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5)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평범하게 자라질 못한 그녀의 존재는 역병이었다. 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바스러뜨리는 죽음의 어빌리티를 가졌던 그녀는 자랑스러운 부모에게마저도 버려졌다. 아니, 그녀를 버린 부모조차 그녀의 손에 죽었다.
돌연 이상한 능력이 생긴 그녀를 반겨주는 이 없었다. 외로운 그녀는 배고팠다. 마을에는 피부가 꺼멓게 변해 죽어가는 정체불명의 병이 유행했다. 그녀의 부모와 같은 증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재앙의 근원을 쫓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식량도 부족한 추운 겨울에 모포 하나 없이 떨어야 했던 그녀는 곁을 원하는 것만으로도 마을 하나를 지웠다. 그해에 기근과 병해와 전염병이 겹쳤다고 해도 그녀만이 생존한 걸 보면 역시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탓했다. 이 힘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버리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한밤중에 마을에 불을 질렀다. 까맣게 탄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언제까지고 걸었다.
먼 거리를 떠나 새로운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고자 희망했다. 평생토록 외로움을 달고 살기 싫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운명을 부정하고 싶었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그녀는 마을과 떨어진 곳에서 홀로 생활했다. 나들이를 갈 때는 온몸을 둘러싸 자신을 숨겼다. 매일같이 씻은 손은 부르텄다. 그녀를 받아준 새로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연구는 성과가 있어야 했다.
어두운 과거를 떨치고 새롭게 시작한 그녀는 그때도 연구를 좋아했다. 가축을 사들인 그녀는 어빌리티를 실험했다. 결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질병을 발병시키는 그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접촉한 가축들은 건강하게 자란다는 기적 같은 통계를 냈다.
물론 유약하게 태어난 것들은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다음 생에는 좀 더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어린 가축들을 땅에 묻었다. 이 힘의 주의할 점과 장점을 구별하던 그녀는 질병과 건강의 상관관계라는 당시에는 없는 낯선 이론을 증명했다.
컨트롤에 자신이 생긴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을 상대로 한 연구 결과도 괜찮았다. 이따금 그녀의 집에 장난을 치러 오는 골목대장 꼬마도 몇 번 앓은 후로는 그녀와 접촉해도 이상증세가 없었다.
그녀는 잘 해내가는 것처럼 보였다. 병자나 노약자만 유의하고 아주 조금씩 건강한 마을 사람들에게 어빌리티를 노출시켜 면역력을 높였다. 능력이 폭주하지만 않으면 일상생활에서도 무리가 없게끔, 혼자가 아니게 될수록 그녀는 계획을 현실화했다.
이내 그녀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반년 동안 마스크와 장갑 없이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괜찮았던 것이다. 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끝에 괴짜라 소문난 그녀는 충분히 기뻤지만 그것조차 잠깐이었다. 이전 마을을 휩쓸었던 가축 전염병이 새로운 마을을 뒤덮었다.
마을의 가축들은 대부분 병으로 죽었지만 유일하게 그녀가 키우던 가축만 건강했다. 건강하지 못한 가축을 먹고 병이 옮은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억울하게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와 접촉이 많았던 사람들은 증상이 없었으니 그녀 덕분에 마을이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괴짜인 그녀와 그녀의 가축, 그녀와 접촉이 잦았던 사람만 건강하자 두려움에 미친 자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몰아세웠다. 누군가가 그녀의 과거를 들추어냈다. 멀리 떨어진 어떤 마을에서 전염병을 뿌려 마을을 멸망시켰다는 마녀의 이야기가 마을에 떠돌았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저 두려워했다. 봉기한 자들은 한밤중 마녀사냥에 나서 그녀의 집을 불태웠다. 연구 자료들이 불살라졌다. 마녀의 시종인 가축들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간신히 몸뚱이만 챙겨 도망가던 그녀는 누군가 발사한 석궁에 맞았다.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산 외진 곳 구덩이에 굴러떨어진 그녀는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석궁을 쏜 이는 줄곧 친하게 지내던 어린 친구의 부모였다. 그녀 덕분에 그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겠지만 억울하고 슬퍼서 애꿎은 바닥이 휘청거렸다.
외로웠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 받았던 그 사랑을 다시 한번 받고 싶어 최선을 다했다.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인간들이 밉다.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었는데. 사랑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내게 마음을 주고 다시 비참하게 만들까.
“미워. 미워. 미워. 인간들 따위 미워. 다 죽었으면 좋겠어. 진작 죽여버려야 했어. 왜 나만. 어째서!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데!”
생명을 잃어가는 그녀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들을 저주했다. 정말로 악독한 마녀가 되어버린 그녀는 사랑의 갈구를 증오로 걸러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죽어가는 자의 증오를 읽은 범상치 않은 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오면 그 소원을 이루어주지.”
달이 뜨지 않는 검은 밤. 몇십 미터 근방에서는 그녀를 불태워 죽이려는 사냥꾼 무리가 산을 헤집었다. 세계의 그림자처럼 선 악마는 짙은 검은 머리에 류제 그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친근감은커녕 파충류처럼 길쭉한 붉은 동공은 인간의 것과 달랐다. 류제는 기억 속 인간이 아닌 그가 다른 존재로 느껴졌다.
“인간들 전부 사라지게 해줘!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줘!”
그녀를 내려다보는 악마의 눈동자에 비치는 무료함. 연민. 인간을 향한 증오. 세 쌍의 거대한 날개와 뿔을 드러낸 마왕은 그녀의 목을 물었다. 어느 봄날 들꽃 같은 머스터드색 눈동자에 붉은 동공이 덧씌워졌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이름과 육체가 부여되었다. 그 증오로 살아난 그녀는 소망대로 그 마을을 없앴다. 추억과 희망을 모두 지우는데도 그녀는 웃었다. 그 미소는 건조했다.
“허……!”
아주 짧은 시간 마가릿의 과거를 스쳐 지나간 류제는 온몸이 소스라쳤다. 그녀를 마족으로 만든 것이 과거의 자신임이 드러났다. 그때의 증오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죽여온 그녀를 변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동정심이 들었다. 그녀도 마족이 되기 이전에는 인간이고 그와 같은 어빌리터였던 것이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가져 세상을 증오하게 된 그녀. 그런 그녀를 증오 그 자체로 만든 과거의 그. 수백 년 전의 과거가 연결되는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이… 그… 안…….”
목소리마저 소멸되어 눈물을 흘리는 마가릿의 머스터드색 눈동자에서 붉은 동공이 사라졌다. 마족의 증오와 인간을 향한 혐오는 분명 인간이 만들었다. 죄책감이 든 류제가 마가릿의 손등을 마주 잡았다.
병마의 군주는 마침내 먼지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사원을 감던 거대한 촉수 덩어리들이 추락한 끝에 지면에 닿기도 전 바람에 쓸려 날아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승리에 환호했다.
사색에 잠겼던 그가 마침내 숨을 내쉬기 시작했을 때 포르테의 기간트리카가 갑자기 지면으로 추락했다.
“대령님!”
놀란 류제가 그녀를 불렀지만 포르테에게서 통신이 없었다. 떨어지는 그녀에게서 만만찮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류제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받쳐 들고 땅에 착지시켰다.
“정신 차리세요, 들라크루아 대령님!”
포르테의 기간트리카를 강제로 장갑 해제한 류제는 그녀의 배에 뚫린 상처와 ‘역병 인자’로 감염된 신체를 보고 한탄을 금치 못했다. 상처가 찢어진 것이라기보단 녹아내린 것 같았다. 렌이 당했던 상처보다 심각하다. 이 정도 상처는 세라조차 치료가 불가능했다.
“소란 떨지 마라.”
피가 식도로 올라온 그녀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한껏 피를 토했다. 회복 효과가 30분은 지속되는지라 아직 ‘힐링 팩터’의 영향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처가 아물지 못했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가 남은 ‘힐링 팩터’를 꺼내 혈관에 꽂았다.
“잘했다. 움직임이 썩 괜찮더군. 날 구하려는 대신 적에게 집중한 것도 현명했어.”
“아닙니다. 제가 더 잘했더라면 대령님이 이렇게 다치실 일은…….”
“등급1의 병마족을 상대로 충분히 대단한 거다. 용케 짧은 시간에 핵의 위치를 파악했구나.”
“공격을 모두 방어해 주신 대령님 덕분이죠.”
쪽지에 적혀있던 핵의 위치를 떠올린 류제가 마가릿의 최후를 기억하며 고개를 숙였다. 호흡이 뜨거워진 포르테는 회복이 되지 않는 육체를 보고 거칠어져 가는 숨을 천천히 뱉었다.
“전투는 그대로만 하면 된다. 남은 생명을 태울 바에 이런 건 앞으로도, 지금도 쓰지 말고. 관장은 저래 보여도 똑똑하니 너도 해독제를 받을 수 있을 거다.”
포르테가 텅 빈 주사기를 들어 보이며 쓰게 웃었다. 이전부터 ‘힐링 팩터’를 주사해도 낫는 속도가 더뎌진다 싶었더니. 이건 부작용이다. 내성이 강한 약물을 한계까지 사용해 버린 탓에 몸이 죽어가는 속도를 ‘힐링 팩터’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대령님 걱정 좀 하세요.”
“네가 걱정이 되게 하지 않느냐.”
류제의 육체는 ‘강화’를 통해 역병 인자를 몰아내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나 포르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생명을 앗아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이렇게나 핏기가 없었나. 류제는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곧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그래, 그래야지.”
이것이 그녀의 최후다. 군주급 마족과 싸우다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니 군인으로서 영광이지만 남아있을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나라카에서 돌아오지 못한 백장미 부대 부하들, 아픈 손가락인 네네 슈만과 류제, 칠푼이 왕녀까지. 전쟁이 한창일 때 부재해야 하다니 미안하다. 이것이 오랜 기간 몸을 혹사시켰던 그녀의 숙명인가도 싶다.
“한 가지… 부탁해도 괜찮겠느냐.”
“네, 뭐든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대령님.”
류제가 포르테의 상처를 지혈해 보려 하지만 ‘힐링 팩터’로도 막을 수 없는 상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강화’ 어빌리티로 타인을 도와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최후를 느낀 류제는 사람의 목숨이란 이토록 쉽게 바스러진다며 탄식을 삼켰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에게…….”
그녀는 이내 아쉬움의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아련함. 남편을 만났던 그때 잡은 생명줄로 꽤나 오래 버티지 않았나. 그러니 포기해야 할 때를 아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슴을 저몄다.
“나를 잊지 말라… 전…해…….”
끝내 힘을 잃은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포르테는 숨이 멎었다. 잊지 말라. 그것이 인류의 영웅이라 불린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유언이다. 재경으로 인해 빗나가 버린 운명으로 맞이한 죽음이지만 실로 영웅다웠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전해줄게요.”
샘이 망가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친 류제는 결심했다. 뒤늦게 달려오는 군인들과 들것을 가진 의무대를 저지한 그는 포르테의 눈을 감겨주었다. 수녀 루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전쟁을 끝내고 반드시 돌아갈게요, 들라크루아 대령님. 저도, 대령님도 소중한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포르테의 사망을 인지한 사람들이 격정으로 술렁거렸다. 등급1의 병마의 소멸과 이어진 영웅의 죽음. 펠노아의 희비가 엇갈렸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차례차례 기도를 올렸다. 이제 뭐든지 해결해 주는 스승 없이 홀로 서야 할 때다.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죽음은 예견에 없던 일이다. 키아나트리체가 병마의 군주가 소멸한 줄 착각했던 이유는 중간 보스전 마지막에 오지 않아야 하는 왕녀의 친위대가 병마의 군주를 박살 냈기 때문이다.
해피 엔딩이라면 이 전투 후 나콜렙시와의 복수전에서 크게 부상당한 포르테는 전쟁이 끝나고 은퇴해 제자를 양성하는 데에 힘쓰고 남은 생을 가족과 행복하게 산다. 이른 그녀의 마지막이 류제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까.
기도를 마친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족들은 마왕에 왜 이리도 집착하며 왜곡된 사랑을 갈구할까. 미나의 생각이 무엇인가. 반격의 도화선을 붙잡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 * *
병마의 위협을 물리친 펠노아 피난민들은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키아나트리체는 여전히 마족의 총공격 속 혼돈에 잠겼다. 펠노아뿐만 아니라 마족이 나타나는 어떤 곳에서든 사람들은 노획되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추억의 물건인지 생존 필수품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짐들이 염화에 잡아먹혀 심지가 되었다. 소중히 간직해 오던 현실에서 강제로 박탈된 채 길 한복판에 쓰러진 피난민 무리는 하나의 산 같았다.
그 위에서 크게 기지개를 켠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이 화마의 군주에게 나지막이 사실을 전했다.
“율폰, 마가릿이 느껴지지 않아.”
분파의 군주급 힘을 가진 마족의 혼이 사라졌다. 같은 사천왕인 그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마기의 행방불명. 여정을 함께해 왔던 병마의 군주가 소멸했다. 예기치 못한 상실에 나콜렙시는 동요한 듯했다.
“어째서일까. 고작 나들이였을 텐데.”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 율폰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마가릿이 죽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을 처리한 그녀가 류제 신리를 빼돌리려는 플로냐의 작전을 엄호하려 했던 건 알았다. 율폰은 펠노아에 마가릿을 상대할 만한 인간이 남아있었나 헤아려보았다.
병마의 군주와 맞붙을 수 있는 어빌리터는 손에 꼽는다. 친위대를 이끄는 니냐롯트 왕녀는 다른 본부에 있다. 류제 신리는 플로냐가 붙들고 있을 거고 가장 방해되는 전력인 백장미 부대는 나라카에 있다.
다른 어빌리터들도 뿔뿔이 흩어져 마족과 대치 중이다. 하물며 제3국의 나약한 기간트리카로는 역병 마법을 막을 수조차 없다.
인간의 주제넘은 술수에 당한 게 분하다 한들 핵이 소멸한 마가릿을 되돌리지 못한다. 율폰은 오랜만에 과거가 떠올랐다. 마왕이 마가릿을 데리고 나라카로 왔을 때 보았던 그녀의 증오가 율폰은 마음에 들었다. 지식을 갈구하는 자세도 쓸모가 많았건만.
마족은 단독 행동 성향이 강해 로라 하놋이 마왕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사천왕이 작당하여 부활을 계획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실감을 원해서 마족이 된 건 아닌데 말이야. 율폰은 들고 있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이 러다이트가 마가릿의 마지막 물건이 되었다. 연구를 좋아하는 마족도 없거니와 그녀만큼 강한 병마족의 자리도 비었다. 마왕님이 부활하면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시시해. 왜 큰일을 앞에 두고 죽어버리는 거지?”
크게 입을 벌린 니켈은 피곤함이 묻어 나오는 하품을 했다. 마족이 되고 천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율폰보다 더 많이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그녀는 오랜만에 적적했다. 그 모습이 의외라 검붉은 화염으로 인간을 잡아먹던 율폰이 우적거리는 ‘연소 인자’를 달래며 물었다.
“슬픈가. 얼마 남지 않은 동족이 목적 달성을 앞에 두고 죽음을 마주해서.”
“슬픔? 마왕님이 없는 지금이 슬퍼서 슬픔이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어.”
“그럼 증오스러운가. 동족을 죽인 인간들이.”
“마왕님이 없는 현재가 증오스러워서 증오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어.”
지루함을 피해 오랜 기간 잠을 자온 그녀는 마족을 이루는 근본의 감정도 망각해 갔다. 오랫동안 끌고 온 증오는 모서리가 마모되었고 슬픔은 침체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강하지만 삶에 대한 집착은 사라진 지 오래다.
“곁에 마왕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쓸쓸하니까. 마왕님도 돌아왔을 때 내가 없으면 쓸쓸해할 거야. 그래서 여기에 있을 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샐러맨더의 왕.”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마왕만 있다면 붙잡아 둔 어빌리터들로 마족을 부흥시킬 수 있다. 마족이 늘어나면 그들이 없더라도 마왕님은 혼자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줄 마족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들을 향한 개인적인 복수의 끝을 위해서 율폰은 이 계획에 동참했다. 그 점에선 나콜렙시와 달랐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마왕의 부활체를 나라카로 데려가기로 한 플로냐가 예정대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마왕이 부활한 기미가 없다. 이 기묘한 지연이 마가릿이 죽은 이유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왔어.”
나콜렙시가 누워있던 인간의 몸뚱이에서 돌연 손 하나가 빠져나왔다. 수마의 수면 마법으로 잠든 사람들을 악몽의 통로로 이동한 미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인간의 육체에서 빠져나왔다.
만일 그녀가 마왕을 손에 넣었으면 나카라로 갔을 터. 늘 여유가 넘치던 율폰이 지체 없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마왕의 부활체가 도망쳤어. 망할 렌 지미.”
마가릿이 소멸한 지금, 달갑지 않은 보고에 율폰이 혀를 찼다. 눈살을 찌푸리자 성난 도베르만처럼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차례로 일을 그르치는군.”
율폰보다 더 분한 자는 미나였다. 감정이 흐트러진 그녀가 바득바득 벼렸다. 인간의 악몽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그녀는 증오를 잠재우지 못해 괴상한 비명을 질러댔다.
자세한 걸 물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지만 나콜렙시와 율폰은 그녀의 실패가 불러온 파장이 더 거슬렸다.
“있지, 플로냐. 마가릿이 죽었어. 왜 그랬을 거 같아?”
“나는 네 실패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만.”
“닥쳐!! 나도 류제 신리를 붙잡기 직전이었어. 그 개 같은 인간 나부랭이가 류제 신리와 바꿔치기하지 않았더라면 부활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알라마니 기술관에 있는 그걸 안 부수다니. 마가릿 그년이 죽은 건 자업자득이야. 산책 나간 개처럼 굴다가 실수한 건 그년이니까!”
분노를 표출하며 소리치는 미나가 새빨간 동공을 부라렸다. 사방에 흐트러지는 ‘악몽 인자’가 밀도 높게 축적되었다.
그자 때문에 또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망쳤다. 지금까지 렌 지미가 망쳐놓은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렌 지미. 네 입에서 자주 들어본 인간인데. 전에 처리했다 하지 않았나?”
“그렇게 믿었지. 어차피 하찮을 테니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인간이 말도 안 되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었어. 미래를 보는 어빌리티라고? 그걸 써서 사사건건 위험을 회피하고 내 일을 방해했다니!”
“미래? 호오, 무지렁이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았군.”
인간 주제에 의태한 서큐버스를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 율폰이 직접 확인했을 때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미미한 존재감에 플로냐의 눈이 옹이구멍이라도 된 줄 알았건만. 지금껏 우리 일이 잘 풀렸던 이유는 미래를 보는 그가 역전의 한때를 기다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망간 마왕의 부활체가 마가릿을 죽인 것이겠군.”
“불쌍한 마가릿. 마왕님의 손에 소멸하고 말다니.”
나콜렙시가 고개를 숙였다. 인간을 향한 증오를 토대로 마왕의 손에 부활한 마가릿이 인간이 되어버린 마왕에게 살해당하다니 슬픈 일이다.
흩어진 마족들까지 총동원해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마왕 부활의 시도도 실패했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틈만 나면 반전을 꾀한다. 그게 심술이 날 정도로 거슬렸다.
“류제 신리야 다시 붙잡으면 돼. 다음번엔 실패란 절대 없어. 나라카로 유인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겠군.”
“‘옵시그나티오’는?”
“파괴당했어.”
“쯧. 마가릿이 없는 지금 남은 건 ‘러다이트’뿐인가. 내구도가 별로인 건 여전하군. 미래를 볼 줄 안다는 방해꾼은 어떻게 되었지? 설마 멀쩡히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가만히 뒀을 거 같아? 이제 다시는 방해할 수 없게 했지. 진작 내 손으로 처리했어야 했어. 더러운 피가 싫다는 결벽증이 일을 번거롭게 할 줄이야.”
“조금 아쉽군. 새삼 궁금해졌거든. 그는 어떤 미래를 점쳤지? 우리 마족은 승리를 거머쥐게 되나?”
“그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진작 들어갔어!”
그건 그녀도 알고 싶었던 정보다. 하지만 정신 방어력이 강한 그 때문에 이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다른 인간을 찾아야 했다.
미나는 짜증 나는 말을 지껄이던 렌 지미의 지독한 면상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마왕님이 부활해도 너 따위는 절대 마족으로 만들지 않아. 거기서 홀로 처참하게 죽어가라지.
“그래, 좋은 생각이 났어.”
무언가 떠올린 미나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렌 지미를 인질로 쓸 것도 없다. 쓸모없어진 미노타군을 이용하는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율폰, 너도 도와. 그 인간들에게 갈 거지?”
“실패를 남의 힘으로 극복하면 쓰나.”
“잔말하지 마. 그래서 싫다는 거야?”
미나가 노려보자 율폰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질린 나콜렙시는 턱을 괴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마족 부흥을 위해 시작한 일이 마족을 더욱 큰 멸망의 구렁텅이로 내밀고 있다는 생각은 괜한 불안일까. 한시라도 빨리 마왕이 부활한다면 이런 불안도 희미해질 테지만 나콜렙시는 어쩐지 미래가 두려웠다.
“플로냐, 그 인간을 이용하면 류제 신리를 더 쉽게 마왕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거 아냐?”
“그 인간이라면, 렌 지미?”
“몰라. 내가 꿈의 핵으로 만들었던 그 인간.”
한때 재경을 인질로 삼아 마왕의 부활체를 농락했던 나콜렙시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슬아슬해 보였던 류제 신리를 떠올렸다. 교양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짐승 같은 증오였지만 지금은 급한 만큼 마기를 자극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렌 지미를 이용하는 건 실패 확률이 더 높아. 그 인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어버리거든. 저번 백마의 군주 건으로 확실해졌어.”
렌 지미는 류제 신리를 마왕으로 타락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인간으로 있도록 만드는 자이다. 그자의 위험함을 익히 아는 미나는 그 때문에 일부러 재경을 전쟁에서 제외시켰다.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정보가 앞에 있으면 인간이라는 믿음이 더 강해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고 싶었다.
“네 시련은 마왕님의 인간으로서의 의지만 강해지는 것 같아.”
미나가 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콜렙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님이 인간이고 싶어 한다라. 천 년간 수마 니켈의 왕으로 있어온 나콜렙시는 인간에게 증오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과거를 떠올렸다.
인간일 무렵 그녀는 마왕과 피가 이어지지 않은 여동생이었다. 기록되지 않은 왕조가 있던 먼 옛날. 인간들이 이보다 더 어리석고 야만적이었을 때. 배움이 없고 성찰이 부족한 인간들이 동화 속에나 나오는 환상의 존재, 드래곤의 전승을 더 잘 알았을 무렵의 이야기다.
그때는 어빌리터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빌리터는 마족들을 상대하는 특이능력자를 일컫는 말이니까. 인간들은 이상한 능력을 타고나는 여자와 드물게 나타나는 남자 어빌리터를 통틀어서 ‘마녀’라고 부르거나 혹은 ‘악마의 종자’라고 했다. 명명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능력은 평범한 인간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름을 배척한다. 당시엔 어떤 능력을 가졌건 상관없이 이상 능력이 발현한 마녀는 반드시 사냥당했다. 마녀의 피는 후대에 이어져 또 다른 능력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도망간 마녀들은 외딴곳에 마을을 만들어서 그들끼리 살아갔다. 흩어졌던 드래곤의 피가 모여 거기에서 마왕은 태어났다.
인간이었던 마왕의 능력은 빼어났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마녀들은 전설이 맞았다며 술렁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의 유래에 관한 노래다.
태초에 드래곤이 있었다. 드래곤은 자연이 만들어낸 정령이다. 그 정령과 교감하는 인간 중 기적적으로 기운을 수태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낳은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 ‘용인’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용인은 인간과 사고가 비슷했다. 그렇기에 인간을 미워하며 사랑했다. 용인과 인간 사이에도 자식이 생겼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으며 극히 일부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드래곤의 힘이 인간에게 흘러오며 지금의 어빌리터가 되었다.
늙지 않는 용인도 드래곤의 힘을 사용했지만 정령처럼 윤회할 수 없는 혼을 가졌다. 긴 시간 인간에게 토벌당한 용인들 중 단 한 명의 용인만이 혼의 윤회를 탔다는 노래 가사. 정말로 윤회한 용인이 맞는 것처럼 인간이었던 마왕에게는 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났다.
그는 고대에 존재했던 정령이 그랬던 것처럼 드라코니스 입자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몸에 흐르는 특별한 기를 이용해 파장이 맞는 부분만 입자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보통 어빌리터와는 달리 지금의 인간들이 슬렉터에서 기간트리카를 호출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만들고 바꾸는 힘이 있었다.
그는 전능했지만 평범했다. 행복을 원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마을에는 다양한 어빌리터들이 모여 살았다.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나콜렙시의 어머니는 ‘기압’을 다룰 줄 알았고 그녀의 이웃사촌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불을 다루는 친구, 손을 잡으면 찌릿한 동생, 바람을 다루는 언니, 마음을 사로잡는 촌장님.
마족이 되기 전 그녀 본인의 어빌리티는 뭐였더라. 그래, 닿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몰래 인간과 어울리던 마왕은 결국 배신당했다. 그들의 마을은 군대를 이끈 인간들에게 토벌당했다. 가족 같은 그녀들은 인간들에게 차례차례 살해당했다.
죄책감과 증오와 슬픔에 미친 나머지 그는 각성했다. 새로운 몸을 얻은 그는 마녀들을 물어 잠재된 용인의 육체를 일깨웠다. 인간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강에 빠져 숨이 멎었던 나콜렙시도 눈을 떴다.
옅지만 또한 용인의 피를 이은 그녀들은 마왕의 힘으로 인간에서 벗어났다. 뿔이 생기고 드래곤의 날개가 생긴다. 인위적으로 일깨워진 그녀들은 진짜 용인인 마왕과는 달리 길쭉하지 않은 붉은 동공을 가졌다. 새로운 육체를 가진 대신 부서지기 쉬운 혼을 얻고 생식기능을 잃었다.
혼이 떠나기 전 육체를 되살린다 해도 생존 본능이 필요하다. 그는 그것을 증오로 심었다. 인간들을 향한 증오만 있다면 살 수 있다. 가짜 용인들은 마족이라 명명되었고 그는 마족의 왕이 되었다.
인간을 향한 증오를 바탕으로 마족의 강함이 결정된다. 나콜렙시는 인간이 너무 미웠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강물에 빠진 그녀는 몸이 가진 수분보다 많은 양의 물을 들이켰다. 정신이 혼미해지니 불합리함과 증오와 미움을 물 대신 들이켜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만큼이나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천 년 가까이 증오만으로 살아가기에 그녀는 지쳐버렸다. 긴 시간을 잠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증오는 다 타들어 간 양초처럼 약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마왕님이 돌아오면 해결될 문제겠지.”
백여 년 전 로라 하놋에 의해 강제로 마족의 육체가 붕괴당했던 마왕의 모습에서는 나콜렙시처럼 어떠한 의욕도 없었다. 인간으로 되돌아간 잠깐의 여흥이 부활한 마왕에게 새로운 바람이 되어 상처받은 그녀들을 상냥하게 품어주기를 나콜렙시는 소중하게 바랐다.
“분명 그럴 거야.”
오늘도 나콜렙시는 마왕이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돌아와 그녀에게 새로운 증오를 심어줄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 혼자만 이 끊임없는 굴레에 영원히 갇힐 거라는 두려움이 가시질 않을 거다.
* * *
펠노아에서 있었던 전투의 짤막한 보고가 오간 제1 작전사령부는 안도와 침통이 교차했다. 소식을 받고 힘이 빠진 니냐롯트는 주저앉아 고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혹하게도 지금은 슬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포르테가 지켜낸 생명을 무의미하게 잃지 않도록 현실을 받아들인 니냐롯트는 마음을 추스르고 묵묵히 류제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군주급 마족과의 상세한 전투 보고를 위해 류제가 펠노아에서 제1 작전사령부로 귀환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기간트리카 부스터를 천천히 줄이며 지면에 착지한 그는 장갑을 해제하며 걸어와 왕녀의 앞에 섰다.
“충성. 소위 류제 신리, 펠노아에서 지금 복귀했습니다.”
“수고했다.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의 위치는 지금 어디쯤이지?”
“제5 보병대대 2중대와 함께 순조롭게 이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사륜구동차로 이동하는 관장님을 포함한 안전상의 인원을 제외하면 네 시간 내로 도착할 거라 예상합니다.”
영웅의 사망에 동요하는 감정을 숨겨낸 니냐롯트가 침착하게 류제의 경례를 받아주었다. 반면 미나의 술수에서 극적으로 벗어나 펠노아에서 포르테와 병마의 군주를 무찌르고 왕녀의 앞에 선 류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한꺼번에 경험한 나머지 지친 정신이 얼굴에 드러났다.
“대대장님은?”
상공에서 착지하면서 왕녀의 주변에 낯선 이들이 얼쩡거린다 싶었더니 백장미 부대원인 네네 슈만과 늑대 귀 루비니 아로즈네그 등이 그에게 다가왔다.
“임시로 펠노아 국립묘지원에 안치를 부탁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육신은 펠노아에 남았다. 떠나기 전 간소하지만 피난민들과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의 도움으로 임시 장례식을 치렀다.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조그마한 무덤 주변에 모여 묵념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라우라 축제의 행렬처럼 장관이었다.
“정말로 그 전투에서 전사하신 건가. 그분께서…….”
“소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해달라. ‘힐링 팩터’가 떨어졌던 거냐? 아니면 대령님께서 등급1의 병마에게 즉사하시기라도 했단 말이냐.”
포르테도 물론이고 나라카에 있어야 할 자들이 키아나트리체에 있다. 역시 마족에 대항해 그가 모르는 비밀 작전이 펼쳐졌던 모양이다.
덕분에 포르테와 함께 펠노아에서 병마의 군주를 죽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구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과 행복보다도 그녀는 다른 사람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이라 불리기에 걸맞은 위인이지만 인간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죽음을 바라는 자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그의 탓은 아니지만 목소리가 처연하게 떨려왔다. 영웅이 병마 페스트와의 접전에서 사망했음을 시인하는 류제의 눈에서 분함이 흘러나왔다. 모두 자신의 잘못 같았다.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어두운 마음이 꿈틀거리지는 않았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한 그녀의 마음이 명예로웠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이전과는 다르기 때문인가. 마왕이었던 그는 왜 인간인 마가릿을 마족으로 만드는 선택을 해야 했을까.
“그럴 수가. 대령님. 하아.”
“내가… 내가 펠노아에 있었어야 했는데.”
한탄이 터져 나왔다. 군인은 매 전투마다 목숨을 건다지만 포르테만큼은 항상 제자리를 지켰기에 강한 백장미 부대의 지지대가 되었다. 네네는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허망하게 죽을 거라 여기지 못했다. 도리질 치며 분을 삭인 네네 슈만은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물었다.
“그분의 마지막은 긍지로 빛났나.”
“네, 부끄러움 없는 최후였습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유리에의 죽음에 세라를 탓했던 것처럼 류제를 탓할 것 같던 그녀는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는 왕녀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피했다.
가족도 잃고 소꿉친구도 잃고 포르테 들라크루아로 말미암아 백장미 부대로 온 네네 슈만은 깊은 상실감에 가슴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믿고 따르는 스승마저 사라졌으니 그녀도 이제 홀로 서야만 했다.
“대령님, 전쟁이 끝나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엄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지만 인간이라는 자부심과 부하들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분이었다. 다른 백장미 부대 대원들은 물론이고 루비니 아로즈네그도 늑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애도를 표했다. 호세마타 요새로 가면 고함을 치며 그들을 타박하는 포르테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강한 분마저 땅의 품으로 돌아가다니. 마족은 두렵고 무서운 자들입니다.”
존재감 없이 니냐롯트의 옆에 있던 하늘바람이 잠깐이지만 포르테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키아나트리체로 건너와 간신히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접선하고 몇 날 며칠 앓아누운 그도 그녀의 강인함에 감명받았던 때가 있었다.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기에 하늘바람은 그녀가 없는 미래가 어둡게만 보였다.
“저쪽은 외국인으로 보이는데.”
왕녀와 함께 있는 피부가 어두운 남자를 흘긴 류제가 작게 질문했다. 니냐롯트가 대답해 주기 전 시선을 알아차린 하늘바람이 류제에게 먼저 악수를 권했다.
“미노타의 셋째 왕자 하늘바람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왕족분이셨군요. 예법을 모르니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키아나트리체 기간트리카군 소속 소위 류제 신리입니다.”
“아닙니다. 니냐롯트 왕녀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류제가 떨떠름하게 하늘바람의 악수를 받았다. 꽤 최근까지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류제는 왕녀와 비키는 물론이고 나라의 높으신 분들과 엮이는 인생이 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당장 앞에 있는 사람이 타국의 왕자라니 실감도 안 날뿐더러 왕실 예법에 무지한 그가 어쩌라는 식으로 멀뚱히 서있자 니냐롯트가 적당히 나서주었다.
“그 덕분에 마족의 계획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와 함께 미노타군의 세뇌를 풀기 위해 노력 중이시지.”
“그러셨군요. 왕자님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나쁜 버릇이지만 그가 어느 나라의 왕자이고 무슨 일을 하건 썩 관심 없는 류제가 무감각하게 그를 흘겼다. 이미 자신의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서있는 것도 고작이었다.
“아…아닙니다. 저는…….”
커다랗고 훤칠한 청년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하늘바람은 자신의 비루함과 비견되어 부끄러웠다. 류제의 어빌리티와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이 보통 제립학교 졸업생들보다 뛰어나다는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외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남성미가 느껴지는 짙은 눈썹과 그 아래에 머무른 푸른 눈동자, 조심스레 드러난 날 선 콧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특히나 며칠 샤워를 하지 못해 화약과 땀에 전 새까만 머리카락은 얼굴의 반절을 가려버렸지만 미지의 존재를 향한 기대감을 슬금슬금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형상이었다.
기간트리카 컨트롤을 위해 몸에 밀착하는 소재로 만든 특수 군복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에 달라붙어 남자인 그에게조차 눈의 호강이었다.
“사령관님께는 비밀리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하늘바람을 지나친 류제는 포르테의 죽음에 충격에 빠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니냐롯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단둘이 있고 싶다는 말이다.
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굳건한 단결감에는 비집을 틈이 없어 보인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에 하늘바람은 주눅이 들었다.
“보고를 들어야 하니 잠시 실례하지. 그대들은 왕자님과 알라마니 기술관 생존자들과의 접촉을 부탁한다. 기술관장이 오기 전에 의무대원과 그들을 도와줄 군인을 배치하도록.”
“예, 맡겨주십시오.”
하늘바람과 백장미 부대원들을 뒤로한 두 사람은 작전지휘실 막사로 향했다.
사람을 물리고 막사 안에 들어올 때까지 말이 없던 류제가 먼저 의자에 주저앉았다. 니냐롯트에게 사령관으로서의 예를 다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지쳤다. 미나의 배신에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병마와 전투를 하였고 포르테를 잃자마자 펠노아에서 이곳 북동부 기지까지 일주일 동안 이동하느라 진이 빠졌다.
“그대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어. 통신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대라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나는 무사하지만 들라크루아 대령님은……. 너도 그분의 도움이 절실했을 텐데.”
“유감스럽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니냐롯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르테를 귀족파의 허를 찌를 비장의 무기로 남기고 싶었다. 황제의 검이었던 포르테와는 처음 손을 잡았지만 그렇게나 듬직한 무기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었다.
“미안. 내가 약해서.”
“그대는 강하다. 그대가 아니라 내 욕심이 화를 부른 거겠지. 그러니 탓하지 마라. 그대는 최선을 다했어.”
니냐롯트가 류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도 포르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키아나트리체를 구할 도구라고 스스로를 칭했던 포르테는 위험을 무릅쓰고 니냐롯트의 계획을 군말 없이 도왔다. 포르테가 왜 자신을 도구라 칭하기에 머뭇거림이 없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의미 없는 정치 놀음에 발 담가 시간을 허비할 바에는 자신의 신념에 맞는 사람의 도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처음엔 폐하였고 지금은 나였다. 포르테의 진심에 드디어 한 발짝 다가갔다 여겼는데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잃다니 아쉬움이 싹텄다.
“늘 건강해 보여서 몸이 아프셨을 줄은 몰랐어. 마족과 전투를 하는 동안 힐링 팩터를 과하게 맞았나 봐.”
“…‘대가’와 더불어 우리 어빌리터가 가지게 되는 고질적인 질병 중 하나지.”
“알고 있었어?”
“검진표를 보고 예상만 했다. 그녀는 약점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호세마타 요새로는 키아나트리체 ‘힐링 팩터’의 총생산량의 쿼터에 버금가는 정도가 이동한다. 그만큼 소비가 많다는 뜻이다. 그 약물은 기적적으로 치명상을 낫게 하지만 자주 사용하다간 남은 생명을 잘라내어 바치는 정도의 대가가 필요했다.
특히 미성년자에게 치명적이지만 정기적인 해독 기간을 주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포르테 정도의 나이에도 상처가 아물지 못하는 증상이 발현되며 끝내 조그마한 충격에도 몸이 부서져 버린다. 제립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어빌리터가 요절하는 이유 중 하나다.
포르테가 죽는 모습 등을 떠올리며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던 류제는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바른 자세로 돌아왔다.
“아까 미노타의 왕자란 사람은 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아무래도 미나의 건 때문에 낯선 사람은 의심이 먼저 들었다. 특히나 그들을 선제공격한 미노타의 왕자이니 류제 입장에서 못마땅한 건 당연했다.
“말대로 미노타 왕실이 마족에게 세뇌당했을 때 몰래 도망쳤다고 한다.”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안전한 사람이야?”
“들라크루아 대령이 믿은 사람이니 의심하고 싶지 않아. 병약한 몸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세뇌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뇌되지 않았다는 말만큼은 진실이다.”
“네가 하는 말이니 신용하겠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가 있다면 세뇌가 풀린 미노타군도 배신자 꼬리표 없이 마족과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타국의 군대를 내가 움직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서로 이용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왕녀가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는 미노타의 왕자가 아니라 류제 바로 그였다. 전쟁은 병마의 군주를 해치운 걸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
세뇌된 미노타군이나 키아나트리체를 뒤덮은 마족하며 수두룩한 문제들은 모두 한곳으로 귀결된다. 비밀을 간직한 그는 늦었을지언정 회피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만 깨어나고 싶었다.
“미노타군의 세뇌는 풀어보려 하지만 성공률이 낮아. 세뇌를 완벽하게 해제하는 건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만 한시가 급하구나.”
“성공률? 일정한 확률로 마족의 세뇌를 풀 수 있다는 거야?”
“대단치도 않다. 3할에 불과하니. 나의 어빌리티로 뇌에 충격을 줘서 일순 정상으로 되돌리는 거다만 능력이 능력이라 부작용을 염려해 보류 중이지.”
“그래도 세뇌를 해제하다니 대단하네. 네 어빌리티에 그런 능력이 있었을 줄은 몰랐어.”
“덕분에 나도 세뇌가 풀렸으니 썩 괜찮게 써먹은 셈이지.”
“뭐?”
류제가 되물었다. 왕녀도 세뇌를 당했었다고? 소위로 진급한 후 지금껏 몇 번 만나왔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놀란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날 뻔하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니냐롯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의태한 마족에게 기억을 봉인당했었다. 어쩐지 위화감이 들어 예의주시했다만 그대가 몹쓸 짓을 당하기 전에 기적적으로 풀렸으니 망정이야.”
“미나 플로리아. 그 마족은 나뿐만이 아니라 너까지 괴롭히는구나.”
치밀한 미나의 술수에 류제는 짧은 감탄사를 삼켰다. 호세마타 요새에 있던 그에게 니냐롯트가 마족의 정체를 간파해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도 미나를 반신반의만 했을 것이다.
왕녀의 세뇌에 대해선 짐작 가는 언행이 몇 떠올랐다. 그래서 렌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어봤던 거구나. 렌이 마족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그 상황에서도 믿었던 건가. 류제는 왕녀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건 나를 놓친 미나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거야.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 반드시 그러겠지.”
“아직도 의문이군. 그녀는 어째서 그대를 노린 것일까. 마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누구보다 강한 어빌리터를 원한 건가. 본능에 충실한 마족이면서 계획적인 움직임이 보여.”
“마족을 만들어낸다니? 너 설마 마족이 원래 어빌리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비키 셀로니아의 공이지. 며칠 전에 그녀와 함께 마왕만이 마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추론했다. 그대에게 말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다니 의외군.”
“2학기 시작했을 때 일이야. 비키가 나와 렌에게 도와달라 부탁했었어. 안일하게 흘려 넘겼는데 그때 분명히 알아야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1년 동안 그의 근처를 맴돌며 농락한 마족 미나 플로리아가 류제의 곁에 있었던 이유. 본디 인간이었던 마족. 마족을 만들 수 있는 마왕. 이 연결고리를 위해 류제는 굳게 다짐했다. 진실을 피하기만 해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왕에 관련된 일이야. 너와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을 모아줘. 비키와 세라 선생님, 유네 정도가 있었으면 좋겠네.”
“그 세 사람은 왜지?”
“적어도 그들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싶지 않으니까. 널 포함해서.”
니냐롯트와 류제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왕녀는 그의 눈동자를 파헤침으로써 의도를 알아차리려는 듯했다. 고요한 은색 눈동자가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엇을 밝히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만 우연찮게도 그 세 명 모두 이곳에 있지. 기다려라.”
슬렉터를 들어 보인 니냐롯트가 통신으로 원하는 내용을 전달했다. 툭 끊기는 무전 소리가 이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류제가 떨리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