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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달과 고양이 (4) (84/112)

AU 외전. 달과 고양이 (4)

팔월 초하루는 낯설게 찾아왔다. 류제는 발 안에 인영이 제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늘 앉았던 자리에 앉아 면류관을 벗자 달의 무녀가 발 안에서 나왔다. 다시 무녀다운 차림을 하고 나타난 그는 조금 나른한 듯이 보였다.

“오늘은 춤을 추지 않는 건가.”

“질렸어.”

재경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류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음흉한 눈으로 류제를 흘겼다.

“마음에 들었어? 하기야 넌 그런 거 좋아하니까.”

“아니, 여는 그저…….”

“변명 안 해도 돼. 나도 알아.”

재경이 킬킬 웃으면서 류제를 놀렸다. 류제는 재경이 못 본 사이에 멀쩡해졌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생각 없이 웃는 모습을 누구보다 싫어했으면서 이제 와서.

“날이 덥군.”

“꽁꽁 싸매고 있으니까 그렇지. 좀 벗어.”

“하지만 이 옷은…….”

“아아, 형식적인 거였지.”

즉 형식적인 절차를 류제가 그대로 복종하고 따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놀리듯이 말한 재경의 모습에 류제가 울컥했다.

류제가 두고 보자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 사이 재경은 오른쪽 발목이 가벼운 것에 괴리감을 느끼고 자꾸만 그쪽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오늘은 춤을 추지 않는 까닭은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것이 듣기 싫어서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축복을 내려줄 생각이었다. 류제가 약조를 잊었는지는 몰라도.

재경은 눈 씻고 찾아봐도 류제의 손에 종이 비슷한 것이 보이지 않음에 실망했다. 뭐, 그런 거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났다. 이럴 거면 약조를 하지나 말든가. 임금님 주제에.

“도자기 인형은 잘 붙었나?”

“이따금 넘어지는 오뚝이가 되어버렸지만 덕분에 아직 말 상대가 되어주고 있지.”

재경이 시원한 수정과를 벌컥 들이켰다가 목이 케케해지는 감각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빈정거리는 거면 빈정거리는 거라고 말해. 나 그런 거 잘 이해 못 해.”

“저번에 봤을 때 안색이 창백했으니 혹여 아픈 건 아닐까 싶었다.”

“걱정한 거야?”

“여는 그러면 안 되나.”

류제가 새침하게 투덜거렸다. 그도 재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접근하려 들지 말고 할 일만 하라고 밀어냈던 주제에 수심을 품으니 모순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류제는 부끄러워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류제는 문득 달의 무녀의 귓바퀴가 더위를 먹은 것처럼 새빨간 것을 발견하고 애써 그쪽을 흘겼다. 가벼운 차림인 것 같은데 덥나?

“어… 뭐, 그래. 달의 무녀니까 아프면 안 되겠지. 하루 종일 나태하게 뒹굴거리느라 아플 구석도 없으니 걱정은 후드려 패셔.”

재경은 어떻게든 이 머쓱한 감정을 숨기려고 애썼다. 류제가 상냥하다 못해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았다.

“늦기 전에 후딱 해치우자.”

신성한 축복 의식을 간식 먹듯이 말하는 재경은 월계수나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였더라. 무사와 형통이 달을 축복하길 기원할게.”

어순이 틀리고 내용이 축약된 것 같은데. 류제는 피식 웃으며 저번에 진지하게 축복을 내렸던 재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그는 실은 저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던 거다.

대지를 달구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고개 숙인 황제의 머리를 축복하는 월계수나무는 달의 무녀의 손에 들려 그의 죄를 씻어 내렸다. 무녀의 자비로 그는 무사히 새로운 달을 시작할 수 있었다.

“끝. 잘 가.”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자리에서 일어서던 류제가 싱긋 웃었다. 재경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류제는 답답한 십이장복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가벼운 차림이 된 그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재경이 후다닥 달려들 기세로 눈을 크게 떴다.

“부탁한 건 그대이지 않은가. 무얼 그리 놀라느냐.”

“아니… 비… 빈손이기에 잊어버린 줄 알았지.”

류제는 몸의 열기를 가두어놓았던 십이장복을 벗자 시원해서 몸이 가벼웠다. 의식이 끝났으니 형식적인 절차는 이제 끝이다. 류제가 답답한 앞머리를 쓸어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남을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장담 못 하나, 부탁받은 소임은 최선을 다하마.”

소반 위에 다과를 치운 류제가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재경은 상냥하게 대해주는 류제를 보며 복잡한 듯 기쁜 얼굴로 다가갔다.

류제가 설화집의 첫 장을 펼쳐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글자를 풀어나갔다. 재경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그러니 이런 글자가 탄생한 것이다. 어때. 기억하기 편하지?”

“자… 잠깐만. 천천히… 그러니까… 이게…….”

한 글자, 한 글자 공을 들여 그 의미와 쓰는 법을 알려주던 류제는 손으로 글자를 흉내 내어보며 집중하고 있는 재경의 귓바퀴를 우연찮게 보았다.

더운 듯이 이마에는 땀이 흘렀지만 귓바퀴는 새하얗게 질린 그의 손과 같은 색이었다.

“우앗, 무… 무얼 하는 거야. 놀랐잖아.”

류제는 어느새 재경의 귓바퀴를 쓰다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것처럼 손을 치웠다.

“놀리지 마.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잘못을 한 게 있으면 할머니가 귀를 잡아당기곤 했으니 재경은 류제도 자신이 잘 못 하니까 귀를 잡아당기려고 한 것이라고 오해했다. 자신이 그 정도로 멍청한 건가 재경은 부끄러웠다.

아, 새빨개졌다. 류제는 아까처럼 다시 빨개진 귓불을 보면서 평소처럼 심술궂고 장난기 많은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만나오면서 처음 발견한 특징이다. 류제는 왜인지 그 심정을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 버리고 마는 재경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 * *

입추가 지났다. 하지에 가장 길었던 낮이 정점을 찍고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곧 다가올 추석제를 앞두고 이번 년의 풍흉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풍작을 점치는 사람들은 황제의 곁에 있는 달의 무녀 덕분에 나라에 음양의 조화가 맞아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곡식 창고가 가득 찰 것이라고 말했다.

흉작을 점치는 사람들은 그것이 전쟁의 흔적을 지울 정도로 대단치는 않다고 비아냥거렸다.

밖에서 무슨 말이 오가든 알아도 상관하지 못하고,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이상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을 대단한 정신력은 없는 재경은 밖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도 모르는 채 류제가 준 서책을 펼치고 반복해서 읽었다.

오늘도 종일 갇혀있었던 재경은 류제의 가르침을 되새겨 글자를 손으로 써가며 천천히 해석했다.

“어느… 선비가… 산을 넘다가… 밤이… 깊어서…….”

내용은 나유타에 사는 어린아이라면 십중팔구 아는 이야기였다.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 올라오다가 밤이 늦어 과부만 홀로 사는 산속에 있는 집에 묵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여우에 홀린 것이라 슬기롭게 대처해서 살아남는다는 옛날이야기이다.

이는 자기 전 할머니에게도 들은 기억이 있는 자장가라 덕분에 재경은 류제가 알려준 뜻을 떠올리며 요령 있게 글자를 외울 수 있었다.

날마다 하는 목욕재계가 아니면 밖에 나가질 못하고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류제가 알려준 글자를 반복해서 보는 것은 최근 재경과 오뚝이 사이에서 유행하는 심심풀이였다.

느릿느릿 기억을 더듬어가며 책을 해석하던 재경은 복잡한 글자의 획이 헷갈려서 제멋대로 휘갈겼지만 그게 틀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다음 글자를 까먹었다. 이게 무슨 뜻이었더라. 재경은 류제가 필히 뭐라고 설명하며 알려줬던 글자의 의미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싸맸다.

글을 배우기엔 기억할 용량이 적은 머리는 좀처럼 글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당장 물어보고 싶다!”

생각날락 말락 잡히지 않은 기억에 답답해진 재경이 싫증을 내고 버둥거렸다. 알려준 글자를 전부 외워서 류제를 놀라게 해줄 셈이었던 재경은 계획이 실패했다며 소리 내서 투덜거렸다.

생일 선물을 주겠다는 약조를 잊지 않고 글자를 알려주던 류제는 과일을 깎아주던 할아범처럼 친절했다. 머리가 나빠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물어보는 재경에게 짜증 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 줄 만큼 말이다.

재경은 물어보면서도 언제 류제의 화가 폭발하려나 전전긍긍 눈치를 보았지만 류제는 시월당을 떠날 때까지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매양 화만 내던 모습만 보다 보니 영 적응이 안 되었다.

“진짜 도움이 안 돼! 맨날 잊어버리고!”

끝끝내 글자의 뜻을 떠올리지 못한 재경이 머리를 쾅쾅 때린 다음 꿍한 얼굴로 다음 장을 넘겼다. 류제가 다음번에 만났을 때 이다음 이야기에 나오는 글자들을 알려준다고 했다.

류제가 글자를 배우고 있다는 건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랬다. 까닭을 물었더니 그러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겠냐고 하는 게 은근히 장난꾸러기 같은 구석이 있다. 재경은 그 말을 지금까지 잘 지키는 중이었다.

그날 재경이 충분히 글자를 익혔을 무렵은 해가 밝아오는 늦은 새벽이었다. 그때까지 류제와 함께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류제는 헤어지기 전 책을 품에 잘 숨기라고 조언했고, 재경은 류제의 말대로 신당으로 돌아와 다시 발에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가 차일 때까지 품속에서 책을 꺼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재경은 병풍 뒤에 있던 쥐구멍을 통해 밖에 나간 것처럼 책을 통해 몰래 이야기 속 세상을 오갔다.

이제 몇 번이고 읽은 이야기지만 글자와 함께 보면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만일 글자를 이만큼이나 외웠다는 것을 안다면 류제가 어떤 기분이 들까 재경은 기대되었다. 반드시 떠올려서 전부 외운 다음 깜짝 놀라게 해줄 거야.

재경은 빨리 류제와 만나고 싶었다. 초하룻날이 아니더라도 류제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심심하다는 까닭 말고 모르는 글자를 평소에 잔뜩 물어볼 수 있다는 변명거리가 생기니 말이다.

* * *

“동향을 추적하라.”

“존명.”

그림자가 유연하게 자리를 감추었다. 배경이 확실치 않은 자들이 긴 시간을 간격으로 두고 궐 안으로 침입하고 있다.

그의 눈과 귀가 확인한 수는 두어 명 남짓이지만 그의 정보망을 빠져나간 자들은 필히 있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누구의 뒷배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나라를 쥐어 잡는 류제조차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선황이 독살당한 직후 어의가 죽어가는 황후의 배를 갈라 류제는 간신히 홀로 목숨을 건졌지만 탯줄을 통해서 중독되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 못한 상태였다.

허나 그는 독이 통하지 않는 기이한 특성과 달이 없는 밤에나 피를 보면 나타나는 저주를 품고 기어코 살아남고 말았다. 그의 생존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바라지 않은 일이 틀림없었다.

선황과 선황후를 독살한 범인은 여태 잡히지 않았다. 죄를 뒤집어쓴 자들만 능지처참을 당했을 뿐이다.

부모가 어찌 살해당했는지 내막을 알기 위해 홀로 조사를 하던 류제는 그 범인을 당숙과 그의 아들이자 류제와 띠동갑인 재종형제라 짐작했다. 그가 죽으면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다.

류제는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살아남았고, 황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자들에 힘입어 황위를 이어받았다.

성수청은 저주를 빌미로 류제를 끝까지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선황 부부를 살해한 내막에는 성수청도 필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건만.”

허나 교활한 도마뱀은 긴 꼬리를 끊어내는 것이 특기라 빌미를 주지 않았다.

달의 무녀의 탈출 건으로 성수청의 수많은 관료들이 물갈이된 것은 예상치 못했겠지. 이로 인해 제사장은 달의 무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터다.

자신이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모르는 달의 무녀를 상대로 제사장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기왕 여를 위해서 궐로 돌아온 달의 무녀를 제사장 뜻대로 움직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간악한 자들의 꼭두각시가 되기에는 너무 순진했다. 더군다나 그는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도 정리하지 못했다.

오직 여를 위해 이곳에 붙들려 있는 그를 여로 인해 상처 입힐 수는 없다. 류제는 재경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경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다. 궐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을지라도 유일하게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단단히 알려주어야 했다. 글자 공부는 달의 무녀의 마음을 열기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류제는 저번 초하루를 떠올렸다. 달의 무녀는 똑똑한 편은 아니었지만 궁금한 것은 눈치 보지 않고 곧바로 물어보는 편이라 가르치기는 수월했다.

과연 그가 알려준 글자를 어디까지 외웠을지 류제는 걱정되는 한편 기대감을 품었다.

글공부를 통해 달의 무녀의 마음을 연다는 목적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것으로도 재경이 슬픔을 견뎌낼 수 있다면 그는 최선을 다해서 글자를 알려줄 요량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한 꺼풀 꺾이고 파도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잠잠해졌다. 곧 다가올 수확제와 추석 명절을 위해서 성수청도 다망하게 움직였다.

달의 무녀는 무얼 하고 지내려나. 여가 알려준 것들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려나. 류제는 이따금씩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무를 보는 중에도 들썩거리는 동안 초하룻날이 다시 찾아왔다. 저주스러운 초하룻날을 이렇게 고대할 것이라고 과거의 자신은 짐작할 수 있었을까.

류제는 달의 무녀가 온 이후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생활이 신기해서 목욕재계 중에 한껏 웃어버리고 말았다.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에 그의 용모를 다듬어주던 무수리가 두려움 없이 두 뺨을 붉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열린 문을 지나 류제가 시월당 달의 무녀 대면의 장에 당도했다. 오늘도 발 안에 인영이 있었다. 류제는 재경이 오늘도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문이 닫히고 류제가 자리에 앉아 면류관을 벗으려는데 발 안에서 잠자코 있던 재경이 급한 불이라도 난 양 후다닥 성급하게 뛰쳐나왔다.

“늦었잖아!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있었단 말이야. 재깍재깍 왔어야지!”

“이전과 다름없는 시간에 왔다만.”

“내가 길게 느꼈으니까 늦은 거야.”

재경이 툴툴거리며 품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은 앞장만 구깃구깃해져서 두꺼워져 있었다. 만나자마자 꺼내 드는 것이 선물해 준 책이라니.

꽤나 열심히 공부한 듯해서 류제는 내심 뿌듯해졌다. 실은 방에 붙어있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상 글자라는 걸 금세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도통 기억이 안 나. 물어볼 수가 있어야 망정이지.”

막 자리에 앉은 류제에게 재경이 냅다 책을 들이밀었다. 그 글자는 류제도 재경이 외우기 까다로운 글자라고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 글자를 잊어버릴 줄 짐작했지만 그 외의 글자는 가리키지 않는 걸 보아하니 재경이 자존심을 부리는 것인가 알쏭달쏭했다.

류제가 기특해서 당장 답을 해주려다가 잠시 생각을 바꾸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책을 살짝 밀쳤다.

“글자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 알려주도록 하지.”

“쩨쩨하기는. 오늘까지 참았는데!”

“그렇다면 조금 더 참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 여가 형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구나.”

그렇게 답한 류제에게 뭐라 반박하지 못한 재경이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저번 초하루에 저런 말을 하며 놀렸던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재경은 치사하다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곧 토라질 기세에 류제가 뒷말을 추가해서 그를 달랬다.

“그대를 가르치는 것이 즐거워서 여도 모르게 시간이 가버리곤 하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그렇다면야 뭐…….”

류제가 좋게 타이르자 부루퉁했던 재경이 어쩔 수 없다며 수긍했다. 류제가 은근슬쩍 좋은 말을 하니 재경은 내색하지 않은 척 쑥스러워서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류제는 오늘도 제정신으로 동작하는 잣대를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전전긍긍해진 재경은 류제가 초하루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해가 질 때까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늘 하는 시답잖은 잡담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어서 의식이 끝나고 궁금한 점을 류제가 해결해 주기 바라는 것 같았다.

저런 모습을 알았더라면 진작 글자를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류제는 재경이 먼저 글자를 배우겠다고 말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해가 지고, 류제가 떠나버릴까 고집을 부렸던 옛날과는 달리 잽싸게 의식을 해치운 재경은 월계수 나뭇가지를 던져놓고 류제의 옆에 무릎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나뭇가지를 던져달라는 강아지처럼 책을 내밀었다. 급하기도 해라. 류제는 약조한 대로 차근차근 그 의미와 획을 알려주었다.

저번에 알려준 글자를 얼마큼 기억하고 있나 확인해 본 결과 재경은 어려워하던 낱말을 제외하고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 류제도 놀랐다.

획을 쓰는 법을 몇 개 틀리기는 했지만 웬만한 글자는 완전히 터득한 모양새에 류제가 잘했다며 성대하게 칭찬을 했다. 재경이 잘난 척하며 콧대를 높였다.

“나는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잘 알아두마.”

류제가 기특해서 재경의 머리를 헤집으며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애 취급에 류제는 혹여 저번에 귀를 만질 때처럼 재경이 싫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재경은 만족한 듯이 웃으며 좋아하고 있으니 문득 당혹스러웠다.

“잘했으면 보상을 줘. 돌아오는 게 있어야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재경이 슬그머니 원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류제는 재경이 무슨 보상을 바라는 것일까 잠깐 추리해 봤다. 금은보화? 아니, 그런 걸 바랄 이는 아닌데.

“가지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가지고 싶은 거라기보단… 시간 있으면 나를 보러 와 주었으면 좋겠어.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신당에 말인가?”

짧게 답한 재경이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했다. 초하룻날만 재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슬슬 안달이 나려고 했던 류제는 흥미롭게 재경의 말을 경청했다.

서로 더 친분을 쌓고 싶다는 마음은 똑같은 듯하다. 재경은 류제가 자신을 번거롭게 여기는 게 아닐까 생떼를 쓰는 것 같아 애써 변명했다.

“하… 하루 종일 심심하거든. 같이 놀 사람도 없고. 나중 가면 배운 걸 조금씩 까먹어서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선생으로서 책임을 져야지. 응?”

재경이 아이처럼 징징거리며 류제의 팔을 붙잡았다. 류제가 신당에 놀러온다면 지금처럼 초하루가 될 때까지 심심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류제가 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재경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류제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류제는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무슨 표정을 짓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재경은 자신이 무리한 부탁을 했다고 짐작하고 별 의미 없었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바쁘면 됐어.”

“정무가 일찍 끝나면 들러보도록 하지.”

류제가 잘못 말한 게 아닐까 재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류제는 자신이 장담할 수 없는 것을 섣부르게 답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몹쓸 웃음을 짓는 재경을 보자니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말 바꾸기 없다? 꼭 와야 한다? 약조하는 거다?”

재경이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수청의 관리나 제사장과 피곤한 신경전을 벌여서 허가를 받아내야 했지만 류제는 거짓말 같은 약조를 손가락을 걸고 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기뻐하는데 이제 와 역시 안 되겠다 말할 수 없었다.

“약조 안 지키는 사람은 엉덩이에 뿔 난다고 했어.”

“그러지 않도록 하마.”

“늦어도 좋으니 꼭 와.”

“알았대도.”

재차 확인받은 재경이 신이 나서 싱글벙글 웃었다. 초하룻날이 아니라도 류제와 이야기할 수 있다.

류제는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다가도 재경이 자신과 글을 배우는 것을 그만큼 좋아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니 성수청과 그 사이에 흐르는 복잡한 정치적 기류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은 것이겠지 싶었다.

아침 닭이 울었을 때, 재경은 류제에게 초하루가 아닌 날에 보자며 인사했다. 그날만큼 호쾌하게 그를 돌려보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 * *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상대에게 기대를 받으면 어떻게든 이뤄주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류제는 종자를 통해 성수청에 달의 무녀가 있는 신당을 방문하고 싶다 요청했지만 초하루가 아닌 날에는 곤란하다는 말만 돌아올 뿐 소득이 없어서 미간이 구겨졌다. 몇 번을 시도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처음에는 수확제와 추석제 때문에 달의 무녀도 바쁘기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제사에 달의 무녀는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런 제사는 그의 관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성수청도 달의 무녀는 초하룻날의 의식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때에는 몸을 사린다고 전했다.

류제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달의 무녀는 오로지 저주받은 자신을 위해서 궐에 들여온 자가 아닌가. 달의 무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인 자신의 권한 밑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류제는 심술을 부렸다.

게다가 신당으로 방문을 요한 것은 다름 아닌 달의 무녀 본인이었다.

그걸 성수청에서 거절했다는 것은 성수청은 달의 무녀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고 류제가 지적했다. 성수청은 물론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달의 무녀의 도주 문제로 성수청이 여태 경계하는데 약조한 것이 있으니 류제는 날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음 초하룻날이 와버리면 필히 달의 무녀는 단단히 화가 나서 저번처럼 싸늘하게 그를 쳐다볼지도 모른다.

글자를 배우는 것을 질려 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시간을 돌릴 수 있더라도 그는 그 약조를 해버릴 것 같았다.

그는 나유타의 황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나라의 통치자란 말이다. 류제는 자신이 한낱 청사의 장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

“짐이 찾아왔노라 달의 무녀에게 전하라.”

류제는 불시에 움직였다. 대련장에서 몸을 풀던 그는 신당 주변을 거닐다가 달의 무녀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 홀로 잠시 들른 것이라고 둘러댈 요량이었다.

황제에겐 달의 무녀가 필요하고 달의 무녀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만나는 게 무슨 문제가 있을쏘냐. 류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졸들과 궁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 아… 아니 되옵니다 폐하. 다… 달의 무… 무녀님은 영험함을 위해…….”

“짐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전선에 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폭군을 하찮은 범인이 누가 거스를 수 있을까. 그를 저지했던 신당의 궁녀들과 나졸들이 류제의 차가운 눈동자에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하… 하… 하오나 오늘은 초하룻…날이―”

“제사장에게는 지금 당장 저주가 발현될 것 같다 전하라. 혹여 추악한 저주와 대면하고 싶은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저주로 이성을 잃은 황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소문으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렇다고 감히 사람의 속세를 한참을 벗어난 달의 무녀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초하루를 제하고서는 달의 무녀를 만나선 안 되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저희 같은 잡것들은 감히 영험하신 무녀님과 면어할 수 없사옵니다.”

“네가 모시는 자와 이야기조차 못 나눈다면 시중은 어찌 든단 말이냐. 변명은 되었다. 저리 비켜라.”

류제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그들을 밀치고 신당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재경이 천연덕스럽게 앉아 류제를 맞이하고 있었다.

“네가 오는 소리였구나. 하도 안 와서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저는 혹시라도 못 올까 이렇게 초조했는데 아무런 걱정 없는 태평한 목소리를 들으려니 반대로 화가 절로 가셨다. 류제는 드물게 불평을 하며 재경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사사건건 방해가 들어와서 말이다. 꽉 막힌 사람들뿐이니 말이 통해야지 원.”

“오늘도 안 왔으면 진짜로 저주하려고 했어.”

재경이 귀신 흉내를 내며 히히 웃었다. 저번에 봤던 것처럼 무녀 화장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옷차림인 그는 기둥에 기대고 가만히 앉아서 류제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밖에서는 류제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인영들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류제는 시끄럽다며 문을 닫았다.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임금님의 추진력은 다르구나.”

“그대가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나. 여는 약조를 했다면 지킨다.”

류제가 처음 오는 신당 안을 살피면서 앉아있는 재경에게 다가왔다.

신당은 시월당의 달의 무녀 대면의 장보다는 좁았지만 혼자서 생활하기 충분히 넓은 곳이었다. 너무 넓어서 오히려 이곳에 사람이 산다니 삭막하기까지 했다.

“간식 시간이 아니라서 다과상이 없는데 가져다 달라 할까?”

“괜찮다. 오래 있지는 못하니. 글자 공부는 많이 했느냐? 궁금한 것이 또 있었나?”

“당연하지. 아, 근데 책이 저기에 있는데.”

밖에서 돌연 들려오는 류제의 목소리에 재경은 급하게 사슬을 옷 아래로 감춘 상태였다.

혹시 류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까 봐 책을 이불 아래에 숨겨두었는데 움직이면 안 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책을 가지러 갈 수가 없었다.

“가져다 줘. 날 기다리게 한 벌이야.”

감히 황제를 부려먹다니. 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재경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괘씸했지만 류제는 궐의 예의를 모르고 제멋대로인 재경의 성격을 알았기에 적당히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가 이부자리 위에 올려진 서책을 집어 들었다. 아까 전까지 이곳에 누워있었는지 온기가 느껴졌다.

“여태 뒹굴거리고 있었나?”

“아… 뭐. 돌연 밖이 소란스러워져서 놀랐어. 올 거라면 미리 이야기하지. 준비라도 했을 텐데.”

“아서라. 그대가 여를 상대로 체면치레를 하다니. 아니면 제사장이 밉보이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기라도 했나?”

“윽, 그 아저씨 이야기 하지 마. 깐깐한 똥고집쟁이 싫어. 말도 제대로 안 해주고.”

제사장 이야기를 하자 재경이 질겁하며 치를 떨었다. 발에 사슬을 채운 이후로 제사장을 만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심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은 다 제사장의 탓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초하루가 아닌 날 류제와 만나서 기쁜데 괜히 제사장 이야기로 기분을 썩히고 싶지 않았다.

“추석제 때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없더군. 추석제는 즐거웠나?”

“추석제? 몰라.”

류제에게 책을 넘겨받은 재경이 차르르 책을 넘겨 헷갈리는 글자를 찾았다. 나라가 떠들썩했던 수확제 때도 추석제에도 재경은 이곳에 갇힌 채 글자 연습만 했다.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고 그저 그날따라 밖이 소란스럽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보다 앉아. 언제까지 서있을 거야?”

재경이 어서 오라며 류제를 향해 손짓을 했다. 류제는 굳이 기둥에 기대어 앉아있는 재경과 그의 옷자락에 살짝 삐져나온 황금색 사슬을 발견하고 일순 그것이 무엇일까 머리를 굴렸다.

그는 발로 슬며시 재경의 옷자락을 치웠다. 시월당에서와 달리 재경이 얌전한 것이 마음에 걸리던 와중이다.

황금빛 긴 사슬이 재경의 발을 묶고 있었다. 멋대로 궐을 나가버린 자신의 잘못을 벌주기 위해 제사장이 내린 조치였다.

나졸들을 신당 주변에 빼곡하게 세워두었는데도 병풍 뒤에 쥐구멍을 뚫어 멋대로 들락날락한 것을 알고 불안했던 것이겠지.

“이건 뭐지?”

도망간 건 재경이 잘못한 일이다. 류제가 와서 신이 나 웃고 있던 재경의 얼굴이 굳으며 빨갛게 달아올랐다. 벌을 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류제에게 들킨 것이 수치스러웠다.

“아… 하하. 봤어?”

“그리 말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니 바른대로 답하라.”

류제는 터무니없는 것을 발견하고 노여움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사슬이라니. 내내 이곳에 갇혀있다는 말인가?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원래 나가면 안 되는데 멋대로 나간 거라 제사장 아저씨가 화가 나서…….”

“신당 밖을 나가지 못한다고?”

“내가 잘못한 거잖아. 뭐 어때.”

류제가 오는 것만 고대했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던 재경이 당황해서 시선을 외면했다. 재경은 수치란 것이 이런 의미임을 몸소 깨달았다.

바보같이 류제가 신당으로 놀러 오는 거면 당연히 벌을 받고 있다는 걸 들키는 건데. 경솔했어. 날 뭐라고 생각할까.

역시 바보라고 생각하려나. 겨… 경멸하면 어떻게 하지. 마음이 바뀌어서 글자를 안 가르쳐주면…….

“늘 이런 식인가?”

그는 스스로 비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싶었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벌게진 얼굴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이 다분히 체면이 깎였다.

“그… 그래도 널 만나는 날에는 밖에 나갈 수 있어. 저녁에 목욕재계할 때도 잠깐 나가고.”

“왜 여에게 말하지 않았지?”

“무얼?”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산에서 뛰놀고 다니던 이가 사당에 틀어박혀서 자신을 만나는 날이 아니면 밖에 나갈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류제의 죄책감을 찔렀다. 류제의 주먹이 꽉 쥐어져 부들부들 떨렸다.

“워… 원래 그런 거잖아. 무얼 굳이 시시콜콜 말해?”

“원래 그렇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도 밖에 나가지 못했다는 말이더냐?”

“아… 안 그랬으니까 몰래 나가다가 걸려서 벌을 받는 거지.”

익숙해진 재경은 달의 무녀이니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숨겨졌던 진실을 알게 된 류제가 경악했다.

그 누구도 황제의 저주를 억누르는 달의 무녀를 이런 취급하지 않을 거다. 류제는 재경이 몰래 궐을 나갔다가 돌아온 진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누가 그대를 감히 이런 취급 한단 말이냐. 불평하란 말이다, 이 미련한 자야. 왜 나가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물어봐도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줘서…….”

“널 돌보는 나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냐?”

“나는 달의 무녀가 당연히 이런 건 줄 알았는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재경이 성수청을 감싸 들려 하자 류제는 화가 나서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식겁한 재경은 미쳤나 싶어서 기둥 뒤에 붙는데 류제가 칼을 내리치자 지레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금속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이 힐끗 옆을 살피자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이 끊어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사장이 마땅찮은 얼굴로 신당 문을 열었다. 류제야말로 그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여가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싫어했던 거구나. 이렇게 갇혀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글자만 읽고 여와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여가 가지 않기를 빌고.

그런 그에게 여는 도대체 무슨 말로 상처를 입혔던 것인지.

“제사장이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오.”

류제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재경은 류제의 눈빛이 저렇게 무서울 수 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류제는 호통 소리에 뭔가 잘못된 건가 겁에 질린 재경을 힐끗 쳐다보고 제사장을 끌고 신당 밖으로 나갔다.

“성수청은 달의 무녀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감금하는 것이 무슨 극진한 대접이오! 가축도 저리 대하지는 않소. 사람을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하다니. 나라의 길흉을 맡을 제사장이 하기엔 악독하구려. 이 사실을 알았으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오.”

제사장은 우레와도 같은 황제의 노여움에 잠시 주춤거렸지만 그럼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전에 쫓겨났던 반역자 일족의 후예입니다. 배우지 못한 자이며 폐하의 용안을 마주하는 것조차 분에 넘치는 자입니다. 돌팔매질을 해도 모자랄 판에 궁에서 생활하게 해주는 것조차 과분한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성수청은 폐하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무녀와 가까워진 탓에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폐하.”

“충분히 제정신이오. 짐을 능멸하지 마시오. 그건 수백 년도 전 이야기오.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황제인 짐을 위해서 궐에 온 자이니 마땅히 자유로워야 하오.”

제사장은 류제를 어리석다는 듯이 비웃었다.

“잊으셨던 겁니까. 무녀가 멋대로 궐을 벗어나는 까닭에 폐하께서 저주받은 광기에 짓눌렸다는 것을. 이자는 들고양이입니다. 잡아두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곳을 벗어나겠지요. 폐하께서는 언제 마음을 바꾸어 이곳을 떠날지 모르는 자를 자유롭게 두시려는 것입니까?”

“스스로 궐로 돌아왔소. 그것으로 족하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있습니다. 잡아두지 않으면 곧 변덕을 부려 떠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성수청은 달의 무녀를 책임지고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해 막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간사하게 웃었다. 달의 무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용한 간악한 말재주에 류제는 치가 떨렸다.

“들고양이를 잡아두려고 하니 떠나는 것이오. 짐은 그가 억지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있게 하고 싶소. 다시는 무녀의 발에 사슬을 채우지 마시오. 자유롭게 두도록 해.”

“하오나 폐하.”

“이것은 어명이오. 다음번에 찾아왔을 때 그의 발에 다시 사슬이 묶여있다면 짐을 능멸하는 줄 알고 용서치 않겠다.”

“달의 무녀는 성수청의―”

“여의 말에 토 달지 말라!”

노여움이 극에 달해 저를 일컫는 지칭조차 달리한 류제에게 제사장이 마지못해 답했지만 제사장의 권위를 침범하는 류제가 마땅찮은 듯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달의 무녀가 없으면 곤란한 것은 그와 황제 둘 다일 것이다. 제사장은 달의 무녀에게 상세한 말을 듣기 위해 신당으로 돌아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고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 * *

재경의 발에서 족쇄가 사라졌다. 못마땅한 제사장은 류제에게 황제가 성수청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탄원서를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조정은 류제의 편이었다.

감히 달의 무녀에게 족쇄를 단 것은 나라의 태양인 황제에게 족쇄를 채운 것과 같다며 측근들이 입을 모아 공격했다. 제사장은 제 꾀에 넘어가 때 아닌 궁지에 몰렸다.

제사장은 달의 무녀가 또 사라지면 성수청이 책임을 지어야 한다며 시세 부득이함을 피력했지만 오히려 성수청의 행위에 달의 무녀가 질려 궐을 나가려 한 것이 아니냐 역풍을 맞았다.

이후로 제사장은 달의 무녀에 관해서는 황제의 뜻대로 하라며 몸을 사렸다.

류제는 일이 일단락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전쟁이 끝나고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달의 무녀를 찾으라 명한 것은 성수청이 아니라 류제 그였다.

허나 그는 달의 무녀가 그와 대립하는 성수청의 아래에 있다는 까닭으로 무녀를 등한시하며 간곡한 요청을 무시했다.

그때 기꺼이 재경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사전에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류제는 어리석음에 통탄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여의 잘못이다. 신중했어야 했어.”

“내가 너였더라도 싫어했을 거야. 지나간 이야기는 이제 끝. 곱씹어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재경이 그만하자며 이야기에 선을 그었다. 류제가 그래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재경은 그것보다는 어서 책의 다음 글자를 알려달라며 칭얼거렸다.

‘그것보다는’이라니. 제사장 때문에 반년이 넘게 지독하게 외로운 생활을 했으면서 그게 고작 그런 말로 넘어갈 만한 수준이냔 말인가.

어떻게 되먹은 정신머리인지. 남들보다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건 강한 수준이 아니라 무감각한 게 아닐까 류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인상 풀고 웃어.”

“말이 쉽지. 그대는 항상…….”

“자꾸 걱정만 하면 이마에 주름 생긴다.”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고 있어봤자 힘들기만 할 뿐이란 것을 몸소 알고 있는 재경은 자신의 일에 나서서 힘들어하는 류제가 더 이상했다.

더군다나 궐에 돌아온 것은 재경의 선택이 아니었는가. 재경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고 류제에게는 재경이 필요했다.

신당에 감금되다시피 있었던 이전에도 재경은 벌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을 뿐 죽도록 심심하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불만 사항이 없었다.

지금은 류제가 신당에 자주 들러 주기도 하고 이렇게 글자도 배우고 있지 않는가. 재경은 충분히 행복했다.

“진정 그걸로 된 건가?”

“끈질긴 자식이네. 정말 나갔으면 좋겠냐?”

“아니.”

“그렇지? 네가 지금처럼 와주기만 한다면 난 더할 나위 없어.”

재경이 원래 삶이란 그런 거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류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로지 임금을 위해 구중궁궐에 붙들려 있는 도둑고양이 같은 자가 성수청의 영향력 밖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류제는 몇 번이고 바랐지만 제사장은 쉽게 달의 무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재경을 이곳에 붙들고 있는 자는 류제 자신이었다.

“송구하다. 여의 처지가 그대를 옥죄는구나.”

“됐다니까.”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다오. 여건이 되는 한 노력하마.”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니까. 어차피…….”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린 재경은 이내 말을 줄이고 없었던 일처럼 글자를 익히는 데에 집중했다.

재경의 사정을 알고 있는 류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 것인지 짐작하고 더 이상 사과하지 못했다. 궐 밖에 나가봤자 만날 사람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젠가는 좋은 일도 있을 테지.”

“…좋은 일은 무슨.”

재경이 꿍얼거렸다. 류제는 마음을 꾸욱 눌러 담고 재경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 살아만 있다면 지금의 슬픔과 무기력함 또한 지나갈 일이 될 것이다. 류제는 재경이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한축 견제를 받은 제사장은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승냥이처럼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거슬린다. 허나 사람을 시켜 주시해도 상대가 가만히 있으니 트집 잡지 못해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질 뿐이었다.

독방에 갇혀 대화할 상대도 없이 할 것이라고는 혼잣말이나 글자를 외우는 일밖에 없었던 재경은 이틀에 한 번은 신당을 방문하는 류제 덕분에 누구든 혀를 차는 천방지축인 성격이 드러났다.

류제가 신당에 왔을 때에는 산책도 할 수 있고 이따금 같이 저녁을 들곤 했던 재경은 꼭 한 번씩 장난을 치다가 뭔가를 망가뜨렸다.

그때마다 신당의 궁녀들은 비상사태가 벌어지는 것 같았지만 재경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신당 어딘가에 놓인 금이 간 오뚝이 인형 위에 먼지가 자욱이 쌓였다.

재경을 안쓰럽게 생각하던 류제는 가까워질수록 재경이 마뜩하게 귀엽다고 여겼다. 종잡을 수 없는 들고양이가 길들여져 주변을 맴도는 모습은 더없는 정복감과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그것이 재경이 달의 무녀라서 그런 것인가 여우, 아니 고양이에 홀린 것처럼 다른 감정이 섞인 건가 구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토지세를 수확량에 비례해서 증세하니 시급한 때에 땅을 놀릴 뿐입니다.”

“몇몇 교활한 백성들이 남령초만 파종하여 징세를 피합니다. 토지세를 개혁하기 전 그것을 먼저 처우해야 합니다.”

“남령초는 약재를 빙자한 해악이니 한시라도 빨리 뿌리 뽑아야 합니다.”

“경들의 의견에 동의하오. 남령초는 사람에게 이익이 없소. 땅이 비옥해야 잘 자라는데 그 좋은 땅에 곡물을 심지 못할망정 그것만 재배하고 있으니.”

“산지에서만 심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것조차 지나칩니다. 남령초 재배에 비옥한 땅을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쌀 열 배에 해당하는 세금을 물게 하여 이익을 내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리하면 백성들이 빈 땅에 곡물을 심겠지요.”

“아니 됩니다. 불법적인 재배만 늘어날 뿐입니다. 차라리 가장 좋은 남령초를 진상하는 평야 한 곳만 허락하는 것이…….”

전쟁의 여파로 먼 남쪽에서 들어온 남령초라는 약재는 불을 피워 연기를 마셔서 병을 낫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독성이 강해 남녀노소 누구나 찾아 피워대는 통에 수요량이 날뛰고 좋은 남령초는 값이 비쌌다. 남령초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유타의 경제를 살리기에는 좋은 작물이었다.

그러나 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확한 세법이 적용되지 않아 비옥한 땅을 많이 가진 자들은 곡물 대신 모두 남령초를 재배하는 바람에 쌀이 귀할 지경까지 왔다. 차(茶)와 함께 이익은 된다만 재배를 제재하면 그 여파가 거셀 것이다.

“가정마다 재배를 금하고 지정한 지역에서만 재배하여 판매하는 것이 좋겠군. 국고에 이득이 되고 비옥한 땅을 놀리지 않아도 되니.”

“하오나 남령초로 생계를 이어가는 백성들의 반발이 클 것입니다.”

“지금까지 재배된 남령초는 약재 상태에 따라 국가에서 일정 금액으로 구입하고 내년 파종 시기부터 단속하여 벌금을 내게 하는 방법이 있소.”

“고작 남령초 때문에 국고를 함부로 쓸 수는 없습니다.”

“고작이라 할 수 있는가. 당장 먹을 것이 시급한 백성들에게는 국가에서 남령초를 사들이는 것이 더없이 좋은 혜택이 될 것 아니오.”

“하오나…….”

“경은 무얼 바란단 말이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반대만 할 뿐이지 않는가!”

류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앞머리 새로 보이는 차가운 눈동자에 아까부터 하오나 타령만 하던 신하가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날이 서있던 황제가 최근 들어 유순해졌다 싶었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료 접견의 시간은 폭군을 빙자한 류제의 역정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이 견디기 어려워했다. 나라는 여태 어지럽고 황제는 나라를 망칠 저주를 품었지만 쉽사리 휘둘리지 않았다.

그들 중 몇 관료는 황제의 재종형제와 손을 잡고 류제를 반정으로 몰아낼 궁리를 하는 중이다. 괜한 트집을 잡는 까닭도 그 탓이다. 류제 또한 그를 짐작했다.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 계속되는 언쟁이 끝났다. 지친 류제가 시월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초하룻날이었다. 문이 열리자 발 안에 있던 재경이 얼굴을 쏙 내밀고 반갑게 웃는데 류제는 이 순간이야말로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 때라면서 웃으면서 크게 한숨 쉬었다.

자신도 저렇게 별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며 그는 내심 재경을 부러워했다.

어느덧 재경이 글공부를 한 지 수개월이 지났다. 책 한 권을 뗀 재경은 다음 권의 끝자락을 배우는 중이다. 글자 몇 개를 익히니 쉬운 이야기들은 금세 터득했다.

류제가 신당을 방문하게 된 이래로 다른 놀이를 하느라 학습을 게을리했지만 여전히 류제가 없을 때에는 책을 즐겨 읽는 듯하다.

“입동이 다가오는군. 날이 차가워. 곧 눈이 내릴 테니 조심하거라.”

“항아님들이 사람을 어찌 꽁꽁 싸매는지 몰라.”

“그대는 겨울마다 고뿔이 들 것 같으니. 그 마음이 이해 가는구나.”

“난 고뿔 안 걸려.”

류제의 허락으로 나졸 둘과 궁녀 하나를 동반한다면 혼자서도 신당 주변을 산책할 수 있게 된 재경은 아직도 자신의 영험함을 까닭으로 류제를 제외한 남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말을 들어보면 궁녀들의 태도가 조금 바뀐 모양이다. 아마 어디선가에서 성수청의 과보호를 까닭으로 달의 무녀가 궐을 나갔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실이 깨달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두 살 먹은 아이가 아니었단 말이지. 필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엿한 성인이야. 동갑내기면서 나만 애 취급하지 마.”

재경이 하나둘 손가락을 펴서 셈을 하며 투덜거렸다. 류제가 보기에는 재경은 아직도 어른이 되기에는 몇 년은 부족해 보였다. 저런 철없는 이가 성인이라니. 한참은 멀었다.

그런데 달의 무녀는 혼인을 할 수 있던가? 무녀의 피를 잇기 위해서는 당연히 혼인을 해야만 하겠지. 자신도 마찬가지고.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그대는 누군가를 반려로 맞고 싶은가?”

“웬 뜬금없는 말을. 누가 나와 혼인을 하고 싶겠어? 너야말로 임금님이니 짝이 있지? 가족이 있어서 부럽다.”

재경은 불만스럽게 자신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무녀 화장을 해서 가려지기는 했지만 볼에 덕지덕지 난 주근깨와 수려하지 못한 외모는 거울을 볼 때마다 되먹지 못한 열등감만 남겼다.

반면 류제는 사내가 봐도 잘생겼고 나라의 임금인 데다 상냥한 자이니 못생겼다며 무시하던 마을 처자들을 떠올린 재경은 필히 어디를 가나 류제는 인기가 있을 거라고 제멋대로 여겼다.

“여는 저주 때문에 혼담이 들어오지 않아.”

“저주야 초하룻날마다 내가 막아주는걸.”

“초하룻날 말고도 피를 보면 억누르기 힘들어. 그러니 혼담도 없지. 누가 귀한 자식을 저승길로 보내려 하겠나?”

“피? 혼인이랑 무슨 상관인데?”

재경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똘망똘망 떴다. 설명해 주기 위해 입을 벌렸던 류제는 뭐라 해야 할지 난감해져서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합방을 할 때.”

간신히 거기까지 말했어도 재경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는 표정이었다.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기 힘들었던 류제는 결국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합방을 하면 소중한 곳의 막이 찢어져 피를 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달거리를 하는 궁녀들조차 침전이나 행로에 겹치지 않도록 배정하는 중인데 잠자리 중에 이성을 억누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피 냄새를 맡은 그는 초하룻날처럼 흉포해지기 일쑤고, 그것 때문에 누구도 황후의 자리에 함부로 나서기 두려워하고 있음을 류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나, 나중에 알 수 있을 거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나중 언제? 누가 알려주는데?”

당장 혼담과 피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던 재경은 뭐든지 알고 있는 류제가 난감해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되었다.

류제는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즉각 답을 해줄 만큼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데 왜 뜸을 들이는 걸까. 알면 안 되는 건가?

“다음 초하루에는 별기은(別祈恩) 삭다례(朔茶禮)를 행하니 그때까지는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별기은이 뭔데!”

류제가 간신히 말을 돌렸다. 재경은 다음 초하루 전까지 류제와 만나지 못한다는 소리에 넘어가 질문을 그대로 잊고 말았다.

재경에게 있어서 류제와 만나지 못한다는 소리는 사형 선고와 버금가는 청천벽력이었다.

“새해 첫날 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지내는 제사다. 달의 무녀가 있으니 신세 첫 초하루의 의식을 공개하여 행한다고 하더군. 이를 위하여 달의 무녀는 한동안 속세와 떨어져 의식을 성공하길 기도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윽, 싫어! 안 할래.”

“여가 신당을 방문하는 것도 본래는 예외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점치는 큰 행사인 만큼 여도 물러날 수밖에 없으니 용서해 다오.”

“그런 게 어디 있어! 왜 나한테 안 물어봤는데?! 진작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결국 뜻하는 바는 한 달간 보지 못한다는 소리다. 재경이 투정을 부렸다. 류제는 제사장을 설득할 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굴복하고 말았다. 류제도 재경을 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 수가 없었다.

“너도 입봉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여 없이도 할 일이 제법 많아 바쁠 테지.”

“나는 무얼 해야 하는데?”

“옷 치수도 새로 재고, 걸음걸이나 앉아있는 품새도 새로 배우겠지. 그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이다.”

“거짓말.”

“아니라면 이후에 만났을 때 화를 내도 좋다. 심심하면 궁녀를 시켜 내게 서신을 보내다오. 이제 글을 쓸 수 있겠지?”

“당연하지.”

재경이 뭐 그런 소리를 하냐며 방방 뛰었다. 이 이야기로 다행히 혼인과 첫날밤의 이야기에 대해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아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하마터면 춘화에 있던 그림을 말로 설명할 곤란할 상황이 올 뻔했다.

“두고 봐. 매일매일 서신을 보내줄 거야.”

“그러려면 오늘 밤에도 열심히 배워야겠구나.”

류제가 웃으면서 재경에게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알려주었다. 알려준 글자를 되짚으며 외우고 있는 재경의 귓바퀴가 오늘도 붉었다.

과연 달의 무녀도 언젠가는 혼인을 하고 아이를 가질 텐데 과연 누가 이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영험함이 떨어진다고 여 외에는 아무와도 이야기를 못 하는데 과연 첫날밤은 제대로 치를 수나 있나?

아니면 몰래 춘화를 보여주려나? 보아하니 그런 가르침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듯한데 설마 여가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새벽이 찾아왔다. 모두가 잠을 자고 있다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날이 늦었지만 또다시 한 달간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재경은 좀처럼 류제를 놓아주지 못했다. 류제는 오늘은 아침 수라를 함께 들고 가겠다며 삐친 재경을 달랬다.

재경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아침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내심 기뻤는지 글을 잘 배운다며 칭찬해 주는 류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재경이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류제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피곤한가?”

“아니.”

그저 다음 달까지 사람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만날 수 없다는 것에 아닌 척도 못 하고 미련을 보이는 재경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은 정상일까.

어리숙한 그는 첫날밤에 어떤 얼굴로 어떻게 움직일까. 무지한 채 부인 될 여인에게 몸을 맡길까? 어둠 속에서 부끄러운 듯이 귓바퀴를 붉히고 어찌할 바 모르는 눈동자를 얌전히 굴리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의 손에 흥분해서 이윽고 귓바퀴의 열이 몸 전체에 퍼지고 낭창한 몸을 품에 안을 것이다.

제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정체도 모르는 여인에게 질투한 류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성인이 아이를 갖기 위해 배우자를 맞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허나 류제는 달의 무녀가 자신 말고 다른 소중한 사람이 생기는 것이 미치도록 마음에 안 찼다. 새빨간 타인에게 무언갈 빼앗기는 듯했다.

“왜 그래?”

반쯤 졸고 있던 재경이 류제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리에 눕자 멍한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류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에게 놓아줄 수 없는 이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품에 꼭 맞게 들어오는 재경은 쿵쿵거리는 류제의 심장 소리에 안심했는지 조금 더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류제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어리석은 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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