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달과 고양이 (6)
꽝꽝 언 눈이 빙판을 만들어 길목에는 미끄럽지 말라 짚이 깔렸다. 머무는 처소도 가까우니 초하룻날 의식은 밀회를 하듯 간편하게 해치워도 될 것을 새로 출범한 성수청도 곧 죽어도 이전 제사장의 원리원칙주의를 이어나갈 생각인 것 같다.
2월 초하룻날 여느 때와 같이 시월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옛날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며 남은 나날들을 손에 꼽던 애틋한 감정은 수그러든 채 무녀 대면의 장에서 만났다.
류제가 들어오기 전까지 발 안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던 재경은 반나절 전에도 봤었던 류제를 무덤덤하게 반겼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는 곤룡포를 입고 있던 류제가 십이장복에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몸이 안 좋아진 건가?”
“그것이 아니라 내내 함께 있었는데 오랫동안 널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경이 툴툴거리면서 소반 위에 있는 송편을 집어서 날름 입에 넣었다. 아파서 살이 홀쭉 빠졌던 재경은 허약해진 몸을 보충하려는 듯 식욕이 왕성해졌다.
식성이 좋으면 이제 다시 건강하다는 거겠지. 류제가 하하 웃으며 그런 재경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
“여도 익숙하지 않구나. 불만이라면 언제든 거처를 바꿔주마.”
“싫어.”
신당에 좋은 추억이 없던 재경이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빤히 알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다니. 류제도 가끔 너무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재경이 무녀 화장을 한 얼굴로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떴다.
“내가 신당에 돌아갔으면 좋겠어?”
“여는 그대의 의견을 존중하려 하였다.”
류제가 면류관을 벗으며 변명했다. 물론 그의 마음이야 계속 재경과 함께 있고 싶지만 저번 달 동안 재경이 자신에게 질려 신당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는가.
만에 하나로 가정을 해보았을 뿐이었다. 재경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재경이 떠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다는 마음을 숨기듯 류제가 애써 외면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여도 생소하구나. 별기은 삭다례로 성수청 청사에서 의식을 치렀으니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인가.”
“대면장은 두 달포 만이네. 너와 있으니 시간이 빨리 흘러.”
재경이 흔쾌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간 류제는 눈을 내리깔았다. 재경은 제사장의 농간으로 신당에 있었을 무렵에는 계속 외로운 처지였다.
늘 자신과 만날 오직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고독하게 갇혀있던 재경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내며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재경은 더 이상 감정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지 않았다. 재경은 이를 다시 실감하고 이상하다 느낀 것이다.
“오늘도 글공부할 거야? 해가 지면 바로 돌아갈 거지?”
“과연 어찌할꼬.”
류제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재경이 거처를 옮긴 이후 매일같이 글공부를 봐주고 있으니 이제 굳이 초하루가 아니더라도 재경은 언제든지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초하룻날은 오로지 자신과 달의 무녀만의 날이라고 시나브로 생각이 바뀐 류제는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이 시간이 몹시 아까웠다.
의식이 비효율적이라며 매번 빨리 돌아가 버리려고 했던 때와는 다르다.
류제가 답하지 않자 재경이 안절부절못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걸 보고 짐짓 모르는 척 류제가 헛기침을 했다.
“둘이서 눈치 없이 담소를 나눌 날은 초하루밖에 없지 않느냐. 돌아가기엔 아쉽구나.”
류제가 손을 들어 마음이 풀린 재경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재경은 자신의 마음이 들통 난 것 같아서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매일매일 만나는데 초하룻날인 오늘도 밤을 새워서 놀고 싶다는 말을 부끄럽게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필히 철부지 바보라고 생각할 거다.
“흐… 흥 당연하지.”
귓바퀴가 새빨개진 재경이 투덜거리며 홀짝 차를 마셨다. 조금만 더 놀리면 얼굴까지 아주 빨개질 것 같아 너무 귀여워서 류제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손도 가슴도 간질거려서 몸이 멋대로 들썩거리는 것만 같았다.
“축복이나 내려줄게.”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핑계로 서둘러 옆에 둔 월계수 가지를 집은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끄러운 얼굴을 가렸다.
아, 참으로 귀엽다. 류제는 어쩔 줄 몰라지는 이 심정이 재경에게 사랑을 느껴서인 건지 아니면 저주가 때를 기다리며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불길한 기분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달려가서 꽉 껴안아 줬을 테다만.
“폐하의 무사안녕과 만사형통을 달이 비춰 축복하길 기원하옵나이다.”
“만백성들의 금신에 평온이 있기를.”
류제에게 배워서 간신히 인사말을 외운 재경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재경이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 들고 있던 월계수 가지로 회오리 가마가 보이는 류제의 정수리를 씻으려고 할 때였다. 정리되지 않은 거친 나무껍질 하나가 재경의 손바닥에 세게 박히고 말았다.
“아야!”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통증에 재경이 놀라 월계수 가지를 놓쳤다. 손바닥을 보니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로 길게 가시가 박혀있었다.
궐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손에 있던 굳은살이 다 벗겨지는 바람에 약한 가시도 손에 잘 박혔다. 재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에 있던 가시를 빼냈다.
“우앗!”
류제에게 다친 손의 손목을 잡혀버린 재경은 류제의 힘에 못 이겨 우당탕 뒤로 넘어져 버렸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재경이 류제를 노려보았다.
재경을 강하게 억누른 류제가 재경의 손바닥을 쥐어짜 내듯 핥았다. 그의 뜨거운 혀가 재경의 손바닥을 농락했다.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에 어린 붉은 동공이 싸늘하게 재경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차!”
피 때문이구나. 그것 때문에 초하룻날 저주가 이르게 발현되었다. 그가 허둥거리던 동시에 해가 졌다. 위험하다. 재경이 버둥거리며 근처에 떨어진 월계수 가지를 집으려고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의 맛에 흠뻑 취한 건지 류제가 재경을 깔아뭉개고 핥고 있던 손바닥을 이빨로 강하게 물었다. 작게 터졌던 상처가 류제의 입 안에서 희롱당했다. 류제의 입가에서 재경의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류제, 잠깐만. 아파……!”
저주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재경을 억눌렀다. 재경은 류제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주가 발현된 류제가 웃는 것은 처음 봤다.
그의 미소는 다정하지 않고 욕망만 가득 차있었다. 피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자 저주가 재경의 손바닥을 소젖을 쥐어짜듯 꽈악 눌렀다. 그가 억지로 혓바닥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혀가 새빨갛다.
“적당히, 해!”
류제가 오른손에 열중해 있을 때 재경이 다른 손으로 간신히 월계수 가지를 들어 류제의 머리를 내려쳤다. 상처를 헤집은 류제에 대한 다분히 악의 가득한 보복이었지만 덕분에 류제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함부로 정신 줄을 놓지 마.”
재경이 호통을 쳤다. 본래라면 축복을 받으면 금방 머리가 가라앉아야 하는데 오늘따라 제어가 되지 않았다. 재경의 오른손을 쥐었던 우악스러운 힘은 풀렸지만 류제는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류제는 흥분을 제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밑에 깔린 재경을 내려다보았다. 피 냄새. 달의 무녀의 힘으로 초하루의 저주가 물러갔지만 피를 좋아하는 저주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 류제를 혼란스럽게 했다.
“무거우니 비켜!”
가시에 찔린 얕은 상처가 류제 때문에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재경이 아프다고 불평했지만 류제는 어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필히 축복을 받았는데도 저주는 어중이떠중이처럼 그를 괴롭혔다. 저주가 떠맡았던 욕망을 류제가 대신 오롯이 건네받은 것 같았다.
지배욕. 파괴욕. 정복욕. 소유욕. 한 낱말로 설명하기 힘든 욕망이 머리에서부터 심장까지 사람을 흔들었다.
“피… 피 때문에… 송구하다. 참으려고 했는데.”
류제의 동공이 평범하게 돌아왔다. 싸늘하면서도 흠칫할 정도로 기묘한 붉은 동공이 아닌 검은색 동공에 열기가 떴다. 요망한 달의 무녀가 자신의 마음을 희롱하고 있었다.
“축복이 듣지 않는 건가. 어… 어째서?”
“모르겠구나. 몸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
“사람을 불러야 하나? 아니면 다시―”
당황해서 말을 늘어놓는 재경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버둥거리다 입이 막혀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자신의 피 맛을 타인의 입을 통해 맛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재경은 류제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멍청해졌다.
“으읍……!”
탐욕스러운 혀가 재경을 정복한다. 피 냄새에 취해 눈이 풀린 류제는 곧이어 자신이 욕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본래 타인을 정복하고 사냥해야 하는 저주의 본성이 달의 무녀의 축복으로 억눌러짐으로써 이성을 되찾았지만 피의 여파로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저주의 본성이 흔적처럼 남아버린 것이다.
“하아… 습…….”
“아, 우읍… 응……!”
그 본성은 류제의 여린 짝사랑과 마주해서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만들어냈다. 류제는 미칠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빤히 알았지만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틀어 막힌 입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그가 평소의 수배는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다급하게 부딪히는 입술에 서로의 타액이 묻어 달이 비친 수면처럼 번들거렸다.
외설스러운 입맞춤을 퍼붓는 사람은 일방적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도 타인의 물컹한 혀가 제 입 속을 휘감는 낯선 감각이 싫은 것은 아닌 듯했다.
재경은 혀의 뿌리에서부터 간질간질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아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류제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던 재경의 손이 류제의 심장에 입술처럼 맞닿은 채 주먹을 꼭 쥐었다. 은은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류제가 왜 입을 맞추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재경은 단순하게 결론 내렸다. 어정쩡하게 억눌러진 저주 때문이라고.
찢긴 손바닥의 피를 계기로 달의 무녀인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저주가 발현된 거라고 대강 치부한 재경은 그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강하게 밀어붙이는 류제의 힘에 못 이겨 고개를 틀었다. 코가 자꾸 부딪혀서 시큰거렸다.
“아으… 자… 자까… 우웃…….”
“후우…….”
성급하게 앞서나가는 마음을 참아내는 게 답답한지 류제가 곤복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살갗에 수컷의 향기를 뿜어내는 땀이 진득하게 흘렀다.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곤복을 벗어 던진 그는 두루마기와 가장 아래에 입은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었다. 번거로운 옷고름 때문에 잠시 입술을 뗀 류제에게 재경이 색색거리며 물었다. 목소리에서 본인은 인식하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하아… 후우… 어… 이제 괜찮아?”
“…아니.”
자신에 의해 더럽혀지고 있는 재경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던 류제가 어렵게 답했다.
바닥에 짓눌린 밝은 갈색 머리칼과 앞섶이 벌어진 무녀의 옷, 숨이 부족해 상기된 얼굴과 조금 지워진 무녀 화장은 천상에 머물던 고귀한 선인을 땅으로 추락시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피에 흐르는 저주도, 그의 마음도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같았다. 재경이 보채고 있다는 헛것을 보게 된다.
“의원을 부르자.”
“쉬잇…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대만 있으면 괜찮아.”
지금 류제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재경은 까마득한 얼굴로 류제를 부채질했다. 류제의 손이 무녀의 품속으로 들어가 축축한 등을 쓸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손에 낭창하게 잡혔다.
오롯이 재경을 향하는 이 욕구만 풀어내면 통제가 되지 않는 마음은 금방 사그라들 것이다. 류제는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류제의 이마가 재경과 서로 천천히 맞닿았다. 류제가 다시 입을 맞추지 않자 재경은 아직도 짐작 못 하는 얼굴로 류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간… 간지러워. 무얼 해야 하는 건데? 입에 혀… 혀로?”
“쉿. 그런 말 하면 여는 저주를 참지 못한다. 가만히…….”
“가만히 있는 건 무얼 하는 게 아니잖아.”
아무리 어정쩡하게 억눌러진 저주 때문이라지만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몸을 더듬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류제를 재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니. 그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닌가? 입에 혀를 집어넣는 걸로는 안 되는 거야?
“저기, 류제… 잠… 어… 어디를 만지는 거야?”
재경의 등을 제 가슴팍에 붙여 치밀하게 감싸 안은 류제가 그의 상기된 얼굴을 재경의 귓가에 붙였다. 류제의 손이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목적지에 도달한 손이 재경 스스로를 포함한 누구도 제대로 쥔 적 없는 성기에 닿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끄러운 곳이 타인의 손에 부드럽게 잡히자 재경의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재경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거기는 안 돼!”
“괜찮다. 자.”
류제가 재경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그가 쥐었던 긴밀한 곳으로 대신 이끌었다. 오줌을 눌 때나 만지던 곳을 이 나라의 임금님인 류제와 함께 만지다니, 재경은 수치심에 싫다고 버둥거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더럽다고……!”
“신당에 오기 전에 목욕재계를 했지 않아.”
“하… 하… 하지만―”
“재경아.”
류제가 재경의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희롱하자 재경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공기에 노출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류제가 뒤에서 재경의 턱선과 목,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한 손으로는 재경을 강하게 밀착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재경과 함께 재경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해.”
“원래 그런 것이다. 점점 좋아질 거야.”
점점 딱딱해지는 그의 것에 재경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생소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몸은 쾌감에 솔직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무지한 이성은 자꾸만 의심을 품었다. 묘한 감각이 몸을 더욱더 들뜨게 하는데 이게 기분이 좋은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거짓말……! 나, 나는 이런 적이 없었어.”
“집중해야지.”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류제가 재경의 허벅다리 사이로 똑같이 흥분한 그의 것을 밀어 넣었다.
서로 맞닿아 땀으로 축축해진 재경의 허벅지는 여성의 그곳처럼 뜨거웠다. 허벅다리와 손에 스치는 류제의 딱딱한 것에 재경이 오묘한 감정을 품었다.
“으… 으으…….”
“하아… 재경아.”
류제는 뒤에서 더듬거리며 속삭거리지, 몸은 이상하지, 과연 류제의 저주가 이런 방법으로 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 과부하가 걸린 재경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생소했지만 류제의 말대로 기분이 덧없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류제의 손이 스친 부분이 간질간질하고 애가 탔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훑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재경의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읏……!”
류제의 성기가 재경의 엉덩이 선과 회음부를 타고 허벅다리를 통과했다. 부드럽게 쳐내는 기둥이 재경의 음낭에 부딪혔다. 류제의 손은 여전히 재경의 손을 감싼 채 재경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쾌감에 진 재경의 버둥거림이 잦아들자 류제가 다른 손으로 재경의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곳을 왜 만지는지 재경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래쪽에서 음낭을 치는 딱딱한 류제의 것과 그의 손, 숨결이 머릿속을 텅 비웠다.
뒤에서 누군가에게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듯이 끌어안겨서 그의 숨소리와 그의 행위에 정복당하고 꼼짝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왜 이렇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류… 류제……! 으… 천… 천천히… 조금만…….”
계기가 뭐가 되었건 천박한 짓을 하는 자신을 원하는 재경이 사랑스러워서 류제는 저주에 지배되는 것처럼 정신이 나가 미칠 것 같았다.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던 투박하고 작은 재경의 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점점 차오르는 쾌감을 향해 재경과 류제 모두 함께 치달았다.
류제는 재경과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재경은 입술은 이제 됐고 이미 다른 곳에 열중하고 있었다. 류제가 재경의 유두를 만지던 손으로 재경의 입을 희롱했다. 뜨거운 혀와 꺼끌꺼끌한 입천장에 묻은 타액이 류제의 손가락을 질척질척 적셨다.
거친 숨소리가 신당 안을 조용하게 채웠다. 해가 져 어두워진 장지문 바깥에는 문을 지키는 궁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들이 의식을 빙자해 이런 외설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월당에 있는 어떠한 자도 짐작조차 못 할 거다.
함께 쾌락의 끝으로 치달아 가며 격한 숨소리를 내뱉던 재경이 끝내 하얀 체액을 내보냈다. 그에 얼마 있지 않아 류제도 재경의 허벅다리를 제 것으로 완벽하게 더럽혔다.
첫 손장난에 쉽게 사정해 버린 재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류제는 자신이 재경의 몸을 탐닉해서 손쉽게 쾌감을 분출했다는 사실이 내심 아쉬워졌다.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길게 함께하고 싶었다. 강한 쾌감 끝에 찾아오는 나른한 감각이 재경을 덮쳤다. 재경은 탈진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얇은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적실 정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린 채 처음 맛보는 생소한 쾌감을 곱씹는 재경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류제의 타액과 땀 때문에 입술 주변을 포함한 무녀 화장이 거의 다 지워졌지만 그 흐트러짐조차 사랑스럽다.
욕구를 풀어내서 저주의 여파를 잠재운 류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설레게 하는 재경의 볼에 얕게 입을 맞추었다.
“난 어린애가 아니야.”
“알고 있다.”
“그럼 왜 입을 맞추는 거지?”
귀여운 구석이 남아있던 어렸을 적, 할머니가 틈만 나면 뽀뽀를 해댔던 기억이 있던 재경이 부루퉁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류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 손으로 잃지 않았나 그 소중함의 우선순위가 잠시 헷갈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무리를 시켜 죄스럽다는 의미였다.”
“됐어. 무리한 것도 아니고. 기분도 좋았고. 그건 원래 그리 기분 좋은 거야?”
처음에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잔뜩 느끼고 나니 재미난 것을 발견한 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는 것처럼 재경이 눈가를 붉혔다.
소중한 몸을 함부로 다루게 하여 성을 내면 어쩌나 했던 류제가 턱을 뒤로 뺐다. 시선이 오갈 데 없던 그가 넌지시 난장판이 된 소반을 흘겼다.
재경은 이 신선한 행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대로 끝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신선해서 류제도 당황스러웠다.
“너만 아는 거야? 남들도 다 아는 거야?”
“아… 알겠지. 아마도.”
“넌 어떻게 알았어?”
“춘… 아… 아니. 서책?”
춘화라고 말하려다 급히 말을 바꾼 류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재경이 낯간지러운 것들을 서슴없이 물어보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다양한 서책이 있는 거구나!”
재경이 감탄사를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경은 이 행위가 친우 사이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저주를 억누를 방법을 눈치챈 거야?”
“그러면 될 것 같았다.”
“대단하네. 책을 많이 읽으니 모르는 게 없어.”
“저, 재… 재경아, 그… 혹시나 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하고 해서는 아니 된다. 절대로 안 돼.”
“다른 사람? 너랑은 했잖아. 왜 안 돼?”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행위를 다른 사람하고 하면 안 된다니.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해서 남들에게 이 일을 떠벌리고 싶어 신이 난 재경은 류제의 말을 듣고 까닭을 모르겠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행위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서 말해주려니 아직 그런 감정을 모르는 재경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식겁할 것 같고, 알려주지 않자니 어린애처럼 길 가던 아무나 붙잡고 이거 아냐면서 가르치고 다닐 것 같아 류제는 점점 무서워졌다.
“여 말고는 아니 돼.”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은데.”
“우… 우리는 사고였지만 본디 사랑하는 사이에서 하는 행위란 말이다.”
류제가 어찌할 바 모르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재경의 머리에 물음표가 뿅 떴지만 이내 느낌표로 바뀌었다.
“그럼 금위대장 아저씨는? 친절하게 인사해 줘서 좋아. 살짝 물어봐도 되나? 그 아저씨도 커지나? 궁녀 아줌마들도? 없어서 안 커지나?”
“아… 안 돼! 절대로 물어보지 말거라.”
“왜?”
“서로 좋아하는 사이여야 한다. 거리낌 없이 친하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사이여야 하는 거야.”
“너랑 나처럼? 그럼 안 되겠네. 아직 다들 그 정도로 안 친하니까.”
류제의 두루뭉술한 설명을 듣고 재경이 기적처럼 수긍했다. 류제는 재경의 시간차 공격에 당해서 잠시 비틀거렸다. 입가가 실룩거렸던 류제가 재경의 어깨를 붙잡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 날 그 정도로 좋아하고는 있는 건가?”
“뭐? 당연하지.”
“얼마나?”
유치하게 좋아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가늠하고 싶은 바람은 나유타의 황제인 류제에게도 있는 간사한 심정인가 보다. 류제가 부끄러워하며 물어보자 재경이 거리낌 없이 답했다.
“우리 할머니만큼?”
“하… 할…….”
…머니? 다른 비교 대상을 추측하던 류제가 전혀 고려하는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의 등장에 고개가 절로 삐거덕거렸다. 혹시나 기대했는데 그가 말한 좋아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간식으로 먹은 물망떡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정도의 기준이 아닐는지라는 무서운 생각이 현실로 될까 두렵다.
재경은 류제보다는 아까 그 행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재경이 은근슬쩍 주제를 바꾸어서 류제에게 조용히 찔렀다.
“그럼 아까 그… 막 문지르는 그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거라고 했지? 너랑 나만 그런 거 아니지?”
“…뭐… 그렇지.”
유사 성행위가 꽤나 흡족스러웠는지 재경은 언젠가 다음번에도 하자며 류제를 꼬여낼 얼굴이었다. 요망하고 요사스러워서 아랫도리가 다 시큰거린다.
류제는 도대체가 생각한 것과는 하나도 같지 않다며 얼굴을 조였다. 그런 류제의 마음도 모르는 재경은 정액이 잔뜩 묻은 허벅지 사이를 야하게 내려다보며 끈적끈적하다고 킬킬 웃기나 했다.
* * *
그날 재경이 낯선 쾌감이 주는 중독성을 깨달은 후, 류제에게는 순수하게 좋다고 말 못 할 생활이 시작되었다. 저주의 여파 때문이라지만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나비 효과는 류제에게 곤란할 만큼 크게 다가왔다.
류제는 상황이 이리 될 줄만 알았으면 그때 최선을 다해서 욕구를 억눌렀을 거라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이 행위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재경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덕분에 류제의 속만 다 타들어 갔다.
류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그때 나누었던 행위의 귀중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재경은 매번 류제의 만류를 한 귀로 흘리며 놀이처럼 여겼다.
글공부를 하다가 비실비실 요염하게 웃으면서 옷을 하나둘 벗어 던져 류제를 꼬여내는 데에 맛을 들린 재경은 본의 아니게 류제의 취향대로 길들여지는 중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을 다잡은 류제지만 그는 매번 질리지도 않고 재경의 유혹에 체통 없이 넘어가 버렸다.
일평생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온 류제는 자신이 이만큼 자제력이 없었나 날이 가면 갈수록 의심이 깊어졌다.
“하아…….”
“흣… 읏…….”
번뇌에 빠진 류제가 자신의 자질을 되짚은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류제는 재경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약해진다.
자제력이 낮아지는 것 또한 이에 파생된 것이므로 류제가 재경이 유혹한다고 냉큼 넘어가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류제가 재경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하재도.”
“왜?”
실컷 거친 숨을 내뱉으며 집중하다가 류제가 김새는 말을 꺼내자 재경이 입술을 쭉 내밀며 불평했다.
이런 기분 좋고 살을 실컷 맞댈 수 있는 재미난 장난을 왜 그만하자고 하는지 재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경이 쀼루퉁하게 투덜거렸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귀찮나.
“싫으면 그만둬. 다른 사람하고 하면 된다, 뭐.”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나랑 하기 싫은 건데?”
“싫은 것이 아니라…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류제가 다른 사람과 이런 행위를 하길 허락해 주는 것도 아니다. 재경은 류제가 또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마지못한 류제가 끈덕진 애무를 펼치자 찌릿찌릿한 감각에 만족하며 달뜬 얼굴로 류제의 가슴팍에 코를 파묻었다.
류제의 손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류제의 성기도 재경만큼이나 흥분에 치달아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류제도 영 싫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으… 흐… 거기… 읏…….”
그때 이후로 시간이 그리 길게 흐른 것도 아니건만 쾌감에 약한 재경은 류제에 의해 빠르게 개발되어 갔다. 저번에는 유두를 만져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간질간질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속에서 찌릿찌릿했다.
뜨거운 기둥이 문질러지는 허벅다리도, 귓가에 속삭이는 류제의 숨결도, 척추를 쓰다듬는 손길도 모두 기분이 좋았다.
척추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리듯 내려 재경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붙잡은 류제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다음을 찾아버리는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 드디어 참지 못하고 재경의 골을 손으로 야하게 지분거렸다.
“읏, 잠… 뭐 하는 거야? 거기는… 안 되잖아!”
“그대가 말을 안 듣고 여를 부추기지 않느냐. 이건 좋아하는 사이끼리 하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줘도 듣는 척도 안 하고. 아픈 꼴을 보면 그대도 그 의미를 알고 반성하겠지.”
“아픈 꼴? 잠깐만… 거기 하… 하지… 으으…….”
건조한 날 재경이 목욕재계를 끝내고 몸에 바르는 값비싼 향유를 집어 든 류제가 재경의 엉덩이 골에 향유를 듬뿍 부었다.
차갑고 끈적끈적한 기분에 질겁한 재경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엉덩이 골을 따라 더욱더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류제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이… 이거 잠시만 놔봐. 진짜 잠깐만……!”
“스읍, 얌전히 있어.”
날이 갈수록 더한 것을 요구하는 재경 때문에 그의 눈과 귀에게 못할 것을 구해오라 시켜야 하는 자신의 부끄러운 심정을 재경은 절대 모를 거다.
야릇한 그림을 상대로 재경을 떠올리며 욕정하곤 했던 류제는 이게 바로 여우, 아니 고양이에 홀린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건데……!”
“곧 알게 될 거다.”
재경에게 있어서 이것은 고작 손장난에 불과했겠지만 고작 손장난으로 만족할 수 없는 더한 마음을 품고 있는 류제는 하나둘 책에 있는 것들을 시험해 보며 점점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욕정 따위 하찮은 감정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어쩐단 말인가. 나유타의 황제가 한낱 욕정에 져버리다니 남들 보기에 어리석다는 건 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류제는 재경과의 손장난을 이대로 남겨둘 수 없었다.
“윽, 으… 하… 이거 놔! 잠깐 놔봐! 거긴 안 된다고! 진짜 더… 더러워.”
“여가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뒀어야지. 그깟 손장난 따위에 언제까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응?”
류제가 재경의 귓가에 간사하게 속삭였다. 류제는 자신의 배에 붙은 재경의 성기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항문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내벽으로 침입함과 동시에 재경의 입에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류제가 그런 재경의 입술을 탐욕스럽게 덮쳤다.
“힉! 우…웃…읍…….”
생소하고 끔찍한 감각 속에서 부드럽게 매만지는 기분이 혼란스럽다. 그만하라며 손으로 류제의 가슴팍을 밀친 재경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류제의 따뜻하고 인자한 푸른 눈동자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달빛에 비친 류제의 인영뿐. 고요한 겨울, 아교처럼 류제의 몸에 눌어붙은 재경은 왠지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으으… 이거… 어… 언제까지 할 거야…….”
“이곳 어딘가에 사내도 자지러지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 그걸 찾아보고 싶어.”
자신 때문에 류제의 성 지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넓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재경은 이런 불쾌하고 매슥거리는 기분만 드는 더러운 곳을 파헤쳐서 뭐가 좋을까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류제가 해주는 행위는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기분이 좋았고, 류제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도 실은 이것의 연장선이 아닐까 류제를 보기 좋게 오해한 재경은 내벽을 어루만지는 류제의 두 손가락을 느끼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몰라. 마음대로 해. 으으… 소름 돋아. 추워. 꽉 안아줘.”
“너는 다른 것보다 매양 포옹을 원하는구나.”
자신보다 큰 사내의 딱딱한 품이 뭐 좋다고 오늘도 류제의 품에 파고드는 재경은 정말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낭창했다. 류제가 재경의 바람대로 몸을 밀착시켜 주자 재경도 류제의 허리에 손을 감쌌다.
류제에게 강하게 안겨있으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만끽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몇 번이고 재확인한다.
재경이 이 행위가 마음에 든 까닭에는 이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류제의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충만했다.
“생각보다 잘 늘어나지 않나.”
“으, 뭐…가 늘어난다는 거야?”
“여기. 느껴지나?”
류제가 손가락 두 개를 벌려 재경의 항문을 희롱했다. 차가운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재경이 싫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도 기분 안 좋아. 이 거짓말쟁이.”
“지금까지 그대에게 실컷 기분 좋게 해줬으니 그대도 봉사를 해줘야 도리가 아니겠나?”
류제도 필히 자신처럼 만족스럽게 기분이 좋았을 것이라 단언하고 있던 재경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류제를 올려다보았다.
“넌 나와 있는 게 좋지 않은 거야?”
“여는 항상 그대에게 더한 걸 바라게 된다. 욕심꾸러기니까.”
이보다 더한 것도 있어? 하고 반문하기 전에 재경을 뒤집은 류제가 몸소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충분히 풀어준 재경의 구멍에 살짝 댔다.
뜨거운 귀두가 들어갈 리 없는 구멍에 닿자 재경이 식겁하며 기어갔다. 허나 류제는 깜짝 놀란 아이 달래듯 조심스레 재경의 배를 쓰다듬었다.
“긴장하지 마라. 숨을 길게 쉬어.”
“드… 들어가는 거야? 안 들어갈 거 같은데.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큰일이라면 진작 났지.”
그날 피를 봐서는 안 되었어. 움직이기 시작한 내 이 마음을 숨기기엔 그 무엇도 역부족이란 말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매일 밤 나를 꼬여내다니 이건 무지한 재경의 탓도 있었다. 아니, 재경의 탓이 있어야만 했다.
“으읏……! 처… 천…천히…….”
타인이 들어온 적 없는 구멍이 류제의 성기를 흡착하듯 빨아들였다. 류제는 재경에게 정신까지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익숙하지 않아 있는 힘껏 조여대는 압력이 고통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재경의 안에 들어간다고 여기니 기분이 좋았다.
재경은 내장에 들어오는 뜨거운 류제의 성기에 배가 압박되어 겁에 질렸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망가려고 했다.
“으… 그만… 그만……! 진짜 그만. 이제 안 돼!”
“하아… 재경아… 후우… 조금만 힘을 풀어보거라.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하고 있다. 힘이 안 풀리면 그대가 힘들어.”
허리를 숙여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류제가 재경이 편하도록 허리를 눌러주었다. 마치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같은 자세가 된 재경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힘을 풀라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마… 말은 쉽지……! 아프다고!”
“할 수 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집중하면서 잘 기억해. 여의 것을. 내가 어떤 모양으로 그대를 원하고 있는지 알겠느냐?”
“못 해……. 진짜 못 해……!”
도리질을 치는 재경이었지만 그는 곧 류제의 말대로 흉부가 들썩거릴 정도로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가며 쉬었다.
뜨거운 류제의 손이 재경의 배를 쓰다듬다가 풀이 죽은 재경의 성기를 향유와 함께 어루만지자 다시금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감각이 재경의 전신을 스쳤다.
류제가 힘들어하는 재경에게 경고하듯, 사랑을 나누듯, 자조하듯이 속삭였다.
“잘 기억하거라. 사람을 침상으로 꼬여낸다는 건 본디 이런 의미다.”
“지금까지 그런 적 없잖아. 이런 아프기만 한 걸 왜 해? 심술부리는 거지!”
“그대는 여를 사랑하지 않으니 참은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말로 해서는 언제까지라도 모르겠지.”
꾸역꾸역 밀치고 들어오는 거대한 육봉이 재경의 감각을 잠식했다가도 류제의 손에 쥐어진 성기가 훑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랑하지 않다니. 재경은 류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 남녀가 하는 그것? 아니면 부모와 자식 간의 그것? 아니면 친우 사이의 그것?
“윽… 내가 널 싫어한다는 소리야?”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게 그거잖아!”
“…달라.”
“어디가!”
“모든 것이 가지는 의미가.”
내가 얼마큼이나 류제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류제는 내가 류제를 싫어한다는 말이나 한다.
재경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억울할 뿐이지 별로 슬픈 건 아니었지만 생리 현상으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무얼 말하고 싶은 건데. 네가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단 거야?”
“그래.”
죄인을 힐난하는 목소리에 류제가 눈시울을 붉혔다. 알고 있다. 재경이 아무것도 모르고서 입에 담은 말이라는 걸.
류제는 참을 수 없이 머뭇거리다 질끈 입이 악물렸다. 그는 대신 재경을 끌어안으며 재경의 몸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여는 그대를 사랑한다.”
* * *
“하아.”
누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생각에 빠졌던 재경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경은 할아범을 보냈을 때와 비슷할 만큼 막막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경조차 위험하다 여길 수준으로 아찔한 손장난을 했던 그날 이후로 재경은 류제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니라 재경의 마음의 문제일 것이라 다른 이들은 말하겠지만 류제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눈치챈 재경은 전부 류제 때문이라고 탓했다.
요 글피는 작년까지 전쟁을 했던 옆 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화친을 맺기 위해 온천장(溫泉場)에서 류제가 직접 나서 사신들을 대접하는 날이었다.
그 일정 마지막 날에 초하루가 끼어있어 성수청의 주술사들을 이끌고 류제가 사신들을 대접하는 이곳까지 따라오게 된 재경은 류제와 온천을 즐기는 내내 어색함이 신경이 쓰여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건 뭐였을까.”
재경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며 머리를 싸맸다. 사랑 타령을 해대는 류제의 말을 몇 번을 곱씹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둔해서 그렇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좋았을 텐데. 열심히 글공부를 하더라도 애초부터 머리가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일찍 여읜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지만 기왕 낳은 거 조금만 더 영특하게 낳아줬으면 좀 좋아.
나무 위에 훌쩍 올라가 나른한 고양이처럼 앉은 재경이 화려한 나유타 황실 소유의 온천장 시설들을 턱을 괴고 살폈다.
아무리 고민해도 매번 제자리니까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그때 류제의 떨리는 목소리와 진득한 접촉이 떠올랐다.
그때의 자극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 류제의 사랑한다는 말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잊으려고 하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할머니나 할아범이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없으니 난감하다.
류제가 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류제를 안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이며, 애초부터 사랑과 좋아함의 차이가 무엇인지 재경 혼자서는 깨닫기 어려웠다.
“옷이 얇으십니다.”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재경이 놀라지 않고 뒤를 흘겼다. 류제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 금위대장이 두꺼운 털옷을 입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가?”
재경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호의호식한다지만 겨울에 먹을 것을 찾아 산을 오르는 험난한 생활에 익숙했던 재경은 이 정도 추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처럼 매섭게 눈이 내리는 것도 아니고, 볕이 따뜻해서 일광욕하고 있었는데 금위대장은 그런 재경이 마땅찮은 모양이었다.
재경이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금위대장은 황제에 버금가는 몸을 귀하게 다루지 않는 재경을 보며 놀랐지만 달의 무녀 특유의 기묘한 분위기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자유분방함은 자주 목격했던 터라 금세 마음을 진정시키고 제 털옷을 벗어서 재경의 몸에 둘러주었다.
“류제는 아직 바빠?”
“외국에서 온 사신들과 협상안을 체결하는 중입니다. 오늘 중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흐음, 그렇구나.”
국제 정세에 대해서 모르는 재경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눈을 끔벅거리다가 힐끗 금위대장을 흘겨보았다.
금위대장이 낌새를 눈치채고 무슨 볼일이냐며 눈으로 물어보자 아무것도 아닌 척 재경이 시선을 외면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별것 아닌데.”
재경이 마른 입술에 입맛을 다셨다. 금위대장은 올해에 소꿉친구와 혼인을 한다고 했다.
재경의 눈에 금위대장은 진정한 의미로 어른이었다. 혼인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이겠지. 재경이 머뭇거리다가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대장은 사랑이 뭔지 알아?”
감히 달의 무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나오자 금위대장이 품위 없이 기침을 해댔다. 재경의 입에서 돌연 튀어나온 말을 곱씹자니 달의 무녀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아니면 그건가? 사람을 벗어난 존재가 사람의 감정에 궁금증이 생긴 것이라든가. 금위대장은 사람을 대표해 혼인을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왜 그것이 궁금해지신 것입니까?”
“하나뿐인 친구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구체화된 이야기를 들은 금위대장은 더 어이가 없어져서 얼이 절로 빠졌다. 친구? 달의 무녀의?
탈출극이 있었던 이후로 별다른 일이 있더라도 웬만해서는 궁 밖을 나가지 않는 달의 무녀의 친구라 함은…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의 유일한 상대자. 태양의 상징. 나유타의 황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위대장은 다시금 부정을 바라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러니까 친구… 류제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무슨 의미일 것 같냐고.”
너무 놀라 차라리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바랐지만 재경은 빼도 박도 못하게 상대를 못 박았다. 금위대장은 하늘이 노래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요 근래 두 사람이 자주 합방하는 것 같다 싶더만 소원해졌다 말이 나돌 만큼 분위기가 묘하더니 그런 전말이 있었을 줄이야. 동성, 그것도 황제의 고백이라. 진귀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거랑 무슨 차이일까?”
“폐하께서 언제, 어느 상황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손장난 중에.”
그 장난을 류제는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기에 재경은 그 금기의 분위기 때문에 금위대장에게 장난을 빙자한 유사 성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실뜨기라도 하신 겁니까?”
성인 둘이 앉아서 실뜨기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고백하다니. 황제가 달의 무녀와 함께 어린애들이나 하는 실뜨기를 했다는 것도 상상이 가질 않는데 돌연 마음을 표했다고?
금위대장이 좀처럼 감을 못 잡자 재경이 쯧쯔 혀를 차고 손장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거 말고. 있잖아. 거시기 만지면서 노는 거.”
“거… 예?!”
“그러니까― 류제랑 서로 거시기 만지면서―”
행여 지나가다 누가 들을세라 금위대장이 큰 소리로 손을 내저었다. 상황이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위험하다.
재경의 입을 다급하게 막은 금위대장이 머릿속을 이후에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남자의 성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물론 다른 의미도 많지만 지금 거시기라는 말을 들어본 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금위대장이 작게, 그리고 빠르게 속삭이며 물었다. 재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보니.”
그 까닭이 터무니없어서 금위대장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류제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왜?”
“그건 마음이 통한 사이끼리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묻는 거잖아. 일일이 안 따져도 기분만 좋더만.”
달의 무녀라서 그런가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이다.
금위대장은 평범하게 길을 지나가다가 초유의 사태가 남모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얼굴이 쌀 미(米)처럼 구겨졌다가 간신히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달의 무녀님께서는… 폐… 폐하께서 그… 소… 소중한 곳을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금위대장은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제발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튀어나와 모든 것이 장난이었다며 폭죽을 터뜨려 주었으면 좋겠다.
황제와 달의 무녀의 추문이라니. 초봄, 추운 날 식은땀이 절로 난 금위대장이 재경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다시금 얼굴을 구기며 손으로 이마를 때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무렇지 않은데?”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금위대장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가 떨떠름하게 생각을 말했다.
“달의 무녀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서로의 마음이 통한 상대가 아니면 원색적 색욕 추구를 지양합니다.”
“지양?”
“피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피해?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달의 무녀는 쾌락을 경계하지 않는 곳에 살았던 건가. 그렇기에는 너무나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금위대장은 감히 이런 지식을 달의 무녀에게 주입해도 되는 것인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는 자손을 남기기 위해 색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허나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분별없는 색욕을 다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나유타가 추구하는 덕목에서는 그렇습니다. 하물며 초대 황제 폐하로부터 내려오는 저주로 인해 궐 안에서는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덕목으로 자리 잡아서…….”
“으아, 어려운 이야기 하지 마. 들어도 몰라. 기분이 좋으면 땡이지. 귀찮네.”
“감히 묻겠습니다. 무녀님께서는 저를 보면 그런 손장난을 칠 마음이 드는 겁니까?”
류제 앞에서는 그럴 수 있다며 말했지만 막상 수염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류제처럼 자신을 어루만진다 생각하니까 오묘했다.
이상하다. 재경은 불현듯 스치는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끌리지는 않아.”
“그런가요. 하아.”
분별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금위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 금위대장은 예전 류제가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달의 무녀였던 거다. 금위대장은 달의 무녀에게 품었던 환상이 아주 조금 깨졌다.
“쉽게 말해서 길가에서 남 앞에서 오줌 함부로 안 누는 거겠지?”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요.”
재경이 내놓은 엇비슷한 비유에 금위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경은 그래도 잘 모르겠다며 머리를 싸맸다.
그거랑 류제가 자신을 사랑한다 말한 거랑 무슨 상관이냔 말인가. 기분만 좋은데 왜 싫다고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본디 사람은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이성에게 끌리는 법입니다. 특히 사내끼리 색욕을 품는 것은 일반적이진 않습니다. 물론 달의 무녀님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본능을 거스를 정도로 폐하께서는 무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예, 사랑은 색욕과는 다릅니다. 색욕은 마음이 없는 반면 사랑은 마음을 동반하여 색욕을 돋우죠. 그래서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알몸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치부를 공유하여 정신과 합동하여 결합하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거리가 있으니까요. 사랑이란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결심이 들 때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류제는 날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폐하께서 그리 말하셨다면 그런 것입니다.”
“허나 류제는 그때 이후로 날 어색하게 대하는걸.”
류제가 내뱉었던 사랑한다는 말이 재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겁고 진중한 의미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재경이 풀 죽은 듯이 나무에 기대었다.
금위대장이 내심 다행이라며 불경한 생각을 했다. 한 나라의 황제가 남색에 빠지다니. 스스로 어려운 길을 가시는구나.
“감히 추측하건대 무녀님께서 폐하와 다른 마음인 걸 알고 거리를 두려는 것이겠지요.”
“나랑? 왜?”
“연모하는 사람을 그리기만 하는 것은 몹시 힘듭니다. 찢어질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항간에는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이도 있으니.”
“…….”
“그렇다고 마음이 없는 이에게 함부로 밀어붙이지는 못하니 폐하께서도 꽤나 속앓이를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기다린다면 폐하께서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정리한다고? 왜?”
재경은 충격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렇게 중요한 마음을 왜 정리하는 걸까.
“되돌려받지도 못할 마음을 퍼붓기만 하는 건 괴롭지 않습니까. 무녀님께서는 폐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시니.”
“류제도 그랬어. 내가 류제를 사랑하지 않는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사랑을 하면 다른 기분이 되는 거야? 대장은 어떤 기분이었어? 사랑해서 혼인하지?”
부끄러운 질문에 금위대장의 얼굴이 절로 새빨개졌다. 허나 달의 무녀의 질문이니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위대장이 얕게 헛기침을 하다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와는 집안이 가까워 만나게 되었습니다. 철없을 어릴 적에는 그저 마음 잘 통하는 친우였지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특별해 보이고, 만나면 마음이 답답하고, 모르는 모습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끝으로는 그녀와 가족이 되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어느덧 그녀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 혼인을 하게 된 겁니다.”
“사랑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저는 그랬습니다.”
“그건 나도 류제와 있을 때와 똑같은걸. 다들 그러는 거 아냐?”
재경이 그것도 사랑이냐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금위대장은 재경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함부로 단언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간신히 입을 열고 말했다.
“사랑을 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가슴이 뜁니다. 언젠가 폐하께 그런 마음이 든다면 달의 무녀님도 폐하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거부감이 없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금위대장은 곧 그를 찾는 사람의 부름에 이끌려 사라졌다. 금위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명쾌하게 풀릴 줄 알았던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자 재경이 나무에 기댄 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해가 지고 찬 바람이 강하게 불자 후다닥 머물고 있는 숙소 안으로 몸을 피했다. 재경을 훔쳐보던 시선 또한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 * *
나른한 고양이처럼 온천장을 쏘다녔던 재경과 달리 종일 외국 사신들을 이끄느라 지친 류제를 위해 한 시진 간 온천욕을 즐길 때가 마련되었다.
시동들이 옷을 벗기고 편히 즐기라 문을 닫았다. 노천탕에 몸을 담근 류제가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곤하니 피로가 풀린다.
강제로 관계를 맺은 그날 이후로 재경이 손장난을 치자며 먼저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상당히 아픈 꼴을 당했기에 무서워서 그런 것이겠지만 상대를 안 해준답시고 혹여 다른 사람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 아닐까 불안하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재경은 쉽게 치는 손장난이 가볍지 않은 행위임을 평생 모를 것이다. 그러니 후회스럽지만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류제가 차갑게 식는 얼굴에 온천수로 세수를 했다. 몸에서 김이 흩어졌다. 문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저절로 문이 열렸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얇은 속곳을 입은 재경이었다.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류제는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제 일 끝난 거야?”
“대부분은 그렇지. 온천을 즐기러 온 건가? 추우니 어서 들어오거라.”
평소와 다름없는 류제의 태도에 재경이 어색하게 다가와 온천에 발을 담갔다. 쭈뼛거리다가 류제의 눈치를 보며 몸을 담근 재경은 온천의 열기 때문인지 금방 얼굴이 상기되었다.
류제의 알몸을 보자니 기억 속에 남은 손장난들이 떠오른 재경은 금방이라도 향할 것 같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애써 그날의 일을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버… 벌써 모레가 초하루네.”
“그래.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우리는 여기에 남아 의식을 치를 거다.”
“나도 알아. 그래서 내가 온 거잖아.”
재경이 하늘에 뜰 그믐달을 떠올리며 돌에 팔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재경이 그가 알았던 신기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그거 알아? 초하루가 가까워질수록 땅이 태양에 가까워진대.”
“그러한가?”
“저번에 하늘을 보다가 우연히 떠올렸어. 할머니가 말해줬던가.”
“초하룻날 밤 우리가 만나는 연유가 그런 까닭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럴지도.”
모르는 척 호응해 주었지만 시간을 관장하는 태양과 달과 별의 이야기는 제왕학의 기초다.
초대 나유타의 황제와 달의 무녀가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이지 않게 되는 달이 태양과 가장 가까워진다는 것은 태양인 황제에게 달에서 내려온 무녀가 현현하여 다가온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달의 무녀가 가진 사람의 것이라 보기 힘든 힘이 떠올라 류제는 더욱더 재경에게 품은 감정이 헛된 듯했다.
문득 침묵이 찾아왔다. 재경은 오후에 금위대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슬며시 류제의 알몸을 흘겼다.
류제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 류제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뒷전으로 밀리는 것도 마음 아프다. 지금도 어색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나는 류제를 사랑하는 건가? 하지만 심장은 두근거리지 않는걸. 사랑을 하면 심장이 찢어진다고? 그런 위험한 마음을 품는 연유가 무얼까?
“왜 그러지?”
온천수에 젖은 답답한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기자 류제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가 온천에 반사되어 물처럼 푸르게 일렁거렸다.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앞머리 때문에 좀처럼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재경의 머리에 스쳤다.
저 눈으로 류제는 자신의 몸을 매만지며 희롱했다. 검은 밤 달빛 아래에서 류제는 어떤 눈빛으로 내게 속삭였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자 재경은 이상하게 심장이 덜컥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그래?”
류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음란한 속셈이 느껴지는 것 같았더니 역시나 그때의 부작용인가.
물론 재경이 또다시 유혹한다면 각오하라 할 정도로 단단히 일러줄 테였지만 생각 짧은 바보가 손쉽게 꼬리를 내리다니 김이 빠졌다.
금위대장과 나누었던 대화에 관해 말을 꺼내고 싶었던 재경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을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는 나랑 그런 거 안 하겠다고 결심한 거라면 싫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거리감이 한 발짝 물러나는 감각에 재경은 철렁거렸다.
기댈 이가 없어 외로운 그는 류제의 깊은 포옹이 불현듯 그리워졌다. 재경은 이런 이상한 감각을 참을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부글부글 온천 안에 잠수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라면 류제는 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정리하겠지. 당사자인 나만이 해쳐나가야 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멍청한 주제에 깊게 생각하니 열기로 가득했던 머리가 뜨거운 물에 닿자 뻥 터져버렸다.
한참이 지나도 물 위로 올라오지 않자 류제가 첨벙첨벙 숨이 올라와 기포로 터지는 부분을 더듬어 재경을 찾았다.
“괜찮으냐!”
온몸이 시뻘게진 채 정신을 잃은 재경을 류제가 다급하게 물 위로 끌어 올렸다. 날이 추워 피부는 부채질을 하는 것보다 빨리 가라앉았지만 몸이 차게 식어갔다.
류제가 서둘러서 커다란 수건을 덮어주었다.
“정신 차리거라. 왜 이러는 것이냐? 그대 때문에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속곳을 걸친 류제가 재경을 둘러업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수발을 들 준비를 하고 있던 궁녀들이 기절한 달의 무녀를 보고 놀라 채비에 나섰다.
적당한 곳에 재경을 눕히려던 류제는 궁녀들과 같이 뭔가 당장 재경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다 옅게 당겨지는 저고리에 제 왼손을 살폈다.
“재경아?”
어렴풋이 눈을 뜬 재경이 류제와 눈을 마주치고 뭐라고 입을 열더니 눈을 감았다. 붙잡혔던 소매에도 힘이 풀려 재경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입모양으로 류제는 감히 재경이 했던 말을 추측해 보았다. 할머니. 그는 그렇게 말했다.
* * *
재경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온천욕을 하다가 혼절하다니.
할머니 상궁은 ‘이래서야 어찌 곁에서 폐하를 보필하느냐’며 ‘매일 고기만 찾다가 영혼에 해가 끼친 거’라며 재경의 수라에만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전부 풀떼기뿐이다.
반정의 난이 있었던 별기은 삭다례 때문에 한 달 동안 풀떼기만 먹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재경은 진절머리가 났다.
“임금님 식단에 고기 잔뜩 있던데. 부러운 자식.”
“외국 사신들과 송별 한 후 함께하는 저녁 수라는 여의 것과 바꾸어주마.”
류제가 허락하자 그것을 노렸던 재경이 좋다며 만세를 합창했다. 재경이 할머니 상궁에게는 비밀이라며 말하지 말라고 약조를 했다.
류제가 보더라도 재경의 반찬거리가 너무하기는 했다. 궁 안 사람들은 달의 무녀를 사람이 아니라 신처럼 대접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기절했으면 몸보신을 하라고 고기를 주지 못할망정 영혼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나물만 주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럼 나중에 봐!”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심심하다고 몰래 나가서는 아니 되고.”
“서책을 읽을 거야.”
재경이 반발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준 류제가 홀연히 떠나버렸다. 재경은 자신을 애 취급하는 류제의 등을 보며 잔뜩 뿔이 났다가 류제가 가깝게 다가와 준 것이 오랜만이라 기분이 묘했다.
커다란 손의 감촉이 정수리에 남았다. 재경이 머리를 정리하는 척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입을 앙다물었다.
귓바퀴가 새빨갰다. 몰래 나가다니. 어디도 안 갈 거다. 재미있는 건 류제 곁밖에 없으니까.
사랑이라. 재경이 한숨을 내쉬면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류제의 곁에 있고 싶을 뿐인데. 그걸로는 부족한가. 막막한 심정이 재경의 아둔함을 때렸다.
그런 재경을 응시하던 어떤 시선이 사라졌다. 재경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음흉한 손아귀가 재경의 목으로 슬금슬금 향했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외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