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6) (66/112)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6)

펠노아에서 귀환한 류제와 곧 도착할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의 상처를 보살피기 위해 사령관의 부름을 받은 세라는 지휘실 막사 근처에서 네네 슈만과 잠시 마주쳤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질긴 악연을 세라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네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비비던 네네 슈만은 세라를 무시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라카로 향했다던 그녀가 이곳에 있다니 놀라웠지만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사망했다는 비공식적인 소문을 들었던지라 비밀리에 귀환한 것인가 짐작했다.

세라는 포르테의 사망이 사실임을 직감하고 침울해졌다. 영웅까지 죽고 말다니. 이 전쟁의 끝이 오기는 할까.

제립학교 학도병 신분 대기 병력 인원으로 기지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유네와 비키도 사령관의 부름에 응답했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긴장을 품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는 니냐롯트는 물론이고 류제와 세라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립학교의 인연들에 유네가 무턱대고 반가움을 표했다.

“류제 군! 무사했구나. 걱정했었는데…….”

“유네, 잠시만.”

이 멤버를 보면 제립학교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건 비키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령관 신분인 니냐롯트도 앞에 있고 학생 때처럼 함께 모여 수다를 떨 분위기가 아님을 헤아렸다. 시범을 보여 사령관에게 경례한 비키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실수를 직감한 유네도 따라 경례하고 옆에 자리했다.

왕녀와 세라, 비키, 유네까지. 이 자리에 렌도 있어야 했겠지만 원했던 사람들이 모이자 류제가 천천히 운을 뗐다.

“비키, 네가 왕녀에게 마족이 본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며.”

“어… 응? 아… 그…그래. 저번에 너희들에게 말했던 것에서 어빌리터 한정이라고 가설을 추가했어.”

“이번 전쟁은 마족들이 마왕을 부활하려는 게 목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비키가 잠시 설명을 요구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렸다. 분명 그녀에게 그렇게 보고한 적이 있었는데 류제가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 실수를 한 것 같아 불안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한 가지 더 마왕의 부활에 관해 내가 아는 게 있어.”

각자의 운명에서 눈을 돌렸다간 이 전쟁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자신이 생긴 그는 과연 그녀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위태위태하게 말을 꺼냈다.

“이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나 때문이야. 미나가… 그 의태한 서큐버스가 날 노린 이유도 물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어.”

“마왕과 그대가 무슨 관계라도 있나?”

류제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린 세라가 식은땀을 흘렸다. 후폭풍은 세라조차 감당이 불가능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내가… 마왕의 부활체이니까.”

류제의 폭탄선언에 히로인들은 서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납득할 시간이 절실해 필연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세라는 미나가 마족임을 몰랐고 비키와 니냐롯트는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몰랐다. 유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 듣는 말에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1년간 함께해 온 인간 류제가 마족의 왕이라는 발언이 믿기지 않거니와 상상도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진지한 눈빛에 누구도 운을 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가장 어리둥절한 유네였다.

“에… 뭐? 미나 양이 의태한 서큐버스? 류제 군이 마왕의 부활체? 마족이 인간? 너…너무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뿐이라 하나도 모르겠어. 다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나만 못 알아듣고 있는 건 아니지?”

경악한 나머지 유네는 제립학교에서 있었던 때처럼 어리바리하게 말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큰 파장은 포용력 넓은 니냐롯트도 감당이 불가능했다. a=b라는 단순한 사실을 전했을 뿐이지만 잘 정리되고 있던 마인드맵이 엉켜버려 유네가 하는 반박이 그녀의 생각처럼 들렸다. 그건 비키도 마찬가지였다.

“동감이야. 마…마왕의 부활체라니 그건 뭐야. 수많은 마족을 해치운 류제 네가 마왕의 부활체? 전쟁의 목적?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나는 들라크루아 대령님이 전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줄 알았어.”

“나도. 펠노아에서 등급1의 마족을 토벌하면서 들라크루아 대령님께서 사망하셨다고 해서 함께 싸웠다던 류제 군이 자세히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맞…맞지? 그 병마족을 해치운 건 류제 군이지 않아?”

선대 가주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포르테를 존경했던 비키는 포르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마저 사망하다니 등급1의 병마와의 전투는 분명 가혹했겠지.

그런데 돌연 사람을 모아서 자신이 마왕의 부활체이고 미나가 마족이라고 비약적으로 날뛰니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류제, 지금 상황이 힘든 건 알지만 다 네 탓이라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백여 년 전에 죽은 마왕이란 말이 왜 나와?”

전쟁의 목적이 류제라는 발언을 비키의 시선에서 보면 가문의 멸족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어린 비키가 무서워서 울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류제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 들어도 혼란스럽겠지. 난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야.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밝히고 싶어. 그러니 진지하게 들어줘.”

마왕의 부활체라는 마족의 말을 믿게 된 이래로 철저하게 숨겨왔으니 이런 반응이 정상이다. 갈등하는 비키가 생각에 잠겼다.

류제는 세라와 마주 보았다. 류제의 선택을 존중하는 세라는 혹시 모를 걱정으로 난감해 보였지만 대체적으로 침착했다. 피곤하게 갈라진 입술을 벌려 의견을 피력하는 세라는 옅은 두통에 이마를 감쌌다.

“저는 미나 플로리아 학생이 마족이라는 의미를 모르겠군요. 마족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건 도대체…….”

“한번 정리를 하고 가지. 나조차도 복잡해졌어.”

서로의 지식이 통합되지 않아 설명의 누락이 생긴다. 이에 니냐롯트가 중재에 나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네를 염두에 둔 그녀는 우선 그들이 이곳에 모인 시발점이 된 존재를 들먹거렸다.

“미나 플로리아가 마족이었다는 것부터 설명하지. 사실이 밝혀진 건 당장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전까지 모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그 가증스러운 이름에 류제는 통제되지 않는 배신감을 짓눌렀다. 남을 잘 관찰하고 독서를 좋아했던 미나의 속셈에 까막눈인 세 사람은 불신의 심정을 삼켰다. 설명은 다 듣고 난 후 반박을 하든 수용을 하든 하겠지. 비판자의 입장인 그들이 니냐롯트의 말을 경청했다.

“이전부터 나는,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포함한 우리는 제립학교에 마족이 침입했음을 염두했다.”

“제립학교에는 대마족 결계가 있습니다. 병마의 때처럼 모든 경비병을 살해한 게 아니라면 분명 침입 여부를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세라가 질문했다. 반면 어릴 적의 일로 대마족 결계에도 한계가 있음을 아는 니냐롯트는 씁쓸해졌다.

“지금은 침입한 방법이 요점이 아니다.”

고등급의 서큐버스는 의태 시 결계에 걸리지 않고 대마족 결계 내부로 침입이 가능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 술수에 당해 살해당했다.

왕실의 보안 능력은 유출 불가능하니 언급할 수 없지만 다른 것은 설명할 수 있다. 왕녀이자 사령관의 입장으로서 그녀는 부하인 세라 밀로니에게 답했다.

“나라카 토벌을 준비하던 중 나는 미노타 왕실이 마족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 반신반의했지만 진실이라면 우리 키아나트리체라고 무사할 수는 없겠지. 분명 틈을 노리는 마족이 있을 것이다 여겼다. 물론 내게 더한 확신을 준 이가 있었지. 렌 지미다.”

“레…렌 군?”

“저희가 알고 있는 그 렌 말씀입니까?”

“그래, 바로 그였어.”

“렌이 알았다고?”

류제도 처음 들었다. 이게 바로 그가 그토록 궁금했던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될 터였다.

“병마의 군주가 제립학교에 쳐들어왔을 때 내가 친위대를 이끌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나, 류제여.”

“그때 네가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렌의 목숨이 위험했지.”

“렌 지미가 내게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병마의 군주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학교로 온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병마의 군주가 쳐들어왔을 때 우리는 바깥과 단절되었어. 렌은 병마의 군주와 혼자서 대립 중이었고. 렌이 네게 위협을 알려줄 방도가 뭔데?”

한번은 이와 흡사한 의심을 했지만 절대로 불가능했기에 류제는 반박이 먼저 나왔다. 드디어 진상을 털어놓는 니냐롯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실을 덤덤하게 답했다.

“그가 전날 내게 부탁했다. 병력을 모아 학교로 와달라고.”

“렌이 마족이 쳐들어올 거란 걸 전부터 알았단 말이야?”

“그래, 그는 부정했지만 알고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말도 안 돼. 류제와 다른 히로인들은 비슷한 부정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설명하는 니냐롯트도 당시에는 렌의 말만 믿고 병력을 움직이는 행위의 위험성을 고민했었다.

“추측이다만 그는 처음부터 미나 플로리아가 마족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마족의 술수에 대처하는 것도 빨랐겠지. 그녀에게서 계획을 훔쳐 듣고 내게 부탁했을 가능성이 커.”

“렌 학생이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

그 엉뚱한 아이의 다른 면모를 알게 된 세라가 떨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문득 어빌리티 척도를 검사하던 날 보았던 아득하게 빛나는 척도계를 떠올렸다.

그것이 렌 학생의 행동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혹은 단순한 우연일까. 비밀투성이인 진실을 세라도 알기를 원했다.

“학교에 마족이 숨어든 것을 몰랐던 나는 그때부터 그를 의심했다. 별 볼 일 없는 그가 어째서 병마의 군주의 침입을 미리 알았나. 정보 제공자가 있다면 누구인가. 물어보아도 그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화가 나서 그를 매도해 버렸지. 나와 그 사이는 틀어졌고, 이게 렌 지미와 있었던 일의 전말이다.”

“그럼 그때―”

“그래. 나는 그를 믿지 못했던 일을 사과하고 싶어서 손등에 키스했다. 그때 그 타고시아 해변에서.”

과연. 렌이 왕녀를 불편해한 이유가 맞아떨어졌다. 더 이상 반박이 없자 니냐롯트는 의견에 살을 덧대었다.

“그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난 관찰을 이어나갔다. 내 불면증의 이유도 알았을 그의 이상 행동에는 항상 마족이 있었어. 류제 그대만큼 렌 지미도 마족과 자주 마주했지. 나라카의 자생 식물의 핵의 위치를 류제 신리에게 알려준 것도 렌 지미일 것이고.”

“맞아, 렌이 알려준 거야.”

고집을 부렸던 렌이 답답했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갔다. 그때의 사건도 미나의 짓이라면 설명이 됐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내가 먼저 마족의 정체를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못했다. 보복이 두려웠던 걸까.”

니냐롯트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대답이 되었냐며 그를 기다렸다. 류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폐하의 명을 받은 나는 나라카를 토벌해야만 하고 학교에 마족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과연 누구를 의심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던 나도 의태한 마족에게 습격당했지. 수치스럽게도 나라카 토벌을 강행하게 되었다.”

“사령관님께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마족이 먼저 알아차린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내가 비밀리에 마족을 수색 중인 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그중에는 류제 신리 그대도 있었다. 또 하나, 나와 렌 지미의 대화를 들은 그날 그대는 학교에서 한 사람을 더 만났다. 그것이 미나 플로리아였지?”

“맞아. 하아, 완벽하게 말려들었군.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어.”

왕녀가 당한 것도 결국 미나를 의심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다니. 거짓된 말과 행동을 믿고 그녀를 따랐던 류제는 치밀한 계략에 혀를 내둘렀다. 왜 렌이 말하고 싶지 않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의 머리로는 계략으로 무장한 미나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미노타가 쳐들어오자 나는 나라카를 토벌할 병력을 돌려 미노타군의 방어에 나섰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로 세뇌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지. 어떤 부분을 세뇌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과거의 내가 남긴 힌트로 시간을 들여 기억을 찾았다. 그 전에 난 백장미 부대를 선봉대로 나라카에 보내는 척 마족을 감시하면서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는 도망친 미노타의 왕자와의 접선을 명했다.”

노력 끝에 세뇌를 해제하고 기억을 되찾은 니냐롯트는 의심스러운 렌 지미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마족이 누구인지 아는 그는 분명 힌트를 남겨두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전 미나 플로리아가 움직였다. 타깃은 류제 신리였지. 그녀는 호세마타 요새에서 백장미 부대 귀환 백업 임무를 맡았다 거짓말을 했다. 동시에 병마의 군주가 펠노아를 습격했지만 미나 플로리아와 친분이 있는 류제 신리는 펠노아 대신 호세마타 요새로 향했다.”

“뭐야, 류제. 그럼 펠노아에서는 대령님 혼자서 병마의 군주를 해치운 거였어?”

“등급1의 병마는 나와 대령님, 펠노아 피난민들이 힘을 합쳐서 해치웠어.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할게. 호세마타 요새에서 미나와 있었던 일을.”

그때 느꼈던 다급함과 미나를 구하고 싶다는 진심이 예리한 칼로 잘라내졌던 분노를 최대한 배제한 류제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정리했다. 설명을 기다리는 여러 쌍의 눈동자들의 독촉이 시작될 무렵 그가 회상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미나의 중대원은 모두 구울이 된 후였어. 마족과 전투 경험을 쌓아왔던 난 이상함을 느꼈지. 내가 알던 미나는 어빌리터가 희생하며 마족과 싸우는 걸 부정적으로 여겼는데 전장에서 만났을 때는 도움이 되어서 기쁘다고 했고, 그녀만 구울이 아니었거든. 중대를 몰살시킨 마족이 인간을 살려두었다고? 수상하다 느끼던 찰나 미나가 내 슬렉터를 강제로 해제하려 했어. 동시에 왕녀에게서 통신이 왔지. 그녀가 바로 마족이라고.”

류제가 물자가 얼마 남지 않은 슬렉터를 감쌌다. 니냐롯트는 십 년을 감수했다. 지금 들어보면 정말 아슬아슬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비키가 수업 때처럼 손을 들었다.

“미나가 마족이라 밝혀진 경위는? 미나도 실은 의태한 마족에게 당해서…….”

“설마 그것뿐이겠어? 내 앞에서 의태한 껍질을 벗어던졌어. 붉은 동공도 보았지. 그 날개, 그 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있었으니 헛것을 본 것도 아냐.”

그래도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엔 니냐롯트에게 질문했다.

“사령관님께서는 어째서 미나가 마족이라 확신했던 것인가요? 렌은 마족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고 했었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지. 병마의 군주가 펠노아로 향할 때 나는 1년 전 병마의 군주와 대항하려 했던 렌 지미의 일이 떠올랐다. 렌 지미에 관한 기억이 돌아오자 참전 일로 나와 말씨름을 하던 그가 끝내 미나 플로리아의 멱살을 잡았던 것도 떠올렸다. 실이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서…설마 렌 군이 그런 말을 한 건……!”

뒷자리라 똑똑히 기억하는 유네는 렌에게 실망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제립학교 학생의 참전을 극구 반대했던 그는 홀로 왕녀와 대립했다.

반 친구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끝내 궁지에 몰린 그가 마지막으로 화살을 돌린 사람은 미나 플로리아였다. 미나가 저지른 짓을 알고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우리에게 닥칠 모든 불행이 그녀의 짓임을 알았던 거지. 이 전쟁이 마족의 손아귀에서 굴러가고 있음을 말이다. 나도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니냐롯트의 후회 담긴 중얼거림에 모든 사람이 탄식했다. 렌이 의태한 마족의 정체를 파악한 경위에 대한 의문점은 뒤로하고 대응 방식이 그들이 아는 바보 렌 지미 같아서 안타까웠다.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도와주었을 텐데.

“어째서 저는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요.”

충격받은 세라가 머리를 짚었다. 담당 학생이 마족인 것도 몰랐고 렌이 혼자 맞서고 있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의태한 마족도 알아보지 못한 저의 ‘탐색’ 어빌리티가 부끄럽습니다.”

“대마족 결계도 파악하지 못하는 의태를 선생님이 알았다고 한들 세뇌해서 기억을 제거했을 겁니다.”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족들은 마왕의 부활을 원할 테니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마왕을 위해서 서큐버스가 제립학교의 대마족 결계를 뚫고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생활하는 작전은 설득력이 높았다.

“학교에 숨어들 정도로 간교하게 움직인 마족의 목적은 나야. 이 전쟁의 의도가 나를 마왕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거니까. 미나에게 속아 궁지에 몰린 난 알라마니 기술관 측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요새에서 벗어나 펠노아로 향할 수 있었어.”

“류제 군을 마왕으로 만든다니? 마왕은 마족의 왕이니까 마왕인 거잖아. 류제 군은 인간이야. 기간트리카도 장갑할 수 있는걸.”

“류제 학생의 말은 진실입니다, 유네 학생. 지금만 학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말대로 그는 인간이지만 마기를 지녔지요.”

지금까지 그걸 알아챈 사람은 고작해야 세라 정도다. 컨트롤도 못 할 거였으면서 세라는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숨겨주었다. 물론 그에 따른 인간 사회의 여파를 고려한 거였더라도 이 전쟁의 목적이 마왕 때문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자신이 염치없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숨겨서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지만 저는 그를 믿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족의 힘을 가졌다고 해도 마족과 달랐으니까요. 그가 마왕이 되고자 했더라면 군주급 마족을 죽일 이유도 없었겠지요.”

세라가 류제를 변호했다. 사실을 믿기 힘든 비키는 부정하고 싶었다. 친한 친구가 마왕이라니. 마족이 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니. 마족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그녀에게 너무 비참했다.

“마기라는 모호한 것 말고 확실한 증거는 없나요?”

“수학여행 때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지진이 일어 렌과 류제 학생이 추락했었죠. 그때 제가 류제 학생의 육체가 마족처럼 변화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것도 류제 학생의 힘을 확인하기 위한 마족의 계략이었겠죠.”

“세라 선생님 말씀이 맞아. 그때부터 내게 마족이 하나둘 접근해 왔지. 덕분에 렌도 내 정체를 알았어. 하지만 숨겨주었지.”

“렌 학생이 당신의 정체를 알았단 말입니까?”

“네. 병마와 싸울 때.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받아줬어요.”

잠깐. 렌은 그 전부터 미나를 싫어하지 않았었나? 더군다나 렌이 미나가 마족인 걸 알았다고 해도 병마를 해치울 때 사용한 정체불명의 능력을 숨기려 한 이유도 잘 모르겠다.

류제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말을 마저 이었다.

“그것도 미나의 계략에 맞서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이 전쟁을 막지 않는다면 마족들은 나를 마왕으로 만들 테니까.”

“그…그런……. 그때 렌 군은 정말 우리를 위해서…….”

잘못된 선택으로 향하는 그들에게 열렬히 토로하던 렌이 스쳐 지나갔다. 만우절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만우절은 아직 멀었다.

어지럽던 유네는 문득 납치되었던 날 렌이 산탄총에 맞았을 무렵 끔찍한 기운의 중심에 류제가 있었음을 기억했다. 그건 그녀가 한때 등급1의 화마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마기와 흡사했다.

“난 아무것도 몰랐어. 렌 군과 류제 군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전혀 그런 걸 눈치채지 못했어.”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를 구원해 준 두 사람이 그런 지독한 운명을 품고 있었다니. 줄곧 친한 친구라고 여기던 자신만 아무 생각이 없어서 절로 무색했다.

“마족이 본디 인간이었다고 말한 건 류제 군을 보고 말하는 거야? 우리도 류제 군처럼 마족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내가 설명할게, 유네.”

이제는 비키의 차례였다. 힘을 합쳐 망가진 퍼즐을 하나둘 맞추는 기분이다. 비키도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을 말했다.

“마족들은 인간이었어. 그것도 어빌리터였지. 그 어빌리터를 마족으로 만들 수 있는 자가 마왕이야. 이유는 몰라도 오직 마왕만이 가능할 거라고 추측해. 이 전쟁의 목적은 마왕 부활이야. 어빌리터를 납치하는 이유도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서고. 그 증거라면 뭐랄까…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등급1의 화마가 원래 셀로니아 가문의 어빌리터였어.”

역사 연구 동아리에 들 만큼 셀로니아 가문의 과거 행적을 알고 싶어 했던 비키가 단언했다. 류제는 대발견을 할 거라 열의를 보였던 비키와 지금의 모습을 오버랩했다.

막 동아리에 들어간 그녀가 마족이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설파했을 때는 마족의 말을 무시했던 것처럼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마족이 그에게 했던 말대로 마족은 인간이었다. 미나도 인간이었을 것이다.

“지금껏 나는 셀로니아가를 멸족시킨 마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먼 옛날 우리 가문이 어빌리터들에게 자행한 건 천벌을 받을 짓이었고 결국 멸족도 먼 과거의 조상이 저지른 죄를 우리가 대신 받은 거였지. 그런데 류제 네가 마왕의 부활체라고? 내 복수는 도대체 뭐였던 거야?”

그녀는 허탈해 보였다. 칼날의 향방이 흐려져 간다. 앞으로의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도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처음 알았어. 날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마족들은 나와 마주할 때마다 마왕의 부활체라고 부르지. 나도 이런 내가 싫고 무서워. 저런 증오에 미친 자들이 되고 싶지 않아.”

당사자인 류제가 고개를 숙였다. 그도 원해서 이런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면 그거대로 좋을 뿐인데 그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는 지금이 끔찍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만 있다가는 금세 마족에게 역전당해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우리가 전쟁에 패배해서 마왕이 부활하면 마왕이 어빌리터를 마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확신은 못 하지만 그러겠지.”

백 년의 공백 끝에 마왕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등장한 자가 친구였다.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들은 각자 옳은 선택을 고민했다. 세라가 선택을 보류한 이유도 알 것 같다. 시선을 의식한 류제가 간곡히 부탁했다.

“미나는 한번 실패했으니 이제부턴 물불 가리지 않을 거야. 나와 친한 너희들에게도 폐를 끼치겠지. 미리 사과할게. 그래도 마족의 뜻대로 되고 싶지 않아. 이건 내 의지이고 의지만 있다면 그들도 날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럼 류제 군은 앞으로 절대로 마…마왕이 되지 않을 거지? 그런 거지?”

“당연하지. 내가 마왕이라면 난 마족들을 없애겠어. 각자의 운명에 마주하며 싸워왔던 너희들처럼 나도 내 운명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한번 비키와 유네의 마음을 자기 유리한 대로 농락했던 류제는 더 이상 그녀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굳게 다짐했다.

렌이 이곳에 있다면 걱정하지 않게끔 그의 진심을 똑바로 말해주고 싶었다.

“나를 인간이라고 말해준 세라 선생님을 위해서, 마족 때문에 복수의 굴레에 갇힌 비키를 위해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유네를 위해서, 나조차도 믿지 못한 렌을 믿어준 왕녀를 위해서, 그리고 이 전쟁을 막고 싶어 했던 렌을 위해서. 너희를 배신하지 않겠어.”

마족들이 그를 원하니 이들 앞에도 병마의 군주처럼 강대한 마족이 나타날 것이다. 비키는 복수의 대상인 화마의 군주와 마주할지도 모르고, 타고시아 해변에서 마주한 수마의 군주도 목숨을 저울질하며 그를 시험하려 들겠지. 미나는 인간의 이기적임을 속삭이며 그를 뒤흔들 것이다.

“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줘. 너희들의 긍지를 믿으니까 나도 인간으로 있을 수 있으니.”

그럼 이 전쟁을 인간의 승리로 끝내기 위해서는 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할지언정 렌을 만나기 전까진 어림없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렌에게 이 모든 일의 해명을 직접 들어야 했다.

그 후 감사를 표하며 따스하게 안아줄 것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보고픈 렌의 미소를 승리의 부적 삼아 기도했다.

“류제…….”

류제의 말대로 이 전쟁의 끝을 맺는 건 마족들의 목적인 류제의 손에 달려있었다. 선택 하나하나가 괴롭고 힘들겠지. 그건 자신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누구도 섣부르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잠시 검지를 입에 댄 니냐롯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사령관님, 펠노아에서 알라마니 기술관 생존자들이 도착했습니다.”

“곧 만나러 가보겠다. 그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둬라.”

“알겠습니다. 충성.”

명령을 받든 군인이 사라졌다. 한자리에 모인 건 기쁘지만 언제까지고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전쟁을 마무리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이야기는 이만하지.”

해야 할 일이 있는 니냐롯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 덕분에 그녀도 많은 것을 알았다. 마왕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고 마족은 류제 신리를 노린다. 평화를 향할 열쇠는 류제에게 있었다. 마족의 목적이 분명해진 것만으로도 목표가 뚜렷해졌다.

“기술관장님께 가는 거지? 나도 따라가도 될까? 개인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거든.”

“힘든 전투에 긴 이동까지 있었으니 내일까지 쉬어도 된다만 원한다면 상관없다. 그대들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따라오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본디 그런 목적으로 왔던 세라도 걸음을 옮겼다. 비키와 유네도 니냐롯트를 따랐다.

미노타의 국경 방어선 근처에 세워진 제1 작전사령본부는 마족의 봉기 이후 중대 단위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기간트리카군을 집중적으로 서포트했다. 이 기지는 비키나 유네처럼 일부 제립학교 학생들을 백업 멤버로 두고 부상자 등 극심한 전투로 피로를 느끼는 군인들과 교체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나머지는 임무 명령을 위한 통신과 적 탐색, 물자 보급을 위한 비어빌리터 군인들로 채워졌다. 온갖 대마족용 병기와 결계로 무장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빌리터가 가장 적은 곳이자 비어빌리터가 가장 분주한 곳이다. 어빌리티를 가진 백업 멤버가 그들에게 소소한 도움을 주는 건 흔했다.

“렌 군은 무사하겠지?”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어둠 속을 묵묵히 걷던 유네가 확신을 원하듯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마왕의 부활체를 향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친구인 줄 알았던 미나가 마족이라는 이 상황이 무서운 건지 불분명했다.

“무사할 거야.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바라야지.”

“하지만 류제 군 말대로 미나 양이 마족이고 렌 군이 그걸 알았더라면 미나 양이 렌 군을 가만히 두었을까? 미나 양이 우리가 없는 사이에 렌 군에게 해…해코지라도 했으면 어떻게 해?”

“유네 말이 맞아. 렌의 소식을 아는 사람 있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생각도 싫어.”

비키도 옆에서 거들었다. 좀처럼 말이 없더니 둘이서 그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앞서가던 니냐롯트가 뒤를 힐끗거렸다. 류제가 반응하기 전 그녀가 먼저 대답을 가로챘다.

“렌 지미라면 후방 지원부대에 소속되었다. 바뀐 편제는 전방에서만 통용되니 나이엔힐리아 근방 소도시 후방 기간트리카 부대에서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까지는 마족의 손아귀가 뻗치지 않았어. 그를 지키기 위해서 전방에 있는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야.”

하지만 마족들의 집단 봉기로 혼란이 가중되었던 상황에 몇몇 기간트리카 부대 소식에 공백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류제의 부탁대로 다급히 행방은 알아보고 있지만 남쪽은 피난민이 몰려있는 데다 통신 장비가 열악해서 정확한 소식이 닿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저…정말로 그럴까요, 사령관님.”

“잘못된 선택으로 희망을 잃은 그에게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줘야지. 그를 위해서라도 약한 소리는 금물이야.”

안 그래도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잃은 직후인데 마왕의 부활체라 스스로를 밝힌 류제 신리에게 굳이 불확실한 정보를 알릴 수는 없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기 마련이다. 그가 끔찍이도 아끼는 친우의 일이니 마음 졸이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해.

“렌…….”

류제는 그래도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렌은 안전할 거라는 속삭임은 자기 세뇌 같았다. 이번만큼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증거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당장 곁에 있어주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위험을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작은 사치였다.

소식을 받은 통신병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던 와중 마중 나간 기간트리카군의 호위를 받는 알라마니 기술관 사람들이 제1 작전사령본부로 도착했다.

아슬아슬하게 연료가 떨어진 사륜구동차가 힘을 다해 시동이 꺼졌다. 비포장도로를 내내 달리느라 멀미가 났던 그들이 땅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드디어 제1 작전사령부 땅을 밟았구나. 더럽게도 멀군.”

“수고하셨습니다, 기술관장님.”

“이곳이라면 안전하겠지. 십 년을 감수했어.”

병마의 알라마니 기술관 파괴에서부터 펠노아 침공, 미노타군의 세뇌 해제를 위해 펠노아에서 제1 작전사령본부까지 긴 이동을 한 그들은 수많은 사건에 얽혀 온몸이 피곤과 더러움으로 범벅되었다. 피로 누적과 탈수 증상으로 쓰러진 그들을 세라와 다른 의무대원이 부축했다. 비키와 유네도 그들을 도왔다.

“무사해 보여서 안심이군.”

“오래간만입니다. 저하께서도 고생이죠. 전쟁이 터지나 했더니 마족의 세뇌에 등급1의 군주에. 포르테 그 양반도 그렇게 가버렸으니 말 다 했습니다. 내 생에 가장 불행하게 역동적인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세마타 요새와 교류가 깊은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은 건강을 잃어가도 고집을 부렸던 포르테를 떠올리며 어울리지 않게 울적해했다.

류제도 오랜만에 헤이하치 머리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만났다. 반가운 한편 불쌍하다. 처음 봤을 때는 연구에 미친 사람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도 슬픔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다.

“그쪽은 류제 신리인가. 펠노아에서는 고마웠다.”

“별말씀을요. 맡은 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다.

관장은 감회가 새로웠다. 1학년인 그를 봤을 때는 앳된 티가 나서 이렇게 빨리 어른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역시 젊은이들은 안 보는 사이 부쩍 커버리곤 한다.

“지식의 보고인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군.”

“과찬의 말씀입습죠. 젊은데 벌써부터 궁금한 게 많다니. 세대교체는 언제나 빠르군요. 그런데 그쪽은?”

기술관장이 보는 쪽은 빈 줄 알았던 왕녀의 옆자리였다. 여전히 존재감이 별로 없는 왕자가 어느새 곁에 서있었다. 그도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에게 볼일이 있었다.

“미노타의 셋째 왕자, 하늘바람이라 합니다. 포로로 잡힌 미노타군의 세뇌를 풀고 싶어 감히 니냐롯트 왕녀께 부탁했습니다.”

“아아, 뺨에 붉은 문신을 보고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미노타도 잘못 걸렸지. 재해에 휘둘리는 인간의 나약함이란.”

한탄하는 기술관장은 기술관 본부에 두고 온 구울이 되어버린 연구원들과 묻어주지 못한 시체들, 조용히 먼지가 쌓일 연구품들을 떠올렸다.

드라코니스 입자가 나라카에 밀도 높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좀 더 안전한 곳에 기술관을 만들었을 텐데. 마족이 있기에 드라코니스 입자 연구를 할 수 있었건만 마족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감성적이게 된 그는 헛기침으로 목만큼 마음도 가다듬었다.

“서큐버스의 세뇌를 해제하려면 분파의 마족이 마법을 취소하거나 그 마족을 토벌해야 합습죠.”

“미노타군도 각기 어떤 마족이 세뇌를 건 건지도 모르는데 허황된다. 그 외에는 방법이 정녕 없는가. 다른 정신계 어빌리티나 나의 이 ‘뇌우’ 어빌리티로도.”

“머릿속은 섬세해서 외부의 간섭은 좋지 못합니다. 무언가 제정신을 차릴 계기가 있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내성이 없는 인간에게 전기를 다루는 건 조심해야 하지요.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라우스의 자식들은 계속 저 상태란 말입니까?”

기다려 마지않았는데 부정적인 답이 돌아와 하늘바람이 풀이 죽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곳에 와서 줄곧 폐만 끼치고 니냐롯트 왕녀를 볼 낯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상위 개체가 인자를 없애주는 것도 있습니다.”

“상위 개체라면… 서큐버스의 상위 개체를 찾아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마왕이? 니냐롯트 왕녀, 저는 마족에 대해 무지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군주급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소만.”

“맞습니다. 등급1의 서큐버스라면 가능하겠지요.”

그 정도의 서큐버스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대마족 결계를 속일 수 있는 수준의 의태 능력을 가졌고 류제 신리를 단번에 위기로 몰아넣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족이 하나 있었다.

“그녀일 것이다, 류제 신리.”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종이에 적힌 병마, 수마, 화마의 군주급 마족은 전부 류제가 만나봤던 자들이었다. 여기에 표시된 핵의 위치가 군주급이라고 한정하면 마지막 이 서큐버스는 미나 플로리아다. 미노타를 구하기 위해서는 미나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듯하다.

류제는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깊게 심호흡했다.

“군주급과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군.”

기술관장은 힘들다며 머리를 싸맸다. 연구만 하던 그에겐 부담스러운 존재다. 지긋지긋하다. 서로 투닥거리며 나라카를 감시했던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사망하고 몇십 년간 지켜온 연구실과 연구원을 잃어 큰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군주급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또 누구를 잃어야 한단 말입니까. 언제 지옥과도 같은 싸움이 끝날까요.”

하늘바람도 두려웠다. 포르테가 죽었으니 다음번 잃게 되는 영웅은 누구일까 상상할 수 없다. 만일 그가 휘말려 죽는다면 어쩌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세뇌당해서 형님들 밑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테였지만 그런 생각은 금물이다. 미노타가 진정으로 인류의 배신자가 되길 원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라우스의 소중한 자식들의 명예를 위대한 후툼의 피를 이은 자로서 재로 만들 수 없었다.

“약한 소리 하지 마시오, 하늘바람이여. 이곳에 있는 누구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요.”

그가 약해지려는 마음을 반성했다. 아무 능력이 없는 그는 과연 미노타군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에게 기대는 미노타군을 떠올린 하늘바람이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피곤해서 그럴 테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쉬는 게 어떻습니까.”

“하지만 니냐롯트 왕녀도 마찬가지로… 하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유약한 그를 달래기 위해 니냐롯트가 하늘바람을 데리고 백장미 부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술관장은 전장에 있기에는 어리기만 한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지도자의 짐은 무거운 법이지.”

“저도 같은 나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사령관님을 보고 있자면.”

짊어지는 책임감이 다르기 때문인가.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결말이 있었으면 좋겠다. 류제는 피곤했던 니냐롯트의 안색을 떠올렸지만 쉬어야 할 건 그녀라고 만류하지 못했다. 미나가 곁에 없어 악몽에서도 벗어났을 법도 하건만 전쟁으로 여전히 잠을 못 이루는 듯하다.

“소위가 묻고 싶었던 건 뭐지?”

따뜻한 차를 건네받은 기술관장이 물었다. 자신의 차례가 빨리 돌아올 줄 몰랐던 류제가 한 가지 먼저 확인했다.

“사령관님께 올릴 보고가 있지 않나요?”

“알라마니 기술관이 파괴된 정도와 되찾기까지 걸릴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면 소위의 질문에 답변할 시간이 되는군. 다음에 물어도 된다면 그렇게 하고.”

“아닙니다. 꼭 알아야만 할 게 있습니다.”

급박한 전투가 있던 데다 이동으로 바빴던 펠노아에서는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을 봤어도 정신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다. 뒤적거리던 류제는 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군복 주머니에서 나온 구깃구깃해진 쪽지에는 중구난방으로 글자가 적혀있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발견했습니다. 덕분에 병마의 군주를 해치울 수 있었죠. 일반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적혀있어서 관장님 것인가 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요.”

“이걸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노안이 온 기술관장이 쪽지를 돌려가며 내용을 확인했다. 나라카의 움직임을 살피던 와중 병마의 군주가 침투해서 연구원 모두 정신없었다. 마족의 주의를 끌 모든 것들을 시도하고 중요 정보를 챙겨 달아나는 동안 누군가가 쪽지를 남겨두었을지언정 자신은 아니었다.

“마족 핵의 위치라. 이런 연구를 한 적은 있지만 상세한 건 처음 보는군.”

“‘호세마타 요새에 마족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몰라 기동 예약시켰다. 요새에는 절대 접근을 금지한다.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반드시 니냐롯트 왕녀의 말대로 할 것.’ 이 부분은요?”

“기동…은 뭘 말하는지 모르겠고, 나라카 토벌 부대에서 이탈한 포르테가 호세마타 요새에 남아있을 때 이야기 같군. 몸을 숨기는 중에 우리가 몰래 식량을 보내줬는데 그때도 호세마타 요새에 마족이 자주 출몰했지. 들킬까 봐 아슬아슬했어.”

“기술관장님이 쓴 건 아닙니까?”

“나이를 먹으면 기억이 애매해서 말이다. 다른 사람이 쓰고 폐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무엇을 기동 예약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니냐롯트 왕녀의 명령으로 연구원들에게 요새에 접근하지 말라 지시한 건 그였다. 독특하지만 이 종이만 보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적었다.

“그러고 보니 마족이 봉기했을 때 마왕이 없는 지금 군주급 마족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며 연구했던 자료들을 다 꺼내왔던 연구원이 하나 있었지. 그 자료를 피신하면서 두고 간 듯한데 그도 호세마타 요새에 포르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자가 내 명령을 받아쓰고 핵의 위치를 정리했을지도 모르겠군. 그 아래는… 다짐의 일종인가. 희한하군.”

얼추 앞뒤가 맞긴 하지만 류제는 불길함이 가시지 않았다. 쪽지를 돌려받은 그가 꽉 잡아 쥐었다.

‘가장 위험한 이 네 마족을 해치우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지 말 것’이라는 글 때문에 목표가 생겼는데 단지 정보의 나열이었다니.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그 수상한 예언자 할머니가 어떤 힌트를 남겨둔 건가. 전쟁을 경계한 건 그 할머니도 있었으니.

“혹시 그 사람도 이곳에 왔습니까?”

“그자는 펠노아에 남았어. 부상이 커서 목숨이 오락가락하거든.”

“그렇습니까. 그럼 이 암호에 대해선…….”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갑자기 알라마니 기술관장이 몸을 휘청거리더니 쓰러졌다. 손에 들린 컵이 뜨거운 차를 뱉었다. 놀란 류제가 무너지는 몸을 받았다. 긴 이동으로 심신이 지친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병대대와 치료를 받고 있던 기술관원들도 동시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지?”

기지 안이라고 잠시 기간트리카를 벗었던 군인들도 돌연 잠이 들었다. ‘수면 마법’이 퍼지며 기지에 마법 인자를 경고하는 알람이 울렸다. 마족의 침입이다. 불길함을 고려하기 전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류제는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당장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라. 고등급의 수마 니켈이다!”

“젠장, 또!”

말하기가 무섭게 마족의 침입이다. 마법 인자가 육체에 닿아 영향을 끼치기 전 류제도 기간트리카 헬멧을 우선적으로 장갑했다.

마족이 나타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바로 그때 알라마니 기술관장의 몸 안에서 손이 하나 빠져나왔다. 놀란 류제가 그를 밀쳐냈다. 그의 몸뚱이를 비집고 악몽 안에서 나온 자는 미나였다.

“찾았다.”

어두운 밤에 비치는 붉은 동공만큼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이다. 미나가 관장의 몸에서 나올 때까지 얼음이 된 류제는 충격에 몸이 경직되었다. 그가 뒷걸음치는 게 무색할 만큼 그녀가 요염한 허리를 흔들거리며 그에게 접근했다.

미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서큐버스들도 잠든 인간들의 악몽을 이용해 제1 작전사령본부로 침입했다. 어림잡아 서른 가까이 되는 마족들로 기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마족 결계는 어떻게 된 건가!”

사태를 파악 중인 니냐롯트가 결계 담당자에게 외쳤다. 마족과 인자가 들어올 틈이 생긴 대마족 결계는 세뇌된 미노타군이 서큐버스의 지시로 포로수용소를 빠져나가 파괴했다. 인류를 애정하는 과한 배려가 독이 되었다. 그 위를 마족의 봉인 마법이 덧씌워졌다.

“감히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오만하구나, 류제 신리.”

“네 짓이구나, 미나 플로리아.”

한때 청초하다 착각했던 녹색 단발머리의 그녀. 뿔과 날개, 불쾌한 붉은 동공은 인간의 것과 달랐다.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마기가 숨이 막혔다.

“류제 군!”

“류제, 조심해!”

반신반의하던 비키와 유네도 사람들이 쓰러지며 등장한 서큐버스 미나의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했다. 정말로 그 미나가 인류의 주적인 마족일 줄이야. 배신감과 두려움에 유네의 눈이 떨려왔다. 미나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나의 목적은 오직 류제 신리였기에 1년간 친구로 지내온 유네와 비키를 하찮은 쓰레기보다 못한 미물을 보듯 흘겼다. 인간들 따위와 나눈 우정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녀는 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절대로 안 놓쳐. 너는 반드시 마왕이, 우리들의 왕이 되어야 하거든. 절대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나는 인간이야. 몇 번을 말해도 대답은 같아.”

“하하, 과연 그럴까? 네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이 탄로 난다면 과연 네 자랑스러운 친구들이 널 받아들여 줄 수 있을지 재미있겠네.”

“류제 군은 류제 군일 뿐이야! 네 멋대로 우릴 판단하지 마.”

언젠가 류제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며 유네가 외쳤다. 류제 신리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려던 그녀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다. 유약한 인간 주제에 괘씸해진 미나가 순식간에 유네에게 접근했다. 비키가 재빨리 막아섰지만 어림도 없었다.

“닥쳐, 이 병신 같은 머저리 인간아. 아무것도 못 하는 벌레 주제에 잘도 입을 놀리는군.”

미나가 유네의 목을 졸랐다. 친구라고 믿었던 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망설임 없는 공격에 목이 부러지기 전 비키와 류제가 동시에 유네를 구출했다.

류제가 미나의 팔을 자름과 동시에 비키가 유네를 뒤로 물렸다. 기간트리카 안쪽까지 파고든 압력에 지친 유네가 숨을 몰아쉬었다. 비키가 비틀거리는 유네를 부축했다.

“괜찮아?”

“으응… 콜록, 콜록.”

속이 후련해진 유네가 ‘잘했지?’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류제가 유네의 머리통을 짓누르듯 쓰다듬으며 대신 앞으로 나아갔다.

“고마워, 유네. 내가 미나를 막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을 부탁해.”

“콜록, 콜록, 컥. 괜…괜찮겠어, 류제 군?”

“응. 미나는 내게 맡겨줘.”

“알았어. 조심해, 류제.”

“비키, 너도.”

지금은 병력을 분산할 때이다. 악몽을 통해서 대마족 결계 안쪽으로 침입해 화수분처럼 늘어나는 서큐버스들은 물론이고 세뇌당한 미노타군이 서큐버스의 명령으로 보다 똑똑하게 움직였다. 이성이 없는 그들은 서큐버스의 수족이 되어 구울처럼 키아나트리체 군인들을 공격했다.

“미노타의 왕자를 지켜라. 안전한 곳에 피신시켜!”

“괜찮습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그대가 없으면 미노타는 일어서지 못하게 되오!”

“내 백성은 내가 지킵니다. 라우스의 자식들을 마족의 손에 농락당하게 두기 싫습니다!”

어디에서 난 건지 대마족용 바리케이드를 든 하늘바람은 직접 달려나가 미노타군을 뜯어말렸다. 기간트리카도 장갑할 수 없는 비어빌리터의 무모한 짓거리에 한숨을 쉰 니냐롯트는 하늘바람을 도와주기 위해 전력을 일발 장전했다. 류제가 있던 방향을 흘긴 그녀는 눈에 익은 마족을 목격했지만 이내 지휘봉을 들고 다른 명령을 내렸다.

“정신 차려라! 대기군은 쓰러진 군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봉인 마법을 타파하라. 강제로 기간트리카를 장갑시키고 일반군은 방독면이라도 쓰게 해! 기간트리카병은 소속 상관없이 3인 1팀으로 팀을 짜서 마족과 맞서!”

기본적으로 협공을 하지 않는 마족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류제를 노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센 공격이 이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사는 마족치고는 섣부르다. 그 정도로 류제 신리를 원하는 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렌 지미가 만들어준 기회를 날려 보낼 수 없다. 니냐롯트는 이 전투로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재앙들을 저지했다.

주인공 류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은 히로인들을 가장 강한 마족에게로 이끌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세계가 만들어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수마의 마법에 당한 군인들을 피난시키며 수동으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주는 백장미 부대원들과 비키와 유네, 세라와 니냐롯트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유네와 함께 강력한 화염의 바람을 생성해 서큐버스를 불태운 비키가 인기척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형상이 기간트리카 없이 연기로 막힌 하늘로 날아올랐다. 류제도 뒤따라 향했다.

“류제 신리 소위,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던 세라가 불길함에 도리질을 쳤다.

“안 돼. 방해하면 못쓰지.”

피가 터지는 전장에 들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순수했다. 그 목소리를 아는 류제는 그의 것이 아닌 기억과 혼동하여 반가움이라는 괴상망측한 감정에 숨을 들이켰다. 경고하는 세라를 가로막는 자는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이다.

“반푼아, 오랜만이구나. 널 위해 나들이를 나와줬으니 축배를 들어주길 바라.”

“수마의 군주!”

연이은 군주급 마족의 등장에 류제가 혀를 찼다. 그를 바라보는 나콜렙시의 미소가 어딘가 어긋났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만났던 그녀는 여전해 보였다.

“이런.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류제를 따라가는 것을 포기한 세라는 소녀의 탈을 쓴 마족과 맞섰다. 세라의 뒤로 등급1의 군주급 존재를 알아본 루비니 아로즈네그와 네네 슈만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부탁드립니다.”

류제는 나콜렙시를 저지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미나에게 향했다. 수마의 군주가 쉽게 비켜준 걸 보면 애초부터 그녀의 목적은 류제가 미나와 접촉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류제는 미나의 뜻대로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 둘, 셋… 인간이 셋이네. 귀찮아. 으하암.”

“저게 바로 군주급 니켈인가. 역시 마족은 외견만으론 판단할 수 없군.”

“피부로 마기가 느껴집니다. 무시무시하군요.”

급한 대로 팀이 꾸려지긴 했지만 포르테 들라크루아조차 상대하기 힘겨웠던 수마의 군주를 질긴 인연으로 뭉친 세 사람이 버틸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들이 필사적인 만큼 나콜렙시도 게으름을 떨쳐낼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계획대로 마족을 부활시키지 못한 마족은 궁지에 몰렸다.

심해의 머리칼을 흩날린 그녀는 죽음의 포용력을 가진 바다처럼 아둔한 인간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 용모의 거만한 시선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저건 천 년을 넘게 산 괴물이다.

“이 조합은 오랜만이 아닙니까. 타고시아 해변에서 훈련할 때는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세라 선배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전투 직전의 수축된 근육의 긴장을 풀기 위해 루비니 아로즈네그가 ‘수인화’하는 동안 가볍게 주둥이를 털었다. 이 멤버로만 이루어진 팀으로 협동 공격을 연습한 적이 없어 내심 걱정하던 세라는 억지로 웃으며 통신을 전달했다.

“그게 지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요.”

“얼쩡거리다가 발목이나 잡지 마. 나서지 말고 백업이나 제대로 해!”

루비니가 사치스러운 말을 하니 네네 슈만은 짜증스럽게 나왔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굳이 지금 사이가 안 좋다는 걸 티 내고 싶은 건지 영 협동성 부족한 태도에도 세라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포르테의 죽음으로 눈물짓고 있었으니 넓은 아량을 가진 그녀가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은인을 죽인 병마의 군주가 먼지가 되어버려 복수심이 갈 곳 없던 네네 슈만은 같은 등급의 나콜렙시에게 분노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렸다.

그 증오는 썩 쓸 만해 보였다.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는 추악한 마족 주제에 나콜렙시가 가소롭게 웃자 네네 슈만이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널 죽여주겠다, 마족!”

“그 말만 천 년의 세월 동안 몇 번을 들었을까?”

하찮은 인간들을 흘겨다 본 나콜렙시가 이 제1 작전사령본부에 침입한 후 깊은 지면에 만들었던 물 마법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수마의 마법으로 잠든 사람을 서큐버스의 손아귀에서 피난시키는 군인들로 분주한 지면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지반 아래에서 지하수 물줄기가 땅을 뚫었다. 등급이 낮은 다른 수마라면 어림도 없는 규모다.

흔들리는 지면을 박차고 네발로 땅을 디딘 늑대 수인 루비니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갑시다, 슈만 중위님. 밀로니 중위님은 오늘은 고양이가 아니니까 물을 싫어하면 안 되지 말입니다.”

“닥쳐, 루비니. 넌 꼭 한 마디가 많아.”

“부끄럽게 이럴 때 그런 이야기 꺼내지 마세요.”

어찌 되었건 일심동체가 된 팀이 수마의 군주의 공격을 상대했다. ‘빙결’ 어빌리티가 있는 네네 슈만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물줄기를 빠르게 얼렸다. 이를 발판 삼아 수인화 모드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루비니 아로즈네그가 뛰어올라 나콜렙시를 공격했다.

미나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나콜렙시는 늑대 귀 군인의 공격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으면서도 귀찮아서 공격을 통과시켰다. 어차피 핵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녀는 죽지 않았다.

“얕보고 있어!”

네네 슈만도 공격에 성공했지만 타격감이 부족했다. 몸 전체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물 같다. 회복 속도도 눈으로 따라갈 수 없어서 핵의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다.

“얕보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약한 거지. 그건 사실이잖아, 보잘것없는 인간들아.”

“약하다고? 내 어빌리티는 빌어먹을 네 마법에 효과적이지. 언제까지 우릴 무시할 수 있을까?”

네네가 보란 듯이 나콜렙시의 물 마법을 얼렸다. 마법 인자로 자극하는 물 분자가 사라지자 나콜렙시는 지하 깊은 곳에서 더 많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마기를 집중했다.

지금보다 더 깊은 곳에 마법진을 만들어내던 나콜렙시의 머리가 얼어붙었다. 만들어낸 얼음 창으로 나콜렙시의 머리를 꿰뚫기 위해 네네 슈만이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뒤에서는 루비니가 나콜렙시에게 손톱을 휘둘렀다.

“어리석긴.”

그 순간 나콜렙시는 얼릴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물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만들었다. 감탄이 나오는 광범위 마법이다.

이에 루비니와 네네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물줄기에 갇혔다. 백업을 하며 근거리 딜러들이 볼 수 없는 특이점을 통신으로 전해주던 세라도 그 공격에 휘말렸다. 물이 기간트리카 안까지 차올라 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마의 군주와의 싸움에 휩쓸린 다른 군인들이 온 힘을 다해 서큐버스에게 반항하는 동안 류제는 의도대로 미나에게 다가갔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떠있는 그녀와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류제 사이에 기묘한 대치가 흘렀다.

거리를 두고 선 류제가 미나에게 외쳤다.

“세뇌한 사람들을 놓아줘. 이건 마족과 인간 간의 싸움이잖아. 마족이면서 하찮은 인간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어?”

피아 식별도 못 하고 인간들을 공격하는 미노타 군인들은 물론 이전에 왕녀에게 행했던 세뇌 공작까지 생각하면 의도가 치밀하고 사악하다. 그것이 그녀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니 류제는 속았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미나는 류제의 잠꼬대 같은 말을 듣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점점 그 움직임이 커지더니 미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그 목소리가 크고 날카로워서 정신계 방어가 약한 사람이라면 기간트리카 장갑으로 방어한다 할지언정 웃음소리만으로도 좌절과 절망으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버린 미나가 고개를 들었다. 치켜뜬 눈에서는 좋은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죄책감 느껴?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고통받으니까.”

“난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미나 플로리아. 네가 마족일지라도 상관없어.”

“아직도 나를 미나라고 부르는구나. 대화? 우리 사이에 대화랄 것이 필요 있나?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잖아. 마족과 마족의 이.심.전.심. 안 그래?”

잠시 인간일 때의 순진한 표정으로 돌아온 미나가 윙크를 했다. 류제가 그녀를 믿고 의지하려 들었던 점을 꼬집고 비웃은 그녀는 좀 더 좌절하라며 두 팔을 벌려 이 절망의 도가니를 즐겼다.

말 그대로 악마였다. 이전의 그였다면 더한 좌절을 느꼈을 테지만 포르테의 죽음으로 한번 마음을 정리한 후라서 그런가 류제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인간인 너를 믿었던 건 사실이야. 마왕의 부활체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널 믿었어. 이심전심이 아니라 네가 거짓말을 한 거야.”

“아무렴. 그딴 인간의 잣대 따위 뭐 어때. 난 널 마왕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할 거니까.”

니냐롯트 왕녀가 있는 제1 작전사령본부를 멋지게 망가뜨린 미나는 나콜렙시의 위대한 마법에 심호흡하여 마법 인자를 깊게 들이마셨다. 나콜렙시는 강하다. 물리적 공격력이 약한 서큐버스와 훌륭한 짝이 되었다.

“같은 인간과 무의미하게 싸우기 싫으면 얌전하게 굴어. 그게 지금 내 마음이야. 잘 통했니?”

네가 하는 것에 따라서 이곳 사람들을 살려둘지도 모르지. 그렇게 덧붙인 미나는 업을 시험하는 마족답게 말했다. 물론 지금 저 인간들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마왕이 부활하고 마족의 시대가 돌아왔을 때 살아있을지는 그녀의 알 바 아니다.

“저걸 보기 싫으면 얌전히 나와 함께 나라카로 가면 돼. 우리들의 왕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훌륭하지 않니?”

렌 지미만 아니었으면 이런 고상하지 않은 방법까지 필요 없었을 텐데. 고귀한 마족이 떼 지어 인간을 습격하다니 못마땅하지만 병마의 군주마저 사라져버려 시간이 급했다. 그런데 저 인간 류제 신리는 마음에 안 드는 대답만 주야장천 내뱉었다.

“그런 선택지는 내게 없어.”

“하아, 언제까지 고통받길 원하는 거야? 괴로운 걸 좋아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너 때문에 죽어야 할 것 같아? 지금이라도 네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 안 해?”

“나는 인간이야. 너희 마족은 마왕이 없으면 수가 불어나지 않지. 지금 고통받더라도 내가 마왕이 되지 않으면 언젠가 너희들이 패배하겠지. 불리한 건 너희 마족이야.”

“잘도 거기까지 알아냈구나. 과거의 기억이라도 떠올랐어?”

그녀가 비웃었지만 쓰린 속은 엉망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인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던 미나는 틀에서 벗어난 류제의 발언이 용납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아? 그가 희생하면 모두가, 아니 혹은 일부라도 살아난다는 희망을 왜 무시하지? 마족을 없애기 위해서는 소중한 사람을 버려도 된다는 거야? 그는 그렇지 못했을 텐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미나.”

“어떻게 하면 마왕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어느새 류제의 등 뒤에서 그의 기간트리카 헬멧을 쓰다듬고 있는 미나가 그에게 반쯤 업혀 속삭였다. 류제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은 착각이 들었다.

모르쇠 다른 소리로 얼버무려도 동요하지 않은 류제는 온 신경을 집중해 미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지했다.

“넌 정말… 우리와 함께했던 1년 동안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어?”

“웃기네. 가축우리에 1년간 갇혀있던 내가 왜 행복해야 해?”

“네가 도서부 동아리실에서 부원들과 독후감을 말하며 즐거워하던 모습은 난 진짜처럼 느꼈어. 네가 마족이라도 실은 인간일 때의 기억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한낱 꿈에 불과한 연기를 믿어서 나를 떠보려고 하다니. 그녀는 마족이었다. 인간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씹어먹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 마족. 마왕의 부활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면 인간과 어울리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다.

“마왕이 되면 네 말이 무슨 헛소리였는지 알게 될 거야.”

미나의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그대로 심장을 꿰뚫으려는 공격을 빠르게 돌아 막아낸 류제는 결국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미나와 싸워야만 한다. 류제는 종이에 있던 군주급 서큐버스의 핵의 위치를 떠올렸다. 그를 공격하는 미나의 핵은 손에 닿을 위치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핵의 파괴를 머뭇거린 류제는 미나의 침입을 밀쳐냈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남았다.

류제가 자꾸 어리석은 소리를 지껄이자 미나가 악독하게 외쳤다.

“나랑 수다라도 떨고 싶은 거야? 그거라면 좋은 장소가 있지. 나라카에는 인간들의 기술로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힘으로 만들어진 성이 있거든. 마왕이었던 네가 만든 드라코니스 입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에서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응?”

공격을 하며 조롱하는 말투도 류제는 흘려들었다. 인간 연기를 하는 미나의 모습을 봤었던 류제는 저 진짜 모습이 더 연기하는 것 같아 어쩐지 동요가 되지 않았다.

“렌은 네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런 렌을 악독하게 괴롭혀야 할 필요가 있었어?”

유네가 물어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걸렸다. 미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렌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 사실을 숨겼지만 미나는 제 정체가 렌에게 들켰음을 짐작했다.

동문서답을 하며 류제를 농락하던 그녀는 표정이 달라졌다. 말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의 계획을 모조리 방해한 빌어먹을 자식이다.

이제 그 이름을 듣는 것조차 지긋지긋해진 미나는 인간 주제에 자신을 가르치려 들었던 렌 지미를 지워냈다.

“렌? 설마 그 렌 지미? 내가 왜 하찮은 무지렁이를 신경 써야 하지? 몇 번을 말했지만 그깟 인간은 중요하지 않아. 류제. 마왕의 부활체. 인간을 초월할 네게 그 역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대도.”

류제 신리와 그녀 사이에 방해물을 끼워 넣기 싫었다. 믿고 싶은 말로 살살 사람을 꼬드기는 마족의 계략은 달콤하기만 하다.

“렌을 바보 취급하지 마. 적어도 내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야.”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보네. 내가 렌 지미를 찾아서 죽여버린다면 어때. 그럼 인간을 포기할 수 있어?”

“그때야말로 너희 마족은 멸망의 길을 걷겠지.”

예전 같았으면 도발에 걸려들어 무턱대고 분노했던 류제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나는 혼란스러웠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마음을 다잡다니 이상했다.

마음을 연 친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의 배신, 그 때문에 참사가 일어났음을 알 터. 지금이 적합한 타이밍이라 침입을 시도한 건데 그렇게 좋아하는 렌 지미를 죽인다는 협박에도 침착하다.

“그것참 대단한 사랑이구나.”

그의 마음이 렌에게 거부당했다는 걸 아는 미나의 빈정거림에 가시가 있었다. 회유책도 통하지 않으니 역시 렌 지미를 격리시킨 것이 옳았다. 실물인 그가 있었더라면 그의 의지는 더 강대해졌을 테니까.

이해를 못 하겠어. 왜 의미 없이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거야. 거절당했잖아. 이루어질 수 없잖아. 그런데 왜 포기를 안 하는 거냐고!

“미나, 난 너를 해치고 싶지 않아. 너도 원래 인간이었다면 인간을 미워하지 않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마왕으로 부활하지 않아도 마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공격을 하는 줄 알았던 류제가 미나의 오른쪽 손바닥을 맞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미나가 류제의 손을 뿌리쳤다.

“제길!”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게 고작 열여덟 소년이 지껄이는 설교는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그녀는 다른 사실에 기겁했다.

알고 있는 건가? 마왕일 때의 기억이 없는 그가 내 핵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약점을 숨기듯 오른 손바닥을 강하게 쥐었다. 렌 지미가 내 핵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

더군다나 마법 인자로 바꾸고 있던 그녀를 둘러싼 마기가 그녀가 아닌 류제 신리의 주변으로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상처 냈던 기간트리카 파츠가 수복되어간다. 아직 인간인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마왕의 힘인 드라코니스 입자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에 침입할 수도 없다. 의지가 나약해진 것도 아니다. 예상에서 모두 빗나갔다. 핵의 위치까지 파악 당했다니 이길 수 없어. 마가릿이 당했던 이유도 알겠군. 방어에 지쳐 숨을 헐떡거리던 미나가 분해서 몸을 벌벌 떨었다.

“미나, 기다려!”

혀를 찬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작전상 후퇴를 감행했다. 이렇게 된 이상 쓰지 않으려고 했던 비장의 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를 만나고 싶으면 나라카에 있는 성으로 와. 그곳에 온다면 마족이 공격을 그만두고 미노타인들의 세뇌는 풀어줄지도 모르지.”

지면으로 하강하여 쓰러져 있는 인간의 악몽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미나를 붙잡지 못해 도중에 부스터를 정지한 류제가 가속도로 인해 바닥에 길게 미끄러졌다. 어딘가 보니 쓰러진 인간이 보였다. 이자를 악몽의 통로로 이용해 벗어난 듯하다.

“플로냐가 도망갔네.”

수벽으로 만든 유동적인 방어막으로 공격을 막던 나콜렙시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플로냐는 너무 어려. 인간에 불과한 마왕의 부활체에게 왜 저렇게 쩔쩔맬까. 강제로 데리고 가면 되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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