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2. [2월. 영웅은 끝을 향해 내달린다] (1) (58/112)

챕터 12. [2월. 영웅은 끝을 향해 내달린다] (1)

활력이 넘치던 학교가 전례 없이 칙칙할지언정 놀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 헤매는 법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무성해도 알 바 아니고, 다음 날 세상이 멸망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기타를 쳐야 속이 풀리는 냥냥이는 일과처럼 시린 손을 비비며 신관 창고를 찾았다.

“후냥… 춥냥!”

진정한 기타리스트로 탈바꿈하기 위해 손끝을 단련하겠다 고집을 부리다가 포기하고 털장갑을 보내달라 편지 보낸 게 엊그제이니 소포가 올 때까지는 손 시림을 견뎌내야 했다.

검열 때문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방법이 없었다.

차가운 철문을 덥석 잡으니 노출된 피부가 얼어붙어 소름이 끼쳤다. 어쩐지 자물쇠가 풀려있는 게 오늘은 그녀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손님이 상대적으로 부지런한 ‘가시’ 어빌리터 소녀인가 싶었던 고양이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그만 놀라 자지러졌다.

“으악! 렌, 거기서 뭐 하는 거냥?”

고양이녀는 어두컴컴한 신관 창고 구석에서 스탠드만 덜렁 켜놓고 중얼중얼 책을 읽는 밴드부 임시 부원을 확인하고 바싹 부풀렸던 꼬리를 잠재웠다.

투쟁이라도 하는 양 어울리지 않은 흰 띠를 둘러매고 부지런히 글을 옮겨 적던 재경은 역광 속 보이는 고양이 귀를 발견하고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뭐야, 너였냐.”

“깜짝이양. 귀신이라도 있는 줄 알았냥.”

공부하는 재경의 모습이 하도 초췌해 보였던지라 신관에 산다는 귀신이 나타난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질 뻔했던 고양이녀가 자라보고 소스라친 가슴을 쓸어내렸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닫은 그녀는 재경이 틀고 있는 낡은 스토브 근처에 주저앉아 따뜻한 공기를 쬐었다. 그녀는 열중하는 재경을 흘기며 줏대 없는 꼬리를 살랑거렸다.

“뭐 하냥. 공부하냥?”

“보면 모르냐. 위기감 장난 아냐. 겁나 큰일이라고. 추가시험 통과 못 하면 2학년에 못 올라가. 난 망했다!”

“에잉, 같이 놀려고 했더니 너도 바보였냥.”

“다른 애들도 있잖아. 걔네랑 놀아.”

“다른 밴드부원들도 다 바보라서 너처럼 공부 중이냥. 덕분에 합주도 못 하고 심심하냥.”

제 일 아니라고 낄낄 웃은 고양이녀는 공부하는 재경을 기묘한 생물체 관찰하듯 구경했다.

수신제 때 공연했던 노래들 합주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지난달 내내 학교에서 안 보이는가 싶더니 언제 돌아왔지 싶다. 고양이 사건도 그렇고 얼굴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녀는 렌이 내심 반가웠다.

냥냥이가 스토브에 손을 녹이며 오늘 연습할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적이 연연하던 중 재경은 그녀가 온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결국 연필을 내던지고 항복을 선언했다.

“으아악, 머리 터질 거 같아. 도저히 못 하겠어! 이걸 어떻게 해?”

“자꾸 사람 놀라게 하지 좀 마냥. 간 떨어지겠냥.”

고양이의 감각을 가져서 다른 사람들보다 배는 예민한 그녀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짓눌렀다. 잘도 이 정도 소리에 놀라면서 기타를 친다.

“왜 혼자서 공부하냥? 바보가 혼자 머리 싸매봤자 바보 아니냥? 네 전담 선생님들은 어디 있냥.”

“시꺼. 시비 걸지 마. 니가 알려줄 것도 아니잖아.”

“그것참 미안한데 나도 아슬아슬하게 보충을 피했냥. 내 수학 평균 점수가 딱 30.5점이냥.”

“헹, 수학은 내가 이겼다. 너 정돈 껌이구만.”

수학만큼은 어떻게든 평균 31점으로 보충을 피한 재경이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딜 보나 도긴개긴이지만 냥냥이는 바보로 유명한 바보에게 수학 평균 점수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럴 리가 없냥! 나는 그냥 바보지만 너는 소문난 바보지 않냥. 네가 나보다 점수가 더 높을 리가 없냥!”

“현실이란 가혹한 법이지. 중간고사 성적이 괜찮아서 평균 1점 차로 아슬아슬 패스했어.”

“뭐냥, 고작 31점이냥. 난 또 뭐라고. 하나도 안 부럽냥. 운이 좋았나 보냥.”

“운도 실력이거든? 그것도 모르냐?”

노력이 폄하당하자 재경이 죄 없는 책상을 내리쳤다. 0.5점이든 뭐든 냥냥이보다 평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다른 과목은 처참할 대로 처참해서 말도 꺼내기가 부끄러워서 문제였지.

“그럼 다른 보충 과목은 뭐냥.”

고양이녀가 그 점을 서슴없이 찔렀다.

“윽,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신경 끄셔.”

“잘하면 다른 부원들하고 겹칠 수도 있잖냥. 바보라도 머리를 맞대면 낫냥. 나도 가끔씩 공부 도와주러 가냥. 매번 놀기만 하지만냥.”

“걔네들은 추가시험 무슨 과목 치는데?”

고양이녀는 ‘가시’ 어빌리터와 ‘마비’ 어빌리터, ‘투시’ 어빌리터가 각기 낙제한 과목들을 말했다. 혹시나 했지만 아쉽게도 세 사람 모두 수학 과목과 재경이 평균 30점을 넘긴 과목을 공부 중이었다.

“참 이상하냥. 기말고사 난이도 높았는데 네가 수학 낙제를 피하다니양. 국사랑 국어처럼 쉬운 과목들은 다 낙제지 않냥. 어려운 과목은 다 통과했으면서 이상한 애냥.”

“그건 중간고사 땐 쪼아대는 사람이 많아서 괜찮았는데 어쩌다 보니 기말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래.”

입학한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다가 절벽처럼 뚝 떨어져 버린 2학기 마지막 시험 성적을 떠올리자니 우울해진다.

재경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학교 공부는 류제가 줄곧 봐줬는데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추가시험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비키한테 국사 과목을 부탁해 취약한 부분을 공부하고 있고, 다른 것들은 실수만 안 하면 추가시험은 통과할 수 있겠는데 이 망할 S_script 시험이 발목을 잡았다.

“흐음… 힘내양. 그거는 정말 말도 못 하게 어려운 과목이냥.”

“잠깐 하나 물어봐도 돼? 넌 보충수업 하나도 안 들으니까 나보다는 잘 알겠지.”

“뭐…뭔데냥?”

재경이 눈이 시뻘게져서는 구겨진 교과서를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의미 모를 코드들이 연습 문제로 나와있는데 S_script 평균이 30 이상인 고양이녀가 보기에도 쥐약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왜 이렇게 되는지 전―혀 모르겠어! 이해가 하나도 안 돼! 납득할 수 있게 설명 좀 해줘.”

“으엑, 뭐라는 거냥. 통째로 외워냥.”

“그걸 어떻게 다 외워?!”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다 하게 되더냥. 참고로 다른 밴드부 애들도 전부 커닝 페이퍼로 통과한 거니 참고해양. 그런 과목을 혼자 힘으로 100점 맞은 애들은 다 이상한 애들이냥.”

그녀가 질색하며 책을 밀쳐냈다. 그녀도 썩 건전한 방법으로 시험에 통과한 게 아니라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것 말고도 최근 그녀와 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어디서 들었던지라 같이 고민하며 공부하려고 해도 혹시 모를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커닝 페이퍼… 들키면 어쩌지.”

믿었던 냥냥이에게서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자 재경이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아 알 수 없는 외계 문장들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진 고양이녀가 쩝 입맛을 다셨다.

“후냐앙. 나도 손이나 풀어볼까냥.”

렌도 공부에 집중하겠다, 어느덧 몸이 다 녹은 고양이녀는 슬슬 동아리실에 온 목적을 달성하고 싶었다.

“근데 나 기타 연습할 건데 공부는 다른 데서 하면 안 되냥?”

“어? 어… 여기가 집중이 잘돼서 좋은데.”

“엑, 그럼 연습은 어디서 해야 하는 거냥.”

“소리 안 낼 수 있잖아. 구석에서 적당히 해.”

재경이 손을 획획 내저으며 쓸모없는 그녀를 파리 쫓듯 쫓아냈다.

연습 시간을 방해받자 냥냥이의 입이 붕어처럼 쭈욱 내밀어졌다. 억울해도 밴드부에서 유일하게 낙제를 면한 똑똑한 그녀가 별수 없이 참았다.

난로를 떠나자 찬 공기가 얼굴에 훅 끼쳤다. 따뜻한 곳에서 연습하고 싶은데 열심히 공부하는 렌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양이녀는 기타 가방을 열고 구석에 앉아 띵까띵까 손을 풀었다.

열중해서 연습하던 고양이녀는 잠시 주객이 전도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여기는 밴드부 동아리실인데 왜 부원인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다시 얼기 시작하는 손가락이 아팠던 그녀가 꾸물꾸물 의자를 끌어 난로 쪽으로 다가왔다.

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던 재경은 옆에서 뚱뚱거리는 미세한 기타 음이 거슬려서 핏대가 하나씩 올랐다.

“시끄러워! 정신 사나워! 저기 가서 해!”

“너 혼자만 난로 차지하고 있냥! 추우니까 그렇냥! 시끄러우면 다른 데로 가면 되잖냥! 여긴 우리 동아리실이냥!”

신관 창고는 임시지만 엄연히 밴드부의 동아리실이고 밴드부 동아리실은 공부랑은 연이 먼 곳이었다. 치사하게 정식 입부도 안 했으면서 동아리실을 독점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고양이녀는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기타 소리가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나가양!”

“…치사한 자식 같으니.”

그 모습이 그녀마저 자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들려 기분이 상한 재경은 반박을 못 하고 고개만 돌렸다.

친구들 때문에 교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보충수업은 뒤늦게 쫓아서 듣는다고 해도 이해가 안 가고, 옆에서 잔소리해 주는 사람도 없다. 그럴 바에는 애초부터 사람이 없는 이곳이 나았다.

“그렇게 빨리 납득해 버리면 재미없냥.”

“하아… 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맨날 공부만 하니까 머리가 이상해져.”

재미있고 즐거운 나날들이 그립다.

먹어야 할 약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산더미 같은 약은 먹으면 졸리기만 한데 매일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아프지 않지만 아픈 사람처럼 취급해서 짜증 난다.

일이 겹쳐서 힘들어 죽겠는데 누구를 막론하고 태도가 이상하기만 하다. 공부는 거대한 벽처럼 앞길을 막았다.

풀이 죽은 재경은 책을 덮어두고 고개를 처박았다. 다 싫다. 빨리 이 고비를 넘어 새롭게 2학년이 시작하기를 바랐다. 그런 렌을 보는 냥냥이의 눈이 샐쭉해졌다.

“추가시험이 언젠데 그러냥? 목요일이었냥?”

“다음 주 금요일.”

아직 한참 멀었구만. 그런 건 벼락치기로 해야지 운이 따르는데.

되지도 않은 지론으로 혀를 내두른 고양이녀가 들고 있던 기타를 만지작거리다가 렌을 슬쩍 흘겼다.

렌 때문에 겨울방학 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겨울방학 특집 밴드 강화 합숙 훈련한다고 열심히 악기 연습 중인 밴드부 일동은 딱히 렌에 악감정이 없었다.

사실 그보단 그녀와 밴드부 일동은 고양이 사건이 있은 후 다시 한번 더 고양이가 된 말썽이 이는 바람에 인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격리되어 있었던 원인이 더 컸다. 덕분에 미나의 세뇌 마법에 영향을 적게 받은 것이다.

그 잠깐 사이 학교 방침이 변한 이유가 궁금하지만 집에 있으면 부모님 잔소리에 시달려야 하니 본가로 귀환하지 못하는 불행이 그녀의 인생에서는 행운이었다. 그러다가도 원흉으로 찍혀버린 친구가 풀 죽은 걸 보자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어휴, 한숨을 내쉰 고양이녀가 재경의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위로했다.

“혼자 처박혀만 있으면 될 일도 안 되냥.”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교실에 있으면 다들 내 탓만 하는데. 아무리 나라도 힘들어.”

울적한 목소리에 습기가 찬 것 같다. 고양이녀는 안 어울리게 센시티브한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간만에 교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야흐로 2월. 수신제에 이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기타랑 연애하기로 한 냥냥이에게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지만 저 풀 죽은 어린양에게는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유네 나르타가 렌을 좋아한다고 했었던가. 미나 플로리아가 류제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었지. 나랑 렌이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불편하고 신세도 졌으니 겸사겸사 두 사람에게 봄바람을 불어넣어 주어야겠다.

“내가 공부는 알려줄 수 없지만 이런 건 알려줄 수 있냥. 힘없고 짜증 나고 그런 거 다 스트레스냥. 스트레스는 풀어야 제맛이냥. 추가시험 끝나면 너도 류제처럼 너네 반 여자애들 초콜릿을 준비해주지 그러냥.”

“초콜릿? 밸런타인데이를 말하는 거야?”

“오, 어째 그런 것도 알고 있냥. 그런 이벤트 좋아하냥?”

“밸런타인데이를 모르는 사람이 더 이상하지.”

빙의 전 현실에서야 재경에게 관심 밖 이야기였지만 여기서 밸런타인데이는 미연시 엔딩 마지막 분기점이라 달린 별의 개수가 달랐다. 류제가 초콜릿을 어떤 히로인에게 선물해서 고백하느냐에 따라 엔딩이 갈린단 말이다.

그걸 무려 1년 동안 바라 마지않던 재경은 이제 곧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가 실감 나지 않았다.

“너네 반 애들이 류제한테 닦달하고 난리더냥. 초콜릿 내냥! 하고. 역시 인기인은 다르냥. 네가 류제를 도와주면 어떠냥.”

“하지만 난……. 몰라. 요즘 반 애들하고 어색해서.”

턱으로 책상을 찌른 재경이 둔한 심해어처럼 이를 딱딱거렸다.

요즘엔 학교 다닐 맛이 없었다.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는데 뒤에서 음험하게 기분 나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누가 했는지 특정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을 걸어봤자 어영부영 자기들끼리 웃으며 떠나기만 한다. 사람 소외감이 들게 하는 방법이 뭔지 속속들이 아는 것 같았다.

아무리 방학 동안 집에 못 돌아갔다고 해도 그렇지 꼰대처럼 꽉 막혀서는 무슨 말을 해도 말이 통할 구멍이 없다니까.

재경은 그것만 생각하면 괴로워서 팔 사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녀들과 친했던 기억이 있으니 빙의 전처럼 밀어내기만 하거나 주먹질로 해결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뭐냥, 싫은 거냥?”

“싫다고는 안 했어.”

“부끄러움 타는 거냥.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줄까냥?”

“엥?”

뜬금없는 제안에 재경이 고개를 돌려 고양이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악의 없이 이전과 똑같았다.

“싫냥?”

“그런 건 아니지만 아마 류제가―”

“설마 류제랑도 싸운 거냥?”

“아냐, 그런 거. 그냥… 좀 서로 바빠서 스케줄이 엇나가서 그렇지.”

“걱정 말아냥. 내가 다 알아서 해주냥. 친구는 이럴 때 써먹는 거 아니겠냥. 그걸로 분위기도 좀 풀어냥.”

재경은 찔끔 안심하고 말았다. 역시 밴드부 짜식들은 머리가 좀 이상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아니었다. 물론 반 친구들이 나쁘다고 말하기도 이상하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댈 수 있어서 편안했다.

“뭘 어떻게 할 건데? 외출도 못 하는데.”

“이게 다 방법이 있냥. 잘 들어봐양.”

저번에 고양이 사건 때 폐를 끼친 것도 있으니 고양이녀가 기타를 내려두고 친히 재경과 머리를 싸맸다.

여기서 렌에게 점수를 더 따놓으면 나중에 보컬이 필요할 때 도와준다고 해줄지도 모르지. 이번 기회에 유네 나르타랑도 잘돼서 나르타 가문에서 밴드부 후원이 나온다면 금상첨화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설계한 냥냥이는 차근차근 재경을 밴드부의 늪에 잠기게 할 계획을 구상했다.

* * *

전부터 그놈의 초콜릿이 뭐라고 같은 반 친구들이 들쑤시는 통에 류제는 마음 한편이 영 성가셨다.

그는 인생에 하등 필요 없는 초콜릿 교환의 날보다는 렌의 추가시험 통과 여부가 더 걱정이다. 그놈의 밸런타인데이가 알짱거리며 생각을 방해하는 기분이었다.

보충 과목이 많아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테니 지금쯤이면 렌이 우물쭈물 다가와 진작 공부를 알려달라고 조르고도 남았을 텐데 어쩐지 지금까지 조용하니 그가 다 좌불안석이었다.

이런 심정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와 공부 잘되냐며 은근슬쩍 떠봐도 렌은 얼버무리며 교실 밖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붙잡고 싶어도 구실이 없었다.

“나도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떠올리면 벽에 이마를 박아 없애고픈 기억이다. 멋대로 상처받아서 거리를 둔 것도 류제 그의 짓거리니 지금 와서 먼저 다가가는 것도 웃기는 짓이다. 변덕과 심술로 렌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마주하기 힘들다.

그래도 렌은 그가 렌에게 휘둘리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류제는 그의 유일하다시피 한 동성 친구였으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하다 그가 먼저 꼬리를 내리고 렌에게 다가가 버리면 기숙사 방을 바꾸면서까지 부린 고집은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유지 중인 거리는 줄어들겠지만 렌과의 사이는 친구의 연속을 반복하게 된다. 그건 싫었다. 참 이기적이다.

최근 키아나트리체에서는 나라카 토벌에 참전할 군인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백장미 부대 포함 포르테 들라크루아뿐만이 아니라 여러 대단한 어빌리터들이 지원했다고 한다.

류제 그도 이전에 없던 척도를 가져 주목받는 인재이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월반으로 졸업하고 최전선의 기간트리카 부대에 편성될 수도 있다고 선생님들이 전해주었다.

가망성 없는 확률이지만 그가 있으면 마족이 얽히고, 마족이 얽히면 렌은 항상 위험해졌다. 지킬 수가 없어진단 말이다.

행여나 지금은 나라카 토벌이 공식 발표되기 전이다. 그렇다는 말은 렌과 관계를 회복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쉬운 사람은 류제이고 고픈 사람이 손해를 본다. 그런 심정에 흔들거리던 차였다.

“이야, 류제가 아니냥. 이거 참 오랜만이냥!”

복잡한 심정을 삼킨 류제가 신관으로 느릿느릿 향하다 4반을 지나치는데 타이밍 좋게 교실 창문이 열렸다.

어미가 둥글둥글한 특이한 말투를 들어보니 확인하지 않아도 사람을 특정할 수 있었다.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 4반의 마스코트, 통칭 냥냥이였다.

“안녕,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왕녀를 비롯한 여섯 명의 지인들이 수인으로 변해버린 고양이 수인화 사건이 있었던 이후 손에 꼽았다.

밴드부 기타리스트였던 냥냥이는 렌과 더 친밀하지 류제와는 대단한 접점이 없었다. 고작해야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는 정도다.

게다가 최근 냥냥이와 렌이 사귄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까지 들어서 류제는 귀엽기만 한 그녀가 달갑지 않았다.

활기찬 냥냥이는 모르쇠 고양이 눈웃음을 지으며 발랄하게 안부를 물었다.

“요즘 바쁘냥? 얼굴 보기가 힘드냥. 인기인도 고생이냥.”

“하하, 바쁠 게 뭐 있어. 다들 학교에서 할 게 없어서 난리인데. 안 그래?”

“난 기타 연습을 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좋기만 하냥. 할 건 찾으면 얼마든지 있냥.”

그녀가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새 사냥이라도 할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눈빛을 보아하니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

그녀가 말을 돌리기만 하자 빨리 동아리실로 가고 싶었던 류제는 목적을 말하도록 잠자코 기다렸다. 지레 찔린 고양이녀가 마침 생각난 척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곧 밸런타인데이더냥! 네 소문 들었냥. 친구들이 엄청 닦달했다더냥? 역시 류제 신리냥!”

어색하게 운을 떼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표정 좀 봐. 조금 알은척을 했더니 히스테리라도 부리는 것처럼 까칠하다. 의심도 많기는. 우연히 말 건 것일 뿐일 수도 있는데 싸늘한 게 무섭다.

“마침 생각나서 물어봤냥.”

쟤도 호르몬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날이라도 찾아온 건가. 참 남자 마음은 여자들만큼 모르겠다니까. 렌이 왜 요즘 류제에게 안 가려고 하는지 알 것도 같다.

“아아… 그거. 왜, 너도 받고 싶어?”

“이양, 이게 인기남의 여유냥. 할 일이라면 그것도 있지 않냥? 아주 자신만만하냥.”

“남들 억지를 내가 왜 들어줘야 하는지 몰라서.”

덕분에 류제는 썩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며칠 전의 기억이 생각났다.

렌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이라든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곧 나라카 토벌을 발표하는 왕녀에 관해 반 분위기가 표표한 와중에도 별 중요하지도 않은 밸런타인데이를 챙기겠다는 의지가 참으로 대단했다.

주말마다 외출을 허가받은 사람은 류제뿐이니 초콜릿을 반 친구들에게 선물하라는 강요를 당했던지라 썩 불쾌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친구들에게서 납득 어려운 요구를 들은 류제는 그렇게 반문했었다.

그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신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짓을 하는지 생각이나 해볼 것이지.

“치사하게. 이런 걸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그게 그렇게 덧나?”

“닳는 것도 아니잖아.”

“미안한데 다른 사람 알아봐. 난 장난으로라도 그런 거 못 해. 너희들의 우스갯소리로 소모되는 것도 사양이야.”

“우스갯소리라니 말 다 했어? 너에겐 우리가 그 정도야?”

반 분위기 전환이라도 해보라고 그더러 재롱을 부리라는 수준 아닌가. 그럴 이유도 모르겠고, 우정으로도 주고 싶은 마음 없었다.

결국 날이 선 채 끝나버린 회상을 끝마친 류제가 기분이 퍽 나빠져 냥냥이에게 쏘아붙였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에또… 냐앙.”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냥냥이는 8반도 아니었고, 류제에게 참견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당황한 고양이녀는 이대로 빙빙 돌려서 말하다가는 절대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 작전을 바꾸어 실실 웃는 웃음을 싹 거두었다.

“너도 까칠하냥. 들리는 소리가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거냥. 사람이 걱정해 주는 것도 불만이냥?”

“그냥 하는 소리겠지. 네가 상관할 정돈 아냐.”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날 리가 없냥. 그냥 하는 소리라니 그런 게 어디 있냥. 기왕 나갈 수 있는 거 사서 나눠주면 좀 좋지 않냥. 비싼 것도 아닌데 빡빡하게 굴기냥.”

“내가 그런 것까지 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참견할 시간 있으면 네 반이나 신경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류제는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냥냥이의 꿍꿍이와 무관하게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것 같다.

잘 설득해서 실타래를 풀어주려고 했던 냥냥이는 목석같은 단호함에 혀를 차며 턱을 괴었다.

“좀 유들유들하면 서로 편안하지 않겠냥. 이전까진 잘 지냈으면서양.”

“볼일 없으면 이제 갈게.”

“잠깐, 잠깐만이냥!”

퉁명스럽게 입을 부풀리던 고양이녀가 류제의 옷소매를 붙잡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사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니 딱 잘라 거절하는 류제를 멈춰 세운 그녀의 꼬리가 불만스럽게 부풀었다.

류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고양이녀는 질질 창문 밖에 끌려갔다. 간신히 발끝으로 창틀에 걸친 고양이녀가 안간힘을 썼다.

“너무하지 않냥! 얼마나 적절하냥. 반 분위기도 풀어주고 좋은 작전이지 않냥!”

“우리 반 분위기를 너네 4반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 반이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신경 쓰냥. 그리고 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네 친구를 신경 쓰는 거냥. 넌 네 친구가 걱정되지도 않냥? 렌 말이냥!”

드디어 류제의 걸음이 멈추었다. 창문에 걸쳐져 한숨을 내쉰 냥냥이가 균형을 잡지 못해 바동거리다가 영차, 복도로 뛰어내렸다.

“렌은 요리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둘이서 같이 만들어보지 그러냥.”

“뭘. 초콜릿을?”

“그렇냥. 녹여서 틀에만 부으면 되는 거 아니냥. 기왕 주는 거 기성품이 아니라 만들어서 선물해 주면 친구들도 정성을 알고 마음을 풀지 않겠냥.”

그녀의 말대로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 서로 안 좋은 감정으로 1학년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립학교에 오기 전에는 친구가 없었던 듯한 렌을 위해서는 냥냥이가 말한 대로 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렌이 요즘 힘들어 보이더냥. 아닌 척해도 너네 반에서 나오는 소문이 얼마나 거슬리겠냥. 너도 친구로서 도움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냥. 그래서 그러는 거냥. 알겠냥? 싫으면 다른 밴드부원들한테 부탁할 거냥.”

안 그래도 둘 사이의 소문이 거슬려 죽겠는데 그녀가 더 렌에게 도움이 되자 찔린 류제가 미간을 움찔거렸다. 같이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준비하면 렌과 다시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어떠냥. 솔깃하냥?”

냥냥이가 다시 건방진 미소를 되찾았다. 한숨을 내쉰 류제는 한 번만 속아주기로 했다. 그가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뭘 하면 되는데?”

“내가 빈 동아리실을 빌려보겠냥. 재료는 요리 동아리한테 공짜로 받을 수 있을 거냥. 거기 부장 선배가 이전번에 사관학교에 있는 남자 친구한테 초콜릿을 보내겠다고 구매했다가 뒤에 0을 하나 더 붙이는 바람에 다 처리 못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냥.”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양이녀가 입을 떠벌렸다. 쏜살같이 터지는 말들을 보아하니 취소란 없는 듯하다.

“마당발이구나, 너.”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다들 좋아하냥. 그것도 내가 부탁해 보겠냥.”

그녀가 와하하 웃으며 잘난 척했다.

가끔씩 너무 동물 취급해서 기분 나쁠 때도 있지만 귀여운 외관을 가지고 있어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류제 그도 앞머리만 잘 다듬으면 훤칠한 외모가 드러나 편할 텐데 저렇게 가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나.

호기심으로 고양이 눈을 빛내던 그녀는 지극히 밴드부적인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 설마 헤드뱅잉용이냥? 멋있을 거 같아. 나도 한번 앞머리를 길러볼까? 자판을 안 보고 속주를 하는 거냥. 크흐, 생각만 해도 쿨한 고양이!

“그럼 나중에 장소랑 시간 알려줄 테니까 그쪽으로 와라냥. 렌한테도 말해놨으니 땡땡이치면 큰일 나냥.”

“속셈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고마워.”

“사람을 너무 의심하지 마냥. 너한테도 좋은 속셈이냥. 그럼 안냥!”

창문을 넘어 교실로 들어간 그녀가 창문을 확 닫았다. 류제는 멀뚱히 닫힌 불투명한 창문 안쪽을 쳐다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뚜벅뚜벅 제 갈 길을 떠났다.

아래로 풀썩 주저앉았던 냥냥이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상큼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떠냥? 말했던 대로 완전 껌이냥.”

“절대 안 올 거 같아. 류제는 귀찮은 거 별로 안 좋아한단 말이야!”

창문 아래서 그 이야기를 모두 훔쳐 듣고 있던 재경이 작게 속삭였다.

게임상에서는 마지막 밸런타인데이 분기가 다가오면 류제가 알아서 초콜릿을 사서 고백할 히로인에게 선물했던 거 같은데, 함께 만들다니 잘해낼 수 있을까 부담스러웠다.

“그게 더 재미있냥.”

“하아… 나도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추가시험이 당장 모레인데 내 팔자가 더 사납다.”

냥냥이의 도움으로 고백 이벤트까지 류제를 감시하는 건 순조롭겠지만 그놈의 추가시험이 문제였다.

여전히 비키가 빌려준 국사 정리 노트를 놓지 못한 재경은 이따 비키가 내줄 국사 시험 문제에서 50점 이상 맞지 못하면 절대로 기숙사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호언장담이 뇌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덕분에 만일 함께 만든 초콜릿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괜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고양이녀의 도움을 받아 삼류 악당에 불과한 그가 주인공 류제와 마지막 분기점 이벤트를 함께할 연결 고리가 생겼다.

그렇지만 같이 초콜릿을 만들기로 한 날은 사슬처럼 발목에 매여있는 추가시험이 끝나는 날과 동일해서 초콜릿이고 뭐고 그 전까지 재경은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든 추가시험을 끝내고 당당하게 류제와 마주하기 위해 재경은 마지막 한 문제를 끙끙 붙잡고 늘어졌다.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을 재경의 처지를 아는 비키와 유네가 공부를 도와주었어도 이놈의 가벼운 머리통이 문제다. 다음 날 원상 복귀되는 뇌 속이 재경도 미스터리였다. 엄마랑 아빠는 똑똑했다고 할머니가 자랑을 하던데 왜 나는 공부랑 연이 없는 걸까 신비로울 지경이다.

결국 추가시험 전날인 어제 밤을 꼴딱 새워서 될 수 있는 대로 머릿속에 암기 부분을 다 욱여넣은 재경은 뇌가 터지기 직전의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갔고, 어떻게든 추가시험을 통과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마지막에 하나 고쳐 쓴 답을 제출했다.

“수고했다.”

시험지가 주저하는 재경의 손을 떠났다. 2학년 진급을 결정지을 추가시험이 끝났다.

“으으… 죽겠다…….”

머리에서 푸쉬시 열이 나는 재경은 결국 자기 혼자만 추가시험 시간을 다 채웠다는 것을 알고 텅 빈 교실과 시험지를 정리 중인 선생님을 흘겼다.

진을 다 뺐지만 최선을 다한 것 같아 만족했다. 결과는 나오지 않았어도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내년엔 절대로 추가시험 따위 치지 않을 거야.”

젠장, 나만 1년에 시험을 여섯 번 치는 것 같아. 재경은 내내 보충수업을 들었던 여름방학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여름방학 때는 곧바로 결과가 나와 차라리 홀가분했는데 이번 추가시험은 선생님들도 다른 일로 바빠서 며칠 후에나 결과가 나온단다. 추가시험 자식, 나랑 간 보는 거야 뭐야.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던 재경은 불만족스러웠다.

“수고했어.”

“…류제!”

교실 밖에서 기다리던 류제가 재경을 반겼다. 추가시험이 끝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는 심정을 숨기느라 진땀을 뺐다. 속으로는 오만가지 걱정과 불안을 품으면서 표정은 무념무상하다.

“오우… 땡큐.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방금 생각나서 와봤어. 아까 냥냥이가 먼저 가달라고 전해달랬어. 이야기… 들었지?”

혹시 고양이녀에게서 그 소꿉놀이 같은 계획을 전해 듣지 못했을까 그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설레발을 친 거라면 혼자서만 앞서 나간 것 같아 부끄럽다. 공부를 봐주지 못했는데 과연 추가시험이 어땠는지 궁금도 하다.

“드…듣기야 들었지. 흥, 사내자식이 초콜릿은 무슨 초콜릿이야. 웃기는 짜식일세.”

재경은 기가 찬다며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다 알고 있었던 주제에 류제에게 살갑게 나대지 못하고 괜히 싫은 척 튕겨야 직성이 풀렸다. 솔직하지 못한 본성이 재경도 답답했다.

“하기 싫으면 굳이 안 해도 돼. 너도 네 일정이 있을 거잖아.”

“뭐? 야, 너는…….”

밸런타인데이 분기용 초콜릿이야 게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사 오면 그만이지만 굳이 함께 초콜릿을 만드는 이유는 반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서라고 냥냥이가 말했다.

렌 지미에 대한 오해를 푸는 목적도 있다고 분명 전해줬는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니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말 한마디가 미워 죽겠다.

“너… 난……!”

류제에게 있어서 렌 지미라는 존재는 그것밖에 안 되는 건가. 반박하자니 자기만 매달리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야 그는 삼류 악당인걸.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달래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뻐겨댔다.

“…별로. 시험도 끝나서 심심했는데 잘됐네!”

“하하, 다행이네. 시험은 어때? 잘 쳤어?”

“어떻게든 끝났어. 어떻게든.”

시험 결과만 생각하면 진이 빠졌다. 공격 한번 다채롭게 들어온다. 그렇게 걱정되었으면 공부라도 봐줄까 이야기라도 꺼내보지 그랬냐.

재경은 이전과 다르게 쌀쌀맞지 않은 류제를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소심하게 궁리했다.

“냥냥이 그 자식은 가끔 억지를 부리거든. 갑자기 이상한 제안을 해서 나도 피해자야.”

“둘이 친한가 보네. 밴드부 때문인가?”

“그렇지 뭐. 그 자식 기타는 진짜 잘 쳐.”

그 결과로 냥냥이를 주제로 속 알맹이 하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도 어째 저번보다 대화가 숨 막히지가 않다. 이제 화가 다 풀린 거냐고 묻고 싶은 재경의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 말로 흔들거리는 선을 넘어 류제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재경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여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학생 부족으로 폐부된 빈 동아리방에 멈춰선 류제는 잠겨있지 않은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다. 정적이 일어서인지 고요한 복도에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손잡이가 괜히 긴장감이 들었다.

“안에 아무도 없지?”

“그런 것 같아.”

어두컴컴한 동아리실 불을 켠 류제는 깨끗하게 치워진 내부를 흘겼다. 작년까지 화학 실험 관련 동아리였다고 들었는데 안에는 삼각 플라스크와 어려운 약품 라벨이 붙은 빈 갈색 병들이 널브러졌다.

화학물질을 빠르게 씻어내기 위해서인지 수도도 달렸고, 가스버너와 실험용 냄비들도 제대로 있었다. 냥냥이가 괜찮은 부실을 구한 듯했다.

“뭐야, 멀쩡하잖아? 난 또 다 찌그러져 가는 곳을 찾은 줄 알았더니만. 빈 동아리실도 많은데 왜 밴드부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 거람.”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가 아닐까?”

“흥, 뭐든 후딱 만들고 후딱 치우자고.”

재경이 묵직한 가방을 벗어두고 아무 의자에 가서 앉았다.

여기까지 왔지만 과연 반 친구들이 좋아할지 의심스럽지만 이제껏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 것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 중학교 시절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래서 냥냥이의 의견에 동참한 건데…….

“냥냥이 그 자식은 언제 오는 거야? 하여튼 자기가 하자고 해놓고 맨날 지각한다니까.”

“곧 오지 않겠어? 요리부에서 뭘 빌려오겠다고 했거든. 기다려보자.”

재경도 바로 옆에서 들어서 안다. 하지만 류제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이 숨 막혀서 그는 고양이녀가 빨리 오기를 속사포처럼 빌었다. 차라리 왕녀는 찾아온 목적이 보이니 참을 수 있는데 류제 저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몰라서 더 답답했다.

“…….”

거봐, 잘 나가나 했더니 또 이런 침묵. 이전에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재경이 꺼내고 싶은 거리들은 많았다. 요즘에 있었던 일. 병원에서 한 고생. 저번에는 왜 왕녀와 함께 병원으로 오게 된 거냐.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은 누구에게 줄 거냐. 유네에게는 관심이 있는 거냐.

이전에는 그런 것들을 물어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말을 꺼낼 때 주저하지 않았다. 친하기도 하거니와 생활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서 류제를 통제하는 것 따위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었다.

류제가 얼마나 그를 배려해 줬었는지 알게 된 재경은 자신의 오만함이 한약처럼 썼다.

“류제, 있잖아. 저―”

“후냐아아앙! 살려줘양!”

오라고 할 때는 안 왔으면서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고양이녀가 후다닥 동아리실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힉힉거리며 숨을 고르는 그녀의 등에는 정의의 도둑처럼 커다란 보따리가 매여있었다.

그녀가 문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아리실을 지나치는 수많은 발소리들이 복도를 메웠다.

“어디야? 분명 저기로 갔는데?!”

“그 망할 도둑고양이 녀석. 감히 우리 비품을 훔쳐가다니. 용서 못 해!”

“반드시 돌려받고 말겠어!”

분한 목소리가 문 뒤에서 스쳐 지나갔다. 경직된 고양이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사람이 전부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소리가 사그라들자 그녀는 그제야 살겠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막 구운 치즈처럼 귀를 늘어뜨렸다.

“끈질기기냥. 죽는 줄 알았냥.”

“도둑고양이라니. 설마 훔친 거야? 재료를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공짜로 받을 수는 있냥. 내가 요리 동아리가 아니라서 그렇냥.”

그녀는 당당하게 도둑질을 자랑했다. 류제와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동시에 헛웃음을 쳤다.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냥냥이는 보따리에 담아왔던 물건들을 책상 위에 풀어놓았다.

“늦어서 미안하냥. 이게 초콜릿이고 이게 설탕이냥. 코코아 가루랑 버터랑 생크림. 데코용 펜도 있냥. 어떠냥, 대단하지 않냥?”

“요리 동아리 부장이 대단하긴 하네.”

“다 좋은데 포장은 어떻게 하게?”

“포장 말이냥?”

아주 순진무구하게 되묻던 고양이녀는 만든 초콜릿을 담을 포장지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쳤다. 요리 동아리에 잠입해서 급하게 훔쳐온다고 포장지는 내버려 두고 재료들만 집어오고 말았다.

“아차, 깜박했냥. 일회용 투명 컵이 대량으로 있는 걸 봤었는데!”

일을 벌인 책임감에 발을 동동 구르던 냥냥이는 포장을 못 하면 선물도 못 하니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았다.

“금방 가지고 올 테니까 먼저 만들고 있어양. 살아서 보자냥!”

다시 문이 닫혔다. 전선으로 뛰어드는 군인처럼 비장하게 나간 냥냥이를 어이없게 쳐다본 두 사람은 그녀가 남겨놓은 물품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초콜릿을 녹여서 굳히면 되는 거 아니었어? 이 재료들은 뭐야?”

“몰라. 냥냥이가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

“참 나, 알아서 하기는 개뿔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일을 벌여만 놓지 제대로 된 대안도 없었던 냥냥이의 허술함에 감탄이 다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재경은 검정 벽돌을 제자리에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 일도 없는데 초콜릿부터 녹이지 뭐. 만들다 보면 돌아오겠지.”

“저렇게 큰 덩어리를 어떻게 녹이게?”

“조각내면 되지 않을까. 쓸 만한 도구를 아까 봤는데.”

재경이 서랍을 열어보며 깨끗한 장비를 들쑤셨다. 멀뚱히 보고 있던 류제는 의욕적인 렌을 보고 냥냥이가 오면 하자고 초 치지 않기로 했다.

“자, 이건 초콜릿을 담을 통이고 이건 뜨거운 물을 받을 냄비.”

“그걸로 저 벽돌을 녹이자고?”

“이걸로 때려 부숴. 할 수 있지?”

재경이 나무 둔기처럼 보이는 동그란 밀대를 류제에게 건넸다. 어디 길거리 깡패 같은 요청은 웃겼지만 확실히 뭔가를 깨부수기에 적절해 보였다.

먼지 쌓인 그릇들을 싱크대에서 깨끗하게 씻은 재경은 류제가 벽돌처럼 두꺼운 다크초콜릿을 부수는 동안 왜 있는지 모르는 버너에 불을 붙여 물을 끓였다.

“낡아서 그런가 불이 잘 안 붙네. 비키가 있으면 편할 텐데.”

“그 녀석은 항상 걸어 다니는 불 취급이구만.”

“입에서 불까지 나오는 레드 드래곤인데 당연하지.”

“그 별명은 들어도 질리지가 않네. 하하하.”

머리 색도 빨간 데다 어빌리티도 불꽃이니 겨울이 되면 난로 취급에, 지금은 가스버너 대용품처럼 떠올리지 않나, 최근엔 입에서 불을 뿜는 능력까지 알게 되었다.

그 부분이 우스워진 둘이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같이 웃으니 재경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꾸물꾸물했던 기분이 한층 상쾌해졌다.

“버터랑 생크림은 어디에 쓰는 거야?”

“난 이런 데에 조예가 없어서. 너는 잘 알지 않아?”

“몰라. 초콜릿 만드는 법을 알 리가 없잖아. 흥, 넣어보지 뭐. 자기가 가져왔으니 실패하면 냥냥이더러 더 훔쳐오라고 할 테다.”

어쩐지 초콜릿 셔틀이 되어버린 냥냥이가 포장 용기를 훔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재채기를 한 것을 모르는 두 사람은 냥냥이를 기다리는 동안 제대로 된 초콜릿을 만들었다.

류제가 잘게 부순 초콜릿을 뜨거운 물로 녹인 재경은 맛을 보고 더럽게 쓰기만 한 끈적한 검정색 액체에 미간을 찌푸렸다. 크레파스 맛이다.

설탕을 부어도 맛은 붕 뜨기만 했다. 고민하던 재경은 생크림과 버터를 녹여서 끓였다. 올라오는 고소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붓는다?”

녹인 초콜릿 그릇에 끓인 생크림을 부으려던 재경이 미심쩍게 확인했다. 하도 비장해서 대단한 실험이라도 하는 것 같아 실소가 터져 나온다.

류제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전에 재경이 부산물들을 집어넣었다. 녹은 크레파스가 조금은 부드러운 갈색이 되었다.

“잘 안 섞이네. 망한 거 같은데?”

두 재료가 제대로 섞일 때까지 휘적거리던 재경은 이상하게도 조합물이 서로 스며들지 않아 애가 탔다. 이대로 실패하기엔 이 시간도, 류제와의 거리감도 아까웠다. 도구가 시원찮으니 섞일 것도 안 섞이는 건가. 지금이라도 다시 걷어내야 하나 싶은데 류제가 팔을 걷어붙였다.

“줘봐. 내가 해줄게.”

류제가 내용물을 마저 휘저었다. 힘이 세서 그런가 재경이 했을 때보다 더 잘 섞였다.

“이 정도면 되는 거지?”

“그래, 좋겠다. 니 똥 굵다. 으, 팔 아파 죽겠네.”

잘나가는 주인공을 질투한 재경은 초콜릿을 담을 네모 틀이 두어 개, 고백용으로 선물하기 좋은 하트 모양 틀을 발견했다.

하트 모양이라. 이것이 운명인가 내심 반갑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 수신제처럼 하트 모양으로 선물을 주면 유네도 더 만족해서 안 될 것도 더 잘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일단 맛이 좋아야겠지. 재료를 모두 섞은 게 정답이었을까 염려되었던 재경은 쓰디쓴 맛이 겁났다.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데 옆에 좋은 대체품이 있지 않나. 재경은 새끼손가락으로 초콜릿을 찍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먹어봐. 맛이 어때?”

“어… 읍……?!”

당황해서 뭐라 답하기 전에 재경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걸 뭐 어쩌지도 못하고 입을 다문 류제는 혀에 맴도는 손가락과 초콜릿 맛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직도 써?”

“맛…있어. 평범해.”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재경이 믿을 수 없다며 류제의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할짝거렸다.

그걸 보자니 역시나 렌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류제는 여실히 깨닫고 만다. 입에 맴도는 초콜릿 향은 무슨 맛인가 미궁 속이다.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도 못한 류제가 공연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음흉한 생각을 뒤로한 그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냥냥이가 가져온 틀을 흩트려놓은 그는 동아리실을 사용하던 부원들이 달고나를 만들어 먹었을 때 쓴 것 같은 종이 포일을 깔아 초콜릿을 부었다.

냥냥이가 돌아오기만을 멍하니 기다리던 재경은 초콜릿이 굳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류제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류제, 넌 누구 초콜릿 선물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뭐?”

두근거렸던 심장 소리에 귀가 먹은 류제가 되물었다.

알다시피 류제는 이런 귀찮은 행사를 사서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받는 것이라면 몰라도 주는 초콜릿은 막냇동생 아세미나 수녀 루나의 등쌀에 못 이겨 준비한 것이 전부다.

작년 이맘때까지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여태껏 이날 누군가에게 고백해서 마음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갑자기 왜?”

변명할 시간을 벌어보는 푸른 눈동자에 정답이 담겼다. 따지자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렇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는 저 대범한 고양이를 류제가 꿰뚫어 살폈다. 의도대로 지레 뜨끔한 재경이 슬쩍 선 안에 올려둔 발을 뺐다.

“그… 네가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해서 의외다 싶었지.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할 줄 알았거든.”

“나도 냥냥이가 제안한 거 아니었으면 별생각 없었어.”

“시시한 짜식. 고백할 사람이라도 찾은 줄 알았는데 뭐야. 그럼 저번에 말해준 이상형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야?”

이상형? 곧 그의 의도를 깨달은 류제는 악의 없는 지껄임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두근거렸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만우절에 말해줬던 의미 없는 특징의 나열을 여전히 기억하는 그는 잔인한 말을 의식 없이 한다. 왜 그런 것만 쓸데없이 잘 기억하는 걸까.

“없어. 그런 사람. 찾을 생각도 안 했고.”

“비관적이기는. 자기가 말해놓고 왜 포기하냐. 있을지도 모르잖아. 좀 적극적으로 나서봐. 얼굴이 다 아깝다. 잘난 짜식이 왜 그렇게 소극적이야?”

“하하, 언젠가는 그러겠지만 지금은 생각 없어.”

조금쯤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류제의 마음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눈치채 줬으면 하는 소망은 허황된 꿈이다.

역시 그런 거겠지. 렌을 좋아하는 감정을 포기하려던 찰나이지만 곁에 있으면 기대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더 실망만 했다.

“너는? 난 렌 네가 냥냥이 말을 들었다는 게 더 신기해.”

“나? 뭐… 괜찮을 거 같으니까 승낙했지. 심심하잖아. 그리고.”

“그래? 난 둘이 무슨 수상한 기류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기대했는데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기는. 있을 리가 없잖아! 놀리는 거지?”

재경이 속으로 분개를 씹었다. 저 녀석은 내 지금 처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지금 누구랑 사귈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 않나.

저번 가짜 고백 건만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 죽겠는데. 고백의 고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더군다나 냥냥이는 아무리 봐도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류제 넌 인기가 훨씬 많은데 왜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냐? 너 좋다는 애들은 많잖아. 선배들도 그렇고.”

외모 훤칠하고 척도 높은 류제는 언제나 제립학교 학생들의 화두였다.

류제는 그 말을 렌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매일같이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 노래를 불렀으면서 막상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껄떡거리지 않잖아. 사랑을 동경만 하지 모르는 거겠지. 결국엔 다 친구의 연장선이다.

“관심… 없으니까.”

“그래도 친한 여자애들 중에서 괜찮은 애들 많은걸. 유네나… 비키나… 넌 왕녀랑도 연이 있잖아. 걔네들한테 붙여도 안 꿀리고. 잘해볼 만도 한데 이해가 안 가네.”

“하하, 내가 그 애들을 왜 좋아해.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소리가 재경은 소음처럼 들렸다.

옅게 묻어두었던 현실이 바람에 쓸려 손쉽게 드러났다. 기어코 질질 끌어 분기점 코앞까지 들어섰어도 류제는 어떤 히로인에게도 마음이 없었다.

유네의 호감도가 5까지 오른 건 유네가 류제를 좋아하는 감정이 가득 찼다는 의미지 류제가 유네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다른 호감도 이벤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는 대부분 재경의 억지로 이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도외시하다 마주한 현실은 의외로 덤덤했다. 왠지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하기야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지.

이걸 어째야 한담. 류제가 유네에게 초콜릿을 주면 유네 루트로 해피 엔딩을 갈 수 있지만 이대로라면 유네에게 초콜릿을 안 줄 것 같은데.

“근데 그건 왜 물어. 그게 중요해?”

“아… 어. 그게…….”

중요하지, 암. 지금 생각해 보면 류제를 끌고 억지로 호감도 이벤트를 성사시킬 게 아니라 진심으로 류제가 유네를 좋아하게 만들어버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사라 하놋이 했던 말이 이제 와 조금씩 이해가 된다. 그러니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입학식 전날로 돌아가면 제대로 할 수 있겠는데.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긴 진짜 게임 세상도 아닌데. 시간을 되돌려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고 싶다니 그거야말로 기만이다.

모르겠다. 그는 이제 플레이어도, 뭣도 아무것도 아닌 엑스트라다. 주인공 류제의 마음을 마음대로 누굴 좋아해라 주물럭거린다는 건 방자함이 하늘을 찔렀다.

“류제… 있지.”

재경이 천천히 운을 뗐다.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고르고 골라도 끝으로 용기가 부족했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얼마나 끔찍하다고 생각할까.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세상을 좀먹는 해충이었다니. 재경은 지금도 이런 자신에게 실망하는 친구를 어르고 달래야 할 말이 추려지지 않았다.

“왜?”

아무리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할지언정 트루 엔딩을 택하지 않은 건 재경 그만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재경은 뱉으려고 했던 말들을 주워담았다. 제대로 된 사과는 해피 엔딩이 결정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추가시험 선택지를 잘못 고른 거 같아서.”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맞았겠지.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 편해.”

기대했더니 또 말을 돌린다. 류제는 실망했다. 렌의 비밀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렌은 뭘 알고, 왕녀에게 뭘 말하려고 했을까. 왜 그에게만 알려주지 않는 걸까.

내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왕녀에게 말하려던 그때의 일을 고백하고 싶었던 걸까? 그거랑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는데? 설마 내가 왕녀를 좋아한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후냐양, 늦어서 미안하냥!”

요리 동아리에서 나머지 물건들도 훔쳐온 고양이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정적 끝에 류제의 입술이 떨어지는 걸 긴장하며 보던 재경이 안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도망치듯 류제를 뒤로했다.

“짜식아, 늦었잖아. 뭐 하다 이제 와?”

“힘들었냥. 이걸로 준비는 끝이냥. 역시 나는 대단하냥.”

“이게 다 뭐야. 참 나, 살신성묘 납셨구만?”

“성묘는 뭐냥. 그런 말 이상하냥.”

정의의 괴도가 되어 노렸던 물품을 훔쳐왔다는 성취감에 고양이녀는 둘 사이에 흐르는 어두운 기류를 읽지 못했다.

재경에게 쫄래쫄래 다가온 그녀는 틀 안에 다 부어져 있는 초콜릿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기대 안 했는데 모양이 벌써부터 그럴싸했다.

“벌써 다 만들었냥? 빠르냥.”

“금방 만들지 뭐. 맛 좀 봐.”

“어디어디. 우와, 생초콜릿을 만들었구냥. 나 이거 좋아하냥.”

고양이녀가 그릇에 남은 초콜릿을 긁어 날름거렸다. 버터와 생크림이 들어가 딱딱하지 않고 진득하게 혀에 녹는 맛이 일품이었다.

“나도 초콜릿 만들고 싶었냥. 데코는 언제 할 거냥.”

“지금 해도 될 거 같은데? 날이 추워서 금방 굳었네.”

“오호옹, 그럼 빨리 하자냥. 나도 초콜릿 만들래양.”

고양이녀가 코코아 파우더와 데코 펜을 들어 팔짝 뛰었다.

초콜릿을 만들면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마음을 담아 꾸밀 때다. 맛있는 부분을 해치울 생각에 냥냥이가 성급하게 코코아 파우더를 뜯었다. 검은 가루가 그녀의 코에 퍽 끼쳤다.

“에츗! 에츄웃!”

“뭐야, 불길하게 재채기는 왜 해. 또 고양이가 되면 다 네 탓인 줄 알아라.”

고양이녀의 재채기 트라우마가 있는 재경이 한 발짝 물러나 병균 취급했다. 코를 훌쩍거린 냥냥이는 재경을 사납게 흘기며 쟁반 위에 파우더를 쏟았다.

“에츗! 이제 조절할 수 있냥. 날 물로 보지 말아양.”

칼을 달궈 파베 초콜릿을 엄지손가락 크기 육면체로 자른 그들은 고양이녀의 아이디어로 코코아 파우더에 굴렸다. 몇 개는 데코 펜으로 그어 모양을 냈다.

재경 혼자만 커다란 하트 모양 초콜릿에 손을 댔다. 고양이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근데 그건 뭐냥? 왜 그것만 크냥?”

“윽… 아무래도 좋잖아, 그런 거.”

“어얼~ 하트냥. 렌, 너 아직 포기 안 한 거냥?”

“뭔데?”

류제가 뭔가 하고 살폈다. 손바닥 크기 정도의 하트 모양 초콜릿이다. 다른 것들보다 크기도 크고 공들인 모습을 보자니 저 초콜릿이 렌에게 있어 특별한 것이 분명했다.

“누구냥~? 설마 유~”

“아…아냐! 진짜로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나한테는 그런 사람 없다고 하지 않았어?”

“없어!”

말과 행동이 다른 수상쩍은 태도는 궁금했지만 추궁해도 그의 입은 지퍼라도 달린 것처럼 다물어졌다.

데코가 끝나고 세 사람은 냥냥이가 가져온 포장지에 초콜릿을 공평하게 나누어 담았다.

재경이 헛짓거리를 해도 고양이녀가 낀 덕분에 류제의 불편한 심기가 희석되어서 초콜릿 만들기는 괜찮게 마무리되었다.

“후우, 이걸로 끝이냥.”

잘 싸인 초콜릿 무리를 보니 처음 만든 것 치고는 모양새가 좋았다. 포장대로 나눠진 초콜릿은 냥냥이가 봤을 때 받는 사람이 좋아할 만큼 훌륭했다.

“힘들었지만 보람차냥.”

“그렇게 뛰어다녔으니 힘들 만도 하지.”

“이거 하나 가지고 가도 되냥? 도와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냥?”

하루 종일 요리 동아리 부원들을 피한답시고 동분서주 고생한 고양이녀가 포장지를 하나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수가 모자라지 않지만 냥냥이와 렌이 그런 사이라는 소문 때문에 류제는 영 탐탁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까 만든 그 초콜릿을 주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하나만이면 되겠냐? 다른 밴드부원들 것도 줄게.”

냥냥이에게 큰 도움을 받은 재경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는 남은 초콜릿들을 밴드부원의 수에 맞게 추려서 냥냥이에게 건넸다.

“그래도 되냥? 나눠 먹으려고 했는데 다행이냥! 렌, 너도 은근 착한 구석이 있냥.”

“착한 구석? 얌마,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함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야, 짜식아.”

다행히도 그 초콜릿의 주인은 고양이녀가 아니었다. 류제는 내심 안도했다.

친구들에게 제대로 전해줄 수 있도록 포장지에 스물한 명의 이름을 전부 적어놓은 그들은 사용한 동아리실 뒷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두툼한 가방을 메고 동아리실 문을 잠그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재밌었냥. 기숙사로 돌아가냥? 나는 연습해야 해서 신관으로 갈 거냥. 나중에 또 보냥!”

“잘 가. 고마웠어.”

“공연할 일 있음 말해. 인심 썼다. 자원봉사로 한 번쯤은 해줄게.”

“너, 그 말 무르기 없기냥! 밴드부원들한테도 다 말해놓을 거양!”

고양이녀가 팔짝 뛰어 고양이처럼 담을 넘어갔다.

약 먹을 시간도 됐겠다, 두 사람도 나란히 기숙사로 돌아갔다. 류제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재경은 A동 기숙사 앞에 이르기 전까지 가방 안에 있는 류제의 고백용 초콜릿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잠깐만, 류제.”

“응?”

헤어질 때 하는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기 전, 재경이 류제를 멈춰 세웠다. 그는 가방을 앞으로 돌려서 자신 몫으로 챙겼던 하트 모양 초콜릿을 꺼냈다.

류제가 무슨 김칫국을 마시기도 전에 그걸 류제에게 건네며 재경이 말을 덧붙였다.

“이거, 내가 줬다고 하지는 말고 유네한테 줘.”

“…왜?”

류제가 막힌 목을 가다듬었다. 부탁할 줄은 몰랐지만 왜 하필이면 유네지?

“직접 주면 되잖아.”

유네는 렌을 좋아한다. 렌이 유네를 위해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준비했다. 렌은 유네의 마음을 아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분기점 고백에 생각이 없는 류제를 살핀 재경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이 만연하기 전, 그는 마지막 이벤트를 위해 적당히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그때,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내가 주자니 좀 괜히 부끄럽고 그렇네.”

“그때?”

“병원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렌이 눈을 떴던 날 유네가 큰 소리로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화해한 거 아니었어? 벌써 정리된 줄 알았는데.”

“퇴원하고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거든. 유네는 신경 안 쓰겠지만 내가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일단 유네가 화를 냈고, 추가시험 공부도 도와줬는데 그때 일을 어영부영 넘어가 버렸다. 재경은 미안했지만 그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부탁이야. 밸런타인데이 날 유네에게 제대로 전해주기만 해.”

“직접 전해주는 게 유네가 더 좋아할 거 같은데. 부끄러울 게 뭐 있어.”

“나중에. 지금은 그냥 네가 주는 걸로 해줘. 응?”

목소리에 힘이 없다. 류제가 히로인에게 고백하도록 강제할 생각은 없었는데. 분명 처음 시작할 때에는 게임처럼 평범하게 고백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약속해 줄 수 있어? 내 일생일대 부탁이야.”

“하하, 일생일대의 부탁도 참 많다. 어지간히 미안했나 보네.”

“그런 것도 있고.”

재경이 말을 줄였다. 이전에 류제한테 사과한 것처럼 유네와 싸웠던 감정을 묻어두고 넘어가면 안 되는 것쯤은 알았다.

겸사겸사 류제가 유네에게 초콜릿을 주면 둘 사이에 좋은 기류가 흘러서 유네 루트로 갈 거라고 재경은 자기만족을 채웠다.

“해줄 거지?”

재경이 재차 초콜릿을 들이밀었다.

이건 보험이다. 류제가 유네에게 초콜릿을 주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형태라도 만들어놓으면 해피 엔딩이 될 것이다. 그럼 그의 역할은 그걸로 끝난다.

왜냐하면 여기는 어떻게든 형태만 이루어지면 아무래도 좋잖아?

“알았어.”

허탈하게 답변한 류제가 초콜릿을 건네받을 때 얼마큼의 박탈감과 미움과 질투에 시달리는지 모르는 채 재경이 안심했다.

전 인류 단위의 대단한 해피 엔딩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자신, 여기 있는 신재경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빨리 이대로 평화롭게 아무 일 없이 2학년에 올라갔으면 좋겠다.

류제의 허망한 시선에서 도망치듯 재경이 기숙사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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