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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2) (89/112)

AU 외전. 용사와 고양이 (2)

나이를 먹다 보면 안 하던 경험을 하는 자체만으로도 신선함은 개뿔이! 스트레스만 듬뿍 받는다. 그것이 당장 전날 잠들기 전에 일어난 일일지언정 꿈에 나올 강렬한 인상이 렌을 괴롭혔다.

난생처음 인간을 본 데다 협박까지 당하고 첫 키스를 빼앗기고 그 손에 발정하고 엉덩이까지 뚫려 가버리다니. 악몽을 꾸지 않을 이유를 고르기 힘들었다.

“후악!”

지독한 쾌감의 단편적 감정을 느끼고 눈을 뜬 렌은 묵직하게 누르는 무언가에 가위라도 눌린 양 낑낑거렸다.

처박힌 코끝에서 레라바시아 온천장 손님에게 제공하는 부들부들한 목욕 가운의 냄새와 어색하고 기묘한 인간 냄새가 어우러졌다.

무겁다. 망할 인간이 자면서까지 사람 귀찮게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아직 밖이 덜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아침 근무 시간은 아닌 듯한데 해는 벌써 창밖에서 들어와 은은하게 방을 밝혔다.

최대한 늦잠을 자는 게 그의 철칙이지만 인간과 함께 쿨쿨 잠들고 싶을 만큼 지키고 싶은 철칙은 아니었다.

잠든 인간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끙차끙차 몸을 비틀던 렌은 고양이 특유의 유연함으로 틈바구니를 찾았다.

간신히 발 하나만 빼면 되려는 그때 노력이 무색하게 인간의 팔이 그를 꼭 껴안고 품으로 이끌었다.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려고?”

“으갹!”

이상한 비명을 질러버린 렌은 분명 눈을 감고 있던 인간이 은근슬쩍 푸른 눈동자를 드러내자 어제 있었던 일이 절로 떠올랐다.

저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얼굴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뤘더랬지. 깰까 봐 조심할 필요가 없어진 렌이 절벽을 기어가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

“야만인에게 붙잡혔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내 탓이야? 8할은 네 탓이었어.”

“됐으니까 이거 놔 좀!”

아무리 사고였다지만 교미를 나눈 적이 처음이었던 렌은 하물며 어색한 인간과 필로우 토크조차 부끄러웠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자면서 꿈지럭거리던 렌의 모습이 아쉬웠던 류제는 조금 더 이 충만한 기분을 즐기고 싶었다.

“나도 사람 살결이 그리웠나 봐. 의외로.”

렌을 더듬은 류제가 킁킁 고양이 냄새를 맡았다. 깜박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푹 잠든 게 몇 개월 만이더라.

정력제로 기운을 죄다 빼내버린 탓도 있겠지만 그 전에 뜨거운 탕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어내고 마사지로 굳은 근육을 풀어낸 시너지로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겔박의 늪에 빠져 자포자기 반신반의로 들어온 곳이지만 이 앙칼진 고양이 덕분에 최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알면 부러워하겠지.

뭐, 그동안 좋은 잠자리는 죄다 그 녀석들이 차지한 데다 늪에 빠져서 피부병까지 생겼던 나한테 이 정도는 양보해야지 않겠어?

“이거 놔. 놓으라고!”

“거참, 무드도 없는 고양이네. 몸의 대화도 나눈 사이인데 매정한 소리 하지 마.”

“이익!”

류제가 귀에 후 바람을 불어 넣으니 고양이의 꼬리가 파스스 떨려왔다.

미약에 정신이 나가서 험하게 다루긴 했지만 반응 좋고 귀여운 사람과 한 건 충분히 좋은 경험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요물에게 당한 것처럼 정액이 뿌리에서 뽑혀 나간 느낌?

“그게 아니라 체크아웃 시간까지 아직 서비스가 남았단 말이야! 어제도 그렇고 인간 주제에 내 풀코스 서비스를 방해하지 마!”

렌이 돌덩이 같은 류제를 드디어 밀어냈다. 게다가 어젯밤 일로 인간의 냄새가 잔뜩 묻어서 이대로 가다간 조식을 받을 때 인간과 교미를 했다는 걸 들키게 될 것이다. 받게 될 손가락질에 피해를 입는 사람은 렌도 마찬가지였다.

“아하하, 귀엽기는.”

이런 상황에서도 돈 뜯어먹겠다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고양이가 퍽 웃기다.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류제는 고양이가 후다닥 탕으로 달려나가자 어제 성교할 때 쓴 기름이 오늘 아침을 위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도망이 목적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서비스가 남은 모양이다.

“하여튼 냄새 없애야 하니까 빨리 와, 이 게으름뱅이 인간아.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뭐야. 하아, 이불 빨래는 언제 한담.”

“예, 예.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렇게 냄새가 나나?”

싱글벙글 기분 좋은 티를 내는 류제가 얌전히 말을 들었다. 저 고양이는 요국인 특유의 단순함을 넘어 바보인 것 같지만 그런 아둔함이 싫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인간 냄새를 가려야 해. 올 때는 겔박 늪의 냄새에 가려졌겠지만 나갈 때는 어림도 없어.”

레라바시아 온천장의 객실 관리인이라면 마땅히 손님에게 해야 할 서비스의 일종으로 류제의 가운을 벗겨주던 렌은 체액이 묻은 자신의 작업복과 함께 빨려다가 류제의 등에 난 손톱자국에 놀라 자지러졌다.

“언제 또 다친 거냐? 잠자리가 불편했던 거냐?”

“응? 뭐가.”

살벌한 손톱자국에 질겁한 렌 대신 류제가 거울로 등을 확인했다. 척추를 기점으로 산 모양으로 갈라진 손톱자국이 보였다.

정신이 나가서 고양이의 앙칼진 할큄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류제는 자기가 내놓은 손톱자국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양이가 우스웠다.

“그러게. 여기는 우리 둘뿐이고, 내 손으론 여기까지 안 닿는데, 귀신이라도 다녀갔나 봐.”

귀신이라는 말에 흠칫하는 렌의 뾰족한 손톱을 만지작거린 류제가 손톱에 작게 입 맞추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난 아냐. 귀신이 와서 한 거야!”

“그래, 귀신이 손톱 관리를 잘하는 모양이네.”

호탕하게 웃으며 목욕탕에 들어간 류제는 이럴 줄 알았으면 고양이가 물어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던 손도 치료하지 말걸 그랬나 하고 매끈해진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가벼운 상처는 추억의 일환이지만 과정이 싫어서 치료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요국에서 좋은 기념이지.”

“웃기지 마.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귀신이 낸 거야!”

갑옷 청소용 수세미를 류제에게 들이민 렌은 으르렁거리며 인간을 경계했다.

“그런 걸로 내 첫 키스를 빼앗겼다고 인정할까 봐? 인간 따위에게?!”

“언젠간 해야 할 거면 지금으로 해. 인정 안 하면 언제쯤 첫 키스를 하게? 한 10년 후에? 아니면 20년? 그 나이에 인간에게라도 빼앗긴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지 않아? 고양아.”

류제의 갑옷에 붙어있던 겔박 늪의 찌꺼기를 마저 떼어내려던 렌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류제를 노려보았다. 그런 렌에게 류제가 쐐기를 박았다.

“이래 봬도 나 인기 많아. 지금은 따로 만나는 사람 없지만.”

“그래 봤자 인간이잖아!”

“뭐 어때. 정왕도―”

렌의 바보 같음에 방심한 나머지 의뢰 내용까지 발설할 뻔한 류제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 일에 벅찬 바보인 렌은 그것보다는 류제가 자신을 놀린 것이 더 짜증 났다.

“아무튼 이건 사고야. 아무 일도 없었어. 누설했다가는 너 죽고 나 죽는 줄 알아. 레라바시아 온천장에 인간이 왔다고 차라리 밝히고 말지!”

“야박하긴. 자기도 기분 좋았으면서.”

가문은 보잘것없어도 잘생긴 외모에 출중한 실력을 가진 데다 백전불패 의뢰 달성률 100퍼센트 S급 길드 소속인 류제 신리를 마다하다니 충격이다.

긴 여정으로 새까만 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그렇지 이 잘난 외모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악우 동료인 비키 셀로니아에게서도 ‘넌 정말 외관만 빼면 쓰레기인데.’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니 이 내가 첫 키스를 빼앗아준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정도로 싫어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요국인에게도 먹히는 외모인 줄 알았는데. 취향 괴팍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그가 싸한 박하향이 나는 약탕에서 인간의 냄새를 빼는 동안 렌은 류제의 갑옷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새까맣던 갑옷이 번쩍번쩍 빛이 나게 기름칠을 해준 렌은 이런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잠시 절망했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지만 엉덩이 구멍이나 바치고. 갑옷을 닦아주는 건 옵션이었다지만 돈 준다니 좋다고 열심히 할 건 뭐야.

“이봐. 다 끝났어? 언제까지 혼자 탕에 있어야 해? 시중 안 들어줘?”

“시끄러! 난 지금 요국인으로서 고뇌하는 중이야!”

“거참 서로 협조하기로 한 거 왜 이러실까.”

약탕에서 나온 류제가 렌을 질질 끌고 욕탕에 집어넣었다. 고양이라 물은 쥐약이었던 렌은 귀에 물이 들어갈세라 버둥거리다가 류제의 몸에 엉겨 붙었다.

“싫다면서 은근히 밝히네.”

“아니, 이건 그냥 본능이―”

렌의 억울한 마음을 알 바 없는 류제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렌을 뒤에서 꼭 껴안았다. 유연한 묘족과는 다른 단단한 인간의 몸이 어색하다.

가슴팍에 쿡 볼이 비벼진 렌은 인간의 심장에서 들리는 두근거리는 소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국인은 선천적으로 몸이 뜨거운 거야?”

“뭐래.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고. 인간이 차가운 거야!”

겉보기에 어른스러운 저 인간은 어리광이 많아서 몸을 더듬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렌은 혼혈이라 냄새에 민감한 요국인은 가까이 안 가려고 해서 밀접한 접촉은 가족 말고는 기억에 없다.

더군다나 손님이 관리인을 껴안는다니 믿을 수 없다. 그는 동물도 아니고, 인간은 싫지만 옛날 먼 기억 때처럼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살랑살랑 쓰다듬으니 마음이 놓였다.

냄새에 둔한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거겠지. 나도 문제야. 이런 것까지 허락하게 두면 안 되는데. 인간은 모르겠지만 요국인에게 있어 머리를 쓰다듬는 건 사랑을 과시하는 행위이니 배덕감이 든다.

“저리 비켜!”

그런 싱숭생숭한 마음도 잠시, 조식이 도착했다는 노크 소리에 놀란 렌이 후다닥 약탕을 빠져나갔다.

류제는 아쉬워했지만 모른 척한 렌은 객실마다 구비해 놓은 예비 작업복으로 환복했다. 인간 냄새가 나나 킁킁거리며 확인한 렌은 거슬리는 침대를 흘겼다.

이불도 아직 어제의 흔적이 낭자한 채다. 최대한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 조식을 받은 렌이 어색하게 동료와 인사했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와 문을 닫고 테이블에 조식을 올려둔 그는 괘씸한 류제에게 바득거렸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곧 체크아웃 시간이니까 서두르란 말이야, 인간 주제에!”

“거참, 부끄러웠다가 화냈다가 바쁜 녀석이네.”

“난 부끄러워한 적 없어!”

식식거리는 렌은 엄마처럼 잔소리하며 류제의 시중을 들었다.

아침으로 가볍게 나오는 커피와 소시지, 콩 요리와 토스트, 계란 등의 따뜻한 음식이 류제는 마음에 들었다. 어제는 경계하느라 조류 요리를 거의 먹지 못했지. 그것도 맛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있지 말고 발 들어. 바쁘다고 했잖아!”

“그거 또 정력제는 아니지?”

“평범한 거야. 라벤더 향! 내가 두 번 당할 줄 알아?”

하필이면 식사하는 와중에 오일을 바르는지. 서비스도 참 제멋대로다. 욕탕에 끌고 들어오는 둥 다른 마음을 못 품도록 하고 싶은 거겠지.

모험가의 특기를 살린 류제는 순식간에 그 많은 양의 아침밥을 해치웠다. 사라지는 순간이 마법 같아서 렌은 인간에게 식사 주머니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렌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은 류제는 이후 깔끔하게 수염도 깎고 이도 닦았다.

“자, 팔 벌려.”

준비를 마친 렌은 인간 냄새를 강한 향이 나는 기름으로 지운 갑옷을 류제에게 입혔다.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모난 곳 없이 투구까지 쓰니 겔박의 진흙이 없어도 류제가 인간인지 못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재확인한 렌은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겠다며 뿌듯해했다. 아니, 뿌듯해하면 안 되는데.

“몰라. 됐어. 이쪽으로 와.”

“체크아웃은?”

“미친놈아. 중앙으로 갔다가는 반드시 들켜! 거긴 랑족이 있단 말이다. 랑족!”

“랑족? 아아, 늑대들 말인가.”

“그 녀석들 코는 절대 방심해선 안 돼. 이 정도 준비해도 인간 냄새를 맡을 놈들이거든.”

툴툴거리며 노천탕으로 이어지는 분합문을 연 렌은 그가 정문까지 지름길로 자주 이용하는 루트를 택했다. 마당 청소를 하는 관리인이 사라지자 렌이 신호를 주었다.

“천천히 좀 가.”

“진짜 인간 주제에 성가시게 하기는! 미적거리지 마!”

아무리 S급 길드원이래도 고양이처럼 소리 죽여 빠르게 움직이는 재량까지는 없는 류제가 하마터면 다른 객실의 관리인에게 들킬 뻔했다.

늦기 전에 후다닥 그를 이끈 렌이 시선이 닿지 않는 다른 곳에 숨었다. 소족 따위 쉽게 밟아버릴 거족 손님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제길, 생각보다 경계해야 할 게 많네.”

혼자서 다닐 땐 상관없지만 오늘은 인간이라는 짐 덩어리가 있어서 가까운 후문까지 가는 데도 장애물이 많았다.

수풀에 숨어서 다음 길로 갈 루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렌은 코가 좋은 랑족 관리인이 킁킁거리자 류제를 다른 곳에 처박았다.

“8번 관리인!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아, 예! 시간이 비어서 산책 좀 하고 있었습니다요.”

요국인들은 인간과 달리 후각이 민감하게 발달한 종족이 많아서 코를 찡긋거렸다는 건 들킨 거나 다름없었다. 수상쩍게 렌을 흘기던 랑족이 거만하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손님 받았다며? 관리인으로서 수발을 들지 않고 뭐 하는 거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셔서… 하하.”

“또 발정기야? 그럴 만도 하겠군. 쳇.”

뻘쭘하게 서있는 그에게 랑족이 진중하게 냄새를 맡았다. 수풀에 숨어 숨을 죽이는 류제는 랑족을 기절시키고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오늘따라 인간 냄새가 독하군. 그 냄새 좀 어떻게 해. 왜 중앙은 발정기 관리도 못 하는 혼혈 따위를 쓰는 건지. 손님이 인간인 줄 알고 기겁하겠어.”

툴툴거리는 랑족은 매번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온다. 망할 인간의 피는 요국에 살면서 도움 되는 꼴이 없었다. 이래서 인간의 피 따위 싫었다.

그래도 저보다 머리 둘은 더 큰 요국인에게 잘못 보여서 레라바시아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그는 있을 곳이 없었다. 남들의 비위 맞추는 거야 익숙한 일이다.

랑족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서있던 렌은 단번에 풀숲으로 들어와 류제를 붙잡고 끌었다. 류제는 몰래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혼혈이라니. 삐죽 솟아나온 고양이 귀와 불만스럽게 휘적거리는 꼬리는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다 왔어.”

“듣던 중 다행이네.”

류제는 렌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헤어지면 만난 적 없던 사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 좀 멍청하긴 해도 따지고 보면 은인인데 치부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

“이쪽이야.”

다른 관리인이 손님과 함께 길을 막자 렌이 또 다른 지름길을 택했다. 지나가는 요국인들이 냄새를 맡고 킁킁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제 갈 길로 갔다.

당당히 침입자를 고발하는 게 인간을 적대시하는 요국인으로서 당연할 텐데 극진하게 편을 들어주는 이유가 혼혈이라서 그런 건가 류제는 문득 궁금했다.

“저기로 나가.”

드디어 레라바시아 온천장의 후문까지 온 렌이 가만히 선 류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저 붉은 문을 지나가면 레라바시아에서 나와 정왕의 왕도로 갈 수 있었다. 렌이 해줄 일은 여기까지였다.

“가기 전에 돈이나 줘. 중앙에 발정기 약 타러 가야 하니까.”

“태평하구나. 어제만 해도 으르렁거리며 경계했던 주제에. 내가 정말 돈을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 안 줄 거냐?! 이 망할 인간!”

이대로 그가 도망가면 저 고양이는 손해만 실컷 보게 된다.

인간을 도와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정왕도 저 모양인데 요국인이란 순진하고 거짓말을 못 해서 매번 이런 식으로 속아 넘어간다.

“내가 정왕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곧이곧대로 믿을까. 고양이는 팔자도 좋구나.”

투구에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렌은 류제가 그를 비웃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네… 네가 정왕님에게 해를 끼치러 가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설마 그걸 믿었어?”

두 번이나 속아 넘어간 렌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분개했다. 정왕님의 말이 맞았다. 인간들이란 죄다 무서운 거짓말쟁이다. 요국인들은 솔직하지만 인간들은 매번 거짓말로 사람을 속인다고 했거든.

설마 그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간 건가 일그러지던 렌은 류제가 코끝까지 잠시 투구를 들추자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난이니까 이리 와봐.”

렌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몸을 수그렸다. 류제는 렌의 관리인 이름표를 숙 끌어당기더니 서로 입술을 맞췄다. 질리지도 않고 또 일을 저지르다니, 렌이 털을 비죽 세우며 뒤로 물러섰다.

“뭐 하는 짓이야!”

“첫 키스, 잊어버리지 마.”

말이 무색하게 렌이 입술을 바득바득 닦았다. 진짜 믿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런 사고 같은 현장은 서로 잊어버리는 게 이득인 거잖아. 왜 자꾸 들춰내는 건지 모르겠다. 돈 안 줄 거면 당장 가버리든가 하지는 않고.

“이 정도 해야 네 처음을 가져간 내게도 수지타산에 맞지.”

류제는 답례로 주머니 한 개를 던졌다.

“그럼 잘 있어, 렌.”

날렵한 고양이 손으로 낚아챈 렌은 류제의 마지막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그것을 열어보았다. 안에 든 보석을 확인한 그가 놀라 돌아보지만 류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묵직하니 진품인 게 확실한 보석은 아기의 주먹만 해서 레라바시아 온천장의 가장 안 좋은 객실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하기엔 값어치가 과분했다.

아니, 아니. 하루 숙박에 집 한 채가 넘는 값이라니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뭐 하는 거냐, 8번! 할 일 없으면 이거나 좀 들어.”

“에… 에에?”

“3층 청탕이 막혔다고 하더라. 가져다준 김에 일해.”

“예… 예에, 갑니다.”

화들짝 놀란 렌은 그 주머니를 몸 가장 깊은 곳에 숨기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속아 넘어갔다고 절망했지만 이만큼의 보답을 받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실감이 안 났다. 이 보석만 있으면 당분간 손님을 못 받아도 여유가 생기지 않는가. 그의 눈에 초롱초롱 생기가 돌았다.

인간 주제에 때때로 도움이 되는구나. 나쁜 인간만 있는 게 아니었어. 정왕님에게는 무슨 이유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괜찮을 거야. 이걸로 나도 두 발 쭉 펴고 자야지.

…라고 행복해하던 게 한 달 전, 정왕이 요국에 침입한 다섯 인간에게 패배해 실종되었다는 소문의 나비 효과로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망해버렸다.

대규모 정리 해고에 들어간 레라바시아에서 혼혈 소족이라는 이유로 중앙 주요 직책들의 라인을 못 탄 렌 지미는 몸뚱이 하나와 약간의 짐만 가지고 거리로 쫓겨났다.

퇴직 권고를 받고 짐을 뺀 것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가방만 덜렁 들고 밖으로 내몰린 렌은 너무 많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혼혈에 고아라 추천장이 없어 취직이 힘들어 레라바시아에 오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은혜에 보답하려고 노력도 하고 단골손님도 많이 받아내서 인간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성공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뭐? 정왕에게 나쁜 짓 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했던 주제에 이런 식으로 날 물을 먹여?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결국 다 거짓말만 치지. 인간 따위 절대로 안 믿어. 절대로!

말세에 더해서 내 세상이 망했다고, 이 망할 인간들 때문에!

“제기랄!!”

거센 사자후에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렌은 당장 그 씹어 먹을 놈의 인간을 찾아가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패버리고 싶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막상 찾을 방법도 없고 대가로 보석까지 받아버리는 바람에 후련하게 욕하기도 애매했다. 이게 다 정왕을 팔아서 얻어낸 것이지 않은가.

찾는 즉시 그놈의 면상에 보석을 던져주며 배때기를 쑤셔 박아줄 테다. 렌은 분노에서 힘을 추출해 취준 활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요국에 쳐들어온 인간과 관련되며 정왕이 실종된 가운데 순혈들이 인간 혼혈을 써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더군다나 그 레라바시아 온천장이 망했는데 다른 소규모 온천이 유지될 리도 없었다.

퇴직금은 떨어져 가지, 쳐다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이 망할 저주받은 보석은 죽어도 쓰고 싶지 않지.

요국에서는 도통 방법이 없었던 렌은 50번째 면접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결국 인간의 나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자존감이 하도 박살 나서 벼랑으로 내몰리니 차라리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 나을 것 같았다.

이럴 때 혼혈이 좋은 점은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피가 섞인 일부 종족의 능력 중 하나다.

적어도 인간은 냄새로 혼혈을 구별할 수 없으니 감쪽같이 둔갑한다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 인간과 어울려 살다니 끔찍하고 무섭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간들의 나라와 요국의 국경선. 귀와 꼬리를 인간의 것으로 둔갑시킨 렌이 축 내려간 가방을 들썩였다.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망할 인간들에게서 돈을 뜯어낸다고 생각하자. 반드시 복수하고 말 테다. 내 직장을 없애버리고 날 속여 요국의 배신자로 만들어버린 망할 인간에게!

당장은 먹고살 일이 문제긴 하지만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기약하며 인계로 향하는 렌은 어렵사리 구한 인계의 지도를 들고 복잡한 머리를 헤집었다.

인계는 나라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이래서야 그 망할 검은 머리 인간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수 없지 않는가.

어쩔 수 없이 브로커를 통해 모험가들에게 섞여 환전한 후 요국과 가장 가까운 인간 나라의 가장 가까운 마을로 잠입한 렌은 점점 박해지는 주머니 사정에 눈물을 머금었다.

이곳에서마저 직업을 구할 수 없다면 정말로 빈털터리가 되어 보석을 써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경력이 있다고?”

“네… 넵.”

거기에 하나 더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인간들은 냄새가 난다고 혼혈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써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요국인과 달리 계산적이고 치밀한 부분이 인간에게는 존재했다.

“이전엔 어디에서 일했다고 했지?”

“아… 그… 뭐 아산티…였나. 사… 사정이 생겨서 그만뒀습죠.”

“흐음.”

요국과의 국경선 사이, 들끓는 몬스터를 해치우기 위해 모험가들이 우글거리는 지옥 같은 마을에는 숙박을 위한 여관과 모험가들의 피와 정체 모를 액체를 닦아내는 목욕탕이 즐비했다.

그중 최근 목욕탕의 관리인을 구한다는 여관의 소문을 들은 렌이 밑져야 본전으로 이력서를 넣었는데 어쩌다 보니 면접까지 왔다.

추천장이 없어 몇 군데 튕기다가 이번이 인간계에서 다섯 번째 면접이다.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꿈쩍도 안 하는지 살이 뒤룩뒤룩 찐 마담의 입술 밑 점을 쳐다보며 말을 아끼던 렌은 침묵이 길어지자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그냥 요국으로 돌아갈까. 인간 천지인 건 생각보다 버티기 힘든 데다 낯선 냄새가 괴로웠다. 이력서와 렌을 번갈아 가며 훑는 인간 여인의 못마땅한 표정이 그의 양심을 찔렀다.

“뭐 좋아. 수완이 없어서 경험자가 꼭 필요했거든. 마시지를 할 줄 안다고?”

“그럽습죠. 아주 잘합니다요. 못미더우시면 직접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요.”

마음과는 반대로 렌이 냅다 답했다. 표정이 못마땅해서 또 떨어지나 했는데 운이 좋게도 채용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렌은 기적적으로 요국과 인계 국경 마을에 위치한 여관 ‘세니타리 롯’에서 일하게 되었다. 옆에 앉아서 나무를 깎던 어떤 얼굴에 긴 상처 있는 여자애랑 동료로 일하면 된댄다.

여관은 옆에 있는 목욕탕을 최근에 인수했다고 한다. 더럽고 관리가 안 되어서 평판이 안 좋은 목욕탕을 잘 바꾸어서 장사를 한댄다.

여관은 오래 운영했지만 목욕탕은 경력이 없으니 타지인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듯했다.

배운 게 레라바시아 온천장에서의 마사지와 약초탕 만들기, 손님 대접뿐이니 렌은 제 경력을 잘 살렸다.

레라바시아처럼 고급 유황 온천을 낀 것도 아니고, 냄새나고, 험하고, 신분 모를 인간들이 드글거리는 던전과도 같은 곳이었지만 일을 계속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목욕탕 관리에 마사지에 밤늦게까지 일만 하다 세니타리 롯 1층 관리인실을 열고 낡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곧바로 잠이 들면 그게 렌의 하루의 끝이다.

제기랄. 이 위대한 단모 소묘족의 후예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치욕을 받다니. 망할 인간들 때문에 요국은 난리법석이 됐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람.

“절대 용서 못 해, 그 빌어먹을 인간.”

아는 거라고는 오직 그 건방진 목소리와 얼굴뿐. 목욕탕에 생긴 물때를 솔로 박박 벗기며 레라바시아보다 뒤떨어진 허름한 남자 목욕탕을 청소하던 그는 이젠 냄새도 잘 기억 안 나는 인간을 떠올리며 복수의 때를 벼렸다.

물론 둔갑한 렌은 인간과 흡사했기 때문에 소족이라고 무시당할 일도 없고 혼혈이라고 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생활 자체는 쾌적했다.

그건 그거고, 지인 하나 없는 타국에서 새로 시작하기에는 외로움 많이 타는 렌은 지치고 힘든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다. 일까지 고되니 그 망할 인간을 원망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더러운, 인간들은,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겔박 같은 늪지대도 없는데 목욕탕 배수구가 어떻게 하루에 한 번씩 막히냔 말이지. 열받아서 기합을 지르며 배수구를 뚫던 렌이 밖에서 들려오는 마담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일에만 집중했다.

“보면 알겠지만 썩 괜찮은 걸 인수했거든. 상태도 멀쩡하고. 네가 보기엔 어때? 류제.”

“저야 뭐 마사지만 받으면 상관없…….”

청소 중이라고 써놓은 팻말을 무시하는 사람이 마담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옆에 있는 인간의 말소리가 익숙했다.

기시감에 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땀범벅에 짜증은 짜증대로 났던 렌은 핏줄을 세우고 낯선 손님을 꼬라보다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와 달리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칼과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법한 용모가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왔다.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다 보면 비교될 수밖에 없는 큰 몸집은 제발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는 렌과는 달리 냅다 반가움을 표했다.

“어어? 그때 그 고양이잖아?”

인간으로 둔갑해서 지금은 꼬리도 귀도 눈동자도 제대로 인간처럼 보일 텐데 어째서 단언하는 걸까.

저 괴물 인간은 냄새도 잘 맡는 건가? 렌은 둔갑으로 숨겨둔 귀와 꼬리가 소름을 따라 튀어나와 파스스 솟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 * *

류제와 렌이 극적으로 마주하게 된 경위는 사실 별것 없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세상의 농락인지 그 시작은 류제가 거족 요국인들이 들쑤시는 레라바시아 온천장에서 무사히 탈출해 동료들과 합류, 미지의 나라 요국의 우두머리가 있는 정왕성으로 침입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까지다, 이 사악한 마왕아!”

“인간 주제에―”

환상종 드래곤과 똑 닮은 마왕은 거대한 몸집을 과시하듯 이를 벌려 으르렁거렸다. 그것과 맞서는 다섯 명의 인간들이 투지에 불타 정왕을 노려보았다. 감히 정왕의 성에 침입한 다섯 인간은 당당히 마왕과 대치했다.

“이 간악한 자들아―”

인간 따위 한입에 꿀꺽 삼킬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의 주둥이가 벌려져 거대한 기압 소리가 성을 울렸다. 긴장한 인간 무리들이 식은땀을 흘릴 때였다.

“의뢰를 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오는 거야!”

거대한 드래곤이 평범한 요국인으로 뿅 변했다. 성의 크기에 맞지 않는 조그마한 소녀가 성질을 부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초록 단발머리 옆에 솟은 뿔과 파충류의 꼬리가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도 돌아오는 말투는 친근했다.

“미안해, 플로냐 양. 최대한 빨리 온다고 노력했는데 여정이 길어졌네.”

“네가 몰래 오라고 사정사정해서 그런 거 아냐, 이 사악한 마왕아.”

덤덤히 지켜보던 류제가 핀잔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아는 걸까. 요국의 말도 안 되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요국인들이야 모르겠지만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성까지 몰래 도달해야 한다는 의뢰 조건이 있어 시간이 더 소요됐다. 긴 사막, 넓은 강, 더러운 늪, 온천이 솟아오르는 화산 지대 등등.

“마왕이라고 하지 마. 난 요국의 정왕! 요. 정. 왕이라고!”

“요정은, 우웩. 잘도 자기 입으로 말하네. 네가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겠어?”

“이… 인기 많거든? 나 좋다는 신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구별 못 한다는 것부터가 인기 없다는 증거지. 나이가 얼만데 투정이나 부리긴.”

마왕을 물리치러 왔다기보다는 아주 예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던 듯한 말투다. 류제는 물론 그의 동료인 다른 네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의 모습일 때에도 마법 영창은커녕 가만히 화내는 정왕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들의 우정은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듯하다.

“왜 이런 곳까지 부른 거야? 우리가 의뢰지를 못 봤으면 어쩌려구.”

이런 막무가내 요국인이 한 나라의 왕이라니 믿기지 않았던 비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류제가 일을 안 해 실상 이 파티의 수장인 그녀는 모험가 길드 조합 보드에 붙은 정왕의 언어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건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플로냐가 알려줬던 용언이었다.

“하…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단 말이야. 저번에 있던 일 때문에 신하들은 여태 인간을 싫어하고.”

요국의 왕 플로냐는 시무룩해져서는 눈물을 흘릴 것처럼 훌쩍거렸다. 언젠가 같은 몬스터를 토벌하며 친해졌던 그들은 플로냐의 고집 센 성격에 한숨이 다 나왔다.

“도와줄 거지? 너희들은 내 유일한 인간 친구잖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타칭 마왕이 애원했다. 마음이 약해진 옛 친구들이 쓰게 웃었다.

“농담이야. 여기까지 왜 왔겠어.”

“돈만 제대로 챙겨준다면 말이지.”

“류제 군은 꼭 한마디가 많아.”

류제와 소꿉친구 사이인 유네 나르타는 화살촉으로 류제의 등을 쿡 쑤셨다.

늪에 빠졌다가 실종되었던 주제에 며칠 후 혼자서만 깨끗하게 돌아와서는 치사하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마디도 안 해준다.

“그럼 시작해 볼까?”

요국까지 오는 것은 의뢰를 수납하기 위한 것이고, 본인을 통해 정식으로 계약을 완료했으니 그들은 의뢰 수행을 위해 마왕을 납치할 필요가 있었다.

드래곤으로 변한 정왕이 인간들을 등에 태웠다. 요국의 왕만 쓸 수 있는 고대 마법을 사용해서 천장을 무사히 통과한 그들은 광활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왕님, 오늘 업무 중에…….”

어떤 연로한 요국인이 플로냐의 알현실에 들어왔다가 텅 빈 왕좌를 보고 놀라 들고 있던 서류들을 떨어뜨렸다. 서류들이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아서 방 안에 날아다녔다.

“정왕님께서 사라지셨다!”

“저기 날아가고 계시는 거 아냐?”

“저건 인간이잖아?”

성에 있던 신하들이 드래곤 모습의 플로냐 등 위에 있는 다섯 인간을 손가락질했다.

성에만 틀어박혀 있던 플로냐의 잠깐의 유희가 요국에게 얼마나 큰 패닉을 가져다줄지는 모르는 채로 그들은 예정대로 목적지로 향했다.

창공을 가로지르며 인계 가까운 곳으로 향하는 그들은 그동안 플로냐가 의뢰를 하게 된 상세한 경위를 전해 들었다.

“이런 험지를 몰래 뚫고 들어와 인계로 같이 가달라고 떼를 쓰다니. ‘인간은… 무서워!’라며 요국인들에게 인간 공포증을 심겨준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인간에게 반한 거야?”

“인간 공포증이라니. 그… 그건 옛날 일이야.”

뭐, 사랑에 빠지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인간보다 감정이 더 풍부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요국인의 축약체인 마왕은 더욱 그랬다.

그런 그녀가 어쩌다 인간에게 빠지게 되었을까. 요국의 왕을 홀린 주인공은 누구인가. 다섯 명의 인간들이 정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그게…….”

고도를 조절하기 위해 날개를 한번 펄럭인 플로냐는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의뢰를 하기 전, 국경 근방에 생긴 몬스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장하고 잠행에 나섰을 때다.

무서운 인간들을 남몰래 피하던 그녀는 튀어나온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근처에 있던 인간 남자가 그녀를 보더니 상냥하게 일으켜 세워주었다.

“조심하세요. 연약한 피부가 다치면 아프잖아요.”

친절한 인간 남자는 싱그러운 사과처럼 웃고는 상처를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그 모습으로 변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게 다야?”

얼굴이 붉어진 플로냐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를 실룩거린 류제가 참다못해 외쳤다.

“그런 정보로 상대방을 어떻게 찾아내? 그건 네 부하들 특기 아니야? 냄새로 찾든가!”

“하지만 그 인간을 본 건 나뿐인걸. 난… 난 인간이 아직 무섭고.”

“인간 공포증 아니라더니.”

“그렇긴 한데 신하들을 데리고 가면 그 인간이 무서워할 거 아냐! 거족을 싫어하는 인간들한테 밉보일 거야.”

플로냐가 또 훌쩍거렸다. 착한 유네와 신관인 세라가 괜찮다며 달래주었다. 말수가 없는 니냐롯트는 날아가는 드래곤의 등 위에서 잘도 책을 읽었다.

세라의 마법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고는 하나 머리칼이 나부끼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책을 읽는 모습이 기행이라면 기행이다.

어쨌든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그 극소수의 정보를 풀어내 플로냐 앞에 인간을 대령해야 하는 모험가들은 증언대로 국경 마을에 당도했다.

말을 들어보니 그 인간 남자는 모험가는 아닌 듯했고, 근경에 있는 마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겠지 싶다. 마을에 들어오기도 전에 후드를 뒤집어쓴 플로냐는 인간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하나같이 오물을 뒤집어쓴 길고양이처럼 초췌했다. 그 류제 신리의 파티가 마을에 당도했다는 소문이 길드 조합원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류제 신리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명망 높은 유명 인사였다. 물론 그 말고도 네 명의 파티원들이 하나같이 한가락 하는 자들이다.

귀족 가문의 성질 더러운 무투가 비키 셀로니아, 나라도 뒤흔든다는 뒷골목 큰손을 부모로 둔 궁수 유네 나르타, 반죽음 상태의 시체도 살린다는 신관 세라 밀로니, 정체는 모르지만 그 실력과 미모로 수많은 남자들을 울게 했다던 대마법사 니냐롯트.

마찬가지로 외견 하나만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울린 류제 신리. 파티원 모두 의뢰 성공률 100%에 달하는 S급 길드 소속이다.

원초적으로 남에게 틈을 주지 않는 니냐롯트와는 다르게 류제 신리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그는 누구나 호감을 품는 훤칠한 외견을 사용할 줄 아는 자였다.

물론 소꿉친구라 남매 사이에 더 가까운 유네나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비키라든가, 연상인 세라는 예외였지만, (니냐롯트야 관심이 없으니 제외) 그의 바람 잘 날 없는 연애 스토리는 순진한 요국인이 들었다가는 기절초풍할 내용들이 많았다.

가벼운 짓 좀 하지 말라고 파티원이 만류해도 류제는 연애에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듣도록 하고, 류제의 길드가 돌아오자 그들의 행적이 길드 조합에 접수되었다.

소식을 듣고 벌써부터 류제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숙소를 파악해 밖에서 대기했다. 왜인지 평소 같았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오는 순서대로 만나 회포를 풀었을 류제는 방을 잡으려는 비키를 잠시 막아섰다.

“난 다른 여관에 갈게.”

“웬일이래? 이 마을에 오면 항상 묵던 곳이잖아. 여기 침대가 제일 좋다며?”

“이번만큼은 사람 없는 곳에서 편하게 쉬고 싶거든.”

임무에서 귀환하면 류제는 마음 맞는 사람과 질펀하게 어울려 관계를 맺고는 했지만 지금은 금욕 시즌이다.

파티원들 몰래 플로냐에게 물어본 결과 그가 지나쳤던 온천장이 요국에서 가장 유명한 레라바시아 온천장임을 알게 된 류제는 임무를 마치면 고양이와 다시 즐긴 후에 미련을 없앤 후, 원래 생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알아서 해. 플로냐가 봤다던 그 남자를 찾을 방법이나 생각해 와.”

“대충 며칠 뒤지면 나오겠지.”

“내일 봐, 류제 군!”

거대 몬스터를 잡아 족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인간 하나를 찾는 것이니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플로냐의 의뢰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플로냐는 요국의 왕이니 의뢰가 길어지는 만큼 값을 톡톡히 치러주겠지만 터지는 쾌감이 없으니 심심하다.

“광장에 사람을 죄다 모으고 냄새로 찾아.”

“닥치고 있어, 류제 신리.”

섬세한 감정적 접근은 류제의 범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류제는 의견이 묵살당하는 날이 이어졌다.

짜증도 나겠다, 화풀이로 몬스터를 후려친 그는 아무 목욕탕에나 가려다가 1인 1객실 1목욕탕이었던 레라바시아를 떠올리니 괜히 꺼려졌다.

아무리 무감각한 류제라도 목욕할 때마다 힐끗거리는 시선이나 음란하게 훑는 눈짓은 지쳤다.

어디 오래 머물 수 있으면서 목욕탕이 딸린 유명하지 않은 여관이 없을까 배회하던 그는 유네에게서 외곽에 있던 망한 목욕탕을 옆 여관이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여관의 여관지기가 유네의 부모님과도 연이 깊다고 한다. 지금은 조직을 나온 인물이 운영하는 곳인데 확인해 보니 한때 의뢰를 맡아준 류제의 지인이기도 했다.

그 여관에서 묵는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들켜도 사생활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류제는 모험가 특유의 안목을 바탕 삼아 새로운 사업에 조언을 해주기로 타협했다.

장기로 묶을 방에 짐을 풀어낸 류제가 스콜라 맥도어와 느긋하게 남자 목욕탕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신원 불분명한 놈을 하나 구하긴 했는데, 자기 말로는 아산티에서 일을 했었다네. 참내, 아산티가 몬스터에 쑥대밭이 된 지가 언젠데.”

“그런 수상한 놈을 쓰다니 맥도어 누님은 여전히 착하시네요. 라탈스키 자매는 잘 지내나요?”

“그럭저럭. 어린놈이 여탕을 담당하고 있어. 큰놈은 여관 쪽. 목욕탕 쪽이 가장 문제인데 다들 노하우가 없어서 외부인만 믿어야 할 실정이야. 하아.”

화산 지대에서 나오는 유황 온천을 쓰는 레라바시아 온천장을 경험해 본 바, 최고의 목욕탕을 상상하던 류제가 고양이의 마사지를 떠올리며 히죽거렸다. 그때만 떠오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면 알겠지만 괜찮은 걸 인수했거든. 상태도 멀쩡하고. 네가 보기엔 어때? 류제.”

“저야 뭐 마사지만 받으면 상관없…….”

남탕의 청소 중이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문을 연 스콜라와 류제는 문제의 남탕 관리인과 맞닥뜨렸다. 익숙한 얼굴을 보고 놀란 류제가 그만 크게 외쳤다.

“어어? 그때 그 고양이잖아?”

서로 입이 떡 벌어져 할 말을 잃었다. 렌도 그 인간의 냄새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믿을 수 없다.

간신히 설 자리를 만들어놓은 이때 왜 하필이면 복수의 대상자와 만나는 것인가! 렌의 머리털이 삐죽 서며 얼굴이 창백해지자 류제가 악마 같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눈치 빠른 스콜라가 수상쩍은 기류를 감지했다. 스콜라의 날 선 말투에 묘족의 촉이 위험을 경고했다.

요국인이란 걸 들키면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제야 막 안정적이게 정착할 발판을 마련했는데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요.”

소족은 항상 거족에게 눌려 살아서 심기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진화한 결과 위험 상황에서 잔머리만 빠르게 돌아갔다. 렌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면서 영업 미소를 지었다.

“사람과 고양이를 착각하다니 웃기는 분이지 말입니다요, 하하하.”

“아닌데… 분명―”

아무리 저 관리가 안 된 삐죽삐죽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이나 옅은 주근깨, 장난꾸러기 고양이상 얼굴은 그때 그 요국인과 똑같았다.

하지만 고작 닮았다는 이유로 어엿한 인간 흉내를 내는 그를 추궁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했다.

“흐음?”

“아이고, 뭐 하시는 겁니까요.”

이상한 존댓말도 그렇고 분명히 맞는데. 류제는 렌의 머리를 들춰보며 기웃거렸지만 분명 인간의 귀였다.

요국인이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고, 레라바시아 온천장에서 봤던 단모 소묘족의 모습이 아니라서 렌이 뻔뻔하게 나오는 이상 류제는 거짓말을 들출 수 없었다.

“저기, 여관장님. 이 사람 뭡니까요? 왜 멀쩡한 사람 머리를 들쑤시고 난리랍니까?”

렌이 곤란한 척 류제를 밀어내며 불쾌해하자 그의 나쁜 버릇을 아는 스콜라가 나서주었다. 렌을 위해 그녀가 류제의 목덜미를 붙잡고 뒤로 밀쳐 거리를 벌려주었다.

“류제 신리, 내 종업원한테 작업 거는 거라면 용서 못 해. 안 그래도 일손 부족한데 그만두게 만들기만 해봐.”

“그런 건 아닌데.”

모험가의 감에 불이 켜졌지만 일단 지금은 넘어가 주기로 한 류제가 인간인 척하는 요국인을 내려다보았다.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도 렌은 서비스직의 웃는 낯을 굴하지 않았다. 뻔뻔스럽게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아… 하하하.”

게다가 아직 피의 복수를 준비하기도 전인데 같은 인간에게 당할쏘냐.

제발 넘어가길. 사악한 인간아, 여기서도 내 일자리를 빼앗을 셈이냐? 눈치가 있으면 그냥 있으라고!

“뭐 어쨌든. 맥도어 누님, 이분한테 마사지 좀 받아도 될까요? 어제부터 어깨가 결려서.”

“후기 좀 남겨 줘. 손님한테 들어본 바로는 괜찮다고는 하더만.”

“저… 저기 여관장님, 그래서 남자 목욕탕엔 왜 오신 겁니까요?”

제발 이 공간에 그와 단둘이 두지 말아달라고 렌이 애처롭게 불렀다. 께름칙한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스콜라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 여관 장기 고객이 될 손님 소개해 주려고. 시설 관리에 대해서 이러저러 말해줄 텐데 오늘은 테스트 같은 거야.”

류제가 남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고, 뭔가 귀찮은 일에 얽힐 것 같았던 스콜라는 후다닥 문을 열어 도망을 시도했다.

“아, 류제. 우리 여관에 머무는 건 좋은데 사생활 문제를 끌고 오는 건 용서 못 해.”

손가락으로 이마를 쿡쿡 찌를 듯이 경고한 그녀가 마침내 자리를 비켰다. 렌은 도망간 스콜라를 저주하며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늘어놓았다. 하지만 문은 닫혔고, 맑은 미닫이문 소리가 목욕탕 안을 청명하게 울렸다.

“자, 그럼.”

단둘만 남자 류제가 평상복 단추를 끌러 벗었다. 한껏 경계하고 있던 인물이 냅다 무장 해제가 되니 질겁한 렌이 몸을 움츠렸다. 저 인간과 얽히는 바람에 생겼던 사고를 아직 잊지 않았다.

“우왁! 왜… 왜 옷을 벗는 거야… 랍니까?”

“아까 못 들었어요? 마사지 받으러 왔다니까.”

벗은 옷을 적당히 던져놓은 류제가 렌을 이상한 사람 보듯이 흘겼다.

목욕탕 청소 중인데 갑자기 마사지를 하라고 해도. 렌은 나름의 루틴이 방해받은 기분이었지만 여관장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어… 그게.”

저 망할 인간이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을 한 걸 보니 어떻게든 넘어간 건가.

움찔움찔 솔 손잡이를 무기처럼 꾹 쥐고 있던 렌의 어깨가 점점 낮아졌다. 하기는 해야겠지. 청소 끝내고 목욕탕 문 다시 열어야 하는데 바쁘다 바빠.

철천지원수 놈과 우연찮게 마주친 렌은 심정이 미묘해졌다. 레라바시아 온천장에 있을 무렵에는 실컷 인간을 무시했는데 인간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몰골도 부끄럽다.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인간은 요국의 정왕에게 해를 끼치고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마사지나 해야 하다니 자존심도 상했다.

“여기에 누우면 되나요?”

“아… 네… 네에. 그렇습죠.”

불쾌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렌은 복수는커녕 을의 입장이다. 언젠가 복수해 주고 말 테다. 두고 봐라! 렌이 분노의 손길로 류제의 근육을 잡아 뜯을 듯이 눌렀다.

“시원하니 솜씨가 참 좋네요.”

“예에, 하하하.”

렌이 이를 악물고 웃는 척을 하든 말든 렌의 힘이 잔뜩 들어간 마사지는 류제에겐 호사였다. 이 마사지를 받으니 확실해진다.

레라바시아 때와 루틴이 똑같다. 요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마사지에 푹 빠져있던 류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속일 거면 이런 것부터 속여야지, 쯧쯧. 바보구나.

“그럼 수고하세요.”

“다시는 오지… 잘 가십시오, 하하하!”

청소하다 말고 마사지를 끝마친 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류제를 내쫓듯 몰아냈다. 이제야 발바닥 전체로 걸어 다니는 게 적응이 될까 말까인데 지금 와서 요국으로 돌아갈쏘냐.

류제를 보내고 청소를 다시 시작하나 했더니 목욕탕에 쳐들어온 불쾌한 액체투성이 손님들의 항의를 받은 렌은 저녁도 못 먹고 주야장천 일만 하다가 간신히 여관으로 돌아왔다.

“으어, 힘들어 죽겠다.”

레라바시아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다. 물론 객실 대금을 내지 않아도 되어서 생활은 한결 수월했지만 사업 초반이라 신경 쓸 것들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런 와중에 퇴짜 맞고 물러선다면 류제 신리가 아니다. 류제가 장박 손님으로 방을 배정받은 늦은 저녁. 싱글벙글 웃음을 터드린 그는 스콜라가 말해준 ‘제이크 신’이라는 웃기는 가명을 들이댄 렌의 방을 찾았다.

이름이 그게 뭐야. 딱 봐도 인간의 문화를 모르는 게 분명한 이 고양이는 인간의 작명법에 대해 무지한 게 틀림없었다. 실컷 렌을 무시한 류제가 루시에 라탈스키가 저녁때 알려준 방 앞에 서서 세 번 두드렸다.

문 밖에서 나는 냄새까지는 잘 맡을 수 없는지 남자 목욕탕 관리인의 방문은 경계도 없이 훌쩍 열렸다.

“누구… 윽. 당신은!”

“기척이 없어서 가려고 했더니 안에 있었네요.”

“손님? 왜… 왜 온 겁니까요?”

하루 종일 용을 쓰느라 기진맥진해 죽겠는데 이 인간을 또 봐야 하다니. 렌이 절망했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는 거지 말입니까요?”

라탈스키 자매 중 큰 쪽이 여관 일을 담당하는데 아무래도 렌이 남자이다 보니 유리에의 부탁을 받고 손님의 진상을 처리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리에 라탈스키가 아닌 그가 싫어하는 진상이 직접 찾아왔다. 렌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까 실례를 한 것 같아서요. 사죄할 겸 해서. 저녁 먹었어요?”

“아니… 이제 먹으려고 하기는 하는데―”

렌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류제가 큰 덩치로 밀고 방에 침입했다. 렌이 당황한 틈을 타 류제가 안을 둘러보았다.

손님이 묵는 객실보다는 작은 편인 관리인의 방은 렌의 꼼꼼한 성격을 대변하듯 깔끔했다. 인간을 무서워하는 요국인이라서 그런가 생활감이 부족한 게 흠이다.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그건 손님 알 바가 아니지 말입니다요.”

“그렇기는 해도.”

왜 요국인이 인간인 척하며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다. 레라바시아 온천장보다 훨씬 시설이 낙후된 목욕탕인데 이걸 위해서 인간의 나라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어떤 생각이 문득 스친 류제는 그럼 그렇지라며 술병을 흔들었다.

“같이 한잔하시죠?”

영영 안녕이라고 생각했던 인연이 신기했던 류제는 렌을 더 알고 싶었지만 렌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아니 됐다니까 그러네. 바쁘니까 좀 가쇼!”

“오래 머무를 것 같은데 같은 남자끼리 합심해 봐요. 생선 좋아해요?”

“거참 남의 일에 관심도 많네!”

“이 술이 생선과 궁합이 잘 맞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러저러한 생각을 숨긴 류제가 활짝 웃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인간의 나라에 와서는 기회가 없어서 갈증이 났던 렌이 움찔거렸다. 저건 요국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이과두주였다.

“아니… 뭐… 잠깐 정도는 가능하긴 한데.”

왠지 꼬리가 있다면 휘적휘적 흔들렸을 것 같다.

인간의 풍습을 잘 몰랐던 렌은 객실 손님과의 술자리를 관리인의 방에서 하는 것의 정당함에 반박하지 못했다. 침입에 성공한 류제는 순수한 웃음을 흘리며 탁자에 앉았다.

“앉으세요. 주인이 서있으니까 괜히 부담스럽네.”

태평하게 앉아서 렌을 부르는 꼴이 아주 그냥 여기가 자기 방이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아는 사람하고 닮아서 그만 무례하게 굴었네요.”

“아… 네. 하하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라. 하하하!”

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 렌이 억지로 따라 웃었다. 무서워 죽겠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 굴에서도 살아나간다고, 여기서 위기를 잘 벗어나면 그의 생활을 망쳐버린 인간에게 복수를 꾀할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류제 신리라고 합니다. 모험가 길드 조합에서 의뢰를 받아서 먹고살고 있어요.”

“아 저는 레― 아니 그러니까 인간 제… 제이크, 신이라고 합니다요.”

적당히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인 거지만 이게 그의 인계에서의 이름이었다. 렌은 그게 응당 그렇다는 듯 이름표를 보여주며 절대 요국의 단모 소묘족 렌 지미가 아님을 절실하게 피력했다.

인간은 서로 소개할 때 종족명을 밝히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 들었더라면 굉장히 수상쩍게 꼬집었을 것이다. 지적하려는 말을 삼킨 류제는 당장은 그냥 속아 넘어가 주었다.

“제이크 씨는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네요. 스콜라 누님 말로는 아산티에서 오셨다고.”

“그게 뭐 문제라도 됩니까요?”

역시 아산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다. 꼬치꼬치 캐물었다가는 질겁해서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살짝 간을 보던 류제는 그냥 그러시군요 하고 답했다.

고양이의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화술로 꼬드긴 류제는 움츠렸던 렌의 어깨가 풀려가는 것을 몰래 흘겼다.

독한 술을 마시는 척 조심스레 입술만 적시는 그는 인계 생활 전반에 불평의 열변을 토하는 고양이를 잘도 관찰했다.

“아 그러니까 그 망할 인간들은 뭘 하고 돌아다니기에 배수구를 막히게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습죠!”

좋아하는 물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한두 잔 마시다 보니 렌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인계까지 와야 할 상황에 내몰려 스트레스를 받았던 와중 술이 들어가자 고삐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초록색 액체라. 크산칼리카의 체액인 것 같은데.”

“크산… 뭐요?”

“지네처럼 생긴 몬스터가 있어. 목을 자르면 즉사하지.”

“으엑, 그런 게 이 주변에 산다는 말씀입니까요?”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속도 조절을 못 하고 빨리 취해버린 렌은 류제가 반말을 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런 징그러운 몬스터는 요국에서 본 적이 없다. 인간들의 나라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렌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을 밖에 안 나가? 이 근방에 둥지가 있어서 꽤 보이는 몬스터야.”

“구… 굳이 나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요. 난 여기서 먹고 자고 돈만 벌 수 있으면 만족하고.”

“나갈 일이 생길 때는 상단을 따라가. 유명 상단들은 용병을 고용해서 몬스터로부터 안전한 편이거든.”

“내 몸은 알아서 건사합습죠. 인간 주제에 참견하지 말라고요. 알겠어요?”

잔뜩 꼬인 혀로 손가락질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하찮아 보일 수 없었다. 턱을 괴던 류제가 피식거렸다. 대화를 할수록 가관이다.

이 인간인 척하는 요국인은 대책 없이 인간계에 쳐들어온 게 분명하다. 국경선 근방에 우글거리는 몬스터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요국과의 협약 사항이나 동시 토벌에 관한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인간인 척하는 고양이가 귀여웠던 류제는 술을 마시다 말고 슬쩍 떠보았다.

“근데 아무리 봐도 당신 내가 아는 그 고양이하고 닮았단 말이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난 인간이라고, 인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를 넘어뜨린 렌이 가슴을 팡팡 치며 주장했다. 알딸딸 취하면 꼬리와 귀를 드러내지 않을까 싶었지만 쉽지는 않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사악한 속셈을 숨긴 류제가 요염하게 다리를 꼬며 요국인의 자존심을 찔렀다.

“요국인들은 발정기가 정해져 있어서 인간과 달리 상시 발정을 안 한다고 하더라고. 들어본 적 있어?”

반응이 오는지 렌이 움찔거렸다. 특히나 혼혈이라 자격지심이 심한 그에게는 주기적으로 오는 발정기가 요국인임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었다.

“요국인들은 야만적인 인간하고 다르거든…이라고 들었습죠. 인간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모양새는 고양이처럼 강한 자존심을 드러냈다. 류제는 옳다구나 걸려든 렌을 냉큼 침대에 몰아넣었다.

“으엥?”

저도 모르게 침대에 걸터앉게 된 렌은 다가오는 류제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옷깃을 풀어 헤치며 근육을 드러내는 인간은 문득 설렘을 느낄 만큼 섹시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요국인이었는데. 시험해 봐도 돼?”

“뭐… 뭐요? 뭔 시험?”

“당신이 정말 인간이라면 상시 발정할 거 아냐. 안 그래?”

씨이익 웃는 류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렌의 거시기를 꽉 붙잡았다. 주물주물 성추행을 하지만 렌도 요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있었다. 왠지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될 거 같아 렌이 까짓 거 해보라고 콧방귀를 뀌었다.

“헹. 잘난 척도 정도가 있지, 요국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당신 손에 왜 서?”

그리고 그 출처 불명의 자신감은 류제가 그의 거시기를 물고 빨고 강제로 사정시킨 다음 지치지도 않고 엉덩이 구멍을 풀 때쯤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으… 으냐, 히익! 아… 으아……!”

렌이 마사지용으로 사용하는 기름에 정력제 성분이 있는지도 검사한다며 기름병 하나를 끌러 렌의 엉덩이 골에 뿌린 류제가 그걸로 거품이 날 때까지 쑤셔댔다. 멈추지 않은 신음이 끙끙거리며 억눌려졌다.

“흐음, 이상하다. 기분 좋은 거 맞아? 발정 안 한 거 같은데.”

“해… 했어! 발정했다고!”

“말 안 하면 모르니까 어디가 좋은 건지 제대로 말해줘.”

창피해 죽겠는데 그런 말까지 강요하는 류제의 심술도 눈치 못 채는 렌은 성감대가 꾹꾹 눌려와서 미칠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 것 같은데 류제가 너무 뻔뻔해서 인간들끼리는 원래 이런 건가 합리화를 하게 된다.

“거기, 거기가 기… 기분… 기분…….”

“좋지?”

“크힛!”

눈물 콧물 줄줄 나올 정도로 신음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났다. 기분 좋다며 엉엉 울며 애원한 끝에 렌은 엉덩이만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끈적끈적해진 손가락을 서로 붙였다가 떼며 음란하게 웃은 류제가 나자빠진 렌을 보며 납득했다.

“정말이네. 성대하게 가버릴 줄이야.”

“그… 그렇다니… 우냐악…….”

뭐가 정말이라는 건지는 의미를 모르겠지만 일단 인간임을 증명한 렌이 헥헥거리며 숨을 골랐다. 이걸로 의심은 완전히 떨쳐냈다고 렌은 믿었다.

한번 문 사냥감은 절대 놓지 않는 류제 신리의 끈질김과 악랄함을 아직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너무 가버려서 제정신이 아닌 그를 류제 신리가 아주 사악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하지만 또 우연찮게 발정기랑 겹친 걸 수도 있잖아?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

“에… 으엥?”

지쳐서 나가떨어진 인간인 척하는 고양이에게 류제는 눈이 부실 만큼 화창하게 웃어 보였다. 렌은 불길함을 삼키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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