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4)
렌 지미의 재판은 다른 제립학교 학생들이 한창 여름방학을 만끽 중일 때로 지정되었다. 반박 증거가 부족해 당장이라도 군 법원에 렌을 소환해 유죄 판결을 내리면 끝장이지만 니냐롯트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었다.
재경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정상참작 해서 기껏 몇 개월 수감되고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다는 게 전부다. 그러나 수감될 짧은 시간도, 명예도 류제는 놓치기 싫었다.
학교에 남아 렌의 수발을 돕던 류제는 멈췄던 증거 수집을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렌을 데리고 고아원에 내려가려던 류제는 귀찮은 장벽과 마주했다. 보호관찰 대상인 렌이 학교를 나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직접 나서 처리하기 힘든 일들은 니냐롯트에게 맡긴 류제는 고아원으로 향할 날짜를 방학식 다음 날로 간신히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는 학교를 나가 홀로 조사를 이어나갔다.
재경이 제립학교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까. 녹는 양초처럼 무너지던 그의 상처는 순조롭게 치료되는 것처럼 보였다. 모래 위에 조심히 누각을 세우는 심정인 세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처에 불안해했다. 재경의 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누구도 몰랐다.
재경의 병명은 세라를 통해 공식적으로 힐링 팩터 중독으로 인한 회복 장애로 판명 났다. 현재 인류의 힘으로는 나을 수 없는 불치병이라 그녀의 어빌리티로 오래 버텨도 1년이라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이 진단서가 그의 재판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길 바랄 뿐이다.
그 소식을 전해야 했던 세라나 들어야만 했던 렌을 곱씹은 류제는 말을 아꼈다. 기껏 밝아졌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힘겨운 치료가 그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는 말은 류제조차 믿기 힘들었다.
그다음 날, 류제는 얼굴을 가리던 앞머리를 잘라냈다. 버릇이 된 건지 머리를 자르더라도 앞머리만큼은 눈을 가리는 정도였는데 눈썹이 얼핏 보일 만큼 짧게 자른 이유는 단순했다. 이 얼굴을 렌은 좋아해 주었으니까. 얼굴이 더 잘 보여야 렌이 그를 더 의식해 줄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런 사적인 감정 말고도 다른 목적이 더 컸다.
약을 먹고 잠든 렌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침이었다.
류제의 무분별한 마법 사용이 연이어 감지되자 어제 알라마니 기술관 담당 연구원이 류제에게 경고차 방문하겠다고 공문이 왔다. 과거 용인의 육체를 일깨운 류제는 협약되지 않은 마법은 지양하겠다 약조했다. 아가타로 돌아온 류제가 절제하지 않고 마법을 쓰는 건 인간의 입장에서는 경계할 만했다.
“하여튼 고위급 마법만큼은 금하길 바랍니다.”
“친구 일로 바빠서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말은 공손하지만 몸은 거만하게 앉은 류제는 연구원과 마주 보는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손가락을 게으르게 까딱거렸다. 앞에 있는 인간을 향한 존중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연구원은 저 걸어 다니는 재앙이 인간에게 적의를 가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새까만 장막으로 가리지 않는 투명한 얼굴이 아침 해에 어슴푸레 빛났다. 빛과 어우러진 경이로운 조화를 보이니 신이 빚은 생명체라 함은 저걸 이르는 말일 것이다.
저런 것이 마왕이라니. 사람을 홀리는 용모를 쳐다보면 성별을 불문하고 매혹에 빠져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흠, 헛기침을 한 연구원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압니다. 그래도 저희 입장이란 게 있으니 자제를 해주시는 게…….”
“당분간은 이걸로 봐줘요.”
자른 머리카락 중 일부가 든 작은 주머니를 류제가 책상 위에 던졌다.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이 주머니를 열었다. 새까만 머리칼들. 용인의 비밀을 풀고 싶어 하는 기술관장이 류제에게 달라고 그렇게나 애원하던 신체의 일부였다.
남의 털을 원하다니 변태스러워서 무시했다만 이 정도 뇌물이면 기술관도 당분간 압력을 최대한 무시하고 그를 내버려 둘 것이다.
“하아, 알겠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인간의 존재는 저희 입장에서는 행운이겠죠.”
얌전했던 류제 신리가 과격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인간일 적부터 함께했던 단 한 명의 친구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십수 년 동안 마족을 연구해 온 연구원은 인간을 위해서 헌신하는 마왕이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마왕이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건 좋다. 그러니 기술관 측은 그 인간이 전쟁에서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언정 적잖은 호의를 베풀어 류제 신리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인간을 괴롭혀 온 마왕이 인계에서 활동하는 게 탐탁지 않은 자들의 눈에 거슬리게 된다.
인간과 어울리는 길을 택한 류제 신리는 긴 시간 동안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들을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가야 한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죽어가는 게 싫어 폭주할 거라면 그들은 차라리 마왕에게 인간의 덧없음을 끊임없이 인지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잔인한 말을 했다.
“걱정 안 해도 인간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적어도 왕녀가 키아나트리체를 다스리는 동안은.”
볼일을 마친 류제가 책상 위에서 발을 내렸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어 복종해야 할 것만 같은 기운을 휩싼 류제 신리는 인간을 흉내 내며 인간과 어울림에도 분명 인간과 괴리가 존재했다.
그가 아직 제립학교 1학년일 때부터 건강검진을 봐주던 연구원은 같은 듯 달라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창문 뒤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주행성 습성을 보이는 인간답게 날이 밝아오자 제립학교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활기를 찾아갔다. 시간이 되니 기숙사에서는 변함없이 시끄러운 기상 방송이 울리고 더 이상 인류의 미래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은 밖으로 기어 나와 오늘도 열심히 등교할 준비를 했다.
내일부터 1학기를 마무리 지을 기말고사가 시작된다. 꼭 1등을 하고야 마는 비키나 연구원, 왕실 쪽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면 학생들은 시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코앞이라지만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군에 소속되려던 학생들은 전쟁을 겪고 마족이 사라지자 졸업 전까지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더 급했다.
시험은 낙제만 안 하면 된다는 안일한 목표를 가진 그들은 방학 동안 꿈을 찾는 여행을 떠난다거나 부모님과 상담을 할 거라는 희망 사항을 떠들었다.
“아, 그래. 나 학교에서 류제랑 같이 있는 걔 봤는데.”
“누구?”
“렌 지미.”
그러던 3학년들, 아니 뿔뿔이 흩어진 과거 1학년 8반 학생들 사이로 어떤 소문이 흘러 들어왔다. 꿈을 찾기 전 그들이 영영 마음의 짐으로 두던 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으나 미노타가 마족에게 세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을 호위하며 인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마족과 싸우다 친구를 잃자 그들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며 반발하던 렌 지미의 외침을 하나둘 떠올렸다.
마족이 사라지고 미노타 군인들의 세뇌가 풀리자 미나가 제립학교 학생들에게 걸어놓은 세뇌도 풀렸다. 고장 났던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오니 그녀들은 뇌리에 남은 렌의 외침에 더한 죄책감을 품었다. 그들은 고작해야 또래 아이에게 말도 안 되는 죄를 덮어씌워 독한 짓을 하고 말았다.
종전이 선포되고 천신만고 끝에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학교장의 연설을 통해 미나 플로리아가 학교에 숨어든 마족의 끄나풀이었음을 들었다. 이어 그들이 기꺼이 참전했던 미노타와의 전쟁 또한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마족의 음모였음도 알았다.
다시 학교생활로 돌아온 그들은 어째서 옳은 말을 했던 렌에게 뾰족한 행동으로 돌려주어야만 했는지 합리화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당시 제립학교 분위기 속에선 그게 맞았다고 타협하려고 해도 그들은 고작해야 같은 반 친구에게 책임을 떠넘겨 잔인하게 굴지 않았나. 그 도덕적 불편함은 오늘 이 대화로부터 떠올랐다.
“렌이 학교에 돌아왔다고? 무슨 반인데? 난 왜 못 봤지?”
“사정이 생겨서 1학년으로 편입되었나 봐. 교복이 1학년 거더라고. 부상을 심하게 당했다던데 그것 때문에 기억이 좀 오락가락한다네. 우연찮게 마주쳤는데 날 못 알아보더라.”
“아, 나도 소식 들었어. 유네가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거든. 군 재판을 받는다는데?”
“저…정말? 왜? 뭐가 잘못됐대?”
“이유는 못 들었어. 근데 일단… 유네한테는 나중에 가겠다고만 했어. 막상 들으니까 용기는 안 나서.”
재판이라니. 전쟁에서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만큼은 그가 원치 않던 현실이었다. 싸우는 걸 두려워했고 참전하기를 꺼렸지만 상황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미래에 저항한 그는 현재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력하게 걸어갔다.
“이제 와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해. 기억도 안 난다며.”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지금 와서 찾아가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무섭거든. 우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으니까.”
현재 3학년들에게 공백의 2년이라 불리는 그 전쟁으로 그들도 많은 친구, 가족을 잃었다. 기껏 마족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는데 살아남은 사람마저 잃기 싫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존재가 당장 옆에 있는데 의도한 게 아니었다며 평생 모르는 척하고 살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녀들도 용기를 내었다.
그녀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렌은 상처나 군사재판 등으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만 한마음으로 모인 친구들은 렌 지미와 연결점이 있는 유네를 찾았다. 쉬는 시간에 불이 켜진 요리 동아리로 온 학생들은 조심스레 동아리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 아, 너희들!”
오늘도 렌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놀란 유네와 비키가 어색해하는 그녀들을 맞이했다.
렌의 기억을 되살려 줄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 몇 번 제안했다 거절당했던 유네는 친구들이 한꺼번에 찾아오자 불안 반, 걱정 반의 심정을 참았다. 뭐든 오늘 렌에게 많은 손님이 찾아갈 모양이다.
* * *
떠오른 해가 땅을 달구고 남중했다.
오늘은 류제가 볼일이 있어 늦는다고 했기에 비키와 유네, 재경 세 사람만 옥상에 모이기로 했다. 귀찮게 구는 류제가 없어도 재경은 어느새 이곳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던 재경은 이윽고 옥상 문이 열리자 의자에서 등을 뗐다.
“렌 군, 많이 기다렸어?”
“딱히.”
퉁명스럽게 굴려는 건 아니고 오늘은 류제도 없는데 비키와 유네 뒤에 다른 여학생들이 보여서 긴장했을 뿐이다. 전부 3학년 교복을 입고 있어 거리감이 들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재경이 경계하니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유네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렌 군, 이 친구들은……!”
“괜찮아, 유네. 우리가 알아서 할게.”
“뭐…뭐야? 뭔데?”
충고를 듣고 기억을 잃은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대표로 오게 된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재경에게 편지가 붙어있는 디저트 봉투를 내밀었다.
루나가 보여주었던 사진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이들은 또 누구인지 어리둥절한 재경에게 한 사람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거 받아줬으면 해서. 머…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대. 사과의 선물…인데 혹시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밸런타인 때.”
투명한 선물 봉투 안에 든 것은 파베 초콜릿이었다. 낯선 여학생들이 몰려오더니 사과를 한다는데 누군가 잘못한 것이 있었나 재경이 멀뚱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까이서 본 상처는 그녀들의 예상보다 심각했다. 같잖게 잘난 척하던 잔망스러운 얼굴은 붕대로 반쯤 가려지고 오른쪽 팔은 아예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 기대놓은 목발로 미루어봤을 때 걷는 것도 멀쩡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까지 신경 쓰기 힘든 거 알아.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건 뭔가 염치가 없어서.”
“그… 우리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돌아오길 빌게.”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
“어…어? 뭐… 그…그러든가.”
좋든 싫든 1년 동안 추억을 쌓으며 함께한 사이인데 렌 지미는 그녀들을 낯선 시선으로 훑었다. 누군가 렌 지미에게 삼류 드라마 연극 대본이라도 준 것 같았다.
그녀들은 감히 힘내라느니, 너를 믿는다느니 하는 약속했던 말조차 꺼내기 머뭇거렸다. 일면식도 없을 사이에 괜히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눈에 빤히 보이는 동정을 보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응원할게.”
대단한 짓을 할 듯이 굴던 그녀들은 재경이 초콜릿을 받아주자 생각보다 순순히 떠났다. 류제처럼 귀찮은 참견쟁이가 생기는 것일까 주춤했던 재경은 압박감이 사라지자 숨을 돌렸다. 또 어안이 벙벙했다.
“누구야?”
재경이 닫힌 옥상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장 친했던 류제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들이 기억난다면 그것도 이상하겠지.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꺼내 놓던 비키가 덤덤히 설명했다.
“우리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
“근데 나한테 왜 사과해?”
전쟁 전에 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재경은 소포장된 파베 초콜릿을 들어보며 의문을 표했다. 비키와 유네는 렌이 기쁜 기억부터 돌아오는 그날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뭐든 아무래도 좋지만.”
재경은 살다가 별일이 다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몇 개의 편지를 뜯어본 재경은 과거의 자신에게 전하는 마음을 읽으며 소외감을 느꼈다.
그 감정에 답할 자격이 없으니 그는 말없이 편지를 접어 다시 넣었다. 요즘 유네와 비키가 점심으로 만들어주는 건강식으로 위장에 자신감이 생겼기에 초콜릿은 디저트로 남겨두었다.
“오늘 점심은 뭐야?”
“흠흠, 기다려봐.”
쉬는 시간 동안 만든 도시락을 꺼낸 유네가 재경을 위해 미지근한 보리차를 따라주고 손수건 위에 숟가락과 포크를 올려두었다. 대망의 도시락은 유네의 입에서 나온 효과음과 함께 열렸다.
“짠짜라쨘. 오늘은 달걀로 만든 볶음밥이야. 당근이랑 콩도 잘게 다져서 렌 군이 먹기도 편할 거야.”
“난 두부랑 버섯으로 만든 구이. 기름은 제거하고 간도 강하게 안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
속이 자주 안 좋아지고 구강에 적잖은 문제가 있어 저작이 힘든 재경을 위해 두 사람이 최대한의 배려로 고안한 식사다. 일반식보단 맛없겠지만 죽이나 미음에 질린 재경에게는 호화로웠다.
“그러고 보니 류제 그놈은 밥을 안 먹더라? 마족들은 다 그래?”
아침에 그를 교실로 데려다준 류제가 오늘은 쉬는 시간마다 찾아올 수 없다며 외로워하지 말라 했는데 진심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점심도 먼저 먹으라고 했던 류제를 떠올린 재경이 웬일로 그에게 궁금증을 보였다.
저번에 봤던 마족 모습도 그렇고 어째서 인간인 척 인간과 어울리는 건지, 마족이 어떻게 제립학교에 입학한 건지, 왜 높으신 분들은 묵인하는 건지 재경의 상상력으로는 요 며칠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우리 시선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놈이라서 그래.”
“마족들은 인간을 먹는다며? 걔도 그래?”
“아니, 걘 마족이라기보단 마족보다 위에 있는… 쉽게 말해서는 마족들의 왕이야. 용인이라고 한대.”
“용인? 에×랜드야? 용인은 뭘 먹는데?”
“으음, 글쎄. 딱히 뭘 안 먹어도 되는 거 아닐까. 근데 렌 군, 에×랜드는 뭐야?”
“몰라. 환상의 나라인가.”
재경도 왜 그런 말을 해버린 건지 알쏭달쏭했다. 뭐든 류제가 인간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운다면 키아나트리체는 벌써부터 뒤집혔을 것이다.
류제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복이 없다는 소리에 적잖이 안타까워진 재경은 자신 몫의 점심을 섭취하려 한 숟가락 떴다. 체온 정도로 식어서 먹기에 딱 알맞았다.
“렌 군, 어때?”
“맛있어.”
“유네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니까. 내 것도 먹어봐.”
“저번처럼 소금하고 설탕을 헷갈린 거 아니지?”
“아니야!”
처음 비키의 요리를 먹었을 때는 미적지근하게 오묘한 맛 때문에 거의 뱉어냈는데 며칠 사이 무섭게 성장한 비키의 수제 요리는 입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재경이 미심쩍게 두부를 하나 건져서 먹으니 그럭저럭 평범했다.
“안 헷갈렸네.”
“흥, 당연하지. 이 비키 셀로니아가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할 줄 알아?”
혀와 어금니로 두부를 잘 짓이겨 식도로 넘긴 재경은 밥을 얻어먹는 그가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준 두 사람이 감격스러워하는 지금이 조금 웃겼다. 뿌듯해하는 비키와 유네도 재경과 속도를 맞추어 식사를 했다.
며칠 동안 묵묵히 두 사람의 호의를 받아주던 재경은 문득 든 소감을 필터 없이 내뱉었다.
“근데 너희들은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난 기억을 못 떠올리는데.”
“잘해주면 안 돼?”
“…기억이 없는 내가 너희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나 생각 중이야.”
솔직히 재경의 입장에서 이런 호의는 부담스러웠다. 우르르 몰려온 친구들이 전해준 초콜릿은 먹어도 그 안에 딸린 편지는 알 수 없는 말들 천지인 것처럼 재경은 비키와 유네가 만든 점심 식사는 맛있지만 도시락에 들어갔을 노력과 인내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그들의 원하는 걸 돌려줄 수 있을까 무서웠다.
“넌 우리가 함께하는 게 싫어?”
“너흴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어차피 난…….”
어제도 세라가 그랬다. 길게 봐도 1년이라고.
불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상처받을 말을 내뱉지만 재경도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류제를 통해 나쁜 소식을 넌지시 들었던 두 사람도 어두울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했다. 묵묵히 생각하던 유네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렌 군,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기억을 잃는 병에 걸렸어.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갔지. 할아버지가 우리를 기억 못 한다고 해서 함께했던 세월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유네가 웃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1학년 동안 유네는 렌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덕분에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부모님이나 어빌리티가 아닌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가치를 발견했다. 그 유대감으로 이어진 마음이라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뭐든 해줄 수 있었다.
“렌 군은 언제까지나 렌 군이니까. 우리는 그저 렌 군이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거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
류제도 그렇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정말 이들의 호의를 생각 없이 받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잠시 생각하던 사이 누군가가 돌풍을 일으키며 옥상 위에 착지했다. 까마득한 위에서 떨어졌다고 하기에는 사뿐하다. 휘날리는 검은 머리를 정리하는 자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기상천외한 놈이었다.
“류제!”
“후우, 아가타는 시원한 편이네. 뭐 하고 놀았어?”
타이밍 한번 좋구나. 비키는 덕분에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화낼 뻔한 자신을 달랠 수 있었다. 밥을 우물거리던 재경이 보리차를 마시며 목을 넘겼다.
“별로. 아무것도.”
“점심은 아직 먹는 중이야?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구나.”
저번처럼 또 의자를 만들어내 털썩 주저앉은 류제는 익숙한 사람들을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테이블을 둘러보던 류제는 버젓이 꺼림칙한 기운을 내뿜는 비키의 도시락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키, 너 아직도 포기 못 했어? 렌, 또 속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저런 건 안 먹어도 돼.”
“남의 음식을 독극물 취급하지 마!”
“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기미 상궁을 자처한 류제가 비키가 만든 반찬을 한입 집어 먹었다. 저번처럼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맛일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랐다. 천하의 요리 똥손 비키 셀로니아가 감히 인간이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다니 인간만사 새옹지마다.
재경은 류제가 평범하게 인간의 음식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남몰래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 짧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류제는 기지개를 꾹 켜며 평화를 만끽했다.
“렌, 입가에 묻었어.”
“아, 어. 몰랐네.”
“잠시만.”
밥풀 하나를 떼어낸 류제가 그걸 제 입에 날름 집어넣었다. 오한이 드는 오글거림에 오갈 곳 없는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도시락에 고개를 처박은 재경은 묵묵히 밥만 먹었다. 앞머리가 잘리니 알겠는데 류제의 시선은 대부분 렌에게 향해있었다.
“남부는 어땠어?”
밥풀 하나도 걱정되면 아예 하나로 합체하지 그래. 비키는 쯧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럭저럭. 수확은 별로 없었어.”
비키와 유네를 소개해 준 후부터 류제는 이따금 렌을 두 사람에게 맡기고 밤 포함 하루 대여섯 시간 정도 제립학교를 비웠다.
재판을 뒤집을 수 있을 증거는 여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다. 그렇기에 고아원으로 가서 렌의 과거를 거꾸로 추적하기 전, 모았던 다른 증거를 공식적으로 등록하기 위해 류제는 겸사겸사 남부로 향했다.
“하, 맛있었다.”
오늘도 평범한 나날이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초콜릿을 받은 것을 빼면 평소와 다름없었다. 긴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재경은 새롭게 붕대를 갈고 내일 다시 볼 두 사람과 헤어졌다.
“그럼 렌 군, 내일 또 보자.”
“수업 때 너무 잠만 자지 말고. 그러니까 밤에 진통제를 먹어도 잠이 잘 안 오는 거야.”
“응, 너희도 내일 시험 잘 봐.”
5교시 수업을 위해 두 사람은 3학년 교실로 돌아갔다. 재경은 이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만큼 친근감을 느꼈다.
옥상에는 류제와 재경 둘만 남았다. 앞머리가 짧아 진지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류제는 다이어리를 꺼내서 무언가를 열심히 탐독하는 중이었다.
류제가 말이 없자 혼자서 어색해진 재경은 모르는 애들이 주고 간 초콜릿을 꺼내보았다. 속이 안 좋아 새로운 걸 먹는 건 무서웠지만 비키와 유네가 먼저 맛보는 걸 보고 왠지 먹어보고 싶었다.
“별로 안 다네.”
오랜만에 주전부리를 먹으니 입이 즐겁다. 안에 든 편지 내용을 떠올려보던 재경은 차라리 단체 고백 같은 거라면 좋겠다는 망상에 헛웃음도 안 나왔다.
단체 고백에 어울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류제지. 저거 봐. 짜증 나게 앞머리는 왜 잘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얼굴, 분할 정도로 잘생겼거든.
힐끗거리고 있으려니 시선을 느낀 류제가 어느새 재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재경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건 뭐야? 그것도 유네가 만든 거야?”
“아니, 다른 애들이 줬어.”
“들? 누구?”
“몰라. 비키 말로는 옛날 우리 반 친구들이래. 뭔가 잘 모르겠는 말만 하고 가더라. 나한테 사과하고 싶다는데.”
그 말을 들은 류제가 잠시 혼자 생각에 빠졌다. 이후 입꼬리를 온화하게 올린 그가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제 인간을 마냥 증오할 수가 없었다.
“그거 맛있어?”
“그럭저럭.”
“나도 먹어봐도 돼?”
“그러든가.”
“넣어줘. 입에.”
뻔뻔한 요구에 할 말을 잃은 재경이 류제를 노려보았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길었던 앞머리가 오늘 아침에는 짧게 잘려 훤히 드러난 얼굴로 누워있었지. 허락도 없이 침대에 침입하는 건 반쯤 포기다. 물론 류제와 함께 자면 쾌적한 수면에 들 만큼 한여름이 시원해지지만 평범한 친구 관계로서는 엇나간 감각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빨리.”
류제가 혈색 좋은 입을 가리키며 독촉했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못마땅하던 재경은 자기가 그렇게 좋나 뚱한 표정을 짓다가 치기도 모르고 들이대는 류제의 입에 초콜릿을 쑤셔 넣었다.
그것도 만족해서는 히죽 웃는 얼굴이 진짜 짜증 날 정도로 잘났다. 재경은 입이 절로 삐죽거렸다.
그래서 류제는 나한테 뭐지? 뽀…뽀뽀까지 한 걸 보면 날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나와 사귀는 사이였던 건가? 하필이면 나랑? 진짜 왜?
“고마워.”
“흥.”
껄끄러웠던 재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필이면 시간이 널널해서 탈이다. 재경의 오늘 5교시는 기간트리카 선택 수업이라서 슬렉터가 없는 그는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류제도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는 걸 보면 이번 학기는 정말 포기했나 보다.
운동장에서는 웅성거리는 백색소음이 생각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재경의 한가한 시간을 지켜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일로 바쁜 건지 자주 들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훑던 류제가 입 안에 남은 재경의 손바닥 감촉에 입맛을 다셨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뭐야?”
구름 모양을 보며 사물을 상상하던 재경이 오늘따라 얌전한 류제를 흘기다가 넌지시 물었다.
“어? 아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답하는 류제의 시선은 계속 다이어리에 머물렀다. 렌이 부대에서 떠난 후의 목격자가 있대서 나이엔힐리아에 갈 겸 찾아갔지만 역시 목격담과 흐릿한 기억만으로는 확신이 부족했다. 목격담 장소가 서부 리엔달로니아 협곡으로 가는 길목이니 고아원 때문에 연관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말고사 공부라도 하냐?”
“뭐? 하하, 아냐.”
사실을 안다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해 류제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런 공부가 아니라 렌을 찾기 위해 1년간 키아나트리체를 돌아다니면서 모았던 증거 중 재판에서 효력이 있을 증거가 새로운 증거에 부합하나 되짚는 것이다. 뭘 하든 관심 없던 렌이 웬일로 류제에게 기웃거렸다.
“뭔데. 나도 보여줘.”
“앗…….”
재경이 슬금슬금 넘겨다보자 커버를 덮어 숨기려던 류제는 손을 살랑거리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다이어리를 놓치고 말았다.
고작 바람 때문에 중요한 물건을 떨어뜨리다니, 한때 마족을 만들어내 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범인이라지만 허점투성이다.
덕분에 다이어리에서 류제가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두었던 온갖 종이와 지도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축소해 놓은 키아나트리체의 지도는 대부분 X라고 표시되었다. 얼핏 보이는 자료들은 모두 렌 지미에 관한 정보였다.
유네와 비키 말로는 류제가 그를 찾기 위해 키아나트리체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했었지. 류제 저놈이 한량처럼 굴어서 반신반의했는데 그 빼도 박도 못할 증거품이 눈앞에 날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류제는 허둥지둥 메모들을 주워 담으려고 했다. 바람에 날리기 전에 쏟아진 자료들을 마법으로 모으려던 류제는 주변을 떠돌던 드라코니스 입자가 반항하자 당황했다. 그 틈에 몇 가지 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미―”
미나? 류제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위해 노력한 증거들이 몸을 감싸자 재경은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 치밀어 올랐다. 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류제가 차라리 낫다. 역시 나한테 키…키스한 건 진짜로 좋아해서 한 건가.
몹쓸 망상을 하는 동안 바람에 날린 쪽지 하나가 재경에게 날아갔다.
“이게 뭐야.”
낡은 쪽지 내용을 읽어보던 재경은 좋았던 마음 한구석이 꽤나 불편해졌다. 다른 자료들은 몰라도 이건 렌 지미에 관한 게 아니었다. 이건 왜 보관한 걸까. 못마땅했지만 하기야 아무리 마족이라도 잘생기고 능력 좋은 놈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었다.
“좋은 친구를 뒀네.”
부럽다는 말을 삼킨 그는 쪽지를 얌전히 돌려주었다.
“뭐가?”
날아가는 자료들을 모으던 류제가 되물었다. 기분이 나빠진 재경은 덤덤한 목소리 흉내 냈다.
“이거, 네 친구가 준 쪽지. 널 좋아하는 마음이 철철 흘러넘치네. 인기 많나 봐. 이런 것도 받고.”
쪽지를 건네받은 류제는 어리둥절했다. 이건 그가 미나에게서 벗어나 알라마니 기술관에 떨어졌을 때 타이머 아래에서 발견한 쪽지였다. 여기에 적힌 건 미나를 포함한 마족의 사천왕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핵의 위치들이었다.
“하하, 놀리는 거야? 이건 전쟁 때 쓰던 거야.”
“날 바보로 보는 거야? 오리발 안 내밀어도 돼.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아니, 오리발이라니 사실이 그런걸.”
“웃기지 마. 고백한 녀석한테 친구로 남자며 찬 거지? 이 매정한 녀석. 친구가 돼서 행복하다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뭐?”
류제는 다시 쪽지를 읽어보았다. 이 내용에 단 한 문장도 렌이 말하는 내용을 지칭하는 건 없었다. 다만 이 마지막에 있는 도깨비 문자만큼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잠깐만. 렌, 너… 읽을 수 있는 거야?”
“뭐? 당연하지. ‘난 너와 친구가 돼서 행복했어.’, ‘신재경’ 이렇게 쓰여있잖아? 기억을 잃었다지만 문맹은 아니야.”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던 재경은 류제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기껏 자료들을 다시 담았던 다이어리가 류제의 손에서 추락했다. 항상 그래왔다. 항상 렌은 그보다 몇 걸음 더 먼 미래를 보았다. 왜 이제야 납득이 가는 걸까.
거기서 그를 구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렌이었다.
‘나는 너와 친구가 돼서 행복했어.’
“류제?”
항상 봐오던 필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글씨체. 이 글을 쓰던 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떻게 남부에 있던 렌이 때에 맞춰 알라마니 기술관에 갔는지, 핵에 관련된 내용을 알아낸 방법이라든지.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류제는 왜 렌이 이런 글을 남겨야만 했을까는 알 수 있었다. 일생의 커다란 실수이며 자신의 가슴에도 깊게 박힌 말의 가시 때문이다.
“차라리 너랑 친구가 안 됐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렌은 그의 소중한 친구로 남고 싶어 마지막까지 온 힘을 끌어냈다. 떨리는 숨을 참지 못하고 렌을 부둥켜안은 류제는 결국 그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흘리지 않으려고 했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렌… 미안. 네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어. 미안해.”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미안… 미안해. 내가… 너는……!”
어떤 단어로도 이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재경은 날아가는 자료들을 잡을 생각 없이 포옹하는 류제가 얼떨떨했다. 항상 능글거리던 류제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한 건 처음 봤다. 양호실로 가던 그 계단 위에서 만났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또 헛짓거리를 한다며 밀어내려던 재경은 맞닿은 곳에 들썩이는 흉부를 의식했다. 류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족이니, 마왕이니, 용인이니, 인간이 아닌 것처럼 굴어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는 놈인 줄 알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우는구나. 이 편지를 쓴 사람이 그렇게 그리운가?
“전쟁 같은 건 절대 안 일어나.”
“내가 막을 거거든!”
류제는 쏟아질 듯 빛나던 은하수 아래에서 단란하게 이야기하던 아련한 때가 떠올랐다. 언젠가 렌이 했던 그 말은 한 치의 과장도 들어있지 않은 그의 진심이었다.
평화를 원하는 마음은 옛날부터 드러났었다. 그가 아는 렌 지미는 미나가 마족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대신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떨어지는 사람이다.
혼자서 병마의 군주 마가릿과 싸우고 나라카의 식물이 학교를 위협했을 때도 가장 먼저 뛰어갔다. 납치된 유네를 구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고 전쟁을 막기 위해 왕녀에게 기꺼이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그랬어. 마족이 부대원을 몰살시켰다 할지언정 렌이 이유 없이 전선을 이탈할 리가 없다. 그 방법은 깊은 곳에 묻혔을지라도 목적만큼은 인류를, 류제를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류제는 어떻게든 렌의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쪽지 자체는 렌의 죄를 반박할 증거는 못 됐다. 류제를 위해 적었을 문자는 이 세계에 없는 독특한 체계인 데다 한 줄만으로는 렌이 말한 내용이 진실인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류제는 렌 지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덕분에 부대 이탈 후 렌이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향했다는 새로운 진실과 이어졌다. 끊긴 길에 망연하게 서있던 류제는 렌의 발자취를 더듬을 희망의 등불을 손에 얻었다.
그곳을 조사한다면 재판을 뒤집을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알라마니 기술관 구 본관은 본부 이전으로 해체 작업에 들어갔는데 류제는 늦기 전에 증거를 찾을 방법을 강구했다.
그날 밤, 렌을 재우고 키아나트리체 왕궁으로 간 류제는 내려앉은 어둠 속에 홀연히 빛나는 니냐롯트의 창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까지 공무를 보던 그녀가 바깥을 쳐다보자 손을 흔드는 류제와 눈이 마주쳤다.
바깥 난간에 앉은 류제는 니냐롯트에게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니냐롯트는 즉시 기술관 구 본관에 지시를 내려 해체 작업을 미루라 명했다. 니냐롯트는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힘을 쓴 덕분인지 기말고사가 끝나자 위에서 며칠 더 빠르게 렌 지미의 임시 귀환 허가가 떨어졌다. 류제는 지체하지 않고 고아원이 있는 고향으로 향했다.
그동안 혼자 둘 수 없는 렌은 물론 그의 품에 안겼다. 기차나 마차 등 인간이 사용하는 교통수단은 시간이 걸리고 렌이 힘들어했기에 류제는 렌을 안아 제 능력을 펼쳤다.
수도 아가타의 제립학교에서 출발해 키아나트리체 서부에서 이름난 대도시를 지나면 인적이 드문 후미진 산골 마을이 있다.
논밭을 가르는 둔덕에 묵직한 물체가 착지했다. 모내기 논이 물결치며 류제가 가벼운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품에 안긴 재경은 처음 겪는 마왕의 비행에 긴장해 팔을 옹그렸다.
이동이 멈추자 재경은 류제의 가슴팍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기차를 타도 꼬박 이틀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순식간에 도착했다. 말도 안 돼.
“어지럽지는 않아?”
“조금. 으으, 뭔가 안 익숙해.”
“무리하게 해버렸네.”
“뭘 일일이. 놀라서 그래. 무리했다고 해도 내가 따라가겠다고 한 거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당장 치욕스럽게 안긴 행태에서 벗어나고프다. 짧은 시간 이루어진 긴밀한 접촉으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멀쩡한 척 지면에 다리를 붙이는데 긴장으로 인한 어지럼증으로 절로 휘청거렸다.
지친 렌이 앉을 곳을 찾기 위해 류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까운 곳에 농사일을 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가 있었다. 류제는 재경의 속이 진정될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 합창하는 매미가 그들을 열렬히 반겼다.
“여기는 언제 와도 한적하구나. 아가타와는 달리 풀 냄새가 좋아.”
“시골이니까. 그리고 네 고향이니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그건 그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뒤로 류제 신리로서의 기억 중 쓰임새가 적은 부분은 아래로 묻혀 나중에서야 떠오르곤 했다. 류제는 지금 막 어렸을 때의 기억이 생각났다.
비키가 챙겨준 미지근한 물을 마신 재경은 여름에 걸맞은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류제와 함께 오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여행을 온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빨리 가자. 루나 누나가 기다리겠다.”
“휴식은 충분해?”
“약골 취급하지 마.”
“도와줄게.”
“싫어. 혼자 걸을래.”
“괜찮겠어?”
“또, 또. 진짜 과보호하기는. 이제는 날 걷지도 못하는 사람 취급하는 거냐?”
재경은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하는 류제를 못마땅하게 흘겼다. 류제는 알았다며 순순히 포기했다. 아픈 건 맞지 않냐며 딴지를 걸었다간 짜증을 낼 것 같으니 참견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남에게 의지만 하는 게 익숙지 않은 재경도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류제의 도움을 받았으니 고아원이 보이는 이곳부터는 스스로 걸어 도착하고 싶었다. 자꾸 도움만 받는 것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몹쓸 인간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수녀 누나는 지금 안에 계시려나.”
“아이들이 있는데 당연히 있겠지. 너 학교에 입학하고 한 번도 안 돌아왔다며? 네가 온 걸 보면 기뻐서 자지러질걸. 아세미는 또 어떻고. 어휴, 쫑알대는 목소리가 시끄러워질 게 눈에 훤하네.”
“하하, 놀라 자지러지는 게 두 사람 잘못이겠어? 내 잘못이지.”
“알기는 아는구나. 이 불효막심한 자식아.”
돌아갈 곳이 있는 류제가 제 가족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니 재경이 성에 안 차 쯧쯔 혀를 찼다.
보폭을 맞추며 걷던 류제는 몇 년 전 아가타로 떠날 때 마지막으로 봤던 고아원의 낡은 울타리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이제는 소실되어 절대 찾을 수 없다 여겼던 고향을 방문한 기분이랄까.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을 발굴한 감정은 설렜다.
귀환한 두 사람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게 정돈된 풀밭을 지나 나무로 덧댄 고아원 건물을 찾았다. 시골답다고 해야 할지, 안일하게 활짝 열린 현관으로 가서 루나를 불러도 답이 없었다. 바깥 활동을 하는 시간이라서 그럴 것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뜰로 가던 두 사람은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르던 아세미와 우연히 마주쳤다.
“어…어어? 어어어?”
잠깐 보지 않은 사이에 무섭게 성장한 검은 트윈테일의 어린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을 끔벅거렸다. 몇 년 전 여름에 아가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류제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계속 연락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갑자기 돌아오다니 아세미는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오랜만이야.”
반가운 마음이 끓어올라 빨래 바구니를 놓친 아세미가 곧바로 류제에게 달려갔다. 류제는 아세미를 안아주기 위해 자리에 앉아 양팔을 벌렸다. 류제를 보면 사족을 못 쓰던 아세미는 수많은 편지를 보냈어도 답장 하나 없던 류제가 괘씸했다.
“미워. 류제 오라버니 정말 싫어!”
꼭 끌어안기는 대신 아세미는 소리 내어 울며 그를 때렸다. 그리움이 담긴 솜방망이 주먹질을 류제는 말없이 받아주었다.
“늦어서 미안해.”
“맨날 말로만 그러고. 아세미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결국 품에 안겨 엉엉 우는 아세미를 보자니 재경은 못된 말만 하던 그녀가 오빠에게는 어지간히 약하구나 어림짐작했다. 재경은 아세미가 그를 위해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세미가 보낸 편지에도 답장도 없고. 아세미는… 아세미는……!”
“편지는 받았어. 답장 보내는 것보다 직접 오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아세미는 어제도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
아무리 달래도 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참 오래 가겠다 싶었을 때 아세미의 주변 공기가 울렁거렸다.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떼를 쓰는 아세미의 똥고집을 떠올린 류제는 안일하게 생각하다 심상찮은 뭔가를 감지했다.
송사리에 개울물이 울렁이는 것처럼 공기 중에 있던 드라코니스 입자가 움찔거렸다. 류제가 뒤에 있던 재경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렌, 귀 막아!”
“류제 오라버니 진짜 싫어!!”
비명을 지르는 아세미를 중심으로 음파의 진동이 바람처럼 그들을 덮쳤다. 반응속도가 느린 재경이 차마 귀를 막기 전 류제가 재경을 대신했다. 빼액 울어대는 아세미를 달래줘야 하는데 이래서는 어떻게 말려야 할지 답이 없었다.
“아세미,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고 했지?”
난감해하고 있을 찰나 빨래 바구니를 두 개나 인 루나가 우는 아세미에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게 얼마나 익숙한 일인지를 방증하듯 귀에는 임시방편으로 휴지가 꽂혀있었다.
“으아앙! 하지만, 하지만 루나 언니……! 류…류제 오라버니가!”
“다 큰 어린이는 울지 않고 이야기해요. 뚝!”
루나가 달래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렸던 아세미가 의외로 얌전히 울음을 멈추었다. 훌쩍거리는 아세미를 안아 도닥도닥 달래주던 루나는 이 정도에서 끝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니 나중에는 웅변가를 시켜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랜만이에요, 수녀 누나.”
루나가 놓친 빨래 바구니를 류제가 대신 들며 인사했다. 우는 아세미를 달래주느라 정신이 없었던 루나는 그제야 고아원에 누가 방문했지 발견했다.
두 눈에 류제와 렌이 하나씩 담기자 그녀는 아세미처럼 놀라 자지러질 뻔했다.
“류제야! 렌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저야말로 놀랐는데요. 아세미가 어빌리터라니.”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에… 뭐? 아세미가 어빌리터라니 무슨 소리니?”
“어, 그래? 그랬어?”
3개월간 아세미와 함께 지냈던 재경은 의외의 사실을 알고 놀랐다. 물론 아세미의 거대한 울음소리가 익숙하던 루나 또한 아세미의 특별한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머, 어머머! 아세미도 너처럼 어빌리터라고? 어머, 정말? 그게 가능한 거니?”
“훌쩍, 아세미가… 아세미가 뭐?”
아직은 막 능력에 눈을 뜬 정도지만 드라코니스 입자를 자극하는 힘을 가진 인간은 어빌리터밖에 더 있겠나. 특별한 능력을 좋아하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세미가 금세 기분이 풀어졌다. 입자들이 이제 좀 진정이 되자 류제는 막았던 재경의 귀를 열었다.
“우리 아세미가 어빌리터래. 나중에 류제처럼 제립학교에 들어가겠구나!”
“진짜? 류제 오라버니랑 같이?”
“같이는 무리겠지. 나이 차이가 있는데.”
“에에, 그건 싫어.”
“나중에 아세미를 데리고 큰 도시에 검사받으러 가야겠구나. 후우, 우리 류제가 처음 어빌리티를 발현했던 그날이 생각나네.”
루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세미는 어빌리터라는 말을 듣고 풀밭을 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제는 바뀐 세상을 실감했다. 그가 인간이었던 예전 시절에는 이능력은 절망의 징표였었다.
루나도 얼떨떨했지만 귀에 끼운 휴지 조각으로도 부족한 아세미의 울음소리가 마냥 우렁차기만 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아세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답시고 우다다 뛰어갔다. 와하하 들리는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다.
아가타로 떠나기 전 약혼을 하지 않으면 울음을 그치지 않겠다고 협박하던 아세미가 벌써 저렇게 컸다. 자신밖에 모르던 동생이 어빌리터라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에게 뛰어가 버리니 허탈하게 선 류제는 이번엔 루나를 보았다. 어린 아세미가 볼세라 꾹 참던 루나는 반가운 두 사람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연락이 닿았구나. 다행이다. 나는 네가 여태껏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된 줄만 알고…….”
재회의 대화가 아세미의 어빌리티에 쏠려버렸지만 렌을 홀로 아가타로 보낸 이후 매일같이 잠 못 이루던 루나는 무사한 그들을 드디어 안아보고 눈물지었다. 그녀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이다.
루나는 눈물을 그칠 기미가 없었다. 미안해진 두 사람은 땡볕에서 내내 그녀를 달래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감정을 추스른 루나는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빨래 바구니를 원래 장소에 둔 그녀는 1층 부엌과 이어진 미닫이창을 열어 봉사자에게 잠시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빈 테이블에 앉은 루나는 내내 십자가를 쥐었다. 재경은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고아원을 둘러보았다. 낡은 기둥이나 마룻바닥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똑같았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렌아.”
“네에, 뭐. 친구들이 도와줘서요.”
“어머, 친구라면 타고시아… 사진 속 그 아이들 말이니?”
“네, 비키랑 유네요.”
“그 애들도 만났구나.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치료는 잘 받고 있니?”
“뭐… 그럭저럭 평범해요.”
루나에게는 괜한 말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몸 상태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약속했기에 류제도 정말이냐고 쳐다보는 루나에게 적당히 미소로 답했다.
루나가 괘씸한 류제에게로 타깃을 돌렸다. 늘 상냥하던 루나가 제대로 뿔이 났다.
“류제, 너는 온다면 미리 말을 하지 항상 이런 식이구나.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제립학교 학생이 참전한다는 소식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니? 연락은 없지, 우리가 왜 네 소식을 신문에서 찾아 읽어야 하는 거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지만 무사하다, 괜찮다, 우리 편지에 답장이라도 보내주면 얼마나 좋아. 사람이 마음을 보내면 그것에 답해야 한다고 나나 신부님이나 얼마나 설명했어?”
“죄송해요.”
“말로만 항상 죄송하다, 미안하다. 물론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마는 적어도 우리 렌은…….”
또 눈물샘이 터진 루나가 손수건을 적셨다. 그녀가 우는 이유가 자기 탓이라 류제는 변명이 무색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류제도 아가타에 없어서 편지를 못 받았대요.”
루나가 류제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지만 류제가 답장을 못 한 이유도 알기에 재경은 이번엔 류제의 편을 들었다. 과거를 잊은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류제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긴 양심에 찔렸다.
“아가타에 없었다면 어디에 있었던 거니? 학교에 있던 것 아니었니?”
“제가 학교로 안 돌아오니까 제가 배정되었던 남부 쪽 부대를 수소문했대요.”
재경이 류제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편을 들어주자 류제는 좋다는 티를 팍 냈다. 앞머리를 자르니까 그게 더 눈에 띈다.
재경은 괜히 얼굴을 돌렸다. 딱히 류제를 편들어 주는 건 아니다. 루나가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면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너는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렌 앞에서 말은 못 했지만 우린 네가 말 못 할 난처한 일에 얽힌 줄 알고…….”
“아야, 아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래도 렌과 만나서 잘 풀렸죠.”
“그래서 렌의 재판은 어떻게 된 거니? 끝난 거니? 끝났으니까 돌아온 거겠지?”
걱정했던 일이 모두 잘되었으니 재판도 잘 풀렸을 거라고 짐작한 루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녀가 실망하지 않도록 이것만큼은 기대하지 말라 비관적으로 말하려던 재경을 류제가 가로막았다. 끝까지 그녀를 안심시킬 생각이라면 그게 재판이든 몸 상태든 똑같아야 했다.
“잘 풀릴 거예요. 그 전에 아무래도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개 있어서요. 신부님이 렌을 데리고 오셨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물론 부탁하면 말씀해 주실 거야. 내가 말해주면 좋겠지만 자세히는 모른단다.”
재판 결과가 반드시 좋을 거라는 류제의 호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몸 상태는 숨길 수 있어도 재판 결과는 숨기지 못하니 재경은 이러다 결과가 나쁘면 어쩌나 불안했다.
루나 앞에서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지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잠 못 이룰 테니 류제가 옳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자…잘 풀릴 거라는 건 확정이 된 거지?”
“걱정 마세요. 왕녀도 있잖아요.”
“폐하 말이니? 그래, 제발 그래야 할 텐데. 우리 렌이 무슨 죄가 있겠니. 잘 부탁한다, 류제야. 도와주고 싶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서.”
“맡겨주세요. 누나는 걱정이 많다니까.”
별것 아니라며 루나를 위로한 류제는 썩어도 준치라고 썩 믿음직스러웠다. 곁에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니 루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뒤로하고 안도했다.
“신부님은 오후 늦게나 돌아오실 텐데.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가셨거든. 그때까지 좀 쉬고 있으렴. 여기까지 오는 데 고생했겠구나.”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무슨. 먼 걸음 했는데 당연히 힘들지. 어디 보자.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우리 류제가 또 키가 컸구나. 아주 멋있어졌어. 지저분한 머리도 드디어 잘라서 보기 좋아. 사람이 아둔해 보인다고 자르라, 자르라 말해도 안 듣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니?”
“하하, 좀 답답해서요.”
“그렇지? 진작 말을 들었어야지.”
지금 나이로 고작 20대 후반이지만 말하는 건 고향 집에 돌아온 아들 반겨주는 엄마다. 루나는 생각난 김에 과일이라도 내와야겠다며 과도를 찾았다. 전쟁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바쁜 삶을 사는지 아는 재경이 만류했다.
“괜찮아요. 차라리 류제가 하라고 해요.”
“그래도 뭐라도 대접을 해야…….”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적어도 일주일은 이곳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고아원이지만 모두의 엄마 같은 보호자이고 싶은 루나는 류제더러 다 컸으니 알아서 하라 내버려 둘 심보가 못 되었다. 전전긍긍하니 류제가 괜찮다며 그녀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따 저녁에 또 이야기해요. 렌도 지쳤으니 전 제가 썼던 다락방에 올라가 있을게요. 거기 아직 비었죠?”
“그래, 혹시나 해서. 어휴, 괜히 미안하구나.”
“갑자기 온 건 저인데 왜 누나가 미안해요. 이따 일도 좀 도와드릴게요.”
사근사근한 걸 보니 악독했다던 마왕인 주제에 애정이 엿보였다. 재경은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끈끈한 가족 간의 애정이 부러웠다. 그저 그립다. 류제도 재경처럼 피를 이은 가족이 없지만 그래도 달랐다.
“쉬고 있으렴. 아무리 몸이 많이 나았다고 해도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루나는 특히 재경에게 주의하며 아이들에게 향했다. 잔소리가 폭풍우가 지나간 듯해서 재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환영이네. 진이 다 빠지는구만.”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나 봐.”
아무리 연락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지만 이 정도로 잔소리를 퍼부을 줄은 몰랐다. 가끔 망각하곤 하는 인간의 감각이 충만해진 류제가 턱을 기대며 아이들이 뛰노는 창문 밖을 구경했다. 이제 이곳이 류제 신리의 고향이다.
“루나 누나는 네가 그… 인간이 아니라는 걸 몰라?”
류제의 정체를 알고 있다기엔 루나의 반응이 다분히 인간적이었다. 류제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재경의 머리를 도닥거린 그는 잠시 세상과 동떨어진 고아원의 전경을 마음껏 즐겼다.
푸른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는 진정한 평화의 안도가 담겼다. 이는 전쟁이 끝나고 마족이 사라졌기에 비로소 볼 수 있는 소중한 경치다.
그날 저녁, 류제를 환영하는 신부가 50명이 넘는 아이들을 위해 뜰에 모닥불을 피웠다. 배식을 받을 만큼 성장한 아이들이 불 주변에 둘러 모였다.
재경도 환영 연회에 참석했다. 류제처럼 루나를 도와 식판에 음식을 떠주는 등 잡다한 일은 무리였지만 한구석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썩 기분이 나아졌다.
류제 덕분일까, 전처럼 외딴 존재라는 생각은 덜하다. 평범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대하는 류제를 보자니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게 만족스러웠다.
한바탕의 축제 동안 해가 지고 산골짜기에 고요의 별빛이 내렸다. 오랜만에 와글와글한 저녁 식사가 끝났다.
신부가 숯을 치우고 루나는 아이들이 가져다 놓은 그릇을 정리했다. 앞치마를 두른 봉사자들이 류제와 함께 식기를 씻었다.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치우고 신부와 함께 저녁기도를 올리러 교회로 향했다.
오늘은 무리해서인지 지친 재경도 빨리 잠들었다. 저녁을 먹고 의자에 앉아 자원봉사자들이 류제에게 관심을 표하는 모습을 관찰하던 그는 불쾌해서 미간을 찌푸린 건지, 눈을 뜨기 위해 찌푸린 건지 모를 만큼 꾸벅꾸벅 졸았다.
결국 입을 헤 벌리고 곯아떨어진 재경은 류제에게 들려 2층 방 침대에 누웠다. 류제는 기껏 깊게 잠든 재경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붕대를 갈아주고 1층으로 내려왔다.
자기 전까지 류제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세미를 억지로 재운 루나가 등불을 들고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 먼저 앉아있던 류제가 지친 루나를 반겼다. 그가 고아원을 떠났을 때보다 아이들이 늘어난 건 전쟁 때문이겠지.
다른 방에서 아이들을 재운 신부도 드디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류제는 고생했을 두 사람에게 미리 깎아놓은 과일을 내밀었다. 신부가 머쓱하게 웃는 류제를 환영했다.
“허허허, 류제 네가 워낙 연락이 닿질 않아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여러 일이 있었죠. 신부님껜 항상 죄송해요. 제 성질이 되먹질 못해서.”
“그 험한 아가타에서 잘 살아간다는 증거 아니겠어. 나는 괜찮단다. 지금도 팔팔하거든.”
사람이 부족해 땔감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위한 산나물 채취에 사냥까지 해내는 신부는 류제의 기억보다 까맣게 탔다.
“아까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지 뭐냐. 몰라보겠구나. 훤칠하니 보기가 좋아.”
“속은 아직도 애예요.”
“애는. 이 정도면 타 컸지. 아세미가 작년 여름부터 너 보고 싶다고 어찌나 노래를 부르던지. 아가타에 갔던 그 이야기만 석 달은 하더구나. 바쁜 일이 끝나면 자주 좀 오고 그래. 렌과 같이.”
“그럴게요.”
“그래, 렌은 재판이 좋게 끝날 거라고?”
그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었던 신부와 루나가 류제를 눈빛으로 독촉했다. 그것 때문에 아세미까지 재우고 모두가 잠든 이 늦은 시간에 모인 것 아닌가. 류제는 2층에서 자고 있을 렌을 떠올렸다.
“네, 그런데 그 전에 신부님께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있어서요.”
“뭐든 물어보렴. 아는 내로 다 말해주마.”
자기만 믿으라며 신부가 가슴을 탕탕 쳤다. 호탕한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
추억은 접어두고 다이어리를 꺼낸 류제가 취재하는 기자처럼 신부의 답을 받아 적을 준비를 마쳤다.
“신부님이 다친 렌을 데리고 왔다고 들었어요. 렌에게서 대강의 경위는 들었는데 신부님 입장에서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건 전쟁이 끝난 직후였단다. 교회에서 키아나트리체 곳곳에 다친 민간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는데 서북부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지시가 내려왔지. 우리 고아원은 당시만 해도 손이 비어서 나도 도움을 주러 떠났단다.”
고아원이 있는 마을은 마족의 습격이 덜했지만 나라카와 가까운 곳이나 마족과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곳은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도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고아원을 비우는 건 마음이 쓰였지만 루나는 괜찮다며 더 필요한 곳에 가는 것이 주님의 인도라고 응원했다.
이에 서북부의 여러 치료 시설을 돌며 사람들을 도왔던 신부는 급한 불이 점점 꺼질 때쯤 어느 민간 시설에 오갈 곳 없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한 어린양이었다.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풀 죽었을 아이가 눈에 밟혔던 신부는 고아원으로 돌아오기 전 사람들에게 부탁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도 렌과 마찬가지로 이 고아원에 데리고 왔다.
“아이의 동의를 구하고 귀환할 날짜를 정하는데 침상에 유독 부상이 심한 사람이 보였단다. 네 나이 정도 또래라 시선이 갔는데 아무리 봐도 수녀님이 보여준 그 사진 속 친구 같았거든.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아뿔싸 기억을 잃었다지 뭐냐. 신분을 확인할 군번줄도 없고, 있는 거라곤 망가진 슬렉터와 찢어진 기간트리카 군복뿐. 낫지 않는 상처 때문에 전염병이면 어쩌나 수군거리는 게 마음이 쓰여서 우선 데리고 왔단다.”
“그게 올해 겨울쯤이고요.”
“그래. 나도 상처가 안 낫는 병은 처음 봐서 당황했는데 잘 낫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역시 제립학교는 믿음직스러워.”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신부는 고아원으로 돌아와 류제와 연락을 시도했다. 다른 곳에서 렌을 찾던 류제는 편지를 보지 못했다. 운명의 엇갈림에 가슴 아플 뻔했던 신부는 만나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전까지 렌이 있었던 시설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곳도 가볼 생각이니?”
“네, 내일 다녀오게요.”
“거리가 상당할 텐데… 렌은 어쩌고?”
“혼자서 다녀올게요. 오늘내일 연이어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거든요.”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왔다고 생각하는 신부와 달리 그들의 이동법은 류제만의 방식이 따로 있었다. 물론 내일도 마찬가지로 눈 깜짝할 새로 이동할 것이다.
“교회에서 후원하던 곳이라 기록이 잘 되어있지. 책임자를 찾으려면 이 주소로 찾아가면 된단다. 내 이름을 대면 될 거다. 정말 하루 만에 갈 수 있겠어?”
“신부님도 참. 류제는 어빌리터라고요. 거리는 문제가 안 되죠. 걱정도 천지시다.”
어빌리터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루나는 신문에서 본 대단한 류제의 활약상을 떠들어대며 소녀처럼 좋아했다. 신부는 신문 내용이 사실이라고 물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추억이 떠오르는 분위기가 안온했다.
고향은 이래서 좋다. 존재하지 않는 전생의 고향을 향한 그리운 감정이 이곳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류제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2층에서 자고 있을 렌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좋아하는 사람을 집에 초대한 기분이었을 텐데.
“고아원은 마족의 습격 없이 무사했나 보네요.”
이동하면서 잠깐 살폈는데 복구한 건지는 몰라도 마을에 심각한 피해는 보이지 않았다. 산골짜기고 사람도 없어서 마족의 타깃에서 빗나간 것인가. 과거의 자신이 벌인 짓 때문에 하마터면 미래의 그가 고통받을 뻔했다.
“실은 우리도 한번 큰일이 있었단다.”
지금은 평화롭지만 신부가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다 뒤집어진다며 심장을 다독였다.
“이 마을엔 피난을 갈 수 없는 노인들이 많지 않니. 우리도 아이들 때문에 남았지. 이런 산골짜기까지 어빌리터가 와주지는 못하니 젊은 우리라도 나서야 했단다. 잘 넘어가나 했는데 어느 날 마족이 나타났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나요?”
“우리는 교회 지하에 모여 숨을 죽였어. 하지만 치밀한 마족은 우리를 찾아냈단다. 마족을 이야기로만 들었던지라 붉은 동공과 뿔을 처음 봤어. 오금이 저리더구나.”
“그건… 정말 큰일이 있었다는 말로도 부족한데요?”
“전멸이냐 아니냐 생사의 기로였지. 하늘이시여, 제발 아이들만큼은 구해주소서! 하고 기도를 올리는데 수녀님이 갑자기…….”
“정말! 웃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웃음이 터졌는지 신부가 껄껄 웃어댔다. 그의 웃음소리에 아이들이 깰세라 허둥거리는 루나의 얼굴이 홍당무 같았다. 쾌소하는 신부 대신 루나가 말을 이었다.
“이판사판이니 내가 빗자루라도 들고 어떻게 해보려고 나섰거든. 무모했다는 건 알지만 저렇게 웃을 건 없잖니.”
“그때 마족에게 덤비라고 큰 소리로 외치던 수녀님이 아주…….”
“신부님도 짓궂으세요. 하아, 그때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랬더니 마족이 진짜 덤비던가요?”
“세상에 너도 듣고 놀리지 말렴. 그랬더라면 우리가 이곳에 살아있겠니? 돌연 마족이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해하며 사라지더구나. 나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지. 아아,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를 끼치기 전 무사히 사라졌다니 류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결심을 했더라면 그를 길러준 고아원에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우리 이야기야 늘 똑같으니 됐다. 그보다 네가 어떻게 지냈나 듣고 싶구나.”
고향으로 내려온 자식에게 부모가 꼬치꼬치 캐묻듯 그들은 성장한 류제를 대견해했다.
대단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류제도 나긋나긋 이때껏 지내온 일화를 꺼냈다. 익숙해진 아가타 생활부터 어빌리터의 싹을 보이는 아세미까지 묵혀왔던 이야기보따리가 하나둘 풀렸다.
늦은 새벽, 두 사람과 내일을 기약하고 2층 다락으로 올라간 류제는 새액새액 잠든 재경의 머리를 차분히 정리했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두 사람을 밝혔다.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될 수 있기를. 살아만 있다면 인간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류제는 렌도 살아서 이 행복을 느끼기를 바랐다. 그러니 그가 보게 될 진실이 무엇이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렌을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