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달과 고양이 (3)
집무를 살피던 류제는 요상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던 초하룻날의 재경을 떠올리고 두루마리를 놓았다.
제사장의 지시거나 의미 없는 변덕일 뿐이라며 주문처럼 중얼거린 그는 붓을 들었다. 문득문득 번뜩이는 진지한 가무를 떠올리면 달밤에 홀린 이처럼 이상해졌다.
“…역시 결결이 상대를 했어야 했던가.”
달의 무녀의 사고력은 짧다. 제사장의 지시라 굴며 품은 마음을 폄하해도 류제는 그날 재경이 무얼 잘못 먹었거나 화가 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달의 무녀가 그 신분에 걸맞은 진중한 태도를 갖춰 보이는 것이 바람이었다고는 하나 돌연 사람이 바뀌니 도무지 헷갈린다.
달포에 한 번 보는 것이니 그리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표정이 거슬렸다. 실수로 사람을 죽일 뻔한 것을 알았으면서도 실실 웃었지 않았나. 전부터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초하룻날에 만나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금세 흉내가 질렸을지도 모르지.
조금만 운을 떼면 헤실한 웃음이나 지으면서 웃어넘기려고 할 거다. 저주를 조롱했던 마음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리하였다 하면 용허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류제는 처음으로 달의 무녀와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렸다. 초하룻날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었는데 이게 다 달의 무녀 탓이다. 다시는 이런 괴상한 거슬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달의 무녀의 꿍꿍이를 파헤칠 셈이었다.
초하룻날을 하루 앞둔 유월 그믐날. 저녁부터 성수청(星宿廳) 주술사들이 궐내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저녁 수라를 들기 전 금위대장과 합을 맞추던 류제는 추태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그들이 소란스러웠다. 허나 곧 성수청에서 보낸 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그가 놀라 금위대장의 귀를 자를 뻔했다.
“사라졌다고?”
“예…예… 초하룻날 일몰 전까지 달의 무녀를 찾겠다 제사장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영험한 달의 무녀를 받드는 성수청은 무녀가 사라졌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류제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창을 땅에 박았다. 류제의 눈빛이 사나웠다.
금위대장은 혹여 노여움을 품은 류제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성수청에서 온 사자는 그가 죄인인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신당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구멍이 있었으니 스스로 나간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금 동서남북의 대문을 모두 폐쇄하라 일렀으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심려치 않을 수 있나.”
류제가 눈가를 찌푸렸다. 기꺼이 재회를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감히 먼지처럼 사라지다니.
늘 가볍게 굴던 그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무감각하고 싸늘했던 건 이것의 징조다. 제사장과 모의한 것인가? 희망을 쥐어주는 척 사라져버리는? 그렇다고 하기엔 달의 무녀라는 중요한 패를 함부로 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의 번영을 기도해야 하는 성수청에서 어찌 감히 태양과도 같은 황제 폐하께 누를 끼칠 수가 있단 말이오. 모독이오. 반역과 다름없는 행위야!”
“폐하께서 작은 허물은 너그럽게 용서하셨지만, 뒤에 큰 허물이 있어서 부득이 폄체하시면 또한 덕에 누가 됩니다. 청컨대 속히 체직하소서.”
“성수청은 반드시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오. 한시라도 존체 여하하온지 확인하시오.”
중대한 사항으로 모인 조정에서는 관료들이 제사장을 물어뜯었다. 그들의 다른 어리석은 부분을 짚으며 능구렁이 담을 넘어가야 하는 제사장은 실수를 부인하지 못했다. 제사장은 표독을 품었다.
“직무에 소홀한 대역무도의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반드시 달의 무녀를 찾겠습니다.”
“혹여 달의 무녀가 이대로 사라진다면 그대는 관을 벗고 재산을 몰수당해 귀양을 보낼 것이야. 폐족 한 삼대는 궐에 발도 들일 수 없겠지.”
류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합당한 벌이다. 황제와 긴밀한 관계인 달의 무녀의 감시에 소홀한 것은 반역에 가까운 대죄였다.
제사장이 해밖에 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행할 리 없다. 달의 무녀의 도주는 필히 제사장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 틀림없었다. 달의 무녀의 단독 행동이란 말인가.
성수청은 수도를 둘러싼 네 대문을 닫고 도성 안의 저잣거리를 뒤졌지만 달의 무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별 소득 없이 다음 날 초하루가 찾아왔다.
어젯밤부터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한 류제는 시간이 가까워오자 홀로 시월당으로 향했다. 주술사와 궁녀를 포함해 시월당 안에 있는 자들을 물린 류제는 백성 누구도 제물 삼고 싶지 않았다.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거라.”
“예, 폐하.”
금위대장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옥체에 상처를 낼 수는 없겠지만 지키는 것은 신하로서의 소임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성수청의 주술사들과 관리들은 달의 무녀를 찾기 위해 발로 뛰며 돌아다녔다.
“오랜만이구나.”
후우. 그가 긴 심호흡을 내뱉었다. 달의 무녀가 없었더라도 초하룻날은 그가 태어난 날부터 찾아온 저주다. 전장에서는 괴물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괴물처럼 정신을 놓아버리는 황제는 나유타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초하룻날에 몸을 가두는 것은 달의 무녀가 오기 전까지 그가 행하던 의식이었으니 괜찮았다. 괴로울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류제가 텅 빈 대면의 장에 앉아 면류관을 벗었다. 앞에 쳐진 발 안이 공허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가 사라졌으니 류제는 후회감이 들었다. 붙잡아 두고 싶어 칭얼거리던 무녀의 손짓이 괜히 떠올랐다.
만일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반드시 온 나라를 뒤져 궐에 붙잡아 놓을 테지만 억지로 붙드는 것밖에 더 되지 않나.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그는 필히 달의 무녀가 이곳에서 주어지는 안락한 삶과 권력에 도취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황제인 자신에게 심심하다며 반말을 하는 둥 상없이 맞먹으려 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과 반대로 달의 무녀는 이곳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그는 여를 붙들고 싶어 했지. 실은 그것이 무언가의 신호가 아니었을까? 무지의 까닭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걸 증명한 것 같았다. 마음 한편에서 죄책감이 찔러 댔다.
타는 듯한 목마름과 의도를 알 수 없는 욕망. 파괴 욕구가 오랜만에 몸을 지배할 듯이 치밀어 올라 버거웠다. 저주를 억눌러 주는 무녀가 없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게 편리함을 추구한다. 고작 몇 달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 평생토록 가져온 고통이 흐릿해졌다니. 류제는 이를 악물며 조금이라도 이성을 길게 유지하려고 했다.
해가 뜰 때까지 이 광기를 혼자서 억누를 것이다. 제발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기를.
류제는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이성이 까무러쳤다. 아무리 달의 무녀가 궐을 벗어나고 싶어 한들 그에게는 달의 무녀가 절실했다.
* * *
잠깐 마실을 다녀오겠다는 거지 재경은 궐에서 도망칠 생각이 아니었다. 칠월 초하루가 되기 전에는, 아니 하룻밤 잘 것도 없이 오후에는 당연히 궐로 돌아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했다. 몰래 나간 걸 들켜서 좋을 것도 없거니와 할머니가 없는 집에서 자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의도 없이 그는 작별 인사도 못한 할아범의 얼굴을 본 후 돌아가려고 했다.
자기는 잘 지낸다고. 혼자 내버려 둬서 송구하다고.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혼자 남은 할아범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재경은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가져온 음식들과 보자기, 술병을 그대로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자리를 떴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면 할아범도 깜짝 놀라겠지. 재경은 다 빠진 이빨 때문에 구멍이 휑한 미소를 볼 생각에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할아범은 몸이 썩는 병을 앓고 있지만 옛날에 비해 많이 건강해진 모양새였다. 잡초가 무성하기는 했지만 아까 여름 작물이 밭에서 잘 자라고 있었지. 혼자서 밭을 일구는 건 힘들지 않을까.
아침부터 성에서부터 수도 외진 곳까지 달려온 재경은 여간 지친 듯이 보였다. 그는 너저분해진 귀한 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흙바닥에 비비며 버선발로 산을 내려갔다.
사냥꾼이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버려진 움막을 개조해 만든 할아범의 집은 거대한 궁궐에 비하면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처럼 하찮았다. 재경은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중천에 떠서 한창 밭일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 보이지 않아 설마 할아범마저 이곳을 떠난 것이 아닐까 싶었던 재경이 기쁜 듯이 눈을 반짝였다.
목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그가 그리워졌다. 재경은 대답 대신 쪽마루에 무릎 꿇고 문을 활짝 열었다.
“할아범, 나 왔어.”
“…재… 재경아!”
이부자리에서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할아범이 있었다. 이전에 비해 더 마르고 노쇠해진 몸을 이끌고 그가 재경을 발견하고 부족한 팔다리로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경은 무리하지 말라고 그를 진정시킨 다음 쪽마루에 걸터앉아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언뜻 진한 흙빛이 돌았던 할아범의 얼굴에 생기가 생겼다.
“너… 네 이놈 몹쓸 자식아.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이제야 나타나. 나라님들이 널 왜 데리고 간 거냐. 응?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니지?”
“궐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어. 오늘만 짬을 내서 나온 거야. 특별한 날이잖아.”
“아이고… 재경아… 벌써 시간이 그리 지났구나. 준비한 것이 없어서 어쩌누.”
“괜찮아. 오랜만에 인사하고 싶어서 온 거야.”
“응, 응. 장하다. 응.”
그는 마지막으로 재경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며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장지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재경을 안아주었다.
재경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무엇보다 좋은 소식이었다. 재경은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을 느끼고 걱정이 되었다. 전보다 더 마른 것 같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재경은 그의 머리맡에 작은 대야에 물이 찬 채 옆에는 젖은 수건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재경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도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썩 나이가 많았다. 재경은 혹여 궐에 있는 사이에 그마저도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할아범 혼자서 외로웠지?”
“나라님께서 오라고 하는데 별수 있겠느냐. 네가 무사하니 좋구나.”
그는 몸의 마디마디가 쑤셔오는 것이 이제야 가신다며 헐헐 웃었다. 재경이 오니 기운이 넘쳐흐른다며 자꾸만 아픈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의 거죽이 흉측하게 뼈에 달라붙은 모습에 재경이 안타까웠는지 할아범에게 말했다.
“뭐라도 먹었어? 좀 해올까?”
“어려운 길 와준 손님한테 어찌 그러냐. 감자가 있는데 좀 삶아주련?”
“할아범은 가만히 있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게.”
재경은 일어서려는 할아범을 만류하고 부엌간으로 향했다.
할아범은 몸이 아픈 데다 혼자 지내느라 입맛이 없어 통 무얼 먹질 않았는지 가마솥은 깨끗하고 장작은 타다 남은 재가 그대로 찬 채였다. 불씨는 꺼진 건지, 아니면 간신히 살아있는 건지 애매하다.
근처 개울가에서 흙 감자를 씻어온 재경은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간신히 불씨를 살려 감자를 삶았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범은 필히 오늘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엌을 살피니 쌀독은 진작 비었고, 감자와 보리, 콩 조금, 알이 얼마 없는 옥수수들과 말린 시래기가 다였다.
이것 가지고 할아범이 여름을 날 수 있을까. 재경은 걱정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일손이 줄어드니 먹을 것도 줄어든 거다.
삼 일에 한 번씩은 나올까. 재경은 심란했다. 장신구 중에 값나가게 생긴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들을 팔면 돈이 좀 될지도 모른다.
그걸로 마을에서 음식을 사면 할아범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할아범은 몰골이 나쁘니 마을에 내려가기도 힘들 거고.
어차피 나는 초하룻날만 궐에 있으면 되니까. 재경은 앞으로는 그래야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솥에서 흙이 고인 물을 덜어낸 재경은 이가 없는 할아범이 잘 먹을 수 있게끔 삶은 감자를 으깨고 주걱으로 저었다.
간신히 한 줌 남은 소금을 조금 덜어 감자죽에 넣은 그는 그릇에 먹기 좋게 음식을 담았다. 쟁반으로 조심스레 감자죽을 올려둔 재경이 할아범에게로 돌아왔다.
“천천히 먹어.”
“우리 재경이가 만든 것은 모두 맛있지.”
“호들갑은. 그냥 감자죽이야. 누가 해도 똑같아.”
할아범은 구태여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끼리 사이에 그런 쑥스러운 말을 들으면 재경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할아범은 몇 달 만에 다시 느끼는 타인의 손길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언제 아팠냐는 듯이 꿀떡꿀떡 죽을 잘도 들이켰다.
“꼼짝도 못 할 정도로 아프면 산 아래 사냥꾼 아저씨한테 부탁을 해. 그 아저씨는 할아범한테 고기를 나눠주는 좋은 아저씨잖아.”
“그래야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재경아.”
“안 괜찮아 보이니 하는 소리 아니야.”
그는 툴툴거리는 재경을 장하다며 쓰다듬었다. 나병이 옮을 거라며 흉측하게 썩은 그의 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주는 것은 이제 재경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는 어린 재경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까 걱정해서 차마 닿지 못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 이 따듯하고 상냥한 체온을 다시는 만지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할아범은 마음이 아팠다.
재경은 할아범이 다 먹은 그릇을 치웠다. 할아범은 재경을 반기고 죽을 먹는 것에 기력을 다 쓰는 바람에 다시 앓아눕고 말았다.
아마도 꿉꿉하고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더위를 먹은 것이 아닌가, 재경이 낡은 수건으로 찬물을 적셔 할아범의 몸을 닦아주었다. 할아범은 재경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무리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할아범은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재경은 혹여나 할머니 생각을 되새김질했다.
더위 먹은 노인이 죽는 것은 흔하다. 할아범이 이런 상태인데 눈 새파랗게 뜨고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재경은 할아범이 아픈 것이 다 자기 탓인 것 같았다. 자기가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을 치니까 할아범까지 이렇게 된 거다. 재경은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 제 손으로 망가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약을 구해 올게.”
“괜찮다. 어서 가…….”
“할아범이 아프면 걱정돼서 어떻게 두고 떠나?”
재경은 가만히 있으라며 할아범을 눕히고 해를 살폈다.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다. 여름이라 해가 길지만 지금 출발한다면 저녁 전까지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굳힌 재경은 마을로 향했다. 굳은살이 빠졌던 발에 물집이 잡혔는지 걸을 때마다 아프다. 그럼에도 재경은 달렸다.
할아범에게는 의원이 약을 만들어줄지도 몰랐다. 돈은? 인색한 의원이 감히 외상을 해줄 리가 없다.
재경은 몸을 뒤지다가 오랫동안 달고 있어서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던 귀고리를 떠올렸다. 초하룻날에는 주렁주렁 더 대단한 것을 달기는 하지만 이건 작고 얇은 종류였다.
“의원 아저씨, 아저씨!”
재경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다른 사람을 진찰하고 있던 의원이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그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손을 떨었다.
재경의 모습을 보고 도깨비라도 나타난 것처럼 환자는 꽁지 빠져라 도망갔다. 재경은 달고 있던 귀고리를 빼서 의원의 책상에 무턱대고 올리며 외쳤다.
“할아범이 아파. 약을 지어줘.”
“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냐. 잡혀간 것 아니었냐?”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부모의 죄 대신 재경이 나라님에게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재경은 약을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할아범이 더위 먹은 것 같아. 이거 줄 테니까 약이나 만들어줘.”
흙투성이인 옷에 버선발이기는 해도 질 좋은 비단 옷차림인 재경과 그가 내려놓은 금귀고리를 본 의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의원이 귀고리에 손을 대려고 하자 재경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낚아챘다.
“먹을 것도 구해줘.”
의원은 죄를 짓고 잡혀갔다던 재경이 금귀고리를 차고 돌아오자 어리둥절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저치는 비싼 금귀고리를 약재와 음식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재경은 그 가치를 모른다.
그는 선심 쓰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원은 돌팔이는 아니었는지 더위 먹은 노인에게는 약보다는 보양을 하라고 충고했다. 재경은 찹쌀 한 되와 소금 한 홉, 의원이 마당에서 키우는 노계 한 마리와 복숭아 몇 알, 더위 먹은 사람을 낫게 해주는 약 이레분을 얻어다가 돌아왔다.
고작 조그마한 귀고리로 음식과 약재를 구할 수 있어 기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챙겨올걸. 할아범도 금방 몸이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범!”
돌아오니 벌써 해가 산 너머로 사라졌다. 신당에 저녁밥이 나올 시간이다. 재경은 필히 궐인들이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라고 한숨을 쉬었다.
감시가 더 심해지거나 병풍 뒤에 있는 구멍을 들키면 궐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가 되겠지.
당장에 할아범이 건강해질 수 있다면야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재경은 스스로를 달랬다.
재경은 귀고리와 교환한 노계를 거친 숨을 뱉는 할아범을 위해 잡아다가 내장을 제거하고 물에 끓였다. 푹 곤 고기를 발라내고 잘게 찢었다. 고기 바른 탕에 찹쌀을 넣고 한 번 더 끓인 그는 이 빠진 그릇에 한가득 담아냈다.
“이거 먹고 약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네가 호사를 누려야 할 텐디…….”
“할아범과 다시 만난 것도 호사야.”
평범하게 이야기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는 행위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재경은 만족스러웠다.
다만 궐에는 초하루인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가야만 한다. 류제에게는 그가 필요했고 그가 없다면 누군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할아범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궐에서 나간 것 때문에 할아범의 신변에 큰일이 나기는 싫었다.
“몸은 어때?”
“괜찮고말고.”
그는 힘없이 웃었지만 낯빛은 어두웠다. 그는 재경이 만들어준 닭죽을 반의반도 먹지 못했다. 약을 먹었으니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밤새 할아범을 간호하던 재경이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어도 할아범은 정신을 놓았다. 기력을 차리라고 고기와 약을 먹여도 전부 게워냈다. 할머니를 보냈을 때처럼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해가 떠오르자 땅이 지옥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집 안은 열기 때문에 찜기 안에 있는 것같이 숨이 막혔다. 가쁜 숨을 내쉰 할아범의 거죽만 남은 몸에서 잘도 식은땀이 흘렀다.
“할아범, 속은 좀 어때?”
그가 허우적거렸다. 말은 계속 괜찮다는데 혼자서 몸을 못 가누었다. 재경은 점점 서쪽으로 향하는 해를 보면서 전전긍긍했다.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할아범의 몸을 조심스레 닦았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할아범의 숨은 점점 옅어져 갔다. 이젠 미지근한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몸은 삐쩍 말라서 늑골이 만져지는데 피부는 짓물러서 썩어갔다.
그는 이웃이 차례로 이곳을 떠나간 이후 홀로 이곳을 지키면서 밭을 일구었을 것이다. 재경은 할아범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떠봐. 나 보여?”
“으응… 뜨고 있어……. 가… 재경아, 어서…….”
재경을 반긴 것이 마지막 힘인 것처럼 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할아범은 이제 눈을 뜰 힘도 없어 보였다.
못 볼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는 손을 까딱거리며 재경에게 부탁했다. 재경은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못내 할아범은 연약한 숨을 거두었다. 재경이 계곡에 찬물을 뜨러 갔을 사이다. 제가 대야를 떨어뜨렸다는 것도 잊은 재경이 헐레벌떡 할아범을 깨웠으나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재경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제 다했을 목숨이다. 허나 재경은 모든 게 다 자기 탓인 것 같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할아범의 손을 붙잡은 채 한참을 훌쩍거리던 재경은 할머니의 무덤 옆에 할아범을 묻었다.
할아범이 누울 자리를 예쁘게 가다듬은 재경은 시원한 흙 이불을 덮어주었다. 재경은 녹슨 삽을 내팽개치고 고개를 처박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경은 할머니의 무덤 앞에 놓인 오뚝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할머니가 죽은 것도, 할아범이 죽은 것도 내 탓이야.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는 게 없어. 다 망치기만 하지.
어떻게 궐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재경이 허청허청 걸었다. 호환마마가 물어다 죽여 버린다면 좋겠다. 그럼 쥐어짜이는 심장도 덜 아플지도 모르지.
오늘은 과연 달이 없어 세상이 어둠 속에 잠긴 것 같은 날이다. 정처 없이 칠흑 같은 산속을 헤매던 재경은 오밤중이 되어서야 간신히 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재경은 나갔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달의 무녀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던 나졸들에게 발견되어 쉽사리 붙들렸다.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갔다.
신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는 게 아닌 다른 길로 시월당으로 향하니 따분한 현실 속 좀처럼 겪지 못할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겠지만 재경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들이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졸들은 달의 무녀를 성수청의 나인들에게 맡겼다. 이틀 동안 산길을 걷는 통에 꼴이 더러웠지만 재경은 영험함을 올려준다는 그럴싸한 목적으로 하던 목욕재계도 없이 도구처럼 시월당에 집어넣어졌다.
달이 없는 밤에 실컷 취한 황제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았던 금위대장은 무모하다며 재경을 막아 세웠다.
달의 무녀를 무사히 찾은 것은 둘째 치고 이번 초하루는 황제를 내버려 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달의 무녀라고 할지언정 달이 없는 밤에 폐하의 저주와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잔말 말고 비켜.”
주술사들이 뭐라 답하기 전에 재경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재경은 죽어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달의 무녀의 눈에서 보였던 기묘할 정도로 가라앉은 꺼림칙한 감각에 금위대장이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과연 달의 무녀. 처음 마주한 그의 얼굴은 주근깨 흙투성이에 하찮을 정도로 왜소했지만 황제와 버금가는 거물임을 금위대장은 직감했다. 저건 저 나이대가 가질 수 있는 눈이 아니었다.
금위대장이 비키자 재경은 비틀거리며 홀로 시월당에 들어갔다. 그가 첫 번째 문을 열고 그다음 문을 열고 마지막 문을 열었다.
짐승이 헤집어 놓은 시월당 달의 무녀 대면의 장은 재경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같이 어지러웠다. 재경은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 이성을 잃은 류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늦어서 미안.”
늘 그랬던 것처럼 금세 얼굴을 바꾼 재경이 철없이 웃었다. 저주의 광기에 잔뜩 취한 류제는 재경을 알아보지 못했다.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붉은 동공이 이글거리며 재경을 사냥감을 응시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화났어?”
저주는 재경을 물어뜯을 듯이 덤벼들었다. 재경은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처럼 다가왔다.
재경은 류제의 힘에 못 이겨 뒤로 넘어졌다. 저주는 재경을 온 힘을 다해 망가뜨리려고 했지만 덕분에 류제를 쉽게 붙잡았던 재경은 품에 숨겨놓았던 작은 월계수 가지로 저주를 억눌렀다.
류제는 길들여진 짐승처럼 온순하게 변해서 재경의 위에 추욱 늘어졌다. 달의 무녀의 힘으로 저주가 마음속 깊이 가라앉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동안 류제는 잠시 동안 재경을 깔고 누운 채 꼼짝을 못 했다.
머리로 몰렸던 피가 가라앉아도 현기증이 가시질 않았다. 재경은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오는 류제의 무게가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좀 바빴어.”
마침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류제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흐트러진 재경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무녀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무녀 옷을 입지 않은 재경은 흙투성이에 꾀죄죄하고 피곤해 보였다.
“영영 도망친 줄 알았다마는.”
“그러게. 아깝게 됐네.”
너저분하게 누워있던 재경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연히 류제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류제는 맨날 화만 내니까. 혼이 나더라도 꼴사납게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던 재경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니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바닥에 잠시 눈을 흘긴 재경은 품에서 월계수를 꺼내다가 놓쳐버린 오뚝이가 산산조각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 동요했다.
재경이 애써 류제에게 변명했다.
“집에 다녀왔거든. 어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일이 좀 생겨서.”
“누가 허락을 내렸지?”
“누구긴 누구야. 내가 내렸지.”
“왜 멋대로 행동했나.”
무책임하게 굴지 말고 네 본분을 다해라. 도망쳤던 주제에 왜 나타난 거냐. 무엇이 목적이냐. 저번의 가무는 무엇이냐.
여가 나쁜 소리를 해서인가. 달포 전 여에게 진지하게 사과를 한 그대를 알아주지 못해서 화가 난 건가.
류제는 재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났어도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과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그의 앞에 존재한다는 게 다른 생각을 묻을 만큼 기뻤다.
“잊어버렸구나. 내가 필히 미역국 차려두라고 했었는데.”
“뚱딴지같은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유월 그믐날은 내 생일이라고 했잖아.”
재경이 너무하다며 대충 흘려 넘겼다. 어차피 류제가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말을 돌리기엔 적당한 거리였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류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귀로 듣고 흘렸던 시답잖은 담화를 떠올려 보았다.
“생일?”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재경이 시선을 외면했다. 화를 내지 않는 류제가 언제 폭발해서 성을 낼지 무섭기만 했다. 재경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이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류제가 가만히 있자 재경이 이전처럼 실실 웃으며 이제 가도 된다고 손짓했다. ‘바쁘지?’라고 되지도 않는 배려의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류제는 저 미소가 거슬렸다. 달의 무녀의 미소는 남들과 달리 때를 가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제 처지를 생각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궐을 몰래 나가 조정을 쑥대밭으로 들쑤신 주제에 장난스럽게 웃어대는 게 류제가 혐오하던 재경의 본모습이다.
그 가벼운 미소가 어딘가 일그러졌다. 제사장의 것처럼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달의 무녀는 어딘가 엇나가 있다. 제사장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기 위한 미소를 짓는다면, 그는 진심을 감추기 위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생일이라 본가로 돌아갔던 거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류제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뒤를 돌아 눈을 감았다. 그는 재경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류제가 미련 없이 가버릴 것이라 짐작한 재경은 지친 발걸음을 옮겨 깨진 오뚝이 조각을 툭 찼다.
알고 있다. 이건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범도 아니다. 단순한 도자기 인형이다.
오늘만큼 혼자 있기를 바라면서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할머니에 이어 할아범도 같은 길을 떠났다. 나는 질리지도 않고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는 깨져버린 도자기 조각을 보면서 나약한 눈물을 흘렸다. 영영 이곳에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참아왔던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할머니가 걱정 안 한단 말이야. 이 멍청한 눈물이 끝도 없이 나오는 게 제 몸도 제대로 못 다루는 머저리 같았다.
쭈그려 앉은 재경은 조각을 모아서 붙여야겠다는 심정으로 하나둘씩 큰 조각을 포갰다. 그는 주체하지 못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멀리 있는 조각을 집으려고 했다. 그때 낯선 손이 대신 조각을 집어 재경에게 건네주었다.
“소중한 것이었나.”
류제였다. 재경이 화들짝 놀라 눈물을 닦았다. 아직 가지 않았나. 소매로 얼굴을 숨긴 재경이 얼버무렸다.
“아, 뭐. 언제 깨졌는지 모르겠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궐로 도망친 주제에 바보처럼 할머니가 그립다고 궐을 빠져나가다니.
깨진 오뚝이를 보자니 재경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는 처참한 현실이 가슴 깊숙한 곳을 찔러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뭐야. 빨리 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씁쓸하게 눈물을 닦은 재경이 거부의 손짓을 했다. 오늘은 류제의 화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건 다음번으로 해줘. 너도 내가 이상하다는 건 알 거 아니야.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둬. 평소처럼.
류제는 저 도자기 인형이 저주 때문에 깨져버렸음을 짐작했다. 장난스러운 미소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죄책감에 그가 섣부르게 말을 꺼내 들었다.
“도와주마. 둘이서 하면 금방 끝날 것이니.”
사내가 도자기 인형이 깨졌다고 울다니 보통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니겠지. 달의 무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류제는 그를 헤집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손이 베일 것이니 섣부르게 만지지는 말고. 피로 저주를 부르는 건 사양이다.”
상처받은 고양이를 다루듯,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방법을 택했다.
화가 난 게 아닌가? 날 도와주겠다고? 재경은 류제의 심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류제는 저주가 억눌러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금위대장을 불렀다. 그는 멀쩡한 정신으로 금위대장에게 도자기를 붙일 풀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위대장은 달이 없는 밤 황제와 대면하며 초연한 듯이 앉아있는 재경의 모습을 보며 저자가 과연 달의 무녀라는 것을 깨닫고 고양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의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항상 옆을 지켜오던 그는 알았다.
류제의 말대로 둘이서 조각을 맞추니 깨진 도자기 인형은 엉성하지만 자기 모습을 되찾아갔다. 재경은 류제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다.
당연히 달의 무녀처럼 굴라며 혼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왜 상냥하게 구는 걸까.
반면 류제는 재경에게 향하는 이 싱숭생숭한 마음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더불어 달의 무녀는 온전히 그의 욕심 때문에 이곳에 있다는 죄책감으로 자꾸만 재경을 힐끗거렸다.
황제와 달의 무녀의 관계라서가 아닌, 순순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 재경이 신경 쓰였다.
“이대로 두면 풀이 마를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담.”
고마워하는 대신 돌아온 냉소적인 답에 류제의 심정이 뜨끔했다. 그가 저번 초하룻날 류제에게 무희를 펼쳤던 재경에게 류제가 한 말과 똑같았다.
달의 무녀는 순수한 만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합리적인 경계였다고는 하나 죄 없는 백성을 상대로 넌 성수청의 장기 말이 될 것이니 늘어놓으며 선을 그었으면서 이제 와 상냥한 척 다가오는 모양새는 꼴불견이다.
“새… 생일이었다고 했지. 성수청에 부탁을 했더라면 직접 데려다줬을 텐데 제 발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다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귀향은 어땠나.”
류제가 애써 말을 돌렸다. 하지만 기어코 건든 것이 재경이 가장 생각하기 싫어했던 부분이다. 재경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없어.”
“무슨 말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재경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는 궐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곳은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있고 싶었다.
겨우 이야깃거리를 찾아 꺼낸 건데 반응이 시원찮으니 류제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죄스럽구나. 가지고 싶은 건 없나.”
“무리해서 잘해줄 필요 없어. 이제 궐 밖으로 안 간다니까 그러네.”
교활함을 숨길 새도 없이 속셈이 들통 난 것 같아 류제는 부끄러워졌다. 멋대로 궐을 나갔던 재경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제경에게 있어서 자신을 성에 얌전히 붙들어 놓으려는 술수로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 그래. 그거 해줘.”
선물을 준다는 소리에 콧방귀도 뀌지 않던 재경은 무감각한 눈으로 류제를 흘겼다. 그가 부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갑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무슨 목적이 있든 간에 아무래도 좋다.
구깃구깃해질 정도로 이용당해도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 다만 그는 이 슬픔을 어서 잊어버리고 기억 속에서 할아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글자를 알려 줘.”
류제는 언뜻 그가 글자를 배우라고 권유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자 재경은 그에게 글자를 가르쳐달라고 했었지. 그 부탁은 진심이었나?
“알겠다.”
류제는 자기가 흔쾌히 답하고도 놀라 눈을 멀뚱하게 떴다. 긍정의 답이 돌아올 줄 몰랐던 재경보다 더 놀란 모습이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싫지 않아.”
재경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흘겼지만 류제는 진심이었다. 흔쾌히 수락한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라기는 했어도 별로 싫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음 초하룻날 적당한 서적을 찾아 가져오겠다. 벌써 시간이 늦었구나. 돌아가서 씻는 것이 좋겠어.”
“뭐, 이 차림으로 산을 탔으니까.”
재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금위대장의 말을 전해 들었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소란스러운 신하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류제가 면류관을 썼다.
“그럼 다음 초하루에 보마.”
오늘은 시월당 안에 둘밖에 없었으니 류제가 직접 문을 열었다. 재경은 류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풀이 덕지덕지 발린 오뚝이를 쳐다보았다. 오뚝이는 오늘도 웃고 있었다.
류제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돌아가자 곧이어 궁녀 대신 남자 주술사들이 재경을 끌고 신당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포승줄에 감긴 죄인을 다루듯 양팔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은 그의 전적 때문일 것이다.
신당 안에 재경이 만들어놓은 구멍은 막혔고 경비도 강화된 듯 신당 주변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재경을 끌고 왔던 주술사들이 몸소 신당 문을 열고 재경을 안에 밀어 넣었다. 신당에는 재경이 돌아왔다는 조보를 듣고 기다리던 제사장이 있었다.
제사장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오늘의 그는 친절하게 웃는 낯이 아니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류제의 저주에도 물러서지 않던 재경이 주춤거렸다. 제사장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듯했다.
“…제사장 아저씨.”
“목숨 소중한 줄 안다면 얌전히 있으시오. 폐하의 곁을 지키기 싫은 겁니까.”
그의 외로움을 이용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주술사들이 재경을 붙잡고 있는 사이 제사장은 재경의 오른쪽 발목에 사슬을 채웠다.
사슬은 신당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재경은 발에 차인 사슬을 보고 놀라 제사장에게 설명을 요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오롯이 폐하를 위해서.”
“나는…….”
“평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다면 반역자의 피를 받아준 것을 감사히 여기시오.”
제사장은 항의하려는 재경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용당한다라. 확실히 저주를 억눌러야 하는 류제에게 재경은 이용당하고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의 선택. 그러니 이용당하는 것도 그의 선택이었겠지.
어차피 이젠 신당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말라비틀어져서 가루가 된다면 모를까. 그러면 스러져간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기억 속의 그곳으로.
하지만 할머니, 역시 그곳은 할머니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곳이었구나.
문이 닫히고 신당 안은 새까맣게 어둠에 잠식당했다. 신당 안에는 재경만 홀로 서서 가만히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꼴좋다고 생각하지?”
“…….”
“멋대로 궐로 가버리더니 결국엔 이렇지.”
재경이 킬킬 웃으면서 풀이 덕지덕지 발린 오뚝이를 쳐다보았다. 인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에 있느니 여기서 그리겠노라 스스로 선택했어. 봐. 잘 웃고 있잖아. 난 괜찮아.”
넌 곤란할 때면 항상 웃어넘기려고만 하지.
“하지만 난 아직 어린걸. 조금만 봐줘.”
그가 실실 웃으면서 오뚝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감히 시도조차 못 할 혼잣말은 지독하게도 심장을 후볐다.
* * *
숨을 쉬는 것조차 후덥지근했던 날은 점점 정도를 지나쳐갔다. 더위에 지친 농민들을 달래줄 말복이 지나고 소서와 대서가 차례로 찾아오면서 염소 뿔도 녹일 정도로 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신당에 갇혔지만 사흘에 한 번은 황제에게 선택받은 귀한 사람만 먹을 수 있다는 달콤한 여지와 시원한 빙과를 먹을 만큼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재경이었지만 달의 무녀라는 자부심이 더위와 지루함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달콤했던 일탈은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제사장이 채운 족쇄와 사슬은 신당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었지만 전처럼 쥐구멍을 파서 밖에 나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발을 붙잡는 감촉이 싫어 재경이 작은 핀으로 열쇠 구멍을 헤집어 보았지만 족쇄는 열리지 않았다. 목욕재계를 할 때는 풀어주었으니 그 열쇠로만 열리는 모양이었다.
이런 것 없어도 어차피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없다. 재경은 발목에 감긴 차가운 감각이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제사장이 한번 궐에서 도망쳤던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건 이해해도 왠지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 웃음도 안 나왔다. 내가 초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재경은 풀이 덕지덕지 붙은 오뚝이 인형을 빙글빙글 돌리며 놀았다. 그날 이후로 오뚝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재경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곳은 생각을 정리하고 슬픈 기억을 묻어버리는 데에 최적이다.
매미가 창 밖에서 요란스럽게 울었다. 저 창 밑에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나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마땅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농기구처럼 그는 멍청한 눈으로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옆에 놓인 소반에서 깍두기 모양으로 잘린 수박을 냉큼 집어 먹었다. 단물이 으깨지면서 텁텁한 입을 헹구었다.
“심심하네.”
지독한 현실을 잊고 이상향인 이곳에서 행복했던 날들만을 떠올리기를 택했던 재경은 몇 번을 다짐해도 어쩔 수 없는 단점을 들먹거렸다. 분에 겨운 말이지만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다음번에 만나면 류제가 글자를 알려주겠다고 했어. 다행이지?”
류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류제의 호의는 당장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 재경과 동등한 처지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류제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재경을 신경 써준다니 의도와 상관없이 기뻤다.
“웃기지? 할머니가 그렇게 닦달해도 안 배웠던 글자를 여기서 배우다니. 사람 일 한 치 앞도 모르는 거구나.”
재경이 뭐가 재미있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매미는 여전히 시끄러워서 귀를 아렸다. 이제 이틀 밤만 더 자면 류제와 만날 수 있었다.
과연 류제가 나와 한 약조를 잊었을까, 잊지 않았을까. 잊었으면 잊은 것이고 잊지 않았으면 잊지 않은 것이지만 재경은 류제가 잊지 않았다는 쪽에 마음 한쪽을 걸었다.
* * *
기록을 찾기 위해 사고에 온 류제는 어려운 상형 문자를 읽으며 찾고 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책을 덮고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두었다.
발걸음을 옮겨 다음 기록을 찾기 위해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던 류제는 문득 재경을 떠올리고 손을 머뭇거렸다. 이번엔 얌전히 잘 있는 거겠지.
제사장도 달의 무녀의 돌발 행동에 크게 당한 듯하니 이번 초하룻날 보면 천방지축인 그라도 풀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무룩한 재경을 떠올리니 류제는 저번에 재경이 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흘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적어도 재경이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여는 배우지 못한 시정잡배가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진 자라고 여겼던 걸지도 모르겠다. 류제가 쓰게 웃었다.
사고에서 나온 그는 금위대장이 찾아왔다는 말에 방으로 들이고 사람을 물렸다. 금위대장은 류제에게 윗사람에게 걸맞은 예를 차린 다음 품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저자에 있던 것들 중에 양인 어린아이가 좋아한다는 서책을 골랐습니다.”
책을 건네받은 류제가 표지에 쓰인 제목을 읽었다. 향간에 떠도는 설화들을 한데 모아 묶은 이야기집이다.
내용을 훑으니 한두 가지만 제외하면 영민한 자라면 하루아침에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쉬운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오나 달의… 무녀께서 이런 책에 만족을 하실는지 소신은―”
“걱정할 필요 없다. 찾던 것이 맞으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떴던 달의 무녀가 어린아이 자장가로 쓰는 구전 설화를 좋아한다고?
재경의 첫인상을 떠올렸던 금위대장은 어리둥절했다. 여기에 토를 달기엔 주제넘는다. 그는 궁금증을 숨기고 찾아온 다음 목적을 꺼냈다.
“명하신 조사를 끝마쳤습니다.”
금위대장이 말을 줄이자 불길함을 짐작한 류제가 책을 덮고 눈을 치켜떴다. 금위대장이 류제의 기에 눌려 짐짓 입을 앙다물었다.
달의 무녀의 뒷조사는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기밀 정보였다.
특히나 황제가 제 권위를 침범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수청에 들키면 골치 아파졌다. 그런데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류제는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명령을 받고 과연 고작 금위대장인 자신이 존귀하신 황제 폐하와 쌍을 이루는 존재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알아도 되는 걸까 두려웠지만 황제에게 평생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가 보고, 듣고, 알았던 내용은 나유타의 황제의 앞이 아니라면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정보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금속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귀고리였다.
“문양을 확인했습니다. 그분의 것이 맞습니다.”
“어디서 찾았느냐.”
“저잣거리 보부상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의원이 금전으로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등장에 류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금위대장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눈치껏 말을 이었다.
“의원을 찾아가 물으니 정당한 값을 치렀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받고 무엇을 건네주었냐고 묻자 시치미를 떼다가 으름장을 놓으니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달의 무녀인가.”
꼬리가 잡힌다. 류제는 달의 무녀가 성을 나간 까닭을 붙잡기 직전이었다. 의원. 귀고리. 교환. 사정을 몰라도 유추만으로 알 수 있다.
달의 무녀와 친밀한 누군가가 병을 앓고 있다.
당연히 고작 생일이라서라는 말은 변명임을 류제도 짐작했지만 그런 연유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뜸들이지 말라.”
“송구합니다. 사전에 설명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류제는 답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것을 승낙했다.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금위대장이 착잡한 듯 마른 입술을 다시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달의 무녀가 입궐하기 전까지 살아간 생애를 대략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조모와 산에서 함께 살았다고. 의원과 사냥꾼들에게 들은 이야기 중 아귀가 맞는 부분만 조합하자면 그랬다.
“산을 타는 사람들을 골려준다든가, 성격이 드센 장난꾸러기라 마을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마을의 골칫거리였던 문둥이와 어울려서 마을에선 그들과 얽히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고 했습니다.”
류제는 계속하라며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금위대장은 여간 정신력이 소모되었는지 흐르지 않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숨을 고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달의 무녀가 어명을 받고 입궐하기 얼마 전 조모가 병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죄를 저지른 부모 대신 달의 무녀가 잡혀간 것이라 소문이 났나 봅니다.”
“부모의 죄? 죄인의 자식이었나?”
“전쟁 병력으로 차출된 양인이었는데 붙잡은 포로에게 연민을 보이다 이용당하고 습격받은 모양입니다.”
“그렇군.”
“사라진 줄 알았던 달의 무녀가 유월 그믐날 불현듯 이상한 차림으로 찾아오더니 약을 내놓으라고 했답니다. 그 귀고리와 교환한다는 조건입니다.”
류제가 금위대장이 넘겨주었던 귀고리를 살폈다. 잘도 이 귀한 보석을 약값으로 넘겨줄 생각을 했군. 하기야 이런 금속 조각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한 것은 옳았다. 그걸 당연하듯 실천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말이다.
“할아범은 누구지? 조부인가?”
“옆집에 살았다던 문둥이를 그리 부른답니다. 더위를 먹은 것 같다고 귀고리를 약과 이것저것 곡식들과 바꾸었답니다.”
“할아범은 무사하였나.”
달의 무녀는 달이 없는 한밤중에 궐로 되돌아왔다. 아픈 할아범을 두고 류제를 선택한 것이다. 류제는 힘겨운 비장함과 견디기 힘든 선택의 기로를 느꼈다.
“그것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달의 무녀가 향했던 곳을 더듬던 금위대장은 그가 마주한 현실의 처참함과 무자비함에 절로 이가 갈렸다.
전쟁으로 부모를 여의고 조모와 함께 문둥이와 어울렸던 이였다. 그런데 조모마저 잃고 입궐한 사이 다른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필히 반쯤 정신 줄을 놓을 것이다.
“사냥꾼을 만나 산을 타니 공터가 나왔습니다. 밭 한 마지기를 사이에 두고 사냥꾼들이 쓰던 움막과 작은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문둥이가 살던 곳은 그들이 사용했던 움막이라며 사냥꾼이 일러주었습니다만 노인은 애석하게도…….”
“…….”
“사냥꾼의 말로는 의원의 말이 신경 쓰여 다음 날 찾아갔지만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물어갔나 흔적을 살피는데, 아마 초하루를 넘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달의 무녀가 돌아왔던 그날 말입니다.”
그것이 그가 알아낸 모든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류제는 까마득해졌다. 역시 무녀의 일탈은 단순한 마실이 아니었다.
생일이었다고 했다. 가족이 보고 싶었겠지. 문둥이라면 부정을 탄다고 성수청이 외출을 허락할 리가 없다.
하나 남은 문둥이 할아범을 가족이라 여기고 성을 나섰더니 돌아온 건 풍수지탄과 다름없는 슬픔이다. 그러니 미소가 일그러졌던 것이겠지.
“성수청에서는 뭐라고 했지?”
“간섭을 꺼리는 눈치였습니다. 달의 무녀의 단독 행동으로 정리하고 책임을 회피할 듯합니다.”
“이 일은 잊어버리거라.”
류제가 낮게 읊조렸다. 화가 난 듯하면서도 분에 겨워하는 눈빛이 서슴없이 드러났다. 금위대장은 과연 황제가 어떻게 나설 것인지 궁금해졌다.
“물러가도 좋다.”
금위대장이 떠나자 류제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한 마음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제는 그날 재경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없어.”
그 말이 신경 쓰여서 여기까지 왔건만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자기 자신에게 내는 화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궐에 돌아온 것이란 말인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와중에도 날 위해서 궐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류제는 금위대장이 가져왔던 책을 흘겼다. 달의 무녀는 여를 매번 붙들려고 했었다. 그건 조모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를 이용하고 있는 건 여인데 여는 그는 제사장의 편이라며 무심하게도 그의 외침을 무시했다. 생각을 할수록 어리석어서 부끄러웠다. 류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책을 매만졌다.
저런 천방지축 공부와는 담쌓은 듯이 보이는 이가 글자를 알려달라 하는 것이면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은 걸까.
그는 과연 다음 초하룻날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되는 동시에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