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망월. 고처에서 떨어진 고양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시절부터 부모님은 곁에 없었다. 평생 있던 적이 없지만 뭐 어떤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만 있다면 맞지 않는 거푸집에 들어가라 머리를 짓누르는 새빨간 타인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낮은 울타리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이들이 허점을 물어뜯으려 도사려도 괜찮다. 남들은 가족과 다 함께 둘러 모여 이야기하는 명절에도 바쁘다, 일 있다며 할머니를 서운하게 하는 고모나 다른 친척들도 필요 없다. 엄마가 놀지 말랬다며 말 걸어도 무시하는 괘씸한 친구도 없어도 된다.
그런 건 익숙했다. 기대하면 상처밖에 안 받는다. 일찌감치 깨달아버렸지만 할머니만은 그의 기대를 절대 깨뜨리지 않았다. 그럼 되었다.
초등학교에 딸린 국립 유치원에 다녔을 때다. 반 원생이 놀려대자 화가 나서 장난감을 던졌더니 이마에 상처가 나 작은 소동이 일었다. 폭력적인 그와 같은 반이 싫다고 특정 학부모가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대서 할머니가 난처해했다. 결국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그 원생은 반을 바꾸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는데.
그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게 제일 행복했다. 새로운 장난감 대신 연습장은 낡은 달력의 뒷장뿐이라도 적의가 을러대지 않는 곳은 안락한 집뿐이다. 이 낡은 장소야말로 가장 상냥한 쉼터다. 이곳에서 쌓은 즐거운 추억이 좋았다.
하나를 꼽자면 쉬는 날 항상 틀어놓는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라든가. 트로트를 따라 부르면 박수를 치는 할머니와의 즐거운 추억이다. 가끔 노인정에 가 노래를 부르면 칭찬을 들었다. 남들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설렜던 건가, 노래에 흥미를 느낀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방과 후 집에 오면 놀아줄 사람 없으니 재경은 할머니처럼 매일 티브이를 틀어놓고 프로그램 재방송을 즐겨 보았다. 음악 프로그램에 나오는 최신 노래도 곧잘 따라 불렀다. 그걸 다른 사람 앞에서 뽐내진 않았다. 초등학생이 되어서까지 할머니 노인정에 따라가진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자상한 연륜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최악의 선생님이 담임이었던 학년.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던 때가 없던 그를 타박하던 선생님은 항상 그더러 시끄럽다 면박을 줘서 반 친구들도 그런 식으로 놀렸다. 타인과 그의 다른 점이 뭘까 모르겠지만 남들이 모두 그렇게 여기니 그도 자신을 멍청하다고 내버려 뒀다.
윗물을 따라 흐르는 구정물에 반 친구들은 그를 쉽게 무시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그가 폭력을 휘둘렀던 최악의 봄 소풍 날 이후였었나. 온 가족이 참가하는 대운동회가 열렸지만 할머니는 일을 가야 했다. 할머니는 연신 미안하다고 그를 타일렀다. 재경은 솔직히 할머니가 학교에 오지 않아서 안도했다.
이제 다 컸다고, 장하다고 엉덩이를 도닥거린 할머니는 그더러 친구들이랑 사진도 찍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라며 꾸깃꾸깃한 지폐를 용돈으로 쥐여주었다. 할머니가 걱정하는 게 싫어 호언장담했지만 그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지루한 수업이 없는 걸 빼면 운동회는 하나도 좋지 않았다. 경찰까지 오갔던 봄 소풍 이후 반 친구들은 그를 투명 인간 취급했고 단체 활동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즐겁기만을 바라는 학교생활에서 이단아를 누가 희생정신으로 어울리고 싶어 하겠나.
아침밥이 소화될 오전 무렵, 재경은 전교생이 필수로 나가는 단거리 달리기에서 1등 도장을 받았다. 히죽 웃으며 하늘에 대고 자랑했지만 관심 없는 수많은 사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도우미 선생님들이 그를 트랙에서 밀어냈다.
상품으로는 싸구려 필기구 세트를 받았다.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응원석으로 돌아가는 동안 뿌듯함은 가라앉았다. 옆자리에선 엄마가 동영상을 찍었니, 어디에 올리니 말만 많다. 등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이 순간의 주인공인데 그만 엑스트라 같았다.
굳이 다른 이와 비교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힌 몰골에 질린 그는 교실로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저번처럼 도둑으로 몰릴지도 몰라 그냥 구석 멀찌감치 떨어져 프로그램 재방송을 떠올리며 시간을 때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란스러운데 어쩜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다. 뭐가 즐겁다는 거지.
쭈그려 앉아 빈둥거리다 선생님이 안 보는 틈에 응원석을 빠져나간 그는 꾸깃꾸깃한 오천 원 지폐를 쓸 부스를 찾아 돌아다녔다. 재미있어 보이는 미니 게임을 하고 싶어서 찾아가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노는 저학년 학생이 배알 꼴렸다.
오후에 반별로 출전한 줄다리기에서 패배하니 그의 출전 종목은 끝이다. 수많은 부스들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이벤트들뿐이고 연차를 낸 부모님과 손을 잡고 노는 친구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신세도 심사가 뒤틀렸다. 어차피 그는 소외되었는데 한마음으로 계주를 응원하기는 개뿔이. 더 이상 거기에 있기 싫었다.
“야, 우리 이따 끝나고 피시방 갈래?”
“엄마가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 같이 가면 괜찮아. 친구들이랑 같이 가자.”
또래 아이가 저들끼리 아는 이야기를 시시덕거리며 지나갔다. 같이 가고 싶다 말해도 끼워주지도 않거니와 요즘 초등학생이 무슨 게임을 하는지 몰랐기에 재경은 못 들은 척했다.
재미있게 놀라지 뭐. 이 용돈은 그의 돼지 저금통에 넣을 것이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걸로 컴퓨터를 살 거다. 컴퓨터만 있으면 피시방 같은 데 안 가도 된다.
말없이 학교를 나온 재경은 안식처로 돌아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적막이 무서웠다. 그는 당장 스위치를 찾아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켰다. 곰팡내 나는 집이 어찌나 낯설어 보이던지.
터덜터덜 양말을 벗은 그는 문득 티브이 위에 있는 사진을 흘겼다. 젊었을 적의 부모님이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모르는 척 화장실로 간 재경은 웬일인지 열심히 흙투성이 손과 발을 씻었다. 비누로 세수도 하고 빳빳한 수건으로 닦고 나온 그는 개어진 이불 위에 냉큼 뛰어들었다. 나프탈렌 냄새가 할머니처럼 익숙하다. 째깍째깍 들려오는 시계 소리가 대신 적막을 채웠다.
냉큼 일어나 티브이 위에 있던 사진을 든 재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당연하게 함께하는 모습이 싫었다. 뭐야, 나만 내버려 두고 가버리고. 사진 속 그들이 미워진 재경은 괜히 꿀밤을 먹였다.
그래도 혹시 오늘 부모님이 운동회에 왔더라면 달리기에서 1등을 한 그에게 칭찬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망상하니 조금 기분이 풀렸다.
언제 잠들었는지 깜박 졸다 할머니가 오는 소리에 깨니 벌써 온 동네가 깜깜하다. 재경은 사진을 티브이 위에 올려두고 조촐하게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가 운동회가 재미있었냐,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냐 물어봐서 달리기에서 1등 해서 필기구 세트를 얻었다니까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아이인 마냥 칭찬해 주었다.
그 이후로는 운동회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 머리가 약삭빨라질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그는 수업 시간 내내 잠만 잤다.
가기 싫었지만 안 가면 할머니가 곤란해진대서 간신히 중학교에 올라가니 열정이 과한 담임 선생님은 재경의 사정을 반 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떠벌렸다.
놀리는 것도 모자라 가만히 동정을 받으라니, 재경은 어른들이 혐오스러웠다. 아마 선생님들도 못돼 먹은 재경이 끔찍했을 거다.
“니가 그딴 식으로 행동하니까 고만고만한 놈들이나 꼬이지. 진짜 수학여행 안 갈 거야? 너 지금 도와주는 친구들 성의 무시해?”
“댁이 뭘 알아. 시답잖은 동정 집어치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놈이 버르장머리를 보자 보자 하니까… 선생님한테 존댓말 안 써? 하아. 이래서 문제야. 부모한테 못 배워먹은 놈들이 하나같이 피해의식에 찌들어가지곤.”
중학교에 올라가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같았다. 개처럼 구니 불쌍한 놈에서 개 같은 새끼로 바뀌었을 뿐이다. 선생들의 참견질이 진절머리 났던 재경은 학교 밖으로 나돌아 나쁜 길로 물들었다.
그는 동네에서 제법 유명해졌다. 맞기도 오지게 처맞아서 병원 신세도 지고 상대 부모님의 신고로 경찰서에도 불려갔다. 그를 전담하는 동네 경찰관도 있을 정도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또 왔느니, 질리지도 않느니, 잔소리 몇 번 하다가 할머니 올 때까지 경찰서에서 보호하고 내버려 두는 게 전부다. 싸운 건 같이 싸웠는데 나쁜 놈은 재경 혼자만 남았다.
“저런 놈을 보살피는 할머니가 보살이지. 어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으면.”
“애 엄마랑 남편은 차 사고로 죽었댔나? 돌봐줄 사람이 없대?”
“누가 돌보고 싶겠어. 저런 놈 키워봤자 억장만 무너지지. 나 같으면 절대 못 해. 할머니만 불쌍해.”
멋대로 말하든가.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야. 출발선부터 달랐던 주제에 뭐라고 말한들 위선으로밖에 안 들린다. 어차피 바보라서 공부는 못 하고 돈도 없으니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도태될 텐데 얽힐 일도 없으면서 오지랖만 넓다.
허송세월을 보내던 그는 문득 체육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좋은 기억도 없는 주제에 참 괴이한 인연이다.
2학년 때 담임이 아닌 척 귀찮게 구는 바람에 땡땡이치지 못했던 그가 점심시간 끝나서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날이 있었다. 5교시 체육 실기였던 달리기 기록 측정을 하는 날과 겹쳤던가. 그때 한번 남들보다 특출나게 빠른 기록을 세웠다.
그를 무시하던 체육 선생이 달리기 선수 하면 잘하겠다고 치켜세웠다. 재경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그 선생이 그걸 담임에게 말했던 모양이다.
당시 체육대회는 다가오는데 반에서 출전하기로 한 학생이 부상을 당해 마땅히 대체할 인력이 없었다. 반 분위기는 적극성이 떨어졌지만 평범하게 인원수는 채우길 바랐다. 적당주의의 선생님은 1등 하면 문화 상품권이 나온다고 그를 실실 구슬렸다.
이런 기대를 받는 건 처음이라 변덕을 부려본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그냥 안 나오면 되겠지.
책임감 없는 태도부터 시작했어도 어쩐지 계주 연습까지 나가면서 재경은 반 친구들과 몇 번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도 문제아와 얽히기 싫었을 것 같은데 별생각 없던 그는 계속 연습에 나갔다.
체육대회 날 보여준 그의 기막힌 계주 역전승은 그날 그 어떤 경기보다 특별했기에 누군가만큼은 지금도 기억할 것이다.
앞 주자를 추월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달렸을 뿐인데 역전승을 거두게 된 그는 잠깐이지만 일약 스타로 빛났다. 재경의 학교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다.
이후 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나 싶더니 자주 시비가 붙던 선배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성가시게 접근했다. 업보를 쌓은 건 그인데 관계도 없는 사람이 고통받을 이유는 없다. 재경은 죄 없는 이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거리를 벌렸다.
어쩌다 보니 학교도 다시 잘 안 나오게 되었다. 솔직히 그들이 못난 그를 포용해 줄 만큼의 대인배도 아닌 것 같고 말이지.
다시 원래 생활대로 돌아왔을 뿐이지만 재경에게는 잠깐의 정겨움이 허하게 남았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하찮고 우습다. 분명 기다려주던 여자 친구와 손을 잡는 누군가를 봐서 그럴 거다.
몰려다니는 그들을 지켜보던 재경은 평범함이 부러워졌다. 나도 저렇게 어울려서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뭘까. 할머니와 같이 있는 것과는 다를까? 드라마에서나 보는 웃기는 짓거리를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부터 괴팍했던 행동거지가 조금은 얌전해졌던 것 같다.
중3에 올라가자 담임이 그가 가장 싫어하는 학생주임으로 바뀌었다. 중학교에 들어왔을 때부터 끈질기게 괴롭혀 대는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1학년 때 교복을 안 입은 학생들을 모아 뺨도 때렸다.
학생주임은 교무실에서 종종 ‘A 선생님은 마음이 약해서 안 돼. 저런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거든.’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인간은 쉬는 시간마다 자기 반을 복도에 서성거리며 감시했기 때문에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기 힘들어졌다. 강제로 교실에 앉아 듣는 수업은 지루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거, 의미도 없다.
그러던 그는 문득 수업 시간에는 조용해야 할 교실이 시시덕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운 과목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돋보기안경을 들여다보며 느긋하게 교과서만 읽는 선생은 꿋꿋이 진도를 나갔다. 쉬는 시간인 줄 알고 자다 깬 재경은 할머니처럼 머리가 센 그녀가 눈에 밟혔다.
반 학생들이 우습게 보는 늙은 국어 선생이 불쌍해진 재경은 이따금 학생들이 선을 넘어 장난을 칠 때 모르는 척 그녀를 도와주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가끔씩 그녀에게 인사도 해보고 수업도 듣는 시늉을 해보고. 욕을 한번 시원하게 지껄이면 조용해져서 조금은 잠들 만했다. 그를 보는 늙은 선생의 시선에 유대감을 쌓았다고 생각한 재경은 자기 혼자 착각에 빠져 좋아했다.
변화가 있을 거라 여긴 중3 여름. 그의 생일 때 2학년 때 잠깐 친해졌던 그들을 초대해 봤지만 당연히 오지 않았다. 그때만 떠올리면 재경은 이불을 찰 정도로 창피하다. 그들도 당황스러웠겠지. 자신감에 취해 안 하던 짓을 하다니 바보였다.
그날 할머니에게 받은 용돈을 그대로 돌려준 재경은 지금껏 모았던 저금통을 깨뜨렸다. 대충 50만 원 정도가 되었다. 이만큼 많은 돈을 모았더니 어른에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아 기뻤다.
중학교 마지막 생일을 기념으로 재경은 컴퓨터를 하나 장만했다. 컴맹이라 동네 컴퓨터 업자에게서 금액에 맞춰 중고로 구했다. 재경은 모르지만 운영체제마저 불법으로 복사한 그 컴퓨터는 새 제품으로 조립해도 30만 원이 넘지 않는 조잡한 컴퓨터였다.
반짝거리는 컴퓨터를 보자니 눈도 반짝거린다. 처음으로 얻어오지 않은 전자 제품이었다. 이제 할머니가 얻어 온 낡은 MP3 플레이어에 새로운 노래를 담을 수 있었다.
컴퓨터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재경은 그날 이후 밖에 나도는 일이 줄었다. 학교 컴퓨터보다 좋은 컴퓨터가 있으니 그도 남들과 똑같은 선상에 선 듯해 뿌듯했다.
할머니가 없을 때마다 인터넷에 친구 사귀는 법을 검색해 구질구질하게 스크롤을 내리던 그는 역시 잘 모르겠다며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첫인상을 좋게 만드는 건 이미 늦었으니 다음으로 미루고 친구에게 살신성인(여기서 재경은 단어의 뜻을 또 검색해야 했다)하려고 해도 돈이 없다.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싫어할 것 같은데. 배려하라는 것도 마찬가지.
선생님들은 싫어하지, 선배들한테도 찍혔지, 수업일수도 간당간당하다. 생각해 보니 이런 그를 좋아할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바닥에 뒹굴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 다시 시작하지 뭐. 할머니가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것도 그만할 때가 되었으니 그때부턴 어떻게든 될 거야.
재경은 지원하려고 생각 중인 특성화 고등학교를 떠올렸다. 솔직히 아직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할머니 몰래 아르바이트도 찾아다녔지만 중학생을 쓰는 업체는 잘 없었다. 컴퓨터도 샀으니 잘 풀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선풍기만 달달 돌아가던 그해 여름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무력하게 걸어가던 그가 운명을 바꾼 게임을 얻은 날은 하필이면 기분 더러운 사건이 그를 괴롭혔던 날이었다.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융통성 없는 늙은 국어 선생의 수업 시간에 그녀를 골탕 먹이며 킬킬거리는 반 분위기가 짜증이 났던 그가 수업 중에 책상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2학기가 되니 학주도 관심이 식었고 몇 주 정도 선배들을 피하느라 수업에 못 들어갔는데 초반에 비해 변하는 게 없었다. 그가 했던 짓은 의미가 있었나 싶다.
내키지 않아 그대로 수업 내내 땡땡이를 쳤더니 학주에게 철자로 삼십 대 정도를 맞았다. 학주는 글러먹은 새끼라며 투덜거리곤 사라졌다.
뭐, 맨날 그랬듯이 신재경이 나쁜 거겠지. 짜증이 끓어올라 그대로 가방을 챙겨 학교를 뛰쳐나온 재경은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육교 아래에서 투덜투덜 아픈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쭈?”
그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학교 선배들과 자주 어울리던 다른 중학교 놈들이다. 질도 상당히 나빠서 담배는 기본이고 술도 마시며 물건을 훔치거나 자동차 사고를 몇 번 냈다고 했다.
그 무리에게 발길질을 당하며 두들겨 맞는 학생이 보였다. 살집이 있어서 맞아도 아프지는 않겠네. 구경하던 재경이 심심하던 차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마음을 바꾸었다.
타 학교 학생들에게 돌멩이만 가득 든 가방을 던진 재경은 학주한테 맞아서 짜증도 나겠다 스트레스도 풀 겸 시원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몸집이 작아도 재경은 한 놈만 죽어라 패대는 싸움을 하니 질려버린 그들은 피떡이 된 친구를 끌고 사라졌다. 그도 꽤 맞았지만 머리는 돌대가리에 맷집도 꽤 있어서 이 정도면 선방했다.
재경이 맞고 있던 학생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병신같기는. 뭘 했기에 뒤지게 처맞고만 있냐?”
“고맙군. 그 정도는 본좌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에헴, 실은 내가 계약한 ‘소환수’가 저놈들을 습격할 준비 중이었거든. 그대가 선수를 치다니. 심보가 고약해.”
“점심에 쥐약 잘못 처먹었냐? 미친 새끼 아냐, 이거?”
가방에서 돌멩이를 우수수 쏟아내던 재경이 식겁해서 대꾸했다. 좀 뚱뚱할 뿐이지 정신은 멀쩡한 놈인 줄 알았는데 자기 혼자 딴 세상에 산다. 먼지가 나도록 맞고 있었던 주제에 센 척도 오지다.
“야, 뭐라고 씨불였냐고 묻고 있잖아, 새꺄.”
“아니… 뭐… 그… 고맙다고.”
키가 작다고 고만고만하게 봤던 건지 재경이 세게 나서자 그가 우물쭈물 인사했다. 스트레스를 풀 겸 겸사겸사한 거였지만 일단 친구 만들기의 연습으로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약간 반에서 겉도는 말수 적은 통통한 안경잡이 부류인 것 같은데 이걸 계기로 다른 학교라도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그러나 웬걸, 그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전학을 간단다. 저놈들한테 맞고 있었던 이유는 그를 계속 괴롭히던 놈들인데 마지막 날이니 한 대라도 쳐보자 했다가 역으로 당해서 위기에 처한 거였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왕따를 당하는 내내 이만큼 속이 후련했던 적이 없었다고 하며 재경을 은인으로 모신다고 했다.
“아, 그러셔.”
이사 갈 곳은 재경이 찾아갈 수도 없는 해외다. 친구는 개뿔이. 좋다가 말았다. 귀찮아진 재경은 허적허적 손짓을 했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재경은 해가 질 때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뭘 어쨌는데, 필살기가, 어떤 장면이 멋지니. 관심은 하나도 없지만 적당히 들어주다 보니 시간은 잘 갔다.
“이런 이야기로 대화하면 재미있냐?”
“아무렴. 위대한 현자들은 명작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그렇지, 은인에게도 보답을 해줘야겠어. 히히히.”
책가방을 뒤져보던 그는 재경에게 USB를 주었다. 중2병 냄새 가득한 스티커가 붙어있어 재경은 집게손가락으로 그걸 들었다.
“이게 뭔데?”
“내 16년 인생을 전부 모아둔 위대한 실록이라 일러다오.”
“16년? 나한테 이런 걸 줘도 괜찮냐? 비…비싼 거 아냐, 이거?”
“이번에 새 NAS를 사서 자료는 전부 백업을 해뒀거든. 이건 PC 장르 배포용이야. 여기 있는 것들 다 내가 말했던 개명작 겜들이거든? 걱정 마. 초등학생 사촌 주려고 했던 거라 엄빠크리 장르는 다 없애서 아쉽긴 한데 진짜 여기 나오는 왕녀 캐릭터가……!”
또다시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하기 시작한다. 컴퓨터는 있어도 재미있는 동영상을 보는 게 다일 정도로 컴맹이었던 그는 일단 이 USB에 다양한 게임이 있고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 친구와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들었다.
기묘한 생물체와 헤어진 재경은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USB를 연결했다. 폴더를 열어보니 종류별로 여러 게임들이 있었다. 아무거나 클릭해 보니 반짝반짝 화려한 애니메이션과 이펙트들이 볼 만하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게임도 하는구나.
친구들과 하지는 못하겠지만 게임에는 흥미가 있던 재경은 이어 눈깔 큰 오타쿠 그림체가 나와 일본어로 이야기하자 짜게 식었다. 뭔가 했더니 일본에서 만든 십덕겜이잖아. 에라이.
하지만 버리기도 뭐하고 은인 대접해 주는 놈한테 받은 거니 일단 다 플레이해 보기로 했다. 할 일도 없는데 알아둬서 나쁠 것도 없겠지.
그 괴짜가 준 게임은 평범한 주인공이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생기는, 통칭 미연시 게임이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야한 장면이 나와서 놀라긴 했으나 대부분 등이 조금 나오는 정도였다.
―그럼… 우리 친구인 거지?
―친구란 건 어느 순간 되어있는 거라고 생각해.
“오오… 뭐야, 좀 오글거리긴 한데 보다 보니 괜찮네.”
교복도 나오고 고등학생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학교생활에 관련된 게임인가 했더니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똑같은 말만 씨부리는 검색엔진보다 나았다.
하지만 하도 많은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니 대충 스토리가 뻔해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내용에 지루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게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라는 미연시 게임이다.
이건 다른 미연시들과 달리 대화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미니 게임도 적당히 난이도가 있어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다른 미연시들은 세이브 로드를 했으면 했지 굳이 다회차를 하지 않았는데 이건 궁금한 부분이 많아 검색까지 하며 게임을 플레이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10년도 전 게임이지만 마니아층 덕분에 위키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잠자던 할머니가 눈부시다고 머리통을 때릴 때까지 집중했다.
“친구가 컴퓨타 속에만 있는 줄 아나. 저것이 공부하라고 컴퓨타 사줬더만 눈깔 알록달록한 염병할 가시내들만 나오는 게임만 처하는구나. 정신머리가 빠져가지고는. 공부는 영 손 놨냐?”
싸돌아다니면서 주먹질만 해대던 놈이 컴퓨터를 사줬더니 집에 붙어있는 꼴이 좋아 내버려 두던 할머니는 이젠 맨날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재경을 볼 때마다 답답한지 잔소리를 했다.
밖에서 친구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컴퓨타 속 가짜 친구나 만들고 앉았다고 꿍얼거리는 그녀에게 재경이 이걸로 친구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거라고 빼액 신경질 냈다가 할머니한테 몇 달은 놀림당했다.
“아, 진짜. 그만해! 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잔소리쟁이 할망구! 시끄러워 죽겠네.”
“참 내, 시끄럽긴 느가 더 시끄럽구만 시건방지게 할미더러 빽빽빽. 그래가지고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것냐? 공부는 하면서 게임도 해라. 안 글면 컴퓨타 선 죄다 가시개로 잘라버릴랑께.”
“새 교복 안 사주면 절대 고등학교 안 갈 거야. 분명히 말했어. 남이 입던 거라든가, 시장에서 파는 건 절대 안 돼. 꼭 그 브랜드 교복이어야 해.”
중고 교복에 자격지심이 있던 재경이 할머니를 떠봤다. 형편도 안 되는데 욕심부리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들들 볶아대니 교복은 멋진 걸로 사줄지도 몰랐다.
“하이고, 알았다, 알았어. 할미가 니가 말해준 걸루다가 사줄 테니까 가서 얌전히 공부도 좀 하고 살어. 또 뭐가 필요한지 퍼뜩 말해봐라. 나중에 안 사줬니 뭐니 징징거리지 말고.”
“윽, 진짜로 사줄 거야?”
“그 말투는 뭐시여. 그럼 사주지 말까? 혹시라도 쌈박질한답시고 망가뜨리고 그러면 다시는 안 사줄 테니 그리 알어라.”
“칫,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잔소리쟁이 할망구.”
“누가 할미더러 할망구래, 이 버르장머리 없는 시키야!”
“할미나 할망구나 할머니나. 사준다고 했으니까 약속해!”
“대신 사고 치지 말고 제대로 다니고잉.”
“구제 말고 내가 말한 그 브랜드 교복이다? 약속했어?”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냐. 머스마 자슥이 뭔 기집애망키로 시끄러워 가지곤.”
“진짜? 진짜지? 헤헤헤.”
간만의 기쁜 일이다. 그가 할머니에게 애교를 떨며 끌어안았다. 나이가 먹어 살찐 몸은 푸근하니 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어디 가면 안 돼.”
“느그 친구들한테나 그리 곰살갑게 애교 떨어라. 할미 허리 아파 디지겠구만 다 큰 놈이 징그럽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재경을 밀쳐내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재경도 달리 계획이 있었다. 새 교복을 살 수 있다면 중학교 때와는 달리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할머니 안 힘들게 할 거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지만 재경도 실은 겨울방학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중이었다. 컴퓨터로 아르바이트를 검색해서 자리를 알아보다가 이력서를 내보고 게임을 하던 중에 전화가 오면 면접을 보러 나가는데 나이를 속여도 보통은 전부 꽝이었다.
그러다 한번 괜찮은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마지막 히로인 엔딩을 봤던지라 재경은 호기롭게 아르바이트에 붙고 오늘 밤 시크릿 엔딩을 볼 거라고 집을 나섰다. 합격한다면 오늘 저녁때 할머니한테 잰 척을 할 거라며 그가 킬킬 웃었다.
어둑어둑하게 낀 구름에 아스팔트가 얼어붙은 날이다. 이 추운 날 걸어서 면접 보고 돌아오던 재경은 그의 집 앞에 기웃거리는 옆집 할아범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서있는 재경에게 달려와 매달린 그의 입에서 안 되는 말이 떨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재경아. 요…요 앞에서 차가 미끄러져 가지고 느…늬 할머니가……!”
“뭐? 아, 아저씨 진정 좀 해요. 뭔 소린지 모르겠잖아! 할머니가 어쨌는데?”
더듬거리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말만 간신히 한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뺑소니가 뭐라고 하는데 정신이 아득해진 재경은 얼핏 들었던 병원으로 당장 달렸다. 폐가 찢어질 정도로 달린 재경은 계주에서 앞 주자를 시원하게 추월하던 달리기가 이렇게 느렸던가 애가 탔다.
응급실에 도착한 그가 허둥지둥 할머니를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늙은 몸이 멍에 물들어 차갑게 식은 그녀가 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경은 매달리듯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잔소리를 했잖아. 새 교복 사준다며. 뭐 하는 거야. 느껴본 적 없는 충격에 귀가 멍해졌다. 차가운 할머니는 그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어딜 가더라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뒤바뀌는 건 일주일로도 충분했다. 비참한 장례식에는 처음 보는 일가친척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두고 다투었다. 보험금이니, 누가 얼마큼 부양했니, 재개발 지역이니 재경에게는 의미 모를 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시끄럽다.
“진심이야? 저런 문제아를 맡으라니 미쳤어? 우리도 돈 없어. 알지도 못하는 애 깽값 물어주기 싫어.”
“저래가지고 자립도 가능하려나 모르겠다. 중학교도 겨우 졸업했다며?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못해. 우리 애 내년에 수험생이고 안 좋은 영향 끼치면 어떻게 해.”
소중한 장소는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사라졌다. 슬픔에 질식할 것 같은데 귀에는 듣기 싫은 소리만 들렸다. 사람들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것조차 빼앗는 너무한 하늘에 재경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소중한 것들이 찢어져 갔다. 집은 고모에게 넘어갔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고모는 재개발 지역에 그 집이 낄 것 같다며 좋아했다. 그는 고등학교 근처에 사는 이름도 모를 먼 친척이 3년간만 맡아준다고 한다.
항상 주인공에게 기대하는 미연시 게임과는 다르다. 돈 많은 부자 친구도 없고 가난한 그는 평범할 수 없다. 뭐든지 만들어내는 괴짜 과학자도 없는 끔찍한 현실에서 재경은 도망가고 싶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하고 싫어졌다. 이름도 모르는 친척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소중한 집은 그대로 버려지는 건가. 이 곰팡이 냄새와 이따금 깜박거리는 전등,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이불, 깨진 타일, 정겨운 가구, 사진. 아, 가족사진. 할머니, 할머니도 엄마 아빠가 죽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어?
그렇다면 할머니도 그의 부모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거다.
무서워진 그는 짐을 챙기다 말고 달아났다. 친구니 고등학교니 지껄여도 할머니가 없으면 싫었다. 그에겐 항상 할머니가 있어줬는데 혼자서 헤쳐나가는 방법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무일푼으로 거리를 방황했다. 며칠이 지나니 옷은 더러워지고 냄새가 났지만 할머니가 없는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돌아간다면 그는 낯선 곳으로 끌려가 할머니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런 돈도 없으니 지하철역 근처에서 노숙은 기본이고 지나다니는 어린놈들 천 원, 이천 원 삥을 뜯어 빵을 사 먹거나 전단지 돌리기 단기 알바를 구했다.
의미 없이 겨울이 지나갔다. 3월이 되면 입학식이 있지만 지금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를 더럽다는 듯이 무시했다. 아무렴 어떤가. 그들은 재경의 인생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들인데.
배고프고 추워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끝날 거니까. 친척 집에 얹혀살기 싫다. 그 집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제발 시간이 흘러가지 말아 줘. 하지만 돌아가면 할머니는 없겠지.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현명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그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에게 손을 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마도 그녀라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으로 재경은 그 늙은 국어 선생님에게 손을 벌려보기로 했다. 혹은 다른 조언이라도 해줄지 모르지.
“넌… 누구니?”
하지만 그녀는 재경을 기억조차 못 했다. 졸업 앨범을 뒤진 재경은 간신히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더러운 꼴인 그에게 가리지 못하는 혐오를 보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그것도 일방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재경은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항상 마음만 앞서나가지. 그렇게 창피할 수도 없었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는 남들의 인생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엑스트라다. 아무리 내가 바라고 바라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은 그를 무시하고 경멸할 뿐.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참하게 울며 할머니의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어. 나한테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 할머니, 제발 나 도와줘. 한 번만 도와줘…….
이불을 끌어안고 울던 그는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을 만졌다. 이불 지퍼를 뜯어보니 할머니가 모으고 있던 돈이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가 꼬깃꼬깃 모인 돈은 총 십만 원. 그건 재경의 고등학교 교복비를 위한 저금이었다.
그녀가 남긴 사랑에 재경은 눈물이 돌았다. 이대로 할머니가 바랐던 모든 것을 포기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고등학교는 가라고 그랬지. 거길 가면… 가서 열심히 뭐라도 배워서 졸업한다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뭐든 좋으니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른 친척들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고모한테 말해서 3년 만이라도 이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하자. 할머니가 있던 집에서, 할머니의 흔적과 함께. 혼자서도 해나갈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그는 달력을 보았다. 낡은 전자시계와 비교해 보니 벌써 내일이 3월이다. 공휴일에는 가게를 열지 않아 오늘 내로 교복을 얻기 위해 재경은 집을 나섰다. 벌써 저녁 시간이지만 아직 닫지 않은 곳이 있을 것이다.
욕심껏 말했던 명품 교복은 이제 됐다. 급한 대로 번화가로 달려나가 아무 교복집이나 가려고 했던 그는 여름쯤에 실컷 두들겨 팬 다른 중학교 출신 무리와 마주쳤다.
“이게 누구냐. 근데 어디서 냄새 안 나냐?”
“거렁뱅이 새끼도 아니고. 그 꼴로 잘도 다닌다?”
“너랑 상관없잖아. 상황 가려가면서 덤벼라. 빨리 꺼져.”
“이거 돈 봉투 아냐? 얼마 들었어? 이야, 어디서 훔쳤대.”
뒤에 있던 학생이 그에게서 봉투를 빼앗으려고 했다. 할머니가 남겨놓은 길마저 빼앗길 수는 없지만 지금은 쌈박질을 할 때가 아니다. 무시하려던 재경은 상대방이 주먹을 휘두르자 참지 못하고 그대로 턱을 후려갈겼다.
패싸움이 벌어지니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그 틈에 버려진 건물까지 도망쳤다. 고등학교에 가는 전날에 경찰한테 붙잡히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이 씨발 새끼들아! 내 돈 돌려줘!”
“너한테 돈이 어디 있어. 새끼가 아까부터 구라가 매끄럽네. 건치야? 이빨은 깔 만하나 봐?”
폐건물 옥상까지 재경을 쫓아온 무리에게 방심하는 사이 돈을 빼앗기고 말았다. 할머니의 일 때문에 며칠 잠을 못 자고 컨디션이 나쁜 재경은 금방 지쳐갔다. 하늘에서는 진눈깨비 같은 비가 내렸다.
“이 돈이 그렇게 중요해?”
“어차피 훔친 거 아니까 나눠 쓰자 좀. 쪼잔하게 굴지 말고.”
돈을 세어보던 그들은 이걸로 소고기나 사 먹겠냐고 하하 비웃었다. 그들에게는 적은 돈일지는 몰라도 재경에게는 소중한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지쳐 보이는 데다 쪽수로도 안 될 테니 재경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던 때, 재경이 그들에게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들아, 내놓으라고!”
“아, 씨발 좀 그만하라고. 더러운 새끼가 자꾸!”
지긋지긋해진 그가 재경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바닥이 미끄러워 발을 헛디뎠던지라 재경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뒤에는 난간이 떨어져 부서진 곳이다. 재경이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뒤로 떨어지기 전, 그가 구해달라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들은 재경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재경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뭐라 생각도 전에 호주머니에서 MP3 플레이어가 먼저 미끄러졌다.
“뭐야? 진짜 떨어졌…어?”
높은 곳은 싫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싫다.
얼어버린 아스팔트에 붉은 체액이 뒤덮였다. MP3 기계에서 망가진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였더라. 생각이 뿌옇게 흐려져서 모르겠다.
온기가 무기질 바닥에 빠져나간다.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살려고 버둥거렸던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와, 시발. 왜 그랬냐. 진짜 죽었어? 누가 가서 확인해 봐.”
“미쳤냐? 싫어! 씨발 좆 됐다. 신고당하기 전에 빨리 도망가자.”
“개 찝찝하네.”
“고소당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 어쩔 건데.”
이젠 누구를 원망도 할 수 없다. 다 업보가 아니곤 뭐겠어. 그래도 누군가 나를 도와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세상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할머니, 나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살아서 할머니 말대로 친구도 만들고, 고등학교도 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 어른이 되어보고 싶었어.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 이대로 죽기 싫어.
그의 바람에도 손가락은 꿈쩍도 안 하고 차가운 아스팔트를 따라 생명이 흘러나왔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에 눈물이 흐른다. 진눈깨비는 빗방울이 되어 아프게 내렸다.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신이 영영 혼자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것 봐. 내가 뭘 해보려고 할 때마다 이 모양이야. 세상엔 나 같은 걸 사랑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나조차도 날 사랑하지 않는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던가, 아니던가.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무엇도 떠오르지 않을 무렵, 누군가가 재경의 손을 잡고 인도했다. 꺼끌꺼끌한 손바닥. 할머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친구나 사귀라고 잔소리를 하며 참견을 해댄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번뜩 눈을 뜨니 낯선 지하철이 보였다. 지끈거리는 두통만 남아 좀 전에 일어났던 일이 거짓말 같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온 세상이 마법처럼 바뀌어 신기했던 그는 슬프고 힘든 기억은 묻어두기로 했다. 하도 불쌍하게 보였는지 신이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건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이곳이 마냥 행복했다.
게임 속 세상일지라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은 걸로 충분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고 알기도 싫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았다.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던 신재경을 이곳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모른다. 낯선 인물에 빙의까지 했으니 완벽하게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새로 사귄 친구, 남들과 동등하게 가는 수학여행, 역전승 달리기가 빛나는 체육대회, 친구들과 함께 보는 불꽃놀이. 처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가 부모님도 소개받고 바닷가에 놀러가고, 동아리는… 류제와 같이 했으면 좋았을걸. 학교 축제에선 그가 꿈에 그리던 순간에 노래를 불렀다. 그가 원했던 것들뿐이다. 행복하다. 그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천국에 가지 않을까?”
류제의 대답에 현실을 직시해 버린 재경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천국으로 간다면 나는 천국에 있는 걸까. 그래서 이토록 행복했던 것일까. 그래서 네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걸까, 류제.
류제 신리. 내 소중한 첫 친구. 이 세계의 주인공. 내 욕심 때문에 너만의 이야기는 엉망이 되었지.
그래도 진짜 렌 지미가 아닌 신재경이라는 내가 주인공인 류제의 행복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나도 주인공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를 받아들여 준 이 세계가 좋았다. 이 세계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꼭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존재만으로도 이야기를 꼬이게 하는 그에겐 불가능할지라도.
방해꾼인 신재경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고 세상은 말했다. 그에게 이 천국은 고작 1년 한정이라 말할지언정 류제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돌려줄 수 있다면 괜찮았다. 이건 자신이 렌 지미라고 모두를 속인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기도 하다.
“그딴 잔재주는 내게 안 통해, 류제 신리!”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스위처가 동작하고 눈앞이 밝아졌다. 스위처의 교환은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익숙한 감각을 뒤로하고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해피 엔딩이 류제를 기다려 줄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눈앞에 있는 미나는 그를 류제라고 착각하고 있을 터. 미나가 손을 뻗자 재경이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챙긴 모든 대마족용 폭탄을 터뜨렸다.
“뭐야? 으읏, 이건―”
그녀가 가진 ‘옵시그나티오’가 정확하게 조준당해 파괴되었다. 같이 터뜨린 연막탄과 함께 기간트리카도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마족의 피부를 뚫을 정도의 살상력에 놀란 미나가 주춤거리며 거리를 두었다.
대마족용 폭탄이라고? 류제 신리에겐 그런 무기는 없었다. 여태 숨겨두었던 건가? 게다가 ‘옵시그나티오’가 파괴당했으니 어빌리티도 재개방되었을 터. 마음이 급해진 미나가 섣부르게 판단했다.
“놓칠까 보냐.”
기간트리카를 상당 부분 망가뜨렸는데 부스터가 멀쩡해졌다는 것은 수상하지만 저기 있는 기간트리카가 류제 신리임이 당연하다는 안일함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미나도 물론 스위처의 존재는 알았다. 그러나 수학여행 당시 기술관장에게서 슬렉터 보안 코드를 빼내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그녀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등장으로 변경 사항이 생겨 그것의 중요성을 놓쳤다.
연막탄이 시야를 가리는 틈을 타 위로 솟아오르는 기간트리카를 발견한 미나는 어림도 없다며 뒤를 쫓았다.
“아직도 나랑 더 놀고 싶어? 포기할 줄 모르는구나?”
마지막 발악이라고 친다면 놀아주지 못할 것도 없다. 마왕님을 위해 그녀는 기꺼이 날개를 움직였다.
어쩌면 운이 좋아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재경은 HUD에 표기되는 추격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치고 빠지는 건 불가능하나. 세상만사 좋게만 흘러가진 않는군.
주인공을 마왕성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미나는 절대 류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나는 도망가는 기간트리카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낭자한 마기 중 미나에게 응답한 것들이 악몽 인자가 되어 손 모양을 따라 변형했다.
인간에게서 악몽을 훔쳐 구현해 내는 서큐버스는 인자들이 어쩐지 아무것도 훔치지 못해 형태 구축에 실패하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류제 신리가 마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래서 인자들이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려 하는 거라면 위험하다.
“그래도 내게서 못 벗어나.”
애매하게 구현된 악몽 인자가 여러 갈래의 검은 손이 되어 재경의 뒤를 쫓았다. 재경도 프로텍터로 공격 방향을 확인했다.
서툴지만 병마의 공격을 몇 번이고 피한 전적이 있는 그다. 입학식 전날 바보같이 처박혔던 때와는 달리 그도 기간트리카 컨트롤에 능숙해졌다. 높은 곳에서 급강하는 고난이도 컨트롤은 무리이지만 낮은 곳이라면 요새의 지형을 이용해 회피가 가능했다.
“제길, 미나 이 끈질긴 자식! 작작 좀 하지.”
하지만 재경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곳은 나라카와 가장 가까운 곳. 정신계 마법은 물론이고 악몽 인자를 현실로 구현해 낼 밀도로 마기가 있다면 미나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요새의 구조물을 이용해 그를 쫓는 인자를 떨쳐내던 재경은 피했다고 자만하던 마지막 인자가 반대편에서 덮치자 급하게 부스터를 꺾었다.
제동 시간으로 도망이 늦어져 피하지 못한 인자에 발목이 붙잡힌 재경은 그대로 요새의 건물에 대여섯 번 충돌했다. 재경을 바닥에 내리꽂은 미나는 그가 일어서기 전 무릎으로 명치를 찍어 눌렀다.
드디어 잡았다. 쓸데없이 애태우기는. 이제 손바닥 위이다.
“컥!”
최신형 군용 기간트리카로도 막을 수 없는 물리적 충격이 내장에 직격했다.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아프다. 요염한 자세로 기간트리카를 짓누른 미나는 얼굴을 팔로 가두었다.
신음이 류제 신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기간트리카 헬멧 안쪽을 살폈지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목을 조른 그녀는 짐승 같은 손톱으로 헬멧을 뜯어냈다.
“렌 지미……!”
드러난 얼굴은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류제 신리가 아니다. 재경은 당황하는 미나의 표정을 곱씹으며 비웃음을 돌려주었다.
“이야, 참 미안하게 되었네. 생각대로 안 돼서. 꿈도 꾸지 마셔. 류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근거 없는 객기를 부려도 재경의 마음속은 절대 편치 못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 영문을 모르는 채로 있을 류제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제발 내 생각대로 흘러가야 할 텐데. 재경은 부디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류제가 쪽지를 읽고 그대로 이행하길 바랐다.
“도대체…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사사건건 날 방해하는 거야! 류제 신리를 어떻게 빼돌렸지?!”
“그 잘난 계략으로 생각해 보지 그래? 인간보다 똑똑하다며. 위대한 마족 나으리.”
“너… 너……!”
악몽보다 더 바라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미나는 믿을 수 없다며 비명을 질렀다. 매번 방해만 하는 렌 지미라는 존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술수를 써서 류제 신리와 강제로 떨어지게 한 렌 지미는 앞으로도 절대 그녀를 방해할 수 없도록 남몰래 처리하게 했다. 말도 안 되지만 고작해야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감히 유능한 부하가 실패하고 만 것인가.
미나는 끝까지 자신을 능욕하는 빌어먹을 인간의 목을 짓눌렀다.
“컥… 큭……!”
“죽어… 죽어버려. 그 전에 류제 신리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당장 말해!”
재경의 목에 핏대가 올랐다. 정신을 잃을 것 같으면 조금씩 숨구멍을 열어주며 가장 고통스럽게 살려주는 미나가 붉은 동공을 부라렸다. 류제 신리의 위치를 들으면 이번에야말로 죽이고 말 테다.
“절…대… 안 돼.”
말하지 않는다면 직접 확인하면 된다. 재경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미나는 머리를 손으로 짓눌러 정신에 침범하기를 시도했다. 이전처럼 손 하나만이라도 충분하다. 이 인간의 기억을 단 한 번만 읽어내면 돼.
이곳은 마국과 가장 가까운 땅. 나라카에 있는 마기들이 흘러 들어온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렌 지미라도 안으로 침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미나는 손끝 하나도 용납되지 않고 튕겨 나가자 미쳐 날뛰며 괴성을 질렀다.
“도대체 왜!”
미나가 주먹을 내질렀다. 고개를 돌려 간신히 엇나간 공격은 귀를 스쳤다. 그녀가 신관 기둥에 화풀이를 했던 것처럼 충격을 따라 훈련장에 커다란 거미줄 모양 금이 갔다. 졸린 목에 간신히 숨이 트인 재경이 연거푸 기침을 하며 산소를 들이켰다.
그가 살아 숨 쉬는 게 꼴 보기 싫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미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재경의 머리채를 붙잡아 주먹을 후려갈겼다. 인간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에 재경은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이빨은 물론 광대뼈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많고 많은 인간 중에 너만 안 되는 거야. 이 위대한 서큐버스의 왕이 네 빈약한 머릿속에는 왜 못 들어가는 거냐고! 네까짓 게 어떻게 내가 마족인 것을 알았던 거야! 어떻게 우리의 계획을 이렇게 방해할 수 있는 거야! 도대체가 왜! 왜!! 넌 뭐야!”
“글쎄. 알 게 뭐야.”
눈알이 터져 눈물 대신 흐르는 붉은 피에도 킬킬 웃은 재경은 그까짓 것에 집착하는 미나를 비아냥거렸다. 미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저 하찮은 인간과 마왕의 혼을 들고 달아나던 마왕 살해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미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채를 놓은 미나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재경의 상처를 상냥하게 쓰다듬은 그녀는 머리를 터트릴 것처럼 악력에 힘을 가했다.
“류제 신리의 위치는 이제 됐어. 대신 널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날… 죽인다고 해서… 너희는 절대로… 인간을 이길 수 없어.”
“아니, 이기는 건 우리 마족이야!”
“이미 늦었어. 인간이 이겨.”
지금까지 이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기만 하던 그에게 세상은 벌을 주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재경의 바람의 담긴 말이다. 하하하. 재경이 쌤통이라며 자조했다. 교실에서의 상황과 형세 역전이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그러게 누가 날 무시하래.”
이를 악물고 미나를 조롱하는 재경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억지로라도 미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참았던가. 망할 미나한테 드디어 한 방 먹였다.
이에 뭔가 알아차린 미나가 살의가 담긴 손을 치웠다.
“너 ‘예지’를 할 수 있구나?”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본성에 재경은 흠칫 놀랐다. 역광으로 숨겨진 광기가 자신만만하다. 렌 지미의 정체에 수많은 가설을 세워오던 미나의 눈에 정확한 깨달음이 짚였다. 그렇지 않다면 류제 신리를 바꿔치기하는 등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정해져 있다’느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못 한다.
“무슨―”
“네 어빌리티는 끝까지 불명이었지. 내 최상위 정신계 마법도 네 머릿속은 미지의 곳이었어. 정신 방어계 어빌리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네 어빌리티의 부가적인 기능이었던 거야.”
인간의 정신은 지식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이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어빌리티의 고유성 때문에 내가 이 망할 인간의 꿈에 들어가지 못한 거라면 완벽하게 설명된다.
재경의 얼굴이 굳어지자 이제는 반대로 미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군. ‘예지’. 그래서 넌 그 여자처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굴었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면 너도 갈 데까지 갔구나, 미나.”
“얼버무리지 마, 렌 지미. 절대 날 속일 수 없어.”
처음 교실에서 슬렉터를 나눠주던 렌 지미를 봤을 때는 인간이었을 때처럼 그녀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인간이 있다고만 여겼다. 어차피 인간들이란 다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류제 신리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마기에 예민한 인간인가 의심이 서렸다.
사사건건 방해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내가 마족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를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지. 그 무소불위의 여자가 마왕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또 방해하는 거야. 여기서 렌 지미를 봤을 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 그 직감은 사실이다.
“과연. 류제 신리의 정체에 입을 다물어준 것도 우정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이미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언제부터 이 일을 계획했니, 간사한 인간아. 네 미래는 보이니? 보였으면 좋겠네. 하하하!”
괜한 입놀림으로 힌트를 줘버린 재경은 혀를 차며 머리를 굴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섬광탄을 꺼내 들려는 찰나, 미나가 그의 손목을 밟았다. 기간트리카를 뚫고 그녀의 날카로운 구두 굽이 재경의 손목을 짓눌렀다. 재경은 꼴사나울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질러버렸다. 뼈가 박살 난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자! 다시 미래를 봐보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류제 신리를 마왕으로 타락시킬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더러운 인류가 멸절하지? 알고 있지? 알고 있잖아! 말한다면 지금은 널 살려줄지도 모르지.”
“미쳤냐?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해.”
다리를 들어 올린 미나는 그대로 재경을 발로 깔아뭉갰다. 굉음과 함께 그 힘을 버티지 못한 훈련장이 무너지며 재경은 아래로 추락했다.
오랜 세월 동안 호세마타 요새에서 풍화되었던 공동이 훈련장 아래에 있었다. 이대로 떨어질 수 없었던 재경은 망가지지 않은 한쪽 부스터로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미나의 공격에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기지를 발휘해 부스터의 방향을 바꾸어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 낙법한 재경은 마지막 희망인 슬렉터를 짓이겨 버리는 미나를 짜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말해!”
외침을 듣고도 미나의 얼굴에 퉤 피를 뱉은 그가 잘도 히죽거렸다.
“구질구질한 자식. 그런 건 네 힘으로 알아서 해. 100년 동안 열심히 대가리 굴렸을 거 아니냐.”
“이 잃어버린 100년의 계획을 네까짓 게 망쳤어. 네가 뭘 알아!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분노를! 우리가 받아온 불합리함을 뭘 이해하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방해는 하지 말았어야지!”
“글쎄. 어쩔 수 없잖아. 난 인간인걸.”
이해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이 게임에서 트루 엔딩을 본 재경은 역시 미나가 마족이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른 사천왕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슬픔의 근원을 알지만 그들을 구원해 주는 건 그가 아니라 류제 신리여야 했다.
“헤,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내가 널 그냥 보내주는 거니까. 미래를 위해서.”
그래서 재경은 끝내 미나의 핵을 파괴하지 못했다. 재경이 제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 가운데를 꾹 누르니 소스라친 미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빌어먹을 인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이 세상은 정말 불합리하지 않냐?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불평등하거든. 뼈저리게도.”
그도 한때 미나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을 가장 하위의 비교 대상으로 삼아 박탈감만 선사하는 이 세상이 밉기만 했다. 진정으로 위해주지 않아 비참해지는 자신 따위 쓰다듬어주는 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가 아니면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버리면 기껏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한심해지잖아. 참견이 싫다고 밀어내고, 동정한다고 반발하고,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가시를 세우면 정말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는 걸 그는 이미 경험했다.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불평만 늘어놓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아. 마음을 닫아버리면 그걸로 그냥 끝나버리지.”
하하하. 왜 하필이면 지금 그때가 떠오를까. 재경은 과거에 불평만 하다 허무하게 죽어야 했던 그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항상 후회했어. 내가 그때 더 일찍 깨닫고 노력했다면… 좋았을 텐데. 내 못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날 미워만 하지는 않았다는 걸 인정했으면 새로운 걸 볼 수 있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조금은 더 원래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불평만 하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어.”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더 많은 비참함을 겪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미나는 재경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내게 설교를 해? 나는 무력했던 그때와 달라. 전부 바뀌었어. 내 삶도, 내 가치관도! 난 마족으로 진화했어. 바뀌는 게 없다고? 그건 인간인 널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러니 너도 수백 년이 넘게 똑같은 증오심을 품은 그대로인 거잖아!”
재경이 지지 않고 외쳤다. 정곡을 찔린 미나는 자신이 주춤거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저 눈에 두려움을 느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분노했다.
굳게 부정했지만 재경의 말이 정답이다. 그녀는 수백 년이 넘게 살아왔어도 인간을 가장 증오했던 바로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멈춰있다.
그때의 기억에 갇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증오. 인간을 향한 분노에만 매달려 하는 거라곤 오로지 인간을 미워하며 폄하하고 죽이는 것뿐.
모든 마족이 그랬다. 마왕이 증오로 이루어진 육체를 선사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모든 마족은 모르는 척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아갔어. 너처럼 원망만 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따돌림을 당했던 유네도, 일족이 몰살당했던 비키도,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세라 쌤도, 엄마를 잃었던 왕녀도, 류제도. 모두 극복했어. 극복해 낼 거야. 그러니까 넌 질 거야.”
“닥쳐! 이기는 건 우리야. 그 가증스러운 입을 당장 찢어발겨 주지.”
재경의 말은 그녀를 일깨워 준 마왕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녀를 부정했다. 지금의 미나는 납득하지 못할 말이다. 재경은 그걸 알면서도 계속 미나를 자극했다. 언제라도 좋으니 미나가 깨달았으면 했다.
“그리고 나도… 나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시야가 뿌옇게 흔들린다. 어쩐지 어디가 아프다 했더니 철골로 된 구조체 중 하나에 잘못 부딪혔는지 허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인간 주제에 우리의 마음을 알 리가 없지. 우리들의 분노를, 증오를…….”
화를 돋워놓고 홀로 죽어가는 인간이 괘씸하다. 내버려 두면 목적은 이루겠지만 그녀는 분은 풀리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던 그녀의 발에 차이는 게 있었다. 슬렉터가 강제로 해제되면서 키트가 튕겨 나가 힐링 팩터 몇 개가 굴러다녔다.
발로 툭 차본 미나는 미소 지었다. 멱살을 잡아 재경을 들어 올린 그녀는 힐링 팩터를 하나 그의 대동맥에 매몰차게 꽂았다.
“일어나. 아직 멀었어.”
순간 숨을 들이켠 그를 바닥에 내팽개친 미나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재경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강한 생명력을 강제로 주사당하자 눈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던 재경은 숨을 몰아쉬며 땅을 쥐고 기었다.
기침을 두어 번 해보니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상처가 아무렇지 않게 회복된다.
오싹한 살기에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나가, 그로서는 구제할 수 없는 슬픈 악마가 어둠 속에서 붉은 동공을 부라렸다.
“안다고? 그럼 너도 한번 당해봐.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절망을.”
“하하… 그딴 걸 해서 뭐 하게?”
“널 누구보다 비참하게 만들 수는 있지.”
어둠 속에서 히죽 웃는 광기는 어떠한 설득도 듣지 않았다. 증오에 먹혀버린 미나의 구원은 재경이 아닌 류제가 해야 할 몫이었다.
“너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한번 해보자고, 렌 지미.”
류제. 네가 나 대신 마족들을, 증오에 먹혀버린 미나를 구해줘. 너라면 할 수 있어. 네가 날 구해줬던 것처럼.
“누가 뭐래.”
제립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싫었던 미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지금껏 받은 방해, 마왕의 부활체의 관심을 독차지한 질투, 감히 인간 주제에 그녀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환멸감으로 미나는 재경을 장난감 부서뜨리듯 망가뜨렸다.
“아직 더 할 수 있지?”
땡그랑. 새로운 주사 커버가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간트리카가 없으면 나약하게 짝이 없는 인간의 몸이 쇼크가 오면 그녀는 다시 힐링 팩터를 주사해 살려냈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움직임이 없어지면 또 새로운 힐링 팩터를 꺼내 들고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무자비하게 쑤셔 넣었다.
그걸 네다섯 번 정도 반복하니 질려버린 미나가 재경을 내팽개치고 하, 한숨을 내쉬었다. 후련하지는 않지만 짜증은 풀렸다.
“아직도 아까처럼 말할 수 있겠어? 응? 이기는 게 누구라고?”
“…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이제는 말할 힘도 없는 재경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두들겨 맞은 온몸이 아팠다. 이가 부러지고 입가가 찢어졌다. 몸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고 아까부터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팔팔한 걸 보니 한 번 더 할 수 있겠네?”
이걸 다시 할 셈이라면 이젠 버틸 수가 없었다. 미나는 마지막 남은 힐링 팩터를 들고 재경에게 다가왔다. 솔직히 이젠 재경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으니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는데.
“……!”
순간 이변을 감지한 미나가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마족만이 느낄 수 있는 기를 느꼈던 걸까. 악마가 혀를 내둘렀다.
“망할 마가릿 그 미친년이 어째서!”
병마의 군주가 죽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러다이트를 손질하고 율폰에게 간 거 아니었나? 인간에겐 마가릿을 저지할 수 있을 만한 병력이 없을 텐데?
“왜, 뭔가 잘못되었나 보지? 누가 죽었나?”
킬킬킬 웃는 소리에 미나는 동요했다. 분명 우위를 점했던 것은 그녀인데 전부 저자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렌 지미. 이것도 모두 계산 내였단 말인가. 두려워진 미나는 재경을 부정했다.
“역시… 너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였어.”
일어난 일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천왕과 합류해야 하는 미나는 악몽의 통로로 쓸 수 없는 재경을 끔찍하게 훑었다. 어차피 죽어가고 있는 인간. 더 비참하게 만들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미나는 버려진 철근을 빼다 발목에 구부려 박았다. 그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족쇄가 생겼다.
“네가 거기서 죽어가는 사이 난 류제 신리를 마왕으로 부활시킬 거야. 네가 어떤 미래를 보았건 상관없어. 너는 절대 마왕님의 눈에 닿지 못할 거고 마왕님은 널 잊을 테니까!”
그대로 비참하게 죽어라. 그 누구도 널 구원해 주지 않는 이곳에서 네가 했던 헛짓거리들을 곱씹으면서.
“마왕님이 부활했을 때까지 네가 살아있다면 그때 절망하는 널 보며 자비롭게 목숨을 끊어줄지도 모르지.”
흥. 고개를 돌린 미나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가장 가까운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향하려던 미나가 스위처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둘째 치고, 그녀가 사라지자 드디어 긴장이 풀린 재경이 숨을 헐떡거리며 아픈 몸을 웅그렸다.
원래 세상에서는 머리통이 한 번에 깨져서 죽을 때 아픔은 덜하기라도 했지 고통이 계속되는 건 참을 게 못 되었다.
“씨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미친년은 너야 너.”
아파서 토기가 밀려올 지경이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가져온 힐링 팩터는 절대 만능이 아니었다. 신중하게 써야 하는 약물을 한꺼번에 사용하다니 단단히 미쳤다. 1회 권장 용량을 훨씬 넘어서서 치사율에 가깝게 받아들여진 약물이 몸에서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가까운 과거에 상처가 났던 부분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면역 체계가 과열된 몸으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환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재경이 아픈 어깨를 누르자 피부가 터졌다. 과거 힐링 팩터로 치료받았던 상처가 물러졌다.
병원에서는 힐링 팩터를 맞으면 몇 달은 독성을 중화시키는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재경은 기숙사에 아직 남았던 약 봉투를 떠올렸다.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지금 와서 깨달았어도 늦었다.
“제길…….”
악다구니로 일을 저질렀지만 이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갔던 류제는 잘 해냈을까. 재경의 지식이 류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이곳에 대신 왔던 게 의미가 있었을까. 이걸로 이 세계는… 류제가 가질 미래는 해피 엔딩에 가까워졌길 바란다.
궁금한 것은 산더미 같은데 들리는 것은 그의 숨소리와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뿐. 그때도 이렇게 심장이 뛰었던가? 정신이 멍해지면서 이 아픈 육체의 감각은 점점 멀어지게 될 거다.
재경은 문득 아주 어린 시절에 원했던 꿈을 떠올렸다. 나프탈렌 냄새가 나던 이불 위에 누워 꾸던 기억이다. 어린이날에 남들처럼 부모님과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보고 싶었다. 그의 앙증맞은 양손에 투박한 손, 부드러운 손 마주 잡고 높게 높게 들어주는 그들은 그를 사랑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티브이 위에 있던 가족사진에는 다 큰 재경이 그들과 함께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해서 그 낡은 안식처로 놀러 가면 기쁘게 맞아주신다. 휴일에는 아침에 신문을 읽는 아빠와 따스한 햇볕 아래서 잠시 낮잠을 자는 엄마. 이 두 사람과 차를 타고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양손을 잡고 함께 걷자. 항상 내 옆에 있어줘. 나랑 놀아줘. 평범한 집 아이처럼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해 줘. 같이 소풍 김밥도 싸주고 운동회에서 같이 달리자. 어린이날에는 놀이공원에 가는 거야. 여름에는 파도를 보고 가을에는 홈런으로 날아온 공을 잡자. 겨울에는 난로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는 건 어때.
이제 다시는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 줘.
“엄마, 아빠……?”
희망찬 행복을 원하던 바람에도 마주 잡아준 손들이 그를 미련 없이 놓았다. 이제 다 같이 모여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재경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들이 그를 버리니 두려워졌다.
이제야 함께할 수 있는데도 재경의 등을 차갑게 밀쳐낸 그들은 다시는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나타난 또 다른 손이 그를 강제로 끌고 갔다. 재경은 그들과 점점 멀어져 갔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나…난 싫어. 이제 싫어!”
드디어 만난 부모님은 멀어지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재경은 조금만 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이유가 없어도 그를 사랑해 주는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떠나기 싫었다.
“왜 그래, 할머니! 이거 놔. 엄마, 엄마! 아빠!”
그럼에도 할머니는 그를 질질 끌었다. 꺼끌꺼끌한 손은 뿌리치기에는 너무 단단했다. 돌아가야지. 가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녀가 말하지만 재경은 어릴 적 공터에서 부리던 땡깡을 부리며 안 가겠다 버둥거렸다.
“싫어……! 힘들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 날 미워할 거야. 나 같은 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거야. 난 나쁜 사람이야.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이제 쉬고 싶어. 못 하겠어.”
미안하다, 할미가 미안해. 울고 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자기 멋대로만 굴려던 재경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머니가 고생을 자처하진 않았을 것이다. 재경은 아련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추억했다. 어린 시절 고집을 부리는 그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손은 그를 짐처럼 매달고 있던 사슬같이 보였다.
재경아, 우리 어화둥둥 귀염둥이 재경아. 고등학교 올라가서 친구는 많이 사귀었느냐? 응?
“응, 행복했어. 그 애들과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그는 어린아이가 아닌 성장한 한 사람분의 어른이 되었다. 그러자 그를 붙잡았던 할머니의 손이 그를 쓰다듬었다.
재경은 아래로, 아래로 되돌아갔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는 앨리스처럼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물건들이 커다랗게 맴돌았다. 티브이 위에 있던 가족사진, 할머니가 얻어다 준 MP3 플레이어, 할머니가 절에서 얻어왔던 커다란 달력, 1등 상품으로 받은 싸구려 필기구 세트, 유치원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
그 사이로 익숙한 여자가 그의 앞에 툭 떨어져 멈추었다. 그처럼 지푸라기 같은 색의 머리칼은 조금 더 길어 양 갈래로 아무렇게나 묶은 여자가 코끝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보았다.
“가기 싫다니 무슨 마음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저지른 일은 네가 수습해. 도망은 절대 용서 못 해.”
그녀는 재경과 함께 빙글빙글 떨어지는 감각을 즐겼다. 기억에 없는 모르는 여자가 아는 척을 하자 재경이 물었다.
“넌 누구야.”
“누굴 거 같아?”
“…나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의미 모를 장소에 함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폭소했다. 가당찮은 말을 들었을 때만큼 폭소했다. 상상력이 참 기발하다.
“아니, 아니지, 이 이레귤러야. 데이터로 보자면 나는 ‘렌 지미’라는 캐릭터와 관련이 있지만 너라는 존재는 아니거든. 그렇잖아. 다른 세상에서 온 신재경 학생?”
그녀가 세라의 흉내를 내다가 어디에서 난 안경을 벗어 던졌다. 어째서 아무도 몰랐던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았을까. 그리고 여긴 어디인가.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가. 기억이 안 났다. 오랜만에 말 상대가 생겨서 기쁜지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렌 지미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 깜찍하게 빌어먹을 꼬마. 내 계획을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걸로도 모자라 이런 지경까지 몰고 오는구나.”
“놀리지 마. 넌 도대체 누구야?”
여기까지 왔으면서 이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멍청한 아이를 어떻게 할까 그녀가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양 넘어갈 수 있지만 기껏 방해 없이 만났는데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싶었다.
“흐음.”
하지만 바로 말하는 건 재미없으니 그녀는 힌트를 주기로 했다.
“첫째, 나는 ‘시크릿 엔딩’에 나오는 인물이야. 둘째, 나는 마왕을 죽이고 지금의 일을 꾸몄어. 마왕이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어 마족을 멸족시킨다는 100년에 걸친 계획을.”
이 정도의 힌트를 들었다면 재경이라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거울 속을 통해 보던 렌 지미와 닮은 그녀의 모습에 사라 하놋이 그더러 언니와 닮았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누구라고?”
“로라 하놋.”
정확히 알아보자 로라 하놋이 박수를 치고 정답이라 외쳤다. 어이쿠, 재경과 함께 하염없이 떨어지던 그녀는 재경의 마음속에 있는 추억의 물건들에 부딪힐 뻔했다며 장난스럽게 머리를 매만졌다.
“하지만 난 요절했지. 마왕을 죽이고 나도 죽어야 할 운명이었거든. 대신 동생에게 조언자의 자리를 부탁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어.”
“동생이라면… 사라 할머니?”
귀여운 동생과 연이 있는 그를 그녀가 자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살아있지 않은 그녀의 손은 무기질처럼 차가웠다.
“다행히 나도 류제 신리와 동시대에 환생할 수 있었지. 어떻게 알았냐고?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누구 덕분에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자문자답하는 그녀의 말투는 충분히 오만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재경이 투덜거렸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야 내 환생이 바로 렌 지미인걸. 당연히 그 사이에 끼어버린 너와 상관이 있지.”
“내가 렌 지미인데. 네가 나라는 말은 뭐 비슷한 거잖아.”
재경은 당연하게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니 로라 하놋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깔깔거렸다.
“아니, 넌 렌 지미가 아니라는데도. 너는 이 세상을 세상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매개체이자 이레귤러에 불과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사라 할머니도 날 이레… 뭐라고 했었지. 그럼 네가 매번 날 불행에 빠뜨린 거야?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이 세상에 없기를 바란다면 이제 됐잖아.”
어깨를 으쓱인 재경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로라 하놋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낱 창작물에 불과한 세계에 들어온 고귀한 영혼을 세계는 탐탁지 못하게 여겼다. 그가 세상의 정해진 이야기를 바꿀 때마다 그를 없애기 위해 꾸물거렸던 이유다. 그가 죽으면 연결은 끊어지고 이 세상은 다시 평범한 게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네 불행은 순전히 네 탓이야. 내가 한 게 아니라. 시간이 없는데 설명해야 할 게 천지구나.”
“당연히 아무도 말을 안 해줬으니까 모르지.”
“그래, 귀여운 꼬마야. 잘 들으렴. 이 세계는 본래 진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언젠가 네가 했던 한 게임에 불과해. 네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 알겠니?”
“…게임하고 닮은 세상이란 건 나도 알아.”
“닮은 게 아니라 정말 게임이었다는데도.”
그녀가 존재하던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로라 하놋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네 영혼을 이곳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대가가 필요했어. 이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 너만 보내면 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다른 세상에 있는 영혼을 연결해야 했거든. 평행 세계라고 아니?”
당연히 몰랐다. 로라 하놋은 아무렴 좋다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뭐든. 우리는 고작 데이터인 세상에서 벗어나 너희 세계와 동등한 세계가 되었지. 너의 소원으로 인해.”
“내 소원?”
“네 하나뿐인 소중한 소원. 짐작 가는 게 분명 있을 거야.”
소원. 소원이라면 하나 있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후회하며 간절히 소망했다.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한 명쯤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삶을 원했다.
“그 소원으로 이 세계에 침입한 너는 인간이 평화를 이룩할 길을 바꿔놓았어. 처음엔 난 네가 미웠지. 공들여서 만들어놓은 이야기가 너로 인해 흐트러졌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게임 세상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던 이야기였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사들. 늘 같은 선택지. 넓어 보이지만 아주 좁은 세계. 이야기대로 흐르기만 하는 세상. 게임 안이란 그렇다.
“정말, 네가 연결된 대상이 하필이면 왜 렌 지미였을까 몰라. 기왕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내는 거라면 다른 인물이 되어도 좋았을 텐데.”
“난 대가 같은 거 낸 적 없는데.”
“냈어. 다른 사람이. 착한 아이라면 그분들에게 감사하렴.”
“그분이라니 누구?”
“누구겠어? 널 가장 사랑하는 세 혈연이지.”
혈연? 가족들? 재경은 그에게 단 한 명밖에 없던 가족을 떠올렸다. 세 사람이나 있을 리가. 아니, 아니다. 할머니만큼, 그보다 많이 그를 사랑했을 사진 속의 그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우리는 네 소원으로 같은 영혼이 되어버렸지.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는 게 이런 걸까. 그래도 진정으로 살아 숨 쉰다는 감각은 기뻐. 네가 여기에 오기 전까진 우리들은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으니.”
“잠깐만, 너와 렌 지미가 같다면… 게임에서는 네가 삼류 악당 렌 지미를 연기했었던 거야? 그 하찮은 놈을? 류제를 위해서?”
“하하. 렌 지미는 렌 지미지. 나와 렌 지미는 같은 영혼이지만 서로 달라. 사고방식도 행동도 능력도. 지금의 너와 나처럼.”
“내… 능력?”
로라 하놋의 능력은 순간 이동이다. 재경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렌 지미의 능력을 떠올렸다.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나. 그런 빈 공간을… 내가 채웠구나.
“사라가 말해주지 않았니? 네 어빌리티는 네가 소원을 이룰 수 있게끔 미래를 바꾸는 거라고.”
“비슷한 말은 들은 적 있어.”
“대충 그런 거야. 평소라면 이런 시시한 게임 이야기는 쉽게 잊어버렸을 거였잖아? 너의 바람이 강할수록 미래는 또렷이 기억났지?”
“그럼 사라 할머니의 말이 사실인 거야?”
“우리 사라도 참 똑똑하지.”
[재경이 스토리를 바꾼다 → 히로인들의 생각이 바뀐다 → 히로인들의 스토리가 바뀐다]의 흐름을 예로 들면 재경이 스토리를 바꾸어 히로인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에는 대가를 받지만 생각이 바뀐 히로인들의 스토리가 바뀌는 것에는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것을 제외하고 렌 지미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정해진 미래를 자의적, 고의적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대가를 가져갔다. 모든 어긋남은 이 세계와 재경의 기싸움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정해진 대로만 흘러갔잖니. 네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게임과 다를 바 없어. 이젠 네가 알 수 있는 미래는 없으니 미래를 바꾸는 건 더 이상 무리겠지만.”
로라 하놋은 상세한 이야기는 재경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엔딩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지? 게임처럼 다른 엔딩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뭐야, 그럼 난… 정말로 그냥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야?”
로라 하놋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뭐야. 이 세상에 날 보낸 이유가 그냥 내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였다니. 나는 뭐 대단한 사명이라도 가진 줄 알았는데. 재경은 만나지 못하고 항상 그리워만 하던 그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아직 울 때는 아냐. 조금만 더 있으면 완벽한 세계로 거듭난 세상은 너와 내가 모르는 미래로 나아갈 거거든. 그때 가서 울어. 세상과 싸워 이긴 승리의 눈물로.”
“상관없어. 어차피 난 아무것도 못 해.”
“과연 그럴까?”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기는 이르다. 엔딩을 보기 전 그가 떠나버리면 이 세상은 미완성인 채로 게임으로 돌아간다.
로라 하놋은 재경과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보니 렌 지미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그가 라우라 축제 때 했던 여장 모습보다 더 예쁘고 선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네 눈으로 확인해. 난 마지막을 위해서 조금 잘 테니. 애쓰지 않아도 내 영혼은 너에게 전부 돌아갈 거니까 걱정은 마. 세상은 기쁘게 널 받아들여 줄 거야.”
손을 맞잡아 주던 그녀는 재경을 멀찌감치 밀었다.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그녀는 상관없는 듯했다. 점점 그녀가 멀어져 갔다. 대신 목소리만 간곡하게 닿았다.
“나 대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꼭 봐줘.”
그녀의 목소리를 끝으로 순간 뜨겁고 아픈 육체의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꿈을 꾼 것 같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벌써 주변이 어두워졌다. 달빛 사이로 빛나는 금속이 보였다. 이물감에 눈을 끔벅거리지만 한쪽 눈이 깜깜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어깨를 움직였지만 역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엉망이라도 목적의식이 샘솟았다. 일어서야만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저 행복해지기를 원한 부모님의, 할머니의 의지라면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윽… 큭……! 제길!”
일어서려던 재경은 왼쪽 발목에 박힌 족쇄에 걸렸다. 미나가 떠나기 전 그의 다리에 걸어놓은 것이다.
정말 이대로 죽어가라는 거군. 류제처럼 신체 강화를 못 하고 슬렉터가 없으면 무능력자에 가까운 재경은 막막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이걸 먼저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박힌 족쇄를 풀기 위해 군화를 벗던 재경은 방법을 강구했다. 미나가 갑자기 떠났다는 건 류제가 병마의 군주를 쓰러뜨렸다는 의미일까. 그다음은 수마의 군주, 아가타의 성에서 화마의 군주, 마지막으로 나라카의 성에서 미나와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면 전쟁이 끝나고 해피 엔딩이다.
그의 몸은 부작용 속에서 기적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류제를 도와줘야 해. 나도 마지막까지 함께할 거야. 다 같이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 말겠어. 하지만 방법은 뭐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군화를 벗어보아도 발은 발목에 걸린 구멍을 통과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는 발칙한 눈동자를 굴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공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주변을 둘러보던 재경은 달빛을 받은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남은 힐링 팩터를 주사하려던 미나가 던져놓은 것이다.
그는 간신히 움직이는 왼쪽 팔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희망 고문 하는 힐링 팩터를 주운 재경은 어떤 생각을 시행할 것인지 알기에 손이 떨려왔다. 미나도 그가 여기까지 할 수 있는 독한 놈이라고는 생각 못 했을 거다.
날카롭게 잘린 철근을 집어 든 재경은 이대로 갇혀서 굶어 죽든 미나에게 살해당하든 그냥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여겼다. 세라 선생님을 찾으면 돼. 괜찮아. 지금까지 잘 해냈잖아.
눈을 질끈 감고 아킬레스건 부분을 깊게 찌른 재경은 아픔이 느껴지기 전에 족쇄에서 발을 빼냈다. 끔찍한 고통에 마지막 남은 ‘힐링 팩터’를 주사한 재경은 몸을 부들거리며 고통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결국 가지고 온 걸 전부 써버렸다.
고통이 진정될 무렵 다시 들어온 약물의 영향으로 안정되었던 몸이 붕괴하고 붙기를 반복했다. 살갗이 녹아내려 다른 사람이 봤더라면 구울과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 재경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망가진 슬렉터를 주웠다.
“가자…….”
이상하게도 높은 곳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를 위로 올려줄 슬렉터는 망가져 기간트리카는 간신히 메인 부스터만 살았다. 방향 조절을 하지 못해 중간중간 튀어나온 지지대를 붙잡아 그는 천천히 위로 향했다.
고생 끝에 간신히 호세마타 요새 지상으로 올라간 재경이 드러누웠다. 달빛 아래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사이 힐링 팩터가 막아주던 상처가 다시 곪아 터졌다. 잘라냈던 다리는 다시 끊어질 것 같고 과거 산탄총에 맞았던 상처 부위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찔했다.
그럼에도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걷고 걸었다. 살기 위해 나아가도 호세마타 요새는 키아나트리체의 최전방.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비추는 것은 하늘 위 달뿐이다.
작은 움직임에도 찢어지는 상처가 아파도 걸었다. 그는 어렴풋이 목적지를 정했다. 수학여행 때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처에 가깝게 있던 마을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에 피신하자. 조금만 가면 돼. 조금만 더.
환각 속에서 걷다 보니 얼마큼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힘이 빠진 다리가 질질 끌렸다. 그의 몸은 한계에 봉착했다. 멀리서 보이는 사람이 진짜인지도 헷갈린다. 다가오는 발소리와 동시에 재경은 쓰러졌다.
힘없이 감겨가는 눈꺼풀 사이로 바라보니 이전처럼 혼자 외롭게 죽어갈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태양이 그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새로운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거기엔 류제가 있을까? 다른 친구들도 있을까? 할머니도 있을까? 부모님도 있을까?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서 시작하자. 분명 잘될 거야. 내가 류제를 불행하게 하지도 않고 내가 류제와 친구여도 괜찮은 세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누군가가 렌 지미가 아닌 그가 이곳에 있었음을, 이 비참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신재경이 잠깐이라도 이곳에 있었음을 아는 세계였으면 좋겠다고 재경은 조심스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