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8) (68/112)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8)

황제도 귀족파들의 알랑방귀에 넘어가 니냐롯트를 추궁했다. 어빌리터를 향한 황제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마족에 대한 증오를 이용하는 귀족파의 태도가 니냐롯트의 숨통을 조여왔다.

“미노타군이 마족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보고는 받으셨으리라 알겠습니다.”

“흥, 설마 인류의 배신자를 감싸려는 생각 따위 마시지요, 니냐롯트 저하. 그들은 인류를 배신하고 마족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는 명실상부한 사실입니다.”

이에 하늘바람이 울컥해서 이를 악물었다. 지금 미노타에 대한 타국의 인식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미노타의 의지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도 미노타를 구하기 위해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도와 이곳까지 왔다. 보다 나은 상황으로 가고자 발악하는 와중 저런 말을 들으면 분노가 절로 끼쳤다.

“폐하, 잘 보십시오. 소녀가 고 들라크루아 대령만 남기고 백장미 부대를 나라카로 보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령관님, 설마!”

니냐롯트가 하늘바람의 후드를 벗겼다. 키아나트리체인과는 다른 피부색과 얼굴에 있는 붉은 문신이 드러났다. 회장이 술렁거렸다. 미노타인, 얼굴에 있는 문신은 후툼의 자식이라는 증거이다.

“미노타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왜 적국의 왕자가 이곳에…….”

“지금 미노타가 처한 상황을 말씀하시오, 하늘바람이여.”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당장 적진 한가운데에서 정체가 탄로 난 하늘바람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미노타 왕실의 정권 다툼도 무시무시한데 대제국인 키아나트리체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타국의 왕자 신분인 이상 그는 이곳에서는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예고도 없이 정체를 드러낼 줄은 몰랐던 하늘바람은 루이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왕자답게 앞에 있는 황제에게 다시금 예를 갖추었다.

“미…미노타의 셋째 왕자 하늘바람이라 하옵니다, 키아나트리체의 황제 폐하.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어째서 인류의 배신자가 신성한 키아나트리체 왕실에 침입한 것이오. 역시 쿠데타를 꾀하는 것입니다!”

“다…당장 저자를 붙잡아 가두시오. 근위병, 근위병은 어디 있는가!”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미노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왔습니다. 미노타는 원해서 배신자가 된 게 아닙니다. 미노타도 마족의 간계에 당한 겁니다! 어찌할 새도 없이 미노타 왕실은 마족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키아나트리체를 공격한 건 절대 미노타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를 증명할 수 있는가.”

황제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결정권을 가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니냐롯트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 누구를 닮았나 했더니 황제였을 줄이야.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나마 저 얼굴에 익숙해진 하늘바람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텼다.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제 말을 믿는 것은 폐하의 의지겠지요. 미노타의 왕실을 엉망으로 만들던 마족의 떼들과 위대한 후툼을 살해한 하얀 머리의 화마족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럼 어찌하여 그대만 이곳에 있는 것이지? 죄를 저지르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미노타의 속셈이 아닌가.”

“제 의지가 미노타의 속셈이라면 그러겠지요. 무색하지만 저만이 운 좋게도 마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전사한 포르테 들라크루아 덕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노타가 저지른 짓이 없어지지는 않지”

“물론 마족과의 전쟁이 끝나면 미노타도 인류를 공격한 마땅한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감히 경고하고 싶은 건 미노타처럼 키아나트리체의 왕실에도 마족이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하늘바람이 외쳤다.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기억이 있는 황제가 주먹으로 왕좌를 내리쳤다. 대마족 결계는 마족을 막고 있고, 그는 다시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스러운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 십수 년간 칼을 갈아왔다. 그런데 뭐? 또다시 왕궁에 마족이 숨어들었다고?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하는가!”

“호오, 재미있군. 도망친 셋째가 어디에 있는가 했더니 이곳에 있었던 건가.”

소름 끼치는 마기가 알현실을 뒤덮었다. 인간들의 구역인데도 침입하는 기척조차 없던 목소리는 상당한 적의가 품어졌다.

전장에서나 느낄 법한 지독한 살기의 원천을 찾아 니냐롯트를 비롯한 어빌리터들이 슬렉터를 붙잡고 주변을 살폈다.

“너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흉터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년.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비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천왕인 마가릿에 이어 나콜렙시도 소멸했다. 마왕에 이어 소중한 동지까지 잃어버린 율폰이 왕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그의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이글거렸다.

“화마의 군주!”

“무대에 어울리는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군. 주연 배우는 어디로 갔지?”

악독한 기운을 품으면서도 히죽 웃고 마는 화마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마족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수마의 유언이 거짓이길 바랐건만 오백여 년 동안 인계를 괴롭혔던 그가 정말 아가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왕궁, 왕좌의 바로 뒤에서.

“네놈, 마족!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발을 디디느냐!”

마족을 보고 왕비를 잃었던 기억에 잠식된 황제는 차고 있던 보검에 겁도 없이 손을 대었다. 초대 키아나트리체의 황제가 최초로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 차고 있던 바로 그 칼이다.

또 마족이 왕궁에 나타나다니. 황제는 원수이자 주적인 마족을 없애기 위해 지금껏 해온 짓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발칙한 짓을 하는군, 하찮은 인간이여. 그딴 발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많은 목숨을 쥐고 있는 한 나라의 지도자라도 율폰에게는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인질로 삼을 셈인지 화마의 군주가 ‘연소 인자’로 만들어진 어두운 염화의 광견들을 움직여 황제의 목을 위협했다.

“폐하!”

“아바마마!”

여유롭게 걸어 나온 율폰은 사냥감을 찾는 늑대처럼 날 선 눈빛을 으르렁거리며 알현실을 훑었다. 류제 신리는 보이지 않는다. 과연 플로냐의 작전은 성공한 것인가? 함께한 나콜렙시마저 죽게 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욕심만 많은 서큐버스의 왕이 계획은 죄다 실패하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이제는 부아가 치민다. 마왕 부활의 때가 코앞인데 키아나트리체의 왕과 왕녀도 죽여 없애버리겠다는 복수극의 시나리오도 엉망이 될 뻔했다.

“비열한 마족 놈이……!”

황제는 분을 삭이려 들었다. 당장 이 마족의 육체에 칼을 꽂아 넣고 싶지만 핵을 노리지 못한다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타격은커녕 칼을 꺼내 들었다간 거대한 수레에 덤벼드는 사마귀가 되는 꼴이다.

냉정해지려는 그를 율폰은 같잖다는 듯이 흘겼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곱게 죽고 싶다면 말이지.”

입을 벌리며 뚝뚝 검붉은 화염을 떨어뜨리는 광견은 조금씩 왕의 옷을 태우며 살갗을 지졌다.

“아바마마, 부디 움직이지 마소서!”

니냐롯트가 떨리는 눈동자로 위협을 주시했다. 저 마족이 어떻게 아가타 왕궁의 대마족 결계를 뚫은 것인가. 방금 전 그녀가 확인했을 때만 해도 이상이 없었다.

군주급 서큐버스가 아닌 이상 마족의 침입은 내부 인간의 도움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대마족 결계에 구멍을 내고 마족이 들어올 수 있도록 수작질한 자들은 시치미를 떼는 귀족파들일 터.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어서 저 마족을 쓰러뜨리세요!”

비키를 비롯한 어빌리터들에게 백작 부인이 건방지게 부채로 지시했다.

율폰은 약속대로 왕녀를 죽일 것이다. 목적 달성이 코앞에 다가오자 귀족파는 지독한 마기의 향방을 알지 못하고 두근두근 울렁거리는 심장이 흥분으로 비롯된 것이라 착각했다.

“멀뚱히 서있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 폐하를 지키란 말입니다!”

“이대로 있다간 저 마족이 미노타 왕실처럼 우리를 세뇌시킬 것입니다. 그 전에 빨리!”

신분과 상관없이 어빌리터는 비어빌리터를 지켜야 하는 존재라는 백작 부인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마족을 상대로 칼을 빼 든 그들은 이를 드러낸 동업자를 안일하게 넘겼다.

긴장감이 흐르는 도중이지만 니냐롯트는 백작 부인의 발언에서 이상한 부분을 꼬집었다.

“당연 마족은 토벌할 것이다. 그 전에 하나 짚고 가고 싶군. 우리는 미노타의 왕실이 마족에게 세뇌당했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만.”

“저는 마족으로 인해 미노타 왕실이 쑥대밭이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니냐롯트 왕녀를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인데 어떻게 당신들이 우리 미노타 왕실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계신 것이죠?”

이겼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졌던 백작 부인은 당황했다. 황제는 물론 그들의 목숨 또한 위태로운 상황에 굳이 실수를 캐묻는 왕녀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지적하지 않았으면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끝까지 모른 체했을 것이다.

“아니, 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노타군이 세뇌당했으니 똑같이 그런 거겠지요. 그것보다 폐하의 옥체가 위험합니다. 싸움에 집중하세요!”

“그럼 그대들도 미노타 왕실이 세뇌당하고 군인 또한 마족에게 조종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나?”

“어차피 죽을 자들에게 그게 뭐 중요하다고.”

율폰이 ‘연소 인자’를 더 이끌어냈다. 그는 여기서 황제를 죽일 것이다.

왕녀도 이곳에서 죽이려 했건만 서큐버스의 왕이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 인간 왕녀는 나라카로 납치해 류제 신리가 마왕으로 부활할 수 있게끔 자극하면 될 일이다.

“사악한 마족 놈, 고귀한 자의 눈앞에서 꺼져라!”

근거리 이동으로 단번에 접근한 루이나가 그의 신체를 반으로 나누길 시도했다. 화염을 두른 방패가 움직였기 때문에 베는 감각이 없었지만 율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율폰은 방해되는 루이나를 천장에 처박았다. 루이나가 벌어준 짧은 시간에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돌진한 니냐롯트가 율폰을 붙잡고 ‘전뇌’로 그 육신을 뚫었다.

동시에 안전을 위해 황제를 왕좌에서 밀친 그녀는 율폰의 검붉은 화염의 광견들과 대치했다. 한번 공격을 허용한 율폰은 육체를 뚫은 니냐롯트의 오른손 기간트리카를 구멍을 통해 검붉고 진득한 용암을 흘려 녹이려 들었다.

니냐롯트가 황급히 떨어지려고 했지만 이번엔 화염의 광견들이 그녀를 물었다. 인간들의 재미난 연계에 대응하는 화마의 웃음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하하, 우리 군주를 우습게 보는구나. 내가 마가릿처럼 오만하고 나콜렙시처럼 게으르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간교한 율폰은 육체에 공격을 닿기를 불허했다. 인간들에게 핵의 위치를 파악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니냐롯트의 기간트리카가 녹아내려 살갗에 화염이 닿기 전 비키가 화염구를 만들어 화마의 군주의 화염에 맞설 준비를 했다.

“왕녀님께 떨어져!”

“난 이기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 꼬마야.”

백발의 머리 아래로 빛나는 눈동자는 살육의 핏빛이 돌았다. 라우라 축제 때 느꼈던 지독한 악몽의 순간을 떠올린 유네가 비키를 보조하려다 겁에 질려 손이 떨렸다. 알현실의 바닥마저 녹아 불지옥에서 버둥거리는 손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어릴 적 가문을 멸족시킨 그 새빨간 눈동자와 다시 눈이 맞은 비키는 발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지옥 불 안에서 과거 셀로니아 가문의 가주였던 어머니의 형상을 발견했다. 좌절하며 비키를 향해 살려달라며 손을 뻗는 형상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비키 양!”

비키가 동요하는 사이 율폰은 비키의 화염구를 오히려 삼키려 들었다. 아차 싶은 그녀가 부스터를 기동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지만 컨트롤에 실패해 알현실 벽에 처박혔다. 반격으로 황제 대신 니냐롯트를 빼앗긴 꼴이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덕분에 화마의 직접적인 위협에서 벗어난 황제에게 이때다 싶어 달려간 백작 부인은 온갖 가식을 떨며 염려하는 척했다. 검을 발도한 멜가로스크 자작이 그 끝을 율폰에게 향했다. 손을 잡았다는 의심이 아리송해질 만큼 기가 막힌 연기력이다.

“사악한 마족, 왜 이곳에 온 것이냐!”

“왜냐고? 하하. 네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우습구나, 멜가로스크.”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지이기에 섣부른 발언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멜가로스크는 율폰이 살살 자극하자 당황해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이에 대처에 능한 백작 부인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사악한 마족이여, 거래를 하지. 그곳에 있는 자는 우리 위대한 키아나트리체의 왕위 계승자이다. 왕녀를 제물로 바칠 테니 폐하의 옥체에 뻗칠 마수를 거둬들여라!”

“그…그렇지. 너희 마족의 적은 어빌리터인 왕녀가 아닌가. 곧 기사단이 알현실로 쳐들어올 터, 그 정도 숫자면 등급1의 마족이라도 번거로울 테지. 대마족 결계를 열어줄 테니 당장 신성한 왕궁에서 나가거라!”

믿을 수가 없는 말에 니냐롯트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위급 상황에서 나오는 이기적임과 비양심적인 언행이 그토록 알기 원하던 귀족파 무리의 알맹이라니. 심문으로 속셈을 파헤치지 않아도 술술 불어대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만 죽이면 된다고? 그대들, 목숨이 위험하다지만 아주 대단한 말을 내뱉는군.”

화염이 기간트리카를 녹이고 있지만 그녀의 능력은 전뇌뿐만이 아니다. 수마처럼 물 자체를 컨트롤할 수는 없어도 내릴 수는 있다.

루이나가 날아간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폭우는 그 어떤 물로도 꺼지지 않는 율폰의 염화를 조금씩 꺼뜨렸다. 니냐롯트를 붙잡은 검붉은 화염이 까맣게 식어갔다.

“그런 말을 하니 마치 마족과 손을 잡았다 시인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요. 말도 안 되는…….”

“아니면 저 마족이 그대의 가문을 어찌 알아봤을까, 멜가로스크?”

“잘못 들은 거겠지요.”

변명은 변명이고, 덕분에 율폰에게서 벗어나 빗속에서 일어선 니냐롯트가 강력한 전뇌를 준비했다. 이글거리는 검붉은 화염을 둘러 스스로를 지키는 율폰은 화염을 뚫고 들어오는 비가 피부에 닿자 불쾌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마족의 목적이 빤히 보이지 않습니까. 어빌리터인 저하를 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 키아나트리체의 유일무이한 황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끼리의 정치 싸움은 아무래도 좋다만 하찮은 벌레들이 내 존재를 무시하는 건 유쾌하지 못하군.”

새하얀 머리칼을 뒤로 넘긴 율폰이 히죽 웃었다. 고작해야 비키보다 서너 살 정도 어린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의 영혼은 새까맣게 타버려 증오와 복수와 악독함만이 남았다. 그는 그 입으로 인간을 먹는다고 믿지 못할 만큼의 새하얀 치아를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거기, 인간 왕녀. 마족이 인간과 손을 잡니 지루한 말들을 꺼낼 생각인가? 이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과연 어리석다고나 할까. 목적지까지의 길이 겹친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한들 어차피 다 죽을 운명인데. 안 그래?”

전쟁은 일어났으니 류제 신리를 돌려받고 복수만 완료하면 키아나트리체에는 볼 일이 없다. 저 귀족파 나부랭이들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이기심을 품은 저들의 육체는 정말 맛있겠지. 화염 속에서 절망하는 비명이 듣고 싶다. 율폰은 강력한 마기를 이끌어냈다.

“네 이놈, 화마의 군주! 감히 네가 우리를!”

“마족이 진정으로 인간과 어울릴 줄 알았더냐, 멍청한 인간들아. 두려워해라. 내가 화마의 군주다. 불에서 다시 태어난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이다!”

그는 거대한 용암으로 왕궁을 녹여 천장을 메웠다. 더 이상 비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자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빌리티는 기껏해야 이 정도다. 계속해서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버거울 터. 특히나 이 뇌우의 비만큼은 감정에 휘둘려야 하는 그녀로서 힘든 선택지일 것이다.

“위…위대한 후툼을 죽인 것도 당신이지? 그때… 그 하얀 머리……!”

후들거리는 무릎을 억누른 하늘바람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화마의 군주의 마기가 너무 독해서 유약한 그에겐 들이킬수록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짓눌리는 것처럼 공포스럽다.

미노타 왕궁의 알현실에서 마족에게 목이 잘린 위대한 후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억누른 그는 후툼의 자식으로서 원수와 대적했다.

“하하, 같은 인간과 싸우는 건 오랜만이겠지. 마족 덕분에 사이가 좋아져서 기분이 어때?”

“사이가 좋아져? 웃기지 마. 죄 없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죽여서 얻는 게 뭔데!”

유네의 부축을 받은 비키가 외쳤다. 율폰은 자신을 악역처럼 쳐다보는 붉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가 끔찍하게 싫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짜증이 솟구친다.

“이봐, 셀로니아가의 빌어먹을 생존자여. 나는 마족이다. 긍지 높고 고귀한 마족이란 말이다. 그깟 인간 몇 죽여서 내가 얻는 건 즐거움과 쾌감이야. 그 이상 뭐가 필요하지? 응?”

“마왕 부활이 필요하겠지. 너희 속셈을 여태 모를 줄 알았더냐? 무슨 수를 써서도 류제 신리는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니냐롯트가 나지막이 전했다. 붉은 눈동자를 굴린 율폰이 그녀를 훑었다. 과연. 플로냐는 이번에도 실패했나. 인간의 왕녀 주제에 류제 신리의 정체를 알면서도 감싸줄 생각을 하다니 가소롭다.

“그건 하찮은 인간이 결정할 게 아냐.”

그는 발밑에서 광견들을 이끌어냈다. 수십 마리의 짐승 떼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인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불에 타 죽어라.”

알현실이 검붉은 화염에 휩싸여 갔다. 닿으면 육신을 모두 태우기 전까지 꺼지지 않을 듯한 염화가 그들을 둘러쌌다.

“화마의 군주여. 정녕 우리를 배신할 셈입니까! 마왕이 부활할지언정 우리와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백작 부인이 이를 갈았다. 이 화염 속에서는 어디도 물러설 곳이 없겠다, 화마에게 목숨을 구걸하려 단합한 사실을 폭로하는 그녀를 니냐롯트가 나무랐다.

“그렇지 않기를 바랐소. 그대들이 인간이오! 인간을 위한다며 그 자리에 올랐으면서 어째서 마족과 손을 잡을 수 있지!”

“하, 너희 어빌리터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는 없어. 이 나라는 인간들을, 오로지 순수한 인간들을 위한 나라다. 너희야말로 이 나라를 좀먹는 악이야!”

백작 부인이 고집하던 순수한 인간들을 위한 나라. 그 순수성을 고집하던 인간들이 있던 곳에서 태어난 율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무렴. 그는 그 인간들을 위한 나라가 어떻게 멸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순수한 인간들을 위한 나라?”

처음 듣는 주장에 황제가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 폐하께서도 저 괴물과 아무렇지 않게 맞서는 어빌리터가 두렵지 않습니까? 왕비님이 어찌 돌아가셨는데! 저것들은 우리 순수한 인간을 위해 마족과 싸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걸 위한 도구면 족하단 말입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동의를 종용하는 그녀는 광기에 차서 외쳤다. 그들이 언쟁하는 동안 왕궁을 뒤덮은 마기는 온갖 곳에서 검붉은 화염을 이끌어내 시종도 기사단도 물론이고 왕궁에서 몸을 숨긴 모든 이들을 잡아먹을 기세다.

“하하. 재미있군.”

분열하는 인간들의 비참한 최후를 눈에 담고자 율폰이 마왕의 왕좌와 닮게 녹여버린 키아나트리체의 왕좌에 앉아 개를 쓰다듬었다. 어빌리터들이 어두운 염화에 맞서지만 역부족이다. 깔깔깔 웃는 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로라 하놋이 영웅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지도자를 믿지 않고 어빌리터만 믿었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황제 폐하. 이건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저들이 제2의, 3의 로라 하놋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

마왕 살해자는 물론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던 셀로니아 가문을 귀족파는 아니꼽게 보았다. 마왕이 죽은 지 100년, 마족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정계까지 침입하는 어빌리터들은 경계할 만했다.

마족이 없다면 어빌리터들은 언제든지 비어빌리터를 위협할 것이다. 그래서 로라 하놋을 묻어두고 위태로운 왕의 권력을 다잡았다.

통솔을 위해서는 마족은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셀로니아 가문이 멸족했을 때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어빌리터 왕녀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쳤다.

“그래서 고 들라크루아 대령의 진급을 반대했던 것이군.”

“도구에게는 권력 따위 필요 없어. 그것도 한계가 있었지. 어빌리터 주제에 과분한 권력을 지닌 가문의 생존자가 있었거든. 밟아도 밟아도 나오는 쥐새끼들마냥.”

왕녀에 이어 저 비키 셀로니아마저 죽여 없앤다면 셀로니아가는 멸족한다. 지체 겸비 문무 양도 위대한 어빌리터 가문이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귀족파들이 셀로니아 가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 진상을 들은 비키가 분해서 외쳤다.

“설마 저 마족과 손을 잡고 셀로니아 가문을 몰살시킨 것도 다 당신들 짓이란 거야? 미쳤어. 반역자들이란 당신을 말하는 거야!”

“오해하지 말라고, 셀로니아.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해. 그건 나의 긴 여정의 끝을 맞이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

왕좌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율폰이 자비롭게 알려주었다. 그는 몇 년 전 대규모의 화마족을 이끌고 셀로니아 가문을 습격했다. 그 이후 그에게 접촉을 시도한 것이 저 귀족파라는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공동의 적이 없다면 피지배자들을 누르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그들에게 어빌리터는 물론 마족 또한 수단일 뿐이었다.

“웃기지 마. 마족이면서 인간의 꼭두각시가 되어 시키는 대로 하다니. 그래서 우리 가문을 멸족시켰다니. 그거야말로 가문의 수치야!”

어릴 적에 마주했던 저 마족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조금이나마 마족과 어빌리터, 인간 이 세 삼각형의 진상에 다가간 비키는 셀로니아 가문 출신인 화마의 군주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런데 인간과 손을 잡아 인간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기 위해 가문을 멸족시켰다고? 차라리 인간을 증오해서, 셀로니아 가문이 했던 짓이 야비해서 눈을 감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속이 시원했다.

“셀로니아 가문은 죽어 마땅하다. 인간들은 감히 마왕님에게 손을 댔지. 그래서 난 멈추었던 복수를 시작했고 그들과는 마침 이해가 맞았을 뿐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면 셀로니아 가문이 했던 짓을 정당화하고 싶은 건가?”

애송이 비키 셀로니아를 보는 율폰의 눈동자에는 복수의 감흥만이 찌꺼기로 남았다.

“꼬마야. 아직도 셀로니아 가문이 긍지 높은 어빌리터 가문이라고 생각하나, 응? 마녀사냥에 앞장선 더러운 셀로니아 가문의 핏줄들아. 너희 피에 흐르는 원죄를 외면하지 말라.”

차근차근 왕좌에서 내려온 그는 셀로니아 가문의 옛 진실을 떠올렸다.

먼 옛날, 셀로니아 가문에 한 마녀가 정체를 숨겨 들어왔고, 그녀는 가문을 이을 아들의 손에 숙청당한다. 하지만 강한 용인의 피는 아들을 통해 대대손손 셀로니아가에 흐르며 어빌리터를 배출해 냈다.

마녀사냥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셀로니아 가문은 그 이래로 세대에 한 명꼴로 마녀가 태어났다. 마녀를 사냥하는 가문이 마녀를 배출하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들은 그들의 피가 마녀를 탄생시킨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더러움을 속죄라도 하는 듯 셀로니아는 가문에서 태어난 마녀들은 물론 전국에서 추적해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환상종으로 취급당하던 마족의 개체 수가 늘어나 인계에 들끓기 시작했다. 재앙처럼 나타나는 마족을 처음엔 마녀가 만들어낸 생물이라고 생각한 인간들은 마족을 향한 두려움으로 어빌리터를 더욱 박해했다.

오백여 년 전 태어났던 율폰도 그런 셀로니아 가문이 자행한 마녀사냥 희생자 중 하나다.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생생하고 기분 더러운 기억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긍지 높은 어빌리터 가문이라 스스로를 칭하며 마족과 대치하는구나. 우스워. 그 피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 근본조차 모르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헌신하는 어리석은 인간.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면 마족을 토벌하기 위한 그 치욕스러운 기계를 벗어던지겠지.”

비키에게서 셀로니아 가문의 과거 행적을 들었던 니냐롯트는 율폰의 증오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저 마족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핍박당한 어빌리터였다는 과거를 짐작했다. 추측만 해오던 비키도 실제로 듣는 진상이 마음 쓰렸다.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어. 난 여기서 널 쓰러트릴 거야. 이겨서 네가 잘못되었다는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

“여전히 무지하구나. 너희는 과거의 나다. 나는 미래의 너희거늘.”

마왕을 따라 나라카에 모여 세력을 불린 마족들은 인계에서 인간 사냥에 나섰다. 마을 하나가 하룻밤 사이 사라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마족이 재앙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창궐하자 역사 속 나라가 망하고 제국 키아나트리체가 건국되었다. 무력한 인간들은 마족들을 쓰러뜨릴 대항마로 어빌리터에 주목했다. 키아나트리체 왕실은 황급히 어빌리터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최초의 셀로니아를 시작으로 마녀사냥을 가업으로 삼던 셀로니아 가문은 가문의 골칫거리였던 마녀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기회를 잡은 셀로니아는 초대 키아나트리체 황제와 함께 어빌리티의 힘으로 마족을 물리치고 작위를 받았다.

인간들에게 어빌리터가 마족을 무찌를 수 있는 존재라는 새로운 의식이 자리 잡혔다. 셀로니아 가문은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불태우고 숨겼다. 그렇게나 증오하고 역겨워하던 마녀들을 낳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로 마족을 토벌해 인간에게 존경받는 가문이 되었다.

어빌리터를 죽이며 그 죄로 마족을 만들었던 주제에 마족을 쓰러뜨리는 긍지 높은 어빌리터 가문으로 탈바꿈을 했다고? 증오에 영원히 붙잡힌 율폰이 셀로니아가의 가식을 지켜봤을 때 느꼈던 역겨움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거다. 그는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

“박쥐 같은 집안의 표본. 나는 그 핏줄이 증오스럽다. 내가 그 핏줄과 얽혀있는 것조차 밉다. 인간이란 이렇다. 항상 이래왔지. 그 여자의 피 모두, 모두가 더러워! 난 모든 셀로니아 가문의 피를 세상에서 지워낼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인간들의 입으로 응당한 비난을 받게 해주마!”

“긍지 높은 셀로니아가의 실상이 이다지도 추악하구나. 셀로니아 후작가의 더러운 피! 하하하하. 마족의 입에서 저주를 들으니 이제야 속이 다 후련하군. 알겠느냐, 비키 셀로니아!”

마족인 율폰이 셀로니아 가문에 집착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원했던 대로 셀로니아 가문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멜가로스크 자작이 후련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적의 치부를 드러내니 배신자의 웃음소리는 통쾌했다. 그 누구도 멜가로스크 자작의 웃음을 훼방 놓지 못했다.

누명이 아니라서 비키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했다. 율폰의 반천 년을 가로지르는 증오를 비키는 덤덤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화마의 군주, 네가 말하는 셀로니아 가문 이야기는 아주 먼 과거의 일이야. 이 키아나트리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지. 멜가로스크 자작님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돌려드리죠.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어머니에게 향했던 선대의 열등감을 제게 향해서 자작님이 뭘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네게 그녀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지. 증오의 이유는 그거면 충분해.”

미소 짓는 멜가로스크 대신 대답한 율폰이 악마처럼 낄낄거렸다. 염화가 알현실을 덮고 메케한 연기가 안을 메웠다. 눈앞에 있는 자에게 원수의 피가 흐른다. 그것 하나만으로 죄는 이어진다. 죄를 척살하는 것이 지워지지 않는 증오를 가지는 마족의 업보이다.

“셀로니아 가문이 500년의 세월을 걸쳐 제대로 된 방향을 찾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너희는 죄를 망각하고 흐르는 피를 아름답게 포장했지. 고작 흐르는 시간이 죄를 용서하다니 괘씸하지 않은가. 내가, 그들의 죄의 증거가 존재하고 있는데.”

율폰이 곁에 있던 어떤 귀족파 인간을 붙잡아 검붉은 불꽃으로 잡아먹었다. 이어 두어 명을 삼켜버린 율폰의 마기가 울렁거렸다. 한없이 이성적임과 동시에 광기가 엿보였던 증오의 감정이 폭주의 단계를 밟아갔다.

인간을 잡아먹는 염화에 맞서는 비키는 지지 않고 외쳤다.

“셀로니아 가문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뭔데?”

율폰이 비키의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물론 셀로니아 가문의 피를 세상에서 전부 지워낸다면 복수는 끝이다, 비키 셀로니아. 이제 그 달성이 눈앞에 남았구나.”

“…류제!”

비키의 신호와 동시에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니냐롯트의 폭우로 식어버린 마그마를 깨부순 류제가 율폰의 공격을 저지했다. 류제가 가진 루이나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율폰의 목을 스쳤다.

곧바로 핵을 향한 공격이 이어지자 일순 머리가 새하얘진 율폰이 광견으로 류제를 물어뜯어 밀어냈다. 염화를 베었더니 칼이 녹아 부러졌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류제가 가뿐하게 착지했다.

“빗나갔군.”

“류제 신리……!”

알현실에 있던 귀족파들도 류제의 등장에 동요했다. 보아하니 그의 기습은 예견되었던 일 같다.

율폰의 의심대로 여러 경우를 대비해 니냐롯트도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로써 류제 신리를 귀족파에 넘기지 않을 명분도 살렸다.

“결계를 보수하느라 늦었거든.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인위적인 구멍이 났더라고. 이제 넌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그 말은 너희 모두 이곳에서 내게 죽게 된다는 소리지.”

대마족 결계 중 구멍 난 곳을 찾아 보수해서 율폰은 이곳에 갇힌 상태였다. 왕궁 곳곳에 율폰이 풀어놓은 검붉은 불꽃도 류제가 모두 꺼뜨렸다. 마족이 결계에서 나가려면 결계를 이루는 모든 부위를 파괴해야 할 것이다.

“이런…이런 일이. 이 위대한 키아나트리체의 왕궁에 감히, 감히……!”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귀족파가 실제로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이 연이어 입증되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가장 용납할 수 없는 왕궁의 마족 침입까지 그들과 얽혔다. 분을 참지 못한 황제가 멜가로스크 자작의 멱살을 쥐었다.

“네놈들! 멜가로스크 자작, 진정으로 그대들이 마족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폐하. 그 누구도 아닌 폐하를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인간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틈에 목을 만지작거리며 일어난 율폰이 상처를 회복했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어도 위험할 뻔했다.

“미안하지만 네 복수도 여기까지야, 율폰. 복수라고 하기엔 너는 죄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어.”

“잘도 이곳까지 왔구나. 마왕의 부활체.”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저 검이 노리는 방향은 정확히 그의 핵이었다. 그의 핵은 로라 하놋에 의해 금이 가있어 조금이라도 공격이 닿았다가는 부서져 버린다.

류제 신리,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 꽤나 성장했군. 설마 각성도 하지 않았는데 기억을 되찾은 건가? 플로냐의 도움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래서 플로냐가 도망친 건가?

“간다, 류제.”

“맡겨둬.”

이날을 위해 1년 동안 합을 맞춰온 류제와 비키가 동시에 움직였다. 손에 화염을 맞붙이며 화마의 불꽃을 꺼뜨리는 비키가 율폰을 조여왔다.

반응을 보아하니 류제가 보여주었던 쪽지 내용대로 저곳이 바로 화마의 군주의 핵의 위치다. 라우라 축제나 어렸을 적에 보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화마의 군주에게는 제대로 형체가 있으니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넌 독 안에 든 쥐야!”

“쥐? 내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몰려드는 쥐새끼들은 너희들이겠지.”

핵의 위치가 발각되었지만 율폰은 금세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는 저들을 몰살할 자신이 있었다. 타깃도 스스로 찾아온 데다 여차하면 왕녀를 인질로 잡으면 된다. 대마족 결계는 저 귀족파 인간들을 구슬리면 되겠지. 그리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었다.

그의 마법은 최상이다. 마가릿처럼 오만하지도 않고 나콜렙시처럼 게으르지도 않으며 플로냐처럼 최신형 기간트리카에 공격이 막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꽃으로 기간트리카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의 염화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얌전히 죽어라, 비키 셀로니아. 그 피로써 속죄를 끝내!”

“난 절대 죽지 않아! 살아서 마족인 네가 또다시 저지를 죄의 연쇄를 끊어낼 거니까.”

“그딴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이 증오스럽지도 않느냐.”

“역사가 부끄러울지언정 증오하지 않아. 그리고 죄를 지은 건 더 위의, 까마득한 선조들인데 왜 우리가 그 죄를 죽음으로 갚아야만 했지?”

손과 손을 맞부딪혀 화염을 상쇄시키는 비키와 율폰의 불꽃이 알현실을 휩쌌다. 그녀를 도와 장식용 검으로 율폰을 혼란스럽게 하는 류제와 루이나, 바람으로 비키의 화염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유네가 검붉은 화마의 불꽃을 막았다.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었을 거야. 네 분노의 방향은 이상해. 인간이 미우니까 모두 죽여버린다니. 그게 과거 셀로니아 가문이 어빌리터에게, 너에게 한 짓과 다를 게 뭐야!”

“인간 주제에 마족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너도 인간이었잖아. 과거 셀로니아 가문 출신이었던 너는 그때 나 대신 네 초상화를 불태웠지. 네 본명은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야, 화마의 군주. 셀로니아 가문의 죄악의 상징.”

“나는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이다. 마왕님이 하사하신 이름으로 나는 새로 태어났다. 그딴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두려움에 질려 기절해 버린 어린 소녀를 지나치고 케케묵은 먼지 속에 오래도 남은 자신의 초상화를 태운 그는 오랜만에 보는 인간일 적 모습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새삼스레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다.

“셀로니아 가문에서 태어난 주제에 죄를 외면하는구나. 그럼 내 존재는 뭐지? 시간이 지나면 셀로니아 가문이 했던 짓이 사라지나?”

“넌 오백 년도 넘는 세월 전에 마족이 된 인간이야. 차라리 그전에 복수를 했어야지. 어째서 우리 부모님이었고 어째서 우리 남매들이었어? 왜 우리 가족이었냔 말이야!”

“난 인간이 밉다. 증오스럽다. 셀로니아 가문은 더욱.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

“차라리 와서 원망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거야. 죄를 망각한 우리 가문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었으면 우리 가족은―”

“나는 마족이다. 건방지게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려 들지 마! 내게 용서란 없다. 오로지 그 피에 대한 증오와 복수뿐.”

그에게 셀로니아 가문은 증오의 결정체였다. 증오가 남아있으면 그는 강해졌다. 마왕마저 죽여버린 인간에게 솟아오른 분노로 복수의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그의 고상한 피날레는 무려 12년 전부터 계획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만 살려둔 거야. 나까지 죽일 수 있었잖아.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 아냐?”

“하하하, 무슨 말을 바라는 거지? 왜 살려두었냐고? 복수를 위해 살아오다 진실을 알고 내게 비참하게 살해당하길 원했지. 절망하는 네 표정이 보고 싶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주 달콤한 얼굴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셀로니아 가문의 멸족을 이용하여 율폰과 손을 잡은 귀족파에 절망한 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까, 이 빌어먹을 반역자들!”

황제의 호통에도 멜가로스크 자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는 혼란스러웠다. 저 마족이 셀로니아 가문 출신이라는 말은 마족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뜻인가? 어쨌든 저치들도 진실을 알고 있을 터.

짓무른 상처를 붙들고 배신자들을 노려보는 황제는 니냐롯트의 부축을 뿌리치고 백작 부인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백작 부인…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말하시오. 마족과 손을 잡은 게 나를 위해서라고 어찌 건방지게 지껄일 수 있소!”

“셀로니아 가문이 멸족했어도 폐하께서는 어빌리터가 권력을 잡으면 생기는 위험을 모르시지 않습니까! 고작 자식된 자가 어빌리터라는 이유만으로 순수한 인간을 외면하면 아니 될 일입니다. 모두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섭니다!”

백작 부인은 염화에 휩싸인 알현실 안에서 외쳤다. 율폰의 검붉은 증오의 화염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마족이 없으면 괴물 취급 받는 건 어빌리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를 위해 얌전히 명령만 잘 따르면 되는 겁니다. 암요. 마족과 몇 번이고 손을 잡겠습니다. 우리 순수한 인간을 위해서!”

“순수한 인간이란 오만한 말로 짐을 능멸하지 말라!”

“어빌리터 때문에 왕비님이 시해당했어도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목숨이 꺼지기 쉬운 자리에 있는 걸 알면서도 백작 부인은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드레스와 장신구가 재로 뒤덮였다. 뒤틀린 긍지와 당당함은 광기를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대마족 결계를 꺼뜨리는 장치 스위치가 들려있었다.

“폐하께서 원튼 원하지 않든 마족은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소중한 것을 앗아가며…….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가 되지. 안 그렇습니까, 폐하! 폐하도 잃었기에 알고 계시지요! 복수를 만드는 권력,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그녀가 그 스위치를 누르자 왕궁이 진동했다. 창문 밖에 보이던 무지갯빛 대마족 결계가 꺼져갔다. 듣다 못한 니냐롯트가 설마 하는 심정을 억눌렀다.

“설마 어마마마를 해치도록 마족에게 사주한 것이 그대인가!”

의태한 마족이 왕궁까지 침입해 왕비를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 인간을 향한 마족의 복수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 마족과 손을 잡은 반어빌리터파의 짓이었을 가능성에 니냐롯트는 크게 충격 받았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던 건가!”

똑같은 의심에 사로잡힌 황제가 메케한 연기에 연거푸 기침을 하다 탄식했다.

“사고? 하하,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이었지. 우리는 전쟁을 원했거든. 이 순간을 위해 잘 짜여진 초석이지 않나.”

백작 부인 대신 율폰이 답했다. 쿨타임에 걸린 비키가 율폰의 공격에 맞고 황제의 앞에 내던져졌다. 그의 공격이 비키에게 닿기 전 유네가 강한 바람으로 짧은 방어막을 펼쳤다. 루이나가 율폰의 상반신을 조각내고 류제가 율폰을 밀쳐냈다. 하반신은 핵이 있는 상반신에게 끌려가 다시 회복되었다.

“칫.”

핵을 신경 쓰며 방어하니 구멍이 생긴다. 또 기회를 놓쳐버린 율폰이 혀를 내둘렀다.

비키의 쿨타임이 차는 동안 욜폰에게 다가간 니냐롯트는 분노로 일그러졌다.

“왕궁에 숨어든 그 마족은 군주급 서큐버스였겠지. 그 마족을 이용해 기사단장을 세뇌하고 어마마마를 밀쳐내 마족에게 살해당하게 만들었다. 야비한 마족 놈. 인간에게 증오를 심어서 뭐가 그리 즐겁나.”

“즐겁지. 아주 즐거워.”

자리에서 일어난 율폰이 먼지 묻은 옷을 털었다.

“고작 심심풀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경시하는 너희들은 아무리 증오에 붙잡힌 안쓰러운 생물이라 해도 정당화할 수 없다!”

율폰이 코웃음을 찼다.

“어리석은 인간. 몇 번이고 말했잖아. 난 셀로니아 가문이 싫어. 더러운 피를 없애면 기분이 상쾌해지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그것이 어마마마를 시해한 무슨 이유가 되냔 말인가!”

“부부인(府夫人)이 셀로니아 가문이었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왕비의 어머니가 셀로니아 가문의 사람이라면 왕녀 또한 셀로니아 가문의 피가 흘렀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인간의 피를 이은 모든 자를 죽인다.

이제 그 피는 비키와 또 다른 이, 니냐롯트만 남았다.

“이해가 맞으니 톱니바퀴는 돌아가지. 나는 그에 맞추어 움직였을 뿐.”

“셀로니아의 피를 없애고 아바마마를 반어빌리터파로 만들기 위해서인가. 그대들, 어디까지 죄를 저지를 셈인가!”

“어디까지 짐을 능멸하려 들었느냐!”

황제가 귀족파 무리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다 죽을 마당에 멜가로스크 자작이나 백작 부인은 어떤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했다. 그것이 바로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율폰이 황제에게 빈정거렸다.

“그걸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옮아간 증오는 돌이킬 수 없고 너 또한 증오에 먹혀 걸맞은 선택을 했다. 그것이 제 핏줄의 목숨을 갉아먹는 것을 알았어도 말이지. 연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

검을 빼 든 황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족을 노려보는 황제의 은빛 눈동자에 검붉은 화염이 비쳤다. 그의 눈에서 증오가 읽혔다. 율폰은 그 감정을 만끽했다. 인간이 좌절하는 순간은 즐거운 만찬이다.

“증오스럽나? 증오스럽겠지. 마음껏 증오해라. 그 유약한 몸을, 정신을.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 마족의 몸을 경배하라.”

“아니, 난 증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슬픈 것이다.”

“아바마마……!”

니냐롯트를 뒤로 물린 황제가 슬픔을 억눌렀다. 타인을 향한 증오, 미움이 전부 다른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그동안 왕비의 슬픔에 미쳐버린 그가 왕녀를, 자식을 마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십 년 가까이 저들의 속셈에 휘둘리는 것도 모르고 다른 곳만 바라보았다. 그 귀한 시간을 분노로 흘려보낸 것이 아까웠다. 통탄스러울 만큼 속절없었다.

“소중한 사람의 소실로 인한 슬픔. 오해로 인한 슬픔. 끊임없는 연쇄로 인한 슬픔. 나의 아둔함으로 만들어진 어리석음이 네놈들의 계획을 거겠지.”

한낱 마족에게 휘둘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그. 마족을 토벌할 어빌리터가 제 목숨만 부지하려 버둥거리는 추악한 모습에 실망한 그. 복수를 위해 마족을 토벌하려 했던 그.

모두 부질없다. 증오에 휘둘리던 그는 그저 저치들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증오는 파괴를 낳는구나. 내가 그러하듯 너의 오랜 증오는 죄 없는 자에게만 향할 뿐이다. 나는 너를 죽여 그 연쇄를 끊고 말겠다. 그러기 위해 너와 맞서마!”

“아바마마, 위험합니다!”

“그럼 그 자리에 서서 절망한 채 죽어버리면 되겠군.”

류제가 율폰을 막아섰지만 율폰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었다.

‘러다이트’가 발동했다. 협력의 대가로 마족이 귀족파에게 주려고 했던 그 무기다. 이걸로 그는 어빌리터들을 제압하고 왕궁에 있는 모든 생존자들을 죽일 것이다.

“류제, 물러서!”

안티 슬렉터. 말로만 들었던 무기에 당하니 장갑이 강제로 해제되기 시작했다. 니냐롯트는 강제로 해제된 기간트리카를 재장갑하기 위해 슬렉터로 강제 장갑을 시도했지만 저 안티 슬렉터는 이전의 것보다 성능이 올라간 건지 보고된 것보다 간섭이 강했다.

율폰은 알현실을 다 채우고도 남을 으리으리한 악마의 파수견들을 만들었다. 각자의 파수견이 각자의 인간을 노렸다.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빌리터들의 손발이 묶인 순간 니냐롯트를 노린 파수견이 당장 달려들어 공격했다.

“증오스러운 마족아, 감히 네 뜻대로 될 성싶으냐!”

초대 키아나트리체 황제의 검을 꺼내 든 그가 대신 광견을 막아섰다. 육체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인내하고 적을 벤 그의 의지에는 마족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키아나트리체 왕가의 피가 흘렀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구나. 나를 죽인다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 주제에 그게 가능할 것 같나?”

하찮은 발버둥에 잠시 물러난 염화의 광견이 추악하게 입을 벌렸다. 기간트리카가 없으면 니냐롯트라도 염화에 대처할 수 없다. 그가 니냐롯트의 운명을 대신한 건 한순간이었다.

“아바마마!”

대제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존귀한 황족이라 할지언정 인간의 몸은 마족과 맞닥트리기에 한없이 나약하다. 그는 이토록 쉽게 화마의 마법에 불탔다.

황제의 살해도 꾀했던 율폰조차 꼭두각시 왕이 왕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려 들자 일순 망연해졌다. 복수를 꾀하는 황제의 최후의 공격은 끝내 율폰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아바마마. 안 돼. 아바마마!”

“어째서 폐하……!”

왕비의 서거 사건을 이용해 왕녀와 황제 사이를 비틀기 위해 몇 년을 걸쳐 수고를 감내했는데 황제는 끝내 어빌리터를 향한 증오 대신 아비의 마음을 택했다.

“좋다! 하하하. 황제도 죽여라. 왕녀도 죽여 없애고 키아나트리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우리들의 손으로 근본부터 새롭게 구축하는 거다!”

멜가로스크 자작이 폭소했다. 죽기를 바란 왕녀는 죽지 않고 황제가 대신한 건 계획과 어긋났다. 과욕을 부린 이념이 맞이한 결과에 실성한 듯했다.

아연실색한 백작 부인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된 반역죄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키아나트리체의 정통 황가의 피가 이제 왕녀밖에 남지 않았다.

“니냐롯트 왕녀님!”

“왕녀 저하, 피하십시오!”

율폰에게 맞서다 당해서 어딘가에 처박혔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루이나가 근거리 이동으로 나타났다. 화마를 맨몸으로 상대할 수는 없던 그녀는 왕궁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대마족 바리케이드를 구해 강력한 화염의 불길을 막았다.

그녀의 능력이 생물도 함께 이동시킬 수 있었더라면 왕녀만이라도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루이나는 불길을 단신으로 방어했지만 당장이라도 화마의 마법에 몸이 튕겨 나갈 것 같았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제 말이 들리십니까?”

“마족을… 난 마족을 반드시… 레아라…….”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다면 인간은 뿔뿔이 흩어져 마족에게 패배할 것이다. 혼미해진 정신으로 왕비의 이름을 부르는 황제의 말엔 집착조차 느껴졌다. 그는 그때 지금처럼 마족에게 살해당했던 왕비를 대신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니냐롯트는 어빌리터를 향한 증오와 마족에 대한 복수에 미치기 전 그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아가타를 정찰하러 나가던 상냥한 손길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황제는 소중한 자를 잃은 충격에서 여태껏 벗어나지 못했다.

“니냐롯…….”

그런 그의 눈이 마침내 그녀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니냐롯트를 향해 뻗던 손이 추락했다. 아버지의 입에서 들어보는 이름은 그녀를 지칭하는 명사 하나가 그렇게나 소중한 것이었나 사무치게 깨닫게 한다.

“아바마마, 제발…….”

니냐롯트는 율폰이 원망스러웠다. 과연 증오의 연쇄가 끊기고 시대는 새로운 방향을 열어갈 수 있을까. 부족한 게 많은 그녀는 그가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한 황제는 곧 숨을 거두었다.

“크흑. 저하, 피하십시오!”

왕녀마저 죽이기 위해 연이어 가하는 화염 마법에 루이나가 튕겨 나갔다. 니냐롯트는 또다시 마족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 순간 쿨타임이 끝난 비키가 화염을 둘러 자신을 지키며 율폰의 검붉은 화염과 대치했다.

“화마의 군주, 더 이상 죄를 저지르지 마. 부탁이야.”

이젠 기회가 없다. 단 열 개의 소중한 화염이 그녀의 무기다.

“닥쳐라, 셀로니아. 죄를 저지른 건 너희다. 너희 붉은 머리만 보면 역겨워서 토가 나오지. 똑같이 태워서 없애버리겠어.”

예정에 없던 황제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한 율폰이 생각을 포기했다. 불타 사라질 때까지 모두 죽이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솟아오르는 증오를 감당하지 못한 율폰은 마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 초록색 눈, 저 붉은 머리, 저 셀로니아 가문의 피가 그를 증오에 미치게 만들었다. 폭주하는 증오는 마기에 심취한 마족을 방심하게 만든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때처럼 똑같이 태워버리는 거야.”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느긋하게 계획을 이루는 철두철미한 율폰은 그 모든 성격이 거짓말인 양 광소했다. 인간이 끔찍하게 밉다. 셀로니아 가문은 물론 인류의 편에 서있는 저 마왕의 부활체도. 마왕이 했던 모든 거짓말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율폰, 이제 그만해! 네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아무것도? 증오를 쥐여주며 이 힘을 준 건 너다. 이 힘으로 인간을 모두 죽이면 끝날 일이야. 그걸 바로 해결이라고 말한다, 마왕의 부활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율폰의 불꽃은 왕궁 전체를 잡아먹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이 전부 죽거나 핵을 깨뜨리기 전까지 마족은 증오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듯하다.

마족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핵을 파괴한 직후밖에 없단 말인가. 혀를 찬 류제가 염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강화한 신체로 불길을 막아섰다.

루이나가 하늘바람의 부축에 제정신을 차리는 동안 혼자서는 검붉은 화염에 밀리는 비키의 곁에 유네가 나란히 섰다.

렌을 위해 마족과 싸워보겠다고 참전을 결심한 유네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족을 두려워하고 기간트리카 없이는 마기에 꼼짝 못 했다.

최후의 방어막마저 강제 해제되었어도 유네는 바람에 힘입어 공기를 순환하고 화염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미…미안해, 비키 양. 내가 이 정도밖에 도와주지 못해서. 내가 더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서있는 것만으로도 고작이야.”

“네가 있어서 나도 버틸 수 있는 거야. 말했잖아. 넌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해. 그 강함이 나도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비키가 유네의 손을 맞잡았다. 비키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일부가 불이 붙어 타버린 유네는 감정을 형용할 수 없어 울먹거렸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분명해도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렌 때문이겠지.

겁쟁이인 유네도 물러서지 않는데 화마의 군주와 마주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비키는 물론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다. 비키도 가족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듯이 복수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그 조그마한 마음가짐의 변화는 분명 새로운 길로 향할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류제, 부탁해!”

기간트리카가 없는 상황에서 키아나트리체의 기둥이 되어야 할 왕녀를 지킬 사람이 비키밖에 없는 지금 화마의 군주에게 접근 가능한 이는 ‘강화’ 어빌리티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류제뿐이다.

“최선을 다해볼게.”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검붉은 화염 속에 뛰어 들어간 류제는 맨몸으로 화마의 군주와 대적했다. 온갖 강화로 몸을 보호하지만 마기의 중심지는 산소도 부족한 데다 뜨거운 불길은 비명 소리처럼 닿으면 찢어질 듯 아팠다.

화염 속에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던 율폰은 인간인 류제를 내려다보았다.

“날 막아서지 마라, 류제 신리.”

수마의 군주가 왜 율폰을 조심하라고 한 건지 알 것 같다. 기나긴 세월에도 그의 증오는 무뎌지지 않았다. 오백여 년 동안 날을 갈고 갈아 이때만을 위해서 복수의 칼날을 숨겨온 것 같았다.

“인간을 다 죽이면 그다음에 넌 뭘 할 거지?”

“…….”

“인간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죽여서 남는 게 뭐야. 마족은 인간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종족 아닌가?”

“닥쳐. 인간인 네가 뭘 안다고 헛소리야.”

인간을 증오하지만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종족이 마족이다. 그건 모두 마왕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족쇄에 매여버린 그들을 류제는 해방해 주고 싶었다.

역사책 속에서나 상상할 법한 먼 옛날 어빌리터가 받았을 핍박은 상상을 초월했겠지. 이유도 없이 인간들에게 죽어야 했고 살아남아 봤자 제대로 된 삶이 아니었을 거다.

“인간인 너는 절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 절대로!”

좋아서 특별한 게 아니고 좋아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닌데 그 어쩔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은 이따금 두려워한다. 혹은 부러워하며 혹은 시기한다. 누군들 그런 마음은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먼 옛날 내가 어빌리터로 태어났더라면 지금의 너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현재는 아니다. 시대는 변했다. 사람들도 변했다. 정과 반의 방향이 화합의 길을 만들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들은 미신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배려하는 법을 습득했다. 자신과 다른 타인을 상처받지 않게 할 방법을 배웠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배워가고 있다.

“난 인간이 이전보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여겨.”

“한순간의 꿈에 불과해. 그 인간의 손에 죽어버린 주제에 어불성설이야! 어서 빨리 인간을 증오하고 그 증오로 우리를 이끌어. 그게 마왕이 할 일이니까!”

케케묵은 증오에 짓눌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율폰은 의견에 동감하지 않는 류제를 거침없이 공격했다. 기간트리카 보호 없이 맞서는 화마의 불꽃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키는 류제는 이 고통이 저 마족의 절망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류제 신리. 너는 우리들의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증오를 이어나가라!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거대한 화염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이 류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살갗을 뚫는 것처럼 물려 반대편에 처박힌 류제는 곧바로 율폰의 불꽃에 의해 멱살이 잡혔다. 목이 졸린 류제는 숨을 헐떡거렸다. 염화 때문에 공기가 부족한데 숨까지 막히니 도리가 없었다.

일순 류제의 동공이 붉어지며 샐쭉하게 조여졌다. 그 눈빛을 본 율폰이 비식거리며 미소 지으려는 때, 감히 황가의 비보인 퇴마의 검을 집어 든 비키가 율폰의 몸을 잘라냈다. 동시에 유네의 도움을 받아 회오리를 둘러 율폰의 불꽃에서 몸을 지킨 그녀가 류제 대신 화마의 군주와 대치했다.

불꽃과 불꽃의 싸움. 오백여 년에 걸쳐 살아남은 괴물과 열여덟 어린 소녀가 맞붙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힘을 합쳐 복수의 순간을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년은 자신이 저지른 업보의 산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네 이놈……!”

자신만만하던 율폰의 화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증오는 부족하지 않다. 다만 마왕이 허락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드라코니스 입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의 명령을 따르는 입자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밖에 없다.

류제 신리, 감히 마왕의 힘을 이런 식으로 사용한단 말인가!

“미안해. 네 증오를 잠재워주지 못해서. 하지만 방법이 없어. 너희들은 그렇게 태어나 버렸으니까.”

의식적으로 마왕의 힘을 발휘하는 류제가 묵묵히 말했다.

반드시 이겨 보이고 말리라. 오백 년의 세월을 이렇게 끝낼 수 없었던 율폰이 불꽃을 이끌어내며 발악했다. 하지만 그 증오가 강하면 강할수록, 원망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강해지면서도 부러지기 쉬운 마족은 비키가 내지르는 불꽃을 두른 검에 의해 단번에 핵을 저격당했다.

뒤로 물러섰지만 끝내 검 끝은 율폰의 핵에 닿고 말았다.

“이럴… 수는…….”

육체를 되찾기 전부터 율폰의 핵은 금이 가있었다. 너무나 강대한 증오를 품은 율폰을 인간이 이겨낼 수 있도록 해준 로라 하놋의 안배였을까? 퇴마의 검이 율폰의 핵을 치자 자극을 감당하지 못한 핵이 바스러졌다.

혼을 붙잡는 핵이 파괴되자 육체가 무너졌다. 율폰은 결국 자신을 또 죽이고 마는 인간을 저주했다.

“어리석은 인간. 셀로니아 가문은 항상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구나. 너희의 죄가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저주한다. 나는 죽어서라도 너희를 저주한다!”

“저주해도 좋아. 그러니 망령은 이제 그만 사라져.”

“나는 망령인가? 너희들이 만들어낸 죄의 덩어리가 아닌가? 나는 운명을 받아들였어. 어째서 내가 패배했지?!”

그에게 있어 오백여 년의 역사 동안 맞이한 패배는 이것으로 세 번째다. 최후의 패배가 지금, 두 번째가 마왕의 혼을 훔쳐 달아나는 로라 하놋과 대치했을 때, 그리고 첫 번째는 그가 마족이 되어야만 했을 때이다.

오백여 년 전, 숨어있는 어빌리터들을 찾아내 끔찍한 일을 자행하던 셀로니아 가문의 서자로 그가 세상의 빛을 보았다.

가주의 불륜으로 생긴 자식으로 하인의 일기장에 한 줄 기록된 채 간신히 목숨만 보전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저택에 감금당하다시피 숨겨졌다. 그 저택 안이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당시 마녀사냥에 심취해 야만적이던 셀로니아 가문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날 때부터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타고났다. 알비노라고 하던가. 돌연변이인 그는 본가 사람들에게 악마의 자식이 아니냐는 수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부분의 셀로니아 가문 인간이 그를 마땅찮게 보았지만 특히 가주의 장남이 그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행해지는 폭력은 우습고 교활하며 날이 갈수록 괴롭힘이 악랄해졌다.

장남은 그더러 마녀라고 지칭했다. 마녀를 고문할 때 썼던 인두로 그의 다리를 지지거나 손톱을 뽑겠다며 의자에 묶어서 어른 흉내를 낸 적도 파다하다.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런 그가 셀로니아 가문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병든 어머니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보는 그녀는 늘 조금만 참으라며 눈물을 훌쩍거렸다.

착한 율폰은 참았다. 인내가 계속되자 참아왔던 감정은 어느새 불꽃으로 발현했다. 뜨거운 불꽃은 그가 아닌 모든 것들을 태웠다.

“알겠니? 절대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가 가진 마녀의 능력을 들켰다가는 온몸의 피가 빠질 때까지 고문당하다가 죽을 것이라며 오열했다.

“어머니, 숨길 수가 없어요. 자기 마음대로 나와버리는걸요.”

“율라그라이프,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해 주렴. 이 집안은 절대 마녀의 힘을 용납하지 않아. 너마저 잃으면 나는… 나는……. 제발.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면 된단다. 돈을 모아 이곳에서 탈출하는 거야. 너도 나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자꾸나. 착하지?”

그는 그녀의 전부였다. 그는 어머니와 약속했다. 그 이후로 마녀의 능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화가 나면 불꽃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양손에서 흘러나오곤 했다.

아무도 그에게 능력을 컨트롤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숨기기 급급했다. 다른 마녀들은 이 능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녀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든지 제대로 되지 않아 막막했지만 그는 살기 위해 비밀을 지켰다. 자신을 숨기고 꾹꾹 억눌렀다. 마음을 차갑게 두면 어빌리티는 폭주하지 않는다.

그가 장남이 하는 짓거리와 본가 사람들의 시선을 인내하며 어빌리티를 참을 수 있었던 건 단 한 사람 덕분이었다. 그건 어머니가 아니었다.

“얘, 너 뭐 하는 거니?”

어빌리티를 억누르고 있던 율폰에게 어느 귀여운 소녀가 다가왔다. 그와 동갑이었던 셀로니아 가문의 장녀다. 붉은 머리카락과 샐쭉한 초록색 눈동자는 사랑을 먹고 자라 반짝반짝 빛났다.

“그냥 있었어.”

황급히 손을 숨긴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살피는 소녀의 시선에 견디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능력이 들키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또 오빠가 때렸니?”

“…….”

“진짜 못됐다니까.”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소풍 바구니에는 그를 치료할 물품이 들어있었다. 그루터기에 그를 앉힌 소녀는 익숙하게 상처를 돌봤다. 갈수록 느는 생채기가 속상한 건지 소녀가 툴툴거렸다.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화를 내. 한 대 정도는 때려도 돼. 내가 모르는 척 해줄게.”

“그럴 수는 없어.”

“겁쟁이구나.”

겁쟁이? 그저 본가 사람들과의 트러블에 말려드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이 저택에서 그에게 적의를 품지 않은 사람은 손에 꼽았고 본가는 저 소녀가 유일했다.

셀로니아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장남은 셀로니아의 다음 가주가 될 사람이다. 본가에 밉보이면 그와 그의 어머니는 저택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못하다. 저택 밖에서는 제대로 된 보살핌도 못 받고 금방 허약해질지도 몰랐다.

“아파.”

“차가운 얼굴을 해가지고선. 아픔을 느끼는 건 살아있는 거라고 했어. 기왕 아픈 거 숨을 쉴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해. 율리.”

“…볼일은 그것뿐이야?”

또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으니 그는 미리 도망가려는 구실을 찾았다. 소녀는 오늘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 상처에 붕대를 고정시킨 그녀는 고개를 들며 씩 웃어 보이더니 코끝을 들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림을 배우고 있다고 했댔지.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집안사람들은 다 바쁘다고 시간을 안 내주지 뭐람. 난 가만히 있어주는 모델이 필요한데.”

“그래서?”

“눈치도 빠르면서 모르는 척하긴. 오늘부터 네가 내 그림 모델이 되어줘. 넌 오빠와 다르게 눈이 예뻐서 딱이야.”

바구니 안에서 작은 연습장을 꺼내 든 소녀가 짓궂게 말했다. 막무가내 부탁이지만 그는 소녀의 부탁은 되도록 들어주는 편이었다. 대화할 상대가 마땅히 없던 그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어준 데다 소녀의 부탁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를 괴롭히는 마녀의 능력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오빠는 네가 더 잘나 보이니까 질투하는 거야. 딴에 지기 싫다는 거지.”

“글쎄. 그냥 싫어하는 것 같은데.”

“에잇, 움직이지 말아 줘. 지금 중요한 부분이야.”

소녀는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스케치북에 밑그림을 그렸다. 그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율폰은 그가 만일 본가 사람이고 그녀가 그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을 했다. 그가 더 위대한 마녀 사냥꾼이 된다면 셀로니아 가문에 인정받을 수 있을까. 장남의 자리가 탐이 났다.

세월은 흘러 인물화를 향한 소녀의 알랑거림이 뜸해졌을 무렵, 성장한 소녀는 종종 마녀사냥법을 배우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그의 어머니의 병세는 갈수록 짙어졌다. 저택에 남아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그는 장남이 집을 비우는 날이 늘어 상처가 줄었다. 그래도 소녀의 부재는 싫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 심심했다. 소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이 불쾌해진 장남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 길로 마녀사냥을 떠난 어른들을 따라나섰다가 자신 때문에 마녀를 놓친 데다 큰 상처까지 얻은 장남이 당분간 근신하게 된 것이다.

요양을 하는 동안 동생만 가르치는 어른들을 보고 열등감이 든 장남은 죄 없는 그에게 분풀이를 했다.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그가 화를 참아냈다. 장남의 괴롭힘이야 익숙하지만 지금은 소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게 문제다. 소녀를 본 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감정이 억눌러지지 않았다. 쌓인 감정을 풀어낼 수 없으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나오지 마. 들어가라고. 반응하지 마!”

멍 들어 엉망이 된 얼굴로 화를 참아내는 그는 아무도 없는 땅에 엎드려 불꽃을 흘려보냈다. 비가 와서 축축한 땅이 불에 닿아 안개가 되었다.

몸이 활화산이 되는 것 같아도 그는 참았다. 이 능력마저 들키면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저택에 있는 건 싫지만 적어도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자신을 짓누르면서까지 이곳에 있으려는 연유가 뭐지?”

낮고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자의 인기척에 깜짝 놀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스산한 나무 위에 뿔과 날개가 달린 괴물이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소리를 지르려던 율폰은 이내 그것이 쓸모없는 짓임을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함께 있고 싶어서요.”

그는 인계로 나온 마왕에게 머뭇거리며 답했다. 뿔과 날개가 달린 괴물 이야기는 몇 년 전에 소녀가 해준 적이 있었다. 마녀가 부리는 하수인, 악마라고 하던가. 그때는 그냥 책에 나오는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마녀처럼 실존했을 줄이야.

“어째서 함께 있고 싶지? 어차피 너는 인간들과 어울릴 수 없을 텐데.”

마왕은 웃었다. 주변 공기가 진득하게 그를 탐색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악마가 그에게 적의가 없어서일 것이다.

아아, 악마는 마녀를 따른다고 했던가? 마녀의 능력을 발현한 그와 모종의 계약을 원해 접근한 것임을 염려한 율폰은 악마를 경계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만이면 상관없어요. 그리고…….”

이 저택의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지만 단 한 명 셀로니아 가문의 장녀는 가족처럼 상냥했다. 색소가 없이 태어난 배척받는 알비노에 마녀의 능력까지 부여받은 그였지만 그녀는 하얀 머리를 보고도 불길하다 징그럽다 말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연약한 그를 잘 보살펴 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과연 그럴까?”

마왕은 가소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샐쭉한 붉은 동공이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았다.

“네가 노력한다고 한들 인간은 널 받아주지 않아.”

“전 마녀 같은 게 아닙니다. 당신과 계약을 하지 않을 겁니다.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다른 마녀에게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마왕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마녀’라느니 ‘계약’이라느니 그런 단어에 집착하며 킬킬 그를 비웃어대기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입을 떼기 전 마왕이 먼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숨기는 거지? 이 저택은 마녀 사냥꾼의 것이니 너는 너를 죽일 적들 한가운데 있다. 네 통제를 벗어나는 그 능력은 곧 인간들에게 들통나고 너는 믿었던 자에게 살해당할 테지.”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악마 나으리.”

다른 건 몰라도 소녀를 폄훼하는 말은 참지 못한 그가 빈정거리자 마왕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악마라. 나는 악마인가. 결정하는 건 너야.”

나무에서 내려와 유령처럼 다가온 마왕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을 물었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그는 마왕의 등에 솟은 세 쌍의 박쥐 날개를 보았다.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 끝에 마왕을 밀쳐낸 그가 목을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악마인지 구원자인지는 네 선택에 달려있다.”

마왕이 낸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마왕은 그 샐쭉한 붉은 동공으로 내려다보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어째서 저자가 앞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는 그는 마왕이 사라지는 순간 남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수상스럽지만 셀로니아 가문에 있을 수 없게 하는 거라면 용서 못 한다. 평화를 해치는 건 악마 쪽이 아닌가. 목을 매만지며 투덜거리던 그였지만 마왕의 경고는 곧 사실이 되었다.

장녀가 오랜 마녀사냥 여정에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그녀는 발에 잡힌 물집을 보여주며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을 만끽했다.

“마녀는 봤어?”

“못 봤어. 어른들이 그러는데 간발의 차이로 놓쳤대. 엄청 강한 마녀인가 봐.”

내심 안도한 율폰은 움찔하며 감정을 털어냈다. 그는 마녀가 아니다. 인간이란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마녀에게 동정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모를 소녀는 하루 내내 어떤 모험을 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당당하게 마녀를 사냥하는 이야기는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의 운명을 뒤흔든 사건은 일어났다. 셀로니아가의 마녀 사냥꾼들이 놓친 마녀가 동료의 복수를 위해 저택에 침입한 것이다.

“빌어먹을 셀로니아 가문.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마녀가 숨어든 곳은 그와 소녀가 밀회하던 곳이다.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니 처음 마녀와 마주한 자는 그 둘뿐이었다.

“이 더러운 마녀가!”

“더러운 건 너다, 셀로니아!”

셀로니아 가문의 본가 핏줄임을 증명하는 붉은 머리칼은 마녀의 심기를 자극했다. 손을 쓰지 않고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기묘한 능력을 가진 마녀가 날붙이를 띄워 소녀를 노렸다. 주변에 있던 날카로운 쇠가 적의를 가지고 그들에게 향했다.

소녀에게 향하는 마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가 끈질기게 마녀를 붙잡았다. 겁에 질린 소녀는 다리의 힘이 풀려 벌벌 떨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마녀는 장녀를 죽일 기세로 능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하지 마!”

마녀 때문에 소녀를, 동생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손에서 강한 화염을 이끌어냈다. 심지가 다 타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불길은 순식간에 마녀의 몸을 타고 번졌다.

“너…너 설마……! 어째서 우리를……!”

마녀는 비명을 지르며 능력을 이용해 불꽃을 두른 그를 떨쳐내려고 했다. 끔찍한 비명 소리 끝에 마녀는 재가 되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장남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는 식식거리며 숨을 골랐다. 뒤를 돌아 소녀를 살핀 그는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불이 나왔어. 마…마녀야? 율리, 너… 마녀였어?”

몸에 붙은 불꽃이 그의 육신만을 태우지 않았다. 저건 마녀의 능력이다. 소녀가 질겁하며 물러섰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덧 역겨움으로 변해있었다.

“감히…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마녀 주제에 셀로니아 가문에 숨어들다니. 역시 그 여자는 더러운 피였어. 오빠가 옳았던 거야!”

그가 목숨을 구해준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마녀 사냥꾼의 피를 이은 뼛속 깊은 셀로니아 가문 사람이었다.

“안 돼. 제발… 제발 그러지 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마녀는 죽어야만 해.”

소녀의 눈에 장남의 눈에 비쳤던 광기가 똑같이 보였다. 셀로니아 가문은 인간을 해치는 마녀를 죽인다. 그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게 마녀 사냥꾼 집안이다. 그게 당시 어빌리터가 인간들에게 받고 있던 시선이었다.

마녀가 죽을 때 지른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른들에 의해 그가 붙잡혔다. 소녀의 증언을 들은 어른들에 의해 짐승들을 제압할 때나 쓰던 쇠 올가미로 목이 짓눌린 그는 충격에 말을 잃었다.

“마녀야. 저 괴물이 마녀였어. 무서워. 엄마아……!”

배신당한 것처럼 울면서 부모에게 안기는 소녀를 보며 그는 현실을 인식했다. 왜 그녀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잠잠해지는가 싶었더니 또 나왔군! 감히 그 여자가 셀로니아의 피를 더럽혔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죽여도 죽여도 나오는 이 더러운 마녀의 피. 어딜 이 저택에 발을 디디려고!”

사람들은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어머니를 억지로 끌고 나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게 했다. 붙잡힌 율폰과 주변의 탄 흔적을 보고 능력이 탄로 났음을 짐작한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마녀를 낳은 자에겐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 셀로니아가 사람들은 믿었기에 그녀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

“율…율…ㅍ…….”

어머니는 그가 보는 앞에서 참수당했다. 잘리는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따뜻한 피가 그의 볼에 닿았다. 서자인 그를 안주인이 아니꼽게 보았기 때문에 본가는 그걸 기회로 삼은 것일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다음은 너다.”

고작 이런 능력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부질없다. 감정을 참아왔던 그는 터져 나오는 능력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치솟는 불꽃을 보고 당황한 틈에 저택에서 빠져나온 그는 침통함을 삼켰다. 자신에게 향하는 적의와 경멸하는 눈초리, 어머니의 주검을 뒤로한 채 달렸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대대로 마녀사냥을 해오던 셀로니아 가문에게 어린 율폰은 쉬운 상대였다. 포위망이 좁혀왔을 때 숨을 죽이던 그를 발견한 사람은 가장 신이 나서 달려온 셀로니아 본가의 장남이었다.

그가 마녀이며 마녀사냥의 연습 상대로 적합한 이임을 약삭빠르게 짐작한 장남이 불이 붙은 석궁을 쏘았다. 화살을 쏠 때 보았던 장남의 웃는 얼굴이 진절머리 났다.

적중이 빗나간 석궁은 머리 대신 그의 목을 꿰뚫었다. 화살촉에 피부가 뚫리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 이대로 죽을 거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조그마한 평화를 사랑했을 뿐인데 결국 이런 결말을 강제하는 인간을 저주했다. 그자의 말이 맞았다. 인간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몸에서 발현한 불로 한밤중 산이 밝게 빛났다. 불길 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증오를 말미암아 마왕이 남겨놓은 힘으로 부활했다. 그는 그대로 셀로니아가의 장남을 죽여 복수했다. 진짜로 악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오빠……. 오빠를 주…죽인 거야?”

불꽃을 보고 달려온 소녀와 악마가 마주했다. 그는 악마처럼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고 하하 웃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손을 뻗은 그는 그렇게나 소중하던 소녀의 목을 졸랐다. 전부 타서 없어져 버려라.

“율…라그라이프.”

그때부터는 기억이 없다. 어느덧 고개를 드니 낯선 장소에 서있었고 그의 앞에는 마왕이 있었다. 마왕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사했다.

옛 이름을 버린 그는 마왕과 인계를 떠났다. 뒤를 돌아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 중턱을 바라본 그는 너머에 있는 감옥 같던 셀로니아 저택을 떠올렸다. 언젠가 증오의 셀로니아 가문을 자신의 힘으로 없애리라.

그러나 율폰에게 있어 가장 죽이고 싶던 셀로니아 가문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그는 소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증오를 다른 인간들에게 풀어냈다.

마족이 되며 인간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던 것인가. 어차피 인간들이란 다 똑같아서 누굴 죽이든 상관없다고 치부했다.

그를 배신한 셀로니아 가문의 장녀는 죽은 오빠 대신 가문을 잇고 성장해 나갔다. 그 가문은 마족이 최초로 살해당하기 전까지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그는 그들의 변모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백여 년 전 마왕이 죽은 후, 마왕의 죽음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그의 탓이라 여긴 율폰은 이번에야말로 셀로니아가를 멸족시키기로 다짐했다. 그를 따르는 화마의 군단을 이끌고 셀로니아 저택에 당도한 그는 그날 그 장녀와 똑 닮은 소녀만큼은 죽이지 못했다.

왜일까. 역시 죽이지 못했다. 그의 과거를 증명하는 초상화를 발견했을 때 마주한 그녀와 똑같은 눈과 머리칼을 가진 소녀에게 차마 손댈 수 없었다.

그 초상화. 셀로니아의 피를 이었지만 마녀의 힘 때문에 역사에 남지 못한 그는 처음 보는 것이다. 그 장녀가 그렸던 그림이 지금껏 남아있었던 것인가.

이제 증오밖에 남지 못한 그의 마음에 찌꺼기처럼 남은 응어리는 정체불명의 감정으로 섞여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다. 증오로 이루어진 정체성이 흔들린다. 그래서 그는 그때 비키 셀로니아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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