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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5) (92/112)

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5)

후다닥 밖으로 나간 렌이 코를 킁킁거려 류제의 냄새를 쫓았다. 날렵한 고양이 발걸음으로 따라잡으니 금세 무장한 류제를 발견한 렌은 콧잔등을 슥 닦고 뒤를 밟았다.

이 새벽부터 토벌이라고? 요국을 간 것처럼 멀리 떠나는 건가? 지금 맡은 의뢰는 정왕님의 사랑을 이어주기 위한 의뢰였지 않았어?

아니면 류제의 단독 행동? 이 마을을 떠나는 건가? 아니면 정왕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크산… 어쩌고한테 잡혀갔다거나.

휴가 때처럼 류제를 미행하게 된 렌은 마을 서쪽 입구에 모인 류제 신리 스탠더드 파티원들을 힐끗거렸다.

“완벽하게 준비들 해왔겠지?”

“플로냐는?”

“마가릿과 함께 요국에 돌아가 수습하겠대. 필요한 재료도 가져와야 하고.”

정왕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렌은 꼭 류제 때문에 뒤를 쫓는 건 아니라고 합리화를 했다. 요국을 위해서라고. 왜냐하면 정왕님의 사랑에 우리 요국의 운명이 달린 거니까.

“영영 안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우리 고생이 개고생이 되도 좋으니 돈이라도 줬으면.”

“넌 플로냐의 사랑을 못 믿니? 못 믿으니까 그 모양인 거야.”

“일일이 시끄럽다?”

“어쭈? 류제 주제에 까칠하네?”

렌은 저 붉은 머리 인간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정왕님의 존귀한 진명을 함부로 부르면서 류제 신리에게 잔소리를 하는데 자기가 뭔데 류제한테 짜증을 내냔 말인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구만. 말대로 요국으로 돌아간 정왕님이 계속 요국에 있으면 요국인들에게 평화가 찾아와서 차라리 좋았다.

잠깐. 그러면 정왕님의 사랑은 못 이루어지는 거 아닌가. 뭐, 나도 혼혈이기는 해도 묘족이고, 인간인 류제와 잘 안 되고 있기는 하지. 아니 그러니까 나랑 상관없어!

모이기로 한 인원이 도착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은 서쪽 문에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섹시한 인간 여자랑 파란 머리 조그마한 어린애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토벌 의뢰를 인계받겠다고 하니까 상대 파티의 표정이 웃기지도 않았어.”

“왜. 설마 ‘이딴 의뢰를 돈 주고 인계받는 파티가 있어? 그것도 S급 파티가?’라는 표정이었어?”

“잘 알고 있네.”

“크산칼리카라니. 끔찍하군.”

이른 아침이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멀끔한 얼굴로 서서 책을 읽는 니냐롯트는 모험가가 꼽은 최악의 의뢰인 크산칼리카 둥지 토벌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지 않은 파티원을 기다리는 동안 류제가 투구를 쓰고 갑옷의 매끄러운 움직임을 확인했다. 근접 공격을 담당해야 하는 비키도 몸을 풀면서 앞으로 있을 크산칼리카 체액 샤워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내저었다.

“늦어서 미안~ 맡겨놓은 화살을 찾느라고.”

“제일 중요한 세라 씨는?”

“저기 오신다.”

근래 걱정이 많은 세라도 오늘 늦잠을 자버렸는지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그녀 손에는 몇 장의 스크롤이 쥐어져 있었다.

크산칼리카는 강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체액만큼은 도리가 없어서 물의 마법이 절실하다.

그들의 파티원 중 유일한 마법사는 니냐롯트인데 그녀는 번개를 쓰는 마법사라서 물 마법을 쓰면 공격 마법이 되어버렸다.

“몇 장 구했어요?”

“스무 장이 한계였습니다.”

“한 사람당 네 번씩 씻을 수 있는 건가.”

“돌아갈 때 한 번 쓴다고 하면 암컷 크산칼리카를 해치우기 전까지 세 번… 너무 적은데.”

“그래도 하루 만에 구한 것치고는 상당하군.”

그래서 세라가 물의 마법을 새긴 스크롤을 구해 백마법으로 구동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체액은 끔찍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을 다잡을 결심이 필요했다.

“차라리 며칠 더 준비하는 게 어때? 크산칼리카 둥지 토벌 따위 누가 인터셉트한다고.”

“현상금이 높아져서 안 돼. 간 보는 파티가 많댔어.”

크산칼리카 둥지 토벌은 앞서 말한 이유로 기피되고 있어서 내버려 두면 현상금이 올라갔는데 지금 의뢰금은 C급 길드의 파티가 의뢰를 받아갔을 만큼의 금액대였다.

지금 놓치면 당분간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출발하자. 다시 한번 말하는데 잊은 것 없고?”

“어제 자기 전에 빼먹은 거 없는지 계속 생각했어. 걱정하지 마, 비키 양.”

“지도 펼치기나 해.”

“류제 넌 꼭 하나씩 잊어버리고 오잖아. 멍청아.”

“동감하군, 그 멍청이라는 부분이.”

“니냐롯트 너 며칠 전부터 이상한 말버릇이 생겼다?”

존경받는 S급 길드원들이 마을을 나서자 무슨 대단한 임무를 위해 나설까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기대했다.

반면 죽을상으로 의뢰자가 준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향하는 그들은 싫어 죽겠다며 한숨을 팩팩 내쉬었다.

사막의 거룡족이 고작 충치를 뽑아줬다고 진귀한 보석을 던져주었으니 정왕인 플로냐가 줄 의뢰금은 더 대단할 것이다. 그들은 받게 될 보상을 선명하게 떠올리며 끔찍함을 견뎌냈다.

“이런 냄새 나는 곳에 볼일이 있는 것인가.”

류제 신리의 파티가 들어간 곳은 어느 기괴한 동굴이었다. 새까만 입구 앞에서 느껴지는 느끼하고 후덥지근하며 소름 끼치는 냄새를 맡은 렌은 도시락 안에 든 음식도 썩어 들어갈 것 같아서 들어가기 주저했다.

“크엑, 이거 진짜 심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바로 전해줄 걸 그랬다. 눈가를 실룩거린 렌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고개를 내저어 떨쳐내고 당당하게 걸었다.

난 겁쟁이 요국인이 아니야. 인간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위대한 단모 소묘족 렌 지미는 이런 것 따위에 물러서지 않아. 그깟 다리 좀 많은 몬스터 따위가 뭐가 문제겠어?

호기롭게 들어갔지만 언젠가 크산칼리카의 위험성을 말해준 류제의 경고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렌은 밝은 눈으로 어둠에 적응하고 동굴을 걸었다.

평야를 지나는 류제 신리를 몰래 뒤쫓느라고 한발 늦었던 렌은 앞서간 류제가 몬스터를 다 처리했을 거라고 안일하게 여겼다.

불행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가왔다. 사방에서 나는 이 지독한 냄새 때문에 류제의 냄새를 놓친 렌이 길을 잃었을 때였다.

츠츠츠츠… 츠츠츠…….

“헤… 흐… 에엑… 사… 살… 살…….”

눈에 보이는 몬스터만 속전속결로 토벌하던 파티의 시야에서 벗어났던 크산칼리카 한 마리가 렌과 마주했다.

겔박의 늪처럼 목욕탕 하수구를 막히게 하는 이상한 액체를 내뿜으며 날카로운 이를 가르릉거리는 지네처럼 다리 많은 몬스터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양이 눈동자를 가진 렌에게 어그로가 끌려 탐스럽게 침을 뚝뚝 흘렸다.

질척한 녹색의 액체가 렌의 머리에 뚝 떨어졌다. 그 기분이 끔찍해 죽겠는데 렌은 너무 무섭고 징그러워서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크산칼리카의 앞으로 돋아난 턱과 이빨이 먹이를 잡아 조이려는 듯 찰캉거렸다. 새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던 렌은 둔갑이 풀린 것도 모르고 반대편으로 죽어라 내달렸다.

“끼야아악! 살려줘어!”

* * *

어디선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류제가 고개를 들었다.

“렌?”

“응? 뭐라고 했어?”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바람 소리겠지. 아니면 크산칼리카 비명 소리거나.”

생각해 보니 끼에엑 끼에엑 거리면서 죽는 크산칼리카의 소리와 비슷하기는 했다. 하도 신경 쓰다 보니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조차 렌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인가.

최근 욕구 불만이 강해졌던 류제는 이제는 환청까지 들린다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기분이 더러워서 그런 거라며 류제는 온 갑옷에 찐득하게 묻은 크산칼리카의 체액을 검으로 긁어내 탈탈 털어냈다.

“악! 내 쪽으로 털지 마!”

“바라는 것도 많다.”

이 상황에서 체액이 조금 튄다고 다를 게 뭐가 있나. 류제가 질겁하는 비키에게 핀잔했다.

최대한 조심하기는 했어도 결국 온몸에 끈적끈적하고 냄새나는 체액들로 범벅된 파티원들은 둥지의 절반도 오지 못했는데 슬라임 같은 몰골이었다.

“점심을 먹을 겸 쓰자. 더 이상 못 참겠다.”

“찬성~”

“동의합니다.”

“바라는 바야. 마법에 오차가 생기는 게 싫어.”

죽으면서 체액을 흩뿌리는 크산칼리카를 피하느라 몸을 많이 움직였더니 배가 고파졌다. 지금을 위해 구해 온 스크롤로 백마법을 부린 세라가 파티원에게 깨끗한 물을 쏟아냈다.

몸을 뒤덮던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특성상 꼼꼼하게 씻기엔 무리가 있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끔찍해.”

“이런 상황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유네가 놀라워, 난.”

“코를 막고 먹으면 먹을 만해, 비키 양.”

비키는 더럽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크산칼리카 토벌을 가는데 도시락을 준비한 유네가 신기했다.

성격이 괄괄해도 귀족 출신이었던 그녀는 이런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죽어도 식사를 못 하겠는지 간단하게 준비한 육포를 뜯었다.

싫은 소리 없이 따르는 편인 니냐롯트도 차마 이곳에서는 식사를 못 하겠는지 칼로리가 높은 환약을 구해서 코를 막고 씹어 먹었다.

류제도 슬슬 배가 고프니 유리에에게 부탁했던 도시락을 꺼내려는데 어째 짐 안에서 먹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뇌가 정지한 그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되감기 해보았다. 나가려고 내려왔는데 렌이 보여서 그대로 도망쳤지. 도시락은…….

“아차,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왔네.”

비키가 두고 온 거 없냐고 했을 때는 없다고 박박 우겼으면서 지금 와서 깜박한 도시락을 떠올린 류제가 태평하게 외쳤다. 비키가 그럴 줄 알았다며 제 육포를 꽁꽁 숨겼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안 줄 거야.”

“치사한 자식. 탱커 대접이 나쁜 파티는 오래 못 간다는 거 몰라?”

“류제 군, 내 거라도 하나 줄까?”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는지라 유네의 짐은 크산칼리카의 체액의 피해에서 그나마 깨끗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토벌에 거부감을 덜 드러냈던 그녀는 벌써 하나를 다 해치운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건넸다.

류제가 흔쾌히 받아들이려던 그때 동굴 천장에서 체액이 뚝 떨어져 샌드위치 위에 안착했다.

“토핑이 좀 추가되었는데 먹을래?”

“아니.”

저걸 먹느니 차라리 굶고 말지. 류제는 빵만 걷어내면 된다며 겉에 있던 빵을 휙 던지고 나머지 부분을 한입에 털어 넣는 유네의 억척스러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쟤 아빠가 그렇게 키운 건 아닐 거 아냐.

“세라 씨는요?”

“저는 이걸 가져왔습니다만.”

류제 빼고 제대로 자기 먹을 것은 다 챙겨왔는지 그녀가 품에서 팩에 쌓인 무엇인가를 꺼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먹을 것에 파티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실은 세라가 오늘 집합에 지각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원래 세라는 점심으로 브리또를 사서 포장하려 했는데 네네에게 붙잡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몇 번을 보아도 남자가 되어버린 친구의 모습은 적응이 안 되는데 크산칼리카 토벌을 간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부터 네네 슈만이 참견을 해댔다.

결국 이 이상 시간을 잡아먹을 수 없던 세라는 말다툼 끝에 네네가 넘겨주는 이상한 것을 받아버렸다. 배고플 때 먹으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네네의 기묘한 센스가 이해가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그건 뭔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크산칼리카의 둥지 안은 축축하고 방금처럼 천장에서 이상한 액체가 수시로 떨어져 입에 들어가면 엄청 떫고 괴상한 맛이 났다.

그래서 류제도 잘 안 쓰던 투구를 벗지 않고 있는데 같은 모험가로서 둥지 토벌의 귀찮음을 아는 네네 슈만이 세라가 먹기 편할 뭔가를 만든 모양이다.

“가죽 물병 아닌가요?”

정체모를 액체가 들어간 짤주머니 같은 것을 살핀 그들이 도통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든 주둥이가 좁은 병이라 입을 대고 빨아 마실 수 있는 구조인 것은 확실했다.

“세라 씨, 위험해 보이는데 받지 않는 게 좋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절 위해서 만들었다는데 어떻게 그래요.”

마음 약한 세라는 그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네네 슈만이 싫으면 버려도 된다고 자존심을 굽히던 모습에 지고 말았다.

안다. 원래 여자였으며, 세라는 그런 마음도 없는데 멋대로 남자로 변해서 대시하는 그녀… 아니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세라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지금 세라는 네네 슈만에게 완전히 말리고 있었다.

“자기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요.”

“저도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고개를 숙인 세라가 눈을 질끈 감고 그 기묘한 음식을 쭉 짜 먹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네네 슈만이라면 칼로리와 포만감이 높으면 땡이라고 생각해서 맛이 이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꿀꺽, 그것을 끝내 삼키자 파티원들의 침도 꿀꺽 넘어갔다.

“괘… 괜찮나요, 세라 씨?”

“살짝 놀라는 중이에요. 의외로 맛있네요.”

“왕실 전투 식량을 본떠 만든 거군. 개인이 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텐데.”

환약을 아득아득 씹어 먹던 니냐롯트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왕실 전투 식량이라니.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네네의 가문에 왕실 기사 출신이 많다고 했었던 것 같아요.”

“신기하네요. 평범한 전투 식량은 본 적 있는데 왕실 전투 식량이라니. 니냐롯트 넌 왕실 전투 식량을 어떻게 아는 거야?”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던 주제에 류제가 난데없이 그 점을 지적했다. 딱히 숨기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류제가 파티원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숨김없이 드러났다.

“류제 군이 드디어 그걸 질문하는구나.”

“얼마나 걸렸지?”

“1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요.”

같은 길드에 스탠더드 파티로 활동한 지가 벌써 옛날인데 언제까지 모를 수가 있을까 내기 중이었던 그녀들이 때가 되었다고 시선을 교환했다.

니냐롯트가 으득으득 환약을 먹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야 내가 이 나라의 공―”

“꺄아아악!”

타이밍 좋게 사람 비명 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질문한 거라 대답을 하든가 말든가 관심이 없던 류제는 저 비명 소리가 더 신경 쓰였다. 역시 아까 들었던 소리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렌?”

놀라지도 않을 것 같지만 드디어 니냐롯트의 정체를 밝힐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던 비키는 저것도 다 제 복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날이 아니었다.

물론 알려주려면 언제든지 알려줄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들도 일단 그들밖에 없어야 하는 크산칼리카의 둥지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거슬렸다.

“인터셉트? 다른 파티가 먼저 와있던 걸까요?”

“에에에, 아무리 크산칼리카가 더럽다고는 해도 저런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목소리도 한 사람 것뿐이고.”

“잠깐만 있어봐.”

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류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다른 파티원의 눈이 하나같이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모험가로서 가져야 할 도리지만 저 류제 신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해결하려고 하지 앞장서 사람을 구하겠다고 달려나가는 성질머리는 못 되었다.

“수상쩍지?”

“따라갈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싫은데.”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류제가 갔으니 별일은 없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던 그녀들에게 다리 많은 무엇인가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잠깐만, 거기 서!”

“꺄아아악! 끄아아아악! 살려줘! 제발 살려주어어!”

달려갔던 류제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위험을 직감한 그녀들은 벽에 등을 찰싹 달라붙었다. 둥지에 난 통로로 이동하는 크산칼리카가 흥분해서 목적지 없이 돌진했다.

“꺄아악! 끄아아악! 으아아악!”

“유네, 날 좀 도와줘!”

“사람이잖아?”

체액으로 범벅이 된 어떤 인간이 크산칼리카에 매달려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속도는 굉장히 빨라서 류제의 달리기로는 따라잡기 불가능했다. 척이면 척, 소꿉친구답게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유네가 끈이 달린 화살을 꺼내 들었다.

“간다, 류제 군!”

크산칼리카가 막 그녀들을 지나쳤을 때 활을 꺼내 겨냥한 유네가 신호를 보냈다. 위험할 수 있으니 크산칼리카가 더 흥분하지 않도록 꼬리 껍질 틈새를 노린 그녀가 적절한 타이밍에 화살을 쏘았다.

“고마워!”

촤르르르 풀려가는 로프의 끝부분을 유네가 토스했다. 달려가다가 그걸 건네받은 류제는 수상 스키를 타듯 능숙하게 바닥을 미끄러지며 로프를 되감았다.

크산칼리카의 울음과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지만 이를 악물던 류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렌!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류, 류, 류제에! 도와줘! 으아악! 죽어! 나 죽어어!”

“안 죽어!”

얼마나 놀랐는지 크산칼리카 위에서 덜렁덜렁 붕어 똥처럼 딸려가던 렌은 자나 깨나 유지하던 둔갑이 풀려있었다.

류제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기에는 왜 매달려 있는 거야? 아니, 여긴 왜 따라온 거야?

“위험하니까 빨리 뛰어내려!”

로프를 되감아 간신히 가까이 다가간 류제가 외쳤다. 뛰어내리라는 말에 아래를 내려다본 렌이 질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속도에서 손을 놓으라니 불가능했다.

“끼야악! 미쳤어? 여기서 어떻게 뛰어내려?”

“받아줄 테니까 뛰어내려!”

“못 해!”

렌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못 했다. 만약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냥 다치는 걸로는 안 끝났다.

더러운 냄새 나는 체액에 처박혀서 깨꼬닥 하라고? 그건 싫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벌레를 닮은 몬스터 때문에, 류제 신리를 미행한답시고 들어온 동굴에서 허탈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렌, 날 믿어! 책임져 줄 테니까 뛰어내려! 반드시 무사하게 해줄게!”

“노… 놓치면 어떻게 해? 나… 난 못 해. 못 해!”

“절대로 안 놓친다니까!”

“으…으아… 으아아!”

“약속할게!”

아무리 설득해도 렌이 놓지 못하자 류제가 아찔하게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은데 한 뼘 차이로 닿지 않는다. 제발 믿어주길 바라건만 크산칼리카를 놓지 못하는 건 그의 신뢰도가 바닥이라는 뜻일까.

고개를 내저으며 펑펑 울던 렌은 손톱을 더 깊게 세웠다. 그러자 크산칼리카가 더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진정해, 렌! 날렵한 묘족이잖아.”

눈물이 고인 렌이 류제를 힐끗거렸다. 정말로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날렵하게 뛰면 류제가 날 받아줄 수 있어?

아니, 난 순수 묘족도 아니고 못 해. 나 같은 건 못 한다고. 내가 순수 요국인처럼 그런 게 잘되었으면 요국에서 살았을 거라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어서!”

그래도 류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믿어보고 싶어진 렌이 손톱을 세웠던 손을 놓으려는 찰나 위험을 감지한 크산칼리카가 껍질 틈새에서 내보내는 체액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끄아아악! 으아아아악!”

죽는다. 진짜 죽을 거야. 싫어어!

“나이스 캐치.”

크산칼리카에서 굴러떨어지는 렌을 넘겨받고 안전하게 허리를 휘감은 류제가 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토벌에서 곧 죽어도 체액에 닿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던 류제는 그 체액으로 범벅이 된 렌을 껴안고 로프를 놓았다.

크산칼리카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뒤구르기로 낙법을 시도한 그는 품 안의 렌이 다치지 않도록 머리를 보호했다.

돌진하는 크산칼리카의 소리가 꽤 멀어졌을 때쯤 구르기가 멈췄다. 어지러워서 정신이 아찔했지만 덕분에 렌은 무사했다.

혹시라도 떨어질세라 갑옷을 꽉 잡은 렌은 털을 잔뜩 부풀이고 있었다. 류제가 렌에게 붙은 체액을 떨쳐내며 말했다.

“거봐, 내가 꼭 잡을 거라고 했잖아.”

“으허어엉.”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까까지 류제 신리 반대를 외치던 렌이 찐득찐득한 꼴로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팔에 들고 있는 바구니만 놓았어도 오래 붙어있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랬다면 더 깊은 곳까지 끌려갔을 것이다.

“이제 괜찮아. 울지 마.”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다 너 때문이잖아!”

눈물 콧물 체액 범벅이 된 렌이 류제에게 화살을 돌렸다. 렌이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도 마땅치 않을 테니 그게 자기 탓이라는 건 알겠던 류제가 미안하다며 도닥였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끄허엉. 저딴 게 사는 동네에는 왜 온 거야?”

“미안. 근데 의뢰니까.”

“그러니까 이딴 의뢰를 왜 맡는 거냐고! 가만히 여관에 짱박혀 있으면 될걸!”

“돈이 없으면 너한테 마사지도 못 받고 같은 여관에 머물 수가 없는걸.”

모험가의 숙명에 무지한 렌이 떼를 쓰며 훌쩍거렸다. 이렇게 엉겨 붙으며 울어대는 것은 여관에서 둘이 섹스를 즐길 때나 그랬는데 류제는 기분이 묘했다.

“잠깐만. 이걸로 가려둬.”

그러던 그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렌에게 붉은 천을 덮어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얼굴만 뺀 렌은 류제가 천 속에 있는 귀를 쓰다듬고 나서야 둔갑이 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치웠어?”

“이 애를 구하는 게 먼저라서. 몬스터는 놓쳤어.”

놀라서 다른 사람이 오는지도 몰랐던 렌은 고장 난 코를 킁킁거렸다. 인간들의 시선이 박히는 것 같다. 귀와 꼬리를 다시 숨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둔갑이 안 되었다.

“이 애가 좀 놀란 거 같아서 그러는데 진액은 너희들이 알아서 가져갈래? 이번 의뢰 대금은 양보할 테니 먼저 돌아갈게.”

“뭐? 진심이야? 이걸 핑계로 도망가는 건 아니지?”

류제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놀라 자지러질 일이다. 파티원들은 류제가 자기 쓰려고 가져온 천을 냅다 덮고 있는 렌을 위아래로 흘겼다. 이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엣, 귀여워. 류제 군과 어떻게 아는 사이야?”

본 적 없는 사이일 텐데도 유네가 호감을 표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경계하는 렌이 불안함을 드러냈다. 특히나 렌은 지금 눈동자에 요국인의 특징이 드러나서 인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기, 괜찮아?”

낯선 인간이 싫었던 렌이 류제의 뒤로 숨었다. 최대한 렌을 가려주고 있던 류제는 문득 불길해졌다.

요국 혼혈인 렌이 인간에게 마음을 안 준다고 하지만 유네가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남자를 상대로는 자신이 없어졌다. 어릴 적부터 뒤 세계에 밀접하게 연관된 유네는 단어 선택이 험할 때가 있지만 굉장히 귀여웠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야? 여기엔 왜 온 거야?”

“안 돼, 유네. 이 애는 임자가 있거든.”

호기심을 표하는 유네를 살짝 밀어낸 류제가 좋게 타일렀다. 소꿉친구인 그녀조차 경계하는 류제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미소는 상냥하지 않았다.

“에에, 뭐야. 류제 군 수상한데.”

“착하지? 그냥 넘어가 줘.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고. 소꿉친구로서 부탁할게.”

“으음~ 알았어. 헤헤.”

그것도 있지만 물론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유네의 귀여운 얼굴이나 작은 체구는 순진한 남자들을 꼬드기곤 했는데 불쌍한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의 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욕심이 많은 그녀도 그걸 알면서도 접근했다가 호기심에 일을 저지르는 편이라 유네는 건들면 안 되는 위험인물이었다.

“비키 양~ 저 친구가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류제 군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그래도 류제가 진지하게 부탁해 주면 소꿉친구의 의리로 말을 잘 들어주었다. 후, 류제가 안도했다. 렌은 그 뒤에서 쫑긋거리려는 귀를 꽉 눌렀다.

“흐음, 내가 보기엔 그냥 놀란 것 같은데 말이지.”

찔끔한 렌이 망토처럼 두른 천 아래로 비키를 힐끗거렸다. 비키는 긴장한 듯 보이는 낯선 이와 능글맞게 웃고 있는 류제를 번갈아 훑었다.

수상하긴 하지만 유네 말대로 체액 범벅이 되어서 풀이 죽은 사람을 불쌍하게 혼자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머, 세상에나. 설마 했더니 세니타리 롯에서 봤던 관리인분 맞으시죠? 류제 씨가 머물고 계신다는. 이런 곳까지 무슨 일이세요?”

류제가 뭐라고 둘러대기 전, 다행히 렌과 일면식이 있는 세라가 알은척을 했다.

“아… 그… 어쩌다 보니… 크… 큰 라탈스키 씨의 심부름으로다가…….”

“유리에가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큰일이셨겠네요.”

세라마저 그렇게 이야기하니 비키도 의심을 풀었다. 크산칼리카의 둥지까지 심부름을 온 이유는 몰라도 수상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어쩔 수 없지. 류제 너는 저분하고 먼저 마을로 돌아가 있어. 많이 놀랐을 텐데 귀찮다고 막 굴지 말고 제대로 돌봐드려. 알았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당연히 그럴 거야.”

“참 나, 당당하게 말하네. 잊었나 본데 저번에 지금처럼 비슷한 변명을 대고 도망쳐서 다른 길드 여자분이랑 같이 여관에서 나오다가 우리한테 들켰거든?”

“윽, 하필이면 그 이야기를 왜 해!”

렌을 꼬시고 싶은 류제는 아무리 렌이 다른 사람과 자도 괘념치 않는다고 주장했어도 비키의 이실직고가 찔렸다. 제가 순수한 사람이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렌이 오해를 하도록 놔두긴 싫었다.

단언하건대 렌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순수했고, 렌을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그의 하반신은 오로지 렌을 향했다는 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았다. 그걸 렌이 알아줘야 할 텐데.

“우린 간다. 네 몫의 스크롤은 사이좋게 나눠 쓸게.”

“너무 순순히 보내주니까 무서운데.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저 사람이 겁에 질려있어서 그런 거 아냐. 내일 늘 모이던 곳에 제시간에 오기나 해.”

“안녕, 류제 군~ 내일 봐~”

어쨌든 류제의 사생활이야 그들이 알 바 아니다. 플로냐의 사랑을 위해서 크산칼리카의 진액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썩을 둥지에서 나가고 싶었던 그들은 류제를 렌과 먼저 돌려보내는 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류제가 렌에게 시선을 못 떼든가 말든가 파티원들은 쿨한 기운만 풀풀 남기고 사라졌다. 발소리조차 조용해지니 류제가 투구를 벗고 히죽 웃었다.

“의심 많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보이던데.”

“내가 왜 임자가 있어? 내 옆자리는 언제나 비어있거든? 너나 임자가 있겠지.”

둘만 있으니 얌전한 척은 그만둔 렌이 꿍하게 투덜거렸다. 렌이라고 불러도 뭐라 안 하는 걸 보니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둘러대던 거짓말은 포기했나 보다.

“대기 1순위가 나잖아. 그러니까 임자 있는 거 맞지.”

“얼씨구.”

저런 이야기나 하고 있는데 누가 좋다고 쫄래쫄래 따라가겠냐는 말이지. 웃기고 있네. 렌은 절대 저 사탕발림을 믿지 않았다.

갑옷에 붙은 크산칼리카의 체액을 칼로 긁어 털어낸 류제가 렌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온몸이 진득진득 젖어 쭈그렁이처럼 영 볼썽사나워진 고양이가 고약한 냄새를 맡고 코를 찡긋거렸다.

불만이 많은지 입을 한 바가지 내밀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위험한데 왜 여기까지 들어왔어? 그냥 불러 세우면 될 걸 가지고.”

“네가 며칠 전부터 자꾸 나를 무시하잖아! 열받게!”

렌이 지레 화를 내었다. 물론 귀찮게 들러붙어 대는 류제를 먼저 거절했던 사람이 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끈질기고 짜증 나던 녀석이 허탈할 만큼 쉽게 포기하고 나 몰라라 하는데 얼마나 사람을 쉽게 봤겠느냔 말이다. 렌은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진짜 생각해 보니까 어이없네. 왜 내가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억울해. 억울하다고!”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이거 전해줄 겸 거시기를 한 대 차주려고 그랬다, 왜?”

렌이 체액 범벅이 된 도시락 통을 넘겨주었다. 류제가 유리에에게 부탁했던 간편식이었다.

이제는 못 먹을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무려 그를 위해서 이런 곳까지 와주었다니 류제는 감동했다.

“에이, 난 또 내가 좋아서 따라온 줄 알았네.”

“사람 열불 터져 죽겠는데 자꾸 기어오를래?”

능글맞게 농담하는 것을 보니 류제도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요란하게 뒹굴뒹굴 굴렀는데 멀쩡하다니 저번처럼 요사스러운 능력으로 상처를 치료했겠지 싶다.

암컷들을 쉽게 꼬여내는 놈인 만큼 대단하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렌 그를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난 따지러 온 거야. 네가 날 농락했잖아! 제길. 네 생각이 뭔지 모르겠어. 나한테 질렸다면 그냥 질렸다고 말하고 떠날 것이지 없던 일처럼 무시하지 말라고!”

천을 둘러싸 얼굴을 숨긴 렌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렌이 훌쩍거리자 류제는 당황스러웠다.

렌이 자신에게 반해 인간 마을에 왔다고 착각했던 류제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마음이 어쩐지 희망에 부풀었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나… 날 가지고 놀았겠다, 내가 용서할 것 같아?”

참지 못한 류제가 렌의 고개를 붙잡고 가볍게 키스했다. 눈물의 짠맛과 크산칼리카 체액의 쓴 내가 났다. 단숨에 벙찐 렌이 고양이 눈을 끔벅거렸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갈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내 인생은 너 때문에 망했어! 간신히 취직했던 레라바시아에서 쫓겨나고, 요국은 인간들 때문에 난리가 났고. 나는 인간 나라에 혼자서 다시 일어나야 하고! 근데 넌 또 날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하고 떠날 셈이지!”

류제를 밀어낸 렌이 억울함의 눈물을 쏟아냈다. 크산칼리카의 체액이 같이 흐를 만큼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데 어쩜 이렇게 불쌍하면서도 앙큼한지.

그래서 나를 좋아하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겼구나 싶다.

“안 떠난다니까 그러네.”

렌을 꽉 안아 달래던 류제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왜 거짓말을 하냐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럼 혼자 두지 마. 이 망할 인간!”

싫다고 하니까 진짜로 그만둬 버리는 게 어디 있어. 밉기만 했던 인간에게 빠져버리고 만 렌이 훌쩍거렸다.

“인간 너한테는 교미할 다른 암컷들이 많겠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인간이 서툰 렌은 류제가 하는 행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울먹거리는 그가 류제를 쳐다보며 성질을 냈다. 요국인의 특성이 빛을 발했다.

요국인은 종족마다 교미법이 다르지만 보통은 인기 있는 한 개체가 수많은 개체를 거느렸다. 그러니 렌처럼 혼혈이거나 인기가 없는 개체는 번식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소외된 개체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난 다… 단순해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날 괴롭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뭐야? 왜 날 짜증 나게 만드는 건데?”

“너와 함께 있게 된 이후로는 아무하고도 교미 안 했어.”

“그럴 리가 없어!”

렌이 단언하자 류제는 그렇게나 믿음이 없었나 뜨끔했다.

류제는 가벼운 하반신의 과거를 렌에게 비밀로 하길 바랐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난 예전에 다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욕망을 풀곤 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신념의 차이 같은 거겠지만 류제는 방탕했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거짓말하는 거 아냐.”

“왜 다른 암컷하고 교미 안 했는데?”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넌 다른 암컷들도 좋아하잖아! 난 그런 거 싫어!”

“안 좋아해.”

“넌 좋아하지도 않는 암컷하고도 교미하지? 나라고 뭐 다르겠어?!”

철없던 행위가 유명세를 따라 렌의 귀까지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류제는 렌의 하찮은 질투가 귀여워서 입꼬리가 근질근질 올라갔다.

“너야말로 다른 사람이랑 있어도 된다고 말하지 마.”

“너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잖아! 거짓말하는 사람 싫다고 협박까지 했으면서. 이 악랄한 인간 같으니!”

“그건 인간인 척하는 네가 귀여워서 그런 거고. 기억 안 나? 레라바시아에서는 약속 지킨 거.”

“이번에도 거짓말하는 거라면 불알을 깨물어 줄 거야.”

그 말에서 진심이 느껴져 류제는 조금 오싹해졌다. 뭐든 둘이 마음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가볍게 시작한 사이지만 뭐 어떤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연애도 있기 마련이지. 더군다나 이 단순한 고양이는 그의 내면을 봐준 거라서 더 장하고 마음이 갔다.

“어흠, 뭔가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긴 했는데.”

렌을 제대로 일으켜 세운 류제가 그의 두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랑 연인이 되어줄 거지?”

류제가 누군들 마음이 동하는 진중하고 미려한 목소리로 고백을 말했다. 단순한 렌 지미는 저 믿을 수 없는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주기로 했다.

“뭐… 뭐어. 너가 하는 거 보고.”

안 운 척하며 눈물을 닦는 그는 부루퉁하게 툴툴거리며 젠체했다. 류제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당장 엉엉 울리고 싶었다.

난생처음 고백한 장소가 크산칼리카의 둥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아름다웠다.

“근데 일단… 목욕이나 하러 갈래? 스콜라 누님한텐 말을 해놓을 테니.”

이런 사랑스러운 순간을 즐기기엔 찐득찐득한 체액은 기분이 나쁘니 말이지. 류제가 히죽 웃으니 렌도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맛볼 쾌락과 사랑의 교환의 현장을 떠올린 렌이 류제의 팔에 꼬리를 감고 발정 난 얼굴을 숨겼다.

* * *

온몸에 땀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뒤엉켜 적극적으로 서로를 탐하는 섹스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타인들은 모두 류제가 변태적 취향을 가졌다고 지적하지만 막상 거쳐간 그녀들의 평으로는 그와의 섹스 자체는 평범하다고 했다.

험난한 의뢰로 물이 올랐던 성욕을 풀기만 할 뿐. 그렇게 합의한 행위는 감정적 충만함이나 상대방을 향한 탐구심을 드러내 주진 않았다.

잘 맞으면 잘 맞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였지. 허황된 사랑을 그리며 손을 뻗을 수고로움도 없었다. 그러기에 뒷맛이 씁쓸했다.

“읏, 우훗, 읍…….”

“이 음란한 고양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

“흐냐앙… 아… 안 좋아……! 하나도 안 좋아!”

발정 난 성욕을 앞에 있는 인간에게 마음껏 풀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렌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질질 흐르는 침을 한껏 마신 류제가 입맛을 다시며 말랑말랑 부드러운 묘족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이 얼마 만에 만져보는 촉감인가.

“자… 장난치지 말고 빨리하라고!”

아까부터 감질나게 애무만 하지 중요한 걸 하지 않자 렌이 벌컥 화를 냈다. 벌써 구멍에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갔는데 육벽 깊은 부분을 둥글게 쓰다듬기만 한다.

인간 주제에 코로는 냄새를 맡거나 튀어나온 고양이 귀에 머리칼을 비비는 등 남사스러운 짓만 골라서 해댄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요사스럽다.

“아깝잖아.”

“백날 천 날 자기 맘대로 속여먹고 쑤셔 박았던 주제에 어디가 아까워.”

“이것도 나름대로 처음이니까.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거지. 네가 첫 키스를 소중하게 여겼던 만큼.”

실상을 파보면 할 것 다 하고 다닌 발라당 까진 놈 주제에 이런 거나 챙기고 있으니 마음이 안 동할 수가 없다.

막 목욕을 하고 나와 살짝 젖은 머리. 촉촉한 피부 속 붉어진 눈가. 푸른 눈동자. 살짝 미소 짓는 입꼬리가 햇빛에 비치어 윤곽선을 진하게 그렸다.

성에 안 차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던 렌이 툭 쏘아붙였다.

“처음엔 냅다 박기만 했으면서 말은 잘해.”

“에이, 그때 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기억 안 나?”

지금도 그때 레라바시아 8번 객실 침대 위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당시 의뢰 때문에 몇 달간 개고생을 하던 그는 오랜만에 몸도 풀고 뜨거운 물에 푹 담갔더니 마음까지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미약 오일 같은 같잖은 것에 당해 성욕이 미쳐 날뛰어버려 이 고양이가 귀엽게 보이는 줄로만 알았다.

“알 게 뭐야!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온 네 잘못이지.”

“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어이구, 미안해.”

“그럴 거면 사과하지 마, 이 망할 인간!”

“근데 그 사고가 없었으면 너랑 이렇게 있는 것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잖아. 살면서 그런 사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의외로 내 스트라이크 존이 마니악했구나. 이 엷은 주근깨나 성기를 쥐는 것 같은 도톰한 꼬리하며 우물쭈물 어찌할 바 모르는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까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흐흐.”

뭐가 좋다고 실실 웃은 류제는 손가락으로 유사 성행위를 즐겼다.

성기는 어긋나게 렌의 사타구니 사이에 비비는가 하더니 손가락을 빼고 제 것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구멍을 풀 때 사용했던 귀한 오일이 울컥 넘쳐흘렀다.

“으히익! 마… 말 좀 하고 들어와!”

“지금 들어갑니다~”

두꺼운 타인의 신체가 침입하는 과정은 항상 이색적이고 짜릿하다. 양옆 손으로 이불을 움켜쥔 렌은 눈을 질끈 감고 신체의 감각을 맛보았다.

기다란 것이 찔끔찔끔 들어오더니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류제의 장골이 허벅지를 찔렀다.

“하, 역시 제정신으로 하는 게 제일 좋아. 안 그래?”

“윽, 힉! 난 차라리 술 한 사발 하는 게 낫겠어!”

“왜?”

“너 때문에 괜히 의식하니까 나까지 떨리잖아, 이 바보야!”

부끄러웠던 렌이 화를 내자 류제가 하하하, 어깨를 떨었다. 진동이 서로 맞닿은 부위에서 흘러 들어왔다. 세포를 타고 저 인간의 간질간질한 감정이 렌의 심장에 닿았다.

“안 떨리게 해줄게, 렌.”

앞머리를 넘기며 웃는 류제의 미소는 화창한 한편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가 주는 무지막지한 쾌감과 성욕의 충만, 야한 그루밍과 정신 나가게 하는 기교를 기억하는 렌은 찌르르 그와 연결된 부위가 뜨거워졌다.

“후냐! 우악! 힉! 진… 잠… 오… 오랜만에 하는데 너무……!”

“후. 네 안을 잊어버릴 뻔했잖아. 위험했어.”

“웃기고…힉! 있네!”

그래 봤자 몇 주 되지도 않는데 발라당 까진 인간 같으니라고. 누구는 여기 와서 발정기 때문에 약을 달고 사는구만.

류제의 허리 운동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눌러지는 렌은 이상한 비명을 지르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윽, 익! 좀… 좀 천천히… 천천히 하라고오……!”

“네가 부족하단 말이야. 한시라도 빨리 너로 꽉 채워지고 싶어.”

‘넌 싫어?’라고 물어보며 피스톤질을 멈추는 류제 때문에 들뜨다가도 만 상태가 되어버린 렌이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을 가렸다.

“그… 그게 아니라……!”

지금 시간은 막 점심이 지났을 대낮. 사랑을 속삭이는 이곳은 류제가 머물고 있는 객실이지만 어쩌면 이 벽 옆에 유리에처럼 또 다른 사람에게 소리가 들릴 수도 있었다.

렌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피스톤질을 시작한 류제는 막힌 입 속에서 터지는 음란한 신음을 만끽했다. 성생활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버릇은 없는 렌은 도리질을 치며 신음을 참아냈다.

“어쭈? 고집 피운다 이거지? 빨리 발정해, 이 야한 고양아.”

그게 스위치라도 되는 것처럼 류제가 렌의 젖꼭지를 쥐고 비틀었다. 움찔 떨어대는 내벽이 기분 좋았던 류제가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돌기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살살 돌렸다.

그러다가 양손을 이용해 가슴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쓰다듬었다.

“흐힝, 읏, 윽! 후아악!”

그거로도 부족했는지 렌의 허벅다리 하나를 붙잡고 천장 위로 드높게 올려서 자세를 바꾸었다.

자세가 비틀리자 내장 안에서 성기가 비벼지며 다른 곳을 찔러 렌이 움찔거렸다. 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류제가 피스톤질의 속도를 높였다.

“하, 후우. 장관이네. 언제 맛봐도 단모 묘족의 부드러운 몸이구나.”

“으냐, 익! 흑! 우우.”

적당히 마른 근육에 말랑말랑 고양이처럼 유연한 살결은 같은 인간 남자의 것과는 여간 달랐다. 류제의 단단한 몸과 두께부터 대비되었다.

고양이의 본능으로 깨물고 싶은 욕구를 누르지 못한 렌이 제 입을 꽉 앙다물고는 침대를 벅벅 긁었다.

그 굳게 닫힌 입을 손가락으로 벌려 침입한 류제는 뼈가 굵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날 선 송곳니를 차례로 훑었다. 질질 흐르는 침을 따라 입천장을 슬슬 훑는데 혀가 절로 얽혀 왔다.

“아…앙대애… 소… 소리가 나와……!”

앙앙 손가락을 물며 빨아대는 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양손으로 류제의 팔목을 잡고 입 안 좋아하는 부분을 스스로 쿡쿡 찌르니 어디서 야한 것을 배워왔을지 모르겠다. 아, 알려준 건 나인가. 그의 첫 키스도, 첫 섹스도 모두 내 것이니까.

“소리가 나면 뭐 어때.”

“하지만 자… 작은 라탈스키 씨가아!”

“루시에가, 큭, 왜?”

렌이 세게 물어버린 손가락을 빼낸 류제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에나 루시에를 바라보는 렌의 시선이 시원찮았다.

혹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한번 충격에 빠져 우울해졌을 때는 렌이 두 사람 중 한 명을 짝사랑하는 게 아닌가라는 착각도 했었다.

“너랑 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고 했단 말이야! 내가 그것 때문…힝! 아으……! 그것 때문……! 앗……!”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나를 거절했었다 이거지. 들리면 뭐 어때서. 아랑곳하지 않은 류제가 렌의 발바닥을 핥았다.

유연해서 그런가 이런 것도 되고. 알지 못했던 그의 패티시 금광이 하나둘 채굴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히, 하! 익!”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안 쓰이게 해줄게.”

어차피 발정 나면 그런 걱정도 없이 울어대는 사람은 렌이었다. 아직도 애무가 부족한가.

반쯤 뒤집어진 렌의 등줄기를 따라 가을 들녘의 갈대밭을 스치듯 척추뼈를 쓰다듬으니 꼬리가 감기며 해롱해롱 눈이 풀렸다.

다시 거꾸로 툭툭툭 미끄러지듯 치고 올라가면 그걸 따라 고개를 쭉 내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욕심 많으면서 별것을 다 신경 쓰기는. 동네방네 이 고양이가 내 거라고 소문을 내도 부족한데 숨기기 급급할 건 뭐야.

“느껴져? 여기가 네가 좋아하는 부분이야. 여기라고. 잘 기억해. 다음번에 물어볼 거니까.”

“으냐앙, 으흑, 히! 으… 냐…….”

렌을 뒤집어 개구리처럼 엎드리게 한 류제는 제 체구로 꽉 억누르며 얇실한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 달랬다. 냥냥거리며 우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완전히 빠져서 들리지도 않을 거다.

제 쾌감에 못 이긴 렌은 허리를 류제에 맞춰 흔들어 자위하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에 성기를 비비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가려고 한다. 좋은 곳을 쿡쿡 찌르며 오르가슴을 드높여 가니 정신을 못 차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내장이 움찔움찔 떨리기 시작하고 고양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를 무렵 도리질을 치던 고양이가 눈을 회까닥 흐트러뜨리며 마지막 신음을 터뜨렸다.

“흐냐아앙!”

“크흑!”

뒤로만 가는 이 신호를 알고 있던 류제도 때에 맞추어 깊게 사정했다. 이 뿌리까지 뽑아먹을 것 같은 음란한 조임이 그의 것과 아주 잘 맞았다.

이때까지 해왔던 의미 없는 성욕의 해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의 것을 살살 뽑고 렌을 마주 보게 돌리려는데 몸을 움찔움찔 떨며 정신이 나간 렌은 앞으로 가기 전에 뒤로 먼저 가버렸는지 내보내지도 않고 절정에 도달하고 말았다.

“후에에… 에…….”

가면서 또 입을 깨물었는지 침 사이로 피가 섞여져 나왔다. 흘러나온 침을 츄릅 빨아낸 류제는 혀로 렌의 입 안쪽을 침입해 피 맛이 나는 부분을 치료했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키스로 혀뿌리까지 빨린 렌은 또 그 음란한 발정감에 붙들리고 말았다. 정말 평생 이런 기분에 휩싸여서 산다면 기 빨려서 죽거나 바보가 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당장 기분이 좋으니 상관없다. 단순했던 그는 추접스럽게 수프를 마실 때나 내던 소리를 앞에 있는 사람과의 타액 교환을 하며 내었다.

이후에는 결국 우려하던 사태로 끝을 맺었다. 루시에에게 잔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대낮부터 손님한테 생중계할 일 있냐며 잔뜩 혼이 났다.

크산칼리카의 진액을 구한 후 목욕을 하러 온 류제네 파티원들과도 마주치는 바람에 멋쩍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렌도 뭐, 요국에서는 영 연이 없던 달콤한 지배에 빠져 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 류제 신리가 이번엔 여자 말고 남자를 꾀어낸다는 소문이 돌기가 무섭게 아닌 척 마음이 있던 여자 모험가들이 칼로 배때기를 쑤시려 들었다.

다행히도 류제가 나서서 무사히 돌려보내고, 이번엔 남자 모험가들의 대시를 받게 된 류제가 렌을 앞세워 지금부터 이 사람에게만 집중하겠다 발표를 한 것도 그로부터 며칠 후이다.

류제 신리의 남의 눈치 보지 않는 기행이야 흔해서 그런가 보다 넘어가던 류제네 파티원들도 상대가 크산칼리카 둥지에서 만났던 그자라는 사실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류제 신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호감을 보일 리가 없는 데다 사랑으로 마음고생하게 한 사람이 남자라면 이해가 갔다.

그의 파티원들도 자신들만의 사랑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혼자서만 잘 풀려버린 류제를 질투한다면 질투했지 솔직히 알 바가 아니었다.

특히나 심성이 착해서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지 못하는 세라가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진짜 남자처럼 변모하는 네네를 보자니 지긋지긋한 인연의 부산물적 감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듯해 곤욕이었다.

유리에나 루시에의 조언대로 고백에 대한 합당한 답을 내놓고 거리를 두는 게 맞는데 만날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서 계속 어울리다 보니 세라는 네네와 옛날처럼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거하게 사고를 쳐서 새벽에 여관에서 나오다가 비키와 마주쳐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세라와 마주친 비키도 썩 당당하지는 않았다. 비키가 짝사랑하는 율폰이 그 새벽에 그녀의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이야 막역한 사이이니 그러려니 하기도 애매한 게, 여관에서 나온 시간이 시간인 데다가 비키의 목 주변에 키스 마크가 보였던지라 다음 날 모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과반수가 사랑으로 날뛰게 된 류제 신리 스탠더드 파티의 주된 의뢰였던 요정왕 플로냐의 인간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마무리되었냐면…….

정왕의 행방불명으로 요국이 엉망진창 들쑤셔지고 인간을 향한 공포는 극렬하게 타오른 가운데 마가릿을 끌고 요국을 잠재우고 돌아온 플로냐는 인간으로 완벽하게 둔갑할 수 있는 약이 개발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만들어진 비약으로 보통의 인간 여자처럼 된 플로냐는 꼬리가 없는 기분이 신기해서 가벼워진 몸을 폴짝폴짝 뛰었다.

당장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던 플로냐가 지체할 것 없이 도서관으로 가서 남자를 불러냈다.

이 의뢰에 엄청난 대금이 걸려있기 때문에 골목에서 줄지어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파티원들도 손수건을 돌려주는 플로냐가 하는 사랑스러운 고백을 듣기 위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때 넘어지셨던 분이시죠? 요즘 마을에 자주 보이셔서 혹시나 했는데. 오늘은 뿔과 꼬리는 없는 건가요?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리는 다 나았나요?”

결국 남자가 플로냐를 알아보는 바람에 인간으로 둔갑해도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플로냐의 사랑은 덕분에 잘 끝났다.

류제네 파티원들은 번아웃이 세게 올 만큼 김이 샜다. 결국 플로냐가 너무 겁을 먹는 바람에 쓸데없이 일이 길어진 게 아닌가.

사랑을 서로 점차 발전시켜 나간다고 하더라도 신분과 종족의 차이가 있는 한 정왕인 플로냐는 요국을 비울 수는 없었다. 떠나는 대신 플로냐가 일주일에 한 번 이 마을에 들르겠노라 남자에게 약속을 전했다.

류제가 알게 된 바로는 그 남자는 매끈매끈 뱀 피부를 좋아하는 특이한 성적 취향이 있는 듯했는데 넘어진 플로냐를 보고 딱 자기 취향이라 계속 기억을 하고 있었다더라고 한다. 이 사설은 비밀에 부쳤다.

대금을 치른 플로냐가 의뢰를 종료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기 전, 니냐롯트가 파티원과 플로냐를 어딘가로 초대했다. 플로냐는 걱정스러워했지만 니냐롯트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러겠노라고 했다.

제대로 차려입으라고 난리를 쳐서 어디를 가는 것인가 했더니 이 나라의 왕성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던 길에 알았는데 니냐롯트는 왕성에서 몰래 도망 나온 공주라고 한다. 그것도 류제만 몰랐댄다.

“뭐라고?”

귀족인 비키는 당연히 니냐롯트의 호위였으며, 교회 소속 신관 세라는 니냐롯트의 안전을 위해서 붙어있었고, 유네는 물론 보자마자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서 나중에 비키를 통해 전해들었다고 한다.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해? 아무리 내가 무신경하다지만 너무한 거 아냐?”

“나는 어떠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만. 그대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 뿐이지.”

억울했지만 류제는 니냐롯트의 반박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속은 기분을 지울 수 없던 류제는 이 정도로 둔탱이었나 왕성으로 가는 내내 머리를 싸맸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외전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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