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권-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2) (56/112)

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2)

제립학교가 학생 관리에 폐쇄적으로 돌아섰다고 하나 고작 교사의 힘으로는 전교생 중 단 한 명, 차기 왕위 계승자의 행차만큼은 저지하지 못했다.

황제 다음으로 강대한 권력을 가진 이를 막아 세우는 간 큰 자는 누가 되었든 심기 불편한 왕녀의 역정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바쁜 걸음마저도 고귀한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제1왕녀는 상시 대기하는 친위대를 이끌고 왕궁에 입성했다. 열린 문을 박차며 수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서 제왕의 기백이 느껴졌다.

오늘은 미노타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측되는 ‘세니타리 롯’의 납치 건 이후 처음 있는 정기 의회였다. 의회가 열리는 회장의 문이 삐걱거렸을 무렵 먼저 모였던 사람들이 한창 그 주제로 시끄러웠다.

그녀가 들어오자 눈치껏 입을 다문 귀족들이 차례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니냐롯트가 언짢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또한 행차했다. 니냐롯트와 똑같은 황금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황제가 느긋하게 왕좌에 자리했다.

멀리서 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키아나트리체의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는 정기 의회가 지금부로 시작한다.

멸족한 셀로니아 후작가의 자리는 공석인 채로 십걸 귀족을 포함한 의회 결정권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의회는 미노타 이야기로 불타올랐다.

왕녀는 십수 명이 말하는 소란 속에서 잠자코 말을 새겨들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는가 살피는 짓을 왕비 서거 후 벌써 몇 년을 해왔다.

이 장소만큼 키아나트리체의 이권이 얽힌 곳도 없을 것이다. 귀족파, 왕녀파, 황제파. 그 내부에서 갈리는 친어빌리터파, 반어빌리터파 등등 쟁쟁한 세력들을 위한 권력투쟁의 장이다. 입에서 나와 부딪히는 목숨을 건 칼싸움 소리가 싫어도 들려왔다.

“우리를 기만하는 행위요. 미노타를 찍어 눌러 키아나트리체의 무서움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정황만 그렇다는 것뿐 진짜 미노타가 어빌리터 납치를 사주했다는 증거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증거 부족이야말로 미노타의 짓이라는 증거입니다! 고작해야 뜨내기 범죄자들이 그 정도로 증거를 인멸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니냐롯트도 급우를 납치해 큰 부상을 입히는 데 일조한 자들을 모아 당장에 벌하고 싶었다. 똑같이 만들어주지 않으면 속에 얽힌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복수의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녀는 대의를 따라야 할 지도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잘못된 결정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에 몰아넣을 것이다.

더군다나 비밀리에 전해졌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전언이 신경 쓰였다.

“미노타에 있는 첩자의 말로는 그날 이후 미노타는 키아나트리체가 먼저 스탈라 조약을 파기했다며 기간트리카 부대를 국경으로 옮기려 시도한다 합니다. 후안무치한 이들을 누가 벌준단 말입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 키아나트리체도 기간트리카 부대를 이용합시다. 미노타의 얄팍한 기술 따위 못 당할 것도 없습니다.”

늘어나는 동토로 식량이 부족해져 식량 확보에 사활을 건 미노타는 기간트리카 부대를 앞세워 키아나트리체를 공격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키아나트리체도 기간트리카 부대를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빼내어 전선에 내보내야 한다. 나라카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건너온 마족들이 인간계를 쑥대밭을 낼 가능성도 무시 못했다.

“기간트리카는 절대 인간을 향해서는 안 되는 무기요. 감히 미노타가 쳐들어온다 해도 용납 못 합니다.”

귀족파의 대표 격인 백작 부인의 완강한 반박이 이어졌다. 인간들끼리의 전쟁에 기간트리카를 쓴다는 의견은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더 큰 그림을 보는 비어빌리터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어빌리터들의 공격이 한두 번씩 인간에게 향하기 시작한다면 기간트리카를 소유한 어빌리터들에게 쿠데타 등의 계기를 줄지도 몰랐다.

“도발에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대응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고개를 수그릴 것이오.”

“미노타 그놈들에게 날뛰지 말라며 식량을 보내주기라도 하라는 말이오?”

“아무리 미노타가 긴 기근으로 구휼 정책에 실패했어도 인류는 아직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 때가 아닙니다. 인의도 모르는 짐승들에겐 먹이를 주지 않고 무시하는 게 옳습니다. 한두 번 은혜를 베풀기 시작하면 당연한 줄 알고 이를 드러낼 겁니다.”

“맞습니다. 뒤통수를 맞는 건 키아나트리체가 될 겁니다. 문제가 되는 나라가 미노타뿐만이 아닙니다. 알레흐카이잔에서도 키아나트리체를 필두로 한 인류 연합군에서 탈퇴를 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미노타는 시작에 불과하겠죠.”

“마족들이 잠잠해지니 이제 외국, 야만인들이……. 차라리 마족들만 들쑤실 때가 나았지.”

“무엄한 입 다무시오.”

눈썹을 움찔거린 왕녀의 목소리가 회장을 찔렀다. 서늘한 눈동자로 발화자를 흘기니 잠시 회장이 조용해졌다.

니냐롯트는 동의하지 않았다. 차라리 마족이 물러선 지금이 낫다. 마족이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면 전쟁은 회피할 선택지가 있었다.

“냉정하시군요. 저하의 급우분께서도 미노타의 첩자에게 붙잡혀 큰일을 당할 뻔했다 들었습니다만.”

“자작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의회를 사적인 감정으로 참석하는가.”

“차기 군주 될 자가 이리도 이성적인 현인이라니, 축복할 일이라는 기쁨의 표현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농담조로 입을 연 것은 멜가로스크 자작이었다. 왕녀도 미노타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멜가로스크 자작은 그 점을 잘 파고들었다.

“미노타를 향한 경고는 필요합니다. 최근 나르타 상단을 포함해 키아나트리체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여러 상단 조직이 반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여론을 잠재우려면 그에 대한 답을 해야 할 겁니다.”

“마족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데 근경의 토벌로 주의를 주도록 하는 걸로 마무리하지요.”

“현 사태에 대한 의사 표현 없이 무력적 움직임을 취했다간 미노타는 선수를 칠 겁니다. 모 아니면 도입니다.”

그가 물꼬를 틀자 다른 귀족들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솔깃했지만 니냐롯트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말이 거슬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미노타보다는 나라카의 토벌이 먼저라 주장했던 황제도 묵묵히 경청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니 이번에도 똑같은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인간들의 일을 마족 때문에 고민하시는 겁니까, 왕녀 저하. 마족들은 언제까지고 우리 키아나트리체의 발목만 잡군요.”

멜가로스크 자작이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아무도 그 농담에 웃지 않았다.

니냐롯트는 가만히 귀족파 무리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저명한 귀족파인 멜가로스크 자작의 말은 혼란만 주었다.

가문의 상징인 독수리 모양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만지작거린 그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소인은 미노타를 쳐야 한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인류 연합을 단단히 만들어 마국을 멸하고 키아나트리체의 위엄을 인류에게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정세에 따라 미노타도 덩달아 잠잠해지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하시긴. 그리된다는 보장이라도 있소?”

“물론. 우리에겐 최신식의 군용 기간트리카와 척도 한계를 넘기는 새로운 어빌리터가 있습니다. 등급1의 마족과 네 번 마주하여 살아남은 장래가 유망한 어린 어빌리터가.”

목젖이 울컥한 니냐롯트는 분노를 꿀떡 삼켰다. 노림수는 류제 신리인가. 그를 끌어들인 다음 귀족파의 꼭두각시로 만들 속셈이겠지.

그녀가 어림도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학생이오. 그런 이유로는 전쟁에 투입하지 않을 겁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도 월반하여 조기 졸업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보이는 류제 신리를 월반시키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졸업반 학생들보다 더 나은 기간트리카 제동 능력을 가졌다고 들었는데요.”

과연 그렇게 나온다 이건가. 류제 신리를 특별 취급하는 발언을 하면 의회를 사적인 감정으로 참석하느냐는 자신의 말에 당하게 된다.

니냐롯트는 고민했다.

보다 안전한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를 위한 복수냐, 아니면 마족 토벌의 의무이냐. 멜가로스크 자작의 말로써 그녀는 무거운 기로에 떠밀려 섰다.

“인간끼리의 분열은 마족이 원하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자취를 감춘 게 아닌 이상 백작 부인의 말대로 인간끼리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빌리터들을 긁어모아 마국을 정벌하면 미노타는 티끌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키아나트리체가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먼저 미노타에게 쓴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마족이 잠잠해졌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왜 나라카 토벌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멜가로스크 자작의 말대로 벌써 작년에만 등급1의 마족이 몇 번이고 키아나트리체 전역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나라카를 먼저 토벌해야 한다고 그대로 돌려주겠습니다.”

“마족의 침입이야 흔하던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인계의 정세를 우리 키아나트리체가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로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적이 될 자가 누가 되었든 키아나트리체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전선에 나갈 사람들의 운명이 오직 왕녀의 선택에 달렸다. 병력을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 것인가. 미노타? 아니면 나라카? 최종 결정자인 황제의 의중은 어떤가.

“제1왕녀가 결정하여 판단을 내려라. 짐은 그에 따르겠다.”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 왕좌에 앉은 황제가 무덤덤하게 명했다. 결정권자로 임명된 왕녀의 손이 움찔거렸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선택을 그녀에게만 맡기는지 의중을 모르겠다. 이제 와서 아바마마께서 날 신뢰하는 것도 아닐 테고.

나라카 토벌을 원했던 그까지 흔들렸다는 건 귀족파의 농간인가. 이들의 꿍꿍이속 안에 예상하지 못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니냐롯트는 믿어야 할 자를 정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니 다음 국제회의에서 이어 발언하겠소.”

마인드맵이 연결되지 않았으니 니냐롯트는 판단을 유보했다. 지금의 대화로 확실해야 할 정보가 하나 생겼다.

“의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황제가 떠나고 귀족들도 하나둘 회장에서 사라졌다. 황금으로 된 문이 닫혔다. 이제부터 키아나트리체의 모든 운명은 니냐롯트의 결정에 따라 달라졌다.

니냐롯트가 빈 옥좌를 흘겼다. 그의 심중을 파악하는 데 지쳐 창밖으로 눈을 돌린 그녀는 어렴풋이 보이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를 응시했다.

이 결정에 대한 책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건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휘말리게 될지도 모르는 제립학교 학생들이 다만 눈에 밟혔다.

* * *

새해 첫 번째 달의 어느 토요일.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이 필요한 류제가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와 렌이 입원한 병원이 가까워 그날만큼은 류제만 특별히 병문안이 가능했다. 렌의 부상 이유를 알고 있거니와 군주급 마족을 상대로 몇 번을 살아남은 인재라 그를 해코지할 자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작 나는 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마왕의 혼을 품고 있는데. 류제가 버릇이 되어버린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검사 결과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가 느린 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늘도 친구 병문안 온 거니? 귀엽다. 시간이 늦어서 안 오나 했어.”

“볼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제립학교 학생 아니야? 무슨 일?”

앞머리에 가려진 류제의 수려한 외모를 알아본 간호사가 추파를 던졌다. 이성의 대시야 학교에 있는 동안 익숙해진 류제는 침묵으로 무시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실망을 숨긴 간호사는 본분으로 돌아가 환자 방문 기록서를 건넸다.

“지금쯤이면 약 때문에 잠들었을 거야. 매주 찾아와 주는데 타이밍이 엇나가네. 내가 다 미안해서 어쩌니.”

“괜찮습니다. 상태가 어떤지만 보러 온 거니까요. 잠을 푹 자야 상처가 잘 낫는다는 말도 있고.”

“어머머, 친구 걱정이 지극정성이구나. 그래서 환자분도 금방 회복하는 거겠지?”

적당히 기분을 풀어주며 병실까지 안내해 준 간호사가 창문을 열어 답답한 실내를 환기시켰다. 그녀의 말대로 렌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잠버릇이 나빠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은 여전하다. 류제가 이불을 곱게 덮어주었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나요?”

“상처도 거부반응 없이 잘 붙고 있어. 식욕도 왕성하고 옆방 노인분들하고도 노는 걸 보면 아주 건강하니 월말에는 퇴원할 수 있을 거야.”

“심심할까 했는데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요.”

“아주 말썽꾸러기던걸. 다만 이따금 가짜 통증을 느껴서 걱정이야. 관리를 잘하면 금방 없어지겠지. 혹시 자면서 아파하면 호출 버튼을 눌러줘. 그럼 난 가볼게. 추우면 창문 닫아도 돼.”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류제가 어정쩡하게 서서 고개를 숙였다. 손을 흔든 간호사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류제는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 침대 맞은편에 앉았다. 잠든 렌을 조심스레 살피니 그때 보았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만일 그가 폭주했다면 렌은 죽고 마족의 모습을 한 그는 특수부대의 손에 사살되었거나 인류를 배반한 꼴이 되어버렸겠지. 분노로 금방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건 전보다 성장했다는 걸까. 제자리걸음 같은데.

“안녕, 렌. 나 또 왔어.”

그가 답변이 없을 인사를 건넸다.

류제는 차라리 렌이 퇴원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학교 분위기가 날카로워 추가시험을 쳐서 2학년에 올라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소문도 있었다.

“네가 이대로 잠들면 좋겠다.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났을 때 내가 깨울 수 있게.”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는 자신에게 한탄하며 류제가 렌의 얼굴을 쓸었다.

매번 잠든 시간에 찾아오는 것도 의도적이었다. 산탄총을 맞은 렌이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날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했다. 지금은 렌과 마주하는 상상만 해도 입이 닫혔다. 이전처럼 발전 없는 대화만 오갈까 봐 겁났다.

그래도 평생을 안고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괴했던 상처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네가 살아 숨 쉬고 있어 다행이다.

네가 나의 진심에 관심이 없더라도, 네가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더라도 나는 네가 소중하니 차라리 아무도 해치지 못하는 곳에 두고 싶어. 그래 봤자 내 욕심이겠지.

약한 피부 때문에 상한 주근깨가 새하얗게 질렸다. 병실에서 누워있는 렌의 색소는 늘 옅었다. 물 빠진 지푸라기 머리칼과 얼핏 태양 아래 가을 들판이 비치는 은은한 눈동자. 모두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그가 렌의 눈두덩을 조심스레 쓸었다. 자극을 느낀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할머니……?”

잠을 깨운 것인지 마른 입술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 눈을 떴으나 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답하지 않은 류제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고양이였을 때의 렌이 누구와 자신을 헷갈렸는지 문득 알아차렸다.

“어디 가?”

“…….”

“나 아프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마. 설탕 토마토 먹고 싶어.”

그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이런 솔직한 말을 멀쩡할 때 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게 아플 짓을 왜 해. 속으로 타박하는 류제도 마음이 아팠다. 잠꼬대를 하던 렌은 몸을 뒤척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류제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너의 비밀. 너의 시선. 나의 감정. 나의 의도.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게 없다.

왜 나의 사랑은 이다지도 어려울까. 너를 알고 싶고, 네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를 원해. 너도 나를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 난 네 보호자도, 할머니도 아닌데.

아픈 렌에게서 대단한 걸 욕심내는 것도 우스웠다.

“푹 쉬어, 렌. 나머지는 내가 할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너만큼은 무사하게 해줄게.”

지금은 렌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렌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는 친구들은 그의 말썽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수군거려 댔다. 차라리 마족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치는 게 낫지, 학교에 돌아온 렌이 그 사실을 알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류제도 방학 때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건 렌의 잘못이 아니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그 전에 교장이 따로 류제를 불러냈다.

류제와 단둘이 마주한 교장은 그에게 성탄제 전주에 있었던 사건에 관련한 어떠한 것도 언급하지 말라 명령했다.

그날 규칙을 어기며 세니타리 롯을 상대로 날뛰게 해줬으니 지금은 함구하라는 말에 류제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왜죠? 왜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침묵하던 교장은 이유를 설명했다. 비어빌리터들이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 어빌리터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면 학생들은 학교 밖 사람들을 신용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친구의 명예를 지키고 싶겠지만 과연 그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비어빌리터를 지켜야 하는 어빌리터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끼칠까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제립학교는 작은 개개인보다는 큰 대의를 위해서 정보를 통제해 왔다. 미나 말대로군. 실로 훌륭한 솜씨다.

교장에게 반감이 생긴 류제는 반 친구들에게만큼은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왕녀조차 그에 반대했다. 그는 며칠 전에 마주친 왕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출석 체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방에서 나왔던 류제는 한때 렌과 같이 썼던 그 방을 흘기며 교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세라가 없는 교실에 남은 건 가라앉은 분위기뿐이었다. 불쾌한 험담만 잇는 그 장소는 앉아있기도 고역이다.

듣다못해 자리를 박찬 그는 유언비어를 떠들어대는 친구들에게 한마디 해주려다가 교장의 경고를 떠올렸다. 생각을 비우고 싶었던 그는 도서부 동아리실에서 책이나 읽기로 했다.

동아리실에 가기 위해 2층 신관 다리를 건너던 류제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니냐롯트와 단둘이 마주했다.

지나치려던 그를 니냐롯트가 거리를 두고 막아섰다. 속셈을 모르는 류제의 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가려진 푸른 시선이 왕녀를 속속들이 훑어 내렸다. 숲속에 사는 요정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친히 찾아왔음을 류제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어디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며 류제가 무엄하게 턱짓을 했다. 왕녀를 신봉하는 루이나가 봤더라면 당장에 칼을 빼 베려고 했을 것이다. 니냐롯트는 류제의 태도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니 하고자 하는 말만 얌전히 전달했다.

“그대의 마음은 알겠다만 교장의 말대로 입을 다무는 게 현명할 것이다.”

류제의 미간에 굴곡이 생겼다. 지금도 충분히 참고 있었다. 계속, 여태까지 참아왔다. 왜 다들 그렇게 참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렌과 화해하고 싶었다던 왕녀만큼은 다를 줄 알았던 류제는 실망의 기색을 지우지 못하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넌 그렇게 말해선 안 돼. 그게 렌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탓할 상대가 잘못되고 있는 걸 날더러 지켜보기만 하라는 거야?”

격분한 그가 고함을 질렀다. 왕녀는 류제가 진정할 때까지 침묵했다. 눈동자에 반사된 차가운 은색 눈동자가 앞을 응시했다.

류제는 속이 탔다. 왕녀가 타고시아 해변에서 렌에게 거절당한 후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저럴 이유가 없었다.

“류제 신리여, 우리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그놈의 신중, 신중. 진절머리가 나. 이상한 오해가 일파만파 기정사실이 되어가는데 날더러 손 놓고 있으란 말이야? 렌이 돌아오면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겠냐고! 거짓말이라도 마족의 침입 때문에 학생을 통제하는 중이라고 발표하란 말야! 지금껏 잘도 그렇게 해왔잖아!”

분개한 목소리는 비밀을 이야기하기엔 컸다. 진정이 덜 된 것일까.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왕녀는 다홍 입술에 백옥 같은 손가락을 대었다.

“쉬이, 목소리를 낮춰라. 그리 말하지 않아도 유념하고 있다. 납치 사건에는 미노타의 왕실이 개입해 있어. 누군가는 억측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대도 미노타의 국경까지 접근했으니 알겠지.”

“미노타가 그놈들을 시켜 고의로 이 일을 꾸민 거라고?”

세니타리 롯이 도주로를 미노타로 잡은 건 알았지만 미노타 왕실까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당혹감이 가시기도 전에 왕녀는 신중하라는 말의 의미에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 진짜 연유가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가정이지. 문제는 미노타가 제립학교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를 한 것 자체다.”

“그럼 미노타가 한 짓이라고 말해. 렌의 말썽이 문제가 아니라.”

“조금만 기다려서 사건이 진정되면 교장이 이 사건을 마족과 얽어 발표할 거다. 그대가 말하는 대로 때로는 진실이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왕녀의 침착한 모습은 유네와 렌이 납치되었을 때 만들어진 비상대책위에서 보인 선생님들의 태도와 겹쳐졌다.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보단 이성적이다.

저게 정녕 어른이 보여야 할 자세인 건가. 류제는 끓어오르려는 답답함을 짓누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왕녀는 차근차근 생각을 설명했다.

“이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제립학교 학생이 카르텔 범죄 표적이 되었다고 발표한다면 학생들은 그 카르텔이 아가타에 거점을 둔 세니타리 롯임을 알게 된다. 그 조직이 어린 어빌리터를 납치해 국내외에 팔아넘기는 악독한 자들이라는 건 유명하지.”

“다들 수상한 사람을 조심하게 되겠네. 사실이 밝혀지는 게 훨씬 이롭게 들리는데.”

“불신이 퍼져나가면 학생들이 학교 밖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겠나?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겨버리겠지. 적어도 이 제립학교에서는 더. 그대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나?”

그녀가 물었다. 교장도 그랬다. 학생들을 위해서라고. 입을 달싹거리던 류제는 납득했다. 누군가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지만 왕녀의 말처럼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었다.

“급우들은 어찌하여 밀로니 선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가도 알게 되겠지. 안 그래도 나르타 상회의 미노타 계약 철회 건으로 이야기가 흉흉한데 스탈라 조약 위반 처분 공지를 본 학생들은 배후에 미노타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학생들의 분노는 비어빌리터와 미노타를 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미노타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대는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런… 건…….”

류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그런 문제로 전쟁이라니. 그러나 일국의 어빌리터 납치 공작은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었다.

특히나 어빌리터의 특권을 좋아하는 고학년들은 비어빌리터가 그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거기에 나르타 상단의 자제 유네까지 얽혀있으니 일이 커질 가능성은 무시 못 했다.

젠장.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었던 것이다. 왕녀는 벌써 거기까지 대비한 건가. 다른 선생님들도 그걸 염려해서 가만히 있는 거겠지.

왕녀의 말처럼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슬렉터의 보안을 뚫어서 통신 크랙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 이번 사건에 단서라도 흘렸다간 그녀가 말하는 대로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대도 사건과 얽혀있으니 내 말의 의미를 잘 알 것이라 믿는다. 키아나트리체는 충분히 혼란스럽다. 그대는 키아나트리체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어. 그런 그대가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무슨 일을 떠넘기게 될지 나조차도 두렵다.”

“하지만 난 그래도…….”

다만 류제는 그 제물이 죄 없는 렌이라는 게 싫었다.

“류제 신리여, 그것이 과연 렌 지미가 원하는 것일까?”

멈칫하는 류제를 봤지만 니냐롯트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도 당장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지위상 말로써 움직임을 취하면 공격당할 위험이 컸다.

저번 회의에서 니냐롯트는 위가 저릿할 정도의 압박을 받았다. 적어도 귀중한 패가 될지도 모르는 류제 신리를 귀족파가 멋대로 휘두르도록 눈 뜨고 보낼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내 쪽에서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 그러니 그대는 교장이 발표할 때까지 어떠한 입장도 표하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강한 어빌리티를 가진 그대는 강대한 권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어. 그대가 일에 끼어들수록 지켜주기 힘들어진다. 부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주길 바라.”

왕녀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부탁했다.

만에 하나 납치 건이 그녀를 휘두르기 위해 귀족파의 알량한 계략이 들어간 사건이라면 더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마국 토벌에 집중하는 그녀에게 포르테와 미노타 왕자까지 써서 미노타를 얽은 그 목적이 뭘까.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의 골을 더 깊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데.

그들의 꿍꿍이를 알기 위해서라도 판을 뒤흔들 류제 신리의 발언은 신중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친위대들을 뒤로하고 그에게 부탁했다.

니냐롯트는 류제가 입을 열 때까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알았어. 고개 들어. 네 잘못도 아니잖아.”

대제국 키아나트리체의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가 고개를 숙이다니. 몸들 바를 모른 류제가 항복을 표했다. 왕녀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적어도 어른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그보다는 훨씬 유능했다.

렌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그는 허탈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학교를 떠나기 전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의 고집을 용서해 주었으면 하구나.”

갑작스러운 발언에 류제가 눈을 떴다.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는 그녀의 다리는 멀쩡하게 바닥에 붙어있었다.

“학교를 떠나? 그만둔다는 거야?”

“잘 모르겠다.”

“납치 건 때문에?”

“이번 연도 국제회의에 따라 나라카로 향하거나 미노타와의 전쟁 준비에 앞장서야 한다.”

국제회의? 나라카? 전쟁 준비? 그에게로 너무 많은 것들이 들이닥쳤다.

“놀라운 말들투성이네. 미노타는 그렇다 쳐도 네가 마국을 왜 가?”

“토벌.”

“토벌?”

말고 학교를 급히 떠나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아직은 가설의 단계이기 때문에 말하지는 않았다. 말대로, 모르는 게 약이다.

“작년부터 논의되던 사항이다. 그대도 작년부터 아가타에 너무 높은 등급의 마족이 자주 들이닥쳤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지. 나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류제가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체육대회 때 병마의 군주, 라우라 축제 때 화마의 군주, 여름방학 때 수마의 군주, 그리고 이번 납치 사건 때 백마의 군주가 키아나트리체에 나타났다.

그 많은 군주급 존재들을 한꺼번에 같은 나라, 비슷한 지역에서 목격하는 것은 번개가 같은 자리에 열 번이 떨어져도 부족한 확률이었다. 그건 류제 그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폐하께서는 이 불안을 한시라도 빨리 종식시키길 원하신다. 복수를 꿈꾸는 마족들이 술수를 부리기 전 왕족의 의무를 받들어 내게 마국을 멸망시키라 이르셨지. 그것을 왕위를 내려놓기 전 이루어야 할 마지막 업적이라 여기시는 분이야.”

왕좌에 앉은 그에게서 명을 받들었던 그녀 역시 마국 토벌을 평생의 의무로 안았다.

명을 완벽하게 수행해 낸다면 어마마마를 그리워하는 아바마마의 복수심이 누그러질지도 모른다.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 간의 갈등의 골이 줄어들 듯 그들의 관계가 옛날처럼 자상한 부녀 관계로 돌아간다면 바랄 것도 없다.

“내가 예전 어마마마의 일로 아바마마께서 이상해지셨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 마왕이 죽은 틈을 타 마국의 존재를 무로 만들지 않으면 불바다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라는 불안감이 아바마마께 내재한 것 같다.”

“…그런 일까지 겹쳤다니. 내 생각이 짧았구나. 미노타에 이어 마국까지. 그놈의 마족, 마족. 사사건건 방해만 하네. 왜 항상 일은 생각대로 안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대뿐만이 아냐. 하아, 아니지. 약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구나. 그대도 마음이 아플 텐데.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다오.”

니냐롯트는 매일같이 꾸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불바다가 된 아가타. 울부짖는 누군가. 그녀의 선택을 원망하는 시선. 그게 현실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그대들과 함께 있고 싶지만 나의 신분이 나를 이곳에 두지 않는구나.”

고고하던 고개를 숙여 잔머리를 귓등으로 넘긴 니냐롯트가 아련하게 아가타의 전경을 흘겼다. 짧게 미소 지은 그녀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류제를 보았다.

작은 경고의 전언 말고 다른 볼일이 떠오른 그녀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그대여,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날 위해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가?”

“널 위해?”

“안 되면 되었다. 강요는 아니야.”

“주말은 토요일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그때는 건강검진을 가야 하거든. 무슨 일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류제는 왕녀의 부탁이 분명 이번 사건과 연관된 일인 줄 알았다. 어색한 듯 손을 주무르던 니냐롯트는 곧 루이나가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재촉했다.

“나와 데이트하지. 싫다면 거절해도 좋다.”

고고한 절벽 위의 꽃의 어울리지 않는 제안에 류제는 얼이 빠졌다.

지금 나와 농담하자는 건가?

찬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간질이며 장막을 걷어냈다가 잠재웠다. 짧은 정적이 둘 사이를 메웠다.

왕녀의 표정은 대체로 옅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기 어렵지만 높은 지위가 있어서라도 상황 파악 못 하는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농담을 주고받기는 섣부르니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

“…….”

짐작이 안 간다. 목적을 모르는 이상 류제는 답을 내리기 머뭇거려졌다.

데이트를 한다고 쳐도 친위대들은 어쩌고. 그런 애들이 간섭하는 건 수학여행 때로 끝내고 싶었다. 사생활도 고려 안 해주는 놈들하고 다시 얽히는 건 이유가 뭐가 되었건 사양이다.

“그게―”

그러나 아까까지 왕녀와 했던 대화를 돌이켜 보면 그것을 빌미로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니냐롯트는 그게 그렇게도 충격적인 발언이었나 어흠, 헛기침을 했다. 나갔던 류제의 정신이 반짝 돌아옴을 확인한 그녀가 점잖게 독촉했다.

“곧 루이나가 올 테니 결정을 서둘러줬으면 하군.”

“데이트라면 치…친위대는 어쩔 건데?”

“나는 데이트라고 말했다. 데이트에 다른 사람을 부를 만큼 세상 물정 어둡지는 않아.”

그러니까 친위대를 따돌리는 게 가능하냐는 말이지. 의외로 상식적인 발언에 류제는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뭐, 지금도 루이나를 따돌리고 단둘이 마주했지만 여기는 학교고 일요일에 만날 곳은 학교 밖이잖아. 지금은 외출 금지가 걸려있지 않나?

“외출이라면 허가를 내려주마. 다른 학생이면 몰라도 그대라면 가능할 것이다.”

“내일까지 답을 줘도 될까? 갑작스러워서.”

류제가 기어코 한발 물러섰다. 루이나가 들었더라면 감히 하늘 같으신 왕녀 저하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모습에 눈에 선했다.

반대로 수락하면 감히 왕녀와 단둘이 있으려 한다고 열불 내겠지. 상상 속에서도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일요일 한 시에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지. 오지 않는다면 거절한 것으로 알겠다.”

“괜찮겠어?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하지 않아?”

“변장을 할 것이니 괜찮다. 들킨 적도 없고. 그대가 발설하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누가 이 나라의 왕녀가 지하철을 탈 것이라 생각하겠나?”

장난스레 웃어 보인 니냐롯트는 루이나가 진짜로 훼방을 놓기 전 신관 다리를 떠났다. 작별 인사를 고하던 커다란 손이 흠칫거렸다. 건물 사이로 비치는 태양 빛에 눈이 부신 류제도 그늘로 걸어 들어갔다.

데이트라니. 말은 잘해. 나에게 사적인 감정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류제는 왕녀의 약속에 즉시 답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무도 없는 도서부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간 류제는 미나가 추천해 주었던 책을 꺼내 책상에 앉았다. 두꺼운 책을 펼치기 전 류제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학교에 감금되어 지루함을 끄적거리던 학생들은 아침 출석 체크를 마치면 보충수업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 기숙사로 돌아가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운동장 한편에 자리 잡은 기간트리카 대결장은 훈련소대 배치를 받고 졸업만 기다리는 3학년 선배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이따금 비키 말을 들어보면 종종 선배들에게서 대결 제안이 들어온다고 한다. 유명한 어빌리터 귀족 가문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왔으니 좋은 연습 상대라 생각된 것일까. 비슷한 이유로 류제도 며칠간 선배들의 심심풀이 대상이었다.

비키와 룸메이트인 유네도 비키의 영향을 받았는지 선배들에게 부탁해 가며 기간트리카 연습에 열심이라고 들었다. 그때 있었던 일 때문인가 싶다.

해가 바뀌어도 제자리에 멈춰있는 건 류제 그밖에 없다. 왕녀도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었지. 다들 모르는 사이에 길을 찾아 가버리는구나.

아니지. 내 일도 아닌데 나서서 고민해서 뭐 하나. 가장 처음 보이는 문장을 읽어 내리던 류제는 이번에도 찾는 내용이 없음을 깨닫고 표지를 닫았다.

왕녀는 무슨 수로 나라카를 토벌할 셈이지. 마왕의 혼을 가졌다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렌과 나는… 같이 있을 수 있을까?

걱정이 마음에 뚫린 구멍을 갉아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싫었다. 재작년에 어빌리티를 발현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다. 바라는 거 없이 그저 평범했으면 했는데. 이런 힘 따위 좋아서 가진 것도 아냐. 렌을 지키지도 못하는걸.

“괜찮아?”

지친 그를 위로하는 상냥한 목소리가 귀를 쓰다듬었다.

눈앞이 멍해졌던 류제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여는 소리가 안 들렸는데 언제 온 걸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다.

“왜 멍하니 있어?”

“미나, 왔구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류제가 그녀를 반겼다.

미끄러진 안경테를 특이하게 새끼손가락으로 올리는 버릇이 있는 미나는 힘들 때 종종 조언을 해주었다. 미나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죄책감도, 마음의 구멍도 덮어버릴 수 있어서 류제는 미나와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생각 좀 하느라 온지도 몰랐네.”

“후후, 어디 아픈 건가 했어.”

웃으며 인사한 미나가 류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꾸준히 오는 사람은 책벌레인 미나 정도가 고작인 도서부 동아리실은 바깥소리마저도 침체되었다. 단둘뿐인 부실에서 미나가 단아하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또 렌 때문이지?”

“난 알기 쉬운 부류인가 봐. 너한텐 항상 들통이 나는데 왜 렌은 모르는 걸까.”

반쯤은 이상한 제안을 한 왕녀 때문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비밀로 하라고 했으니 굳이 미나에게 왕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류제가 덮었던 책을 다시 읽는 척했다. 미나도 골라온 책을 내려두었다.

“네가 걱정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렌이잖아. 더군다나 렌 학교에 안 나오니 말 다 했지. 반 분위기도 안 좋고. 류제,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미안. 말할 수 없어.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말고 마족과 얽혔다고만 알아 둬.”

미나를 믿지만 교장과 왕녀에게 연이어 경고를 받았던지라 쉽사리 진실을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다. 입이 싼 남자라고 생각되기도 싫다.

실은 담아둔 것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던 류제는 그래서는 안 됨을 되뇌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미나는 류제의 고민을 쉽게 추측했다.

“렌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학생들 외출 금지당했던 성탄제 전 주말에?”

미노타에 있는 왕실 관계자를 세뇌해 세니타리 롯으로 제립학교 학생을 납치하도록 지시한 율폰의 계획에 동참했던 미나는 당연히 이 사건이 전말을 알았다.

유네 나르타의 불신을 다시 지펴준 것도 좋지만 그중에 렌 지미가 학교에 부재하게 된 건 쾌재를 부를 정도의 대성과였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걱정하는 척 아양을 떨었다.

“그 사건이 아직 해결이 안 되어서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거겠지. 마족이라면 선생님들에게 전투 대기 명력이 내려졌을 텐데 그런 건 안 보이고. 마족이라기 보단 아마도 비어빌리터가 어빌리터인 렌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을 거야. 납치라든가, 상해를 입혔다거나. 학생들을 보호하고 싶은 선생님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어.”

“그게… 미나, 그러니까…….”

영리한 건 알고 있었지만 류제는 이런 반 분위기 속에서 그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정답에 근접한 추리를 해낸 미나가 놀라웠다.

반 친구들은 렌의 험담을 하느라 바빴다. 렌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미나가 휩쓸려도 할 말이 없는데 알아주다니. 렌은 언제 미나의 심성을 알아줄까. 류제는 세심함에 물씬 감동받았다.

우쭐거리는 마음을 숨긴 미나는 애잔한 말로 류제를 도닥였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런 거겠지 싶어. 괜히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매번 제립학교 학생은 키아나트리체의 최후의 검이라고 하는걸. 이럴 때에만 어린애처럼 싸고돌려고 하고. 좀 치사해.”

“다른 친구들이 다 너 같았으면 좋을 텐데.”

진짜로 미나만 알아줄 줄이야. 류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1년 동안 함께했던 주제에 본가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렌을 험담하던 친구들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매일 아침마다 친구들이 빈 렌의 자리를 보며 수군거리는 걸 보는 것도 지쳤다.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대충은 맞아.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겐 그냥 마족과 얽혔다고만 해줘.”

“많은 사정이 있었나 보구나. 너도 힘들었겠네, 류제. 그래도 힘내. 이런 말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야. 그 말 한마디에 힘이 났어. 고마워.”

다른 친구들도 이해해 주면 좋을 텐데. 렌의 비밀주의나 무신경함 등을 이야기할 때는 동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만악의 근원은 세니타리 롯과 습격했던 마족인걸.

물론 무턱대고 몸을 날리는 그 버릇은 류제도 진절머리가 났다.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건 그냥 그런 성격이라서다. 그의 잣대에 렌을 집어넣는 건 무례할지 몰라도 틀에 맞지 않는 렌을 보면 류제만 스트레스를 받았다.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어른의 사정이잖아.”

“최근에 그 단어가 정말 듣기 싫어지고 있어.”

세라의 교사 자격 박탈도, 렌이 간신히 처방받았던 ‘힐링 팩터’도 참견은 고사하고 다 어른들만의 사정이란다.

그의 편이 되어준 세라마저 학교를 떠나버린 지금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여기저기서 어빌리티 척도가 높은 자신을 휘두르려고 하는 건 경계하고 있다. 응급실에서 봤던 어떤 귀족이 그랬으니까. 내게 빚을 만들어둬서 좋다고. 그것도 전부 어른들의 사정이겠지.

“류제, 너는 우리들보다 훨씬 강하니까 더 휘둘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네가 렌을 구할 수 있었던 걸 거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요즘엔 힘드네. 여러모로.”

류제가 렌을 구했다는 걸 미나가 어떻게 아는지는 아무래도 좋은 듯 그가 눈을 감았다.

상냥한 목소리에 마음을 기울일수록 부정적이게 된다.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류제는 속삭임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이 모든 상황이 싫고 억눌리기만 하는 마왕의 혼이 연약한 인간의 마음 따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류제, 넌 렌 지미를 지키고 싶지?]

“…지키고 싶어. 상처받지 않게.”

비밀스럽게 입을 연 미나가 마법을 걸었다. 인간의 마음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균열을 파고든 그녀는 등 뒤로 류제를 감싸 안고 볼을 쓰다듬었다.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류제는 환상처럼 들리는 미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는 그 아이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킬 방법을 알고 있어.]

“그건… 모든… 위협… 어떻게…….”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렌이 이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사랑해 달라는 둥 더러운 욕심 부리지 않을 테니까 행복하게 웃길 바라지만 상황은 항상 나빠졌다.

[다 없애버리는 거야. 위협이 되는 것들을. 네 손으로 모조리.]

없애버린다고?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아이인걸. 휘둘리기만 하고, 지키려고 하지만 타고시아 해변의 가는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렌도 나중에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웠다.

[전쟁을 하는 거야.]

미나는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을 침범했다. 달콤한 해법이 최면처럼 박혔다.

[왕녀님과 함께 적들을 다 해치워 버리자. 비어빌리터들 사이에서 힘을 가지기 위해선 참전해야만 해. 너라면 가능해, 류제. 할 수 있어.]

“참전…….”

[그래, 착하지?]

인간들은 모두들 네 힘을 원하는걸.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달콤한 유혹은 개울에 던져진 솜사탕처럼 녹아들어 갔다. 이로써 그는 렌 지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것이다.

미노타를 부추긴 건 왕녀를 조급하게 만들려는 패였다. 미나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키아나트리체와 마족과의 전면전이다. 망가진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대신할 귀족파의 새로운 말 류제 신리는 당연 왕녀와 함께 토벌의 중요한 인물로 내정될 것이다.

“그런데 류제, 이번 주 일요일에 새로운 책이 도착한대. 정리해야 하는데 날 도와줄 수 있어?”

“이번 주 일요일?”

돌변했던 미나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깜박 존 것 같은 류제의 눈동자가 정상이었다. 그는 이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흐트러진 그에게 미나의 암시는 쉽게 걸렸지만 썩어도 준치, 그는 마왕의 혼을 가졌다. 류제는 아까 만났던 왕녀의 제안을 먼저 떠올렸다.

“일요일은… 내일 답해줘도 돼?”

“일이 있나 보구나. 어쩔 수 없지. 답변 기다릴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

미나는 실망했다. 그녀에게 푹 빠진 류제가 보류를 입에 담을 줄은 몰라 분했다. 렌 지미도 없는데 아직 그에게 그녀는 0순위가 아니었다.

미나는 왕녀와의 선약을 알고 있었다. 류제에게 선택받을 자신이 있었는데 왕녀란 말이지. 미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끊임없이 무너뜨리려고 했어도 왕녀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왕녀를 넘어서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마족 부흥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재경 없이도 왕녀와 미나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는 다섯 번째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를 활성화시킨 류제는 내일 과연 누구와 만나야 하나 고민하며 병실을 나왔다.

나무판자가 작게 부딪치는 소리가 공기 중에 희석되어 사라졌다.

약 기운이 사라진 재경이 눈을 떴을 때 류제는 학교로 돌아간 후였다. 남이 들어왔다는 흔적이라곤 열린 창문이 다인 병실에 누운 재경은 오늘도 심심하게 보냈음을 알고 실망했다.

호감도 이벤트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학교에 있을 류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어도 사라처럼 공간을 열어볼 능력도 없는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기다렸다.

* * *

다양한 히로인을 공략하는 것에 목적을 둔 미연시 게임은 멀티 엔딩을 지향하는 장르이므로 이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에도 엔딩이 몇 가지 있었다.

엔딩의 종류에 대해선 재경이 이따금 말했지만 한데 모아 정리한 적은 없었다. 그걸 의식한 재경도 분기를 한 달 앞둔 이 시점에서 엔딩 종류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루고 미루던 그는 어제저녁 간호사가 구해준 종이쪽지에 글씨를 깨작거렸다. 몇 번이고 봐서 머릿속에 박혀있을 대로 박힌 정보들이었지만 그가 기어코 그만이 아는 글자로 적어 내리는 이유는 당장 심심했기 때문이다.

병마나 백마 때처럼 게임 진행 중간에 게임 오버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분기가 갈리는 밸런타인데이 이후에 볼 수 있는 엔딩은 모두 다음과 같았다.

배드 엔딩

1. 왕녀의 호감도가 5보다 작거나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3 미만일 때 왕녀에게 고백 → 전쟁 패배 및 마왕 엔딩

2. 미나의 호감도에 상관없이 미나에게 고백 → 미나가 돌변하여 마왕성 감금 엔딩

3. 왕녀와 미나를 제외하고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5 미만일 때 해당하는 히로인에게 고백 → 확률에 따라 히로인이 거절. 실망한 주인공의 뒤로 미나가 등장하여 히로인 음문 타락 엔딩

4. 히로인 호감도가 2 이하이고 해당하는 히로인에게 고백 → 고백 거절 및 3의 엔딩

5. 히로인 호감도가 2 이하이고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음 → 고독한 마왕 엔딩

6. 히로인 호감도가 전원 3 이상이고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음 → 절반 확률로 5의 엔딩

노말(해피) 엔딩

7. 비키 호감도가 5일 때 비키에게 고백 → 졸업 후 비키와 백장미 부대 엔딩

8. 유네 호감도가 5일 때 유네에게 고백 → 졸업 후 유네와 왕실 공무원 엔딩

9. 세라 호감도가 5일 때 세라에게 고백 → 졸업 후 세라에게 찾아와 프러포즈 엔딩

10. 히로인 호감도가 전원 3 이상이고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음 → 절반 확률로 모두는 친구 엔딩

11. 왕녀와 미나를 제외하고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3 이상 5 미만일 때 고백했을 시 확률에 따라 10의 엔딩

트루 엔딩

왕녀 호감도가 5이고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3 이상일 때 왕녀에게 고백 → 전쟁 승리 및 영웅 엔딩

시크릿 엔딩

모든 엔딩을 봤을 때 열리는 스토리로, 로라 하놋의 진실과 마왕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엔딩

정확성을 따지자면 할 말이 없지만 현재 히로인의 호감도는 비키가 4, 유네가 5, 세라는(그렇게 생각하기 싫어도 정황상) 0, 미나는 4, 왕녀가 3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길이 없는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이대로 유네 루트로 가게 되면 무난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비키의 호감도가 4이니 비키 엔딩으로 갈 확률도 꽤 크다. 만에 하나로 생각해도 차선책으로서 괜찮은 루트였다.

이제 이번 달로 지긋지긋한 호감도 이벤트는 딱 두 번 남았다. 바로 왕녀와 미나의 마지막 다섯 번째 호감도 이벤트.

이번 이벤트의 특이점은 왕녀와 미나 둘 중 한 사람만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한 명의 호감도만 올리는 게 가능했다.

어차피 가장 확실한 해피 엔딩인 유네 루트밖에 보지 않는지라 재경은 자신이 학교에 없는 사이 류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상관없었다.

최선의 선택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쭙잖게 왕녀 루트를 노리기도 뭐하니까. 미나 루트는 당연히 가지 않을 테고 미나의 호감도가 유네 정도로 높아지는 것도 불안했다.

재경이 방구석에서 지적질해도 이 게임의 엔딩을 좌우하는 류제는 물론 재경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류제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호감도 이벤트고 이 세계의 예언이고 그저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일요일 이른 시각부터 지하철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겨울 특유의 꾸물꾸물한 구름이 낀 날. 하늘에서는 눈이 내릴 듯하지만 날이 건조하니 끝끝내 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학교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거리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일탈한 기분이다.

벽에 기댄 채 사람들을 구경하는 올곧은 체격과 큰 키는 충분히 성인처럼 보였다. 제립학교 학생임을 알아보지 못하게끔 멀끔한 사복에 새까만 가죽 장갑을 낀 그는 외투 소매로 가려진 슬렉터로 시간을 살폈다.

약속 시간까지 한참 멀었다. 소매를 당긴 그는 슬렉터를 숨겨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입을 벌리자 입김이 흩어졌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나이를 막론하고 모르는 여자들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왼쪽 눈까지 다 가린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류제는 검은 장막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부지런히 역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번잡하게 움직였다.

유동 인구의 흐름을 관찰하다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류제는 은근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이미 수려한 외모에 반한 여자는 용기를 내서 다가왔다.

“누구 기다려요? 심심하면 저랑 이야기할래요? 저도 약속이 취소되어서 할 일 없거든요.”

류제는 무관심을 표했다. 마을에만 나오면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거절하기도 귀찮다. 가시 돋친 마음이 심술을 찔렀다.

괜히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나. 이게 몇 번째야. 근처에 사람도 많으니 굳이 나한테 와서 말을 걸지 않아도 될 텐데.

“뭐야. 기분 나빠.”

그가 무시로 일관하니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토라져 군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다가온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싫은 일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왜 마음 써가면서 거절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슬슬 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강박적으로 시간을 살폈다. 1시가 되기 5분 전.

왕녀의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면 약속 시간에 지각할 리도 없겠지만 기다림은 지루했다. 왕녀의 목적을 빨리 알아내고 싶고 전쟁이니 나라카니 토벌이니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저기.”

질리지도 않고 어떤 여자가 또 말을 걸어왔다.

검정 선글라스와 털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여자는 언뜻 보면 몸이 아픈 병자처럼 보였다. 인위적인 갈색 머리카락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비치는 속살은 햇빛에 닿아본 적 없는 아이 것처럼 티 없이 순수했다.

그녀가 누가 되었든 상관할 바는 없었다. 류제는 여자를 힐끗거리다가 무시로 일관했다. 그나저나 왕녀는 언제 오는 거람. 1시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돌아가야지.

“저기, 류제 신리여. 친위대는 없으니 가까이해도 상관없다만.”

“어?”

여자의 입에서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가 들렸다. 슬렉터를 만지작거리던 류제가 놀라 그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가지런한 섬섬옥수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아름다운 은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와…왕… 아니, 그… 아, 너였구나.”

멋대로 왕녀라고 말하려는 입을 가린 류제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머쓱해하는 류제를 보며 쿡쿡거린 왕녀가 선글라스를 올리며 가슴을 뿌듯하게 내밀었다.

“알아보지 못했다니 자신감이 생기는구나. 내 변장 실력도 그리 녹슬지는 않았군.”

“그런 차림으로 올 줄은 몰랐어.”

“잠행을 하려면 기본이지. 아가타에 내 얼굴을 모르는 이가 드무니.”

하관을 가린 마스크는 겨울이라 흔해서 그러려니 넘어갈 정도였다. 얼핏 스쳐 지나간다면 이 수상쩍은 사람이 왕녀란 건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쪽으로.”

왕녀가 망설임 없이 류제를 지나쳐 앞섰다.

위풍당당한 그녀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표를 끊었다. 지하철표를 끊을 줄 알다니 의외였다. 왕족이라 서민들의 교통수단 따위 익숙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뒤따라 역장에게 표를 넘기고 지하철을 탄 류제는 건강검진 가는 방향임을 확인했다. 익숙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무의식적인 행위를 되짚느라 생소하다.

마침 두 자리가 비어 그들은 나란히 앉았다. 학교와는 다르게 그녀가 일국의 왕녀임을 아는 사람은 그뿐이다. 왕녀는 의연했지만 사람이 많아질수록 들키면 어쩌나 류제는 조바심이 났다.

“어디로 가게?”

“필히 구매할 것이 있다.”

“굳이 나와 함께할 이유가 있어?”

“그대의 안목이 필요하지.”

선글라스와 마스크 때문에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위에 반달처럼 웃는 입술을 덧씌우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 미소에서 보이는 고집을 류제는 잠자코 따라주기로 했다.

철로를 따라 이동하다 어떤 역에서 내린 류제는 근방에 왕녀가 갈 만한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평범한 걸음으로 삼십 분 정도 가면 렌이 입원한 병원이 있었다.

“이쪽으로.”

낯선 곳에서 머뭇거림 없이 류제를 이끈 니냐롯트가 걸음을 서둘렀다. 유네 때처럼 납치라도 되면 어쩌나 왕녀의 곁에 붙은 류제가 더 수상쩍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젊은 커플의 종종거리는 데이트 같아서 길 가던 노인네가 귀엽게 구경했다.

“골목으로 들어가지는 마. 위험하니까.”

“그러니 그대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렇지 않나?”

무뢰배들에게 당할 만큼 약하냐는 질문에 류제는 답하지 않았다. 알고서도 묻는 거다, 저건. 영악하기는. 데이트니 뭐니 이상한 말로 신경 쓰이게 하더니 결국 나를 보디가드로 써먹는다 이거지.

“구매하길 원하는 건 향초다.”

“향초?”

“그래, 편히 잠들 수 있는 그 향초. 그대가 선물해 준 것만큼 좋은 향초를 파는 가게를 찾았거든. 그대에게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아아, 그거? 그건 딱히 내가…….”

작년 수학여행 때 렌의 고집에 못 이겨 그가 불면증인 왕녀에게 향초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보충하려는 건가. 류제는 친위대에게 불면증을 숨기려는 왕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이곳이다.”

가게로 들어가는 왕녀 대신 류제가 문을 밀어 열었다.

삼대째 장인이 만든 수제 향초 전문점에 나라의 왕녀가 손수 걸음을 하다니. 저 주인장은 그걸 알까? 세상 물정 모를 신분일 법도 한데 왕녀도 꽤나 말괄량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꽃향기나 과일을 좋아할 것 같은 왕녀는 여자들에게 인기 있다는 향초가 진열된 선반이 아닌 남자들을 위한 향초를 살폈다.

뭘 사든 관심 없는 류제는 왕녀의 취향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불면증 때문이 아니라 예의 ‘아바마마’에게 줄 선물인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했는데 나라카 토벌 전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려는 건가. 그래서 남자인 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럼 이걸로 하지.”

류제는 조언도 그에 어울릴 향으로 던져주었다.

“그거면 돼?”

“미안하지만 더 남았다.”

“또 있다고?”

“기왕 시간 내주었으니 나와 계속 어울려다오. 오랜만에 나오니까 즐겁구나.”

향초를 사고 왠지 신이 난 것 같은 왕녀가 류제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어릴 적 선물받은 비녀를 고집스레 하고 다니는 그녀를 떠올리자니 정말 황제를 위한 선물을 사는 건가 싶다.

왕녀가 다음으로 들른 곳은 꽃가게였다.

귀찮기도 하고, 이런 세심한 곳이 서툰 류제는 실수로 꽃병을 발로 차 깨뜨릴까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는 동안 니냐롯트는 문을 두드려 다소곳이 주인장을 불렀다.

“‘솔라’라는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만.”

“이야기하셨던 것보다 일찍 오셨군요. 선물용 꽃바구니였던가요? 여기 있습니다.”

왕족만 가질 수 있는 미들 네임을 가명으로 쓴 왕녀는 점원에게서 예약한 꽃바구니 하나를 건네받다가 휘청거렸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류제가 놀라 대신 들어주었다. 바구니가 그녀의 몸집에 비해 꽤 커다랬다.

“고맙군.”

겸연쩍은 왕녀를 본 것만으로 감사는 충분하다. 류제는 꽃이 다치지 않게끔 조심히 바구니를 돌렸다.

“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계산을 위해 지갑을 꺼내던 왕녀는 어리둥절했다.

류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덕분에 왕녀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정면으로 보였다.

“선물로 드릴 거 아냐? 그… 네 아버지에게.”

“후후, 과연.”

장난기가 생긴 왕녀는 수수께끼라도 내듯 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인장에게 의무적인 인사를 끝으로 가게를 떠났다.

“이쪽으로 오거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다오.”

“아직 남았어?”

다시 거리로 나온 니냐롯트가 걸음을 빨리했다. 서두르던 그들이 향초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새롭게 찾은 곳은 채소 가게였다. 겨울이라 온실에서 키운 채소들만이 진열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이런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왕녀가 고른 것은 토마토 한 상자였다.

황제 폐하께서 그 흔한 채소를 좋아하실 줄이야. 왕녀가 발품을 팔 만큼 왕궁에서는 토마토를 구하기 힘들구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채 오른쪽에는 꽃바구니, 왼쪽에는 토마토가 든 상자를 옆구리에 낀 류제는 얌전히 왕녀를 뒤따랐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닫혔다고 되어 있는데?”

“부엌을 빌릴 것이다. 토마토를 손질하고 싶거든.”

왕녀가 도착한 곳은 아직 열지 않은 작은 카페였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닫힘’으로 돌려진 팻말이 걸린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고개를 내민 주인이 실례를 범했다.

“오픈 전입니다.”

“며칠 전에 ‘솔라’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드렸습니다만.”

“아아, 부엌을 빌리신다는 분이군요. 지저분합니다만 들어오세요.”

카페 주인은 얼굴을 꽁꽁 가린 수상한 자들을 훑더니 의심 없이 들여보냈다.

낮은 문을 지나다 이마를 부딪친 류제는 낡은 나무 냄새가 나는 내부를 무신경하게 살폈다. 왕녀가 말하기에 어딘가 특별한 줄 알았더니 정말 영업 준비 중인 평범한 카페였다.

“마음대로 쓰시면 됩니다.”

“감사하오.”

예스러운 표현을 잘 못 들은 듯 주인은 손을 내저으며 테이블 청소를 계속했다.

류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왕녀는 토마토 상자를 내려놓게 하더니 탐스러운 토마토를 몇 개 꺼냈다.

“전부 썰기엔 양이 많겠지.”

“파스타 소스라도 개발할 셈이야?”

황제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주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면류는 미리 만들어놓으면 불 텐데.

류제는 왕녀의 손을 거쳤던 기괴한 음식을 떠올렸다. 새까맣게 탄 민물고기. 수학여행 때 생선도 제대로 굽지 못하는 왕녀가 요리라고? 분명 비키처럼 거하게 태워먹을 것이 뻔했다. 날더러 그 수습을 해달라는 건가.

“설마. 그런 대단한 것은 난 만들지 못한다.”

“그럼 여기는 왜 온 거야?”

“토마토에 설탕을 버무리면 맛있다고들 하지. 영양에 나쁘다고 해서 먹어본 적은 없다만.”

이번엔 그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토마토를 찬물에 씻은 왕녀가 칼을 들고 서툴게 잘랐다. 어디서 본 것은 있는지 비키만큼 솜씨가 나쁘지 않았지만 즙이 터지는 토마토 때문에 도마가 금방 엉망이 되었다.

아세미를 해변에 내버려 둔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던 류제가 기어코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까? 둘이서 하면 금방 끝날 텐데.”

“아니, 내가 하지. 그대는 자른 토마토를 저 통에 담아다오.”

니냐롯트가 들고 온 가방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소지품이 든 가방인 줄 알았던 류제는 그 안에서 도시락 통을 꺼냈다. 철두철미하군. 황제가 설탕에 버무린 토마토를 좋아하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그러고 보니 렌도 좋아하지.

높이가 제각기인 토마토를 담던 류제는 상자에 있는 모든 토마토를 기어코 썰어보이는 왕녀를 보며 집념이 만만찮음을 느꼈다.

“충분하군. 설탕은… 이만큼이면 되려나.”

“와아악! 그만, 내려놔!”

비키보다는 상식적인 요리 센스가 있어 잘하는가 싶더니 왕녀가 설탕 포대를 들어 도시락 통 안에 설탕을 들입다 부었다. 아차한 류제가 손목을 잡아챘다.

산처럼 쌓인 설탕을 덜어낸 류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달지 않을까.”

“그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요리치들의 특성이야 그거? 설탕은 이만큼이면 돼.”

“그대와 함께하길 잘했어. 알려줘서 고맙군.”

3단 도시락 통을 전부 토마토와 설탕으로 채운 니냐롯트는 설탕이 스며든 토마토 과육을 만족스럽게 감상하며 뚜껑을 닫았다.

낯선 카페 주방에서 볼일은 이것이 다였는지 그녀가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마련했다.”

“역으로 돌아가면 되지? 방향은 이쪽이야.”

“그럴 리가. 가장 중요한 볼일을 마치지 않았는데. 둔하구나. 아직도 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건가, 그대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류제의 지시를 무시한 왕녀는 골목을 지나 지름길을 통해 대로변 건너편에 보이는 하얀 건물 앞에 섰다.

마스크를 내린 그녀는 이제 알겠냐며 류제를 보고 웃었다.

“여기는…….”

이곳은 아가타의 가장 큰 병원이었다. 몇 번 와본 길이니 지리는 잘 알지만 왕녀의 최종 목적지가 렌이 입원한 병원일 줄이야.

적절한 반응을 고르기 전, 니냐롯트가 주저 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류제가 당황해서 함께 움직였다. 우선 큰길을 건너 왕녀를 무사히 병원에 데려다 놓기로 한 류제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걸음을 따라 묻고 싶은 말들이 하나둘 정리되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왕녀의 뒷모습만 본 채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왕녀에게 렌은 손수 선물을 고르고 요리를 해주는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겉보기에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둘 사이의 진실은 뭘까. 두 사람 모두 중요한 부분에서 입을 다무니 궁금하다.

그보다 왕녀의 사과는 거절당하지 않았나? 혹시 왕녀도 렌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건 아니겠지.

“괜찮겠어? 지금 가면 깨어있을 텐데.”

타고시아 해변에 찾아왔었던 수마의 농간에 놀아났던 날, 렌이 왕녀의 손등 키스를 거절한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는 류제가 그 부분을 꼬집었다.

고르고 고른 질문 중에 제일 먼저 나온 말이 이거라니. 렌만 관련되면 한심한 사람처럼 굴게 된다.

“상세히 아는구나. 보통은 잠들어 있나 보군.”

과연 절친한 친구라서 그런가 살뜰히도 챙긴다. 외출 금지령 때문에 친구들이 오지 못해서 힘겨워할까 걱정했는데 그녀는 행동이 자유로운 류제가 있어서 다행이라 안도했다. 류제의 생각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순수한 시선이다.

“아니, 그, 약 먹고 나면 늘 자더라고. 어제도 그랬고.”

뜨끔한 류제가 아닌 척 답했다. 일부러 그런 시간에 찾아가는 주제에 말도 잘한다. 류제는 공연히 긴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마음과 다른 말은 할수록 할 게 못 되었다.

마스크 아래로 입을 달싹거린 니냐롯트는 이대로 말을 돌릴까 하다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아픈 사람을 위로해 주는 데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지. 하물며 1년간 함께한 급우가 아닌가.”

“…그렇지.”

“외출 금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대와 나 단둘이니. 병문안이라면 괜찮은 데이트지 않아?”

“그것도 그래.”

물론 그녀에게도 또 다른 목적은 있었다.

서로 얼굴 보기 껄끄럽지만 병마의 일과 연관된 렌 지미가 백마와 다시금 얽혔으니 만약 이번 사태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가정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니냐롯트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병실은 어디지?”

“그것보다 이게 먼저야. 방문 기록을 작성해야 하거든.”

“어머, 렌 지미 환자 친구분이네. 웬일로 이틀 연속이구나?”

병문안을 자주 와본 류제가 유연하게 안내하던 중 간호사가 류제에게 알은척을 했다. 오늘도 잘생긴 류제를 봐서 행운이라 여기던 간호사는 묘령의 여자가 수상쩍게 뒤를 따르자 손을 멈칫했다.

“누구…시죠?”

“제 친구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뭐야, 여자 친구인가? 저런 외모에 역시 없을 리가 없겠지.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 아니지만 납치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복장 한번 수상하다. 병원이 무슨 병균투성이도 아니고 마스크나 선글라스를 끼고 올 필요는 없는데.

눈여겨보던 간호사는 방문 기록에 류제만 이름을 적자 그들을 불러 세웠다.

“친구분도 이름을 적어주실래요? 미안한데 병원 방침이 그렇거든.”

“아, 이 사람은―”

“이름만 적으면 되는 것이오?”

“이름과 성 모두 쓰세요.”

다분히 예스러운 말투에 간호사는 당황했지만 엄격하게 필기구를 내밀었다. 니냐롯트는 별다른 불평 없이 방문 기록을 작성했다. 훌륭한 필체에 유명 스타를 훔쳐보는 기분이 든 간호사는 괜히 샘이 났다.

“이제 됐어. 안내는 제가 할 테니 누나는 하던 일하세요. 수고하세요.”

“어…어머. 그래.”

펜을 내려놓는 왕녀의 등을 떠밀며 어색하게 웃어 보인 류제는 문제라도 생길세라 후다닥 사라졌다.

항상 마이페이스인 그가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본다.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간호사는 방문 기록을 훔쳐보다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발견했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잘못 보려야 잘못 볼 수 없는 정갈한 왕족의 글씨. 간호사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렸다가 작년에 제1왕녀가 제립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털이 바싹 서서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를 들은 류제는 이름을 써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망했다. 실은 왕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녀를 무사히 렌의 병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문을 열자 간호사들하고 깔깔거리며 놀던 렌이 놀라 얼음이 되었다.

“아… 그… 어? 류제?”

“일어나 있었네?”

류제가 모르는 척 물었다. 그도 어색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병문안도 늘 애매한 시간으로 왔고, 어제도 자고 있는 얼굴만 봤으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 간호사들을 잘 구워삶았는지 수다를 떨던 렌은 아픈 사람이라기보단 학교를 땡땡이친 불량아였다. 심심한 어린애 돌봐주던 간호사들이 잘되었다며 박수를 쳤다.

“친구가 병문안 왔나 보네.”

“일하러 가야 했는데 심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친구들이랑 잘 놀아~”

“아, 누나드을!”

이 어색함을 함께 견뎌주길 원했던 간호사들이 호쾌하게 자리를 비켰다. 간호사들은 수상한 갈색 머리 소녀를 지나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문이 닫히자 병실 안 공기에 어색함이 쌓였다.

“벼…별일이네. 와도 매번 토요일에 오더니. 근데 그 사람은 누구야?”

알아보지 못한 건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류제가 내 병문안에 모르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눈빛이 점점 의심으로 바뀌었다. 설마 렌 지미의 진짜 지인인가 싶었던 재경이 둘러댈 말을 찾느라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건 꽤나 묘한 기분이로군.”

니냐롯트가 가만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갈색 머리와의 언밸런스해서 재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모자를 마저 벗자 숨겨졌던 긴 금발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제야 재경이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기었다.

“왜…왜…왜 왕녀가 여기에 있어?! 뭐야? 무슨 일이야?”

“국가 간의 일에 휘말린 백성을 보러 오는 것도 내 업무의 일환이라.”

“어렵게 말하면 렌이 못 알아듣잖아. 병문안 왔다고 해.”

“그렇게도 말하지.”

니냐롯트는 답답했던 모자와 가발을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늘 비녀를 꽂아 깔끔하게 틀어 올렸던 그녀가 머리를 푼 모습은 류제도 재경도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 사람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자 더 영문을 모르겠다.

“몸 상태는 어떠한가.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지금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재경이 류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 괘…괜찮…은데. 약도 열심히 먹고 있고.”

반성도 안 하고 별생각 없이 놀고 있는 모습을 들켰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부연 설명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류제는 별반 호들갑도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잔소리가 재경은 조금 아쉬웠다.

“너…너희 둘이 같이 병문안을 오다니 놀랍네. 우연히 만난 거야?”

“아니, 함께해 달라 고집한 건 나이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갑자기 데이트를 하자더니 네 병문안이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데이트는 무슨, 사람 부려먹으려는 거지.”

왕녀와 자신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던 류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데이트? 안 그래도 당혹스러운 와중 재경은 더 멍청해졌다.

진히로인인 왕녀는 호감도가 올라가도 주인공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는 히로인은 아니었다. 다만 딱 한 번,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 때에는 유일하게 먼저 제안을 한다.

바로 주말 데이트. 세니타리 롯 사건의 여파로 술렁거리는 아가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등의 이벤트였다.

엔딩 전 류제와 왕녀 사이에서 등장하는 데이트라는 단어는 그때가 마지막이다. 설마 그… 이벤트 중에 나한테 왔다고? 진짜?

“외출 금지로 사정이 생겼으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어… 그…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같은 고양이 사건에 휘말린 동료기도 하고.”

“참 대단한 사건이었지.”

자신의 옷을 떨어뜨린 류제가 다시 주우며 냉소적이게 대꾸했다. 친근함을 표하겠다고 고양이 사건까지 입에 담는 왕녀가 다른 의미로 감탄스럽다.

“아…아하하, 그랬었지. 맞아. 고…고생했었지. 기억은 안 나지만.”

재경이 억지로 웃었다. 류제의 빈정거리는 말투를 끝으로 침묵이 생긴 이 분위기에서 웃지 않으면 끔찍한 가시방석이 지속될 거 같다. 그러면서 류제의 눈치를 슬쩍 살펴보니 반응은 영 무덤덤했다.

그 왕녀의 병문안은 마냥 기뻐하기엔 미묘했다. 이것도 그가 다쳐버린 바람에 왕녀의 스토리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다치지 않았으면 두 사람은 다른 목적으로 데이트를 했겠지만 이벤트 내용이 바뀌는 것에 하나하나 반응하기도 이제는 식었다. 류제가 미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일단… 뭐, 앉…아.”

그가 아까까지 간호사들이 앉아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니냐롯트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다소곳하게 앉았다.

1학기 중간 보스전 이래로 왕녀랑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까먹고 있었던 타고시아 해변에서의 손등 키스 일도 떠올라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곧 퇴원한다고 들었다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냐롯트가 계속 말을 걸었다.

“어, 의사 쌤이 다음 주에는 퇴원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어쩐지 왕녀를 따라 정좌한 재경이 죄라도 저지른 양 힐끗거렸다. 손에는 선물처럼 보이는 뭔가를 들고 있고, 류제와 무려 데이트 중이라는데 괜히 방해한 것 같았다.

“아, 병문안 선물이다. 별건 아니지만.”

선물을 보고 있다 착각한 니냐롯트가 준비한 것을 전해주었다. 얼결에 상자를 받은 재경은 거리낌 없이 포장을 풀다 향초를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이건… 잘 때 쓰는 거… 아닌가.”

살면서 이런 물건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이런 건 평생 가질 일 없다고 생각했다.

“잘 아는구나.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땐 잠이 잘 안 오곤 하지. 악몽을 꾸기도 하고. 그대에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 고…고마워. 잘… 쓸게.”

“이것도 있어.”

커다란 꽃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류제도 사이에 끼었다.

풍성하게 핀 꽃은 위안을 주었다. 꽃과 향초라. 수학여행 때 왕녀의 호감도 물품이 향초였지 아마.

“병원 음식이 그리 맛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단치는 않지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시락 통을 건넸다. 그걸 한 아름에 든 재경은 열어보라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왕녀가 부담스러웠다. 마지못해 그가 맨 위 뚜껑을 열었다.

“어?”

설탕 토마토? 와, 병원에 있는 내내 엄청 당겼었는데. 새콤달콤한 맛을 상상하자 입에 침이 고였다.

입맛을 다시던 재경은 불현듯 자신이 이 간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녀의 정보력이 대단했다.

“어떻게… 말한 적 없는데.”

“쏟아지는 말들 중에서 필요한 것만 걸러내는 건 쉽지.”

한 나라의 왕녀니까. 어빌리터를 대표하는 세력에 친위대들도 많고. 그녀의 질문이라면 의심 없이 답할 학생들이 제립학교에는 천지로 있었다.

왠지 등 뒤로 후광이 비쳐서 재경이 너 잘났다며 주둥이를 우물거렸다. 혹시 다른 층에는 무엇이 있나 해서 뚜껑을 열어 확인해 보니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모든 층이 설탕 토마토였다. 아무리 그가 토마토를 좋아해도 이건 좀 심했다.

“너무 많은데. 다 못 먹어.”

“같이 먹을까?”

짐 정리를 끝낸 류제가 아니꼽게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되나. 내가 만든 것이 무슨 맛이 날까 궁금하구나.”

“뭐? 이…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설탕 토마토를 한입 먹어보려던 재경은 왕녀도 비키만큼이나 요리치라는 걸 기억하고 주춤거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왕녀가 말을 걸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말을 더듬게 된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기니 니냐롯트가 무덤덤하게 의문을 표했다.

“그럼 누가 만들지?”

“아…아니, 류제도 있으니까…….”

“토마토를 잘라 설탕에 버무리는 것쯤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왕녀가 당당하게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 자신감에 괜찮겠지 싶었던 그가 한입 먼저 먹었다. 할머니가 해준 것에 비하면 너무 달았어도 추억의 맛은 여전히 그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근데 겁나 달아. 마실 물이… 아, 다 떨어졌네.”

간호사들과 웃고 떠들며 놀다 보니 물병이 빈 것도 몰랐다.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니 그 전에 왕녀가 말을 꺼냈다.

“이것저것 산다고 마실 것도 잊어버렸구나. 류제여, 그대가 마실 것을 구해주지 않겠나. 병자를 부려먹기는 뭐하고, 내가 다시 변장하기도 애매하니.”

“내가? 알았어. 금방 갔다 올게.”

간단한 일을 부탁받은 류제가 군말 없이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자기가 나가려고 했던 재경이 좌절했다. 왕녀는 어려운 존재였다. 류제가 없다면 이 어색한 상황을 홀로 견뎌야 하는데 버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지. 작년 수학여행 때 내게 향초를 선물하라 류제 신리에게 조언한 건 그대지?”

방해꾼을 내보낸 건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병실이 조용해지자 그녀가 작지만 확실하게 물었다.

“어… 응? 뭐?”

예고 없이 들이닥쳤어도 누군가 병문안을 와준 게 기뻤던 재경은 이 기회에 왕녀의 생각이나 들어보자 안일하게 앉아있다 허용량을 넘어서는 질문을 듣고 뇌가 제 기능을 멈추었다.

거두절미라는 의미를 못 알아들은 데다 당연히 몰라야 하는 내용을 말하는 왕녀가 기묘한 생물처럼 비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대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대의 기묘한 행동 뒤에는 항상 마족이라는 존재가 도사리지. 처음 내게 그 의문을 준 것은 병마의 때였다. 그대가 내게 도움을 청한 다음 날이기도 하고. 설마 이것마저 부정하지는 말거라.”

“그… 아니, 그건 장난이었다고 말을…….”

류제가 사라지자마자 이때다 싶은 질문 공세라니. 재경은 심장이 다 덜컹거렸다. 설마 이걸 물어보러 온 건가?

매서운 은색 눈동자가 재경을 샅샅이 훑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와 마주한 듯 재경은 어떤 변명거리를 떠올려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일어난 지진도 마족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 그대는 미나 플로리아를 구하려다 대신 위험에 처했다. 라우라 축제 날엔 화마와 마주했다지?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보고서에서는 타고시아 해변에서 그대가 수마의 군주가 사용한 마법의 핵이 되었다고 했다. 한 달 전 백마의 때에도 그대는 연관되었지. 평범한 학생이라면 불가능할 우연이다.”

왕녀는 쉴 틈 없이 정황증거를 들이밀었다. 지금까지 준 선물은 모두 그를 유혹하기 위한 함정임에 틀림없었다.

공격을 받은 재경은 온 정신이 휘둘렸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알아차렸지? 지금까지 나 몰래 조사해 왔던 건가?

몰래라는 단어도 어불성설이다. 해피 엔딩인 유네 루트만 신경 쓴다고 왕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건 재경 자신이 아니던가.

차마 잇지 못할 단발적인 감탄사들은 어떠한 단어나 문장도 형성하지 못했다. 니냐롯트는 지금이야말로 비밀을 파고들 기회임을 알고 드러낸 이로 물어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대는 마족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그대의 행적을 추적해 온 바로는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아냐! 내가 아니라 류제가 그런… 나는 관련 없어. 류제 옆에 있으니까 말려든 거야!”

혹시 마족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재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숨김없는 표정 변화를 니냐롯트는 이미 대답의 범주에 넣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그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그는 맨 처음부터 영문을 몰라 했겠지. 대답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이미 내용이 들어맞음을 시인했다.

“나는 반대로 류제 신리가 그대에게 이끌려 다니다 마족과 얽혔다고 생각하네만.”

“그런… 그게… 나…나는 평범한…….”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 파헤친 건 미안하지만 인류의 미래가 좀 더 밝아질 수 있다면 그녀는 이런 짓을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모르쇠 부인할지언정 언젠가 그녀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시점에서부터 렌 지미는 분명 아는 게 있었다. 그녀가 붙잡으려는 동아줄은 바로 그것이었다.

“향초는 그를 방증하는 좋은 증거품이지. 절친한 그대에게조차 변변찮은 병문안 선물을 줄 줄 모르는 류제 신리가 스스로 고민하여 내게 선물을 주었을 리 없어. 그대가 류제 신리에게 향초를 선물하라 조언해 준 것이다. 당시 함께 행동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변명하지는 말거라.”

“아니, 그건… 그러니까… 그때는 류제가 그… 네가 불면증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그 남자는 타인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대와 관련도 없는 내 이야기는 그대에게 꺼낼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옆에 있는 그대가 더 잘 알겠지. 아니면 내가 류제 신리에게 직접 물어볼까?”

메인 히로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류제를 향한 왕녀의 평가는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류제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내가 알려줬다고 할 거야. 으으, 어떻게 하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거지? 사라 할머니, 좀 도와줘요!

“그건… 그… 아… 그게… 내가 지나가다 우연히… 그… 들었거든.”

“우연히 들어서 내게 향초를 선물하라 조언했다고? 나와 아무런 접점도 없던 그대가 무슨 연유로?”

그녀의 집요함에 재경은 숨이 다 막혔다. 유일한 숨구멍이 될 류제는 매번 잽쌌던 주제에 매점에서 음료수를 만들어 오는지 돌아올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했다가는 지금껏 지키려고 했던 비밀이 들통날 것이다. 숨을 구석을 찾는 고양이를 사냥하는 한 야수의 으르렁거림은 한 치의 자비가 없었다.

“그대가 답하지 못하겠다면 이 역시 내가 추측해 보지. 그대가 필히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고민하던 나는 한 결론에 도달했다.”

“어… 겨…결론?”

“그대는 내가 불면증을 앓는 진짜 원인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불면증이 단순한 불면증이 아닌 거지.”

길을 몰라 헤매는 어린양이 아닌 그녀는 이미 아는 해답을 서술하기에 거침없었다. 재경은 고작 그 조그마한 단서만으로 홀로 여기까지 도달한 왕녀가 무서웠다. 탐정에게 트릭의 진실을 파훼당하는 범인의 기분이란 이런 걸까.

거짓말이 능숙하지 않은 재경은 잡다한 변명들이 목에서 막혔다. 왕녀가 정답을 말해버리면 어쩌나 두려운 한편 이상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그럼 뭔데? 불면증이 불면증인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사람이 마음 써줬더니 의심만 하네.”

니냐롯트 왕녀는 게임상에서도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냉미녀에 주인공보다 한발 앞서 나가곤 하는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설마라도 고작 그런 정황만 가지고 여기까지 알아낼 수 없어. 진짜로 뭐 하자는 놈이야?

“인간으로 변할 수 있으며 사람의 약한 점을 파고들어 악몽에 빠뜨리는 마족 분파는 단 하나.”

그녀 또한 주인공을 만나 성장하는 부류의 히로인 캐릭터지만 다른 인물들에 비해 완성형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의 성격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일까.

“이 학교에, 나의 주변에 몽마… 서큐버스가 숨어든 것이지?”

남들이 듣자면 농담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무슨 근거로 자신만만히 말할 수 있는 걸까.

왕녀는 드디어 정답에 근접했다. 고작 그런 부탁 한번 한 것에서부터 의심을 품어 여기까지 추리해 냈다.

단순한 재경은 한 히로인을 떠올렸다.

미나 플로리아. 마족의 사천왕이자 몽마의 군주. 왕녀에게 악몽을 심어주었고, 류제를 꼬드기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다. 그녀는 왕녀와 류제 주변에 도사리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실수로 어떠한 말이라도 꺼낼까 재경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숨이 떨렸다. 그 흔들림이 의미하는 것에 왕녀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 가정에 부합하는 사건이 있지. 신관에서 일어난 나라카산 자생 식물에 관한 사고. 물론 여기에도 그대가 관련되었다. 핵은 류제 신리가 파괴하였지만 그것을 지시한 것은 그대지? 류제 신리가 스스로―”

“…그랬을 리가 없을 테니까.”

재경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류제의 행동은 모두 그의 억지에 기인한 것을 왕녀는 전부 알아차렸다. 망했다는 심정으로 재경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솔직히 뭐가 좋아서 미래의 것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당장이라도 다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은 사람은 그였다. 그의 고생을 왕녀가 알아주었다는 것도 기뻤다.

“조금은 솔직해졌구나. 그렇다면 이어서 설명해 보거라. 내가 의문을 표한 모든 것들에. 지금 바로. 내가 납득할 수 있게. 그대의 말 또한 나만이 기억하겠다.”

도망갈 수 없다. 병마의 일이 끝나고 학교 뒤편 쓰레기장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보다 더 직설적이다. 사냥감을 몰아넣은 왕녀는 순순히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분명 왕녀가 음료수를 핑계로 류제를 물린 것도 의도한 것이다. 재경은 빨리 류제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아니, 류제가 왔는데도 왕녀가 물러서지 않으면 어쩌지? 그 전에 답해야만 하나?

그가 혼란에 빠진 와중 류제는 왕녀와 렌이 단둘인 게 거슬려 금방 매점까지 달려가 달지 않은 음료수를 구매했다. 병실로 돌아오던 그는 뜬금없이 간호사들에게 붙잡혔다.

“학생, 렌 지미 환자의 병실에 왕녀님이 오셨다는 게 사실이야?”

간호사들이 말을 걸어온 적은 잦지만 그때와는 목적이 달라서 류제는 어쩐지 뿌리치기 힘들었다.

“방문 기록에 이거, 장난친 거 아니지? 왕족을 사칭하면 크게 혼나.”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왕녀가 맞음을 에둘러 인정한 류제는 그들의 태도가 더한 경악으로 번지자 일이 귀찮아질 것을 직감했다.

“그분이 정말로 왕녀님이시라는 거야?”

“우리 병원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아뇨, 그냥 친구 병문안…인데요. 그, 제가 늘 병문안 오는… 그 애.”

왕녀가 있을 병실까지 찾아갈 만큼 대담하지도 않으면서 부담스럽게 들이대는 병원 관계자들이 류제는 성가셨다.

생업이 관련된 이상 그들은 이 나라에서 손에 꼽는 최고 권력자가 병원을 찾은 목적이 분명하길 했다. 그들은 왕녀의 의도를 알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류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제대로 좀 설명해 봐.”

“그 환자가 왕녀님과 친구라도 된다는 거야?”

“따지고 보면 같은 제립학교 학생인 데다 큰 부상을 입었으니 급우로서 위로를―”

“급우? 왕녀님과 같은 반이라고? 어쩜 세상에!”

그를 몰아붙이던 간호사들이 흩어지며 이번엔 이 병원의 원장까지 출두했다.

“뭣이라? 그 환자가 왕녀님의 급우분이시라고?”

방문 기록에 이름 철자를 똑똑히 썼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사람을 속이려면 적당히 가명을 써도 될 것을. 드디어 사생활까지 침범하자 참지 못한 류제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평소대로 하면 돼요! 조용히 문병 온 거니까 소란스럽게 하는 게 왕녀…님께 더 큰 피해를 줄 겁니다.”

“그 말 약속할 수 있니? 우리 병원이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니지?”

“절대 아니니까 방해만 하지 마세요! 떠벌리고 다니시지도 마시고. 그렇지 않으면 왕녀…님이 더 화를 낼 겁니다. 병원에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그래. 후우, 제발 아무 일도 아니어야 할 텐데.”

원장을 간신히 뿌리친 류제는 아직도 전전긍긍하는 그들을 외면하고 병실로 향했다.

닫고 나갔던 문이 반동으로 조금 열려있어 안에서부터 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열려다 말고 그의 손이 멈칫했다. 안에서 왕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학교에 숨어든 마족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일이 흐트러질까 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족의 목적 또한 알고 있지.”

왕녀와 렌이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상 속에서도 어색했다.

그가 모르는 비밀을 말하는 중인가. 왕녀와 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아무리 잘난 듯이 떠벌려도 나의 짐작일 뿐이지.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그렇다고 답하라. 당당하게.”

“…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도…….”

목소리를 내리깐 왕녀의 질타 어린 목소리는 강심장이라도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로 매서웠다. 그럼에도 렌은 왕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왕녀보다는 렌의 의견이다. 류제가 숨을 죽이고 돌아올 대답을 기다려도 렌은 말할 듯 말 듯 입만 뻐끔거렸다. 그 답답함에 대신 왕녀가 독촉했다.

“정말 내게 그 어떠한 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나. 그렇다면 적어도 내 비녀를 고쳐준 이유를 난 알고 싶다.”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지 말고 지금 네 앞가림이나 잘해.”

재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하고 싶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에 관하여.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그마저도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이야기가 엉망이 되고 이벤트 결과가 달라지는데 더 큰 결단을 해야 하는, 마지막 스토리의 향방을 결정하는 신분이자 메인 히로인인 왕녀가 엔딩을 알았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재경 그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대는―”

그녀가 당장에 마족과 싸워야 할지 인간과 싸워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걸 렌 지미는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나. 마족에 대한 것 말고도 그가 가진 비밀은 더 있었다.

왕녀가 터뜨릴 이야기에 집중하던 중 손에 힘이 풀려 류제의 손에서 음료수가 떨어졌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낸 류제는 에라 모르겠다 병실 문을 열었다.

“음료수 때문에 손이 걸렸네. 왜 그래?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세 개나 되는 음료수가 들기 버겁다며 모르는 척 말한 그는 두 사람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마침 잘 끊었다는 듯 재경이 살았다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이… 바보야, 음료수 사러 어디까지 간 거야? 한참을 기다렸네.”

“하하, 미안. 돌아오다 간호사 누나들한테 붙잡혀서.”

“번거로웠다면 미안하다. 내가 마실 것을 깜박하는 바람에.”

끝까지 몰아세우던 와중 류제에게 방해받아 버린 니냐롯트도 똑같이 모르는 척했다. 렌도 눈이 마주치니 꼬리가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 같다. 그 필사적임이 가련해서라도 류제가 먼저 그에게 차를 건넸다.

“쓴 차도 괜찮지? 단 음식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사 왔는데.”

“나무랄 데 없는 선택이구나. 고맙다.”

어색한 기류를 류제는 무시했다. 그게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한 그가 받을 벌이겠지만 역시 부담스럽다. 이 조화롭지 못한 인원들로 다과를 즐기다니. 먹어서 체해도 나무랄 곳 없다.

렌과 단둘이 자리를 마련한다는 목적만큼은 달성한 왕녀는 더 이상 이 병실에 볼일이 없었다. 설탕 토마토나 류제가 사 온 차는 먹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루이나와 약속한 시간도 가까워지니 설탕에 버무린 다디단 토마토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는 분위기 속에서 니냐롯트는 이만 일어났다.

“돌아가야겠구나. 친위대들에게 들통나겠어.”

“버, 버…벌써? 류제, 넌? 좀 있다 가지.”

“미안, 나도 돌아가야 해. 왕녀 혼자 학교까지 돌아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 그러냐. 그렇구나. 그렇겠지.”

막상 중요한 류제랑은 이야기를 못 나누었는데. 류제는 늘 토요일 약을 먹고 잠든 시간에만 들러서 병문안을 와도 좀처럼 얼굴은 못 봤다.

딱히 스토리나 해피 엔딩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포를 풀지 못해 아쉬웠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니냐롯트가 기다란 금발 머리를 가발과 모자로 가렸다. 왔던 때와는 다르게 빈손인 그녀는 마스크를 하려다 재경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퇴원 수속을 밟고 돌아오면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 허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니 그대도 흔들리지 말고 침묵을 유지해라.”

“어수선하다니? …왜?”

학교 상황을 모르는 재경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응? 침묵? 단어 선택이 이상했다. 류제를 흘겨도 왕녀의 말에 동감한다는 제스처를 취할 뿐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왕녀가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지 거울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학생들은 왜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충분한 이유를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대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것도. 세니타리 롯에 관련된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

“퇴원할 때가 되면 그대도 저절로 알게 된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답을 똑같이 돌려받은 재경은 마지못해 두 사람을 배웅한 후 터덜터덜 병실로 돌아갔다.

건물 밖으로 나간 두 사람도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류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니냐롯트는 류제의 손에 이끌려 사람이 없는 곳을 통해 병원을 빠져나갔지만 눈치챈 병원장이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비밀리에 탈출하는 건 실패했다. 니냐롯트는 병원장의 외침에 답하지 않고 작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조용히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그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류제는 왜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학교에 마족이 있다는 말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왕녀는 렌이 무엇을 안다고 여기는 걸까. 혹시 내 이야기인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그가 바로 학교에 숨어들었다는 마족이고, 렌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로 한 건가?

만약 나라카의 토벌을 앞둔 왕녀가 내 정체를 알아버렸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세라 선생님처럼 나를 믿어줄까? 설마. 착각도 유분수다.

숨은 눈동자가 소란스레 흘기자 시선을 느낀 왕녀는 류제의 비언어적 의사 표현에 친절히 답했다.

“오래 붙잡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랐구나. 이야기를 엿들었다면 입을 닫거라. 그 누구에게도. 혹여 렌 지미에게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류제는 모르는 척했지만 그마저도 왕녀에게 읽힌 듯하다.

변장까지 했던 왕녀가 병원 방문 기록에 당당히 이름을 쓴 이유는 다 계획된 것이었다. 그를 밖에 좀 더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서. 당해낼 수가 없다고 류제가 쯧 혀를 내둘렀다.

제립학교 역으로 돌아올 때까지 유익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찰구에서 표를 건네고 역 앞으로 나오니 그녀를 기다리는 마차가 서있었다.

“시간을 내주어서 감사하군.”

“나야말로 네가 렌을 신경 써줘서 고맙지.”

친위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마차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루이나가 왕녀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이자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왕녀는 루이나가 열어주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루이나는 왕녀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이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날 선 눈빛이 잠시 류제를 향했다.

류제를 뒤로하고 마차가 출발했다. 왕족이 탔다고는 생각되지 못할 만큼 요란스럽지도, 대단치도 않았다. 온종일 그녀와 렌에게 휘둘린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걸음으로 역에서부터 차근차근 걸어와 학교로 돌아온 류제는 문득 해가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렉터로 시간을 살피던 그는 무슨 생각인지 A동 기숙사가 아니라 신관 도서부 동아리실로 향했다. 단 한 사람의 히로인을 선택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 호감도 이벤트에서 불가능하지만 그거야 주인공인 류제의 마음대로다.

그가 홀리듯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일요일임에도 열려있는 동아리실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그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다렸지? 책 정리는 벌써 끝난 거야?”

“조금 남았어. 에이,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 뭘. 난 와준 것만으로도 기뻐.”

미나의 안경에 붉은 황혼이 반짝였다. 웃고 있으나 정말로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류제가 문을 닫자 그림자가 드리워져 미나의 입꼬리가 바로 보였다.

해가 지고 있지만 그녀는 도서부 일로 바빠서 손에 든 책을 한시라도 빨리 제자리에 꽂아 넣을 필요가 있었다. 신장이 부족해서 책이 잘 꽂히지 않았던 미나의 뒤로 류제가 대신 잡고 넣었다.

“키가 작아서. 에헷, 부끄럽네.”

“이럴 때 써먹어야지. 내 바보같이 큰 키는.”

류제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근 1년 사이 무섭게 성장한 류제는 이따금 과거와 비견되는 키와 몸무게에 놀라곤 했다. 어릴 적 주변 어른들이 칭찬한 것처럼 귀엽지 않으니 렌이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이 더 줄어든 것 같아 싫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뭐 어쩌나. 그렇게 짜증 나도 커버렸는데.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걸 따질 거였으면 제 성별이 남자인 것부터 문제다. 나는 렌의 연애의 대상이 아닌, 질투의 대상인걸. 웃기게도.

“약속이 있는데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 류제.”

“도서부 일도 중요하니까. 내버려 두면 넌 혼자서 다 해버릴 거고. 그런 부탁을 들었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해.”

류제는 정리 중인 것으로 보이는 책들을 서재에 하나둘 이름순으로 꽂아 넣었다.

설마 정말로 미나 그녀가 주말까지 학교에 나와 이깟 인간들이 쓴 새 책을 정리한다고 약속을 꺼냈을까.

인간 ‘미나 플로리아’의 연기의 막바지에 다다른 미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류제를 이 시간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누구랑 놀았던 거야? 날도 추운데.”

“렌 병문안 갔던 거야. 평소처럼.”

“그래?”

살갑게 웃던 미나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류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멍하니 책만 정리했다. 뒷모습을 흘기던 그녀는 분에 겨웠다.

왕녀를 만났던 주제에 렌 지미의 병문안을 갔다고 변명한다고?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지? 공을 들인 만큼 류제 신리도 내게 무엇인가 숨긴다는 생각에 둔감해져야 할 텐데.

“렌의 병문안은 매주 토요일 날 간다고 하지 않았나?”

“어… 그렇지. 근데 뭐, 그렇게 됐어.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 못 하는 거야? 저번에 말해줬잖아.”

“그래? 하하, 까먹었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미안.”

류제가 실없이 웃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미나가 그랬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이 이상 그의 머릿속에 고민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이상해.”

병문안을 간 게 거짓말이 아니야?

한자리에 있으면 수상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왕녀와 렌 지미는 접점이 없었다. 인류의 미래를 결정해야 왕녀는 하찮은 렌 지미 따위 안중에도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학교에 그런 소문마저 도는 그가 고깝지 않을 리 없었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류제. 아무것도…….”

그녀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차근차근 되짚어 보면 정황이 뜬금없지는 않았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왕녀의 꿈에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보라. 이상하게도 렌 지미들의 소굴이지 않았는가.

대상의 정신에 따라 달라지는 악몽 마법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으니 니냐롯트 왕녀는 렌 지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다.

커다란 마물에 대항하는 렌 지미. 그건 멍청이 마가릿과 류제 신리가 맞붙었을 때 곁에 있다 부상당한 것 때문에 생겨난 이미지라고 쳐도…….

이게 이렇게 연결되다니. 찜찜했던 부분을 정리시켜 주는구나, 렌 지미. 그래서 왕녀가 친히 경고해 주러 간 건가?

류제 신리를 데리고 간 걸 보면 친위대는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이 틀림없는데. 그게 뭘까.

“류제.”

“응?”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줄 수 있어?”

“별일이네. 뭐든 말해줄게.”

숨이 내뱉어지며 이 공간은 그녀의 공간으로 변했다. 울렁거리는 듯 이미 정신의 절반을 그녀에게 내어준 류제를 미나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동공이 마족처럼 붉게 변했다. 염소의 뿔이 류제의 귀를 간질이고 허리에서부터 자라난 음란한 날개가 류제의 허리를 휘감았다. 노을마저 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두 사람을 휩쌌다.

[왕녀가 렌 지미와 무슨 말을 했어?]

무언가를 아는 렌 지미가 아무것도 몰라야 할 왕녀와 접점이 있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분명 그곳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 거래 속에서 렌 지미의 목적이 드러났겠지.

그의 목적은 그녀도 궁금했다. 그가 무엇인지, 왜 그녀를 방해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둘이서 어떤 대화를 은밀하게 나누었지? 넌 들었지? 네 마음을 이렇게나 술렁이게 하는 둘만의 대화를. 내게 말해줘. 괜찮아. 나한테는 말해줘도 돼.]

“둘만의 대화… 아…….”

류제는 미나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다. 현실을 직시하기엔 너무 마음이 아프니 미나가 하는 말을 믿고, 조언을 듣고, 사탕발림에 속아서 마음을 안주했다.

사람의 몸에 이어 정신까지 지배하는 서큐버스에게 단단히 홀려버린 인간은 신경 쓰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어둠 속에서 일깨웠다.

“…마족이…….”

류제는 꿈속에 있는 것처럼 나지막이 지껄였다.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더라? 나 자신에게였던가? 가진 의문을 내 자신에게 표하는 기분이다.

그는 어두운 옷장 안에서 바깥을 훔쳐보았다. 왕녀와 렌이 둘이서 비밀을 나누었다.

“학교에 숨어든 마족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어… 그 마족의… 목적도… 렌은… 알고 있다고…….”

류제의 혼잣말을 엿들은 붉은 동공이 확장되었다. 손에 꼽아 예의 주시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앞으로의 판도가 갈릴 중요한 수확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왕녀가… 렌에게… 이상하게도… 그건… 나를… 의미한 걸까… 나는… 마왕의…….”

[부활체니까?]

류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흥미롭다. 왕녀가 렌 지미에게 물었다니? 미나 그녀가 렌 지미를 주시하던 것처럼 왕녀도 렌 지미를 봤던 것인가? 역시 렌 지미. 끝까지 방심할 수 없어.

[그래서 렌 지미는 뭐라고 답했지?]

세뇌를 거는 목소리는 신중해야 하는데 마법의 파장이 흔들거릴 정도로 그녀는 동요했다. 두려움에 빠진 류제는 그 특이점을 타파하지 못했다.

“아무런… 답도……. 왕녀…한테 지금 하는 선택이나 잘하라고… 했던 것… 같은…….”

렌 지미는 세라 밀로니처럼 류제 신리가 마족과 연관되었음을 아는 인간이다. 더군다나 미나의 일을 몇 번이고 망친 전적이 있다. 과연 그들이 나눈 대화는 류제 신리에 대한 의심일까, 아니면 나를 향한 의심일까.

‘숨어든 마족’이라. 이건 류제 신리의 걱정처럼 왕녀에게 마왕의 존재를 들킨 게 아니다. 렌 지미는 내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확실히 위험한 인간이다. 우리들의 마지막 계획에서도 널 완벽하게 배제할 테다. 마왕님은 우리 것이야. 네 것이 아니라.

[그렇구나. 정말 잘했어, 류제. 착하구나.]

“난… 아무것도… 난… 이제 어쩌면… 왕녀가…….”

[너는 이대로만 있으면 돼. 왕녀를 따라 전쟁에 나가서… 인간을 위해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무 걱정 없이. 네 소중하고 소중한 렌 지미를 위해서.]

“렌…을… 위해서…….”

[너는 나쁘지 않아.]

미나는 류제의 이마에 상냥하게 입술을 닿았다. 웃는 얼굴이 사악했다. 일단 렌 지미가 학교로 돌아오기 전, 그의 최후의 발버둥을 먼저 짓밟을 필요가 있었다.

깔깔거리는 마족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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