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1) (61/112)

챕터 13. [종전을 위하여] (1)

“긴 여정이었군.”

“따분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정이었지. 인간에게 알랑거리느라 임무 수행에 태만했던 누구 때문에.”

“닥쳐, 마가릿.”

부재하는 마왕의 부활을 꾀하기 위해 마족을 대표하는 네 지도자가 성에 모였다. 목표를 함께하는 동지임에도 사이좋지 못한 말이 오가는 건 현 마족의 사천왕이 이 자리에 처음 모였을 때부터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그들은 마왕의 명령을 수행했던 명실상부한 오른팔들이며 그를 사랑해 마지않는 긍지 높은 자들이다. 다른 분파의 군주들보다 월등히 강하고 오랫동안 군주의 자리를 지킨 이 네 마족은 로라 하놋이 말뚝으로 마왕의 육체에서 혼을 훔쳐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던 그날 허탈해진 심정으로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마족에게 있어서 마왕은 인간들의 통치자와 의미가 사뭇 다르다. 모든 마족의 시초인 마왕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유일한 존재이자 강력한 정신적 지지대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느껴오던 존재가 텅 비어버리니 마족들 사이에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인계에 있던 마족 중 폭주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폭주한 마족은 인간들의 타깃이 되어 집요하게 공격당해 핵이 파괴된다. 이 상황이 지속되다간 인간들에게 밀려 패배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들은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수고했다,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네 덕분에 이 여정의 종지부가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마왕성에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앗아간 로라 하놋이 증오스러운 것은 율폰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마왕 살해가 요행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율폰이 도망가려는 로라 하놋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그 싸움에서 율폰의 핵이 절반 가까이 박살 났다.

인간인 로라 하놋이 자비를 베풀어 율폰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육체를 마가릿의 도움을 받아 마왕성 안 어딘가에 봉인한 그는 그때부터 영혼으로 떠돌아야만 했다. 그때 패배감과 굴욕은 가히 상상하기도 역겹다.

백여 년 만에 육체를 되찾은 율폰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웃었다. 소년의 하얀 머리카락은 더 이상 유동체처럼 흩날리지 않았다. 실체를 가진 그는 힘의 제약에서 벗어났다. 금이 간 핵은 회복이 불가하지만 위협을 무릅쓰고 육체를 되찾았다는 건 그가 이 전쟁에 사활을 걸었음을 내포했다.

“수고한 축도 아냐. 마왕님께서 부활하실 수만 있다면 난 죽음도 감내할 거야.”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망할 창년이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샐러맨더의 왕아, 저년은 배신자다.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인 척하다 동정심을 품은 변절자야! 틀림없어. 나였더라면 핏덩이 가축들 따윈 전부 죽이고 이 자리에 자랑스레 섰을 거다. 하지만 저년은 인계에 숨어든 동안 어떠한 인간도 죽이지 않았어.”

“닥쳐, 이 이성이라곤 터럭도 없는 미친년아. 누군들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 이래서 아둔한 병마 족속들하고는 말 섞기 싫어. 앞일은 못 보고 오로지 인간 사냥밖에 모르지.”

“서큐버스 창년. 인간 사냥이 중요하지 않단 말이냐? 이 배신자, 변절자, 반역자!”

협동심이라곤 쥐뿔도 없고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마족들의 성격을 전부 모아놓은 대화를 듣자니 저들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이 거짓 같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은 강대한 두 마족이 다투거나 말거나 인형을 끌어안고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미나의 잘난 척을 못 볼 꼴을 보듯 흘기는 병마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광기 어린 머스터드색 눈동자를 일렁거리며 씨익 씨익 비뚤어진 날개를 들썩거렸다.

싸늘하게 병마의 군주를 흘기는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미나 플로리아라는 인간 이름을 사용했던 그녀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새침하게 외면했다.

발화점이 낮은 마가릿이 도발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을 때였다.

“거기까지들 해. 너희 둘은 앞으로도 붙여두지 말아야겠어.”

그런 그들을 이끄는 화마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마왕의 왕좌를 뒤로하고 그들을 중재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저 왕좌가 채워질 날이 다가온다. 마왕의 힘만 있다면 그의 핵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새를 못 참고 내부 분열로 자멸하는 건 인간들만 하는 짓이었다.

“어리석은 가축들이 멸망을 자초하는 모습은 흥분되지. 그 재미에 광분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 병마의 군주여. 곧 네가 바랐던 일을 할 수 있을 거다. ‘러다이트’와 ‘옵시그나티오’ 안정화 작업은 어때.”

“흥, 매일같이 들먹거리기는. 진작, 전부, 완벽히 끝났다.”

“나콜렙시, 내가 부탁했던 건 찾았어?”

“쿠울… 음냐.”

부활의 때가 머지않은 가운데 아랑곳없이 잠만 자는 나콜렙시를 미나가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한 나콜렙시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눈을 비볐다.

“뭐라고 했어?”

“그 빌어먹을 인간 여자가 마왕성에 남긴 물건을 찾았냐고 물었어.”

“아아, 으음… 지하 수로에 처박혀 있었어. 피곤한데 이런 건 왜 부탁하는 거야?”

“만일을 위해서.”

건조한 눈을 끔벅거리던 나콜렙시는 품을 뒤지더니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미나에게 넘겨주었다. 그 무기를 확인하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미나를 무시한 나콜렙시는 언제 깨어났냐는 듯 다시 잠이 들었다.

서큐버스가 쥔 뾰족한 정점을 본 마가릿이 끔찍해하며 몸서리쳤다.

“그런 참혹한 물건을 왜 끄집어내는 거야, 이 망할 창년아. 아아, 불쌍하고 안쓰럽고 가련한 마왕님! 저런 계집이 당신을 죽인 물건을 들어 조롱합니다.”

“닥쳐. 네 멋대로 해석하지 마. 그 인간 여자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왕님의 핵이 파괴당하지 않은 덕분에 부활할 수 있었던 거지? 이것만 있으면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또다시 백 년을 기다리자는 의미인가, 몽마의 군주여.”

“실패하지만 않으면 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왕님을 부활시킬 거니까.”

은색의 아련한 빛을 내려다본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이것이 바로 로라 하놋이 마왕의 심장을 찔렀을 때 사용했던 말뚝이다.

마족은 강한 육체와 심장을 찔려도 살아나는 회복력을 가진 대신 생명의 근원인 핵이 파괴당하면 혼까지 소멸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윤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증오를 택한 마족들의 업이었다.

로라 하놋에게 혼을 빼앗긴 마왕의 육체는 핵이 소실되지 않았음에도 무너졌다. 그 인간 여자가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다.

이대로 종족의 운이 끝났다고 절망할 무렵 이 말뚝으로 부서진 육체와 혼을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한 율폰이 조금만 더 지켜보자 때를 기다렸다.

마족은 언제나 마왕의 존재를 느낀다. 침착해진 미나도 마왕이 혼까지 소멸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그들은 마왕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모든 마족과 인연으로 얽힌 마왕은 마족을 이끌어주기 위해 귀환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로라 하놋은 마왕을 끝내 인간으로 전생시킨 것이다. 아무리 마족의 근원이 저열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지언정 감히 천 년을 살아온 마왕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로라 하놋도 구멍은 있다. 가장 진한 드래곤의 힘이 깃든 마왕의 진귀한 혼만 존재한다면야 그릇이 무엇이든 부활을 꾀할 수 있었다. 은으로 만든 이 말뚝은 만일 류제 신리가 진정한 정체를 수용하지 못했을 때를 위한 최후의 도구였다.

“이걸 쓰기 싫다면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마왕님을 부활시키면 돼.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인간의 정치 따위에 간섭한 이유를 망각하지 마, 율폰.”

“걱정하지 않아도 실패는 없어. 네가 그걸 쓸 일도 생겨나지 않을 거다.”

“인간들은 전부, 모조리, 반드시 죽인다. 절망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마왕을 고대하는 웃음소리가 마기가 지독하게 깔린 중심부에 피어올랐다. 인간들끼리 내분을 고대하며 숨을 죽인 박쥐 날갯소리가 키아나트리체 전역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드디어 마왕이, 그들이 사랑하는 마왕이 백여 년의 공백 끝에 돌아올 준비를 마쳤다.

약간의 소란을 의식한 나콜렙시가 침체된 눈동자를 끌어올려 그들을 흘겼다. 그녀는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잠이 들었다.

* * *

거미가 물러나지 않은 첫새벽. 낯선 대지 위에서 류제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비 오듯 흐른 땀이 튀어나와 손등을 적셨다. 악몽을 꾼 기분이다.

어떤 어린아이가 그의 곁에 있었다. 맞잡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조그마한 손바닥은 아세미 또래 어린아이의 것이다. 그를 향해 웃는 미소가 현실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녀를 따라간 길 끝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에 사는 사람은 어디를 둘러봐도 젊은 여자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상냥함과 수수함을 새벽이슬처럼 머금었던 그녀들은 고립당하고 배신당해 상처받은 채 사라졌다.

떠올리기 싫다. 기댈 곳 없이 스러지는 그 마음이 너무 싫었다. 꿈속의 사연에 먹혀 울렁거리는 심장이 다른 이의 것 같았다. 현실과 꿈을 혼동했던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이 전쟁의 끝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막사 밖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얼핏 푸르게 빛나는 새벽 색을 본 기억은 이른 착각인 듯하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연기가 이글거렸다. 과거의 땀방울이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제립학교에서 출발해 전방 부대에 배속되자마자 미노타군을 막는 작전에 참여했던 그는 인간을 상대로 목숨을 거는 전투가 참담했다. 같은 인간끼리 싸운다는 건 이런 의미겠지.

발생하는 사건들이 중구난방 터져 머릿속을 채 거치기도 전, 그보다 더한 것이 등을 노린다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기분은 그를 악몽의 도가니에 끌어당겨 허우적거리게 했다.

어제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다시 잠들지 못한 그가 군화를 대충 끌며 나오니 다른 군인이 모닥불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드래곤.”

“어스름.”

금일 암구호를 교환한 그들은 여기가 전장이라는 것을 문득 실감했다. 얼굴도 알고 누군지도 아는 사이끼리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한다고 의미 모를 문장을 교환하다니. 류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비키의 옆자리에 공간을 마련했다.

“뭐야, 벌써 깼어? 조금 더 자지 그래.”

“너야말로. 불침번이야?”

“불침번 순서도 못 외우니? 잠이 안 와서 망이나 보고 있었어.”

따닥. 마른 장작이 깨지며 불꽃에 먹혀들었다. 비키는 일렁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앳된 선을 비추며 흔들리는 불빛은 강직한 얼굴에 애환만을 그렸다.

정적이 일자 혼자 남아있다는 두려움을 깨고팠던 류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 소대는 어때. 사람들이랑 잘 맞아?”

“그냥 좀 착잡해. 전투 경험이 미미한 우리는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햇병아리들이니. 마음대로 싸우지 못하는 건 짜증 나네.”

“하하, 너답구나.”

류제가 실없이 웃으며 마른 나뭇가지로 장작을 들쑤셨다. 학교에서는 귀족인 데다 실력도 좋아 훈련할 때 별다른 트집과 고함을 들어본 적 없겠지만 여기선 경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실수가 있었다간 온갖 욕과 폭력이 배로 돌아왔다. 억척스러운 그녀에게도 힘든 환경일 것이다.

“마음 약한 유네가 부모님하고 싸우면서까지 이런 곳에 적응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마음에 안 들어.”

“소대장님께 한 소리 들었다며. 유네.”

“소문 참 빠르네. 그래도 울지는 않더라, 그 울보가.”

어제 미노타군과 대적했을 때 류제와 비키의 소대가 우연찮게 같은 적을 처리했다. 어빌리티로 적을 타격했어야 할 타이밍에 유네가 차마 같은 인간을 공격하지 못해 기회를 놓쳤다. 첫 전투였대도 유네는 명령 불복종으로 전투 후 큰 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 있었던 미노타 기간트리카군과의 싸움을 복기해 보던 두 사람은 씁쓸하게 서로를 마주 봤다.

비키야 귀족이라는 의무감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상인 가문 자제인 유네가 자진해서 험지에 지원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나약한 심성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던 것일까 지금도 아리송했다.

“그래도 유네와 함께 와서 다행이야. 가끔 아는 친구들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운 거 있지.”

“전혀. 제립학교 소속 학생들이 보일 때마다 난 심장이 벌렁거려.”

혹시나 렌의 얼굴이 보일까 봐 무서워서 시선으로 좇게 된다. 문득 남성 어빌리터가 지나가면 그 얼굴을 사정없이 뜯어 본 후에야 렌이 아님을 알고 고개를 돌린다. 여기에 없을 것이 뻔한데 그의 주변은 온통 렌의 흔적뿐이다.

“세라 선생님도 같은 사단인 거 알아? 의무근무대 쪽에 계신다고 했던가. 결국 이쪽으로 오셨나 봐.”

“정말? 그건 참…….”

이곳은 학교가 아니다. 세라 선생님과 마주했을 때 경례와 관등 성명으로 서로의 존재를 교환해야 한다는 현실이 쓰다.

제자들을 의식한다면 세라는 안타까움을 넘어 죄책감을 삼킬 것이다. 고운 눈매에 슬픔이 매달렸지만 울지 못해 망연하게 선 그녀를 상상하자니 류제는 그저 미안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미노타도 필사적이야. 그들과 싸울 때 보였던 무감각한 눈이 꿈에 나왔어. 그 눈을 보면 소름 끼치는 무엇인가를 마주할 것만 같아. 도대체 무엇이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걸까.”

“나도 그래. 미노타군과는 감정 없는 인형과 싸우는 것 같아. 군인이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그들이 싸우는 이유도 나라를 위해서일 테니까.”

또다시 정적. 사람을 향한 연민도 아픔도 없이 앞에 있는 적을 멸할 뿐인 자신을 상상하자니 무섭고 끔찍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색하고 힘든 것은 처음일 뿐 어떻게든 잘 해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곳에 있다 보면 체념에 익숙해져서 마음이 죽어간다고.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되면 어쩌지. 그는 이를 극복하고 그녀의 뒤를 제대로 이어 성장할 수 있을까? 류제는 새삼 그녀가 대단한 사람임을 느꼈다.

“사람들은 잘 피난하고 있을까?”

후방 지원군들은 피난민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그곳 어딘가에 렌도 있을 것이다. 류제는 조심스레 키아나트리체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지나가다가 얼핏 들었는데 일부 피난민들은 벌써 나이엔힐리아까지 내려갔대.”

“나이엔힐리아면 최남부 아냐? 거기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어?”

“거긴 키아나트리체가 마족을 방어하면서 생겨난 유도(留都)니까 피난민들에겐 최후의 보루겠지. 가장 안전한 곳이고. 두 번째는 펠노아.”

“미노타가 쳐들어오지 않았으면 올해 수학여행은 펠노아가 아닌 다른 곳이었겠지? 렌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하고도 잘 지낼까?”

보고 싶다. 비키가 그리워하며 나지막이 동의를 원했지만 그건 류제의 역린을 건드렸다. 마지막으로 본 렌이 떠오른 류제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찾으러 떠나고 싶어졌다.

“우리가 이기면 다시 만날 수 있어. 언제라도.”

“그럼 오늘 전투도 잘 해내는 수밖에 없겠네.”

시답잖은 말이 오가는 동안 해가 떠올랐다. 시간이 되자 기상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각자의 막사로 돌아가며 가볍게 작별 인사를 했다. 또 다른 전장에서 마주칠 그때까지 안녕이다.

“유네 잘 타일러 줘.”

“그래, 또 보자.”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제보다 적응한 그들은 오늘도 적과 싸운다. 패배는 없다. 혹독한 싸움과 짧고도 짜릿한 승리. 인간을 죽였다는 허망함이 전장을 잠식했다.

싫어도 다음 날의 해는 또 떠올랐고 전투는 반복되었다. 끝이 있을 거라 달래보아도 마음은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다. 어깨는 점점 굽어졌다. 정녕 이 길이 맞았을까에 대한 의심도 무뎌졌다.

제립학교 학생들이 학도병 신분으로 참전한 지 일주일이 경과했다. 고난이 힘겨울수록 사람은 깊게 적응했다. 기계적인 전투. 아픔을 모르는 구울처럼 쏟아지는 적군을 저지하고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류제는 잔인해지는 자신을 마지못해 타일렀다.

증오도, 분노도 아닌 비참함을 잊으려 사람들은 감정을 회피했다.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자아와 마주하지 못하는 정신은 시나브로 메말라 갔다. 인류 연합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왕녀의 부탁이라지만 이런 곳에 오래 남아있으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럼에도 방어전에 온 힘을 쏟아붓는 건 렌을 위해서다. 자존심을 무릅쓰고 왕녀에게 머리 숙여 부탁했으니 연합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전선은 무너지지 않는다. 렌은 안전할 거다.

적군이 잠잠해졌을 틈에 가벼운 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에 있었던 저지 작전에서 공적을 세운 그가 흉부에서 쓴 숨을 내쉬며 짓무른 샌드위치 봉투를 뜯었다.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먹는 식사에는 제립학교에 있었던 품위 따위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허기진 배는 쓰레기 같은 음식물을 알맞게 수용했다.

물러진 샌드위치 한쪽을 입에 욱여넣었다. 눅눅한 양배추 비린내가 끔찍하다. 힘들 때마다 버틸 기력이라도 이끌어내게 렌을 떠올리고 싶은데, 유일한 수단이었을 사진은 그가 스스로 불태워버리지 않았나.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불꽃에 삼켜져 아스러진 추억들이 그리웠다.

친우로서의 그리움을 헷갈릴세라 고개를 내저은 그가 나머지 한쪽 샌드위치를 물어뜯을 참이었던가. 아까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던 중대장이 통신병을 하나 이끌고 짜증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땅개 새끼들은 뭐 하느라 보급이 느려?”

“베스터 중대장님, 안 그래도 그 문제로 행보관님이 부르시던 찹니다.”

“씨이발, 그 양반은 일 처리도 느리면서 존나게 불러대네. 하여튼 비어빌리터들이란. 왜, 두더지 왔대?”

“옙. 살모사 오백스물다섯 발과 독수리 천칠십 발입니다.”

“다 쏘라고? 하, 어디 평탄화 작업이라도 해?”

중대장이 빈정거리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이에 낀 통신병만 불쌍하게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통신병은 수첩에 적힌 대로만 이야기했다.

“알라마니 기술관 본부에서 쓸어올 수 있는 건 다 쓸어왔답니다. 수송로가 끊겨 당분간 보급이 없을 거라 아껴 쓰라고 공문이…….”

“뭐? 보급이 없어? 비어빌리터들은 우리들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 씨발,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데?”

“인류 연합군이 올 때까지랍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양반들을 귀한 미사일 쪽쪽 빨면서 기다리라는 건가. 그 외에 특이 사항은 없나.”

“포로들이 또 난동을 피웠답니다. 수용소 쪽에서 통역병을 추려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조약을 어긴 미개한 야만인들의 말 따위 들어줄 필욘 없는데. 알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봐.”

“충성.”

제 개인 비서로 쓰는 통신병을 보낸 중대장이 뒤로 돌아 행보관에게로 가려다 류제와 눈이 마주쳤다. 류제는 음식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경례했다.

류제는 척도가 측정되었던 무렵부터 어빌리터들에게 큰 화두가 되었던 학생이다. 어빌리터로서는 드물게 남자인 데다 이전에 없던 괴물 같은 척도를 가져 높으신 분들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소문을 웬만한 어빌리터라면 모를 리 없었다.

용모도 수려하다지. 고(故) 셀로니아 장군님 여식의 친구고. 그녀는 류제를 힐끗거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시선은 ‘우리 중대에서 가장 쓸 만한 학도병은 저 정도지.’라고 하는 듯하다.

류제를 지나친 그녀는 곧 중대의 행보관에게 방금 도착한 보급 물품에 대한 특이 사항을 전해 들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류제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녀가 사라지자 착석한 그는 무릎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 애꿎은 샌드위치를 툭툭 털어 멀쩡한 부분을 씹었다. 배경음으로 귓가에 알짱거리는 소음처럼 어쩐지 아삭한 모래가 씹히는 듯해 불쾌감이 가시질 않았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3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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