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6)
니냐롯트가 일국의 공주가 아니냐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건 그녀의 외견 때문이지 절대 실제가 아니라고 멋대로 단언하던 류제 혼자만 바보가 되었다.
일국의 공주가 모험가처럼 험한 일을 왜 하느냐 했더니 니냐롯트 왈, 아버지가 왕족으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잔소리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녀는 왕위를 잇는 데에는 관심도 없었다. 자유롭게 이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하나 더. 왜 하필이면 류제 신리와 파티를 맺었나 물었더니 그가 먼 옛날 거대한 악을 물리친 용사의 후손이라나?
그렇다면야 나라에서도 크게 간섭하지 못할 거고, 또 류제의 무관심한 성격도 한몫했다.
덕분에 니냐롯트도 어떠한 제약 없이 온갖 의뢰를 하면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 왜 이제 와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거야?”
“플로냐를 처음 만났을 때, 잘만 하면 요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왕이 인계에 자주 나오다니 기쁜 일이지 않은가.”
“왕위는 잇고 싶지 않다며?”
“왕족으로서 하는 의무인 거지. 지금쯤 들러 주지 않으면 어마마마께서도 걱정하실 테니. 그리고 플로냐를 보자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플로냐의 등을 타고 창공을 질주하던 그들은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어떤 맹금족을 발견했다. 류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인간 나라의 한가운데에 요국인이라니. 요국인이 이렇게나 흔했던가?
“니냐롯트 공주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프… 플로냐 정왕님의 등을 타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요국인으로서 감히 정왕의 등에 탈 수는 없었던 조족은 살짝 어두운 피부에 볼에 붉은 문신이 있는 자였다. 그는 요국인인 주제에 정왕인 플로냐보다는 니냐롯트에게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설마 했더니 하늘바람이구나! 오랜만이야.”
“정왕님, 지금 이 무례를 용… 용서하시길. 놀라 버선발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플로냐가 알은척을 해주니 하늘바람이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다. 한 바퀴 빙글 돈 그는 착륙할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누구야?”
“요국에서 온 사절단이다.”
“몇 년 전에 보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
“그건 좀 심했다, 플로냐.”
“다른 이들은 돌아갔다. 그는 제 발로 머물고 있는 것이라.”
“왜?”
“글쎄, 나도 모르겠군.”
왕성 뒤편에 있는 들판에 착지한 플로냐가 용의 모습에서 작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하늘바람이 뒤늦게 그녀에게 무릎 꿇어 예를 갖추었고, 이어 니냐롯트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이 니냐롯트에게도 왕족으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공주님, 돌아오시는 건가요? 왕비마마께서도 걱정을 심히 하셨습니다.”
“내키면 그렇게 하겠지.”
“다… 다른 분들도 제발 설득해 주세요. 전하께서도 아주 못마땅해하셔서…….”
“그래서 가끔씩 일을 하러 오는 게 아니겠나. 아바마마껜 그렇게 전해드려라.”
“공주님, 제발요!”
류제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듣자 하니 아주 제멋대로 공주님이다. 저런 면 때문에 류제가 니냐롯트의 신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요국에서 온 사절단인 주제에 니냐롯트의 가신처럼 행동하는 하늘바람은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안 된다, 안 된다 잔소리를 해댔다.
“여기도 인간에게 빠진 요국인이 있네.”
“요국인이 종족을 따진 이야기는 거짓말인 게 분명해.”
“그걸 바로 성급한 일반화라고 하는 거라지만 플로냐를 보자니 그런 말도 못 하겠어.”
류제는 그를 기다리고 있을 렌을 떠올렸다. 아무도 모르지만 비키가 좋아하는 율폰 또한 요국 혼혈이다. 세라는 또 뭔가. 남자가 좋다니까 성을 바꿔온 사람이 들이대는 중인데.
아무렴 남들이 보기엔 엉망진창이라도 마음에만 잘 맞으면 되지.
공주의 귀환을 환영하는 행렬은 긴 방황 끝에 그녀가 영영 이 왕궁으로 돌아온 것이라 단언하는 듯했다.
그러나 니냐롯트는 가고 싶은 곳은 모두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삶을 살아온 모험가다. 요국과 국경 개방 협정 논의를 마친 그녀는 그것만이 볼일이었다는 듯 밀려드는 업무를 피해서 멀리 도망쳤다.
“니냐롯트 공주님!”
“공주님! 어디 계세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공주님!”
“인기 많네. 손 한번 흔들어주지 그래?”
아래에서는 그녀를 찾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지만 그들은 정왕의 성을 빠져나왔을 때처럼 플로냐의 등을 타고 유유히 왕도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답답한 왕궁에서 벗어난 류제네 파티원들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음 의뢰를 고민했다.
* * *
원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의뢰를 받던 류제는 소소하게 토벌 의뢰만 맡으며 요국과의 경계 마을에 머물렀다.
최근 파티가 필요한 규모의 의뢰를 받지 않아 류제 신리 스탠더드 파티는 잠시 행동을 멈춘 상태다.
벌어들인 돈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슬슬 류제도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만 사랑에 빠져있던 그는 렌과 앙증맞은 연인 놀이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요국으로 돌아간 플로냐가 요국인들에게 ‘나 인간이랑 사귀어!’ 공식 발언을 한 이후 인간 나라와 요국과의 교류가 늘어가는 추세다.(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류제는 요국인의 뇌가 세포 하나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고민했다.)
그래서 렌도 정체를 밝혀도 괜찮을 것 같지만 고양이 귀와 꼬리의 파급력을 알고 있는 류제는 영 못마땅했다.
“그게 뭐야?”
“내 앞으로 온 편지. 정왕님께서 보내주신 거야.”
요국이 안정화되자 손님의 폭증해서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부활했다. 이에 정리 해고한 경력직 직원을 다시 구한다고 렌에게도 용케 공고문이 다다랐다.
“돌아갈 거야?”
“뭐, 너 하는 거 보고.”
그 공고문을 보며 옆에 휙 던져놓은 렌이 발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돌아가도 오갈 데 없는 혼혈도 써준다는 등 오만한 거족 관리인들의 생색을 들어야 하고, 이 마을에 있으면서 제 힘으로 만들어낸 목욕탕도 있는데 레라바시아의 밑바닥부터 시작하다니 내키지 않았다.
“가지 마. 여기에 있어.”
“네가 찾아오면 되잖아.”
“요국은 들어가기도 힘들고 지형도 험하잖아. 난 자주 보고 싶단 말이야.”
창문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발가벗은 몸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인간인 그와 다르게 요국인인 렌은 언제든지 요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험가인 그가 요국으로 들어가 몰래 렌을 만나는 수 있겠지만 장거리 연애는 싫었다. 그러던 류제가 문득 든 궁금증을 물었다.
“넌 인간 혼혈이라며 부모님은? 요국에 인간이 있어도 돼? 그럼 나도 따라갈 텐데.”
“요국에 있겠냐. 아빠가 엄마 찾으러 인계로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지. 한 번도 본 적 없어.”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난 거래?”
렌은 혼혈이라 인간으로 둔갑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류제는 종족을 중요시하는 요국인이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전말이 알고 싶었다.
“그때는 인계로 나오는 요국인이나 요국으로 들어가는 인간 모두 없던 때잖아.”
이때껏 그런 이야기를 궁금해한 사람이 없었던 렌은 난감했지만 상대가 류제니까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몰라. 태어났을 때는 아빠가 날 데리고 있었는데 할머니한테 맡기고 엄마 만나러 갔다가 안 돌아왔댔어.”
“그럼 부모님은 다 인계에 있네.”
“그러겠지. 할머니 말로는 아산티에 있댔어. 할머니도 이전번에 거기로 갔으니 기회 되면 가보게. 할머니도 10년은 넘게 본 적 없어. 혼혈은 필요 없으니까 다 날 버리고 간 거지.”
그래서 맥도어 누님한테 아산티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구나. 가족들이 인계 어디선가 살고 있을 거라 알았을 텐데 사실을 모르는 듯하니 류제는 머뭇거려졌다.
그래도 비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산티는… 꽤 오래전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서 사라진 마을이야.”
분주하게 교차하던 종아리가 멈추었다. 아무리 류제가 심술궂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가지고 농담을 하지 않았다.
렌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래.”
처음에는 덤덤한가 싶던 렌은 이내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이걸 말하는 게 옳았을까 흔들리던 류제는 훌쩍거리는 렌을 달래주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의 슬픔은 그의 인생에 별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좋아서 우는 게 아니라 슬퍼서 우는 사람은 달래주는 방법에 류제는 무지했다.
“그분들이 널 버린 건 아니야.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인간은 싫다. 아빠도 인간에게 홀려가지고 개고생이나 하고. 기다리던 할머니는 또 뭐야. 인계로 갔다가 행방불명된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인데.
너무하잖아 정말. 엄마는 왜 아빠 같은 걸 만나가지고 사람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그러다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니 쌤통이다.
우는 렌을 들어 제 배 위에 올린 류제는 고양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한참 울던 렌은 다짐을 했는지 고개를 번쩍 들고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너 말이야. 돈을 주면 뭐든지 해주는 모험가지?”
“뭐든지는 아니지만, 그렇지.”
“내 의뢰 하나만 맡아줘.”
렌의 의뢰? 하고 의문을 띄웠지만 류제는 그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부모님을 찾아줘. 흔적이라도 좋으니까.”
의뢰를 할 때 필요한 건 돈이지. 렌은 제 가방을 뒤적뒤적 뒤지더니 주먹만 한 보석을 하나 꺼냈다. 의뢰 대금은 류제가 답례로 줬던 보석이었다.
류제의 가슴팍에 그걸 둔 렌의 눈빛에는 소중한 바람이 담겨있었다.
“알았어.”
결심을 마친 류제가 그 보석을 손에 꼭 쥐었다.
* * *
모험가는 의뢰를 받으면 완수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걸 방증하듯 다음 날 렌이 눈을 떠보니 류제는 옆에 없었다. 증발하듯 마을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객실에서도 방을 뺐다고 했다.
혼자 두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중요한 짐은 아직 렌의 방에 있고, 류제네 파티원에게 물어도 개인적인 의뢰 때문에 어디론가 향했다고 했으니 당분간 스탠더드 파티는 해체라고 한다. 혼자 남은 렌은 류제를 한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눈이 그치고 봄이 왔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갔다.
세니타리 롯이 운영하는 목욕탕은 마사지와 약초탕으로 유명세를 타서 모험가라면 피로를 풀기 위해 꼭 와야 하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목욕탕은 더 큰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했다. 마사지사도 많이 뽑았고, 관리인은 물론 여관도 증축해 방 수를 늘렸다.
세니타리 롯은 이 마을에서 두 번째로 말하면 서러운 여관이 되었다. 사업을 성공시킨 일등공신인 렌을 스콜라가 아주 예뻐했다.
인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렌에게는 류제의 지인들이 이따금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
마사지를 받으러 네네 슈만과 율폰 같은 단골손님도 찾아와 말을 걸어주고, 라탈스키 자매가 놀아주긴 했어도 렌은 의뢰를 받고 떠난 류제가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조차도 행방불명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문득 두려워졌다.
첫눈이 내렸다. 요국의 쇄국 정책이 누그러지고 인간에게 호의가 있던 요국인들이 넘어오면서 국경 마을은 많은 요국인들로 북적거렸다.
거족들을 위한 시설들도 하나둘씩 생기고, 요국인의 인간을 향한 무서움도 무뎌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떠났던 류제가 어떤 무리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약 1년 만이었다.
류제 신리가 마을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당장 뛰쳐나간 렌은 유쾌하게 손을 흔드는 류제에게 달려가 싸대기를 후려갈겼다.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다음 날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이 멍청한 인간!”
“아니… 난 그냥…….”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렌에게서 외로움을 본 류제는 미안하다며 끌어안아 주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렌의 귀가 쫑긋거렸다.
“렌? 설마 렌이니?”
많이 변했어도 냄새로 금방 알았다. 요국인은 인간에 비해 나이를 늦게 먹어서 할머니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귀가 쫑긋 나와서 팔락거리는 아빠도 그렇고, 그가 궁금해했던 인간인 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몬스터가 길목을 막고 있어서 못 돌아오고 있었대. 산맥 하나만큼이나 커서 해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 뭐야.”
당장 달려가서 그들을 꽉 끌어안은 렌은 칠칠치 못하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이고 요국인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너무 놀라 고양이 귀와 꼬리가 뿅 나와버린 렌이 엄마에게 어린애처럼 들러붙어 울어대는 통에 세니타리 롯 온천장을 이용하러 왔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둘러쌌다. 세니타리 롯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이 자리에서 처음 역사를 썼다.
그렇게 해서 뭐, 요국과 인간 나라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지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