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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3) (90/112)

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3)

저도 양심은 있는 건지 그날은 그대로 끝내줬지만 악독한 류제 신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확인시켜 줘서 고맙고 같이 술 마신 거 즐거웠다며 안녕하고 얌전히 물러난 다음 날, 렌이 싫어하는 크산칼리카의 체액을 뒤집어쓴 류제는 당당히 남자 목욕탕에 발을 디뎠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대서 확인해 보려고. 겸사겸사 나 좀 씻겨줄래?”

“당신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만요……!”

목욕탕 청소를 마치자마자 다시 더럽히는 류제의 만행에 렌의 미간이 실룩거렸다.

목욕하러 왔으면 얌전히 목욕만 하고 갈 것이지 류제는 굳이 또 마사지를 받는다고 사사건건 사람을 귀찮게 만든 후 느지막이 돌아갔다. 얼마나 성가신지 다른 손님들이 렌을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그보다 더한 몬스터의 체액을 뒤집어쓴 그다음 날, 그 다다음 날에도 목욕탕을 찾아온 류제는 렌을 콕 집어 지명해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 손님이 늘어 대기열을 해치우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진상 손님까지 전담하려니 렌은 스트레스로 털이 홀라당 빠질 것 같았다.

망할 인간을 간신히 돌려보내면 틈을 노리던 다른 손님이 저 ‘류제 신리’와 아는 사이냐면서 말을 걸어댔다.

최신 유행이라도 따라 하듯 자기도 똑같은 마사지를 해달라고 조르는데 류제 신리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알 바 없는 렌은 불쾌해 죽을 것 같아 뜬눈으로 잤다.

유일한 안식처로 퇴근하고 나서도 류제는 질리지도 않고 쳐들어왔다.

여관 1층 관리인실에 렌이 좋아하는 술을 들고 찾아왔던 류제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자 고양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연구해서 꼬여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야한 짓으로 끝났다.

“으앗, 아으, 아니 언제까지 확인을… 으힛! 이제 그… 그만할 때도―”

“무슨 소리야. 검사가 다 끝날 때까지 해야지. 또 이상한 핑계 대면서 도망칠 거잖아.”

찌걱거리는 야한 소리가 숨죽인 방 안에 진득하게 울려 퍼졌다.

어차피 새빨간 타인에 불과하니 의심스러워도 무시하면 그만일 걸 왜 끈질기게 괴롭히는 걸까. 소름 끼치게 피부를 쓰는 손길이나 맞닿은 부분이 뜨거워서 렌은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흑, 으윽, 윽. 어… 언제 끝나는데… 왜 맨날……!”

“의심을 안 사게 해봐.”

아니 그걸 왜 내 탓을 하냐고. 물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는 한데!

류제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해고당하기 싫은 렌은 자기가 요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다.

“흐냐악……!”

“이런 예의 없는 고양이 같으니라고. 먼저 가버리면 상대방은 외롭다고 말했잖아.”

“고양이 아냐! 댁이 외로운 거랑 나랑 무슨 상… 히익!”

오늘도 남의 손에 착실히 발정했던 렌은 흉기를 둔골에 들이미는 류제를 흘기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확인만 한다면서 굳이 교미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마땅찮아도 그의 안으로 류제는 무리 없이 치고 들어갔다.

“아윽, 흑, 이익! 처… 천천히 하라고 좀! 매번 진짜 제멋대로―”

“천천히 하면 네가 싫어해서 그런 거 아냐. 널 위해 노력하는 날 칭찬해 줄 수는 없어?”

“으으으……!”

한 마디도 안 진다. 열심히 인간인 척을 해야 할수록 류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렌은 어느 순간 처박히게 되는 류제의 거시기라든가 진득한 키스, 젖도 안 나오는 꼭지를 비트는 애무 등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에 종종 비명을 질렀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무지한 요국인이라 렌은 류제 신리의 행태에 함부로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류제 신리가 레라바시아에서 했던 행위의 가벼움을 떠올린 렌은 인간들은 친분을 쌓으면 다 이런 식인가 보다 납득하기로 했다.

침입을 꾀하는 류제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도 통하지 않자 고양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쥐 장난감, 고양이들이 싫어하는 길쭉한 오이 등을 예사로 가져오는 류제 때문에 목욕탕 일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렌이 소스라치게 놀라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장난으로 한두 번 렌을 놀려먹던 류제는 어느 날 개다래나무 덩어리를 구해 왔다.

스콜라에게 부탁해 관리인실 문을 열고 개다래가 담긴 주머니를 침대에 숨겨둔 류제가 밤중에 다시 찾아왔을 때 렌은 주머니에 얼굴을 박고 후냥거리고 있었다.

“하하.”

너무 예상했던 대로라서 류제는 웃음이 터졌다.

“개다래나무라고 한대. 마음에 들어? 선물이야.”

눈이 풀려서 침을 질질 흘리며 해롱거리던 렌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방문을 살폈다. 그가 그렇게도 마땅찮게 여기는 인간이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다래가 너무 좋아서 제정신이 아니던 렌은 푸르르 얼굴을 털어내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 참 좋은 냄새가 난다 싶어서.”

인간은 개다래 냄새 구별 못 하는데, 라고 류제는 트집 잡지 않았다. 이럴 때 모르는 척해 줘야지 또 있는 힘껏 인간일 척할 테니까.

그게 귀여웠던 류제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렌이 코를 처박고 발라당 눕자 하찮게도 쳐다보았다. 발정기가 따로 있는 요국인에게는 미약이라는 개념이 없을 줄 알았더니 종족별로 흥분제로 통하는 건 통하나 보다.

“흐냥! 윽, 흐힉! 아니… 나 또 왜…….”

모든 건 류제의 계략대로였다. 어쩌다 보니 또 거시기가 처박히고 있는 렌은 항상 왜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는 건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하지만 입술을 쪽쪽거리다 보면 이성이 날아가서 도무지 생각이 불가능했다.

“후우, 오늘도 수고했어.”

“으… 으에…….”

질펀하게 놀고 난 후에는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골골거리면서도 고양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렌을 매일같이 맛있게 잡아먹은 류제는 누구의 정기라도 빼먹은 것처럼 안색이 맑아져 갔다.

* * *

모험가란 직업은 본디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사냥꾼에서 유래했다. 말인즉슨 티어가 높은 길드에 속한 모험가일수록 온몸에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점철되어 있다는 말이다.

도망가는 타깃을 쫓고, 붙잡고, 꿰뚫어 목적 달성에 이용하는 것에 큰 쾌감을 얻어야만 정상에 오르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건 S급 최상위 티어에 속한 길드 소속인 류제 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즘 그는 사냥 대신 다른 재미난 일에 빠졌다. 새로운 놀이는 몬스터를 해치울 때보다 즐거웠다.

덕분에 길드 일이나 현 의뢰를 함께하는 파티의 일에도 무관심한 류제는 플로냐가 반한 인간 찾기 의뢰를 수행하는 중에도 어떻게 하면 렌이 고양이라는 것을 시인할지만 머릿속에 꽉 차있었다.

“류제.”

아니지. 지금처럼 모르는 척 잡아떼는 것도 재미있는데. 오늘은 또 뭘 써보지? 캣닢이 남긴 했지. 어디서 팔았더라. 근처에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그걸 베갯잇에다 잔뜩 넣어놓으면 또 홀라당 낚여서…….

“듣고 있어? 류제! 야!”

쾅, 하고 테이블 치는 소리에 턱을 괴고 있던 류제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집중하는 모양새가 가증스러워 비키가 버럭 짜증을 냈다.

“집중하라고!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는 거야?”

“아아, 그… 생각하고 있었어. 방법을.”

“정말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나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는지 까먹은 류제가 아, 하고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점점 파티원들의 눈매가 사나워지니 류제는 팔자 좋게 둘러댔다.

“어어. 뭐. 몇 개쯤은 있겠지.”

“플로냐와 그 도서관지기를 만나게 할 방법인 거 맞지? 또 딴소리하면 안 돼.”

플로냐와 극적으로 마주쳐 손수건을 쥐어준 인간이 이 마을의 도서관지기라는 것까지는 파악했다.

무슨 연유로 플로냐가 이 마을 근처까지 왔을 때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목격 정보를 토대로 더듬은 결과 틀림없었다.

그래서 플로냐와 그를 만나게 해야 하는데 플로냐의 요국인의 모습은 인간에게 이질적인 데다 그녀에겐 인간 공포증이 있어 남자의 반응 하나하나가 상처가 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둘이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따로 불러내. 그다음에 인적 드문 장소까지 납치하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섬세함이라고는 눈 코빼기도 없는 자식.”

비키가 혀를 차며 나무랐다. 뒤이어 ‘로맨스라고는 쥐뿔도 보이지 않아.’라며 인신공격을 해댔다. 그런 건 섬세한 녀석들이 알아서 하라지. 류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때 만났던 사막의 거룡족은 썩은 이빨 하나 뽑아주니까 조용해졌잖아. 그만큼 의젓하면 얼마나 좋아. 요국인들의 호들갑이란.”

“아아, 그 게으름뱅이 용. 생각해 보니 그랬네.”

류제의 파티가 플로냐의 의뢰를 받고 요국으로 가던 길에 겸사겸사 하나 더 의뢰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사막에서부터 돌아 정왕의 성까지 온 것이다.

사막에서 사는 거룡족이 이가 아픈데 자기 레어 밖에 나가길 죽어도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라 썩은 이빨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요국에서 섬세한 작업을 하는 치과의는 소족뿐인데 거룡족의 거대한 입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간 큰 소족은 없으니 사람을 통해 인간 나라에 의뢰를 했었다.

그들은 그 거룡족의 입에 들어가 썩은 이를 뽑아내고 대가로 보석을 받았다. 류제가 렌에게 보답으로 준 보석도 그중의 일부였다.

“사막의 거룡족이라면 시에스타 말이야? 내 먼 친척인데.”

“친척? 플로냐 너도 거룡족이던가?”

그렇다면 그 거룡족도 저런 모습으로 변해서 진료를 받았으면 되었지 않았을까 싶던 그들이 물었지만 플로냐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린족은 나처럼 소족으로 변할 수 없어.”

“넌 어떻게 둔갑하는 건데?”

렌의 일이 떠오른 류제가 문득 궁금증을 표했다. 그가 호기심을 보이자 가만히 있던 니냐롯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대 설마 플로냐에게 손을 대려―”

“순수한 궁금증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애한테 내가 손을 왜 대!”

하여튼 사람을 쓰레기로 몰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식들 같으니라고. 류제가 질색하자 플로냐도 안도했다. 니냐롯트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더니 다시 책을 읽었다.

“순수 용족이 아니라서 그래. 왕족이니까.”

플로냐가 뒤이어 설명했다. 정왕은 요국에 사는 여러 부족 중 강한 요국인과도 정략결혼을 하기에 오랜 기간 다양한 피가 섞여서 이런 모습도 가능했다.

“그럼 인간 혼혈은 인간으로도 변할 수 있는 건가?”

“몰라. 요국인과 인간의 혼혈이라니 사고방식이 신기하네.”

“인간에게 반한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불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류제가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세니타리 롯 여관 소속 목욕탕 관리인은 레라바시아 온천장의 그 녀석이 맞을 테니 혼혈이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류제 너 때문에 이야기가 딴 데로 새버렸잖아!”

“미안. 계속해, 계속해.”

“그게 아니라… 야! 류제!”

비키가 타박해도 생각에 빠진 류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또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그는 캣닢을 파는 가게를 떠올리며 히죽거렸다.

아무리 봐도 모양새가 수상하다. 동료들은 혼자서만 다른 여관에서 머물고 있는 그가 이상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 불길해졌다.

하지만 곧 류제 신리를 걱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들은 플로냐의 의뢰에 집중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때 멀리서 종이 쳤다. 일몰을 알리는 시간에 묵묵히 생각하던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한데 오늘은 일찍 가봐도 괜찮을까요? 지인과 술을 마시기로 해서.”

“세라 씨가 약속이라니 웬일이래요. 괜찮아요. 류제는 안 돼도 세라 씨 부탁이야.”

“고마워요.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인데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설마, 고백했다던?”

유네가 묻자 세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 파티원들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거… 거절했잖아요. 어색하지 않겠어요?”

“어쩌겠어요. 이놈의 정이 뭔지. 친구로서 이야기는 들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답하기 곤란한 고백을 받았던 세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세라가 어떤 고백을 받고, 그걸 어떻게 거절했는지 들어서 알고 있는 파티원들이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세라가 떠나자 플로냐가 곧바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백이라는 일생일대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플로냐 그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기도 사랑 문제. 세라 씨 친구분이 고백을 했는데 세라 씨가 거절했거든.”

“거절? 왜애? 아까워라.”

기껏 사랑을 받았는데 거절하다니 여간 종족 차이가 심한 게 아니라면 플로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어… 여러모로 복잡한데… 그러니까…….”

“취향이 아니었던 거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꼬아. 고백한 사람이 여자인 데다 세라 씨는 이성애자니까 그렇지.”

“종족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간은 종족보다는 성을 더 따져.”

플로냐는 인간들의 사랑 방식이 시시콜콜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처럼 그들만의 장벽이 있는가도 싶었다.

그러다가도 자신도 그 인간 남자에게 그런 이유로 거절당하면 어쩌나 풀이 죽어서 파티원들이 용기를 불어주느라 진땀을 뺐다.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는 류제도 생각에 잠겼다. 물론 류제 신리도 살면서 거절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어왔다.

그야 생긴 게 이러니 사람들은 그의 내면까지 굳이 들여다볼 수고를 감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다 그렇잖아. 예쁜 포장을 풀어 헤쳐서 굳이 그 알맹이가 쓰레기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런 점에서 보면 이만하면 고양이 쪽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길 만도 한데 이상하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묘한 콤플렉스가 있던 류제는 그만큼 타인에게 무관심하지만 그 고양이만큼은 한시라도 빨리 알맹이까지 벗겨 더듬더듬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 고양이도 겉모습에 관심이 없잖아. 처음 겪은 기묘한 경험이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류제의 사냥 본능을 자극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괴이한 순환의 의문점은 돌연 어느 날 찾아와 렌을 찔렀다. 인간의 나라에 숨어들어 스콜라 맥도어의 여관에서 일을 하게 된 렌이 처음 가진 휴가 날 아침이었을 거다.

아무리 봐도 번듯한 직장 없이 목욕탕에 쳐들어와 방해만 하는 길거리 한량 류제 신리가 요국의 정왕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건지 알아내지도 못하고 복수의 향방은 속절없이 흐려지는데 매일같이 발정 나서 끙끙거리던 렌이 제 역량에 좌절한 참이었던가.

슬슬 낯설던 인계도 익숙해졌고, 쪼들렸던 자본도 넉넉해졌으니 정신 차리고 류제 신리에게 복수를 꾀할 때다. 하지만 가련한 렌 지미는 바보라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일 생각밖에 못 하는 단순한 뇌구조를 가졌다.

안 되겠다 싶어 자신에게 하루 시간을 주기로 한 렌은 류제에게는 비밀로 하고 이른 아침부터 방을 나섰다.

“잠깐 너, 거기 멈춰봐.”

그러던 때 여관 객실 관리인 유리에의 동생이자 그와 같은 목욕탕 관리인이자 마사지법을 배우는 제자 루시에 라탈스키가 돌연 찾아왔다.

방문을 잠그던 렌이 놀라 주춤거렸지만 그녀는 제 할 말만 떠들었다.

“누구를 끌어들이든 그건 네 사생활이니까 상관없는데, 네 옆방이 바로 우리 언니 방이란 걸 좀 명심해!”

알고 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가볍게 가방을 챙겨서 살금살금 남몰래 나가려던 렌은 털이 바싹 선 고양이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함께 일하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루시에와는 사적인 관계가 일절 없었다. 그래서 목욕탕 이야기나 마사지 수업 때가 아니면 대화를 나눌 일이 없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머리가 굳은 렌은 루시에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매일같이 그렇게 해대는 것도 용하다. 그 난봉꾼 자식, 말로만 들었지만 이건 민폐야. 류제 신리 그놈한테도 적당히 하라고 전해!”

화가 단단히 난 루시에가 손가락질하며 경고했다. 류제 신리라고 하니까 렌은 고양이 귀가 쑥 나올 것 같았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그 이름만 들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해댄다고? 아아, 인간들이 친분을 쌓기 위해 술과 함께 시행하는 성관계를 말하는 건가?

“보통 아냐?”

사악한 류제 신리의 계략으로 그전까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렌이 변명을 먼저 했다. 어림도 없다는 듯 루시에는 빠져나갈 구석을 찾는 렌의 행태를 지적했다.

“사람을 무슨 발정 난 짐승인 줄 아나! 좋아 죽는 신혼도 그 정도는 안 하겠다.”

“짐승이라니 무례하긴! 난 이… 인간이야.”

“그럼 좀 절제할 줄 알아야지. 너 혼자서만 여기 사는 것도 아니고. 어제는 손님들까지 항의했단 말이야!”

차갑고 타인에게 간섭하기 싫어하는 루시에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니.

바보 렌도 그녀의 충고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가장 가까운 인간이 류제이니 그를 인간의 본보기로 삼던 렌은 뭔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여관의 이용객들은 인간이다. 같은 인간이 불평할 정도라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에… 그…….”

토마토 주스가 차오르는 것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렌은 기묘한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나왔다.

아뿔싸. 나는 인간이 상시 발정기인 줄 알았는데? 인간도 요국인처럼 발정을 관리할 수 있었던 건가? 그럼 류제 신리 그놈은 뭐야?

이대로 류제에게 말리다가는 어떤 의미로든 큰일 날 거라고 렌의 본능이 경고했다.

어차피 오늘은 꿈에 그리던 휴가. 그 인간이 없는 곳에서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겠다. 나중에 만나면 단단히 따져야겠어. 같은 인간으로서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말이야!

쿵쿵 신경질적으로 걸은 렌은 시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규모가 큰 장이 열리는 날이다. 이런 날에만 문을 열어 신선한 생선 요리를 해주는 가게가 있다고 류제 신리가 추천했다.

어쩐지 류제 신리 때문에 가는 것 같긴 한데 절대 아니다. 그는 단지 맛있는 생선 요리를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기대 안 했는데 인간 주제에 솜씨가 좋구만?”

저금했던 돈으로 따끈따끈한 구이와 회, 양념 등 종류별로 생선 요리를 맛보고 배를 두드린 렌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광경과 시장 상인들이 하는 어수선한 호객 행위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인간 냄새는 익숙해졌는데 역시 막 들러붙는 거친 문화는 무섭다.

낯선 인간들이 무리를 이루자 잔뜩 쫄아 구석진 곳으로 피해 다니던 렌은 골목 안쪽 쓰레기통에 앉아있는 도둑고양이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쪽이 끔벅. 이쪽이 끔벅. 그쪽이 끔벅. 이쪽이 끔벅. 인사를 나눈 그는 고양이에게 시장에서 산 쥐 장난감을 던져주었다.

놀이에 취해버려 고양이처럼 투닥투닥 장난쳐 버린 렌은 순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숨겨놓았던 귀가 뿅 나와버렸다.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방심하다니 그도 아직 멀었다.

“앗, 잠깐만!”

렌처럼 기척을 느꼈던 도둑고양이는 렌이 제 귀를 다시 숨기는 동안 후다닥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동지가 장난감을 물고 사라져버리자 아쉬웠던 렌이 뒤늦게 손을 뻗었다.

감히 묘족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고양이를 쫓아내다니. 누가 날 방해한 거야? 렌이 눈을 세모지게 떴다.

“일찍 오셨네요, 세라 씨.”

“어머, 류제. 약속 시간은 아직 멀었지 않나요?”

류제란 말이 들려오니 열불 나던 렌의 숨이 단번에 죽었다. 이 골목 바깥에 류제 신리가 있는 것인가.

인간들이 섞여있어서 분별하기 힘들었다만 집중해 보니 그가 아는 류제 신리의 냄새가 미묘하게 났다. 평소처럼 혼자는 아니고 어떤 인간 여자와 함께였다.

“집합 시간 전이라서 아무도 없을 줄 알았어요.”

“살 게 있어서요.”

매일같이 목욕탕에만 죽치고 있어서 친구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목소리를 더 듣고 싶지만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골목 밖으로 몰래 고개를 뺀 렌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살피며 살금살금 추적을 개시했다. 목욕탕에서 만나지 않는 류제 신리라니 신선했다.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목적지가 분명해 보이자 렌은 마음이 급해졌다. 휴일에는 꼭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지만 저걸 놓치긴 아까웠다.

류제의 약점을 파헤칠 기회일지도 몰라. 맨날 나만 방해받았는데 두고 보자. 나도 당장 방해할 테다.

렌은 제 특기를 발휘하여 날렵하게 기척을 죽였다. 두 사람이 갑자기 옆을 쳐다보았다. 렌이 근처에 있던 틈에 몸을 던지니 그들은 어떤 가게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감시하기 좋은 곳에 숨은 그가 벽에 손톱을 박았다. 목소리는 잘 안 들리지만 수상한 동태를 살피기에는 딱이다.

“와, 이게 누구야. 류제 아니야?”

“요즘 안 보이더라. 뭐 하고 지내?”

“나야 뭐 평소와 똑같지.”

“평소처럼 난봉꾼이라고? 하하하!”

“진짜로 뭐 하고 지냈어? 너 돌아왔다고 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지금은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줘.”

류제가 한마디 할 때마다 추임새가 대단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동네방네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지나가는 여자 모험가들이 죄다 한 번씩 들러 그에게 아는 척을 해댔으며 이따금 음담패설도 들렸다. 옆에 있던 회색 머리 인간 여자와 특별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뭐지? 알 수가 없군.”

그러고 보니 렌은 류제 신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목욕탕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금 유명하다는 정도?

그런 놈이 요국에 쳐들어와 정왕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갔다는 점, 그것 때문에 렌은 직장을 잃고 인계까지 와야 했다는 점, 우연찮게 또 만나서 그 인간에게 또 말렸다는 것 말고는 하나도 몰랐다.

저 원수 놈이 발정 나서 감히 날 셀 수도 없이 농락했단 말이지.

“역시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은데.”

인간 여자들을 대하는 류제 신리의 가벼운 태도를 보면 인간은 발정 나면 아무나 붙잡고 하는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지만 루시에는 그게 이상한 거라고 말했지. 그럼 류제 신리는 왜 나한테 발정하는 거지? 저런 예쁘고 건강한 인간 여자들이 유혹하는데.

“세라 밀로니!”

어리둥절해질 찰나 어떤 남자가 류제 신리의 테이블로 접근했다. 긴 회색 머리 인간 여자가 기겁했다.

그 남자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목소리가 오갔다. 무덤덤하게 있던 류제도 놀라 주춤했다. 과연 저 인간 남자는 누구일까 렌은 호기심이 일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처럼 엉덩이를 쭉 내뺀 렌을 어떤 후드 쓴 여인이 후미진 골목으로 이동하다 말고 지켜보았다.

그녀는 별일이라며 얌전히 지나가려고 했다. 그때 인계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냄새를 맡은 렌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이 냄새는…….”

어떤 여인이 지나가자 후드 속 바닥을 슬슬 쓰는 꼬리도 따라 흔들거렸다. 온몸에 소름이 우스스 돋은 렌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붙잡았다.

요국인이다. 인계에 숨어든 요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저 린족의 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렌은 당장 단 한 사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정왕 나으리! 나으리가 아니십니까요!”

단번에 정체를 간파당하자 플로냐가 삐거덕거렸다. 요국의 왕답게 인간으로 둔갑한 단모 소묘족을 알아본 그녀가 박수를 쳤다. 모르는 척 지나가려고 했는데 들키고 말았다.

“어머, 사랑하는 나의 백성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나으리야말로 여… 여기서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요? 행방불명 되셔서 지금 요국이 난리입니다요! 인간들한테 당했던 거 아니었습니까요?”

“뭐? 당해? 이상하다. 비서실 마가릿 양에게 편지를 발표해 달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없었어?”

비서실의 마가릿 양은 지하실에 처박혀 정왕을 완벽하게 인간으로 둔갑시킬 연구를 한다고 위의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난리가 날 일이 없었겠죠! 어서 요국으로 돌아갑시다요! 인계는 위험하단 말입니다요!”

“싫어. 내 사랑을 쟁취하기 전까지는 절대 못 돌아가.”

지금 요국에 무슨 난리가 났는데 정왕은 태평한 말이나 늘어놓았다. 렌은 울상이 되었다.

인간에게 당한 줄 알았던 정왕이 무사해서 다행이긴 한데 그 이유가 너무 하찮지 않은가. 사랑을 쟁취하러 인계에 왔다는 건 설마 그 대상이 인간이라는 말인가?

“너야말로 소묘족이 왜 인간 마을에 있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둔갑했어?”

“아… 아니 사정이 좀… 혼혈이라서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요만.”

정왕이 한 짓 때문에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망해서 쫓겨났다고는 저 순수한 눈동자를 향해 말하지 못한 렌이 끄아악 비명을 질렀다.

“나으리야말로 그런 모습을 들키면 어쩌시려고 그러는 겁니까요. 인간은 무서운 놈들입니다요. 큰일 납니다요.”

“괜찮아. 친구들이 날 도와주고 있거든.”

“친구들 말입니까요? 요국인이 있다니 몰랐습니다요.”

“아니, 저 인간들 말이야. 저기 저 테이블에 있는 모험가.”

플로냐가 가리킨 무리는 붉은 포니테일과 푸른색 짧은 머리를 가진 여자가 합류한 류제의 테이블이었다. 보아하니 분명 요국에 쳐들어왔다던 그 인간 무리일 것이다. 렌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팍팍 쳐댔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인간들은 정왕의 의뢰를 받아서 요국에 온 것이고, 지금도 정왕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건가.

“제기랄!”

그럼 도대체 뭘 위한 복수란 말인가. 결국 정강이를 차야 할 나쁜 자식들이 없잖아! 렌이 눈가를 실룩거리다 류제 신리의 파렴치한 짓거리를 떠올렸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저 검은 머리 인간 남자가 손을 대지는 않던갑쇼? 저놈은 겁나 위험한 놈입니다요! 믿으면 안 되지 말입니다요!”

“류제랑 아는 사이야? 역시 어딜 가도 유명 인사네. 매사 무관심하긴 해도 성실하고 좋은 애지. 물론 사생활이 더럽긴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냐. 난 의뢰만 완수해 주면 되니까.”

하하하, 웃는 플로냐의 말에 렌은 비수가 꽂혔다. 사생활이 더럽다. 그가 바로 그 더러운 사생활에 얽혀있는 불쌍한 피해자였다.

나도 낚인 거였어.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 일단 명분은 채운 렌이 플로냐에게 제발 류제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해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너도 사정이 깊은가 보구나. 걱정 마. 나는 우리 요국의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불안했지만 렌은 플로냐를 조용히 떠나보냈다. 플로냐가 인간들에게로 향하니 물가에 애를 보내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용케 인간들 사이에서 요국인임을 숨긴 플로냐는 류제네 파티와 만나서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왕은 정말로 저 인간들과 친한 사이인지 협박이나 힘으로 찍어 누르는 불합리한 수단도 없었다. 인간은 무서운 자들이라고 발표했던 정왕이 인간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다. 렌은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요컨대 요국에 쳐들어왔던 인간들은 정왕을 해하려는 게 아니라 정왕을 위해서 온 거였고, 요국인들은 그런 인간이 무서워서 지레 겁을 먹은 거라는 말이다.

비서실의 마가릿 양이라는 양반은 그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뭐 하고 있었대? 이 천하 태평한 요국인들 같으니라고!

어느새 류제 신리가 있던 테이블엔 총 다섯 명의 인간과 플로냐가 둘러앉았다.

약속했던 인원이 모두 모이자 주변 인간들이 수군거렸다. S급 길드 ‘기간트리카’ 소속 류제 신리 스탠더드 파티라는 단어가 렌의 귓가에도 닿았다.

“의뢰 회의 중인가 보네. 이번엔 마을에 오래 머무는 것 같지 않아?”

“이번에 복귀하고 류제 신리의 옆구리에 여자가 한 번도 안 꼈대.”

“그게 가능해? 하도 해대서 질렸나.”

“그놈만 질리면 뭐 해. 그러든가 말든가 주변에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

오늘 장이 크게 열리는 날이라 모험가들도 주변에 많아서인지 그런 정보들이 렌의 귀에 쏙쏙 박혔다.

귀족 영애, 뒷골목 큰손의 딸, 교회의 고위 신관, 일국의 공주를 닮은 마법사부터 그녀들을 이끄는 바지 사장 류제 신리. 그중에 류제 신리에 관한 소문이 가장 말이 많았다.

잘생긴 데다 제 파티원들에겐 손끝 하나 안 대면서 다른 여자 모험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난봉꾼 류제 신리의 행실은 욕먹을 만했다.

하지만 실력이 특출해서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할지언정 함께 몬스터 사냥 의뢰를 맡으면 무릎을 꿇고 형님 형님 하게 된다는 일설도 있었다.

“잘생기고, 강하고, 돈 많고, 친절하고, 간섭 안 하고. 모험가로서는 최고의 파트너지만 누구와도 안 사귄단 말이야.”

“특정 상대를 만들면 인기가 줄어서 그런 거 아냐?”

딱히 알고 싶지 않은 남의 잘난 척을 듣는 것 같아 들을수록 짜증 났다.

“율폰!”

회색 머리 인간 여자가 인간 남자를 내쫓은 이후로 또 다른 인간 남자가 그 테이블에 접근했다. 이번엔 붉은 머리 인간 여자가 반갑게 일어났다.

그 남자는 새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가 이질적인 요국인 같은 인간이었다. 저 파티원이라는 자들에겐 다 제 짝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놓였다.

아니, 왜 내가 마음이 놓여? 나랑 상관없지 않나? 차라리 골고루 손대는 게 나한테는 기분이 덜 나쁘지. 그럼 나만 저 외모에 농락당한 게 아니니까!

“비키. 의뢰 중이니?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 무슨. 오빠도 의뢰 중이야? 몸은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는 돼. 이제 끝나서 길드로 돌아가려고. 내가 방해한 것 같네. 나중에 보자.”

“아, 방해 아닌데. 잠깐, 율폰!”

비키가 아쉬워하며 손을 뻗었다. 매사 쏘아 붙는 말투인 비키의 목소리가 착해지자 류제가 겉과 속이 다른 내숭쟁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러다 무투가의 펀치로 턱주가리를 얻어맞았다.

비키의 짝사랑 상대이자 같은 길드 소속의 불마법사인 율폰은 몸이 건강하지 못해 의뢰를 잘 받지 않았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비키는 류제와 절대로 파티를 이루지 않았을 것이다.

니냐롯트를 데리고 당장에 율폰의 파티로 옮겼겠지. 비키는 류제를 철천지원수처럼 흘기며 이를 갈았다.

“그 자식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에요!”

오늘은 회의를 할 기분이 아닌 세라는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멘탈이 나갔다. 플로냐가 오히려 세라를 위로해 주었다.

“요국에서도 그건 정상이 아니에요. 친구분에게 상담을 해보는 게 낫지 않아요?”

“그래야겠어요.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돼.”

“세라 씨… 힘내세요.”

누구는 우울해하고, 누구는 주먹을 휘두르고, 누구는 턱을 괸 채 딴생각만 하는 정말 정신 사나운 무리들이다. 저 무례한 자식들이 정왕님께 과연 도움이 되는 걸까?

소중한 휴일에 온종일 그들을 들여다봤던 렌은 안타깝게도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했다. 그 이후에 류제 신리에게 앙심을 품은 어떤 인간 여자가 그를 덮쳐 약간의 소란이 일었던 게 마지막이다.

온갖 마법이 난자하고 우는 목소리가 그를 원망하는 가운데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파티원은 남 일처럼 내버려 뒀다.

그래서 도대체 그 인간들은 하루 종일 뭘 했던 거지? 시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밖에 더 돼?

하여튼 류제 신리, 이 앞길을 방해하는 사악한 인간 자식. 정왕님의 의뢰는 제대로 해치울 생각도 없고 내 휴가도 엉망으로 만드는구나.

“레― 거기 관리인 씨?”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진이 빠져 터덜터덜 돌아오던 렌은 여관 바로 앞에서 류제와 다시 마주치고 뒤로 물러섰다. 양반은 못 된다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게 염탐한 것이 들킨 게 아닐까 찔렸다.

“돌아오는 길이야? 휴가였다며? 어땠어?”

“아… 뭐. 네가 알 바는 아니잖아.”

물론 하루 종일 저놈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약점은커녕 류제 신리는 한 서린 습격을 유유히 막아내고 그 인간 여자를 잘 달래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약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소득도 없었으니 짜증 나게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 렌은 뒤에 있는 인간 여자가 더 신경 쓰였다. 오늘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회색 머리 인간 여자가 류제와 함께 있었다. 렌이 힐끗거리자 류제가 친절하게 서로 소개해 주었다.

“우리 파티의 힐러분.”

“이곳에서 일하는 유리에의 친구예요.”

직접 본 회색 머리 여자는 꿍꿍이속 다분해 보이는 류제 신리와는 다르게 순수한 미소가 돋보이는 뭔가… 섹시한 사람이었다.

목욕탕을 이용하려 그러나? 아니면 하반신 가벼운 류제 신리가 꼬신 건가? 고민할 새도 없이 여관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세라!”

렌은 아침 생각이 나서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소리가 저 사람한테 죄다 들렸다고?

제가 저지른 죄도 모르고 류제는 유리에를 넋을 잃고 쳐다보는 렌을 못마땅하게 흘겼다.

“유리에, 어쩌면 좋아.”

유리에에게 달려간 세라가 어쩔 줄 몰라 그녀를 껴안았다. 저 인간 여자가 나긋나긋한 객실 관리인 인간과 아는 사이였다니 의외지만 일단 알은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네네 슈만 그 망할 자식이…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진정해, 세라. 무슨 일인데 그래?”

영문을 모르는 유리에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반가운 한편 슬픈 일로 눈물 지새우기 바라지 않았다.

창문 밖에서 고개를 내민 루시에도 세라가 반가워서 꿈지럭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인사하고 싶지만 분위기를 보고 좀처럼 나서지 못하는 듯했다.

그 시선을 느낀 렌이 루시에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에는 휙 몸을 돌려 숨어버렸다. 오늘 아침에 들은 루시에의 잔소리가 귀에 선한 렌은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궈졌다. 이게 다 저 망할 류제 신리 때문이다.

“네네가 왜? 조금 딱딱하긴 해도 이상한 짓을 할 애는 아닌데.”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이던데요.”

네네 슈만과 세라의 전말을 들어서 아는 류제도 한숨을 내쉬었다. 매사 덤덤한 류제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심각했다.

어리둥절한 유리에는 FM에 단체의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이곤 하는 네네 슈만이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 있을까도 상상이 안 갔다.

“그… 그럼 이제 나는 가도 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자리가 불편했던 렌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있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류제는 팔을 올가미처럼 내둘러 렌의 어깨에 둘렀다. 저 인간 여자 둘은 그걸 바라지 않을지도 몰랐다. 렌이 눈치껏 작게 쏘아붙였다.

“내가 왜! 나는 이 사람하고 하나도 관계없고 그 네네라는 사람도 몰라.”

“하지만 유리에 씨는 알잖아?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지. 그게 인간의 도리고.”

음소거로 버둥거리던 렌은 석상처럼 꿈쩍도 안 하는 류제의 팔에 굴복하고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류제 신리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인간들은 더 부담스러워서 싫은데 왜 날 귀찮게 구는 걸까.

그의 사정 따위 생각하지 않는 류제 신리는 이런 마음을 모를 것이다. 매번 이 자식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저 인간 여자도 인간 여자야. 난 새빨간 남이라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거야? 어서 눈치껏 날 쫓아내란 말이지!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래, 세라. 이쪽으로 와.”

류제의 제안에 유리에는 우는 세라를 여관 안으로 안내했다. 자기들 사정에 빠져 렌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렌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었다.

계단을 오르는 그들을 루시에가 구석에서 날 서게 노려보았다. 우연찮게 루시에를 본 렌이 삐죽삐죽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저런데 오늘 또 류제 신리를 방에 끌어들였다가는 용서 못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휴, 내 팔자야. 나를 위한 휴가 따위는 없구나. 복수의 계획은커녕 목표조차 애매해졌다. 정왕님도 무사하지, 류제 신리에게 농락당했다는 것만 빼면 외국인 노동자로서 이 안일한 상황이 나쁘지도 않고 말이지.

“그래서 네네가 어쨌다는 거야?”

인간들의 사정에 관심 없었지만 렌은 어쩐지 그들의 사정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여관에 있는 테라스, 손님들이 쓰는 라운지에 둘러앉은 그들은 이제야 울음이 잦은 세라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남자가 됐다고?”

그들은 사정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다. 며칠 전 플로냐 일을 논의하다 말고 선약 때문에 일찍 이탈했던 세라는 네네 슈만과 어울려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네네 슈만의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을 받고 찼던 세라는 어색해질 뻔한 상대가 하도 당당하게 굴어서 요국에 가있는 동안 극복한 줄만 알았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몇 번이고 묻더라고. 자기가 여자라서 그런 거냐며, 남자면 달랐을 거냐면서. 그래서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을까?’라고 답했던 것 같아. 나도 술에 취해서.”

펑펑 울며 자신을 탓하는 세라는 자기 잘못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

사건의 이랬다. 세라가 플로냐의 의뢰를 받기 전의 일이었다. 니냐롯트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는 세라는 임무 중에 문득 심심했다.

당장은 길드를 떠날 수 없는데 또래 친구가 그리웠던 세라는 유리에를 통해 어떤 모험가를 소개받았다.

그렇게 알게 된 네네 슈만과는 한 1년 정도 잘 어울려 지냈다. 그녀도 모험가라서 나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 이따금 네네 슈만과 우연히 마주치면 반가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이 없으면 의뢰도 함께 맡고 같이 술을 한잔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라는 까탈스럽고 잔소리가 심한 데다 자기중심적인 네네 슈만과는 딱 이 거리감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이 거리감을 무시하고 간섭하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시어머니라도 된 것처럼 복장을 보고 너무 짧다는 둥, 신관이 몸매를 왜 드러내느냐는 둥 다가오는 남자들을 자기가 퇴짜 놓고 다니더니 요국으로 떠나기 전 세라에게 고백을 했다.

세라에게 있어서 네네 슈만이라는 인간은 표현이 서툰 모험가 친구에 불과했다. 융통성이 없는 네네 슈만에게 트러블이 일어날 때 도와주기는 했어도 친구끼리, 그것도 동성끼리 반해서 고백할 줄은 몰랐다.

세라에게 동성은 연애 가능 범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으로는 좋아도 연애는 무리였다. 남자 모험가에게 대시를 많이 받아본 세라는 사람 좋게 거절하는 법도 알았다.

“난… 그… 남자가 좋거든. 네가 싫다는 건 아냐. 네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특히나 그 네네 슈만이 자신을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반대로 실은 안 좋아하는 건가 싶던 적이 많았다.

그래도 네네 슈만을 놓을 수 없던 이유는 모험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의뢰를 하니 가끔 만나서 이야기할 친구가 귀했고, 네네 슈만이 그와 어울렸기 때문이다.

거절당한 충격으로 네네 슈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중에 다시 만나서 마음이 정리되면 제대로 설명을 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요국으로 떠난 후 다시 돌아와 네네와 만났을 때 그녀가 술에 취해 물었다.

“그럼 내가 남자였다면, 내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줬다는 말이야?”

“어… 뭐, 그러지 않았을까.”

그 말을 진지하게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런 말을 했다고 남자가 되었다니 그게 말이 되나! 그녀는 단지 네네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로 자기 성 정체성을 버리다니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아니지. 내가 너무 말을 쉽게 해버려서 그래.

“흐윽, 어쩌지? 정말 어떻게 해?”

“그 애는 좀 극단적이긴 해. 무서웠지, 세라. 내가 다 미안해.”

“유리에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훌쩍.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네네 슈만이라는 별종은 그 정신세계가 어떻게 되먹은 건지, 성별이란 것을 바꾸고 싶다고 홀라당 바꿀 수 있는 건지도 이해가 안 갔다.

“네네 성격 알잖아. 그 애가 홧김에 그랬을 리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그걸 가볍게 바꿀 수 있는 거야? 그래 봤자 나는 그 애한테 죄책감밖에 못 느낀다고!”

“아니면 뭐, 원래 정체성이 남자였을 수도 있죠. 겸사겸사 바꾼 거고.”

“남성을 동경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애초부터 그런 정체성이었다면 진작 수를 써서 바꾸었겠지. 세라에게 차이고 나서 바뀔 건 뭔가. 유리에는 하여튼 정신 나간 소꿉친구의 정신 나간 짓거리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렌, 네 생각은 어때?”

“뭐, 나?”

종족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남자끼리 즐기는 사이이니 동성에게 고백받은 세라를 보여준 건 류제의 의도대로였다.

하지만 저 바보 고양이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멍청한 얼굴로 주전부리를 씹어댔다. 저 일화를 듣고 느끼는 바가 없나? 도통 모르겠네.

“다 같은 인간 아닙니까. 같은 종족이면 상관없지 않습니까요? 수커… 남자라면서요.”

“그럴 수는 없죠. 몰랐으면 몰라도 저는 그가 여자였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몰랐으면 상관없었다는 말인갑쇼?”

렌이 태평하게 정곡을 찔렀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유리에를 통해 저자가 이 여관에서 운영하는 목욕탕 관리인임을 소개받은 세라는 플로냐처럼 말하는 렌이 당황스러웠다.

요즘엔 그런 게 유행인가? 실은 시대에 뒤떨어진 건 세라 그녀란 말인가?

“그럼 세라 언니는 네네 그 인간이 언니 때문에 그런 길을 선택한 게 걱정이라는 말이야?”

“아무래도… 부담스럽잖아요. 네네는 좋은 친구지만.”

“그럼 이 기회에 이성으로서 봐봐. 영 아니면 시원하게 차버리면 되지. 그래 보여도 자기 길은 자기가 알아서 개척하는 양반이니까 알아서 잘 살 거야. 언니도 알잖아.”

어느새 끼어든 루시에가 주전부리를 씹어 먹으며 투덜거렸다. 극과 극이 맞지 않듯 루시에는 괴팍한 성질머리인 네네와 사이가 나빴다.

시니컬한 루시에는 세라를 몹시 따랐기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세라가 네네 슈만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 뻥 차주기를 바랐다.

“네네에게 실례잖아요.”

“세라 언니도 가만 보면 융통성이 없다니까. 네네 언니는 진심이니 그렇게 하는 게 더 실례가 아닌 거지. 차라리 그런 편이 네네 언니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을걸. 동성이든 이성이든 세라 언니한테는 연애 감정이 안 들었다고 증명한 거니까.”

“하지만…….”

“고백을 받은 이상 친구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게 더 상대한테 실례야.”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서로 대하는 감정이 다른데 세라 그녀만 마음 편하자고 친구로 돌아가는 것도 이기적이었다. 네네 슈만은 용기를 내서 마음을 부딪쳤으니 세라도 도망치지 말고 결론을 내어야 했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난봉꾼한테 그런 말 듣기 싫어.”

류제가 빈정거리자 루시에가 눈을 부라리며 적개심을 담았다. 유리에와 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렌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기묘한 흐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는 생각 못 하는 오만한 류제 신리는 안중에 없던 유리에가 방해꾼이 될 줄은 몰랐다.

인간을 싫어하는 고양이를 어떻게 꾀어낸 거지. 선물도 사주고, 기분 좋은 잠자리를 제공한 것도, 열심히 들이대 준 것도 바로 그다. 요국인은 성별은 신경 안 쓴다며? 종족도 다르지 않아?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해가 지자 여관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핑계를 대서 간신히 그 말도 안 되는 모임에서 빠져나온 렌은 관리인실로 돌아가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노려보았다.

망할 류제 신리가 보란 듯이 따라 들어왔다. 오늘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렌은 류제와 문 앞에서 한참을 씨름했다.

“아 진짜 왜 들어오냐고!”

“손님한테 반말해도 돼?”

“오늘은 일하는 날 아니거든? 매일 말 같지도 않은 변명하면서 내 방에 들어오려 하고. 발정 났으면 다른 사람 알아봐!”

오늘 루시에가 말한 ‘신혼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발정 난 짐승도 아니고’ 이 두 문장이 머리에 맴도는 렌은 염치가 있어서라도 기필코 류제의 유혹을 사절했다. 그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거참 너무하네. 넌 내가 다른 사람이랑 해도 좋아?”

“나랑 무슨 상관이야 진짜! 내가 오늘 너 때문에 작은 라탈스키 씨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아?”

“그럼 이거라도 받아줘. 오늘 시장에서 산 건데―”

그건 렌이 오늘 샀다가 고양이에게 빼앗겼던 쥐 모양 장난감과 똑같았다. 렌은 열이 뻗쳤다. 완전 그를 고양이로 보는 게 아닌가. 의심은 풀리긴 개뿔이 처음과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너같이 줏대 없고 가벼운 인간은 진짜 싫어!”

렌은 어림도 없다며 류제를 내쫓고 문을 쾅 닫고 잠갔다. 오늘만큼은 문짝을 지켜냈다. 렌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설마 야만스러운 인간이 문을 억지로 잡아 뜯는 건 아니지? 덤벼들던 인간을 제압하던 류제 신리가 떠오른 렌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러나 류제 신리는 오늘따라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밖에 고여 있던 류제의 냄새는 한참 후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류제는 교활한 인간이었기에 저것도 다 그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고 어차피 다시 올 거라고 생각했던 렌은 빈 복도를 사이에 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로 갔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빼꼼 문을 연 렌이 밖을 확인했다. 한번 쫓아낸 거 가지고 포기할 줄은 몰랐다. 나중에 또 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로 밤늦게까지 류제가 오지 않자 렌은 류제가 진짜 다른 사람이랑 발정 난 건가 전전긍긍했다. 왜 뜬눈으로 천장 무늬를 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안 쓰여. 안 쓰인다고!

생각해 봐. 류제 신리는 가벼운 하반신으로 날 농락했을 뿐이잖아. 인간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이 그냥 이상한 거고. 평범한 요국인의 감각으로 돌아가 보자, 렌 지미.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요국인인지 뭔지 시험한다고 내 엉덩이 구멍을 파헤친 건 놀리는 거야!

솔직히 오늘 보니까 더 그래. 인간 같은 건 잘 모르겠어! 난 인간이랑 결혼한 우리 아빠 마음을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하지만 또 사람이 간사한 게, 축 처졌던 류제의 뒷모습이 조금 마음이 쓰였다.

결국 그때 정왕님한테 해를 끼치러 간 게 아니라 의뢰를 들어주러 가는 거라는 말도 사실이었다. 레라바시아에 대해서도 말 안 했고, 그와의 약속은 제대로 지켰다.

레라바시아에서 들었던 인간의 소문들은 거의 다 헛소문이었잖아. 요국에 쳐들어온 인간 무리는 딱히 잘못이 없는데 괜히 쫄아서 날 내쫓기나 하고.

그건 내가 혼혈인 데다 재정도 안 좋으니 겸사겸사 쫓아냈던 거 아닐까?

아,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외롭다. 날 위해서 골랐을 텐데 선물은 받아줄 걸 그랬나. 그래도 이 인간 나라에서 유일하게 아는 인간이었는데. 괜히 쫓아낸 걸지도 몰라.

그런 영문 모를 마음을 품은 렌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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