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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6) (77/112)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6)

펄럭이는 커튼은 환상을 풍경으로 담은 창문을 희롱했다. 언젠가의 교실 전경이 문득 있었다. 항상 그의 자리였던 창문 옆 맨 뒤에서 세 번째 자리. 학생들이 돌아가 아무도 없는 교실 안에 산란하는 오후의 태양이 어머니의 품처럼 그를 감쌌다.

[네 말이 맞았어.]

진녹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땋은 소녀는 그의 기억과 달리 동그란 안경을 쓰지 않았다. 재경이 알던 그녀와는 조금 다른, 표독한 기운 없이 누그러진 선한 인상에 분홍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부드럽다.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아. 그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나를 놓아주는구나.]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녀는 죽음으로써 자유가 되었다. 그걸 깨닫기까지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해치고 긴 세월을 붙잡혀 있었다.

착각과 오해로 시작되었던 복수는 처음부터 틀렸다. 깊은 속죄를 해야 하는 그녀는 마지막 죄만큼은 저지하고 싶었다.

“넌 괜찮은 거야?”

제 코가 석 자일 텐데 재경은 미나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어 제가 말하고도 어색해하는 그에게 미나는 상냥하게 웃고 말았다. 원망을 들을 법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구원받길 바랐던 것이다. 미나는 책상 위 재경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걸 깨닫지 못했던 나는 잘못된 길로 가버렸지. 이걸 마지막으로 난 먼 여행을 떠나야 할 거야. 어리석었던지라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네게는 전하고 싶었어.]

“…난 괜찮아.”

[그렇구나. 그렇게 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 너라면 분명히 그러겠지.]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다니. 그는 분명 사람들을 싫어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곳에 와서 극복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궁금했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던 한때 미나의 손길이 떠났다. 봄을 찾아 순례하는 나비를 붙잡을 수는 없다. 바람에 날리는 커튼이 대신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 고마워. 잘 있어.]

주변이 바래지며 시야가 점멸했다. 그녀에게 손을 뻗은 재경은 멀어지는 이 거리가 영영 줄어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안녕. 재경의 입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가 맴돌았다. 그녀가 마침내 세상을 향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 * *

“헉!”

어느 순간 양쪽 눈이 번뜩 뜨였다. 언뜻 붉은 기운이 서렸던 동공이 빛을 받고 검게 수축했다.

재경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아주 오랫동안 잠들었다 일어난 것처럼 상쾌하고 가뿐했다. 왜 하필 공주를 예시로 들었냐면 이전에 머물렀던 유네의 대저택보다 훨씬 화려하고 큰 공주가 쓰는 방 같은 곳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벽면에 금박으로 장식된 몰드와 그에 어울리는 정교한 가구가 호화로웠다. 한 세트당 집 한 채 값이라는 비키 어머니의 찻잔 세트와 비슷한 다기가 테이블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고요한 방 안 소음을 흡수하는 푹신한 양탄자는 밟는 것조차 황송할 정도로 세밀했다.

“뭐야, 여긴 어디야?”

한때 니냐롯트를 도왔던 새 한 마리가 짧게 울며 창문에 들렀다가 재경의 움직임에 날갯짓을 하며 사라졌다.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가 낯설었던 재경은 엉덩이가 푹 들어가는 침대 촉감이 어리둥절했다. 최근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던 지하철에서처럼 영문을 모를 감정과 비슷했다.

“우앗!”

무의식적으로 일어서던 재경은 순간 실수했다 착각하고 왼발을 들어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양발을 모두 바닥에 디뎌도 목발 없이는 걷지도 못했던 발목이 괜찮았다. 발만 아니라 매일같이 쑤셔왔던 온몸의 고통이 사라졌다.

“왜 안 아프지? 붕대…도 없어.”

움직이지 않았던 오른손을 들어보니 붕대가 풀려있었다. 어깨를 돌려보았더니 기름칠 된 로봇처럼 잘 움직였다. 실명했던 눈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상하다. 그는 분명 인류의 힘으로는 나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는 모두 그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결과인데 그 영광의 흔적이 사라지자 재경은 당황스러웠다.

마침 환복용 파티션 옆 커다란 전신 거울이 그의 시야에 닿았다. 쪼르르 달려간 재경은 거울 속 모습을 확인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항상 붕대를 휘감고 고통에 찌들어 초라해 보였던 몸이 보통 사람처럼 회복되어 있었다.

“이…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몸을 확인하던 재경은 이전 렌 지미와 다른 점이 보여 거울에 가까이 붙었다. 함몰되었던 오른쪽 얼굴 빛깔이 환하니 주근깨가 안 보였다. 그것 말고도 비대칭적이라고 생각되어서 자세히 봤더니 그쪽 눈동자 색도 더 연했다. 재생되면서 색소가 연해진 듯했다.

“뭐야. 도대체 여긴 어디고, 난 왜 여기에 있고, 류제 이놈은 날 두고 어디로 갔어?”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자가 류제였으니 그를 먼저 찾던 재경은 최후의 기억이 번뜩였다.

욕심이 많은 류제가 그가 볼 수 없을 긴 미래를 염두에 두며 칭얼거렸다. 그게 짜증 나 류제와 다투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솔직한 심정을 외쳤다.

지금 생각하면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어리석은 말을 한 재경에게 류제는 눈물을 흘리다 마침내 목을 물었다. 고통은 없었지만 그때부터 정신이 멍청해져서는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그러니까… 난 기억을 잃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기억이 수맥을 찌른 것처럼 샘솟아 올랐다. 류제나 다른 친구들에게 온갖 착각을 했던 어제까지의 그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꼴 보기 싫은 놈이었다.

“하아.”

깊게 생각하려니 민망해서 도리질을 친 재경이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꼼꼼하게 확인해 보려고 다시 거울을 보는데 밖에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인물을 본 재경이 뒷걸음치다 옆에 있던 화분을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무사해서 다행이군.”

“어…어?”

들어온 이는 단발로 머리를 자른 이 방의 주인이었다. 재경은 분위기가 바뀐 그녀를 금세 알아보았다. 기억을 잃은 그가 남의 관심이 두려워 학교 뒤편 쓰레기장 근처에 몸을 숨겼을 때 나타났던 금발의 여인은 역시 니냐롯트였다.

“왕녀?”

항상 긴 머리에 그녀의 아버지가 선물로 준 낡은 비녀를 꼽던 헤어스타일이 아니니 어색했다.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은 왕녀가 아니다만 꾸준히 그리 불러주다니 그대와 류제 신리는 비슷한 점이 많구나. 이러다 나는 그대들에게 평생 왕녀로 끝나겠어.”

황제의 붉은 케이프를 두른 모습을 봐도 여전히 왕녀라고 부르다니 어쩐지 귀여웠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시종들이 재경이 찬 화분을 바르게 세우고 더러운 것들을 쓸어 원상 복구시켰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에…….”

류제가 아니라 왕녀가 나오자 재경은 더 복잡해졌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질 만큼 깊게 자고 일어난 듯했다. 왕녀가 있다 함은 여전히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세계 속이라는 건데. 설마… 설마 이곳은―

“왕궁이야, 여기?”

“그럼. 그대는 와본 적이 없었던가. 반응이 신선하구나.”

“당연하지! 내가 왕궁에 올 일이 뭐가 있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난 분명 기숙사에 있었는데?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재경은 혈색 좋게 건강해 보였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진 니냐롯트는 재경의 기억과 달리 특유의 피곤한 무표정이 풀어졌다.

마족에 대한 부담과 걱정거리가 없어서인가 제립학교에서 최악의 최후를 보냈던 두 사람도 그때를 의식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야 오늘 그대를 군 법원에 데리고 가는 것이 나의 임무이기 때문이지. 사람을 시켜 보호하는 중이었다.”

“재판 아직도 안 끝났어? 난 뭐 몇 년 흐른 줄 알았네. 류제는 어디로 가고?”

“그자는 협약 위반 사항 문제로 다른 곳에 있다. 시간 맞춰서 재판에 올 것이니 걱정할 것 없어.”

협약 위반? 잠깐, 그러고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기억들만 들쑥날쑥 떠올랐다.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는 몰라서 반응을 못 했다만 류제 그 녀석, 마왕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남들 앞에서 보여주고 다녔지 않아?

게다가 왕녀는 지금 왕녀가 아니라 임금님이라고? 진히로인의 단발 일러스트는 진엔딩 때에만 해금되는데. 그럼… 그렇담.

“나… 성공한 거 맞지?”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 그대의 재판은 지금부터 시작이고.”

생뚱맞은 혼잣말을 지껄이는 재경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니냐롯트는 오늘 있을 중요한 일을 위해 왕실의 시종을 붙여주었다.

오밤중에 갑작스럽게 보고를 받고 새 마족을 감시한다는 명목하에 재경을 왕궁으로 데려왔던 니냐롯트는 류제 신리의 타이밍 선정 능력이 기가 막히다며 혀를 내둘렀다.

재경을 멀끔하게 씻긴 그녀는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혔다. 재경은 니냐롯트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재경은 제 발걸음을 구경했다. 목발 없이 멀쩡하게 걷는 걸음이 신기했다.

“기억은 모두 돌아온 건가? 류제 신리는 그렇게 말했다만.”

“어? 아니… 뭐, 그런 것 같은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나와 있었던 일도 기억하나?”

“뭐… 그때는 내가 좀 말이 심했다고는 생각해.”

“나야말로 그대의 의견을 받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재경은 니냐롯트와 마주한 이 상황이 떨떠름했다. 시한부였던 자신이 어떻게 나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앞으로의 일이 멀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감이 잘 안 났다.

“그런데 류제는 정말 이상한 일에 얽힌 건 아니지?”

“와보면 만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날 마땅찮게 생각하는 자들은 이 일로 꼬투리 잡겠지만 예상 범주 내의 일이라 수습할 수 있어. 그대의 자유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꼬투리? 뭘? 자유?”

“류제 신리가 그대를 마족으로 만든 것 말이다. 서로 합의가 된 사항 아니었나?”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재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점점 그녀를 따라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재경은 니냐롯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낫지 않을 그의 몸이 하룻밤 새 나은 것이 이상했는데 류제가 목을 무는 행위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은 재경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뭐어?!”

재경은 믿을 수 없다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족? 내가 마족이라고? 아니 잠깐만. 나는 뿔도 없고 날개도 없고 동공도 붉지 않았어. 아까 거울로 봤을 때는 평범한 인간 모습이었단 말야.

재경이 머리를 싸매며 혼란스러워하자 갈 길이 바빴던 왕녀는 시종들을 시켜 재경의 양팔을 들고 날랐다. 그러는 동안 패닉에 빠진 재경은 세상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건 절대 있을 수가 없다고! 내가 뭐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했는데. 류제 이 개자식, 진짜 뭐 하는 짓이야?!”

이상한 자세로 절규하던 재경은 왕녀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마족이 되었다는 현실에 사고를 정지했던 재경이 정신을 번뜩했다. 어느새 그가 도착한 곳은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키아나트리체 군사법원이었다.

그때까지도 현실 파악 못 한 재경이 사람을 따라 휘둘리다 문득 둘러보니 피고인석에 서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방청석에 앉은 니냐롯트는 재경에게 손을 흔들어 힘내라고 대신 전했다.

“아니, 진짜 뭔데?! 뭐냐고? 이래도 되는 거야?”

“렌! 너 어떻게 된 거야?”

“어…에?”

멍청해져서 듣는 것도 못하는 그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박혔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방학 중인데도 학생들이 방청석에 주르르 앉아있었다. 재경의 재판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가타 지인도 드문드문 보였다. 아니, 남 재판에 뭔 축제라도 일어났나 완전 만남의 장이다.

“어딜 보는 거야? 이쪽이야.”

“우악! 비키?”

오랜만에 만난 듯한 비키는 키아나트리체 양복 차림에 서류를 잔뜩 들고 있었다. 재판관에게 상처를 보여주어 동정심 작전도 고려했던 비키는 멀쩡해진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떻게 된 거야. 상처는 다 나은 거야? 류제가 방법을 찾았대? 당분간은 괜찮아? 다행이다. 재판이 길어지면 네가 힘들어할까 걱정했었거든.”

변호인석에 자료를 내려둔 비키가 긴장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은 평범한 복장인데 비키 그녀만 어른스러운 복장이라서인가 하나도 안 어울렸다.

“하필이면 재판 전날 류제는 무슨 사고를 친 거람?”

“나…나도 몰라. 그 자식은 왜 여태 안 보여?”

“그러게. 설마 재판 날짜를 잊어버리진 않았을 테고. 증인 명단에 있는 걸 보면 오기는 오겠지. 하아, 그 녀석 어제 기간트리카 부대에 붙잡혀서 끌려갔다는데. 뭐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었어?”

“어…어어, 몰라.”

재경이 얼렁뚱땅 넘어갔다. 설마 마족이 된 건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가? 날 어제 기숙사에서 왕궁으로 데리고 온 왕녀만 알고 있고? 아니, 왕녀 이 자식아! 멀리서 웃지만 말고 좀 어떻게 해봐! 재경은 정말 혼란의 끝이었다.

“렌 군, 재판 시작한대. 걱정 말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 비키 양과 내가 어제까지 진짜 열심히 변호 준비했으니까 괜찮아. 알겠지?”

단정히 차려입고 나온 유네도 재경의 손을 붙잡고 승리를 기도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재경을 지켜줄 차례라는 듯 두 사람은 각오를 다졌다. 긴장해서 재경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도 못 알아차린 모양이다.

“렌 군, 나는 뒤에 있을 테니까 힘들면 말해줘. 비키 양이 잘해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프면 휴정을 요청할게.”

“어… 그래.”

“지루하더라도 앉아만 있어. 내 말 잘 듣고. 알겠지?”

유네는 보조석으로 가고 어느덧 법정 위에 군 재판관이 들어와 앉았다. 그를 기소한 원고 군 검사가 들어왔다. 앞에는 공증한 증거들이 준비되었다.

위풍당당한 귀족의 포스로 무장한 비키가 군 검사과 대치했다.

해봤자 아직 미성년자인 학도병 출신의 탈영 재판이고 결과는 유죄에 가벼운 금고형으로 끝날 테지만 평소라면 방청객도 별로 없을 재판에 제립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황제까지 자리했다. 변호를 자처한 인물은 셀로니아 후작가의 영애였다. 재판관은 별일이라면서 사건 파일을 읽었다.

저 보잘것없는 소년을 니냐롯트가 보호에 힘쓴다는 소문을 듣고 허점을 잡아 물어뜯으려는 귀족파 잔재들도 반대편 방청석에 앉았다.

삼류 악당 렌 지미가 뭐라고 사소한 재판이 초유의 관심을 끌게 된 걸까. 싱숭생숭해진 재경이 부담감에 떨리는 숨을 삼켰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재판관이 망치를 두드렸다. 방청객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잦아들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을 직접 겪다니 엄청 긴장된다. 솔직히 이제 막 깨어난 병아리 같은 기분이라 현실감각이 떨어지는데 어리둥절한 정황이 연속되었다.

진짜 류제 이 자식아, 빨리 와서 나한테 좀 설명을 하란 말야! 재경이 속으로 절규하는 동안 재판관이 인정신문을 시작했다.

“사건 번호 638GD9574 피고 렌 지미 맞습니까?”

“예? 아, 네.”

“피고 렌 지미 본인이십니까?”

“그럼 본인이지 다른 사람… 으악!”

변호인석에 서있던 비키가 잽싸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판관이 뭐냐며 눈살을 찌푸리자 비키는 맞다면서 하하 웃었다. 눈으로는 재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기억을 잃은 그에게 보여주었던 미묘한 상냥함이 긴장으로 사라진 것 같다.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관에게 공소사실을 낭독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이라며 뭐라 뭐라 씨불이는데 집중해서 틈을 노리는 비키와 달리 재경은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래서 진짜 내가 마족이라고? 류제가 날 마족으로 만들었다고? 난… 지금 인간으로 의태한 미나와 같은 상태인 건가? 근데 마족이라고 해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인간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거 숨길 수 있나?

물론 내가 힐링 팩터의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지만 왕녀 루트의 진엔딩에서 류제는 왕녀와 결혼하면서 다시는 마족을 만들지 않겠다고 협약한단 말야. 그리고 둘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겠지.

그러면 될 걸 류제 자식은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혼자서 이상한 길로 가서 죄다 망치면 아무리 너라도 진짜 용서 못 한다!

“피고는 이 일이 사실임을 인정합니까?”

“네?”

“위의 사실을 인정합니까?”

“어~ 그건… 읍!”

딴생각을 하다가 공소사실을 전혀 듣지 못한 재경은 대충 대답하면 될 거라며 입을 놀리려다가 비키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사상 초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렌 지미와 함께한 세월이 있던 비키의 노련한 대처였다.

“부정합니다. 부대 이탈은 맞지만 그 의도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노리고 피난민 보호 의무를 포기한 탈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재경 대신 비키가 대답했다. 아까부터 자꾸 입을 막는 비키 때문에 재경은 조금 열받았다. 왜 사사건건 내 말을 방해해? 이거 내 재판 아니야?

“사실입니까? 피고인, 변호사와 의견 통일된 것 맞습니까?”

“아… 어… 네… 뭐.”

비키가 얌전히 그렇게 말하라며 잇새로 경고했다. 괜히 반발심이 들었던 재경은 장난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을까. 고지식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안 맞아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데 변호사? 왜 비키가 변호사야?

“근데 너 언제부터 변호사로 꿈 바뀌었냐?”

“형법은 귀족의 기본이거든, 이 멍청아. 일 복잡하게 만들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알아서 무죄로 만들어줄 테니.”

잠시 재판관의 질문이 검사에게 향한 틈을 타 비키가 믿음직스럽게 등을 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내려갔던 렌이 갑자기 멀쩡하게 낫고 돌아와 갈피를 못 잡겠어도 그녀가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다만 긴장 때문에 꿈에 대한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녀답지 못했다.

“검찰 측은 렌 지미의 탈영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검찰 측이 내민 증거는 렌 지미가 피난 작전 시 전멸한 부대를 두고 도망쳤다는 기록물들이었다. 목적했던 피난지에 도착했을 때 묘연했던 행방, 피난민들의 증언 등등 검사는 피고인이 자신의 의지로 의무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재판관이 니냐롯트가 증거 조작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품게끔 하도록 귀족파에게 꽤 많은 뇌물을 받았을 것이다.

“피고인 측에서는 부인하는 증거를 제출해 주십시오.”

이에 비키는 류제가 새롭게 공증한 증거들을 제출하고 이 증거들이 가리키는 바를 주장했다.

“렌 지미가 부대를 이탈한 이유는 부대를 급습한 등급2의 서큐버스를 물리친 후 마왕의 부활체로 알려진 류제 신리가 마족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용 증명을 해주십시오.”

“변호 측은 당사자인 류제 신리를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현재 류제 신리는 인간과의 협약을 어긴 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어젯밤 폭주한 마기로 인해 류제의 초커가 반응했다. 용인의 육체를 끌어낸 재경이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 때 류제는 재경을 니냐롯트에게 맡기고 기간트리카 부대에 붙들려 갔다. 자신이 저지른 짓의 무게를 아는 류제는 마족을 만든 이유가 인간을 향한 적의가 아님을 그동안 증명해야만 했다.

“증인을 데려오세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류제 신리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 무엇도 그를 묶어놓을 수 없었기에 협약을 어긴 주제에 속 시원히 걸으며 증인석에 선 류제는 후광이 비추는 것처럼 당당했다.

재경은 싱글벙글 웃어젖히는 류제를 보니 다 저놈 때문에 일이 꼬인 것 같아 열불이 뻗쳤다.

“렌~ 오랜만이야. 몸은 어때?”

“짜증 나니까 웃지 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냐?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나한테 뭔 짓거리를 한 거야?”

삐딱하게 답하는 재경을 보자니 이거야말로 그가 아는 렌이라며 류제가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진짜! 지금 이럴 때야? 증언한다며? 증언이나 해, 이 망할 자식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마구마구 떠오른 재경이 얼굴을 붉히며 손길을 뿌리쳤다. 기억이 떠올랐을 때부터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막상 류제의 얼굴을 보니 기억을 잃은 동안 허락했던 온갖 추태들이 생각났다.

고개를 팩 돌린 재경의 귓불은 밝은 곳에서 본 어떤 때보다 새빨갛다. 방청석에 앉은 나라의 높으신 분들 중 아직 재경이 마족이 되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히 일개 평민이 마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전전긍긍하며 부채질했다.

“증인은 잡담은 그만하고 피고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세요.”

“알았으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재판이 끝난 후엔 당신들도 다 납득할 테니까.”

말투 한번 거만하다.

류제가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자 그를 감시하는 기간트리카 특수부대가 들이닥쳐 협약을 어긴 마왕을 붙잡았지만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법정 문밖에서 못마땅하게 그를 보내준 부대원들은 괴물을 왜 황제가 내버려 두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합의를 깬 것이라고 하나 그를 제재할 방도가 없으니 나라카로 내쫓을 수도 없고 만들어낸 마족이 인간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도 아니니 애매하겠지. 물론 류제는 재경 말고 다른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피고인은 부대 이탈 후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향했습니다. 피고인이 도착 당시 병마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의 손으로 파괴된 곳이었죠. 하지만 기술관장이 개발했던 스위처는 기동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스위처…란 무엇이죠? 이탈한 피고인이 그곳에 갔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변호인은 을제5호증을 그 증거로 제출합니다.”

류제의 신호에 따라 비키가 재판관에게 바로 그날 그 시각 스위처가 가동되었다는 증거를 넘겼다. 스위처에 대해서 모르는 재판관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밤새 류제에게 시달렸던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이 참고인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 스위처를 발명해 낸 본인이 온 것이니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워낙에 투머치하게 말하는 양반이라 기동 원리와 설계까지 말하기 전에 류제는 그를 증인석에서 끌어내렸다. 기동 사실과 그 시간을 확인한 재판관이 증인에게 물었다.

“어째서 피고인이 스위처를 기동한 것이죠?”

“이 스위처는 말씀드렸다시피 호세마타 요새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호세마타 요새에는 제립학교에 숨어들었던 서큐버스의 왕, 미나 플로리아와 제가 있었습니다.”

“왜 증인과 등급1의 몽마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이죠?”

“마족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과 연관이 있습니다.”

안경을 올리며 호기심을 보이는 나이 지긋한 재판관에게 류제는 제 장기인 미모가 돋보이게 싱긋 웃었다. 하마터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라카로 끌려가 마왕의 기억에 그대로 잠식될 뻔했던 것에는 걱정하지도 않는 듯하다.

류제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진실들에 재경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들통나 부끄러웠다.

“마족은 힘을 일깨우지 못한 절 나라카로 납치하려 했습니다. 그때 렌이 스위처를 기동해 저를 피난시키고 대신 서큐버스의 왕을 막은 겁니다.”

“이의 있습니다. 피고는 일개 학도병에 불과했습니다. 어빌리티 불명에 척도도 낮고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등급1의 몽마를 혼자서 막았다는 겁니까?”

“그래서 피고인의 발견 당시 상처가 컸던 겁니다. 피고인이 호세마타 요새에 있었던 증거와 제립학교 양호교사 세라 밀로니가 작성한 힐링 팩터 중독으로 인한 회복 장애 진단서를 추가로 을제7증부터 11증까지 제출합니다.”

이번엔 호세마타 요새 지하에서 발견된 렌 지미의 피, 군번줄, 사용한 힐링 팩터와 호세마타 요새 근처에 있는 렌 지미를 보호한 도시의 민간 시설에서 얻은 진료 기록이었다.

“증거를 받아들입니다.”

설득당한 재판관이 이의를 인정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안심이다. 앞을 바라보는 재경을 살핀 류제는 이제 조금 남았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검사 측 말씀하세요.”

그러나 어디선가에서 섣부르게 접근했던 건지 처음으로 검사 측에서 이의가 나왔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류제가 놓친 부분을 그들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증인은 현재 피고인이 그날 증인이 호세마타 요새로 간 걸 알아낸 방법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가 없다면 증인은 증거를 짜깁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방청객들도 검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만일 렌 지미가 류제 신리를 대신해서 마족의 편에 서버린 마왕이 탄생하는 큰일을 막았다는 사실관계가 증명되려면 이의가 먼저 설명되어야 했다.

“당시 증인은 병마 페스트의 왕을 막기 위해 펠노아로 가기를 명받았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지만 증인은 호세마타 요새로 향했습니다. 상부의 명령을 어긴 것이죠.”

“준장 신분이었던 멜가로스크 자작의 허락하에 움직인 겁니다.”

“어쨌든 당신은 공식적으로 펠노아로 향해야 했습니다. 호세마타 요새로 향한 건 당신만의 독단이었으니 만일 렌 지미가 당신을 막으려 했다면 알라마니 기술관이 아니라 펠노아로 향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에 재경이 무죄로 풀려나길 바라는 사람들은 류제가 반박하지 않자 불안해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류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향하는 게 가능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피고인은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향했을 겁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왜냐하면 렌 지미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보는 어빌리티를 가졌거든요.”

기다렸다는 듯이 터뜨린 진실에 방청객들이 수군거렸다. 재경의 몸이 움찔거리고 무릎에 올려둔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태평한 류제를 대신하여 비키가 증거를 제출했다.

“변호인은 을제12, 13, 15호를 제출합니다.”

재경이 가지고 있던 공책, 쪽지의 필체와 일기의 필체가 전문가가 판별했을 때 한 사람이 썼다고 할 수 있다는 증명서였다.

재판관은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는 류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회를 잡은 검사가 류제의 주장을 부정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어빌리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증인은 피고인과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피고 측은 증거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비키가 반박했다. 법정에서 모든 정황은 증거로 설명한다. 검사는 귀족파의 언질이 아니더라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피고에게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원고는 이에 반박합니다. 피고인의 어빌리티 척도는 매우 낮으며 제립학교 교사들의 소견상 정신계 어빌리티의 일종이라고만 판단이 되었습니다. 미래를 보는 어빌리티라면 척도가 낮을 리가 없습니다.”

“피고 측은 참고인으로 피고인의 1학년 당시 담당 교사였던 세라 밀로니를 부르겠습니다.”

흥미진진한 진실 공방에 방청객들은 어느덧 숨죽이며 집중했다.

군 검찰은 죄목이 확실할 때만 기소하기 때문에 재판에 넘어가면 당연히 유죄를 선고받는 것이 고착화되어 있었다. 이번 재판은 니냐롯트와 귀족파의 알력 다툼 가운데에 낀 별것 아닌 탈영병의 공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엄청난 사실들이 까발려진다는 생각을 누구나 품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차례가 다가오자 증인석에 섰다.

“참고인 세라 밀로니는 증언하세요.”

“제가 피고인 렌 지미 학생을 처음 맡은 학기, 신체검사와 함께 진행되는 어빌리티 척도 검사를 할 때였습니다.”

세라는 지금까지 숨겨야만 했던 사실을 드디어 말할 수 있어서 속이 후련했다. 한 학생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한 학생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잘못을 드러낼 수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선택이 틀렸다고 비난해도 좋았다.

렌이 그 능력 때문에 원하지 않게 휘둘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 없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 기뻤다. 류제의 말대로라면 이 능력은 파급력이 대단한 만큼 발현 기간이 짧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볼 수 있는 유용한 미래는 이제 없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렌이 권력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당시 렌 지미 학생은 어빌리티를 발현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어빌리티가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검사 시에도 척도가 낮게 측정되어 다음 사람을 부르려는 찰나였습니다. 척도계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렌의 어빌리티가 뭔지 아는 사람은 없었고 같은 반 학생들도 렌이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세라 입에서 나오는 비밀을 듣는 8반 학생들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그 척도의 값은 얼마였죠?”

“측정 불가. 류제 신리 학생과 같았습니다.”

방청객들에게서 동요의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귀족파들은 그들의 계획과 관련이 없는 하찮은 인간을 니냐롯트가 왜 저렇게 나서서 보호하나 했더니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고 혀를 찼다. 군중들 틈에 가려진 그는 오만한 귀족들이 절대 인지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왜 그 측정값을 기록하지 않았죠? 담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겁니까?”

“물론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럼에도 변명을 하자면 그건 그때 단 한 번만 일어난 일이었고 학생 스스로도 자신의 어빌리티를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기록하지 않기로 판단했습니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세간의 관심을 받아버리면 부담감을 느껴 학생 스스로 발전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증인이 말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흘러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재경은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끔벅거렸다. 재경의 기억이 돌아온 사실을 모르는 비키는 일단 동의하라며 날 선 눈빛 신호를 보냈다.

“네에… 뭐… 그랬던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거짓말입니다!”

알력 다툼의 한편인 사람이 외쳤지만 모두가 저 절규를 이해했다. 그만큼 상황이 말도 안 됐다.

“미래를 볼 수 있다면 피고인이 어빌리티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자신의 어빌리티라고 인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어빌리티의 특별성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을 함부로 발설하면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미나 플로리아, 마족의 스파이가 주변에 있는 상황에서는요. 다행히도 그의 능력은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훔쳐보는 정신계 마법에 능한 몽마의 군주라도 그의 머릿속만큼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마의 군주인 미나가 렌만큼은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을 마왕인 류제 신리가 하니 인간은 마족의 한계를 트집 잡기가 어려웠다.

“그럼 그가 봤다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고작해야 류제 신리가 호세마타 요새로 갈 거라는 그것뿐입니까? 그것이 어빌리티란 말입니까? 피고인, 말씀하세요.”

“아… 어… 그게…….”

“렌 지미가 본 미래에 대해서는 이 공책에 자세하게 쓰여있습니다. 모두 피고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비키가 증거로 제출했던 공책과 쪽지를 재판관에게 대신 넘겼다. 재판관은 공책을 읽어보다가 자신의 식견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자들이 있어서 당황스러워했다.

“처음 보는 문자군요. 암호인가요?”

“네, 피고인은 알고 있는 미래가 남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만.”

“물론 그것도 알라마니 기술관장과 렌 지미의 도움으로 키아나트리체어로 해석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걸 을제16호로 제출합니다.”

기간트리카 특수부대에 잡혀있던 류제는 그곳에서 기술관장과 접촉해 암호의 해독문을 알려주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끔 직전까지 자료를 모았다.

류제가 공증한 증거를 비키를 통해 제출했다. 물론 공책 내용 중 필요한 내용만 추출한 것이다.

해석한 내용을 읽은 재판관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 남겨졌던 쪽지에 키아나트리체어로 적힌 핵의 위치까지 생각하면 피고인의 주장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신빙성이 높았다.

“공책에는 다양한 기로가 있습니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기에 미래는 하나로 국한되지 않고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존재했죠. 거기에 적힌 대부분의 미래는 마왕의 부활체였던 저의 인간관계의 변화에 따른 미래입니다.”

“그럼 피고인은 애초부터 증인이 마왕임을 알았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군요.”

“그럼 피고인은 국가의 위기 상황을 외면한 반역자여야 합니다!”

“17살 어린 미성년자에게 뭐 그렇게 기대하는 게 많은 겁니까? 말했잖아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고. 그는 인류의 해피― 엔딩을 지키려고 했던 겁니다.”

류제가 적당히 고삐를 잡았다. 재판관도 검사의 말 대신 변호인처럼 말하는 류제의 증언에 더 집중했다.

“그는 인간이 마족의 술수에 넘어가 전쟁에 패배하는 상황을 가장 염려했으나 미나 플로리아의 방해로 인해 그것까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강제로 미래를 바꿀 방법을 생각해 냈고 호세마타 요새에서 미나에게 붙잡힐 제 운명을 바꾸는 것에 마지막 도박을 건 것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재판관은 감탄으로 말을 줄였다. 학도병 탈영에 판결을 내리나 했더니 사실이라면 키아나트리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숨겨진 영웅의 업적이 아닌가.

마족의 류제 신리 탈환 작전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고, 수학여행 때 일어났던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지진, 병마의 군주의 제립학교 침공, 라우라 축제에 나타난 화마의 군주, 타고시아 해변에서 있었던 수마의 군주의 습격과 키아나트리체가 미노타와 사이가 틀어진 유네 나르타의 납치 사건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선택지가 해석본에 적혀있었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이번 재판에 깊게 관여하셨다 들었습니다. 피고인이 제립학교 재학 당시 절친한 친우였다죠? 재판에 유리하게끔 거짓말로 꾸민 것이 아닙니까?”

재경은 ‘절친한’이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쳐버리고 말았다. 법정이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시선이 방청석에 앉은 니냐롯트에게 향했다.

미래를 아는 어빌리터이자 류제 신리의 친구이기까지 한 렌 지미의 철저한 보호는 귀족파가 경계할 만한 것이었다. 니냐롯트가 느긋하게 답했다.

“그랬더라면 그를 재판에 세우지도 않았겠지. 나는 그의 정당한 공을 치하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경하는 재판장. 물론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의중이야 저희 같은 천것들이 감히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피고인을 보십시오!”

이번엔 니냐롯트가 앉은 방청석 반대편에 앉은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반박했다.

“피고인은 힐링 팩터 중독으로 인한 회복 불가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 부작용은 현재 인류의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십시오. 다친 상처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바로 저기에 있는 마왕 류제 신리가 그를 마족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왕이라는 사실은 제립학교 학생들은 물론 재경을 응원하기 위해 온 대부분의 방청객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방청석의 귀족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어리둥절한데 렌은 또 상처가 멀쩡하니 그들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오늘까지 피고인을 폐하께서 보호하고 계셨다고요? 저 재앙 덩어리가 협약을 깨고 다시 마족을 만들었음에도 구속되지 않은 걸 보아하니 마족을 만든 건 폐하의 명령입니까? 비어빌리터들을 지배하기 위해 마왕의 힘을 과시하며 어빌리터인 렌 지미를 마족으로 만든 것이죠!”

물론 류제 신리가 렌 지미를 낫게 하기 위해 마족으로 만들도록 종용한 것은 니냐롯트의 의도이긴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결정은 류제가 판단하여 내린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 지껄이는 아무 말에 류제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렌을 마족으로 만든 건 제 의지입니다.”

비키는 당연히 부정할 줄 알았던 류제가 흔쾌하게 긍정하자 깜짝 놀라 재경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어쩐지 상처가 없다고 했더니 그런 방법으로 낫게 한 것인가! 마족? 지금 렌의 이 몸이 마족이라고?

“왜 그랬나. 어째서 인간을 다시 마족으로 만든 거지? 그새 인간을 배신할 셈인가?”

“배신이라니 재미없는 말이군요.”

“그럼 어째서 협약을 어긴 건가!”

재경은 류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래도 쟤도 눈치가 있는데 그렇게까진 하지 않겠지 방심하려는 찰나 류제의 입에서 정말로 당연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오래오래 살아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게 이상한가요?”

방청객들이 수군거렸다. 같은 8반 학생이었던 친구들과 비키, 유네까지 있는데 마음을 드러내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무려 류제가 렌 지미를 좋아한다는 전대미문의 대고백에 로맨스 연극이라도 보는 듯 8반 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렌을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 남기고 있던 비키와 유네의 머리털은 소스라쳐 삐죽 솟아올랐다.

그러나 류제를 남자로는커녕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좋아해서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었건 하등 상관없었다. 그들은 류제가 협약을 깨뜨렸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또 그런 식으로 하나둘 마족을 늘려나갈 셈인가? 마족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해친다. 마족은 인간을 먹어! 너는 또다시 무고한 인간을 죽이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침을 튀긴 귀족파는 류제의 반박을 기다리며 숨을 식식거렸다. 사태의 엄중함에 방청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류제는 답변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고요함 속에 이런 것까지 말해야만 하는 걸까 무안해졌다.

헛기침을 한 류제는 자신을 아니꼽게 쳐다보는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렌의 주식은 제 체액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해를 끼칠 일은 일절 없습니다. 인간을 증오하라고 마족으로 만든 게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용인의 피를 일깨워 준 것일 뿐이니까요.”

“체액? 뭐… 마왕의 피라도 마시는 건가?”

“그게 뭐 중요한 사실입니까?”

“당장 답해라, 이 괴물아! 거짓말을 한 경우엔 절대 용서치 않겠다. 마왕의 피를 먹는 마족이라니 들어본 적 없어!”

한숨을 내쉰 류제는 적당히 에둘러 설명했다.

“지금 렌이 마족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이상은 설명하게 하지 마세요.”

용인의 피가 일깨워져 육체의 형태가 바뀌더라도 인간의 모습을 의태할 수 있는 분파의 마족이 있었다.

서큐버스. 서큐버스는 에너지원으로 인간의 정기를 흡수한다. 정기라 함은 말 그대로 정기다. 다른 말로 생명력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무언가. 인간이 가진 생명을 만들어내는 무언가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설마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그…건 아니…겠지?”

“하하하.”

모두가 그저 상상만으로 그친 그걸 굳이 입에 담아 묻는 사람에게 류제는 웃음으로 답했다. 파워 당당한 대답에 재판관도 얼이 빠졌다. 참관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어떻고.

“뭐야? 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재경이 이해를 못 하는 동안 비키와 유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심각한 상황을 이어가던 법정은 인간이 아닌 것의 음담패설을 듣고 차갑게 식어갔다. 재경만 눈치 없이 두리번거리며 물음표를 그리자 유네가 뒤에서 ‘야한 거.’라고 귀띔을 했다.

그때야 류제 신리 이 제멋대로인 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재경이 의자를 던졌다.

“죽어버려, 이 망할 놈아!!”

류제는 단지 인간들의 추궁에 결백함을 답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공개 치욕을 당해버린 재경은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어쩌지도 못한 채 재경은 류제를 두들겨 팼다.

류제가 뒤로 넘어지기 전 비키와 유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지만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말에도 꼼짝 않던 그들의 시선은 세상 가장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했다. 어쩐지 아세미가 멋대로 자신과 결혼 사실을 발표했을 때보다 더 썩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해? 널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나와 미래를 생각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게 내 탓이야? 내 탓이냐고 이 멍청아! 세상을 구하라고 했더니 날 이 꼴로 만들면 어떻게 해! 내가 왜애애!”

“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됐잖아! 그렇다고 인간을 먹게 할 수도 없고.”

“그냥 평범한 밥을 먹이란 말야, 이 변태야!”

“용인의 몸은 인간과 다르단 말야. 네 핵을 만들 때 네가 날 필요로 해서 어쩔 수가―”

“닥쳐!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거 다 네 속셈이지? 너 이 자식, 내가 너 때문에 열불 터져서 진짜! 끝까지 내 속을 썩여?”

“너를 위해서 그런 거라니까. 아야야, 그만, 그만!”

류제의 개소리에 빡쳐 눈이 돌아간 재경이 피고인석을 집어 들어 던지려고 했다. 과연 인간이 아닌 마족의 근력이 엿보였다.

이대로라면 잘 나가던 재판마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자 류제가 최후의 수단으로 외쳤다.

“재경아!”

폭주하려던 재경은 그 이름을 듣고 일순 멈추었다. 이 장소에서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류제뿐일 것이다. 식식거리던 재경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스르르 주저앉았다.

“이 망할 자식이…….”

눈물이 줄줄 흐르던 그는 참지 못하고 서럽게 통곡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모르겠는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별개로 류제에게서 그 이름을 들으니까 눈물이 났다.

다 큰 남자가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혼자서만 세상을 잃은 것 같았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서투른 위장 마법이 흐트러지며 류제가 일깨워 상처를 메웠던 용인의 육체가 드러났다.

일반적인 마족에게서 나타나는 패턴과 다르게 상처 부위만 변해서 한쪽 몸만 반쪽짜리 마족처럼 보였다. 정작 본인은 몰랐다.

마족이니 마왕이니 하던 공방의 진실이 드러났다. 방청객들이 수군거렸다.

물론 방청객들의 동요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마족의 재등장에서 나오는 두려움보다는 다른 이유가 컸다. 법정을 휩싸는 울음소리는 진짜 이름을 들은 기쁨의 눈물이 아닌 감히 동의도 없이 안쓰러운 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마왕에 대한 분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협약을 깨고 마족을 만들어낸 류제를 공격한 다음 새로운 마족에게 화살을 돌리려던 귀족파의 대표 주자도 할 말을 잃었다. 건방진 손가락질조차 차마 미안해서 절로 내려갔다. 몰랐던 건가? 감정이 없는 마족과 달리 싫다고 저리 우는데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가 설득력이 부족했다.

“개자식… 나쁜 놈아. 너 진짜 내가 얼마나… 얼마나……!”

게다가 마왕을 저렇게 두들겨 패는 마족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마왕의 정체를 아는 인간들 중 누구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던 류제 신리를 넘어뜨려 멱살을 잡고 주먹질하다니. 베일에 싸인 마왕에게 환상을 품던 인간들에게는 충격적이었지만 과거 1학년 8반 학생들은 있을 법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알아. 알았어.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정말로.”

“내가… 내가 진짜……! 진짜 많이……! 으허어엉…….”

주먹질에 지쳐 결국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어 엉엉 울고 마는 재경을 류제가 천천히 도닥였다. 마족의 모습은 인간들에게 혼란만 줄 뿐이니 류제는 그의 힘으로 재경을 인간처럼 변화시켰다. 용인의 형태가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그동안의 고생이 재경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걸 남들이 알아줄지 몰랐다. 하물며 믿어줄 거라곤 바라지도 않았다. 진짜 렌 지미가 될 수 없었던 그는 렌 지미의 뒤에 숨어 이 세상을 망친다고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류제가 누렸어야 할 행복을 돌려주고 싶다는 이유로 마지막 결심을 했다. 그러니 류제가, 본인이 그 이름을 불러준 건 의미가 컸다.

“본 법정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삼가기 바랍니다. 본 법정은 사건 번호 638GD9574 렌 지미 피고의 탈영에 관한 재판 중입니다.”

꺽꺽거리는 울음이 잦아들자 벙쪄있던 재판관이 망치를 두드리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이 정도로 개판이 일어났는데도 휴정하지 않고 계속해 나갈 모양이다. 그 누구도 아니고 니냐롯트가 아주 불쾌하게 재판을 지켜보고 있으니 속결로 판결 내리고 싶은 마음인 듯했다.

재경이 던졌던 의자와 피고인석이 정리되고 할 말을 잃은 귀족들도 더듬더듬 자리에 앉았다. 방청객들은 재판이 끝나고 한시라도 빨리 류제를 추궁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변호인석에 있던 비키가 훌쩍거리는 재경의 어깨를 도닥였다. 지금 당장 저 망할 류제 신리를 재판에 세워 유죄를 내려달라 자처하고 싶을 만큼 울분이 터져서 이가 갈렸다. 뭐어? 뭘 먹여? 진짜 미친 새끼 아냐?

어쨌든 재판을 마무리 짓기 위해 검사가 일어나 구형 선고를 요청했다.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비키가 일어나 최후 변론을 마쳤다. 판결을 내리기 전 재판관은 피고의 증거들과 원고의 증거들을 마지막으로 골고루 살폈다.

“피고인은 변호인이 말한 위의 사실을 모두 인정하십니까?”

아직도 훌쩍거림이 그치지 않았던 재경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 같은 재판관의 안쓰러운 시선은 다 망할 류제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가 바라던 해피 엔딩도 이루어졌고 숨길 이유도 없으니 재경은 체념했다. 그가 한탄하듯 사실을 인정했다.

“네에… 맞습니다. 적힌 내용 그대로예요. 미나가 마족인 것도 알았고 류제가 마왕인 것도 알았는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될지 몰랐을까.”

그러면서 또 울음을 터뜨리니 재판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상에 우는 마족을 재판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어빌리터가 마왕의 손에 마족이 될 수 있으며, 그 증오가 어디로 향할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누군가의 말은 진실이었던 모양이다.

“원고 이 이상의 이의신청 있습니까?”

이런 개판인 상황에서 이의를 신청하라고 해도 피고의 증거가 너무나 명확했다. 검사 측은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진실의 길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원고의 증거 또한 피고의 무죄를 입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검사는 귀족파를 힐끗거리며 포기를 선언했다.

“판결하겠습니다.”

류제 때문에 진이 빠진 재경 빼고 긴장이 되는 순간,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정의로운 키아나트리체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할 군인의 탈영이란 국민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나 도망간 범죄를 뜻했다. 그러나 피고가 부대를 이탈한 목적이 도망이 아닌 마족과의 싸움에서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함이었음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미래를 보는 어빌리티와 그 목숨을 바쳐 평화를 지켜낸 공로는 군인의 의무인 국가를 위한 헌신이 될 수 있다.”

어려운 말이 이어졌지만 그래서 결론은 탈영이 아니니 무죄라는 것이다.

망치가 세 번 땅땅거리자 법정은 폐정했다. 99퍼센트로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군사재판이 뒤집혔다. 피고인이 영웅으로 등극하는 전례 없이 축하할 일이었기 때문에 방청객들이 일어서 박수를 쳤다.

원하는 결과가 나왔으니 류제가 방청석에 있던 니냐롯트에게 씨익 웃으며 승리의 브이 자를 그렸다. 박수를 치며 류제를 응시하는 니냐롯트의 표정은 싸늘했다. 재경을 마족으로 만드는 건 자기가 의도한 주제에 류제가 한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렌, 축하해~”

“네가 그냥 도망갔을 리 없지, 암. 잘했어.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야!”

“진짜 넌 한다면 하는 놈이라니까. 아니, 근데 미래를 본다는 건 정말이야?”

“진짜니까 판결이 그렇게 내려졌겠지. 의심도 많기는.”

“신기하니까 그렇지. 그런 어빌리티는 처음 있는 거잖아.”

“그래, 어… 중간에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뭐 어때.”

승소를 축하하며 하하하 재경을 둘러싸는 학생들은 멀뚱히 선 류제를 어색하게 흘겼다. 그래서 도대체 뭐냔 말인가. 진짜 류제가 마왕이야? 렌을 마족으로 만들어? 남자를 좋아해? 식사가 뭐라고? 혼돈과 패닉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축하할 건 축하해야 직성이 풀렸다.

“잘 되어서 다행이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니 소외되는 건 싫었던 류제가 냉큼 재경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참견했다.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자고 왕녀가 그러던데. 오랜만에 단체 사진 어때?”

“너는 좀 가만히 있어!”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재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재경은 못마땅했지만 떠들썩하게 남은 승소 축하파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법정을 배경으로 섰다. 재경을 중심으로 포즈를 잡은 사람들은 사진 기사의 하나 둘 셋과 함께 승리의 브이를 그렸다.

“우아앗! 또 뭔데?”

“축하할 일이 있으면 역시 그거지.”

“그거?”

사진 촬영이 끝나자 전날부터 작정했던 친구들이 신호와 함께 재경을 들었다. 당황한 재경이 어리둥절할 찰나 합심해서 헹가래를 쳤다.

단말마 같은 비명 소리가 울리거나 말거나 축하를 받고 땅에 내려온 재경은 저것들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투덜거리며 어지러움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 걸 보면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수고했어요.”

“세라 쌤!”

“당신이 무엇이라도 저는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세라가 기억이 돌아온 재경을 꼭 끌어안았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가 인류에게 미래를 되찾아준 것처럼 그의 과거와 미래도 되찾을 수 있어서 기뻤다. 학교를 떠나야만 했을 때 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었던 세라가 끝내 울음을 삼켰다.

“렌 학생, 지금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알겠나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라 쌤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요?”

“지금은 딱히 그런 걸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재경이 히죽 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말썽꾸러기의 웃음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세라는 그 이유는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대답 대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쉽게도 재경을 위해 증언대에 올라준 세라는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의 재활 치료를 이어야 했다.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하니 저녁에 기숙사에서 보자며 작별 인사를 한 세라는 학생들의 배웅을 받고 제립학교로 먼저 돌아갔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축배를 드는 날이다. 승소를 예상했던 니냐롯트는 법정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왕궁으로 초대해 귀족파들을 대놓고 골탕먹었다.

지금까지 로라 하놋, 포르테 들라크루아, 류제 신리에게 내려졌던 명예 훈장은 이제 공식적으로 렌 지미에게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인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뒤에서 노력한 인물을 대접하는 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게 없으니 귀족파는 더 약이 오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축하할 게 어지간히 없었던 키아나트리체는 숨겨졌던 인류의 영웅을 추대하며 늦게까지 파티를 즐겼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라이브 밴드의 노래가 나오며 진귀한 음식들이 그들을 환영했다.

대부분 평민 출신에 배운 건 군사교육뿐인 학생들이 모인 거대한 연회장은 서로의 근황을 파악하는 수다의 장이 되었다.

재경이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다시금 그에게 밸런타인데이 때의 사과를 했고, 사소한 건 신경 안 쓰고 있던 재경은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린 것처럼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들은 다시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상처가 다 나아서 천만다행이다. 내심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오래 사는 게 장땡이지.”

“근데 마족이 되면 기분이 달라져? 막… 막 인간을 없애고 싶어?”

“지금은 잘 모르겠어. 글구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냐?”

진귀한 동물 구경하는 모양새에 재경이 별꼴이라면서 볼을 부풀렸다. 아무리 류제의 계략으로 마족이 되었다고 한들 이유도 없이 인간을 죽이고 싶을까. 툴툴거리는 걸 보자니 옛날과 하등 달라진 게 없는 모습에 친구들은 만족스러웠다.

“몰랐는데 렌, 너 키 좀 컸다?”

“오옷, 진짜? 얼마큼?”

“어디. 와, 진짜네? 이것도 마족의 힘인가? 마족의 힘만 있으면 나도 글래머러스한 몸이 될 수 있는 건가?”

“아서라, 무슨 꿈을 꾸는 거야.”

쭉쭉빵빵을 원하는 친구가 야욕을 드러냈지만 그건 실현 불가능했다. 갑자기 자란 게 아니라 마족이 되면서 상처가 심했던 신체가 재정렬되고 곧게 펴져 성장한 키가 드러난 것이다. 옛날보다 5센티는 넘게 큰 것 같은데. 친구와 키를 비교한 재경은 우쭐해졌다.

기억이 돌아와 진정으로 친구들과 재회한 재경은 신이 나서 모험담을 떠들어댔다. 빙의되었다는 말은 쏙 빼먹고 미리 알고 있던 게임 속 내용을 어빌리티로 잘 포장해 다달이 이루어진 예언들을 말하는데, 이야기꾼이 관객을 모으는 것처럼 주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목이 집중된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체하는 재경은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았다.

1학년 때 일어난 대연대기를 마치고 어깨 뽕을 으쓱한 재경이 집어 든 과자를 냉큼 입에 털어 넣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생각보다 말이 안 되는 듯 잘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렌의 어빌리티가 뭘까 제일 궁금했는데 미래를 알고 있었다니.”

“그런데 순 다른 사람에 대한 미래뿐이고 렌 네 미래는 없네.”

“자기 미래를 보는 게 원래 제일 어렵잖아.”

“그렇겠네. 자기 미래를 볼 수 있으면 낙제를 하겠어? 아까처럼 세상 떠나가라 울지도 않았겠지.”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물론 연회장에 나온 요리를 하나씩 집어 먹는 재경에게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묻는 이는 없었다. 렌이 유네의 고백을 거절한 게 어째서일까 했더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려 류제 신리 때문이었다.

“렌 군, 맛있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걸 먹으니까 드디어 살겠다. 물론 너랑 비키의 도시락도 맛있긴 했는데 역시 달고 짜고 맵고 자극적인 게 짱이지. 아, 비키 너 요리 실력 엄청 늘었더라?”

“흥, 이 지체 겸비 문무 양도 비키 셀로니아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가뿐하거든?”

“자기 입으로 말하고도 부끄럽지도 않냐?”

“그야 사실이니까. 그래도 과식하지 마. 배탈 날라.”

“괜찮아, 괜찮아.”

어찌 되었건 사나이의 고집상 절대로 류제 뜻대로 되지 않겠다 마음먹은 재경은 음식을 와구와구 집어 먹었다.

설탕에 버무린 토마토를 원 없이 먹는 그가 속으로 꿍얼거렸다. 뭐? 내 식성을 야한 걸로 바꿨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 난 이런 음식 먹고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이거 봐, 잘만 먹잖아.

“그래서 말하는 건데 류제는 진짜 마왕인 거지? 인간인 척을 하고 있지만… 이번 전쟁으로 다시 그 힘을 찾은 거고. 당연히 비밀이었겠지만 배신감 장난 아니네~”

“게다가 미나가 류제를 나라카로 납치하려고 제립학교에 들어온 거였다니 좀 오싹해.”

“지금은 평소 같지만 만약에 류제가 인간이 싫어지면 어떻게 해?”

“내가 아는데 그럴 일 없어. 류제가 진짜 인간을 싫어했으면 마족을 없애진 않았겠지.”

류제를 대변해 주던 재경은 수다쟁이 친구들이 혀 놀림을 멈추자 머쓱했는지 음식을 마저 집어 먹었다. 그녀들은 류제한테 눈 뜨고 코를 베였으면서 기어코 류제 편을 드는 재경에게 혀를 찼다.

“어쩐지 류제가 요즘 이전보다 건방지다고 생각했어. 잘생기면 다인가.”

“잘생긴 게 다긴 하지.”

“암, 진짜 다긴 해. 난 용서해 줄 수 있어.”

“솔직히 난 처음부터 류제X렌파였거든.”

썩을 부 자의 친구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류제를 흘겼다. 자르라고 고사를 지내도 끝까지 자르지 않던 앞머리를 짧게 잘라 얼굴을 내놓은 류제는 어쩐지 인간이 아닌 생물처럼 빛나 보이긴 했다.

어른이 되어 다 자란 몸은 물론이고 단단한 근육에 완성된 낮은 목소리까지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저런 류제가 이 렌을 좋아한다고?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단둘만 놓고 봤을 땐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지만 듣자 하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힘들었다.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준 사람을 안 좋아하고 누가 배겨?

“렌, 왕녀가 잠깐 보자네.”

“어엉?”

재판은 이겼어도 특정 누군가에겐 굉장히 짜증이 났던 재경이 류제를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류제가 누구를 잡아먹기라도 하듯 비키와 유네가 슬금슬금 재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멋대로 대마왕 류제를 쓰레기 쳐다보듯 한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모아 그를 매도했다.

“천하의 나쁜.”

“변태.”

“음란마귀.”

“호색한.”

“어떻게 말해도 달갑게 받아들이겠는데 왕녀가 렌을 찾는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두 사람에게만큼은 류제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몸 따로 마음 따로 갈 수도 있으니 앞으로 누구를 선택하든 재경 마음대로지만 말이지. 류제는 디저트를 퍼먹다 말고 부끄러워하는 재경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와.”

“너 진짜 두고 보자.”

누구도 아니고 왕녀가 부르는데 어쩔 수 없다. 얼굴이 시뻘게진 재경이 성큼성큼 류제를 따랐다. 빠른 걸음대로 그를 제친 재경을 좋다고 뒤에서 끌어안는 류제를 보니 반성은 개뿔이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지친 재경은 들이대는 류제를 떨쳐낼 기력도 없었다.

익숙하게 왕궁을 활보한 류제가 니냐롯트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연회를 연 장본인이라지만 니냐롯트는 렌 지미의 업적을 기리고 훈장을 내리기 위해 손을 쓰느라 바빴다. 호위인 루이나가 그를 확인하고 못마땅하게 눈가를 실룩거렸다. 렌 지미를 끝까지 하대했던 루이나에게서 재경을 향한 불쌍함이 읽혔다. 세상에나, 그 루이나가 렌 지미를 연민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폐하, 그 자식이 왔습니다.”

류제가 왔다는 말을 꼭 저렇게 한다. 자기가 류제를 까는 건 몰라도 남이 류제를 까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재경이 입을 비죽거렸다. 뭐야, 그래도 그 이후로는 류제가 노력해서 해피 엔딩이 된 건데 참 나.

들어오라는 말에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연회에 잠깐 얼굴을 비쳤다가 공무에 복귀한 니냐롯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한 손님에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선 니냐롯트는 곁에 있는 루이나에게 잠시 부탁했다.

“루이나, 그대의 검을 빌릴 수 있을까.”

영문은 몰랐지만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시니 루이나는 분신과도 같은 검을 빌려주었다. 손님들을 자리에 모시기 전 날카롭게 손질된 진검을 발도한 니냐롯트는 불길하게 웃어 보이더니 류제를 향해 덤벼들었다.

“어…어어! 으아악! 뭐 하는 거야?”

“저놈에게 칼을 쑤셔 박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

“니냐롯트 폐하, 체…체통을 지키세요!”

말 그대로 그걸 류제의 배에 쑤셔 넣으려는 니냐롯트에 사람들이 식겁해서 말리느라 혼이 났다. 며칠 후에 있을 미노타와의 정상회담 일로 함께 일하던 하늘바람이 뒤에서 붙잡지 않았으면 진짜로 한 번쯤은 제대로 쑤셔 넣었을지도 몰랐다.

“진짜로 죽일 셈이야?”

“그대가 경멸받을 짓을 하지 않았나.”

“어쩔 수 없었잖아!”

“전부 변명이다. 문답무용!”

루이나가 할 법한 기합을 내뱉은 니냐롯트는 검도부에서 익혔던 검법을 써야 할 때가 지금이라는 듯 날카로운 검을 정확히 휘둘러 공격했다.

류제는 물론이고 재경도 놀라 허둥거렸다. 이대로 니냐롯트가 류제의 핵을 찔러버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재경이 일단 류제를 지키고 보았다.

“그만해!”

류제 신리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지키는 것을 보면 이쪽도 마음이 완전히 없지는 않은 것 같고. 검코를 재경의 턱 끝까지 들이댔던 니냐롯트는 한숨을 내쉬더니 착검했다.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하고 공무를 보던 책상에 앉았다.

“놀라기는. 퇴마의 검을 꺼내지 않은 것으로 농담임을 알았어야지.”

“아니, 네 농담은 항상 농담처럼 안 들리니까.”

옷이 두어 번 베인 류제가 툭툭 털어 복구시켰다.

퇴마의 검이란 초대 키아나트리체 황제부터 내려오는 보검을 뜻했다. 마족 토벌을 상징하는 그 검은 그녀가 지도자의 자리와 함께 물려받아 다시는 악마를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뜻을 이어갔다.

“농담이 싫다면 이걸로 정말 다시 태어나게 해줄 수도 있다.”

서랍 어딘가에서 유일하게 용인을 전생시키는 위험한 말뚝을 꺼내 들어보는 니냐롯트가 입꼬리를 사악하게 올렸다. 눈이 웃질 않으니 진심이다. 저건 진짜 안 된다.

류제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제 막 렌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만큼은 결사반대다.

“내가 죽으면 렌이 식사를 못 하잖아. 그만둬. 그리고 이건 전부 네 계획대로 아니야? 새삼스레 왜 그래?”

억울했던 류제가 반박했다.

재경의 죽어가는 몸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는 마왕인 류제가 마지막으로 마족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니냐롯트는 마족이란 증오로 만들어진 안타까운 생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증오가 없는 마족 또한 만들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물론 그 새로운 마족의 식량은 생각한 것과 다르긴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

그러나 이를 인정해 버리면 퇴마의 검을 가진 인류의 대표로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조장해 버린 것이기도 하고 괜히 심술이 돋았던 니냐롯트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계획대로라는 말에 미심쩍어하는 재경의 시선이 따가웠다.

“능구렁이 같기는.”

“그대야말로.”

“성격이 왜 저렇게 변했담. 저런 성격을 지금까지 어떻게 숨겼나 몰라. 안 그래, 렌?”

“나조차도 우울해지면 누가 이 나라를 행복한 미래로 이끈단 말이냐. 그렇지 않느냐, 렌 지미여.”

“어…어?”

질문이 가만히 있던 그에게로 향하자 이게 뭔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던 재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저런 순진한 이를 이때다 싶어 냉큼 자기 걸로 만든 류제에게 쯧쯔 혀를 찬 니냐롯트는 검을 루이나에게 돌려주며 투덜거렸다.

“렌 지미, 그대를 부른 이유는 그대의 신병 때문이다. 아무래도 ‘협약을 어긴’ 류제 신리가 ‘다시’ 만들어낸 마족은 무해할지라도 그 이름값이 무겁거든.”

“으엉? 너…너희 둘 뭐 결혼하는 거 때문에 부른 거 아니야?”

시종에게서 차를 내와 속을 달래던 류제가 그대로 그것을 뿜어 뱉었다. 진짜 렌과 함께 있으면 질리지가 않는다. 류제는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르겠어서 기침만 엄청나게 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런 미래는 왜 튀어나온 거야?”

“이쪽에서도 사양하고 싶구나. 난 변태를 좋아하지 않거든.”

“변태라니. 너까지 그럴래? 렌, 너 아직도 내가 한 말 이해 못 했어?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얼마큼 말해야 해?”

“아니… 내가 아는 미래는 이 루트에선 그렇게 끝난단 말야.”

이 세계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재경 덕분에 류제는 니냐롯트의 호감도가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고 전쟁 승리 루트로 갔다. 그러나 호감도가 부족해 니냐롯트와는 이어지지 않았다.

재경은 안도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새로운 엔딩으로 만들어진 미래에선 렌 지미가 마족이 되거나 류제가 그를 좋아하는 루트는 아닐 테니까 어느 정도 납득은 했다.

“또 나 때문에 곤란해지는 거야?”

“류제 신리라면 그대가 가져도 상관없다만. 부디 그래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고. 내가 마족이 된 것 때문에 곤란한가 해서.”

“아무래도 좋다니. 진지하게 생각해 줄래?”

오랫동안 앓아온 마음이 부정당한 류제가 투덜거렸다. 기억을 잃은 재경은 좀 더 솔직한 맛이 있어서 좋았는데. 기억이 있는 편이 더 좋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게 만약 진심이라면 상처받지 않는가.

“상대가 그대라면 곤란하지 않지. 마족이 된 그대를 키아나트리체가 감시하게 된다만 그건 못된 사람들에게서 그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겨다오. 그대는 우리 인류를 위해 헌신한 용사이니.”

무언가를 준비한 니냐롯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붉은 케이프를 둘러주었다. 성큼성큼 다가서는 니냐롯트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대의 고된 사명과 희생으로 인류는 구원받았다. 그를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오.”

니냐롯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재경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보드라운 입술이 피부에 닿아 짜릿했다.

재경은 드디어 타고시아 해변에서 니냐롯트가 뭘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재경과 화해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기나긴 오해와 싸움이 드디어 끝나는 기분에 재경은 마음이 근질거렸다.

“우리를 위해 힘내주어서 감사하구나. 며칠 후에 그대에게 훈장을 수여하겠다. 소란이 일겠지만 기쁘게 받아다오.”

“벼…별거… 아니었는데 뭐.”

“훈장만으로 부족하다면 그대를 위해 축하 퍼레이드와 전국을 돌며 연회를…….”

“그런 것까진 필요 없어! 겁나게 부담스럽네. 난 숨겨진 조력자 정도가 좋단 말이야. 그게 더 멋있잖아. 네 감사 인사로도 과분해 죽겠구만.”

감당이 안 되는 규모에 놀란 재경이 니냐롯트를 만류했다. 니냐롯트의 마음에 들 만큼 어지간히 소박한 이다.

“그럼 이걸로 우리도 친구인 것인가?”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올려다본 니냐롯트가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렸다. 물론 지금의 재경은 왕녀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는 재경을 보고 니냐롯트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경은 그녀의 화창한 미소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직 멀었어?”

질투심이 많은 류제는 한 편의 동화책처럼 아름다운 광경 속에 서로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동화책 속 마왕처럼 못된 소리나 해댔다. 다른 친구들은 괜찮지만 니냐롯트만큼은 방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도 렌이 인정받는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꾹 참는데 긴장해서일까 얼굴이 달아올랐던 재경이 빈혈이 온 것처럼 휘청거렸다.

“어… 근데 나 좀 큰일 난 거 같은데.”

“왜 그러지? 어디가 안 좋나?”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재경은 니냐롯트와의 화해가 기뻤기도 했지만 몸에서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인간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낯선 공복감이 몸에서 끓어올랐다.

해롱해롱해진 그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니 니냐롯트가 꿇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쓰러지는 재경을 받쳐주었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류제 신리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슬슬 한계겠지.”

마족으로 변하고 나서 큰 열량 소모가 있었을 텐데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로 재판이 이루어졌다. 마족이 된 몸이 낯설어 공복이 긴장을 비롯한 다른 감정으로 억눌렸다가 이제야 터진 것이다.

“너무… 배고파.”

재경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분명 아까 연회장에서 맛있는 요리들을 보이는 족족 집어 먹었는데 속이 텅 빈 것처럼 허했다. 때가 와버렸음을 짐작하고 니냐롯트 대신 재경을 짊어진 류제는 자주 드나들었던 창문을 박차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우린 먼저 갈 테니까 다른 애들을 잘 부탁해.”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낚아채 가는구나.”

“칭찬 고마워.”

하하 웃어 보인 류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재경이 지르는 마른 비명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더운 바람에 커튼이 펄럭거렸다. 책상에 있는 공문서가 날아가 버리기 전 하늘바람이 대신 창문을 닫았다.

“후우, 정말 시끌벅적했습니다.”

“그게 렌 지미가 가지는 힘이지.”

말로만 들어왔던 류제 신리와 니냐롯트의 친우는 하늘바람의 생각보다 대단해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들었던 기개나 의지를 보자면 본받을 것이 많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섭게만 보였던 저 마왕님의 풀어진 얼굴은 처음 봤습니다.”

아무리 마왕의 힘을 되찾아 인간의 감정과 괴리가 생겼다지만 인간이었던 그전에도 다른 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류제 신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놀라웠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이 원래 저런 자였다만.”

“아닙니다. 그때는 뭐랄까, 딱딱하고 차가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범인은 절대 다가갈 수 없는…….”

하늘바람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전쟁이고 그가 지고 있는 책임감이 있었으니 더 날을 세웠겠지만 한 세트였던 두 사람이 제대로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제야 류제 신리가 류제 신리로 돌아온 것 같다.

“그만큼 그를 좋아한다는 의미겠지.”

짧게 미소 지은 니냐롯트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서 붉은 케이프를 건네받은 하늘바람은 눈치를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용기를 내서 물었다.

“니냐롯트 폐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호라, 그대는 어떤 것 같나?”

의도를 꿰뚫는 짓궂은 질문에 하늘바람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뭐든, 전쟁 속에서 싹튼 사랑은 평화에서 성장했다. 가만히 있던 루이나는 어흠 헛기침을 하며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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