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3)
본부에 돌아온 류제를 호출하고 그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니냐롯트는 고원의 야수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국경 일대의 지도를 훑었다.
미노타군과 함께 등장한 마족으로 방어선이 무너진 8일 경과. 점차적으로 전력을 이동시키고 있지만 작은 실수로도 마족에게 포위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귀족파들에게서 류제 신리가 왕녀의 직속 호위 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돌았다. 이런 시국임을 이용해 그를 마음대로 휘둘러 정보를 빼낼 목적이겠지만 니냐롯트는 코웃음도 치지 않으며 도발을 받아들였다. 물론 호위 기사는 어림도 없다. 그녀는 그들의 논지대로 다른 의견을 몰아붙였다.
제립학교 학도병은 인류 연합군이 올 때까지만 참전할 예정이었지만 마족의 개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오래 군에 소속되어야 할 류제는 싫어도 많은 권력자에게 노출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도 곤란해지겠지. 대신 그녀는 그를 지켜줄 무기를 준비했다.
그녀는 군주급 병마족과 싸워서 시간을 벌어낸 것,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라우라 축제 때 화마를 저지했던 것, 군주급 니켈을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합동하여 몰아냈던 것, 제립학교에 있는 나라카산 자생 식물의 핵을 파괴한 업적과 세니타리 롯 및 백마의 군주 토벌 건을 고려하여 그녀의 이름으로 소위로 진급을 명했다.
소위는 제립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간의 군 훈련을 거치면 졸업생이 받을 수 있는 최초의 계급이다. 기간트리카 훈련과 어빌리티 전문 교육을 1년밖에 받지 못한 애송이 신분이지만 류제를 제립학교 졸업생 전력 그 이상으로 보고 있으며 귀족파가 그를 차세대 인류의 영웅으로 주목한다는 증거다.
그 계급을 수여받기 위해 류제가 작전사령부 지휘통제실 사령관저를 찾았다. 긴장되는 몸을 추스른 그가 턱 끝을 내렸다. 실수할까 목을 가다듬은 류제는 막사 밖에서 그가 왔음을 고했다.
“8중대 류제 신리.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들라.”
낯익은 목소리가 답신으로 들렸다. 정말 이 안에 왕녀가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권위의 장소에 입성하니 그가 아는 왕녀가 낯선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최상급자가 입는 군복에 권력을 상징하는 문장이 박혔다. 어울리지 않은 옷도 아름다워 홀려있던 류제가 멍하니 있다 경례했다.
“충성. 부르셨습니까.”
“벌써 봄이구나.”
작전사령관인 니냐롯트는 신성의 경례를 씁쓸하게 받아주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2학년 교실에 정답게 모여 학창 시절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나눴겠지. 문득 따사로운 봄의 햇살이 창문을 따라 렌의 머리를 간질였던 전경이 떠올랐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들었다. 그대 덕분에 마음이 놓여. 다른 학우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참으로 걱정이구나. 친구들의 근황은 알고 있나?”
“비키와 유네는 같은 중대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던… 합니다.”
어색한 존대에 웃음이 터진 니냐롯트가 훗 가볍게 갈무리했다. 루이나의 협박에도 끝까지 존대한 적 없던 그가 이곳에서 계급의 회초리에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무얼, 우리 사이에 새삼스레. 둘만 있을 때는 이전처럼 대해도 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작전사령관님.”
“그렇다면 명령이다. 그리 해주겠나.”
류제는 당황스러웠다. 군사 최고 권력자에게 일개 병장이 말을 놓으라니 그 누가 분에 찬 호화를 누리리오. 미노타군과 마족을 저지하는 모든 작전을 책임지는 그녀는 류제가 쳐다볼 수 없는 아득히도 높은 자였다.
니냐롯트는 류제의 존대를 들을 만큼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기 힘들었다. 그녀의 선택이 올발랐다고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해주겠나?”
상급자의 명령을 안 따를 수도 없고 난감해진 류제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말을 놓을 때까지 같은 말만 반복할 것 같은 왕녀의 무서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가 질끈 눈을 감고 끄덕였다.
“알…았어.”
“고맙군.”
만족한 그녀는 그제야 무서운 얼굴을 거두었다. 제립학교에서 가뭄에 콩 나듯 본 적 있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겹쳐졌다.
“마족 일로 바쁘겠지만 그대가 나의 손발이 되어주어야겠다. 명령은 아니고 내 개인적인 부탁이다.”
“손발이라니 저는― 하아, 마족의 세뇌 때문에 말이 많은데 날 신용하는 거야?”
“눈을 보면 안다. 그대가 나를 믿기에 이곳에 와준 것 아니겠나. 나는 어리석은 내게 보내는 그대의 신용을 믿는다.”
마왕의 혼을 가지고 있는 그가 실은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대신 침묵으로 답변한 류제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부활한다는 기정사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된다.
그는 평생 인간일 것이다. 렌을 위해서.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뭘 해주면 돼?”
주변에 유능한 사람이 많을 왕녀가 남몰래 그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필히 있을 거다. 그것이 이 전쟁을 끝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물론 무엇이든 할 용의가 넘쳤다.
“그대도 미노타군이 마족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은 인지했나?”
“공식적인 보고는 모르지만 중대장님 입에서 들은 적 있어.”
“누군들 미노타가 마족에게 조종당했을 거라고 알았을까. 마족이 어디까지 손을 뻗쳤는지 가늠할 수 없다. 충고하건대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지 말라. 그대 주변에도 마족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학교에 마족이 있다는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주변에 숨어있다는 마족은 아무리 곱씹어도 거짓말 같다. 제립학교의 대마족 결계를 속일 방법이 없다. 인간과 도드라진 특성인 마족의 뿔과 날개는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역시 왕녀가 의심하는 마족은 나야. 내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거다.
“우리 근처에 도사리는 서큐버스는 인간으로 의태할 수 있는 마족이니.”
그런 류제의 의심을 잡아내듯 니냐롯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서큐버스. 의태.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에 류제의 눈이 번뜩였다.
“서큐버스? 몽마를 말하는 거야?”
“그래, 인간으로 의태한 서큐버스 중 등급이 높은 마족은 대마족 결계를 속일 수 있다. 인간 기술력의 한계지. 본부에는 대마족 결계는 물론 마법 인자를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마법에 한해 안전하다만 전장에서는 쓸 수 없으니 유의해라. 각 중대에도 그리 명령이 내려갔을 것이다.”
학교에 마족이 있다 의심했던 왕녀는 그녀 주변에, 혹은 그의 주변에서 인두겁을 두른 마족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말하고 있었다.
마족이 학교에 잠입한 이유는 미래에 마족에 해가 될 학생들을 사전에 없애기 위해서일까? 인간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마족이 굳이 자존심을 무릅쓰고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류제는 가장 나쁜 경우가 떠올랐다. 바로 그 때문이다.
“그대는 아주 위험한 존재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족의 움직임은 류제와 연관이 있었다. 그는 왕녀가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문장을 곱씹으며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푸른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다행히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달랐다.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권력은 없지. 잘못했단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나를 돕는다면 내가 대신 그대의 평온을 지켜주겠다.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않나.”
그대는 귀찮은 것을 아주 싫어하니 말이지. 마족과 인간을 넘어서 그의 본질을 꿰뚫은 니냐롯트가 류제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마왕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은 류제가 내심 안도했다. 얼굴도 모르는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물론 귀찮았다. 상대가 왕녀라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도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주변에 의심되는 자가 떠오르면 알려다오.”
“알았어. 노력해 볼게.”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만족한 니냐롯트가 드디어 앉을 곳을 안내했다. 사령관이 직접 탄 차를 마신다니. 체할 것 같은 와중 류제는 옥상에서 차와 함께했던 담소가 겹쳐졌다. 은식기로 커피를 휘저은 니냐롯트는 친위대들에게 지켜지던 제립학교가 아닌 적도 아군도 모호한 전장에 홀로 선 신세를 한탄했다.
“그대에게 자신만만히 전했던 말이 수치스럽구나. 최후에 도달했을 때 미련이 없으려면 하지 않아서 생긴 후회가 없어야 한대도 정작 방향이 틀렸지. 돌아가는 법도 이젠 모르겠다.”
“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잖아.”
“마족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별개지 않나. 그건 무능과 다름없어.”
류제는 짐짓 입을 다물었다. 그 누가 마족이 떼거리로 덤벼들 것이라 예견했을까. 분명한 건 마족이 들이닥친 이 상황은 왕녀의 탓이 절대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다 보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보일 거야.”
위로를 해도 아는 것이 없는 그의 말은 영 영양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어빌리티를 개발하고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을 길러도 권력이 없는 그는 항상 휘둘려지는 쪽이었으니. 이런 자리에 서서 마족들을 막아내는 왕녀가 새삼 훌륭해 보였다.
적적한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커피를 홀짝이던 니냐롯트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 부탁 때문에 전방에 배정되었는데 불편한 점은 없나. 편제도 내 억지가 들어가 사병(士兵)들의 반발이 예상된다만.”
“전투가 잦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들 납득하고.”
니냐롯트가 은근슬쩍 떠보지만 류제는 의도를 모른 체했다.
“언제 또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까. 내게 궁금한 것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
니냐롯트는 지난날을 되짚어 보았다.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왔지만 학교에 마족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부분부터는 아리송했다. 가장 유력한 추측은 전쟁을 반대했던 렌 지미의 말뿐이지만 그에게 연락이 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딱히.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정도?”
그러니 류제 신리가 렌 지미의 발언에 뭔가 알고 있기만은 바라는데 그의 입은 느리고 무겁기만 하다.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자 졌다며 쿡쿡 웃은 그녀는 진중한 얼굴로 돌아와 돌직구를 날렸다.
“그건 누구도 모르지. 그럼 내 쪽에서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아는 거라면 답해줄게.”
“나와 외출한 날, 그대는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했지?”
뜬금없는 주제에 류제가 차를 마시려다 말았다. 그녀의 눈은 농담을 담았다기엔 한없이 진지해 뜻을 읽을 수 없었다.
“너와 나?”
의중이 헷갈렸지만 답해준다고 했으니 류제는 사실대로 답했다.
“함께 렌 병문안을 갔잖아.”
“렌 지미는 어쩌다 병원에 있게 되었지?”
“뭐?”
어쩌다 있었냐고? 서로 다 아는 사실을 이제 와서 왜.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렌을 위해서 이것저것 병문안 선물을 챙겨준 왕녀가 모를 리가 없다고 여긴 류제는 해괴한 질문을 되짚었다.
아니면 그녀도 나름대로 미노타와 연관된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네와 함께 세니타리 롯 놈들에게 납치당했다가 크게 다쳤잖아.”
“그대가 보았을 때도 병문안을 가줄 만큼 나는 그와 접점이 없었지.”
“무슨 소리야. 분명 넌…….”
절대 접점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 병마의 군주가 학교에 침입했을 때였나. 그때 왕녀가 렌에게 어떤 실수를 저질렀고 왕녀는 렌에게 사과하길 원했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으니 정확한 사실은 모른다.
“…왕실의 비호 아래에 있는 제립학교 학생에게 큰일이 일어났으니 면회를 간다 했었지. 아까부터 왜 그래.”
“거기서 렌 지미와 나는 무슨 대화를 했지?”
“지금 날 떠보는 거야?”
자기 입으로 함구하라 명했고 물어도 모르는 척했으면서 왜? 반응을 살피던 니냐롯트는 동요하는 류제의 눈동자에 빠져들어 생각을 더듬었다.
“그대는 그 대화를 들은 모양이군. 함께 있지는 않았고.”
그렇게 중얼거린 왕녀는 손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야 그렇지. 듣지 못한 척하라 말한 건 왕녀가 아닌가.
“그 이후 우리는 별다른 일 없이 헤어졌나?”
“…뭐, 할 일도 없잖아. 너도 친위대 몰래 나왔던 거고. 루이나가 날 잡아먹을 듯이 쳐다봤던 게 아직도 기억나네.”
“그대는 학교로 돌아가 뭘 했지?”
의처증 걸린 사람도 아니고 아까부터 왜 의미 모를 질문들로 사람을 꼬치꼬치 캐묻는 걸까. 대답하기 꺼려졌지만 아무리 말을 놓고 있어도 그녀는 비견이 불가능한 드높은 상급자다. 그녀 군복에 달린 계급장의 압박이 엄청나서 류제는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미나에게 갔지. 동아리 일로 자주 만났었거든. 새 학기 준비한다고 동아리실 정리했어.”
“다른 이들과 함께였나?”
“없었어. 우리 둘뿐이라.”
미나 플로리아. 얌전하고 존재감 없는 반의 도서위원이다. 2학기부터 둘이 같은 동아리였으니 이상할 것 없다.
“그다음에 기숙사로 돌아와서 비키와 만나 이야기했던가. 왜?”
“아니, 나와 데이트를 했으면서 잘도 바람을 피우는구나 싶었다.”
농담으로 얼버무린 니냐롯트는 직감을 예리하게 세웠다. 이제 명확해졌다. 마족을 의심한 이유는 물론이고 렌 지미에 관한 기억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그러는 동안 마족들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것 때문에 토벌을 고민했던 거 아니었냐고!”
“두려워? 흥, 개뿔이. 난 죽는 게 싫은 거야. 이 전쟁은 반드시 질 테니까!”
“제발 멍청이처럼 굴지 마! 넌 네 발로 호랑이굴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라고!”
“아니야. 정말이야. 다 적들의 계략이라고. 이건 마족들의―”
“그대는 어째서 렌 지미가 전쟁의 패배를 예견했는지 아는가.”
단지 우연의 일치일지라도 렌은 전쟁에 굉장한 두려움을 품었다. 특히나 당장 국경을 침공했던 미노타보다는 마족을 향한 공포가 지배적이었다.
그때는 렌 지미가 이상하다 생각했으나 지금 떠올리면 그는 마족과 필연적으로 얽히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애는 정작 중요한 건 내게 말 안 해. 그게 자기 생각일지라도.”
왕녀가 교실 단상에 서서 미노타군의 침공 사실을 인정하던 그때였나. 렌은 이상한 부분에 주목하며 화를 냈다. 쫓아가서 말리니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트집 잡고 이상한 논리를 들먹였다. 렌도 밸런타인데이 때 반 친구들에게 고배를 마신 데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때를 떠올리면 류제도 쓴웃음만 남았다.
“너도 잘 알지 않아?”
니냐롯트와의 침묵 대결에서 진 류제가 먼저 털어놓았다. 그녀도 병원에서 익히 실감했던 사실이 아닌가.
“아니, 뭐, 렌과 싸운 적이 있다며. 렌은 자기 이야기를 입 밖으로 안 꺼내. 고집도 세서 저번에 네가 손등에 키스했을 때도 사과를 안 받아줬댔나. 그 루이나가 기절초풍했지.”
“흐음.”
과연 과거의 자신은 그랬단 말이지. 니냐롯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사실과 달라진 부분이 상당했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나는 렌 지미에게 고개를 숙일 만큼 신용한 듯하다.
루이나도 모르는 비밀을 누가 폭로해 그녀의 기억을 없앴을까. 니냐롯트는 단정 짓지 않았다. 강한 어빌리티를 가져 귀족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류제도 의심한다. 관련된 기억이 사라졌던 렌 지미도.
그러나 그는 전쟁에 반대했었다. 오직 혼자서만 열렬하게. 그 점이 거슬렸다.
“그 애는 전쟁이 무서웠을 뿐일 거야. 새겨들어 상처받을 필요 없어.”
“전쟁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드물겠지. 과거를 추억하는 건 이제 충분하다.”
커피 잔을 내려둔 니냐롯트는 도톰한 입술에 옅은 곡선을 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한 상자를 들었다.
“아쉽지만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잡담이 주가 아니었으니 말이지.”
그녀가 상자에서 소위 계급장을 꺼냈다. 니냐롯트는 사령관으로서 소소한 의식도 없이 계급장을 하사했다. 창백한 손가락이 가슴팍에 닿았다. 류제도 이곳에 오는 동안 이야기는 전해들었지만 역시 기분이 남달랐다.
“무언가 이상이 있다면 곧바로 통신해라. 사소한 거라도 좋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쓸었다. 가련한 섬섬옥수가 류제의 앞에 당도했다. 그녀가 손을 떼자 류제는 작은 종이를 발견했다. 비밀스레 종이를 펼치니 자릿수가 다른 통신 번호가 있었다.
“도움이 되는 게 있었으면 좋겠네.”
이는 사령관인 왕녀의 군용 슬렉터와 연결된 번호일 것이다. 류제는 이걸로 보고는 물론 뿔뿔이 흩어진 친위대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전담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무기로 이용하는 것은 죄스럽지만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걸 위한 거래다.
“무운을 빈다. 수고하시게. 소위.”
“충성.”
오랜만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친우가 막사 밖으로 나가니 이제 그곳은 다시 그녀만의 공간이 되었다. 어쩐지 제립학교 1학년 8반 교실로, 아니 신관 학교 옥상으로 변모한 듯했던 지휘통제실은 제 역할을 찾았다.
한숨을 쉰 그녀는 책상에 앉아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전언을 재확인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족의 목적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라카에서 키아나트리체 군인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포로를 죽이지 않고 마기의 중심부로 데려가는 것 같다. 절반의 부대원은 귀환 대신 나라카에 남아 첩보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나머지 절반은 현재 나와 합류했다.]
[나라카로 귀환했던 마족들이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건너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현 은신처도 위험하다. 합류한 부대원과 미노타의 셋째 왕자를 데리고 대기 가능한 장소를 원한다.]
“과연.”
마족이 줄어든 것처럼 보였던 건 이 때문이었나. 짧은 단상을 마친 니냐롯트는 포르테에게 명령을 지시했다.
[수신자는 펠노아에서 대기. 그대는 나의 비장의 카드이다. 셋째 왕자는 합류한 부대원과 함께 지휘본부로 이동. 포로수용소의 미노타군을 안심시킬 것이다.]
작은 새가 언제까지 버거운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족들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일까. 실종된 어빌리터를 마왕성에 가두고 있다고? 백 년이 흐른 이제 와서 죽은 마왕의 추모식이라도 벌이는 셈인가?
머리를 붙잡고 탄식하는 가운데 그녀가 의심하고 고민에 빠져 절망의 길로 내려앉길 바라 마지않는 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같이 상쾌한 날에 왕녀의 심기를 건드려볼까 야비하게 웃던 그는 이 전쟁의 목적이자 승리의 포상인 류제가 막사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오오, 누군가 했더니 류제 신리 소위였군. 오랜만일세.”
“충성.”
“진급 축하하네.”
일단 장성급 장교복을 입고 있으니 경례를 먼저 한 류제는 얼굴을 확인하고 놀란 심정을 억눌렀다. 세니타리 롯 사건 때 도움을 줬다고 알려진 멜가로스크 자작이다.
힐링 팩터 처방을 가볍기 지시했으니 귀족인 줄은 알았지만 류제는 그의 복식에 붙은 세 개의 별 모양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명령 한 번으로 여단을 움직일 수 있는 준장. 애송이인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계급이다.
“소위의 능력을 높이 사서 기대 중이다. 우리 키아나트리체를 승전국으로 만들어주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족들의 공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는데. 껄껄 웃은 그는 이 전쟁이 어린애 장난인 양 뒷짐을 지고 사라졌다.
아무도 믿지 말라. 그럼 믿어야 할 자는 누구인가.
마음을 달래보지만 류제는 자신을 향한 믿음조차 흔들거렸다. 나를 믿는 왕녀는 허상을 믿는 것인가. 그러지 않기만을 하염없이 바랐다.
* * *
아가타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금빛 첨탑이 상징적인 키아나트리체 왕궁. 잎사귀가 다 바스라 떨어졌던 정원수는 과거 흔적이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미래가 부끄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봄의 노크로 매섭던 추위가 물러서고 따사로운 햇볕이 바람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오후. 전시인지도 모를 평화로운 분위기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왕궁 제1 정원에 딸린 순백 티파티장에 귀가 먼 까막눈 하인이 황홀경에 취한 그들을 시중들었다. 군사권을 들고 있어도 아름다운 드레스에 자신을 치장하기 바쁜 백작 부인은 자작 나뭇가지 같은 팔목을 들어 기품 있게 차를 마셨다.
“항해를 완주할 순풍이 붑니다.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려요.”
몸을 쓰는 건 천한 아랫것들이나 하는 것. 무지한 왕녀나 온몸에 화약이 묻도록 고생한다. 어빌리티가 없어도 조그마한 손가락질 하나로 원하는 건 얼마든지 이룰 수 있었다.
성실히 굴어도 왕녀는 혼란 속에서 처리될 것이고 마족은 득세한다. 왕녀의 발버둥은 헛된 아우성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리도 원활한데. 마왕의 부활은 진척이 어떠신지요, 마족의 대표님? 순풍인가요?”
“덕분에 시간문제지.”
아세미가 꿈꾸는 동화 같은 성에 이질적인 자가 단 하나. 샐러맨더의 왕 율폰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새하얀 가구에 비치는 강렬한 햇빛 뒤 그림자에 선 존재가 새까만 심연처럼 일렁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건 한 발자국이거든.”
그 한 발자국을 디디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1년간 인간의 추한 모습을 지독히도 목격했을 마왕의 부활체. 저들은 마족의 목적이 마왕 부활임은 알지만 인간으로 전생한 마왕을 각성시키는 게 아닌 마왕성에서 인간들을 제물로 바쳐 깨우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 누가 마족이 원래 인간이었던 존재라고 믿으리오. 어차피 인간의 목적이란 단순하고 시시하다. 지피지기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나라카로 간 어빌리터들은 어떻지.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나라카에 있는 게 확실한가?”
“글쎄. 인간은 다 똑같이 생겨서.”
“실례군요. 괴기한 날개와 흉측한 뿔이 있는 것보단 아름답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앞에서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며 자존심을 채우는 백작 부인은 부채를 팔랑거리며 새침하게 토라졌다. 순간 불꽃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겁 없이 율폰의 심기를 건드리자 티파티를 즐기던 귀족파 일대가 긴장했다.
왕비가 마족에게 살해당한 이후 왕궁 전반에는 제립학교에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대마족 결계가 형성되었지만 권력이 있는 배신자가 있다면 의태할 수 없는 율폰이 들어오는 것쯤 손쉬운 일이다. 이를 전담하는 것이 멜가로스크 자작이지만 오늘은 백작 부인이 대신했다.
백작 부인은 품 안에 있는 원격 컨트롤 장치를 의식했다. 율폰이 여기서 그들을 공격한다면 정체를 들켜 왕실 기사들에게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배신한다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대마족 결계를 해제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그녀는 알량한 우위를 선점했다. 율폰에게서 목줄을 건네받아야 하기에 단지 기다리는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어쨌든 그녀를 없애주어야 움직이기 편하오. 눈앞의 적을 처단할 뿐인 단순 무식한 원숭이는 원대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니.”
옆에 있던 귀족이 자극을 피하며 율폰의 주의를 끌었다. 백작 부인은 부채 사이로 가소로움을 숨겼다. 눈썹을 까딱거리던 율폰도 음산한 기운을 접었다. 손에 검은 불꽃을 올려둔 그는 요염하게 다루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될 거다.”
저들은 인류의 두 번째 영웅을 아가타로 들였을 때 해치울 속셈이겠지만 율폰의 입장에선 그녀 또한 강력한 마족이 될 재료였다. 반항이 거세면 처리하겠지만 적절한 증오만 주어진다면 잠재력이 충분했다.
“아아, 그래. 이제야 떠올랐군. 왕녀에게 붙은 서큐버스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백장미 부대가 나라카에서 귀환하니 호세마타 요새로 맞이하러 간다 했던가.”
류제 신리를 나라카로 데리고 간다던 플로냐의 속셈에 입을 맞춰줘야 한다. 힐끗거리며 인간들의 반응을 살피자 의도했던 대로였다.
“그런 중요한 말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샐러맨더의 왕. 맞이하러 가는 건 누구입니까? 왕녀 자신입니까?”
“아무나 상관없지 않나. 인간은 기억하지 않지만 왕녀는 아니었다.”
그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눈앞에 둔 목적지로 가기 위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고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 마족에 대한 공포는 최고조를 찌르고 어리석은 군중들은 공포에 떨며 그들의 명령을 따른다. 어빌리터들은 고작 적을 막는 방패에 불과하다.
“그러니 때가 되면 호세마타 요새에 류제 신리를 파견해라. 우리도 높은 등급의 마족을 보내주지.”
“이상한 말이로군요. 마족이라뇨.”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나?”
류제 신리는 귀족파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만큼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더한 위험에 내몰긴 위험부담이 컸다. 염화를 동그랗게 모아 손바닥 위에 놀리던 율폰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다 휙 튀어 오른 그것을 손으로 낚아채 어렵지 않게 터뜨렸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발견하면 처리해야지. 프로파간다는 신중하게 설계한다지 않았나? 업적이 쌓이면 가치가 상승하는 건 인간에겐 이치가 아닌 건가.”
자비로운 척 율폰이 그네들을 훑었다. 이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 중 하나다. 귀족들의 새로운 개. 그리고 그 강력한 개를 통솔할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도구.
“전장의 영웅을 없애려면 그 도구들이 있어야 할 텐데. 안티 슬렉터를 선보인 이후 감감무소식이군.”
“그것도 물론 준비되었지.”
그걸 사용하는 목적은 류제 신리를 잡아들이기 위해서지만.
율폰에게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유연한 거짓말로 인간들을 농락하는 그는 역시 인간들은 감정에 휘둘리는 멍청한 것들이라며 조소했다.
“알라마니 기술관이 일을 열심히 해서 말이야. 지금은 수정할 필요가 있어.”
“아무렴 연구에 미친 괴짜들이 일을 그르치게 둘 수는 없지요.”
“그것만 완성되면 나라를 망칠 왕녀는 이제 작별인 건가.”
혼란한 틈에 왕녀를 살해하려는 귀족파는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두고 그들 마음대로 키아나트리체를 주물럭거릴 것이다. 새로운 장기말은 어빌리터를 찍어 누를 도구와 계급에 굴복하여 절대복종하겠지.
그것이 과연 마족에게 세뇌당한 미노타 왕실과 무엇이 다를까. 뭔들 힘없는 범민들은 마왕이 부활한다면 이전보다 더 혹독한 삶에 짓눌릴 것이다.
절망을 바라는 그네들의 바람 소리가 현실이 된 것처럼 병마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의 웃음소리가 드넓은 대지에 우렁차게 울렸다. 그녀가 목적했던 알라마니 기술관이 파괴되어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하하하! 즐겁도다. 기쁘도다. 후련하도다. 누군들 이 병마의 군주를 막으리오!”
닿으면 육체가 썩어가는 역병 인자를 피해 겨우 살아남은 기술관 연구원들이 심취한 병마를 피해 기둥 뒤에 숨었다. 병마의 몸에서 나오는 촉수가 소중한 동료를 살해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시체가 되어 움직이는 장면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으니.”
“갑시다. 이제 포기하고 가야만 해요.”
“관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복수를 꿈꾸는 생존자들은 괴물 마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연구원들은 대체로 비어빌리터와 보조 어빌리티를 가진 자들뿐이라 등급1의 마족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통신 장비도 망가져 도움 요청도 불가능하다. 구울들을 처리할 폭발물로 병마의 군주의 시선을 끌고 쓸 만한 물건을 챙길 그들은 지하에 있는 사륜구동차 시동을 켜 지름길로 빠져나갈 것이다.
피난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건사했지만 이로써 키아나트리체의 연구 기술의 집약체가 파괴되었다. 키아나트리체에 무기 공급이 끊겨 고장 난 슬렉터도 재활용해야 하는 판이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 인간들이 마족에게 패배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 * *
마족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참전을 서두른 인류 연합군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대제국 키아나트리체가 무너지면 독자적으로는 마족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음을 감안한 제3국의 기간트리카 부대는 작전에 투입되자마자 세뇌된 미노타군을 몰아내고 마족 소탕에 힘썼다. 반전을 노리는 총공세로 마족이 주춤하는 기세가 보였다.
덕분에 한숨이 트인 키아나트리체는 기본 방어선에서 물러나 변두리 곳곳에서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마족 토벌에 집중했다. 류제도 방어선이 쳐져있던 북동 본부 근처에서 나라카와 가까운 남서쪽으로 작전지가 이동했다.
전방에 지원한 제립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구 방어선에 남아있었지만 유달리 그의 작전지만 이동한 이유는 진급도 물론이고 나라카에서 건너오는 마족 때문에 남서쪽 변경의 공격이 잦아져 척도가 높은 어빌리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는 왕녀는 강한 어빌리터들을 토대로 마족을 나라카로 몰아낼 목적인 듯하다.
매일 마족과 전투하며 실전에 익숙해진 류제는 같은 인간인 미노타군과 싸웠을 때보단 마음이 편했다. 수많은 인간을 죽였을 마족이 키아나트리체의 마지막 보루인 나이엔힐리아까지 도달하지 못하기만 하면 무념으로 싸울 수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등급4의 사마족입니다.”
“사마(死魔)? 당장 프로텍터로 소리를 차단해!”
그럼에도 그가 마주하는 마족들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공격을 자행하곤 했다. 현재 류제가 마주한 마족은 죽음의 장소에 출몰하는 사마족이다. 병마, 화마처럼 상대한 적 있는 마족 분파가 아니라서 공략이 더디던 와중 인간을 물어뜯는 강철 같은 송곳니를 보인 마족이 노래를 불렀다.
“저 빌어먹을 죽음의 악마.”
“끅… 으으. …머리가……!”
“음파를 차단해야…….”
등급과 상관없이 사마의 노래는 진동에 닿은 생명을 흡수한다. 마족을 둘러싼 여러 대의 기간트리카가 비틀거렸다.
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은 기간트리카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류제는 간신히 프로텍터에 접근해 안쪽으로 침입하는 마법을 차단했지만 중대원들은 타이밍을 놓치고 광활한 대지 아래로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여기는 ‘탈란드시아’. 도달까지 약 1분. 협력해도 되겠나.”
위기를 타개할 통신이 들리며 죽음을 부르는 음파가 사라졌다. 근처에 있던 다른 중대가 상황을 파악하고 협공에 나섰다.
“기체 시리얼 넘버 81, 마법 상쇄합니다.”
“핵의 위치 ‘분석’ 부탁한다.”
협력 중대 중에 ‘소리’ 계열의 어빌리터가 있어 사마족의 노래를 흩트려 놓았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류제가 근거리 공격을 담당하는 대원과 함께 사마족의 육신을 조각내었다.
“핵의 위치 특정. ‘분석’ 완료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3cm 아래입니다.”
들어본 목소리다. 핵 위치가 특정되자 군용 나이프로 마족의 오른쪽 어깨를 잘라낸 류제는 마족의 재생력으로 살이 붙기 전 칼을 비틀어 억지로 벌렸다. 다른 중대원들이 재생하려는 살을 방해했음에도 마족은 류제의 기간트리카를 붙잡고 내부까지 침입해 목을 졸랐다.
“하지 마. …주제에 왜! 배신하면 가만 안 둬.”
신체를 압박하는 괴력과 그를 응시하는 붉은 동공이 두렵다. 그 눈에서 보이는 죽음을 향한 갈망 때문인가. 혹은 그가 깨어나지 못한 마족의 왕이기 때문인가. 애써 괴물을 외면한 그는 마침내 마족의 핵을 찔러 소멸시켰다.
“어째서, 왜 같은―”
“‘죽음 인자’ 반응 무. 적 소멸 확인.”
좌절하는 마족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만 같다. 류제는 어렵사리 애처로운 비명에 귀를 틀어막았다. 저건 마족이다. 인간을 수백을 죽였을 잔인한 마족이란 말이다.
전투 종료 후 휴식을 위해 두 기간트리카 중대가 지면으로 내려왔다. 마법 인자가 소멸했다지만 한때 인자의 침범을 허락했던 내부가 찝찝했던 류제가 헬멧을 해제시켜 공기를 순환했다. 그러니 다른 중대의 대원 하나가 반갑게 다가왔다.
“류제! 역시 너 맞지?”
그녀 또한 헬멧을 장갑 해제했다. 녹색 단발머리가 땀에 젖어 얼굴에 붙었고 기간트리카 장갑을 위해 안경을 벗어 분홍 눈동자가 말갛게 들어나 태양에 일렁거렸다. 통신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미나였다.
미나도 역시 류제를 알아보았다. 특유의 미성과 1년과 봐온 전투 스타일, 사랑하는 마왕을 품은 육체를 그녀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미나! 어빌리티를 보고 설마 했는데. 이게 얼마 만이야.”
아니, 우연히 마주한 상황도 모두 그녀가 의도했던 것이지만.
원대한 부활 계획에 무지해 배신을 운운하던 등급 낮은 사마족을 처리한 건 마족 부흥을 위한 희생의 일부다. 의심을 피하려 동족 처리에 거리낌이 없던 그녀가 류제의 손을 반갑게 붙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잘 지냈어?”
“너야말로 방심하면 못써. 어디 우리 류제, 조금은 성장했니?”
보호자인 척 연기하는 미나가 장난이라며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그녀와 재회한 류제는 마음 한편이 스르르 풀렸다. 같은 반 친구라는 단순한 관계를 넘어 노련한 상담가를 전장에서 만났다는 동지애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진심이 반가웠다. 류제는 왕녀의 부탁이었던 가까이 있는 이를 의심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사마족은 처음이라 당황했어. 너도 이쪽 본부로 왔구나. 후방으로 지원한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보조 어빌리터라 전투력은 없지만 나 꽤 쓸모 있나 봐.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되어서 기뻐.”
“겸손할 거 없어. 너도 체육대회 때 나랑 같은 팀이었잖아. 그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빛을 발한 거지.”
“에이, 그때랑 지금을 비교하면 어린애 소꿉장난인걸.”
어빌리터는 워낙 소수라 몇 다리를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지만 막내가 전장에서 지인을 만난 사건은 임무 중에서도 기특한 일이었다. 앉아서 수통을 열어 물을 마시던 류제의 중대장이 친절하게 물었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냐?”
“제립학교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청춘이구나. 남자 친구?”
그러니 중대원들이 휘파람을 날려댔다. 피바람이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어지간히 이런 이야기가 고팠나 보다. 어쩐지 부끄러워진 두 사람은 그런 거 아니라며 동시에 손을 내젓다가 서로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족도 쓰러뜨렸겠다, 본부로부터 작전명령이 떨어지기 전 그들은 마족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보초를 서서 번갈아 가며 휴식했다.
중대원들의 배려로 두 사람을 회포를 풀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은 덕분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꽃을 피웠다.
도서부 사람들 이야기, 적응이 잘 안 되는 전장 노숙 생활, 적의 낌새, 이동하며 만난 8반 친구들. 다양한 주제가 나왔지만 역시 렌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미나의 배려라고 착각한 류제는 상냥함에 쉽게 빠져들었다.
“세라 선생님이 우리들 걱정에 잠을 못 이루신다더라. 넌 어디 다친 곳 없지?”
“난 약해서 몸 사리는 거 하나는 잘하거든. 아직까지는 괜찮아.”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아? 전방은 위험하니 반대하셨을 거 같은데.”
그러자 짐짓 미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풀숲에 기댄 그녀는 비련에 가득한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가족이라. 그런 건 인간을 버리면서 잊은 지 오래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고 했지만 어쩐지 눈을 내리깐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가족이 없어, 류제. 요즘에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랬…구나. 미안. 내가 무신경했네.”
그나 비키나 렌처럼 낳아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학생이 적지 않다지만 미나도 가족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따금 미나가 비어빌리터를 차별하는 듯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건 그녀에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형편은 다 비슷해. 전방에 지원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걸. 어차피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슬퍼.”
다투지 않았더라면 왠지 렌이 했을 법한 말에 류제가 극구 부인했다. 동시에 일순 어떤 생각이 맴돌았다.
그래, 렌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위험한 일에 뛰어든다. 학교에 있을 때에도 사건을 해결한답시고 매일같이 다치고 상처받았지. 그것이 가족의 부재로 세상에 미련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는 왜 반응이 달랐지? 렌은 자기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 주장했지만 제 성격대로라면 당장 친구를 위해서라며 최전선에 나가겠다 우겼을 것이다. 당시는 여러 상황이 겹쳐서 짚지 못했는데 충분히 수상했다.
“그렇지? 하하. 미안, 여기 있으면 그냥 좀 우울해지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아 줘.”
“알았어. 걱정하지 마.”
누구 대신이라는 듯 류제가 미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렌의 행동 이면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을 이 손바닥 안에 숨겼다. 아니야, 렌은 후방에 있고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못한다. 렌을 지키기 위해서 한 희생이 물거품이 될 수 없었다.
“실수로 이상한 이야기를 해버렸네. 아, 그래. 류제, 그거 알아? 나 백장미 부대 백업을 하러 호세마타 요새로 간다?”
“백장미? 호세마타 요새?”
렌 생각을 하다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류제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 미나가 쉿, 쉿 입단속을 시켰다.
“별건 아냐. 백장미 부대가 나라카에서 무사히 건너올 수 있게 마족을 감시하는 일이야. 나는 ‘분석’ 어빌리터라서 멀리 있는 게 마족인지 인간인지 빨리 분간할 수 있으니까. 무려 왕녀님의 직속 명령이거든. 비밀 작전이라 입이 근지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영광이지? 이제 인류도 안심이야.”
윙크를 한 그녀가 비밀이라며 류제의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들 주변에 의태한 서큐버스가 있다고 하지만 미나는 아니었다. 마족이 어떻게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마족을 처치해.
그렇게 판단한 그는 미나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단지 어빌리터가 마족을 상대하는 것을 이이제이라고 표현했었던 것 같은 그녀가 이토록 전쟁에 의연한 이유가 살짝 걸렸다.
미나의 마수가 류제를 향하는 한편, 비어빌리터는 망설임 없이 처리하는 마족이 어빌리터를 납치하는 현상을 수상하게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타고시아 해변 악몽 이후 셀로니아 가문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며 마족의 번식법을 깨달은 비키 셀로니아다.
보급을 위해 오랜만에 본부로 돌아온 유네와 비키의 중대는 부상 치료와 식량 조달로 바빴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질끈 묶은 비키는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되짚으며 마른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비키 양, 어디 다쳤어? 안색이 안 좋아.”
“아까 있었던 전투를 생각했어. 아픈 건 아냐.”
며칠 전부터 탐탁지 않은 부분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덕분에 오늘 전투에서 방심해 버렸지만 유네가 곁에 있어서 살았다.
서투르던 유네는 이제 마족을 공격하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생명을 상처 입히는 나쁜 자신을 향한 공포에서 벗어나 마음이 단단해진 것이다.
“그보다 유네 너 움직임이 좋더라. 정확하게 마족의 핵을 노렸던데. 바람도 보다 날카로워졌어.”
“아직 멀었지. 그것도 비키 양이 없었으면 안 되었을 거야. 신세만 져서 항상 미안해.”
“신세라고 생각 안 해. 오늘 건 순전히 네 공인걸.”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비키 양밖에 없어.”
“애초부터 여기서 적과 맞서 싸우는 너를 아무도 비난 못 해. 너도 너 자신을 탓하지 마.”
비키가 위로를 넘어 타박했다. 탓하지 말래도 유네는 비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 침울했다. 바람과 불이라는 두 사람의 어빌리티는 조합이 좋아 함께 있지만 비키는 유능해서 언제 버림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유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비키를 보고 자극받은 덕분도 있었다.
“난 볼일이 있어서 잠깐 가볼게. 먼저 돌아가 있어.”
“응, 이따 봐.”
유네는 또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이전에 따돌림을 당했을 때 유네도 어영부영 자신을 탓하곤 했다. 지키고 싶은 게 생겼으니 지금은 더 이상 무능력하고, 그저 좋은 곳에서 태어났을 뿐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짐해서 이곳에 온 것 아닌가.
렌 군, 내게 힘을 줘.
유네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상상 속의 렌이 기운이라도 줬는지 유네는 당당히 어깨를 폈다. 돌아가는 유네를 잠깐 돌아본 비키는 만족스레 제 갈 길로 향했다.
지휘본부까지 서두르던 그녀의 걸음이 점점 주춤거렸다. 사령관을 만나기도 전인데 큰 장애물이 남았다. 지휘통제실 막사를 지키는 군인은 그녀보다 계급이 높은 장교였다.
감히 병사 주제에 사령관께 직접 말을 전한다는 게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위축된 심정에 머뭇거리던 비키는 용기를 내 다가갔다.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서이니 무서울 것 없다.
비키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경례했다.
“충성. 26중대 병장 비키 셀로니아. 사령관님께 감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전달해 주겠다.”
“사령관님께 직접 보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족의 세뇌 때문에 복잡한데 고작 병장 주제에 사전 고지도 없이 사령관을 만나러 와? 상식 밖의 하극상에 장교들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개소리 말고 꺼져라. 제립학교 학생이 끼어드니 듣도 보도 못한 사태가 생기는군.”
“애송이들은 이래서… 셀로니아? 잠깐 있어 봐.”
저 붉은 머리를 보고 생각나는 게 있었던 군인이 멈칫했다. 비키 셀로니아라면 그 유명한 셀로니아 가문 생존자 아닌가. 다른 장교가 물러서지 않는 비키를 밀치려고 했을 때 옆 사람이 저지했다.
“셀로니아라면 설마 후작가 말인가?”
“사령관님을 만나 뵈려면 정당한 절차를 밟고 와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언제 또 본부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가 알아차린 사실은 니냐롯트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가설이었다. 비키가 자행하는 일은 군법에 어긋나서 장교들도 난처했다.
“무슨 소란이지?”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치하던 비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작전을 세우던 중 참모의 보고를 듣고 돌아온 니냐롯트가 있었다. 나이가 어려도 사람을 이끄는 위대한 자의 위용이 대단했다.
“사령관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추…충성! 26중대 병장 비키 셀로니아. 사…사…사령관님께 전할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사령관님은 바쁘시다. 그런 건 중대장을 통하라고 했잖아!”
“괜찮다. 말해보라.”
다행히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인지 니냐롯트는 비키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키가 떨리는 손을 내렸다.
사령관이 허락하자 장교들도 비키를 끌어내려고 힘썼던 팔을 떨떠름하게 풀었다. 버티던 비키가 비틀거리다 생기 도는 녹색 눈으로 니냐롯트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마족의 이상행동에 대하여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감히 제 견지를 입에 담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마족들의 집단행동 말인가?”
“인간을 납치하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눈빛을 보아하니 마족에게 세뇌를 당한 건 아닌 듯하고. 허황된 말에 사령관이 입을 다물자 장교가 역시 비키를 밀어내려 했다. 그 움직임을 손을 들어 멈춘 니냐롯트는 천막을 걷었다.
“안으로 들어오거라.”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장교를 지나친 비키가 조심스레 지휘본부 안으로 들어왔다. 비키는 추론이 정답일지 분명하지 않은 와중에 함부로 말을 꺼내도 될까 확신이 없었다.
“네가 먼저 찾아오다니 신기하구나. 날 원망하고 있을 줄 알았다.”
“원망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셀로니아, 언제든지 저하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맹목적인 충성심이 향하는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니냐롯트는 장한 비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뒷짐만 지고 앉을 곳에 안내했다.
“따르더라도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막아다오. 가신이란 응당 그래야지.”
“잘못되었다 할지언정 언젠가 분명 터졌을 일. 사령관님, 저는 이 전쟁이 계획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노타군이 마족에게 세뇌당했기 때문인가?”
“그 외에도 마족들이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납치 행위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흐음, 이상하다고는 여겼지만 생소한 접근이로군.”
참모에게 들은바, 며칠 전 통신 두절된 알라마니 기술관을 우려하던 니냐롯트는 최근 구울이 된 어빌리터의 비율보다 실종된 어빌리터의 비율이 높다는 보고를 받았다.
알라마니 기술관에 정찰병을 보내고 싶지만 병력이 부족해서 어찌하지 못하는 이 상황의 이유를 안다는 비키에겐 어떤 정답이 들어있을까. 니냐롯트는 호기심이 생겼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사령관님의 상식을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허황되다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제 보잘것없는 소견을 기억해 주십시오.”
“좋다. 발언을 허한다.”
진실을 탐구하는 자세가 신선하다. 가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마족 토벌에 눈이 멀어있던 비키 셀로니아가 언제부터 이처럼 바뀌었더라? 목을 가다듬는 비키를 기다리던 니냐롯트는 짧게 두통이 일었다.
“마족들이 어빌리터를 납치하는 이유는 마족이 원래 인간 어빌리터였기 때문입니다.”
“인간?”
인간을 사냥하고 증오하고 먹이로 삼는 재앙이 본디 인간이었다고? 놀라운 접근 방식이었다.
“어찌하여 그리 판단했지?”
비키는 그 말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황당무계한 의견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니냐롯트이기에 말할 수 있었다. 설득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비키는 니냐롯트를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에 고개 숙여 감복했다.
“저희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등급1의 화마. 샐러맨더의 왕이 바로 먼 과거 셀로니아가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들어라.”
그러기 위해서 비키는 역사 속에 잘 숨겨왔던 셀로니아 가문의 치부를 알려야 했다. 며칠 전부터 정리했던 말이 긴장으로 순백 속에 사라지는 기분이다.
진정하자. 사령관님은 내게 죄를 묻지 않을 거야. 침착하게 머릿속에서 글자 하나하나를 집은 비키가 입을 뗐다.
비키는 셀로니아 가문이 멸족하던 날에 있었던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때 본 초상화 속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라는 인물이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등급1의 화마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도 말했다.
어떤 계기로 그 기억이 되살아난 그녀는 그때부터 셀로니아 가문의 유래를 조사했다. 기록이 바랜 먼 과거에 있었던 첩과 서자를 불문하고 가문의 사람들을 조사하던 중 비키는 그녀의 가문이 저질렀던 추악한 만행을 알아냈다.
이 가문은 시작부터가 뒤틀렸다. 본래부터 셀로니아 가문은 ‘마녀 사냥꾼’, 즉 키아나트리체 건국 전 먼 과거에는―
어빌리터를 사냥하던 집안이었다는 것을.
마녀 사냥꾼이었던 셀로니아 가문은 태어나는 어빌리터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 가문에서 태어난 어빌리터였던 등급1의 화마는 어떠한 경위로 마족이 되었고 긴 세월 후 그 복수로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켰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끝났다. 상대가 니냐롯트이기에 비키는 긴 정적을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과연.”
태고부터 존재했던 어빌리터를 향한 차별은 니냐롯트도 익히 알았다. 신빙성 있는 주장은 고려할 만하다. 그렇다 한들 지금껏 수많은 기회가 있어왔는데 이제 와서 마족들이 어빌리터만을 선별해 납치한다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어빌리터가 마족이 될 수 있다면 구울과 마족의 차이점은 무엇이지?
의문을 품으니 마족들이 전장에 나타났을 때 자랑스레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다. 진실은 하나이니 모든 증거들은 하나의 길을 자아냈다.
“마왕 부활의 때라.”
“마왕 부활…이라뇨?”
“그래, 그래서였어. 마족은 마왕을 부활시킬 생각이다. 마족이 될 수 있는 인간은 어빌리터이고 인간을 마족으로 만드는 자는 마왕뿐인 거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비키가 혜안에 감탄했다. 가설이 점점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마족들이 떼를 지어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로라 하놋이 한 희생은 고작 백여 년의 짧은 평화뿐이라는 것인가.”
“사령관님,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우리는……!”
마족의 속셈이 풀렸다. 저 악마들은 전쟁을 이용해 마왕을 부활시킬 어떤 준비를 하고 있다. 제물을 바치려는 건지 혹은 마왕이 이미 나라카에서 부활을 했는지 아는 것은 마족뿐이겠지.
이제 남은 수수께끼는 미노타가 마족의 수중에 있다는 걸 귀족파들이 알았느냐다. 귀족파의 의도에 대해선 증거는 없으나 니냐롯트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마족과 귀족파가 모종의 계약을 했다는 가설이 정설이 되어간다.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비키에게 입단속을 시킨 니냐롯트는 그녀를 조용히 중대로 돌려보냈다. 가설은 이 상황을 타개할 지식으로 소화되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그녀는 사람을 물리고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마왕의 부활. 의태한 서큐버스. 귀족파. 셀로니아 가문. 왕비의 죽음. 알라마니 기술관. 백장미 부대. 나라카. 주요 키워드가 난발하며 하나씩 새로운 색으로 선이 이어졌다.
―지직 여기는 w―99, 응답하라, 오버.
무시할 수 없는 잡음이 들렸다. 자신만의 궁전에서 마인드맵을 그리던 니냐롯트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슬렉터가 얕게 알림을 주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유연하게 상대방을 확인했다. 드디어 그들이 도착했다. 속셈이 무엇이든 그녀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답하라.”
―저하, 안녕하십니까! 배달부가 왔습니다. 지휘본부가 보이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활기찬 목소리 뒤로 ‘이 버릇없는 놈!’이라는 타박이 들려왔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보냈던 네네 슈만과 루비니 아로즈네그 등 절반의 백장미 부대원이 지휘본부로 합류했다.
“좌표를 보내주겠다. 그곳에서 대기하라. 눈에 띄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73.
그녀도 곧바로 지휘통제실에서 나와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둔 위장 천막에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후드를 벗은 백장미 부대원들이 니냐롯트에게 경례했다. 나라카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왔을 그녀들의 몰골은 불쌍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대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오.”
“나라카 관광은 쉬운 기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만족… 아야.”
“닥쳐, 아로즈네그. 사령관님 앞에서 무엄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을 가진 네네 슈만은 FM이 따로 없었고 늑대 귀를 쫑긋거린 루비니 아로즈네그는 아픈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저래 보여도 백장미 부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뒤로 멀대 같은 인물이 한 명 보였다.
“마…만나서 반갑습니다, 니냐롯트 왕녀. 미노타의 셋째 왕자 ‘하늘바람’이라 합니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라 하오. 이야기는 대령을 통해서 들었소.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
몇 달 전부터 포르테 들라크루아로부터 언질 받았던 미노타의 셋째 왕자와 접선한 니냐롯트는 특이한 이름과 외견을 가진 그를 관찰했다.
어렸을 적 국가 간 교류의 일환으로 미노타의 첫째 왕자와는 몇 번 만난 적 있으나 셋째 왕자와는 첫 만남이다. 위대한 후툼의 피를 이은 자식들 중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인 셋째 왕자는 유약한 성격으로 바깥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선 이걸 먼저 걸치시오. 크기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감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 주시고.”
니냐롯트는 미리 준비해 둔 남성용 군복을 건네주었다. 누더기 같은 옷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하늘바람은 같은 또래라 예상했던 것보다는 덩치가 조금 컸다. 손목에 반 뼘 정도 살이 보였다.
“어색하군요.”
왕족답지 않게 비실비실한 자태와 부족해 보이는 미소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만 그 덕분에 미노타 뒤에 마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았나. 그가 긴장을 푼 것처럼 보이자 니냐롯트는 필요한 사람을 추슬러 호출했다.
“저를 따라오시오. 슈만 중위, 아로즈네그 소위도 나를 따르라. 나머지는 이곳에서 대기한다.”
“사령관님, 힘든데 좀 쉬었다 가도 됩니까?”
“넌 사건의 엄중함을 알 필요가 있어, 루비니 아로즈네그. 잔말 말고 따라와.”
네네 슈만이 빈정거리자 늑대 귀 군인은 무사 귀환부터 축하하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도 갈굼을 당했는지 이 정도 하극상은 우스운 모양이다.
눈가를 실룩거린 네네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후 사령관을 뒤따라 걸었다. 루비니도 모습이 노출되지 않도록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타국의 군복을 입게 해서 미안하오. 키아나트리체 내부에도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이해해 주시오.”
반걸음 떨어져 뒤따라오던 하늘바람에게 니냐롯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처음 보는 여인과의 대화가 부끄러웠던 하늘바람은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키아나트리체의 제1왕녀가 그리도 아름답다던 형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라우스의 소중한 자식들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지키기 위해 미노타에서 머나먼 키아나트리체 변방까지 왔다. 이번 전쟁의 열쇠를 쥔 그가 미노타 왕실에서 벌어진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우연이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데다 외부 활동을 선호하지 않던 그는 왕실 내에서도 존재감이 없던 왕자였다. 환절기 감기로 고생해 앓아눕기를 며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는 물을 가져다주는 간병인이 오질 않아 외부로 걸음했다. 그때 그는 그 광경을 목격했다.
“명분을 만들어 군대를 이동시켜라.”
[키아나트리체의 어린 어빌리터를 납치해. 그들이 먼저 공격하게 빌미를 잡아.]
“키아나트리체를 공격하라. 키아나트리체만 없다면 미노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조약을 어기게 종용하자. 전쟁을 하는 거야.]
위대한 후툼의 접견실에서 박쥐 날개를 가진 십수의 서큐버스들에게 농락당하는 형님들이 보였다. 라우스의 의지를 이어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대한 후툼은 화마에게 살해당했다. 대신 왕좌에 앉은 하얀 머리의 소년은 일렁이는 검은 불꽃으로 사람을 집어삼켰다. 왕실의 고요는 죽음이 부른 것이다.
“군대를 모아라! 인간을 죽여라! 키아나트리체를 쳐라!”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형님들이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숨이 목 끝까지 찰 때까지 도망쳤다. 구울들이 도사리는 성벽에 막혀 비밀 통로를 찾아 미친 듯이 뛰었다.
다행이다. 존재감이 없어서. 다행이다. 병약한 나는 마족들에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서.
그때만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노타에 이어진 기근으로 생긴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던 형님들. 유목 말고도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광산 산업. 광산에서 나온 보석의 원석. 이제 잘 풀릴 날이 눈앞에 있었는데 모든 게 뒤틀렸다. 도움을 청해야 하지만 그런 광경을 봐버린 이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위대한 후툼의 자식 된 입장으로서 그는 라우스의 소중한 아이들을 위해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노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마족에게 멸망하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방법을 강구하던 그는 키아나트리체에 있는 마족 토벌자를 떠올렸다. 키아나트리체라면 마족 토벌에 가장 앞장서는 국가이자 드라코니스 입자를 임의로 컨트롤하는 기술이 가장 발전한 나라가 아닌가. 그곳이라면 도움을 줄 것이다.
형님들이 이끌 미노타군이 키아나트리체를 침공하기 전에 미노타 왕실이 서큐버스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야 했다. 늦었다가는 미노타는 마족들의 손에 의해 인류를 배반할 것이다. 오명을 저지하기 위해 그는 먼 여행을 떠났다.
병약한 그가 혼자의 몸으로 국경을 넘어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접선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호세마타 요새에서 며칠 앓아누워 버렸지만 지금 이곳에서 키아나트리체의 다음 왕위를 이을 제1왕녀와 만난 것도 하늘이 도왔다. 두 번의 기적이 부디 다시 한 번의 기적으로 이어지길. 그는 바람의 드래곤 라우스에게 기도를 올렸다.
* * *
얼마 후 류제의 중대는 본부로부터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미나는 호세마타 요새로 파견되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헤어짐에 아쉬움이 컸다.
“수고해. 또 보자.”
“응. 잘 가, 류제.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미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립학교의 일상 속에서 본 적 있는 미소다.
이 상황에서 저만큼 웃을 수 있다니 강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중대원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향하는 미나의 뒷모습을 보며 류제는 손을 내렸다.
한쪽에서 마지막 연초를 태우던 미나네 중대장이 류제를 지나쳐 그들에게 향했다.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미나를 잘 부탁한다 경례하려던 류제는 그녀의 눈동자가 세뇌당한 미노타군처럼 감정 없는 인형처럼 느껴져 온몸이 얼어붙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자…작전 성공을 빕니다. 그런데―”
차가운 목소리에 머뭇거리던 류제는 이내 이으려 했던 말을 무시당했다. 기간트리카를 전체 장갑한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 예닐곱 정도의 중대원이 중대장을 따라 하늘로 차례로 날아올랐다.
기묘한 감각이 경고했지만 지친 모습을 착각했나 싶었다. 그야 미나는 멀쩡했잖아. 아까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눈빛은 미노타의 기간트리카 부대에게서 느껴졌던 감각과는 정반대였는걸.
류제가 중대장을 따라 멜가로스크 준장의 여단이 있는 남서방위본부로 복귀하는 동안 제1 지휘통제본부에 있는 니냐롯트는 네네 슈만에게서 현 백장미 부대 상황 보고를 전해 들었다.
“대령님은 명대로 펠노아로 향했습니다. 나머지 부대원은 나라카에 남아 포로를 구출할 것입니다.”
“나라카는 어떠한가.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나라카의 독기를 차단할 수 있으니 식량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니냐롯트는 걱정하는 진짜 이유를 입에 담지 않았다. 비키에게서 마족이 어빌리터였다는 가정을 들은 게 바로 전이다. 백장미 부대가 마족이 되어 적의 전력이 되어버린다는 걱정은 나쁜 염려였다. 가설이 사실이라면 나라카로 납치된 어빌리터를 구해야 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저희 백장미 특공대대,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행운의 여신이 앞길을 비추길 바라는 수밖에.”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마족의 노림수를 무마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니냐롯트.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보고를 마친 네네 슈만이 뒤로 물러섰다. 옆에서 늑대 귀 군인이 사령관이랑 잘도 이야기한다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네네 슈만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백장미 부대라. 소문으로 들어봤지만 함께하는 내내 느꼈습니다. 강한 전우를 두셨군요.”
언제까지고 당당한 것 같은 니냐롯트의 후광이 눈이 부셨는지 사령관실의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하늘바람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강함은 책임감에서 나올까. 위대한 후툼이 될 수 없는 그가 병약하다는 핑계로 왕궁 구석에 숨어있는 동안 미노타 왕실은 엉망진창이 되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족에게 농락당해 이용당하고 결국 미노타는 인류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썼다.
“저는 무능력자에 위험에 처한 미노타를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라 맞서 싸우는 왕녀의 기백이 부럽습니다.”
하물며 해법을 나라 밖에서 찾은 것도 염치없다. 그러나 니냐롯트는 그렇게 여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빌리터든 비어빌리터든 혈혈단신으로 마족에 맞서는 건 두려운 일이다. 그러니 다 함께 힘을 합쳐 해치우고 있지 않은가. 그의 행동은 현명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무연고지 타국까지 찾아와 준 그대의 공을 격하하지 마시오. 누가 그 같은 용기를 내겠소.”
“위대한 후툼이 마족에게 살해당하자 두려움에 짓눌렸을 뿐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 저는 라우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 이입니다. 그리 말하지 말아 주세요.”
침울해진 그를 위해 미노타의 어빌리터들을 가둔 포로수용소로 안내해 준 니냐롯트는 그녀에게 경례하는 군인들을 물리고 세뇌가 일정 부분 풀린 포로들을 호출했다.
마족이 만든 오파츠인 안티 어빌리티를 토대로 제작한 어빌리티 제한 장치가 곳곳에 깔린 포로수용소에서 피곤한 듯 앉아있던 미노타의 장교가 하늘바람의 얼굴에 있는 후툼의 자식의 붉은 문신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설마… 설마 후툼의 세 번째 보석이 아닙니까.”
“이럴 수가. 왕자님마저 잡혀 오시다니. 망할 마족들이 어디까지 세뇌의 손길을 뻗친 건지!”
“진정하세요. 제가 키아나트리체 제1왕녀에게 미노타를 도와달라 부탁한 겁니다.”
의지를 박탈당하고 적이 아닌 적을 공격했던 미노타의 위대한 전사들을 직접 본 하늘바람은 복합적인 감정이 가슴 언저리에 끓어올랐다. 그들이 이런 곳에 갇힌 건 전부 미노타 왕실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하늘바람은 철창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제가 약해서 라우스의 소중한 자식들을 상처 입혔습니다. 어찌 사과드려야 할까요.”
“미노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왕자님. 위대한 후툼의 첫째 보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우스의 안배가 깃든 땅은 끝나는 겁니까? 뭐든지 좋으니 알려주십시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라우스여!”
민족 대대로 내려오는 전승에 나오는 드래곤의 이름을 기억하는 그들은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긍지 높은 자들이라 스스로를 칭했다. 그런 원대한 민족의 역사가 마족의 이간질로 사라지다니 치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실은 밝혀지는 법.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님은 제가 압니다.”
하늘바람의 단언에 감동한 장교가 눈시울을 붉혔다. 암. 라우스의 자식들이 인간을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들 리가 없다.
미노타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차기 위대한 후툼의 내정자였던 첫째 왕자의 안위가 궁금하다. 어찌하여 셋째 왕자가 이곳에 있는가도 무지하지만 적어도 억울함은 풀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도 늦기 전에 앞장서 마족을 처단합시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인류를 배신한 우리의 말을 믿어줄까요. 그리고 아직 세뇌가 풀리지 않은 자들이 많습니다. 저희조차 스스로를 믿지 못합니다.”
“왕자님만 믿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하늘바람의 앞에 모인 그들이 오른발을 두 번 울렸다. 절도 있게 주먹을 쥔 그들은 미노타의 경례법으로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하늘바람이 똑같이 주먹 쥔 손을 가슴에 올려두었다.
전쟁을 선포한 형님과 대립해야 하는 입장에 선 하늘바람은 유약한 자신이 형님의 세뇌를 풀고 미노타를 마족에게서 되찾을 길이 까마득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가 오히려 망치는 게 아닐까 역량이 의심스럽다.
왕녀의 배려로 미노타군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었던 하늘바람은 포로수용소를 나와 자신을 더욱 짓누르는 책임감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던 니냐롯트의 배려가 더한 부담감으로 다가온 듯하다.
“괜찮으시오?”
“말은 잘했다만 과연 형님이 어떻게 나올지……. 형님께서도 세뇌가 풀리기를 바랍니다만 미노타 왕실 상황을 모르니 답답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무기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손에 든 과도로 호랑이를 쓰러뜨려야 하는 입장은 니냐롯트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부족하면 꾀를 쓰면 된다. 지혜가 모자라면 머리를 맞대면 된다. 지혜를 무장했으면 호랑이를 공격할 용기를 낼 때다.
“나라의 위험을 알고 슬기롭게 헤쳐오지 않았습니까. 자신감을 가지시오, 미노타의 왕자여.”
“니냐롯트 왕녀는 형님께 듣던 대로 상냥하시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나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이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으니.”
멋진 대사에 하늘바람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니냐롯트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나이 또래인 미노타의 셋째 왕자는 마족에게 점령당한 왕궁에서 홀로 도망쳐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접근해 사실을 알린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배짱 없어 보이는 인상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단단함은 눈여겨볼 만했다.
미노타는 툰드라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의 피가 흐르는 민족이다. 새까만 머리와 어두운 피부를 가진 그는 볼에 있는 붉은 문신만 아니면 왕자라고는 믿기 힘든 평범함을 내재했다. 그럼에도 뭔가를 해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왠지 렌 지미 그와…….
안개 속에 어떤 장면이 생각날 뻔하던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환상을 필사적으로 헤쳤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슬렉터가 강하게 진동했다.
조금만 더 하면 생각이 날 것도 같았건만. 어쩔 수 없이 통신을 받은 니냐롯트는 이어지는 보고에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여기는 제3 통신소대. 사령관님, 사령관님 계십니까! 통신 두절되었던 알라마니 기술관의 생존자라 말하는 자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그쪽으로 가마.”
통신을 끊은 니냐롯트는 하늘바람을 백장미 부대가 있는 막사에 데려다주고 통신소대가 있는 텐트로 향했다. 보초를 서는 군인을 정신없이 지나친 그녀는 경례를 올리는 군인들에게 보고를 서두르라며 손짓했다.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과 이하 생존자들의 보고입니다. 통신 두절되었던 알라마니 기술관 본부는 마족에게 급습당한 듯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확인 불가. 등급1의 마족으로 추측. 그 마족이 현재 알라마니 기술관을 거쳐 펠노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펠노아에는 피난민들이 있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펠노아?”
그녀의 첫 수학여행지이자 현재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가 아닌가. 계획이 들킨 건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
“펠노아 근방의 병력은 어느 정도 남았지?”
“리엔달로니아 협곡 주변에 집중되어 펠노아 내부는 기간트리카 부대가 비었습니다.”
“괴물 마족들. 여기까지 버티는 데에도 얼마큼이나 희생했는데 아직도!”
“마족은 인류를 완전히 멸망시킬 셈인가요?”
등급1의 마족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백장미 특공대대급의 뛰어난 인력이 필요하다. 물론 포르테 들라크루아 정도의 척도와 경험과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이라면 이전 등급1의 마족과 붙어 살아남은 적이 많은 류제 신리를 생각했을 때 급한 대로 대처는 가능하다.
“남서방위본부에 연락을. 펠노아에 가우르3을 발령하겠다. 반드시 그 마족을 척살하라!”
통신을 끊은 니냐롯트는 일그러진 얼굴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알라마니 기술관을 습격한 등급1의 마족이 이제는 펠노아까지 노리고 있다. 그곳은 초대 황제가 처음으로 마족을 쓰러뜨린 키아나트리체의 상징적인 장소다. 그런 곳이 무너지면 어떤 키아나트리체인인들 마음이 꺾이지 않으리오.
네네 슈만과 루비니 아로즈네그를 비롯한 절반의 백장미 부대가 펠노아까지 가기엔 시간 초과다. 남서방위본부에는 류제 신리가 있다. 현재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는 그뿐이다. 니냐롯트는 슬렉터를 켜고 서둘러서 류제의 통신 번호를 입력했다.
* * *
전 임시 전선 기지에 펠노아의 경계경보 발령이 전달되었다. 시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남서방위본부로 돌아와 물자를 보급받던 류제는 지령을 받기 전이었지만 본부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서 뛰어가는 중대장을 보자니 썩 좋은 일이 아님은 짐작했다. 짐을 나르면서도 그는 긴장을 유지했다.
“12중대 류제 신리 소위 있나. 여단장님께서 부르신다.”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역시 그도 뒤따라 호출되었다. 남서방위본부로 자대가 이동하고부터 잦아진 멜가로스크 준장의 참견이 오늘따라 달갑지 않다. 보급 물품을 나르다 만 류제가 별수 없이 손을 털고 헐레벌떡 지휘 막사로 향했다.
막상 도착하니 중요한 회의 중이라며 저지당했다. 엉거주춤해진 그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노라니 안에서 참모들과 의견을 나누는 멜가로스크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멜가로스크 자작은 말투부터가 유들유들 소름이 끼치는 의뭉스러운 양반이지만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무능하진 않은 듯했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햇병아리 사령관이 겁에 질려서는. 쯧. 제6 보병대대를 파견해 펠노아 피난민들을 보호하도록 지시 내려라. 기간트리카는 얼마큼 뺄 수 있나.”
“현재 전 중대 전투 중입니다. 아, 30분 전 12중대가 전투 후 물자 보급을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본부로 돌아온 류제 신리를 부른 건 바로 멜가로스크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얌전히 왕녀의 말을 들어 류제 신리를 등급1의 마족이 있는 낭떠러지에 밀어 넣기엔 효율이 나빴다.
류제 신리를 남서방위본부로 간신히 빼돌렸는데 이번 일로 다시 왕녀에게 명령권을 빼앗길 수는 없다. 귀찮게 되었군. 알라마니 기술관까지 없애더니 이번엔 등급1의 마족? 화마의 군주더러 자제해 달라 언질을 해야겠어.
“펠노아라.”
왕녀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꾀를 써야 할까 머리를 굴리던 멜가로스크 자작의 소원을 들어주었는지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경계로 나라카와 맞닿은 키아나트리체 남서쪽 국경 일대를 탐지하고 있던 통신장교가 본부 중대 대원에게서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라저. 1277 무슨 일인가.”
―여기는 시에라. 들리나, 들리나, 오바. 제길, 호세마타 정찰 중 마족이 나타났다. 지직 현 중대로 대응 불가능……!
“마족 분파와 등급을 말해라.”
―망할. 구조 요청을 부탁… 어서 이쪽으로 와! 두둑
“무슨 분파인가. 시에라, 응답하라! 답하지 않으면 구조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
―지직
그대로 통신이 끊겼다. 멜가로스크 자작은 불만족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전쟁은 계획했던 대로지만 마족들이 과도하게 날뛰는 이대로라면 쓸 만한 어빌리터들마저 다 죽어 버리는 것 아닌가.
“여단장님, 오후 호세마타 요새로 향했던 15중대 구조 요청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타이밍이 좋지 않군.”
요새에 등장한 마족이 어떤 분파인지 모르니 어빌리터 파견도 비효율적이다.
그때 멜가로스크의 눈이 번뜩였다. 호세마타 요새의 마족 출현. 생각해 보니 화마의 군주가 말했다던 신호가 아닌가.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그의 입이 호선을 그었다.
“내가 알기로 나라카에서 백장미 부대가 호세마타 요새로 귀환한다고 했거늘. 중앙본부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없나.”
“모르겠습니다. 백장미 부대에서 현 본부로 통신은 없었습니다.”
“백장미 부대. 중요한 전력이지. 백업도 전에 중대 전멸이라. 전력 손실이 뼈아파.”
개죽음이 따로 없어. 동정 없이 혀를 차던 그는 장막에 가린 고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텐트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류제가 이야기를 듣고 무리하게 들어오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가진 어빌리티 특성상 이길 자가 없었으니 류제는 말리는 장교를 밀치고 막사에 쳐들어올 수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있는 중대가 호세마타 요새에 백장미 부대 귀환 백업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제발 구조 요청을 받아주세요!”
멜가로스크 자작은 류제 신리에게 지울 많은 빚과 공적이 필요했다. 호세마타 요새의 마족 출현은 화마의 군주의 신호일 터. 저절로 굴러떨어지다니 좋은 방향으로 돌아가는군. 멜가로스크 자작은 그를 자극하듯 힐끗 눈동자를 내리깔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병력이 부족하다. 남은 기간트리카군도 없어. 있다 한들 가우르3 발동으로 당장 펠노아로 지원을 보내야 하지.”
“제가… 저 혼자서 가겠습니다. 허락을 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전쟁에 마족이 개입하고 지금껏 다양한 마족의 핵을 파괴했던 그다. 병력이라면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류제는 자만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펠노아는 알 게 뭐야. 전쟁으로 친구가 죽는 건 더 용서할 수 없었다.
“늦기 전에 친구를 구하게 해주세요.”
류제가 일렁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멜가로스크를 응시했다.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골격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다. 젊고 건강하고 혈기 넘치는 어린아이. 이만큼 휘두르기 쉬운 자도 없다.
“좋다. 허락하지.”
고민하는 척하던 멜가로스크 자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비를 보였다. 본부 텐트 안에 잠깐의 적막이 나돌았다. 통신을 받던 병사가 멜가로스크 자작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단장님, 아까 본부 사령관님께서 신리 소위를―”
“그만. 책임은 내가 지겠다. 전우를 넘어 친우를 구하겠다는 소년의 결심이 보이질 않는 건가, 자네는?”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하자 류제는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 말대로 끈적끈적한 우애에 감동한 건 아닐 테고 렌에 이어서 이번엔 미나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 멜가로스크 자작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지만 그에게 빚을 만들어두려는 속셈이다.
그가 호세마타 요새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멜가로스크 자작이 바라던 바임을 모르는 류제는 당장엔 멜가로스크 자작의 결정에 감사했다.
서로의 목적을 이룰 수 있으니 상생이 아닌가. 멜가로스크는 류제 신리가 그의 손안에 있음을 과시하며 왕녀를 톡톡히 견제해서 좋았다.
“가거라, 류제 신리 소위.”
“반드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구조하겠습니다.”
명령을 받든 류제는 더 늦기 전에 텐트를 뛰쳐나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지면을 박차고 부스터로 날아오른 그는 기지 북쪽에 있는 호세마타 요새 방향으로 날아갔다. 다른 중대원도 문제지만 미나와 렌의 얼굴이 겹쳐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나… 미나! 제길.”
우연찮게 만난 그를 반기며 활짝 웃던 미나를 잃을 수 없었다. 그는 미나에게 받았던 통신 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거리가 멀어서인가 기간트리카의 통신으로는 닿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호세마타 요새까지 가야 한다. 제발 무사해 줘. 이를 악문 그가 속력을 더 높여 하늘을 가로질렀다.
“왜 응답이 안 되지? 기지로 돌아온 게 아닌가?”
펠노아를 지켜야 하는 니냐롯트는 류제의 통신 번호로 슬렉터를 연결시켰지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속이 답답했다.
분명 그가 본부로 귀환했다는 정보를 받았는데 남서방위본부 여단장인 멜가로스크 준장은 류제 신리는 다른 작전에 투입했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류제에게 통신 번호를 주었던 것이건만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금 속도로 등급1의 마족이 펠노아 상공을 지나기까지 약 두 시간 남았습니다.”
“빨리… 류제!”
펠노아민의 피난과 마족 대비를 위한 시간이라면 두 시간도 빠듯하다. 등급1의 마족과 전투 경험이 있는 류제 신리가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어시스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