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 크레딧과 Thanks for] (80/112)

[엔딩 크레딧과 Thanks for]

모든 게임에 엔딩이 있듯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미연시 세계의 흐름이 강제했던 이곳에도 고난 끝에 얻은 엔딩이자 새로운 시작이 존재했다.

그 엔딩을 얻어내야 했던 주인공 류제는 인간을 사랑하는 트루 엔딩을 맞이했지만 히로인을 거부하고 그만의 사랑을 개척했다. 그로 인해 히로인들도 게임의 트루 엔딩과는 달라진 삶으로 나아갔다.

이후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가능성만 남겨두고 플레이어의 상상에 맡기는 게 게임의 룰이다. 그러나 엔딩을 맞이한 이 세계는 더 이상 게임의 룰을 강제하지 않기에 충분히 바랄 수 있다. 과연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훔쳐보자면 복수를 끝낸 비키는 졸업 후 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아가타 제립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했다.

특유의 똑똑함과 행동력으로 과거 호세마타 요새, 현 나라카 탐험기지에서 논문 집필을 돕는 그녀는 드라코니스 입자와 마족의 비밀을 파헤치려 나라카로 건너가 발굴 작업에 나섰다.

마족은 본디 인간이었으니 오래 살아온 마족이 인간일 적에 쓰던 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그들이 기록한 정보를 토대로 비키는 인간들이 잃어버린 빈 역사의 칸을 채웠다.

그러던 비키는 사적으로 추적하던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샐러맨더의 왕 율폰이 나라카로 떠난 후 가주가 된 그 셀로니아 소녀는 홀로 마족의 진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말년에 율폰의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풀지 못한 감정이 비틀려 버려 안타까워도 율폰의 혼은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재회할 수 없다. 류제에게 물어도 핵이 소멸한 이상 윤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딱함은 뒤로하고 연구를 지속하던 그녀는 파괴되어 드라코니스 입자가 되어버린 마족의 혼이 식물에 붙어서 영향을 끼치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그 영혼도 다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지 않을까? 실험 단계도 가지 못한 가정일 뿐이다. 온갖 파편이 한데 섞여 이전의 그들과는 다른 영혼이 되어버리겠지만 희망이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유네는 졸업 전부터 아가타의 목 좋은 곳을 둘러보더니 소원대로 아기자기한 카페를 차렸다. 계획으로는 키아나트리체 전국에 지점을 낸다고 하지만 자본이 부족해 몇 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초기 자본만 나르타 가문의 힘을 빌리고 나머지는 혼자 힘으로 인테리어부터 메뉴 구상까지 해낸 유네의 카페는 오픈 초부터 붐볐다. 듣자 하니 전흔 회복 관련 모금 활동과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그 입소문으로 마케팅을 하는 듯했다.

카페는 학교 근처에 있어 재경도 주말마다 찾아왔다. 아가타에서 구하기 힘든 넬사 고원산 푸딩도 판매해서 비키는 그보다 더 자주 방문했다.

다투었던 엄마와는 잘 화해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재경에게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한 것이 계기였다. 듣자 하니 유네가 왕실에 들어가길 원하던 그녀는 치맛바람 속에 웅그리던 딸이 위험한 바깥세상으로 혼자서 훨훨 날아가 버려 상실감을 느낀 듯했다. 더 팔불출 같았던 아빠가 오히려 딸의 독립에 의연했다. 어딜 가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종종 유네가 남동생을 카페에 데리고 왔다. 엉겨드는 아기가 어색했던 재경은 안은 상태로 얼음이 되었다. 당황한 그를 지켜보던 유네는 이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재경에게 만일 자신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대부가 되어달라 부탁했다.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재경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제립학교 정식 양호교사가 된 세라는 아이들을 좋아하니 여전히 학교에 있었다. 마족이 사라지기 전보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긴 세월 핍박받아 온 어빌리터들이 바른길로 가도록 교육자로서 공부도 이어나갔다. 아끼던 제자들이 모두 졸업을 해버렸을 때는 혼자 청승맞게 울다가 네네 슈만이 달래주었다고 한다.

재경의 1호 팬답게 사적으로는 왼쪽 눈 치료를 위해 아가타에 온 네네 슈만과 그녀를 따라온 루비니 아로즈네그와를 데리고 재경의 밴드 공연을 구경하러 오곤 했다. 네네 슈만은 옛날보다 날카로움이 풀어져 루비니의 장난도 잘 받아주는 것 같았다.

같이 술을 마셨을 때 세라의 취기로는 가끔 소개팅으로 남자를 만나려고 하면 엄마라도 되는 양 어찌나 깐깐하게 참견하던지 허구한 날 파투 내서 귀찮다고 했다.

니냐롯트야 황제가 되었으니 만나기 힘들지만 류제는 전령으로 활동해서 지겨워했다.

그녀의 행동은 예측 불능이라 재경을 만나겠다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병문안을 왔던 때처럼 하늘바람과 쌍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분장한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상쩍었다. 그들을 찾아다니는 루이나가 딱했다.

보면 고귀한 신분 둘이서 아가타를 잘도 싸돌아다니는데 정보원의 말로는 미노타와의 관계가 마무리되었지만 셋째 왕자가 돌아가지 않고 그녀에게 구애 중이라고 한다. 바쁜 니냐롯트는 연애할 계획이 전무해 왕자만 불쌍하게 되었다. 뭐, 아주 나중에는 제대로 약혼했다.

재판이 끝나고 고아원에 돌아가 여름방학을 보낸 류제와 재경은 2학기도 무사히 마치고 사이좋게 3학년으로 올라갔다.

다 좋았지만 진급하는 2학년이 비어서 3학년 1년간 시골 분교처럼 둘이서만 수업을 듣게 생겼다. 류제는 단둘인 게 좋지만 재경이 고등학교 생활에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그들은 곧 교실로 줄줄이 들어오는 낙제생 밴드부 일동들에게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2학기 내내 연습한다고 수업을 빼먹는다 했더니 역시 바보들은 바보들이었다.

변명을 늘어놓는 그들 말로는 전쟁 당시 고양이녀가 마족들을 고양이로 만들어 무찔렀다고 한다. 마족 고양이가 쓸데없이 귀여워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큰 공로를 세웠기에 수업을 안 들어도 졸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실망하는 네 사람 모두 대책이 없었다.

또 1년간 즐거운 학창 시절을 원 없이 보내게 된 재경은 이번에는 미래를 걱정할 일기장 없이 3학년 1학기를 시작했다. 류제의 뼈를 깎는 노력 덕분에 수업도 잘 따라갔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밴드부 보컬로서 제립학교 후배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친구들이 키가 컸다 했던 말을 반신반의했던 재경은 학기 초 신체검사에서 받은 기적의 숫자 175cm를 보고 환호했다.

드디어 평균 신장을 따라잡아 기뻐하던 와중 186이라는 숫자를 확인한 재경이 류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마족이 되었으니 이 빌어먹을 차이는 영영 줄어들지 않을 거라며 배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는데 성장판이 거기까지였다는 건 절대 인정 안 할 모양새였다.

류제는 신장 말고는 항상 재경이 이겨왔으니 문제없지 않냐고 했지만 재경은 류제가 맥을 잘못 짚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든, 아무리 합의하에 사귀고 있다지만 류제에게 공부 말고 밀리는 건 절대 싫었다. 류제는 제발 공부에서도 승부욕을 느끼라며 시끄럽게 굴었다.

고작 여섯 명이지만 3학년 전교생이 모여 나이엔힐리아로 수학여행도 갔다. 남자 숙소에서 몰래 야한 짓을 하다가 밴드부원들에게 들켜 재경이 도망간 후로 류제는 재경을 달래느라 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그 후 제립학교에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학생이 없어졌다.

체육대회 때는 경기에 나서는 1, 2학년을 응원하며 3학년 대표로 기간트리카 시연을 했다. 후배들은 기간트리카가 필수교과가 아니라서 능숙한 선배의 대결을 흥미로워했다. 나쁜 마족 역할은 당연하게도 류제의 몫이었다.

류제가 얄밉게 피해 다니자 약이 올라 공격을 감행하던 재경은 욕심을 부리다 하마터면 큰 상처가 날 뻔했다. 핵만 다치지 않으면 신체 어디가 박살 나든 순식간에 복구되는 마족에게 세라가 두 시간 동안이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옆에 있던 류제도 귀에서 피가 나올 뻔했다.

후배들만 참전하는 체육대회의 꽃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는 스포츠적인 의미로 남았다. 그 경기를 누구도 아닌 니냐롯트가 보러 와서 화제가 되었다. 전투 기계가 아닌 기간트리카의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듯했다.

열심히 학교를 다니다가도 주말인 토요일에는 공연이 없다면 졸업한 비키와 유네와 만났다. 모이는 장소는 항상 유네가 차린 카페다. 유네의 어빌리티로 여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카페의 가장 좋은 자리는 그들이 선점했다.

피곤에 찌든 비키가 푸딩을 퍼먹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시작으로 해가 질 때까지 놀던 재경은 류제와 손을 잡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이제는 마족이 사라진 날을 축하하는 라우라 축제에 네 사람은 나란히 서서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그날은 류제도 아주 특별하게 기억했다. 딱히 그들과 연이 있는 두 여장 숙녀가 사라 하놋 대신 여장대회의 유지를 이어가는 게 강렬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불꽃이 터지려던 무렵 양손으로 솜사탕을 들고 있던 재경이 신발 끈을 묶어주던 류제에게 허리를 숙여 먼저 키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것도 자기 로망이었다나?

여름방학 때는 다 함께 타고시아 해변 별장에 놀러 가 일주일 동안 새까맣게 탈 때까지 수영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선이 향하는 건장한 미남과 귀엽고 새침한 두 미녀, 그럭저럭 평범한 남자의 조합이 신기했는지 사람들은 류제가 두 여자 중 누구와 사귀고 있는 걸까 멋대로 상상했다.

누구도 류제와 재경 둘이 이어졌을 거라고는 몰랐다. 이상하게 그런 데에 꽂힌 류제가 밤마다 괴롭히긴 했지만 재경도 류제를 독점해 뽐내는 기분이 없지 않았다.

1, 2학년들의 수신제는 훌륭했다. 제립학교 명물이 되어버린 밴드부는 이제 독자적인 인디 밴드 활동을 하고 있어 추가 부원은 모집하지 않았지만 올해 수신제 공연도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다. 실력이 일취월장한 재경도 신나게 무대를 즐겼다.

그보다 아주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 밴드부가 익명으로 활동 후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류제는 니냐롯트의 짓일 거라면서 투덜거렸다.

거기에 셀로니아 가문과 유네의 후원까지 더해져 밴드부는 신관 창고에서 벗어나 아가타의 유명한 스튜디오에 연습실을 차릴 수 있었다. 밴드부원들은 역시 셀로니아 가문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며 고양이로 이어진 인연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연말에는 다 함께 넬사 고원에 있는 유네의 산장에 놀러가 스키를 탔다. 밴드부는 물론이고 안전을 위해 세라, 루비니, 네네까지 초대해서 밤새 파티를 열었다. 아직 학생인 사람들이 있었으나 어차피 곧 졸업이고 나이는 성년을 넘었으니 선생님인 세라도 적당한 음주 가무를 귀엽게 넘어가 주었다.

며칠 전부터 벼르던 비키는 그곳에서 넬사 고원산 특별 푸딩을 열 상자나 샀다. 그걸 놓치지 않은 류제가 유통기한은 신경 안 쓰냐며 놀려댔다.

모두가 술에 취했을 때쯤 니냐롯트가 도착했다. 다 함께 맞이한 새해는 폭죽으로 시작했다. 추운 날씨 속 한줄기 따스함으로 태양이 솟아올랐다.

그들의 1년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 꿈에 바라던 학교생활을 해낸 재경이 행복해하니 류제도 만족스러웠다. 재경을 차지하는 과정에 있어서 불공정함을 느낀 비키와 유네에게 발길질당하거나 음습한 비꼼에 심정이 푹푹 찔리기는 했어도 뭐 어떠랴. 지금 재경이 행복한데.

재경을 이성으로 바라봤던 두 사람도 그의 시간이 인간과 달라진 걸 인정하고 류제에게 양보했다. 못마땅했지만 재경이 저만큼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들이 지켜주지는 못함을 세월이 흐르면서 납득했기 때문이다.

경계하라는 의미로 헤어지면 냉큼 받아가겠다는 우스갯소리로 류제를 협박했지만 그들은 대신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되었다.

재경은 행복했다. 정녕 빙의 전의 일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어디를 가든 친구들과 함께였다. 곁에는 류제가 있고 밴드부와 공연을 나가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긴 재경은 위풍당당하게 제립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찾아온 후배들과 친구들이 사진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추억이 담긴 학교를 뒤로한 두 사람은 계획했던 대로 기숙사를 나왔다. 며칠 비키의 저택에 신세를 지다가 처음 목련이 피던 날 새집으로 이사를 마쳤다. 그들의 새로운 안식처는 키아나트리체를 지킨 공적으로 훈장과 함께 받은 몰락한 귀족파의(아마도 멜가로스크 자작의) 대저택이었다.

마족이라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딴 귀찮은 것은 사절이었던 재경은 류제와 함께 살 대저택이 얼마나 설렜는지 직접 보수 작업까지 했다.

여기에 할머니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기숙사에서 가져왔던 짐을 정리한 재경은 푹신푹신한 침대 앞에서 류제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이후, 지금부터 말하는 작은 일화는 그저 앞으로 두 사람이 가질 미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오해와 착각과 부끄러움에 관한 재경 나름의 사랑 이야기다.

사회로 나간 두 사람이 정식으로 사귄 지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사이좋다가도 가끔 싸우고 화내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는 평범한 연인들과 같은 나날이다.

류제의 집착에 질릴 법도 하지만 재경은 여태 헤어질 기미가 없었다. 이따금 별 이유 없이 화내다가도 들러붙는 재경을 보던 류제는 혹시 헤어진다는 의미를 모르는 건가 싶었다.

절대 알려주지 말아야지. 자기 실수로 토라지고 자기가 잘못한 걸로 울어버리는 재경에게 사과하는 건 항상 류제였지만 이토록 재미있는 재경에게 질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경이 헤어지자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나.

몇 년 전부터 들어와 사는 둘만의 대저택, 대자로 뻗어도 한 사람이 더 들어갈 커다란 침대에서 현재에 만족하는 류제는 최근 야한 짓 연구에 맛을 들인 재경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다.

“어때?”

심정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입으로 들어야 알겠지만 그랬다가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거나 부끄러워져서 다시는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모르는 척 가만히 있는 것이다.

“으… 감질나.”

식사는 입으로 하면 된다고 하자 류제가 식겁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던 재경은 최근 들어서야 류제가 항상 자신의 것을 입으로 해주었음을 깨달았는지 자기도 그걸 하겠다고 따져댔다.

심하게 몰아붙이는 관계는 지양했던 류제는 재경이 안 하던 짓을 하니 혹시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지쳤나 번민했다. 과한 건 자제하는 편인데 그래도 힘드나?

“집중하란 말야. 뭐 하는 거야?”

“하고 있어. 후…….”

기둥을 혀를 세워 애무하는 재경의 서투른 야함에 손이 근질근질했다.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식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매너리즘을 빠져나갈 여흥 같은 거겠지 싶다.

“윽……!”

좋아하는 부분을 핥아 올리자 류제가 크게 반응했다. 옛날에는 야한 거 하나하나에 남사스럽다고 난리를 치던 재경은 어른이 되었다고 뽐내는 건지 히죽거리며 그걸 즐겼다.

류제의 거시기는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것처럼 두꺼운 육봉을 혀로 실컷 농락하던 재경은 메인 디시를 먹기 위해 질질 침을 흘리는 입을 벌렸다. 슬쩍 류제를 살핀 재경은 귀두를 입천장을 따라 그리며 목 안쪽까지 집어넣었다.

“크흑, 어디서 이런 걸 알아온 거야.”

“하? 머 아어다느거아.”

말을 하니 꽉 조이는 목구멍에 아찔했다. 재경은 류제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냥 한 번에 집어넣으면 이가 닿을까 봐 그런 건데 좋나 보네. 호기롭게 목구멍 안쪽까지는 넣긴 했지만 역시 헛구역질이 나왔기 때문에 재경은 시간을 들이며 익숙해질 때까지 육봉을 입에 물고 침을 삼켰다.

“재경아…….”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는 류제는 빨리 움직이고 싶어서 온몸이 달아올랐다. 힘낸다고 열심이니 냅다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아아, 진짜 오늘도 너무 귀여워. 하루도 빠짐없이 귀여워 죽겠네.

“안 돼. 오늘은 내가 해볼 거야.”

“윽, 너…….”

그곳에 피가 몰려 미칠 것 같은데 재경은 움직이지 말라며 손을 쳐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열이 오른 얼굴로 야하게 혀를 날름거리는데 서툴고 부족해서 류제는 안달이 났다. 이런 데에서 학구열을 느끼다니. 몸으로 움직이는 것만 좋아한다니까.

“어디가 좋은지 제대로 말해줘. 알았지?”

“너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자기도 남자면서 이 안달 나는 기분을 모를 리가 없다. 그 말이 정답이라며 개구쟁이처럼 웃은 재경은 기둥을 다시 한입에 다 넣고 목구멍과 입술 힘으로 쭉 빨아낸 다음 아주 천천히 빼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것으로 끝내고 다시 혀를 굴려 귀두를 둥그렇게 핥은 재경은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웠는지 입을 비죽거렸다. 볼때기에 류제의 것을 맞댄 저질러놓은 것을 해결 못 해 나름의 애교를 피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힘들어.”

“그럴 줄 알았어.”

자극이란 자극은 다 해놓고. 주도권이 주어진 류제는 그의 것을 재경의 입에 가장 깊은 곳이 닿을 때까지 밀어 넣었다. 천천히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니 살짝살짝 닿는 재경의 치아 자극에 그가 스퍼트를 올렸다.

도발한 주제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재경의 뒤통수를 눌러 울컥 내뱉은 류제는 그럼에도 부족했다. 사정하자 입에 가득 찬 하얀 액체를 삼키는 꼴에 몸이 근질거렸다. 그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류제는 아직 가지 않은 재경의 것을 쓰다듬으며 뒤로 넘겼다. 입을 닦은 재경이 시선을 회피했다. 안 하던 짓이 부끄러웠는지 귓불이 빨갛다.

인간을 잡아먹던 버릇이 피부를 씹는 걸로 바뀐 걸까 자꾸만 씹어대서 재경은 좀 짜증이 났다. 매일같이 하는데도 부족하다고 갈구하는 기분이다.

오늘 이벤트로는 성에 안 찼나? 부족하나? 저 자식은 왜 저렇게 능숙한 거야. 난 매번 능숙하게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던데.

“아… 으. 가…가… 류제, 나… 으읏……!”

“하… 재경아. 후…….”

뜨거운 체액을 뿌린 류제는 좀 더 재경의 안쪽을 즐기다가 조심스레 빼냈다. 수고했다며 목덜미에 쪽 키스를 했다. 마족의 식사를 마친 재경은 포만감과 만족감에 숨을 뱉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횟수가 꽤 많았다. 류제가 오늘부터 일주일간 나라카와 관련된 일로 파견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되도록 많이 주고 있는데 팔불출인 류제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진짜 괜찮겠어?”

출발 시간이 머지않았던 그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전전긍긍했다. 별걱정을 다 한다며 재경이 의연한 척 굴었다.

“일주일 치는 충분히 먹었잖아. 배불러 죽겠어.”

“그래도 혹시 저번처럼 쓰러지거나 하면…….”

“넌 진짜 과보호하려는 게 있더라? 물론 내가 좀 무턱대고 행동하긴 하지만 아세미도 아니고 진짜 괜찮대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입술이 나온 류제에게 재경이 쪽 가볍게 맞댔다. 자기가 애정 표현 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재경의 특기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얌전히 집에나 있지. 나라에서 연금도 나오니 먹고살 걱정은 없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마왕인 그는 재경보다 제약이 많았다. 나라카 관련한 일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인간과 함께 지내는 조건이라 무시할 수 없음은 재경도 이해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니냐롯트와 함께해야 한다지 않나. 임금님과 함께라니 중요하지, 암.

그래도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라 류제의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재경은 어디 6개월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나름대로 궁리를 해봤다.

뭐가 좋을까. 류제가 떠나기 전 재경은 빨리 돌아오라는 말 대신 볼을 앙 물어 잇자국을 남겼다.

“아야! 왜 그래?”

“너도 맨날 나 물잖아. 그래서 물어봤어.”

“하하, 그렇긴 해도.”

작별 키스 대신 이빨 자국이라. 퍽 귀여운 이유였다.

류제가 물었을 때는 적당히 키스 마크 정도로만 남는데 뭔가 보기 흉하다. 이제 나가야 하는 사람을 너무 세게 물었나 재경이 눈치를 보았다.

“치료 안 해?”

“왜? 네가 남겨준 건데.”

재경의 서툰 애정 표현을 만끽하며 능글거리는 게 노련하다. 요즘 그런 생각이 가시지 않던 재경은 억울했다. 자기는 이런 게 류제가 처음인데 류제는 아닐 것이다. 잘생겨서 인기도 많은 데다 저 자식은 마왕이라고. 천 년 동안 살아온 놈이란 말야. 이렇게 잘하는데 경험이 없을 리가 없잖아, 저 망할 할아버지!

“렌~”

“아, 또 왜!”

“사랑해. 보고 싶으면 통신해.”

오늘도 베개를 처맞으며 쫓겨나는 류제가 일주일 후에 보자며 사라졌다.

커다란 저택에 홀로 남은 재경에게도 오늘 할 일이 있었다. 인근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밴드 연습 날은 내일이지만 류제에게 비밀로 하는 다른 약속이 있었다.

류제가 애정 행각에 서슴없다는 걸 곧잘 느꼈던 재경은 6개월 연장자인 자신도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상담했던 그는 비키에게 학교를 졸업한 후 친구들(놀랍게도 과거 검도부 부장, 요리 동아리 부장이 있었다!)과 화실을 차려 만화 작업을 한다는 과거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을 소개받았다.

거기서 왜 그 침착한 안경잡이 문학소녀가 나오는지 묻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비키는 찾아가면 안다고 투덜거렸다. 역사 연구 동아리의 한쪽 벽면은 돌아가는 구조이고 그 안에 엄청난 규모의 동인지들이 쌓여있다나?

반신반의했던 재경은 문학소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보유한 엄청난 양의 남X남 동인지를 보고 제대로 찾아왔음을 느꼈다. 왕도물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판타지가 섞인 남남 로맨스들의 결정체들이 재경의 지식을 대신할 것이다.

부장이 추천하는 왕도물 동인지를 읽던 재경은 어쩐지 동질감을 느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하마터면 류제의 의심을 살 뻔했다.

만화책에서는 역경으로 이어진 커플이 질투니 오해니 착각이니 같은 하찮은 것들로 쩔쩔맸다.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저런 염병을 해대나 생각했던 재경은 그날 펑펑 울면서 그 책의 마지막 권을 끌어안았다. ‘내가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았구나.’, ‘나도 만화책에서 경험을 쌓으면 류제를 질리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재경은 조금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그때 다 읽지 못한 작품들을 섭렵하러 가는 길이다. 사람이 왜 책을 읽는지 그제야 좀 알 것 같던 재경은 창작물 속에서 빤히 보이는 사랑의 흐름을 조금 캐치했다.

역시 미연시처럼 남자끼리 연애할 때도 다양한 이벤트들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도 연애 마스터가 머지않았으니 류제가 돌아오면 어른스럽게 리드를 할 테다.

이쯤 왔으면 눈치챘다시피 그가 류제에게 소소하게 야한 이벤트를 준비한 이유는 전부 다 동인지의 영향이었다. 그가 읽은 만화책에서는 출장은 바람을 뜻했다. 일상이 지루하다며 바람을 피운 상대 때문에 주인공만 울어대는 이상한 장르였던 것이다. 그러다 둘이 눈이 맞아 야한 것을 해대니 재경도 의무감이 들었다.

“엄청 피곤해 보이네.”

“마족도 지치는 거냥?”

“아냐, 마음을 살찌우느라고 그래.”

산더미처럼 만화책을 빌려다 밤새워 읽은 재경은 다음 날 밴드 연습실에 마지못해 출근했다. 졸려 죽겠는데 핀잔을 걸어대는 밴드 멤버들이 귀찮았던 재경이 변명하듯 꿍얼거렸다.

바랐던 대로 ‘카페라테 치즈 캣’이라는 인디 밴드로 활동 중인 그들은 틈만 나면 전국을 싸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밴드 이름이 왜 저따위인지는 재경도 몰랐다.

“우리도 들어서 안단다, 소.년♂. 그 잘생긴 친구랑 사귄다며? 그래서 피곤한 거지?”

밴드의 전담 매니저는 바로 그 울퉁불퉁 여장 남자 두 사람이었다. 제립학교 시절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졸업 후에는 류제와 사귄다는 말을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되어버린다. 숙녀들도 한 달 전에 그의 추천으로 매니저 자리에 들어왔는데 아는 걸 보면 다 저 입 싼 녀석들 때문이다.

“사…사귀는 거 아니…….”

“헤어졌냥?”

“…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류제는 출장 갔어요.”

부정하는 재경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두 사람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제기랄.

“뭐가 이상한데? 사랑하잖아, 그 잘생긴 청년을.”

“그렇지~ 사랑하지~ 류제를~”

“아~ 몰라 몰라. 그보다 공연 곡 말인데…….”

얼버무리는 재경은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사랑한다는 건 여전히 모르겠지만 류제와 함께하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항상 옆에 있었었다가 고작 며칠 안 본 것일 뿐인데 지금도 엄청 보고 싶었다.

만약 어제 읽었던 만화책 내용처럼 류제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다면 진짜로 용서 못 할 것 같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주지? 만화책처럼 류제가 무릎 꿇고 빌면… 으음.

용서가 뭐야. 당장 쥐어패 주마.

“어?”

류제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밴드 연습이 있어 집을 나서던 재경은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류제가 새까만 머리칼을 찰랑거리는 어떤 제립학교 여학생과 꽁냥꽁냥 노는 걸 목격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재경이 알은척을 하기 위해 다가가려는데 여학생이 수줍게 주먹질하며 칭얼거리자 류제는 좋다며(지극히 재경 개인적인 생각이다) 히죽거렸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그 류제가 여자의 애교를 귀여워하며 떨쳐내지 않는 것이다!

나한테는 돌아왔다고 말도 안 했으면서 새빨간 타인하고 친근하게 장난치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감정이 격해진 재경은 발끝에서부터 머리카락 끝단까지 열이 올랐다. 부들부들 주먹을 떨며 숨을 한껏 멈춘 그는 얼굴이 터질 때까지 목에 힘을 주었다.

이런 왕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분명 바람피우는 걸 오해해서 상처받는 그런 루트겠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진짜 바람이잖아! 만화책의 내용을 직접 당해보니 답답했던 주인공의 심정이 단번에 이해된다.

화가 났던 재경은 우울해졌다. 도저히 밴드 연습에 나갈 기운이 나지 않았던지라 그길로 곧장 유네의 카페로 간 그는 상담을 빙자한 위로를 원했다. 몰려오는 무력감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 망할 자식.”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나한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나만 특별한 게 아니었어. 노망난 망할 늙은이 같으니. 역시 나로는 부족한 건가? 그래서 그래? 진작 말을 해주지. 그렇게 약속했던 주제에.

“인기야 어마어마하지. 능글거리는 속내는 몰라도 껍데기는 훌륭하잖아. 사람들에겐 그저 인류의 영웅이니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나도 왕실에 출근하면 싫어도 소문을 듣는데.”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통에 눈이 나빠진 비키는 이번에 새로 안경을 맞추었다. 논문 정리를 위해 유네의 카페에 들렀다가 재경과 합석한 비키는 푸딩을 먹다가 말고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뀌었다.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우울해하는 재경이 참 하찮게 보였다. 천하의 왈가닥 렌 지미가 사랑 때문에 울다니. 한때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했던 비키의 입장에서는 사랑 상담도 좀 웃겼다.

“비키 양, 그래도 사귀는 사이라면 타인의 유혹 정도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걱정이네. 류제 군이 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드문데 그것도 예쁜 여자라면…….”

감정선이 풍부해서 잘 공감해 주는 유네는 테이블과 혼연일체가 되어 훌쩍거리는 재경을 다독여 주었다. 그녀가 마음 풀라며 수플레 케이크를 커피와 함께 쥐여주었다. 퉁퉁 부을 때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던 재경이 마지못해 포크를 들고 꾸역꾸역 수플레를 먹었다.

온실 속 화초였던 유네도 지금은 재경을 넘어설 만큼 요리를 잘했다. 제과 쪽에서 특출나 재경도 유네가 직접 만든 디저트를 좋아했지만 오늘따라 입맛이 없었다. 몇 입 먹다 만 재경이 포크를 내려두고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런 놈이랑은 헤어지지 그래? 몰래 바람이나 피우는 놈이 뭐가 좋다고.”

“헤어질 거야. 류제가 헤어지자고 하면.”

귀찮아진 비키가 막 던져본 말이었지만 재경은 찌질하게 답했다. 만약 진짜 헤어지자고 그러면 어쩌지. 재경은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상처받아서 수그러들던 눈물을 터뜨렸다.

콧물을 흘리는 마족이라니. 비키는 옆에 있던 티슈를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류제 신리가 뭐라고 이 난리야.

반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니냐롯트와 일주일간 볼일을 마치고 아가타로 돌아온 류제는 밴드 연습실에 가는 날에 유네의 카페 근처에서 잡히는 렌을 감지했다.

별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려 일주일 만에 만나는 거라 뭐든 상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양손에는 렌이 좋아하는 기념품이 잔뜩 들렸다.

아직도 눈물을 그치지 못한 재경이 코를 푸는 동안 카페 유리창 바깥으로 이 일의 원흉이 다가오자 비키의 눈이 싸늘했다. 잡힌 문이 열리자마자 비키가 자리를 박찼다.

“렌, 여기에―”

“죽어, 류제 신리!”

류제가 카페에 발을 디밀기도 전에 화염구를 날린 비키가 류제를 바깥으로 내팽개쳤다. 덕분에 류제가 사 온 기념품들이 구겨져서 엉망이 되었다. 비키가 식식거리며 노려보니 핏대가 올라온 류제가 이에 맞섰다.

“뭐야? 해보자는 거야?”

“그래, 해봐! 이참에 토벌되어 버리는 거 어때?”

“하찮은 인간 주제에. 분수를 알게 해주지!”

“사악한 악마 자식! 죽어라!”

억울했던 류제가 지지 않고 맞섰다. 펑펑펑. 와장창. 어빌리터들의 싸움에 구경이 난 사람들이 무슨 일이고 기웃거렸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 카페의 명물이라고 한다.

“나 집에 갈래.”

훌쩍거리는 재경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해가 있는 거라면 둘이서 어련히 풀겠지만 유네는 쓸쓸한 렌의 뒷모습이 불쌍해서 류제가 더 밉게만 보였다.

비키가 던지는 화염구를 피하려다 유리창을 깨고 데구루루 구른 류제가 도망가는 재경에게 손을 뻗었다.

“렌, 잠깐만! 어디 가? 나 돌아왔다니까?”

“싸우는 건 좋은데 부서진 가게랑 물건 대금은 청구해도 되지? 류제 군.”

유네가 재경을 쫓아가려는 류제를 붙잡고 상쾌하게 종이를 들이밀었다. 순수했던 미소는 사라지고 유네는 어느새 장사치가 되어버렸다. 나르타의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절반은 그가 부순 게 아니라서 비키를 노려보자 그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류제는 억울해 미치겠어서 주먹이 울었다. 렌을 강탈해 간 그때의 분노를 또 푸는 거라면 잘못이 있는 류제는 그녀들에게 심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비키,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봐.”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너 때문에 렌이 울었다고. 알아?”

나 때문에? 대금 청구서에 사인하던 류제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얼이 빠졌다. 설마 내가 울 정도로 보고 싶었나? 일 때문이라고 한 달도 전에 말했던 걸 왜.

“렌!”

일주일마다 보는 두 사람에게 따로 작별 인사 하지 않은 류제가 도망가는 재경을 쫓아갔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삐친 고양이를 달래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화가 나버린 재경은 마족의 능력을 사용하면서까지 류제와 거리를 벌렸다.

“따라오지 마!”

“왜 그래.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어?”

참다못한 류제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붙잡은 팔을 놓지 않자 심술이 돋은 재경이 손을 앙 물어버렸다.

“악!”

볼을 물었을 때와 다르게 치악력에 악의가 담겼다.

“오지 마!”

메롱. 혀를 내민 재경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류제의 손바닥에 반원의 호 모양 점선이 그려졌다. 툭 치면 잘려나갈 것 같다. 피가 흘러서 상처를 이어붙인 류제는 따라오지 말라며 날아오르는 재경에게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재경아~”

“시끄러워. 안 들려.”

“왜 삐졌어?”

“안 삐졌어.”

“나한테 화났잖아.”

“그럼 화를 안 내고 배겨?”

“왜 화가 났는데?”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웃기다. 네가 바람피웠잖아! 라고 만화책 주인공처럼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 재경은 줄줄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당황한 류제가 말을 못 잇는 동안 재경은 또 제 갈 길로 갔다. 그 뒤를 졸졸졸 따라가다 보니 결국 두 사람만의 저택이 나왔다.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재경을 방해한 류제가 품에 가두고 가볍게 키스했다. 말랑한 입술이 사랑과 함께 맞닿았다.

“배 안 고파?”

또 어영부영 넘어가지. 류제에게 끌어안긴 재경은 입을 비죽였다. 솔직히 배고파 죽겠다. 실은 이 짜증이 모두 배고파서 난 성깔일까 싶던 재경은 류제의 사랑스러운 애교(얼굴)에 못 이겨 구애를 받아주었다.

대신 류제와 바람난 진한 흑발의 그녀에게는 괘씸죄를 물어 이를 갈았다. 지금은 류제를 내가 가졌다 이거야. 내가 너한테 넘겨줄 줄 알아?

“읏, 훗. 전정해! 숨 막혀 죽겠네. 너무 급하잖아.”

“당연하지. 일주일 만인데.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옷을 벗어 던진 류제가 재경을 침대에 던졌다. 오늘도 잘 뛰고 있는 재경의 심장 소리를 들은 류제는 욕심 많은 혀로 오돌토돌한 젖꼭지를 애무했다.

다음을 원하는 재경의 것이 반응했다. 하고 싶다. 배고프다. 먹고 싶었다.

“짜샤.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

“그렇게 배고파?”

“잔말 말고 빨리!”

침대에 엎드린 재경은 자신의 양 엉덩이를 벌리며 류제를 유혹했다. 일주일간 얌전했던 구멍이 벌름거리며 그의 것을 원했다. 기대감에 흐르는 액체가 질척거렸다. 당연 여유가 없는 류제는 그 유혹을 받아들였다.

일주일 만에 빡빡해진 구멍에 느긋하게 침입한 류제는 바들바들 떨리는 재경의 날갯죽지에 이를 박았다. 이따금 재경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느끼는 날이면 이곳에서 날개가 나오곤 한다. 연결 부위에 민감했지. 류제가 그 부분을 혀로 핥았다.

“왜 이렇게 귀여워?”

“시끄러워… 윽… 아흑, 처…천천히 해.”

“빨리하랬다 천천히 하랬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을까, 우리 재경이는.”

침대를 받치고 있는 재경의 손을 맞잡은 류제가 귓가에 앙큼하게 속삭였다. 푹 들어가는 허리 놀림에 흠칫 놀란 재경은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침대에 비벼지는 발기한 물건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려 침대를 적셨다.

“얼굴 보여줘.”

“싫어. …윽…윽! 아, 너 진짜!”

“안 보여줄 거야?”

후배위는 무섭다고 싫어하면서 굳이 하라고 할 정도면 뭐 때문에 삐친 걸까. 혹시 재경이 숨겨둔 간식 다 먹어버린 거 지금 와서 눈치챈 건가? 그래서 내가 새로운 걸로 사 왔는데.

“보여줘, 응?”

“윽, 흐윽! 힉… 진짜… 아…알았으니까 좀……!”

애타는 부분을 쿡쿡 천천히 찔러대며 보채니 재경도 두 손 두 발 들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자 류제가 깊게 키스했다. 사람을 잡아먹을 듯 커다란 입이 재경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이 벌렸다.

좋아하는 부분을 혀로 쓰다듬으니 금방 반응이 왔다. 오랜만이라서 배가 고플 테니 류제도 어서 가주고 싶었다. 키스와 함께 사정한 류제는 질척하게 젖은 재경의 페니스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사정을 도왔다.

“흐으윽……!”

짜릿한 쾌감에 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큐버스의 특징인가 재경 본연의 특징인가 쾌감에 약했던 그는 머리가 가벼워져 축 늘어졌다. 아직 허기가 가시지 않았기에 끝난 건 아니다.

“더 해줘.”

“알았어.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해줄게.”

이번엔 서로 마주 보며 애무를 하는 류제가 재경에게 잇자국을 내었다. 끌어안고 응석을 부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기분은 조금 풀린 모양이다.

일주일 만에 한 정사는 만족도가 높았다. 재경이 그를 원했듯 류제의 갈구는 썩 마음에 놓였다.

류제의 마음이 여자가 더 좋다고 바뀐 거면 어쩌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했던 것들은 배가 차오르자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그래서 그건 누구야?”

“뭐가?”

정사가 끝난 후 재경을 끌어안고 쪽쪽거리던 류제가 되물었다. 전혀 생각나는 게 없는 모양이다. 재경은 바람난 부인 추궁하듯이 땍땍거렸다.

“오늘 다 봤어. 어떤 여자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류제 주제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살갑게 대화한 데다 그 여자의 장난을 받아주기까지 했다. 8반 여자애들이면 몰라도 정말 난생처음 보는 여자였다.

영문을 몰랐던 류제가 머리를 굴렸다. 어떤 여자? 오늘? 그야 아가타로 돌아온 그가 우연찮게 만난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난 또 무슨 이야기 하나 했네. 누구긴 누구야. 아세미지.”

“아…아세… 뭐?”

아세미 신리. 류제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여동생 말이다. 4년여 전 어빌리티가 발현해 현재 17살. 제립학교 학생이라서 고아원에서 나와 류제처럼 아가타에 있었다.

재경도 분명 아세미가 제립학교 기숙사에 산다는 말을 들었었다. 올해 입학식 때는 공연 일정과 겹쳐서 못 갔는데…….

그 조그맣고 땍땍거리던 아세미가 어른이 되었다고? 재경은 도저히 매칭시킬 수 없는 성장력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검은 트윈테일 아가씨가 아세미? 어른스럽게 웃던 여자가 고집부리고 떼쓰던 아세미? 누가 고무찰흙에 비벼서 늘린 거야?

“아세미가 왜? 아가타로 돌아왔다가 잠깐 만나서 용돈 좀 줬는데.”

어찌 되었건 그가 했던 짓은 바람난 남편을 붙잡으려는 애절한 노력이 아니라 하찮고 쪼잔한 질투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굴이 시뻘게진 재경은 그대로 목욕을 하겠다며 도망쳤다.

어안이 벙벙하던 류제는 설마 질투한 건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아세미랑? 일주일간 함께 있던 니냐롯트도 아니고? 너무 귀엽잖아!

“…그래서 날 때린 거야?”

같이 목욕하러 들어왔다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한 대 맞은 류제가 물장구를 쳤다. 재경 말로는 뭐든 바람을 피웠다는 기분이 들었으니 기분이 나빠져서 때렸다는데 기분 나쁠 일이 없는 류제는 재경을 품에 안고 비비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커다란 욕탕 안에서 기분 나쁨을 열렬하게 피력하는 재경은 뒤에 있는 류제의 볼을 쭉쭉 꼬집으며 불평했다.

“넌 너무 쓸데없이 잘생겼어. 그래서 자꾸 아세미 같은 얼빠들이 꼬이는 거야! 진짜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데.”

“네가 이 얼굴을 좋아하잖아.”

류제가 그때부터 계속 짧은 상태인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론 이 감탄이 나오는 얼굴은 언제 봐도 좋기는 하다. 재경이 투덜투덜 입을 비죽거렸다.

“아… 조…좋아하기는 하는데. 난 아세미랑 다르게 딱히 널 얼굴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의도치 않게 기쁜 말을 들어버린 류제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끄러움이 많은 재경은 그더러 직접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손에 꼽았다.

“내 얼굴 말고 다른 데도 좋아해? 어디가 좋은데?”

“어? 어어? 아니, 뭐… 아, 대충 뭐 그런 거 있어!”

“대충 어디?”

“너…너는 내가 꼭 다 말해줘야 아냐? 이 천 년 묵은 요괴 할아버지야. 나보다 더 경험이 많잖아. 알아서 알아차려!”

“뭐? 푸하하.”

귀여운 말에 감동한 류제가 재경에게 키스했다. 능숙하고 여유로운 태도라 굳이 아세미가 아니더라도 재경은 수많은 세월 동안 그를 스쳐 갔을 무언가들에 속이 터졌다.

“그거 알아 렌? 지금 내 몸은 너밖에 몰라. 네가 나밖에 모르는 것처럼.”

그런 마음을 안 건지 류제가 젖은 지푸라기가 된 재경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속삭였다. 속내를 들키자 쭈그러든 재경이 중얼거렸다.

“닥쳐라…….”

“부끄러워하지 마.”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거든?”

“너 부끄러워하면 귓불이 빨개지는 거 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말해줬나?”

류제가 말랑말랑한 귓불을 꼬집었다. 옛날 류제가 말했던 이상형을 떠올린 재경이 그갸가각 물을 첨벙거렸다.

머리에 열이 올라 더 이상 참지 못한 그가 욕실에서 도망쳤다. 뒤따라 나오는 류제에게 오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류제는 기어코 따라 나와 재경에게 가운을 입혀주었다.

“비키가 알려준 만화책은 재미있었어?”

“아, 진짜! 너 다 알고 나한테 그러는 거지?”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걸.”

장난기가 돋았던 류제가 재경을 끌어안고 변태처럼 웃었다. 어쨌든 류제에게는 여전히 재경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그를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좋았어. 나도 오늘은 힘내서 밤에는 내가 좋다는 말이 나오게 해줄 테다.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놀러 왔어요!”

“어?”

“아.”

잠가두지 않았던 대문이 벌컥 열렸다. 신이 났던 류제는 아까 만난 아세미가 놀러 오기로 한 걸 그대로 잊어버렸다는 걸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막 목욕탕에서 나온 두 사람의 소름 끼치는 애정 행각에 손바닥으로 제 볼을 찰싹 친 아세미가 저택이 떠내려가라 비명을 질렀다.

평화로운 한때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완결)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5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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