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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4) (91/112)

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4)

탕탕,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수건을 사이에 끼고 손바닥을 마주치던 렌은 목욕탕에서 옷을 입고 쭈뼛거리는 별 이상한 인간을 위아래로 훑었다.

“손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요.”

그날따라 독특한 손님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싱숭생숭한 휴가도 지났겠다, 자취를 감춘 난봉꾼 류제 신리는 생각도 하기 싫겠다, 그놈에게 행할 뜨거운 복수는 내버려 두고 당분간 일에 집중하기로 한 렌은 이상한 주장을 지껄이는 인간 남자의 말이 어처구니없었다.

“왜 다 벗어야 하지?”

“손님, 여기는 그런 곳입니다요. 옷 위로 마사지를 어떻게 합니까요.”

물론 레라바시아에도 이 손님과 비슷한 주장을 하던 요국인이 있긴 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알몸이 되기 싫어하는 손님.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마음은 알겠지만 레라바시아나 인간들의 조그마한 동네 목욕탕이나 둘 다 태어난 그대로 발가벗어 더러움을 씻어내는 곳이란 말이야. 벗기 싫으면 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규칙이거늘.

“너는 옷을 입고 있잖아.”

“손님, 저는 직원입니다요.”

마사지를 받겠다고 했으면서 저런 말로 고집을 부리면 렌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의 몸 따위 관심도 없고, 어차피 목욕탕 습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할 일도 많은데 귀찮게 굴지 말아줬으면 했다. 괜찮게 나가나 했더니 하필이면 진상이라니 오늘도 텄다.

“공평하지 못해.”

평균적인 인간 남자보다 머리카락이 긴 손님은 머리 자를 새도 없이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는 모험가처럼 보인다.

깐깐해 보이는 얼굴이나 고집 있는 입술은 중성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소족보다는 조금 크고 다부진 인상은 류제 신리처럼 역시 인간 남자였다.

“그래서 손님분은 마사지 안 받으실 거지 말입니까요.”

저 인간에게서 보통의 인간과 다른 이질적인 기분이 들어 꺼림칙했던 렌은 차라리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고민하다가 결국 앞섶을 드러낸 손님은 마사지 보드 위에 누웠다.

하도 가려대기에 보아서는 안 되는 게 있었나 했더니 평범했다. 이 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험가처럼 상처가 많고 근육이 도드라진 몸일 뿐인데 뭐 그리 부끄러움을 타는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요.”

체온 정도로 달군 기름을 부어서 등부터 마사지하는 렌은 단단히 뭉친 근육들을 결 따라 꾹꾹 눌렀다. 남들보다 단단하게 굳은 것이 막 담금질한 근육 같았다.

렌도 여기서 알게 된 것이지만 류제 신리도 그렇고 모험가들은 몸을 험하게 굴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우, 많이 뭉치셨네. 고생을 하셨나 봅니다요.”

“남자들은 다 그렇지. 제길, 무슨 근육이 이렇게 빨리 생겨?”

“복에 겨운 소리를 하십니다요. 저는 근육이 잘 안 생기지 말입니다요.”

“우락부락한 몸에 관심 없어.”

끙끙거리는 손님은 칭찬을 해줘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불평을 표했다. 말하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손님의 상세한 사정은 알 바 아니었던 렌은 열심히 제 할 일을 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이 손님은 어느 날 돌연 몸의 부피가 늘어난 것처럼 살결이 튼 자국이 흉터와 섞여 호랑이 줄무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손님은 성장기 때 고생하셨나 봅니다요. 그때는 오일을 자주 발라줘야지 살이 트지 않습니다요.”

“성장기는 아니고 며칠 전부터 키가 커서 뼈마디가 아파. 제대로 좀 눌러줘.”

“며칠 전부터요? 마사지도 좋지만 그런 건 스트레칭이 더 좋습니다요.”

답할 때마다 틱틱거리는 손님 말투가 거슬린 렌이 억지로 웃으며 충고했다.

아무리 곱상해도 성장기는 진작 지났을 나이인데 키가 자라다니 복에 겨운 소리다. 렌은 류제 신리와의 그 짜증 나는 키 차이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 말을 들으니 저도 희망을 가지고 싶습니다요. 무슨 묘술을 부린 겁니까요? 5센티미터는 자랐습니까요?”

“묘술이야 그쪽은 쓰지도 못할 거고, 몇 주 사이에 20센티미터 가까이 자란 것 같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서 탈이야.”

“오우, 엄청나시구만요. 비법 좀 알려주시지.”

하지만 치사하게도 손님은 마사지가 끝날 때까지 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엔 부끄러움을 타던 손님은 렌의 기똥찬 마사지 솜씨를 받고 나니 끝날 때쯤엔 뼈마디가 후련해 보였다.

“유리에가 추천해 줬는데 괜찮군. 앞으로 자주 오겠어.”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렌이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며 단골 지명에 감사를 표했다. 할 때마다 인센티브가 있어서 손님을 많이 받을수록 렌에게 돌아가는 게 많았다.

이런 식으로 단골을 모으면 다달이 들어오는 고정 금액이 늘었다.

그렇담 천천히 친해지는 척해서 키 크는 방법을 캐내야겠다. 이것 참 인간도 첫인상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겠다니까. 진상인 류제 신리와 다르게 복덩이잖아.

“너는 여기서 남자들을 자주 보겠군.”

목욕까지는 할 생각은 없는지 스트레칭을 마친 손님은 곧바로 가운을 입었다.

기름으로 엉망이 된 마사지대를 정리하던 렌이 그야 여긴 남자 목욕탕이니 당연하다며 손님을 향해 끔벅거렸다. 뭐라고 우물거리던 손님은 괜히 얼굴을 구기며 외쳤다.

“여자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의 행동은 뭐라고 생각하지?!”

손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목욕탕 안에 울려 퍼졌다. 탕에서 전신욕을 즐기던 몇몇 손님이 놀라 첨벙거렸다.

렌도 들고 있던 바구니를 놓칠 뻔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나도 몰라 이 자식아. 난 모태 솔로라고.

하지만 프로페셔널 온천지기 출신이었던 렌은 손님의 어떤 당황스러운 질문에도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성숙한 관심 표현과 배려, 그리고 일편단심 아니겠습니까요.”

누구한테는 없는 그거 말이지. 또 얼굴이 떠오른 렌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멀쩡하게 생겼으면 뭐 하냐고. 제정신이 아닌 놈인데.

관심은 제멋대로 표현하고, 배려는 눈 코빼기도 없으며, 일편단심이란 말과 한 마디도 같지 않은 그놈 말이다.

“그럼 뭐, 평소대로 하면 되겠군.”

손님은 자신만만하게 목욕탕을 나갔다. 잘 가라고 손님을 떠나보낸 렌은 저번에 세라 밀로니가 펑펑 울었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떠올랐다.

돌연 스치는 안타까운 이미지가 어리둥절했던 렌은 별것 아닐 거라며 적당히 넘어갔다.

다음 손님도 놀라울 만큼 독특했다. 손님들이 없는 틈을 타 목욕탕 청소를 하던 중 그를 찾은 마사지 손님은 렌을 보자마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혼혈이군.”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혼혈의 의미가 인간이 말하는 것과 다름을 렌은 어렵지 않게 캐치했다. 찔끔한 렌은 묵묵히 남자를 흘겼다. 언젠가 한번 본 새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기묘한 인간이었다.

아니, 순수한 인간은 아니다. 가까이 보니까 렌도 알 수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저자도 그와 같은 혼혈이었다.

“용케 인간들이랑 어울려 사는군요. 저는 힘들어 죽겠습니다요.”

“난 요국 국적은 아니라서. 넌 요국 출신 혼혈인가?”

“네에, 뭐. 소묘족입니다.”

“백토족이라고 들었어. 나로서도 의외야. 요국인은 국경 밖에는 관심 없지 않나. 요국을 나온 사정이라도 있나?”

마사지로 살결을 어루만지는 동안 침묵이 생길 때가 가장 어색했던 렌은 말을 걸어주는 손님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혼혈이기도 하고, 태어난 배경은 달라도 인간들 틈에서 태어난 혼혈은 어떤 삶을 사는지가 궁금했다.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만, 요국은 최근에 정왕님이 행방불명되면서 인간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는데 제가 혼혈이지 않습니까요. 이때다 싶었는지 일자리에서 잘렸습니다요. 혼혈을 써줄 분위기가 아닐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인계로 왔습죠.”

“냄새라. 요국에선 그런 문제가 있었군. 하기야 인간들은 코가 좋지 못하니까.”

인간들과 함께 살았던 혼혈도 뭔가 불편한 점이 있던 걸까. 렌은 조금 궁금해졌다. 손님도 그걸 이야기해 주고 싶던 모양인지 묻지 않아도 제가 겪은 불편함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인간들은 아무래도 발정기가 따로 없으니까 그러겠지만, 몸 관리를 못 할 때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야 하니 조금 그래. 아는 동생이 걱정이 많아서 말이지.”

“특히나 혼혈은 주기가 불안전하니까요. 약을 먹어도 자극이 있으면 효과가 팍 떨어지지 않습니까요.”

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망할 류제 신리 때문에 발정기 주기가 계속 꼬여서 요즘에는 약을 매일 달고 살았다.

그놈만 없었더라면 인계에서 좀 더 편안한 삶을 영위했을까. 하지만 뭐, 이 마을에선 사생활을 함께 보내줄 친구가 없으니 조금 심심했을 것 같기는 했다.

잠깐. 아니지. 그놈만 없었더라면 내가 여기에 왜 있어. 내가 레라바시아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근데 정왕님이 행방불명된 건 정왕님의 의지인데. 그놈이 있든 없든 나는 쫓겨났을 거 아닐까?

“약이 있나? 처음 듣는데.”

“있습죠. 효능이 좋은 놈이 있는데 인계에서 나는 약초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호오, 듣던 중에 희소식이군. 재료를 알려줄 수 있나?”

류제 신리가 알짱거리는 잡념을 떨쳐내고 싶은 렌은 손님에게 발정기 억제 탕약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었다.

발정기 약은 요국에서만 팔았지만 레라바시아 온천장에 있을 때 중앙을 통해 약초 조합법을 배운 적이 있는 렌은 덕분에 인계에서도 손쉽게 약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거 고맙군. 은인에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난 율폰 밀로노프레세야. 만나서 정말 반가워.”

“렌 지미라고 합습죠. 저야 뭐, 자주 마사지 받으러 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보답입습죠. 다른 사람에겐 혼혈이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그러겠습니다요.”

율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흔쾌히 팁을 더 얹어주었다. 렌은 율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인간계에서 혼혈을 또 만나다니 동질감에 기분이 좋았다. 고통에 공감해 줘서 다행이었다.

거봐, 처음 보는 사람도 잘 이해해 주는데 그놈은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틈만 나면 남의 사정 따위 파괴해 버리려고 한다.

매일같이 발정 나서 괴롭혀대며 나를 류제 신리 그 자체로 물들려고 하는 그 점이 괘씸했다. 그랬던 주제에 거절한 이후부터 류제 신리는 찾아오는 날이 없었다.

여관 관리인인 유리에 말을 미루어보아 세니타리 롯에는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흔하던 놈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동안 새 손님들을 많이 받았지만 매번 와서 귀찮게 굴던 그놈만 행방불명이었다.

“망할 놈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입을 쭉 내민 렌은 아득바득 분을 삭였다. 그도 딱히 류제 신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거절하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갔다 그거지? 누가 뭐라고 할 줄 알아?

…라고 형편 좋게 투덜거려도 하루 온종일 류제 신리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지 렌은 삼십 분째 같은 자리만 솔질을 박박 하며 이를 갈았다.

콱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중상이라 당하라지. 그놈이 누굴 꼬시든가 알 바 없고 날 포기해서 아주 속이 다 시원하구만! 이대로 다시는 오지 마!

렌의 사념을 통해 저주란 저주는 다 받고 있는 류제는 과연 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하면, 마을 도서관 뒤편 플로냐가 반한 남자가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 보이는 골목에 숨어서 파티원들과 함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냥 정체를 드러내는 게 어때? 어차피 그 남자도 알아야 하는 문제잖아.”

“싫어. 무섭단 말이야.”

도서관에 잠입하려는 플로냐는 인간으로 변신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순수 용족인 그녀는 뿔과 꼬리를 숨기는 것만큼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도서관 안에서는 로브를 벗어야만 해서 인간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플로냐에게는 힘겨웠다.

“그래도 극복해야지. 사랑을 위해서야, 플로냐. 힘을 내.”

“맞아. 그때 그 일도 그래. 당사자는 악의가 없었을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아무도 널 괴물이라고 생각 안 해.”

“하지만 난 상처받았는걸.”

옛날 기억이 생생한 플로냐가 훌쩍거렸다.

요국의 정왕인 그녀가 인간을 무서워하게 된 계기는 아주 먼 옛날 어렸을 적, 옆 나라에 산다는 인간의 존재가 궁금해서 성을 탈출했던 그녀가 몰래 근방 마을을 방문했을 때 생겼다.

어린아이이던 그녀는 요국인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인간이 낯설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인간 마을을 배회하던 그녀는 또래로 보이는 인간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그녀를 놀이에 끼워준다고 했다.

술래잡기의 술래가 된 플로냐가 마지막 친구를 잡으려던 그때 몸을 감싸던 로브가 날아가 버렸다. 어떤 꼬마가 그녀의 뿔과 꼬리를 보고 몬스터 같다고 깔깔 비웃었다.

자신을 몬스터라고 지칭하자 충격받은 플로냐는 도망가서 그대로 칩거했고, ‘인간은 무서워!’라고 요국인들에게 공표하며 지금 같은 사태를 일구는 데에 일조했다.

그때는 약 200년도 전 이야기라 그녀도 어렸고, 요국과 인간의 왕래가 지금만큼도 없던 때라 그녀의 뿔과 꼬리가 인간에게는 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극복했을 법도 하건만 그때 들었던 비웃음은 끈질기게 트라우마를 자극해서 지금까지 플로냐의 발목을 붙잡았다.

“상냥한 인간 남자는 다를 거야, 플로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는 걸 어떻게 해.”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사랑을 느껴버린 플로냐를 말릴 수도 없다. 다독이며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비키와 유네는 재기 불능이 된 세라나 책을 읽는 중인 니냐롯트 말고 가장 할 일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류제에게 발길질을 했다.

“류제, 침울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봐.”

“몰라.”

“우리도 모르겠으니까 생각 중인 거 아냐!”

비키가 짜증을 냈지만 류제의 반응은 옅었다. 쓰레기답게 쓰레기통에 앉아 멍청하게 벽에 기댄 류제의 상태는 충분히 이상했다.

물론 평소처럼 무관심하고 태평한 소리나 해대긴 해도 말투가 시무룩하고 힘이 없다. 울적해하는 류제는 새파란 눈동자를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내 사랑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남의 사랑 따위 알 게 뭐야.”

그 말에 비키는 사레가 걸릴 뻔했다. 그 류제 신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다니. 냉정한 니냐롯트조차 놀라서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긁적이던 비키가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야?”

“류… 류제 군이 사랑? 그럴 리가 없는데. 류제 군 좀 쓰레기잖아.”

“쓰레기라니. 신랄하다, 유네.”

“그래? 류제 군도 인정하지 않아?”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두 사람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류제 신리가 사랑?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그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은 방탕아가?

조금이라도 참견한다 싶으면 선을 그어버리고 가벼운 관계를 지향해서 만날 때마다 여자가 바뀐다는 바로 그 류제 신리가 사랑을 논하다니?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연애하는 네 모습은 상상조차 안 간다.”

“상대는 누구야?”

“있어. 까탈스러운 고양이 같은 녀석.”

“별일이네. 귀찮은 성격을 제일 싫어하면서. 네 자신 있는 얼굴에 안 넘어가는 사람인가 봐?”

모험가 사회에서 류제 신리의 유명세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S급 길드 소속에 톱급 파티를 이끄는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게 가려질 만큼 대단한 것이 외견이다.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었다. 자신 있는 외모로도 안 꼬셔지니 류제도 승부욕이 불탄 건가.

“누군지는 몰라도 요망한 사람이네.”

“류제 군 요즘 들리는 소문으로 엄청 얌전하다던데 그래서였구나. 또 어떤 곤란한 사람이랑 엮이는 바람에 아빠한테 부탁해서 묻어야 할 줄 알았지 뭐야.”

“설마 그래서였던 거야? 요국에서 돌아온 후에 혼자서만 다른 여관에 들어가더니 난 네가 하렘을 만들어 즐기는 중인 줄 알았는데.”

“매번 반박하느라 질리는데 난 여러 명이서 하는 건 안 좋아하고, 노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당연히 몸 사려.”

하지만 저런 반응이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요국에서 온 고양이를 꼬시는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의 연애 플로우와 양상이 달랐다.

보통 이만큼 왔으면 상대방이 알아서 빠지든가 집착하든가 할 텐데 그 고양이는 도통 마음을 표현할 낌새가 없었다.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은 가을 바다처럼 우수에 찼다. 슬픔에 젖어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려니 모르는 사람이 그를 위로해 준다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그와 어릴 적부터 썩을 인연으로 얽힌 두 사람이다. 류제 신리의 진상을 아는 그녀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점찍어 둔 사람이 있든 없든 마음껏 즐기고 다닐 줄 알았더니. 하반신 가벼운 너도 일편단심인 부분이 있구나. 연애 방면에선 절대 우울해하지 않을 것 같은 놈이 그러니까 이상하네. 그거 사망 플래그 아냐?”

“맞아. 조심해, 류제 군. 누가 류제 군 좋다고 칼부림을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면서 지금 이러는 건 뭔가 불길하니까 당분간 사냥 나가지 마.”

“나도 도덕심은 있거든? 불길하긴 뭐가. 하아, 내 사랑은 이 모양인데 마왕의 사랑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의욕이 안 나.”

“마왕이라고 하지 마. 난 정왕이라고. 요국의 정왕, 요. 정. 왕. 몇 번을 말해야 해?”

감수성이 풍부한 요국인의 정수이자 사랑을 하면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곤란한 성격을 가진 플로냐는 류제의 난잡한 연애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성적인 인간은 모르겠지만 요국인은 한번 사랑에 빠지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곤란할 만큼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냥 네 뜻대로 안 넘어오는 것일 뿐이잖아. 아니면 그 사람은 네가 싫대?”

“내가 누구랑 자든 관심 없대.”

“그렇담 네 더러운 하반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네.”

“꼴좋다.”

항상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류제 신리는 어느 마을에 가도 수많은 섹스 목적의 친구들이 있었다. 가끔 그가 칼부림을 당하는 이유도 특별한 상대를 만들지 않고 그 외모로 사람 마음을 쑤시고 다녀서다.

물론 대부분의 여자 모험가들은 그와의 섹스를 가볍게 여겼으나 그렇지 않고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칼부림을 하는 쪽이 류제 신리에게 마음이 있던 여자들인데 누구랑 섹스를 하든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는 건… 말 그대로 완전 류제 신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가벼운 하반신을 탓해. 네 인상은 다 네 손으로 만든 거니까.”

“상대가 있으면 난 바람 안 피운다고!”

“지금까지 내가 본 더러운 염문과 칼부림은 뭐지.”

“그건 사귄 게 아니라 상호 합의 간에 하룻밤 즐긴 거야. 모험가들이란 다 그러잖아.”

“같은 취급하지 마. 난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그런 거 안 해.”

“그래, 류제 군. 그런 쓰레기 같은 부분을 안 고치면 답이 없을걸.”

류제의 파란만장한 섹스 라이프는 파티원 모두 진절머리 나게 겪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류제는 질척한 관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벼운 만남을 중시했다.

상대방이 만남에 의미 부여를 하기 전에 끝내버리는 타입이라 조금이라도 참견하기 시작하면 바로 작별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면 귀찮다는 이유가 태반이다.

고난을 거쳐 간신히 마을로 복귀했을 때 그 불끈불끈함을 해소하고 타인의 살결의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 섹스를 즐기지만 귀찮은 과정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가볍게 만나고 끝나는 게 편하다고나 할까.

뭐, 모험가란 전국을 싸돌아다니는 직업이니 연인과 자주 만날 수도 없고, 연인과 같이 파티를 짜면 크게 싸워 헤어지거나 다시는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잦다.

그런 반면교사가 지천에 널리고 널렸다지만 류제는 정도가 심했다. 그의 외견이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치부하는 게 파티원 입장에서는 손이 덜 갔다.

“쓰레기… 그런가? 다른 이유 때문인 거 아냐? 상대도 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거 100퍼센트 네 착각이야. 짝사랑은 항상 그런 식이지.”

“동감하군. 착각이라는 부분이.”

10년째 짝사랑만 하는 비키나 가만히 있던 니냐롯트까지 동조하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뭐가 문제일까. 설마 종족이 달라서 거절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나?

요국인은 성별을 신경 안 쓴다는 것에 꽂혀서 종족을 심하게 따지는 관습에 소홀하고 말았다.

인간 혼혈인 데다 플로냐도 인간을 좋아하니 그런 건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면전에서 그런 말로 거절당하니 역시 납득이 안 갔다.

뭐가 잘못된 거지?

선물도 사주고, 섬세하고 겁 많은 요국인이면서 인간들 사이에 끼어 사니까 심심할 것 같아서 놀아주고, 친구도 만들어주고, 맛있는 가게도 추천해 주고, 성욕도 풀어주고. 나 정말 최선을 다한 거 아니야?

…라고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류제 신리는 제 되먹지 못한 성질머리가 이유인지는 모르고 마음속 깊이 변명했다.

“여러분, 목표물이 움직입니다.”

그들이 수다 떠는 동안 혼자 멍 때리고 있던 세라가 문득 이동하는 타깃을 발견했다. 못된 짓 하는 도중 순찰하는 치안대와 마주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 그들은 골목에 옹기종기 고개를 내밀고 상대를 주시했다.

“도통 플로냐의 취향을 모르겠어. 저런 비실비실한 놈이 어디가 좋아?”

“다 좋아. 보면 보호 본능이 끓어오르지 않아?”

“별로.”

플로냐는 차마 보지도 못하겠다며 눈을 가리고 슬쩍슬쩍 짝사랑 상대를 구경했다.

혹시라도 사귀는 상대가 있는 건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 건지, 도서관지기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궁금한 건 많은데 꼴이 이래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매일같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어라, 옆에 못 보던 여자가 있어.”

“앗, 정말이네. 누구랑 나온 거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서 동료인 것 같은데.”

“그냥 동료겠지? 그러겠지?”

혹시라도 빼앗길까 전전긍긍한 플로냐가 손수건을 붙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남자는 그녀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건 S급 길드원으로서 의뢰 완수를 바라는 다른 파티원들도 바라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플로냐의 인간 공포증은 극복되기는커녕 슬픔으로 성에 칩거해서 근 몇백 년간은 요국과의 교류는 꿈도 못 꿀 것이다.

“가버렸다.”

웃는 상의 남자는 곧 사라졌다. 스토커처럼 끝까지 그 모습을 훑은 플로냐는 눈물을 훔치며 둔갑을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이잇! 왜 안 되는 걸까.”

저번에 마주쳤던 그 혼혈 묘족은 제대로 인간처럼 보였는데. 정왕의 피에는 인간이 섞이지 않아서 그런가 플로냐는 뿔과 꼬리만큼은 가려지지 않아 애가 탔다.

“내가 너였다면 당장 돌진했을 거야. 그런 모습 자체로도 이미 너잖아. 저런 인간 남자 때문에 너라는 존재를 부정할 셈이야?”

플로냐의 콤플렉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류제는 옆에서 힘 빠지는 소리나 해댔다. 요국인인 그녀가 무슨 결심을 하고 여기까지 온 건지 인간인 그는 절대 모를 거다.

“부정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이 섬세하지 못한 류제 같으니.”

종족을 뛰어넘는 플로냐의 사랑조차 친구들에게 부탁해도 어려운데 사랑에 탄탄대로일 류제가 침울해하는 건 고작해야 칭얼거림이다.

“사랑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쉽지 않은 거라구. 네네 슈만 그 사람도 봐. 방향은 잘 모르겠다만 얼마나 필사적이야. 나도 요국에서 인간의 나라까지 온 거고. 비키도…….”

자기 사랑 잘 안 되었다고 남의 사랑까지 공치려는 류제에게 플로냐가 쓴소리를 했다.

어차피 당장 방법도 없는데 한 나라의 왕 주제에 사랑에만 목메는 하찮은 그림인 거 알고 있다. 하지만 플로냐는 그를 위해 노력하는 이 감정마저도 소중했다.

“나는 달라. 언제까지고 애 취급만 하는걸. 하아.”

착잡한 마음에 비키도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부터 봐온 사이라서 그런가 율폰은 비키를 아는 동생 정도로만 여겼다.

숨기고 있는 걱정이 뭔지 궁금한데도 그녀에게는 말해주지 않고, 길드원들과 친분을 쌓지도 않고 꾸준히 잠수를 타니 심란하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칫, 모험가 연인이 있는 것도 괜찮은데.”

“그 사람은 좀 독특하지. 난 아직도 거리감이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거든.”

“아니거든? 율폰은 몸이 자주 아픈 것일 뿐이거든?”

당장 편을 드는 비키가 투덜거렸다. 율폰은 좀 진중한 데다 병약해서 그럴 뿐이다.

그렇게 믿는 비키는 짝사랑에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하는 자신이 플로냐나 류제만큼 한심해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한편 그녀는 지금껏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을 류제에게 안쓰러움을 표했다.

“하여튼 너도 기어코 힘든 길을 가는구나. 지금이라도 철이 들었으니 축하해 줘야 하나.”

“이때다 싶어 너무 놀리는 거 아냐?”

“그럼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너를 놀리겠어? 그거 다 벌받은 거야. 너 때문에 운 사람들이 불쌍하다.”

“뭐… 그에 대해선 할 말 없지만.”

그도 첫 만남부터 가볍기 짝이 없던 고양이에게 이만큼 빠질 예정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류제 입장에서는 렌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없긴 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위협하는 거족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보호해 준 유일한 요국인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라도 미약 오일 사건은 썩 좋은 경험이었다.

고양이는 남자라 해도 상관없을 만큼 귀엽고, 몰아붙이는 데에 약하니까 들이대다 보면 평소처럼 쉽게 넘어올 줄 알았다.

정말로 내 외모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그 애는 혼혈이라도 요국인이라서 인간과 보는 눈이 다를지도 모르지.

“플로냐, 요국인인 네가 보기엔 내 얼굴이 어때?”

“오만한 질문이구나.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보여.”

“역시 그렇지?”

그럼 문제가 없을 텐데 왜 그렇지. 류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 할지언정 이 외견이 취향이 아닐 리가 없었다.

“류제 신리 진심으로 재수 없어.”

“진짜로.”

“동감하군. 그 재수 없다는 부분이.”

류제가 이만큼 비뚤어진 계기가 그의 완벽한 외관 때문이라 파티원들이 치부한 것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들도 류제가 그걸 이유로 상처받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외견에 홀딱 반한 사람들은 대부분 류제의 속내나 마음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다.

겉 포장지를 보고 안까지 완벽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사소한 태도, 약간의 부도덕, 잠깐의 무관심함도 용서를 못 해서 항상 외견만큼 속내까지도 자기가 만든 가상의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끊임없이 고집했다.

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던 류제는 언젠가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와 어울리든 어차피 그의 마음은 아무도 신경 안 쓸 거라고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여태까지 류제는 가벼운 만남을 추구했다. 그것조차 류제의 마음을 상처 입히고 있었기에 류제는 점점 더 그 요국인에게 더 끌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있지, 비키 양. 류제 군의 쓸데없는 말은 아무래도 좋은데 아까부터 어디서 비명 소리 안 들려?”

“그런가? 류제 네 멍청한 말을 누가 엿들은 거 아냐?”

궁수의 특성상 귀가 좋은 유네가 말했지만 류제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외모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평소대로 무시했다가는 진짜로 날 상관 안 하게 될 것 같은데. 요국인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원래 성격이 저런 거야? 도통 접근 방법을 모르겠네.

“비명 소리는 들리는 것 같다만.”

니냐롯트가 책을 넘기며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비명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들이 숨어있던 골목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을에서 싸우면 배상 문제 때문에 골치 아파서 싫은데.”

사람들이 쿵쿵거리는 발걸음의 반대 방향으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걸 보니 몬스터가 침입한 건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마침 그 범인이 골목에 고개를 쑥 내밀었다.

“플로냐 님!”

“우앗 깜짝아!”

3미터는 넘는 거구에 소뿔을 가진 거족 요국인이 싱글벙글 아는 체했다. 플로냐를 향한 반가운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이번엔 플로냐에게 향했다. 각자 긴장하던 파티원들은 김샜다는 듯이 무기에서 손을 뗐다.

“거족 요국인이면 플로냐 네 손님이다.”

“세상에나. 마가릿?”

“여기 계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플로냐가 정왕의 성에 남겨두었던 비서실의 마가릿이다. 키가 3미터가 넘는 거우족의 등장에 요국인을 처음 보는 다른 인간들이 몬스터인 줄 알고 수군거렸다.

“눈에 너무 띄니까 일단 이 안으로 들어와 봐.”

“사람들이 엄청 놀랐겠는데.”

“사정은 잘 설명했습니다만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서 그냥 들어왔습니다. 하하하, 인간은 목소리가 쥐똥만하니까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군.”

특히나 타깃이 일하는 도서관 앞이다. 소란을 느끼고 창문 밖을 살피는 타깃에게 정체를 들킬세라 그들은 마가릿을 골목으로 끌었다.

“인간 나라는 모든 게 조그마하군요.”

마가릿의 몸이 벽에 꽉 끼었다.

“어…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어?”

요국에서 잘 나오지 않는 요국인이 인간들의 마을까지 온 것도 신기한데 소족도 아니고 거족이다.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연구만 좋아하는 마가릿은 이 중대 사항에 상관 안 하는 듯했다.

“제가 말입니다. 드디어 인간으로 완벽하게 둔갑이 가능한 약을 만들 비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녀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것 때문에 당장 칵센(말처럼 이용하는 비룡, 요국인들이 사막을 지날 때 탄다.)을 타고 당장 플로냐가 있는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물론 코가 좋은 요국인이기에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플로냐를 찾는 것은 더욱 쉬웠다.

마을 밖에서는 문지기들을 위협하며 깍깍 울어대던 칵센이 날아가는 새를 발견하고 한바탕 노는 중이다.

갑작스러운 거족의 등장으로 난리가 난 인간 마을의 유난은 그들이 요국에 몰래 잠입했을 때와 비슷했다. 비룡이 우는 소리와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비키가 눈가를 실룩거렸다.

“이제 정왕님의 고백은 식은 죽 먹깁니다, 하하하!”

동네방네 소문을 낼 듯 큰 소리로 웃는데 다만 그 목적만큼은 어지간히 순수해서 파티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노력보다도 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것 때문에 제가 급하게 인간 나라에 들어온 것 아니겠습니까요.”

“그 약이 어디 있는데?”

“그것이… 딱 한 재료가 부족해서 만들지 못했는데 요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인간분들께 부탁하러 온 것이지요.”

설명을 듣자하니 마가릿이 구하지 못한 남은 재료는 이 근처에 있는 특정 몬스터의 둥지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크산칼리카의 진액. 그것만 있다면 정왕을 위한 인간 둔갑의 묘약이 완성된다. 체액이 아닌 진액. 진액은 둥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암컷 크산칼리카에게서만 구할 수 있었다.

“으악, 최근에 크산칼리카 토벌이 있었지 않았어? 길드 의뢰판에서 본 것 같은데. 한발 늦은 거 아냐?”

“둥지는 토벌하기 전이야. 당장 연락해서 의뢰 인계받을게. 혹시라도 인터셉트당하면 안 되니 내일 새벽같이 오도록 해.”

칫, 할 일만 태산이네. 류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가 보면 파티장이 그가 아니라 비키인 줄 알겠네.

“이상. 준비할 거 단단히 챙겨오고.”

“나절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런 곳에서 비박하는 건 사양이야. 우웩.”

토벌 계획을 짜봤더니 규모가 커졌다. 오랜만에 나서는 사냥에 유네가 재미있겠다고 팔짝 뛰었다. 크산칼리카의 체액만큼은 끔찍했던 다른 사람들은 썩 표정이 좋지 못했다.

“킁킁, 어디서 묘족의 냄새가 나는데. 이상하다.”

류제가 스쳐 지나가자 마가릿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렌의 정체는 그만 알고 있어야만 한다. 지레 놀란 류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최근에 만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역시 요국인은 코가 남다르긴 하구나 하는 순간 어째 플로냐가 당황해서 말을 돌렸다.

“그런데 마가릿, 내가 인계로 내려간 걸 전달 안 한 거야? 들리는 말로는 나의 백성들이 그런 건 모른다고 하던데?”

“아아, 아까 말했습니다. 연구를 하다 보니 아주 조금 약간 깜박하는 바람에.”

한번 연구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는 성격인 건 알지만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잊어버리다니. 그 묘족 백성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플로냐가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그럼 내 편지는?”

“인계로 나오기 전에 대충 공개했는데 어쩐지 요국이 시끌벅적하더군요. 실은 오랜만에 목욕하려고 레라바시아 온천장을 들렀는데 영업을 안 하길래 뭔가 했습니다.”

“뭐어? 영업을 안 하다니. 망한 거야?”

이번엔 류제가 외쳤다.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뭔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류제의 아는 척에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애써 외면한 류제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헤집었다.

“뭐, 인간들이 정왕님을 쓰러뜨렸다는 소문 때문에 손님이 팍 줄어서 당분간 영업을 안 한다고 합니다만.”

“그런 거였구나. 제길 어쩐지.”

내가 분명 요국의 왕에게 해를 끼치러 가는 게 아니라고 설명을 했는데 어쩐지 적대감이 장난 아니라고 했어.

나는 또 렌이 날 잊지 못하고 인간들의 나라까지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도 발칙하게 날 모르는 척하려고 요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던 줄 알았지. 왜, 요국인은 종족을 심하게 따지니까.

“아아,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왜 제대로 해보려고 할 때마다 엉망일까. 류제가 발광하든가 말든가 다른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파이팅을 넣었다.

“그럼 오늘은 내일 토벌을 위한 준비를 각자 하도록 하자. 이만 해산!”

“마가릿은 나랑 같이 가자. 나 참, 잔소리해야 할 게 이만저만이 아니야.”

“아니, 저는 정왕님을 위해서…….”

오늘도 허탕 친 그들은 내일은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한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는 그들은 이번 토벌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자처한 그들의 자질에 있는 큰 구멍을 직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 * *

이 지역을 자주 드나드는 모험가 사이에서 악명 높은 크산칼리카의 둥지는 마을 주변에 연간 대여섯 개씩 발생하곤 했다.

짝짓기를 한 암컷 크산칼리카가 굴을 뚫어 알을 낳으면 태어난 새끼들도 토양 생물들을 섭취하며 자라났다. 성체가 되면 2미터가 넘는 그것들은 엄청난 규모의 굴을 뚫어 번식했다.

어린아이를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입이 벌어지는 크산칼리카는 굴을 뚫으며 경쟁하는 습성이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산사태가 나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사람을 공격했기에 둥지를 발견하는 대로 토벌하고 흙으로 메꿔야만 했다.

하지만 마리 수가 많고 둥지는 그들이 상시 내뿜는 이상한 점액질 냄새로 뒤덮여 모험가들은 크산칼리카 토벌 의뢰를 기피했다.

게다가 크산칼리카를 편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간뇌 부분을 단번에 절단해야 하는데 태생이 벌레인지라 완전히 죽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모험가들은 두 동강 나서 버둥거리는 머리와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체액들로 온몸을 진득하게 샤워하는 진풍경을 겪었다.

한 마리를 잡아 죽여도 더럽게 찝찝한데 둥지 토벌을 인터셉트하는 파티는 또 처음일 것이다.

아무리 플로냐의 의뢰라지만 크산칼리카의 둥지라니.

S급 길드에 들어가면 고상한 임무만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초보자일 때나 돈 없어서 맡은 더러운 의뢰를 다시 찍고 올 생각에 류제는 한숨이 다 나왔다. 차라리 요국 잠입을 다시 하고 만다.

토벌에 필요한 물품을 채비한 류제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아 좋은 술을 사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혼자 자학이나 하면서 내일 있을 끔찍 기분을 미리 달래야겠다.

“어.”

류제는 당황하지 않은 척했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이미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비스트로 카운터에서 렌과 마주하고 말았다.

적막이 도는 와중 카운터를 닦고 있던 유리에가 류제를 반갑게 맞이했다.

“류제, 오늘은 늦으셨네요.”

“의뢰가 조금 생겨서.”

류제가 어수룩하게 웃으며 눈길을 회피했다. 욕탕을 마감하고 유리에를 도와 여관을 관리하던 렌이 못마땅하게 그를 흘겼다.

렌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줄 착각했던 류제는 그동안 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했을지가 뻔해서 부끄러웠다.

렌이 제 방으로 돌아가는 류제의 뒷모습을 힐끗거렸다. 손에 술병을 들고 있어서 또 파렴치한 짓을 하려나 했더니 그대로 물러선 걸 보면 정말 뭔가 싶다.

“둘이 싸웠어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남자 목욕탕의 까칠한 마사지사를 봤다 하면 괴롭히지 않고서는 못 살았던 류제가 순순히 물러서자 유리에가 갸웃거렸다.

“그…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지 말입니다요?”

렌은 모르는 척 얼굴을 붉혔다.

“제이크 씨도 수고하셨어요. 이제 그만 쉬세요.”

“큰 라탈스키 씨도 수고하셨지 말입니다요.”

꾸벅 인사를 하고 후다닥 자기 방으로 향하는 렌을 지켜본 유리에는 이상한 호칭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 자꾸만 류제를 쳐다보던데 모종의 이유로 싸웠던 거겠지.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다.

지쳐 보였던 류제가 이후에 그의 방으로 쳐들어올 줄 알았던 렌은 기다리던 손님이 오지 않자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그 술 내 거 아니었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누가 그랬더라? 할머니가 그랬던가. 여튼 렌은 여관 소등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는 류제의 행태가 괘씸했다.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자기가 토라져? 냉큼 내 기분이 상했다 싶으면 얌전히 술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 거 아니야? 큰 라탈스키 씨한테 불쾌한 경험을 하게 만든 건 바로 너 때문이잖아!

솔직히 내가 요국인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그걸 협박해서 사람을 잘도 꼬드겼던 주제에 진짜로 얌전히 물러난 걸 보면 이제 질려 다른 상대를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렌은 분했다. 내가 그 망할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랑 비교해서 뭐가 부족한데?

“으하아암, 죽겠네.”

결국 그날도 또랑또랑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렌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여관의 아침을 시작했다.

손님들이 깨어나기 전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유리에와 비슷한 시간에 기상한 렌은 유리에를 도울 겸 체크아웃 할 손님들의 리스트를 살폈다.

“좋은 아침.”

“작은 라탈스키 씨도 일어났지 말입니까요.”

“매번 느끼지만 네 존댓말 구려.”

마당을 정리하고 돌아오다 이유 없이 독설을 날리는 루시에의 인사를 받은 렌이 삐거덕거렸다.

열받아서 한마디 돌려주려고 하는데 루시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언니를 도와 팔을 걷어붙였다. 아침 식사가 서비스로 나가기 때문에 손님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해가 창문에 비칠 때쯤 되니 손님들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계단을 밟으며 등장한 사람은 숙취에 절어있는 주제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류제였다.

그는 레라바시아 온천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갑옷 차림에 천으로 둘둘 만 짐과 거대한 검을 차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시더니 일찍 나가네요.”

“토벌 의뢰가 겹쳐서요. 스콜라 누님께 오늘은 제가 오기 전까지 목욕탕 닫지 말라 해주세요. 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뭐? 그걸 왜 네가 해? 그건 내 일이거든?”

렌이 쏘아붙였다. 렌은 원래 이 시간에 안 일어나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류제가 몸을 움츠렸다.

민망해 죽겠는데 같이 살다 보니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귀여워 죽겠는걸.

어제 술 마시며 내내 고민한 것도 무색하게 자기 걸로 하고 싶었다. 그냥 그러면 서로서로 편한 거 아닌가. 류제는 반복되는 고뇌를 떨쳐내지 못해 렌을 피해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야, 내 말 안 들려?”

“그럼 수고하세요.”

류제가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휙 나가버리니 렌의 머리가 삐죽 섰다. 싫다고 노래를 불러도 기어코 엉겨 붙으며 귀찮게 굴던 놈이 한번 정색 좀 했다고 저렇게 나오니까 허탈했다.

“저 빌어먹을 인간이……!”

우락부락한 건지, 울려고 하는 건지 아리송한 얼굴로 이를 악물던 렌을 보던 유리에는 얕게 한숨지었다.

어제 제이크 씨가 방으로 돌아간 후 류제가 부탁할 게 있다고 찾아왔던지라 혹시나 루시에의 방에서 자기는 했는데 아직 화해한 게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루시에가 소음 문제로 한마디 했더랬지. 물론 좀 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한 커플이 깨지는 것은 유리에도 바라지 않았다.

뭔가 저 둘에게 대화를 이어줄 만한 좋은 계기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던 유리에는 아침부터 만들었던 도시락 바구니를 발견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류제가 도시락을 안 들고 갔네. 이걸 어쩌나.”

정신이 없어서 생긴 틈바구니에 좋은 수가 보였다. 유리에는 귀가 쫑긋할 것 같은 렌이 어떻게 반응하려나 슬금슬금 입꼬리를 올렸다. 던진 떡밥에 입질을 하듯 렌은 덤덤한 척 바구니를 보며 기웃거렸다.

“도시락입니까요? 왜요?”

“몬스터 토벌 때문에 보존식이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기껏 준비했는데 잊어버리다니. 류제도 참.”

유리에가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려 그녀가 원하는 렌의 반응을 기다렸다. 설거지 중인 루시에도 고개를 돌리며 대화에 집중했다.

“제… 제가 가져다주겠지 말입니다요.”

“정말요? 와, 친절하셔라.”

그 말을 하기만을 기다린 유리에는 떡밥을 문 고기를 낚싯대로 들어 올리듯 옳다구나 바구니를 렌에게 떠넘겼다.

“금방 나갔으니까 뒤쫓을 수 있을 거예요. 집합 장소가 마을 서쪽 출구라고 했으니 안 보이면 그쪽으로 가보세요.”

“금방입습죠.”

눈에 빤히 보이는 행동이란 것도 모르는지 렌은 살신성인하듯 바구니를 끌어안고 냅다 달려나갔다.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어준 유리에는 참지 못하고 폭소하고 말았다. 루시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힉힉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웃어댔다.

“뭐야? 왜 웃어?”

뒤늦게 내려온 스콜라는 웃음바다가 된 비스트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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