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AU 외전. 달과 고양이 (1) (81/112)

AU 외전. 달과 고양이 (1)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

“지금 우리 뭐 하는 거야?”

“…….”

“내 귀가 옹이구멍인 줄 알아? 항아님 벙어리 아닌 거 알아. 잘만 떠드는 거 다 들었거든?”

나이 지긋한 손윗사람에게 상없이 으름장을 놓으며 애꿎은 개다리소반을 내려쳤지만 상대방은 묵묵부답이다.

소반에 올려둔 경대에서 구슬이 데구루루 나와 굴러떨어졌어도 아랑곳없는 나인들은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한 차가운 손길로 그를 치장했다. 이곳에 온 후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표정 변화 없는 산송장 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임금님이 찾았대서 다 내버려 두고 와준 건데 이때껏 아무런 설명도 안 해줘, 하물며 묻는 말에 답도 없다.

할머니는 궁궐에 사는 사람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그 말이 맞았어. 필히 저것들은 내가 못 배워먹은 놈이라고 무시하는 걸 거야.

토라진 재경은 이래도 대답 안 할 거냐고 어질러진 상자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어린 투정에도 숙련된 나인들은 묵묵히 제 할 일만 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

아우성을 질러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으니 심술부리는 것도 허탈하다. 매번 이런 식이지. 좋은 마음에 와줬더니 사람을 개뿔로 본다.

“신통한 데가 없어.”

퉁명스레 콧방귀를 뀐 그는 이레 전 그를 찾아온 병사들과 어명을 내리는 늙은 벼슬아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른 아침부터 예고도 없이 문을 두드리더니 놀란 사람 냉수 마시기도 전에 나라가 어쩌고저쩌고. 황제가 귀(鬼)가 들려서 어쩌고저쩌고. 어쩐지 제 말만 실컷 떠들어대더라.

어려운 말이라 한 귀로 흘렸지만 여하튼 제가 필요하다니 냉큼 나서줬는데 사람을 구석에 처박아 놓고 취급이 박하다. 임금님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뭐 다를까 했더니 겉만 화려하지 하잘 것도 없다.

“정녕 답을 안 할 셈이지?”

“…….”

“내가 무얼 해야 한다며? 그것만 말해주면 얌전히 있을게.”

바늘로 꿰맨 게 아닐까 재경이 그녀들의 입술을 자세히 살폈다. 이 지경이라면 질문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궐인들은 대화를 모르나? 지루해서 어찌 살아.

산에서 나고 자란 들고양이처럼 모난 눈매와 콧잔등을 스치는 옅은 주근깨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 위로 분이 툭툭 덧씌워졌다.

“아파!”

가을 들녘에서나 볼 법한 거친 지푸라기처럼 붕 뜬 머리칼은 시중드는 이들의 손에 의해 동백기름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약관이 넘은 나이에도 또래에 비해 작은 체구나 품위 없이 흐느적거리는 허약함은 풍성히 겹쳐 입은 옷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으으, 사내한테 무슨 분칠을.”

일족의 신화에 맞게 내려오는 분장은 사내의 까불짝거리고 심술궂은 얼굴을 신비롭게 바꾸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장신구는 무겁고 금박이 박힌 비단은 거추장스럽다. 산을 누비며 물장구를 치고 놀았던 그에게 이 이레는 생애 가장 악독하다 꼽을 만큼 끔찍했다.

낯선 곳에서 대화 상대라도 있으면 모를까. 농사일하면 혼잣말이 는다고는 해도 상대가 눈앞에 뻔히 있는데 제 말을 못 들은 척하니 못 배워먹은 그라도 자존심이 상했다.

“일어서야 해? 어디를 가는지 설명을 해 줘야 나도 생각을 할 거 아니야.”

“…….”

“임금님이 아프다며. 아줌마!”

건방진 말투에도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신줏단지 모시듯 비단신을 신겨준 나인들은 신당 문을 열어 안내를 했으면 했지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등의 중요한 말은 굳은 입술 새로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꽥꽥거리는 목소리가 상없다며 등짝을 때리는 할머니가 더 낫다. 재경은 임금님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꿀밤을 여러 대 먹여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굼벵이도 그보다 빠를 것 같은 느린 걸음으로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당도한 곳의 이름은 시월당(侍月堂), 달을 모시는 곳이다.

허나 문맹에다 아둔한 재경은 맞닥뜨릴 앞길을 짐작 못 해 이 긴 행차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 * *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 나유타국(那由他國). 가차 없는 전쟁을 끝마치고 승자의 위용을 과시하며 귀환한 황제는 면류관 아래로 푸른 눈동자를 오만하게 내리깔았다.

그 시선은 잔혹하고 차가워서 고고한 대신들이 절로 고개를 숙였다. 길목마다 오체투지 한 백성들이 머리를 세 번 땅에 찧어 그를 경외했다.

그는 응당한 나유타국의 황제다. 선황과 그 부인이 독살당한 후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일 때 황위를 계승했으며, 이윽고 참담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전략가.

새까만 명마를 타고 전장을 휩쓸면 두 합으로 적장의 목을 베고, 그때마다 비치는 붉은 동공은 적군과 아군을 모두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저주받은 자다.

피에 취해 전장을 누비면 적들은 고개를 조아려 목숨을 구걸하지만 안하무인 이성이랄 것도 없는 짐승은 자비 없이 생명을 취했다. 그는 폭군이다. 아비규환 속 통제 불가능한 저주를 품은 악독한 폭군이었다.

특히나 달이 뜨지 않는 초하룻날이 되면 그에게 들린 귀신이 기어코 피를 보겠다고 날뛰었다. 피바람이 부는 날에는 궐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황제를 흉측한 괴물이라며 남몰래 수군거렸다.

황제에게 들린 귀신은 황가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이지만 까마득한 이전에 대가 끊겼던 잔재다. 숨겨졌던 저주는 독살당한 선황비의 배에서 열 달보다 이르게 그가 태어났을 적에 이끌어내졌다.

이로 인해 황제는 독이 듣지 않는 육체를 취했지만 반동으로 저주를 품고 초하룻날마다 이성을 잃고 날뛰어야만 하는 숙명이었다.

소문이 무색하게도 그는 실상 상냥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가졌다. 저주에 이면을 가리고 본성을 숨기기 위해 귀신을 이용하는 그로서는 저주라는 존재가 참으로 모호했다.

맨정신일 때면 들짐승 하나 함부로 죽이지 않지만 적을 능멸해야만 하는 황제로서 저주가 훌륭한 소임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긴 전쟁은 끝났다. 황제는 유약한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피를 보면 원치 않게 남을 상처 주고, 초하룻날에는 괴물이 되어 날뛰는 건 지양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그는 옛 고서적을 뒤져 까마득한 옛날 황제의 저주를 잠재웠다는 성수청(星宿廳) 달의 무녀의 자손을 찾았다. 전란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샅샅이 뒤져 이레 전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손을 궐로 들였다.

달의 무녀의 자손은 절차에 따라 나라의 제사를 담당하는 성수청의 관리하에 신당에 모셔졌다. 고서에 따르면 달의 무녀는 저주받은 황제를 월계수로 쓸어내려 초하룻날의 괴물을 잠재웠다고 했다.

신력이 대단하다 알려진 성수청 제사장의 월계수 무용도 소용이 없었는데 달의 무녀라고 다를까.

먼 옛날의 고사가 진실인지 증명되지 않았으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니 폭군은 없어야 한다. 그는 후세에 어진 왕으로 기록되고 싶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제왕의 정복을 입은 폭군이 걸음을 뗐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궁녀가 시월당 달아자살문을 열었다.

그가 발걸음을 떼면 안의 문이 열리고, 다시 걸음을 떼면 마지막 문이 열린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발에 가려진 희미한 인영이다.

과연 저 안에 있는 자가 참으로 달의 무녀의 자손일까. 혹여 거짓이라 이성을 잃어버린 그의 화를 누르지 못한다면 저자는 어찌 될 운명인가.

성수청의 제사장은 무슨 의도로 상의도 없이 단번에 일을 진행했나 도통 꺼림칙하다.

모든 근심 걱정은 칠흑 같은 머리칼에 가려졌다. 왼편에 얼핏 드러난 푸른 눈동자만이 주변을 살폈다.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시월당 무녀 대면의 장에 당도했다. 세 개의 문이 차례로 닫혔다.

이제 대면실에 남은 자는 그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달의 무녀의 자손 둘뿐. 흔들리는 촛불이 해 질 녘 방 안의 불을 은은하게 밝혔다.

전례 없는 일이라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이처럼 들뜰 수 없던 그가 엄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굳게 닫힌 창살 밖으로 노을이 비쳤다.

초조하다. 해가 지고 달이 없는 초하룻날 밤이 찾아오면 그는 괴물이 될 것이다. 성수청을 믿어도 되었던 건가 온갖 근심이 그를 뒤흔들었다.

“어흠.”

시간이 되었어도 발 속의 인기척이 꼼짝도 않았다. 공연히 헛기침을 해 보아도 묵묵히 메아리치는 공기가 적막하다.

이윽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즈음 명랑한 손짓이 발을 스윽 밀었다. 발 아래로 호기심 어린 표정이 디밀어졌다.

“이제 말해도 되는 건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낮춤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 황제는 불쑥 들려오는 철없는 목소리가 당혹스러웠다.

고서에 나오는 달의 무녀의 자손이라 하여 한껏 높았던 기대치가 삐그덕거린다. 놀란 폭군의 눈동자가 체통도 모르고 끔벅거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그렇다고 전해야 하나?

“누구야?”

황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들리는 물음이 가차 없이 무식하다. 버들나무처럼 늘어진 면류관을 비롯한 제왕의 정복을 보고도 몰라본다면 세상과 담을 쌓고 신에게 헌신하는 무인(巫人)일 것이다.

그러면 좋으련만 아무리 보아도 발 속에서 꾸물꾸물 무릎걸음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 또래 남자는 신을 모시는 정숙함이나 근엄함에서 열 발치는 물러나 있었다.

저자가 진정 달의 무녀의 먼 자손이란 말인가. 그가 품은 괴물을 억누르기엔 그 피가 옅어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과인은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오.”

“우악.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소년은 기뻐했다. 대답 자체를 즐거워하는 듯해서 황제는 아리송했다. 그러면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들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일어선 소년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손에는 월계수나무의 가지가 하늘하늘 흔들거렸다. 그것만이 그가 저주를 누그러뜨려 줄 존재라는 신령스러운 믿음을 피력했다.

“임금님이야?”

“그렇소.”

“날 부른 사람이네.”

측근이 들었더라면 노발대발하며 상없는 소년의 목을 쳤겠지. 이 초하룻날의 저주를 억누를 수만 있다면 호기로운 무인(巫人)이 시건방지게 굴어도 그는 너그럽게 봐줄 용의가 있었다.

“과인이 달의 무녀의 자손인 귀공을 불렀소.”

“그게 뭔데. 물어도 도통 답해주지 않네. 날 부른 까닭을 알아야 말이지.”

“제사장에게서 소임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이오?”

“아프다고 했었나? 난 의원이 아니라서 병은 못 고쳐. 근데 내 말은 씨알도 안 듣더라. 어쩌라는 건지.”

소년이 들고 있던 월계수나무 잎을 흔들거렸다. 황제는 난감했다. 허나 의심하기엔 섣부르다. 고서에는 달의 무녀가 저주를 잠재웠다고만 기술되어 있으니 제사장도 무지한 일일 터.

저주가 눈을 뜨는 초하룻날 일언반구 없이 무인과 마주하게 자리를 만든 목적은 의뭉스럽지만 꼬투리를 잡기에는 애매한 신경전이었다.

“축복을 내려주면 되오. 귀공이 가진 월계수가 도움이 될 것이오.”

“장식인 줄 알았는데. 애걔. 그게 다야?”

“상세한 것은 과인조차 알지 못하오.”

“임금님이라며. 네가 불러놓고 뭐야. 바보야?”

황제가 낮게 한숨 쉬었다. 성수청의 일은 차치하더라도 일국의 황제에게 무엄한 말을 서슴없이 떠드는 소년과 대면하는 지금이 노름판 위 같았다.

저 소년은 폭군의 소문에도 무지한 건가? 저주를 억누르지 못하는 이라면 얌전히 말을 듣도록 겁을 줘야겠다.

“혈족에게 들은 것은 없는가. 달의 무녀에 대해서.”

“달의 무녀고 나발이고 아까 처음 들었고, 난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왔을 뿐이야. 사람을 데려다 놓고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멋대로 내버려 두질 않나. 날 무시하기만 하지. 이 내가, 신재경이 힘든 걸음을 했는데 괘씸한 자들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지?”

“곤란하군.”

참으로 곤란해. 이런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도 달이 없는 밤이 슬그머니 그림자를 드러냈다. 이 방법도 틀렸다. 정녕 구원은 없는 것인가.

“달의― 그게 그렇게 필요해?”

소년은 태평하게 물었다. 황제는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해가 지자 제멋대로 이글거리는 물이 으르렁거리며 속내를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끓는점이 낮은 인내심은 저주가 다가온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감정을 참아내야 한다. 그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눈을 굳게 감았다.

“달의 무녀는 황가에 내려오는 저주를 억누르는 자요. 귀공은 그 달의 무녀의 자손이지. 전설이 진실이라면 초하룻날 내게 축복을 내려주면 되오.”

“아프다는 게 저주 때문이야? 임금님도 저주를 받는구나. 하하하. 누구한테 밉보인 거야?”

소년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태도가 가벼워 진전이 없다. 알짱알짱 맴돌며 신경을 건드리는 몸짓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평소라면 눈감아 줄 무례도, 하늘하늘 하찮게 움직이는 발걸음도 당장에라도 쥐어뜯어 처박아 목을 졸라 능멸하고 싶다.

지긋지긋하다. 바라지 않는 욕망의 고통에 얼마큼 휩싸여야 만족하려나. 저자가 마지막 희망이었건만.

“저주라고 한들.”

재경은 월계수 가지를 휘둘러 저주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말이 어리둥절했다.

그는 자유분방하게 산속을 쏘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문자는 그림이고, 생각도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할머니가 등짝을 때려대던 게 엊그제다. 난생처음 듣는 말을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나뭇가지로 저주를 푸는 자가 괴력난신이지. 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농사일만 한 사람이야.”

열이 오른 황제는 답답한지 면류관을 벗고 옷섶을 풀어 헤쳤다. 몸이 뜨겁고 정신은 분노에 휩싸였다. 해가 지면 내제된 괴물이 눈앞에 있는 자를 해치고 만다.

노을빛조차 사라져 방 안을 촛불이 홀로 비추게 되면 시간제한은 끝이다. 그는 그렇게 되기 전에 이를 악물고 마지막 친절을 보였다.

“그렇다면 당장 돌아가라.”

“변덕이 심하네. 기다려봐.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은 해봐야지.”

“나가라고 말했다.”

후우. 거친 숨이 몰아쉬어졌다. 저주받은 붉은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지하단들 죄 없는 백성을 탓할 수 없다.

저주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파괴를 일삼았다. 백성을 다치게 하는 군주로 남고 싶지 않다. 성수청에 빌미를 주기도 역겹다. 황제가 다시금 낮게 경고했다.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거라.”

“할머니가 저주를 풀 방법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으니까 같이 생각해 보자는데도.”

“잔말 말고 나가!”

그가 으르렁거리며 손을 뻗쳤다. 기다란 꽁지머리가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살기는 소년을 찢어발길 터였다. 태연하게 눈을 끔벅거리던 소년은 들고 있던 월계수 가지로 황제의 머리를 툭 쳐서 밀어냈다.

“간 떨어지겠네. 진정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한 행위로 한겨울 폭포수라도 맞은 듯 거짓말처럼 이성이 차가워졌다. 머리를 스치는 월계수 잎을 따라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뛰어든 용암처럼 분노가 가라앉았다.

앞머리 새로 보이는 붉은 동공이 검게 수축하며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황제도 영문을 몰랐다.

피가 가라앉으며 동반된 어지러움만 남기고 사라진 저주는 당혹감을 하사했다. 초하룻날 저물녘 전신을 꿰뚫은 고매한 정신이 생경하다.

“왜 그래. 미쳤어?”

정확히는 미칠 뻔한 거지. 황제는 함부로 들었던 손을 죄책감과 함께 숨겼다.

문창호를 흘기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서 호롱불만이 방을 밝혔다. 가장 두려워하는 초하루 달이 없는 밤인데도 그는 마음속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

하. 하하. 아무리 버둥거려도 허망하게 잠식하던 저주가 고작 월계수 잎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어린애 장난 같은 행위 하나만으로 해결되다니. 세상만사 새옹지마로구나.

“과연.”

고사는 진실이다. 선조의 기록을 읽은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성수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의 무녀를 찾으라 지시한 것이 옳았다. 감복한 황제가 홀로 기뻐하며 재경에게 절을 올렸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지 말고 설명 좀 해.”

어쩌다 보니 해결이 된 것 같은데, 설명도 없이 자기 혼자 수긍하고 좋아한다. 재경은 월계수 잎으로 황제를 쿡쿡 찌르면서 꿍얼거렸다.

“다음 초하루에도 오늘처럼 하면 된다.”

“끝난 거 아니었어? 또 해야 해?”

월계수 나뭇가지를 흔들던 재경이 물었다. 황제는 그렇다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벗어 던졌던 면류관을 쓰고 의복의 옷맵시를 다잡았다. 이로써 그도 남들처럼 초하룻날 멀쩡히 사고하는 자가 되었다. 범인의 삶이 이다지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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