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3) (57/112)

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3)

왕궁으로 돌아온 왕녀는 며칠 후 집결한 대마족 인류 연합 가트 회의에 키아나트리체 대표로서 참석했다. 렌 지미와의 담화로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내려야 할 선택을 마쳤다.

“미노타의 사신께서 자리하셨습니다.”

“알레흐카이잔의 사신께서 자리하셨습니다.”

“텐마이어의 사신께서 자리하셨습니다.”

각국의 사신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키아나트리체 다음으로 강한 국력을 가진 세 나라가 앉고 그다음으로 소국들이 자리했다.

둥근 원탁은 누구에게나 같은 발언권을 주는 것처럼 공평했지만 키아나트리체 대제국의 대표이자 차기 왕위계승자인 왕녀의 자태에는 그 누구도 비견되지 못했다.

“키아나트리체는 각 나라의 대표분들을 환영하오. 이로써 모든 대표가 자리했으니 쉰여섯 번째 가트 회의를 시작하겠소.”

정기적으로 인류의 대표가 모여 마족의 동향을 공유하는 회의. 마왕이 죽고 그 주기가 뜸해졌지만 오늘 드디어 모든 사신이 키아나트리체에 모였다.

“키아나트리체는 작년 고등급 마족의 습격이 잦았다고 하던데. 그에 비해 피해가 적어서 신기하군요. 역시 대국입니다.”

“텐마이어는 보고된 바로는 등급5 이하의 마족들이 날뛰었습니다. 마왕이 살아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수가 현저하게 적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습격 수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확실히 마왕이 죽고 난 후 마족들의 행패가 적어졌다. 일부 의견대로 가만히만 있는다면 마족이 인계에서 자취를 감추기는 시간문제였다.

과연 그럴까? 니냐롯트는 왜인지 이 기간이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마족들의 고의적인 자숙 기간처럼 보였다. 몸을 웅그리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인간의 목을 노리는 더러운 괴물들의 송곳니가 그녀의 목을 간질였다.

“우두머리가 없으니 괴물들도 손을 쓰지 못하는군요.”

“그와 더불어 마족들을 상대할 병기인 기간트리카는 더 발전하고 있지요. 키아나트리체는 새로운 군용 기간트리카를 올해 배포한다고 하던데. Ver.‘데이브레이크’…였나요? 정신계 방어도가 놀랍게 증진했다고 하던데.”

“그에 대해서 긴히 할 말이 있소.”

니냐롯트가 종을 흔들어 발언권을 주장했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대표하는 권한을 임시로 부여받은 키아나트리체의 왕녀는 그 미모나 말투 때문인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모든 사신들이 조용해지고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니냐롯트는 회장을 한번 둘러본 후 천천히 발언했다.

“키아나트리체는 마왕이 죽고 칼을 갈며 키워온 야망이 있소. 이 야망을 들어본 적 있으시오?”

“야망이라니요.”

복수의 야망. 이는 아버지의 바람이었다.

소국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대제국 키아나트리체의 야망은 실로 경계할 만했다. 자원은 어떤 나라나 부족하다. 만일 키아나트리체가 대마족 인류 연합에서 탈퇴하고 소문대로 미노타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승리한 나라의 다음 타깃은 유약한 소국이 된다.

“우리 키아나트리체는 인류에게 완벽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외다. 그를 위한 야망이지. 그를 위한 기간트리카고.”

다른 나라의 대표들이 술렁거렸다.

그녀는 미노타의 대표를 흘겨 반응을 살폈다. 생각을 모르게끔 그들은 묵묵했다.

“키아나트리체는 나라카를 토벌할 것이오.”

그녀는 귀족파의 의견에 일부 동의했다. 기간트리카는 아직 인간을 향해야 하는 병기가 아니었다.

가트 회의에 미노타를 끌어들인 건 그들을 얌전하게 억누르기 위해서다. 대마족 인류 연합이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상황이 어려워도 미노타는 전 인류와 척을 질 수는 없을 터.

이걸로 그들을 속일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좋은데.

“이에 다른 나라들도 협력해 주길 바라오.”

“부…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나라카를 어찌……!”

“‘순간 이동’ 어빌리터는 백 년도 전에 해냈소. 알라마니 기술관이 새로 개발해 낸 군용 기간트리카, 코드네임 ‘데이브레이크’는 나라카의 독기를 견뎌낼 수 있게 설계하였지. 불가능하지 않아.”

“어찌… 그런……. 키아나트리체는 무슨 생각인 겁니까? 불나방 같은 짓입니다! 마족이 어찌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는 적기요. 꼬리를 말고 도망친 마족이 언제 반기를 들고 인류를 억압할지 모르는데 마왕이 죽은 이 기회를 우리는 백여 년간 놓쳐왔소. 나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소이다!”

이제 니냐롯트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보다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 그것이 귀족파의 목적 중 하나겠지. 여기서 실패하면 그녀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키아나트리체는 근시일 내로 기간트리카 부대를 이끌고 나라카로 건너갈 것이오. 이를 어떠한 형태로든 방해한다면 인류 연합에 소속된 나라의 총공세를 받을 준비하시오. 협약에 명시되어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시오. 부디 대마족 인류 연합을 이루는 이 회의가 마지막이 되기를.”

“하오나…….”

“본 텐마이어는 키아나트리체의 야망에 협력하겠소이다.”

“그… 자…잠시 생각할 시간을…….”

그렇게 외치는 니냐롯트의 얼굴에 비장함이 엿보였다. 전무후무한 어빌리티를 가진 차기 지도자의 발언은 비어빌리터들을 충분히 압도했다.

“본 미노타 측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노타는 이미 키아나트리체를 쳐들어갈 준비를 마쳐놓았다. 그들은 다급했다. 마족들은 수도를 습격하고, 구조 요청은 실패하고, 식량은 부족하고, 긴급 구휼 정책은 실패했다.

절망한 미노타의 수뇌부들은 모두 율폰과 미나의 계략에 의해 마족의 손에 떨어졌다. 미노타의 왕궁은 마족들이 인간을 섭취하는 공장으로, 이미 주지육림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세뇌 마법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곧이다.]

구울과 마족의 양식장이 되어버린 미노타 왕좌에 앉은 율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나긴 계획의 종지부가 머지않았다. 마왕이 부활함으로써 마족은 부흥할 것이다. 인간은 마족에게 걸맞은 완벽한 가축이 된다.

[하하하하.]

형체가 없는 율폰의 불꽃이 사라졌다.

마왕을 죽인 로라 하놋으로 인해 핵이 거의 부서진 화마의 군주 율폰은 마가릿의 도움으로 육체를 마왕성에 동결시키고 혼의 상태로 움직여야만 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리 먹어도 만복감이 없고, 온몸이 쇳덩이에 짓눌리는 감각을 백 년 동안 견뎌왔다. 마왕이 돌아오면 이런 생활도 이제 끝이다.

동결되었던 육체에서 눈이 움찔거렸다. 바스러져 가는 입이 열렸다.

“우리들의 마왕이 돌아온다.”

‘옵시그나티오’와 ‘러다이트’를 애지중지 실험하다 율폰의 예언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병마 페스트의 왕이 입을 찢어 웃었다.

때를 깨닫고 잠에서 깨어난 수마 니켈의 왕이 읊조렸다.

“우리들은. 우리 마족들은. 마왕님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모든 계획을 주도했던 마족의 사천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나콜렙시 맙불마임이,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가 두 팔을 벌리며 왕녀의 결정을 환영했다.

“내 승리야, 렌 지미.”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만반의 준비를 마쳐두었지. 너는 돌아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가 누구이고, 어떤 목적을 가졌든 류제 신리는 우리들의 것이야. 인류가 마족의 가축이 되는 모습을 보며 절망하도록 해.

마왕이 백 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상상을 한 미나가 깔깔깔 만족스레 웃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회의를 마치고 왕실 그녀의 방으로 돌아온 니냐롯트가 쓰러져 있었다.

해피 엔딩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어떤 루트로 가도 그녀의 승리가 확실했다.

* * *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공기가 참 좋다. 따사로운 햇빛에 기온이 한풀 꺾여 들숨의 온도는 더없이 상쾌했다.

병문안 오가는 사람도 드문 평일 오전의 병원. 드디어 퇴원 수속을 마친 재경이 건물 유리문을 열었다가 태양 빛이 부셔 눈을 가렸다. 어깨에 멘 짐 가방이 흘러내렸다. 학교로 돌아가기에 오늘같이 좋은 날도 없었다.

“퇴원이다!”

왕녀에게 잘 말해달라며 부탁의 부탁을 거듭하던 병원장에게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재경이 시원하게 외쳤다.

왕녀가 다녀간 후로 병원 사람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담스러워졌으나 환자로서 떠받들어지는 기분은 끝내줘서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밸런타인데이 분기를 넘길 준비를 위해 현실로 돌아가야겠지. 잘 추스른 재경은 돌아가면 유네의 루트 해피 엔딩을 잘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퇴원 축하드려요, 렌 학생. 수고하셨어요.”

“세라 쌤!”

짐도 가벼우니 산책도 할 겸 천천히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재경의 앞으로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웨이브 진 회색 머리에 눈 밑 점이 섹시한 그의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가 재경을 맞이했다.

“쌤, 저 퇴원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물론이죠. 제가 우리 말썽꾸러기를 혼자 보낼 리가 있나요? 학교까지 바래다주러 왔어요.”

주말도 아니고 류제도 나올 수 없으니 근신 중인 세라가 학교를 대신해서 재경을 마중 나온 것이다. 손에는 퇴원 기념 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축하의 꽃송이를 선물하며 상태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에 있어도 돼요. 학교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괜찮아요. 약은 이만큼이나 받았긴 해도. 이걸 다 먹으면 건강이 더 안 좋아질 거 같은 기분이야.”

재경이 가방 안에 가득 담긴 약 봉투를 들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한 줄로 길게 붙은 약 봉투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아침, 점심, 저녁 절대 빼먹으면 안 된다고 담당 의사가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귀에서 피가 나는 줄 알았다. 우리 할머니는 양약이 건강에 젤로 안 좋댔어. 근데 또 진짜 안 먹자니 겁이 난단 말이지.

“‘힐링 팩터’는 렌 학생처럼 성장이 덜 끝난 아이에겐 치명적이랍니다. 번거롭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꾸준히 드세요.”

“그 말도 딱지 생기도록 들었어요, 쌤.”

그가 귀를 긁는 시늉을 하며 투덜거렸다. 세라 쌤은 오늘도 잔소리쟁이네.

재경은 세라가 건네준 꽃향기를 잠깐 맡았다. 벌써 1년을 함께했던 그녀와 나란히 걸으니 학교로 돌아간다는 기분이 물씬 들었다.

보폭에 맞춰 걸어주던 세라는 조금은 큰 듯한 렌을 안쓰럽게 보다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허해졌다. 이제 그녀는 그를 돌봐줄 수 없었다.

“렌 학생, 이야기 들으셨나요? 학교 방침상 학생들은 본가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녀는 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도리라고 북돋았다. 그것 때문에 마중 나온 것이라고 여기게 하기 싫었지만 이걸 말해주는 것 또한 목적에 포함되는 일이라 슬프다.

“아아, 그거요. 듣긴 들었어요. 방학이 없다니 최악이네요. 저야 뭐 병원 신세였지만. 그래도 병원에 있는 게 학교에서 보충수업 듣는 것보단 낫죠.”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겨울방학이 끝나는 2월 초, 밸런타인데이 며칠 전에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생들이 학교에 돌아온다.

본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건 명백한 엇나감이었다. 그가 납치 사건 때 크게 부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세니타리 롯과 얽혔던 사건은 기밀로 봉인되었습니다. 렌 학생도 친구들에게 발언하면 학교에서 큰 페널티를 줄 거예요. 국내외가 잠잠해질 때까지는 가만히 계셔야 해요. 아셨죠? 아마 마족의 일로 포장되어서 공표가 될 겁니다.”

“비밀일 것까지 있어요? 엄청난 경험을 했으니까 자랑하고 싶었는데.”

“렌 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면 음… 어른의 사정이란 걸까요.”

세라의 설명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어도 엔딩 분기 직후 유네의 납치 공작 일로 키아나트리체가 옆 나라와 분위기가 안 좋게 변하는 뒷배경을 재경도 대충 알았다. 그러니 얼타서 우왕좌왕까지는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렌 학생. 지켜주지 못해서요.”

“에이, 쌤이 안 미안해하셔도 돼요. 제가 멋대로 굴다가 다친 건데.”

자랑을 못 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재경은 그것보다는 세라가 더 걱정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그가 처음 눈을 뜨고 나서 봤던 세라와 지금의 세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는 온갖 세간의 풍파에 시달린 건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쌤, 그… 학교 이제 못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때 그것 때문인 건가요?”

“류제 학생이 그렇게 말해주던가요?”

할 수 있다면 가장 나중에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교직 박탈이 렌의 탓이 되어버리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이야기를 아끼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구나. 재경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인 그녀가 침울함을 달랬다.

“그 대가로 당신들을 구할 수 있었으면 충분합니다.”

세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한없이 슬퍼지다가도 보살펴야 하는 학생만 보면 그 슬픔이 책임감과 활력이 된다.

헤어지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만나지 못하겠지. 그녀는 이제 아가타에서 멀리 떨어진 최전선의 기간트리카 부대에 발령될 거니까.

“미안합니다, 렌 학생. 끝까지 있어주지 못해서요. 계속 사과만 하네요.”

“괜찮아요. 선생님은 계속 선생님일 거잖아요.”

그것이 그의 기억 속이든, 아니면 그녀의 의지든. 중의적인 표현이다. 의도하고 말한 걸까. 세라는 순수한 그를 억지로 어른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 같았다.

“렌 학생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교직으로 복귀하기 힘들 거예요. 괜찮겠어요? 저 없어도.”

이렇게 물으면 늘 보여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당빠 괜찮죠! 쌤은 절 뭘로 보는 거예요?’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그는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쌤. 근데 실은 좀 많이 무섭기는 해요.”

“우리 귀여운 말썽꾸러기가 뭐가 그렇게 무서운가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앞뒤 가리지 않는 성질머리를 가진 그에게도 두려움이 깃들다니 그때 그 사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입가에서 남모를 한숨이 흘렀다. 나는 어째서 이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헤쳐나갈 거라고 생각한 거람. 그럴 리가 없는데.

“있잖아요, 쌤.”

“네, 말해보세요.”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뭘 해야 할지 목표가 보이지 않아요.”

그 두려움은 세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똑같이 미래에 관한 두려움이었다.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목표가 보이지 않다니. 아직 어린 학생이니 해야 할 것들은 지천에 널렸는데. 그녀는 자신이 봐왔던 다양한 것들을 떠올렸다.

“1학년 때는 보였던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그게 뭐였죠? 렌 학생이 뚜렷하게 봤던 목표가.”

대답을 주저한 재경은 오랜 시간 고민했다. 터덜터덜 빠르게 들썩이던 걸음이 잦아들었다. 끊이지 않는 고민의 흔적을 계속해서 더듬던 그는 이 복잡하고 모르겠는 감정을 표현할 좋은 단어를 찾아 헤매다가 알쏭달쏭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행복해지는 거?”

“행복…이요?”

세라는 오늘의 날씨 같은 그 단어를 되새겼다.

기간트리카를 배우는 것. 친구와 함께 노는 것. 공부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런 종류의 답을 예상했던 세라는 그보다 더 원천적이고 두리뭉실한 대답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1학년 때는 행복해지는 게 목적이었는데 2학년 때는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가 생각하던 행복을 달성했다는 의미인가. 심하게 다쳐서 힘껏 울부짖었는데 그럼에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아니다, 현실을 알았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에서 눈을 돌린 것일지도 몰랐다.

“렌 학생은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처음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냥… 모르겠어요.”

이제 행복해진다는 갈망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른 현실적인 미래를 찾으려 도피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목표 자체는 뜬구름 잡는 소리지만 행복해지자고 생각해도 목적이 없으면 이루기가 힘든걸. 어째서 포기하려고 하는 거람. 세라는 서운했다.

“그럼 2학년 때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걸로 하죠.”

“근데요, 1학년 때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확실하게 길이 보였던 거 같은데 2학년에 올라가면 잘 안 보일 것 같아요.”

“그건 왜죠?”

“그냥… 모르겠어요.”

막 빙의를 했을 때는 행복이 지천에 깔린 것처럼 느껴졌다. 새 출발이라는 느낌이 좋았다. 아무도 과거의 그를 모르고, 어떠한 과거도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며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부를 한다. 모두가 공평하게 성장하는 평범함. 그 행복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그 일상적 행복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할 때다.

2학년에 올라가면 호감도 이벤트도, 이 세계의 운명이 갈리는 엔딩도 모두 없다. 그때부터는 오롯이 재경 혼자서 생각해서 그를 위한 행복을 추구해야 했다.

그걸 고민하는 게 재경은 무서웠다. 그때부터는 삼류 악당 렌 지미라는 역할 뒤에서 숨어있을 수가 없으니까.

“다른 친구들은… 비키나 유네나… 류제나 왕녀나 다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미래의 일을 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저는 아니잖아요.”

삼류 악당 렌 지미의 미래는 불친절한 게임에선 보여주지 않았고 그의 장래 희망은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다. 만일 해피 엔딩이 된다고 해도 미래에 아무 정보 없이 걸음을 디디는 게 그는 두려웠다.

“렌 학생은 하고 싶은 것 없나요?”

“장래 희망이요?”

“장래 희망처럼 거창한 거 말고 하고 싶은 거면 충분해요. 렌 학생이 지금 떠오르는 바로 그거.”

하고 싶은 것이라. 이전에 누군가에게서 똑같은 질문을 들었던 것 같다. 밴드부 하는 애들한테서 들었던가?

그때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당장 해피 엔딩으로 갈 길도 막막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사람은 변하는구나.

재경은 대답을 찾는 동안 긴 침묵을 유지했다. 길을 걷고, 지하철을 타고, 그녀와 나란히 앉아 학교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다. 수십, 수백 개로 갈리는 선택지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곱씹으며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꿈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다.

“음… 만약에 말인데요.”

“네?”

“하고 싶은 거요.”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마침 학교 경비원에게 신원을 검증받고 무지개 돔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이제 그 주제를 잊어버리고 있던 세라는 처음엔 재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영문을 몰라 그만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뻔했다.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던 세라는 그가 겁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잘 설명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만약에 어빌리터로서 의무라든가 상관없이 그저 하고 싶은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요.”

솔직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데 서툰 재경은 어차피 지금 내뱉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거, 이번만큼은 딱 한 번만 말해보자며 머뭇거리던 입을 용감하게 벌렸다.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실컷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수신제 때 불렀던 것처럼요?”

재경의 귓불이 반사적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과연 꿈이었을까. 어릴 적 어렴풋이 가졌던 좋은 기억. 벅차오르는 충족감과 남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기쁨. 자신만을 위한 칭찬. 여기에 똑똑히 존재한다는 그 기분. 이곳에서만 이루었던 꿈을 그는 더 크게 부풀리고 싶었다.

“할머니, 나 진짜 잘해?”

“어이고, 어이구. 잘하지 그럼. 우리 재경이가 최고지.”

할머니가 노인정에 데리고 가면 앞에서 노래도 하고. 할머니가 좋아하면 그도 좋았다.

그런 노래를 언제부터 남들 앞에서 안 불렀냐면… 그의 노래가 더 이상 남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노래가, 진심이 남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의식한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류제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녀석은 좀 쓸데없이 걱정하고 참견하는 게 있어서.”

약간의 환상을 떠올리던 재경은 그런 모습조차 과분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두루뭉술했던 미래는 감히 상상으로도 재현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미래의 자신이 상상하던 대로 수 있다고 단정 짓는 게 무서웠다.

“잘될지 모르겠어요. 생각한 만큼 안 될까 봐. 터무니없는 소리잖아요. 그래서 그냥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은 렌 학생이 언젠가 저를 위해서 좋은 노래를 불러주시리라 믿어요. 저는 렌 학생의 노래를 정말 좋아하니까요.”

세라는 충분한 가능성을 품은 아이가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었다.

물론 그도 마족이 사라지고 어빌리터로서의 의무가 사라진 현실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 미래에서 노래하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큼 기대되는 것도 없었다.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잘 못하면 어때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걸. 사람은 실패하고, 그 실패로부터 일어서서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선생님도 그랬어요?”

“…네!”

그녀가 상냥하게 답했다.

거짓말쟁이 세라 밀로니. 실패로부터 일어선다고?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은 잘하지. 노래를 부르고 싶니, 뭐니 그런 꿈 따위 이루어지지 않는 거 알잖아. 추악하게 입에 발린 말만 떠벌리기는.

저 아이는 어차피 루시에나 유리에처럼 원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잘난 척하면서 괜한 희망을 불어넣지 마.

그런 자학을 하는 세라에게로 예상외의 말이 들렸다.

“쌤도 울 할머니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네요.”

렌 지미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그의 할머니는 작년 초여름쯤에 돌아가신 걸로 알았다. 원래부터 병세가 나빴는데 결국 버텨내지 못하셨지.

괴롭다는 티를 내는 성격이 아닌 학생이라 할머니에 대한 건 그대로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녀를 추억하고 있었구나. 언제나 그에게선 의외의 면모만 본다.

“할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사람한텐 그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시련만 온대요.”

할머니는 입이 험하지만 이따금 좋은 말을 해주곤 했다. 그 말이 지금 가장 뇌리에 남았다. 힘든 여정이 드디어 종지부가 다가오니 재경은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그 끝에서 볼 후련함을 기대했다. 이 또한 견뎌낼 수 있던 시련인 걸까.

“그러니까 일어설 수 있는 거겠죠. 실패로부터.”

재경이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세라는 그 의미를 똑똑히 들었다. 실패라. 마치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

“견뎌낼 수 있는 시련이 오는 건요, 제 생각에는…….”

견뎌낼 수 없는 시련이 오면 사람은 버티지 못하고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잔인한 문장이지만 세라의 지인들은 그래서 죽었다. 그들에게 닥친 시련은 살아있기에는 버거웠다.

“그걸 견뎌낼 수 있는 건 소중한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죠?”

그런 듣기 좋은 말로 세라가 재경을 달랬다.

A동 기숙사 앞까지 재경을 바래다준 세라는 마지막으로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두꺼운 외투 때문에 체온이 닿지 않았지만 재경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라는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쌤, 멀리 가서도 저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런 말썽꾸러기는 잊고 싶어도 못 잊어요.”

하지만 그도 결국 다른 한 명의 루시에가 되어 잊히겠지. 지키지도 못하는 거짓말만 늘어난다. 그래도 이 아이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지금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그의 진실한 행복을 기원했다.

“렌 학생이 꿈을 이루고 싶다면 제가 렌 학생의 제1호 팬이 되어줄게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할 때 나를 위해서 노래 불러줘요.”

이 또한 지나가리니.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릴지라도 세라는 약속했다.

그가 기숙사 건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세라는 거친 숨을 내쉬고 학교로 향했다. 교무실에 남아있는 짐을 빼고 선생님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8반 학생들과도 인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책임지지 못하다니 반장인 비키에게 부담을 지워서 미안하다.

몇 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야 하는 마음은 공허하고 허탈했다.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녀는 학교를 빙 둘러 추억하며 8반 교실이 보이는 복도를 걸었다.

반 안을 훔쳐보니 아침 일찍 출석 체크를 마친 학생 두어 명만 남아 수다를 떨었다. 어쩐지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이 큰 벽처럼 느껴진 세라는 창문 밖에서만 학생들의 즐거운 한때를 구경하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복도.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이러한 일상이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앞날이 깜깜했다.

노력하면 되돌아올 수 있을 거라 자위하며 세라가 교무실 문을 열었다. 방학인데도 교무실에서 대기하는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려던 세라는 한곳에 모여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들었다.

“그럼 학생들까지 참전하는 거죠?”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죠?”

누가 들을세라 문을 닫은 세라가 물었다.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빠져 세라가 온 줄도 몰랐던 선생님들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놀란 나머지 그들도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세라 선생님……! 짐을 가지러 오신 거죠?”

“그것보다 아까 그 말은 뭐죠? 학생들을 참전시킨다니. 설마 제립학교는 학생들을 전선에 참여시킬 계획인가요?”

“선생님, 쉿! 이건… 그러니까 확정된 사항은 아녜요. 진정하셔요.”

그들도 세라가 무슨 심정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듣는 귀를 차단하는 게 먼저다.

창문이나 문이 제대로 잘 닫혀있는지 확인한 그들은 혹시나 학생들이 어빌리티로 확인하지 못하게 안티 어빌리티 파장을 내보내는 기계를 켰다.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가 떠돌면…….”

“저희도 오늘 전해 들은 거라 파악이 안 됐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선생님들은 허리까지 낮추며 작게 의견을 나누었다. 세라도 그 틈바구니에 끼었다. 키아나트리체 제1왕녀가 나라카 토벌을 이끈다고 들었는데. 참전이라니 도대체 왜?

“오해예요, 밀로니 선생님. 학생들을 참전시키는 건 미노타가 움직임을 표했을 때 한정해서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다고 했어요.”

“저희도 이 공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근신 중인 세라가 백마의 군주 처치 보고로 왕실을 오가는 동안 학교에 남은 제립학교 선생님들에게 왕실 직통으로 공지가 내려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근시일 내로 키아나트리체는 제1왕녀를 필두로 새로운 버전의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기간트리카 부대를 이끌어 나라카로 향할 것이고, 그동안 미노타가 낌새를 보이면 부족한 수만큼 학생들을 전선에 동참시킨다.

황제 직인이 찍힌 서신에 선생님들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최근 각 나라의 대사들이 참석하는 대마족 인류 연합 가트 회의로 아가타가 시끌벅적했는데 키아나트리체 왕실은 외국의 눈에 최후의 검을 노출시키기 꺼려했다. 그 때문에라도 학생들을 학교 안에 통제시켰다. 그게 이런 식으로 써먹힐 줄이야.

왕녀를 필두로 한 나라카 토벌전이 과반수로 가트 회의를 통과했지만 그동안 미노타가 변심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게 사실인가요? 정말… 왕실에서 그렇게 명령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칙령입니다. 학생들에게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 칙령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하아.”

“이러려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가두어놓은 겁니까?”

세라는 분이 가시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군인이라는 계급 조직의 일원이라 윗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일 뿐이니 행동에 제약이 크다는 걸 세라도 알았다. 그녀도 그만큼 무능했으니까.

“전… 전 용납 못 합니다. 절대로 용납 못 해요!”

그럼에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일어나 교무실을 뛰쳐나갔다.

단숨에 교장실까지 간 세라는 몇 명의 학생들을 지나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분노로만 가득 차서 어지러웠다.

노크라는 기본적인 예의도 차리지 못한 그녀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평소처럼 군복 차림으로 문서 정리를 하던 교장은 숨을 헐떡거리는 세라를 보고도 침착했다.

세라는 교장을 보며 큰소리로 따졌다.

“어째서 그런 결정을 수용한 겁니까?”

“세라 밀로니 중위, 학생은 학교에 잘 귀환했나?”

“학생들을 참전시킨다는 계획에 동의하다니 무슨 생각이십니까. 군인이 아니라 아직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잖습니까!”

“난 1학년 8반 소속 렌 지미 남학생을 학교로 잘 바래다준 건지 물었어, 중위. 그 대답이 우선이야.”

교장은 태연자약하게 자신이 읽고 있던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했다.

세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펴고 구두 굽을 한 번 치며 그녀에게 경례했다.

“중위 세라 밀로니, 전 담당 학생 렌 지미와 제립학교로 무사 귀환하고 현시점에 복귀했습니다.”

“수고했어.”

경례를 바로 한 세라는 달려들 기세로 교장에게로 향했다. 서명한 문서를 봉투에 넣은 교장은 책상 한편에 치워놓고 앞으로 세라가 할 말에 느긋하게 대비했다.

“어째서 그런 결정에 따른 겁니까, 교장 선생님! 교육자로서의 의무를… 학생을 지킨다는 의무를 왜 외면하시는 거죠?”

“미노타가 뒤통수를 친다는 가정하다. 물론 그렇다 한들 풋내기 1, 2학년들은 지원만 들어가겠지.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마.”

“안 됩니다! 그래선 안 돼요!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저는 용납 못 합니다.”

“밀로니 중위, 당신이 용납을 하든 하지 않든 반박할 권위가 있나?”

손을 깍지 껴 입을 가린 교장이 서슬 퍼렇게 눈을 치켜떴다.

세라는 교직을 박탈당했다. 선생이라는 감투가 벗겨진 그녀는 학생들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없는 평범한 군인 신분이었다. 그 점을 찔리자 세라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부터는 교장의 반박 시간이다.

“정신 차려라. 제립학교 학생들은 길거리에 뛰노는 평범한 아이들이 아냐. 키아나트리체의 중요한 병력이지. 한 사람의 비어빌리터와 한 사람의 어빌리터를 비교했을 때 얼마큼의 전력 차이가 나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우리가 왜 필사적으로 학생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지 잊었나?”

“하지만 그들은 미성년자예요!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란 말입니다!”

“어른의 보호? 적들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선 제립학교 학생들이 비어빌리터들을 보호해야 한다. 밀로니 중위, 보호란 뭔가? 도대체 무엇이 보호이지?”

세라는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입술이 떨려왔다. 학생들이 전선에 설지도 모른다는 그런 끔찍한 일 따위 상상으로도 그만두고 싶다.

학생들은 어리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 마땅했다. 세라는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을 교장이 서슴없이 공격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단지 몇 년 늙었을 뿐인 학교 밖 비어빌리터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어빌리터를 ‘보호’한다고? 전선에서? 웃긴 주장이라 생각하지 않나, 중위.”

“하지만… 하지만 학생들은……!”

“제립학교 학생들은 키아나트리체의 ‘최후의 검’이다. 휘두르지 않으면 검이 아니지. 이건 언제나 있어왔던 비상 상황일 뿐이야. 중위가 걱정할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그래도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용납하면… 용납하면 안 돼요.”

교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낡은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학교 전체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섰다.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는 교장의 눈에는 그들은 이미 한 사람분의 어빌리터였다.

“밀로니 중위, 당신도 백마와 싸울 때 세니타리 롯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싸웠지.”

“그걸 지금과 비견하지 마세요.”

“이상하군. 뭐가 다르지? 당시 중위가 사용했던 병력은 지금 열렬하게 반대하는 미성년자 제립학교 학생이었고 당신은 그 힘으로 훌륭하게 등급1의 백마를 해치웠다. 당신이 교직을 박탈당한 이유는 학생들을 마족과의 전투에 이용해서가 아니야. 스탈라 조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둘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그녀가 학생들의 참전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커서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아이를 전선으로 밀어 넣기 싫었다. 그 빈약한 근거가 마음 아팠다.

어째서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은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에 목숨을 바쳐야 할까. 이 나라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나가서 머리나 식혀.”

꽉 막힌 교장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었다. 세라는 교장실 밖으로 나갔다.

교장실을 오가는 오크색 문의 손잡이를 붙잡은 세라는 같은 교육자였던 사람으로서 미련을 놓지 못하고 끝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교장 선생님은…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도 몇 년간 같은 교육자로서, 믿고 따랐던 상사로서 세라가 마지막 희망을 품었다.

답이 없던 교장은 세라가 문을 닫기 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나도 썩 유쾌하진 않아. 하지만 어쩌겠어. 폐하의 명인걸.”

문이 닫혔다.

이 무력감은 불길하다.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그녀는 곧바로 어딘가로 뛰었다. 한참을 달리던 세라는 검도부 부실에서 훈련하고 있는 왕녀를 찾았다.

왕녀는 세라가 찾아올 것임을 짐작한 듯했다. 무엄하게 왕녀를 부른 세라가 사람을 물렸지만 왕녀 역시 교장처럼 당황하는 낌새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 칙령에 동의한 것입니까?”

“미노타의 일 때문이로군. 진정하세요, 밀로니 선생님.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습니다.”

왕녀의 은색 눈동자는 비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왕녀는 대표적인 친어빌리터파이다. 어린 학생들인데도 어빌리터라는 이유로 무거운 짐을 강제로 지어야 하는 이 키아나트리체의 풍토를 왕녀 또한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뭐지? 세라는 왕녀의 의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밀로니 선생님. 우리에게는, 우리 세대는 평화를 이룩할 힘이 있습니다.”

“그에 학생들을 끌어들이면 안 됩니다!”

“미노타가 쳐들어온다는 가정하에서일 뿐입니다.”

“그럼 미노타가 잠잠해질 때까지만이라도 토벌을 미루는 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힘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고하게 눈을 치켜뜬 왕녀는 단호하게 세라를 마주했다. 왕녀는 어려운 이야기를 덤덤하게 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이 그 적기입니다. 이 굴레를 내 손으로 끊어낼 수 있으면 몇 번이고 하겠습니다. 설사 친우들을 인간들 간의 전선에 내보내야 한다는 위협이 있을지라도.”

학교에 마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의도적으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미노타의 동향을 기다린다는 계획 대신 마국을 토벌한다는 강박이 남았다. 미나가 수작을 부린 탓이다.

나라카 토벌은 니냐롯트의 업보다. 꼭 악몽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해야만 한다.

“선생님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겠지요.”

왕녀가 손가락을 더듬어 창가에 비치는 햇빛을 쓰다듬었다. 마국 토벌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 자신감이 니냐롯트에게는 있었다.

“저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이 손에 다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대화는 짧았다. 어딘가에서 친위대의 소리가 들려오자 니냐롯트가 먼저 친위대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세라는 마지막 인사조차 헛것으로 들렸다.

“그럼 언젠가 또… 보기를. 마족들이 없는 그 하늘 아래서.”

세라가 혼자 남았다.

마족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빌리터들은 더 이상 의무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럼 렌도… 다른 학생들도 각자가 가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녀의 친우들처럼 허망하게 죽을 일도 없겠지. 세라는 탄식하며 이마를 쳤다.

유리에, 나는 도망치던 것에 맞서 끝매듭을 지어야 하는 걸까. 우리의 적에게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날이, 더 이상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며 눈앞에 닥친 위험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끝내려면 이 굴레를 반드시 내 대에서 끝내야만 해.

세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매번, 매번 지키는 데 실패했지만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학생들이,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아무런 방해 없이 좇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런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당장 나라카의 토벌만큼은 불가결하다. 세라 그녀 또한 차출되겠지.

그렇다면 다시 한번만 그 아이를 위해서. 꿈을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도록 세라는 마지막으로 힘을 냈다.

가만히 눈을 감은 그녀는 하늘에 있을 유리에에게 미노타가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달라며 기도했다.

* * *

금의환향한 것도 아니고 퇴원한 것일 뿐이니 대단한 환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왕녀와 세라에게 거듭해 경고를 들었던 것처럼 교내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세라와 헤어지고 기숙사에 돌아온 재경은 저녁에 류제를 만나 이 분위기에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다음 날 출석 체크를 위해 학교에 등교했을 때 날 선 기미는 피할 수 없었다.

교실의 공기는 밝고 시끄러웠던 예전의 8반과는 거리가 멀어 괴리감이 관통했다.

오랜만에 보는 8반 교실. 친근했던 친구들은 그를 무시했다. 재경은 흘기는 시선에서 적의마저 느꼈다. 이런 데에 서툰 재경은 어찌할 바 몰라 의기소침해졌다.

충격받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비키와 유네는 여전히 친절하고, 잘 돌아왔다 축하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옆 반 선생님의 도움으로 출석 체크를 마치고 학생들이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갔을 무렵 비키와 유네가 외롭지 않게 재경의 자리에 찾아왔다.

“혼자서 병원에 있던 소감은 어때?”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

“렌 군,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다 나은 거지?”

유네가 누군가 들을까 몰래 속삭였다. 저번에 유네와 이상하게 헤어져 버렸던지라 걱정했는데 유네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모두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려는 모양이다. 재경도 그게 마음 편했다.

“그러니까 퇴원을 시켜줬겠지. 아아, 할 일도 없는데 학교에 처박혀 있어야 하다니. 끔찍해 죽겠네.”

“보충수업은 어떻게 된 거야? 거의 다 끝났잖아.”

“으엑… 그러게. 나도 추가시험 보려나?”

“당연하지! 2학년에 올라가려면 낙제생들은 필수야. …라고 야단치고 싶어도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공부하는 분위기도 아니라…….”

버럭하려던 비키가 점점 말을 줄였다. 선생님들도 보충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많아 진도도 제대로 못 나갔고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만 돌았다.

지금은 비키가 나서서 렌을 지켜주어도 렌이 나오지 않는 동안 겨울방학이 사라진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소문이 기정사실로 된 지 오래라서 따가운 눈초리를 비키도 견디기 버거웠다. 마족의 짓이라 둘러대도 이상하게 믿지 않았다.

“너까지 그런 이야기 하니까 무섭네. 다음 달 되면 괜찮아지겠지. 걱정 마.”

“그럴까……. 왕녀님의 친위대 사이에서는 나라카 토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하던데. 어디서는 미노타랑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복잡하네.”

“아, 비키 양. 나도 들었는데―”

“유네. 빨리 와!”

유네가 참견하려고 하자 멀리서 친구들이 그녀를 불렀다. 왜 그러는지 대강 눈치챈 유네는 눈치를 보다가 비키가 가라는 신호를 주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 렌 군. 나중에 또 보자!”

기약 없는 인사를 하는 유네를 끈 그녀들은 렌을 힐끔거리다 다른 곳에 가버렸다.

비키도 학생들이 하나둘 교실을 나가는 것을 보다가 부장이 어빌리터의 유래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고서를 구했다는 것이 생각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다. 나도 동아리실 가야지. 넌 뭐 할 거야? 공부할 거면… 내가 봐줄까?”

“약 먹을 시간이라서 기숙사에서 잘 거야. 그거 먹으면 엄청 졸리거든.”

공부 이야기에 질린 재경이 비키를 잘 구슬렸다. 다 나았다고 했던 주제에 병약한 척하는 그가 짠해지는 한편 비키는 이런 상황에도 땡땡이치려는 렌이 괘씸했다.

“너,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지?”

“아…아니야. 진짜야! 류제한테 물어봐!”

“가방도 텅텅 비었는데 무슨. 빤히 보여.”

“사물함에 다 있어.”

“과연 그럴까~? 전적이 많은데.”

비키는 피식거리며 재경의 공부 의지를 비웃었다. 그만큼 진심이 내비치지 않기는 했다. 재경이 꿍얼거려도 물러서지 않는 비키는 사물함에 손가락질했다.

“정말 마음이 있으면 가방 챙기는 동안 교과서나 가지고 와. 범위 지정해 줄 테니까 그만큼은 꼭 읽어. 이러다 2학년 어떻게 올라가려고 해.”

“우이쒸, 귀찮게.”

2학년에 올라가고 싶었던 재경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수 없이 사물함을 열었다. 추가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추가시험의 추가시험까지 있다는데. 으으, 정말로 2학년에 올려주지 않는 건 아니겠지?

“어어… 보충 들어야 하는 과목이 뭐였지?”

“뭐어? 그것도 기억 못 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윽… 구…국사! 국사는 있었던 거 같은데. 병원에 너무 오래 있어서 깜박했어.”

“그럼 국사 교과서 가져와.”

“알았어. 소리 지르긴.”

그녀는 역사 연구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니 남 가르치는 데에 개뿔 재주가 없더라도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싶다.

투덜거리며 사물함 문을 연 재경은 안에 들어있는 낯선 미움의 흔적을 발견하고 머리가 차가워졌다. 아무리 사물함을 창고로 쓰고 있다지만 이건 결코 재경이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

악의, 분풀이. 시비가 걸리면 받은 대로 돌려주는 그의 입꼬리가 갈 길을 잃고 실룩거렸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은 언제나 불쾌했다.

익명성에 숨은 누군가의 의도도 짐작이 간다. 겨울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날 의심한 거겠지. 그녀들의 솔직한 성격을 아니 더 의기소침해졌다. 제길, 나는… 왜 항상 이런 식일까.

“왜 그래? 사물함에 없어?”

“아아아, 국사 교과서는 기숙사에 있는 거 같아.”

“잘도 빠져나가긴.”

“진짜 그런 거 아냐!”

재경은 사물함 문을 힘껏 닫았다. 비키가 언짢아했지만 재경은 모른 척했다.

“잘 가. 내가 말했던 대로 ‘키아나트리체 건국’ 파트는 읽어 와. 펠노아에서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던 그 황제가 나오는 파트. 기억하지?”

“아~ 알았어~ 그것도 모르겠냐?”

재경의 미덥지 못한 대답에 비키가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이내 붉은 말총머리를 흔들며 동아리실이 있는 신관 건물로 가버렸다. 재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마저 흘기다가 제 갈 길로 향했다.

재경은 애써 가방 안에 숨긴 찢겨나간 국사책을 외면했다. 여기에서마저 이전의 세계처럼 끝나버리면 그라는 존재가 영영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다음 달에 류제가 유네에게 고백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거면 돼. 그럼 나도 자유로울 수가 있어. 해피 엔딩이잖아. 해피 엔딩.

그가 터덜터덜 손에 든 신발을 땅에 던져두었다.

더러운 신발을 구겨 신던 재경은 복도 멀리 마주 오는 미나와 눈이 마주쳤다. 초록색 단발머리에 소름 끼치게 무감각한 분홍색 눈동자는 숨기지 않은 적의가 가득했다.

재경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찰나의 눈싸움. 고요한 1층 복도에 은은한 햇빛이 이상스럽게도 평화로웠다.

미나는 말없이 지나쳤다. 화가 난 재경이 괜히 신발장을 발로 찼다.

미나에게 놀아난 것 같아 속이 답답해진 재경은 재활 운동 겸 학교 뒤편 언덕에 올랐다.

이전에 고양이녀가 말하길 캣닙이 많이 심어져 고양이 수인화가 되어버린 학생들이 있었다고 했던 곳이다.

탁 트여 시원한 데다 생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재경은 푸르렀던 그때에 비해 머리색만큼이나 말라버린 들판을 살폈다.

이 광활하고 커다란 하늘은 근심을 삼켰다.

온갖 허무함, 정신 승리, 씹어 넘기기 힘든 것들이 약처럼 목에 감겼다. 이 감정을 외면하지 말라고 타박하는 늙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날이 좋구나.”

“으악, 깜짝이야. 하…할머니? 뭐예요. 왔으면 왔다고 하지.”

재경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인네는 사라 하놋이었다. 예언이라는 이름하에 온갖 이벤트가 판을 치는 학교였지만 이곳에 사라가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언니의 뜻대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의지였지만 오늘만큼은 직접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자신의 편이나 진배없는 사라가 찾아오니 기뻤던 재경이 촐싹맞게 다가갔다. 아무리 억울한 미움을 받아도, 혼자서 견뎌내야 했던 것과 이전과는 다르게 그에겐 여전히 그를 믿고 따라주고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에 자주 오네요. 몸은 괜찮아요?”

“아이야, 넌 네 어빌리티를 모른다 했었지.”

둘러싼 후드를 벗지 않은 그녀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목소리는 이전처럼 생기가 담기지 않았다. 불길함을 느낀 재경이 지팡이를 짚은 그녀를 두렵게 쳐다보았다.

“그건 지금 와서 왜요? 분위기 깔지 마요. 무…무서우니까.”

재경은 후드 아래에 그늘진 안색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 불길함을 알았지만 알기 싫어서 현실이 되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았다.

“네가 예언에 끼어들 때마다 불행을 겪었다는 게 계속 거슬려 와버리고 말았다.”

“그…그건 이제 됐잖아요. 어차피 이제 호감도 이벤…예언은 없는데. 자꾸 와서 어빌리티 남발하지 마요.”

“…네 바보 같은 면상이 생각났던 게지. 그러면 안 되는데. 머저리처럼 자꾸만 다치기만 하니.”

그녀는 비틀거리며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재경은 이전보다 더 기운이 없는 사라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분명 해가 저렇게 밝고 양지가 따뜻한데 그녀의 손은 송장처럼 차가웠다.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말은 왜 하는지. 재경은 할머니들은 다 치사하다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너는 예언을 바꾸는 대신 대가를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할머니,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모든 어빌리터들은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를 치르지.”

사라는 제 말만 늘어놓았다.

재경이 아무리 아둔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는 하나 지금 사라 하놋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예언을 바꾼 대가.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 그녀는 그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

“네가 예언을 거스르지 않아 7월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할머니는 내 어빌리티가 예언을… 정해진 미래를 바꾸는 능력이라 말하는 거예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건 단지 우연이라고요!”

이능력자가 있는 세계관에 떨어진 지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겪어본바 사라의 의견은 허무맹랑했다.

미래를 바꾸는 능력?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미연시 세계에서 미래를 바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따지자면 류제잖아. 척도도 가장 높으니까.

“나도… 확신할 수 없단다. 그저 내 생각을 마지막으로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치기엔 내 척도는 엄청 낮은… 아!”

재경은 고장 난 줄 알았던 어빌리티 척도계를 떠올렸다. 류제처럼 밝은 빛을 발했던 그것. 척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라고 본다면… 그때 있었던 일도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네 어빌리티는… 정해진 흐름을 바꾸는 것이니. 그 대가는 닥치는 불행이 되겠지.”

“그…근데 지금 와서 말해봐도 할머니… 이제 내가 아는 미래도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보다… 그보다 괜찮은 거 맞죠?”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내가 말했지? 이 세상에 영원한 끝은 없다고.”

예언의 아이들의 마음은 예언과 같지 않다. 그에 따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함께하지 못해서 사라는 마음 아팠다.

“기억해라. 너는 세계를 망치는 게 아니야. 평범한 다른 어빌리터와 같았던 거야.”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비키처럼 불꽃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애들 같지 않으니 사라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해낼 수 있어. 혼자서 해내야지, 암. 잘할 수 있지?”

재경은 힘없이 나무에 기댄 사라를 안타깝게 불렀다. 그녀의 눈이 자꾸만 감겨오고 몸이 가벼워졌다.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할머니 덕분이란 말이에요. 정신 차려요! 벼…병원에 가지 왜 나를……! 바보같이 왜 그러는 거야!”

“너와 다른 이들의 앞길이 어떻게 바뀔지 보고 싶다는 건 내 욕망이겠지.”

사라는 끝끝내 만지지 못했던 재경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목나무처럼 낡고 꺼끌꺼끌한 손길을 재경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청승맞은 천덕꾸러기야…….”

그녀의 숨이 점점 가빠왔다. 재경은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애틋함에 눈에 눈물이 절로 고였다.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나한테 이런 시련만 주지 마.

“흔들리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거라. 어느 길을 가든 네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으니.”

“하…할머니!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녀는 해야 할 말을 끝낸 것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어빌리티를 쓴 사라 하놋은 어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공간 안에서 사라 하놋의 늙은 육체가 부서져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마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에 재경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공간이 닫혔다. 그녀는 사라졌다.

“나랑 같이 끝까지 지켜봐야 하잖아! 왜 또 나 혼자만 두고 가버리는 거야!”

재경은 오열했다. 길고 긴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가 끝났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드디어 엔딩의 끝이 보였다.

다음 달 밸런타인데이 때 류제가 유네를 선택하면 평화로움은 늘 지속되는 행복한 노말 엔딩이 뜬다.

할머니는 내가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지켜봐 줘야지. 이것도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할머니가 죽은 거야? 그게 아니면 왜 매번 날 혼자 두고 사라지는 건데. 드디어 나도 할머니의 짐을 덜 수 있게 되었는데.

“반드시…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만들게. 제발 돌아와… 할머니……!”

왜 난 할머니 상태가 나쁘다는 걸 몰랐지? 내 일 때문에 바빠서? 짐이 되지 않겠다고 한 주제에 내 생각만 하는 멍청이 같으니.

할머니. 난 행복하고 싶어. 여기서는 반드시 행복해질게. 제발 그럴 수 있기를 바라줘.

그런데 이제는 평범한 행복이 아득하게만 느껴져.

울부짖지만 그 소원을 과연 이 세계가 들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믿을 만한 조력자는 힘을 잃고 이야기는 최종장 분기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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