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달과 고양이 (7)
성대한 배웅을 받은 외국 사신들이 차례로 온천장을 떠났다. 떠들썩했던 온천장에 적막이 잦아졌다.
종일 주위를 경계하느라 피로가 더해진 류제는 머릿속을 희롱하는 재경의 잠꼬대가 거슬렸다.
“할머니라…….”
그의 조모는 이 세상에 없다. 삼라만상을 소유하는 대국 나유타의 황제라도 죽은 사람은 되돌려 줄 수 없었다. 슬픔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아 잘 잊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돌연.
그는 재경이 손아귀 밖으로 날아가 버릴세라 불안해졌다.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다오. 류제는 불현듯 제 욕심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 하지 않았나. 여는 무얼 하는 것인지.”
필히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에 더한 짓을 해버린 주제에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재경에게 상처받고 멀리하다니 나유타라는 이름이 아깝다.
재경은 당장 기댈 곳이 없으니 곁에 있는 것이겠지. 일부러 멀리한다는 속심을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재경은 들고양이처럼 자신을 보듬어줄 새로운 주인을 찾아 훌렁 떠나버리겠지.
그럼 그는 재경을 궐에 붙들기 위해 전 성수청 제사장과 똑같은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겠다 호언장담을 했건만 과욕으로 일을 그르치려고 하다니. 이래서는 안 된다. 아니 돼.
초하루 탓인가 정신이 산만해서 머리에 통증이 맴돌았다. 마지막 사신을 배웅한 류제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면서 저무는 태양을 응시했다.
마음을 알리지 말걸 그랬다. 제 마음만 밀어붙이면서 상대방이 이해하기를 바라다니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간이 집무실에서 궐로 보낼 파발을 쓴 류제가 저녁 수라 시간이 되었다는 상궁의 말에 재경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수발을 드는 궁녀가 문을 열어주니 안에서는 재경이 궁녀들과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놀란 궁녀들이 자리를 치우고 물러났다. 재경이 볼을 부풀리며 불평했다.
“좋을 때였는데.”
“방해가 되었는지는 몰랐구나.”
배배 꼬이는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류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궁녀들을 흘겼다. 그의 시답잖은 질투에 궁녀들이 겁에 질려 고개를 푹 숙였다.
“저녁 수라가 기대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내가 이기고 있어서 그래!”
재경이 냅다 반박하며 고개를 디밀었다.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류제의 눈이 재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어제의 일이 떠오른 재경이 귓바퀴를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류제는 그가 부끄러워하는 연유를 알 수 없어 눈을 끔벅거렸다. 아녀자와 공기놀이를 한 것이 이제 와 수치스러운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지만 곧 두 개의 저녁상이 들어오는 통에 분위기가 흐지부지 흐려졌다.
“아, 그건 류제한테 줘. 오늘 류제 밥은 내 거야.”
“예? 하… 하오나…….”
“그의 말대로 해다오.”
류제가 허락하자 상을 나르던 나인들이 재경과 류제의 상을 바꾸어 두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각기 수저를 들었다.
류제는 예의를 갖추어 국부터 한 술 뜬 반면 궐의 식사 예의는 죽 쒀먹을 것도 모르는 재경은 제일 먹고 싶었던 고기반찬을 냉큼 집었다.
그걸 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인 류제는 건개에 밥을 한 술 뜨다가 표정이 나빠졌다.
재경이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자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을 낚아챘다. 나물 반찬뿐인 본래 재경의 상이 넘어져 바닥에 흐트러졌다.
“먹어선 아니 된다. 기미 상궁을 불러라.”
류제의 외침에 궁녀 한 명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류제는 저주의 여파로 독이 들지 않는 몸이었다. 그렇기에 검식(檢食)을 굳이 하지 않았는데 재경은 다르다. 류제는 실수를 직감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경이 류제를 쳐다보았다. 궁녀가 수건을 건네자 류제가 독이 든 음식물을 뱉었다.
“고기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왜라고 칭얼거리기에는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문제를 처단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류제는 넌지시 깨달았다.
나물 반찬을 먹이라 지시한 늙은 상궁은 반정을 꾀했던 인물과 긴밀하다. 필히 여의 상과 구별하기 위해서겠지. 여는 독이 들지 않지만 독의 맛은 안다. 그러니 여에게 먹이려고 했던 게 아냐.
“자비를 베풀려고 했건만.”
그렇게 중얼거리는 류제의 눈동자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재경은 류제의 동공이 붉어졌나 살폈지만 평소와 같았다. 재경은 류제가 저만치 멀어지는 것 같았다.
궁녀와 함께 돌아온 기미 상궁은 도중에 조보를 들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달의 무녀에게 올라가는 상은 성수청이 담당하여 소주방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으니 이곳 온천장에서 달의 무녀가 황제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굳이 그녀가 나서서 검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름뿐이었던 직책이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그녀는 두려움에 말을 머뭇거렸다.
“폐… 폐하.”
“비상(砒霜)이다. 확인해 보거라.”
“예.”
품에서 검식용 은식기를 꺼낸 상궁이 달의 무녀가 받아야 했던 조치와 건개 하나하나 독의 유무를 확인했다. 치밀하게도 모든 음식에 독 반응이 나타났다.
반대로 재경이 좋아하는 고기반찬이 들어갔던 류제의 상에는 독이 들어있지 않았다.
준비했던 은 식기가 모두 검게 변하자 기미 상궁이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상황 판단이 느렸던 재경도 제 원래 밥상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이 물씬 엄습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책임에서 회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기미 상궁이 류제에게 바싹 엎드렸다.
“소… 소…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달의 무녀가 먹을 음식은 성수청에서 책임지고 있지. 주방 상궁과 담당 관리를 도와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조사에 착수하라.”
“예… 폐하.”
“이것들은 다 치워라. 꼴도 보기 싫다.”
류제가 독이 든 상을 발로 찼다. 궁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류제가 재경을 이끌고 건넛방으로 향했다. 류제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감히 여의 앞에서 달의 무녀를 노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아직 초하룻날도 아닌데 마음이 분노로 끓었다.
독이 든 음식은 몰라도 멀쩡한 류제의 상의 음식까지 버리는 게 이해가 안 갔던 천한 출신 재경은 뒤에서 꾸물꾸물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류제, 그래도 고기반찬에는 독이 안 들었던데.”
“은식기로도 검출되지 않는 독도 있다. 새로 준비하라 이를 테니 배고파도 기다리거라. 여가 직접 기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놀란 재경이 동요하지 않도록 다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목소리는 그럼에도 냉기가 돌았다. 재경에게 화가 난 것이 단연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경은 두려웠다.
한번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는 게 끝도 없이 멀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닿지 못하면 어쩌나. 이게 전부 자신 탓인 것 같은 불쾌한 착각이 들었다.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독이라니!”
“내성이 강하신 폐하께서 알아차리셔서 오히려 다행입니다. 만일 무녀님께서 드셨더라면…….”
사신이 떠나자 적막해졌던 온천장은 좋지 못한 활기를 띠었다. 수라상을 거쳐갔던 나인들, 무녀를 보필하기 위해 성수청에서 온 주술사들, 나인들을 관리하는 상궁들, 모든 이들의 소지품 검사가 이루어졌다.
금위대 소속 군견들이 버려진 독병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온천장을 헤집었다.
인원을 총동원해서 수색한 결과, 수라간 근처 나무 장작이 쌓인 곳 뒤쪽으로 독이 들었을 거라 추측되는 병이 깨진 채 버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이어서 수라간을 오갔던 이들의 증언에 따라 유력한 범인들이 색출되었다.
건개를 만들었던 나인들과 달의 무녀의 입에 들어갈 식재료를 관리한 성수청의 관리들의 공통적인 증언으로 중간 기미를 하였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판별 났다. 또한 그릇에서는 독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완성된 수라상을 나르기 전 누군가가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말이다.
그때까지 달의 무녀의 식단을 알며 수라상에 접촉할 수 있었던 인물의 수는 스물이 넘는다. 그중 능여 대군과 연이 닿고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자들은 대여섯 남짓.
무고한 자들 사이 흉악한 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다.
“배고파.”
“조금만 참거라.”
“벌써 자시(23시~01시)가 지났어. 이게 웬 날벼락이야. 뱃가죽이 등이랑 붙으면 어쩌지.”
먹지 못한 고기반찬을 떠올리던 재경이 바닥에 눌어붙어 툴툴거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의심되는 이를 소주방에서 쳐내고 새롭게 식재료를 구해 저녁을 내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 재경은 독이고 뭐고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 고기. 한 점이라도 그냥 입에다가 넣었으면 좋았을걸.
이렇게라도 긍정적인 척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어떤 목적으로 살해를 모의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필히 전 제사장 아저씨처럼 날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사람일 거야. 젠장. 난 류제한테 필요한 사람 아니었어?
류제는 황제잖아. 내가 류제 곁에 있는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배고픈데 안 좋은 생각만 나서 짜증만 났다.
“폐하, 새 수라를 내왔습니다. 기미 상궁과 두 나인이 검식을 마쳤습니다.”
“안으로 들라.”
류제가 허가하자 문이 열리고 다시금 상이 들어왔다. 식기는 모두 은으로 대체되었으며 검식을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차려진 모든 반찬과 밥이 한 번씩 헤집어진 흔적이 보였다.
연이어서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두 번째 상은 보이지 않았다.
“상이 하나밖에 없네. 류제 네 것은?”
“여가 다시 검식을 할 것이다.”
재경은 그것과 상이 하나만 들어온 것이 무슨 상관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류제는 사람을 모두 물리고 재경을 옆으로 불렀다.
류제와 상을 사이에 둔 재경이 머뭇거리다가 거리를 두며 우물쭈물 앉았다. 예전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살을 붙였던 것과는 다르다.
류제는 그 모습이 실망스러우면서도 저지른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재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수저를 들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잠깐 기다리거라.”
류제가 식사하려는 재경을 저지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검식도 끝냈겠다, 또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쀼루퉁해진 재경이 한 소리 하려는 찰나에 류제가 젓가락을 들어 재경이 좋아하는 고기를 먼저 한입 먹었다. 내 고기! 그걸 본 재경이 황당해서 눈에 별이 반짝 떴다.
“치사하게. 배고프면 네 상을 들여!”
“독이 들었나 확인한다는데도.”
특유의 묘한 맛과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음식을 씹었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재경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류제가 들고 있는 젓가락이 탐이 났다.
“자, 먹어보라. 배고프다 하지 않았나.”
“젓가락을 줘.”
대신 류제가 직접 반찬을 들어 재경의 입 앞에 대령했다. 어린 시절 젓가락질이 서툴 무렵 할머니가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줬던 때보다 더한 애 취급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상없이 남이 젓가락질해 주는 반찬을 먹어야 할까 고민하는 재경과 젓가락을 든 류제의 찰나의 기 싸움.
재경은 간장에 조린 돼지고기 냄새에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합 받아먹고 말았다.
“맛있어.”
무려 반나절 만의 식사다. 재경은 입에서 사르르 녹는 돼지고기에 흠뻑 취해 당장이라도 수치심 따위 없이 식사를 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류제는 수저를 넘겨주지 않았다.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먹었으니 다음에는 쌀밥이다. 가장자리 부분을 기미한 류제는 수저로 먹기 좋게 떠서 또다시 재경의 입 앞에 대령했다.
“계속하는 거야?”
“그럼. 독이 있을지 누가 알고.”
재경은 부끄러웠지만 그저 장난치는 건 아닌 듯해서 마지못해 아기 새처럼 음식을 받아먹었다. 한두 번 반복되니 그렇게 못 할 짓은 아니었다.
거리감이 사라지니 예전처럼 사랑이고 뭐고 복잡한 감정 따위 없이 친구이던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얼핏 느껴지는 류제의 호감이 좋다. 그가 마음을 아직 다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괜스레 우월감이 들었다. 그런데도 계속 류제가 신경 쓰이는 건 무슨 마음일까.
“고기는 그만. 골고루 먹어야지.”
싫다면서도 류제가 젓가락으로 집어주자 재경은 마지못해 먹어주었다. 싫어하는 반찬을 집어주는 류제를 힐끗거리던 재경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지간히 어린 취급 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귓바퀴가 평소보다 더 달아올라 있었다. 독 때문이라지만 류제 저놈도 과보호라니까. 당연 날 사랑하니까 그런 거겠지만.
“더 안 먹을 테냐?”
“됐어. 배불러.”
식사를 한다는 핑계로 너무 붙어있었다. 재경이 슬슬 눈치를 보며 멀어졌다.
한쪽 입꼬리를 구겨 올린 류제가 수저를 놓았다. 기미를 하고 밥을 먹이느라 음식은 차갑게 식었고 시간은 벌써 새벽 늦은 시각이었다.
“송구하구나. 여의 탓에 연거푸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네 탓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 탓이지.”
재경이 가져왔던 오뚝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안도한 류제가 짧게 웃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를 향한 재경의 올곧은 믿음과 두려워하지 않는 시선에 몇 번이나 구원받았을까.
궁녀들이 들어와 상을 치우고 침상을 마련했다. 그들의 잠자리는 금위대장과 금위군이 뜬눈으로 지킬 것이다. 류제가 제 방으로 가기 전 걱정스레 말했다.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답답한 생활이 될 거다. 여가 아니었다면 그대는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염치가 없구나.”
“그 말은 됐다니까. 말했잖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갈 곳도 없고.”
궁녀들이 깔아준 요에 뒹굴거리던 재경이 씁쓸하게 웃으며 오뚝이를 기우뚱거렸다.
류제는 그런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경은 이곳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다. 과욕은 금물이다.
순순히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것을. 억지로 마음을 몰아붙였다간 재경은 어느 순간 들고양이처럼 궐을 나가버릴 것이다.
“기특하구나.”
“벼… 별로 기특할 것까지야.”
귓바퀴를 붉힌 재경이 고개를 베개 위에 처박자 귀여움을 참지 못한 류제가 곁에 누워 깊게 포옹했다.
설마 손장난을 하자고 다가온 줄 착각한 재경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거리감이 가까워지니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옷 위로 느껴지는 류제의 따뜻한 체온이 두렵게도 따뜻하다. 두근두근 느껴지는 것이 류제의 심장 소리인가, 아니면 자신의 심장 소리인가.
“여는 그대만 무사하면 돼.”
“…….”
“그대와 함께 있다는 걸 만끽하고 싶어. 조금만 이대로 있어다오.”
류제는 그 이상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다. 재경도 기대했던 손장난이 아니라 아쉬웠지만 자신을 품어주는 그 체온만으로 좋았다.
류제는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류제가 좋다. 류제는 그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내주는 사람이었다.
“알았어.”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이상 늘 곁에 있고 싶다. 류제만큼은 그를 내버려 두고 홀로 떠나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재경은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독살 미수 건 이후로 류제의 신경은 예민해졌다. 별기은 삭다례 이후 그를 노렸던 역모자들이 흩어져서 때를 기다리다 달의 무녀에게 시선을 돌린 것을 보자니 속이 끓는다.
기어코 그를 몰락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황제의 자리에서 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
방증으로 능여 대군은 늙은 상궁을 변호하지 않았다. 재경의 상에 독을 넣은 상궁은 결국 입을 굳게 다물고 심문 전에 숨겼던 칼로 자결했다.
겸연하지만 말했던 대로 독살 미수 건의 배후를 붙잡기 전까지 재경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류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재경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황제가 돌아왔다며 소문이 떠돌았다.
능여 대군의 사람이라 추정되는 수십의 사람들이 시체로 나갔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연관 있는 자는 추후를 위해 숙청했다. 자비를 베풀었더니 돌아오는 것이 가장 소중한 자를 향한 위협이라면 너그러울 필요가 없다.
“그럼 꽃놀이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참아다오. 꽃놀이는 그때 하도록 하지.”
“꽃이 져버리면 어떻게 하게?”
“걱정하지 마라. 길게 끌지는 않을 거다.”
오늘도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작년에는 신당에 꼼짝없이 갇혀있느라 꽃놀이를 가지 못했던 재경은 올해마저도 전각 안에서만 심심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슬슬 지루해졌다.
류제는 매번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어르고 달래지만 벌써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꽃놀이 갔다 오는 게 뭐 어때서.”
툴툴거린 재경이 꽃들이 만개한 정원을 창문 밖에서 흘겼다. 정자에 사이좋게 앉아 류제와 함께 꽃놀이를 즐길 거라는 상상은 도저히 실현될 기미가 없다.
그때 이후로 신변에 위협을 느꼈냐고 묻는다면 단언하며 고개를 저을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전각에만 있는 것은 싫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무료하게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던 재경이 반짝 눈을 빛냈다.
류제 몰래 꽃놀이를 준비하는 거야.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나졸 아저씨들을 데리고 가면 별말 않겠지. 꽃놀이를 가겠다 통보하고 걱정만 태산인 류제가 날 찾아왔을 때 깜짝 꽃놀이를 시켜줘야지.
“요즘 일만 하니 내시 아저씨도 걱정을 하셨어. 쉬게 해주는 것도 좋겠지. 암… 난 달의 무녀인걸.”
재경이 제멋대로인 행동을 합리화했다. 류제는 근래 잠을 미루고 온종일 집무만 본다고 한다. 궐 내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황제의 과로를 걱정한다는 말이 돌아올 정도였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독기가 잔뜩 들어서 이러다간 일 치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꽃놀이를 한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생각이 앞선 재경은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했다. 독살 미수 건 이후로 간식도 엄격하게 관리되어서 다과거리는 구하지 못했지만 바람을 쐬는 정도면 류제도 수긍할 거다.
게다가 요즘 분주해서 얼굴도 잘 못 봤잖아. 류제는 잠깐 들렀다가 획 돌아가 버리고.
재경이 실실 웃으면서 보자기에 꽃놀이할 때 가지고 갈 것들을 쑤셔 박았다. 금이 간 오뚝이 인형, 책, 공깃돌 등등.
“아저씨! 잠깐 와봐.”
재경이 창문 밖 나졸들을 불렀다.
“또 함께 작당하자 하신다면 절대 안 할 겁니다.”
“꽃놀이 가려는 거야.”
“절대로 안 됩니다. 폐하께서 필히…….”
“내가 다 알아서 말할 거니까 아저씨들은 눈치 안 봐도 돼.”
떨떠름한 나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저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는 한번 결심하면 곧 죽어도 나쁜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부터 포기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녀가 오늘까지 참은 것이 대단한 거겠지.
일단 상관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아 꽃놀이를 가기 전 재경을 지키는 나졸 둘 중 하나가 금위대장에게 허락을 받으러 떠났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은 가끔 교대로 근무했던 다른 나졸이었다. 그는 허락을 구하러 왔던 위병은 금위대장의 명령으로 볼일이 있어 다른 곳에 갔다고 전해주었다.
“허락하셨습니다.”
“진짜? 웬일이래.”
“대신 폐하께 혼나는 건 무녀님만 하시라고 덧붙이셨어요.”
“그건 무녀님이 잘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야 저희들도 화를 입을 걱정 없겠네요.”
“치사하게 그렇게 빠져나가다니.”
허락 안 하면 멋대로 가려고 했지만 금위대장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재경이 툴툴거리면서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정원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겨울에 재경이 눈사람을 만들었던 그곳은 유채꽃은 물론이고 예쁜 봄꽃들이 흐드러져서 보기만 해도 행복이 차올랐다.
옛날 할머니와 할아범과 같이 꽃놀이를 가서 놀았던 추억이 떠오른 재경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졸들에게 자랑하듯 물었다. 남들과 함께 꽃놀이를 가는 것이 무척 오랜만의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들떴다.
“아저씨들은 화전 먹어본 적 있어?”
“먹어본 적도 있고 해본 적도 있지요.”
“해보다니? 화전을 만들어봤다고?”
“아뇨, 다른 화전입니다. 꽃싸움을 해봤다고요. 꽃을 꺾어서 그 줄기로 끊어지고 안 끊어지고를 내기하는 겁니다. 단순하지만 재미있어요.”
그럼 이따가 류제랑 같이 해봐야지. 재경이 꽃밭으로 뜀박질을 했다. 아직도 꽃놀이가 좋은 시절인 달의 무녀를 뒤에서 지켜보던 나졸들이 피식 웃었다.
달의 무녀라고 해서 뭔가 다를까 했더니 보다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들고 있는 창을 닦던 나졸이 쯧 혀를 찼다. 재경이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는 거야?”
“가장 줄기가 단단해 보이는 꽃을 꺾어서 교차한 다음 서로 당기면 됩니다.”
창을 닦던 나졸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날이 포근하니 나른한 건지 다른 나졸은 이때다 싶어 주변에 쭈그려 앉아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가 한눈을 파는 동안 꽃을 하나 꺾은 재경과 창을 닦던 나졸이 대결을 했다. 화전의 경험이 있는 나졸이 이겼다.
“예, 제 승리군요.”
“반칙 쓴 거지?”
“하하, 그럼 다시 합시다.”
이런 놀이에서 지는 건 납득 못 하는 재경이 질겨 보이는 꽃을 찾아 몇 번이고 대결을 요청했지만 다섯 번 중 고작 한 번만 이길 수 있었다. 그가 그럼 그렇다며 박장대소했다.
“다 속임수가 있는 겁니다. 이기겠다고 세게 당기면 금방 끊어집니다.”
“역시 그럴 것 같았어. 이따 류제한테 써먹어야지. 류제한테는 알려주면 안 된다?”
나졸이 속 좋게 웃었다. 재경은 정말로 세게 당기면 먼저 끊어지는 건가 양손으로 몇 번 실험을 했다. 날이 좋아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졸이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지간히 달의 무녀를 애지중지하는지 시종들은 전부 내팽개친 채 헐레벌떡 저주받은 나유타의 황제가 뛰어오고 있었다.
“말도 없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단단히 화가 난 류제가 호통을 쳤다. 꺾어서 가지고 놀던 꽃을 뒤로 숨긴 재경이 몰래 간 거 아니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대장한테 허락받았는걸. 그렇지?”
“금위대장이 허락을 내렸다고?”
류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졸들을 흘겼으나 그들도 재경처럼 모르쇠로 고개를 돌렸다. 알다마다. 재경이 멋대로 벌인 일이겠지.
류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류제에게 재경이 어서 앉으라며 옆자리를 비워주었다.
“일만 하다가 저승 가면 이승이 무슨 재미야. 바빠도 봄에는 꽃놀이를 가야지. 올해 봄은 다시 안 돌아온다고.”
“어쩐지 쉽게 물러난다 했더니. 그래도 허락 받을 생각을 했다니 대견하구나.”
“당연하지. 나도 대장 아저씨한테 혼나는 건 싫어.”
“여에게 혼나는 건 괜찮고? 나 참.”
예전 같았으면 꽃놀이 가고 싶다고 생각이 듦과 동시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나가버렸을 텐데 적어도 붙여놓은 나졸들을 데리고 간다는 정신머리가 박혀있으니 그나마 마음 놓였다.
이런 좋은 날 신당에 있던 무렵처럼 방 안에 틀어박히게 하는 것도 죄스러우니 오늘만큼은 일탈을 용서하도록 할까.
“위험하니 다음은 아니 된다.”
“히히, 충분해.”
재경이 만들었던 화관을 류제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새까만 검은 머리에 오른 노란색 유채꽃으로 만든 화관이 썩 잘 어울렸다.
“화전이라고 알아?”
“꽃으로 부친 전 말인가? 그대가 말한 적이 있었지.”
“아니, 꽃을 가지고 싸우는 거. 저 아저씨가 알려준 거야.”
“들어본 적이 없구나. 궐 밖에서 유행하는 놀이인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소리는 알고 있으나 꽃으로 싸움을 하다니. 꽃놀이에 관심이 없던 류제도 처음 들어보는 놀이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자 재경에게 화전놀이를 알려주었던 나졸이 다가와서 설명을 해주었다.
“줄기가 질겨 보이는 꽃을 꺾어서 상대방의 꽃과 교차한 다음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금방 배우겠구나.”
류제는 싱긋 웃으며 설명을 마친 나졸의 얼굴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금위군 소속이 아닌가? 얼굴이 낯설다.
“본 적 없는 자로군.”
“되게 자주 봤는데. 네가 너무 바빠서 그래.”
재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순간 표정이 움찔거린 것은 착각일까. 바로 그때였다.
“님… 무녀님! 말씀도 안 들으시고 어디 계신 겁니까! 대장님께서 꽃놀이는 절대 안 된다고―”
돌아오다가 습격을 당하고 기절해 있던 나졸이 재경을 찾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류제가 거짓말을 한 재경을 노려보았다. 재경은 금시초문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냐! 진짜로 허락 맡았어.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럼요.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창을 닦던 그 나졸이 사람 좋은 얼굴로 재경에게 창을 휘둘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익숙한 얼굴을 한 나졸에게 기꺼이 영역을 허가했던 재경의 심장에 커다란 날붙이가 다가왔다. 그 찰나를 막아선 자가 류제였다.
“감히 뭐 하는 짓이냐! 폐… 폐하! 폐하!”
“깜… 깜짝… 류제!”
“빌어먹을 놈이… 감히……!”
몸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본 류제의 동공이 새빨갛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는 달의 무녀의 것이 아니다. 꿰뚫린 것은 류제의 뱃가죽이었다.
간발의 차로 공격을 저지한 류제가 나졸을 제압했다.
과연 전쟁 중에 괴물이라고 불렸던 정신력이다. 류제에게 치명상을 입힌 자객이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본래 저주는 다른 이의 피에 크게 반응하니 불행 중 다행이다. 흥분했다가는 제 육체가 망가질 것임을 안 저주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어금니 사이에 숨겨놓은 독약을 씹어 삼키려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 낸 류제가 다른 이를 시켜 포박하게 했다.
“허억……. 헉… 괘씸한… 놈이.”
“괜찮아? 의… 의원! 의원을 불러! 아무도 없어?!”
주변을 순찰하던 위병들이 재경의 외침을 듣고 뛰어왔다. 상처가 깊은지 류제의 배에서 피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제길… 이거 놔. 젠장!”
“아저씨… 왜 류제를……!”
“제 꾀에 넘어간 거지.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달의 무녀. 언제까지 유유자적 살 수 있을까.”
나졸인 척했던 자객이 으르렁거렸다. 곧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에 솜이 틀어 막힌 그는 포승줄이 묶여 꼼짝도 못 하고 끌려갔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먼저 달려온 나졸들이 응급 처치를 한다고 띠를 풀어 피를 막고 들것에 옮겼다.
재경도 따라가려고 했으나 성수청에서 온 이들에게 붙들렸다.
“류제 옆에 있고 싶어. 나도…….”
“아니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무녀님을 지키시려다가 화를 입으신 겁니다. 곁에 보이면 폐하께서 더욱 무리하시게 되니 제발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재경은 소름이 끼쳤다.
‘제 꾀에 넘어간 거지.’
자객이 한 말의 의미를 그는 그제야 이해했다. 독으로 그를 죽이려고 한 의도도 함정이다.
류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창으로 그를 노린 것은, 그를 지키려는 류제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경은 눈물이 고였다. 다른 이들조차 알아차린 것이다. 류제가 나를 좋아해서 그래. 그 마음을 알고 이용하는 거야. 류제가 날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만났던 때처럼 류제가 나를 그저 도구 취급만 했더라면 류제는 날 위해 몸을 던지지 않았을 텐데. 외롭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류제의 약점을 자처했다.
“나… 난…….”
“안전한 곳에 대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폐하께서는 필히 무사하실 것입니다.”
멍청한 내가 멋대로 굴어서 그래.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가까이 있으면 류제도 날 홀로 두고 할머니처럼 죽고 말… 테지.
류제의 배에서 새빨간 피가 흘렀었다. 손바닥에 살짝 나뭇가지가 베였던 것과는 크게 다른 만큼의 생명이 흘러나왔다.
재경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류제가 죽는다. 할머니나 할아범처럼 나를 두고 죽어버린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신당으로 향하는 동안 재경은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류제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 * *
류제가 눈을 뜨자 다음 날 새벽이 밝았다. 상처가 깊었어도 독이 들지 않는 만큼 본디 몸이 튼튼해서 출혈은 금방 멈추었다.
발을 디디지 못할 만큼 빈혈이 일었지만 류제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경의 무사를 먼저 확인했다.
곁을 지키던 금위대장이 달의 무녀는 성수청이 신당에서 보호 중이라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안심한 류제가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나.”
“역시 금위군이 아닙니다. 신원을 속이고 오랜 시간 무녀님의 곁에 잠입한 것 같습니다. 입을 강제로 열게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재경의 상태는 어떻지.”
“…외람되오나 크게 충격받으신 듯했습니다.”
“빌어먹을 것이…….”
재경을 덮치려고 했던 소속 불명의 자객을 향해 류제가 비속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시간을 들여 달의 무녀의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사람을 쉽게 믿는 재경 앞에서 배신하고 죽이려고 들다니. 용서할 수 없다.
달의 무녀와 황제가 신분을 위장한 자객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조보는 궐 내에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곧 모진 고문에 자객이 입을 열었다.
한 핏줄로서 반역의 죄를 용서하여 외가에서 몸을 사리던 능여 대군의 명이었다는 말이 실토되었다.
처음부터 황제를 노리였으나 별기은 삭다례 때 실패하고 달의 무녀를 노리는 척한 것이라고. 자객은 죽여 달라며 울부짖었다.
류제는 놀라지 않았다. 풀어준 꼬리의 뿌리가 자라나 물을 흐리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자객의 머리가 추락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류제는 재종형제를 궐로 들여 죄를 물었다. 역모를 꾸민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죄를 짓다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능여군이여, 네 아들은 너를 아비로 알지 못할 것이며, 너는 대역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유타의 가장 천한 자리에 묻힌 무덤은 멧돼지들에게 파헤쳐지겠지.”
“웃기지 마라, 이 괴물아. 나는 나유타를 위했을 뿐이다. 네깟 괴물이 다스리는 나라는 망하고 말 테지! 달의 무녀는 무슨. 괴물은 반드시 나유타를 재앙으로 몰고 갈 것임을. 누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단 말이냐! 잘못한 건 너다! 너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어야 했어!”
류제가 싸늘한 눈으로 능여 대군을 흘겼다. 제사장이나 다른 무리들에게 순진하게 휘둘리는 줄만 알았더니 욕심이 커진 모양이군.
가만히 있었더라면 생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제 손으로 내 혈육을 처단하는 운명은 불쾌하다.
어찌 되었건 당장 나유타의 우두머리는 류제다. 재경과 함께 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황제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두 번이나 역모를 꾀한 능여 대군의 목이 저잣거리에 걸렸다. 고귀한 황족임을 부정하는 최악의 굴욕이다.
능여 대군의 어린 아들은 류제의 밑으로 입양되었다. 결국 류제가 의도하던 대로 되었으나 제 아비를 죽인 자를 보고 꺄르르 웃는 아이를 보자니 안타깝다. 이 일에 휘말린 자들은 성수청을 찾아 죄를 씻는 기도를 올렸다.
피의 숙청이 끝났지만 누구도 황제가 유해졌다 말하지 못했다. 한시름 놓은 류제는 신당으로 피신을 간 재경을 부르기 위해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냈다.
서둘러 일을 처리해서 재경이 안심할 수 있도록 정신을 쏟아붓느라 무녀에게서 서신이 한 통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류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답변이 담긴 서신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까닭은 들었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너희를 믿고 무녀를 맡겼건만!”
“무녀님께서 도통 신당에서 나오지 않으시려 해서 걱정이었습니다. 성수청에서는 폐하께서 무녀님을 설득을 해주십사…….”
“신당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그 아이가 어째서!”
“송구하오나 그 까닭을 모르겠사옵니다.”
류제는 문득 마지막에 보았던 재경의 안색이 떠올랐다.
이제 안전하다는데 싫어하는 곳에 틀어박혀 버린 까닭이 무엇이냐. 무서운 것을 보았느냐. 류제가 서둘러서 신당으로 향했다.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성수청 주술사들과 관리들을 지나친 채 류제가 신당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컴컴한 신당 안은 빈 듯하지만 인기척이 있었다.
“돌아가!”
“재경아.”
목소리가 서까래 위에서 들려왔다. 도망갈 새도 없이 놀라 손이 닿지 못하도록 몸을 숨긴 재경은 제 마음과 달리 냉정하게 말했다.
뻣뻣하게 고개를 드니 희끗희끗 재경의 소매만 희끗하게 보였다. 숨을 헐떡거리던 류제가 조금씩 다가갔다.
“왜 그러느냐? 응? 무엇이 그리 무서워. 무서운 것들은 여가 다 잠재웠으니 걱정 말라.”
“…….”
“그대를 위협하는 건 없어. 그러니 거처로 돌아가자꾸나.”
“널 보는 건 초하룻날로 족해. 다시는 찾아오지 마.”
“재경아!”
“가라고 말했어!”
재경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으나 류제의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재경이 자신의 곁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해왔는데. 류제가 재경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려오지 않는다면 강제로 내려주마. 고집을 부려서 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다오.”
“잡지 마!”
재경이 싫다고 버둥거렸지만 류제는 놓아주지 않았다.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서까래에 붙은 재경은 씨름을 하다 툭 류제의 위에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신당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재경은 그대로 품에 안겼다.
숨이 가뜩한 재경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역력했다. 무언가 슬픈 일이 있었구나. 류제는 마음이 아파서 미간을 구겼다.
“여에게 왜 이러는 것이냐.”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했는데 다시는 오지 말라 하다니. 그 마음이 두려워 류제는 상처받고 말았다.
재경이 시선을 외면했다. 재경도 류제의 안위를 들었지만 직접 보니 또 감사해서 깊게 포옹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류제가 다칠 가능성이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났다. 다시는 사람을 잃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난 네가 싫어. 날 내버려 둬.”
“널 지켜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냐.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아냐! 나… 나 때문에 다친 거잖아. 사과하지 마.”
재경이 류제를 밀쳤다. 그때 기억이 나자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도 잃고, 할아범도 잃었지만 류제가 곁에 있으니까 견뎠다.
그런데 류제까지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슬픈 기억이 몰려왔다. 재경의 눈물이 눈물 자국을 따라 흘러내렸다.
재경의 볼을 쓰다듬은 류제가 따뜻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재경이 손대지 말라며 손을 쳐냈지만 류제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가 다친 게 이다지도 두려운 것이냐?”
“그 사람이 그랬어. 나 때문이야. 꽃놀이니 뭐니 멋대로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매번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그대 때문에 다친 것이 아니야. 자객은 애초부터 여를 노렸어.”
“뭐가 되었든 싫어. 너도 날 홀로 두고 죽을 거지. 그렇지?”
소중한 사람은 이제 류제밖에 안 남았는데 그 때문에 류제가 죽는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사랑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그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류제는 아이처럼 울부짖는 재경을 어화둥둥 달랬다. 두려움에 정신이 먹힌 재경은 좀처럼 눈물을 기칠 기색이 없었다.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류제만 바라보았는데 목숨이 노려지니 상처받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식으로 재경의 마음을 확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할머니만큼 좋아한다는 충분히 무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류제는 어찌해야 할꼬 고민하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대가 여의 곁에 있어준다면 여는 그대를 외롭게 하지 않겠다 약조하마.”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다. 그러니 들고양이처럼 여의 곁을 훌쩍 떠나지 말아다오. 늘 그대 곁에 있어주겠다 맹세하마. 제발 그만 울거라. 응?”
“그러면서 또 다칠 거잖아. 나 때문에… 네가 날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재경은 다 자기 잘못 같았다. 류제와 친해지고 싶다 과욕을 부린 제 마음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가 신당에만 있으면 류제는 무사할 거야.
그런 두려움을 없애주려는 듯 류제가 재경을 다독였다.
“그래도 여는 그대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그러면 안 돼. 너까지 잃으면 난… 이제 난 네가 없으면 안 되는데.”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류제는 괜찮다며 등을 도닥였다. 류제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감동했다. 마음을 밀어붙일 것도 없이 그는 재경의 안에서 커다란 나무였다.
“절대 다치지 않겠다. 그대를 두고 떠나지도 않아.”
“하지만……!”
“여도 그대가 없으면 안 된다. 제발 멀어지려고 하지 말아다오.”
“하지만 네가 죽느니 차라리 내가 머… 멀어지는 게 나아.”
“그대가 여의 곁에 없으면 여는 그대가 여를 잃은 만큼 마음이 찢어진다. 죽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일이지 않느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재경이 류제의 등줄기를 붙잡고 물었다. 류제는 몇 번이고 재경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만 울고 다과를 먹자꾸나. 실컷 우니 배가 고프잖아. 응? 마음껏 궐을 돌아다녀도 된다. 꽃놀이도 가고, 같이 책도 읽고. 그대에게 이 좁은 곳은 필히 심심할 거야.”
재경은 따뜻한 품에 마음이 점점 녹아들었다. 또다시 자신 때문에 류제가 위험해지면 어쩌나 고민하던 재경이 끝내 답했다.
“…응.”
찌르는 듯이 슬프고도 환하게 웃은 류제가 그를 안아 사당 밖으로 나갔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자구나. 여에게 그대가 필요한 것인데 그대 또한 여가 필요하다 말하다니.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필히 한데 묶을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다.
“재경아, 여는 그대를 사랑한다. 이 마음을 그만둘 수 없구나.”
훌쩍거리던 재경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류제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재경의 뒤통수를 상냥하게 감싸 안은 류제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해준 대답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집착인지 아니면 전부 파헤쳐진 그의 마음속에서 드러난 진심인지 모르지만 재경이 품고 있는 마음이 깊은 것임은 알았다.
류제가 신당 문을 열었다. 비쳐지는 밝은 불빛 속에서 류제는 언젠가 본 것 같은 여릿한 미소를 보았다. 그는 몸에 흐르는 저주가 그의 대에서 끊길 것임을 직감했다.
신당에 틀어박힌 달의 무녀를 설득해 안고 나온 류제에게 성수청 관리들이 뛰어왔다. 류제의 발목에 감겨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자유로워진 발걸음은 환한 빛으로 향했다.
* * *
두 번의 역모를 끝으로 황제의 자격에 반하는 이들은 없었다. 류제도 재경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위협이 될 만한 일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약조대로 재경의 곁을 지켰다. 수많은 노력을 들여서야 그 믿음을 회복한 재경은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그를 말미암아 류제는 황제의 자리를 지키는 한 달의 무녀인 재경은 불안에 잠길 것임을 알고 계획했던 일을 실천했다.
그것은 류제의 꿈이었다. 양친이 독살당하고, 저주받은 몸으로라도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지켰지만 재경이 있다면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자와 한적하게 살아가는 꿈은 과연 이룰 수 있는가.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궐을 떠나는 것이 들고양이를 붙들어 놓는 것보다 알맞은 길이다.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저주받은 황제는 달에서 내려온 고양이의 덕을 빌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끄는 현왕이 되었다.
궐을 나갈 때까지 부인을 들이지 않은 그는 반역의 죄를 저질러 처형당한 재종형제의 아들을 태자로 올렸다.
그의 양아들이 황위를 이을 자격이 되었을 때 그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한적하고 풍경 좋은 곳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달의 무녀와 여생을 보냈다.
긴 시간 끝에 꿈을 이룬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요, 고양이는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물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