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4)
왕녀의 통신을 미나의 것이라고 착각한 류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미나! 무사해?”
―…로 지직 펠노아로 가야 한다. 제발 응답하라!
“왕녀?”
통신은 미나의 것이 아니었다. 하필 이럴 때 왕녀가. 며칠간 연락이 없던 그녀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 구하기에 눈이 먼 류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펠노아라니 안 돼. 지금 호세마타 요새에 미나가… 설명하기 복잡한데 위험해!”
―…미나라면 지직 …리아를 말하는 건가?
본부와 멀어질수록 통신 상태가 더 나빠졌다. 이동이 빨라질수록 니냐롯트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통신이 끊겼다 다시 연결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왜 그녀가 호세마타 지직 …있지?
“백장미 부대 귀환 백업. 네가 명령한 일인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니냐롯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백장미 부대 귀환 백업 명령? 백장미 부대의 행동 명령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했다. 귀환 작업은 기밀이었던 것은 물론 다른 중대에게 백업을 명하지도 않았다.
서큐버스의 세뇌 때문에 수많은 실수를 저지른 그녀라도 호세마타 요새라면 똑똑히 기억한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피신한 이후 아무 부대도 접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가. 백장미 부대는 이미 귀환한 데다 나머지는 나라카에서 첩보 활동 중이다!
니냐롯트가 남들이 들을까 작게 반박했지만 잠깐 사이에 또다시 통신이 불안정해졌다. 영문을 모르는 소리를 하는 류제. 펠노아로 다가가는 마족. 통신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답답해진 니냐롯트가 평정심을 잃고 책상을 내리쳤다.
“류제, 똑똑히 답하라!”
멜가로스크 자작이 꾸민 일인가? 펠노아에 류제 신리를 보내지 않고 다른 기간트리카 부대를 보내기 위해? 이 어리석은 자 같으니. 마왕 다음으로 강한 등급1의 마족이다. 군주급으로 분류된 이상 그것들은 나라를 멸망시킬 최상위 개체의 괴물이었다.
제립학교 학생들이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지 분파의 군주급이 강림하면 펠노아처럼 큰 도시는 하룻밤 새 소멸할 것이다.
“사령관님, 펠노아로 향하는 마족 분파가 병마족으로 특정되었습니다. 역병 인자에 감염된 연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알라마니 기술관 생존자들과 접촉 시도했던 중앙지휘통제부 통신소대는 간신히 얻어낸 목격 증언으로 펠노아로 향하는 마족을 판별했건만 추가되는 소식은 절망만 가중시켰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행운을 바라서도 안 되는 것인가. 등급1의 마족 중에서도 인간 살해를 즐기는 병마의 군주라면 더더욱 류제 신리가 필요했다.
“병마족의 군주는 제립학교에서 퇴치한 것 아니었나?”
참모는 그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달받은 외견의 군주급 병마는 처리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괴물들이군.”
대마족 결계가 있는 기술관 보안실을 찾아 전략적으로 망가뜨릴 정도로 인간들의 기계를 잘 이해하는 점과 순식간에 건물 안을 점령한 강한 역병 인자만 보더라도 썩은 늪 색 머리칼에 오래된 복식을 하고 있는 뒤틀린 날개가 떠오른다.
“그 괴물이 죽지도 않고 또 살아 돌아온 게지.”
니냐롯트도 친위대들의 손에 망가졌던 병마의 군주를 떠올렸다. 제립학교에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마족의 발버둥에서 광기를 느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대부분의 학생과 교사들이 연휴로 본가로 돌아갔을 때였다. 그녀가 끝내 도움을 주러 가지 않았더라면 학교에 남아있던 소수의 학생들과 교사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 괴물과 또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이제는 그 정도의 병력이 준비되지 못하는데. 막지 못하면 발생하는 피해는 수백 배는 더 컸다.
“……!”
니냐롯트는 기묘한 꺼림칙함이 스쳤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텅 빈 미싱 링크가 있었다. 잠깐, 내가 어째서 그날 병마의 군주를 막을 수 있었던 거지?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비녀가 망가져 기분이 우울했던 체육대회 다음 날. 왕궁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멀쩡한 비녀를 가졌던 이유나 이튿날 친위대들을 이끌고 학교로 향한 이유를 떠올리자니 점점 심장이 조였다.
비녀는 누군가가 고쳐주지 않았었나? 그게 류제 신리였던가. 아니면…….
세뇌가 일부분 깨질 때 느꼈던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평화로웠던 가정의 달 연휴 제립학교에 병마의 군주가 학교에 쳐들어온 건 학교 밖의 사람은 누구도 몰랐다. 이상을 알릴 경비병이 모두 살해당한 데다 봉인마법으로 학교 전체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학교를 지켜줘!”
외롭게 그녀를 붙잡고 부탁하던 누군가의 외침이 안개를 걷어냈다. 꼬투리를 잡은 진실을 통해 최초의 열쇠가 풀렸다. 진심으로 앞일을 걱정하는 햇빛색 눈동자에는 열의와 갈망이 담겼다.
체육대회가 끝난 후 병마의 군주가 쳐들어올 것을 감지한 렌 지미. 그가 왕궁으로 돌아가려던 그녀에게 막무가내 부탁을 했고 그 말을 곱씹으며 고민하던 그녀가 늦기 전에 움직인 덕분에 병마의 군주를 물리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했던 자신이 한심해질 정도로 공백이 채워졌다. 향초, 비녀, 불면증, 마족, 전쟁. 물음표로 이어졌던 마인드맵에 글씨가 새겨졌다.
렌 지미는 마족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동이 힌트였다. 그는 마족의 속셈을 미리부터 파헤치고 그녀에게 알려주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번개가 쳤다. 니냐롯트에게 걸렸던 세뇌가 완벽히 풀렸다. 렌 지미가 신경 쓰였던 이유. 렌 지미가 알고 있던 것. 그가 전쟁에 반대했던 이유.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학교에 마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렌 지미는 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그가 잠시 머리가 이상해졌던 내게 반박하다 끝내 교실에서 여론을 뒤집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그러지 마.”
“너… 네…네가… 네가……!”
그때 그의 분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 돌아갔다. 그가 돌연 아무런 관련이 없던 미나 플로리아의 멱살을 잡았던 사건을 기억한 니냐롯트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명령한 적 없는 백장미 부대의 귀환 백업과 니냐롯트 그녀의 명령을 받고 호세마타 요새에 갔다는 미나 플로리아. 거짓말처럼 순백했던 그녀의 뒷모습.
그가 알고 있던 마족의 정체는―
“미나… 미나 플로리아!”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 힘이 풀린 니냐롯트는 지휘봉을 떨어뜨릴 뻔했다. 믿을 수가 없지만 분명 그것이 진실이었다.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 머리를 저은 그녀는 혼미해진 정신을 차리고 류제에게 반복적으로 통신을 시도했다.
“류제… 류제 신리, 당장 돌아와! 그대가 가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다. 적의 함정이란 말이다!”
―…지직 …지지직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렌 지미가 이다지도 노력했는데 무지한 그들은 마족의 뜻대로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말았다.
기간트리카 부스터를 최대한으로 ‘강화’해 성능을 끌어올린 류제는 남들보다 빠르게 호세마타 요새에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호세마타 요새의 돌바닥 훈련장 구석에 미나가 홀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구울이 되어버린 중대원들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미나!”
“류제, 와줬구나… 꺄악!”
“조심해!”
기간트리카가 망가진 미나가 구울에게 물어뜯길 순간 류제가 돌려 차기로 구울의 머리통을 날렸다. 머리가 잘렸어도 끝까지 꿈틀거리던 구울의 손에 차인 슬렉터와 피범벅인 군복은 이전까지 함께 인사했던 미나의 중대 마크가 있었다.
제길. 그가 혀를 찼다. 썩은 피를 뿜으며 경기를 일으키는 구울은 몇 번을 봐도 역했다. 미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구울이 방금 전까지 적과 맞서 싸웠던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심장을 찌르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미안, 왕녀.”
왕녀에게서 통신이 반복적으로 왔지만 비극적으로 마주한 전우의 구울과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마족을 쓰러뜨려야 하기에 류제는 통신을 잠시 차단했다. 지금은 미나를 구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구울은 마족보다 약하고 인간을 향해 덤벼들기만 하는 단순한 움직임을 보여 처리 자체는 쉬웠다.
일곱 명째. 숨을 고른 류제가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중요한 마족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이들을 구울로 만들었을까. 벌써 여기서 도망간 건가? 도망이라니 마족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무서웠어. 마족이 우리 중대를 이런 꼴로……!”
홀로 살아남은 미나가 넝마가 된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고 류제에게 다가왔다. 류제는 직감이 말하는 경고를 억눌렀다. 이 극적인 상황이 다분히 인위적이라 기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인지 가늠하기도 애매했다.
어쨌든 덕분에 상처 없이 무사한 미나가 류제의 품에 안겨 훌쩍거렸다. 찝찝했어도 소중한 친구가 무사한 것은 안심할 일이었다. 순식간에 전우를 잃은 그녀가 불쌍해진 류제는 과도한 경계심일 거라며 안일하게 품을 허락해 주었다.
울음을 달래주는 상냥한 손길을 독점한 미나가 류제의 슬렉터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전투 모드가 종료되었음을 인식하고 통신 차단이 자동으로 풀려 통신이 연결되었다.
―미나 플로리아. 그녀가 바로 서큐버스다! 들리면 답하라, 류제 신리!
그 찝찝함의 이유를 정확히 짚는 답에 놀란 류제가 미나를 밀치며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손이 그의 손목을 스쳤다. 그때서야 류제는 미나가 강제로 기간트리카를 해제시키려고 했음을 알아차렸다.
“…내 슬렉터는 왜?”
“어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까이 있었으니 분명 왕녀의 통신을 들었을 텐데 모른 체하는 미나가 미심쩍었다. 중대를 저 꼴로 추락시킨 마족에게서 세뇌라도 당한 것인가 포장하려 해도 저 눈빛은 미노타의 군인과는 다르다. 분명히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류제, 왜 그래?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너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따금씩 보였던 미나의 인간혐오증과 세뇌당한 중대장의 눈빛이 교차로 떠올랐다.
중대원이 모두 구울이 되어버린 가운데 상처 하나 없이 홀로 살아남았다 무언으로 주장하는 미나. 왕녀의 확신에 찬 외침.
그녀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것이 왜 부정이 되지 않는 것인지 류제 자신도 신기했다.
“네가 배신자구나. 네가 의태한 서큐버스였어.”
단둘이서 마주하는 낯선 요새 안. 류제는 주춤거리며 점차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던 류제는 미나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눈물이라도 흘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배신자라니. 갑자기 왜 그래? 진정해, 류제. 안쓰럽게도 당황했구나. 그보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무서워.”
제립학교에 있었던 때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나에게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졌다. 고장 난 사람 같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것인지 지펴진 불신은 커졌다.
“너희 중대는 어떤 마족에게 당한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마족이 다시 올지도 몰라. 어서 가야 한다니까?”
“어떻게 너만 살아남았어? 마족이 왜 너만 살려준 거야?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할 수 있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호세마타 요새의 훈련장은 기간트리카 훈련에 유리하게끔 트여있어 숨을 곳이 없었다. 구울로 변한 중대원들은 모두 그녀보다 척도도 높고 강한 공격형 어빌리티를 가진 사람인데 도망칠 곳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미나 혼자서만 마족을 피해 살아남았을까.
“미나! 숨기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줘.”
그녀가 제발 오해를 풀 수 있을 정당한 답을 돌려주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전쟁이 일어났고 이제는 류제를 나라카로 데려가 마족을 부흥시키기만 하면 되는 미나는 귀찮은 질문들에 연기를 그만두었다.
“하아, 다 된 밥에 재 뿌리긴. 그깟 인간 계집애 말에 흔들리는 건 또 뭐야.”
미나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마무리 지을 거, 어리석음이나 깨달으라지. 배신이 증오의 씨앗이 되어 마왕으로 다시 부활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가만히 이용당했으면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래. 자기가 말해놓고 설마 놀랐어?”
설마 했지만 서늘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미나는 지금껏 상냥했던 웃음이, 유리구슬처럼 섬세하게 글을 읽던 분홍 눈동자가, 야외 활동을 선호하지 않아 나약한 팔목이 전부 거짓말이었음을 과시하듯 마족 본연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강하게 세뇌시켜 놨는데 용케도 알아차렸구나, 빌어먹을 왕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긴 그녀의 음란한 곡선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양 뿔 조형의 비정상적인 신체 부위가 머리에 솟았고 꼬리뼈 위에서 뻗어 나온 박쥐 날개가 살아 움직이듯 살랑거렸다. 피처럼 붉은 동공이 그를 조롱하고 인간을 물어뜯기 위한 날 선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그래, 나야. 내가 바로 그 마족이야. 니냐롯트 왕녀가 찾고 있던.”
미나의 본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가장 진실다웠다. 류제는 눈앞의 그녀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누구도 아닌 미나가 학교에 숨어든 마족, 서큐버스였다고? 오늘 마주한 것도 전부 계산된 우연이란 말인가?
“나보다 왕녀의 말을 더 믿다니 충격이지만 단둘뿐인데 뭐 어때. 내가 마족인데 왜? 날 죽일 거야?”
“너…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학교생활부터 마족과 대적하고 동족을 죽인 것도 모두?”
질타받는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이길 바랐던 류제는 도리질 치며 뒤로 물러섰다. 힘들 때마다 믿고 의지했던 미나가 배신자라니. 미나는 깔깔거리며 그동안 즐겼던 그의 무지를 조롱했다.
“그럼! 널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민을 털어놓더라. 하아, 역시 인간이란 단순하고 어리석어. 덕분에 네 환심을 사기 쉬웠어.”
드디어 모든 것을 털어놓은 미나가 후련하게 기지개를 켰다. 당장 류제가 마주했을 끔찍한 배신감이나 슬픔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기간트리카 헬멧 사이로 보이는 당황한 눈동자에 온전히 그녀만이 담긴 것만으로도 큰 쾌락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 병신 같은 고민거리를 들어주는 내내 어찌나 입이 근지럽던지. 하아, 계속 이러고 싶었어. 나 때문에 절망하는 네 모습은 너무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벌려놓은 두 사람의 간극이 우습다는 듯 눈앞에 연기처럼 등장한 미나는 류제를 끌어안았다. 사이를 방해하는 기간트리카를 쓰다듬은 미나는 먹음직스럽게 헬멧을 핥았다. ‘러다이트’가 있었더라면 좀 더 로맨틱하게 정신에 침범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속셈이 뭐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어머,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진심이냐며 미나가 되물었다. 류제는 그가 내린 답이 기어코 정답이었음을 확인받자 괴로웠다. 미나가, 혼자서만 그의 편이 되어주었던 미나가 사실은 의태한 마족이었다. 마왕의 부활체인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했다.
“내가 왜 네 곁에서 멍청이 같은 고민을 들어주며 위로해 주었을까.”
그녀가 또각또각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단발의 진녹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찰랑거렸다. 혼란으로 머리가 굳은 류제는 미나가 제발 그 이유를 입에 담지 않기를 바랐다.
“네 마왕의 혼을 원하기 때문이지. 당연히.”
고개를 꺾은 미나의 붉은 동공에 광기가 짙게 물들었다. 그녀는 안티 어빌리티인 ‘옵시그나티오’를 꺼냈다. 이전에 제립학교에 쳐들어왔던 병마의 군주가 사용하던 기계와 비슷한 도구임을 떠올린 류제는 커다란 진동과 함께 그때와 같은 감각을 느꼈다.
미나의 주변에 악몽 인자가 둘러졌다. 어둡고 몽환적인 연기가 류제를 감쌌다. 고등급의 마법. 들리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뿐.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스터를 켜서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했던 그는 인자 사이에서 돌연 등장한 미나의 족쇄에 붙잡혀 땅에 추락했다.
“순조로웠어. 유일하게 내 존재를 의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어차피 그런 하찮은 인간 말 따위는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잖아? 너도 그렇고.”
“미나, 너……!”
학교에 있는 마족이 누구인지 말하라는 왕녀의 추궁과 답하지 못하는 렌. 이유 없이 미나를 경계하며 믿지 않았던 렌을 떠올리니 소름이 끼쳤다. 렌이 미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정체를 알았기 때문인가?
렌이 말하지 못했던 진실은 미나가 마족이라는 걸 목격한 것……?
“친구들이 렌을 싫어하게 된 것도 다 네 짓이구나. 어쩐지 이상했어. 비정상적이었다고! 그 애들도 네게 세뇌된 거지?”
“소중한 인연에게 배신당해 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게 바로 마족이야. 이상하다고 느꼈지? 하지만 너는 그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지. 그 대신 날 믿었으니까! 그건 네 업보라고, 류제 신리.”
공격이 이어졌다. 피아 식별이 확실하지 못해 머뭇거리던 류제와는 다르게 그녀의 공격에는 진심이 담겼다. 마법 인자들이 그녀를 대변하여 류제를 공략했다.
“실은 그 인간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건가?”
“멋대로 지껄이지 마!”
부스터가 망가졌다. 망할 안티 어빌리티 때문에 기간트리카에 ‘강화’ 어빌리티가 먹히지 않았다.
“날카롭게 굴기는. 난 네 진심을 적나라하게 대변했을 뿐이야. 바보같이 내게 의논하러 찾아온 네가 어리석은 거지. 인간의 껍데기란 이다지도 하찮고 얇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공격을 피해 날아오를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손상은 재장갑하면 복구가 될 정도지만 여기서 기간트리카가 뚫리면 끝이다. 그녀에게 세뇌당해 마족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얇은 껍데기를 벗겨서 진정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게.”
“난 인간이야.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일 것이라고 맹세했다. 마족을 앞에 두고 궁지에 몰렸을 때 곁에서 마음을 다잡아주던 렌. 그가 당장 그리웠다. 진실을 알고 있던 그 애는 최선을 다해 날 지켜주려고 했는데 왜 나는 실수만 저지른다.
“크헉!”
머뭇거리는 공격은 닿지 못하고 류제의 팔과 목은 인자에 짓눌려 바닥에 가라앉았다. 검은 마기 안에서 등장한 미나는 서늘한 미소를 띠며 옆에 쭈그려 앉았다.
“이 전쟁은 다 널 위한 건데 섭섭한 말 하지 마. 마왕님,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들의 나라로 돌아가자.”
악마처럼 속삭이는 미나는 그의 헬멧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고 슬렉터를 해제시키려고 했다.
“이거 놔!”
“100년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구.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있으니까 각오해.”
어빌리티를 쓰지 못하는 데다 부스터가 망가진 류제는 정신을 지키는 갑옷만 남은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마왕의 부활체라도 마기의 폭주 없이, 어빌리티도 없는 상태로 제압하는 건 쉽다.
“읏, 뭐야 이건?”
패배 엔딩의 시작으로 가는 분기점에서 승리를 직감한 미나가 손을 뻗는 순간 번쩍이는 빛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위기의 순간에서 류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혀를 차는 미나의 중얼거림이었다.
“잔꾀를 쓰는군.”
정체불명의 빛에 휩싸인 류제는 이제 꼼짝없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인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니. 저버린 믿음만큼 배신감이 흘렀다.
렌은… 렌은 무사한 걸까?
눈 깜짝할 새가 지났다. 눈부심을 가렸던 류제는 어떤 건물의 내부에 서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졌다.
“…여기는?”
파괴되어 위가 뻥 뚫린 천장과 스파크가 이는 커다란 기계. 난장판이 된 사물들. 낯선 곳인데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이곳에 존재하는 통신 증폭 장치의 영향으로 단절되었던 통신이 연결되었다.
―지직 류제 신리여, 미나 플로리아를 믿어서는 안 된다……! 제발 무사해 다오. 들리면 답해달라.
이상한 마법에 당해 어딘가로 끌려간 후 정신을 차린 건가 착각했지만 왕녀의 통신으로 가능성이 깨졌다.
“…듣고 있어. 나도 봤어.”
―무사한가? 미나는 어떻게 되었지?
“네 말대로야. 미나가 마족, 서큐버스였어. 제길. 제기랄!”
머릿속이 복잡해진 류제가 죄 없는 바닥을 갈겼다. 기적과도 같은 소식을 전하자 니냐롯트는 몇 초간 답이 없었다. 그가 미나에게 당해 세뇌를 당한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는 낌새였다.
“기간트리카 장갑은 유지 중이야. 부스터는 망가졌긴 했지만 세뇌는 안 됐어.”
―그녀는… 서큐버스는 쓰러뜨렸나?
“아니, 내가 다른 곳으로 강제로 이동했어.”
―설마, 나라카인가?
“인계야. 알라마니 기술관… 같아. 아마도.”
이곳도 최근에 마족이 쳐들어온 듯했다. 차마 짐작하기도 힘든 처참한 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호세마타 요새에 있는 그대가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간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나에게서 벗어났… 우악!”
가까이서 스톱워치가 울렸다. 미나가 쫓아온 것인가 화들짝 놀란 류제는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인가!
“몰라. 알람 좀 확인할게. 누가 맞추고 간 건가?”
―알라마니 기술관은 병마의 군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마족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설치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류제는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스톱워치를 껐다. 어빌리티 컨트롤 연습 때 쓰던 것과 디자인이 비슷했다. 스톱워치 아래에는 난장판인 주변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종이가 있었다.
류제는 그 글자에 눈이 향했다. 심하게 떨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호세마타 요새에 마족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몰라 기동 예약시켰다. 요새에는 절대 접근을 금지한다.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반드시 니냐롯트 왕녀의 지시대로 할 것.]
[1. 지금 즉시 뒤돌아보지 않고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향할 것.
2. 그녀와 함께 싸울 것.
3. 이후 마주하게 될 페스트의 왕, 니켈의 왕, 샐러맨더의 왕, 서큐버스의 왕의 핵의 위치를 표시하겠다.
가장 위험한 이 네 마족을 해치우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지 말 것.
4. 마족의 말에 절대 현혹되지 말 것.
5. 너 자신을 믿을 것.]
일개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이 아는 정보치고는 대단하지만 방금 전까지 미나에게 잡혀 나라카로 끌려갈 뻔했던 그를 구해준 사람이 남긴 메시지다.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 관장이라면 납득이 된다. 생존자들이 도망가기 전에 쓴 쪽지인가.
“지지 말 것이라니. 말은 쉽지.”
―무슨 말이지?
“아니… 어떤 쪽지가 있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
미나가 실패해 버렸으니 다른 마족들도 가만두지 않고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종이에 표시된 핵의 위치는 연구원이 나라카를 관찰하며 알아낸 건가. 뭔가 다른 팁이라도 없나 류제가 쪽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 ■■ ■■■ ■■ ■■■■.’
―■ ■ ■
이 글자는 뭐지? 수수께끼인가. 도깨비 문자처럼 낯설어서 읽을 수 없다.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이 쓰는 새로운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상황이 급박한 만큼 한두 번 지나쳤던 글자는 기억의 바다에서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나중에 생존자들에게 물어보기로 한 류제는 미나를 향한 배신감을 억눌렀다. 종이의 마지막 조건이 마음에 든다. 나 자신을 믿으라니. 마왕의 부활체라는 운명에 얽혀버린 그에게 힘이 되는 문장이었다.
―친우로서 내 부탁이자 명령이다. 류제 신리, 병마의 군주가 다시 등장했다. 들라크루아 대령이 있는 펠노아로 한시바삐 향하라.
“알았어.”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로 향하라. 첫 번째 조건이 그러하듯 왕녀도 그렇게 말했다. 쪽지에 쓰인 병마의 군주의 대략적인 핵의 위치를 확인한 류제는 망가진 기간트리카를 재장갑해서 부스터를 켰다.
“왕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뭐지?
“지금 당장 렌의 무사를 확보해 주길 바라. 무슨 일이 있어도.”
렌을 농락하던 미나의 악독함에 이를 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펠노아로 떠났다. 다음에 그녀를 만났을 때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적이다.
―알았다.
알라마니 기술관에 홀로 남은 개발자 디버그용 하드웨어 모니터에 ‘goodbye world!’라는 글자가 깜박깜박 지직거리다 전기가 끊겨 뚝 점멸했다.
* * *
기간트리카가 발명되기 전 키아나트리체 초대 황제가 비공식 인류 연합군을 이끌고 최초로 마족을 무찔렀다던 전설이 내려오는 펠노아.
다른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이색적인 건물을 둘러싼 수천 그루의 벚꽃나무가 장관이다. 땅에서는 온천이 솟아나는 이곳은 계절을 불문하고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 찬란한 아름다운 관광도시다.
그 역사적인 의미와 명성이 맞물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기도 한 펠노아는 키아나트리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마족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이 묻히는 국립묘지가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국립묘지가 있는 텔다산 정상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거대한 사원이 우뚝 서서 정기를 가다듬었다.
“텔다 사원. 먼지 쌓일 틈도 없던 이곳이 조용하다니. 신선놀음할 겸 목욕재계라도 해야 할 것 같구나.”
국립묘지원 정자에 앉아 턱을 기댄 중년의 여인이 기와지붕을 올려다보며 킥킥 웃었다. 마왕 살해자 로라 하놋 이후 현 인류 최강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녀,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아무도 없는 이 장소에 홀로 살아남은 사람처럼 의연했다.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닙니다!
“태평이라니. 초대 황제도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마족에게 승리하지 않았나.”
초목이 싱그럽게 꿈틀대는 아름다운 펠노아 상공으로 재앙 덩어리 등급1의 병마족이 지나갈 것이며 알라마니 기술관을 박살 낸 공격성을 보자면 펠노아도 얌전히 지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전해주던 네네 슈만은 출처를 모르겠는 포르테의 태연자약함이 속 터졌다.
―언제부터 그런 징크스를 믿으셨습니까?
“거야 내 마음이지. 기술관장은 살아있냐?”
―그 양반이 쉽게 죽을 것 같습니까? 초동 대처가 좋아 연구원도 5할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최악은 아니군. 지원 병력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냐.”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그러자 통신기기 안쪽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찢어졌다. 어찌나 우렁찬지 포르테의 귀에 이명이 어렸다. 한참 아래 부하의 하극상이 괘씸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니 타박도 효과가 없을 터. 포르테가 퉁명스럽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시끄럽다. 잔챙이 마족은 나 혼자면 충분해. 사람이 있으면 더 귀찮아져.”
전쟁 전 토벌 파견 때문에 나라카에만 있었다고 경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이 터지고 그녀 손에 죽은 마족의 수만 하더라도 등급 불문 스물이 넘었다. 그녀의 자신감은 파괴한 마족의 핵의 개수로 증명이 가능했다.
―잔챙이가 아닙니다! 등급1의 병마족, 분파의 군주급입니다. 그 망할 것이 등급1의 니켈처럼 괴상한 기계라도 사용하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폐하의 호위를 맡는 게 더…….
“그걸 보완한 기간트리카지 않나?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내가 설 장소는 전장이야.”
―하지만 대대장님, 이런 식으로 복귀하면 또 말이 나올 겁니다. 은퇴는커녕 현역이라며 건강 문제도 무시당하면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지금껏 나라카에 있을 거라고 알려졌던 그녀가 떡하니 펠노아에 등장해 병마의 군주를 막는다니. 그치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안 보고도 뻔하다. 나라카 토벌을 속인 것도 문제거니와 전쟁이 일어났는데 몸을 숨기고 있었다고 몰아붙이면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살아남는 걸 전제로 말하는구나. 흥, 그쪽에서 지랄을 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에라도 보내라지 그래. 그게 얼마큼의 패배로 이어지는지 보자고.”
―대대장님께서 살아남는 거야 당연하시고, 매번 그런 식으로 윗사람들한테 밉보이니까 비어빌리터들에게 진급에서 밀리는 겁니다!
“이번에 진급했으면 됐지. 대령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이 무대가 내 마지막이야. 남은 생은 좀 조용히 보내게 해줘.”
그랬더니 돌아오는 네네 슈만의 목소리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시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 말씀 말라느니 부하들을 생각하라느니 무슨 잔소리가 이렇게 심한지 원. 어빌리터는 마족만 죽이면 되는 거라고 곧 죽어도 고집을 부리던 녀석이 남 목숨은 언제부터 이렇게 살갑게 챙겼담. 이름처럼 항상 네네거리면서 날 따르던 주제에.
잔소리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들어먹질 않으니 네네 슈만도 포기하고 한숨을 팩 내쉬었다. 그 한숨도 분명 들으라고 크게 내쉰 것이 틀림없었다.
―하아, 대대장님 고집은 아무도 못 꺾죠. 몸도 안 좋으신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깟 병마족의 인자야 기간트리카로 방어 가능하지 않아. 피난민들만 어떻게 하면 어려울 것도 없지.”
―…‘힐링 팩터’는 충분합니까?
포르테도 네네 슈만의 나이 즈음엔 마족을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군 생활을 했지만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서도 성장을 하는 모양이다. 네네 슈만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어 보인 포르테는 걱정을 곱씹었다. 왕녀에게 맡긴 부하들이 그녀 없이도 잘 해내기를 바랐다.
“걱정 마라, 슈만 중위.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군인으로서 전장에 서서 키아나트리체를 지킨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마땅하다 여기니 신념으로 행한다. 주인인 황제의 말(馬)인 주제에 왕녀에게 도움을 준 건 후회하지 않는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이전 왕의 패는 물러나야 한다. 나라를 지키기엔 마음이 약하고 끌어안은 것을 추려 버릴 줄 모르던 왕녀가 군사권을 쥐더니 썩 볼 만해지지 않았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바통 터치로 이곳은 그녀의 최고의 은퇴 무대가 될 것이다.
“…아니, 완전히 혼자는 아니군. 내 뒤를 이을 뜨거운 신인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어야겠구나.”
어디선가에서 기간트리카 부스터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왕비를 보고 시녀 뒤에서 훌쩍훌쩍 울기만 하던 공주가 준비한 패를 발견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 역시나. 제때 도착한 왕녀의 카드를 포르테가 반겼다.
―네? 누가 지금 펠노아로 가고 있습니까?
“곁에 있는 귀여운 사령관에게 물어보지 그러냐. 그럼 나중에 보자.”
그녀는 시끄러운 통신을 종료했다. 부하들 대신 왕녀를 통해 함께하게 될 동료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녀는 ‘기압’ 어빌리티로 관심을 끌었다. 돌부리에 넘어진 것처럼 공중에서 잠시 휘청거리던 기간트리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래에 있는 포르테를 발견했다.
“키아나트리체 제22 기간트리카 특공대대. 백장미 부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아.”
정자에서 내려온 그녀가 두 팔 벌려 류제를 환영했다. 획일적인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있는데도 단번에 류제임을 알 수 있었다.
포르테를 발견하고 땅에 착지한 류제는 최선을 다해 서두르느라 지친 숨을 골랐다. 이제는 군인의 신분이니 류제는 그녀의 군 계급을 당당히 입에 담았다.
“소위 류제 신리. 등급1의 병마를 저지하기 위해 백장미 부대 백업차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들라크루아 대령님.”
“그렇게 말해도 지금은 너와 나 단둘밖에 없지만 말이다. 하하하, 부대에 대대장 하나와 애송이 하나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처음 봤을 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아이가 어느새 여기까지 오다니 불쌍한 한편 장하다. 유쾌하게 웃은 포르테가 팔짱을 끼었다. 과열된 기간트리카를 장갑 해제한 류제는 경례한 손을 내리고 자연스레 다가왔다.
“다른 부대원들은 없는 겁니까? 나라카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왕녀의 통신은 그저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도와 병마의 군주를 무찌르라는 명령뿐이었으니 나라카에 있어야 할 그녀가 펠노아에 있는 이유는 듣지 못했다. 다른 백장미 부대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류제는 부대원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자 단둘이 병마의 군주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 착잡해졌다.
“군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거지.”
“하지만 토벌로 건너간 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어서…….”
“애송아, 비밀 작전을 네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쳐야 할 필요가 있나?”
“아닙니다.”
왕녀가 포르테를 이용해 다른 패를 준비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 류제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쪽지에 적힌 대로 병마의 군주와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상관없다.
다른 비밀을 파헤치기엔 그는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불신의 감정이 아른거렸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몹쓸 눈을 하고 있구나. 전쟁이 널 그렇게 만들더냐?”
썩어 문드러진 분노는 어째서일까. 마족의 속셈을 막기 위해 뒷공작으로 바빴던 그녀가 부재한 사이 류제가 겪은 일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면 또 친구가 네 속을 썩이더냐?”
정답이었다. 친구. 그래, 그녀가 진정으로 그의 친구였다면 말이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접근한 가증스러운 염탐꾼이라는 사실은 심장이 찢어질 만큼 배신감이 들었다.
“대령님께서는 학교에 마족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은 아셨습니까?”
“왕녀를 통해 들었지. 미노타의 뒤에 마족이 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쯤이었나. 경계는 하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진심으로 의심했던 거였어.”
왕녀를 비롯해 렌이나 들라크루아 대령님까지. 전쟁을 막으려는 이들은 학교에 의태한 마족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가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류제만 그 마족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서 렌이 배신하면 어쩌나 헛발질을 했다.
“그 마족이 어제까지는 제 친구였습니다. 겉보기엔 착한 여자애였는데 의태한 마족이었습니다. 말도 잘 통해서 같은 동아리까지 들었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니. 허탈해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그들 주제에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고작 인계의 왕녀를 경계하기 위해 학교에 침입했다기엔 그들의 악랄한 성미와 맞지 않아.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다.”
포르테가 혀를 찼다. 그 교활한 서큐버스가 류제 신리와도 연관이 있었나. 동일한 공간에서 어울리다 보니 연관되어 버린 모양이다. 어른이 되면 배신은 새로울 게 없지만 어린 학생에겐 익숙하지 않았을 테지.
“자존심 강한 마족 주제에 잘도 병아리들 주변에 숨어있었군. 몇백 살 할머니가 되어서는 노망이 났나.”
확실히 늙지 않는 마족은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었다. 미나가 할머니라는 동치 기호를 연결시키자 류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는 또 그 유약한 주근깨 꼬맹이가 널 그렇게 만든 줄 알았다. 그 친구와 연관되어 또 잘못된 판단이라도 한 건가 지레짐작했다만. 그와는 같은 전장은 아닌 건가?”
수마 니켈의 왕과 만났을 때처럼 류제가 대의를 우선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박혀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관계와 우정에 집착하는 류제가 여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놀라웠다.
“네, 그 애는 더 남쪽에 있습니다. 대령님 말씀대로 같이 있으면 제가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았거든요.”
“극진히도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을 그 꼬맹이도 아느냐?”
“그러면 뭐 합니까. 저는 그 달콤한 말에 속아 잘못된 결정을 해버렸는데.”
렌과의 소중한 시간을 버리고 미나에게 달려가 상담했던 과거가 전부 헛짓거리라 몸서리가 쳤다.
거짓된 꾐에 꼬여 친구들의 마음을 배신했던 자신을 합리화할 시간에 차라리 렌의 말을 더 들어주었어야 했다. 제 감정에만 목매다가 많은 것을 놓쳐버렸다. 렌이 없어도 그는 잘못된 결정만 했다.
“그 마족을 그 애가 가장 먼저 경계했습니다. 미나를 믿지 말라고 했던 렌이 한 말을 그냥 흘려 넘겨버리다니. 당장 그 애를 볼 낯이 없어요.”
“호오, 주제에 의태한 마족을 알아본 건가. 눈썰미가 좋은 친구구나. 뭐, 돌아가서 사과하면 될 일이지.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하지만 전 이미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마족에게 속은 네가 잘못했다는 뜻이냐?”
그 주근깨 소년이 뭘 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과거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의태한 마족에게 속았다. 그 정도로 서큐버스는 치밀했다.
“마족의 거짓말에 마음을 홀리는 진심이 섞여있었겠지. 속인 마족의 죄를 네가 덮어쓸 필요가 있나.”
“그래도 전 분명 더 잘 생각할 수 있었을 거예요.”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앞으로 진실을 잘 파악하는 눈을 기르거라.”
그녀가 류제의 이마를 툭 찔렀다. 포르테도 어릴 적에는 윗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신념이라 믿어왔던 것들을 볼모로 인생을 착취당했다.
그녀는 마족을 증오하는 황제의 말(馬)이었다. 그걸로 족하다 여겼지만 황제의 주변에는 신념을 이용하는 무뢰배들로 가득했다. 진실은 정말 깊숙하고 찾기 어려운 장소에 숨어서 보물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숨 쉬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아직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류제의 등을 도닥여 주던 그녀의 안색이 일순 새파래졌다.
전투 중에 찾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다만 이 발작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내하려고 했지만 이미 내장이 녹아내릴 대로 녹아내린 포르테는 울렁거리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크흑… 컥.”
“대령님? ‘역병 인자’의 반응은 없는데. 설마 마족이 벌써……!”
“아니, 별 것 아니다. 전투 전에 추한 모습을 보여버렸군.”
류제가 쓸데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그녀가 군복을 뒤져 ‘힐링 팩터’를 하나 꺼냈다. 뚜껑을 벗기고 동맥에 정확히 바늘을 꽂은 포르테는 천천히 액체를 주사하며 고통을 인내했다.
“부상을 당하신 겁니까?”
“말하자면. 오래 싸우다 보면 필수 불가결하게 희생해야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
“어빌리티 대가인가요? 설마 부작용……?”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치고는 형벌이 가혹하다. 류제는 그녀가 맞는 약물에 집중했다. 렌이 산탄총에 맞아 어쩔 수 없이 ‘힐링 팩터’를 처방받아야 했던 그때 그는 몇 번이고 의사에게서 이 약물의 위험성을 전해 들었다. 상처를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치유해 주는 대신 자주 사용하면 상처가 자연적으로 치유되지 않게 되어버리는 양 날의 검이다.
“괴물을 죽이려면 괴물이 되어야 한다. 내겐 치유계 어빌리티가 없으니 별수 없지.”
지금까지 수많은 마족들과 상대했을 포르테는 물론 저 ‘힐링 팩터’를 누구보다 자주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보기엔 건강해 보이는 그녀의 몸은 이젠 스스로 면역계를 움직이고 치유를 하지 못할 정도로 정상이 아니었다.
류제가 진실을 알아차리자 늘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가 씁쓸하게 입가의 피를 닦았다.
“이 굴레를 내 대에서 끊고 싶었다만은. 쪽팔리니 눈 돌려라.”
“전투는 괜찮으시겠습니까?”
“우습게 보지 말아라, 애송아. 얼마큼의 생사를 넘어왔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류제와 비교하면 셀 수도 없었다. 몸이 망가지는 동안 그녀는 어떤 싸움을 해왔을까. 그럼에도 어떻게 이곳에 서있을 수 있을까. 아직 지킬 수 있는 힘이 남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포르테는 밟아온 수많은 고난을 추억했다.
“목숨을 건 전투는 항상 짜릿하지. 생각해 보니 너도 이번 전쟁이 첫 실전이었겠구나. 무슨 기분이었나? 내가 해준 예방접종이 약이 된 것 같나?”
“조금 모자랐던 거 같습니다. 그때 더 혹독하게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자조 반 농담 반이 섞인 그 말을 들은 포르테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류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신경을 거슬러가며 류제를 자극한 건 다음 대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그녀의 몸은 이따금 피를 토했다.
그 망할 알라마니 기술관장은 5년 정도는 남았다고 했다. 썩 긴 시간이 남은 건 아니지만 은퇴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었다.
“유쾌하구나. 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역시 너는 성장을 보는 맛이 있어.”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정말 어렸으니까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부끄럽습니다.”
“우리 아들도 딱 너 정도로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잠깐의 시간 같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관계도, 상황도, 사랑도. 전쟁의 목적이 마왕의 부활체인 자신 때문이라는 부담감과 죄책감은 마주할 수조차 없이 무섭다. 그러나 그는 분명 성장했다. 그에 맞물려 달라진 부분은 긍정적인 방향일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류제는 ‘힐링 팩터’를 전부 주사한 후 수통을 꺼내 목을 축이는 포르테를 힐끗거렸다.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수녀 루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보는 시선이 궁금해졌다.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힐링 팩터’에 관한 이야기만 아니면 된다.”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들킨 것이 어지간히 싫은 듯하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보다 더 쓸데없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의 일입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했다 단번에 거절당했습니다. 그 애는 제가 안 보이나 봐요. 계속 곁에 있었는데.”
“하하하, 아하하하하!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더니 귀여운 말을 하는구나. 하하하하!”
방금 전까지 피를 토한 사람이 맞을까 할 정도로 우렁차게 웃어대는 포르테 때문에 류제의 얼굴이 다 새빨개졌다.
“너무 웃지 마십시오. 아니면 대령님께 궁금한 것들 전부 물어버릴 겁니다.”
“하하하하. 뭐, 사랑 이야기는 전투를 앞두고 하기에 썩 흥미로운 이야기지. 너도 남자랍시고 대담한 짓을 하는구나. 청춘은 무엇이든 바꾸어버리니 무섭기 짝이 없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애 덕분이었죠. 보답 받지 못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습고, 포기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어른이 되었다 싶더니 오랜만에 어린애 같은 질문이다. 귀엽구나,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이란. 그녀가 피식 웃으며 정자에 걸터앉았다. 분명 그 대상은 주근깨투성이 소년일 것 같은데. 류제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 포르테는 그 점을 굳이 꼬집지 않았다.
“난 그런 이야기를 상담해 줄 만큼의 능력은 안 된다만.”
“그… 죄송합니다. 이상한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한 게 아닌가. 괜찮은 배려였다. 좋은 남자가 되겠구나.”
이상한 것을 보여주고 말았으니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던 포르테는 이대로 류제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쉬웠다. 나중에 그녀의 아들도 커서 똑같은 말로 물었을 때의 대답을 위해 지금 고민해 보는 것도 좋았다.
“병마의 군주가 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그때까지 내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수통을 닫은 그녀가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과거를 추억했다.
“나는 부모를 몰라. 철이 들어보니 고아원이었지. 아무래도 좋았지만 망할 원장은 우리들을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처럼 대했어. 유쾌한 기억은 아니야.”
류제를 위해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더러움이 덕지덕지 붙은 과거는 추억조차 달갑지 않았다. 그 누군들 최악이라 추억하는 그날이 좋을까. 빵에 핀 곰팡이를 잘라내듯 툭 떼어내 버려도 되겠건만 그런 시절이 있어 지금의 그녀가 있다 믿고 있었기에 포르테는 뚜껑을 열어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 난 굉장히 무지했다. 사랑도 몰라, 감정도 몰라. 사람들은 내 못남만 타박하니 난 가슴에 구멍을 뚫어서 차오르는 감정을 흘려보냈다. 음식만 축내는 무지렁이 취급에 익숙해져서 살아갈 목적을 세울 필요성도 못 느꼈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과거 이야기를 듣자니 류제는 죽은 세니타리 롯의 우두머리였던 스콜라 맥도어가 넉살 좋게 한 변명이 떠올랐다.
인류의 영웅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악당은 끝내 추한 결말을 맞았다. 어쩌면 포르테와 같은 고아원에 있었다는 스콜라의 이야기 일부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고아원 밖 사람들은 자기 먹고살 길을 개척하느라 바빴거든. 가장 공평한 햇빛 아래 깊은 응달이 내가 서있을 장소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내 인생의 전환점은 어쩌면 극적일 수도 있겠구나. 남들의 관심거리에서 멀었던 내게 어느 날 어빌리티가 발현했으니.”
그녀의 몸에 흐르던 기는 낯설기보단 오두막 속 다락방 보물처럼 친근했다. 공기 중의 ‘기압’을 다루는 능력은 사람에 따라 방어와 공격 모두 가능한 어빌리티였다. 이야기를 잠시 멈춘 그녀는 정자에 떨어진 낙엽을 손바닥 위에 올려 기압이 다른 작은 구를 만들었다.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낙엽은 조그마한 힘에도 조각조각 나서 바람에 흩어 날아갔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은 신기하지 않더냐.”
“처음엔 사람들의 시선이 뿌듯했습니다.”
신기함을 넘어 경외가 담긴 그 시선. 어빌리터라면 받을 수 있는 나라의 복지는 물론이고 돈과 명예가 있는 탄탄대로 인생에 부러움이 담긴 시선은 즐겁기만 했다. 제립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부담스러운 길이 펼쳐져 있을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어깨가 훨씬 무거웠을 것이다.
“하하, 어빌리터라면 다들 그러겠지. 난 다른 어빌리터보다 컨트롤에 능수능란했다. 척도도 높으니 고아원장의 태도도 금세 바뀌었지. 곧 제립학교에 입학해 마족을 쓰러뜨릴 테니 분명 나라에서 지원도 있을 거고, 자신에게 떨어질 달콤할 콩고물을 지레 좋아했던 거겠지.”
“대령님 주변에 있던 어른들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네요.”
“그들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냐.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들을 그나마 돌봐주었던 사람들이니 괘씸하더라도 난 이해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상대하기로서니 어른의 잣대로 사람의 급을 나눈 불쾌함은 지울 수 없다. 루나와 신부님이 있었던 시골구석의 고아원과는 전혀 달랐다. 누가 더 행복했다느니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똑같이 고아였던 그의 어린 시절은 포르테보다 행복한 편이었다.
“어릴 적의 나를 너무 불쌍하게 여기지는 말거라. 네가 동정할 정도의 삶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귀엽긴. 사과할 것까진 없어.”
“제 어렸을 적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제립학교에 오기 전까지 고아원에서 신세를 졌던지라 저도 모르게 비교를 해버렸습니다.”
“그럼 너도 알겠구나. 부모의 사랑을 향한 호기심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류제에게도 피를 이은 가족은 없었지만 상냥한 신부님과 루나의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모두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어렸을 적에는 두 사람에게 폐를 끼친 것 같은데 무관심한 성격도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루나도 신부도 류제 그만을 사랑해 줄 수는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도 부모님이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는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적은 없었다.
“갑작스레 관심을 받으니 그것은 중독적이었지. 진정으로 사랑받는 것 같았어. 물론 뒤에선 날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지만 난 그런 겉치레의 상냥함조차 달콤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 사랑이 진짜가 아님을 깨달았지.”
“이득을 취하기 위한 단계였을 뿐이겠죠.”
“그래, 사람의 마음을 구슬려서 가진 것을 빼앗는 자들은 마족뿐만이 아니거든.”
이제 막 어빌리티가 발현한 어린아이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그녀의 관심을 끌어댔을 것이다. 스콜라 맥도어가 루시에 라탈스키를 그런 식으로 꼬드겨 세니타리 롯을 위해 이용했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류제는 만일 자신이 포르테나 루시에와 같은 환경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여하튼 나는 제립학교에 입학했고 그 프라이드 높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잘 해냈다. 월반도 했지. 대신 친구는 만들지 못했어. 누구보다도 빨리 학교를 졸업한 나는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게 내 목적이었다. 그래야 내 존재 의의가 증명될 것 같았거든.”
그녀에게 학창 시절이란 무색무취한 흔적이었다. 미들 스쿨도 나오지 못한 그녀가 제립학교에서 한 것이라곤 필사적인 공부와 군 사회에 몸을 담을 준비, 마족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한 훈련뿐이었다. 동지애니 친구니 사소한 것들은 투지에 치여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니, 사람과의 관계에 질린 그녀가 일부러 외면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서툴고 할 줄 아는 건 이런 것밖에 없으니 내 앞길은 황량했다. 협동심도 없고 그저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던지라 날 좋게 보는 동료가 있을 리가. 그런 나를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이끌어주던 사람이 바로 고 셀로니아 장군님이다. 백장미 부대의 이전 대대장을 맡았던 분이야.”
“셀로니아라면… 비키의 어머님이신가요?”
“그래, 타오르는 붉은 머리가 아름다우신 분이셨어.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이지. 처음엔 날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소 엄격하긴 해도 내 잘못을 짚어준 사람이야.”
마족과의 전투 후 크게 혼이 났던 날, 눈앞의 적에게서 이기는 것보다 곁에 있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 단계 더 높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 포르테의 뇌리에 남은 ‘왜’라는 의문이 풀려가던 그런 날이 있었다.
“그녀는 셀로니아 가문의 멸족 사건으로 전사하셨지. 그분의 장례식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면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소리로 울며 엄마를 부르던 어린 비키 셀로니아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그녀도 그런 목소리로 울고 싶었다. 부모가 떠나는 것이란 그런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네게 혹독하게 대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네가 나처럼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했거든. 후회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주는 건 우리 부대에 온 신병에게도 꼭 해주는 연례행사기도 하지.”
“대령님도 처음엔 잃는 것이 두려우셨군요.”
“암. 상심한 나는 사람과 관계가 이다지도 두려웠다. 누군가를 열렬히 바란다는 모호한 감정조차 말라가 미궁 속에 갇혔어. 난 지금까지 항상 나만 생각하느라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거야. 다 큰 여자가 한심하지 않느냐.”
상실의 두려움. 전투를 하다 보면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쓴소리를 해주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슬픔을 모르던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잃음으로써 알아버렸다.
“나는 다시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 그녀의 가르침과는 반대지. 그러다 보니 병이 생기더구나.”
“병…이요? 지금처럼 말입니까?”
“아니, 마음의 병 말이다. 수많은 승리도, 죽음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랑스러운 군인도 싫었다. 난 알아선 안 되는 걸 알아버린 거겠지. 문득 이러다가 나도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 같았어.”
류제도 만일 마왕이 부활체가 아닌 평범한 어빌리터로서 이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면 똑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곳처럼 생명이 하찮아지는 장소도 없었다. 류제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은 없지만 두려움은 확실하게 박혀있었다.
“그런 와중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나. 마족이 왕궁에 잠입해 왕비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소령을 달고 있던 나는 썩 괜찮은 척도와 실적을 평가받고 있었지. 왕실로 불려간 나는 백장미 부대 대대장으로 승격하며 폐하께 하사하신 마족 토벌 명령을 받들었다.”
영광스러운 한편 그녀도 앞서 사라진 위대한 어빌리터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의 병이 깊어져 미래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1년이 넘게 토벌 준비를 하던 때였을 거다. 전투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어디로든 걸었어. 허탈한 마음의 향방을 몰라 방황하는 채.”
“강직하신 대령님께서 그랬던 적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나도 인간인지라 찌르면 눈물 한 방울은 나온다.”
“한 방울 말입니까.”
“그래, 한 방울.”
남들이 보기에는 한 방울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거대한 홍수였다. 삶의 의미조차 희미해지고 싸우는 목적을 잃었다. 토벌전에서 살아 돌아올 용기도 없는 데다 죽어도 아무도 그녀를 추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피해망상에 우울해졌다.
“허탈해져서 바보처럼 울고 있는데 누가 다가오지 않더냐. 그게 지금 내 남편이었지.”
“그건… 정말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네요.”
“운명. 하하, 운명이라.”
그날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류제는 언뜻 그녀가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도 있다고 했었다. 그런 생활을 해오던 그녀가 가족을 만들 용기를 낸 것도 모두 그 사람 덕분일까? 감히 추측해 보았다.
“그자는 이상했어. 좋게 말하자면 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숙했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손수건을 주질 않나, 좋은 풍경이 보이는 곳을 안다며 날 이끌었지. 그런 사람은 처음이라 이놈도 날 이용하려는 건가 의심했는데 저번에 물어보니 그때 날 보고 첫눈에 반했다나 뭐라나.”
“대령님의 우는 모습은 누구라도 특별할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이놈이 뭐라는 거냐. 사람의 유약한 모습을 좋아한다니 납득도 안 되거니와 이런 흉터투성이에 ‘힐링 팩터’가 없으면 상처도 안 낫는 추악한 몰골이 뭐가 좋다고. 당시 난 그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 순수한 감정을 미쳤다고 생각했으니 그때의 그녀는 주변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멍청할 대로 멍청한 바보였다. 용케 그이가 고백을 했구나. 그녀는 프러포즈를 하던 남편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토벌전에 출전하기 전날 그자는 내게 고백했다. 하지만 난 그걸 받아줄 만큼 용기도 없고 마음도 척박했지. 그야 당장 마족 토벌전이 코앞이었고 저자는 미친 자였으니까.”
“그럼 대령님께서는…….”
“무시했어. 그 마음을. 잔인하게도. 그때 로맨틱한 상황을 즐길 입장이 아니었으니. 구구절절 이야기를 했다만 이러면 남편과 네 상황과 비슷하느냐?”
좋아하는 사람이 고백을 거절한 것밖에 비슷한 점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할 말이 있었지만 류제는 입을 다물고 남은 말을 경청했다.
“난 당연히 그자가 포기할 줄 알았다. 끈덕지게 구니 싫다고 내가 워낙 못살게 굴었어야 말이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도 어렸었다며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었다.
“결국 결혼까지 하셨죠. 그분은 어떻게 대령님을 설득하신 겁니까?”
“그 사람은 내가 거절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거든. 그러더니 치사한 방법을 써서 내가 무시하는 감정을 직시하게 만들었어.”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남부끄럽게 대시를 해대던 그 남자는 어빌리티도 없는 주제에 무슨 용기가 있었던 걸까. 토벌전이 한창인데 그녀가 내일 당장 죽을 거라는 생각도 못 했던 걸까.
어떻게 부탁했는지는 몰라도 전장에 나날이 오는 편지와 선물을 보자니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전장에서 그를 생각했다. 다음 날 무슨 편지가 올까 궁금해졌어.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게 되고 그가 보고 싶어졌다. 이런 내 감정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봤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일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어.”
나무에 앉아있던 새 한 쌍이 무리 지어 날아갔다. 마족 토벌전의 선봉장으로 나서 전투를 이끌며 지금까지 버텨온 그녀의 몸은 망가졌다. 아마도 이전 ‘순간 이동’ 어빌리터였던 로라 하놋만큼이나 망가졌을 것이다. 그만큼 몸을 막 다루던 그녀는 조금 더 그녀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모두 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끈기란다.”
“하지만 제 마음만 몰아붙이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포르테가 결국 마음을 허락하게 된 건 그녀도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긴 과거 이야기를 끝내고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포르테가 피식 되물었다.
“뭐,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이 방법은 무리지. 물어보건대 너는 그 아이가 왜 네 마음을 거절했는지는 아느냐? 네 마음을 거절해야 했던 그 이유를 들었느냔 말이다.”
“아니요, 하지만 그냥 지켜보면 알게 되는 것도…….”
“듣지 않으면 모른다. 영영 모르는 채이지. 네 생각은 그저 네 생각일 뿐이지? 아니면 그 애는 네 감정을 이유도 없이 거절할 성격이냐?”
“그건… 아니지만 제 상황은 대령님과는 다른…….”
반박하려던 류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당시를 생각했다. 달랐나? 나는 렌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나? 도망가고 싶었던 나의 지레짐작이 아니었을까.
미노타와의 전쟁에 반대하던 렌은 상황이 미나의 뜻대로 돌아가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을 것이다. 이 전쟁의 심각성을 간과하던 그는 귀에도 들어가지 않은 고백이 실패하자 상처받고 절망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던 렌은 류제의 말을 이해조차 못 했다. 마음을 직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류제는 그저 원망스럽던 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대령님, 저는 터무니없는 실수를 해버린 것 같습니다.”
“말했잖느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라고. 인내하고 떠올리고 위하고 고통받고… 그럼에도 이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며 사랑하길 원하는 그 마음은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그걸 위해서 상대방을 배려해 주거라.”
“네, 대령님. 나중에 꼭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겠습니다.”
“그래, 이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렴. 가서 한 번만 더 네 소중하다는 친구의 마음이 어땠는지 생각해 봐. 그때 가서 차여도 울지 말고. 인생은 길고 삶은 아름다운 법이니.”
그녀가 류제의 머리를 장하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이 자라나면 이런 모습일까 먼 미래를 상상했다.
그녀의 따스했던 눈동자는 변화를 감지하고 시선을 날 서게 옮겼다. ‘역병 인자’가 다가온다.
정자에서 일어나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포르테는 뻐근한 어깨를 스트레칭한 후 부스터를 켰다.
“즐거운 학창 시절 짝사랑 이야기는 이만하지. 손님이 왔군.”
포르테와의 사설은 다음을 기약하고 하늘을 올려다본 류제도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프로텍터에 알림이 오고 있었다. ‘역병 인자’의 침입이다.
마른 침을 삼킨 류제는 부스터 방향을 아래로 두고 천천히 상승했다. 병마의 군주가 펠노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마족에게 패배했다가는 펠노아에 숨어있는 인간들은 주지육림의 한가운데에 속절없이 노출되고 만다.
피난민들을 지키기 위해 멜가로스크 자작이 파견한 보병대대가 방독면을 최대한으로 배분하고 전투 시 날아올 건물 파편들을 방어할 준비를 마쳤다. 노출된 마법 인자를 막기 위해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피난 온 연구원들과 백업 담당인 기간트리카군이 비어빌리터용 바리케이드를 들었다.
그네들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까만 점 하나가 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펠노아를 망가뜨릴 재앙이 될 것이다.
“등급1의 병마와는 마주한 적이 있다고 했나?”
“네, 작년 제립학교에서 대적했었습니다.”
“그럼 공격 패턴은 잘 알겠구나. 그 마족은 육체 변형이 특히나 자유로워 전투 시 핵의 위치를 이동할 수 있어 굉장히 까다롭지.”
그래서 왕녀의 친위대들에게 기습당했을 때에도 도망이 가능했던 것이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쉰 다섯명의 정예 어빌리터에게 둘러싸여서도 대등하게 맞서던 괴물을 단둘이서 막을 수 있을까. 그 힘을 알기에 더욱 막막한 류제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그때는 버티는 것도 한계였던지라 왕녀나 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겁니다.”
“걱정 마라. 지금은 내가 있지 않느냐. 방어는 나와 다른 이들이 할 테니 너는 공격만 집중하면 된다. 다만 우리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것만 잊지 마라.”
“…네!”
등급1의 마족에게서 지켜야 하는 피난민들. 어쩌면 작년 여름 타고시아 해변에서 있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때는 인질로 잡힌 렌을 지키겠다며 어린아이처럼 굴었던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포르테의 신념에 답해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병마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아는 류제는 과연 체육대회 때보다 얼마큼 성장했을까 두려운 한편 호승심이 일었다. 주먹을 쥐어본 그는 한때 있었던 마가릿과의 전투를 되짚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너절한 인간들아, 어디로 갔느냐. 이 몸이 이 대지에 군림했다!”
도망간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을 쫓아온 건지 아니면 몸이 따라가는 대로 이동한 결과 펠노아에 당도한 건지. 저 괴물의 생각을 이해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자야말로 변절자다.
역병 인자를 뿌리며 죽음의 냄새를 만끽하는 마가릿은 인간들이 모여사는 축사에 당도하자 자유롭게 인간 사냥을 개시하고자 했다. 마왕의 부활에 경배하는 마음을 시원하게 표출하고 싶었던 그녀는 알짱거리는 기척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못마땅하게 비죽거렸다.
“으응? 뭐냐. 도륙당하고 싶어 찾아온 가축이 여기 있었군.”
위대한 마족의 길을 막아선 한 기의 기간트리카를 마가릿이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인간들이 있는 곳에 안 나타날 리가 없지. 재미를 볼 생각에 신이 난 마가릿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훔쳐 온 단안경을 허공에 버렸다.
새로운 하얀 장갑을 끼고 새까맣고 오래된 복식을 풀어 젖힌 마족의 늪색 머리카락이 뿔에 걸쳐 휘날렸다. 샛노란 머스터드 눈동자 가운데에 박힌 붉은 동공은 어지간히도 소름이 끼친다.
약 10미터 거리를 두고 병마와 대치하는 기체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것이었다. 숨을 몰아쉰 포르테는 그동안 단련된 대범함으로 병마의 군주를 조롱했다.
“유언은 끝냈나? 네 무덤이 될 장소에 인사나 해, 늙은이.”
“하하하! 인간,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뒤틀린 날개를 이용해 세찬 바람이 부는 허공을 밟고 선 마가릿은 포르테를 가소롭게 흘겼다. 병마의 군주의 괴팍한 성질머리를 대충 들어온 포르테도 마족들의 시건방진 특징을 흉내 내며 마가릿을 자극했다.
“고작해야 학생들 상대로도 밀리는 형편없는 마족에게 별 기대는 안 한다만, 준비가 되었다면 덤벼라.”
“인간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히 병마의 군주를 몰라보고 도발까지 하는 멍청한 인간에게 마가릿은 자비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서 돋아난 독이 끈적거리는 촉수로 포르테의 기간트리카를 관통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인간의 힘은 한정적이다. 위대한 병마의 군주에게는 범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누구인가. 백전불패. 패배는 죽음밖에 없는 전장을 셀 수 없이 누볐던 사람이다. 둥근 원으로 응축되는 기압을 이용해 연결된 촉수를 끊어낸 포르테는 연이어 사방에서 다가오는 집요한 촉수 덩어리들을 폭죽처럼 터뜨렸다.
“별거 아니군.”
“네까짓 게… 병마의 군주를, 페스트의 왕을, 마왕님의 진정한 오른팔인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 이 몸을 무시했겠다?”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고작 이런 힘으로 병마의 군주? 우습지도 않구나. 다른 마족이 차라리 더 강했어.”
기간트리카 안쪽에서 비웃음 어린 말투가 들려오자 움찔거린 마가릿은 저 인간을 당장 제압하고 싶었다. 풋내기일 줄 알았는데 어빌리티를 다루는 것을 보아하니 지금껏 상대했던 인간들보다 특출하게 전투에 노련한 이다.
“당장 그 기계를 벗겨주지.”
그래 봤자 인간이란 기간트리카를 벗겨내면 역병 인자에 먹혀들어 죽을 터. 개량된 ‘러다이트’는 율폰에게 넘겨주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리적으로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인간의 야들야들하고 유약한 몸이 드러나는 순간 승리는 마가릿의 것이었다.
물론 마가릿이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포르테의 배짱은 장담할 수 없었다. 병마의 공격을 막으려 죽을힘을 다해 어빌리티를 컨트롤하는 안쪽에는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군인이 존재했다. 호기는 마족을 도발할 허세일 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유롭지 못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인간.”
“한심한 공격이라 하품하면서도 막겠는데.”
“그 갑옷을 찢어발기는 순간 알록달록하게 물들여지는 건 네 육체다.”
이는 모두 작전의 일부였다. 병마의 군주는 똑똑하지만 그만큼 멍청하다. 지식은 넘쳐나도 지혜가 없다. 힘에 심취하여 인간을 무시하는 병마의 허점을 찌를 것이다. 포르테는 좀 전에 류제와 세웠던 작전을 떠올렸다.
“마족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목숨과도 같아.”
“자존심… 말인가요?”
“그래, 특히나 인간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쉽게 도발당하고 공격이 사나워지지. 본 적이 없느냐.”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부끄럽지만 버티기만으로도 한계라서…….”
“그럼 지금부터라도 잘 알아둬라. 자존심을 건드리면 폭발하는 건 특히 우리가 마주할 등급1의 병마가 그렇다. 공격이 사나워지면 그만큼 적도 방심한다. 그때가 기회다. 놓치지 마라.”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을 모두 쳐낸 포르테는 프로텍터의 반응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때를 기다렸다. 포르테의 어빌리티는 순간에 한 번만 발현이 가능하다. 동시처럼 보이는 방어도 짧은 시간 차를 가져 마가릿의 육체에 닿을 새도 없다. 셋, 넷, 다섯. 역시 진짜 육체에 접근할 수 없게 공격하는군. 약삭빠른 괴물 같으니.
만일 포르테 혼자 상대해야만 했다면 공방전이 꽤 길어졌을 것이다. 방어는 가능하나 유의미한 타격을 먹이기 쉽지 않았다.
마족과의 싸움에서 포르테가 제1 순위로 보는 것은 스피드였다. 마족이 강할수록 승부가 길어지면 불리한 건 인간이었다.
“윽……?”
마가릿의 머리통에서부터 상반신 아래까지 세로로 절단되었다. 갑자기 시야가 두 조각이 나자 당황한 마가릿은 앞에 있는 포르테를 훑었다. 이 인간의 공격은 아니다.
잘려나간 반신을 돌리며 나머지 반신을 회복한 마가릿은 뒤에 있는 다른 적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간트리카 헬멧 안에 보이는 새까만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마가릿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마왕의 부활체. 게다가 저번 제립학교에서 자신의 부하를 농락한 것과 비슷한 방식이 아닌가.
“감히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이번엔 도망갈 수 없어. 여기서 반드시 널 없애주마.”
저 마족을 해치우지 못하면 미나가 한 짓을 잇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은 렌의 팁도, 그의 마기를 잠재워줄 응원도 없이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류제 신리.
회복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류제는 군용 나이프를 강화해 마족의 육신을 조각냈다. 어긋난 마가릿은 육신을 덕지덕지 붙이며 분노에 잠겼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인간 주제에 시건방지게 공격을 감행한다.
“플로냐 년. 왜 저 인간이 왜 있는 거야.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군.”
분명 계획대로라면 마왕의 부활체는 서큐버스의 손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녀는 인간의 시선을 돌리며 즐겁게 살육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왕의 부활체가 호세마타 요새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거지?
“이봐, 마왕의 부활체. 칼끝이 향할 방향이 틀렸잖아. 네 적은 내가 아닐 텐데?”
“난 인간이야. 내 적은 더러운 마족이지.”
류제는 마가릿의 유혹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쪽지에도 분명 마족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적혀있었어. 이대로 작전을 들키지 않게끔 버티는 거다. 들라크루아 대령님도 계시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그럼 연약한 인간 주제에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크헉!”
포르테도 보지 못한 촉수가 용서 없이 류제의 배를 강타했다. 기체가 뚫리진 않았지만 부스터를 상쇄할 만큼의 힘에 류제의 기간트리카가 사원 귀퉁이에 처박혔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쏟아지는 촉수들에 질겁한 류제가 당하기 전, 포르테가 ‘기압’으로 공격을 상쇄했다. 귓가에 박히는 포격음에 사원이 허물어져 갔다.
“망할 계집. 위대한 여정을 방해하지 마라!”
“내 공격이 방해되나? 위대한 병마의 군주는 인간의 공격을 무시할 수 없나 보군.”
포르테가 마가릿을 도발해 시선을 끄는 사이 류제는 충격으로 꺼진 부스터를 되살려 벽에 박힌 파츠를 떼어냈다.
역시 병마의 군주. 방심했다간 목숨이 위험하다. 아무리 ‘강화’해도 저 마족과는 순수한 힘에서는 밀려. 막무가내로 몰아닥치는 힘을 흘려보내 접촉을 피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몰라.
과연 내가 그 힘을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할까. 솔직히 협동 공격도 제대로 못 해내고 있다. 다른 백장미 부대원이었다면 대령님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 그녀가 어찌어찌 맞춰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폭주해서 이성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제길, 끈질긴 똥파리 같으니.”
“아직 멀었나!”
“지금 갑니다.”
병마의 군주는 다른 마족과 달리 핵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지만 그건 핵이 있는 부위를 촉수화해서 밖으로 빼내 다른 곳에서 부활한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현재 포르테와 류제는 합동 공격으로 마가릿의 핵의 위치를 좁히는 중이다. 촉수를 발판으로 달려들어 마가릿에게 공격을 퍼붓는 류제의 눈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마가릿이 이 작전을 알아차리기 전에 핵을 파괴한다. 군용 나이프가 하나 박살 나자 여분의 나이프를 꺼내 촉수를 짓이긴 류제는 포르테가 공격을 상쇄시켜 주는 틈을 타 마가릿의 목을 잘랐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다. 회복하는 방향을 살핀 류제는 종이에 대략적으로 표시된 핵의 위치를 의식했다.
육신을 붙이며 류제의 목을 조르는 마가릿은 먹이를 사냥하는 거미처럼 그를 옭아맸다. ‘역병 인자’가 류제의 몸에 침입했다.
“뭐 하는 거야, 마왕의 부활체. 시시하게 굴면 재미없어. 너는 우리들의 주인이자, 왕이자, 아버지라는 것을 잊지 마!”
“난 마왕의 부활체가 아니야!”
“흥, 멍청한 서큐버스 년. 역시 플로냐는 실패한 모양이군. 아니지, 내가 그때처럼 네 마왕의 힘을 이끌어주랴?”
마가릿의 손아귀 힘이 기간트리카 헬멧을 짓눌렀다. 제립학교 때처럼 순순히 당하지 않을 거다. 헬멧이 깨지기 전 마가릿의 손목을 잘라낸 류제는 뒤로 물러나며 재정비했다. 마법 인자에 접촉된 부분의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이 시작된다. 기관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대상 포위 및 미사일 포격 준비 완료.
“기회는 한 번뿐이다!”
“알겠습니다, 대령님!”
펠노아에 있는 피난민들과 일반군, 백업을 온 기간트리카군,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 등 때가 오기만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인간들은 펠노아를 뒤덮는 역병 인자 속에서 조용히 역전의 한 방을 노렸다.
“발포!”
포르테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풀에 숨어 명령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유도탄을 발사했다.
기간트리카가 아니더라도 마족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이곳에서 싸우는 사람은 류제와 포르테 단둘만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사각지대란 없다. 마가릿의 전신을 폭격하는 미사일은 대마족용이 아닌 것들이 섞여있어 큰 살상력을 보이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순간이 바로 펠노아의 인간들이 붙잡은 작은 희망이었다.
새까맣게 되어 쓰러진 사람들 위로 누군가 기도했다. 펠노아에 남은 모든 인간들에게 방독면을 배분할 수는 없어 역병 인자에 감염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저 마족을 없애야 한다.
사람들의 기도를 담은 공격으로 키아나트리체 수백 년의 역사와 함께 내려온 텔다 사원이 무너진다. 연기 속 마족의 실루엣은 뒤틀리더니 포르테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공격으로 무너질 병마의 군주가 아니다.
“내가 이런 공격에 눈 하나 깜박할 것 같으냐?”
“눈 깜박? 하하.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치매라도 온 건가?”
이 모든 것이 포르테의 계획대로다. 수십 발의 유도탄 폭격을 받은 마가릿은 소스라치게 놀라 핵만을 촉수로 다른 곳에 빼놓았을 것이다. 이전의 공격으로 마가릿의 핵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류제는 핵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근방에서 뽑혀 나온 촉수를 붙잡았다.
“무…무슨!”
방해되는 포르테를 물어뜯으려던 마가릿은 핵에 접근하는 류제를 뒤돌아보고 움찔거렸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손으로는 촉수가 잡히지 않자 류제가 한쪽 손만 장갑을 부분 해제했다.
“웃기지 마라, 인간 주제에!”
한 번의 방심에 책이 잡힌 마가릿이 핵을 파헤치는 류제에게 돌진했지만 포르테에 의해 저지당했다.
도망가게 둘쏘냐.
“이거 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럴 수 없지.”
기간트리카를 부서뜨린 마가릿의 손에서부터 안쪽으로 역병 인자가 침식했다. 강대한 역병 인자에 포르테의 몸이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깨진 기간트리카 헬멧 사이로 승리의 미소가 보였다.
류제가 군용 나이프로 붙잡은 촉수를 잘라내자 핵이 있는 부분에 다시 살갗이 붙기 시작했다. 마가릿은 방해가 되는 포르테의 뱃가죽을 뚫었다. 피가 범람했음에도 포르테는 손을 놓지 않았다. 맨손으로 촉수를 짓이긴 류제가 기어코 핵을 발견했다. 그의 손도 역병 인자로 변색되어서 짓물렀다.
“찾았다.”
“안 돼!”
단말마에는 복잡한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핵을 쥔 마왕의 부활체에게 마가릿은 자비라도 바라는 것처럼 울먹거렸다.
이딴 식으로 죽기 싫다. 이제 곧 마왕이 돌아오는데 어째서 그 손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건 그녀가 바랐던 미래와 달랐다.
“하찮은 인간의 손에 잘 가라, 병마의 군주.”
마족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류제는 단호하게 핵을 짓눌러 터뜨렸다. 저 잔인무쌍한 마족의 핵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삼백여 년을 넘게 불멸한 군주급 마족의 필멸하는 현재. 힘이 다한 포르테를 밀친 마가릿은 비명을 질렀다. 붕괴하는 육체가 거짓말 같다. 부정하려 해도 나라 하나를 멸할 강대한 힘을 잃고 흩어지는 육신은 모이지 못하고 소멸해 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나는 병마의 군주다. 이 내가 소멸한다니. 내가, 이 내가!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포기하지 못한 병마의 군주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면서까지 류제에게 달려들었다. 죽기 전 발악인가. 병마의 촉수가 그를 옭아맸다. 마가릿의 손끝 가까이 존재하는 류제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노출된 육체가 검게 변색된 지 오래다. 도망가래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왕으로 부활시킬 수 없다면 저승길이라도 함께하자는 걸지도 모르지. 숨을 들이켠 그가 손을 교차해 마가릿을 막았다.
“어째서… 마왕님……! 나라쿠바라. 나의 구세주.”
날 선 공격이 육체를 타격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대로 마가릿의 입에서 까마득한 이름을 들은 류제는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쨍 하고 스쳤다. 윤회를 거부하고 혼마저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마가릿의 마지막은 증오가 아니라 마족에게는 없는 슬픔과 비애로 점철되었다.
“이제 외롭지 않은 거야?”
그를 저주하며 죽음의 말을 내뱉는 대신 마가릿은 눈물을 흘렸다. 짙은 다크서클과 렌처럼 볼가에 가득한 주근깨, 창백한 입술이 스러져간다. 이것이 끝이라며 마가릿은 류제를 안타깝게 껴안았다. 분해되는 몸은 어떠한 기온도 품지 못했다.
머스터드색 눈동자와 눈이 맞은 류제는 그녀의 과거를 마주했다. 운명을 원망해도 비난하지 못할 처참했던 인생. 류제는 찰나의 시간 동안 인간이었던 괴물의 증오를 엿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