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2. [2월. 영웅은 끝을 향해 내달린다] (3) (60/112)

챕터 12. [2월. 영웅은 끝을 향해 내달린다] (3)

반격 준비는 만반에 걸쳐 완성되었다. 친위대들을 비롯한 학도병을 이끌고 출격하는 내일이면 의미 있는 정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왕궁 안 그녀의 방은 특히나 고요했다.

오늘 장군들과 늦은 시간까지 미노타의 기간트리카 부대를 제압하고 마족의 습격을 경계할 전략들이 세워졌다. 시뮬레이션이 여러 갈래의 가정이 되어 스쳤다. 미노타의 속셈, 동원 가능한 병력, 식량, 자원, 지형, 날씨. 그 모든 변수들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는 그녀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구상을 마친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보름달이 남중한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고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난 왕녀는 창문 아래서 서성이며 전투 중인 군인들을 떠올렸다.

침략당한 국토를 방어하기 위해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걱정과 불안이 그녀를 갉아먹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력을 이끌고 위기에 빠진 그들을 돕고 싶다.

보고된 바로는 동토와 가까운 북서쪽 국경지대는 어떻게든 막았지만 대륙 한가운데에 자리한 나라카와 가장 먼 동쪽 국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열린 통로를 뚫고 물밀 듯이 쏟아지는 미노타의 기간트리카 부대를 간신히 근방 소규모 기간트리카 부대가 막아서고 있지만 키아나트리체가 열세였다.

사람들의 피난을 도와주기 위해 일반 군부대가 파견되어 지원 중이지만 항공을 활보하는 기간트리카를 격추시키기엔 전력 차이가 극심했다. 시급히 학생들과 친위대들로 갈라진 금을 막고 나라카에서 부대가 귀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것이 미노타와의 접전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이다.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립학교 체육관 단상에 나서 한 연설은 훌륭했다. 전교생 앞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다짐으로 애국심을 호소하며 어빌리터의 책임론으로 사지로 몬 것은 지금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 말고도 속에 얹힌 무엇인가가 넘어가지 않았다.

뭔가 걸렸다. 왕녀가 아닌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책감과도 달랐다.

“하아.”

왠지 두통이 심해진 그녀는 침대 한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지쳤지만 잠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기억나지 않는 꿈이 머릿속을 지배해서 심장이 두근거렸기에 여전히 불면증이다. 잠은 사치였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입에 달고 사는 커피가 홀짝이다 만 채 일렁일렁 남아있었다. 베개에 머리를 뉜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안정되지 않은 몸에 심장이 심하게 울렁거려 불안감을 자극했다.

이 증상은 무엇을 향한 저항인가? 그 대상이 모호하다. 떠오르는 것은 오늘 있었던 한 가지 불화다.

“너… 왜 생각이 바뀐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 없었잖아. 그렇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신중하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말할게. 물어봤었지? 학교에… 내부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정계의 일과는 상관도 없는 그가 그녀의 결정에 화를 내며 두려워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선 렌 지미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모든 이의 의견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 그녀의 역할은 그들을 설득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까.

류제 신리의 간곡한 부탁도 있으니 렌 지미는 전쟁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미에 맞게 후방 지원부대에 신경 써서 배치해 주면 된다. 그것뿐인데 왜 머릿속에서 퍼즐이 사라져버린 기분일까. 박동하는 심장이 타인의 손에 주물거리는 것 같다.

“화난 건 아니지? 병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니, 그때 네가 렌한테 마족에 대해 물었을 때…….”

류제 신리의 말도 그렇다. 병원? 그녀는 최근에 류제 신리가 말할 만한 일을 겪지 않았다. 렌 지미도 그렇고 누군가를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마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아니야. 달라. 그녀는 도리질 쳐 맴도는 문장들을 부정했다. 그녀는 렌 지미와 접점이 전무했다. 이건 징크스처럼 불안감의 한 종류일 뿐이다.

현재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족에 대한 준비도, 미노타를 제압할 전략도 충분하다. 그녀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왜? 뭐가 이렇게 두렵지? 내부에 있는 적? 마족에 대해서 물어? 맞춰지지 않은 퍼즐 한 조각을 완벽하게 놓치고 있다.

“루이― 아니야. 루이나가 보고한 일정에도 그런 건 없었어. 뭐지. 뭘까. 내가 잊어버린 것.”

측근을 부르려던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침대 아래 비밀 공간에서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하루 일과나 그녀만 아는 중요한 걱정거리들이 그곳에 적혀있었다.

그녀는 최근에 적은 일기를 차근차근 읽었다. 나라카 토벌, 미노타의 정세, 나르타 집안 자제의 납치 사건, 고양이 수인화와 관련되었던 일, 사관생도들과 교류를 성사시키기 위해 남몰래 고생했던 수신제까지. 거꾸로 돌아보아도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단순한 착각에 불과한 모양이다.

“……?”

일기장을 집어넣으려던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커버를 열었다. 어릴 적부터 소중하다 여기는 것들을 일기장에 넣어 비밀리에 간직하곤 했는데 오늘따라 일기장 커버 안 빈 공간이 가벼웠다. 비밀의 상자가 그녀의 기억에도 없이 최근에 열렸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작은 틈 속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죽은 왕비의 사진이나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던 그곳에는 그녀만의 추억들이 텅 빈 채, 오로지 단 하나, 자신의 글씨체로 적힌 짧은 글만이 남아있었다.

[염탐꾼은 누구인가?

질문이 낯설다면 요새에서 기다리는 자에게 물어라.

두 발 달린 짐승이 전해줄 것이다.]

남몰래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증거들이 설마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갔을까 걱정되는 한편 기억에 없는 쪽지에 저절로 눈이 갔다. 요새에서 기다리는 자? 염탐꾼? 분명 자신의 글씨인데 문장은 수수께끼였다.

“이건 뭐지?”

이런 글을 적어 일기장에 넣은 사실도 기억에 없었다. 요새라는 말은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있는 호세마타 요새를 말하는 것일까.

호세마타 요새에는 나라카를 감시하는 백장미 부대가 있다. 그리고 그 부대를 이끄는 자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설마 거기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가?

말이 안 된다. 그녀는 나라카 토벌 때문에 황제에게 양도받은 권리로 왕녀인 그녀의 명을 따라 나라카로 떠났다. 그러나 분명 자신의 글씨였다. 텅 빈 퍼즐 조각의 행방이 알 것만 같다. 그녀가 모르는 새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니냐롯트는 반신반의한 느낌으로 답장을 썼다. 다급하면서도, 절실한 그녀의 손을 따라 휘갈겨지는 글자는 명확하게도 아름다웠다.

이는 일종의 신호였다. 염탐꾼을 노린 한 함정이기도 했다. 만일 학교에 숨어든 마족의 존재를 알았다는 사실을 마족이 눈치챘을 때를 대비해 니냐롯트 또한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미나에게 기억을 제거당한 와중임에도 니냐롯트는 제립학교 또한 마족의 손아귀에 있다는 증거를 확보한 셈이다.

자신이 마족의 손바닥에 놀아나게 된다면 정보를 준 ‘렌 지미’ 또한 마족의 표적이 된다. 그러니 밀고자인 그의 존재를 숨기고 마족 모르게 움직일 수 있게끔 니냐롯트는 자신이 세뇌당하는 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다.

[수수께끼의 답변을 잊었다. 나는 무엇을 망각한 것이지?]

그녀는 과거의 그녀가 의도한 대로 답장을 썼다. 그녀가 믿을 사람은 과거의 자신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요새에서 기다리는 자. 그녀는 편지를 이마에 맞대며 기도했다.

일기장을 열어 의심을 맞이하기 전까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간은 승리한다. 마족도 토벌하고, 미노타 또한 정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것에 집착할 정도로 불안할까. 어렴풋한 영상이 지나쳤다. 그녀는 울부짖는 누군가와 타박하는 어떤 자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악몽 속에서나 정체를 드러내는 그들의 경고는 귀에 닿지 않았다.

“이리 오련.”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두 발 달린 짐승. 먼 여행을 위해 적들에게 노려지지 않을 조그마한 친구가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어릴 적 그녀의 어머니가 선물로 준 영리한 새다.

등급1의 병마를 무찌를 때, 급하게 친위대를 호출할 때도 이 아이에게 도움을 받았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그녀의 들키지 않을 유일한 연락 수단이다.

“절대로 잡혀서는 아니 된다. 먼 여행이 되겠지. 외롭겠지만 나도 아무도 믿지 않겠다. 나의 걱정이 단지 기우였으면 좋겠다마는. 부디 좋은 답을 가져와 주거라.”

총총 걸음을 걸은 새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아는 것만 같았다. 새가 짙은 칠흑을 뚫고 멀리 날아 사라졌다. 회신의 행방은 저 어둠을 뚫고 돌아오기에 난관임을 예상했다. 니냐롯트는 조심스레 창문을 닫고 그제야 진정된 심장을 꾹 눌렀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이물질이 낀 이상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 하물며 마족의 속셈이라도 미래는 어긋나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또 다른 미래를 준비했다.

* * *

개인 짐을 본가로 보낼 시간이 없는 학생들이 처분한 물건들로 뒤뜰 쓰레기장이 넘쳐흘렀다. 오전 내내 들쑤셔지다 잠잠해진 그곳은 유달리 기억에 남는 곳이다.

발을 디디기도 힘들 정도로 너저분해진 그곳에서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하늘은 날아오른 연기로 가득 찬 것처럼 짙은 구름이 끼었다.

그 아래, 남자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는 제립학교에서 훤칠한 키와 외모를 가진 소년 한 명이 미련이 담긴 눈동자로 무엇인가를 응시했다. 불을 빌려온 류제는 마침내 조그마한 종이를 소각로에 한 장 떨어뜨려 불태웠다. 손에 든 종이들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수학여행 때 사진, 체육대회 때 사진, 라우라 축제 사진. 시간 순서대로 차례대로 불태우고 있는 그는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며 유달리 자주 등장하는 한 소년을 눈에 담다 지워내려 애썼다. 일방적인 마음 따위 가지고 있어봤자 독이었다.

그러던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불태우려던 사진은 고양이 렌이 찾아준 사진이었다. 그러나 그 사진도 다른 사진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팔랑팔랑 떨어져나간 사진이 열에 휩싸여 오그라들었다.

남은 사진들도 봄을 지난 꽃잎처럼 떨어졌다. 장작이 된 추억들이 재로 돌아갔다.

그의 생각이 안일했다. 벅찬 감정을 그만 간직하면 되는 게 아니다. 평생 똑같은 마음으로 마주 볼 수 없다는 의미는 가혹했다. 거절당한 이상, 그가 렌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기까지는 긴 세월의 마모가 필요했다.

전쟁 때문이라지만 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미노타를 막는 동안 이 감정을 깨끗하게 지워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곳에서는 이런 사사로운 감정들을 떠올릴 시간도 없을 거다.

전장에 파견되기 전 전 학생들에겐 만 하루, 하룻밤의 준비 기간이 남겨졌다. 짧지만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이다. 그동안 학생들은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기숙사 짐 중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했다.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는 불상사를 위해서였다.

누군들 외면하지만 전쟁터로 내몰리기 싫어도 분위기 때문에 휩쓸리는 학생들이 분명 있었다. 다른 부대에 배치된 친구들은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어 울면서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척도가 높은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냐 왕녀의 말과 다르다며 반발이 있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강한 힘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그녀들조차 도망가면 키아나트리체에 더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이다. 그녀들도 뼈저리게 알았다. 그 의무에서 평생 도망갈 수 없다는 것도.

전장으로 떠날 학생들의 짐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될 신관 창고를 청소하는 밴드부 멤버들도 이루지 못할 공연을 아쉬워하며 손악기를 정성스레 닦아 케이스에 보관했다.

돌아올 수만 있다면 추억에 먼지가 쌓여도 좋다. 이렇게 빠르게 작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수신제에 찍혔던 대기실 사진을 어딘가 낡은 책에 꽂아 나중에 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랐다. 이 모든 짐들이 타임캡슐이 되었다.

재경은 책상에 앉아 공책을 펼쳐놓은 채 고개를 처박았다. 두꺼운 커튼으로 방 안의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발아래에는 가져가지 못할 짐이 담긴 가방에 잡동사니들이 쑤셔 박힌 채였다.

몇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아 독약이라도 마셨나 싶지만 낮은 들숨이 들리는 것을 보니 살아는 있는 듯하다. 그의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스쳤다.

“뭐 하는 거야?”

“응?”

번뜩 초점이 맞춰진 푸른 눈의 동공이 좁혀졌다. 마지막 한 장의 사진, 타고시아 해변에서 다 함께 찍은 사진이 마침 류제의 손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버릴 짐을 들고 온 비키와 맞닥뜨렸다. 안색이 파리한 그녀는 입술이 부르터 피곤해 보였다. 며칠 새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룬 듯하다.

“태울 게 있어서.”

“그 정도는 나한테 부탁해도 괜찮았는데.”

류제가 무엇을 태우고 있었는지 보지 못한 그녀는 그녀의 소지품 중 태울 것을 합쳐 ‘화염’으로 불태웠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그도 그녀도 정상인이 아니었다. 이런 힘이 있으니까 어떤 나라든 이용하고 싶어 하는 거겠지.

“그럴 것까지도 없었어.”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렌은 어때? 지금도 많이 상심했어? 그렇게까지 받아들일 수가 없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항상 그랬지만.”

“같은 편을 들어주지 못해서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렌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까. 떠날 때까지 만나주지 않을 모양인가.”

남은 재를 발로 밟으며 불씨를 꺼뜨린 비키는 애가 타 한 치 앞도 모르는 앞날을 상상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침착하네.”

“넌 무섭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나랑 렌을 같은 취급하지 마. 난 귀족이야. 싫다고 해서 될 입장이 아니라고. 그런 앙탈은 사치일 뿐이지.”

그녀는 담담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셀로니아 가문의 가주인 비키는 단연 귀족의 의무에 부합하게 최전방에 나서 미노타를 저지할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만일 그녀가 전장에서 사망한다면 셀로니아 가문의 대는 영원히 끊겨 후작의 지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녀에게 이번 미노타와의 공방전이란 그런 의미였다.

“맡은 임무라고 해도 다른 선배들의 보조까지겠지만 나는 내 의무에서 눈을 돌릴 생각 없어. 그게 셀로니아 가문의 생존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마족에 대한 복수는 하지 못해도 괜찮아?”

“글쎄. 복수라고 할까, 사실을 알고 싶은 욕구일까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지만―”

주적인 마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인간과 얽힌 전쟁으로 죽는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번 1년간 복수에 목매기보단 인간적인 삶을 희망하기로 전향했던 그녀는 먼 과거 셀로니아 가문이 어빌리터에게 향했던 지독한 행위의 반성의 의미를 담아 결심을 굳혔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으면 그것만큼 영광스러운 것도 없지.”

“비키, 너도 무리하지 마. 네 가문에서 남은 건 너뿐이잖아.”

“무리하지 않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도 지키고 싶어! 내 친구들도, 너도, 유네도, 렌도!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어. 날 비겁자로 만들지 마. 이건 내가 택한 길이야.”

비키는 이제야 둘러볼 수 있게 된 주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무섭다. 항상 마족을 상대하겠다, 싸우겠다 말해왔지만 막상 닥쳐오는 현실은 그것보다 막중한 법이었다.

지금도 평범했던 일상이 그리웠다. 고작해야 1년도 안 되는 세월에 자신이 이렇게까지 바뀔 거라고는 그녀조차 짐작 못 했다.

조금 흘러내린 눈물을 닦은 그녀는 버릴 옷가지들과 1학년 교과서들을 분리수거했다. 남은 짐은 신관 창고에 보관하고 학교에 돌아올 수 있을 때 정리해야겠지.

텅 빈 제립학교는 당분간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대마족 결계로 마족들의 위협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짐은 조그마한 가방에 담겨 창고에 차곡차곡 보관될 예정이었다. 죽으면, 그것은 유품이 되어 안에 있는 편지와 함께 보호자에게 보내질 것이다.

“나도, 너도 다들 바뀐 거겠지. 그거 알아? 유네가 전방 부대를 지원한 거. 그 애가 나를 따라가겠대.”

“뭐? 유네가? 유네라면 나르타 상단이 뒤를 봐주니 충분히 안전한 곳에 배속될 수 있을 텐데.”

“지키고 싶은 거겠지. …렌은 정말로 혼자잖아. 도망치려는 그 애의 분만큼 싸우고 싶은 걸 거야.”

작년에 보호자인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렌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비키처럼 그가 죽으면 대대로 내려온 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비키에게는 유모나 셀로니아가에 남아 그녀의 유지를 이어줄 수많은 사용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류제도 고향에 있는 고아원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 줄 것이다.

“렌한테 그런 겁쟁이 같은 일면이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까 렌도 전쟁에 나서기 싫었던 걸지도 몰라. 가문의 피가 세상과 영영 끊어진다는 건 나도 무서운걸.”

“…유네가 스스로 전방에 지원했다니 몰랐어. 집안에서 반대는 없었대?”

본래 유네 루트로 끝난다면 유네는 졸업 후 왕궁에서 일하며 왕녀를 도와 어빌리터가 받는 불합리함이나 책임이 치중된 정책을 없애는 데에 앞장서는 둥의 행보를 보인다.

전쟁 루트에서는 나르타 상단의 힘을 이용해 참전을 회피하다가 결국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 말려드는 축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유네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그 애의 의지니까 누군들 뭐라 하겠어. 너도 나도 유네를 말릴 수가 있어? 무슨 근거로?”

“없지. 하아. 다들 각오를 다졌구나.”

“난 복수하는 게 아니라 지켜낼 거야. 이 학교를, 이 나라를.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을. 너야말로 할 수 있겠어? 지금 와서 약한 소리하면 가만 안 둬.”

“필사적으로 해봐야지. 약속했잖아.”

비키가 씁쓸하게 웃으며 류제와 작별인사를 교환했다. 등을 맞댈 소중한 동료. 그들이 다음에 마주할 때는 군용 미사일이 터지는 전장에서일 것이다. 학생들과 했던 기간트리카 대결은 이제 상대방을 죽여야만 하는 필멸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힘을 합쳐 사람을 죽이기 위해 힘을 낸다.

기숙사에 앉아있던 재경도 무뚝뚝하게 내려앉은 얼굴로 가방 안에 노트 한 권을 툭 던져 넣었다. 지퍼로 잠근 그 가방은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시선에서는 단념이 담겼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미노타를 막기 위해 지원을 온 다른 키아나트리체의 기간트리카 부대들은 지금도 미노타에 맞서서 싸우는 중이다. 세라는 피투성이 같은 현실로 돌아왔다. 학교의 상황을 소식통으로나마 간신히 들은 세라는 타지에 떨어진 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그럼에도 퀴퀴한 연기가 퍼지는 전장에서 동료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체육관에 모인 제립학교 전교생들은 교장의 마지막 연설과 최종 배치된 부대로 나눠서 선생님들을 따라 떠났다. 1학년 8반도 어빌리티와 척도에 따라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학생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삶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어떠한 변명도, 최후의 발악도 없이 소중한 팔다리가 찢어졌다. 정문을 나서니 학교에 남아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경비병 인력만이 경례를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올 줄 알았지만 재경은 그게 지금이 아니기를 바랐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화려한 미래에 끼어들 수 있을 거라 해피 엔딩을 희망하던 때에도 바라지 않았는데 배드 엔딩을 위해서라니 납득하기 싫었다. 마지막 인원으로 체육관을 떠나며 재경은 꿈에서 깨어났다.

재경은 류제가 원했던 대로 최후방부로 배치되었다. 반박할 수도 없이 세니타리 롯의 납치 건 때 크게 다쳤기 때문에 후유증을 염려해서라는 기회주의적인 상냥함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반드시 지고 마왕이 부활하는 끝이 존재할 뿐이다. 그 미래가 다가올 때까지 재경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의미한 시간 허비였다.

“이봐, 꼬마!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빨리 짐이나 날라!”

후방에 배치되었더라도 제립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혹독한 계급사회의 위계질서가 그를 맞이했다. 거기에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어빌리터에게 향하는 일반인들의 기대감은 상심과 피로를 부담감으로 덮어 버무렸다.

위급 상황에서 일반인들이 어빌리터에게 향하는 기대감은 커다랗다. 부흥할 수 있을까 위가 아플 만큼 그는 무능했다. 그는 어빌리티도 변변찮고, 기간트리카 컨트롤도 조금 봐줄 만한 수준이 되었을 뿐인 평범한 학생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 투정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걸 다 옮기라고요? 무리예요. 젠장. 난 일꾼이 아닌데.”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몸이나 움직여. 누군들 안 쉬고 싶은 줄 알아?”

고작 다섯 명의 어빌리터가 배치된 재경의 중대는 위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전선과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혹시나 모를 마족의 습격을 대비해 피난길을 따라가며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빨리 안 움직이면 오늘 안에 다 못 가. 다른 일반 군인들도 힘내고 있잖아. 어빌리터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마라.”

“으…….”

배속된 어빌리터 말고도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과 징병된 병사들이 나서서 짐을 날랐다. 그들은 농땡이를 부리려는 재경을 못마땅하게 흘기며 땀을 흘렸다. 재경도 별수 없이 짐을 들고 기간트리카를 이용해 날랐다. ‘데이브레이크’니 뭐니 새로운 기능이 들어간 군용 기간트리카라고 하지만 싸우긴커녕 매일같이 짐만 나른다.

“이봐요, 군인 양반. 우리 짐도 좀 옮겨 줘.”

“그 정도는 알아서 들어요! 힘들어 죽겠는데. 아니면 저쪽 군인들에게 부탁하든가.”

“그쪽은 조금… 미덥지 못해서. 부탁 좀 할게요.”

징병 때문에 가문의 장자들이 차출되어 의지할 곳이 없는 피난민들의 어빌리터를 향한 터무니없는 신용이 거북스럽다.

재경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어빌리터만이 가지는 기간트리카라는 무기에 숨으려고만 했다. 그래도 몇몇 염치가 있는 이들은 사력을 다하는 군인들에게 모두 상냥했다.

“오빠. 이거 우리 엄마가 먹으래.”

재경이 힘들어서 자리에 주저앉아 땀이나 식히고 있으면 이따금 눈에 익은 아세미 또래의 어린아이가 그와 소대원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언제 어느 때에 우려하는 상황이 발생할지 눈을 감아 그리며 재경과 소속 소대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 나이엔힐리아로 향했다.

* * *

제립학교에서 보호받으며 생활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나날들이 이어졌다. 정확히 1여 년 전 엑스트라 렌 지미의 몸에 빙의했던 재경은 학교 밖 사람들의 생활에 무지했다. 그것도 모자라 군이라는 계급사회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춰야 하는 그는 맞이하는 매일이 지옥이었다.

좋게 치래도 땅바닥 바로 위의 잠자리는 춥고 불편하고, 하루 종일 움직여 피곤한데도 병영식(兵營食)은 더럽게 맛이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근무는 힘들고, 하루 이틀이 지나갈수록 뼈저릴 정도로 무능한 놈임을 깨닫는다.

무기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렌 지미 이야기의 다음을 복기해 봐도 삼류 악당의 마지막은 왕녀의 루트에선 그때 그 모습이 끝이었다.

렌 지미는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으니 나머지 부분은 전부 플레이어의 상상에 맡겼겠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이 그 현실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대로 정녕 끝이란 말인가.

“하아.”

미나에게 꼴 보기 좋게 당한 그 순간이 악몽으로 튀어나온다. 모르는 척하며 비웃는 그 빌어먹을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줬어야 했어. 거기서 발악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이따금 울컥하는 복수심이 불타올라도 현실은 냉혹했다. 어떠한 것을 하든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낯설었다.

특히나 새로 마주한 비어빌리터인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과는 어지간히 사이가 불편했다. 그가 기간트리카 소대 소속 중 나이가 가장 어린 데다 흔치 않은 남자 어빌리터이기 때문엔가 만만하게 보고 시비를 걸어서 충돌이 잦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울컥해도 그는 이전처럼 아무 때에나 주먹을 올리는 철없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군은 계급사회이니 하극상은 처벌이 무겁다는 것은 차치하고, 지금까지 생각 없이 저지른 일 때문에 세상이 안 좋게 변해버렸는데 사소한 행동 하나에 책임감을 못 느낄 리가 없다.

참을 수는 있지만 분출을 못하니 답답하다. 마음을 기댈 사람 전무한 건 끔찍하게도 한없이 우울했다.

“지금부터 휴식한다. 피난민 대표에게 통지하고, 해 지기 전까지 막사 세워.”

명령에 짐이 하나둘 풀어졌다. 기나긴 이동 끝에 오늘 목표까지 도착해 정박지에 막사를 세운답시고 휴식 시간을 다 쓴 그는 오늘 하루도 지나갔구나 주저앉았다. 피난민들이 세운 쉼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아하니 슬슬 저녁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오늘 자 저녁은 묽은 닭고기 수프에 치즈와 햄 한 조각이 들어간 토스트, 감자샐러드였다. 제립학교의 호화로운 식단을 바란 것은 아니어도 온도 차가 너무하다. 나름대로 좋은 음식을 만들어준 피난민들을 뭐라 타박할 수도 없고, 배도 고프니 그는 꾸역꾸역 맛없는 토스트를 전부 입에 욱여넣었다.

새까만 저녁 하늘 아래에 희미하게 빛나는 매화꽃이 일렁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즐거웠지, 작년 봄은. 회색빛이던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했던 봄이다. 그때는 언제나 봄일 것만 같았다.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는 동화 같은 끝은 없다. 나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어. 그러니까 기회를 받았어도 잡지 못한 거야. 수프를 먹다 말고 그는 맹탕에 둥둥 뜬 고기 한 조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식사가 끝날 때쯤엔가, 소대장이 고생하는 부대원에게 초콜릿 바 몇 개를 간식으로 내줬다. 다섯 명이서 마족과 미노타 군의 경계에 피난민들의 짐과 군장을 나르느라 남들의 배는 고생했던지라 이 정도 포상이야 사사로운 것이다.

뭐, 이것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재경은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이 초코바는 보통 주변을 기웃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주고는 했다. 라우라 축제 때 과자를 원하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같이 이런 거라도 주면 책임감이 덜했다.

“우와아!”

“내 거야! 만지지 마!”

“나눠먹으라고 준 거거든?”

고작 초코바 하나 가지고 깔깔거리며 사라지는 대여섯 무리의 어린아이들을 보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어린 시절에 비해선 썩 운이 좋은 애들이 아니어서 그런가 알량하게도 마음이 상냥해졌다.

모두가 잠든 오밤중이 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군인들이야 번갈아가며 불침번으로 경계근무를 하지만 그는 새벽쯤에 순번이 돌아왔기에 슬슬 자지 않으면 피곤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닥불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충성. 렌 지미 병장님은 안 주무십니까?”

“윽… 잠이 안 와서 농땡이 좀 피우다가 자려고요. 불침번 수고하세요.”

“예에… 수고하십쇼.”

이따금 알은척을 해오는 일반 병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미노타와의 전쟁을 위해 징병으로 차출된 사람일 것이다. 자신보다 나이는 한참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그에게 존댓말을 하자니 몸이 배배 꼬였다. 이것만큼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납득하기 싫어도 전쟁에 임하게 되었으니 그도 학교를 떠나기 전 임시군번과 계급을 받았다. 1학년인 데다 실전 경험도 부족하니 직급이 더 낮아야 할 것 같은데도 병장이다. 다른 일반 병사보다는 애매하게 높은 걸 보아하니 어빌리터이기에 사람들을 통솔해야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세라 쌤만큼이나 나이가 많은데도 대부분 하사나 중사 정도니까 학도병이라는 입장상 그 사람들보다는 낮아야 하겠지. 세라 선생님은… 중위였던가. 밀로니 중위라고 맨날 그랬던 거 같은데. 그 정도는 얼마나 높은 거지.

잡생각을 하는 동안 다들 자러 들어갔는지 고요하다. 따닥따닥 불이 튀는 소리만 들렸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도 이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았던 그는 불침번을 서고 있는 병사에게 귀띔하고는 터덜터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과 떨어져 나가니 막혔던 숨이 다 뚫렸다. 피곤이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오밤중에 시간이 나면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후우, 터져 나오는 숨을 내쉬니 그의 한이 서리가 되어 흩어졌다.

나무에 등을 기대앉은 그는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밤하늘의 별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의 이마를 적셨다. 심장이 공연히 두근거려서 오늘은 잠이 안 올 것 같다. 그가 나무 막대를 하나 들어 바닥에 빙글빙글 동그라미를 그렸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할 때 나를 위해서 노래 불러줘요.”

어른들을 믿지 못했던 그를 돌봐주고 긍정해 주었던 세라 쌤이 보고 싶었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믿지 못했는데 그녀만큼은 도와달라고 찾아가면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해 줄까. 그의 말을 믿어줄까 바라게 된다.

헛된 망상에 재경은 도리질 쳤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과 미나를 떠올리면 그것마저 두려웠다. 미나가 어디까지 손을 뻗쳤을지 모른다.

지금 그의 편은 없었다. 그의 노래를 좋아해 주었던 이들은 모두 연락이 닿지 않은 먼 곳에 있다.

“잘 못하면 어때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걸. 사람은 실패하고, 그 실패로부터 일어서서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럼 쌤, 실패로부터 일어서는 법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 건가요.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 이 세상은 나한테 혹독하기만 한걸요.

이곳이나 저곳이나 그런 건 빼다박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피난을 도와주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아주 이곳저곳 들쑤시며 엉망으로 만들더니 재미있는 꼴이구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환청에 재경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았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들려오는 것은 슬렉터에서 들려오는 통신이었다.

“우왓……!”

실수한 그가 다급하게 통신을 받았다. 언제부터 왔던 거지. 군에서는 이런 실수는 용서가 없었기에 분명 큰 체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어떻게 변명할까 머리를 굴렸다.

“토…통신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어디로 간 거야?!

“예…에……? 자…잠깐 화장실 좀…….”

―습격이다. 마족이야! 당장 돌… 지직 …제기랄!

통신이 끊겼다. 마족? 마족이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다. 앞일을 걱정했던 주제에 안일했던 재경은 탄식하며 막사까지 달려갔다. 미노타의 침략에는 마족이 배후 했음은 이미 알던 사실 아닌가.

“제길… 아무리 그래도 벌써 이런 날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그는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네 명의 어빌리터가 하나의 마족에게 수를 쓰지 못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목격했다. 그 잠깐 사이에 고생해서 만든 정박지가 엉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짐은 버려! 당장 군인을 따라 이동해라! 당황하지 마!”

“빌어먹을 마족… 하필이면 이런 때.”

이제는 하다못해 엑스트라 마족까지 그를 방해했다. 엑스트라라고 하지만 마족은 마족이다. 아수라장에 함부로 발을 디디지 못하는 그는 허수아비처럼 서서 식은땀을 흘렸다. 류제도 없고 공략법도 없는데 이길 수 있을까 공포마저 느껴졌다.

마족을 상대로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은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어빌리터의 사명이자 임무다. 그가 겁에 질려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피난민들을 호위하는 어빌리터들은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결속력 있게 움직였다.

“어디, 저 괴물 년은 무슨 분파에 어느 등급이냐.”

“‘악몽 인자’ 검출로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등급2의 상위 개체 서큐버스입니다. 피난시켜야 할 인원도 많은데 골치 아프게 됐어요.”

“피난 완료할 때까지 집중력 유지해. 정석대로 간다. 핵 위치 파악하고.”

노련한 소대장이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쉽게 말해도 등급2의 마족은 이런 시골 촌구석에 등장했다고 치기엔 통계적으로 등급이 높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서큐버스는 정신계 마법만 주의하면 신체적 능력은 기간트리카로 커버가 가능했다. 사력을 다한다면 핵을 찾아 파괴할 확률도 충분했다.

“다른 파츠를 희생해서라도 헬멧은 반드시 사수해. 뭐 하는 거야! 넌 당장 저쪽으로 가서 사람들 대피시켜!”

“아… 예…옙!”

위급 상황인데도 어리벙벙하니 혼이 나가 가만히 서있는 재경에게 소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는 어빌리티가 불명인 데다 이 소대와 기간트리카 합동 훈련도 하지 않았고, 1학년인 것을 감안하여 이런 상황에서는 피난민들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인력이었다.

“이래 봬도 나는 미식가라 신선한 식량을 처분하는 건 안 좋아하거든. 오랜만에 정기보단 피를 맛보는 건 즐거울지도.”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어디서 등장했는지, 목적을 모르는 마족이 공격을 개시했다. 어두운 밤에도 번뜩거리는 포식자의 붉은 동공. 비정상적인 뿔과 날개. 그 낯선 마족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재경은 뒤를 힐끗거리며 사람을 홀리는 옷차림을 한 마족에게서 멀어졌다.

미나를 제외한 서큐버스 마족 분파는 처음 봤다. 게다가 미나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상위 개체다. 과연 저 네 명의 기간트리카 소대가 류제처럼 마족을 해치울 수 있을까?

“어빌리터 따위 얇은 갑옷을 걸친 하찮은 가축이지.”

“왼쪽 다리, 핵 반응 없습니다.”

“머리, 핵 반응 없습니다! 몸통 쪽에 있는 듯합니다!”

대단치도 않은 어빌리티로 짜증 나게 공략하는 기간트리카 대원들은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더욱 귀찮았다. 잘려나간 육체를 질척한 살갗을 내보내 이어붙인 서큐버스는 전력으로 덤벼드는 기간트리카 대원은 하루살이처럼 귀찮은 존재라는 양 휙휙 내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빌어먹을 년이 피난민 쪽으로 갑니다. 저지하십쇼!”

강한 힘으로 반대편에 처박히면서도 그녀들은 용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움직였다. 아랑곳하지 않는 서큐버스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미처 사정거리 밖까지 도망가지 못한 사관학교 출신 장교 한 명을 마음에 드는 인형 뽑기라도 하듯 집어 들었다.

“안 돼, 물러서!”

“우…우와악!”

“흐음. 너는 좀 맛있어 보인다.”

등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족은 황홀하게 입을 벌려 목덜미를 단번에 물었다. 사고를 마비시키는 고통에 그가 몸부림쳤다.

“끄아아악!”

“이런―”

“젠장할. 군인이 되어가지곤 적을 늘려서 어쩌자는 거야!”

마족에게 물린 자는 수족인 구울이 된다. 온몸을 비틀대던 장교가 거품을 물고 경기를 일으켰지만 서큐버스는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사람임을 잊어버린 구울은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침을 질질 흘렸다.

그는 마족의 의지에 따라 공격했다. 배신감으로 인간 무리가 아비규환이 될 것이라는 서큐버스의 예상과는 달리 방금 전까지 그들을 도왔던 장교를 사람들은 매정하게 공격했다.

“재미없네. 감정적인 건 인간들의 특징이라고 하던데.”

“닥쳐 이 사악한 마족!”

“적에게 말대답할 시간에 핵 위치나 파악해.”

“하. 가축 주제에 건방진 말을 하는구나. 네깟 것들이 내 핵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슬픔을 가치 없이 조롱하는 마족은 자신만만했다. 물리 공격력은 다른 마족에 비해 부족하지만 정신계 마법이 독보적인 서큐버스의 마법 인자들이 그들을 휩쌌다. 미나만큼은 아니지만 마족은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정신계 마법을 난사했다. 역치를 넘어버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여기에 바리케이드 펼쳐!”

“수가 부족합니다!”

“사람들 모아! 이쪽으로 빨리 좀 오세요! 제발 좀!! 짐은 버리라고!!”

아수라장 속에서 같은 편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리던 재경은 뒤에 있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반 군부대가 마족의 공격을 차단하는 바리케이드로 저지하고 있지만 분명 시간이 흐르면 끝내 반격당할 것이다.

“으…으…….”

“핵 위치 확인 불가입니다.”

“공격을 제대로 넣으란 말야.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하지만……!”

후방에 파견된 기간트리카 부대는 어빌리티 척도가 높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척도가 높은 어빌리터들은 최우선으로 미노타 기간트리카 군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등급2의, 이전번 병마 페스트의 왕과 함께 왔던 다른 두 마족과 같은 레벨의 마족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마족이란 간교하고 사악하다. 미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서큐버스는 집단의 정신을 야금야금 지배해서 농락하곤 한다. 세뇌당해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채 마족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기간트리카 부대원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거 놔. 놓아요! 젠장.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빌어먹을 마족 같으니!”

회생이 불가능하게끔 구울로 변모한 것도 아니고, 마법만 풀리면 멀쩡해질 사람들을 방해가 된다고 공격하기는 참담한 현실이다. 그걸 아는 소대원이 울먹거리며 공격을 주저했다. 죄책감으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시기를 놓쳤다.

“머뭇거리지 마! 방해되면 당장 떨쳐내!”

“안…안 돼……! 그럴 수 없어요…….”

이미 늦었다. 공격을 망설였던 소대원 한 명이 서큐버스에게 붙잡혔다. 정신계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기간트리카의 헬멧이 마족의 손톱에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바깥쪽으로 보이는 마족의 동공이 붉게 빛났다. 웃고 있는 입에서 살육을 위한 송곳니가 번뜩였다. 마족의 눈을 보고 있는 소대원의 눈동자가 덩달아 멍해졌다.

“아… 아…….”

“당장 떨어져! 이봐 안네 소위! 서큐버스를 밀쳐내!”

“제가 가겠습니다!”

그녀의 동기가 정에 이끌려 달려들었으나 정신계 마법에 지배당한 어빌리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구해주러 온 동료를 붙잡고 억지로 슬렉터를 조작했다. 그러자 서큐버스가 다가와 기간트리카가 해제당한 소대원의 목뼈를 부러뜨렸다.

“그만… 커헉!”

“안 돼, 제발 그만……!”

서큐버스는 사람들을 이간질시키며 서로를 배신하게 한다.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어빌리터들은 자신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내분으로 망가지는 기간트리카 소대원들을 서큐버스가 노련하게 해치웠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악몽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마족을 저지한 어빌리터들의 희생은 과연 명예로운 것이었나. 온 세상이 피투성이다.

“하. 이제야 조용해졌네.”

이제 어빌리터는 재경만 남았다. 과연 렌 지미의 최후란 이런 것이었나? 전쟁을 피해 도망가다가 마족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야? 그런 결과만 있는 세상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 노력했는지 허무하다.

“나는 메인 디시는 가장 마지막에 먹는 걸 좋아하거든. 기다리게 했구나.”

기간트리카 소대를 전멸시킨 서큐버스가 하늘에서 내려와 천천히 착륙했다. 그녀는 박쥐 날개를 살랑거리며 바리케이드를 친 군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 가운데에서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재경 그밖에 없었다.

비어빌리터들은 점차 뒤로 물러섰다. 그가 시간을 끌지 않으면 뒤에 있는 피난민들이 전부 죽을 것이다.

나머지 인간들이 도망가든 말든 마족은 신기하게도 상관하지 않았다. 도망가 봤자 다 손바닥 안에 있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면―

“후후. 계속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어. 어떤 기분이었어? 마왕님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건.”

재경이 목적이라는 뜻일까.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접근한 그녀가 재경의 머리를 붙잡고 기간트리카를 일그러뜨렸다. 세뇌시켜서 또다시 마음을 가지고 놀 셈이다. 그러나 분파의 군주인 미나의 마법조차 듣지 않는 재경에게 등급2의 마족이 행하는 정신계 마법이 들을 리가 없었다.

서큐버스의 붉은 동공을 마주 본 재경은 벌벌 떨려오는 과거의 상처를 붙잡았다. 그는 자신이 정신계 마법을 차단할 만큼 강력한 정신 방어 기재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랐던지라 마족이 사람들을 홀렸던 마법을 쓰면 어쩌나 절로 어지러워졌다.

“어서 말해……!”

“뭐라는 거야, 이 변태가!”

하지만 그의 마음이 마족의 생각대로 주물러지는 감각은 없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마족도 방심한 것 같으니 재경은 들고 있던 소형 폭탄으로 마족의 몸을 조각내고 벗어났다. 커다란 소리 때문에 머리가 울렸다. 이제 남은 건 섬광탄 몇 개와 어빌리티가 있다면 마족의 피부를 찢을 수 있는 군용 나이프 하나.

류제도 아니고 고작 이거 가지고선 답이 없다. 한쪽 몸이 죄다 날아갔는데도 마족은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는 양 여유롭게 자신의 몸을 회복시켰다.

“소용없는 짓이나 하긴.”

“목…목적이 뭐야. 난 이제 류제랑 연관이 없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핵의 위치만 알면 허를 찌를 수 있을 텐데. 재경이 뒤로 물러나며 마족을 경계했다. 들은 대로 건방진 말투에 마족은 못마땅하게 입을 비죽거렸다.

“감히 인간 주제에 마왕님의 사랑을 받다니 용서할 수 없었거든. 겸사겸사 없애러 왔지. 하아. 어빌리터들은 가능한 안 죽이려고 했는데 꼬였네. 근데 저것들이 약한 걸 날더러 어쩌라고. 근데 넌 꼭 죽일 거야. 걱정 마.”

자신이 앗아간 여러 생명들을 향한 존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손톱을 길게 뺐다.

“플로냐는 왜 이런 까탈스러운 놈을 남겨둔 건지 몰라. 역시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길 바라는 거겠지?”

“사천왕 쫄따구 짓이나 하기는. 자존심도 없냐?”

재경은 마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긴장해서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머리가 차가워진 그는 저 마족이 미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수족임을 짐작했다. 그가 류제에게서 멀리 떨어진 틈을 타 완전히 제거하려는 속셈이다. 과연 미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플로냐를 따르는 것은 내 목적과 부합하기 때문이야. 쫄따구? 하. 감히 하찮은 가축 주제에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서 위대한 마족을 무시해?”

괜히 도발했다. 일렁거리는 마기가 그를 압도했다. 봐줄 것은 정신계 마법 방어력밖에 없는 인간에게 업신여겨지자 화가 난 등급2의 서큐버스는 핏대를 세우며 손을 뻗었다. 쐐기처럼 박히려는 손톱을 피해 재경이 몸을 돌렸지만 그는 마족에게 손목이 붙잡혀 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졌다.

“네까짓 것이 뭐라고. 넌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마왕님께 구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지 그래? 뭐? 오지 않아? 거봐. 마왕님도 널 버렸잖아. 마왕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야. 네가 아니라!”

정신계 마법을 쓸 수 없는 서큐버스는 넘어진 재경을 걷어차고 발로 내려찍었다. 구두 굽이 기간트리카를 찍을 때마다 파츠가 망가져갔다.

“젠장, 으윽! 누가… 제발……!”

이 망할 서큐버스의 시선을 끌어줬으면 좋겠지만 주변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라면 방법이 없다.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나. 포기하려던 그때 기간트리카 통신을 통해서인가, 출처를 모르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속삭여졌다.

[아쉽네.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었는데.]

시끄러워. 듣기 싫었다.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조롱하는 이 세상의 목소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생각도 허무하다. 그는 정해진 이야기를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언젠가 세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한텐 그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시련만 온대요.”

“이딴 한심한 것에게 마왕님이 마음을 빼앗겼다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죽여줄까. 구울들의 먹이로 던져주는 거야. 네가 생각해도 멋지지 않니? 뭐? 좋다고?”

“그걸 견뎌낼 수 있는 건 소중한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죠?”

세라 쌤.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저를 떠났어요. 제가 엉망으로 만든 세상은 결국엔 저를 내쳤어요.

“어리석은 가축 같으니. 마왕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야. 내가 가장 마왕님과 가까이 있어.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이 가장 큰 마왕님의 이해자야.”

[그래서 이대로 쉽게 포기할 생각이야. 이레귤러?]

류제를 향한 집착 어린 마족의 외침 사이로 들리는 냉정한 듯 상냥한 목소리에 재경은 정신을 차렸다. 마족이 깔깔거리며 빈정거렸다.

“명예롭게도, 자랑스러운 내 핵조차 마왕님과 같은 곳에 품었는걸.”

라는 말이 귓가에 스치자 재경은 남은 섬광탄을 단번에 터뜨렸다.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한 마족이라지만 터지는 빛 속에서는 누구라도 눈이 먼다. 허를 찌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 재경은 손에 쥐고 있던 군용 나이프로 정확히 마족의 핵을 노렸다.

“어…어떻게……!”

생명의 근원이 파괴당하자 당황한 음색이 말을 잇지 못했다. 반격조차 못 하던 하찮은 인간이 어째서 그녀의 배꼽 위, 척추의 바로 앞에 존재하는 핵의 위치를 알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찮아 보이던 그가 죽기 바로 직전이 되어서야 기묘한 것으로 비쳤다. 플로냐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던 건―

“이런… 의미…인…….”

“그러게 누가 배꼽을 다 내놓고 다니래. 겨울에 얼어 뒤질려고.”

마족을 쓰러뜨리며 참으로 그다운 말을 돌려준 재경은 마족이 소멸하는 모습을 덤덤히 지켜보았다. 핵이 파괴된 마족의 육체가 경화되어 조그마한 충격에도 헐하게 부서졌다.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인간을 붙잡지 못하고 검은 흙이 되어 쓰러지는 그녀는 이내 전신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하아…하…하… 이겼다. 하하하.”

승리가 실감되지 않는 재경은 괴물의 살을 짓이겼던 군용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피 묻지 않은 손이 떨렸다. 다리 힘마저 풀린 그가 먼지가 흩날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겼다. 혼자서 마족을 처치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은 안전하다.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쁨을 취하기도 잠시, 재경은 이 모든 사투가 허탈해졌다. 그러면 뭐 하나. 이 작은 승리는 세상을 바꾸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걸. 정작 처치해야 하는 건 저런 엑스트라가 아니니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재경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나 작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지 헤아리는 것조차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런 미래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실에 순응해서 이따위 것에 기뻐하는 자신이 싫었다.

“으흑… 이게 뭐야. 이게 다 뭐냐고. 난 그냥… 그냥……!”

재경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을 뿐이다.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해보고,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기를 바란 것 외에도 어리바리한 류제가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곁에 있는 미래도 그에겐 행복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 뭔가. 이 앞에 있을 미래는 그가 바랐던 것들을 깨뜨릴 텐데.

누군가를 원망해도 어차피 다 그의 업보였다. 류제가 왕녀에게 초콜릿을 잘못 전달해 준 건 류제의 잘못이 아니었다. 유네도, 비키도, 세라 선생님도, 왕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 자신이 못나서 그런 거다. 이질적인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기에 그렇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혹은 어떻게 하면 패배로 정해진 미래가 승리로 바꿀 수 있을까. 후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재경은 이기심 때문에 생긴 잘못을 속죄하고 싶었지만 이 세상은 그가 무슨 발악을 하든 의도했던 대로만 움직인다. 정녕 기회가 없을까?

왕녀의 루트가 패배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무사히 인간들의 승리로 이끌 것인가는 왕녀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사라 하놋이 경계했듯, 그 단 하나의 차이 때문에 인간은 지거나, 혹은 승리한다. 패배한다면 재경이 겪은 쓰디쓴 감정은 물방울 하나가 되어 맹물 파도에 합류할 것이다.

전쟁의 승리. 왕녀의 마음을 바꿀 한 번의 기회. 재경은 사라 하놋이 말해주었던 자신의 어빌리티를 떠올렸다. 공략을 아는 건 빙의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는 것을 자신의 어빌리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네 어빌리티는… 정해진 흐름을 바꾸는 것이니. 그 대가는 너에게 닥치는 불행이 되겠지.”

사라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에 가슴이 지끈거린 재경은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렸다. 사라가 하는 말은 완벽하지 않겠지만 지금 매달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정해진 흐름을 바꾸는 것. 지금까지 세상을 망쳐왔던 능력으로 세상을 되돌리는 거다.

재경은 문득 기숙사에 두고 온 공책이 무척 그리웠다. 그가 급하게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왕녀 루트로 끝나는 엔딩 스토리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전쟁 패배와 승리는 류제가 미나의 술수에 걸려드느냐가 판가름을 갈랐다. 전쟁으로 정신없는 와중 미나에게 속은 류제는 호세마타 요새에서 미나에게 붙잡혀 나라카로 끌려간다. 그곳에 있는 마족들의 수작으로 류제는 품고 있는 악한 혼을 일깨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끝이었다. 마족의 사천왕에게 이기지 못한 히로인들도 하나같이 마족에게 붙잡힐 거다. 비키와 왕녀는 소중한 사람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영원히 알지 못하고, 세라는 악우를 잃는 똑같은 슬픔을 되풀이하며, 허망하게 패배한 유네는 자신의 약함과 책임감을 버텨내지 못한다.

마족이 되기에 좋은 소스를 가진 그들은 절망 속에서 포기한 채 부활한 마왕의 첫 종자가 되어버린다. 거의 모든 어빌리터들이 죽거나 마족으로 변하고, 인간은 마왕이 있던 때처럼 멸망 직전까지 몰락한다. 그것이 바로 전쟁 패배 엔딩이다.

그걸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류제가 호세마타 요새에서 미나에게 붙잡히지 않으면 된다.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왕녀뿐이었다.

전쟁 승리 엔딩에서 마족에게 세뇌당한 적 나라 기간트리카 부대를 막은 왕녀가 호세마타 요새로 가는 류제를 설득한다. 덕분에 류제는 기적적으로 미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다른 히로인들은 물론 류제와도 연락이 끊긴 재경으로서는 왕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왕녀는 재경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 데다 미나에게 홀라당 빠진 그들이 당장 미나를 의심하기는 힘들 것이다. 말한다고 해도 그녀는 노련하게 사람들을 세뇌시켜 정체를 숨기겠지. 그렇게 되면 스토리가 바뀌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아는 것은 있어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스토리라인에 개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적어도 왕녀가 병원에서처럼 학교에 마족이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의심하고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말해둘 걸 그랬어. 그랬다면 왕녀에게 부탁할 수 있었을 거야. 왜 나는 항상 내 동아줄을 스스로 걷어차는 걸까.

“제길… 정말로 난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중구난방으로 쓰인 글씨를 보며 애꿎은 흙을 쥔 재경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왕녀에 집착하지 말고 다른 곳을 공략해 보자. 요점은 왕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류제가 호세마타 요새에서 미나에게 잡혀 나라카로 끌려가지 않는 거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류제를 어떻게 탈환시켜서 승리 이벤트로 이어지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보내지?

그는 다시 한번 바닥에 정리를 해보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땅에 자기만 아는 글씨로 뭔가를 휘갈길 뿐인데 점점 머리가 상쾌해졌다. 그가 지금 도달하려는 끝이 정답이라는 양 이렇게까지 스토리가 기억이 잘 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류제는 나라카에서 돌아올 백장미 부대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려 호세마타 요새에서 대기 중이던 미나가 마족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때 류제는 왕녀를 통해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따라 마족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도와달라는 미나의 요청을 따라갈 것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류제가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함께 가면 병마 페스트의 왕과의 전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왕녀의 호감도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류제는 미나를 구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호세마타 요새로 가지 말라는 왕녀의 통신을 듣지 못한다. 류제가 붙잡힌 후 왕녀는 반어빌리터파와 마족의 계략에 당해 나라카로 붙잡혀가고 거기서 마왕이 된 류제와 마주한다.

“호세마타 요새. 거기에 분명 그게 있었어!”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떠오르자 재경의 머릿속에 문득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호세마타 요새로 향할 류제가 미나의 함정에 빠지기 전 빼돌릴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트이자 산 정상에서 세찬 바람이라도 맞는 것 같았다.

엔딩 분기점에서 류제를 구해낸다고 해도 그 이후에 류제가 사천왕 간의 대결에서 지지 않아야 한 데다 여러모로 패배의 길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많았지만 재경이 할 수 있는 일은 류제를 믿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류제에게 맡기는 수밖에.

지금 메인 스토리라인에서 물러선 만큼 그는 자유로웠다. 이 세계는 게임상에 서술이 없는 부분에서는 너그럽다는 생각을 언젠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렌 지미의 행동은 굉장히 자유롭지 않나.

“…오빠!”

라고 어떤 어린아이가 외쳤다. 행동을 개시하려던 그의 몸이 멈칫거렸다. 이따금 그에게 빈약한 간식거리를 주곤 했던 착한 아이다.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마족을 해치웠다는 것을 인지한 군인과 피난민들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 마족을 해치운 영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잊어버렸던 재경은 남아있는 피난민들을 누가 보호할 것인가를 염려해야 했다. 재경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해…해치운 거야? 정말 마족이 없어진 거 맞아?”

“다른 사람들은? 어빌리터는 이제 너뿐이야?”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를 들어도 더 큰 미래를 바꾸기로 생각을 굳힌 그는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완수해야 할 마지막 역할이 더 중요했다. 마을 사람들과 세계의 미래를 저울질하는 그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해요.”

그가 여기에 남아있으면 아까 그 서큐버스처럼 그를 죽이려고 하는 미나의 부하들이 찾아와서 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저들에게 더 좋은 일일 거야.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안한 그는 비틀거리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며 두리번거리는 틈에 재경은 부스터를 켜고 미련 없이 떠났다.

남아있는 사람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저런 나이에, 소속된 부대가 전멸했으니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도망가도 할 말은 없다. 어빌리터라고 해도 그들과 같은 인간이구나 싶었던 피난민들은 재경이 어떤 심정으로 떠났는지 몰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련히 살 길을 찾아 마족이 헤집은 짐들을 하나둘 정리했다. 이어질 전쟁은 더 혹독했다.

* * *

수학여행 둘째 날에 와본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방에는 백장미 특공대대가 쓰는 호세마타 요새가 있다. 잠깐 언급되었던 요새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분기가 갈리는 장소라는 걸 첫 회차의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이후 나라카와 인접한 이곳에 다시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재경은 반쯤 부서진 채 연기가 피어오르는 알라마니 기술관 본관 건물을 올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늦지 않게 군용 무전을 훔쳐 들어 싫어하는 높은 장소를 강행해서 뚫고 오기까지 했는데 정작 그의 목적지였던 알라마니 기술관이 이 모양일 줄이야.

“제길 신재경, 이 멍청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그가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알라마니 기술관에 온 그는 한발 늦었다며 머리를 찧었다.

알라마니 기술관 본관은 기간트리카를 개발하고 최전방에 있는 백장미 부대 지원과 마족의 동향을 파악하는 키아나트리체의 아주 중요한 기관이다. 미노타의 침략과 함께 활동을 시작한 마족들이 이곳을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이런 당연한 것도 떠올리지 못하다니. 하아.”

이래서는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시간만 부질없이 허비한 거다. 미나가 호세마타 요새로 류제를 부르는 3월 14일까지 시간이 부족했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던 그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 박살 난 문을 치우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상태가 이래도 사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안에 들어가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재경은 구울이 된 연구원의 시체를 멀찌감치 피하며 계단을 올랐다. 멀쩡하게 남은 것이 없는 이곳에 그가 쓰고 싶었던 도구가 있었다. 그것만큼은 무사해야 하는데. 재경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부수지 말아달라며 기도했다.

만일 류제가 미나를 구출하기 위해 호세마타 요새로 향한다면 그곳에서 미나는 플레이어에게 마족이라고 정체를 밝힌다. 1년 동안 착실하게 미나에게 속아 온 류제는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 그녀를 해치우려고 하지만 그녀와의 추억 때문에 주저한다.

그런 미나는 류제에게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없게 하는 ‘러다이트’를 사용한다. 류제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없게 되고, 정신계 마법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 류제를 빼돌릴 방도를 재경은 기어코 생각해 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호세마타 요새에서 기간트리카로 30분은 소요되는 알라마니 기술관까지 순식간에 오게 했던 도구가 바로 이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있어……! 고…고장 난 건 아니겠지?”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옆이 뻥 뚫린 높은 계단을 타고 올라오니 기술관 관장이 자랑하던 스위처가 엉망이 된 건물 안에서 위용을 과시했다. 허둥지둥 바닥에 널린 잔해들을 피하며 기계로 다가온 그는 뿌옇게 먼지가 쌓인 스위처의 모니터를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다행히, 전원은 들어왔다.

“하아… 다행… 아니, 아니지. 다행이 아니잖아! 혼자서 이걸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래서 알라마니 기술 관장이 있기를 바랐던 거다. 재경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연구원들을 찾았으나 구울 시체와 사람들이 도망간 흔적만이 즐비했다.

“제발 눈 뜨고 코 베이게 하지 말라고. 시간이 없단 말이야!”

재경은 정신없이 알라마니 기술관을 뒤졌다. 개발이 백지화된 지 오래인 스위처에 관련된 서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물며 글 읽기 싫어하는 재경이 자료실에 ‘스’ 자가 들어가는 보고서는 전부 뒤져봐도 스위처에 관한 내용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럴 거면 그 변태 할아범은 저런 기계를 왜 개발한 거야! 왜 주인공한테 저런 걸 소개시켜 주냐고!”

애꿎은 서류를 내던진 그는 보루로 남겨두던 관장실로 향했다. 저번에 수학여행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스위처는 관장의 고집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했었던가.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고 했었나. 손수건하고 팬티랑 바꾼 그 기계를 신뢰할 수 있는 거 진짜 맞아?

여기까지 오자 불길한 생각만 났다. 안 돼. 여기서 절망하면 안 된다. 잡념을 떨쳐낸 재경은 류제의 머리랑 몸통이 분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스위처를 작동시키기로 결심했다. 사용설명서가 안 나오면 실행 버튼을 그냥 주먹으로 꽉 내려찍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나와.”

관장의 연구실에서 화를 중얼거린 재경은 서랍을 열고 서류를 뒤지다 마침내 찾아 헤맸던 그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 자지러졌다.

[스위처의 사용 목적과 그 한계에 관한 보고서.]

“우와악! 있어. 진짜 있다고!”

신이 난 재경이 보고서를 넘겨 글자를 읽었다. 밤낮으로 알라마니 기술관을 뒤지느라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를 오갔다.

드디어 한 보 더 진전할 수 있다는 희망에 올라갔던 입꼬리는 보고서를 넘기면 넘길수록 침착해졌다.

끝내 마지막 장까지 읽은 재경은 허탈해져서 서랍을 다시 뒤졌다. 더 이상 스위처에 관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래 가지고 어쩌라는 거야. 정말 이게 다야……?”

자신이 없어진 그는 하릴없이 손에 든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위처의 작동법이란 정해진 위치에 서서 실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류제만 호세마타 요새에서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스위처의 목적은 호세마타 요새에 있는 어빌리터가 마족과 전투 시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경우 다른 보충대대 인력과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였다. 그러기 위해 비슷한 형태, 부피, 무게, 성질 등을 분석해서 멀리 떨어진 두 물질의 위치를 텔레포트처럼 뒤바꾼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쓸모없는 기계는 관장이 이전번에 말했듯 마족과 인간까지는 구별할 수 있지만 상처가 난 어빌리터가 누구인지 분간이 불가능하고, 한번 텔레포트시키면 한동안 작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에너지 소비가 극심했다.

악용될 우려도 높아 개발이 중지되었기에 이 스위처의 능력은 그때 재경이 느꼈던 얼렁뚱땅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발 좀… 왜 맨날 내 생각대로 안 굴러가는 건데. 이제 와서 그러지 말란 말야.”

실망한 재경은 어떻게든 류제만 이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기계 이곳저곳을 건드려 봤지만 실험을 해보자니 스위처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 번으로 한정되어 있고 보고서를 암만 정독해도 류제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어빌리터인 류제와 또 다른 마땅한 것을 바꿔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세마타 요새에서 매복해 그가 류제에게 도움을 준다는 전략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려면 미나가 류제 앞에서 정체를 드러낸 시점이어야 하는데 류제조차 미나의 손바닥 위에 있는 이상 그와 류제가 세뇌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는 서큐버스의 왕인 미나와 접촉하는 사람은 류제보다는 그가 나을 것이다. 미나 말고 병마 페스트의 왕을 쓰러뜨려야 하는 류제의 시간도 촉박했다. 미나에게서 벗어난 류제는 당장 그 길로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가야만 스토리에 어긋나지 않을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그것뿐이다.

말인즉슨 류제의 운명을 대신해서 미나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재경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정말 내가 대신 배드 엔딩 루트를 막는다고? 내가 어떻게 미나를 이기는데? 절대로 안 돼. 걔가 날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문득 깔깔거리며 그를 비웃는 미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재경은 자신의 해피 엔딩을 향한 원대한 계획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미나가 무서웠다. 죽는 것도 당연히 싫다.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해야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암만 내가 혼자 힘으로 등급2의 서큐버스를 해치웠다지만 미나는 거의 최종 보스급으로 강한걸.

“진짜 싫어…….”

싫어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죽는 것과 진배없다. 그는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가 이 세계에 온 이유가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위해서일 뿐인 것보단 나았다.

싫어도 선택의 때는 다가왔다. 자신이 조금만 더 똑똑해서 이 상황을 지혜롭게 타파해 나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이 길이라도 파헤쳐보는 수밖에. 포기하면 여기서 끝나는 거니까. 그는 사나이답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적어도 알라마니 기술관에는 대마족 병기들이 다수 존재했다. 미나를 공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핵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여차하면 이전번의 서큐버스처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다 운명인 거겠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 중에 하나라면 기운이 난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때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 밸런타인데이의 답례를 하는 그날의 새벽은 추웠다. 오늘도 저 멀리서 태양이 떠오르려 했다.

이틀 사이 그는 미나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후 류제가 취해야 하는 길을 글로 남겨 제시해준 그는 호세마타 요새의 대결장을 인식 중인 스위처의 모니터에 식별된 두 인간 중 한 사람이 마족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후우… 좋아. 가자.”

타이머를 설정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진실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

작문 숙제는 남아서 다시 할 만큼 글솜씨가 전혀 없는 데다 긴장으로 손이 떨려 글씨는 좀처럼 종이에 남지 못했다.

“잠시 작별이야.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구구절절하고 앞뒤 말도 안 맞지만 그냥 하고 싶어. 그러니 타박하지 말고 그냥 들어줘.

우리 엄마 아빠는 의인이었대. 지역 뉴스에서는 작은 영웅이라고 포장했어. 할머니는 슬퍼도 그걸 위안으로 살아간다고 했지.

난 달랐어. 왜 생판 남을 위하는 바람에 나랑 할머니가 고통받아야 할까. 나랑 할머니의 몫은? 남들 목숨 구하겠다고 가족을 내팽개치는 게 의인이고 영웅이야? 그냥 개죽음이란 거에 슬프기 싫으니까 하는 자기 위로잖아. 부모님을 평생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류제. 여기 있다 보니까 너나, 유네나, 비키나, 왕녀나,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세계를 지킬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

지금 생각해 보니 알겠어.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위해, 할머니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사람들을 도와줬던 것일지도 몰라.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남들도 용기 있게 행동해서 도움받는, 부모님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할머니도 그 마음을 인정하고 죽음을 헛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 거야.

그런데 정작 나는 바보에 성질도 나쁘고 욕심도 많은 놈으로 자랐어. 부모님이 희생한 보람도 없이 매일매일 할머니 가슴에 대못이나 박고 경찰서에나 불려 다니고 고등학교 올라가겠다고 할머니랑 약속했으면서 할머니 마지막 가는 모습 지켜주지도 못하고.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싸우지 않는다는 약속도 안 지켰어.

정말 돼먹지 못한 놈이지 않아? 이런 내가 결국 여기서도 모든 걸 망쳐버렸네.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 내가 이 세계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만약 스토리대로 너희들에게 빈축을 사는 삼류 악당 노릇을 제대로 해냈다면, 너희들과 절대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나도 알아. 나는 그랬었어야 했어. 근데 나는 친구가 필요했어. 그대로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눈을 떴더니 이곳이었어. 기회라고 생각했어. 외로웠단 말이야.

여긴 정말 즐거웠어. 내가 모든 걸 망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았어. 평생 뚫려있을 것만 같았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채워져서, 좋았어. 너희들이 날 혼자로 만들어주지 않아서 행복했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너희들이 불행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아. 더 나은 답이 있을 텐데 바보라서 그런가 봐.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잖아. 그러니 내가 다 책임질게.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이게 내 마지막 역할이었던 거야.

너희들의 세상을 망쳐버린 난 절대 부모님처럼 영웅이 될 수 없지만 내게 두 번째 인생을 준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거야.

뭘 해도 서툰 내가 마지막 발버둥을 쳐볼게. 정말 딱 한 번, 마지막으로 정해진 이야기를 바꿔볼게.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내 사죄를 위해서.

성공할지 무의미한 발버둥일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몰라. 하지만 내 부모님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을, 작은 희생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믿을래. 믿어보고 싶어.

꼭 성공하고 돌아올게. 실패하더라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

“류제. 내 행복을 위해서 너를 불행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나는 실은 네가 생각하는 렌 지미가 아니야.

너에게까지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런 말이 위로가 될 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1년간 너희와…

류제 너와 친구가 돼서 행복했어.

이번엔… 이번만큼은 내 자기만족이 아니라, 진심으로 류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게.”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산더미 같지만 생각은 좀처럼 적히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만 하느라 툭, 하고 잉크가 떨어진 종이 위에 손이 떨려왔다. 긴 고민 끝에 결국 종이에 남은 것은 다섯 마디의 문장뿐이었다.

‘나는 너와 친구가 돼서 행복했어.’

―신 재 경.

누군가 내 진짜 이름을 기억해 줘. 이곳에서 지내며 조금은 행복했다는 사실을 알아줘. 내가 이 세계를 이렇게까지 망치고 싶은 건 아니었다는 변명을 믿어줘.

부서진 건물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게 파랬다. 카운트다운 스톱워치와 스위처를 차례로 켠 재경은 곧 다가올 두려움을 삼켰다. 탐색을 마친 스위처가 기동하기 시작했다.

책임을 진다. 재경이 존재 의의를 다잡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나중에 보자.”

그래도… 그의 첫 친구가 되어준 류제와는 조금만 더 서로의 마음을 공유했으면 좋았다는 미련이 남았다. 그가 하지 못한 일을 류제가 해내기를 바라면서 그는 스톱워치를 종이 위에 올렸다.

이윽고 해가 지평선에 걸쳐졌을 때, 미래를 바꿀 조그마한 방아쇠가 새벽이 되어 출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