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10) (70/112)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10)

마녀들이 모여 살던 마을은 심심하고 오래된 것들뿐이니 그는 종종 몰래 그곳을 빠져나가 다른 마을을 둘러보며 노는 것이 취미였다.

그런 그에게 살갑게 다가온 자가 있었다. 그 인간은 세상 물정 모르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며 새로운 친구가 되어주었다. 개구쟁이지만 활달하고 친절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악마의 힘을 가졌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던 인간에게 그는 마음을 열었다. 잘 맞았던 그들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는 한번은 마녀의 마을을 몰래 소개해 주었다. 인간은 기뻐하며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인간은 착하고 상냥했다. 인간들은 생각보다 나쁜 자들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을 누나들은,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는 그 상냥한 인간을 믿었다. 상냥한 인간을 따라 더 많은 인간과 소통하고 싶었다. 인간과 다른 점이 아닌 공통점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라 안에 마녀의 마을이 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고 배신자에게 정보를 얻은 국가의 군인들이 마을을 찾아 소중한 그녀들을 무차별하게 사냥했다.

그를 배신한 그 인간은 입을 나불거릴 때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아아, 인간들이란 배신자들이다. 인간 병사들에게 쫓기다 강물에 빠져 죽어가는 여동생을 보며 그는 울부짖었다.

인간을 믿었던 그가 아둔한 멍청이 같았다. 왜 그녀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을까. 인간이 밉다. 증오스럽다. 그의 실수 때문에 처참하게 죽어버린 그녀들의 영혼이 안쓰럽다. 인간들은 항상 그래왔는데.

“류제 군, 정신 차려!”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분노를 받아들이자 류제의 용모가 최초로 각성했던 그때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용인의 피가 증오에 반응하여 들끓는다. 인간의 피부 따위 간단히 으스러트릴 듯한 날카로운 송곳니가 용인의 피에 반응해 깊게 자라났다.

푸른 눈동자 안에 떠있던 인간의 동공은 샐쭉하게 모아졌다. 피부가 전부 갈라져서 떨어지는 것같이 고통스럽다. 등 뒤에서는 추악한 날개가 가죽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인간 따위 우리들의 힘 앞에서는 가볍게 바스러지는 버러지에 불과한데.

“마왕님… 나만의 마왕님.”

황홀해하는 미나는 마왕의 기운에 심취했다.

어째서 이토록 어리석은 인간의 편을 들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이대로 정녕 끝일까. 그때, 어둠에 사로잡힌 정신 속에서 그를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 정말 렌이 말했던 대로 되고 싶어?! 의지박약 같으니. 창피하지도 않아?”

봇물처럼 쏟아지는 천 년의 세월이 넘게 쌓인 마왕의 기억에 질식하기 직전, 류제는 그 목소리에 손을 뻗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거라며!”

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었나 떠올리니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 인도해 주는 것 같았다. 그가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렌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겨야만 한다. 단 한 사람의 절망을 사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 전쟁의 끝에는 패배밖에 없다는 그 외침을 류제는 진실로 만들어선 안 되었다.

그러자 증오의 감정이 섞여 파도치던 기억이 잠잠해졌다. 익숙한 손길은 그를 더 아래로 이끌었다. 그는 손길을 따라 더 깊은 기억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용인으로 각성해 본래의 육체를 되찾은 그는 슬픔 속에서 앞에 있던 시에스타를 최초의 마족으로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시에스타는 나콜렙시라는 이름을 새롭게 받고 절망하며 울부짖는 그를 다독여 주었다.

파괴된 마을 속에서 일어난 그는 인간에게 주어야 할 감정은 증오만이 마땅하다 여겼다. 그는 추악한 인간들에게서 용인의 위대한 피를 가진 자들을 구원해 주겠다며 새로운 땅을 찾았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인간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믿고 싶어 다가갔다가 절망한 마녀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반복. 모든 일의 반복. 인간을 향한 증오와 끝이 없는 복수. 그의 감정은 메말라 갔다. 그 무엇도 그를 즐겁게 하지 못했다. 그가 하고 있는 짓이 과연 진정으로 마녀들을 구원하는 행위일까라는 고민은 이제 할 수 없다. 그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러니 왕좌에는 무력함과 지루함만이 남아 그를 옭아맸다. 새롭게 잡아 온 인간으로 만든 만찬도, 이제는 어빌리터라는 이름이 된 마녀들이 그가 피를 일깨워 준 마족들을 소멸시켜도, 꼬여버린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날은 계속되었다. 그는 마족을 만들고 마족들의 증오를 이용해 인간을 죽이고, 마녀의 원석들은 마족을 죽였다.

그때 감히 그만의 단단한 요새에 침입한 인간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마왕이었던 그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알고 있다. 로라 하놋. 마왕을 죽였던 여자가 그의 눈앞에 있다.

“나랑 내기를 하나 해.”

인간 주제에 건방지게 미소 짓는 그녀는 이상한 말뚝으로 심장을 찌르고 그에게 말했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건방지게 그의 몸에 올라타 재잘재잘 팔자 좋게도 떠들어댔다.

이 고통은 예사의 것이 아니다. 저건 용인의 보구라 알려진 윤회의 말뚝. 마왕의 전생도 똑같이 저 말뚝으로 육체가 붕괴해 다시 태어났다. 지금도 그때처럼 불로불사의 육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네가 다음 생에서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면 내 승리야.”

감히 멋대로 육체를 붕괴시키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을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네가 널 위해 붙잡고 있는 마족들을 놓아주기로 해. 네가 이기면 너는 인간을 차지하는 거지. 멸망시키든 아니든 네 멋대로 해도 좋아. 어때, 잠깐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즐거운 유희라고 생각하지 않니?”

“하하하, 시건방진 인간. 감히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가?”

로라 하놋은 답하지 않았다. 끝이 나지 않는 무료함을 견뎌내고 있던 마왕은 그때 분명 웃고 있었다. 인간의 호기는 믿지 않는다만 정말로 오랜만에 지어보는 미소였다. 물론 그는 승리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 후로 100여 년이 흐른 바로 지금, 과연 인간과 마왕이 한 최초의 내기의 승리자는 누구일까.

그가 새롭게 눈을 뜨자 푸른색 눈동자 위에 인간의 것이 아닌, 그렇다고 마족의 것도 아닌 기묘한 동공이 드러났다.

그의 보석처럼 빛나는 동공은 파충류처럼 샐쭉하고 마족의 것처럼 붉었다. 히로인 중에서 유일하게 세라가 저 모습을 기억했다. 안티 슬렉터의 영향으로 생성된 거대한 진동 때문에 그가 렌 지미와 함께 리엔달로니아 협곡 아래로 추락했을 때이다. 불안정하게 마왕의 힘이 개방되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 류제의 모습은 완벽하게 마왕으로 탈바꿈하고 만 것처럼 보였다.

“마왕님……! 아아, 정말로 마왕님이야!”

이 눈은 세상에서 마왕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드래곤의 산물이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빛깔에 감격한 미나가 환희에 차 외쳤다.

천신만고의 긴 노력 끝에 드디어 마왕이 부활했다. 다른 사천왕의 도움 없이도 그녀 혼자서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달아오른 미나는 짜릿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이 돌아왔으니 지금 세상의 모든 마족이 축배를 들어 그를 환영하고 있을 것이다.

“류…류제… 군?”

“안 돼. 그럴 수는… 류제, 너…….”

반대로 믿었던 그가 완전히 마족으로 변모하자 히로인들은 발밑이 무너지는 절망에 넋을 잃었다. 절대 마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던 류제의 확고한 신념이 환상처럼 들린다. 마왕의 부활은 류제 신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었단 말인가.

정녕 저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니냐롯트가 움직이려는 그때 세라가 저지했다.

마왕은 무감각한 눈동자를 굴려보았다. 그는 차분히 새로운 신체를 둘러보았다. 돋아난 훌륭한 뿔과 세 쌍의 날개는 인간이었던 육신을 가볍게 부정했다. 그를 지켜주던 기간트리카가 부서져 떨어져 나갔음에도 마기 때문에 숨이 막히지 않았다.

과연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이런 것인가. 지금까지의 몸은 갑옷 안에 속박되어 있었던 것처럼 혼에 맞게 변모한 육체는 이다지도 가볍고 상쾌하다.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마왕님을 위해서 저만큼은 꼭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마왕님, 마왕님……!”

“…플로냐.”

미나가 마왕을 끌어안았다. 나라쿠바라. 우리들의 왕. 백여 년 사이의 공백이 끝나고 드디어 주인이 나라카로 돌아왔다.

그를 부활시킬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마족들이 소멸했다.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애먹게 한 값을 톡톡히 치러야겠지. 하지만 분명 돌아온 그는 류제 신리와 다르게 마족들을 사랑해 마지않을 것이다.

“윽……!”

그러나 미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손을 든 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를 찔렀다.

마왕처럼 외관이 달라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히로인들은 순간 공격당한 미나처럼 사고가 마비되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미나는 마왕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미나가 아는 마왕의 감정이 담긴 얼굴이 아니었다. 지루하고 나른하며 무감각해야 하는 그에게 다른 의지가 있었다.

“말했잖아. 나는 다른 사람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고.”

천 년이 넘는 세월로 쌓인 기억이 흘러들어 왔을 텐데 그는 천 년 동안 마족들을 이끈 마왕이 아닌 인간 류제 신리로서 이곳에 서있었다.

고작 2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세월을 인간으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그 기억이 그를 움직일 주축이 될 수 있는 건가 미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날 공격하는 거죠……?”

뒤로 물러난 그녀는 어렵지 않게 상처를 치료했다. 이제야 그의 모습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이제 드라코니스 입자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마왕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키아나트리체 군복을 입었다.

“류…제 신리!”

안일했던 건 그녀다. 곧바로 핵을 노리지 않은 것은 마왕으로서의 하찮은 자비를 베풀어준 건가.

“내가 류제 신리이기 때문이지. 네 말대로.”

미나는 그가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틀렸어! 내가 아닌 인간들을 공격했어야지. 기억이 돌아왔잖아! 분명히 기억하고 있잖아요, 마왕님! 그런데 왜!”

그녀가 원하던 마왕이 돌아왔다고 생각하던 미나는 분노가 폭발했다. 머리를 헤집는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실패했다고? 기억을 되찾았는데도 왜 우리를 인정하지 않지? 왜 그때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건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건 질렸어. 나는 너희들의 왕이 되지 않을 거야.”

기억을 완전히 되찾은 류제는 과거의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시에 수많은 상실의 아픔과 증오를 끊임없이 들추어서 반복하는 행위는 그만두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끈기라고 했던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던 마왕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인간들에게 조금씩 설득당한 것이다.

그러니 미나가 그렇게 바라던 마왕의 육체가 전생의 기억과 함께 깨어났을지언정 바뀐 건 없었다. 다만 류제가 이전보다 마족의 증오의 뿌리 깊음과 그의 죄를 더 공감하게 되었을 뿐이다.

류제의 의지로 마기가 증오를 박탈해 인자가 다시 평범한 드라코니스 입자로 돌아갔다. 히로인들을 감싸고 있던 미나의 악몽 인자가 와해되었다.

이에 자유의 몸이 된 히로인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시 인간의 역전의 시간이다.

“말도 안 돼!”

미나가 다시금 마법을 시도했지만 마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저들의 의지가 담긴 눈에 두려움이 생겼다. 어째서지? 어떻게 계속 일어설 수 있는 거야. 몇 번이고 악몽을 보여줬잖아. 그만 포기하란 말이야!

“아냐… 아니야. 이게 아니야!”

미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꺾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무엇이 그를 바꾼 거지? 마왕에게 서큐버스의 세뇌는 이제 통하지 않는데.

미나는 저자들과 대치하는 이 상황이 타고시아 해변에서 있었던 악몽의 사건과 겹쳐졌다. 렌 지미는 없지만 그녀들 안에 있는 그가 그녀와 싸우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죽었어야 하는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했던 거야. 마족이 인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이걸 의미하는 거였나, 렌 지미!

“웃기지 마! 네 모습을 봐. 너는 마족이야. 인간과 절대로 섞일 수 없어. 인간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부정하는 거야? 넌 배척당할 거야. 우리가 없으면 어빌리터들은 어차피 다시 고통받게 되어있다고! 인간 편에 들지 마!”

가진 마기를 모두 끌어모아 폭주하고 싶은 미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왕의 힘을 깨닫고 기억을 떠올린다면 한때는 인간과 즐겁게 지낸 그라도 반드시 되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저 용인의 눈은 이전 마왕의 눈이 아닌 류제 신리의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어. 네 덕분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건 류제가 그녀에게 몇 번이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나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마족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류제는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플로냐.”

류제가 미나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마왕이 두려워진 미나의 몸이 벌벌 떨려왔다. 인간의 몸이었던 류제 신리면 몰라도 힘을 각성한 마왕은 마족에게 있어서 초월자나 다름없는 존재. 일개 마족인 그녀가 상대할 수 없다.

죽음이 드리울 것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찬 미나에게는 더 이상 무기가 없었다. 이제 이곳의 모든 마기는 류제의 컨트롤하에 있다. 이대로라면 렌 지미 말대로 그녀의, 마족의 패배로 끝이 난다.

“이걸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나는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등 뒤로 꺼내 들었다. 이 고대 유물을 이용해 류제의 육체에서 다시 영혼을 적출하는 방법이 남았다.

이전 로라 하놋이 했던 대로 마왕의 심장에 꽂아 영혼을 강제로 빼앗아 윤회시킨다면 마족은 또다시 시간을 다시 벌 수 있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미나가 류제의 심장을 향해 말뚝을 조준했다. 그 전에 말뚝을 등 뒤에 숨기던 미나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눈치챈 네 히로인들이 미나를 막아섰다.

“이제 그만둬. 다 끝났잖아.”

“미안해, 미나 양.”

질리지도 않고 방해한다. 미나가 그녀들을 뿌리쳤다.

“하찮은 인간들 주제에……!”

로라 하놋이 사용하던 무기를 손에 넣었나. 그 말뚝을 알아본 류제는 욕심이 많은 미나의 손에서 흉악스러운 무기를 떨어뜨렸다.

미안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벌써부터 다시 태어나긴 사양이다.

그가 자연스레 미나의 손바닥을 잡아 짓눌렀다. 이곳에 그가 과거 미나의 증오를 혼과 함께 응축시켜 핵을 만들었다. 그 조그마한 핵에는 그녀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존재했다. 이걸 파괴하면 미나의 영혼도 파괴되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왜? 인간을 미워하면 된다고, 증오하면 된다고 그랬으면서 어떻게 당신만 인간의 편에 서는 거야? 어떻게 깊고 진한 증오를 단숨에 식힐 수가 있냐고! 나만 내버려 두고 가버리지 마!”

“플로냐,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포위되어 버린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 영혼까지 파괴당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서 존재 의의를 증명하길 바랐다. 인간들이 나쁘고 그들이 옳다는 걸 알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를 구원해 준 사람은 이제 와 그 방식이 틀렸다고 말한다.

“인간이 증오스럽잖아. 마왕이 되었으니 예전처럼 인간을 죽이면서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해버리란 말이야!! 왜 예전의 당신이 아닌 거야. 어째서! 로라 하놋 그 망할 계집이 당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러지 못하는 그를 원망하며 미나가 류제를 때렸다. 그녀의 마왕님이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가 원했던 마왕님과 달랐다.

류제는 그 위대한 서큐버스의 왕이 부리는 앙탈에 그저 미소 지었다. 미나의 눈에서 잊은 줄만 알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마왕님, 왜 우리를 버리시는 건가요. 어떻게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한 그들을 감히 용서할 수 있어요? 저는 못 해요. 인간이 미워. 싫어! 용서할 수 없어!”

“알아. 이제 괜찮아. 여기서 멈추면 괜찮아질 수 있어, 플로냐. 날 믿어.”

마왕의 힘을 완전히 깨달은 류제는 그녀의 핵을 파괴하지 못했다. 이 핵을 파괴하면 미나는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되어버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미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지금보다 머리가 더 길었던 인간일 적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너의 증오를 이용해서 미안해. 그만 과거에서부터 널 자유롭게 해줄게.”

인간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눈물 흘리던 그녀를 받아준 유일한 자가 마왕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그와 함께 있으면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린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틀리고 싶지 않았다.

“아아, 싫어! 인간 따위 싫어! 과거 따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보지 마. 보지 말아 줘……!”

적어도 남은 마족들만큼은 제대로 구원해 주고 싶다. 류제는 붉은 파충류의 눈으로 그녀의 상처와 증오의 근본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에게 류제는 사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어빌리터는 더 이상 마녀라고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들을 물리칠 수 있는 기간트리카는 이제 막 개발 단계에 착수한 탓에 모든 어빌리터가 인간들의 환호 속에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책에 나오는 마족이라는 존재에 흥미는 있었지만 베일에 싸인 악마들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마주해야만 한다. 마족들을 만난다면 곧바로 죽은 목숨이니 그녀는 어빌리터나 마족은 그녀의 삶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 속단했다. 두려운 존재들에 대한 환상은 책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소녀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하교할 때 심부름으로 장을 봐 오던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소녀. 귀여운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쓴 그녀는 어쩌면 또래 남자애들의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바라지 않았던 어빌리티가 발현했다. 이를 인지한 순간은 그날 그녀의 부모님의 태도가 이상해졌을 때부터다.

여느 날과 똑같이 잠에서 깨어 학교에 가려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내려온 그녀는 부모님이 돌연 괴물처럼 달려들자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는 그녀에게 마수를 뻗쳤다. 누구보다 자상하던 부모님이 두려워진 그녀는 도망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부모님은 짐승으로만 보였다.

그녀가 간신히 방으로 도망치자 제정신이 든 부모님은 자신들이 저지를 뻔한 죄를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구석에 처박혀 훌쩍거리는 딸을 보면서도 또다시 그런 마음이 울타리를 벗어나 샘솟는 자신들이 얼마나 역겨웠을까. 그러니 그녀의 아버지는 그날 미안하다는 글만 남기고 마을을 떠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욕조에 잠겨 자결했다.

돌연 세상에 혼자 남게 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이것이 마족의 저주인가 여겼을 정도로 어빌리티에 무지했던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마을에 나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오는 건 비극, 비극뿐이었다. 제발 누군가, 교회에서 말하는 전능한 신이라도 내려와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길 바랐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자신에게 생긴 이상한 능력이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깨달은 건 며칠 후이다. 그녀는 사람을 꾀어내는 이 음란한 능력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인간들이 상대하기엔 강대한 정신계 어빌리티를 가져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체취는 숨결은 의도하지 않음에도 인간의 마음을 침범하고 유린했다.

원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성욕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건 비참한 일이다. 마주친 모두가 그녀의 몸을 사랑했다. 아무도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엔 죄책감을 가졌던 마을 사람들은 점점 행동을 합리화했다. 어차피 마족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하찮은 어빌리티를 타고난 거면 이런 식으로라도 인간에게 도움이 되라 말하기도 했다. 더러운 것은 그녀뿐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미나는 미쳐버린 마을에서 벗어나 아가타로 가고 싶었다. 어빌리티를 발현했다고 국가에 알렸지만 그녀의 능력은 마족을 상대하기엔 쓸모가 없어 키아나트리체는 그녀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체계적인 어빌리터 교육 기관조차 설립되지 않았기에 그녀의 어빌리티 컨트롤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방치되었다. 이제는 고작해야 죄책감 때문에 그녀를 버린 부모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시…싫어요. 싫어. 하지 마. 그러지 마요. 부탁이에요. 이제 싫어… 그만…….”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마족과 싸우지도 못하는 어빌리터면 가만히 대주기라도 해. 어차피 이러려고 있는 능력 아냐? 응?”

“이 음란한 년이. 좋아? 좋겠지. 그렇지 않으면 매일같이 우리를 보고 꼬리를 칠 리 없어.”

인간 취급도 아니다. 그녀의 능력 앞에서 모럴을 망각한 마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그녀를 유린했다. 그녀의 반복적인 거절을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비참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지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빌리티는 그녀의 의견을 묵살했다. 바라지 않았건만 더러운 자로 낙인찍힌 심정을 아는가. 이런 능력은 세상에 없는 게 나았다.

그녀가 본디 좋아하던 사람은 옆집에 살던 독서를 좋아하는 두 살 많은 청년이다. 가족끼리 친해 어릴 적부터 함께했고 분명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감정의 기류가 존재했다. 마을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녀는 그가 마을을 떠나는 전날 직접 만든 책갈피를 선물로 주었고 편지에는 그가 추천해 주었던 책을 읽어 감상을 써서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그녀가 어떤 존재였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저 사람이 좋았던 시절. 면학을 위해 수도 아가타로 향했던 그가 돌아왔을 때 마음을 고백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런데 그가 잠시 마을을 비운 사이에 그녀는 소중한 첫 경험을 무자비하게 날려버리고 존재감이 없었던 그녀의 취급은 가축처럼 바뀌어버렸다.

아아, 이 능력이 정말 싫다. 통제되지 않는 주제에 날 비참하게 타락시키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능력 따위 왜 내게 주어진 걸까.

그녀는 그렇게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그녀가 누구이고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 죽기는 무서워서 매일매일 두려워하며 살아갔다. 덕분에 굶어 죽지는 않으니 망정이라고 할까. 어둠 속에서 거울로 자신의 몰골을 본 그녀는 하하하 허탈하게 웃었다.

운명처럼 찾아왔던 그날은 그녀가 마을에서 도망치기 위해 모두가 잠들 무렵 집을 나왔을 때부터 벌어졌다.

새벽일을 하려다 회관 금고에 모아둔 돈을 들고 달아나려는 그녀를 발견한 서너 명의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향한 소유욕만 들어차 다시금 마수를 뻗쳤다. 미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장소를 불문하는 행위를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해가 떠오르던 무렵이었나. 그녀가 그렇게 듣고 싶었고, 또한 당장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욕구에 잠식당했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남자를 보고 잠시 제정신을 차렸다. 몇 달 동안 편지가 없던 그녀가 걱정되어 돌아온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냐… 아냐! 아니야!”

가장 보여주기 싫었던 비참한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켜버리다니. 수치를 잊어가던 미나는 가장 수치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더러운…….”

미나는 그의 얼굴에 비친 혐오감이 떠올랐다. 부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부정했지만 그녀는 더러웠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와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만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미웠다. 그조차도 나를 더러운 것으로 취급한 거다. 내가 잘못했던 걸까? 무엇 때문에 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평범하게 살아오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저것들이 나쁜 거야. 더럽지 않았다. 더러운 건 인간들이다. 미워서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 나를 희롱하고 못살게 군 그자들을 전부……!

하지만 나는 힘없는 소녀일 뿐인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뭐야, 당신도 나를 원하는 거야? 마음대로 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이에게 그런 취급을 받은 후로도 소리 내어 웃는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정신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와 준 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친 몸을 깨끗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내가 복수를 도와주지. 너는 저자들을 미워하기만 하면 돼. 그것이 네 새 의지야.”

이 어빌리티 때문에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던 내게 손을 내밀어 준 건 당신이었다. 잘못된 건 인간이라고.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알려준 건 바로 그였단 말이다.

하얀 손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주며 껴안아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것이 여전히 떠오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날 버리냔 말이야.

“그건 분명히 당신이었어. 당신이 죽고 싶었던 날 구원해 줬어. 그 손수건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단 말이야. 더러워지고 낡았어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제대로 떠올려야 해. 미나. 그게 아니야. 너는 잘못 기억하고 있어.”

류제는 언젠가 새하얀 손수건을 선물해 주자 뛸 듯이 좋아하던 미나가 떠올랐다. 그러나 류제는 그녀의 기억과는 반대로 미나의 몸을 닦아주지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았다.

“나는 너희들을 고통받는 그 순간에 박제시켜 항상 분노하고 슬퍼하게 만들었지. 그건 구원이 아니야. 너를 증오에 붙잡아 놓았을 뿐.”

큰 충격을 받아 왜곡되어 버린 순간을 류제가 제대로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 다시 한번 순서대로 생각해 보자.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건 누구였더라?

그 새하얀 손수건은 아가타에서 파는 고급 천으로 만들어졌다.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마음을 담아 그것을 구매한 사람은, 그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좋아하던 인간 남자였다.

그녀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괜찮다며 다독여 준 사람은 마왕이 아니라 그자였다.

“아아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진짜일 리가 없었다. 그 남자를 향한 증오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셀 수도 없는 마을을 멸망시키고 더러운 인간들을 가축처럼 살해하면 그녀가 당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그 인간 남자를 향한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더럽다고 말하며 역겨운 듯이 내리깔고 지나간 그 남자를 향한 배신감과 증오가 그녀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기억이었다고? 상처받은 나머지 그녀가 왜곡시켜 버린 기억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분명……!”

미나를 끌어안은 류제는 그녀가 잊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돌아온 남자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을 들은 미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더럽다’는 말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했다는 걸 그녀는 오해했다. 피폐한 나머지 모든 모욕적인 언사가 그녀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실은 며칠 전부터 어빌리티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는 욕망 해소의 쾌감에 먹힌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그녀를 농락한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미나는 몰랐다.

그렇기에 남자에게는 그녀의 어빌리티가 통하지 않았고, 그는 미나의 눈물을 닦아준 후 덮을 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잠시 마을 회관에 들어갔다. 그사이에 미나를 지켜보던 마왕이 다가와 그녀를 마족으로 만들었다.

도망간 줄 알았던 그는 직후 모포를 들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녀는 마왕을 따른 후였다. 그녀는 돌아볼 것도 없이 마을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마왕은 그걸 알면서도 미나의 증오를 이용했다. 인간을 죽일 더 많은 마족을 만들어 그의 곁에 두었어야 했으니까. 차라리 마족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미나라면 인간을 더욱 미워할 수 있는 군주급 마족이 될 것이니.

“이제 그를 용서해 줘. 또한 나도 용서해 다오.”

인자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마족이 성스러움에 약하다는 펠노아의 미신은 마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눈시울이 붉어진 세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끈질기게 남았던 미나의 악몽 인자가 점점 사라져 갔다.

“으흑, 흐으윽, 흑. 으아앙……!”

미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자신의 증오가 오해에서 비롯한 표출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미나의 몸이 점점 붕괴하기 시작했다.

핵이 파괴당한 건 아니다. 뒤늦게라도 그녀가 저지른 짓의 실상을 알아버리니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을 향한 용서를 돌려받은 그녀의 의지이자 마왕의 의지였다.

“미안해, 류제. 미안해, 너희들을 배신해서 미안해. 아아,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어째서……! 왜 나는 그를 의심했던 걸까. 왜 나는… 나는 항상……!”

그녀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마지막 시선이 떠오른다. 사무치게 후회해도 벌써 20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그럼에도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전에 건방지게 말하던 렌 지미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잘못되고 있었다.

“미나 플로리아, 이제 편히 쉬어.”

인간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 사용했던 그녀의 가명은 역시 인간일 적에 쓰던 그녀의 본명이었다. 그때로 돌아가 읽지 못했던 책을 찾아 읽으며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을 류제는 똑똑히 기억했다.

“류제… 류제……! 미안… 미안해…….”

“다음 생은 행복한 삶이 되기를.”

핵이 파괴되지 않았으니 그녀에겐 후생이 생겼다. 이제 증오밖에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용서라는 최후가 있었구나. 그녀의 윤회를 허하는 것이 마왕의 뜻대로라면 그럴 것이다.

어쩐지 죽음에 이르러서야 증오했던, 좋아했던, 사랑했던 인간이 용서가 될 것 같았다.

“내가 네 소중한 사람을…….”

긴 시간 동안 이 감정을 망각했던 미나가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류제도 모든 기억을 떠올렸으니 마족들을 놓아줄 힘이 생겼다. 그가 로라 하놋과의 약속대로 힘을 개방했다. 뿔과 날개가 그의 옷을 흩트려 놓았지만 그가 악독한 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들도 놓아줄게.”

그러자 인계 곳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왕의 부활을 축하하며 인간을 학살하던 다른 마족들도 용서를 돌려받고 붕괴한 것이다.

“네가 이겼어, 로라 하놋.”

그녀와의 기나긴 내기에서 시원하게 져버린 류제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드디어 천 년의 지루함에서 빠져나와 한 발짝 전진했다. 마족들의 증오에 붙들렸던 드라코니스 입자는 자유가 되었다. 증오가 쌓였던 마왕성에서 마기가 빠져나갔다.

이를 느낀 니냐롯트가 기간트리카 헬멧을 해제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어 다른 히로인들도 답답했던 숨을 벗어나 상쾌한 공기를 만끽했다.

나라카로 향한 이들을 기다리던 호세마타 요새에서는 어둠에 가려졌던 나라카가 인계처럼 밝아지자 혼란스러워했다. 기지로는 마족들이 저절로 소멸했다는 보고들이 폭주했다.

새로운 황제가 여는 새로운 시대인가.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이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때에 기도를 올렸다.

후련하다. 이제 그의 앞길엔 케케묵은 증오 대신 미래를 위한 조각들이 끼워 맞춰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류제.”

지친 친구들에게는 설명을 덧대주어야 할 것 같다. 완전히 자신을 되찾은 류제는 머뭇거리는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 모습 어때? 난 조금 어색하네.”

히로인들은 안도했다. 류제의 새로운 모습은 낯설어도 그가 류제 신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잘했습니다, 류제. 당신이라면 해낼 줄 알았어요.”

일단 세라는 선생님의 마음으로 곧바로 달려와 그를 껴안고 칭찬해 주었다. 처음 이 모습을 봤음에도 그를 인간이라 말해주었던 그녀 덕분이다.

류제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녀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류…류제 군. 이제 정말로 끝난… 거지?”

“약속대로 마족을 없앴어. 이제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지. 끝이라면 끝난 건가. 드디어.”

“그대는 고약한 사람이구나. 가장 중요한 사람이 하나 남았지 않아.”

허탈하게 웃은 니냐롯트가 그를 가리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마족과 달랐지만 거기까지 설명하기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용기가 없던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끔 함께해 준 동료들에게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든 조금 어색한 모습이 되어버린 류제에게 비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다는 것만 기억해 둬.”

세라의 판단은 옳았고, 비키는 복수의 굴레를 끝냈다. 유네는 자기 힘으로 가치를 만들어냈다. 니냐롯트는 바라왔던 꿈을 이루어 감정이 벅차올랐다.

미나는 끝내 구원받았다. 나라카에 머무르며 마족을 놓지 못한 전 마왕이야말로 나라에게, 마을에게, 가문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핍박받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숨어서 계속 울고만 있었지 않았나 류제는 반성해 보았다.

이제라도 그들을 놓아주었으니 편안한 안식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마족들의 공격을 받다가 말고 어안이 벙벙할 백장미 부대원들과 합류할 일이 남았다.

남은 네 사람의 히로인들은 류제를 향해 마땅히 손을 내밀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장소가, 만나야 할 인물이 인계에 있었다.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자꾸나.”

“가자, 류제. 기다리겠다.”

“힘내서 돌아가야지.”

“서둘러서 갑시다.”

기다리는 사람의 품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마족이 사라진 이 앞길이 변할 모습은 오로지 그들 하기 나름에 달려있었다.

* * *

전쟁이 끝났다. 베일에 싸인 적국의 땅이 검은 안개를 거두고 모습을 드러낸 데다 인류 최대의 숙적이 사라진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끝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대표인 마왕은 로라 하놋의 내기에서 졌다며 패배를 인정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미노타의 일만 마무리되면 인류는 천여 년 만에 평화를 찾는다.

어둠뿐이던 나라카에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시다. 니냐롯트는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니냐롯트에게 있어 고통의 끝에 도달한 승전은 기쁨만 차오르지는 않았다. 키아나트리체를 새롭게 이끌어나가야 할 그녀에게는 인간들이 보지 못했던 곪은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족을 놓아준 류제의 선택이 틀리지 않게 슬픔이 되풀이되지 않을 미래를 선택해야겠지. 그것이 마왕을 죽여 인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팠던 로라 하놋이 바란 일일 테니까.

그러니 류제는 전우였던 자들에게 구태여 정체를 숨기지는 않았다. 백장미 부대는 물론 2차로 나라카로 진입한 다른 부대들의 도움으로 마왕성 지하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이 간신히 구출되었을 때에도 그는 마왕의 모습 그대로였다.

날개가 썩 거추장스럽다고 여길 무렵 네네 슈만 등 마족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무리에게 하마터면 류제가 공격당할 뻔했다. 이에 히로인들은 그들에게 마족의 기원을 설명해 주고 지금 모든 마족을 없애 나라카의 마기를 흐트러뜨린 건 류제라고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래서 마족들이 납치한 어빌리터들을 살려둔 것이 아니겠나.”

그것조차 마족의 술수라고 경계하는 그들에게 실제로 기간트리카를 해제 중인 히로인들을 증거로 들어도 믿지 않았다. 갇혀있던 군인들을 치료해 주던 세라가 제발 그만하라고 진심으로 화를 내고 나서야 네네 슈만이 떨떠름하게 공격을 멈추었다.

“믿을 수가 없어. 마족이 실은 어빌리터였다니.”

만나는 사람 족족 그렇게 대꾸해도 그게 진실이다. 말대로라면 마족이 사라졌어도 아직 그에겐 마족을 만들어낼 힘이 있고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생각을 알 수 없는 류제를 경계하는 그들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놀라 허둥거렸다. 류제는 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쇠약해진 포로들을 데리고 나라카에서 호세마타 요새로 넘어왔을 때에는 해가 뜨려는 시간이었다. 니냐롯트에게 마족들이 연이어 사라졌다는 보고를 올리고 싶었던 호세마타 요새의 인물들도 류제의 날개를 보고 소스라치며 놀라 뒤로 넘어졌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 모양이니 이야기가 진전이 안 되었다.

“목격자가 충분히 생겼으니 그만두는 게 어떤가, 류제여.”

“나도 처음엔 좀 재미있었는데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어.”

마왕일 적에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이 싫어 용인으로 변모한 육체를 내버려 두었다만 태초 그대로의 용인도 아니니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있었다.

너무 큰 소란이 얼쩡거리니 재미가 식은 그는 신체를 인간처럼 되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 호세마타에 있던 사람들도 마족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조금 인지하는 듯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인간들을 위해 요새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해주던 알라마니 기술관장이 차트를 넘기며 물었다.

“네 의도를 모르겠군. 지금처럼 인간 흉내를 내고 아무 말 없었으면 누구도 몰랐을 텐데 왜 털어놓은 거지?”

“경각심을 남겼으면 해서요.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가 낳은 참사에 대해서.”

어쨌든 류제는 그의 정체를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그는 인간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생을 끝내지 못할 테니 언젠가 탄로 날 사실이기도 하다.

또 마족이 생겨나고 사라진 이유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가 목격자이자 증언자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상징으로 마족의 진실을 기록하길 원했다.

이에 니냐롯트도 찬성했다. 어빌리터들이 이곳에 서있을 수 있는 이유를 알아야만 인간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줄 것이다.

부활한 마왕을 보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타국과 마찰이 있겠지만 전생을 따지는 것보단 현재 류제 신리가 어떻게 자라고 컸는지를 생각한다면 키아나트리체가 그 몫을 감당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더 남았다. 마족의 진실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한 종족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류제의 강대한 힘을 어떻게 경계해야 할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현실 또한 경계해야 했다.

일단 마왕이 건재하단 사실은 추후에 발표하기로 하고 그의 힘을 경계할 수 있는 방안을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강구하기로 했다.

호세마타의 임시 사령부는 비밀의 땅의 탐사를 위한 기지로 남기고 키아나트리체 왕가는 공식적으로 마족과의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피난민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소집 해제가 된 군인들은 공을 치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족을 제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인류 연합군도 아가타의 왕궁으로 돌아와 각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인간들은 일전 로라 하놋에 의해 마왕이 살해당했을 때처럼 돌연 찾아온 어색한 평화를 맞이했다. 떠났던 군인들이 아가타로 돌아오고 마족이 사라졌다는 증언이 나돌아도 사람들은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마족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어떤 노인들은 분명 마족은 재앙처럼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세뇌가 풀린 미노타 군인들과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미노타 왕가와의 관계도 개선될 여지가 보였다. 하늘바람의 노력으로 첫째 왕자가 사죄를 위해 찾아오겠다 약조한 것이다. 세뇌가 풀려 미노타도 위대한 후툼이 마족의 손에 사망한 사실을 인지했으니 썩은 내부를 잘라내야 할 미노타도 할 일이 많았다. 거기까지 성사되기에는 아직 준비할 것들이 있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제립학교 학생들도 학도병으로서의 임무를 끝냈다. 다시 학교로 복귀해야 하는데 전국의 기찻길들이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 나이엔힐리아에서 아가타로 향하는 기찻길이 복구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제립학교는 복귀하는 학생들에게 9월까지 넉넉한 유예기간을 주었다.

먼저 아가타로 돌아온 류제는 임시 거처인 왕궁에 머무르며 렌이 제립학교로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느리게 지나갔다. 그러던 중 잊고 있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유언을 떠올린 그는 네네 슈만에게 부탁해 그녀의 집을 찾았다.

적힌 주소를 따라 찾아가니 작은 꽃집이 눈에 보였다. 몇 번을 비교해 봐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어색하다. 호탕하게 웃었던 포르테의 모습을 떠올리던 류제가 통지서를 들고 문 앞에 섰다.

과연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18년간의 인간의 기억을(물론 전생의 마왕이 인간이었던 기억까지 합치면 도합 40년쯤은 되지만 아무리 그가 마왕의 기억을 떠올렸다 할지언정 망각의 축복은 가지고 있기에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흐릿했다) 뒤져보아도 슬픈 소식은 도리를 모르겠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우당탕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이라 실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마야?”

가장 먼저 문을 열어 그를 반겨준 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폼이 뒤뚱거리는 걸 보면 아세미보다 훨씬 어리다.

눈을 반짝거리던 소년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자 뒤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이래선 안 되겠지만 조금 귀여웠다.

“누구시죠?”

뒤이어 나온 이는 아가타에서 흔히 볼 법한 평범한 남자였다. 전쟁이 끝나자 근조 화환을 요구하는 집이 많아져 최근 일이 늘었던 그는 잠을 잘 못 잤는지 눈 밑이 검어 피곤해 보였다. 그를 본 류제가 조심스레 군모를 벗었다.

“착하지. 아빠 손님이니까 들어가렴.”

그가 소년을 좋게 달랬다. 울 것같이 인상을 찌푸린 소년은 실망해 소파로 되돌아가 얌전히 처박혔다. 오늘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옆집 누나가 전쟁이 끝났니, 마족이 사라졌니 좋은 소리만 하는데 엄마는 아직도 안 돌아왔다.

“무슨 일이죠?”

그는 류제의 군복을 보며 불길함을 느낀 듯했다. 아니면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구나 실감하는 건가. 그녀와 끝내 함께 돌아가지 못했던 류제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죽음이 담긴 전사 통지서를 전해주었다. 포르테의 남편은 사망을 알리는 붉은 종이를 침착하게 건네받았다.

“늦게 전해주어서 죄송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드리라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내 눈을 감는 그는 어느 정도 각오한 얼굴이었다. 영웅의 감투를 쓴 그녀는 위험한 곳에 앞장서야 하니 항상 그에게 불현듯 찾아올 죽음에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다.

“아빠, 왜 그래?”

무서워 보이는 군인에게 무언가를 전해 받은 아빠의 상태가 이상하자 소년이 분위기를 느끼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들을 도닥인 그는 아직 아들에게 죽음을 알려줄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온대?”

“그것 때문에 아빠가 잠시 이분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방에서 놀고 있겠니?”

“정말? 괴롭히는 거 아니야?”

“응, 괜찮아. 착하지?”

엄마가 돌아올 수 있는 건가. 소년은 내심 기대해 보며 기웃기웃 계단 위에서 섣불리 올라가지 못했다. 포르테의 남편이 어서 올라가라고 손짓하자 소년은 마지못해 담요를 질질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저 아이는 엄마가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렸거든요. 포르테는 집에 잘 못 들어오니까…….”

“그렇군요.”

“안에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그는 문을 열어 류제를 안으로 들였다. 꽃집 안쪽에는 거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처음 와본 그녀의 거처는 그의 취향처럼 귀여웠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부지만 액자 안에는 제대로 그와 그녀 둘이서 찍은 사진들이 제법 걸려있었다. 늘 군복을 단정히 입던 포르테의 사복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당신도… 그… 후배인 건가요? 어빌리터인.”

“맞습니다. 대령님께서 전사하신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소위 류제 신리라고 합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방면은 잘 모르거든요. 포르테는 잘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그가 악수를 권했다. 류제 신리라. 술을 마실 때 그녀의 입에서 이따금 들어본 적 있는 자다. 아직 제립학교 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인력 부족으로 이번 전쟁에서 그쪽 어빌리터도 차출했다고 들었다. 앳된 모습이 흔적처럼 남은 류제의 얼굴을 보니 그는 이 전쟁이 얼마나 가혹했을까 새삼 깨달았다.

“어땠습니까. 그녀의 마지막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그는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승에 남겨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런 사소한 것밖에 없다. 땅이 꺼지는 듯한 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나아가야 하는 거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에게는 상실의 슬픔을 알려주고 그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인지해야만 했다.

“잊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그 사람다운 말이네요. 유언도 1년 하고도 반년 후에 전해주다니. 참 고집 있는 사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강해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강한 척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쳐서 앞만 보던 사람의 옆자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물론 그도 상처를 많이 받았고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한 건 역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삶이란… 허망하군요. 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감정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은데.”

그는 아이를 낳고 처음 자식을 안아보던 그녀의 당혹스러움과 이내 입가에 어린 은은한 미소가 좋았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만 항상 인간이 죽는 모습만 보던 그녀에게 한 생명이 태어나는 그 감동을 알려줬을 때 들어온 눈의 생기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통지서를 붙잡은 그는 그것이 그녀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슬픔은 경계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상실의 위험을 알고 있어도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슬픔이 쏟아졌다. 사랑하는 만큼 마음껏 울어 애도를 표했다.

그렇게 사람 손에 손을 거쳐 전사자들의 거처에 도착했을 붉은 통지서에는 승하하신 선황제의 국장에 이어 전사자들을 위한 국가의 예를 갖춘 장례식이 있을 것이라 쓰여있었으며, 남편의 통지서에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역시 펠노아에서 아가타로 옮겨질 것이라는 작은 문구가 있었다.

며칠 후. 예정대로 전쟁으로 희생당한 국민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 행렬이 이어졌다.

화마의 군주와 싸우다 장렬하게 불탄 선황제의 장례식. 이어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마족에게 희생당해 죽은 군인들, 전쟁의 피해자들, 그리고 인간을 미워해야 했던 마족을 향한 간소한 위로의 향이 올랐다. 이 느긋하면서도 쓸쓸한 전쟁의 마무리가 먼 길로 사라져갔다.

하루 동안의 긴 행렬 끝에 선황제는 왕가의 무덤에 자리했다. 나란히 묻힌 부부의 무덤 앞에 선 니냐롯트가 씁쓸하게 기도했다.

예식 내내 상태가 걱정되었던 류제가 짐짓 그녀의 옆에 섰다. 류제가 왔다는 걸 인지한 니냐롯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바마마께서는 승하하신 어마마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무 능력도 없던 그가 어떻게 마족 앞에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복수를 향한 집념으로 틀어진 잘못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증오를 목숨으로 끊어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어마마마와 행복하게 있으신가요, 아바마마. 어떠한 근심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 힘든 일이지.”

니냐롯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는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바라던 일을 그녀의 손으로 끝냈음을 실감하는 니냐롯트는 품에서 은장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류제 신리여, 그대가 내게 올바른 길을 알려다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류제가 알아차리기 전에 니냐롯트는 아름다운 장신구와 소중한 비녀가 찔린 자신의 올림머리를 잘라냈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던 그녀의 금발이 비녀와 함께 선황제의 묘 앞에 놓였다.

류제는 그것이 황제가 되기 위한 그녀의 결심임을 알았다. 둥그렇게 묶인 금색 머리에 박힌 비녀를 보며 그녀는 사랑하던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바마마. 아버지. 길고 길었던 당신의 소망이 이제 풀렸습니다. 하지만 전…….

“저는 실은 당신의 웃는 모습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 눈물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황금빛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다. 이윽고 하늘에서는 슬픔으로 만들어진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 아버지를 잘 부탁드려요.”

이 전쟁의 목적이었던 류제는 살아남았고 인간들은 끝이 없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마왕이라는 씨앗을 인간은 감당할 수 있을까. 니냐롯트의 앞길에는 여전히 도전의 길이 남았다.

국장이 치러진 몇 주 후. 니냐롯트의 공식적인 대관식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가 모여 대부분의 귀족파가 역모죄로 갈려나가 지위가 박탈당하고 목이 잘렸다. 수많은 귀족의 자리가 비고 중도파와 왕녀파만 대관식을 찾았다.

공석이었던 셀로니아 후작가에는 비키가 참석했다. 류제를 비롯한 다른 히로인들도 빈자리 대신 초대를 받고 자리를 빛내주었다. 증인으로서 인류 연합군 소속 타국의 귀족들이, 미노타 대표로서는 하늘바람이 곁을 지켰다.

왕족이 왕위를 이으면 유일무이한 황족으로 추앙되는 키아나트리체의 풍습에 맞게 대관식 보구를 두르고 왕관을 물려받은 니냐롯트는 아버지가 지던 황제의 무거운 짐을 질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바쁜 일이 한꺼번에 몰아닥치고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아가타 왕궁은 화마의 군주에게 당한 상처의 수리를 이제 막 시작한 터라 가볍게 추린 대관식 연회가 끝났을 무렵 니냐롯트가 류제를 호출했다.

“뭐야, 내가 왕실을 버젓이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느긋하게 임시 알현실로 들어와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는 그를 루이나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마왕의 힘을 가졌다는 류제 신리의 두려운 배경을 알아버린 모양이라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 참견하지는 않았다.

루이나의 생각대로 니냐롯트가 한 나라의 지도자의 자리를 공식적으로 이었다고 할지언정 마왕일 때의 기억이 있는 류제에겐 그녀는 인간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자라기보다는 당돌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뭐, 이 무기는 이제 나에게 있고 그대도 누군가를 해할 의지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백성들의 안심을 위해 나와 혼인이라도 할 텐가?”

니냐롯트가 류제에게 미나가 쓰려고 했던 유물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언제 주워 왔는지 치밀하기도 하다. 콧방귀를 뀌는 류제와는 달리 미노타의 일 때문에 키아나트리체에 아직 남아있던 하늘바람이 놀라 헛기침을 했다.

“거봐, 미노타의 왕자님도 어처구니없어하잖아. 네 농담은 표정에서 안 드러나니까 재미가 없는 거야.”

“지나친 참견이군. 나도 그대 같은 무신경한 부군은 사양하고 싶구나.”

“사돈 남 말 하시네. 국서 자리가 뭐 좋다고.”

그럼 왜 말을 꺼낸 거야.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거절당해 자존심이 상한 류제는 굉장히 못마땅했다.

그들 말대로 류제가 니냐롯트의 루트로 가서 전쟁이 승리했으니 다시는 마족이 나타나지 않게끔 니냐롯트는 화합을 위해 인류 대표로 류제와 혼인을 한다. 물론 니냐롯트의 호감도가 5라서 서로 마음이 통한 상태가 조건이다.

그러나 패배 엔딩에서 극적으로 전환한 그들에겐 연인 간의 사랑은 쥐꼬리도 없으니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너도 황제 일로 바쁘니 학교에서는 못 보겠지?”

“하하, 지금이라면 재미있는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안 되겠지. 그대는 제립학교로 돌아갈 텐가?”

“재미있잖아. 학교생활이란 거. 오래 살아왔어도 학교는 처음이라 재미있거든. 왜 옛날엔 이런 게 없었을까.”

“영감쟁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전흔을 수습하고 국정을 살펴야 하는 니냐롯트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제립학교 학생들은 계속 학업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아직 지도가 필요했던 미성년자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했으니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줄 기관이 필요했다.

“존재가 모호해진 제립학교의 향방을 결정해야 해서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어 불렀다.”

니냐롯트는 어빌리터를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서 제립학교가 있는 게 아니라 어빌리티를 좀 더 잘 활용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기 위한 장소로 탈바꿈해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네 생각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학교가 나올 것 같은데. 다녀보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줄게.”

마족을 토벌하는 것 말고도 어빌리티를 컨트롤하는 법을 배우는 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내년에 새로 제립학교로 들어올 1학년 학생들은 기간트리카 대신 어빌리티 관련한 교육을 심화할 예정이다.

2학년은 바로 사회로 돌아갈 예정이고 류제를 비롯한 다른 1학년 학생들은 학도병으로서의 참전을 정상참작해 내년에 3학년으로 진급할 것이다. 9월이 예비 소집이고 이후 내년 3월이 될 그때까지는 유예기간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히로인들은 모두 제가 향해야 할 길을 재정립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류제도 렌을 기다리는 동안 마지막으로 반전의 열쇠를 쥐여준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알라마니 기술관장은 그 쪽지를 쓴 자가 펠노아에서 끝내 사망하였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암호를 풀어준다는 알라마니 기술관장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다.

알고 있었지만 연구원들에게 이전보다 더한 관심을 받게 된 류제는 용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알라마니 기술관장의 호기심을 독점했다.(별로 독점당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정기적으로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가 인간이었을 적 받은 건강검진과 어빌리티 척도를 토대로 과거와 지금 상태를 비교하는 기술관장은 새로운 가능성에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복해했다. 마족을 연구하고 싶어 하던 관장에게는 류제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즐거운 연구 자료일 뿐인 듯하다. 다 좋지만 가끔씩 변태처럼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것만큼은 꺼림칙해서 싫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조금 서늘해질 9월. 쉬는 기간 동안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고 제립학교로 돌아온 1학년 학생들이 생존자 인원 파악을 위해 강당에 모였다. 몇몇 자리가 빈 것이 보이는 걸 보니 주로 후방을 지원했던 학생 중에서도 전사자들이 꽤 있는 듯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왔을 렌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를 피해 늦게 오는 건가 싶어 기다렸지만 보이질 않았다.

렌 지미 학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학생 수를 추리던 선생님은 한참 서류를 뒤지다가 류제에게 렌의 신변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었다.

행방불명

이 글의 의미를 물어도 교사들이 하는 일은 이미 모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생의 수가 정확한지 추리는 것뿐이라 자세한 사항은 몰랐다.

“그럴 리가 없어.”

전사자 리스트에는 없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분명 제립학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들었을 거다. 오기 싫을 정도로 그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거라면 직접 설득하고 싶었다.

렌의 본가를 찾아가 봐도 그곳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변을 느낀 류제는 렌을 찾기 위해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가 있다고 했던 키아나트리체의 최남부 나이엔힐리아까지 내려온 그가 니냐롯트가 받은 보고서를 들고 렌이 속했던 부대를 찾았다.

“그건… 이상하군요. 렌 제이미라고 하는 여성분이십니다만. 전란 당시 처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살피던 담당 공무원이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었던 류제가 직접 그 군인을 찾았다. 복구 작업 현장에서 웬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찾는다고 하니 그 여성이 머쓱하게 손을 들어 군번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이름이 맞았다. 렌과 스펠링이 하나 다른 여성은 렌처럼 주근깨가 가득했지만 절대 그녀가 렌 지미일 리가 없었다.

“그럼 렌 지미… 제립학교 소속 학도병이었던 렌 지미는 어디로 간 겁니까. 1학년 8반이었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분명 기록은 있을 텐데.”

현재 군 공무원들도 수십만 명에 이르는 전쟁 실종자들을 찾느라 작업이 분주했다. 다행히 어빌리터는 소수이고 남부 기간트리카 지원부대 소속 학도병이라면 일주일 정도 만에 카테고리가 추려졌다.

“실종자라고 하셔서 한참을 잘못 찾았습니다. 그쪽으로 아직 공문이 안 간 듯합니다. 남부방위본부 제2 사단 7기간트리카 대대 소속으로 되어있는 렌 지미 병장은 작전 중 임무 수행 포기 및 탈영으로 수배 중입니다. 전시라 정보가 종합되지 않았을 때라 수색망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류제는 그저 멍청해졌다. 아찔해진 그는 망설일 틈이 아까워 곧바로 뛰쳐나갔다. 위험을 두고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 렌이 사람들을 지키는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갔다고? 그걸 내가 믿을 리가 없잖아. 그동안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나. 소리치며 원망하던 렌의 얼굴을 떠올리니 지금까지 했던 일이 허탈했다. 이제 그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안심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정작 본인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류제는 모르지만 전쟁이 끝나고 엔딩도 났으니 세상이 준비한 남은 이야기는 에필로그뿐이다. 니냐롯트와 이어져 결혼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행복한 종소리만이 그를 기다렸다.

해피 엔딩의 주인공인 그의 곁에 엔딩 히로인이 없어서 생겨버린 공백이 만든, 그럴 리가 없는 이야기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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