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달과 고양이 (2)
해가 뜨기 전에 기상하여 태황태후께 문안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 류제는 초조반(初早飯)을 들기 전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잠을 깨웠다. 아침 훈련을 끝내면 밀린 업무를 살폈다.
본래라면 면학에 힘쓸 때라지만 전리 분배와 전흔 수습 문제로 조정의 일이 밀려 봉소된 상소문과 측근들의 보고서가 책상에 가득 쌓여 먼저 처리하여야만 했다.
뒤이어 조계에서 신료들과 공문서와 상소문에 관해 토론한 후 경연 특진관을 불러 주강을 들었다. 이후 늦은 시각에 점심 수라를 들고 오후 업무를 보았다.
정무를 살피던 류제는 때를 알리는 내시의 나지막한 말에 글에서 눈을 떼었다. 멀리서 미말(未末―미시(未時)의 끝인 오후 세 시 바로 전의 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폐하.”
“벌써 그리되었는가.”
아득하게 남은 문서들을 본 류제가 피곤한 눈을 감았다. 해야 할 것은 산더미인데 하루가 짧다. 벌써 달포가 지나갔구나. 달이 뜨지 않는 밤이 오는 날. 초하루가 돌아왔다.
더 늦기 전에 서류를 덮고 자리를 정리한 류제는 세수간 아기나인을 앞세워 목욕재계에 나섰다. 나인을 시켜 반듯하게 이를 닦고 손톱 끝을 정리한 그는 창포로 머리를 감고 향유로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젖은 머리를 빗기 위해 아기나인이 두려움을 숨기고 머리를 넘기자 앞머리에 가려졌던 수려한 이목구비와 은은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아름다움을 보고 그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쏘냐. 허나 그는 피를 좋아하는 폭군이라는 잔인한 업보를 등에 업었다.
지니는 저주는 두려움을 종용했다. 익숙한 일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무녀 정도뿐이겠지.
초하루를 위해 몸을 정화한 무수리들이 손을 바삐 움직여 황제에게 정복을 입혔다. 귀에는 음양의 조화가 그려진 귀고리를 끼우고 기다란 뒷머리를 황금으로 된 머리끈으로 고정시킨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면류관을 씌운 아기나인들이 준비의 끝을 알리며 절을 하고 살금살금 물러났다.
류제의 머릿속은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할 공문서들과 신료 접견 때 답해야 할 상소문들로 가득 찼다.
시월당으로 향하는 기다란 도열을 따라 걷던 류제는 고작 철없는 이가 월계수 휘두르는 행위를 위해 이만큼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효율성을 고민했다.
초하룻날 제사는 성수청 관할로 제사장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는 황제인 그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권한이다.
하물며 그는 황가에 내려오는 저주를 품은 자다. 나라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곳에 저주받은 황제가 관여한다면 돌아올 후폭풍이 거셌다.
그렇기에 달의 무녀의 관리에서부터 준비까지 모두 그의 손 바깥에 있었다. 초하룻날의 의식은 황제를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 그의 처지에서는 의식을 단축하자는 의견을 입에 담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무녀를 침전으로 불러 의식을 치른 다음 물러가라 명하고 싶다. 류제는 국정을 살피는 것 말고 다른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아까웠다. 하물며 평생을 거쳐 괴롭히는 저주라도 그렇다.
“위대한 나유타의 황제 폐하께서 죄를 씻으시니 무사안녕과 만사형통을 달이 비춰 축복하길 기원하옵나이다.”
“만백성들의 금신에 평온이 깃들기를.”
무녀가 기다리는 시월당에 들어가기 전 성수청의 제사장이 먼저 그를 맞이했다. 제사장은 월계수나무로 죄악을 씻어내는 기원을 빌었다. 화답한 류제가 맞절하고 행렬을 이끌며 천천히 시월당으로 향했다.
무해한 자 흉내를 내는 제사장은 도통 마음에 차지 않는다. 천한 신분인 무녀를 데려다가 가르침 없이 내몬 것은 그자의 꼼수겠지. 빤히 보여서 의심스럽지도 않다.
달의 무녀를 만나기 위해 시월당 내부로 들어서는 자는 오직 류제뿐이다. 신을 벗은 그가 차분하게 마루에 올랐다. 좌우에서 성수청의 주술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시월당 달의 무녀 대면의 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삼중으로 잠긴 달아자살문이 내부를 봉인했다. 달의 무녀가 저주를 억누르지 못했을 때를 위한 장치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장지문이 차례로 열렸다. 무릎 꿇은 궁녀들이 걸음에 맞춰 문을 열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시월당 내부에서 문을 지켜야 하는 그녀들은 산제물이다. 무녀가 실패했을 때 달 없는 밤의 괴물이 된 그를 달랠 제물. 용케 두려운 심정을 숨긴 그녀들이 황제에게 절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류제는 저번부터 저를 골탕 먹이며 실실거리는 달의 무녀가 거슬렸다. 제 의무의 막중함을 모르는 그자는 툭하면 농판을 부리지 않나, 대여섯 살배기처럼 군다.
물론 광기를 누그러뜨려 주니 감사한 자임은 사실이다. 허나 책임감을 모르는 치는 어떤 소임을 부여받았건 눈엣가시였다.
대면의 장에는 얼굴을 가리는 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만남. 부디 무녀가 제정신을 좀 차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마주 보는 곳에 앉은 류제는 발 안에 없는 인영과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낮게 한숨 쉬었다. 그리 화를 내었건만 버릇 나쁜 건 고쳐지지 않는다.
“자리를 지키지 않고 무얼 하는 거지.”
류제가 오기 전 발에서 빠져나와 깜짝 놀래주려고 했던 재경은 류제가 먼저 선수를 치자 뻗었던 손을 숨겼다. 뒤도 안 돌아봤으면서 완전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어?”
목숨을 위협받는 전쟁터에 몇 년을 있었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 생각이란 걸 하면 다행이지 대답할 가치도 없다. 혹시나 했더니 여전하군.
사람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고는 하나 입궐한 지 두 달은 넘었을 터인데 언제까지고 예의범절을 죽 쒀먹은 상태라니 가르침이 잘못되었다. 제사장의 탓으로 치부하기엔 본인이 너무 미련해 보였다.
“칫. 재치가 없네.”
“질리지도 않구나. 조금이라도 좋으니 직책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잔소리부터 시작하다니. 달포 내내 널 기다려준 날 위해 이 정도는 봐줘.”
재경이 류제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롱에 실패한 그가 코를 씰룩거리며 앞에 있는 화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다리를 품위 없게 벌려 앉은 모습에 류제는 진심 어린 조언을 꺼내 들었다.
“지루하면 절차탁마라도 하거라.”
“절… 뭐라고?”
실은 재경은 류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잦았다. 백치 같은 얼굴을 보자니 류제는 말을 잘못했다며 혀를 찼다.
“고서를 읽으며 공부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공부? 됐어. 읽을 줄 몰라.”
재경이 질겁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살면서 공부와 담 쌓은 그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할머니도 열까지 글자를 가르치다가 두 손 두 발 들은 걸 보면 그는 글재주에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글방 선생을 들여 글자를 배우거라.”
쌀쌀맞은 어투였지만 부디 그래 달라는 진심이 담겼다. 다과를 씹어 먹던 재경은 울컥해서 류제를 노려보았다. 다른 이에게 부탁해서 답변이 돌아온 전적이 있더라면 이렇게까지 심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 놀리는 거야, 뭐야. 선생은 개뿔 글자 배우고 싶다고 칭얼거리면 책 하나 달랑 던져줄 텐데.
“네가 가르쳐주지 그래?”
“여는 해야 할 것들이 있다.”
“네가 먼저 공부 이야기를 꺼냈잖아. 됐네요. 그냥 해본 소리야. 어차피 멍청해서 안 돼.”
스스로를 격하하는 피학적인 말에 류제는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류제도 재경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라고 여겼으니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제 주제는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오만한 문장이었다.
때문에 류제는 재경에게 진심을 들킨 것 같아 낯이 없었다.
“그대 일은 그대가 알아서 하거라.”
그가 솔직하지 못한 심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재경은 자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말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불평했다.
“만나는 걸 고대하는 건 나밖에 없는 거 같아.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수청에서 천한 신분인 그에게 달의 무녀에 맞는 대접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나. 류제 또한 무례함을 꾹 참고 있는 거고.
“여와의 담화를 바라는 연유가 뭐지. 금은보화라도 필요하나?”
입을 다물던 류제가 면류관을 벗으며 물었다. 이 면류관도 본디 달의 무녀가 벗겨야 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소임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
“달의 무녀가 황제에게 무얼 바라냔 말이더냐. 아니면 궐에서 떠나고 싶은가?”
“불평 한번 했다고 날카롭게 구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비약한담. 궐을 떠나고 싶다는 건 아니고 그냥 꽃이 다 지기 전에 꽃놀이를 가고 싶었을 뿐이다.
재경이 병풍 뒤에 존재하는 작은 쥐구멍을 떠올렸다. 역시 부탁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어줄 거다. 꾸물거리던 재경은 귓불을 붉히며 간신히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나는 단지 너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
“담화는 지금도 하는 중이지 않느냐.”
“더 많이! 매번 볼일만 끝나면 가버리잖아. 임금님이 매정하기는.”
“그대의 고집이 우스꽝스럽구나. 분에 넘친 감투를 둘러쓴 우생이 기회를 엿봐 여를 협박한다고밖에 생각 못 하겠다.”
“협박이라니 무슨 무서운 소리를 그리 해.”
반박하던 재경은 류제의 진심이 담긴 눈빛에 시무룩해졌다. 저런 식으로 여겼던 건가.
역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여긴 건 그뿐이었던 거다. 알아갈수록 가까워질 수 없는 건 왜일까. 달포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여태 그걸 담아두다니. 임금님이면서 속 좁기는.
재경은 순순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류제는 달의 무녀의 유일한 말 상대였다. 재경의 바람은 단순하다. 이 순간 류제와 조금이나마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류제가 그에게 관심이 없어도 좋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젠가 상대방을 더 알 수 있는 날이 올 테니 언젠가는 친해질 계기가 생길지도 몰랐다.
재경은 능숙하게 속내를 숨기고 실실 웃는 낯으로 턱을 괴었다. 풀 죽은 것 같으니 드디어 포기하려나 싶었는데 오뚝이처럼 쓰러지질 않는다.
류제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이 텅텅 비어서 그런가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독기에 질렸다.
“쩨쩨하게 굴지 말고 인상 펴.”
“…….”
“혹시 저번 초하루 일 때문에 그래? 송구하다고 했잖아.”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군.”
그때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나서 지금 처음 들었다. 류제는 진심 없는 사과에는 상종하지 않았다.
태도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이제 와 그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그에 대한 평가를 철회하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
“여의 저주를 희롱한 자에게 어찌 그리해야 하는지?”
또 밀쳐낸다. 용기를 내서 사과했는데. 재경은 붕어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매사에 깐깐하게 굴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거다.
“멀쩡히 돌아왔으면 된 거지. 그 정도는 희롱한 것도 아닌걸.”
달의 무녀가 임금님과 친구가 될 명분도 없나? 어지간히 까다롭다. 스쳐 지나가도 인연이라고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그럼 운명이지. 아닌가? 아닌가 보네. 류제의 낯빛이 전보다 차가워졌다.
“그대의 처지에 무지한 듯하니 기회를 빌어 소명하마.”
일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 류제가 눈을 반짝이는 재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제 입으로 말하다니 꼴이 우습다.
“달의 무녀는 나유타의 제사를 관리하는 성수청이라는 기관 휘하에 존재하는 직책이다. 제사장 바로 밑의 관직이지. 제사장도 모른다 하지는 말아라.”
“제사장 아저씨는 알아. 누굴 진짜 바보인 줄 알아.”
달의 무녀 책봉식 때 본 적이 있다.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본 적 없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그 사람이 왜.
“제사장을 필두로 한 성수청은 여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관서다.”
“어, 뭐?”
“더 풀어서 설명해야 하나.”
“잠시만 있어 봐.”
제사장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인가? 나는 지금 성수청 소속이고, 성수청은 류제를 임금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류제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건 류제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뜻이겠지.
그럼 나도 류제와 친해지면 안 된다는 건가.
“내 입궐을 원한 건 너잖아.”
“허나 달의 무녀는 성수청 휘하의 사람이지.”
“그건 궐 안 사정이야. 성수청에 있는 게 내 잘못도 아니고. 난 널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아.”
“저번 일을 떠올리면 그리 치부하기 어렵구나.”
달이 없는 밤에 이성을 잃은 류제를 희롱했던 재경은 류제의 반응이 생경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더 까다롭게 구는 건가. 그의 행동이 류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 깨달은 재경은 뜨악한 얼굴로 이마를 쳤다.
“그러니 여는 달의 무녀가 저주를 누그러뜨릴 유일무이한 존재라도 유별난 사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완벽한 선 긋기에 당한 재경은 어떻게든 류제를 붙잡아 보려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렸다.
“나… 나랑 친해지면 서… 성수청과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류제는 궁궐 사정은 아둔한 이의 계획대로 굴러갈 만큼 만만하지 않다고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집착할 까닭은 없을 터. 그만 포기하기를.
아니면 저런 모습이 모두 연기고 제사장의 뒤 공작이 있나? 의심에서 시작하는 관계는 처음부터 글러먹었다.
“달의 무녀는 맡은 바만 다하면 돼. 모든 것이 무탈하게 굴러갈 거다. 이해가 간다면 두말하지 않겠다. 월계수를 들어라.”
어느덧 일몰의 때가 왔다. 재경이 마지못해 월계수를 들었다.
류제에게 재경은 고작 그런 존재였다. 필히 재경이 달의 무녀이고 류제는 그가 필요하니까 재경은 류제가 반드시 자신을 원해줄 줄 알았다.
씁쓸해진 재경은 류제의 차가운 눈빛을 시무룩하게 받아냈다. 내게 관심 없는 저 눈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허나 축복을 내려주면 너는 가버리겠지.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건 싫었다.
“잠깐만.”
순순히 들었던 월계수를 잠시 주춤거렸다. 이 정도까지 거부당했으면 포기할 법도 하다. 하지만 재경은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화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류제는 곧 저주가 바깥으로 나올 거라고 짐작했다. 허나 월계수를 든 재경의 손이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너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
“뭐… 하는―”
저주가 드러나기 직전에 재경이 변덕을 부리자 당황한 류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그의 검은 동공이 넓게 이완되면서 새빨간 빛을 발했다.
“많은 건 안 바랄 테니까 이따 나랑 조금만 더―”
본래라면 드문드문 시야가 끊기다가 이성이 추락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가위로 자른 듯이 단번에 저주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재경이 머뭇거리는 사이 완전히 눈을 뜬 저주는 육체의 주도권을 잡자 무녀에게 억눌러지지 않을 계략을 세웠다.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
재경이 스스로를 보호하다 월계수를 놓치고 저만치 굴러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안이 벙벙한 재경은 머리를 부딪쳐 잠깐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저주는 달의 무녀가 방해되었다. 저주는 나유타국에 으스러져 간 것들이 보내는 황가에 대한 원념의 집약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밀접하게 마주하던 류제의 분노와 절망과도 연관이 있다.
파괴하고 싶은 욕구. 피를 갈망하는 저주. 그것은 제가 존재하는 의미를 표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달의 무녀가 있으면 항상 억눌려야 한다. 피를 보고 싶다.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저 무녀는 저주를 너무나 쉽게 무력화시킬 만큼 터무니없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 태초에 있던 그녀처럼.
재경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익숙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겠던 그는 혹이 난 머리를 문지르며 어지러운 시야를 찌푸렸다. 류제가 보이지 않았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놀란 재경이 허둥지둥 장지문을 살폈다. 무녀에게서 도망쳐 욕망을 풀기 위해 봉인된 시월당 밖으로 나가려던 류제가 밖에서 기다리던 궁녀를 붙잡은 것이다.
재경은 언뜻 스치는 불길함에 비틀비틀 일어서서 부러진 월계수나무의 가지 하나를 들었다.
“안 돼!”
류제가 걱정했던 사태가 바로 이것이구나. 다 내 욕심 때문이다. 내 탓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그만해!”
재경이 궁녀를 해치려는 류제에게 달려들어 월계수나무를 휘둘렀다. 류제를 잠식한 저주는 다가오는 재경을 막으려고 했지만 발이 빠르고 날렵한 재경이 한 수 위였다.
저주가 억눌러진 류제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머리에 올랐던 피가 가라앉자 류제는 현기증이 일어 일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그의 손에 쥐어져 팔이 부러진 궁녀가 기절한 것을 보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위험했네. 후우, 다행이다.”
류제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안도한 재경이 실실 웃었다.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뻔뻔하게 입가가 올라간다.
류제는 그런 재경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부디 아프지 않게 죽여달라는 듯이 엎드려있는 다른 궁녀를 보고 낮게 읊조렸다.
“…서둘러 의녀를 불러라.”
“예… 예, 폐하.”
달이 없는 밤마다 죄 없는 백성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달의 무녀를 찾았다. 허나 그의 안일한 정신머리로 인해 사람이 다친다면 본말전도가 아닌가. 짙은 분노가 들어찬 눈동자가 재경에게 향했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다니 어찌 이리 이기적이고 후안무치한 자인가. 실망할 것도 없다고 여겼더니 그 아래가 더 있었다. 그의 됨됨이에서부터 류제는 질려버렸다.
“재일차 반복된다면 달의 무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류제는 시월당을 떠났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수선한 발소리가 왔다 갔다 정신없었다. 반면 모든 이가 떠난 시월당은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조용했다.
헤어지면 달포 후에나 볼 텐데 작별 인사도 없다. 그곳에 홀로 남아 눈을 끔벅거리던 재경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다. 의식이 끝나고 일다경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던 건데. 되는 일이 없다.
일이 마음대로 풀릴 때가 없다. 홀린 사람처럼 그는 멍하니 할머니를 떠올렸다. 혼자가 아니고 싶다는 마음이 과분했다.
* * *
초하룻날 궁녀가 다쳤음에도 재경에게는 아무런 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재경은 안도하다 못해 신경질이 났다. 궐 사람들은 나를 뭐라 여기는 걸까. 무녀가 아니라 일을 망치는 방해꾼이다.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해?”
“네 꼴에 그런 걸 따질 처지냐?”
“심심하잖아. 생각하는 건 내 마음이지.”
산들산들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만끽하며 재경이 배 위에 올려둔 오뚝이 인형에게 말했다.
하기야 도망쳐 보려고 제 발로 입궐한 주제에 취급이 짜다고 왈가왈부하기도 우습다. 그때는 머릿속이 새하얘서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고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류제는 화냈고, 나랑 친해지기 싫다고 하고. 나는 심심하고. 이게 다 제사장 아저씨 때문이야.”
“허이구, 사정도 모르면서 저 화난다고 말은 잘도 늘어놓지.”
“그것 말고는 류제가 나랑 안 놀아주는 까닭을 모르겠단 말이야.”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건 염두에 안 두느냐?”
“시끄러워!”
재경이 아무것도 모르는 건 할머니라며 손에 들고 있던 오뚝이에게 성을 냈다. 그러다 균형을 잃을 뻔하고 발버둥을 쳤다.
나무에서 후두둑 나뭇잎이 떨어졌다. 휘청휘청 간신히 가지에 매달린 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머리에 쌓인 나뭇잎을 털어낸 재경이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신당에서 빠져나와 드넓은 하늘을 만끽하는 재경은 구멍을 판 결과 몸뚱이만 빠져나갈 크기의 작은 구멍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
간식을 먹은 후 저녁상을 받기 전까진 신당 안에 들어오는 자는 없으니 오후 느지막이 바깥바람을 즐기고 신당으로 돌아가면 누구도 달의 무녀의 일탈을 몰랐다. 오늘로 이레째. 여태 그걸 눈치챈 이가 없었다.
“그놈이 바라는 대로 참된 달의 무녀처럼 행동해 보려무나. 평생 사방팔방 개새끼처럼 뛰어다니며 살아온 네 꼬락서니가 꾀죄죄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할머니는 늘 그가 생각은 하지만 귀찮아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부분을 파고들어 이야기하곤 했다. 입맛을 다시던 그는 그 말에 답했다.
“할머니 말대로 내가 달의 무녀의 무얼 안다고.”
“그건 네 알아서 할 일이지.”
“맨날 말만 꺼내고 답은 안 주고. 할머니야말로 날 희롱하고 있어.”
“무슨 말을 한들 결정하는 건 본인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야 그렇지만. 재경은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울컥 짜증이 나서 나무에서 훌쩍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달의 무녀라.”
처음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을 때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류제가 이상하게 변하는 초하루 밤마다 잘 해내고 있으니 달의 무녀는 맞는 것 같다. 허나 그 이상 무얼 하라는지 모르겠다.
나뭇가지로 머리를 툭툭 치는 행위에 무슨 신성한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겉보기에 더 그럴싸해 보이는 걸 사람들은 더 좋아하겠지.
슬슬 때가 되자 나졸들이 순찰을 돌지 않는 곳으로 몸을 돌려 신당 반대편 언덕을 오른 재경은 곧이어 보이는 낮은 성벽에 기와를 손가락으로 후두둑 두드렸다.
곧 유월이라 꽃은 다 지고 더운 햇빛에 녹음이 차오르는 중이다. 따뜻한 기온을 즐기는 재경이 빙그르 돌았다.
그대로 성벽을 따라 조심스레 걸은 재경은 이전번에 멀리서 류제를 보았던 곳을 기억했다. 신당이 있는 산 아래로 보이는 깊은 궐은 옥황상제가 있을 하늘에서 보는 속세처럼 멀어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나와 연무(鍊武)하는 류제는 측근과 함께 시원한 칼부림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우렁차다. 할머니도 보라며 오뚝이를 기와 위에 둔 재경은 그 옆에 올라타서 무료하게 지켜보았다.
매번 바쁘다고 했으면서 칼싸움하고 놀 정신은 있나 보다. 뭐, 저것도 일인가 보지 뭐.
세 번의 합 이후에 틈을 보려는 상대방의 경계 태세를 부드럽게 흘려보낸 류제는 그 힘을 이용해 상대방을 몰아세웠다. 몸에 밴 음과 양의 조화로움에 보는 이는 황홀경에 감취되었다.
“오늘도 멋지네, 자식이.”
“기왕이면 다홍치마는 저걸 이르는 말이겠지.”
누군가의 마음에 대입해서 말하고 있다고는 하나 어차피 오뚝이는 자기 자신이다. 재경은 제가 미덥지 못해서 류제가 가깝게 지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가 턱을 괴고 연무를 훔쳐보았다.
이번에도 류제의 승. 류제는 상대에게 수고했다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상대는 황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이쿠.”
그 순간, 류제의 시선이 닿을 것 같아 재경이 슬그머니 성벽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과연 다른 이 앞에서는 성미가 가라앉는단 말이지. 치사한 자식. 나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라 이거냐.
임금님인 류제와 척을 지는 성수청의 달의 무녀인 데다 초하룻날이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 존재니까. 류제와 만날 때마다 매번 마음처럼 안 풀리고 일도 엉망으로 만드는 나는 쓸모없겠지.
“참된 달의 무녀는 어떤 걸까?”
재경이 손을 위로 더듬어 기와에 놓여있던 오뚝이를 집고 바스락바스락 나뭇잎을 헤치며 자리를 떴다.
산책도 질렸겠다, 신당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나졸들이 순찰을 돌기 위해 다가오는 소리에 유연하게 나무 위를 올랐다.
수다쟁이 아저씨들이다. 처음엔 나졸들이 껄끄러웠지만 어린 무수리들과 더불어 궐에서 가장 말이 많아 이따금 재미난 이야기를 흘리곤 했다.
“어제는 성수청이 붐비던걸.”
“곧 유월이니 궐내에도 풍흉을 점치는 자들로 문전성시겠지.”
“날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전쟁도 끝났는데 풍년이나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어.”
“달의 무녀님께 풍신제를 지내달라 성수청 나인에게 말을 전해보자고.”
자기 이야기를 들은 재경이 쫑긋 귀를 세웠다. 신당에만 있으면 도통 궐내에서 무슨 처지인지 알아야 말이지.
손에 들린 오뚝이 인형과 눈을 마주하던 그는 인형을 품 안에 넣고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나무에서 내려와 나졸들을 따라갔다.
“달의 무녀님은 폐하의 깊은 병마도 단번에 물리치셨다고 하셨지. 그 영험함으로 달님께 기도를 올리면 올해 풍작은 누워서 떡 먹기일 거야.”
“그러다가 영험함이 떨어져서 폐하의 병을 막지 못하면 어쩌려고. 저번 초하룻날에도 궁녀 하나가 크게 다쳤다고 했어.”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일이군. 무녀님은 어쩌다 영험함이 떨어지신 걸까.”
“성수청 주술사들만 똥줄 탄 게지. 공들여 모시고 온 달의 무녀를 탓할 수 없으니 다 자기 죄다 하며 폐하께 싹싹 빌고 난리도 아니었을걸.”
“세상에. 몇 명의 목이 날아갔을까 끔찍하군.”
저번에 그가 변덕을 부렸다가 일어난 참사를 두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은 모양이다.
성수청에 당도한 그들이 자세를 잡고 자리를 지키는 것까지 본 재경은 커다란 버드나무 위에서 성수청을 오가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관찰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성수청 내부에는 가끔씩 신당 주변에서 볼 법한 차림을 한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고결한 척 가무를 연습했다.
재경은 흥미로운 듯이 그 가무를 흘겨보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어디선가 이른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한 날들 동안 가무를 훔쳐본 재경은 그 가무를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문맹에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단순무식한 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특출해서 줄지어 칭찬이 따라왔다.
나무 타기는 두말할 것도 없는 특기요, 달리기는 바람과도 같아 동네에서 따라잡을 이 없고 남을 흉내질하는 일도 그럴싸했다.
춤을 익히면 류제도 다시 봐주겠지 싶어서 시작한 가무 연습은 그를 외로움의 무저갱에서 끌어 올렸다.
목표는 무기력한 하루하루에 활기를 준다. 눈대중으로 보고 익힌 가무를 검증하기 위해 성수청에서 몰래 확인하고 동작을 수정한다.
그는 곧잘 해냈다. 그것이 피에 흐르는 무녀의 자질 때문일까, 그의 천성이 그래서일까는 모를 일이다.
“어때?”
긴 소매 대신 옷고름을 풀어 승무(僧舞)와 비슷한 그 춤의 흉내를 내어본 재경이 잘 보라고 놔둔 오뚝이에게 물었지만 여전히 답은 대충이다.
재경이 그럴 줄 알았다며 부루퉁해졌다가 질렸다는 듯이 바닥에 엎드렸다. 요즘 들어 오뚝이 대답이 시원찮아지고 있었다.
그는 거꾸로 누운 오뚝이를 눈을 끔벅거리며 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를 짚었다. 매끌매끌 도자기 감촉에 재경이 오뚝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실실 웃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날이 좋다. 엊그제는 비가 와서 나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산책을 갈 수 있으려나. 재경이 몰래 겉옷과 버선을 벗었다. 그대로 꾸물꾸물 기어서 병풍을 치운 그는 전보다 넓어진 구멍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갔다.
그는 나졸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지붕을 타고 올라가 성수청사로 향했다. 도둑도 넋이 빠지는 기가 막힐 재능이다.
숨죽인 들고양이는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루한 구중궁궐을 빠져나가는 것은 재경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궐 밖은 알 바 없는 그는 오늘도 성수청으로 향했다. 주술사들의 가무가 잘 보이지만 눈에 안 띄는 곳에 착지한 재경이 유유자적 나무에 기대고 앉았다.
“춤은 다 외웠지 않느냐고? 어차피 할 일 없잖아. 사람 구경할 좋은 곳이잖아.”
오늘도 제 행동에 핀잔을 주는 오뚝이 인형에게 재경이 실실 웃으며 변명했다.
그는 어린 주술사가 주술을 위한 가무를 익히다가 넘어져서 그들의 스승처럼 보이는 이에게 호되게 혼나는 장면을 보고 킬킬 숨을 죽여 웃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저 다른 이들의 일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옛날 생각 안 나?”
누구한테 말하는 건지. 재경은 혼이 났음에도 금세 넘어지는 아이를 보며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가 듣는 사람이 있을세라 진정시켰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의 어렴풋한 추억을 떠올린 그가 오뚝이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길게 내린 버드나무 가지에 몸을 드리운 재경은 고개를 들어 따스하게 내려오는 햇볕을 음미했다. 며칠 후면 초하룻날이 돌아온다. 류제와 당당히 마주할 테다. 기왕이면 다홍치마잖아. 그렇지?
“믿을 만한 자들로 입궐시켰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재경이 눈을 떴다. 샐쭉한 고양이 눈이 데구루루 굴러 아래를 흘겼다.
“기한을 넉넉히 준 까닭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거라.”
“무녀는 어떻습니까.”
“저잣거리에서나 볼 법한 비렁뱅이 놈이 참으로 달의 무녀의 자손이었다니 누가 믿었겠어. 아니, 오히려 그런 자가 희망을 부서뜨려야 마음을 꺾겠지.”
“저번에 있던 소란은 무엇입니까.”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분에 안 맞는 호사를 누리겠다고 궐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아둔한 놈이야.”
짧은 대화를 나눈 그들은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매정하게 흩어졌다. 저자는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남들의 대화를 훔쳐 들은 꼴이 된 재경은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욕한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다.
“무슨 말일까, 할머니.”
“네가 멍청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역시 그게 맞겠지?”
도대체가 달의 무녀를 말하는 사람들 평이 엇갈리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헷갈린다. 누구는 영험하다 뭐다 치켜세우고, 누구는 저잣거리 비렁뱅이라고 하고.
저잣거리 비렁뱅이였던 나한테 무얼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듣자니 더욱더 달의 무녀로서 잘 포장해야겠다는 마음이 불탔다. 두고 보자. 류제도 그렇고 아무 말도 못 하게 해줄 테다.
그가 콧방귀를 내쉬었다. 하늘에서 먹구름이 들어찼다. 재경은 비가 내리기 전까지만 쉬자며 자유로운 바람을 만끽했다.
* * *
전흔 수습이 마무리되고 민심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상소문도 줄었고 전국에서 들어오던 황제의 눈과 귀의 보고문도 수가 줄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태산과도 같은 집무가 드디어 작은 언덕이 되었다.
어깨가 가벼워진 류제는 점심 수라를 들고 넉넉한 시간을 빌미로 오늘도 금위대장과 간단히 연무를 펼쳤다.
여전히 시원시원하게 들어오는 류제의 공격을 못 당하겠다는 듯 금위대장은 합을 맞추다 뒤로 물러나 패배를 선언했다.
“조금만 더 놀아주지 않고.”
“초하룻날이지 않습니까. 곧 내시가 닦달하러 올 겁니다.”
“빌어먹을 저주는 질리지도 않고 고개를 내밀려 드는군.”
류제는 검을 놓고 나인이 주는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는 문득 저번 초하룻날을 떠올렸다.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만 그놈 말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그리 타일렀음에도 듣는 척도 안 하고 제멋대로 굴다가 기어코 피를 보았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오늘도 고집을 부리겠지.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십니까?”
초하루 준비를 위해서 목욕재계를 하러 가려던 류제가 잠시 금위대장을 불러 세웠다.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이 차가 나는 어린 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망극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사사로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류제는 이 심정을 그만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어린 동생이 있는 금위대장은 저래 우직해 보여도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생각을 잘 파악하곤 했다.
“올해 다섯이라고 했던가.”
“예, 어린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잘도 쏘다니는 철없는 때지요.”
“매번 놀아달라 떼를 쓴다지.”
“입궐할 때마다 곤란합니다, 하하.”
그래도 제 어린 동생이 귀여웠는지 그는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이 나라의 으뜸인 황제의 입에서 동생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집안 대대로 내릴 만큼 은혜로운 일이다.
류제는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금위대장의 모습을 떠올리고 피식 코웃음을 쳤다.
“고집 부리는 아이는 어찌 달래느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였으니 금위대장이 잠시 머뭇거리자 류제는 금세 발을 뗐다. 팔불출이라 제 동생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던 금위대장은 점잖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처음엔 아니 된다며 만류하였지요. 늘 소인을 배웅하면서 아쉬움을 품어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것이 계속되니 제 관심을 끌려 짓궂게 사람을 희롱하지 않습니까.”
달포마다 만나는 그자와 똑같다. 어리석은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로구나.
“일이 밀려 호롱불을 켜고 업무를 살피는데 저를 놀래려다 등잔을 엎어뜨려 큰일이 날 뻔하지 않나, 넘어져서 다치지 않나. 호되게 혼을 냈는데 형님이랑 같이 감 따다 먹고 싶다며 울지 않습니까. 하도 기특하여 동생이 세 번 조르면 한 번은 들어주고자 합니다.”
“그러니 떼를 쓰는 것이 줄었던가?”
“자라면서 스스로 잘 타이르는 모양입니다. 언제까지고 아이는 아닐 테니까요. 폐하께 떼를 쓰는 아이라도 있습니까?”
“귀신도 잡는다는 금위대장의 화목한 이야기를 들어 기분이 좋아졌구나.”
류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올렸던 띠를 벗었다. 호쾌하고 아름다운 미모가 머리칼로 사라졌다.
금위대장은 나유타국의 두려운 황제에게 떼를 쓰는 그 무엄하고도 용기 있는 자가 누구인가 떠올려봤지만 좀처럼 상상되는 이가 없었다.
초하룻날의 의식을 위해 목욕재계를 마친 류제는 십이장복과 면류관을 쓰고 긴 행렬을 따라 시월당으로 향했다.
세 번 중 한 번이라. 오늘은 말 상대를 해줄까. 고집을 부리는 건 곤란하다만 그 행패를 계속 보자니 금위대장 말대로 상을 내리는 것도 필요할 듯싶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마지막 장지문이 열렸다. 오늘은 발 안에 잘 앉아있는지 검은 인영이 어렴풋하게나마 제대로 보였다.
저번에는 뒤에서 몰래 나를 희롱하려고 했었지. 오늘은 어디 천장에나 붙어있을 줄 알았더니 얌전하게 구는 건 무슨 심보이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또 무엇인가 짓을 꾸미고 있을까 오싹하다.
류제의 헛기침을 신호로 달의 무녀가 움직였다. 오늘은 또 무슨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서 화나게 만들 것인가.
반쯤 체념한 류제는 미리 면류관을 벗기 위해 매듭을 풀었다. 스르륵 발을 헤치고 사뿐히 밖으로 나온 재경은 오늘따라 입을 꾹 다물고 고고하게 류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곧 머리를 조아려 류제에게 극진히 절을 했다.
“삼가 태양과도 같은 인세 우두머리께 달의 무녀가 초하룻날 문안 바치나이다.”
진중하고도 예의 바른 인사말에 류제가 당황해서 자세가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저번 초하룻날까지만 해도 낮춤말을 툭툭 내뱉던 이가 갑자기 예의범절을 갖춘 진중한 인사를 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여를 놀리는 법을 새롭게 고안한 건가? 지성도 이런 지성이 없다.
“오…랜만이구려.”
“짧은 시간 달의 힘에 평안히 몸을 맡기기를.”
웃음기 없는 얼굴은 익숙하게도 달의 무녀의 붉은 화장이 되어있지만 류제는 오늘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오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게 새로운 장난인 건가? 농은 집어치우라고 하기엔 이것이 바로 류제가 바라던 것이었기에 하지 말라 입을 뗄 수가 없다.
“돌연 무슨 바람이 분 것이지?”
사람 진중하게 있는데 옆에서 초나 치긴. 재경은 이게 네가 바란 거 아니었냐며 표정을 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애써 다잡은 진지한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아 꾹꾹 속에 눌러 담았다.
어차피 성수청에 있던 사람들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하는 것일 뿐이다. 허나 어째 류제의 반응을 보자니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늘 마주했던 철없는 이가 기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월계수 가지를 들었다.
날카로운 분위기에 류제는 소름이 끼쳤다. 겹겹이 쌓인 무녀복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무녀의 화장이 친숙한 사람을 생경하게 돌려놓았다.
끝까지 제멋대로 굴다가 일을 망치기 십상이었으면서 심보가 궁금하다. 성수청사에게 했던 지적이 먹혔나. 그거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만, 마음이 탐탁지 않은 연유를 알 수 없다.
“폐하의 무사안녕과 만사형통을 달이 비춰 축복하길 기원하옵나이다.”
시월당에 오기 전 제사장과 화답을 나눌 때 오가는 말이다. 어안이 벙벙한 류제는 그에 맞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긴 장삼과 사뿐한 걸음걸이에 류제는 긴장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주먹 쥔 손을 무릎에 모았다.
재경은 성수청 어린 주술사들이 배웠던 가무를 어렵지 않게 해냈다. 손에 든 월계수나무를 너끈하게 휘두르며 류제의 주변을 느리게 돌며 주술 가무를 펼쳐놓자 류제는 더한 희롱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달의 무녀와 어울리는 행동을 하라고 해서인가? 이자가 여의 말을 경청하는 이였다면 고생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복사복 옷깃 스치는 소리와 나뭇잎 닿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불길한 적도 없었을 거다.
이러다 때가 되면 또다시 마음을 바꾸어서 사람을 손바닥에 굴릴지도 모르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을 겪으니 류제의 머리는 과부화가 걸려 어질어질했다.
성수청의 제사장과 달의 무녀가 드디어 결탁을 한 것인가부터 달의 무녀가 무얼 잘못 먹은 게 아닌가까지 오만 잡생각이 류제의 머릿속을 스치느라 류제는 오싹한 주술 가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월계수나무를 류제의 정수리에 부드럽게 얹은 재경은 어느새 해가 무사히 저물었다는 것을 알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류제가 넌지시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붉은 화장에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는 무녀의 얼굴이다. 원래 저 화장이 저만큼 기묘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나?
“끝. 바쁘댔지? 잘 가.”
재경은 이제 볼일 없다는 듯이 발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솔직히 오늘은 류제가 많이 그립지는 않았다. 몰래 나가서 지켜보기도 했고, 내내 가무 연습도 했으니.
그러니 오늘은 참을 수 있었다. 류제가 안 바쁘다고 한다면야 놀아줄 여지는 있었지만.
이번에도 친해지고 싶다니 뭐니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이야기를 질질 끌 것이라 여겼던 류제는 지금껏 그가 했던 행동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흔쾌하게 자신을 놓아주자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다.
뭔가 다른 흥밋거리를 찾았나? 아니면 역시 제사장과 결탁을…….
“만백성들의 금신에 평온이 깃들기를.”
늦은 답변을 건넨 류제는 면류관을 다시 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영문 모를 의심과 어리둥절함을 숨길 수 없었다.
기껏 양보해 줄 속셈이었는데 이리도 쉽게 물러나다니 그 같지 않았다. 그가 저자의 모든 것을 알 리는 없다만 적어도 진중한 성격은 아니지 않나.
류제는 열린 장지문으로 나서려다가 짐짓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허나 이미 볼일을 마치고 발 안에 모습을 감춘 달의 무녀는 나와 보지 않았다.
복잡한 심정을 삼킨 류제가 밖으로 나왔다. 이런 관계를 원했으나 태도가 돌연 바뀌니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류제에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수법은 먹혀 들어간 것 같지만 재경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 쓰였다. 장지문이 닫히자 재경이 빼꼼 발 뒤에서 고개를 내밀다가 오뚝이를 앞에 두고 빙글빙글 돌렸다.
“잘했지?”
긴장이 풀어진 재경이 오뚝이를 향해 실실 웃었다. 가무를 보고도 별말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류제는 오늘도 바쁜 모양이다.
재경은 류제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성수청 나인들 몰래 신당 밖에 마실을 나가더라도 그와 대화해 줄 이는 류제가 유일무이했다.
필히 이게 맞는 행동일 텐데. 재경은 할머니를 상상하면서 혼잣말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잘했냐고 물어보고 싶고, 류제는 어땠느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기운이 빠졌다.
오뚝이가 웃는 낯으로 재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보였지만 인형은 원래 말을 못 한다.
“서른 날 후에는 안 바빴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이 말에 뭐라고 답했을까. 입을 빠끔거렸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그는 쓸쓸한 기분을 숨기고 오뚝이를 옆에 두었다. 진짜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 * *
재경은 제가 아둔한 자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자학했다. 화려한 궐 생활은 정신적인 면에서 최악이었다.
초하루에 류제와 만났을 때 어쭙잖게 굴지 말고 늘 그랬던 것처럼 붙들어서 더 같이 있었어야 했다. 그러질 못했으니까 당장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무감정할 만큼 심심한 거겠지.
날씨도 남의 편처럼 군다. 땅을 가르는 더운 하늘에서 일주일째 비가 내렸다. 그 통에 병풍 뒤 구멍을 통해 나가지도 못한다.
혼잣말하면서 노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오뚝이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재경은 도리어 심술이 났다. 습기는 이런 생각들을 몇 배로 불릴 만큼 꿉꿉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대자로 뻗은 채 시체처럼 마룻바닥에 누워있는 재경은 한 시진째 천장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의 나이테를 관찰했다. 전에 발견한 건데 잘라낸 옹이구멍이 꼭 동물 이목구비처럼 생긴 것 같다.
여기에 있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재경은 과연 이곳에 온 것이 정답이었을까 스스로 되물었다.
그리움은 여전한데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심술궂은 장난질에 역정을 내는 사람은 류제밖에 없지만 류제는 그를 싫어하니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다.
밖에서 잡아온 커다란 딱정벌레나 거미 따위로 상을 치우는 궁녀들에게 장난을 부려봤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재경은 일방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그건 사람을 더 비참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재경은 오뚝이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똑같을 것이다. ‘다 네 탓이지.’라고 그의 상상 속 할머니는 답했다. 그의 머릿속 할머니의 이야깃거리는 늘 똑같다.
그가 생각하는 할머니는 그녀의 일부일지라도 진짜는 아니다. 재경은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집을 뛰쳐나온 주제에 말하기엔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럼에도 가족이 그리웠다.
돌아가면 밭일 하던 할머니가 큰 소리로 잔소리를 하며 달려오겠지.
엉덩짝을 한 대 차주고 머저리처럼 나뒹굴지 말고 와서 밭일이나 도우라며 투덜투덜거릴 거다. 저녁에는 한 상 가득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내와 줄 거겠지.
옆집에 사는 골골거리는 홀아비 할아범이랑 반딧불을 등 삼아 과일을 먹고 찌르르 찌르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며 잠이 든다. 밤하늘에는 신선들이 목욕하는 은하수가 흐를 거다.
특별해 보이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궐 안보다 덜 먹고, 못 입는 좁은 집에서 잠을 잤지만 넓은 들판과 산을 자유롭게 누비며 훨씬 재미있게 살았다.
이곳에서는 철창에 갇힌 새 신세다. 무슨 행동을 해도 재롱을 부리는 화조처럼 돌아오는 것은 무. 혹은 바보 취급하는 뒷말뿐.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재경은 여기에 있으면 제 마음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진짜 할머니가 있었더라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똥찬 대답을 돌려줄 텐데.
“그래!”
좋은 생각을 떠올린 재경이 자리를 박찼다. 그의 시선은 열어놓은 문창 밖을 향했다. 후두둑 나뭇잎에 빗방울이 부딪혀 미끄러져 바닥에 고이는 소리가 청명하다.
“가면 되는 일을.”
바람을 쐬러 나간 것처럼 아주 잠깐이면 될 거다.
궐 사람들은 초하룻날만 나를 바라지. 아니라면 날 내버려 두는 끔찍한 처사를 벌리지 않았을 터. 그러니 괜찮을 거야. 아침에 갔다가 늦은 오후쯤에 돌아오면 누구도 모를 거야.
밑도 끝도 없는 지루함에 썩어가던 재경의 눈이 드물게 빛났다. 돌아가서 할머니한테 물어보자.
할머니는 달의 무녀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 왜 제사장은 날 바보 취급하는 건지, 류제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진짜 할머니라면 필히 현명한 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궐 밖 나들이를 가겠다던 그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커다란 보자기를 구한 재경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떡이나 과일, 과자, 술 등을 하나둘씩 감추었다.
그는 이곳에 모셔야 할 인외(人外)의 신성한 존재이니 그깟 도자기 병이나 다과 조금 사라진다고 나인들은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질리지도 않고 쏟아졌던 뇌우가 그치려는 찬 새벽, 그는 일을 감행했다.
조반을 먹고 점심을 들이지 말라 상을 물린 그는 숨겨놓았던 보따리를 들고 오뚝이를 품에 숨겼다. 보따리를 병풍 안 구멍에 밀어 넣고 몸을 빠져나간 그가 유유자적 걸었다.
축축하게 젖은 흙으로 발이 금세 젖었지만 재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느긋한 몸놀림으로 나졸들의 포위망을 파헤친 재경에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은 쉽다.
새장에 가둔 새가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날아가 버리듯 그는 이전에 찾아두었던 감시가 소홀한 성벽을 찾아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하품하는 궐 밖 나졸과 마주칠세라 재경은 숲 안으로 몸을 숨겼다.
궐에서 나간 후로부터는 일사천리다. 금세 지리를 읽은 재경은 오늘 내로 돌아오기 위해 한시라도 아깝게 움직였다.
집으로 가자. 뭐라도 좋으니까 답이 있을 거야. 당분간은 혼자 있어도 버틸 수 있어. 늘 똑같은 답만 하는 오뚝이의 이야깃거리가 늘어날지도 모르지.
헐레벌떡 뛰어 낯선 숲을 지나 익숙한 산에 도착한 재경은 젖은 발과 더러워진 옷자락은 신경 쓸 새도 없이 헉헉거리며 멈춰 섰다.
멀리 보이는 오래된 초가집을 보자니 눈에 물방울이 고였다. 소매를 훔친 그는 덤덤히 발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조금만 더 가면 할머니가 보일 것 같다. 반갑고도 그리운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린 재경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잡초가 군데군데 난 밭은 아주 방치되지는 않았는지 할아범이 심었을 여름 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고양감에 감화된 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할머니!”
그가 반갑게 외쳤다. 환하고 아늑한 집 안의 환상이 보였다. 그 환상을 무참히 깨버리듯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집 안은 여전히 어둡고 어수선했다. 재경은 삭막하고 먼지 쌓인 집 안을 외면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할머니……!”
우당탕 발을 굴린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휘청거렸다. 어명을 받았던 그가 전에 무엇을 행했는지 멈춰놓았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숨이 막혔다.
정리하다 만 할머니의 옷자락. 흐릿한 그녀의 기척. 재경의 품속에서 오뚝이 인형이 떨어졌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인형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기대로 가득 찼던 재경의 눈동자가 체념으로 금방 까무러졌다. 그래, 그런 거겠지. 당연한 일인데.
제 꾀에 넘어간 그는 내팽개치고 도망간 현실과 마주쳤다. 왜 이곳에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여긴 걸까. 어리석은 그의 좁은 식견에서 나온 우매한 판단이다.
할머니가 답을 줄지도 모른다고? 무지몽매한 소리를. 재경은 지치고 말았다.
지금 나는 웃고 있나? 일그러졌나? 실망했나? 우스꽝스러울 거다. 심술이 난 재경은 오뚝이 인형을 연신 괴롭혔다.
할머니는 없다. 진작부터 없었다. 그는 입궐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인력으로 차출당했다. 아버지는 병사로, 어머니는 노동꾼으로 전선에 향했다가 내통한 적의 기습을 받고 사망했다.
마을의 소문으로는 포로에게 큰 아량을 베풀어준 나머지 세작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습격을 받은 거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믿는 사람에 따라 달려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진실이라 믿었다.
재경과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백안시되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혼자서 재경을 돌봐야 했던 할머니는 궁핍한 생활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못 이겨 어린 재경을 이끌고 마을 외진 곳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에 정착했다. 옆에는 나병 환자라 마을에서 쫓겨난 할아범이 살았다. 근근이 먹고살 밭일로 그들은 옹기종기 버텼다.
마을에 내려가 봤자 배신자의 아들이라며 무시당한 재경은 할아범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사냥을 배우고 나물을 채취했다.
종종 산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오는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때에는 장난질로 통쾌한 꼴을 보았다. 할아범을 더러운 병 취급하는 사람들을 골려주는 날에는 재경은 철없이 웃었다.
나무 타기는 특기이고, 달리기는 일상이며, 장난질이 취미인 그는 영영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매양 잔소리를 할 정도로 정정했고, 할아범은 오른팔 살점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갔어도 재경이 오면 좋아라 하며 과일을 깎아주었다.
그는 기억에도 없는 부모보다 할머니가 더 좋았다. 다치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슬프고 화가 나서 울고 싶더라도 할머니를 위해 미소 지었다.
웃어넘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할머니는 걱정을 덜었다. 할머니가 행복하길 바라며 그는 매일을 살았다.
재경은 웃으며 무사를 확인시켰지만 할머니는 늘 그의 부모를 그리워했다. 재경은 할머니가 그 기억을 떨치기를 바랐다. 허나 할머니는 매사 남들 걱정뿐이었다.
좋지 못한 징조는 예전부터 있었을 거다. 어린 재경은 그걸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나이 먹은 그녀의 몸은 지병에 시달렸다. 마음도 약해졌다.
한번 아프면 일어서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혼자 남을 재경이 걱정된 그녀는 기어코 나은 척을 했다.
처음에는 버텼고, 다음에는 비틀거렸으며, 세 번째는 일어서지 못했다.
사태를 깨달은 재경은 밤늦게 마을로 내려가 의원의 문을 두드리며 사정사정 불렀지만 그것이 또 재경의 희롱질이겠거니, 마을의 풍조에 따랐던 의원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의원이 죄책감을 품었다고 한들 이제 와 늦었다.
“할머니… 할머니! 눈을 떠봐, 할머니.”
“…재경아… 항상… …이도 건강하고…….”
“나는 건강 빼면 시체잖아. 봐. 내 걱정은 하지 마. 잘 웃고 있지? 그러니까 빨리 나아.”
그는 평소처럼 웃었을까.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추락한다. 허탈한 끝이다.
사흘 밤낮 앓던 할머니는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할머니는 금방 털고 일어날 거라 마음을 다잡던 재경은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떨군 할머니를 붙잡고 죽음을 부정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할머니는 낫는 것만 생각해.
몇 번이고 붙잡고 깨워보아도 영혼이 떠난 육신은 망가진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상실을 겪은 재경은 눈에서 그만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심장은 도자기 그릇처럼 산산조각 났다. 마음을 헤집어 놓는 충격으로 그는 제정신을 놓았다.
옆집 할아범이 어르고 타일렀지만 그는 평생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는다는 것이 그런 것임을, 그는 아직 인정하고 수긍할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가 늘 이런 상실감을 달고 살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거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재경이 턱을 괴었다. 선산에 있는 할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씁쓸하게 말한 그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들과 술을 놓고 멋대로 지껄였다.
“음식이 좀 쉬었는데 여름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화내지 말고.”
그가 예전처럼 똑같은 얼굴로 웃었지만 입술에 힘이 없었다. 재경이 아직 상태가 괜찮은 과자를 한 개 집어먹었다.
옆에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의 묘가 있었다. 그도 죽으면 이곳에 묻히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그녀의 옷가지들과 물품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옆집 문둥병 할아범이 종종 상태를 보러 오기는 했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물건들을 다시 집어넣는 것을 반복했다.
할아범은 그녀의 흔적이 적어야 천천히 잊어갈 수 있다고 달래도 재경은 할머니를 잊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기억하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해야만 했다.
도망가고 싶어.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끔찍할 정도로 자신을 옥죄어 오는 현실 속에서 재경이 그렇게 생각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닭의 홰치는 소리가 들리니 새벽이었다. 잠을 설친 재경은 발로 차고 소금을 뿌려줄 거라며 벼르다 문을 열었다. 수많은 신하를 거느린 자는 재경에게 내려진 어명을 읽었다.
재경은 그들이 하는 말 반절은 못 알아들었지만 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재경은 흔쾌히 그들을 따랐다.
지독한 슬픔 속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마에 올라탄 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가 없는 집에서 도망쳤다.
“나한테 멍청하다고 하고 싶지? 입이 없어 못 말하니 어째.”
재경은 말하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무덤은 조용하기만 했다.
“여기 오면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 또한 어리석은 생각이지. 재경이 술병을 손에 들고 가볍게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