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달과 고양이 (5)
마지막으로 만났던 류제의 말은 반쯤 사실이었다. 십이월 초하루가 지나자 평소와는 다른 낌새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속세로 더럽혀진 몸을 정화하기 위해 식단을 조절하는 재경의 식사에 고기가 빠졌다. 늘 나오던 점심 간식도 양이 줄었다.
원하는 대로 나오던 고급 다과도, 풍족하게 나오던 고기반찬도 사라지자 가난하게 살았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재경이 풀떼기 가득한 상을 들여온 궁녀를 향해 툴툴거렸다.
곧 죽어도 다음 초하루가 지나기 전까지는 식단에 고기가 올라올 일이 없을 듯했다.
평상시 입는 옷도 바뀌었다. 류제가 말한 새해 첫 초하루에 하는 대규모 제사인 별기은 삭다례를 위한 새 의복이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재경은 성수청 주술사들의 손짓에 따라 가마에 앉는 법을 배웠다. 신기하게도 이때만 한하여 주술사들이 재경의 묻는 말에 답을 해주었다.
다른 주술사와 의복이 다른 것을 보면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선택받은 주술사일 것이라고 재경은 나름 추측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바쁘지는 않았다. 날이 추워지니 자주 하던 산책도 못 할 때가 많아졌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사람을 삶아 죽으려는 건지 아랫목은 절절 끓었다.
재경은 더워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눈 오는 날 창문 밖 경치를 보며 차를 마시는 건 좋았다. 여기에 류제가 있었더라면 더 재미있었겠지. 무뚝뚝한 성수청의 주술사들은 하나도 재미없었다.
“어때? 완벽하지?”
“삐뚤빼뚤해 가지고 개도 그것보단 잘 쓰겠구나.”
“할머니는 잘했다고 칭찬할 때가 없다니까. 맨날 사람 김빠지게 해.”
맨질맨질한 귀한 종이에 덕지덕지 발린 먹물을 보며 오뚝이가 말했다. 감질 나는 심심함 끝에 처음 부활한 오뚝이는 오늘도 재경에게 독설만 날려댔다.
삐친 재경이 부루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알아보기 힘든 낙서가 그려진 하얀 종이는 류제에게 줄 서신이었다.
“먹물이 튄 건 어쩔 수 없잖아. 손가락으로만 써봤으니 붓질이 어색한 건 당연한 일이야.”
아무래도 생각하면 할수록 글씨를 쓰는 것과 글자를 배우는 것은 다른 종류의 배움인 것 같다. 재경은 붓을 들면 손이 떨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류제는 글자를 알려줬을 뿐, 글씨를 쓰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류제가 이 글자를 못 읽어도 서신을 보내라고 한 류제 탓이니 재경의 잘못은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류제가 이 글자를 못 알아본 적은 없었다. 매번 다 알아먹고 답장을 보내준단 말이야.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핑계는 기가 막혀.”
“할머니도 읽을 줄만 알았지? 나는 쓸 줄도 알아.”
재경이 문법이 하나도 맞지 않는 상형 문자들의 나열을 보면서 만족스레 웃었다. 먹이 다 마르면 사람을 시켜 이걸 류제에게 보내줄 거다.
보낼 서신이 잘 마르게 양지바른 곳에 둔 재경은 이전번에 류제가 보내준 답장들을 하나둘 꺼내서 읽어보았다.
이번 달은 바쁠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서신을 보내면 답장을 보내준다는 류제의 약조는 진실이었다.
저번에 보내준 예쁜 돌은 잘 받았다. 바쁘지 않다니 송구하구나. 저번에 첫눈이 내렸지. 날이 더 추워져 눈이 높게 쌓이면 함께 궐을 산책하는 것도 좋겠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글을 쓸 때 먹을 두어 번 벼루에 덜면 종이에 잘 번지지 않는다. 다음번에는 글씨를 조금 작게 써보는 연습을 해보거라. 많이 쓰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재경이 읽을 수 있게끔 쉬운 글자들로만 이루어진 답장은 류제처럼 수려하고 정갈했다.
필히 재경이 알고 있는 글자임에는 틀림없는데 단순한 내용밖에 전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랐다. 재경은 자신은 절대 이렇게 못 쓴다고 장담했다.
“작게 쓴 거 같아?”
“뒷산 바위만큼 크구만.”
“비슷하지 않아?”
류제의 서신과 재경이 보낼 서신을 양옆에 두고 마주 보며 비교해 보던 재경은 류제의 글자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못난 글자에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하지 않아 손바닥만 한 글자를 써야만 했던 처음에 비하면 제법 작아진 크기지만 여전히 먹이 두껍고 삐뚤빼뚤했다.
새해 첫날까지 이제 열흘 남았다. 재경은 이 한 달이 올해 들어 제일 긴 달인 것만 같았다. 엎드려 누워서 다리를 까딱거리던 재경이 턱을 괴고 누웠다.
어서 빨리 류제와 다시 만나 서간으로 못다 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고 싶었다. 재경이 시큰한 코를 훌쩍거렸다.
* * *
조세법을 개정한 이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불만과 상소문들을 훑어보던 류제는 짜증스럽게 눈가를 실룩거렸다.
앞머리에 가려진 푸른 눈동자는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를 통해 못마땅한 감정이 여실이 드러났다.
“제 욕심만 부리기는.”
결국 사적인 남령초 재배를 금하고 나라에서 남령초의 생산과 판매를 관리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몰래 키우는 자들이 많다.
올해 재배된 남령초까지 나라에서 값을 쳐서 사준다고 한다지만 음지에서 거래되는 양이 줄어들지 않았다.
음지에서 거래되는 남령초의 품질은 상당한 편이다. 천한 백성들이 척박한 땅에서 재배한 남령초에 비해서 나라에서 쳐주는 값은 후해 당장 돈이 급한 백성들은 나라에 남령초를 팔아넘겼지만, 비옥한 토지에서 재배된 부유한 귀족들의 남령초는 좀처럼 회수가 되지 않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관리들이 마을을 돌면서 남령초를 수거하고 있지만 종자를 숨기는 집이 꽤나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청탁까지 더해져서 관리들에게 뇌물 수수가 오가고 있습니다.”
“당장에 될 문제는 아니니. 수고했다. 감찰을 시작해야겠군.”
그의 눈과 귀가 답하는 말에 류제가 쯧, 혀를 찼다. 그렇게 반발이 심했으니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한 대로 되려면 길게 봐야 할 것이다.
조보를 전달한 그의 밀정이 목적을 마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류제는 글만 다를 뿐 어차피 뻔한 내용의 상소문들이 지겨웠다. 그는 이번에 전달된 재경의 서신이 차라리 더 흥미롭다고 상소문을 향해 불평했다.
작게 글자 써. 고기가 아니야. 고기 먹고 싶다. 풀 싫어. 눈 예뻐. 뭐야 ‘산책’ 모르겠어. 뭐 해?
무슨 글자를 쓴 건지 한참을 해석해야 알 수 있는 기묘한 도형들은 결국 별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절로 웃음이 터지고는 했다.
글자는 알지만 글을 쓰는 법을 모르니 문법과 내용이 엉망진창이다.
조세법 개정으로 손해를 본 게 싫어 불평을 꽈배기 꼬듯 꼬아서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상소문보다 별것 없는 내용이지만 재경의 솔직한 서신이 더 좋았다. 이런 보잘것없는 내용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류제는 이딴 것에 답변을 하느니 차라리 재경의 서신에 답장을 하는 것이 더 삶에 보람이 되겠다며 새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재경에게 ‘산책’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재경이 알고 있는 글자를 조합해서 서간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민해야 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재경을 떠올리며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류제가 드디어 붓을 들었을 때였다.
“폐하.”
하얀 종이에 먹물이 뚝 떨어졌다. 재경이 처음 글씨를 썼을 때 봤던 얼룩 같다. 목소리의 정체를 눈치챈 류제는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움직였습니다.”
“들어온 자들은?”
“묘한 서신을 주고받는 듯했습니다. 서신은 즉시 태워져 내용은 모릅니다. 자택에서 긴밀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가.”
“부디 옥체 보존하십시오.”
그림자가 사라졌다. 류제는 재경의 새로운 서신을 보고 좋아졌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중요한 제사가 코앞인데 불순한 움직임을 보인다니. 달덕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나라 전체가 달의 무녀와 함께하는 별기은 삭다례에 취한 와중이라 더욱 기미를 감추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재종형제여. 성수청을 등에 업고 무엇을 반정의 근거로 들려는 건가. 그때는 언제인가.
증거가 없기에 역모를 꾸몄다고 선수를 칠 수도 없다. 눈에 빤히 보고도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에 류제는 숨이 막혔다.
재경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무엇을 잃더라도 그의 자리만 지켜내면 되었지만 그와 한 쌍으로 취급되는 달의 무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존재의 까닭이 없었다.
반정이 일어나면 성수청에 밉보이게 된 재경도 궐에서 쫓겨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달의 무녀가 무사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목숨을 지켜내야 할 것이다.
류제는 아직 먹물 한 방울만 떨어진 종이의 내용을 바꾸었다. 수려하게 글이 써 내려졌다.
몸을 조심하라.
과연 그의 충고를 재경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 * *
수군수군 올라오던 불길한 움직임들은 정점을 찍다가 사그라들었다. 전쟁 전의 고요함처럼 류제는 이 평화가 몹시 불길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며 껄끄러움을 참고 하루 이틀 넘기니 어느새 1월 초하룻날이 찾아왔다. 류제는 아무것도 모를 재경을 떠올렸다.
설이 찾아오자 궐 밖에 아이들은 친척집을 오가며 세배를 하고 덕담을 들었다. 각 가정에서는 새벽부터 조상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제사를 지냈다.
하늘에는 소원이 담긴 연이 가득 수놓았고 언 강에는 썰매를 타거나 팽이를 치는 이들이 즐겁게 웃음 지었다. 온 나라가 명절에 취해 활기가 돌았다.
궐에서도 시간에 맞춰 제사를 지낼 것이다. 1월 초하룻날 해가 질 때에 맞춰 지내는 별기은 삭다례. 오늘은 제사를 위해 시월당이 아닌 성수청 청사에서 공개하여 저주를 억누르는 의식을 치렀다.
이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점칠 뿐만 아니라 달의 무녀의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고 황제의 저주가 끝이 났음을 궐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
십이장복으로 갈아입은 류제는 면류관의 무게를 느끼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이후로 수그러든 반정의 기미는 거슬렸지만 재경을 만날 수 있다니 기뻤다.
서간으로는 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제사가 끝나면 둘이서만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 밤은 내 거처에서 회포를 푸는 것은 어떨까.
시간이 되자 류제는 그의 뒤를 줄줄이 잇는 왕족들과 귀족들을 이끌며 성수청 청사에 들어섰다. 청사의 끝에 류제가 앉아야 하는 어좌가 금빛으로 빛났다.
저기에 앉아 고지식한 절차에 따라 기다리고 있으면 달의 무녀가 가마를 타고 나타날 거다.
환대를 받으며 어좌에 앉은 류제는 저 멀리 서있는 능여 대군을 흘겼다. 그가 바로 그가 죽으면 황위를 계승할 재종형제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입지를 다져야겠다 여긴 것인가?
묘한 긴장감 속에서 악관들과 성수청 무희들이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춤을 추었다. 저번에 재경이 보여준 것과 흡사한 것을 보니 재경은 저것을 보고 춤을 배운 듯하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진지하게 의식을 내려준 적은 없지만 류제는 가끔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었다.
제례악이 멈추자 종이 울렸다. 달의 무녀가 앉은 화려한 가마가 느릿느릿 들어왔다. 두꺼운 발로 가려진 가마 안쪽에 달의 무녀가 사포를 쓴 채 앉아있었다.
과연 재경은 어떤 얼굴로 앉아있는 걸까. 류제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제사가 중하거나 중하지 않거나 하등 상관없다는 듯이 필히 지루해서 하품을 쩌억 날리며 졸린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거다.
성수청의 제사장이 류제와 마주하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자 제사장은 물러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며 계단을 내려섰다. 그는 달의 무녀가 앉아있는 가마 앞으로 가서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달의 무녀 납시오!”
일몰을 알리는 종소리가 청사 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과연 참으로 달의 무녀가 황제의 저주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인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의식을 구경했다.
가마 안의 인기척이 울렁거리더니 의복을 차려입은 달의 무녀가 나왔다.
다른 이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기다란 소매 옷 아래에 월계수나무 가지를 든 그는 어디선가 평소와 다른 듯했다.
재경을 신경 쓸 여지도 없이 류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저주의 기운에 이를 악물었다.
재회가 기뻐도 지금은 때가 좋지 못하다. 달의 무녀가 월계수나무를 들어 황제를 축복하면 제사는 성공으로 끝난다. 그때 재경과 눈인사를 나누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는 달의 무녀의 소매에서 창백한 날붙이가 빛난 것을 알지 못한 류제는 문득 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위협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포 아래로 보이는 모르는 이의 얼굴과 눈앞에 번뜩이는 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장의 삶에 익숙했던 류제는 습격자에게서 칼을 빼앗아 그대로 반격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류제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걸 본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차. 류제는 적들의 농간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 열로 서있는 사람들 사이가 술렁거렸다.
달의 무녀로 가장한 적을 처리한 것은 좋았으나 오늘은 초하룻날에, 게다가 축복을 내리기도 전이다.
류제는 눈앞에 쓰러진 가짜 달의 무녀를 흘겼다. 가장 좋지 못한 때에 가장 좋지 못한 것들이 그의 주변을 채웠다. 피. 달이 없는 밤.
어울리지 않는 속어를 내뱉으며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에서는 곧 사람의 말이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능여 대군이 이에 맞춰 숨어서 들어온 병사들을 데리고 류제의 주변을 둘러쌌다.
“꺄아아악!”
“어떻게 된 거야! 달의 무녀가 황제 폐하를……!”
“무녀가 죽으면 폐하의 저주는…….”
“대군께서 검을 빼 드셨다!”
시끄러운 소란 소리가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입에서 퍼져 나오는 숨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눈앞이 어지럽다.
가짜 달의 무녀가 들고 있던 날붙이는 그의 손에 들려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를 좋아하는 저주는 그리던 무기를 얻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사람의 것이 아닌 새빨간 동공이 으르렁거렸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혼란이 시작될 찰나 자리를 빠져나간 제사장이 비명 소리를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경계심 많은 황제라고 하더라도 이런 날까지 주위를 둘러볼 정신은 없었겠지. 능여 대군도 저 정도 인원이면 황제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다.
“하하… 어리석은 황제……. 저주를 품고 죽어라.”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그에게만 기대려 하는 달의 무녀를 황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
황제는 오늘 같은 중요한 날 결국 달의 무녀 때문에 방심했다. 그게 제사장인 그가 원했던 바였다. 제사장이 청사 밖을 나가자 성수청과 내통한 위병들이 문을 잠갔다.
이제 안에 있는 이들은 일이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미친 황제와 그를 처단하는 새로운 황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것이다.
달이 없는 밤 저주로 이성을 잃은 황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빤히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하지 못한 채 신하들과 황가의 일가친척들을 전부 제 손으로 죽이려 들 것이다.
그들에게 황제는 이제 더 이상 황제가 아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살인마에 불과하다.
이에 용기 있게 나서는 자가 능여 대군이다. 그는 날뛰는 황제를 죽이고 정당하게 황위를 찬탈한다. 그렇게 되면 달의 무녀는 소임을 다한다.
천하고 더러운 피를 가진 주제에 달의 일족의 후예라고 궐에 눌어붙는 것부터가 끔찍했다.
필요 없어진 도구는 어떻게 처리할까. 가짜 달의 무녀를 진짜 달의 무녀로 위장한 후 다시 옛날의 달의 일족처럼 반역의 죄를 물어서 수도에서 만 리는 더 떨어진 외딴 섬에 위배를 시킬까, 아니면 황제와 똑같이 처형을 시킬까.
그는 마지막 남은 달의 일족이다. 뒷일을 위해서 죽여 버릴까?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대돼 건방진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리던 중 제사장은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의 모습을 보고 놀라 주춤거렸다.
가마에 태우기 전 약을 먹여 잠을 재우고 성수청 청사 지하에 감금해 놓았던 진짜 달의 무녀가 제사장의 앞에 있었다.
“어… 어떻게 나온 거지? 배신자가 있었다니.”
“스스로 걷지 못하는 치는 아니란다.”
달의 무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한겨울에 입기에는 다소 얇은 옷에 이날을 위한 무녀 화장이 괴기스러웠다. 때마침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사장은 늘 멍하고 어리숙하던 달의 무녀의 눈동자에서 새까만 밤하늘에 홀로 떠있는 달의 오만함과 차가움, 그리고 아련한 따뜻함을 보았다.
“언제나 변함이 없어서 실망스럽지도 않아, 우매한 자야.”
싸늘한 매도에 그의 본능이 말했다. 저자가 있는 한 그가 원하던 바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저것은, 위험한 거라고.
“아니면 이런 날에 일을 벌여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나도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위… 위병! 위병은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제사장이 그의 기묘한 정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서는데 위병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달의 무녀에게서 도망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일을 위해 들여온 성수청 나졸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황제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저항 한번 못한 채로 기묘한 힘에 짓눌려 잠에 빠져있었다.
“허… 허어.”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달의 무녀가 서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괴물이다. 사람의 이해에서 벗어난 서역에서 온 괴력난신의 피가 움직이고 있다.
멀찌감치 서있는 달의 무녀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제사장을 깔보듯이 흘겼다. 제사장은 머릿속이 텅 비는 것처럼 흐릿해지다가 제 몸이 까무러치는 것을 느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잠이 든 제사장을 지나친 달의 무녀는 성수청 청사의 대문을 열었다. 칼을 쥔 채 이성을 잃은 황제에게서 도망가려고 발버둥을 쳤던 다른 이들도 모두 제사장처럼 까무러져 있었다.
달의 무녀는 피 냄새가 낭자하는 곳에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마치 짐승처럼 버둥거리며 겁에 질려 소리를 내는 것을 사냥하는 것을 즐기는 황제의 저주는 사람들이 단숨에 정신을 잃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와중에 누군가의 농락으로 청사에 갇힌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류제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능여 대군도 검을 청사 바닥에 꽂은 채 정신을 잃었다.
용병들은 류제의 손에 전부 목숨을 잃었다. 피를 보고 흥분해서 입꼬리를 실룩거리던 저주는 누군가를 사냥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기척에 붉은 동공을 한 황제가 붉은 피를 머금은 은색 칼을 들고 뒤를 돌았다.
“너도 늘 질리지도 않는구나. 내 자손이 무슨 죄야.”
“…….”
“언제까지 나유타의 피를 따라 방황할 셈이야? 덕분에 나까지 붙잡히고 말았지.”
“로라.”
류제가 낮게 중얼거렸다. 류제의 이성을 억누른 저주가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경은 그런 류제를 보면서도 겁에 질려 하는 기색 없이 오만하게 그에게 걸어갔다.
손에는 어느새 그를 상징하는 월계수 가지가 들려있었다. 곧 류제의 부하들이 이상을 깨닫고 달려올 것이다. 끈질기게 저주를 억누르려 시도하는 류제도 그걸 알고 있었다. 진짜 재경이 왔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내 귀여운 자손에게 걱정 끼치지 말거라, 나유타의 피를 이어받은 자야. 나는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싫단 말이다.”
달려드는 류제의 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가 월계수를 들었다. 휘둘러진 검은 빗나가고 황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의 날이 스친 재경의 머리카락이 얕게 잘려 흩날렸다.
“재…경…….”
류제는 그를 찾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측근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지러운 정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류제는 저주를 통해 언젠가 그 미소를 본 적이 있다고 떠올렸다.
황제를 지키는 임무를 마친 재경 또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를 간신히 받은 류제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측근들의 소란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저 광기를 보아라. 황제는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허공을 가르며 퍼지는 저주의 목소리. 재경의 기억에 없는 순간들이 머릿속에 과감하게 스쳤다.
하늘은 어둡고 땅은 끓어 넘치는 혼란이 가득한 세상. 재경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이 귀신처럼 흐릿하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필히 초하루 의식을 위해 가마를 타고 류제에게―
“그것이 그대의 업보다. 이 나라에 스러져간 이들의 증오다. 이는 황가 대대로 내려와 적합자를 찾아내어 저주할 것이다. 나유타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겠지.”
혼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로 어떤 여자가 앞에 나서며 말했다. 재경 자신처럼 엷은 색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샐쭉한 눈이 앞에 주저앉아 괴로워하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류제처럼 황제가 입는 옷을 입은 그는 그런 그녀에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주변에는 시체가 낭자하여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는 고통에 허덕거리며 구원을 바라는 듯이 버둥거렸다.
“내 백성을 위해서였다!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는데 어찌 이를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단 말이냐!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럼 마땅히 그들의 분노도 받아들여야지.”
“아아… 서역에서 온 무녀여……! 내게는 너뿐이다. 내 곁에 있어다오. 나의 저주처럼 내 자식들과 함께 이어져 내려와 우리를 용서해 다오.”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는 류제처럼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이였다. 그의 동공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붉어서 괴기스러웠다.
이런 괴물인 그를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는 오로지 그녀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구원하지 않는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가여운 나유타, 너는 달의 가호가 없는 날이 오면 네 소중한 이들을 네 손으로 으스러뜨릴 테지. 흐르는 피는 저주를 일깨우려 할 것이며 너의 후손은 저주가 희미해졌을 때 우리 일족을 반역의 죄로 내쫓을 것이외다.”
아마도 먼 옛날의 기억. 재경은 씁쓸한 심정이 들었다. 두 사람 다 필히 이 계약이 못마땅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초대 황제는 절실했고, 달의 무녀는 그를 안쓰럽게 여겼다. 달의 무녀가 그에게 다가가 주변에 낭자한 피를 손에 찍어 화장을 했다.
그것은 재경이 초하룻날 늘 하는 무녀의 화장과 닮았다. 피가 묻은 손으로 그녀가 황제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네 곁에 있을게. 나의 가여운 나유타.”
“로라(Laura)… 나의 월계수.”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건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매여 있는 것인가 재경은 알 수 없었다.
허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둘은 서로 맺어지지 못한 채 서로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들이란 거다.
재경은 정신이 흐릿해졌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무너졌다. 그의 정신이 멀어지기 전 달의 무녀가 사라지는 재경에게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니 그를 부탁한다.”
* * *
재경이 눈을 떴다. 환한 진짜 세계의 빛이 들어왔다.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건지,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왠지 눈물이 나왔다.
조심스레 뜬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주르르 떨어져 귓바퀴를 적셨다. 참을 수 없이 슬펐다.
모르는 천장. 잠시 꿈과 현실을 혼동한 재경은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곧이어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필히 새해 첫날 다른 사람들 손에 이끌려 가마를 타고 성수청 청사에 있을 류제에게 향했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가마를 타기 전 성수청 주술사가 정신을 안정시키는 약이라며 이상한 탕약을 먹였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몸이 답답하고 어지러워 성수청 청사에 도착하니까 졸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약을 먹인 주술사가 다른 사람들 몰래 그를 끌어 내렸다. 재경 대신 그와 체구가 비슷한 이가 똑같은 옷을 입고 가마에 올라탔다.
그의 손에는 차가운 날붙이가 숨겨져 있었다. 재경은 혼미해지는 정신 끝에서 이전에 류제가 보냈던 짧은 서신을 떠올렸다.
몸을 조심하라고 한 의미가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바보였어.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갔다. 류제가 위험하다.
“이게… 뭐… 하는―”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있겠지. 그동안 좋은 꿈이라도 꾸길 바라지. 그게 네 마지막이 될 테니.”
류제를 위해 달의 무녀로서 제사를 올려야 하는데 저들은 나를 지하에 가둔다. 버둥거리는 재경의 손발이 묶이고 입이 틀어 막혔다.
재경은 쏟아지는 잠 속에서 어떻게든 깨어보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초하룻날이야. 류제가 여기에 있어. 축복을 내려주지 않으면 류제는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거야.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류제가……!
하지만 무력하게도 몸이 약에 취해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이 쏟아졌다.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문이 닫힌다. 그 이후로는 그의 기억도 암전이었다.
거기까지 떠오른 재경이 놀라 자리를 박찼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곳은 그때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지하실이 아니었다.
재경은 자신이 머물던 신당보다 더 화려하고 속세의 기운이 느껴지는 낯선 방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제가 위험하다. 시간이 급한데 푹신한 침상에 누워 언제까지 자고 있었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어떻게 된 거지.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있을 거라고 그자가 말했다. 설마…….
“아, 류… 류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재경은 바보였지만 음모에 휘말린 정도는 충분히 인지했다.
다름 아닌 류제의 일이다. 자신이 지하실에 갇히는 바람에 류제에게 축복을 내려주지 못했다. 이번 제사에서는 내가 의식을 내리는 모습을 공개한다고 했어. 소임을 다하지 못한 나를 류제는 계속 기다렸을 것이다.
류제가 날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기라도 했으면 큰일이다. 반대로 류제가 죽은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로 싫다. 여기서 류제까지 잃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인가. 이제 믿을 것은 류제밖에 없는데. 나는… 나는……!
“류제… 류……!”
“진정해.”
정신없이 침상을 벗어나려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코를 처박은 재경은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주는 목소리를 듣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재경이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는 여기 있다.”
류제가 평상시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재경을 안아주었다. 앞머리 새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재경이 안도하며 류제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나… 나는 도중에 가마에서…….”
“괜찮아. 걱정할 것 없으니 침상에 누워라.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어.”
류제가 억지로 재경을 들어다 다시 침상 위에 눕혀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밖에 나갔다가 온 건지 류제의 차가운 손이 재경의 이마에 닿았다.
재경은 그때서야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깨질 듯이 아팠던 머리가 류제의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재경이 이번에도 자신이 잘못해서 일이 틀어진 것인가 두려워서 변명하듯 징징거렸다. 만약 이것 때문에 류제가 멀어져 버리면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다.
“도… 도망간 거 아니야. 네가 몸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갑자기 졸려서……. 다른 사람들은 다 무사한 거야? 넌? 다친 건 아니지?”
“…위험하던 찰나 그대가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나. 덕분에 무사하다. 아니, 오히려 일이 잘 풀렸어.”
손발이 묶여 지하실에 갇힌 채 기절했는데 어떻게 축복을 내린단 말인가. 재경은 그런 기억이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에 이성이 잡아먹혀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류제는 그때 자신의 앞에 서서 오만한 미소를 짓던 그가 재경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때 저주는 내 입을 통해서 그에게 말했다.
로라(Laura). 서역의 말로 월계수를 이르는 말이다. 로라 하놋. 초대 달의 무녀의 이름이다.
“그래, 그대의 덕분이다. 이후에 이 일을 도모했던 성수청 제사장 일당들과 능여 대군을 구속했다. 그대 소속은 임시로 여의 거처로 바뀌었지. 걱정할 것 없다. 그대는 몸이 낫기만을 생각하거라.”
“구속……? 내가 축복을 내렸다고……?”
도대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는 재경은 머리가 복잡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소한 방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아무래도 여의 눈에 닿는 곳에 두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 불편한가?”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이곳에서 류제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다.
류제의 냄새. 류제의 침상. 자기 전 늘 상상하던 그곳에 누워있다. 마음이 편안해진 재경은 다시 금세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그걸 본 류제가 침상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자기 전에 탕약을 마시는 게 좋겠군. 가져오라 이르겠다.”
재경이 코를 훌쩍거리며 류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만큼 약한 힘이었지만 류제는 가만히 붙잡혀 준 채 재경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직 사태가 파악이 안 된 재경은 류제가 정말 괜찮은 건지 불안했다. 이걸 놓으면 안 될 것 같다. 류제를 놓으면 그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다. 재경은 잠이 들면서도 류제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곁에 있을 테니 걱정 말아.”
재경의 흉부가 크게 부풀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류제의 말대로 모든 일은 잘 풀렸다. 모두 제사장의 움직임을 막아준 재경의 덕분이다.
이 일을 도모했던 성수청 제사장은 피를 보지 않겠다는 황제의 뜻을 따라 처리되었다. 종이가 한 겹 한 겹 얼굴 위로 올라갈 때까지도 제사장은 류제에게 정당한 황제가 아니라며 발악했다.
옛날 황제의 피에 흐르던 저주가 옅어져 쓸모가 없어진 달의 일족이 궐에서 쫓겨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일을 꾸민 제사장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로 역모죄로 저잣거리에 시체가 내걸렸다.
제사장의 집안은 반역죄로 3대가 멸해졌다. 그를 도와 일을 꾸민 자들도 모두 잡아들여 만 리 떨어진 외딴 섬에 귀양을 보낸 류제는 그의 재종형제만은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재경아.”
그대가 잠이 든 동안 여는 또다시 지독한 짓을 했다. 여는 살아남았지만 저주를 후대에 내려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대가 여의 곁에 있어준다면 그 누구도 옆에 두지 않아도 좋다. 그러니 곁에 있어다오. 여를 위해다오. 그렇다면 이런 지위는 언제든지 내버려도 좋은데. 하지만 여도 그대도 살기 위해서는 여는 황제여야 하겠지.
그가 조심스레 재경의 옆에 누웠다. 그때 있었던 강신(降神) 때문에 몸이 약해진 건지 재경은 열감기가 며칠째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쭉 잠에 빠져있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을 보면 몸이 곧 나을 징조일지도 모른다.
성수청은 한동안 감찰 대상이 된다. 제사장이 역모죄로 죽었으니 현 성수청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재경은 사사로운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럼 누구의 허락도 받을 것 없이 같이 산책을 가도록 하자. 재경이 다 낫기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류제도 깨어난 재경을 보고 안도했는지 피곤이 몰려왔다.
따뜻하다. 류제가 재경을 꽉 껴안았다. 그도 곧 쪽잠이 들었다.
* * *
역모를 꾀했던 자들이 슬기로운 황제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나유타 전역에 퍼져나갔다.
성수청 제사장과 능여 대군의 역적질에 대한 이야기는 새해 첫날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기에는 영험하신 달의 무녀가 별기은 삭다례 때 몸을 바쳐 황제 폐하를 지켰다는 출처가 불확실한 이야기도 섞였다.
재경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지만 궐 밖 소문이 재경의 귀까지 들어오려면 기나긴 여정을 지나야 했기에 재경이 그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경은 밖에서 소문이 돌거나 말거나 황제의 침전이 있는 궁궐에 마련된 자신의 침소에서 뒹굴거리며 글공부를 했다.
매번 느꼈던 거지만 설화들은 늘 행복한 결말이라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류제의 도움 없이 꾸역꾸역 해석하는 데 성공한 재경이 싱글벙글 웃으며 책을 덮었다.
재경이 열감기가 낫는 동안 그날 일은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성수청 감찰로 인해 소속이 불명확해진 재경은 이제 신당에 내내 갇혀있지 않아도 되는 몸이다.
이제 그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 병풍 뒤에 구멍을 내서 몰래 밖을 오갔던 것처럼 다시금 자유로운 들고양이가 된 것이다.
물론 그가 궐을 떠나는 것은 그럴 만한 마음이 들었을 때겠지만 재경은 아직 떠날 마음이 없었다.
“눈 온다.”
창문 밖으로 흩날리는 작은 눈덩이의 그림자를 보고 재경이 문을 활짝 열었다. 쌓일 눈인지 두꺼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 껴서 세상을 하얗게 덧칠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어 가는 전경을 보며 재경이 좋아라 웃었다. 계속 몸이 안 좋아서 밖에 못 나갔는데 어제부터 의원이 밖에 나가도 된다고 허락을 내렸던 게 기억났다.
눈이 오면 류제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치사하게 아픈 동안 눈이 몽땅 내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는데 오늘 와서 다행이었다.
눈이 그칠세라 마음이 급해진 재경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추워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밖에 돌아다니기엔 옷이 얇았다. 어딘가에 몸을 따뜻하게 덮어줄 거해로 자아낸 두꺼운 옷이 있을 거다.
“항아님, 솜옷 못 봤어?”
“그쪽을 먼저 쓸거라. 금방 그칠 눈이 아니구나.”
재경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시종들은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는 바람에 자주 다니는 길목을 쓴다고 정신이 없었다. 바쁜 사람을 억지로 불러다 이리저리 시켜먹을 정도로 재경은 매정하지 않았다.
방 안 어딘가에 솜옷이 형편 좋게 놓여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던 재경은 아까 류제가 들렀을 때 두고 간 솜두루마기를 마음대로 걸쳤다.
크기가 맞지 않아 아랫단이 끌렸지만 따뜻하기만 하면 아무렴 뭐 어떤가.
재경이 신이 나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따뜻한 솜버선에 태사혜를 구겨 신은 재경은 류제의 두루마기를 펄럭거리며 류제를 찾아 나섰다.
“류제! 눈 온다!”
그가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할 황제의 이름을 상없이 외쳤다. 쏟아지는 눈이 재경의 목소리를 먹고 아래로 떨어져 차곡차곡 쌓였다.
조금 돌아다녔을 뿐인데 벌써 재경의 머리와 어깨에 눈이 수북하게 쌓인다. 재경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 류제를 찾아 헤맸다.
“류제?”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어디를 간 거람. 재경이 익숙하지 않은 궐 안을 돌아다니며 류제를 연신 불렀다.
눈이 내리면 산책을 나가겠다고 꼭꼭 약조를 했으니 류제도 눈이 내린 걸 보고 필히 그가 곳으로 돌아올 거라고 재경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주 거닐던 정원, 텅 빈 후궁의 거처, 의금부 청사 등 처음 보는 전각을 지나친 재경은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다 어떤 전각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호통 소리를 듣고 지레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닥치거라. 그대는 황가의 피를 능멸하려는 셈인가?”
“으악……! 깜짝이야.”
필히 류제가 화가 났을 때 그 목소리인데. 재경이 스리슬쩍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 전각은 류제가 신하들과 조정을 살피는 청사였다. 같이 산책 가기로 했는데, 누가 류제를 화나게 한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재경이 몰래 청사 안을 살피기 위해 살금살금 기웃거렸다.
“하오나 폐하, 황손 또한 반역자의 피가 흐릅니다.”
“아직 세 살도 안 되었지. 이 일과 관련이 없소이다.”
“무르십니다. 전 제사장과 같은 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사전에 싹을 잘라야 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짐은 양자로 들일 생각을 철회하지 않겠소.”
“하오나 폐하.”
“아니면 다음 황위를 위해 그대들의 여식을 친히 바칠 것인가? 아이는커녕 첫날밤을 넘기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조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그를 대할 때와 같은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재경은 조심스레 귀를 떼고 청사를 떠났다. 펑펑 내리는 눈이 그의 흔적을 지웠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재경은 자꾸만 류제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저번에 류제가 말했지. 피가 저주를 부르기 때문에 혼인을 할 수 없다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류제에게 조금의 동질감을 가지고 있던 재경은 다음 황위를 위해 양자를 들일 것이라는 류제의 말이 괴이하게 거슬렸다.
양자를 들이면 혹시 자신은 뒷전이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으, 추워.”
싫은 생각을 떨쳐버리듯 재경이 푸르르 머리를 털었다. 쌓였던 눈이 떨어졌다. 류제가 언제부터 상냥해졌더라. 내가 궐 밖에 멋대로 나간 이후부터였나.
새 황제가 생겼으니 필요 없다고 류제가 날 찾지 않으면 어쩌지. 그때야말로 궐에서 내쫓기는 순간이다.
단순한 재경은 곧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며 손을 내젓고는 뜀박질을 하며 가던 길로 돌아갔다.
류제가 신료 접견을 마친 시간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양자 문제에 관해서 싸우느라 진이 빠졌던 류제는 언제부터 눈이 왔는지도 몰랐다는 얼굴로 새하얘진 세상을 흘겼다. 발이 푹 빠질 만큼 눈이 쌓였다.
“폐하.”
“달의 무녀의 거처로 가자.”
류제가 약조를 떠올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우산을 든 내시가 서둘러서 류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발칙한 함박눈을 막았다.
늦었군. 화를 낼지도 모르겠어. 류제는 어제부터 밖에 나가고 싶어 길길이 날뛰던 재경을 떠올렸다. 눈이 오면 산책을 가자고 약조했으니 지금까지 자신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재경이 머물고 있는 거처의 문을 연 류제는 안에 보이지 않는 재경을 두어 번 호출하였으나 방 안은 텅 빈 후였다.
내시가 궁녀에게 달의 무녀의 위치를 물었으나 눈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던 궁녀들은 안에 계신 것이 아니냐면서 오히려 호들갑을 떨며 놀랐다.
하기야 저들의 주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겠지.
신당에서 머물렀을 때에도 주변을 나졸들이 지키고 있던 와중에도 병풍 뒤 구멍을 파서 신출귀몰하게 도망 나왔던 재경을 떠올리면 그녀들이 들고양이 같은 재경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류제는 자신이 두고 간 두꺼운 솜두루마기가 없는 것을 보고 재경의 행동을 짐작했다. 눈이 오니 기다리다 못해 혼자서 뛰쳐 나가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됐다. 어디에 있는지 알겠어.”
저번에 달의 무녀가 궐 밖으로 나가버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궁녀는 혹시 달의 무녀가 이 틈을 타서 탈출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워하는 듯했다.
꽉 막힌 구중궁궐을 이다지도 쉽게 누비는 자이니 한시라도 눈을 놓친다면 잃어버릴 것 같다는 심정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류제는 재경이 섣부르게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눈이 많이 온다고 건강을 염려하는 내시를 뒤로하고 류제가 재경이 갔을 법한 곳을 찾아 헤맸다. 여를 발견하면 반가워서 뛰쳐나오려다 이내 솔직하지 못하게 늦었다고 투덜거리며 뚱하게 고개를 돌리겠지.
류제는 재경을 달래줄 적당한 변명거리를 떠올리며 정원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정원은 재경도 떠올릴 수 있는 눈을 구경할 적당한 위치였다.
“재경아.”
정자 근처에서 눈을 이만큼 긁어모아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재경이 류제의 목소리를 듣고 쫑긋 고개를 들었다.
토라졌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눈을 동그랗게 뜬 재경은 순수하게 기뻐하며 들고 있던 거대한 눈덩이를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저 큰 것을 던지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바보 같다.
“일찍 왔네!”
“약조를 어겼다고 투덜거릴 줄 알았더니 웬일로 얌전하구나.”
“일하고 있었잖아.”
재경이 그럴 수도 있다면서 이해하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견한 척하는 건지 아니면 또다시 마음을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류제가 가볍게 웃어주며 재경의 머리 위에 잔뜩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가져다가 입은 류제의 두루마기는 얼마나 엉성하게 입었는지 자꾸만 앞이 벌어진다. 류제가 대신 단단히 앞섶을 여미고 벌어지지 않게 끈을 묶어주었다.
“눈이 내릴 때부터 계속 밖에 있었던 것이냐. 손이 차다.”
류제가 자신의 뜨거운 손으로 재경의 양손을 잡아 데웠다. 감각이 없었던 손이 찌릿찌릿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재경이 기분이 이상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재경이 문득 운을 뗐다.
“류제 넌―”
양자 이야기를 말하려던 재경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어서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양자를 들인다는 게 뭐 어때서. 류제는 여전히 날 필요로 할 건데.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류제와 둘이서만 있는 현 상황이 바뀌는 게 싫은 건가?
“왜 그러지?”
“아냐. 바쁜가 보다 해서. 그것보다 이거 봐.”
재경이 류제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이 지금껏 만들었던 눈사람을 가리켰다. 제법 그럴싸한 눈사람은 검은색 자갈로 눈과 코가 콕콕 박혀있었다.
여태 차가웠던 재경의 손이 멀어지자 아쉬웠던 류제가 재경이 만든 눈사람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파서 꼼짝을 못 했을 때에도 눈이 언제 오는지 자꾸 창문만 보더니 그렇게도 좋을까. 가만히 누워있던 것이 몸서리치게 진절머리 난 건가.
“혼자서 용을 썼구나. 잘 만들었다.”
“이 정도야 쉬이 만들지.”
재경이 턱을 치켜세웠다. 류제가 다 만든 눈사람을 보수하려는 재경을 이끌고 정자에 앉았다.
“그만하고 이리 오거라. 몸이 다시 안 좋아지겠어.”
“멀쩡하게 나았어.”
“여가 그대를 걱정한다.”
거봐라. 다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지 않아. 류제가 지적하자 재경은 아니라며 손으로 슥슥 콧물을 닦아 없앴다.
“궁녀들이 그대가 밖에 나선지도 모르더군. 여가 그대를 찾으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다음부터는 언질을 주거라. 그럼 그들도 걱정을 덜 하겠지.”
“버릇이 되어서 그만. 일부러 그런 건 아냐.”
깜박 망각한 것인지 재경이 무안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성수청에 매여 있는 몸이 아니기 때문에 제사장의 명령들은 철회되었다. 영험함을 위해 달의 무녀와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둥 신당 밖에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둥의 억지도 끝이라는 거다.
재경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궐을 나돌 권리가 생겼다. 류제의 처소에 있는 궁녀들은 신당의 궁녀와는 다르게 대답도 잘해주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신당에서 부자유스럽게 갇혀있던 기억이 남은 건지 재경은 가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재경은 궐을 나갈 때도 말하는 것을 깜박했다가 돌아올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들고양이다.
“이자는 들고양이입니다. 잡아두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곳을 벗어나겠지요.”
제사장은 재경을 신당에 묶어둘 때 까닭을 위와 같이 들었다. 류제는 아직 그가 완벽하게 들고양이를 길들였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 마음을 바꾸어서 훌쩍 떠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제사장처럼 재경을 구속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워야 비로소 달의 무녀이다.
“눈이 머리끝까지 쌓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백성들이 일은 어찌하라는 것이냐.”
“눈길을 만들면 되지. 아니면 겨울잠을 자는 거야.”
“모두가 갇혀서 배가 고파 쩔쩔 맬 거다.”
“팍팍하게 굴지 말고 좀 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면 안 돼?”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다 보니 그리되었다. 미안하구나.”
류제가 재미난 소리를 한다며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 귀엽다. 류제도 아주 오래전, 눈이 처소를 막아 매일매일 완벽하게 고립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저주가 너무나 끔찍해서 스스로를 숨기고 싶었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재경은 그러면 세상이 참으로 재미있을 것이라 순수하게 여기는 마음이 좋다.
정자에 앉아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을 구경하노라니 궁녀들이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왔다. 재경의 손은 찻잔에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새빨개져 류제가 한참은 손을 녹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