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2. [2월. 영웅은 끝을 향해 내달린다] (2)
초콜릿을 선물해야 하는 부담감에 짓눌려 밸런타인데이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 재경은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누워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러고 있으려니 입학식 전날 두근거려 밤을 새운 기억이 난다. 헌 가방에는 류제와 절반 나눈 초콜릿이 한가득 담겨 다음 날 맞이할 주인을 기다렸다.
고양감을 한껏 끌어안고 히로인 분기점, 밸런타인데이가 밝았다. 이 특별하고도 중요한 날은 매번 있어왔던 나날처럼 화창하고 평화로웠다.
그날 아침은 은근슬쩍 분주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재경도 평소보다 옷차림에 신경 썼다. 직장인의 무기가 정장이듯, 학생의 무기인 교복을 최대한 깔끔하게 입으려고 노력한 그는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답답해 조금만 풀까도 했지만 꿀꺽 참아내고 거울에서 벗어났다.
추가시험 며칠 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기에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일지라도 정규 수업이 잡혀있는 날이다.
그럼에도 일찍 와서 좋아하는 사람 책상에 초콜릿을 두려는 학생만 아니면 출석 체크 시간에 맞춰 느긋하게 등교하는 분위기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기 전, 남은 2학기 일정은 며칠 후에 있을 종업식과 졸업식을 빼면 일주일 정도의 봄방학만 남았다.
집으로 귀환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봄방학은 무슨. 선생님들도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는지 이번 겨울방학엔 숙제가 없다는 것이 마음의 위안이었다.
툭툭툭. 발끝을 땅에 두들겨 신발을 고쳐 신는 건지, 아니면 지루함을 달래는 건지 자기도 몰랐던 재경은 이윽고 옆방 문이 열리자 화색을 띠며 등을 뗐다.
“요, 류제. 안녕.”
퇴원한 후부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따로 등교했었는데 재경이 분기점인 오늘만큼은 용기를 내었다. 가방을 메던 류제가 문을 열다 놀라 주춤거렸다.
“기다렸어? 난 또 느지막이 등교할 줄 알았는데.”
“추가시험도 끝났는데 같이 갈까 해서.”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는 거 아냐?”
“이제 다 나았거든? 무리는 이게 무슨 무리야. 초콜릿은? 설마 안 챙긴 건 아니겠지.”
“챙겼지. 당연히.”
렌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가방을 향한 것을 안 류제가 친히 열어 보여주었다. 부스럭거리는 초콜릿을 보고 안심하는 눈초리가 뻔하다. 초콜릿에 목매서라도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은 거다. 렌의 발버둥에 류제는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런 마음도 잠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가갔던 류제는 김이 샜다. 같이 초콜릿을 만들고 나서부터 거리가 가까워진 착각에 빠진 재경이 등교하는 내내 제 이야기만 떠들어댄 것이다.
2학년에 올라가면 추가시험 따위 절대 치지 않게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든지, 반드시 여자 친구를 사귀겠다든지 영양가 없고 실현 가능성 적은 목표는 당사자가 떠벌려도 싫증만 났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류제도 다시 봐주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말한 거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뚱해진 재경은 눈알을 굴리다가 슬쩍 류제를 찔러보았다.
“류제, 너는 뭘 하고 싶어?”
“뭐가.”
“짜식아,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2학년에 올라가면 뭘 하고 싶냐고.”
2학년에 올라가도 지금까지와 똑같은 훈련을 계속하겠지. 렌을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이다. 그 전에 미노타와의 일도 정리되고 나라카 토벌이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래? 의외네. 넌 성실하니까 제대로 계획했을 것 같은데.”
발뺌하는 실력만 느는 류제는 렌이 곁에서 그만을 좋아해 준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인류의 희망이니, 어빌리티 척도니, 그런 것보다는 가장 사적인 감정이 그를 간질였다. 동시에 절대 이룰 수 없는 희망 고문이다. 그러자 가방에 든 초콜릿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비키를 따라 백장미 부대를 지원하지 않을까 싶어. 아, 그건 3학년 때 이야기려나.”
“2학년이든 3학년이든 아무렴 어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고 있구나. 대견한 짜식.”
“생각하고 있는 건 아냐.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지.”
“그래도 목표가 있잖아.”
허무맹랑한 꿈을 세라를 통해 입 밖으로 꺼내봤던 재경은 미래의 자신이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았다.
주인공 류제는 걱정할 일 없이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반면 확정되지 않은 기류에 마음 편히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게 재경의 형편이다.
“좋겠다.”
혼잣말에 미련과 진심이 범벅으로 묻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남들이 들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좋긴 뭐가 좋아, 라고 빈정거리려던 류제는 드리워진 어두운 장막에 가로막혔다. 당장 얼굴을 봐선 안 될 것 같다. 그는 들었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교실엔 꽤 많은 학생이 등교해 있었다. 항상 오던 곳인데 긴장이 된다. 문턱을 넘은 재경은 마음을 다잡고 속으로 파이팅했다.
류제의 책상에 놓인 수많은 초콜릿들의 존재 여부는 아무래도 좋다. 류제의 임무는 유네에게 초콜릿을 잘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재경의 임무는 나머지 친구들에게 우정이라는 이름의 초콜릿을 전달해 주는 것. 지금껏 개입해 온 이벤트에 비하면 난이도는 간단했다.
“이상. 반장은 아까 손 든 인원과 함께 나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왕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출석 체크에 답했다. 남은 기간 동안 세라 대신 8반을 담당하게 된 7반 담임 선생님이 반장인 비키를 불러 밖으로 사라졌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대서 유네와 몇몇 친구들이 비키를 따라 나갔다. 남은 학생들은 지금부터 자율 학습 시간이었다.
재경이 근질거렸던 궁둥이를 떼기도 전에 여학생들이 류제의 자리에 우르르 몰려왔다. 오늘 류제의 가방에 초콜릿이 보였다는 말이 그 짧은 새에 나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뭐야, 류제. 귀찮다, 귀찮다 하더니 결국 준비한 거야?”
“그럴 줄 알았다니까.”
“튕기기는. 빨리 줘. 다른 반 친구한테 자랑하고 싶단 말이야.”
마침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려던 류제는 고기 냄새를 맡은 개 떼 같은 움직임에 혀를 찼다. 그녀들 때문에 렌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 욕심쟁이들아. 너희는 우리한테 줄 것 없냐?”
그러자 재경이 그녀들에게 투덜거렸다. 류제의 자리에 몰려있던 여학생들은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뭐야, 너한테 달라고 안 했잖아. 참견하지 마.”
“아무도 부탁 안 했어.”
“내가 너한테 초콜릿을 줄 이유가 뭔데?”
대화에 끼려고 내뱉은 말이지만 돌아오는 말은 배타적이었다. 고생 끝에 찾아온 이 좋은 날, 화를 내지 않으려고 참는 재경은 꾹꾹 올라오는 감정을 눌렀다.
“상식적으로 류제 혼자 어떻게 그 많은 초콜릿을 준비하냐? 당연히 내가 도와줬으니까 줄 수 있는 거지. 사사건건 짚어내지 말고 이거나 받아!”
“어쨌건 너한테 말한 건 아니잖아. 잘난 척하니?”
시비 거는 말투가 거슬려 재경의 미간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뭐야? 그래서 받기 싫다는 거냐?”
재경이 가방 안에 있던 초콜릿들을 자랑했다. 말은 저래도 이걸 보여주면 달라고 칭얼거릴 것 같았다. 심술궂게 웃어 보였지만 반응은 그저 그랬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난 류제한테 초콜릿을 받고 싶은 거지 넌 아냐.”
“누구 렌 지미가 주는 초콜릿 원하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그녀들 사이에서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에게나 받아서 좋은 거면 너한테 왜 말 안 했겠니?”
“아무나? 어차피 같이 만든 거거든?”
재경이 가방에서 초콜릿을 쏟아내며 류제의 가방에 들어있는 것과 비교를 했다. 그러나 이미 미나의 세뇌에 마음이 전부 먹혀버린 반 친구들은 미나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였다.
“그럼 류제가 나눠줘. 렌 지미가 만진 초콜릿은 받기 싫어.”
“류제가 나눠준다면 군말 없이 받아줄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재경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이 심정은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준비물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수치심을 심겼던 선생님의 잔혹함. 이 감정을 알고 있는 게 재경은 너무 싫었다.
“렌, 잠깐만!”
재경이 제 분을 참지 못하고 교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럴 때 비키나 유네가 렌의 편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하필이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들을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류제~ 우리 초콜릿 어디 있어?”
“빨리 초콜릿 줘~”
“왜 렌한테 그래? 렌 말대로 둘이서 만든 거고, 양이 많아 나눠서 든 건데. 너무한 거 아냐?”
“그것보다 빨리 초콜릿 줘.”
“줄 거지?”
말이 안 통한다.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네들은 초콜릿에는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류제는 짐작도 못했지만 세뇌당하는 사이 류제를 향한 미나의 집착 어린 감정이 섞인 듯하다.
하이에나처럼 모여드는 여학생들에 짓눌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류제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렌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아른거렸다.
교실에서 뛰쳐나가 끔찍한 기억을 도리질 쳐 지워낸 재경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학교 뒤편 쓰레기장에 쭈그려 앉아 얼굴을 가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오직 교실에서 있었던 수치뿐이다. 그걸 유네나 비키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히로인들이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이 동정했다면 진짜 죽고 싶었을 거다.
“제길, 개 같은 새끼들.”
안 쓰려고 했던 험한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뀌지 않았다.
이제 와서 세상의 억지가 삼류 악역의 자리를 채우는 것일까. 아니면 날 때부터 신재경이라는 존재는 이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재경의 자존심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근데 지금 와서 말해봐도 할머니… 이제 내가 아는 미래도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보다… 그보다 괜찮은 거 맞죠?”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내가 말했지? 이 세상에 영원한 끝은 없다고.”
기댈 사람을 찾으니 사라 하놋의 말이 떠오른다. 해피 엔딩이라고 해서 모두가 항상 행복하게 끝이 나는 건 아니라고 했던 충고가 새삼스레 박혔다.
모든 게 허황된 꿈이었을까. 2학년에 올라간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해낼 수나 있는 걸까. 난 어차피 아무것도 안 되는데. 해가 지나면 중학교의 도돌이표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간신히 여학생들에게서 벗어나 렌을 찾던 류제는 분풀이는 못 하고 속상해서 혀를 찼다. 이러려고 초콜릿을 준비한 게 아닌데 자꾸만 일이 엇나간다.
“어라, 류제 군! 무슨 일이야? 벌써 동아리실 가려고?”
마침 심부름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던 두 히로인들과 마주친 류제가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유네, 비키. 렌 못 봤어?”
“렌? 못 봤는데. 오늘 등교 안 했어? 아닌데. 출석 체크 시간에 제대로 있었지 않아?”
물정이 어두워 류제가 초콜릿을 준비했다는 것을 모르는 순수한 히로인들은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탄식을 내지른 류제는 머리를 헤집으며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낸 비키가 추측을 내뱉었다.
“아까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여 있던데 그것 때문이야?”
“에, 그랬었나? 류제 군, 그랬어?”
교실에서 나가기 전 유네를 기다리다가 류제의 자리로 몰려드는 여학생들을 봤던 것 같다. 무슨 일인가 했지만 심부름이 먼저라 류제에게 맡겼는데 그것밖에 도화선이 될 만한 게 없었다.
“걔네들이 렌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트러블이 좀.”
“결국 터질 게 터진 건가. 하아, 왜들 그러는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비키가 머리를 감쌌다. 겨울방학이 사라진 것이 렌 때문이라는 소문은 오해라고 몇 번을 설명해줘도 듣지를 않으니 속이 터졌다.
귀족 신분이니 반 친구들이 은연중에 거리감을 가진 데다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던 유네는 똑 부러지질 못해 휘둘리기만 해서 상황은 나빠지기만 한다.
“내가 한마디 해주든가 해야지. 뭐 때문에 트러블이 생긴 건데?”
“반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렌하고 같이 초콜릿을 준비했거든. 그걸 나눠주는 문제 때문에.”
“초콜릿? 별일이네. 그런데? 설마 고작 그것 때문이야?”
“여자애들이 렌이 주는 건 받기 싫다고 하는 바람에 렌이 화나서 그대로 나가버렸어.”
“뭐어? 왜… 왜 그런 말을!”
유네가 끔찍하다며 얼굴을 가렸다.
류제는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자니 렌의 치부를 일러바치는 기분이 들어서 썩 내키지 않았다. 반 여학생들이 유치한 심술을 부리는 이유는 관심 없지만 렌을 찾아 제대로 위로해 주고 싶었다.
“초콜릿은 왜 준 거야? 괜한 짓 한 거 아냐?”
“비키 양 말대로 지…지금은 좀 몸을 사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류제는 곧 렌과 준비했던 초콜릿 중 두 히로인의 몫을 깨달았다. 그는 별생각 없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잖아. 너희들 몫도 있어.”
귀찮으니 기왕 만난 김에 전해줄 겸 그녀들 몫의 초콜릿을 찾던 류제는 렌이 부탁하며 넘겨주었던 사심 담긴 초콜릿을 집었다가 머뭇거렸다.
그는 다른 초콜릿에 비해 커다란 하트 모양 초콜릿 대신 평범한 초콜릿으로 바꾸어 꺼냈다.
“자, 이거. 렌이랑 같이 만든 거야.”
“이걸 둘이서 만들었다고?”
“대…대단해. 고생했겠다. 그런데 이걸 친구들은 싫다고…….”
비키와 유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내놈 두 명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포장지를 살폈다.
“밸런타인데이가 오늘이었구나. 어쩐지 며칠 사이 요리 동아리 선배들이 시끄러웠어. 초콜릿 재료가 없어졌다느니.”
“그…그래?”
그 없어진 재료를 훔쳐간 범인이 바로 냥냥이지만. 류제가 슬며시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난 렌을 찾으러 이만 가볼게. 길 막아서 미안.”
“아냐, 우리도 찾으면 연락해 줄게.”
“류제 군, 렌 군한테 꼭 고맙다고 전해줘. 풀 죽지 말라고도.”
렌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직접 초콜릿을 받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초콜릿을 소중하게 든 그녀들 얼굴에 띤 미소를 봤으면 렌도 마음을 풀지 않았을까 류제도 미련이 남았다.
한참을 걷던 그는 가방 안 남은 초콜릿을 보았다. 그가 받은 초콜릿 사이로 유네에게 건네주지 못한 진짜 초콜릿이 있었다.
“나도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부탁받았었는데.
비키가 옆에 있어서 전해주지 못했다는 건 변명이었다. 류제는 이 초콜릿을 유네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렌이 유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유네에게 마음 담긴 초콜릿을 주기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렌 말대로 대신 건네주자니 유네의 마음을 알고 있는 주제에 조롱하는 것 같았다.
“길 한복판에 서서 뭐 하냐? 허수아비냐?”
그의 죄책감을 찌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양반은 못 된다고 돌아보니 그렇게 찾던 렌이 있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가 가방 안에 초콜릿을 쑤셔 숨겼다. 뛰쳐나갔던 렌은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 멀쩡해 보였다. 껄렁껄렁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네 양아치처럼 삐딱하게 선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가있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동아리 가는 거냐?”
“어, 그렇지. 반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초콜릿은?”
“다 나눠줬어. 말만 그렇지 다들 좋아하더라.”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렌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쿨하게 넘어갔다.
“그건?”
“뭐?”
“내가 유네한테 주라고 했던 거.”
“아… 아까 유네랑 만나서 전해줬어.”
“그래?”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답이 허탈했다. 류제는 가방의 덮개를 꾹 잡아 눌렀다. 제발 이대로 넘어가 주기를. 렌의 손이 들리며 어딘가로 향하는 일 초가 일 분처럼 느껴졌다.
“난 기숙사에서 잠이나 잘래. 쌤들이 물으면 약 먹으러 갔다고 해줘.”
재경이 휘적휘적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이대로 학교를 땡땡이치려는 것이다.
류제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왜 감당하지도 못할 거짓말을 한 걸까. 작게 ‘잘 가.’라고 중얼거린 류제가 뒤를 돌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지친 그가 도리질을 쳐 처량한 뒷모습을 지웠다. 거짓말했다. 거절해서는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죄책감에 땅만 바라보며 걷노라니 어떤 신발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운 빠지는 얼굴이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조금은 차가운 듯한 미성이 주변을 환기시켰다. 이명 속에서 정신을 차린 류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병문안을 다녀온 이후 토벌을 준비하느라 학교에 오지 않았던 왕녀가 환영처럼 그곳에 있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왕녀 네가 걱정할 것까지는 아니야. 오랜만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부끄럽네.”
누가 걸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그로기에 빠졌던 것인가. 흐트러진 시야가 좁혀진 류제는 왕녀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자 고작해야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전해주는 것일 뿐인데 대단히 심려를 끼쳤구나 반성했다.
“몸이 비틀거려서 아픈가 싶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다시 학교에 나오는 거야?”
“서류 절차 때문에 볼일이 있었다. 토벌과 관련해서 교장 선생님과 면담이 있거든. 가다가 마침 그대를 본 거고.”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반면 왕녀의 나라카 토벌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정계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는 류제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위태롭게 선 그녀가 어디를 향해 섰는지 흐릿했다.
“네가 없는 동안 렌도 무사히 퇴원했어. 알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동요한 게 부끄러워 류제가 말을 돌렸다. 병문안 이후 처음 만났으니 대화의 주제도 어차피 그것으로 연결될 것이기에 일부러 언급했지만 왕녀의 태도는 하등 관심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래.”
이후에 ‘다행이다.’라느니 ‘몸 상태는 괜찮은가.’라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은데 안부 인사는 그걸로 끝이다.
류제는 그녀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자 혹여 렌이 그때 일로 밉보인 게 아닐까 지레 그 부분을 꼬집었다.
“화난 건 아니지? 병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병원? 병원에서 왜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아니, 그때 네가 렌한테 마족에 대해 물었을 때…….”
거기까지 말한 류제는 실수를 인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왕녀가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었다. 지금은 둘밖에 없어서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둘밖에 없을 때라도 언급조차 마땅찮은 듯하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경솔했네. 미안.”
“경솔?”
되묻는 왕녀의 차가운 말투 때문에 의도가 헷갈린다. 비밀을 이야기하는 태도가 아니라서 류제는 속으로 물음표를 그렸다.
류제가 답하지 않으니 니냐롯트는 류제의 의도를 알 재간이 없었다. 경솔한 것이 무엇이었나 짐작 가는 바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왕녀 저하.”
루이나가 근거리 이동 능력으로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니냐롯트와 류제 사이를 절묘하게 가로막은 루이나는 방해꾼에 불과한 그를 벌레를 흘기듯이 노려보았다.
경계심을 지우지 않은 루이나는 왕녀의 귀에 그들끼리의 비밀을 전했다. 소식을 듣는 왕녀는 변화가 미미했다.
“그럼 나는 볼일이 있어 이만.”
“어… 응. 잘 가.”
루이나와 왕녀는 류제를 지나쳐 제 갈 길로 사라졌다.
기다란 채찍 같은 머리를 휘두르는 루이나야 원래 그랬지만 왕녀의 스산한 모습에서 괴리감을 느낀 류제는 그의 심정이 이상해서 그런 것이라며 도리질을 쳤다.
신관으로 향하던 류제는 도서부 동아리실에 들어가려다 지나쳤다. 무엇을 하든 가방 안에 든 무거운 이 초콜릿을 해치워 버리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 초콜릿, 렌을 생각해서라도 유네에게 전해줘야 하겠지. 아까는 유네와 비키가 함께 있어서 주지 못했다고 변명한다면 아직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유네도 비키와 헤어져 그 길로 요리 동아리에 갔을 거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풀어낸 결과 과연 이 실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는 미지수다.
“안냥! 표정이 왜 그러냥?”
“으와악! 깜짝이야!”
천장에 매달려 있던 고양이녀가 바퀴벌레처럼 툭 떨어졌다. 거대한 인영이 등장하자 방심하던 류제가 자지러지게 놀라 주춤거렸다.
“왜 그러냥?”
이 정도 움직임이야 어빌리티 척도가 높은 류제라면 늘 덤덤하게 받아주었고 또 그녀의 일상이었던지라 냥냥이는 왠지 꼴사납게 움직인 류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그의 가방을 발견하고 귀를 쫑긋거렸다.
“초콜릿은 잘 전해줬냥?”
“넌 그런 데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요리 동아리 부장이 날 현상 수배 내려서 아주 곤란하냥. 천장으로 피해 다니고 있었냥.”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만들 재료를 훔친 고양이녀를 요리 동아리 부원들은 아직도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곤란하다 말하는 고양이녀는 하나도 곤란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보다 꼬리를 휘적거리며 류제의 가방을 기웃거렸다.
“렌이 그 하트 초콜릿 누구한테 줬는지는 봤냥? 딱 봐도 고백용일 게 뻔한 초콜릿 말이냥.”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역시 냥냥이도 그렇게 봤던 거구나. 그는 가방 안에 있는 부담스러운 그 초콜릿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왜?”
“궁금하니까 그렇지양. 혹시 유네한테 준 건 아니냥?”
렌의 부탁이 귀에 박혀 울리던 류제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눈치가 빠른 고양이녀가 씨익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야, 렌도 의외로 사나이란 말이냥.”
“왜 유네라고 생각한 거야? 렌과 유네가 친하긴 하지만 고백을 할 정도는 아냐.”
“에이, 모르는 척하지 말냥. 수신제 때 유네가 렌한테 고백한다고 러브레터를 보낸 거잖냥.”
그 고백을 훼방 놓은 장본인이 류제다. 그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심장이 죄책감을 녹여 세차게 박동했다.
“어떻게 알았…….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어? 너 4반이잖아.”
“나도 귀가 밝냥. 저번에 유네네 친구들한테 들은 적이 있냥. 아무래도 고백은 남자가 먼저 하는 게 폼 나긴 하냥.”
멋대로 둘 사이에 낀 고양이녀의 응원에 류제는 심사가 뒤틀렸다. 렌이 유네에게 고백하려고 이 초콜릿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걸 넘겨주는 건 류제의 몫이라 렌의 의도가 미심쩍다.
“그러고 보니 류제, 넌 미나한테도 초콜릿 준 거겠냥?”
“미나? 아니… 미나 건 이따가 동아리 간 김에 전해주려고.”
“우정 초콜릿이냥?”
“말고 또 뭐가 있어. 여기서 미나 이야기는 왜 나와?”
수상쩍은 의심을 받은 냥냥이는 아차 싶어서 눈동자를 돌렸다. 초콜릿 만들기에 눈독을 들인 건 실은 유네가 렌을 좋아하고 미나가 류제를 좋아한다는 걸 어쩌다 알았기 때문이었다.
“데헷이냥. 사랑의 큐피드 냥냥이지 않냥.”
“너…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어?”
“유네가 렌을 좋아한다지 않냥. 이어주려고 그런 거지냥. 마음고생도 하는데 서로 어울리기도 하냥.”
조막만 한 둘이서 손을 잡는 장면은 상상하기 쉬웠다. 전말이 밝혀지자 류제는 수그러들었던 어지러움이 배가 되어 다리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휘감았다.
“렌도 네가 그럴 생각이었던 걸 알고 협력한 거야?”
“냥? 하하하! 그럴 리가 있냥. 뭐 어떠냥. 너도 미나랑 잘되라고 응원하냥!”
그게 무슨 소리야. 류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제부터 나랑 미나가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물론 최근 그가 미나의 조언에 많이 의지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미나를 좋아했더라면 미나의 조언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뭐, 언젠가 추억거리가 되지 않겠냥. 밴드부 친구들이 초콜릿 고맙다고 렌한테 전해달라냥. 만나면 전해줘냥.”
책임감 하나 없이 일을 벌여놓은 그녀는 유쾌하게 사라졌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데 가볍기 그지없다. 상대적으로 그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어쨌든 이 문제의 초콜릿이 어째서 유네에게 향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았기에 유네에게 향하려던 목적이 상실되었다.
그런 것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 초콜릿은 외면하고 싶은 물건이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간신히 옮기던 그는 늪에 가라앉은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언젠가 식물 동아리가 키우던 나라카산 자생 식물이 있던 곳에는 이제 커다란 창문만 남아 바깥을 투영했다.
“머리 아파.”
스트레스성 두통이 치민다. 그가 자리에 잠시 주저앉았다. 심장이 끊임없이 박동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속에 있는 악마가 귓가에 속삭였다. 어렴풋이 낯선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미나. 지금 미나를 만나야만 해. 휘청거린 류제가 다급하게 일어나던 찰나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잡거라.”
“…왜 다시…….”
흐릿하게 맞춰지는 초점에 보이는 건 요정처럼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가진 왕녀였다. 분명 루이나와 사라지는 모습을 봤었는데 눈앞에 다시 나타난 그녀는 조금 숨이 차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시간을 미루었다.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안색이 나빠.”
이런 모습까지 보였다면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손을 잡고 일어난 류제는 뭐든 시련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게 당장 찾던 미나가 아니라 왕녀인 것은 의외였지만 편해질 수 있으면 그 상대는 상관없었다.
“뭘 잘못 먹었나 봐.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대도 참 솔직하지 못하군. 나를 따라 이쪽으로 오거라.”
류제의 손목을 붙잡고 이끈 그녀는 그를 데리고 신관 계단을 올랐다.
얌전히 그녀를 따라간 류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빙글빙글 낯선 곳을 돌아 그 끝에 당도한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따고 나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순간 몰아닥친 이곳은 나라카의 자생 식물 사건 이후 어쩌다 보니 봉인된 신관 옥상이었다.
리모델링할 때 사용했던 자재나 남은 책상들이 한편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곳은 입학 이후 류제도 처음 와보는 장소였다.
“바람이 상쾌한 곳이지. 이런 무질서함이 마음에 들어서 이따금 루이나와 단둘이 차를 마시곤 한다. 수신제 날에도 그랬지.”
“네 비밀 기지에 날 데리고 와도 상관없어?”
“지금 이곳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가 아닌가. 받은 도움이 많으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왕녀의 고민을 들어준 적은 있어도 고민을 왕녀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던 류제는 이 처지가 역전된 순간이 어색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류제는 주변에 있는 아무 의자에 푹 꺼졌다. 마침 사이에 있는 책상을 경계로 니냐롯트도 맞은편에 다소곳이 자리했다.
“그래서 무슨 고민으로 그대라는 사람이 복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은 것이지?”
토할 것처럼 어지러웠던 이유가 고작해야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때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류제는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다 이 망할 저주받은 것 때문이지.”
류제는 저 끔찍한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낡은 책상에 놓인 번듯한 초콜릿으로 향하는 왕녀의 시선이 수치를 자극했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사사롭게 군 거냐며 타박할 것 같았다.
동상이몽으로 마인드맵에 가지가 몇 번이고 뻗어 나가도 류제 신리라는 주제에 연결되지 않은 아기자기한 포장지를 훑은 니냐롯트는 저것이 미지의 것처럼 보였다. 초콜릿으로 인지한 것이 맞는 건지조차 헷갈렸다.
“저건 뭐지?”
“초콜릿이야. 밸런타인데이.”
굳이 입으로 내뱉게 해 확인 사살시키는 왕녀의 심보가 고약하다. 어이가 없을 거란 거 알았다.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류제는 더 이상 고민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흐음.”
짧은 감탄사가 어처구니없는 한탄일지, 머리를 맞대기 위한 이해의 시도일지.
시험당하는 동안 류제는 가시방석에 앉았다. 당장 일국의 미래를 어깨에 지고 마국 토벌에 나서는 왕녀와 마주 앉아 고민하는 게 고작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이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밸런타인데이. 마족으로 인해 피폐해진 인간 사회 속에서 숨겨왔던 사랑을 드러내는 날. 교회가 주도하는 행사지.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
“그날에 준비한 초콜릿이라.”
그녀가 포장지 안 초콜릿의 형태를 상세하게 살폈다.
교내가 시끄러웠던 데다가 오늘 사물함을 확인해 준 루이나의 말로는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더불어 친위대들에게 한 수레에 담아도 모자라지 않을 초콜릿을 받았던 니냐롯트는 버릇처럼 저 초콜릿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염려스러웠다.
그건 류제 신리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하고팠던 꺼냈다.
“그대는 괜찮은 사람이니 고백을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만, 설마하니 거절하고 싶은가?”
“고백받은 게 아니야.”
단단히 잘못 짚었다. 어찌 보면 왕녀의 오해가 타당하게 들렸기에 더 깊어지기 전 류제가 서둘러서 정정했다.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줘야 하는 거야.”
“저것을? 그대가?”
짧게 끊어 물은 왕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류제 신리가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다니. 관대한 니냐롯트도 동요할 만한 일이었다.
“드물군. 그대가 사랑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대상에 호기심이 생기는구나.”
“사…사랑?!”
그녀를 이해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한 설명에서 생긴 착각임을 알았지만 제 발 저렸던 류제는 당황해서 몸을 비틀며 물러나다 넘어질 뻔했다. 왕녀가 너무 덤덤하게 물어봐서 그 반작용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해괴한 몸짓이구나. 내 생각이 틀렸나? 고백을 못 해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만.”
“이 초콜릿의 주인은 내가 아니야. 깜짝 놀랐잖아.”
그가 겁쟁이라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하면서 렌에게 고백을 못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류제는 심장이 다 덜컥거렸다. 왕녀의 농담은 웃어넘기기도 힘들었다.
“그럼 누구의 것이지?”
가장 말하기 싫은 걸 묻는 니냐롯트가 검지 하나로 초콜릿을 툭 쳤다. 류제는 어차피 탄로 날 각오 한 거 시간을 끌어도 별수 없으니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렌. 렌 거야.”
마침내 나온 이름을 곱씹은 류제는 속이 후련했다. 수녀 루나에게 고해성사로 악행을 일러바친 기분이다.
의외의 인물에 니냐롯트가 재확인했다.
“렌? 렌 지미 말인가? 어째서 그의 초콜릿을 그대가 가지고 있지?”
“부탁받았어.”
“렌 지미에게 전해주는 것인가, 아니면 렌 지미가 전해줘야 하는 것인가?”
“렌 대신 전해주는 거야. 상대는 묻지 말아 줘.”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반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렌 지미의 초콜릿을 왜 우등생인 류제 신리가 떠맡을까.
예의 이성 친구를 원하는 몸부림인가. 어리석은 부탁 따위 거절하거나 무시하면 그만일 것을 신중하게 고민하는 게 원래 그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우습군.”
“뭐가!”
한없이 진지한데 비웃는 말투는 용서가 안 된다. 버럭 외쳐도 니냐롯트는 무의미한 초콜릿만 내려다보았다.
“렌 지미의 부탁 때문에 그대가 고민한다는 것이.”
“하…할 수밖에 없잖아. 친하게 지내는데 싫다고 하면 조금…….”
류제가 힐끔거렸다. 왕녀는 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냉담했다. 역시 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만.”
“어떻게?”
“나의 해결 방법을 택함으로써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뭐야, 불길하네. 네가 대신 전해주기라도 하게?”
류제가 어디 한번 해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소 지은 니냐롯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둔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 들었다. 그녀가 잡기에는 시각적으로 사나워 보여 류제가 당황할 때 그녀가 머뭇거림 없이 내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그가 뒤늦게 말렸지만 하트 모양 초콜릿은 정 중앙을 기점으로 짓눌려 조각조각 갈라졌다. 말라버린 대지도 그렇게까지 흉측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물렁하군. 이러면 그대의 고민이 사라지는가?”
“아…아니, 초콜릿이……!”
류제가 황급히 초콜릿을 들어 보았지만 완전히 으깨져서 조각이 떨어졌다. 이러면 유네에게 전해줄 수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녀는 충격에 뜯긴 포장지 사이에서 부서진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무릇 진심을 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그자는 도리를 지키지 않았어. 그 책임을 그대가 질 이유가 뭐가 있나. 안일한 미루기는 철퇴만이 답이다.”
렌을 향한 왕녀의 판단이 너무 모질어서 류제가 절로 뜨끔거렸다.
샛분홍 혀를 내밀어 단맛을 음미한 그녀는 보통 검증되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지만 렌 지미의 초콜릿을 의심 없이 먹고 왜 이런 실수를 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제는 그러는 동안에도 저질러진 일에 미련을 보였다.
“하지만… 그건 렌이…….”
“나 때문에 부서져 버렸다고 둘러대면 되지 않나. 반대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렇긴… 그렇지.”
“맛은 나쁘지 않군.”
뭐 어떤가. 형체를 잃고 왕녀의 입으로 들어가 버린 초콜릿은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어째서 간악한 렌 지미가 초콜릿 안에 몹쓸 것을 넣지 않았을 거라는 출처 불분명한 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맛은 좋았다.
“그대라면 부탁받은 이상 상대가 누구라도 아랑곳없이 전해줬을 것 같다만. 복도에 주저앉다니 상당히 거슬렸나 보구나.”
“상대가 렌이야. 아무래도 책임감이 다르잖아.”
“렌 지미의 상대에게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 주제에 꼭 한 번은 찔러본다. 그가 장난치지 말라고 노려보았다. 도도하게 코끝을 들은 그녀가 당연한 말을 했다.
“그 정도로 그가 소중하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은 명확히 구분해서 거절하는 것이 옳지 않나? 그것이 그대가 가진 미덕이라고 보고 나는 본받았다만.”
류제는 찔끔했다. 그야 수학여행 때 친위대들의 무리한 행동에 짜증이 난 류제가 왕녀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막상 자신이 똑같이 렌에게 휘둘리니 할 말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미련 안 가지면 될 거 아냐.”
“훌륭하군.”
“박살 난 초콜릿은 어쩌지. 들고 갈 수도 없고.”
“그대와 나만의 비밀이니 여기서 먹어치우면 그만이지. 이걸 바로 완전 범죄라고 했던가?”
“말은 쉽지.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머리 아파 죽겠네.”
한숨을 내쉰 류제는 왕녀를 따라 렌이 신경 써서 만든 초콜릿을 날름 집어 먹었다. 이렇게라도 렌이 만든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니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다만 초콜릿이 혀에 닿는 순간 그 손가락에 묻었던 초콜릿이 생각났다.
“커피와 마시면 좋겠구나. 기다려보라.”
단 음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그녀가 어디선가 티 포트틀 꺼내 물을 끓였다. 탁 트인 하늘을 천장으로 둔 그녀의 비밀 기지답다.
셀로니아 가문에서도 엄두 내기 버거운 비싼 다기가 부서진 찬장에서 나왔다. 차가 내려졌다. 고소한 원두 향이 났다.
“커피?”
“각성 효과가 있어서 즐겨 한다. 머리도 상쾌해지는 것 같거든.”
수신제 때는 메이드 카페를 하면서 허가되었지만 커피는 학생에게 추천되는 음료가 아니라서 오랜만에 마셔본다. 분명 저건 수신제 때 단가 맞춘다고 샀던 싸구려 원두가 아닐 거다.
“고마워.”
그녀가 류제를 위한 커피를 내어주자 공손하게 받아 향을 맡았다.
“별말씀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거리는 류제는 왕족에 마땅한 다례에 무지했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왕녀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편안하게 속을 데웠다. 커피는 바스러진 초콜릿과 감미롭게 어울렸다.
“마음이 풀렸나?”
“조금. 후련한 기분이야.”
“다행이구나.”
뜨거운 차를 후루룩거리지 않고 고요하게 머금어 삼킨 그녀는 컵 받침에 가볍게 잔을 내려두었다. 입가심으로 코코아 가루가 묻은 새까만 생초콜릿을 물으니 평범한 초콜릿이 귀한 디저트라도 되는 것 같다.
“학교에 오는 건 오늘만이야?”
나라카 토벌 때문에 학교에 없는 왕녀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였다. 이런 날에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그동안 다양한 심경의 변화를 느낀 듯했다.
“최전선의 기간트리카 부대에게 새로운 기간트리카 배포를 완료할 때까지는 왕실을 오가야 한다. 나라카 토벌 공식 발표도 있을 예정이라 그때까지는 아마 나오지 않을까 싶어.”
“바쁘구나.”
“왕녀니까.”
그 토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묻지 못했다.
아무리 마왕이 죽고 마족이 쇠퇴하고 있다 할지언정 나라카는 미궁 속 마족들의 나라다. 분명 토벌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미노타는?”
“얌전해졌다.”
“만약 미노타가 움직이면… 학생들이 동원된다는 말이 돌던데.”
“국가안보 위협 긴급 상황 대처에 따른 매뉴얼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좋아하지 않는다만 배수진을 친 기분이군.”
“사실인가 보구나.”
왕녀는 답하지 않고 차만 들이켰다. 류제는 자신을 이용하길 원하는 어떤 귀족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 무서워?”
“미지의 것에 두려움으로 맞서는 게 인간이다.”
왕녀의 인간 찬사란 그녀의 신분으로 생겨난 신념일까 아니면 본인의 의지일까. 어떤 것이든 그녀는 강인한 심지를 가졌다.
토벌을 강행한다면 학교에 있다는 마족은 어떻게 하기로 한 것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겠지.
“진실한 최후에 도달했을 때 미련이 없으려면 적어도 내가 하지 않은 것들로 인한 후회가 없어야 한다.”
“후회는 항상 해도 늦지만… 네가 옳았을 땐 그것참 개운할 것 같네.”
진심을 부딪히지 않으면 결론은 언제까지나 나오지 않았다. 그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이 질투의 초콜릿을 박살 낸 왕녀가 하는 말이기에 마음에 와닿았다.
“그럼 마음 잘 추스르기를 바란다.”
“잘 가. 언젠가 또 대화했으면 좋겠다.”
커피를 다 마신 니냐롯트는 살포시 미소 짓고는 옥상을 내려갔다. 책상 위에는 이 장소에 둘이 존재했다는 증거만 단순하게 남았다.
난잡한 곳에 홀로 남은 류제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겨울의 끝이 결국 온다는 고찰로 머리를 식혔다.
렌에게는 초콜릿을 전하지 못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처를 받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 * *
꾸물꾸물하다.
밸런타인데이, 세계의 향방이 갈리는 역사적인 날에 기분을 망칠 대로 망치고 기숙사로 도망친 재경은 사무치는 무력감에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틀어막았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배후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불길함이 사지를 찔렀다. 그래도 지금은 생각을 비우고 싶었다. 약 먹고 잘 수 있어서 차라리 낫다.
이런 기분은 위험했다. 사람을 나락으로 내리찍는 잔인함을 재경은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회피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알고 있으니까 도망치고 싶은 거다.
숨을 참은 그가 틀어막은 감정을 천천히 억눌렀다. 2학년에 올라갈 때까지만 참자. 그러면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난다.
“렌, 안에 있어?”
그날 이후 방에 칩거해 버린 렌이 걱정되어서 류제가 잠긴 기숙사 문을 두들겨 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부재했다. 닫혀버린 마음처럼 묵묵부답이다. 억지로 문을 열어도 렌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르니 시도하기 머뭇거려졌다.
“여기에 아침 둘 테니까 꼭 먹어.”
그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등교를 안 할 셈인가 보다.
선생님들은 추가시험도 끝났고 학교 일정도 없으니 새 학기 시작 전까지 몸이라도 보전하라고 내버려 두라고 했다. 류제는 걱정 때문에 우울함이 전염된 것 같았다.
밸런타인데이 날에 있었던 일도 사과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가로막혀 버려서 어지간히 후회스럽다.
“괜찮아, 류제?”
“뭐가?”
동아리실 안.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청소하는 부원들 속에서 유달리 둔한 류제를 미나가 일깨웠다. 류제는 덤덤한 척했지만 미나는 어쭙잖게 숨기는 마음은 전부 꿰뚫어 보았다.
“뭐긴. 안색이 안 좋아. 렌 오늘도 출석 때 없었지?”
“숨기려고 해도 계속 티가 나네. 미안.”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힘든 기색을 지웠다. 상냥하게 류제를 달랜 그녀는 책을 건네받아 대신 책장에 꽂아주었다.
“우리 사이에 숨길 필요가 뭐 있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때 초콜릿 때문이지? 맛있게 잘 먹었는데 왜들 그럴까 몰라.”
“그건 나도 두 손 두 발 들었어. 알아서 하라고 해.”
“그럼 그것 때문이 아니었구나. 다른 게 거슬리는 거야?”
렌과 관계가 박살 나 끊어지기 전에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미나는 친구들의 허튼 미움이나 렌이 받았을 상처를 이해해 주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상한 자신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류제는 차마 묻지 못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항상 네 편이야. 걱정하지 마.”
수녀 루나가 대신해 줬던 자상한 어머니처럼 류제의 투정을 받아주는 그녀 덕분에 류제는 그나마 마음을 추슬렀다. 미나가 없었더라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그래도 밥은 챙겨 먹는지, 기숙사로 돌아갈 때쯤이면 밖에 두었던 샌드위치가 사라져있었다. 그걸 보고 안타까운 듯이 서성이다 방으로 돌아가는 게 그의 하루의 끝. 그것의 반복.
이후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내내 침대에만 누워있던 재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한 햇볕이 베란다를 통해 침대에 쏘아져 그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멍하니 오늘이 며칠인가 셈을 했다.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대로 숨어있다고 해결되는 건 없는데. 침착해진 재경은 떡 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보아하니 오늘은 추가시험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2학년 반 배정도 곧이고 그 결과라도 듣기 위해서는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재경은 처음 빙의했을 때처럼 마음을 새롭게 바꿔보기로 했다.
등교 시간이 늦은 8시 25분. 기숙사 식당이 닫힐 때까지는 5분 남았다. 류제가 아침을 가져다 두지 않았을까 문을 열어보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치사한 자식. 주려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고작 친구에게 가족에게나 할 과분한 기대를 했던 재경은 늦을세라 주린 배를 붙잡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들 등교한 지 오래라 기숙사는 고요했다.
여느 때보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기숙사를 나온 그가 식당까지 달렸다.
이제부터 해피 엔딩이다. 류제가 유네에게 초콜릿을 줬으니 유네 루트일 것이고, 그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거면 족하다.
아슬아슬하게 아침 식사 식판을 받은 재경은 텅 빈 식당 안 구석진 자리를 찾다가 가판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치 신문은 진작부터 텅 비어있었다.
혼자서 잘해낼 수 있다는 어른스러운 기분으로 아침밥을 흡입하던 재경은 가판에 있는 며칠 전 자 신문에 거슬리는 단어가 대서특필된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나라카… 토벌 부대?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출격……?”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읽어보니 나라카 토벌대 선두 부대가 왕녀의 명으로 나라카로 향했다고 한다. 이어 두 번째 부대가 어제 날짜로 뒤따른다고 되어있다.
나라카 토벌? 유네의 루트에서도 왕녀가 마족 토벌전을 계속했는지는 희미한 정보였다.
게임에서 표시되지 않는 정보에 관해서는 이 세계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이런 선전 또한 아마 그 일종일 거라고 생각한 그는 안일하게 넘겼다.
한적한 등굣길을 따라 학교로 들어오니 복도에는 진작 등교한 학생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려댔다. 며칠 전 일 때문인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아 싫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사건을 치워내고 교실에 들어온 재경은 유네와 비키가 있자 안심했다.
“안녕.”
인사를 듣지 못한 그녀들은 끔찍한 것이라도 본 양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다 두 사람과 같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마저 인사를 무시하니 불길하다. 다들 무슨 일이지. 재경이 서둘러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뭐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어?”
“렌……!”
동요하는 두 사람은 그제야 재경을 인지했다. 유네도 그렇고 비키까지 당황한 모습은 펜던트를 잃어버렸을 때만큼이나 드물었다.
“큰일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어쩌면 좋지?”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무슨 일이냐고? 새벽부터 난리였는데 아직도 모르면 어떻게 해! 신문 안 읽었지? 빨리 이거 봐봐.”
보던 신문의 한 면을 접은 그녀들은 오늘 자 신문 1페이지에 난 기사와 왕녀의 모습이 인쇄된 사진을 지적했다.
“미노타가 결국……!”
아니나 다를까 어제 새벽, 국경을 마주하는 미노타가 대규모 기간트리카 부대를 이끌고 국경선을 돌파해 아가타로 접근 중이라는 특보였다.
그가 무시하는 동안 일상에 침범했던 일들의 단서들이 한 꺼풀 드러났다. 재경이 믿을 수 없다며 도리질을 쳤다.
“잠…잠깐. 미노타가 왜 키아나트리체를 공격해?!”
“모르겠어. 우…우리 엄마는 위험하니까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데 어쩌지?”
“어리석은 미노타. 지금 시국에 전쟁을 감행하다니. 나는… 신분상 후작가 가주(家主)는 반드시 참전해야만 하는데!”
재경은 학교가 이상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미노타의 침공. 유네 루트라면 이런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왕녀의 루트와 비슷했다.
“학생인 우리는 상관없잖아. 군인도 아니고!”
“그게… 당장 나라카 토벌로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건너간 기간트리카 부대가 돌아올 수가 없대. 미노타를 방어하기 위해선 우리도 기간트리카 부대가 있어야 하는데 토벌 때문에 수가 부족하니 제…제립학교 학생들로 충당한다나 봐. 그것 때문에 난리야.”
“뭐? 그게 가능해? 서…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은 뭐라는데!”
“그러니까 그게 문제인 거 아냐!”
머리를 싸맨 비키가 신경질을 냈다.
현 상황이 도래할 것임을 진작부터 알았던 선생님들은 내려진 공문대로 움직였다.
믿음이 가는 세라는 더 이상 학교에 있지 않고, 며칠 후 종업식 날 학교에 찾아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조차 성사되지 않을 것 같다.
순간 복도가 술렁거렸다. 화제의 인물인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왕녀가 친위대를 이끌고 8반 교실로 향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학생들도 서둘러서 교실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술렁거림은 잠잠해졌다.
뒤이어 들어온 류제는 등교한 렌을 봤지만 지금 반겨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1년간 함께했던 8반 학생들에게 하는 특별한 사죄의 발표인지 친위대들은 밖에서 대기했고 니냐롯트와 류제만 교실로 들어왔다.
류제의 얼굴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교탁 앞에 선 모습은 익숙한 전경이라 더 무서웠다.
“그대들의 불안함은 이해하나 내게 집중해 다오.”
니냐롯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생들을 미노타의 총알받이로 내보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인도적인 왕녀는 냉정했다.
“어제 새벽, 미노타가 침공을 감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교실은 고요해졌다. 교실에 쌓인 감정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뒤섞였다. 재경은 설마 하는 심정을 삼켰다. 이건 말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바라지 않는 말이 비수를 꽂았다.
“현 키아나트리체의 기간트리카 부대는 나라카 토벌로 병력이 나뉘었다. 이에 제립학교 학생들 또한 의무를 다하여 실전에 투입될 것이다. 그대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바랐으나 미노타의 움직임을 안일하게 대처한 나의 탓이니 머리 숙여 사과하겠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감히 고개를 숙이는 왕녀에게 향해지는 비판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일순 머리에서 불꽃이 튄 재경은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식당에서 읽었던 신문부터가 잘못되었다. 유네의 루트에서 나라카 토벌은 무슨. 왕녀는 졸업 후를 기약하지 토벌을 강행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 안다. 그럼에도 같은 반 학우들이었던 그대들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곧 교장의 발표가 있을 것이다만 자세한 사실은 그녀를 통해서 듣거라.”
“웃기지 마. 너 미노타가 그런 거라고 알았잖아! 그럴 때 나라카 토벌을 왜 강행했는데? 지금이라도 토벌전에 들어간 병력을 빼!”
“나라카로 향한 기간트리카 부대를 빼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 이리 부탁하는 것이다.”
왕녀가 침착하게 반박했다. 재경은 그녀의 눈빛이 도저히 병문안을 왔을 때 봤던 그때와 같다고 믿기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왕녀는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방법이 왜 없어. 찾으면 분명히 있어. 마왕도 없는 마족 따위 내버려 두면 알아서 없어질 텐데. 토벌전 따위 뒤로 미루면 되는데!”
“장담하지 말라. 그대가 이 나라의 뭘 안다고. 나는 왕녀다. 결정을 내리는 건 바로 나야. 인간들을 위해서 그것이 최선이었거늘. 그대에게 힐난받을 만큼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뭐든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는 절실한 몸부림을 응시하는 니냐롯트의 표정이 날 섰다.
고작 렌 지미에게서 나무람을 들을 정도로 바보 같은 판단이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심사숙고한 결정이 하찮은 것에게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더러웠다.
“렌,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자리에 앉아. 진정하고 왕녀의 말을 먼저 들어줘.”
한번 돌진하면 스스로도 절제하지 못하는 렌의 성격을 아는 류제가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 재경은 이 와중에 사리 분별 못 하고 왕녀의 편을 드는 류제가 어처구니없었다. 그렇게까지 피하고 싶었던 엔딩이 도래해 버린 원인이 다 저 머저리 때문인 것 같았다.
“시끄러워. 넌 닥치고 가만히 있어!”
비난이 쏘아지자 말리려던 입이 별수 없이 다물어졌다. 식식거리는 숨을 채 고르지 못한 재경의 입에서 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틀렸으니까 틀렸다고 하지. 적들의 속셈도 모르는 주제에 왕녀는 무슨 왕녀. 네 결정으로 피해를 입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키아나트리체의 군사력은 그대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식량 조달도 할 수 없는 미노타의 병사들은 시간만 끌면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 인류 연합군이 모일 때까지만이면 된다. 그 틈을 막아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그러는 동안 마족들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것 때문에 토벌을 고민했던 거 아니었냐고!”
트루 엔딩과 패배 엔딩이 갈리는 왕녀 루트에서는 미노타가 쳐들어옴과 동시에 인간계에 숨어있던 마족들이 사천왕들의 지휘를 앞세워 키아나트리체 곳곳을 습격한다. 그것을 버티냐 버티지 못하냐는 히로인들의 호감도에 달려있었다.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는 3을 넘겼지만 왕녀의 호감도는 부족했다. 왕녀의 호감도 실패 징조는 몇 번이고 있어왔으니까. 그 징조가 보였을 때부턴 손을 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왕녀 루트라고 못 박아버리면 곤란함을 넘어 머리가 아팠다.
호감도가 부족한 왕녀 루트는 전쟁 패배 엔딩밖에 없다. 살해당한 마왕이 부활하고 역전의 기회를 잡지 못한 인간들은 마족들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사육당한다.
류제에게도, 다른 히로인에게도, 렌 지미처럼 곁다리로 끼어있는 인간에게도 좋을 게 없는 절망의 끝만 남았다.
“마족을 막을 방도 또한 있다. 우리에겐 인류 연합군이 있어. 그때쯤이면 나라카로 향했던 기간트리카 부대가 돌아올 것이다.”
“아니, 턱도 없어. 여기까지 오면 아무것도 못 해. 제기랄…….”
뭐라도 하고 싶지만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이 답답함을 재경만 실감했다. 왕녀가 나라카 토벌을 강행한다는 낌새를 진작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그대는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두려운가?”
전쟁이 싫다는 그의 말은 패배론자의 궤변처럼 들렸다. 상황이 이렇게 흐른 건 미노타 때문이라 이해한 학생들과 왕녀의 결정에 맞서는 렌 지미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미나는 간악한 미소를 숨겼다.
“두려워? 흥, 개뿔이. 난 죽는 게 싫은 거야. 이 전쟁은 반드시 질 테니까!”
저주와도 같은 말에 반이 어수선해졌다. 류제도, 다른 히로인들도 그 지적이 따끔거렸다.
뒤에서 숨죽이며 말을 듣던 유네는 이전에 그녀의 집에서 말했던 렌의 호언장담과 지금의 모습이 엇갈렸다.
“등 따시고 배부르고 딱 좋은데 속 안 좋아지게 쓸데없는 걱정하긴. 내가 단언해 주지. 전쟁 같은 건 절대 안 일어나. 내가 막을 거거든!”
그때 그는 어떤 싸움이든 피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투쟁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시작도 않은 전쟁을 미리부터 패배로 점지해 놓은 가련한 도망자가 되어버렸다.
“레…렌 군, 제발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속삭임은 재경의 귀에 닿지 않았다. 지금 와서 꼬리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자신만만한 그를 좋아하던 유네는 낙심만 남았다.
그건 비키도 마찬가지였다. 렌 지미는 호소하는 왕녀에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떼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럼에도 재경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개죽음은 사양이야. 전쟁은 결국 이권 다툼이란 걸 너도 알잖아! 미노타가 움직일 줄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지. 넌 그냥 잘못된 선택을 했어!”
“인정할 수 없다. 그 이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움직인다. 대의를 위해 제립학교 학생인 우리들, 왕녀의 신분인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너도 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마족이든 인간이든 어빌리터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그럼 적들이 기간트리카 부대로 스탈라 조약 지역의 국경 부대를 압살한 이 상황에서 비어빌리터를 무장시킨다 한들 얼마큼이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지? 이 자리에서 어빌리터의 책임론을 지껄이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미노타의 기간트리카 부대에 맞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제립학교 학생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동안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을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졸업생인 3학년을 몇 달 빠르게 군에 보낼 뿐이다. 1, 2학년은 지원자를 위주로 부대를 편성하고, 이외에 낮은 척도를 가진 학생이나 희망하지 않는 학생들은 후방 피난민 지원부대에 소속시킬 예정이다. 전방에 나서라 강요하지 않아. 그대가 싫다면 사람들만 도와주어도 돼. 그대의 목숨이 위협당할 일은 없다.”
그가 하는 설득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싫다는 투정일 뿐이었다. 어차피 척도가 낮은 그를 최전선에 내보낼 일도 없겠지만. 삼킨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내가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재경은 자신의 발언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았다. 왕녀를 불문하고 그를 쳐다보는 모든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너… 왜 생각이 바뀐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 없었잖아. 그렇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신중하지 않았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니냐롯트는 병원에서 있었던 상담을 없었던 일로 치부했다. 재경은 왕녀의 루트로 가버린 게 안일한 자신의 탓 같았다. 또 류제의 탓, 무지한 히로인들의 탓인 것 같았다.
분기를 앞두고 병원에서 만난 왕녀는 분명히 나에게 도움을 바랐다. 그걸 외면한 것은 그다. 그때의 기억이 스친 재경은 후회감에 목이 따끔거렸다.
“지금이라도 말할게. 물어봤었지? 학교에… 내부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니까 그만―”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하는구나. 나를 믿고 따라주는 학생들 중에 적이 있다는 비겁한 이간질로 날 설득하지 마라.”
“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정신 좀 차려!”
진작 말해줄 걸 그랬어. 왜 왕녀를 믿지 못했지? 이 루트가 싫었다. 유네 루트로 갈 거라고 눈을 막고 귀를 막았다.
어차피 왕녀 엔딩으로 갈 것도 아니고 왕녀랑은 관련이 없다면서 흔쾌히 도와줬었던 그녀를 나는 내버려둬도 알아서 괜찮아질 거라며 외면해 버렸다.
“정신이라면 진작 차렸다. 나는 제정신이야. 제정신이 아닌 건 그대다. 그대에게 휘둘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나는.”
“제발 멍청이처럼 굴지 마! 넌 네 발로 호랑이굴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라고!”
“렌 지미, 왕녀님께 버릇없이 굴지 말고 당장 앉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던 비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렌을 다그쳤다.
셀로니아 후작가는 왕녀파이다. 그녀도 전쟁은 싫었지만 이미 적들이 쳐들어왔다. 마족을 상대로 연습한 기간트리카로 인간을 상대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왕녀의 편이었다.
“누군들 달가운 줄 알아? 비겁한 말은 그만해. 우리가 정말 패배했으면 좋겠어?”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왜. 뭐야, 비키. 너도 개죽음당하고 싶어?”
“아까부터 말이 너무 심하잖아. 왕녀님께서 바라신 일이 아냐, 이건!”
“비키 님 말이 맞아. 뭐가 잘났다고 우리들의 대표인 양 비난해? 우리는 왕녀님이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사고 같은 거야!”
듣다 못한 학우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왕녀의 변호를 자처했다. 그녀를 막론하고 세뇌당한 모든 사람들이 재경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 너 같다고 착각하지 마. 우리는 너처럼 전쟁이 두렵지 않아. 미노타 그까짓 게 무서운 건 너뿐이겠지.”
“왜들 그래. 죽고 싶어서 미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미노타가 문제가 아니라 마족들까지 쳐들어올 수도 있다니까?”
“무서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너야. 마족이 습격한다 한들 그것들이 미노타만 가만히 내버려 둘 리도 없는데.”
재경은 학생들이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왕녀에게 협조하는 그녀들이 이해가 안 갔다.
죽으라고 등 떠미는 왕녀를 말리는 건 재경 자신인데 왕녀의 편을 드는 건 오늘 돌연 그녀들이 온몸을 희생해 남을 지키고픈 의지라도 피어난 것인가?
문득 재경은 이 순간을 떠올렸다. 그가 렌 지미에 처음 빙의했을 때 이 캐릭터에 강렬하게 가졌던 그 이미지는 바로 이 순간에서부터 도래했다.
왕녀 루트로 갔을 때의 최후의 심판. 친위대들 발에 차이기만 하던 렌 지미 그와 왕녀의 최초의 접촉. 삼류 악당의 전형적인 비겁함을 보여주는 바로 이 장면.
겁쟁이에 자존심만 세고 이기적인 렌 지미가 비난하자 학생들이 힘을 합쳐 왕녀를 북돋아 주는 연출로 왕녀가 옳음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자의 위치.
“그렇게 싸우는 게 무서우면 너는 도망가. 우리는 왕녀님과 함께 맞서 싸울 거야.”
“왕녀님이 이끄는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같은 취급하지 마. 이 야비한 겁쟁이야.”
그는 시선의 과녁이 되었다. 나쁜 건 그였다. 정의롭지 않은 삼류 악당. 재경은 그 시선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일그러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원래 이 세상에서 렌 지미가 받아야 하는 시선일 것이다. 지금에서야 제대로 굴러가는 거친 심판 속 그의 입이 열렸다.
엇나간 기어가 이 순간만큼 맞아 굴러갔다. 이 순간 렌 지미가 했던 말을 재경은 누군가가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으로 지껄였다.
“그럼 사이좋게 손잡고 죽는 건 너희끼리만 해.”
이 앞은 진정한 패배뿐이란 걸 재경만이 알았다. 이 장면이 언젠가 봤던 렌 지미의 추악한 마지막이라는 것도.
두 번 다시 죽기 싫다. 죽는 건 무섭다. 그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 때문에 죽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이 순간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모든 노력이 이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분명히 진다고 경고했어. 인류가 멸망하면 다 너희 탓이야. 좋아. 제발 부탁인데 나는 끼지 마. 눈 뜨고 뒈지는 건 절대 싫어.”
“이제 그만해! 렌 너 지금 도를 지나쳤어!”
안타까워진 류제가 말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은 렌이었다.
“약해빠진 너 없이도 우리들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어. 뭐라도 된 양 자만하기는.”
어리석은 그녀들에게 향했던 재경의 쓴소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책임을 나눠줄 사람도 이제 없다. 이는 비키도, 류제도, 유네도 막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겁쟁이 렌 지미 따위 어빌리터로서 긍지도 없이 도망이나 가버리라지. 우리는 인류의 최후의 검이야. 누구처럼 비겁하지 않거든.”
모든 말이 마음을 난도질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지도 않아. 이렇게 된 건 다 네 탓인데. 안 그래, 렌?”
저들이 자신하는 앞길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건 게임 엔딩이 아니라도 당연했다. 그가 기억하는 등장인물만 하더라도 네네 슈만을 포함한 어빌리터들은 물론이고 왕녀의 아버지인 황제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도 죽었다. 무고한 시민들도 사라지겠지.
함께해 왔던 주인공과 히로인들은 계획에서 놀아나 마족이 되어버린다.
인간이었던 그때를 모두 잊고 세상을 잔인하게 지워나갈 것이다.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 대신 마족처럼 인간을 증오하겠지.
그것만큼은 막고 싶은데 감정에 호소하는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설득은 저항조차 허무했다.
“아니야. 정말이야. 다 적들의 계략이라고. 이건 마족들의―”
문득 재경은 그를 보는 눈빛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느꼈다. 친구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 왕녀가 저런 판단을 내려버린 원인.
짐작 가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스토리 최후반부,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한 무리가 학교 한가운데에… 아니, 이 교실 한가운데에 음흉함을 도사리며 존재하지 않는가.
“너……!”
재경이 미나의 멱살을 잡아챘다.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 저 망할 마족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다. 연약한 모가지를 위협하며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죄 없는 미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왜…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그러지 마.”
“너… 네…네가… 네가……!”
마족을 상대하는 그의 목소리도 떨려왔다. 재경은 목소리를 연기하는 미나의 표정에서 비릿한 비웃음을 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렌, 당장 미나한테 떨어져!”
“레…렌 군, 아까부터 이상해. 죄 없는 미나 양에게 그러지 마.”
“아무리 화가 난대도 그걸 미나한테 왜 풀어? 내가 널 잘못 봤던 거야?”
류제도, 유네도, 비키도, 믿었던 그들마저 재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가 겹쳐졌다. 혼자였던 그때와 같았다.
아아. 재경은 깨달음을 속으로 삼켰다. 삼류 악당 렌 지미의 마지막에 불과한 이벤트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까지 해내왔던 것들은 진실로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도 고작 세상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키아나트리체에 영광을. 낭자야심(狼子野心)은 그대와 같은 사람을 이르겠지. 신의도 없는 겁쟁이는 내게도 필요 없다. 걱정 말거라. 그대는 죽지 않는다. 우리도 죽지 않아.”
렌 지미와의 언쟁으로 시간이 지체되었다. 니냐롯트는 그렇게 말하며 교실을 떠났다. 친위대들이 뒤를 따랐다. 반 학생들의 얼굴에는 자긍심이 떴다.
안 돼. 정말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녀를 막아야만 한다. 미나의 뜻대로 굴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기다려! 잠깐만! 내 말을 들어봐! 답해줄게. 네 질문에 대해서 답해줄 테니까 멈춰!”
“렌, 가지 마!”
말리는 류제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재경은 뒤를 쫓았지만 왕녀의 끝자락에도 손이 닿지 않게 친위대가 앞길을 막았다.
주저하던 재경은 그녀가 이후 체육관 단상에 서서 하는 연설을 떠올렸다. 그쪽으로 가서 왕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학교에 마족이 있다는 걸 왕녀도 의심했었으니 사실대로 말하면 뭐라도 바뀔 거야.
“렌! 진정해. 마음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달려가는 재경의 팔을 류제가 붙잡아 세웠다. 이렇게까지 반발할 줄 몰랐던지라 당황했던 류제의 눈동자에 재경이 담겼다. 재경은 당연히 류제가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너라도 정신 차려! 머리도 좋은 주제에 가만히만 있지 말고 제발 생각해 봐. 전쟁에 널 끌어들이려는 함정이란 걸 나도 아는데 왜 넌 몰라? 평생 남들한테 휘둘리며 살고 싶어? 그리고 나라카 토벌 이야기를 알았으면 진작 나한테 이야기해 줬어야지!”
하지만 류제도 다른 이들과 똑같았다. 그도 지난 세월 동안 천천히 파괴의 신호에 물들어 있었다.
“모르지. 몇 번이고 찾아갔는데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난 휘둘려도 괜찮아.”
결심이 끝난 류제는 침착했다. 이야기하지 않은 건 렌의 쪽이었다. 몇 번이고 방문을 두드릴 때마다 거절당해야만 했던 그의 심정에 대해선 렌은 관심 없었다.
그럼에도 류제는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좋았다. 걱정 마, 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너를 위해서 위협을 없애겠어.
“렌, 무서운 건 알아. 다들 그러겠지. 하지만 맞서 싸우는 게 필요해. 내게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잘만 했으면 그럴 필요조차 없었어!”
재경은 저 바보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류제는 그가 방으로 도망친 동안 홀로 나아갈 길을 결심한 후였다.
“너는 몰라. 미노타만 막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거 같아? 아냐. 절대 아니니까 말하는 거잖아!”
“렌, 나는 괜찮아.”
“안 괜찮아. 반드시 미노타의 뒤에는 마족이 움직여. 마족들이 왜 움직이는 것 같아? 다 널 노리고 있는 거야. 네가 마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그러니까 더욱 왕녀에게 협조하겠다고 한 거야. 마족이 간섭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 손으로 마족들조차 모두 없앨 거야.”
렌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말이 렌이 예상한 그 어떠한 대답도 아닌 모양이다. 그의 행동은 절대로 렌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렌을 따라잡았다. 뒤꽁무니만 쫓기 바빴던 류제는 이제야 렌을 추월한 착각이 들었다.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너 분명히 유네한테 초콜릿 준 거 맞아? 왜 루트가 꼬였지? 유네 루트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유네 이야기가 왜 나와. 루트라는 건 도대체―”
“대답이나 해!”
물론 유네에게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이야기나 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 이질감이 류제는 싫었다. 또 자신만 아는 무엇인가로 그를 휘두를 셈이다.
“지금 이야기해 줘서 미안해. 유네한테 안 줬어.”
“내가 해달라고 부탁했잖아! 왜 내 말을 무시한 건데?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유네는 널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런 건 실례라고 생각했어.”
“누가 네 생각을 물어봤어?”
히로인들이 삼류 악당인 그에게 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이 세계는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조롱만 한다. 타인의 입에서 듣는 남의 진심은 그에게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왜 이해를 못 하는 거냐고! 다 널 위해서라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
그 말에 애써 화내지 않고 있던 류제의 표정이 굳었다. 모든 말이 류제의 역린을 건드렸다.
“날 위해서라고?”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그의 친구 렌 지미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류제 신리를 위한 적이 없었다. 그가 류제의 마음을 헤아려준 적이 과연 있었던가?
“날 위해서는 무슨. 전부 네 자기만족 때문이겠지.”
렌이 가장 들추고 싶지 않아 했던 부분을 류제는 알았다. 좋아하고, 항상 보고 있었으니까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잠자코 휘두름 당한 거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렌 지미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난 네 말대로만 움직이는 장난감이 아니야. 바라지도 않는데 대신 희생하고, 내 마음 따위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이나 하는데 날 위해서라고? 착각도 유분수지.”
“나… 난……!”
말문이 막혔다. 류제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라고 둘러대도 결국 재경은 죄책감을 덜고 자신의 행복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류제를 위해서라는 말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뭐가 날 위해서야.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해. 네가 멋대로 정하지 마.”
“지금까지 그래도 잘 해왔잖아. 지금 와서 그러지 마. 그럼…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내 말을 좀 들어. 제발 네가 왕녀를 말려줘……!”
“날 먼저 설득해. 왕녀의 말 어디가 잘못된 건데? 미노타가 쳐들어왔고, 인류 연합군이 오기 전까지 능력이 있는 우리가 사람들을 지키는 것뿐이야. 그 이상 방법이 없는데 왜 떼를 써?”
“전쟁은 절대로 용납 못 해. 우리는 질 거야. 희망이 없는 싸움이야, 이건!”
“피하고 싶어도 이제 피할 수 없어. 우리는 지지 않아. 렌. 괜찮아. 너는 안전한 곳에 배속될 거야. 그게 약속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류제는 왕녀와 오늘 새벽 약속을 나누었다. 고민하던 류제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렌은 안전할 것이다.
안전이 중요한 게 아닌 재경은 납득가지 않았다.
“왜? 왜!! 누가 그렇게 해 달래? 왜 멋대로 일을 벌여! 너 때문에 엉망이 됐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제대로 하지 않아서……! 유네에게 초콜릿을 주지 않아서…….”
분에 겨워 소리치는 그가 머리를 쥐어 싸맸다.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논리다. 류제도 덩달아 화가 났다. 이 마음을 모르는 그가 점점 밉게만 보였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초콜릿 따위가 그렇게 중요해? 그래. 말해줄게. 초콜릿은 나랑 왕녀가 먹었어. 왜 그랬냐고? 싫었으니까 그렇지. 네 초콜릿을 유네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어!”
“누가 네 마음더러 뭐라고 했어? 부탁하는 대로만 해줬으면 끝났을 거야. 내가 널더러 유네를 좋아해라 마라 강요한 것도 아니니까 잠자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왜 네 멋대로 행동해서 다 망쳐!”
“내 마음이 왜 안 중요해? 내가 좋아하는 건 다름 아닌 너야. 유네도, 미나도, 누구도 아니라 너라고! 왜 모르는 거야? 너야말로 왜 몰라?! 왜 나한테 네 억지만 강요해!”
정적이 흘렀다. 류제의 미간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엉겁결이긴 해도 용기를 내서 털어놓은 일생일대의 고백이었다. 알아주지도 못할 마음을 렌이 언제까지고 모르쇠 할까. 류제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마음은 해피 엔딩으로 나아가고 싶은 재경에게는 방해물이었다. 성립조차 되지 않는 문장이다. 재경은 이 상황에서 장난을 치는 류제가 어이없어서 얼굴을 구겼다.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한 너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알기나 해?”
귓등으로도 스치지 못한 진심은 힘없이 추락했다. 거절당할까, 조금이나마 알아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대했던 류제는 허탈하게 부정당한 마음속 어딘가에서 뭔가 끊어졌다.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다. 받아들여달라고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을 부정하지는 말았어야지.
너무 좋아해서, 좋아하니까 저런 렌의 모습마저 밉다.
“하.”
그의 깊은숨은 탄식으로 흘러 포기가 되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집착하던 사람이 미움의 덩어리로 보였다. 아무리 진심이 되어 부딪힌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의 마음은 공허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바보 같았다. 새벽에 왕녀의 호출로 최전선에 배속됨을 전해들은 류제는 그녀와 한 가지 협상을 했다. 렌만큼은 안전하게 해달라는 이기적이고 집착 어린 협상. 그러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래서 돌아온 게 고작 이거다.
전달한 마음은 바닥에 떨어져 깨졌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이런 미움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걸 아니까 힘들었다.
“류제―”
“역시 그랬어. 차라리 너랑 친구가 안 됐어야 했는데.”
불안해진 재경이 붙잡으려 들었지만 상처받은 류제는 그 손을 단호하게 밀쳤다. 강한 거부에 밀려 재경이 벽에 부딪혔다. 숨을 못 쉴 만큼 심장이 아팠던 류제는 겁에 질린 렌을 보고 꼴좋다고 생각했다.
“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
류제는 이 이상 밀려날 수 없을 때까지 밀려났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마음이 깎여버린다. 그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등을 돌린 류제는 허탈함을 지우지 못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류제……. 잠깐 류제, 그럼 적어도 미나만은―”
재경이 그를 불렀지만 등이 뒤를 도는 일은 없었다. 재경이 벽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고꾸라졌다. 왜 너마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거야.
그렇게 믿었던 친구에게마저 거절당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그 상대에게서 들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세상의 주인공인 류제 신리와 신재경이라는 존재는 역시 만나서는 안 되었다. 류제는 그걸 탓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그때 손을 내밀어 악수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의 머릿속에 나열된 모든 시공간이 뒤죽박죽 얽혀서 X로 그어졌다.
“으…우욱……!”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토기가 밀려왔다. 뿌리친 그 감각이 남아있는 손등을 그가 사정없이 옷자락에 비볐다. 지금의 감각을 매개로 드러나는 그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배 속에서 아침에 먹은 것들이 스스럼없이 올라왔다. 간신히 근처 화장실에 들이닥친 재경은 모든 것을 게워냈다.
“윽…흑…….”
나의 존재 의의. 여기에 온 이유. 결국에는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여긴 그냥 지옥인걸. 자존감이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억눌린 울음소리는 작았다.
류제가 편이 되어줄 거라고 의심치 않았으나 내밀었던 손은 외면당했다.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떠나버린 류제는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걸었다. 꽉 쥔 주먹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왔다. 상대의 표정, 눈동자, 입술.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스쳤다. 미안한다고 말할지언정 뭐가 달라지나. 그의 마음은 이미 내팽개쳐졌는걸.
“류제, 괜찮아?”
걱정이 되어서 찾아와 준 미나가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멱살까지 잡혔던 그녀는 착하게도 그들을 말려주려 나온 모양이다.
류제는 너무 괴로워서, 비참하고 힘들어서 미나에게 기대어 울었다. 렌이 미웠다. 그가 너무 좋아서 미웠다. 이런 마음을 누군가가 구제해 주기를 바랐다.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먼 옛날에도 그랬을 거라는 희미한 기억만이 스쳤다.
“울어도 돼. 류제.”
소리 죽여 울부짖는 류제를 다독이는 미나의 말은 피에로의 미소와 달리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에 호의적이지 않을 세라 밀로니를 제거하고, 학생들을 세뇌하고, 키아나트리체의 귀족들은 마족과 손을 잡았다. 왕녀의 기억에서 마족에 대한 의심과 렌 지미의 신용을 지웠다.
인간들은 자기 발로 멸망의 길로 걸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미나는 그의 지독한 사랑을 한 몸으로 안아 만끽했다. 렌 지미마저 배제되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