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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5) (76/112)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5)

아침이 밝는 대로 류제는 렌이 처음 발견된 도시로 갈 채비를 마쳤다.

류제가 영영 가버리는 줄 착각한 아세미는 또 몇 년은 안 돌아올 거라며 껌딱지처럼 안겨 떼를 썼다. 금방 돌아오겠다며 동생을 달래는 그에게 재경이 잘 가라며 마지못해 손을 흔들었다. 아세미를 떼어내 루나에게 맡긴 류제는 느릿느릿 아침을 먹는 렌을 툭 쓰다듬고 고아원을 떠났다.

이슬이 내려앉은 풀밭을 스치며 류제는 짧은 산책에 나섰다. 제립학교 입학 전 아세미에게 치이던 그는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류제는 그때 자주 가던 뒷동산으로 향했다.

푸르른 잡초가 선명한 탁 트인 들판이 새롭다. 못 보던 벤치와 그늘막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숲의 기운이 내려앉은 아침 공기를 만끽하며 심호흡을 들이켠 그는 밤새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신부가 적어준 위치로 이동을 개시했다.

기억을 잃은 렌이 발견된 장소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야 했다. 펠노아를 지나고 호세마타 요새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마족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은 소도시가 하나 나왔다.

류제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수학여행 때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던 숙소가 있던 곳이다.

마족과 사투의 흔적이 남은 도시는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구를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도시 전경이 적당히 내려다보이는 부서진 첨탑에 착지한 류제는 다이어리를 꺼내 지도와 실제 지형을 확인했다.

신부가 말했던 민간인 치료 시설은 마족에게 파손된 건물 안에 있었던 모양이라 전쟁이 끝난 후 환자들은 모두 퇴원하거나 공공병원이 운영하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가고 안전을 위해 해체된 듯하다. 그렇다면 시설 책임자 자리에 있던 사람을 찾아가 탐문하는 게 우선이겠지.

류제는 신부의 지인이 있다던 중소 교회로 향했다. 이곳 교회 형편도 비슷해서 마족의 공격으로 부서진 벽 사이가 다 노출되었다.

류제가 한쪽 벽이 뻥 뚫린 교회를 기웃거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굶주린 사람, 다친 사람 할 것 없이 줄을 서서 무료 배식을 받았다. 전쟁으로 집을 잃은 부랑자부터 보호자 없이 떠도는 아이들까지. 니냐롯트가 노력해도 남아있는 전흔이 류제는 야속스러웠다.

거무튀튀한 부랑자들 사이에 불쑥 나타난 류제는 눈에 띄었다. 눈이 가는 외모와 군인다운 다부진 몸은 특별하게 빛났다. 몇 명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제 삶을 살기 바빠서 굳이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헤친 류제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찾았다.

“누구시죠?”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을 돕던 이 교회의 신부는 낯선 이에게도 친절했다. 류제는 자신의 신분과 그를 찾게 된 배경 등 가타부타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 신부는 생면부지인 류제를 유연하게 반겼다.

“지금 바빠서 그런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신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류제만을 위해 시간을 내주기가 힘든 듯하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일손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몸에 밴 류제도 기다릴 겸 배식을 도왔다.

혼자서 대여섯 사람의 몫을 해냈기에 류제의 봉사는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배식이 끝나고 정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평소보다 훨씬 시간이 절약되었다.

사무실로 그를 안내한 신부가 마실 것을 내왔다. 컵은 가장 멀쩡한 것을 구했겠지만 이가 나가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깨진 창문과 찢어진 커튼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어빌리터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을 찾은 이유가 뭘까요?”

“어빌리터란 건 어떻게 아셨나요?”

그의 혜안에 놀란 류제는 이따금 그의 영향력을 안일하게 여겼다. 신부는 껄껄 웃으며 별일이라며 신문을 가리켰다.

“그야 힘도 장사신 데다 자주 봤으니까요. 덕분에 마족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아뇨… 쑥스럽네요. 저 혼자 해낸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전쟁이 일어난 원흉 마족을 만든 것도 그고, 없앤 것도 그라서 인간의 감사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굳이 관련 없는 일반인에게까지 진실을 꼬집을 필요는 없고. 류제는 다이어리를 꺼내며 본목적을 말했다.

“다름 아니라 한 사람의 행적을 조사 중입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고 제 소중한 사람인데 곤란한 일에 휘말려서요.”

“어떤 분일까요? 거쳐 가신 분들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제립학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렌 지미’입니다. 황토색보다 조금 어두운 머리칼에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막 성인이 된 소년 정도의…….”

“아아, 그 아이. 특색 있게 생겨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번줄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런 이름이었군요.”

워낙 부상이 심했던지라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임시 병동에 홀로 멍하니 벽을 보고 앉은 왜소한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낫지 않고 오히려 점점 벌어져 가서 갖은 수를 다 써보았지만 치료는 불가능했다. 상처 주변이 감염된 것처럼 벌어지니 아픈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 상처가 그들에게까지 전염되면 어쩌나 불안감이 고조되어 신부도 마음이 아팠다.

“그 형제분은 무사하신가요?”

“나아지고 있습니다. 제립학교에서 보호 중이거든요.”

“정말 희소식이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 때문에 잃기엔 작은 생명이니. 마음이 놓입니다.”

안도하는 사람과 달리 마냥 안일하게 방치할 수 없는 게 류제의 입장이다.

렌의 몸은 회복할 힘이 없다. 일반 상처에 쓰는 방식은 효과가 전무했다. 바닥을 드러낸 회복력을 세라가 이끌어내지만 렌에게는 느리게 힐링 팩터를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세라도 평범한 치료로 버틴 것이 용하다고 했다.

“신부님께선 민간 치료 시설에서 사람들을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렌이 그곳에 있게 된 계기나 날짜를 기억하시나요?”

“물론 기억합니다. 알고 오신 건지는 몰라도 제가 바로 그 형제분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 중 한 명이거든요.”

일정이 길어질 줄 알았더니 하늘이 도왔다. 후, 심호흡을 한 류제가 진실을 들을 준비를 마쳤다.

천천히 그때의 기억을 되짚는 신부는 설명하기 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얀 종이에 정갈하게 그어지는 선은 이내 지형을 그려냈다.

“2년 전, 전쟁이 발발한 후 마족들이 날뛰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을 겁니다. 나라카와 가까운 전방 도시는 기간트리카 부대가 마족을 막아도 빈틈이 곧잘 생겨요. 그래서 피난을 못 간 사람들끼리 도시를 지켜내자며 자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감시탑을 세워서 마족이 보이면 사람들에게 숨어라 지시하거나 마족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지요.”

“대단하시네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정말로 대단하신 분 앞에서 말하기엔 부끄러울 규모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습격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청년들이 부족했습니다. 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살피던 제가 그날 감시탑 임무를 맡은 것도 그것 때문이죠. 급하게 팀을 꾸려 경계 중이었는데 멀리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마족이 나타난 줄 알고 십 년을 감수했습니다.”

신부가 감시탑이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의 눈에는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숨을 죽이며 상태를 살피는데 이내 먼지가 걷혔습니다. 망원경으로 보니 기간트리카 군복을 입은 애가 피를 줄줄 흘리다가 툭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숨이 붙어있기에 놀라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도 상처가 심했나요?”

“심하기보다는… 뭐랄까… 제 소견이지만 보통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나아야 하는데 그 아이는 나은 상처가 시간을 거꾸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헤어지기 전만큼 상처가 심하진 않았으니까요.”

역시 힐링 팩터의 부작용이다. 처음에는 다 나은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몸이 회복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비 오는 날 담벼락 진흙처럼 상처가 났던 부분이 무너져 내린다. 지금 렌의 상태와 똑같았다. 전쟁 초반에 그랬던 거라면 어떤 마족에게 당했던 걸까.

“형제분은 깨어날 때까지 죽은 것처럼 잤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죠. 하물며 자기 자신도요.”

“군인이란 걸 알았으면 가까운 부대에 연락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때 상황이 궁금해서요.”

“신분을 증명할 군번줄도 없고 어빌리티를 못 발현해 우리도 어떻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사람 하나에 매달려 있을 정도로 인원이 많지도 않고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애는 연고자를 찾지 못했어요. 기적적으로 저희 교회의 형제분이 그를 알아보기 전까지는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곳에 있었군요. 거기서부터는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또 궁금하신 것 있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그때의 환자 기록도 있을까요?”

“기록이야 시간이 나는 대로 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신부는 책장에서 파일을 찾더니 진료 기록을 넘겼다. 전쟁에 휘말린 신원 미상 부상자들 중 강렬히 인상에 남은 십 대 아이의 기록을 찾아낸 그는 날짜별로 글씨가 휘갈겨진 진단서 더미를 넘겼다.

류제는 진단서 첫 장에서 이곳에 처음 왔었을 2년 전 렌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왼쪽 눈을 가리는 작은 안대를 쓴 것만 보더라도 지금보다 상처가 덜했다.

몇 장 넘겨보니 렌의 몸 상태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건 모르고 싶어도 보였다. 당시의 의사가 어렵게 구한 약들까지 효과가 없었다고 적은 비극적인 내용이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진단서를 끝까지 다 읽은 류제는 그것을 다시 정리해서 신부에게 넘겨주었다.

“자료는 필요가 없는 겁니까?”

“나중에 공증인과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재판에서 증거로 쓰려고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사연 없는 사람이란 없다. 그 소년도 전쟁에 휘말리면서 사연이 생긴 모양이다. 그 소용돌이에서 구원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행운이지. 류제가 떠난 후 신부는 성호를 그어 기도했다.

교회에서 나온 류제는 다음 목적지인 구 알라마니 기술관 본관으로 향했다.

해체 작업을 지시한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과연 그곳에 렌이 머무른 증거가 남아있을까 걱정이 된다. 인기척에 상관없이 땅에 착지한 류제는 작업을 중단했던 공사 인원과 연구원들에게 적당히 인사했다.

“먼 곳까지 수고하십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니냐롯트에게서 곧 류제가 방문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던 연구원들이 그를 환영했다. 류제가 인간이 아님을 아는지라(아니면 그냥 힘든 일을 잊어버릴 정도로 잘생겨서인지) 그들은 해체 작업이 중단되어 손이 붕 떴어도 류제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만족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주세요.”

“암호문처럼 보이는 글이 추가로 발견되지 않았나요?”

“안 그래도 관장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런 도형과 유사한 글자는 없었습니다.”

“호세마타 요새에서 알라마니 기술관까지 단번에 이동 가능한 장비도 확인했습니까?”

연구원은 지체할 것 없이 따라오라며 커다란 기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원래는 고층에 전시되어 있던 기계는 반파된 알라마니 기술관 해체 작업 중에 붕괴 위험이 있어 1층으로 옮겨졌다.

“이야기를 듣고 바로 떠올렸습니다. 스위처. 기술관장님께서 연구하시다가 포기한 아쉬운 발명품입니다. 언젠가는 이걸로 나라카를 정복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하하.”

연구원은 애물단지였던 기계를 툭툭 쳤다. 짐작했던지라 류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거라면 타이머나 쪽지, 기술관에 없었던 렌에 대한 의문점이 해결되었다.

그와 인류의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처음 만나는 계기를 준 장치가 아닌가. 호세마타 요새와 알라마니 기술관 사이 사람과 사람을 바꾸는 장치. 그렇다면 이곳에서 쪽지를 남기고 그를 빼돌린 렌은 호세마타 요새로 갔다는 게 된다.

“사용 시 긴 충전 시간이 필요할 만큼 전력 소모가 큰데 배터리에 사용한 흔적이 있어 이유를 분석하던 중이었습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가 보네요?”

“있고말고요.”

마가릿에게 반파당한 알라마니 기술관에 일부러 찾아와서 스위처를 사용해 류제와 바꿔치기를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 명밖에 없다.

미나에게 속아 요새로 간 류제가 정체를 드러낸 미나에게 당하고 있던 중 갑자기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이동한 수수께끼는 완벽히 풀렸다.

방법은 알아냈다. 부대에서 이탈한 렌이 어디서 뭘 하려고 했는지도 알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가 당해야 할 운명을 렌이 대신했다는 현실에 절망하기 전 어떤 사실이 여태 거슬렸다.

전장에서 미나와 우연히 만나 헤어졌던 날, 미나의 중대가 세뇌당했다는 것은 류제도 미나가 정체를 드러내고서야 알았다. 그녀가 호세마타 요새로 류제를 꼬여낸 건 류제만 알던 함정인데 멀리 떨어져 있던 렌이 어떻게 그걸 알고 움직인 거지?

어떻게 내가 미나에게 갈 것을 미리 알았던 건데? 쪽지에 적어둔 핵의 위치는 뭐지? 자신을 믿으라니, 왜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준 걸까? 확신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1학년 학기 초 마가릿과 싸울 때도 핵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지시했다. 마왕의 기억이 없을 때는 렌의 어빌리티의 일종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류제는 기억을 잃지 않은 렌의 진짜 정체에 의구심이 들었다. 명백하게 이 세상의 이치에 벗어난 존재처럼 보였다. 이따금 생각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행동들도 지금은 수상했다.

“…리……, 신리 소위?”

“아, 네. 뭐라고 말씀하셨죠?”

“재가동된 날짜가 있는데 필요하신가요?”

연구원의 물음에 류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은 날짜 역시 그가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전송되었을 때와 같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복잡한 생각을 뒤로한 류제는 우선 필요한 증거 수집에 집중했다.

“시간과 날짜, 사용 내역까지 모두 준비해 주세요. 나중에 공증인이 찾아올 때 넘겨주면 됩니다.”

“또 필요한 건 있을까요?”

“아직은 없습니다.”

“그럼 기술관 해체 작업은 언제부터 다시 가능할까요?”

“재판이 끝나면요.”

방심할 수는 없으니 짧게 당부한 류제는 인간일 수 없는 신체 능력으로 구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벗어났다.

렌은 수학여행 때 했던 것처럼 스위처를 통해 호세마타 요새로 맞바꾸어졌다. 나라카 근처에서 행해지는 미나의 악몽 마법은 류제도 상대하기 버거웠다. 무슨 수를 썼든 렌이 그걸 홀로 견디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렌이 힐링 팩터를 맞아했던 경위도 이해가 갔다. 그걸 연이어 주사한 점은 미심쩍다. 세니타리 롯 사건으로 힐링 팩터의 부작용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렌이 그 약물을 함부로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상상해 보던 류제는 결론을 내리기 전 나라카 탐사 기지로 바뀐 호세마타 요새에 착지했다. 마족을 없애고 나라카에서 귀환한 이래로 처음이다.

무너진 지반은 물론 보수 작업을 끝낸 요새를 둘러보던 류제는 탐사 기지에서 대기하던 공증인을 불렀다.

“정말 이곳에 당신이 말한 모든 것들을 증명할 물품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반드시 남아있어요.”

렌은 이런 방면에선 그다지 꼼꼼하지 않으니까.

류제는 그때 오싹함을 느꼈던 지하로 내려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크게 무너졌던 지반의 복구를 돕기 위해 만든 계단은 아직 철거되지 않았다.

공증인이 플래시를 비추며 류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맨눈으로도 어둠을 잘 파악하는 류제는 새까만 어둠 속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주변을 플래시로 훑은 공증인이 흔적 없는 지반을 확인했다.

“아뇨,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요.”

류제가 감각을 극대화하였다. 뒤틀리기 시작하는 용인의 사나운 동공이 주변을 살폈다. 시간이 많이 지나 흐려지기는 했으나 사건 현장의 손상되지 않은 부분은 분명히 존재했다.

탐지견처럼 피 냄새가 강하게 나는 곳을 거슬러 올라간 류제는 비에 쓸려가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류제가 손짓하자 공증인이 다가왔다. 그녀 또한 붉게 남은 핏자국을 어렵지 않게 확인했다. 플래시를 비추다 보니 근처에서 반짝거리는 금속 물체가 보였다. 끊어진 군번줄이었다.

“렌 지미의 군번줄 공증합니다. 키아나트리체 기간트리카군에서 나온 것이 확실해요. 렌 지미는 이곳에 있었던 것이군요.”

“병원에서 쓰는 것과 다르지만 이것도 주사용 ‘힐링 팩터’의 빈 통 맞죠?”

“라벨을 보니 알라마니 기술관 테스트용으로 확실합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수의 ‘힐링 팩터’ 사용 흔적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알라마니 기술관 구 본관에 있는 스위처 사용 내역과 아까 말씀하신 교회에서의 진료 기록을 증빙하면 됩니까?”

“네, 잘 부탁할게요. 제 소중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일이에요.”

증거물을 개별로 밀봉하는 공증인에게 류제가 애달프게 당부했다.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외견이 가까이 다가오자 공증인은 뭐든 힘내서 해야 할 것처럼 마음이 일렁였다. 마법이 아닌 것으로 사람을 홀리는 거라면 누군들 트집을 잡으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공증인의 노력을 위해 류제가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좋던 외견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으니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었다.

일 처리가 완벽하게 흐르자 류제는 해 질 녘쯤 기지를 통해 니냐롯트에게 보고를 올렸다. 수고했다는 답변을 들은 류제가 한시름 덜기도 전, 기지 소속 연구원들에게 이리저리 시달리다가 밤늦어서야 고아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옹기종기 모인 어린아이들이 별 이불을 덮을 새벽.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창문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 류제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렌에게 인사했다. 등이 켜져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아직 깨어있다니 걱정되는 한편 기쁘다.

“먼저 자지 그랬어.”

“더워서 잠이 안 오더라고.”

솔직하지 못한 재경은 류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오글거리는 말은 차마 못 했다. 고아원을 나가고 스무 시간 가까이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정신적으로 지친 류제는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생각할 게 많아 보였다.

“어땠어? 뭐라도 찾았어?”

“내일까지면 공증도 끝날 거야. 믿을 만한 변호인도 있으니 재판 때 증언만 제대로 하면 돼.”

“정말 기억을 잃기 전의 내 행적을 알아낸 거야?”

“대부분.”

“…그래서 나는 대체 뭘 했던 거야?”

과거에 무덤덤하던 재경이 관심을 보이자 류제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주둥아리를 나불거릴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응석을 피운다. 류제는 재경의 허벅지에 고개를 파묻고 침묵했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류제는 그가 알아낸 사실들을 조곤조곤 입에 담았다. 재경의 안색은 불신으로 짙어졌다.

부대를 이탈한 그가 했던 기상천외한 행동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허황된다. 마족에게 끌려갈 위기였던 류제를 구하려고 기술관에서 요새까지 순간 이동? 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거니와 재경은 자신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인간이었음을 불신했다.

“말도 안 돼.”

“날 위해서였어. 그 상처는 모두 내 대신이었다고.”

“차…착각이겠지. 생각해 봐.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확실해. 증거도 있어.”

증거가 있으니까 이런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의 렌조차 모르는 과거의 렌은 나를 대신하겠다는 결심이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고개를 든 류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불가능해.”

재경은 과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힘든 날이라는 것을 알아도 역시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네가 틀린 게 뻔하니까 그렇지. 내 짐 속에도 저번에 네가 보여준 문자가 적힌 공책이 있었어. ‘히로인’이니 ‘호감도’니 영문 모를 말들만 줄줄이 쓰여있는데 진짜 미친놈 같았다니까? 난 그냥 좀 이상한 놈이었던 거야!”

“공책이라니. 네 일기장 말이야?”

류제는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였던 일기장을 떠올렸다. 저번에 책장을 봤을 때 없어서 처분한 줄 알았다.

“뭔들! 넌 그냥 이상한 놈의 병신같은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중이야. 그런 말을 하면 다들 널 우습게 생각할 거라고!”

저렇게 말하는 애한테 공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미리 말해주라고 차마 타이르지도 못했다.

좋아하는 만큼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에 렌의 사생활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던 류제는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타인의 일기를 훔쳐볼 인성은 못 되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게 있다면 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확실해질 것이다.

“거기 적힌 내용 자세히 알려줘.”

“뭐? 싫어. 대충 읽었고 진짜 이상한 말들밖에 없어.”

“부탁할게. 그걸 가지고 널 놀리려는 게 아니야. 나는… 렌, 난…….”

보잘것없는 그를 위해 류제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던 재경은 일순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어깨가 고장 난 것처럼 떨려왔다.

“큭… 아……!”

미간이 짜증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구겨졌다. 커다란 게 온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식겁한 재경이 영문을 모르는 찰나 틀어막아 왔던 격통이 몸을 꿰뚫었다.

“렌?”

발작은 갑작스러웠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재경도 혼란스러웠다. 육체가 갈라지는 아픔이 동반하며 붕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세라의 도움으로 이어 붙였던 몸이 결국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윽…으윽. 으… 아파… 끄…으…아……!”

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했다. 류제는 올 것이 왔음을 짐작했다. 세라가 그렇게나 염려했던 리바운드다. 류제는 재경이 발버둥 쳐서 상처를 벌리지 않도록 아프지 않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렌. 조금만 참아.”

“모…못 해. 못 하겠어. 아…으… 너무 아파. 어떻게… 어떻게 좀 해줘… 류제……!”

“천천히 심호흡해. 천천히.”

고통에 잡아먹힌 렌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류제는 차분하게 속삭였다. 소중한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누가 있겠나. 하지만 여기서 동요하면 렌이 더 아파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 했더라. 류제는 침착하게 응급처치 요령을 떠올렸다.

“하…하아, 하… 아픈 건 싫어. 아픈 건 이제…….”

“렌, 날 믿어. 괜찮아질 거야.”

진정하도록 머리를 쓰다듬어준 류제가 세라의 어빌리티를 흉내 내었다. 용인의 힘은 어빌리터보다 우위이니 물론 인간의 몸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치료가 과연 다음번에 렌에게 어떤 부담으로 돌아올지는 몰랐다. 치료를 하는 지금도 소중한 사람의 몸으로 도박을 하는 것이다.

망가져 가는 상처의 살갗이 맞붙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두 사람만의 소란이 분주하다. 햇볕 냄새가 따스하던 이불은 재경의 몸에서 나온 피와 진물들, 물러진 살점들로 엉망이 되었다.

긴 시간 끝에 간신히 진정된 재경은 헐떡거리던 숨을 안정시키며 힘없이 누웠다. 류제의 다리를 베고 떨리는 몸을 억누르는 재경은 언젠가 이번처럼 다시 찾아올 격통이 무서웠다.

“류제, 내 몸은 진짜 나을 수가 없는 거겠지?”

눈물범벅이 된 재경은 행복한 한때를 보내기에는 남아있는 시간이 짧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재판에서 승소할지언정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어떻게든 할 거니까 걱정 마.”

“…루나 누나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마.”

아픔이 완전히 가신 듯하자 류제가 힘없는 재경을 일으켜 세웠다. 힘들겠지만 이대로 두면 붕대가 젖어있어 피부가 물러질 것이다. 촛불에 의지한 류제는 붕대를 풀었다. 짓무른 상처를 닦아낼 솜 대신 그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가장 먼저 오른쪽 어깨의 상처부터다. 피부에 혀를 가져다 대는 류제의 치태에 재경은 저항할 힘도 없었다. 또 저놈이 지랄을 하는구나 내버려 둔 재경은 입으로 직접 피와 고름을 빨아내는 류제의 행위를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손길은 아프지 않고 상냥했다.

마지막으로 왼쪽 발목의 붕대를 푼 류제는 달리기를 곧잘 했던 렌이 떠올라 마음이 쓰라렸다. 이건 렌의 몸 자체의 문제이니 이 몸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거다.

침대에 걸터앉은 재경의 앞에 비장한 기사가 되어 무릎 꿇은 류제가 힘없는 발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다친 상처에 키스하듯 입술을 가져다 댄 류제의 마음은 재경에게 과분했다.

“걱정하지 마, 렌. 내가 아는 넌 누구보다 올곧은 사람이었어.”

공책에 무엇이 적혀있기에 지금 렌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스스로를 의심하는 렌이 안타까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억만큼은 되돌려 주고 싶었다.

류제는 렌의 몸을 낫게 하거나 강제로 기억을 되돌릴 유일한 길을 알았다.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없다. 또다시 과거의 일을 답습하게 될까 두려웠다. 마족처럼 과거에 붙들려 버린 망령을 만들어버릴까 봐.

그게 얼마나 렌에게 큰 고통이 될 줄 알고 있었기에 그 한 발짝을 나갈 수가 없었다.

“덥지? 같이 자도 돼?”

“…마음대로 해.”

지친 재경은 눈을 감았다. 류제는 아직도 뜨겁게 달아오른 렌의 상처를 식혀주며 편히 잘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재경은 깊게 고민했다. 과거의 내가 류제 말대로 행동했다면 나와 류제는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을까? 류제가 나를 위해서 희생하는 건 그런 이유일까?

이런 나는 포기하면 편할 텐데. 기억을 잃기 전의 나를 대단한 사람인 양 말하지만 실상 난 아무것도 없어. 남자인 데다 몸은 약했다.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재경은 짐짓 류제를 외면했다.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나. 그가 마음을 주면 줄수록 상처받는 사람은 류제가 될 것이다.

짧은 여름휴가는 재경의 리바운드가 있던 다음 날 허망하게 끝났다.

고아원에 있는 동안 렌의 멘탈을 다독여 주려 했던 류제도 가족과 다름없는 이들과의 이른 헤어짐이 아쉬웠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천 년의 세월 동안 용인의 힘으로 남을 해치기만 했던 그에겐 치료의 힘으로 렌의 몸에 일어날 부작용에 대해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세라가 꼭 필요했다.

일주일은 머무른다고 했으면서 벌써 먼 아가타로 돌아간다는 청천벽력에 아세미가 매미가 되어 류제에게 들러붙었다. 절대 안 떨어지는 아세미를 류제가 어르고 달랬다.

다음에 보자고 눈물짓는 루나와 어른스럽게 떠나보내는 신부님, 키순으로 줄지어 선 고아원 아이들과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두 사람을 배웅하는 그들은 다음번에 돌아왔을 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했다.

밤새 렌의 상처가 악화된 걸 알아차린 사람이 없어 근심이 놓인다.

보는 눈이 사라질 때쯤 류제가 재경을 안고 높이 날아올랐다.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은 새의 날갯짓 같았다. 재경의 머리칼도 그처럼 휘날렸다. 류제는 그게 추수절의 논 같다고 했다.

발밑 저 멀리 낡은 고아원이 점이 되었다. 오는 것만큼 돌아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새벽의 일로 지쳐버린 재경은 돌아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기말고사가 끝나 여름방학만 기다리는 학교는 적당히 어수선했다. 건물 옥상에 착지한 류제가 괜찮냐고 볼을 쓰다듬어도 재경은 어영부영 대답을 회피했다.

양호실로 향한 두 사람은 세라가 다른 학생의 검진을 끝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고향으로 돌아간댔는데 벌써 돌아온 이유를 세라는 묻지 않았다. 이르게 찾아온 리바운드를 진찰한 그녀는 류제와 함께 앞으로의 방향성을 논의했다.

두 사람의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재경의 몸은 다시 전의 상태를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리바운드라는 현상을 겪어버린 재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싱크홀에 서있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겁났다. 그래서 특히나 뭐라도 다 내어줄 것처럼 구는 류제에게는 모질어졌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계속 말했잖아! 날 내버려 둬.”

어색해도 조금씩 마음을 받아들여 주던 렌이 원상 복귀되었어도 류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제는 지금의 렌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렌이 가지는 과거와 미래를 향한 불안감은 기억을 되찾는다면 괜찮아질까. 류제는 공책을 보여달라 요청했다.

물론 재경은 이상한 망상이나 써진 공책 따위는 마음대로 하라며 내던졌다. 그 공책은 류제 혼자서는 해독이 불가능했다. 내용을 알려달라는 부탁에도 재경은 치부를 드러내는 그것만큼은 거부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렌, 절대 널 비웃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내게만 말해줘.”

“재판에 필요한 증거는 다 모았다고 했잖아. 그게 왜 알고 싶은데?”

“어째서 네가 위험을 미리 알았을까. 그거야말로 네 과거이자 진실이잖아. 넌 알고 싶지 않아?”

공책에 한가득 쓰인 암호는 체계적이라 언어학적 지식이 없는 렌이 만든 건 아니다. 류제가 아는 인류 역사상 이런 문자를 썼던 민족은 없었다. 알면 알수록 렌은 알쏭달쏭한 존재로 변모했다.

류제는 렌이 어떤 마음으로 험난한 선택을 한 건지, 어째서 남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았는지 깊게, 많이, 더 오래 알기를 원했다.

“난 알고 싶지 않아.”

재경은 애원하는 류제를 뿌리쳤다. 내버려 두라며 신경질적으로 말한 그는 침대에 돌아누웠다. 곁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하트 모양 클립이 꽂힌 공책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두 사람은 지쳐갔다. 매미가 뙤약볕 아래에서 합창했다.

일방적으로 거절된 관계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류제는 알라마니 기술관을 통해서 문자 해석을 시도했지만 정보 부족으로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는 동안 여름방학이 찾아오고 예정되었던 재판 날짜는 하루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쪽지 덕분에 새롭게 입수한 증거의 공증도 마쳤으니 재판만큼은 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니냐롯트도 이 정도라면 목격자의 증언 없이도 충분히 무죄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류제는 협조적이지 않은 렌이 서운했다. 니냐롯트와 내일 있을 재판을 논의하고 돌아온 류제는 마지막으로 이 공책도 증거물로서 제출하고 싶었지만 이 문자를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이 과거를 내팽개치니 애가 탔다.

“진짜 그만 좀 해. 네가 찾은 증거들이 진짜라고 어떻게 가정해? 죄다 네 생각일 뿐이야. 내가 널 구했다고? 미래를 봐? 공책에 적힌 내용은 전부 정신이 이상한 놈이 써놓은 허황된 소리라고. 그걸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

여름방학이 되어 학생들이 대부분 본가로 돌아간 기숙사 방 안. 두 사람은 재경이 기억을 잃은 이래로 처음 크게 다투었다.

“그렇지 않아. 이 공책에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알려만 준다면 내가―”

“싫어. 몸이 아픈 게 낫지, 정신이 이상한 놈으로 낙인찍히는 건 더 끔찍해. 그냥 날 내버려 둬!”

그동안의 노력을 전면으로 부정한 재경은 상처받았을 류제를 짐짓 무시했다. 과거 지인들이 기억을 되찾길 바라는 건 안다. 하지만 재경은 자신이 없었다. 시간도 부족한데 만약 끝까지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지금의 그가 대단하게만 보이는 과거의 그처럼 바뀔 수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건 기억을 잃은 그가 아닐 텐데.

혹시라도 그들이 바라는 영웅 같은 모습이 착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별것 아니었을 거라는 두려움도 컸다. 몸이 아픈데 실낱같은 자존감마저 절벽 끝으로 추락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네 과거는 네 거야. 순전히 네 마음이었다고! 그걸 되찾아야지!”

“되찾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야.”

“왜 그런 말을 해?”

“되찾든 말든 아무런 가치도 없어.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기 싫어.”

1년? 1년도 우습다.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 고통스럽게 죽어갈 운명이다. 그런데도 류제는 계속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시간 낭비가 아니야. 네게 의지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날 내버려 둬.”

“렌!”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모르던 그때로 돌아간 렌 때문에 류제는 답답했다. 가시를 세우며 다가오는 사람에게 상처만 주는 그가 안타까웠다.

“내 생각이고 내 몸이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왜 난리야? 이 이상 내게 간섭하지 마.”

재경이 선을 그었다. 모질게 보여도 다 류제를 위해서였다. 또한 모서리가 금이 간 낭떠러지 앞에 선 자신을 위해서였다. 재경은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좌절하면 일어설 수 없을 만큼 그는 궁지에 몰렸다.

류제가 그를 좋아한대도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을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래서 재경은 애원하는 류제를 혹독하게 대했다. 차라리 실망하는 게 낫지 류제가 이보다 더 슬프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널 위해서라도.”

침대로 다가온 류제가 재경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재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날 위해서 하는 거야. 그딴 공책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내일 재판에서 이기면 뭐든 끝나. 그거면 충분해.”

“그걸로 넌 만족해? 그 정도로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네 과거가, 네 마음이 싫어?”

“싫어!”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이 세계에서 함께 배워간 것들도 사라졌다. 함께한 추억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 불에 탄 사진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류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던 재경은 참을 수 없는 격통이 점점 몸을 침투해 가자 뼛속이 아려왔다.

“…으… 크윽……!”

또 리바운드가 시작되었다. 저번에는 약 3주 정도의 기한이 있었는데 이번엔 2주로 간격이 줄어들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잇새로 고통을 참는 비명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괜찮아, 렌. 천천히 숨을 내쉬어.”

“크흑…흑… 제길.”

그동안 세라에게 노하우를 터득한 류제가 치료를 위해 필연적으로 닿았지만 재경이 거부했다. 분명 아플 것이 뻔한데도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렌!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차라리 계속 아픈 게 나아. 차라리… 차라리 희망도 없으면 포기라도 쉽지……!”

재판이 열리거나 말거나, 과거를 알거나 모르거나 몸이 죽어간다.

기어코 리바운드를 수습한 류제는 숨을 헐떡이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해 마음을 달랬다. 치료를 거부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그 행동에 마음이 잠시 동했던 재경은 류제를 밀어냈다.

“이런 것도 이제 그만해.”

“제발, 렌. 포기한다고 말하지 말아 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름다운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류제를 추락시키는 건 항상 재경이었다. 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만 바라는 재경은 솔직한 마음을 끌어내렸다. 렌 지미라니, 실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데 애타게 불러도 현실의 벽은 컸다.

“난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이쯤 되면 알아차려야 할 거 아냐. 난 죽어간다고!”

끈질긴 류제에 질린 재경이 드디어 제 입으로 진심을 말했다. 재경은 울 것 같았다. 누구는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네가 억지를 부린다고 뭐가 달라져. 고집부리고 있는 건 너야!”

“달라져. 분명히 달라져. 제발 내게 의지를 보여줘.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너는 내게 네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미래를 단념한 재경과 다르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던 류제가 울었다. 재경은 과한 기대를 품는 류제가 미웠다. 그런 류제에게 제대로 된 답을 돌려줄 수 없는 자신도 싫었다.

“나도 나를 알고 싶어. 그럴 수 있었으면, 그럴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했어. 하지만 어쩌라고. 이런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내가 얼마큼 비참해지길 바라는 거야?”

“네게 미래가 있다면 달라?”

“왜 당연한 말을 물어?”

그야 당연히 함께할 날들이 더 길더라면 기억을 찾을 의지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공책의 내용이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내용일지라도 그런 과거를 받아들이고 시간이 지나 그걸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성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촉박한 그에게 과분했다.

“나도 못난 소리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살고 싶어. 왜 하필이면 이런 날 좋아하는 건데. 왜?”

실은 류제가 곁에 있으면 가족이 없는 그도 남들 부럽지 않게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수한 감정만 즐기며 행복한 순간에 함께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다. 함께하는 즐거움이 길어질수록 남겨진 이들에게는 슬픔만 남았다.

“내가 왜 그러냐고? 아직도 모르겠어?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거절하는 거야! 내가 없어지면, 그럼 넌 어떻게 해!”

“그만해.”

울음을 삼킨 류제가 말렸다. 렌이 저렇게 된 건 그가 부족해서였다. 후회할 시간도 빠듯하니 탓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있을수록 나아가긴커녕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 말고 제발 널 걱정해. 이기적이게 굴어. 너 자신을 먼저 생각하란 말야. 난 네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라. 그게 내 욕심이야. 렌, 난 혼자 남아도 상관없어.”

“뭐가 혼자 남아도 상관없다는 거야. 울고 있는 주제에 한심한 말 하지 마!”

재경도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해 서럽게도 울었다. 떨리는 손으로 약한 몸을 끌어안은 류제는 결국 그 방법밖에 없음을 상기했다.

“나도 살아서 행복해지고 싶어. 진지하게 너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싶단 말야!”

그 바람에 응답하듯 류제의 동공이 마왕의 것으로 돌아갔다. 벌리는 입에서는 육식동물처럼 사나운 이빨이 드러났다. 자라난 그 이는 창백한 여린 목을 단번에 물었다. 생명을 압박하는 진득한 억눌림이 재경을 자극했다.

“크…흑……!”

그 중심은 증오가 아닌 함께하고프다는 렌의 바람이다. 류제는 어빌리터인 렌의 육체에 깊게 잠들어 있는 피를 일깨웠다. 핵에 의지를 모으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만 했다.

“내 눈을 봐, 렌.”

그는 지금부터 산란기의 연어처럼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렌의 모든 것을 알아낼 것이다. 용인의 눈에 홀려 몽롱하게 뜬 재경의 눈동자를 통해 류제는 기억에 침입했다.

그는 현재 그들이 다투는 기억에서부터 처음 고아원에 와 수녀 루나와 아세미 두 사람과 만난 렌을 찾았다. 그보다 전 과거 민간 시설에 있던 렌은 매일같이 벽을 쳐다보았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던 류제의 앞에 굳게 잠긴 커다란 문이 그를 막았다. 이 이후부터가 렌이 잊어버린 기억일 것이다. 손잡이를 잡고 열었지만 강한 정신 방어계 어빌리티로 얽힌 자물쇠가 방해했다.

“렌… 미안해.”

과거를 보기 위해서 류제는 임시방편으로 렌에게 지배의 문양을 새겨서 휘하에 놓았다. 실이 엉킨 이유는 모르나 이중으로 종속 관계를 이루면 그의 힘을 강제로 우위에 두어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첫 번째 열쇠가 끌러졌다.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디디니 몰아치는 거친 감정의 폭풍에 류제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와 운명을 대신해 맞바꾸어진 렌이 맞이했던 최후, 아무리 증오에 얽매여 있었다고는 하나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혹독하게 이루어진 미나의 폭거. 그럼에도 죽지 않아 다행이라며 류제는 아픈 감정을 삼켰다.

대신 맞바꾸어 그를 빼돌린 렌이 미나와의 전투에서 겪은 일들을 지켜보던 류제는 자신을 때려서라도 호세마타 요새로 달려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펠노아는 마가릿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그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나라카로 끌려가 미나의 손에 강제로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다.

그 미래였다면 인간은 승리할 수 없었겠지. 렌의 희생은 인간을 위해 필연적이었을까.

그걸 알고 싶었던 류제는 폭풍처럼 지나가는 기억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갔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감정의 소용돌이 속 편지를 쓰는 렌. 부대가 서큐버스에게 전멸하고 ‘핵은 마왕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말을 단서 삼아 서큐버스를 해치운 그. 홀로 다른 부대에 배치받고 제립학교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렌은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다.

처절한 심정을 삼키며 전쟁을 반대했건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류제 그가 꽂은 비수들이다. 크게 박힌 언어의 상처는 길게 남았다. 특히나 그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던 재경의 마음을 배신한 이 문장만큼은 더.

“너랑 친구가 안 됐어야 했는데.”

렌의 시선에서 보는 미나의 비웃음도 몰랐던 사실이다. 렌의 절박함은 상상보다 더했다. 왕녀의 입에서 전쟁을 시인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미노타의 침공이 있기 전날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렌은 밸런타인데이 때 일로 큰 상처를 받았지만 류제 그가 유네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거짓말하니 크게 안도했다.

불안불안하게 떨려오는 심정이 잔잔해졌다. 고작 그 초콜릿이 뭐라고? 그건 류제 그가 질투를 참지 못하고 왕녀와 함께 입 속으로 넣어버린 것인데.

아아, 렌의 기억 속에 그가 있었다. 얼마나 치졸하고 한심했는지 보기 싫어도 보였다.

추가시험 공부를 한답시고 밴드부가 쓰는 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렌은 쓸쓸해 보였다. 기숙사 방에서도 계속 혼자였다. 그럴수록 렌은 일기장에 집착했다.

어째서 혼자서도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었는데. 류제의 마음을, 타인이 소중하게 여겨주는 마음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아 밉다는 이유로 렌의 진심을 오해했었다.

세니타리 롯 사건으로 부상을 입기 전에도 렌은 무언가에 쫓겼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재 의의에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강박적으로 굴었다.

그는 계속 공책을 확인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태평하게 일기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과 달랐다.

“선택에 휘둘리지 말거라, 류제 신리.”

언젠가 봤었던 수상한 할머니가 류제 그에게 경고했다. 늙은 몸으로 한계를 넘어서 어빌리티를 사용한 그녀는 먼지가 되어 다른 공간에 삼켜졌다. 렌의 마음에 동감한 류제는 그녀가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류제의 앞에 나타나 마왕의 일과 과거의 일을 설명해 줘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렌은 그걸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유네의 납치 사건이 있던 날 아침에도 렌은 공책을 확인했다. 어쩌면 렌은 공책을 채워나가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주절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가 그런 걸 알았던 걸까.

행복해야만 했던 수신제 속 불안. 그 와중에 그가 했던 가짜 고백이 렌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그때의 심정에 동화된 류제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라 하놋은 예언과 운명의 아이를 논했다. 류제는 렌의 어빌리티가 ‘미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했다. 그런 어빌리티는 알지 못했다.

드라코니스 입자로 미래까지 엿본다고? 용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류제는 아무리 드래곤의 흔적이 위대해도 그것은 현재에 기반을 둔 것이지 운명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강력한 힘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사라 하놋과 렌의 대화를 들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류제는 답을 더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무덤 앞에 홀로 앉아있던 렌이 울고 있었다. 불꽃놀이를 보았던 날. 비키와 화마의 군주의 두 번째 만남이 있기 전에는 그는 마냥 행복했다. 즐겁게 그와 손잡으며 라우라 축제를 즐겼다.

공책은 맥거핀처럼 등장했다. 비키가 펜던트를 잃어버린 날에도 그는 류제와 싸운 후 공책을 보고 있었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온 렌이 새 공책을 꺼내 첫 장을 채웠을 때,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공책은 기분 좋은 기대감만 써 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운명의 순간. 그와 렌이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던 바로 그날까지 왔다.

비키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기 전 렌은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 전의 과거를 보려던 류제는 한 발짝 더 나가자 새까매진 기억 속에 잠입했다.

그를 가로막는 거대한 문이 기로를 방해했다. 류제 그가 온 힘을 다해 밀어붙여도 소용없었다.

“어디까지 들어올 셈이야?”

단단한 문 위에 앉은 자는 그가 아는 인물이었다. 오만하게 미소 짓는 그녀는 렌과 닮았으면서 달랐다. 그녀는 렌일 수 없고, 렌은 그녀일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사소한 문제는 태클 걸지 않았다.

“방해하지 마.”

“안 돼. 여기서부터는 이 세계의 영역이 아니야. 선을 지키라고, 류제 신리.”

“당장 비켜. 넌 이미 죽었어. 나와 처음 봤을 때부터 넌 죽어가고 있었지. 넌 날 방해할 수 없어.”

이미 죽어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야만 하는 그녀가 그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류제의 경고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게 내 마지막 일이야, 류제 신리.”

“왜 날 가로막는 거지? 아직도 이룰 게 남았나? 로라 하놋.”

류제는 알아야만 했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렌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 진실은 분명히 이 문 너머에 존재했다. 그 앞길을 왜 그의 전생과 함께 백여 년 전에 죽은 로라 하놋이 방해를 하냔 말인가.

“그래도 안 돼.”

“이유를 말해.”

문으로 접근하는 류제를 밀쳐내는 로라 하놋은 이미 존재가 흐릿했다. 렌과 닮은 외견이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과 행동은 충분히 수상했다. 그녀가 그를 가로막는 이유 또한 렌과 연관이 있을 게 분명했다.

류제의 주변을 도는 로라 하놋은 소풍이라도 나온 양 가볍게 뜀박질했다.

“넌 이 기억을 매개로 그를 마족으로 만들 테니까. 내 목적은 마족이라는 불운의 찌꺼기를 세상에서 없애는 거야. 네 행동은 내 철칙에 위배돼.”

그녀는 그를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류제는 절박했다.

“난 렌을 증오에 사로잡힌 존재로 만들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 안에 있는 기억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넌 널 위해 희생한 이 애를 마족처럼 불행한 존재로 남길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그녀의 염려는 진심이었다. 불행하게 죽어버린 자의 불쌍하고도 외로운 진실을,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고 신재경이 있기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작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하찮은 소원을 빌어 이곳에 온 신재경을 위해서?

“나는 렌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 거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더 조각나겠지. 나는 렌에게 정당한 기회를 주고 싶어. 그뿐이야.”

그녀가 원했던 대로 마왕은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이레귤러의 침입으로 길이 엇나갔어도 차갑게 식었던 마왕의 감정이 죽기 바라는 것은 아니다. 로라 하놋도 마왕이 인간을 더 길게 오랫동안 사랑하기를 바랐다.

“내가 너를 여기에 가둬버리지 않도록 해줘.”

그녀가 류제를 막은 것은 경계심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비키자 커다란 문이 조금씩 열려 빛이 흘러 들어왔다. 류제가 머뭇거림 없이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나라쿠바라.”

이전 육체를 이르던 이름을 들은 류제가 마지막으로 로라 하놋을 바라보았다.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일까.

“너를 배신해서 미안했어.”

마지막이라는 걸 아는 듯 로라 하놋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거의 소멸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떤 의도로 사과한 건지 류제는 이해했다.

“용서할게.”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열렸다. 문 안에서 보이는 거대한 진실의 흐름에 쓸려간 로라 하놋은 마침내 사라졌다.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진실이 드러났다. 기나긴 끝에 류제는 드디어 이 세상의 진실과 마주했다.

우리는… 나는 네가 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구나, 렌. 류제는 손을 뻗어 그만의 렌을 드디어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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