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7)
“한눈팔 정신이 있나 보지?”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빙결 어빌리티로 수벽에서 벗어난 네네 슈만이 얼음 창으로 심장을 꿰뚫었다. 나콜렙시의 주변 살갗이 얼어붙은 덕분에 타격감이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귀찮다. 수마족과 최악의 상성을 가진 인간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번거롭지만 사천왕이라는 자존심이 있으니 물러설 수 없다. 인간들을 방해하는 임무만 수행하던 나콜렙시는 플로냐도 멋대로 가버렸으니 네네 슈만을 죽이기로 했다.
힘을 숨겼던 수마의 의지대로 이 일대를 잠식한 마기가 독해졌다. 표면장력으로 똘똘 뭉친 물의 감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세라는 상태 변화에 이상을 감지했다.
“네네, 떨어져!”
네네 슈만의 무모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세라가 있는 힘껏 외쳤지만 그것이 네네의 귀에 닿았을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세라가 직접 가려고 했지만 메인 부스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수벽에 잠긴 인간들의 기간트리카에 인자를 의도적으로 침투시켜 중요 부분을 망가뜨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다간 상급 정신계 마법을 발휘하는 ‘수면 인자’의 영향하에 놓여버린다. 시간이 부족해. 그녀는 떠오르는 몇 가지 방법 중에 단 하나를 선택했다.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세라는 기간트리카에 남은 미사일 세 발을 마저 장전했다.
“루비니, 부탁합니다.”
“넵, 맡겨주십시오!”
보통 인간의 세 배는 큰 늑대 수인화 상태로 물을 부르르 털어낸 루비니가 크게 도약했다. ‘수인화’ 기간트리카 모드를 적용 중인 루비니는 세라와 다르게 부스터에 의존하지 않았다.
“슈만 중위님, 이쪽으로.”
루비니가 발판을 만들어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네네 슈만도 공중에 떠있을 수 있게 하는 메인 부스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추락하기 직전 달려오는 루비니를 발견한 네네가 간신히 수분을 모아 발판을 빙결시켰다.
“의미 없는 발버둥.”
나콜렙시의 중얼거림에는 인간을 무시하는 한심함이 담겼다. 물의 인자에 붙어있는 수분을 일부 빼앗아 재정렬하는 것에 불과하다. 남의 것을 탐내서 공격하는 인간의 성질과 똑 닮았다. 하지만 세차게 흐르는 물은 빼앗긴 분자의 결합을 깨뜨린다.
수마의 강한 힘으로 발판이 날아가 버리기 전 ‘수인화’ 상태인 루비니가 네네 슈만을 붙잡고 얼음 발판을 디뎠다. 그 순간 수마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세라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반동을 망가진 부스터가 감당하지 못해 세라도 뒤로 추락했다.
나콜렙시는 감흥이 부족했다. 그녀를 자극할 유의미한 공격은 없다. 마족이 된 이래로 해왔던 일의 연장선상이다. 인간일 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느꼈던 시간 낭비와 같다. 마족인 그녀가 지금껏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발버둥은 한없이 나약하다. 그것이 짜증이 치밀 정도로 지루했다.
수마는 세라가 가진 최후의 물리 무기인 미사일을 의연하게 저지시켰다. 물에 잠긴 미사일은 나콜렙시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침몰하고 수막 속에서 터졌다. 견고한 방어막이 버티는 한 근접전이 아니면 상처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은 나콜렙시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 네네 슈만이 만들어낸 얼음들을 모아 뾰족하게 깎아내렸다. 미사일이 먹히지 않자 혀를 차고 주시하던 세라는 백마의 군주의 손에 죽었던 루시에가 떠올랐다. 좋지 못한 생각이 스친다. 대포처럼 강한 힘으로 얼음송곳을 쏘아 올린 공격은 인간 하나는 가볍게 꿰뚫을 만큼 강력할 것이다.
“잡았습니다!”
그 전에 루비니가 네네를 낚아채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마에게서 한 걸음 멀어질 다음 발판이 부재하다. 얼음을 이용한 나콜렙시의 공격은 네네와 루비니를 타깃으로 삼았다. 네네는 어빌리티 쿨타임이 뼈아팠다. 수마의 물 마법을 다시 빙결시킬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루비니, 뒤를 보세요!”
게으를지라도 공격에 머뭇거림이 없는 나콜렙시가 인자에 잠식된 얼음송곳을 발사했다. 루비니가 네네를 구출한 지 불과 일이 초 만의 일이다. 동물적인 감각이 극대화된 루비니는 발판이 없는 상태에서 몸을 비틀어 네네를 지킬 방안을 강구했다.
몸집이 큰 루비니의 자신감은 불완전했다. 이대로 가다간 두 사람 다 치명상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긴 네네 슈만은 루비니를 밀치고 자신이 발판이 되어 루비니를 먼저 지상으로 보냈다.
“중위님!”
추락하는 루비니가 손을 뻗었지만 어찌해 볼 수도 없이 네네는 수마의 공격에 정통으로 당했다. 네네 슈만이 고통의 비명을 삼켰다. 그녀가 얼린 얼음으로 만든 송곳이 기간트리카 헬멧을 뚫었다.
“네네!”
수마에겐 네네가 만들어낸 얼음들이 아직 남았다. 짧은 시간 차로 먼저 착지한 루비니가 지면을 달려가 땅에 처박히는 네네를 낚아챘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공격을 피한 루비니는 치료를 위해 세라에게로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루비니의 오른쪽 기간트리카 파츠와 헬멧에도 얼음송곳이 명중했다. 부상은 심각하지 않지만 헬멧이 파괴당하면 정신계 마법에 노출된다. 조그마한 반격으로 백장미의 정예 팀이 반전투불능이 되어버리다니. 금이 간 부분을 손으로 막은 루비니는 그저 분했다.
“슈만 중위님을 부탁합니다. 부족하겠지만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루비니… 부탁합니다.”
세라도 한계인 루비니의 상태를 모를 수 없었다. 이토록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다. 늑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루비니 아로즈네그는 자신들을 무릎 꿇리려 드는 수마의 군주를 노려보았다.
과연 저것이 군주급. 류제 신리가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함께 병마의 군주를 쓰러뜨렸다는 말을 들어서 포르테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은 그녀도 군주급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포기가 절로 나오는 압도적인 실력 차가 존재하다니 두렵고 원통하다.
“네네, 괜찮아?”
“눈이 옹이구멍이냐? 이게 괜찮아 보여?”
“그러게 왜 안 어울리는 짓을 해?”
걱정이 가시지 않는 세라가 끝내 울먹거렸다. 네네의 기간트리카 헬멧에 박힌 얼음을 따라 피가 흘러나왔다. 정신계 마법을 경계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네네의 헬멧을 해제한 세라는 루시에 때처럼만 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유리에, 루시에에 이어 네네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악우라 칭할지언정 네네는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치료할 시간을 버는 루비니는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마족을 상대하자니 명중률이 줄고 지치는 간격이 짧아졌다. 수면 인자가 기간트리카 안으로 침범해서 눈꺼풀이 닫혀갔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허억…헉… 제길, 망할 니켈 자식. 왜 이렇게 강해?”
“너희들이 나약한 거란다. 너희는 스스로의 뿌리도 잊어버린 한심한 마녀에 불과하니. 그런 너희보다 내가 약할 이유가 없어.”
“이 주둥이로 물어뜯기 전에 아가리 닥쳐.”
네네가 만들어내는 발판이 없어 수마가 쏘아대는 얼음 공격을 밟고 크게 도약한 루비니는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 해제와 재장갑을 통해 망가진 부스터 수복을 시도했다. 간신히 한쪽 부스터를 살려낸 루비니는 추진력을 이용해 돌진한 후 거대한 늑대 주둥이를 벌려 수마의 몸뚱이를 씹어 먹었다.
수마의 육체를 통과하면서 재생되는 부분을 살피려던 루비니는 마족의 시선이 세라와 네네에게 고정된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나콜렙시의 목적은 여전히 ‘빙결’ 어빌리티를 가진 네네 슈만이었다.
“제길, 제기랄. 안 돼. 세라 선배, 피하십시오!”
수마의 의도를 파악한 루비니가 빠르게 통신을 전달했지만 상처 치료에 몰두하느라 반응이 느려진 세라는 수마의 공격이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야 알아차렸다. 부상당한 네네를 뒤늦게 피신시키려던 세라는 자신을 밀치는 네네 슈만에 놀랐다.
“멍청한 세라 밀로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세라가 다치면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목숨을 잃는다. 치료하는 내내 한쪽 눈으로 수마를 주시하던 네네는 봉합이 덜 된 왼쪽 눈을 막고 일어섰다.
세라를 등 뒤로 보낸 그녀는 타이밍 좋게 쿨타임이 끝난 어빌리티를 있는 힘껏 끌어냈다. 모든 힘이 부활한 건 아니라 어설펐지만 네네의 앞에 거대한 빙벽이 만들어졌다. 나콜렙시의 얼음송곳이 빙벽을 뚫고 네네의 기간트리카 심장부를 찔렀다.
또 같은 광경이다. 세라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모습을 매번 지켜보기만 해야 하다니. 무력감에 잠긴 마음은 슬픔을 껴안았다. 도대체 그녀가 뭐라고 세라를 깔보고 미워하던 네네마저 희생까지 해야 할까. 나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닌데.
이러는 이유는 믿고 의지하던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그것 때문에 삶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을 잃어 대신하려 한 것인가? 그런 건 네네 슈만이라는 인간과 더 어울리지 않았다.
“하.”
한마디 한숨을 뱉은 네네 슈만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세라가 무릎걸음으로 네네를 받았다. 수마의 공격은 남았지만 희생이 무색하더라도 네네를 살리고 싶었다.
“네네! 살아있어? 대답해! 멍청한 건 바로 너야. 네네 슈만, 이 바보가!”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세라 밀로니를 지키는 날이 오다니. 분명 서큐버스에게 혼이 나간 거다. 멀어버린 왼쪽 눈 때문에 어질해진 네네 슈만이 속으로 혀를 찼다. 동시에 수마에게 무시당한 루비니가 나콜렙시가 노리는 두 사람을 막아서며 으르렁거렸다.
“네 상대는 나야, 수마의 군주.”
“끈질기네. 그대로 도망갔더라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제 길도 못 찾는 멍멍이구나.”
“내게 도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어.”
“주인을 잘 지키는 개로군. 그걸 어리석다고 일컫지.”
세라는 침착하게 네네 슈만의 가슴 쪽 기간트리카를 장갑 해제했다. 심장을 보호하는 부분이 뚫린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피는 보이지 않았다. 네네의 군복 주머니에 있던 단단한 물체 덕분에 얼음송곳이 피부를 찢지 못한 것 같다.
파편이 박혔을지도 모르니 군복 주머니를 뒤진 세라는 그곳에서 나온 물건을 꺼내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부서진 하트 모양 로켓 안에는 세라가 강제로 고양이 수인이 되어있을 때 사진이 들어있었다.
“이걸 왜 가지고 있어.”
“닥쳐. 저년이 억지로 쥐여줘서 가지고 있는 거니까. 잡담으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치료나 해.”
수면 마법 때문에 급격하게 피곤해진 네네 슈만이 눈을 질끈 감았다. 괜히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트 모양 로켓은 파견 나갔던 제립학교 수신제 임무 중 포르테의 억지로 퀴즈 대회에 나갔다가 우연찮게 우승해서 얻은 것이고, 안에 넣을 게 없어서 이전번에 루비니가 장난으로 보내준 세라의 고양의 사진을 넣어놓았을 뿐이다. 딱히 둘 곳이 없어서 그냥 가지고 다녔던 거라 별 이유 없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아, 그런 거 아니라고!”
“후후, 알았어.”
“이상한 오해 하면 죽여버린다.”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아득했던 세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이상한 네네가 그저 감사했다. 로켓을 쥐고 네네 슈만의 잃어버린 왼쪽 눈을 치료하는 세라는 그녀의 생존이 승기의 열쇠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
자신을 막아선 루비니를 무자비하게 짓누르던 나콜렙시가 일렁거리던 물 인자를 잠재웠다. 하찮은 인간들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녀는 당당하게 인간의 편에 선 류제를 못마땅하게 내리깔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나를 놓친 후 나콜렙시를 저지하던 팀원들과 합류한 류제가 지상에 착지했다. 갑작스레 한쪽 눈을 잃은 데다 기간트리카 복구까지 시간이 걸릴 듯한 네네와 루비니를 대신해 그가 나설 차례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나… 그 마족은요?”
“놓쳤습니다. 악몽을 통해 도망갔어요. 다들 무사하신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비니가 지면에 처박혔다. 해롱해롱 다시 일어서려던 그녀가 철퍼덕 땅에 턱을 찧었다. 혀를 차던 네네 슈만이 비관했다.
“보는 대로 엉망진창이지.”
“제가 시간을 벌어볼게요.”
“애송이에게 신세를 지다니 나도 여전하군.”
“부탁합니다, 류제 학생.”
안도한 네네 슈만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자로 뻗었다. 세라의 바람대로 그의 등장은 승리를 위한 작은 가능성이었다. 류제가 미나를 쫓는 동안 세 사람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이다.
편지의 내용대로 수마의 군주의 핵의 위치를 아는 류제는 그들보다 더 앞선 출발선에서 나콜렙시를 죽음까지 몰아넣을 것이다.
“류제 신리.”
마왕이 아닌 자와의 재회가 달갑지 않은 나콜렙시는 기분이 나빠졌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다시 만나도 그녀만의 마왕이 아닌 류제 신리는 시답잖은 이유를 들먹이며 비협조적이다.
어차피 마왕으로 돌아오면 이따위 모든 것들은 전부 부질없는 것이 될 텐데 왜 고집을 피울까.
“죄송합니다, 세라 선배님. 우리는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루비니 소위. 상대는 군주급이지 않습니까. 혼자서 충분히 잘 버텼습니다.”
“하지만 류제 신리는 선배 담당 학생 아닙니까. 하아, 분합니다. 제길.”
인간으로 돌아온 루비니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이 간 기간트리카 헬멧 사이로 조금씩 침입하고 있는 수면 인자 때문에 눈이 절로 감기는 데다가 동물적인 감에 털이 삐죽 설 정도로 마족의 독한 살기는 그녀조차 겁에 질렸다.
“병마의 군주도 해치운 사람이니까요.”
“화나지만 현재로선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군.”
조금만 깊게 박혔어도 뇌가 망가질 뻔했던 네네 슈만도 하늘이 빙글빙글 돌자 차라리 눈을 감았다. 상실된 왼쪽 눈은 형태를 되찾더라도 시신경까지 돌아오려면 몇 년을 들여 꾸준한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네네를 치료하던 세라는 탐지 어빌리티로 자신들을 상대할 때와 다른 수마의 마기를 감지했다. 수마가 화가 난 이유는 류제 때문이다. 마왕의 부활체인 류제를 원하기 때문에 작전본부에 들이닥쳤을 터. 그런 그가 인간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현실이 마족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겠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본 세라는 류제에게 짧은 통신을 남겼다.
“류제 학생,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부디 무사하세요.”
“걱정 마세요. 제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요.”
류제가 통신을 종료했다. 비교적 부스터가 멀쩡한 류제가 물의 장벽을 두른 나콜렙시와 마주했다. 초승달 해먹에 누운 사람처럼 기지개를 켠 나콜렙시가 반갑지 않게 인사했다.
“안녕, 마왕의 부활체. 눈빛이 달라졌구나.”
네네 슈만 살해에 실패한 나콜렙시는 도망가 버린 플로냐 대신 자신이 류제를 나라카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나콜렙시는 마왕이 돌아오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상성이 나쁜 어빌리터가 누구든 아무래도 좋다.
“또 만났군. 저번엔 얌전히 물러가 줬는데 이번엔 썩 얌전하지 않네.”
“나는 마왕님을 위해서만 움직여. 얌전하다느니 인간의 기준으로 말하지 마.”
삐친 아세미처럼 부루퉁해진 나콜렙시가 외견에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마기를 펼쳤다. 인간인 아세미와는 다른 그녀는 살기가 담긴 물 마법으로 그를 둘러싸는 잔인한 짓을 행했다. 배신자는 따로 있는데 류제가 배신한 것처럼 나콜렙시의 눈에는 나무람이 담겼다.
“플로냐는 왜 괴롭힌 거야?”
“플로냐?”
나콜렙시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미나의 마족으로서의 이름임을 류제도 알아차렸다.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은 미나라는 정체성이 가짜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어 마음이 쓰렸다.
“괴롭히지 않았어. 내가 마왕으로 부활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했을 뿐.”
“좋은 방법이라니 그런 건 없어. 애초부터 이 증오의 시작은 인간들인걸.”
슬픈 말이다. 인간이었던 어빌리터가 마왕의 손에 마족이 된 이유는 이들이 보이는 인간을 향한 증오와 미움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이 과거에 벌였던 만행에 이기지 못한 어빌리터는 마족이 되어야만 했다. 미나도, 이 앞에 있는 소녀 형상의 마족도, 그가 쓰러뜨린 병마의 군주도 마찬가지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겠지. 매듭을 짓지 않으면 영원히 이 굴레를 끝내지 못해. 마왕이 부활하면 마족은 다시 인간을 죽이고 인간은 언젠가 마왕을 죽이겠지. 그럼 또 지금처럼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거야? 몇백, 몇천 년을 주기로 계속?”
나콜렙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야 대단히도 무료한 나날이 되겠지. 삶의 목적도 찾을 수 없고 무력하게 왕좌에 앉은 마왕은 기억조차 흐릿해진 머나먼 과거의 증오에 사로잡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인간들에게 그 증오를 풀어내 저주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야. 네가 그렇게 우리를 만들었는걸. 마왕님을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해.”
기억을 잃은 마왕은 그 굴레가 불합리하다고 여길지언정 마왕이 되면 쓸모없어질 걱정이다. 네네 슈만이 만들어놓은 얼음을 다 써버린 나콜렙시는 이번엔 끌어올린 지하수로 뱀의 형상을 만들었다.
마왕의 손으로 만들어진 되다 만 용, 반푼이 용인이 마족이다. 마족은 불완전하다. 그러니 마왕은 마족에게 증오를 에너지로 삼는 삶의 원동력을 심었다. 다시는 인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인한 육체를 일깨워 두 번째 삶을 선사한 마왕은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들을 그런 식으로 지켜주고자 했다.
과연 그 방법이 맞았던 걸까? 나콜렙시는 왕좌에 기대 마족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따분함을 분명히 보았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이 굴레의 시작이자 끝인 마왕은 영원히 물레를 굴리며 끝나지 않을 베를 짜서 마족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 가야 했다.
“네가 바뀐 건 다 그 인간 여자 때문이야.”
상실의 기억에 나콜렙시가 가만히 혀를 내둘렀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마왕이 짜던 베를 단칼에 자르고 그를 해방시켜서 문제가 된 거다. 인간을 부정하고 인간을 증오하던 마왕은 불행하게도 인간이 되어버렸다. 전생이 저지른 업보는 산처럼 쌓여있는데 베를 짜는 사람이 없다.
그 업보를 인간인 그가 갚을 수 있을까? 차라리 마왕이 되는 게 나았다. 마족의 존재 의의마저 부정하려는 마왕의 부활체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들을 만든 게 과거의 나라면 지금의 나는 너희들을 놓아줄게. 이기적이라고 하겠지만 이대로 두면 굴레는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 나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매듭짓고 싶어.”
“그건 안 돼. 나는 마왕님이 보고 싶단 말이야. 분명 넌 외로워질 거라고!”
어리석은 소리를 자랑스레 늘어놓는 류제에게 붉은 동공을 빛낸 나콜렙시가 물의 뱀으로 그를 물었다. 이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기간트리카를 망가뜨리고 그대로 재워 나라카로 데려갈 것이다.
사랑하는 마왕님을 위해서야. 마왕님이 돌아오면 지루함도 무력함도 사라지게 노력하자. 그래, 인간을 더, 더 죽이는 거야. 그러면 증오도 다시 차오를까?
“제길!”
물처럼 형체가 없는 마법과 싸우는 건 류제에게 불리했다. 그의 ‘강화’ 어빌리티로는 액체를 파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르테 들라크루아처럼 기압으로 형체를 터뜨리거나 분산시킬 수 없으니 그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기간트리카 컨트롤로 수마의 공격을 피했다.
“그렇게 발버둥 치고 바꿔보려고 해도 항상 똑같아. 계속 그래왔어.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아.”
“그럼 이번에야말로 바꾸면 돼. 노력하다 보면 분명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
“불가능해. 네가 이 전쟁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네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걸 알아버린 인간들은 너도 죽이려고 들걸?”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해 줄 수는 없겠지. 그건 욕심이란 걸 나도 알아. 내 곁에 날 믿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충분해. 그건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잖아.”
류제는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마왕의 부활체임을 알고 미나가 마족 서큐버스라는 걸 알아챈 렌은 끝내 날 위해 이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 렌은 무슨 수를 써서든 내가 인간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던 거야. 그 마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고 걱정할 거 없다며 당당하게 그와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류제 신리, 마족이 사라진다 해도 너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과, 하물며 어빌리터들과도 다르게 살아야 해. 너는 혼자 고립되겠지. 왕조가 멸망하더라도 너만 남아서 맥수지탄(麥秀之嘆)조차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릴 거야.”
“마왕이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야.”
“그렇지 않아. 마왕은 하나 남은 용인의 혼을 품은 자. 그 혼을 가진 너는 인간과 달라. 평범하게 늙고 다치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 그러다 진짜 네 힘을 깨달았을 때 너는 이미 혼자가 되어버렸을걸.”
마왕의 혼이 윤회를 타기 위해서는 은의 말뚝이 있어야 한다. 천 년 전에 인간으로 부활한 마왕도 다시 태어나기 전 윤회의 말뚝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다음은 로라 하놋이 사용해 류제 신리로 태어났다.
인간의 몸과 닮았을지라도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처음 용인의 힘을 마주하고 육체가 힘의 영향을 받아버린 류제는 이제는 그 말뚝이 없으면 윤회는 불가능하다. 혼자만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야 했다.
“지금의 너는 절대 몰라. 그 미래는 현재가 아니니까.”
“그건 그때 생각해 보면 돼. 오지도 않은 미래를 왜 무서워해야 하는 거지?”
“네 말은 전부 이상일 뿐이야. 허황된 치기. 그 힘을 가진 이상 너는 우리와 함께해야만 해.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다 널 위해서라는 걸 왜 무시하는 건데!”
류제가 진정한 힘을 되찾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고 그가 과연 플로냐의 도움 없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백 년 후에도,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 그를 믿어주는 인간은 모두 죽어 사라졌는데 혼자만 남아 그 의리를 지킬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너는 또다시 외로워진단 말이야.”
울부짖는 나콜렙시는 드디어 류제를 붙잡았다. 똬리를 튼 물뱀은 류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집을 불려나갔다. 수면이 가까웠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기간트리카 안으로 침입하는 물 인자에 부스터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벗어나기 위해 장갑을 해제하면 수면 마법에 당할 거다.
“나는 마왕님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알아. 그러니까 얌전히 내 말을 들어.”
“넌 지금의 나를 가장 모르는 거 같은데.”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도 류제는 자신만만했다. 헬멧에까지 물 인자가 침입하기 전 그는 귓가에 들리는 도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류제 군, 지금이야!”
날카로운 바람이 물의 뱀을 갈랐다. 류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뒤에 있는 유네에게 반응하기 전 그가 나콜렙시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세미보다 더 가는 이 팔로 지금껏 얼마큼의 인간을 죽여왔을까. 기록된 것만으로도 셀 수가 없었다.
“인간일 때의 기억은 천 년의 세월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야. 먼지 한 톨도 되지 않을 만큼 무의미해.”
나콜렙시는 류제를 뿌리치지 않았다. 물의 뱀이 다시 형상을 되찾아 류제의 배후에 도사렸다. 그를 가두려는 물의 뱀을 이번에는 비키가 화염구로 막아섰다.
“많이는 못 버티니까 빨리 끝내!”
“고마워.”
감사 인사를 전한 그는 한쪽 팔의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고 흐트러진 나콜렙시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수마의 군주의 핵의 위치는 바로 갈비뼈 아래에 숨은 오른쪽 폐. 그녀를 보면 귀여운 막냇동생 아세미가 떠오르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와 저지르려 하는 업보는 옳지 못했다.
“인간인 나는 너희들을 설득할 수 없는 거야? 절대로 마족은 인간을 용서할 수 없어?”
류제가 스스로 기간트리카 헬멧을 해제했다. 맨얼굴로 보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빠져든 나콜렙시는 붉은 동공을 마주하고 죽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소유하던 마법 인자가 모두 류제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증오로 더럽혀지지 않은 드라코니스 입자를 둘러 기간트리카를 수복하고 위협적으로 몰아붙이는 이 공기는 전생의 마왕과 달랐다.
“말했잖아. 우리는 증오에서 태어났어. 마왕조차 인간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그 감정을 잃었지. 인간을 용서하는 마족은 존재할 수 없어.”
“과거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야.”
“잘못하지 않았어, 마왕님은. 나라쿠바라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아니, 그는 잘못했어. 그때는 최선이었겠지만 마왕은 그 힘을 현명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 건 없어. 그때의 분노와 증오와 슬픔은… 인간을 좋아했기에 더 컸어. 그러니까 내가 곁에 있어준다고 했잖아! 인간을 믿으면 안 돼. 좋아하게 될수록 상처받는 건 너야!”
“상처받겠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심장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거 알아.”
“그런데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내게 아픔을 줄지언정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마저 사랑스럽게 보이는 걸 어떻게 해.”
쓸쓸해진 류제는 그대로 나콜렙시의 폐를 뚫었다. 상냥하게 귀 뒤로 넘겨주던 손은 이제 그녀의 생명을 위협했다.
나콜렙시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과연 저런 마음을 가진 류제가 마왕으로 부활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나콜렙시가 되겠지. 마왕이 없다면 그녀는 끔찍하게 긴 세월을 더 이상 살아있기 싫었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해 버렸구나.”
인간을 사랑하는 마왕과 인간을 증오하는 마족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녀의 눈에서 마법 인자가 아닌 물이 흘러내렸다. 류제의 손에는 천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나콜렙시의 핵이 쥐어졌다.
“나라쿠바라, 이제… 내가 없어도 되는 거네.”
나콜렙시가 쉽게 포기하자 류제는 작게 동요했다. 마지막으로 류제를 안아보는 나콜렙시는 마족의 품이라서인가 차가웠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마가릿의 때와 마찬가지다. 백마의 군주도 사라지기 전 그렇게 말했다.
“외롭지 않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이제 외롭지 않은 거야?”
그녀들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뭘까. 멀쩡한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어버린 자일 텐데. 지금 와서 마족의 존재를 부정하며 쓰러뜨리는 나를 쓰다듬어주는 이유가 뭘까.
“오빠는 내가 없으면 안 되네.”
어디선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류제는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작은 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기억 속 미소는 아세미도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그가 쓰러뜨리려고 하는 저 소녀의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그들은 모두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아있던 거였어.
“…미안,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언젠가… 어떤 날이 왔을 때… 외롭지 않겠어?”
“괜찮아. 인연이 또 다른 길을 만들어주겠지.”
그가 손에 힘을 주니 작은 핵은 맑은 가을 하늘 밤껍질이 갈라지듯 깨졌다.
마지막으로 보는 눈동자는 먼 옛날 인간이었던 마왕이 따스하게 그녀를 바라봐주던 것과 닮았다. 이처럼 광활한 아침의 빛이었지. 아아, 피곤해. 지금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개운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었으니 됐어.”
핵이 소실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류제가 삶을 이어준 마족들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했지만 그런 걱정은 괜찮을 듯하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미련이 없어진 나콜렙시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인간으로 다시 시작한 마왕이 행복하다면 지루한 증오의 연쇄는 맛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가타에 있는 율폰이 너희 왕을 죽일 거야. 조심해. 나와는 달리 그의 복수심은 누구보다 날카로우니.”
사라지기 전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은 모두 먼지가 되었다.
그녀도 옛날 모든 일에 무료함을 느꼈던 마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쉬고 싶을지도 몰랐다. 핵이 파괴당한 마족은 드라코니스 입자가 되어 영혼까지 사라진다. 영원한 휴식을 취하러 떠난 그녀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안녕, 시에스타. 잘 자렴.”
류제는 수마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먼지조차 바람에 흐트러져 사라졌다. 긴 세월 동안 힘겨웠던 그녀에게 안식이 주어졌다. 류제는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해서 더 슬펐다.
나콜렙시가 죽자 군주급의 마족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지에 남은 서큐버스들이 지레 겁을 먹었다. 봉인 마법이 해석되고 대마족 결계가 고쳐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그들은 잠든 군인을 찾아 억지로 악몽을 비집고 들어가 피신을 감행했다.
마지막까지 더 많은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 땅 밑이 분주한 가운데 수마를 쓰러뜨린 류제가 홀로 떠서 멍하니 있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비키. 하하, 미안. 이겼는데도 기분이 이상하네.”
물의 뱀이 사라진 후 류제에게로 왔던 비키는 그의 눈물을 못 본 척했다. 마족을 죽인 그가 흘리는 눈물은 그녀가 아는 슬픔과 달랐다.
“류제 군, 무사해서 다행―”
“유네, 쉬잇.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자.”
대활약해 준 유네를 곧바로 칭찬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함께 있어준 자의 영원한 소실에 류제는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증오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그의 힘은 점점 동화했다.
“등급1의 수마, 토벌 완료했답니다.”
“하아아, 살았다.”
“역시 저번에 봤을 때부터 느꼈습니다. 대단한 제자를 두셨군요, 세라 선배.”
수마의 마법 인자가 사라지자 각성제를 주입하며 버티던 루비니가 지쳤다며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나머지 서큐버스들은 수마의 군주가 소멸하자 몸을 숨겼고 몇몇 도망가지 못한 등급 낮은 서큐버스들이 군인들에게 토벌당했다. 이대로 봉인 마법 안쪽에서 무차별하게 살해당하나 했더니 한시름을 놓았다.
“세라 밀로니의 분수에 맞지 않은 놈이지.”
“얄밉지만 사실이야. 이미 내 손을 벗어나 버린 작은 새인걸. 많이 커버렸지.”
눈물을 닦고 땅으로 내려오는 류제를 세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사악한 마왕의 부활체라기 보단 먼 옛날 키아나트리체 최초의 황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노아에서 처음 마족을 쓰러뜨렸던 본 적도 없는 모습이 그려질 만큼 성스러워 보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성장할 사람은 그 말고도 있었다. 트루 엔딩으로 갈 수 있는 전쟁 루트의 주인공이자 메인 히로인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가 그렇다.
류제가 드라코니스 입자를 무의식적으로나마 컨트롤해 내듯, 이전까지만 해도 어빌리티를 사용하려면 우울하고 슬픈 기억이 필요했던 니냐롯트는 자신의 어빌리티를 수용할 수 있게 되면서 감정 컨트롤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녀가 자신의 힘을 부정하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마족을 미워하는 만큼 어빌리터를 미워했다. 왕비 시해 사건 후 어빌리티가 발현한 니냐롯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황제에게 미안했다.
그 우울함과 죄책감은 더욱 그녀의 몸에 흐르는 기를 자극했다. 참고 참을수록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뇌우는 그녀를 더한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제는 뭐랄까, 해탈했다고 해야 하나. 어린 시절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려던 사랑의 갈구가 만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현재를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은연중에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아버지가 사주었던 비녀를 하고 있는 그녀는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그녀의 진심을 그가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포기와는 다르다. 부서져 버려 한번 포기하려고 했던 그녀의 비녀를 렌 지미가 고쳐준 건 분명 황제와 그녀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떠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다치게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칫, 저 글방도련님이 말은 잘하지.”
“루이나, 나도 부탁한다.”
근거리 이동 어빌리티를 가진 루이나는 미노타 포로들을 빠르게 기절시켜 나르기에 적합했다. 니냐롯트가 부탁한다면야 루이나는 힘의 200%를 끌어낼 용의가 있었다.
“인간을 베어야 하는 건 저도 사양입니다!”
빠른 속도로 발검하여 적들 틈으로 이동한 그녀를 비롯한 친위대, 미노타의 왕자 하늘바람 그리고 니냐롯트는 각자 가진 무기로 서큐버스의 꼭두각시 짓을 하는 미노타의 포로들을 기절시켰다.
마족에게 물려 구울이 되지 못하도록 기절한 포로들을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끌어 넣는 하늘바람을 보자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들의 기합, 마족들의 웃음소리, 부딪히는 소리, 폭렬음. 머리 위에는 등급1의 수마의 핵을 파괴한 류제 신리가 있었다.
“등급1의 수마를 토벌했답니다!”
“서큐버스 무리를 이끌던 그 녹색 머리칼의 마족은?”
“행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러선 것 같습니다.”
미나와 대치하던 류제 신리가 수마를 처치했다는 건 그녀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래도 가장 큰 걱정이었던 미나 플로리아가 물러서고 군주급의 마족을 하나 더 해치웠으니 그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늘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라우스의 자식들은 진정할 수 있는 겁니까?”
옆에서 그 보고를 들은 하늘바람이 주저앉을 기세로 안도했다. 미노타의 왕궁에 처박혀 책만 읽던 그에게 이번 전쟁은 지옥보다 더 힘든 곳이었다. 빨리 고난이 끝나기를 바라는 하늘바람에게 니냐롯트는 모진 현실을 직시시켰다.
“모릅니다. 마족들에게 정신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그래도 살아만 있다면 분명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한차례 돌풍이 불었다. 군주급 마족이 사라지자 통제가 되지 않는 서큐버스들은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어빌리터들이 정신계 공격에 당하지 않자 기로가 막히기 전 미나처럼 악몽의 통로를 찾아 빠져나갔다.
“하늘바람이여, 마족들이 물러갑니다.”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하늘바람이 주저앉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숨겼다. 왕궁에서도 도망치기 바빴지 세뇌당한 사람들과 직접 마주해서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마족과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적의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던 하늘바람에게 지독히도 트라우마를 상기시켰다.
“괜찮을까요? 쫓아가서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산 사람이라도 살리는 게 우선입니다. 무리해서 호랑이를 물어뜯을 필요는 없습니다.”
군주급 마족이 둘이나 동시에 쳐들어온 전무후무한 침략전을 방어한 것까진 좋았지만 본부 기지는 끝내 반파되었다. 마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막사를 보호막으로 썼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끝내 도망가지 못한 마지막 하나 남은 마족의 핵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제1 작전사령본부의 군인들은 사이렌 소리가 멈춘 그제야 부상자와 사망자를 들어 날랐다.
류제는 그 한가운데에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생겼다. 과거 자신이 만들어낸 증오의 존재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류제는 지금까지 해치워 왔던 마족들과 이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묵념했다.
새삼 깨닫고 말았다. 마왕의 부활체인 그에게 있어서 마족을 죽인다는 건 자식을 죽이는 것과 비슷하겠지. 그런 그들에게 마땅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풀어내지 못할 영원의 증오를 심어준 것도 죄스럽다.
“미나 플로리아는 어떻게 되었지?”
지시 사항을 외치며 군인들을 통제하던 니냐롯트가 구석에 서있던 류제를 발견하고 물었다. 고개를 돌린 류제는 짧게 웃었다. 다시 만난 미나는 그에게 업보를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업마(業魔)였다.
“잡지 못했어. 전쟁을 멈추고 미노타군의 세뇌를 피하고 싶으면 나더러 나라카로 오래.”
“나…나라카 말입니까? 그곳은 마족들의 나라가 아닙니까.”
점점 더 넘어서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현실에 하늘바람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이곳으로부터 남서쪽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건너 어둠에 싸인 토지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새까만 마기들로 뒤덮여 자라나는 식물마저 괴물처럼 변형되었다는 그 나라. 마족들이 득시글거릴 그곳에 가야 한다는 말을 류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병마에 이어 수마의 군주까지 쓰러뜨린 데다 가장 강한 서큐버스까지 기지에서 몰아낸 키아나트리체의 새로운 영웅 류제 신리는 정말로 강했다. 거기에 나라카까지 오라는 말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는 그를 보자니 하늘바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렇게는 못 될 것 같아 시무룩해졌다.
“빤히 보이는 속셈이군.”
마왕의 부활체인 류제를 나라카로 부른다. 호세마타 요새에서 실패한 작전을 이렇게 써먹을 셈인가. 니냐롯트가 혀를 찼다.
무시하려고 해도 이대로 계속 포로들이 난동을 부린다면 키아나트리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꼴이 된다. 미노타는 여전히 마족의 손에 있다. 이 습격은 끝에 가선 결국 류제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안 좋은 소식은 하나 더 있어. 화마의 군주가 폐하를 시해하기 위해 아가타 왕궁으로 향했대.”
분명 나콜렙시가 죽기 전에 한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마족들 중에 유일하게 그녀는 그가 새롭게 태어나 찾은 행복을 존중해 주었다.
율폰이라는 이름이 어째서 화마의 군주를 뜻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짐작하자면 아마 그의 기억이 전보다 더 전생에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날 만났던 형체가 없는 그 흰머리 소년을 떠올린 류제는 셀로니아 가문의 사람이었다던 그자의 증오는 어째서 아가타의 왕실을 향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뭐라? 폐하? 아…바마마를 말인가? 그들의 목적은 나일 텐데. 서큐버스가 아닌 샐러맨더라면 대마족 결계를 통과할 수 없어.”
니냐롯트는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의문을 떠올렸다. 귀족파 무리가 미노타의 뒤에 마족이 있을 거라는 걸(마족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녀의 뜻과 어긋날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았을 방법에 대한 의심. 다른 이를 노리는 이유는 의문이지만 류제의 말대로라면 미노타에 이어 키아나트리체 왕실도 큰 위험에 빠진다.
“그 정보의 출처는 마족일 터. 정녕 거짓은 아니겠지.”
“거짓이라면 더 좋을 정보지. 짚이는 게 있어?”
“아마도. 화마의 군주는 비키 셀로니아가 먼 옛날 셀로니아 가문의 인간이었다고 했었던가.”
“…그가 바로 의심의 도화선이었지.”
대마족 결계를 속일 수 있는 서큐버스가 아니라 화마의 군주가 폐하의 목숨을 노린다니 한 가지 가장 바라지 않는 경우가 떠오른다. 귀족파 그들과 손을 잡은 게 마족, 등급1의 화마일 경우에 한해서다.
“당장 아가타로 가서 확인하겠다.”
어마마마에 이어 아바마마까지 마족의 손에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군주급의 마족이,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키고 미나 플로리아만큼 치밀한 존재가 남았다.
군주급 화마와 싸우려면 이만큼의 병력이 다시 필요하다. 아가타 왕궁에는 직속 기사를 제외하면 기간트리카군이 없다. 성안에 배신자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하물며 조심하라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부상자 처치가 끝나면 모두 철수한다. 군장을 꾸려라. 기지를 옮길 것이다!”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제1 작전사령본부는 제 능력을 잃었다. 대부분의 막사가 전투 후유증으로 회복 불가능. 이능력 전투가 펼쳐진 곳이라 폭격을 당한 것처럼 엉망이 된 데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마저 드물었다.
서큐버스에게 조종당했던 포로들은 또 어떤가. 이럴 바엔 아가타로 돌아가 재정비를 한 후에 다음 기지를 물색하는 편이 낫다.
“으으…….”
“아파. 살려줘…….”
“으으윽. 누가 제발…….”
마족들의 공격과 수마의 에너지 드레인에 당한 군인들과 알라마니 기술관 사람들의 앓는 소리는 어느새 당연한 잡음이 되었다. 네네 슈만을 치료해 준 것에 그치지 않고 의무병들을 모아 중상을 입은 사람들을 돌보는 세라는 동아리 활동으로 가르쳤던 응급처치를 지시하며 온 힘을 다해 상처를 치료했다.
갖은 고생을 해온 알라마니 기술관 사람들은 다행히 사망자가 없었지만 기술관장은 에너지 드레인에 심하게 당해 기운을 차릴 때까지 요양이 필요해 보인다. 기술관장에게 쪽지의 암호를 물어보고 싶었던 류제는 다음 기회를 엿보았다.
적어도 해가 뜰 무렵에는 군장을 챙겨 이곳을 떠날 것이다. 분주한 가운데 세라를 도와 깨끗한 물을 긷고 따뜻한 모닥불을 피워주던 비키를 발견한 류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다음 상대는 등급1의 샐러맨더다. 지금은 방향이 달라졌지만 화마의 군주로 인해 몰살당한 가문의 생존자인 그녀의 복수심을 친구로서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비키, 잠깐 시간 있을까?”
“할 일 없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 말고 너도 도와. 당장 고양이 손도 빌려야 할 때인데. 나서서 움직이지 못할망정.”
“화마의 군주가 아가타로 향했어. 너도 선발 부대로 갈 거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비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서 보이는 진지함을 보고 무언가를 깨닫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스스로 마왕의 부활체라고 말했다. 쓸쓸한 일이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마족들과 어떠한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까 전 군주급 수마와 싸울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정말로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구나 싶었다.
“그렇겠지. 미안, 믿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네가 마족을 아무렇지 않게 쓰러뜨리니까 잊게 되어버려.”
“아냐, 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그는 굴레를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아주 오랫동안 그의 곁을 기다려준 수마의 군주까지 보내준 것이다. 이는 팔다리 하나를 잃은 것보다 더한 상실감을 주었다. 다음에 마주할 마족은 얼마큼의 상실감을 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라. 그가 마족이 되었을 땐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었겠지. 고작해야 미들 스쿨에 입학할 때쯤일까.”
그녀는 어릴 적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여름방학 때 보았던 화마의 군주의 어린 모습도 떠올려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의 날이 찾아왔는데도 달갑지 않았다. 몰라야만 하는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실 뒤에 있는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기 꺼려지기 때문일까.
“류제, 너처럼 나도 진실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키는 항상 하고 다니는 가족사진이 담긴 펜던트를 꼭 쥐었다. 그녀는 화마의 군주와 마주해 복수를 마치고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때가 머지않았는데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네게 필요한 것을 줄 수는 있지.”
류제는 주머니를 뒤져 쪽지를 비키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화마의 군주와 싸워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비키여야 할 것이다.
“이거 읽어둬.”
“이게 뭔데?”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연구한 군주급 마족의 핵의 위치야. 화마의 군주의 것도 있어.”
류제가 화마의 군주의 핵이 표시된 쪽지를 보여주었다. 비키는 당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과 작년 여름방학 때와는 다르게 화마의 군주를 공략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얻었다.
“고마워.”
중요할 때에 등을 맞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복수에 눈이 멀었던 과거의 자신이 변덕을 부려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었던 게 복수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끔 돌아오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모를 일이구나. 힘을 얻은 비키는 안쓰럽게 웃었다.
* * *
작년 봄, 니냐롯트와 친위대의 손에 소멸한 줄 알았던 병마 페스트의 왕이 살아있었고 그를 막기 위한 전투에서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전사하였다는 전언이 멜가로스크를 통해 아가타로도 도착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왕궁 안 회장은 혼란과 무질서로 빈민가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나라카에서 호세마타 요새로 귀환 중이라던 들라크루아 대령이 어째서 펠노아에 있었던 것이오? 류제 신리도 마찬가지요. 그대가 왕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며 호세마타 요새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시오, 멜가로스크 자작!”
“요새에 도착해 대령과 만나 펠노아로 향한 모양이지요.”
“그 시간 동안 펠노아까지 이동이 가능합니까? 아무리 어빌리터라지만 ‘그녀’처럼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 당장 알아보세요.”
“왕녀의 술수인지도 모르지. 꼭두각시 주제에 머리를 쓰는군.”
그들의 의문을 공통분모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설마 그녀와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처리하려던 속셈을 눈치챘단 말인가? 얌전히 손안에서 농락당하는 장난감인 줄 알았는데 남몰래 간교한 짓을 벌였다니 발칙하다. 한시라도 빨리 없애는 게 옳았다.
“큰일 났습니다!”
이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도 전 어떤 귀족 가문의 종자가 회장에 정신없이 뛰어 들어왔다. 무례를 무릅쓸 만큼 그는 파급력이 강한 정보를 쥐고 있었다.
“어젯밤 미노타 국경 근방 제1 작전사령본부에 마족의 떼가 습격해서 반파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서큐버스 열두 마리와 등급1의 수마를 토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사상자가 오천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규모면 기지에 남아있던 병력이 대부분 소실되었을 거라 예상됩니다.”
귀족파 중 가장 동요하는 자는 멜가로스크 자작이었다. 남서방위본부에 있던 그도 펠노아에서 있었던 병마족 토벌에 류제 신리가 참전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고 정보를 얻기 위해 오늘 아침 아가타에 도착했다.
“뭐라? 반파? 제1 작전사령본부는 왕녀가 있는 기지가 아닌가. 등급1의 수마라면 타고시아 해변에서 ‘러다이트’의 실험을 도왔던 그 마족이지?”
“폐하께서는 이 사실을 인지하셨나?”
“예, 가장 먼저 예문하셨습니다.”
“반응은?”
“피해 규모만 칙문하셨습니다.”
“니냐롯트 왕녀의 상태는 어떤가. 기지가 반파되었으니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겠군.”
“새…생존해 계십니다.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그들은 빤히 보이는 실망감을 삼켰다. 목숨 하나는 끈질긴 년. 전쟁에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는 귀족파는 전전긍긍했다. 등급1의 마족이 펠노아에 침공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또 다른 고등급의 마족이 날뛴 것이다.
그로 인해 니냐롯트 왕녀가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이루었을 테지만 그것조차 실패한 데다가 류제 신리까지 왕녀에게 빼앗겼다.
도대체 그들과 손을 잡은 마족들은 마왕도 부활시키지 않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사망한 것 말고는 되는 일이 없었다.
종자를 내보내고 그들끼리의 공간을 만들어낸 귀족파는 엇갈리는 의견으로 장내가 술렁거렸다.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백작 부인이 짜증스럽게 부채를 접었다.
“역시 더러운 마족 놈들을 믿어선 안 되었던 겁니다. 그 간교한 무리가 우리를 배신할 셈일 지도요!”
“화마의 군주는 어디로 간 거요, 멜가로스크 자작. 이 모든 일은 당신이 주선한 일이 아닙니까.”
“접선을 시도했으니 근시일 내로 접촉할 겁니다.”
악마의 지혜를 빌리고 싶은 사람은 멜가로스크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자리를 비운 율폰은 아직 오지 않았다. 육체를 되찾은 후부터는 인계를 자유롭게 오가지 못한다고 했었나.
하여튼 이대로 인간에게 기운 승세를 뒤집지 못한다면 마족이 패배하고 왕녀는 승승장구한다. 그건 그들이 바라는 게 아니다.
“소란스럽군. 그대들도 제1 작전사령부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지.”
“폐…폐하!”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곳은 짐의 성이니 짐이 어디에 있건 짐 뜻대로이지. 아니면 짐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나?”
회장에 돌연 황제가 방문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간악한 눈동자를 굴렸다.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일을 절대로 황제가 알아서는 안 된다.
국정을 살피면서 귀족파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황제는 목적을 이룰 중요한 도구였다. 귀족파는 마족과 어빌리터를 증오하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허수아비 통치자가 필요했다.
느긋하게 걸으며 귀족파 무리를 훑는 황제는 앞서 한 이야기는 농이라는 듯 수상쩍은 그네들에게 친근히 다가왔다.
“그래서 정녕 이곳에 모여 뭘 하고 있었던 게요.”
“작전사령관께서 사령부 기지 방어에 실패하였으니 마족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혹여나 기세를 탄 마족들로 아가타까지 점령당한다면 버거운 시련이 인류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애국심이 각별하구려. 허나 그를 막기 위해 그대들과 내가 있는 것 아니겠소.”
강한 기간트리카 군대를 소유한 키아나트리체일지라도 수도 아가타가 점령당하면 무너지는 건 삽시간이다. 군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은 어빌리티가 없지만 기간트리카 부대를 움직일 권력이 있었다. 여차하면 니냐롯트 왕녀 대신 황제가 전장에 나설 가능성도 고려 중이다.
“장군들과 기지를 이전할 장소를 물색해야겠지. 제1 작전사령본부는 미노타군을 막기 위해 임시로 마련한 곳이오. 전력 손실은 뼈아프지만 마족이 상대라면 나라카와 가까운 곳에 기지를 세웠어야 했어. 지금은 남서방위본부에서 제1 작전사령부 소속 직할부대를 통제해 주기 바라오. 마족들이 주춤해지면 기세를 몰아 나라카 또한 토벌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폐하.”
멜가로스크 자작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군사권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된 건 나쁘지 않지만 정작 중요한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두 마리 토끼는커녕 사냥꾼이 당하고 만다.
제1 작전사령본부가 무너졌다지만 나라를 멸한다는 고등급의 마족이 몇이나 소멸했단 말이냐. 마족과 손을 잡은 그들이 알기론 군주급 마족은 이제 샐러맨더와 서큐버스, 둘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인간이 승리하고 마왕이 부활하지 못한 채 마족이 사라져버리면 키아나트리체의 다음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니냐롯트가 된다. 그들이 원한 결말과 반대다.
어빌리티를 가진 황제가 탄생하기 전 전쟁에서 왕녀를 처리한다. 마족들은 마왕을 부활시킨다. 류제 신리는 인류의 새로운 영웅이 된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이루고 싶은 귀족파들은 마왕의 부활과 새로운 인류의 영웅의 탄생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지독한 꿍꿍이를 꾸렸다.
* * *
현재 왕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모를 파헤치길 누구보다 원하는 이는 니냐롯트 왕녀였다.
기지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부상을 당한지라 아침이 밝자 니냐롯트는 다친 군인들을 이끌고 아가타로 피신했다. 생존자들이 힘을 합쳐 귀환을 위하지만 부상자들은 물론이고 장비와 남은 식량을 운송해야 해서 상당히 까다로운 실정이다.
마족의 습격에 대비해 이동 인원을 분할하여 모두 아가타에 도착할 때까진 짧게는 수일, 길게는 2주 이상이 걸릴 듯하다.
당시 기지에서 벗어나 산발적으로 흩어져 마족과 상대했던 제1 작전사령본부 소속 기간트리카 대원들은 하룻밤 새 본부가 사라져 귀환할 장소도, 식량 보급도 어려워졌다.
마족들의 목적이 류제 신리이니 그를 탈취할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나 플로리아가 말했던 대로라면 류제 신리가 나라카로 향하지 않으면 미노타가 마족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방법이 희박했다.
화마의 군주가 키아나트리체의 황제를 살해하기 위해 아가타로 향했다는 믿기 힘든 마족의 작전까지 들었으니 이 상황에서 니냐롯트의 최선의 선택은 선두로 서서 아가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군주급 마족을 둘이나 해치웠어도 개선장군처럼 국민들의 환호를 받을 상황은 아니다. 행군하는 군인들을 뒤로한 니냐롯트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측근들과 가장 먼저 왕궁에 도달했다.
간단한 언질만 주었기에 왕도는 붐비지 않았으나 변함없는 키아나트리체 왕궁의 문은 언제나처럼 위용이 넘친다.
옆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하늘바람과 호위인 루이나, 화마의 군주와 대치하겠다 지원한 비키 셀로니아와 그녀와 호흡을 맞출 유네 나르타가 나란히 섰다. 친위대들과 함께하지 않은 건 적들의 방심을 노렸기 때문이다.
“상대는 화마의 군주다. 복수심에 무리하거나 방심하지 말도록, 비키 셀로니아여.”
“네, 사령관님. 물론입니다.”
화마의 군주의 타깃이 될 류제는 나중에 합류할 예정이다. 마왕의 부활이 걸린 가운데 정계까지 얽히기 시작하면 곤란한 건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니냐롯트의 일행이 왕궁 앞에 서자 근위병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문을 열었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작전사령관이 귀환했습니다.”
왕족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시종들의 행렬을 무시한 그녀는 왕궁 안을 거칠게 활보했다. 뒤로는 오랜만에 왕궁에 와보는 비키가 의연한 척 걸었고 오래된 별궁조차 나르타 가문의 대저택보다 훌륭한 왕궁의 화려함에 기가 눌린 유네는 과연 자신이 이런 곳에 와도 될까 긴장을 삼키는 것조차 떨렸다.
버릇처럼 주변을 살핀 니냐롯트는 다가오는 위협에 비해 평화로운 왕궁 내부에 괴리감을 느꼈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비친 무지갯빛 대마족 결계의 상태나 왕실의 분위기를 보았을 때는 이상한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미노타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마족이 숨어든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후드 아래로 어두운 피부를 가린 하늘바람이 시종의 상태나 기사들의 상태를 은근슬쩍 살폈다. 서큐버스에게 세뇌당하면 스스로 생각할 의지를 잃고 서큐버스가 의도한 대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저들의 눈빛이나 움직임에는 의지가 엿보였다.
“세뇌된 것은 아니라는 건데.”
“그래도 인간과 마족이 손을 잡았다는 가설은 모르겠습니다.”
“글쎄. 미노타에는 없소? 어빌리터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썩 무겁다. 전쟁 중이니 시시덕거리며 농담 따먹기나 할 때는 아니지만 어빌리터와 일반인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은 오랜 이전부터 있어왔던 정치적 논란이 담겨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고민해 본 하늘바람이 어빌리터인 니냐롯트에게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본디 미노타는 유목 민족이지요. 바람의 드래곤 라우스의 인도 아래 정처 없이 떠도는 자들이다 보니 부족별로 문화가 다르지만 몇몇 고립된 부족에겐 아직도 어빌리티가 발현하면 마족을 부를 거라 예언하고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오.”
“보호할 수 있으면 보호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고 하더군요.”
미노타는 버려진 동토를 포함해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키아나트리체처럼 도시와 마을을 만들어 머물러 사는 자들보다는 목축 때문에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부족이 대부분이라 허허벌판에 버려진 아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능은 어디서나 두려움을 낳는군.”
니냐롯트가 중얼거렸다.
“3왕자 주제에 괘씸한…….”
주제는 차치하고 감히 외간 남자가 왕녀와 이야기하는 게 탐탁지 않았던 루이나는 한 나라의 대표를 저지할 정도로 무뇌아는 아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받들고 모신 분이니 불평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류제 신리는 마주 섰을 때 그림이라도 되지, 하늘바람이라 하는 저 나약한 무지렁이는 왕자라고 하기엔 기개가 없어 마음에 안 찼다. 내가 류제 신리를 옹호하다니. 루이나는 남몰래 혀를 찼다.
“서두르지. 그대들도 환복하라.”
니냐롯트가 시종을 불러 비키와 유네, 루이나 몫의 정복을 준비시켰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녀의 공간은 떠날 때와 똑같다.
감히 왕녀의 방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은 비키와 유네를 막론하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생처음 여성의 방에 방문한 하늘바람도 키아나트리체 왕궁의 화려함보다는 남성인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방에 들이는 그녀의 태도가 더 놀라웠다.
시종을 따라 며칠 씻지 못해 더러워진 몸을 닦아낸 니냐롯트가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었다. 모든 일이 시급하게 일어나 머리가 못 따라간 하늘바람이 어리벙벙 서있으려니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루이나가 한숨을 팩팩 내쉬었다. 니냐롯트는 아름다운 미모와 선을 가진 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혀를 찬 루이나가 하늘바람에게 면박을 주었다.
“무례하게 뭘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 계시는 겁니까.”
“아…아니, 다시 봐도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다 싶어서…….”
“왕궁에 마족이 숨어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참으로 태평하시군요.”
루이나의 뒤틀린 발언에 하늘바람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호위에게도 무시당하는 건 익숙하지만 아름다움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인류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미노타 출신인 데다 왕위 계승과도 한참은 떨어진 셋째이니 이런 취급이 당연하지 싶다.
“폐하를 알현하러 갈 것이다. 유네 나르타여, 예법은 알고 있겠지?”
“네…네! 어릴 적에 배워두었습니다. 니냐롯트 사령관님.”
“셀로니아 가문의 그대라면 익숙할 것이고. 하늘바람이여, 그대도 따라오시오.”
시종의 손을 빌려 제복을 정돈한 니냐롯트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뒤따르다 발을 헛디딜 뻔한 하늘바람이 후드를 깊게 누르며 물었다.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족이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는데 혼자 있고 싶으시다면야 말리지 않겠습니다.”
낯선 나라의 왕궁까지 와서 만일 그가 미노타의 왕자라는 사실을 밝혀지면 곤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겠지만 마족이 있다는 소리에 하늘바람은 지레 겁먹었다.
“회장에서도 그러실 겁니까? 얌전히 좀 있으십시오.”
상인 가문의 나르타 여식도 예법을 아는데 수상쩍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루이나가 쏘아붙였다.
“임무 중에 전장에서 귀환한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알현을 청하옵나이다.”
황제의 시종장이 알현실 밖에서 삼가 아뢰었다. 허락과 함께 이윽고 문이 열리자 황금과 붉은 양탄자로 장식된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좌에 앉은 황제와 의견을 나누던 귀족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당하게 왕좌로 걸어간 니냐롯트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그녀의 양옆에 있던 루이나와 하늘바람, 그 뒤에 따라오던 비키와 유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귀족파의 우두머리 격인 멜가로스크 자작이 그들을 샅샅이 훑었다. 그의 시선은 붉은 포니테일의 비키 셀로니아에 머물렀다.
“수마의 군주, 병마의 군주를 무찌르고 소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가 폐하의 앞에 귀환했습니다.”
“그대가 맡았던 기지가 반파되었다 들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여건이 부족하여 마족을 저지하기도 벅찼습니다. 하여 장군들과 논의 아래 새로운 장소에 빠른 시일 내 재건할 것을 폐하께 약속드립니다.”
“마족을 무찔렀다고 할지언정 다른 것도 아니라 심부인 작전사령부가 파괴되었습니다. 자랑스레 아가타로 돌아오다니 저하의 자신감이 드높군요.”
“폐하와 알현 중이니 방해하지 마시오. 아니면 감히 대담에 끼어들 만큼 부상자들이 마족과 싸우길 바라는 건가, 백작 부인.”
날 선 시선에 부채를 쥔 백작 부인의 손이 움찔거렸다. 어떻게든 황제의 앞에서 왕녀를 깎아내렸어야 했던 백작 부인은 군사권을 들고 있으면서도 참전을 피하고 아가타 왕궁에 숨어 부와 권력을 만끽했다. 전장에서 구르며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왕녀가 꾀죄죄한 몰골이리라 짐작했건만 여전히 그녀보다 아름다우니 분했다.
“물론입니다. 응당 사령관의 지위에 있다면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지휘부가 없는 사이 인명 피해가 극심해지면 저하께서 책임이라도 지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백작 부인이 부상당한 군을 이끌고 마족을 토벌하는 게 어떻소. 거기 있는 멜가로스크 준장도 어빌리티 없이 군을 통솔하고 있으니 사이좋게 궁 밖으로 나가보시오. 그대가 한 말이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으니.”
“제가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하!”
“그럼 아니오?”
“백작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무리 일국의 왕녀라고 해도 키아나트리체 유일무이한 황족이자 통치자이신 황제 폐하를 보필하는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을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려 괜한 트집을 잡던 백작 부인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어리석은 이와는 나눌 말이 없다. 대놓고 백작 부인을 무시한 니냐롯트는 이번에는 멜가로스크 자작에게로 눈을 돌렸다.
“마침 준장에게도 할 말이 있었지. 펠노아에 병마의 군주가 쳐들어왔을 때 가장 가까운 전력이었던 류제 신리를 어째서 호세마타 요새로 파견했지?”
“그것에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왕녀 저하. 그 때문에 저도 한시바삐 아가타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니까요.”
왕녀의 쐐기가 그를 향할 것임을 짐작한 멜가로스크 자작이 자신은 무고하며 잘못을 저지르는 인물은 왕녀라는 것처럼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라카에 있다던 고 백장미 부대 대대장 포르테 들라크루아 대령이 어째서 펠노아에 있었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펠노아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키아나트리체의 영웅이 전사했습니다. 저하의 보고대로라면 그녀는 나라카에 있었어야 합니다. 무슨 속셈이지요?”
“그녀에겐 내가 비밀로 지령을 내렸소. 그래서 펠노아에 있던 것이오.”
“그거 수상합니다. 군사권을 받자마자 아무도 모르게 들라크루아 대령을 움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폐하를 배신하고 왕좌를 탈취하려는 목적은 아니신지요?”
이때다 싶어서 물어뜯는 저들이 까마귀 떼처럼 수군거렸다. 물론 친어빌리터파인 왕녀와 의견이 맞지 않던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약이 심하시군. 왕궁에만 처박혀 있느라 상상력이 풍부해진 건가. 현실을 알려면 밖에 나가서 상황을 보는 것도 좋소만.”
“지…지금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일국의 왕녀가 나라의 기로가 갈리는 전쟁을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하는 인류의 배신자라고 단언하는 이유가 없지.”
“화를 누그러뜨리시지요, 왕녀 저하. 하지만 그만큼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거취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등급1의 마족을 둘이나 해치운 공적을 지니셨다 하실지라도요.”
역시 저들은 왕녀인 그녀가 황제의 권력을 가질 미래를 두려워한다. 여기까지는 생각했던 그대로다.
“설명해 보라.”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4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