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삭월. 백 년 월계수(Laura)]
어때, 이야기는 재미있었어? 히로인이 아닌 사람과 이어지는 것도 꽤 멋진 결말이네. 도전은 해봐야 한다니까. 어디선가 더 좋은 결과가 튀어나오곤 하니.
아차, 내가 너무 허물없이 다가갔나? 너희들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해서 그만. 무턱대고 아는 척하는 건 내 나쁜 버릇이지.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해. 우리끼리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니 소개부터 해야겠다.
만나서 반가워. 로라 하놋이야. 나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을 테지. 100년 전 마왕에게 은의 말뚝을 꽂은 인류의 영웅이자 마족들의 원수. 무소부지의 여인. 순간 이동 어빌리터. 별명이 참 많구나.
나에 대한 것은 ‘시크릿 엔딩’을 보지 않는 이상 밝혀지지 않아.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다가 마지막으로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나왔어. 내 이야기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거든.
하지만 지금 소멸하는 내게는 시간이 촉박해서 시크릿 엔딩을 처음부터 완벽히 보여주긴 힘들어. 그러니 부분 서술로만 접근한다는 점 유의해 줘.
궁금하지 않다면 이번 이야기는 건너뛰어도 상관없어. 두 사람이 말하지 못한 과거의 추가적인 설명일 뿐이라 아주 지루할 거야. 그만큼 가벼운 말투로 접근하는 건 너그럽게 봐줬으면 해. 너희도 진지한 건 재미없잖아.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을 메타 픽션으로 접근하는 점도 양해해 주길 바라. 남성향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빙의한 BL 소설의 주인공 ‘신재경’이 사는 세계도 말하고 싶거든. 물론 이 세상이 게임이 아닌 소설 속이라는 건 우리들만의 불문율로 하고. 나도 나라는 존재를 게임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할 테니 부탁할게.
나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가 게임이라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알았어. 여기서 ‘태어난다’는 건 게임 속이 아닌 세계에서의 이야기야.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가 지금은 없어진 인디 개발사가 제작한 게임인 건 알고 있니? 스토리는 그럭저럭하고 버그가 많은 조잡한 프로그램이지. 캐릭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소수 있었지만 다른 게임처럼 평범했어.
우리의 세계는 컴퓨터 1만 대 가까이에 설치되었어. 하지만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미연시야 다 그렇듯 게임이 끝나면 그대로 끝인 거잖아? 불법 복제도 만연하게 이루어져 설치와 삭제가 반복되며 소멸의 길을 걸었지. 1년에 수만 개의 게임이 쏟아지고 모바일로 전향하는 시대에 누가 오래된 PC 미연시를 기억하겠어.
그래도 미연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보니 나름 인터넷 위키에도 등록되고 썩 마무리는 괜찮았지. 미니 게임을 추억하며 이따금 플레이하는 사람도 종종 있고.
나는 그중에서도 어떤 인간이 USB에 불법으로 복제한 파일에 있던 로라 하놋이야. 감동적이게도 그 인간은 우리를 아주 좋아했지. 물론 다른 게임보다는 덜했지만 우릴 추억해 준다는 게 어디야. 그에 만족했던 나는 평생 그 USB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어.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고물 PC에 설치되었지 뭐야. 새로운 세이브 파일로 완벽히 새로 시작하는 그 기분이란 참 뿌듯하지.
EXE를 누르자 우리 세상은 다시 구축되었어. 주인공과 히로인들은 새 플레이어에게 열심히 준비한 이야기를 보여주었지. 하지만 상상력이 담긴 세계라도 게임이 꺼지면 폴더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둘러쓴 숫자에 불과하잖니.
정해진 대로 대사를 치고 정해진 선택지를 고르고 정해진 곳을 가기만 하지. 나도 그렇고. 늘 하던 것처럼 무엇도 바뀌지 않았어. 모든 것을 안다고 한들 내게는 선택을 바꿀 능력이 없었으니까.
왜 나만이 이곳이 게임이라는 걸 알았을까. 제작자가 내 캐릭터 설정을 그렇게 잡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줘. 상상력의 산물이랄까. 우리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준 신재경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조금 씁쓸하게 여기고 있었나 봐.
신재경이 우연한 사고로 죽고 그의 부모는 더 먼 과거에 무고한 사람을 위하다 사망했지. 그에 대한 신의 보답인가 그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들의 세계로 인도되었어. 죽어서도 자식이, 손자가 고통받지 않고 소원을 이루길 바라 마지않았다니 눈물 나는 사랑 아니겠니.
빈정거리는 거냐고? 똑똑한 친구구나. 외롭게 죽은 그에게 기회를 준다는 좋은 의도였겠지만 나는 처음엔 그게 탐탁지 않았어. 뭐든지 알지언정 그건 게임에 관한 것이지 신재경의 바탕까지는 권한 밖이었거든.
규칙대로 움직이는 게임 속 세상에 갑자기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버그가 찔끔찔끔 이야기를 바꾸는데, 난 늘 고통받던 렌 지미가 날 원망하다 못해 고장이라도 난 줄 알았지 뭐야.
뭐, 미나 플로리아가 악몽을 남겨주고 간 덕분에 나도 간신히 그의 과거를 보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마는.
고작해야 데이터 쪼가리들이었던 우리들이 진짜 육체와 의지를 가지고 하나의 평행 세계가 되어 리셋과 세이브와 로드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놀라워. 지금의 나는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있어.
내가 게임상 렌 지미의 전생이라고 말했던가? 닮은 건 생김새뿐이지만. 비화를 말해주자면 처음엔 우리는 아무 연관이 없는 캐릭터였어. 개발 과정에서 설정을 억지로 쑤셔 넣었거든. 둘 다 주요 인물도 아니고 일러스트를 재활용할 필요가 있어서 내 양 갈래 머리를 뗀 삼류 악당 버전의 학생을 제작한 것에서부터 시작했지. 어쩌다 전생이라는 설정도 붙고.
개발자들이 전생 관계라는 설정을 이은 방법도 참 웃겨. 내가 모든 것을 알았듯 렌 지미의 실제 어빌리티도 ‘예지’거든. 다만 한 달 동안 일어날 특별한 일을 꿈에서 겪고 나쁜 짓으로 이용하려다 실패하는 불쌍한 캐릭터지. 물론 스토리에서는 필요 없어 결국 삭제된 설정이야.
하하, 너희들이 지금 내게 하고 싶은 말 하나를 골라볼게. 렌 지미는 내 후생이니 렌 지미의 어빌리티도 ‘순간 이동’이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뭐, 이동은 했잖아. 신재경이 게임 속 세상으로.
농담이고. 어빌리티는 피를 이은 드래곤의 종류와 처음 발현할 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라 영혼이 같아도 다를 수 있어. 뭐? 그럼 수마의 군주가 봤던 옛날 마왕이 살았던 마을 풍경에서 나온 히로인들의 전생 모습은 뭐냐고? 순수하구나! 그야 그들이 히로인들의 전생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게임 속 장치일 뿐이지. 우연이야, 우연.
그런데 류제 신리만큼은 그 규칙에서 예외야. 그는 주인공답게 현세에서 가장 진한 드래곤의 피를 이은 자니까. 아주 옅은 용인의 피를 가진 우리처럼 능력이 마음에 따라 흔들리지 않아. 전생해도 혼에 운명을 타고난 거지.
사설이 쓸데없이 길었구나. 너희들이 알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내가 시크릿 엔딩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키워드들이야. 마왕, 어빌리터, 마족, 기간트리카, 드라코니스 입자, 드래곤. 이 세계를 이루는 독특한 키워드들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지. 마족의 시초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많이들 들었지?
신재경은 시크릿 엔딩을 못 봤으니 지금부터 내가 어빌리터란 무엇인가, 마족이란 무엇인가 그 뿌리를 자세히 알려줄게. 그래야만 내가 왜 마왕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전생시켜 인간과 어울리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테고 그게 바로 시크릿 엔딩의 시작이거든.
렌 지미가 제립학교에 입학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처음 눈을 뜨기 이전에는 그가 이 게임에 빙의할지 몰랐음을 염두에 두고 들어주길 바라.
아주 먼 옛날, 떠돌이 인간들에겐 문자가 없던 시절이 있었지. 신화시대라고 부르자. 그땐 이 세계에 용이 살았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드래곤이라고 불린 그들은 세계에 떠도는 드라코니스 입자들이 응축된 정령이야.
그들에게는 혼이 없어. 따라서 생명을 가진 것들처럼 윤회하지 않아. 그저 세계의 순리를 따르며 존재할 뿐. 정령인 그들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언제나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이따금 재해를 내리거나 은혜를 베풀었지. 마치 자연 그 자체처럼 느껴지지 않니?
하지만 언젠가 인간이라는 독특한 존재는 기어코 기적을 만들어냈어.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인 용인이 태어난 거야. 용인은 드래곤을 닮은 파충류의 붉은 동공과 뿔과 날개를 가졌지만 피부와 생김새는 인간을 닮았다고 해.
그것들은 드래곤과 다르게 혼을 가졌지만 인간과는 다르게 파괴당하기 쉬운 핵의 형태였어. 어빌리터와 유사하게 남자 용인은 불안정해 혼이 정착되지 않는 경우가 잦아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주 오랫동안 흘러 자연의 상징이던 드래곤은 자연을 차지하고 싶은 인간에 의해 멸종했어. 정복자들에 의해 드래곤은 공기 중에 흩어져 다시 드라코니스 입자가 되었지. 그렇게 신화시대가 끝났어.
드래곤과 인간을 모두 닮아 혼을 가졌지만 윤회할 수 없는 용인이 자연과 인간을 이으며 새롭게 추앙받았어. 하지만 드래곤이 없는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외로웠어. 끝이 있는 생은 쉽게 스러졌거든.
결국 다름은 두려움을 낳았고 인간들에게 지친 용인들은 외로움에 질려 스스로 핵을 파괴했어. 불멸의 삶이 불러온 지루함 탓이지.
오랜 시간이 흘러 그들도 드래곤의 발자취를 똑같이 따랐어. 핵은 혼과 같으니 혼이 파괴당한 그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드라코니스 입자가 되었지.
자연의 힘을 따르는 주제에 인간의 감정을 가져버린 용인이 안쓰러웠던 마지막 드래곤은 어떤 용인에게 윤회를 흉내 낼 수 있는 도구를 주었어. 하지만 그건 용인이 인간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어.
모든 드래곤과 용인이 소멸했을 때 마지막 남은 용인, 마왕의 전생은 그것을 이용해 세상을 등졌지. 이렇게 해서 용인과 드래곤은 모두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고 해.
윤회의 말뚝은 제사의 도구로 남아 기억 속에서 옅어졌어. 인간을 좋아했던 용인들은 소멸하기 전 인간과 교제하며 수많은 자식을 낳았지. 그 아이들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대를 이으며 이따금 용인의 능력이 드러났어.
모습은 인간과 같았지만 기묘한 힘을 조종했던 드래곤의 피가 옅게 드러난 거야. 물론 용인의 비율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여성의 비율이 높았어. 이 기묘한 여자들을 사람들은 경외하다 두려워하고 배척했지. 글자가 생기고 농경이 번창할 즈음에는 그들은 통틀어 마녀라고 불렸다나 봐.
드래곤의 전승도, 용인도, 이능력의 뿌리도 잊어버린 채 진짜 모습을 망각한 마녀들과 극소수의 남자들은 인간들의 시선을 피해 용인의 피를 이어나갔지.
그리고 먼 옛날 윤회를 택했던 마지막 용인이 오랜 방황 끝에 다시 태어났어. 그는 배척과 외로움의 연쇄에서 용인으로 각성해 인간을 저주했지. 친구라 믿었던 인간에게 배신당한 것이 계기야. 비밀을 털어놓았던 그는 친구의 가벼운 입으로 인해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살해당했거든.
용인은 본디 인간을 사랑했지만 그는 인간에게 증오를 품어버렸어. 복수를 꿈꾼 그는 드래곤의 향기를 잊어버린 마녀들에게 새 육체를 일깨워 주었지.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삶의 의지야. 그 욕망을 바탕으로 드라코니스 입자가 더 강하게 반응해 뛰어난 마족이 태어나는 거거든.
증오로서 용인의 피를 일깨운 마녀들을 인간은 마족(魔族)이라고 불렀어. 인간을 미워하는 드래곤과 인간의 하프를 마왕이라고 불렀지. 마왕은 배신당한 그 미움 때문에 무려 900여 년간 인간들을 사냥했어.
덕분에라고 말하기 이상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이 배척하던 마녀들에게서 마족들을 물리칠 가능성을 찾았어. 드디어 그들이 잊어버린 힘인 드라코니스 입자에 주목한 거야.
엉성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마녀만이 조종 가능한 기간트리카라는 물건을 만든 인간들은 힘을 합쳐 마족을 물리치기 시작했어. 인간에 의해 마녀가 마족이 되고 그걸 또 마녀들이 토벌하다니 아이러니하지.
그런 싸움이 팽배했을 때 나는 태어났어. 이때 태어나다라는 건 게임 세계관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야.
난 태어날 때부터 이상했다고 해.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자주 중얼거렸다나. 나는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던데.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어. 너희 모두 어빌리터의 척도를 계산하는 기계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어빌리티로 드라코니스 입자를 얼마큼 자극할 수 있느냐를 나타내지. 그 수치가 높을수록 인류가 개척하지 못했던 미래로 갈 수 있었지.
나는 그걸 이용해 ‘류제 신리’라는 가능성을 찾아내었어. 마족들의 뿌리가 궁금해서, 마녀의 뿌리가 궁금해서, 내 능력의 뿌리가 궁금했던 나는 결국 드래곤이라는 진리까지 도달했거든.
내가 어디로든 갈 수 있기 때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마왕을 배신한 원죄 때문에 그런가. 나는 모든 것을 알았어. 알 수밖에 없었어.
나는 계획대로 아주 오래전에 소실된 은의 말뚝을 찾았지. 족쇄에 얽히고 만 그를 놓아주고 싶었어. 본디 자유롭던 그는 구백여 년간 이어지는 괴로움으로 몹시 지루할 거야. 증오하며 미워하는 건 상냥한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거든.
그 말뚝을 품에 숨긴 나는 마왕성으로 갔어. 내게 있어서 리엔달로니아 협곡은 우스운 장벽이었지.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성에 있을 그와 마주하러 가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리더라. 콧노래가 나왔어. 결전의 날은 맑았지만 마왕성은 독한 마기의 그림자가 졌지. 나는 목숨을 각오했어.
내가 세운 계획이야말로 마왕의 욕심으로 생긴 마족들을 놓아줄 유일한 방법이야. 인류를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아니, 장황하게 이 세계를 위해서라고 하자. 실은 나라쿠바라 그를 위해서였어. 아차, 나를 위해서인가?
“잘도 그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는군.”
“후후, 나는 머리가 좋거든. 한번 본 건 잊어버리지 않아. 어빌리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능력이야. 망각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아서 그런가.”
그래서인가 나는 이따금 아주아주 먼 과거를 보곤 해. 나의 잘못된 말 한마디로 죄 없는 마을 하나가 멸망한 슬픈 때를.
오랜만에 그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지루해질 대로 지루해진 그는 왕좌에 존재할 뿐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지. 굴레에 갇힌 부자유와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던 거야.
“한때 존재했던 증오는 긴 시간 속에 침체되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과 지루함만이 남은 너는 왜 존재하는 걸까.”
나는 왕좌에 나른하게 기댄 마왕의 무릎에 올라탔어. 그는 나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 그의 생각은 완벽하게 알 수 없었어. 그가 날 보았을 때 든 감정은 뭘까. 증오? 복수? 허망함? 뭐든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어. 그를 제압해 그 감정을 직시하게 하고 싶었거든.
“후회하니? 천 년 전 인간들에게 용서 못 할 증오를 내보였던 것이.”
“전혀.”
마왕은 단호하게 말했어. 샐쭉한 붉은 동공은 동요가 없어서 두려울 정도야. 나는 용서를 잊어버린 그가 불쌍해서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어. 그가 눈을 좁혔어. 나라쿠바라는 따뜻한 인간의 살이 그리웠을 거야. 내가 그의 몸에 기어올라도 마왕은 무엇이든 해보라는 듯 자유롭게 방치했지.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 없겠지. 너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걸 감히 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하튼 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네가 고통받는 그녀들을 구해주려고 했듯 나도 널 구해주고 싶었어.
나는 굳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부담스럽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네게 말해줄 수 있어. 이건 순전히 너의 공이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나의 먼 과거의 실수조차 필연이었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면 어빌리터는 여전히 마녀였을까. 응? 나라쿠바라, 너는 알겠니?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하하, 그렇지.”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 슬퍼서 웃었어. 증오에 침체된 나머지 그 시작점마저도 되짚을 일이 없는 걸지도 몰라.
마왕은 나의 얼굴 또한 쓰다듬었어. 아닌가? 역시 그 배반과 증오의 시작은 절대 잊을 수가 없을까. 원죄가 아프다.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거든.”
나는 숨기던 말뚝으로 마왕의 심장을 찔렀어. 내가 인간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것을 꺼내 들 줄은 그도 몰랐겠지. 심장을 찔린 그의 육체에서 혼이 빠져나왔어. 이로써 내 계획이 시작해.
“아프니? 죽을 만큼 아프지만 진정으로 소멸할 수 없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의 아픔에 둔감해진다는 소리일까. 타인의 아픔에 둔감해진다는 소리일까.”
“하찮은 인간. 네까짓 것을 내가 죽이지 못할 것 같나?”
육체가 붕괴되는 중에도 마왕은 충분히 강했어. 내 몸은 마왕의 반항으로 갈기갈기 찢겼어. 쓸모를 다한 은빛의 말뚝을 떨어뜨린 나는 뒤로 물러서며 웃었지. 미완성작인 ‘힐링 팩터’로 시간을 벌지 않았으면 정말로 죽었을 거야. 게다가 마왕성의 마기는 숨을 쉴수록 나를 갉아먹었거든. 웃고 있었지만 고통스러웠어.
“다음에 뚫는 것은 네 심장이 될 거다.”
“후후후, 바로 죽이지 않다니 상냥하구나.”
시간이 부족했어. 마기와 힐링 팩터의 부작용으로 난 점점 숨이 가빠져 왔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힐링 팩터를 꽂았어. 인간들은 마기에 오염된 식물에서 이런 것을 발명해 버렸구나.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걸까. 뭐든 마왕의 혼을 받아가기 전까지 난 물러서지 않을 테지.
“너는 100년 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거야.”
난 무너져 내리는 그에게 예언을 말했어. 마왕인 그가 처음에는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졌던 것처럼 그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름은 류제 신리가 되겠지. 천여 년 전 과거와 다르게 어빌리터들이 고통받지 않는 시대에 그는 인간과 어울리며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해.
“인간에게 기회를 줘. 너는 분명 인간을 사랑하게 될 테니까.”
“그럴 리 없어.”
자꾸 외면하면 상처는 치료되지 않아. 나는 내 잘못과 마주한 결과 이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여겼어. 그에 대한 대가로 나도 죽겠지. 죽어서 전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몸으로 인간인 그와는 두 번 다시 어울릴 수 없다면 그것대로 슬퍼.
“나랑 내기를 하나 해.”
물론 이길 자신이 있는 내기야. 나는 충분히 모든 것을 계산했지. 다시 태어난 그의 곁에는 상처만 주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그에게는 다양한 기로가 주어질 거야. 인간을 사랑하는 건 그의 선택이겠지만 나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이게 기회를 줄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해.
“네가 다음 생에서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면 내 승리야.”
내 말을 들은 마왕은 코웃음을 쳤어. 두 번 다시 인간을 믿지 않기로 한 것 같아. 하지만 이게 내 유일한 속죄이자 희망이었던지라 놓칠 수 없었지.
“내가 이기면 네가 널 위해 붙잡고 있는 마족들을 놓아주기로 해. 네가 이기면 너는 인간을 차지하는 거지. 멸망시키든 아니든 네 멋대로 해도 좋아. 어때, 잠깐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즐거운 유희라고 생각하지 않니?”
“하하하, 시건방진 인간이군. 감히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가?”
나는 답하지 않았어. 펠노아에서의 전투에서 기간트리카가 없었던 인간들이 승리한 이유가 뭔지 알아? 상냥한 키아나트리체의 초대 황제가 한 마족의 증오를 없애주었기 때문이야. 증오가 없다면 마족은 존재할 수 없어. 마왕이 그렇게 만들었거든. 그래서 나도 그의 증오를 없애주어 마왕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게 되길 원했어.
“하하하!”
그때 날 보고 마왕이 정말 유쾌하게 웃었지. 지루함과 따분함과 정체된 이 감정을 쾌적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내가 누구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제안이 그에게는 좋은 여흥이기는 해. 그것을 자극한 것도 계획 내였지.
마왕의 육체는 끝내 소멸했어. 이대로 둔다면 이 나라카의 마기에 혼이 갇혀버리겠지. 그것을 품은 나는 서두를 필요가 있었어. ‘힐링 팩터’의 부작용이 점점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가고 있는 데다 마왕의 소실을 느낀 마족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거든.
첫째로 등장한 병마의 군주,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내게 덤벼들었어.
“마왕님이 죽었다! 저 인간 여자에게 살해당했어. 인간 주제에! 위대하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 왕을, 사랑하는 나라쿠바라를!”
그때 나라카나 인계 어디에서든 마족들이 마왕의 죽음을 느끼고 울부짖었을 거야. 병마의 군주도 그랬거든. 연이어 나타난 화마의 군주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덤벼들었지만 율폰의 과거도 알고 있는 나는 그의 핵의 위치를 손쉽게 파악했지.
그도 이야기에 필요한 존재였기에 나는 핵을 완벽하게 파괴하지는 않았어. 특히나 저 네 마족의 과거는 인간으로 태어난 마왕이 반드시 마주해야 했어.
나는 달려오는 미나 플로리아를 흘기고 어빌리티로 유유히 마왕성에서 빠져나왔어.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힐링 팩터의 부작용이 심각해서 척도가 높은 나만이 국가의 허락을 받고 쓸 수 있었어.
위험할 때가 아니면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약조했지만 어쩔 수가 있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허락받고 가져온 것인걸. 어차피 내 몸은 어빌리티의 대가로 무너지고 있어서 괜찮아.
이제 백 년 후, 인간으로 태어난 그는 각각의 상처를 품은 다섯 명의 소녀와 만나 아픔을 치료하는 법을 배울 거야. 그들과 함께 과거를 극복하며 인간들을 구원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어.
왜 적에게 이런 짓까지 하냐고? 천 년 전, 마왕을 배신하여 그의 마을이 불태워진 건 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거니까. 혼에 박힌 죄책감이 이런 길을 만든 건지도 모르지.
맞아. 그때 그를 배신해서 마을이 멸망하게 만든 게 바로 나야. 같은 마녀였던 나는 정체를 숨기지 않는 그가 부러워서 실수하고 말았어.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지. 이걸 기억하는 것이 나의 또 다른 대가.
마왕을 풀어준 나는 사랑스러운 여동생 사라에게로 갔어. 몸이 무너지면서도 마지막으로 어빌리티를 사용했지. 사라는 내가 말한 대로 기다리고 있었어.
사라는 착한 아이야.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가 항상 날 어려워했지만 분명 이 애도 좋은 어빌리터가 될 거야. 그걸 보지 못하겠지만 나는 감시자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그녀에게 쥐여주고 작별 인사를 했어. 내 온몸은 부서져 내렸어.
“왜 언니만 이렇게 희생해야 하는 거야?! 왜? 그놈들이 언니한테 뭘 해줬다고!”
“사라, 불행이란 누군가의 교활함으로 이루어지듯 행복이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거란다.”
“난 못 해. 난 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예언이란 게 뭐야? 언니가 죽인 마왕이 부활한다니 그게 뭐냐고! 왜 나한테 이런 어려운 걸 맡기는 거야.”
“부탁해, 사라. 실패 없는 성공은 없지. 나는 한 번 실패하는 거야. 성공을 위한 발판을 위해서. 알겠니? 네가 성공을 만들어.”
사라는 내 계획을 허무맹랑하다 여겼어. 무려 백여 년이나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거잖아.
내 계획이 성공할지는 마왕 본인의 손에 달려있지만 기회 자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가 고민할 때이면 사라가 나 대신 좋은 길로 인도해 주기를 바랐어. 난 내기에서 꼭 이기고 싶거든.
마왕이 인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인계 전체에 퍼지고 나도 사라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했어.
백 년 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마왕은 그의 업보 때문인가 부모가 마족에게 살해당하고 신부에게 거두어져 고아원에서 자라나게 됐어.
용인의 혼을 가진 그는 조금 이상한 아이였지. 고아원에 처음 발령받은 수녀 루나 에펜시타르가 그를 처음 봤을 때는 무관심함을 넘어서서 생명을 경시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돌봐준 그녀의 사랑은 깊었어. 진심이었지. 같은 인간으로서 존경할 정도야.
어느 날 새로 들어온 두 살배기 새로운 여동생을 멀뚱히 쳐다보던 류제에게 수녀 루나는 물었어.
“왜 아세미가 울고 있니?”
“넘어졌어요.”
“왜 넘어졌어?”
“밀쳤거든요. 자꾸 귀찮게 해서.”
그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우는 동생 곁에 끝까지 있어주었어. 그걸 본 루나는 오히려 그에게 따뜻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이따금 뒷동산에서 방황하다 고아원으로 들어와 방에서 같이 자곤 하는 떠돌이 개와도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 개에게는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지 않냐며 묻자 류제 신리는 답했지.
“개는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꼬리가 저절로 움직이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모르겠어요. 숨기고 도망쳐서 복잡해.”
“사람은 훨씬 세심하기 때문이란다. 사람은 개보다 더 많이 관찰해야 해. 무엇보다 나와 다르더라도 이해하려는 자세가 중요해.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똑같이 널 이해해 줄 거야.”
그의 어린 시절은 이런 이야기의 반복이야. 그런 사랑 덕분일까, 그는 조금씩 변화했어. 마을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같은 고아원 남매들과도 평범하게 어울렸지. 그 마왕이 인간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거야.
때가 되자 내가 예견했던 대로 그도 용인의 혼에 영향을 받은 어빌리티를 발현했어. 그때 즈음엔 그의 여동생도 그를 몹시 따랐지.
제립학교에 입학 전 그는 파견 나온 사람을 따라 어빌리티를 측정하고 어빌리티의 이름을 부여받았어. ‘강화’. 어둠의 드래곤은 육체의 힘을 관장하니 직계와 어울리는 능력이야.
나라의 부름을 받고 키아나트리체의 수도 아가타에 있는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그는 오랜 추억이 담긴 고아원에서 벗어날 짐을 꾸렸어. 처음 수도로 홀로 나서는 두려움이 반, 기대가 반이었던가.
어릴 적에는 그를 무서워하던 아세미가 이제는 그가 영영 떠나는 게 아닐까 무서워 울며 결혼 약속을 강요했어. 정말 귀여운 꼬마야. 류제 신리는 그녀가 귀찮았던 건지, 그런 여동생이 이제는 귀엽게 보였던 건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지.
고아원 가족들의 배웅을 받고 기차를 탄 그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한때의 적국의 수도로 향했어. 드넓은 아가타의 전경을 보고는 감탄을 내질렀지. 망가뜨리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인간의 도시가 아니겠니.
지하철을 갈아탄 그는 심심한 나머지 어떤 남학생을 몰래 흘겨보고 있었지. 루나의 말대로 인간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을까?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매력적인 소년은 졸다가 깨어나 헛소리를 하다가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까칠한 소녀와 말다툼을 했어. 그는 그들의 명찰을 확인했어. 그와 같은 제립학교 1학년이었지. 소녀가 떠나자 그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말을 붙였어.
“와, 역시 수도는 사람 인심이 무섭구나.”
“……? 뭐야 넌. 나랑 아는 사이냐?”
“미안. 너도 나랑 같은 제립학교 입학생인 것 같아서. 교복을 입고 있으니까. 맞지? 이름이… 렌 지미?”
“넌 또 뭔데 나한테 시비인데?”
고아원 사람들과 달리 까칠한 반응에 조금 당황했지. 그가 살던 마을에는 또래가 거의 없었던지라 미들 스쿨도 학생이 대여섯 명이 전부였어. 어린 시절보다는 성장했지만 남들에게 관심이 부족했던지라 그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되지 못했어.
아가타에 온 기념, 고아원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결심했던 대로 저 소년과 친구가 되어야겠다 먼저 손을 내밀었어. 그래서 굉장히 어색한 대사를 내뱉고 말았지 뭐야.
“내 이름은 류제 신리야. 류제라고 불러줘. 난 렌이라고 부르면 되나?”
“류… 류제?”
“다행이다. 주변에서 어빌리티가 발현되는 사람은 여자밖에 없다고 해서 나만 남자일까 걱정했거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랑 친구 해도 되겠니?”
“아… 뭐, 좋아.”
소년은 류제 신리의 손을 흔쾌히 잡아주었지. 그때부터 모든 것이 엇갈리기 시작했을 거야. 그리하여 류제 신리는 붉은 그녀보다 까칠하고 푸른 그녀만큼 인간에게 에 상처받았으며 녹색 그녀만큼 사람들을 미워했고 잿빛 그녀처럼 상냥하고 금색의 그녀처럼 미래를 해피 엔딩으로 이끌 그 소년을 만나버린 거겠지. 두 사람의 악수야말로 이 세상이 겪지 못한 운명의 시작이야.
엔딩 전에 렌 지미가 죽었다면 우리는 연결 고리가 끊겨 하찮은 게임 속 캐릭터로 전락해 처음으로 돌아갔을 거야. 하지만 우리 세계는 신재경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생명을 되찾았어.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류제 신리처럼. 세상을 만들어준 자에게 찬사를 보낼게.
이야기가 길어졌네. 이제 너희들이 풀지 못했던 궁금증은 풀렸니? 풀리지 못한 게 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내가 이걸 말해준 이유는 너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었고 또 이제부터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두 사람에게 이런 설명이 필요한 사건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야.
그럼 정말로 안녕. 귀여운 재경이의 해피 엔딩을 축하하며 이만 갈게. 신재경이 되어버린 렌 지미의 영혼에 붙어있는 작은 사념 덩어리지만 전생이 있는데 후생의 영혼이 떠다니는 건 좀 모양새가 빠지잖아.
그럼 여러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커튼콜로 막을 내립니다. 모두 즐거우셨기를. 혹시 모르지. 기다리다 보면 어쩌면 앙코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