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9) (69/112)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9)

율폰의 핵을 소멸시킨 비키는 흰색 머리의 소년과 같은 나이가 된 자신이 서로 마주 보고 있음을 느꼈다. 새하얗게 물든 공백의 세상에서 비키가 쓸쓸하게 전했다.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널 구해주지 못해서.”

묵묵히 존재하는 율폰은 비키의 사과를 듣고 어렸던 셀로니아가의 장녀와 모습을 겹쳤다. 증오에 얽매인 혼이 풀려나고 옥죄던 증오가 사라졌다. 율폰은 연거푸 참회하는 비키를 가만히 응시했다.

“꼬마야, 네게 무슨 죄가 있었겠느냐. 복수를 위해 용서를 불태운 나의 잘못이지.”

이어 그는 곧 혼마저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가 소멸해 가자 비키는 눈물이 쏟아졌다. 셀로니아 가문에 얽힌 증오의 연쇄를 드디어 끊어냈다. 하지만 그 연쇄를 끊어낸 게 그녀가 아닌 그때 그를 절망하게 했던 셀로니아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그때 그녀가 태어났었더라면 뭐라도 바뀌었을까. 무력감이 들었다.

“과연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율폰은 씁쓸한 듯 류제를 흘겼다. 그의 마지막 눈길이 이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를 저렇게 만들었던 류제의 죄악감이 가슴을 조였다.

마족의 핵이 파괴당하자 화마의 불꽃이 만들어낸 잔여물들도 위력을 줄였다. 슬픔의 비는 생명이 되어 그들에게 내렸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불길을 점차 잠재웠다.

적막이 이어졌다. 왕궁을 뒤덮던 마기가 사라지자 사시나무 떨리듯 짓눌리는 두려움도 물러갔다.

“존재 소멸 확인했습니다.”

‘러다이트’도 기동 중지되었으니 슬렉터를 확인해 본 루이나가 말했다. 하늘바람도 비를 맞으며 혹시나 모를 일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껏 으르렁거리던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아픔을 느끼는 그들은 살아있었다.

“하…하아, 우린 살아남은 건가. 마족은 무찌른 것이겠지? 다…다시 살아나거나 하진…….”

극적으로 살아남은 귀족파 중 한 명이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화마를 잠재우기 위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지만 그 이상의 희생을 만들지 않고 마족을 소멸시켰다.

“아바마마.”

목숨 하나하나에 느끼는 각자의 가치는 다르다. 죽은 황제에게 무릎 꿇은 니냐롯트는 차갑게 식은 이마에 키스했다.

“망할 마족. 끝까지 제멋대로 구는군.”

살아남은 멜가로스크가 중얼거렸다. 설마 어빌리터들이 군주급 화마족을 해치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에 귀족파의 대표로서 반역죄를 추궁당해야 할 궁지에 몰린 멜가로스크는 마침 그의 발에 차이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율폰이 놓친 안티 슬렉터다.

황제가 죽고 귀족파는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까지 잡혔다. 여기서 왕녀를 죽이지 않으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안티 슬렉터를 기동한 그는 왕궁이 진동하는 이 기회를 틈타 칼을 빼 들었다.

“죽어라, 왕녀!”

“그…그만하십시오!”

루이나 옆에 찰싹 붙어 마기에 떨며 바리케이드 뒤에 숨죽이던 하늘바람이 유목민들이 말을 다루는 법을 이용해 멜가로스크 자작을 일순 제압했다. 멜가로스크 자작이 안티 슬렉터를 떨어뜨렸다.

그것이 ‘옵시그나티오’였더라면 힘이 부족한 하늘바람을 밀쳐낸 멜가로스크가 검을 휘두르기 전 루이나가 근거리 이동으로 검을 쳐낼 때까지의 시간을 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계속 신세만 졌으니 왕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하늘바람은 분한 멜가로스크 자작을 보며 뭔가 잘못된 걸 저지른 건 아니려나 떨리는 심정을 삼켰다.

“죄가 늘었군.”

자리에서 일어선 니냐롯트는 제압당한 멜가로스크 자작을 흘기며 그가 떨어뜨린 검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날 죽이고 싶거든 마족의 힘을 빌리지 말고 당당하게 인간으로서 맞서시오, 멜가로스크.”

니냐롯트의 손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검 끝까지 닿아 멜가로스크 자작을 위협했다. 이제 와 제 목숨이 귀한 줄 알아서 몸을 사리려는 멜가로스크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불꽃이 잦아들자 간신히 알현실까지 당도한 왕실 기사단들이 왕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멜가로스크 자작과 여타 다른 귀족파의 신병을 맡기고 황제의 주검을 정리했다.

“쓰레기 같으니.”

왕녀를 돕기 위해 다가온 비키가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멜가로스크 가문의 자작을 하찮게 흘겼다.

“망할 셀로니아. 젠장!”

치욕적이었지만 비어빌리터인 그에게는 기사단에게서 도망갈 힘이 없었다. 멜가로스크 자작은 이래서 저 오만한 셀로니아 가문이 싫었다. 지하 밑에서부터 시작한 멜가로스크 가문과 달리 어빌리터를 배출한다는 이유만으로 후작 자리를 차지한 셀로니아 가문에 열등감이 들었다.

그런 연유 때문에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율폰을 찾아가 어빌리터들을 무릎 꿇리고 비어빌리터의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게끔 손을 잡자 제안한 것이다. 마족이 그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그도 마족을 이용하면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모두 헛소리가 되어버린 그의 이상은 욕심 때문에 바스러졌다.

니냐롯트의 슬픔으로 치환된 비가 내리는 동안 검붉은 불꽃이 완전히 꺼지고 왕궁이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군주급 마족은 미나뿐이다. 쪽지를 살피고 있던 류제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비를 맞았다. 힘들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미나를 소멸시켜 미노타의 어빌리터들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일이 남았다.

“그들은 정말로 먼 옛날 인간이었던 존재란 말인가.”

류제가 뒤를 돌아보니 니냐롯트가 그처럼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진실을 확인한 니냐롯트는 씁쓸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악의 평범성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괴이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우리들 한가운데에 있다.

“마족을… 끝내러 가자. 정말로.”

아가타 왕궁을 무사히 되찾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마족과 인간이 종족의 멸을 걸고 싸우는 중이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그들은 끝내 나라카로 향해야만 했다. 거기서 류제는 미나와 만나 마족의 진정한 끝을 보고 싶었다.

마족의 탄생은 비참한 죽음에서 시작한다. 인간을 향한 증오가 그들을 마족으로 바꾸어놓았다. 마왕이 부활하면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도 마족처럼 바뀌는 걸까.

니냐롯트가 꽉 쥔 주먹을 짐짓 풀어냈다. 그럼에도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안 된다. 알면서도 온 거다. 지키기 위해. 되찾기 위해. 그 원동력을 분노로 삼지 말라는 하늘의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 * *

뜻하지 않은 황제의 승하로 전시에 왕좌가 비어버린 키아나트리체는 난세의 역경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 그 권리를 가진 사람은 황제의 적장녀인 제1왕녀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이에 전시상의 법률에 따라 니냐롯트는 왕권을 계승했다.

이를 공식적으로 증명해서 니냐롯트를 키아나트리체 유일무이한 황족으로 승격시키는 대관식은 범국민적인 축제가 되어야 했기에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만일 전쟁이 끝나더라도 니냐롯트의 첫 번째 국가사업은 존귀한 전 황제의 장례식이 먼저였다.

전쟁이 몇 년 이상 길어진다면 당장이라도 간소하게나마 국장을 진행하겠지만 증오의 사슬에 얽힌 마족에게 자유를 선사하기 위해 나라카로 향한다 류제 신리가 선언하지 않았나. 그녀는 그 확신을 믿었다.

마족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마왕의 힘을 가진 그의 바람대로 마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미노타인들의 세뇌가 풀리고 인계는 빠르게 안정된다. 마기의 독이 지천에 깔린 나라카 원정을 떠날 수 있게끔 기지를 세우고 준비하는 기간을 포함하면 내년 안으로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키아나트리체를 지키다 전사한 군인과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난민들, 과거 인간의 과오로 인해 악마가 되어버린 마족들에게도 간소하게나마 위안을 줄 대규모 국장을 준비할 것이다. 행렬은 아가타에서부터 펠노아로 이어질 것이며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시신도 추려서 영웅에 걸맞은 대우로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또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중의 일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태산 같았다. 왕궁에 화마족이 들이닥친 사건 후 비어빌리터를 위한다는 선전을 빙자하여 개개인의 욕심으로 인간을 배신한 귀족파를 숙청하고 무너진 왕궁의 잔해들을 치우느라 아가타는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

니냐롯트 또한 그 전투로 크게 화상을 입었다. ‘러다이트’로 기간트리카 장갑이 강제 해제되면서 화마의 불꽃이 피부에 닿은 것이다. 화마의 불꽃에 몸이 짓무른 상처의 자연치료는 힘들었기에 척도가 높은 치료 계열 어빌리터가 필요했다.

마침 니냐롯트가 이끌던 제1 작전사령본부 소속 군인들도 속속들이 수도군단에 합류했다. 이에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히로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후발대로 출발했던 세라가 입궁 허가를 받았다. 여타 다른 치료계 어빌리터도 있었지만 니냐롯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유가 컸다.

니켈과 서큐버스와의 전투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와 아가타로 향했던 그녀는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마족들이 류제를 얻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세라는 그들만이라도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몸과 마음이 성치 않은 니냐롯트는 세라의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나라카 원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로 장군들과 회의를 이어나갔다. 절반 인원의 백장미 부대가 아직 나라카에 있지만 미궁 속에 있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그녀는 이따금 류제의 파편적인 기억에서 나라카의 특징을 알아내려 애썼다.

그러니 왕궁을 방문했던 세라와 류제가 마주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니냐롯트의 치료가 끝난 세라와 사령관이 부를 때까지 대기하던 류제가 잠시 자리를 함께했다.

류제는 그녀와 단둘이 만날 자리가 생겨 내심 기뻤다. 세라는 각별한 선생님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최초의 시작이 그녀의 도움 덕분이었으니 감사한다는 말로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

율폰과의 전투로부터 벌써 몇 달이 지난 지금, 언젠가 귀족파 일당들이 티 파티를 열던 그 장소에서 류제와 세라가 마주 앉았다. 류제는 언젠가 마주했던 정체불명의 힘에 두려워하던 때가 떠올라 화창한 봄 날씨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당신들이 앞으로의 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세라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언제나처럼 제자를 향한 걱정이었다. 일국의 왕녀(비공식적으로 즉위한 지금은 그렇게 부르기도 애매해졌지만)나 후작가라는 지체 높은 귀족, 부유한 상인 가문의 자제, 혹은 마왕의 후생이라는 그처럼 멀리 떠나가 버린 존재일지라도 세라에게는 여전히 어리고 소중한 제자들이다. 아픈 손가락인 그들은 특히나 걱정스러웠다.

“덕분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제 악우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해서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여전히 당신들만의 고민을 안고 있으니까요.”

걱정할 것 없다는 미소를 지어 보인 류제가 물었다.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건 뭔가요?”

“많지요. 니냐롯트 학생은 전투로 폐하를, 아버지를 잃지 않았습니까. 충격이 클 텐데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없이 호세마타 요새에 구축할 기지 문제로 바쁩니다. 그녀는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니 다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남몰래 속내를 앓는 편인 니냐롯트는 차라리 지금처럼 바쁜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틀어박혀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진실로 다다를 성미를 가진 그녀지만 그렇기에 스스로를 탓해 마음이 병들 가능성도 높았다.

류제가 왕궁에서 종종 그녀와 대화를 할 때엔 기본적으로 일적인 이야기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슬픔은 사치라는 듯 그녀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슬픔을 중화시키는 방법이라면 말리지 않겠지만 애처롭다면 애처롭다.

“비키 학생도… 고대하던 일족의 복수를 끝냈지요. 류제 학생이 전해준 소식을 듣자면 그녀가 받을 충격은 대단할 겁니다. 제가 제립학교에 있었을 적 상담을 했을 때 그녀는 일족의 복수가 최우선 순위였거든요. 목표를 잃은 그녀가 가질 허탈함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군주급 수마가 쳐들어오기 전 세라도 비키에게서 셀로니아 가문의 진상을 들었지만 머리로는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보고 들은 것은 다르다. 셀로니아 가문의 진실을 조사했던 비키도 더한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며칠 전 류제가 비키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숙소를 찾았을 때 비키는 펜던트를 보며 남몰래 울고 있었다. 꼬여버린 율폰의 과거와 현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위로와 죽음을 선사하는 것뿐이었다는 좌절이 힘겨웠을 터. 류제는 말을 걸지 않고 돌아갔다.

“유네 학생도 그렇지요. 버거운 일들을 차례차례 해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도 한 한편 이번 나라카 토벌 추가 인원 차출에 지원했다는 건 말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선택이니 이젠 선생님도 아닌 제가 말해봤자 제 꼴이 우습기만 하겠죠.”

“선생님은 영원히 선생님이잖아요. 유네도 충분히 세라 선생님의 걱정을 이해할 거예요. 그럼에도 가만히 멈춰 서있을 수 없는 거겠죠. 그 애는 더군다나 자기가 렌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렌의 대신이라. 세라는 렌이 처음부터 미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류제를 원하는 마족의 공작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고 싶어 했다는 말이 거짓말 같았다. 그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유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유네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겠지. 그건 세라도 마찬가지였다.

“미나 학생… 학생도…….”

거짓말로 무장하고 인간을 속인 미나에게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역시 가르쳤던 학생이 마족이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마의 군주와 싸울 때 마족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마음으로는 미나가 여전히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 참한 학생 같았다.

“그 학생은…….”

마왕의 부활을 꾀하기 위해 류제에게 붙어있었을 뿐인 것임을 알지만 그 아이는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인간을 증오해야만 했을까. 세라는 그게 궁금했다.

결국 미나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못한 그녀가 이번엔 가장 아픈 손가락을 꼬집었다.

“렌 학생의 소식은 어떤가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이엔힐리아 근방에 있는 마을에서 피난민들을 돕고 있나 봐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곳은 아직 마족의 침입이 없어서 쾌활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대요.”

며칠 전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랬다. 과연 먼 곳에 있는 그는 친구들이 그의 의지를 이어 마족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면 태양의 냄새가 날 것 같은 그의 머리칼이 떠오른다.

빨리 렌을 만나고 싶다. 무지했던 그가 렌에게 내뱉었던 마지막 말들을 사과하고 싶다. 도망가지 않고 그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는 그 순간만 기대하고 있다. 나이엔힐리아에 있을 렌은 지금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를 떠올리며 보고 싶다고 생각할까?

“듣던 중 가장 마음이 놓이는 소식이군요.”

“그러니까요. 분명 그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겠죠. 그야 그 누구도 아니고 렌이니까.”

활기차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린 류제가 먼 곳을 추억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속에 성숙한 얼굴이 반짝거렸다. 똑같이 렌을 상상해 본 세라는 언젠가 렌이 말했던 그의 꿈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그녀를 추억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태양 빛이 내리쬐는 맑은 하늘 아래 철새가 날아갔다. 최근 들어 가장 긴 평화 속에 잠겼던 류제는 나라카로 향했다가 의도에서 벗어나 마왕으로 각성해 버리면 어쩔까 하는 부질없는 걱정을 끝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을 끝내고 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나라카 토벌을 원하는 니냐롯트의 주도로 키아나트리체군은 나라카와 가장 가까운 최전방 호세마타 요새로 제1 작전사령본부 기지를 이전했다.

이에 따른 대규모 병력 이동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군주급 마족을 셋이나 해치웠지만 아직 잡히지 않은 세뇌된 미노타 군인들이나 다른 마족들이 건재해서 인원을 차출되기까지 어려움이 컸다.

전투가 아닌 보급과 통신 등에 특화된 일반군은 물론이고 전국의 기간트리카 부대에서 조금씩 차출된 인원이 호세마타 요새로 집결했다.

그중에는 류제는 물론이고 비키와 유네, 세라와 절반의 동료를 나라카에 두고 온 백장미 부대원들, 납치된 어빌리터를 구출하기 위한 여타 다른 어빌리터들이 함께했다.

벌써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수많은 마족들이 키아나트리체를 위협하는 중이다.

종종 마족과의 전투에 호출되었던 류제가 호세마타 요새에 도착하자 추위에 몸서리쳤던 겨울날 거짓말처럼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기지 건축으로 확 달라진 요새로 다시 돌아온 소감이 새롭다.

미나와의 접전이 있었던 장소를 둘러보는 류제는 다른 전투가 있었는지 그동안 더 망가진 요새 안을 찬찬히 살폈다. 백장미 부대가 자리를 비운 1년 동안 수많은 마족들이 오간 모양이다.

미나가 구울로 만들어버린 중대원들의 시신이 마침내 수습되어 다른 곳으로 실려 나가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라카 토벌 기지 구축으로 수많은 군인들이 요새를 수복해도 손이 부족했다. 특히 무너진 건물 외벽이 크고 무거워서 기간트리카의 부스터 힘으로도 역부족일 때면 그도 가서 도와주곤 했다.

본부가 이곳으로 바뀌었으니 마족과의 대치도 잦아졌다. 마족의 습격이 여러 번, 나라카로 출전할 날은 가까워지고 해는 점점 뜨거워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훈련장의 지반이 달구어져서 그런 건지 류제는 이곳에 있으니 왜인지 피가 끓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뒤틀린 감각으로 느껴지는 피 냄새로 정신이 착란하는 이유는 여기서 배신을 당했던 트라우마인가, 아니면 이곳이 나라카와 가깝기 때문인 건가.

리엔달로니아 협곡 너머 나라카가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던 그는 훈련장 가운데에 무너져 내린 지반을 발견했다. 아까 마족과 전투가 있었을 때 계속 눈에 밟혔던 곳이다.

류제가 그곳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본능적으로 걸어갔다. 미지의 힘을 막 깨우쳤던 이전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류제는 울렁거리는 마왕의 힘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감정에 그대로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류제, 뭐 해?”

구멍 아래가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던 류제는 누군가의 부름에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비키가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그에게 다가왔다. 최근 더운 날씨가 지속되었기에 비키가 수통을 건네주었다.

“더위 먹었니? 설마 긴장했어? 부상당한 건 아니지?”

“어? 아니…….”

덕분에 번뜩 정신이 든 류제는 다시 구멍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햇빛 한 줄기가 간신히 드나드는 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수통을 끌러 입으로 쏟아내는 동안 비키가 아래를 힐끗거렸다.

“아, 이 구멍 말이지. 슈만 중위님이 그러는데 요새가 오래된 데다 고립되어 노후화된 부분이 많아서 이런 구멍은 예사래.”

“미나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는 없었던 것 같아서.”

“그것도 꽤 오래전 일이잖아. 요새는 나라카에서 넘어오는 마족들과 마주하는 최전방이니 습격을 당했던 거겠지. 다행히 사람이 상주하지 않으니 알라마니 기술관처럼은 안 되었지만.”

그를 놓친 미나가 분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고. 하기야 그가 이곳에서 미나와 마주했을 때에도 지반이 엉망인 부분이 있었다. 지금 와서 이런 새로운 구멍 하나 생겼다고 이상할 것은 없는데 왜 돌연 털이 곤두섰을까.

그 구멍에서 간신히 눈을 뗀 류제가 입맛을 다셨다. 분명 미나와의 기억 때문에 과민 반응을 한 것이다. 한숨을 내쉰 류제가 아,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마침 비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가 알기론 여기 관할은 멜가로스크였던 것 같은데 이곳에 기지를 세워도 괜찮은 거야?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으니 작위가 박탈당한 건 아니잖아.”

“하하. 이미 다 세워진 후에 말하면 어떻게 해.”

“그렇긴 하지만.”

“뭐, 백장미 부대가 남서방위본부 소속이긴 하지. 근데 반역죄는 특별한 데다 군사권을 몰수했으니 괜찮아. 이 기지는 나라카 토벌을 위해 필수적인지라 폐하께서도 수를 쓰셨겠지.”

니냐롯트의 착실함을 떠올리면 어련히 처리했겠지 싶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정치적인 일이 아니라 앞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이다.

이곳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면 그는 니냐롯트를 포함한 대규모 지원 병력과 함께 나라카로 건너가 다른 명령을 수행하고 있던 절반의 백장미 부대와 합류한 후 잡혀있는 어빌리터들을 구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미나를 만나 결판을 짓는다. 지금껏 보았던 마족의 과거처럼 미나도 인간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클 것이다. 그런데도 1년간 그와 함께 지냈던 추억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책을 읽으며 재잘재잘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비키는 고민하는 류제를 기다려주며 묵묵히 어둠 속에 가려진 나라카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의연해 보여서 류제가 넌지시 물었다.

“넌 긴장 안 돼?”

율폰의 진실과 마주한 후 한동안 우울한 모습을 보이던 비키는 준비 기간 동안 마음을 잘 다잡았는지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일족의 복수에 잡혀있던 발목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듯하다.

“당연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니 걱정될 만도 하지.”

“위험한 것 같으면 오지 않아도 돼. 왕녀는 논외로 치고 셀로니아 가문의 피는 이제 너밖에 이을 수 없잖아.”

“뭐? 싫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겁쟁이로 만들지 마, 전 마왕 나으리. 그리고 이제 왕녀님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루이나가 더 짜증 나게 굴걸.”

비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비키를 도와주었으니 비키도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빚지는 걸 싫어하는 성미가 참 장하기도 하다.

“어때. 나라카는 기억나?”

“잘 모르겠어.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마족 개개인에 대한 거거든. 그것도 아주 잠시, 마족의 핵이 파괴당했을 때만 내 것이 아닌 과거가 떠올라.”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겠지만 마족으로 만들어놓고 다 잊어버리다니 미나가 널 원망할 만도 하겠네.”

우스갯소리로 말한 비키의 말에 류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인간들에게 핍박당한 그들을 구원해 주겠다며 마족으로 멋대로 뒤바꾼 주제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인간 편에 서서 마족과 적대하고 있으니 그들 입장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마왕이 전생이니 기왕이면 전부 기억했으면 좋으련만. 내가 만든 죄를 잊지 않게끔.”

류제는 어쩌면 로라 하놋이 그를 인간으로 전생시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녀를 생각하니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은 렌과 닮았었지 싶다.

* * *

인력을 총동원한 새로운 기지 건축은 여름 내로 완료되었다. 나라카 원정 준비도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이 작전에서 인간이 패배하면 귀족파의 몰락으로 구사일생 일으킨 니냐롯트의 권위는 다시 실추될 터. 원정 준비가 시작될 무렵부터 왕녀파는 물론 안정을 원하는 많은 자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니냐롯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며 토벌을 강행했다.

이에 병행해 나라카 원정 및 마족 토벌을 행할 정예 멤버들이 추려졌다. 류제와 히로인들을 포함해 약 서른 남짓이 선발 인원으로 정해졌다. 한때 나라카에 잠입해 지리를 아는 백장미 부대원들을 비롯한 지원군이 포지션을 나누었고 원정을 이끌 지도자로서 니냐롯트가 함께했다.

루이나를 비롯한 왕녀파는 하다못해 새 황제의 전사 시 생길 혼란과 비게 될 키아나트리체 왕좌를 생각하라며 그녀의 참전만큼은 만류했지만 니냐롯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전력 차이가 있다 한들 한 종족의 멸이 달려있는 일합의 장소에서 일국의 지도자가 나서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이에 키아나트리체에 부재할 니냐롯트는 왕실의 일을 루이나와 하늘바람에게 맡겼다.(라고 루이나는 에둘러 표현했으나 실상은 하늘바람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겼다는 말이 맞았다. 타국의 왕자인 그의 유약하고 순진한 성질머리를 이용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그의 신용이 오른 거라고 할 수 있다.) 미지의 나라에 발을 디딜 자들은 호세마타 요새에서 차곡차곡 긴장을 쌓았다. 최고조로 달한 순간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나라카로 향할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마왕성이다. 마왕을 살해한 로라 하놋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은 그 이래 마왕성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마족들의 무법 지대 나라카에서는 장님이 상상하는 코끼리처럼 알 수 없는 것들이 상식을 파괴할 것이다.

“가지.”

각 중대별로 선 기간트리카 선발 원정부대가 니냐롯트를 앞세우고 차례로 지면을 박차 앞으로 나아갔다. 나라카로 향하는 히로인들과 주인공의 눈에 비친 각자의 미래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자는 안타깝게도 부재했다.

까마득한 아래에 무언가 도사릴 것 같은 깜깜한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지나는 동안 그들은 발밑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에 두려움을 삼켰다. 나라카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원 도착했습니다.”

“나라카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군요.”

멀어만 보였던 나라카와 키아나트리체 사이 리엔달로니아 협곡 거리는 저속의 기간트리카 부스터 모드로 30분가량 소요될 만큼 짧았다.

금기의 땅이 이웃사촌만큼 가까웠다는 충격을 곱씹기 전 호세마타 요새로 보고를 보낸 그들은 대형을 이루며 마기의 내부로 진입했다. 짙은 마기로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하는 그들의 눈에 비장함이 엿보였다.

그들이 나라카의 땅에 침입하자 마기의 영향 아래 진화한 식물이 침입자를 느끼고 꿈틀거렸다. 한때 제립학교를 덮쳤던 식육식물처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식물에 영 좋은 기억이 없는 비키를 비롯한 작년 제립학교 출신 군인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혐오감을 표했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들었던 것보다 더 시야가 좁군요.”

“비키 양, 아…앞이 아무것도 안 보여. 으으… 저것들이 우리를 덮치진 않겠지?”

“걱정 마. 내가 태워버릴 테니까. 이런 곳에서도 어빌리티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손에 조그마한 화염을 만든 비키가 불꽃으로 마기를 불태웠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안개처럼 몰려드는 검은 기운에 비키의 어빌리티가 짓눌렸다. 여기서 기간트리카를 해제했다간 숨도 쉬지 못하고 마기에 압박되어 죽을 것이다.

“생명체가 자라난다는 것도 대단하군.”

“여기는 그나마 인계와 가까워 버틸 만한 장소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통신 장비도 거의 먹통이 되니 앞사람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음성 통신 대신 모스부호로 멀리 떨어진 존재를 확인해야 했다. 네네 슈만은 미노타가 침공하기 전 동향을 살피기 위해 나라카에 잠입했던 때를 떠올렸다. 루비니도 마찬가지로 이 턱 막히는 공기에 진절머리가 났다. 미개척지를 향한 모험심도 처음만이지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대낮임이 분명한데도 검은 마기가 가라앉아 밤처럼 어둡다. 서로의 인기척에만 기댄 채 목적지로 향하는 그들은 걷고 있는 방향이 제대로인가 알 수 없어 으스스했다. 숨이 가빠지니 공포감은 그에 비례하여 말수가 줄어들었다.

“접선 장소는 아직인가.”

긴 이동 끝에 먼저 침묵을 깬 건 니냐롯트였다. 나라카로 진입하고 한참을 행군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착각이 든다. 조금은 익숙해진 주변은 프로텍터가 식별한 헬멧의 HUD 화면으로 어느 정도 판별이 가능하나 엇비슷한 지형과 인계와는 다른 식물들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 근방입니다만 송구하게도 나침판이 먹통이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독촉해서 미안하군. 어디서 마족이 나타날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식육식물이 그들에게 돌진했다. 군용 나이프로 잽싸게 촉수를 잘라낸 류제가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는 식물을 발로 밟았다. 터지는 진액이 통통한 벌레를 밟는 느낌과 비슷했다.

“질리지도 않네.”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기는 한지 점점 마기가 독해지고 네네 슈만이 말한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기운에 짓눌리는 게 얼마 만인가. 이건 육체를 강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카는 마왕이 세운 나라이니 그가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류제가 술렁거리는 마왕의 힘을 사용해 보았다.

“그만둬. 마족이 낌새를 눈치채면 어떻게 해? 게다가 여긴 네 정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류제를 따라 주변 마기가 울렁거리자 곁에서 가장 먼저 감지한 비키가 류제를 붙잡고 만류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이대로 가다간 접선 장소에 도착도 못 하고 쓰러질지도 모르잖아. 특히 유네가.”

나라카에 발을 디딜 때부터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간신히 따라오는 유네를 가리킨 류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변명이 틀림없고 눈에는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보인다. 남자들이란 참. 말려도 어차피 자기 멋대로 할 셈이지. 콧방귀를 뀐 비키가 손을 치웠다.

조금은 뜻대로 움직이는 마왕의 힘을 이용해 류제가 주변 마기를 자극했다. 될 듯 말 듯 감질나게 구는 마기들을 말 안 듣는 아세미 달래듯 구슬리며 시도해 보던 그는 이내 땀을 비 오듯 흘리고 포기했다. 나라카는 그의 컨트롤에서 벗어난 마기가 너무 짙었다.

“무리하지 마, 류제 군. 난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아, 알면 알수록 정말 어려운 힘이구나, 이거. 계속 연구했는데도 안 따라줘.”

이곳의 마기는 다른 마족에게서 배출된 증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에 반하려는 그의 힘은 수많은 마족이 공동으로 지배한 드라코니스 입자를 빼앗아 컨트롤하기엔 미성숙했다. 그가 완벽하게 힘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형을 이루며 나설 수 있게끔만 간신히 마기를 물려 길을 확보한 그는 어빌리티 대가를 받는 것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래도 마기가 상대적으로 옅어진 덕분에 선발대는 나라카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백장미 부대의 신호를 잡을 수 있었다.

“연락이 닿았습니다.”

나라카로 건너온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접선지 근처에 있을 백장미 부대와 만나는 것이다.

마족에게 납치당한 어빌리터를 구출하기 위해 나라카의 중심으로 갔을 그들과 접촉할 방법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지금 그 노력이 빛을 발할 때이다.

행군을 저지하고 자리에 머무른 네네 슈만이 감지한 모스 부호 신호를 해석했다.

―…는 …파……. 여기는 델파. 누구인가.

“여기는 로사리오. 이전에 말한 장소에 근접했다.”

―…았다. 판별 가능한 어빌리티 시그널 요구.

분명 인계라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을 텐데도 수십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통신 상태가 나빴다. 마기의 간섭 때문에 단순한 모스 부호 신호가 닿는 것조차 버거웠다. 네네 슈만이 신호를 주자 니냐롯트가 약속했던 대로 토지에 미약한 전류를 흘려 보냈다.

기다리는 동안 잠시 쉬고 있는 대원들은 벌써부터 인계의 상쾌한 공기가 그리웠다. 당장 나라카에서 빠져나가 헬멧을 벗고 싶은 욕망을 꾹 눌렀다.

“머리가 어지러워. 루비니 소위님은 이런 걸 어떻게 참았던 건가요?”

“어떻게든 익숙해질 거다. 키아나트리체로 돌아가면 인계가 참 좋은 곳이구나 실감하지.”

한번 경험해 봐서 이미 익숙해진 루비니가 땀을 뻘뻘 흘리는 비키를 친절하게 달래주었다. 기간트리카 필터로 마기를 걸러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고산지대처럼 산소가 부족해 움직임이 제한된다. 백장미 부대를 동경하는 비키는 같은 인간일 그들의 의연한 모습에 내심 존경스러웠다.

“통신은 마쳤습니다만 제대로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군요.”

“긴장은 늦추지 마라. 하물며 그대들의 동료라고 해도.”

니냐롯트의 경고에 백장미 부대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나라카에 남아있던 백장미 부대원이 미노타의 군인처럼 세뇌당했다는 가정도 충분히 검토했다.

그들의 걱정이 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 경계를 하던 그때 일순 마기가 일렁거린다 싶더니 순간적으로 대형을 흩트려 놓는 공격이 들어왔다.

“제길, 뭐냐!”

“마족인가?”

“마족의 반응은 아닙니다.”

‘탐색’ 어빌리티를 가진 세라가 전했다. 이곳은 사방이 위험으로 도사린 곳이지만 습격자가 마족인지 아닌지 정도는 그녀의 능력으로도 구분이 가능했다.

“이곳에 있을 인간은 정해져 있지.”

전투 소리를 들은 눈치 빠른 마족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습격자를 탐지한 그들은 괴상한 식물 위에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한 인간을 발견하고 제각기 감탄사를 내질렀다.

“기간트리카!”

“…설마!”

“그 목소리는 네네인가?”

익숙한 목소리가 답변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공격한 건 백장미 부대원이었다. 동료를 발견한 네네가 방심하자 습격자가 네네 슈만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동요했다. 설마 위대한 백장미 부대의 대원마저 나라카에선 마족에게 농락당했단 말인가.

세라가 손을 뻗치려는 찰나 네네의 목숨을 위협하던 공격이 멈추었다.

“안일해졌구나. 방심하면 못쓰지.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다. 우리가 세뇌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냐.”

“그런 건 눈을 보면 압니다. 제가 인계에서 세뇌당한 자들과 한두 번 싸운 줄 압니까. 장난도 정도껏이지 재미없습니다.”

네네의 신랄한 언변에 기가 찬 습격자가 넘어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못마땅한 네네 슈만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미안, 미안. 이런 곳에 계속 머물고 있으려니 워낙 심심해서 말이지.”

아군임을 확인한 네네가 니냐롯트에게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접선을 확인했다.

“맞습니다.”

“하아…….”

안도한 세라는 주저앉을 뻔했다. 이따금 느끼는 거지만 저 극단적인 무리는 이따금 심장에 무리를 준다.

“그쪽이 니냐롯트 왕녀님인가. 무례를 용서하시길. 저희도 이번 토벌로 동료를 많이 잃었지 말입니다.”

습격자가 니냐롯트에게 다가가 경례했다. 기간트리카가 부분부분 망가져 고무테이프로 보수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라카 토벌을 떠난 이래로 지금까지 마기 때문에 장갑을 함부로 해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용케 우리를 찾아와 주었구나.”

“근방 지리는 익숙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곳도 썩 안전하진 않습니다.”

무언가가 날아오르는 소리에 일순 집단이 고요해졌다. 허리를 숙여 신호를 준 그녀가 잡담을 금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군인은 앞장서 그들을 안내했다. 근심 반 기대 반으로 괴상한 식물들을 헤치고 한참을 걸어간 곳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하나 있었다.

“임시 거점입니다. 마족도 만능은 아니라서 여기까진 눈이 닿지 않을 겁니다.”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가니 바깥보다는 마기의 농도가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처 정도로 옅고 그나마 숨이 덜 가빴다. 세라는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을 탐지할 수 있었다. 슬렉터 빛을 비춰보니 스물에 가까운 인원들이 그곳에 남아 그들을 기다렸다. 부상당한 자들이 태반이다.

“드디어 왕녀님께서 오셨군.”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걸음하시다니 영광입니다, 니냐롯트 왕녀님.”

이젠 왕녀가 아니지만 그녀가 키아나트리체의 새 황제로 즉위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장미 부대원들이 예를 갖추었다. 부상당한 자들에게 예법을 강요할 정도로 무식한 자는 아니었던 니냐롯트가 그들을 만류했다.

“나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따르느라 고생 많았소.”

“아닙니다. 나라카를 탐험하다니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대장님은 같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빴던 그들은 이 몇 개월간 인계에서 있었던 일에 무지했다. 여태 마기에 적응하지 못해 누워있는 모습을 본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대장님은…….”

이끌어줄 포르테가 이곳에 함께해 준다면 길을 헤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백장미 부대원의 물음에 일순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들라크루아 대령님께선 1년여 전 병마의 군주와의 싸움 끝에 전사하셨다.”

가장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따르던 네네 슈만이 덤덤하게 부고를 전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던 다른 대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네 슈만.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강하신 분이 시답잖은 전쟁에서 전사를 해!”

멋대로 반박해 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사람 목숨을 농담으로 지껄일까.

누구보다 죽음과 밀접한 직업을 가진 그들이지만 그런 그들을 이끌어주던 자마저 적에게 사망했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들은 부정했지만 그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

긴 생각 끝에 들리는 것은 짧은 탄식이다. 포르테와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던 네네 슈만을 비롯한 절반의 백장미 부대원더러 뭘 했냐고 원망하는 건 유치한 짓거리임은 그들은 충분히 알았다. 분해서 허공에 주먹을 내리찍은 부대원이 단발적인 욕설을 지껄이며 흐느낌을 참았다.

“제길, 제길! 망할 마족 놈. 반드시 토벌해 주리라.”

“그 병마는 무찔렀나? 우리 대령님을 죽인 그 빌어먹을 마족의 핵은 파괴시켰냔 말이다.”

“네, 이제 남은 군주급 마족은 몽마 서큐버스의 왕뿐입니다.”

포르테와 함께 싸웠던 류제가 전해주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기간트리카 안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얼굴을 보고 류제를 알아본 백장미 부대원이 비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라카에서 탈출해 포르테와 함께했어야 했던 것인데. 그들이 나라카에서 맡은 임무가 포르테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침통한 와중에 미안하다만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납치된 자들에 대해서 말해다오.”

“이곳에 남은 동안 저희는 마족과의 접촉을 피하고 지형 파악을 우선했습니다. 밖의 상태가 저러니 앞이 보여야 망정이죠. 이걸 만들기까지 고생깨나 했습니다.”

그들 중에 ‘탐지’ 계열의 어빌리터가 한 명 있어 그나마 마왕성까지 다다르는 지도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지도에 빛을 비추어 대략의 지형을 보여주는 군인들을 보자니 역시 믿음직스러웠다.

“지도상 붉게 표시된 곳이 이 동굴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라카 중심에 더 가까운 출구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름길을 만들고자 저희가 파낸 것이죠. 그곳에서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마왕의 성 꼭대기가 보입니다. 납치된 어빌리터들은 성에 있습니다.”

“성까지는 들어간 적이 있었나. 시간이 오래 지나 그들의 안전이 몹시도 걱정이다.”

“납치되는 자들을 확인하고 한번 침입을 시도한 적은 있습니다. 그들이 갇힌 지하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교환했죠. 지하는 인간을 살려두기 위해 마기가 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했지?”

“썩 괜찮지는 않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고 전했습니다.”

“아주 큰일을 해주었구나. 그대들이 이 낯선 토지를 개척해 준 덕분에 한결 임무가 수월해진 기분이다.”

“과찬이지 말입니다. 성 내부는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마족이 인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우리로서는 희소식이군.”

니냐롯트가 생각에 잠겼다. 미나는 미노타의 세뇌를 풀고 싶으면 나라카로 오라고 류제에게 말했다. 긴 시간을 준비해 나라카로 왔지만 미나의 말은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알고 있었어도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큰 담력이 필요했다.

그 순간 군인의 배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인간을 보고 안도한 것인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 반 가까이 나라카에 있는 동안 뭐든 제대로 먹질 못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무사한 모습에 안도하여 잊을 뻔했군. 뭐라도 드시오. 식량이 아슬아슬했을 테지.”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서 그렇지 식량 섭취는 괜찮습니다. 나라카에도 식물은 나니까요.”

이에 저번 제립학교 식육식물 난입 사건을 떠올린 비키가 욱 하고 질겁하며 입을 가렸다. 곱게 자란 그녀는 그런 걸 먹는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뭔들 못하리. 백장미 부대원 하나가 솔직한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넌 셀로니아 가문의 여식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이니 당연히 단백질도 들어있지.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에 대해선 요리 동아리에서 정보를 많이 공유할 수 있으니 만약 제립학교로 돌아간다면 그 동아리에 들어라.”

“그건 알아요. 하…하지만 나라카의 식물에 이상한 성분이 들어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독성이 없는 걸 찾아 먹었으니 그렇게 역겨워할 건 없어. 이게 아니라면 포로들도 진작 굶어 죽었을걸.”

식량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보존식만으로 이어오던 그들이 더 오래 생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손에 꼽았다. 나라카의 특이한 환경 때문에 변화한 식물을 섭취하며 버틴 덕분에 아직까지도 비상식량이 조금 남은 상태였다.

“하아, 이게 얼마 만이야. 역시 키아나트리체 음식이 제일 낫군.”

“전 본국에 돌아가면 먹고 싶은 것들 리스트를 정리해 놨지 말입니다.”

“시간 없으니까 닥치고 먹기나 해.”

입 부분까지만 기간트리카 장갑 해제한 백장미 부대원들은 선발대가 가져온 식량을 다급하게 먹어치웠다. 이곳이 마기가 적은 곳이라 망정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자마자 입 안으로 들어간 마기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짓눌렀을 것이다.

“부상자의 치료도 병행하겠소. 정리되면 우리를 마왕성으로 안내해 주시오.”

“물론 그러기 위해 저희가 이곳에 남아있던 게 아니겠습니까. 잡혀간 동료들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왕녀님께서 이런 곳까지 오시다니 군인으로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왕성에 뭔가 전쟁을 끝낼 힌트라도 있습니까.”

“아마도.”

류제를 흘긴 니냐롯트가 적당히 둘러댔다. 겸사겸사 아까부터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니냐롯트는 한 가지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왕녀가 아니오.”

“네? 그게 무슨…….”

“폐하께서 승하하셨소. 전시라 왕좌를 비울 수 없어 내가 곧바로 그 뒤를 이었지. 그대들은 모를 것 같아 말해준다만.”

황제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에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죽음을 언급한 이래로 한바탕 소란이 날 뻔했다. 잠깐 인계에 부재한 사이에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서 벽촌인 호세마타 요새에 틀어박혀 훈련과 실전만 오갈 때보다 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아니면 나라카의 공기가 사람의 시간개념을 헷갈리게 하는 것인가. 그들은 잠시 동굴에 표기된 날짜를 재확인해야 했다.

“이만 출발하지.”

“조심히 따라오십시오. 지름길이라고 해도 상당히 오래 걸어야 합니다.”

다친 군인들을 치료한 그들은 지체할 시간 없이 기간트리카를 보수하고 마왕성으로 출발했다. 감히 키아나트리체의 황제가 나라카까지 행차했다는 사실에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고 반박해야 할지 헷갈린 백장미 부대원들이 터덜터덜 동굴 안을 앞서 나갔다.

저 강한 자들의 걸음에 혼란스러움이 묻어나 류제는 니냐롯트가 얼마나 저돌적으로 일을 강행했는지 실감했다.

과연 미나는 그들이 마왕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과거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감정을 류제는 형용하기 어려웠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이 나라 백성들은 죄다 날개가 있으니 바닥은 신경 쓰지 않거든요. 저기 보이는 게 바로 마왕성입니다. 흐릿하지만 첨탑이 있지 말입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 아직도 떠오르는군요.”

그들이 안내받은 장소에는 아가타의 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흉흉한 검은 건축물이 있었다. 어둠의 안개 속에 자리 잡은, 문자 그대로 마왕의 성이다. 인간의 기술로는 따라잡기 힘든 광대한 구조물을 보자니 류제는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찌릿하게 뭔가가 끓어올랐다.

“조심해, 류제 군!”

“괜찮아?”

머릿속에 스치는 낯선 기억에 머리를 짚은 그에게 비키와 유네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낯설지가 않다. 그가 모르는 영혼이 이곳이 바로 그만의 장소였다고 속삭였다.

“우리가 시간 내로 돌아가지 못하면 두 번째 원정대가 올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붙잡힌 어빌리터들이 있는 장소라도 알아내야 해. 정보 탐색을 목표로 안정적이게 움직여라.”

황제의 지시를 받은 특수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작전을 세웠다. 자연스레 팀이 나뉘었다. 백장미 부대원들은 마왕성에 잠입해 납치된 어빌리터들을 확보할 것이다.

어빌리터의 구출이 공식적인 목적이라면 비공식적인 목적으로 움직일 니냐롯트와 류제, 비키와 세라, 유네를 비롯한 인원은 같은 반 급우였던 미나 플로리아와 저지해 쓰러뜨려야 했다.

“그럼 부디 무사하기를.”

이에 백장미 부대와 찢어져야 하는 세라는 아직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네네 슈만과 ‘늑대 수인화’ 어빌리터라 마기의 냄새에 민감할 루비니를 돌아보았다. 네네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된다.

하지만 네네 슈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원들과 떠났다. 세라는 괜한 걱정이었다며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겐 홀로 걸을 수 있게 된 네네 슈만보다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학생 류제 신리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릴 테니까.”

세라가 상냥하게 말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느껴지지 않았지만 맞잡아 준 손에서 온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이에 니냐롯트가 옆에서 거들었다.

“유약하게 쓰러져서는 곤란해. 우리 모두 그대를 믿고 이곳에 온 것이니 우리의 목숨이 그대에게 걸렸다고 여겨다오. 부담감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답이다.”

“성격 한번 고약하긴. 긴장한 게 아니라 고양감이라고 생각해 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긴 류제가 억척스럽게 웃었다. 전생의 그가 기거하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 텐데도 두렵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요술 상자처럼 뭔가가 뒤바뀌어버릴 것 같았다.

백장미 부대가 출발한 후 비공식적인 명령을 따르는 자들 역시 마왕성으로 잠입했다. 긴 준비 기간 동안에도 인계에 군주급 서큐버스가 등장했다는 보고가 없었으니 마왕의 성에 미나 플로리아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종지부를 찍기 위한 여정의 마지막이다. 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가서 모든 것을 끝내자.

그가 나라카를 나와 인계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끝나야만 했다. 그는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낯익은 그만의 성에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 * *

한편 핵을 파괴하려고 했던 류제에게서 벗어나 악몽의 징검다리를 이용해 나라카로 피신했던 미나는 나콜렙시에 이어 아가타로 향했던 율폰마저 소멸하자 패닉에 빠져 머리를 헤집었다. 가장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압도적으로 강한 화마의 군주 율폰이 죽은 건 마족에게 있어서 타격이 컸다.

미나는 율폰만 남아있으면 다른 사천왕인 마가릿과 나콜렙시의 빈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게으른 나콜렙시나 화가 나면 폭주하는 마가릿은 몰라도 누가 뭐래도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강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그만큼은 부활한 마왕의 양옆에 함께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죽었다고? 그가 죽음을 허용했다고? 그것도 그의 영원한 숙적 셀로니아의 앞에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빈 마왕의 왕좌 대신 자리를 지키던 자들이다. 하물며 그녀의 배를 넘게 마족으로 살아오며 강함을 쌓아왔던 사천왕 모두가 인간의 손에 소멸하고 말다니. 계획했던 일들이 전부 망가져 갔다. 그때 류제 신리 납치 계획이 렌 지미로 인해 실패한 이후 승세가 인간에게로 너무 기울었다.

어째서 인간 주제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 인간은 패배해야 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이룩하는 위대한 승리자는 우리 마족이어야 한단 말이다! 어째서 마왕님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거야. 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데!

“곤란해… 곤란해……. 렌 지미 그 망할 것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안 되는 거지? 이게 그가 봤던 미래인가? 우리는 이길 수가 없는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안 돼.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어. 바꿀 수 있어… 바꿔야만 해.”

혼자 남은 그녀는 사천왕 중에서 가장 약했다. 그녀의 마법은 정신계이고 그 마법마저 최신 기간트리카에 막힌다. 그녀 혼자서는 류제 신리를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아니지. 그건 인계에서의 이야기야. 여기는 우리들의 나라 나라카라고. 마기가 충만한 이곳에서 감히 인간이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아무리 류제 신리가 마왕의 힘을 조금 사용할 수 있다고 한들 인간이 여기서 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반드시 여기서 마왕을 부활시킬 거야. 그때가 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주마.”

그녀는 류제를 기다리며 성심성의껏 부활 의식을 준비했다. 마왕은 기필코 부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유예밖에 없었다.

그래, 율폰은 죽었지만 인질 없이도 류제 신리는 나라카로 올 것이다. 이건 기회였다. 모 아니면 도다. 희생된 모든 마족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류제 신리를 마왕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녀의 손에 든 은색 말뚝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 * *

인간들은 낯선 곳이 선사하는 미지의 두려움을 헤치며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어빌리터 구출을 위해 마왕성의 지하로 향한 백장미 부대는 물론이고 류제의 팀도 낮은 창문을 통해 마왕성 안쪽으로 조심스레 침입했다.

걷는 소리조차 웅장한 마왕성에서 숨을 죽인 그들이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화려한 장식이 걸린 복도에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누군가의 초상화조차 없었다. 그저 오랜 장식들만이 먼지 하나 없이 남겨져 누군가를 기다렸다.

“빛이 들어오지 않은데 앞은 보이니 으스스하군.”

“하나같이 악취미적이야. 이런 걸 누가 만든 거야?”

“시끄러워.”

“딱히 누구라고 지칭한 건 아닌데.”

“날 보면서 말했잖아.”

발언자는 모르는 척 굴어도 자신을 겨냥한 말임을 아는 류제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런 기억에도 없는 물건들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니 어릴 적 그만 알고 있던 비밀을 들킨 것 같아 창피했다.

“세라 선생님, 뭔가 느껴지시나요?”

“마왕성은 다를까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족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짙은 마기 때문에 그런 건가……. 제 탐색 어빌리티가 마기에 눌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라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걸리는 기척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 마왕성은 그녀가 제립학교에 재학 중일 적 수신제 때 만들었던 조악한 전시품보다 더 진짜 같은 유령의 성이었다. 키아나트리체와는 완전히 다른 양식의 건축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이질감을 더했다.

“갈림길이다. 난처하게 되었군.”

“여기야. 아마도.”

류제가 길잡이를 자처하며 앞서 나갔다. 낯설어야 할 성은 돌아볼수록 익숙했다. 이 악취미적인 디자인의 벽과 바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장식물들은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쪽은 긴 식탁이 있는 홀이 있고 이쪽으로 가면 왕좌가 있는 방이 있었…던 것 같아.”

“마왕성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했는데 인간의 것과 비슷하네.”

“마왕의 알현실인가. 감회가 새롭군.”

“그런 셈이지. 알현하는 건 인간이 아니었을 테지만.”

마왕을 죽이기 위해 마왕성으로 갔던 로라 하놋도 이 복도를 걸었을까. 그녀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성을 보며 무슨 생각이었을까. 갈림길에서 여러 생각을 교차한 그들은 류제를 따라 마왕의 알현실로 향했다.

왕좌를 향해 다가갈수록 류제는 그가 왕좌에 앉아 느꼈던 그때의 케케묵은 감정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의 마음속에서 마기가 폭주할 때의 감정의 양상과 비슷했다. 떠올려서는 안 될 것들이 그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한 안색을 숨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루함, 연민, 증오, 뭔지 모르겠을 기억들이 뒤죽박죽이라 마기와는 별개로 정신이 어지러워 토기가 밀려왔다. 미나가 왜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곳에 있으면 그가 자신이 아닌 제3자로 밀려나 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샘솟았다.

“이곳인가.”

마왕성에는 특이하게도 인계에서는 당연한 문이 없었다. 이것이 서로에게 보여주지 못할 감정이 없는 마족의 사고방식인가. 모든 방은 훤히 뚫려있고 방 안쪽은 누구라도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왕좌가 있는 방은 복도 멀리서도 알 수 있게끔 가장 크고 화려했다. 그곳에 발을 디딘 인간들이 드높은 천장과 어지러운 장식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거대해.”

“하지만… 뭔가… 허전하네요.”

“외로워 보이군.”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당당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왕좌는 백 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먼지 한 톨 남아있지 않았다.

왕좌만 외롭게 남아 주인이 돌아오기를 영원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끊임없이 되새기지 않았더라면 류제는 자연스레 왕좌에 앉았을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장소가 가장 친숙했다.

“아무도 없어.”

마왕성 어떠한 곳보다 기묘한 장소가 뿜어내는 기운에 눌려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피던 유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곳이 마왕성의 가장 깊은 곳일 터. 류제를 기다려야 할 미나는 보이지 않았다. 마왕성에 없는 건가. 헛걸음을 한 거라면 그들도 어빌리터들을 구출하는 멤버들과 우선 합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멋지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파티라도 준비한 듯 태피스트리가 내려오고 초에 불이 들어왔다.

흩어졌던 마기가 마왕성 바깥에 있는 마기처럼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 굽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모래알이 다 떨어지는 카운트다운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다 포기한 줄 알았지 뭐야. 초대하지 않은 손님까지 줄줄이 끌고 올 줄이야. 길을 안 잃으려고 다 함께 손잡고 온 거야? 하하하, 귀여워라.”

귀 위에 난 양 뿔을 조금 가리는 녹색 단발머리와 꼬리뼈를 따라 펄럭거리는 음란한 서큐버스의 날개, 마족의 붉은 동공이 보내는 악랄한 시선이 손님을 환영했다.

“뭐 어때. 아무튼 잘 돌아왔어. 무려 1년. 버티고 버티던 마왕님이 언제 제 발로 돌아올까 기다리느라 지쳐버렸지 뭐야. 차라도 마실래? 오랜만에 성으로 돌아왔으니 회포를 풀어야지. 나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유령의 성에서 유령처럼 나타나 달콤하게 빈정거린 미나가 류제에게 다가갔다. 다른 히로인들에게 눈길 하나조차 주지 않는 걸 보니 그녀들의 동행은 아무래도 좋아 보인다.

‘악몽 인자’를 응용하여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낸 미나가 기상천외한 다기와 과자, 새빨간 피가 담긴 차를 꺼냈다. 사람을 조롱하는 재미없는 장난이다.

“이렇게 사이좋게 손잡고 마왕성에 왔다는 건 인간을 버리고 마족이 되겠다는 걸까?”

그녀의 기운은 나라카와 가까웠던 호세마타 요새에서 보았던 힘보다 강하다. 류제조차 짓누를 마기는 나라카이기에 낼 수 있는 건가.

미나도 류제를 기다릴 1년간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마기를 아득바득 모았다.

뒤에 있는 듯싶던 미나는 어느새 류제의 앞에서 그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할 것처럼 아찔하게 콧잔등을 가까이 들이댔다. 들짐승 같은 송곳니에 잡아먹힐 것 같다. 기간트리카 헬멧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정말로 그에게 키스했을 것이다.

“아니, 널 쓰러뜨리고 마족을 없앨 거야.”

류제와 다른 히로인들에게 제안한 미나의 다과 파티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생생한 피가 흐르는 컵과 인육으로 만들어진 역겨운 쿠키를 유네가 질겁하며 밀쳐냈다.

“날 쓰러뜨린다고? 하. 마왕이 마족을 쓰러뜨리니, 어빌리터가 마족을 쓰러뜨리니… 무지몽매한 인간의 개소리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는데.”

미나는 아무도 마시지 않은 인간의 피를 달콤한 허브티처럼 음미했다. 드라코니스 입자를 이용해 원하는 걸 만드는 건 전대 마왕이 그녀에게 허락했던 힘이다. 마왕의 총애를 받던 ‘악몽 인자’를 다루는 서큐버스의 왕인 그녀이기에 가능한 마법이다.

아무튼 류제의 반응이 지루했던 미나가 이번엔 다른 히로인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비키 셀로니아. 셀로니아, 셀로니아. 마녀 사냥꾼 집안의 핏줄. 얼굴이 활짝 펴져서 보기 좋아. 너희 가문은 그를 두 번이나 죽이고 말았네. 즐거웠어? 복수는 상쾌했니?”

킬킬거리며 미소 짓는 미나가 가만히 있던 비키를 자극했다. 율폰의 과거를 엿본 비키 셀로니아는 복수를 한 자신이 옳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를 구원할 수 없었던 비키는 죄책감에 짓눌렸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상관할 바지. 율폰은 내 동료야. 너희는 내 동료를 죽였어.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지.”

“마족의 증오는 도를 지나쳤어. 이제 남은 건 너뿐이야.”

“마족은 아직 많아. 잊어버린 거야? 아직도, 나라카 밖에는, 인간들을 증오하는 마족들이, 넘쳐흐른다고!”

그녀를 없앤다고 모든 마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마왕의 네 사천왕만이 자리를 비우게 될 뿐이다.

“전쟁을 하는 동안 깨달은 게 없나 보네. 나는 그만 네가 항복하고 마왕이 되길 결심한 줄 알았는데. 손님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미나는 마기를 이용해 마왕성 지하에 붙잡힌 어빌리터들을 구하러 간 백장미 부대원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모두 마왕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마족들에게 습격당한 후였다.

역시 미나는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나라카에 왔는지 진작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네네……!”

“이 아둔한 인간들과 아는 사이야? 걱정 마. 마왕님이 부활하면 다들 마족이 될 귀중한 재료들이니 허튼짓은 안 해.”

이건 류제 그에게만 하는 협박이 아니었다. 악마처럼 웃어 보인 미나의 붉은 동공이 세라를 훑었다. 아무리 그녀가 한때 선생님이었던들 찌꺼기 기억이다.

“네 말대로 마왕성에 왔으니 다른 사람에겐 손대지 마. 그리고 미노타의 세뇌를 당장 풀어.”

“날 쓰러뜨리겠다며 다 함께 손잡고 찾아온 주제에 귀엽구나. 어차피 마왕님이 부활하면 모두 마족이 될 건데 뭐 어때. 인간들 조금 죽는 것 가지고.”

미나가 즐겁게 웃었다. 제립학교에 정체를 숨기며 류제의 곁에 붙어있으면서 어찌나 이 말을 참아왔는지 모른다.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어빌리터들은 인간을 위한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지금쯤이면 너희들도 알았겠지. 우리들의 시초가 누구인지.”

일순 연기처럼 사라졌던 미나가 사천왕의 자리 중 그녀의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다과 파티를 위한 찻잔과 그릇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족이란 뭘까. 왜 마왕만이 마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왜 어빌리터들만 마족이 되는 걸까. 어째서 마족은 인간을 미워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 시작이 어디인지. 천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너희는 알아냈지.”

그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더 어처구니없다. 미나가 귀신이 들린 것처럼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마찬가지로 나도 인간, 어빌리터였어. 너희처럼 인간에게 떠밀려 마족과 싸웠어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한 유약한 계집이었나.”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해야 했던 그때 기억을 떠올린 미나는 치유되지 않는 증오로 치를 떨었다. 그 증오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이렇듯 마족이란 본디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내가 마족이 된 건 고작 200년 전이지. 그때도 어빌리터와 마족은 적대했어. 지금처럼 어빌리터는 마족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런 내가 왜 마왕을 받아들였을까 생각해 본 적 있어?”

“인간을 향한 네 증오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증오를 만든 건 인간이야!”

미간을 찌푸린 미나가 마기를 모아 그들을 짓눌렀다. 마기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유네가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했다.

“켁, 커흑. 컥.”

미나는 그들이 전부 무릎을 꿇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가장 그녀의 심정을 이해해 주어야 할 마왕의 부활체가 인간들 편에 서있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같은 인간들에게 배척받다가 결국 복수와 증오로 다시 태어난 마족을 알면서도 인간을 대표해 마족을 처단한다고? 이봐, 너희들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고 있어?”

그러니 마족의 인간을 향한 증오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지 그녀가 했던 모든 짓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마왕님은 상처받은 우리들을 나라카의 대지로 모았지. 인간들을 용서하지 못한 우리들은 마왕님의 몫만큼 인간들을 증오했어. 그런데 알아?”

“꺄악!”

순식간에 비키의 앞에 나타난 미나는 악몽 인자를 이용해 그녀가 가장 기억하기 싫은 순간을 옆에 재현했다. 찐득한 타르 같은 악몽이 비키를 붙잡았다.

“인간들은 목숨이 위험해져서야 어빌리터를 영웅으로 추대해 마족을 무찌르게 하더군. 우리 마족이 있기에 너희들이 괴물이 아닌 영웅 취급을 받는 거야. 우리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평생 도망쳐야만 하는 ‘마녀’였어!”

“윽, 그만둬! 미나 양, 제발!”

“어빌리티 척도? 세상을 바꾸는 정도? 웃기지 마. 비어빌리터들이 우리처럼 너희를 등급 매긴 것과 똑같아. 세상을 얼마큼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가를 저들 마음대로 수치 재서 컨트롤하려는 무능력한 인간들의 발버둥을 왜 못 보지? 그런 세상에 여전히 살아가는 주제에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굴어?”

미나는 이번엔 니냐롯트가 가진 악몽을 끄집어냈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어빌리터이기 때문에 있어야만 했던 귀족파의 배신, 커다란 짐. 그녀로서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찌꺼기들이 강제로 배출되었다.

유리에와 루시에를 살리지 못한 세라의 악몽도 눈앞에 구현하고 쓸모없는 어빌리터라는 이유로 미들 스쿨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유네의 악몽도 끄집어냈다.

“너희는 여전히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인간들한테 이용당할 뿐이야. 큰 힘에는 큰 책임? 인류의 무기에 불과한 너희들이 누구 때문에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바로 우리야! 마족이 없으면 너희들은 또다시 핍박받고 쇠고랑을 차겠지!”

큰 힘에는 큰 책임. 그것이 바로 비어빌리터가 세웠던 어빌리터들만의 학교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모토이다. 니냐롯트는 아픈 부분을 서슴없이 찌르는 미나의 증오와 원망에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마족이 어떻게 인간과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그 가축들은 위대한 마족을 이용하면 너희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도 쉽게 그들을 이용했지.”

귀족파는 비어빌리터들의 이권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권력자들의 생각대로 굴러가는 키아나트리체를 다스리고 싶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정계를 치고 올라오는 어빌리터들을 억눌러 더욱 강한 권력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달콤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류제 신리, 넌 인간의 이런 어리석음과 이기적임과 배타적임을 알고 우리를 구원했어. 우리들이 이렇게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절대로 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아니면 뭐야, 우리를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일 셈이야? 네 손으로?”

류제의 목적은 마족을 없애는 것이다. 그 의미는 미나가 한 말과 일맥상통했다.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었던 주제에 이제는 안 된다고 버려버린다면 그 누가 타락해 버린 그들의 마음을 구해줄 수 있을까.

“우리 덕분에!”

사천왕의 의자에서 일어나 네 개의 의자를 소멸시킨 미나가 발을 굴렀다. 그녀가 움직이는 마기들이 그들을 옥죄어 왔다.

“우리 때문에!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고서도 우리에게 이기려고 하는 거야? 류제 신리, 마왕의 부활체! 대답해!”

미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류제로 향했다. 류제를 자극하는 미나는 풀지 못한 증오로 혼 깊은 곳에서 생겨난 마기를 이 장소에 고이게 했다. 그럼에도 류제는 익숙한 이 왕좌의 앞에서 증오에 사로잡힌 미나에게 자유를 주어야 했다.

“그래.”

흔들리지 않는 시선이 미나에게 꽂혔다. 마왕의 알현실에 있는 인간 중에 과거 비어빌리터들이 어빌리터들에게 행했던 일을 모르는 자는 이제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쓰러뜨리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럼 해야 할 건 하나네.”

미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제립학교에서는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돌변한 마족이 진정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티 파티 수다 같은 장난은 여기까지다. 이곳은 나라카. 증오에 삼켜진 마족들의 나라다. 그녀는 마왕의 의지의 최후의 대변자로서 저들을 척살할 것이다.

“누가 옳은지는 승자가 말해주겠지.”

류제와 히로인들의 목적은 미노타군을 세뇌에서 해방시키고 마족을 이끄는 서큐버스의 왕을 죽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 미나의 목적은 그의 나라에 돌아온 류제를 이곳에서 그녀의 마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가 마왕성에 돌아왔을 때부터 모아온 숨 막히는 양의 마기가 술렁거리며 미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마기는 미나의 마법에 닿아 ‘악몽 인자’로 변모했다.

마기가 물러나자 히로인들도 인자를 뿌리쳤다. 과연 나라카에서 마족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작전을 실행한다는 신호로써 니냐롯트가 류제에게 전했다.

“시작하겠다.”

“부탁해, 류제. 널 믿을게.”

나라카의 낯선 땅에서 벌어질 전투가 불안한 비키는 미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합을 맞췄던 연습 대결을 떠올렸다. 그저 제립학교 같은 반이라서 이루어진 한 팀이 아니라 서큐버스의 특징과 전투 방식을 분석해 만든 최적의 레이드 팀이다.

처음 보는 막대한 양의 마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지만 포기하는 순간 질 것이다.

“각오해. 미나.”

“친절하기는. 어서 내게 와봐, 마왕님. 날 없애기 위해 얼마큼 노력했을까 상냥하게 칭찬해 줄게.”

근접전은 류제가 담당한다. 그의 손에 든 군용 나이프가 순식간에 미나의 육신을 훑었다. 류제가 자신의 핵의 위치를 노렸다는 걸 인지한 미나는 절대 류제의 공격이 닿지 못하도록 방어를 견고히 했다.

인자를 모은 미나가 악몽을 구현해 내기 전 니냐롯트가 협공으로 치고 들어갔다. 뭉쳐져 사물을 만들려는 미나의 ‘악몽 인자’가 전뇌로 파헤쳐졌다.

“하하, 장난감이었던 주제에 잘도 내게 덤벼드는구나. 아직 악몽의 맛이 부족해?”

그녀가 처음 제립학교에 왔었을 때부터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았던 니냐롯트가 이젠 이를 드러냈다. 복종해야 하는 개가 반기를 드니 괘씸하다. 거두어들인 ‘악몽 인자’로 미나는 제일 먼저 니냐롯트의 가장 끔찍한 기억의 악몽을 현실로 구현해 냈다.

[레아라!]

[공주님, 보면 안 됩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니냐롯트의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비명 소리가 형체를 만들어냈다. 어머니가 살해당한 후 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하다 지친 그녀를 아버지는 원망했다. 발현된 어빌리티가 미웠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아바마마는 어마마마가 돌아가셨어도 날 사랑해 주었을까?

증오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어버린 얼굴로 니냐롯트에게 손을 뻗는 선황제가 끈적거리는 진흙처럼 녹아내리며 다가왔다.

서큐버스는 이런 족속들이다. 사람의 기억을 들쑤시고 약점을 찾아내 정신적으로 몰락시킨다.

그러나 이전이라면 모를까 니냐롯트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 남겨놓은 작은 사랑을 찾았다. 그가 진정으로 니냐롯트를 미워했더라면 과연 마족의 공격에 혈혈단신으로 맞서 막아냈을까?

증오란 사랑이 있다면 쉽게 스러져 간다는 것을 마족이 되어버린 저 서큐버스는 모른다.

니냐롯트는 선황제를 닮은 ‘악몽 인자’ 역시 뇌전으로 흩트려 놓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드디어 그녀는 물론 렌 지미를 농락하고 친구라 믿던 자들을 배신한 실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왕궁의 대마족 결계를 뚫고 어마마마를 살해한 마족은 그대지? 미나 플로리아.”

왕궁의 하인으로 위장했던 길게 땋은 초록빛 머리칼과 분홍빛 눈동자가 떠오른 니냐롯트가 이를 갈았다. 류제를 탈취하기 위한 전쟁에 마족들이 얼마큼의 노력을 퍼부었는지 알 바 아니지만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졌다. 원수가 코앞에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 꼭두각시처럼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하다.

“알아주는구나. 고맙기도 해라. 모를 때는 하하호호 행복했지? 기분이 어때. 내가 증오스럽니? 그 증오를 잘 기억해 둬. 내가 느낀 배신감의 새 발의 피일 테니까.”

“넌 대체 그 증오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네 분노를 남들에게 전염시킬 뿐인가?”

“그래, 모든 인간이 서로를 증오하게 될 때까지.”

류제는 한탄했다. 과연 그녀를 증오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정녕 죽음밖에 없다는 말인가.

니냐롯트가 미나를 상대하는 동안 ‘악몽 인자’에 녹아버린 군용 나이프를 드라코니스 입자를 빼앗아 수복하고 ‘강화’한 류제가 그녀를 붙잡았다. 뒤에서 세라가 신호를 주자 유네와 함께 마기를 거슬러 거대한 화염의 회오리를 만들어낸 비키가 미나를 덮쳤다.

“네 의도는 모두 엇나갔어. 나는 아바마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때에 맞춰 류제와 동시에 뒤로 물러난 니냐롯트가 말했다.

마족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비틀린 키아나트리체 왕가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엉킨 끈이 풀렸다. 니냐롯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능이 두려운 비어빌리터도, 귀족파도, 희생이라는 짐에 오만해진 어빌리터도 그들을 증오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에 연민을 보냈다.

“아니지. 적어도 나를 증오하고 있잖아?”

유의미한 타격이 있었을까. 한 번에 강한 어빌리티를 끌어내느라 숨을 몰아쉬는 비키는 화염 속에서 또각또각 걸어 나오는 미나를 보며 기염을 토했다. 나라카에서의 마족은 무적이나 다름없는 건가. 회복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이래서는 끝도 없겠네. 난 류제 신리와 이야기하고 싶은 거라서. 너희는 다른 곳에서 수다 떨고 있을래?”

하루살이들이 많으니 귀찮기만 하다. 마기를 네 군데로 끌어모은 미나는 ‘악몽 인자’로 그녀가 알고 있는 강한 마족의 형상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에게서 악몽을 색출한 미나는 마가릿, 나콜렙시, 율폰과 닮은 꼭두각시 인형을 탄생시켰다. 살아있는 존재와 다르게 색이 없는 그들이 무감각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미나, 너……!”

이미 쓰러뜨렸던 군주급 마족들이 다시 나타났다. 마족에게는 동료의 죽음을 조롱한다는 관념조차 없는 건가. 그들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최악의 악마들이 그들의 앞에 재림했다.

“다섯이서 나약한 여인에게 덤비다니 비겁하잖아?”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맛을 다신 미나가 꼭두각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체 없는 그들은 연기처럼 히로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공격했다.

“류제여, 너는 그녀를 막아라!”

이에 율폰의 그림자에는 비키와 유네가, 나콜렙시의 그림자에는 세라가, 마가릿의 그림자에는 니냐롯트가 붙었다. 가짜임에도 그들을 손쉽게 농락하는 미나의 꼭두각시 인형들은 과연 진짜만큼은 아니라도 강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꼭두각시들은 물론 가짜 율폰의 화염의 능력은 마기의 농도는 물론 마주하는 사람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화마의 군주가 부리는 화염 마법의 위험성을 몸소 경험했던 유네는 겁에 질려서인가 가장 먼저 기간트리카 파츠가 박살 났다.

“꺄악!”

달라붙는 소재의 군복이 미약하게나마 마기를 막아주지만 지독한 마기에 노출된 몸이 마비된 것처럼 아팠다.

“유네!”

“한눈팔면 못써. 너는 나랑 놀아야지.”

이제야 둘만 남았다. 미나는 류제가 가장 두려워할 악몽을 만들어보았다. 조그마한 악몽에서부터 태어난 형상이 류제의 몸을 조금씩 감쌌다. 벌써 1년은 보지 못한 그 모습이 류제의 기억에 영향을 받고 모습을 바꾸었다. 색도 없고 당찬 눈동자도 드러나지 않지만 그건 분명 렌, 렌이었다.

[류제… 그러면 안 돼. 왜 죄 없는 착한 미나를 괴롭히는 거야?]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했다 할지언정 사랑하는 자가 안타깝게 만류하는 목소리는 사람을 순간적으로 흐트러지게 했다.

“렌……!”

렌이 그가 쥔 나이프를 감쌌다. 저지른 죄가 있었던 류제는 환영이래도 차마 렌의 형상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걸로 날 찌를 거야? 널 불행하게 만든 날 찔러 죽일 거야?]

그가 주저하는 사이 렌의 형상은 다시 끈적거리는 악몽 인자가 되어 류제를 속박했다. 거대한 뱀이 휘감는 힘처럼 강대한 압력이 그의 기간트리카를 망가뜨렸다. ‘강화’를 해도 버틸 수가 없는 강한 힘이다. 악몽 인자는 상대방의 의식에 달려있듯 그의 마음은 언제나 렌에게 이길 수 없었다.

“컥……! 젠…젠장.”

“그런 가짜에 속다니, 류제 신리 너 진짜 바보같이 뭐 하는 거야! 어서 빠져나와!”

류제의 악몽에게 화염을 던져 구출을 도와주려고 했던 비키는 역으로 율폰의 공격에 당해 발이 묶였다. 그녀의 공격은 미나에게 막혀 류제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이어 니냐롯트가 전뇌를 장전했지만 마가릿의 촉수가 그녀를 억눌러 전류를 집어삼켰다.

“이런, 나라도… 읏……!”

나콜렙시와 대적하던 세라는 전투에서 빠져나오려다 끈적끈적한 늪을 표방한 물 마법에 붙잡혀 반대편으로 내던져졌다.

가장 먼저 당한 비키가 곧바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녀들과 대적하는 각자의 악몽 인자는 히로인들을 바닥에 짓눌러 꼼짝할 수 없도록 억눌렸다.

“어서 도망… 크흑!”

“어딜 방해하려고. 하찮은 가축들은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 마왕님이 부활하는 위대한 순간을 볼 수 있다니 영광으로 여기렴.”

렌의 형상에서 녹아내려 물러진 악몽 인자가 류제를 꽉 조여 그물망 사이로 기간트리카를 조각냈다. 이어 그의 실제 몸까지 침입하며 피부에 선혈을 그었다.

박살 난 기간트리카 파츠 중 일부가 미나의 앞에 떨어졌다. 마침 떨어진 파츠의 부품 안에 있던 기체 코드가 드러났다. 한때 그녀도 장갑한 적 있는 인간들의 하찮은 미물품을 들여다본 미나가 그것을 뒤로 던져 완전히 망가뜨렸다.

“‘데이브레이크’라니. 너희들에게 내일은 없는데도 말이지.”

꼬리뼈에 난 날개를 펄럭거려 가볍게 떠오른 미나가 류제의 헬멧을 마저 박살 내 맨얼굴을 끄집어냈다. 땀에 전 머리칼이 피부에 달라붙어 그의 분한 표정이 잘 보였다.

“다가오지 마!”

왼손만큼 속박하는 악몽 인자에서 간신히 빼돌린 류제가 왼쪽 허벅지에 비상용으로 남겨둔 군용 나이프로 다가오는 미나의 손을 잘라내기를 시도했다.

“어머, 깜짝이야.”

하지만 제약된 행동 안에서 나이프가 닿을 수 있는 사거리가 조금 부족했다. 그의 마지막 공격 역시 미나의 마법에 막혔다. 류제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졌다.

류제의 손목을 짓눌러 슬렉터를 마저 망가뜨린 미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붉은 동공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망을 담아 류제의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왕님의 손… 아름다워.”

나라카의 공기에 노출된 류제는 피부에 닿는 독한 마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될 것 같았다. 이 마기에 그의 마왕의 힘이 반응했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이 일을 반복해야만 해. 나는 영원히 과거에 얽매일 수는 없어. 제발 부탁이야. 여기서 멈추게 해줘, 미나.”

“닥쳐. 이 입은 그런 말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한껏 이상에 취해있던 미나가 못된 말을 하는 류제의 하관을 강하게 쥐었다. 사사건건 곁에서 그녀를 방해했던 렌 지미도 해치웠고 부활한 마왕의 첫 제물이 될 인간들도 붙잡았으니 이제 이곳에서 그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 절망한 류제 신리. 그녀가 바라던 모습이다.

“하아… 꿈에 그리던 순간.”

역시 류제라도 마왕의 힘을 가지지 못한 이상 나라카에서는 미나를 이길 수 없었다. 비키도 유네도 니냐롯트도 세라도 미나가 만들어낸 꼭두각시에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볼이 짓이겨졌다.

이대로 미나의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류제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증오의 기억을 잃어버린 마왕님 대신 내가 깊은 곳까지 들어가 줄게.”

붉은 동공에 시선이 갇힌 류제는 머릿속을 헤집는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이 붙들린 류제의 원초적인 열쇠를 미나가 사정없이 헤집어 잡아냈다.

“윽… 크흑…….”

불쾌한 기억들이 담긴 문을 누군가가 강제로 열어젖혔다. 악문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찔렀다.

“날 봐. 내 눈동자를 보며 떠올려봐. 네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네가 네 손으로 만들어낸 굴레를!”

“나는 네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야.”

“너의 진짜 과거를 기억해. 이딴 가짜 기억이 아니라.”

거칠게 반항해 보아도 꿈쩍할 수가 없다. 류제의 정신은 미나의 눈동자를 따라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추락했다.

수면 아래에 존재하던 수많은 기억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던 마왕이었을 때의 그의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류제는 그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인간에게 배척받고 비참하게 죽어가던 마녀들에게 손을 뻗었던 그의 마음은 그들을 진정으로 구원해 주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다.

왜 인간이 미웠더라? 그 계기를 되짚어가면 진절머리 나는 증오가 먼저 울컥하며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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