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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1) (55/112)

챕터 11. [1월. 공든 탑은 무너질까] (1)

단란해야 할 연말에 벌어진 사건의 끔찍한 전말은 특히 민감한 시기를 거치는 제립학교 학생들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성탄제 당일까지 영문도 모르게 외출 금지가 내려진 것도 참았는데 이제는 겨울방학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냉정한 공지를 들은 학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마족이 등장한 것도 아니라던데 방학을 고대하며 남은 날을 꼽던 학생들은 무지개 돔 안에 고립되어 허탈해했다.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겨울방학을 학교에서 보내다니.

재경처럼 1월부터 보충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들이야 학교에 외롭게 남지 않아도 되니 쌍수 들고 환영하겠지만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훈련소로 들어가는 졸업반 3학년들은 가족들과 마지막 방학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에 반발이 거셌다.

그런다 한들 납치 사건이 미노타와 얽혔을 가능성을 아는 교장은 학생들의 시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교장은 올해 겨울방학 동안 학생들을 제립학교에서 관리하겠다 보호자들에게 통보만 했지 절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세니타리 롯이 저지른 납치 사건과 미노타 국경에서 벌어진 일 등이 누설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학생들은 감금이나 마찬가지인 이 생활이 미친 듯 답답했다.

방학식 이후 담임이 부재한 8반 학생들은 통솔해 줄 사람이 없어 더 불안해했다. 이런 와중 학교 밖에서 일어난 사고를 추측하는 것만이 소소한 반항이었다.

그들은 개중에 등교하지 않는 유일한 학생 한 명, 렌의 소문을 부풀렸다. 전교생 중 학교에 없는 학생은 렌뿐이니 그 학생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 아니냐는 출처를 모르는 소문이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렸다.

고립된 교내에 불평불만이 응축되는 가운데 폐쇄된 환경에서 한 사람을 향한 두루뭉술한 환상이 뒤바뀌는 것은 쉬웠다.

여장 사진이나 메이드, 고양이 귀 등으로 유명해졌던 렌은 고작해야 입으로 뜯고 맛보는 정도의 흥밋거리였을 뿐 대중들의 관심은 진실한 호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진 미나의 계략으로 학생들은 죄책감 없이 등을 돌렸다.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를 탓하는 것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도 없었다.

당연히 재경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병원에 입원한 재경에게도 학교에서 공지가 내려졌다.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병원도 모방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밖에 나가지 말고 회복되는 즉시 학교로 복귀하라는 전언을 들은 재경은 언제 이 귀찮은 환자 생활이 끝날까 심심하게 하품했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을 보고 싶었다.

그가 있는 새하얀 장소는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오늘도 병실 창문 밖만 구경하던 재경은 병문안을 올지도 모르는 친구들을 마냥 기다렸다.

고생 끝에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만큼은 성공했다고 정신 승리 중인 그는 혼자만의 어렴풋한 희망을 음미했다. 따스한 햇볕이 그를 위한 칭찬 같았다.

내면의 평화를 깨뜨리듯 순간 몸 안쪽이 욱신거렸다. 잠잠하던 미간을 일그러뜨린 재경은 차갑게 식는 비명을 인내했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부작용인지 이따금 가짜 통증이 느껴졌다.

참는 것이 특기인 그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몸뚱이를 타일렀다. 이 정도쯤은 괜찮다. 잘 참으면 다음 달 밸런타인데이 때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것이다.

재경의 염원과는 어긋나게 지난달 이벤트에 직간접적으로 얽힌 히로인들은 과거를 극복하긴커녕 도돌이표로 돌아가 의구심에 시달렸다.

특히 유네는 미들 스쿨 때 그녀를 따돌렸던 친구들이 무능한 어빌리터를 미워했던 건 당연했던 거 아니었냐는 자기 비하부터 과연 그녀가 사람을 진심으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불신까지 들어서 한동안 우울감을 달고 살았다.

좋아하는 상대가 몸을 던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를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일렁거렸다. 그따위 실력으로 죽음을 각오할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루시에의 악령이 들러붙어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유네는 사람이 죽는 장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다들 이런 걸 무슨 수로 견뎌내는 거지. 모르는 척 잊고 사는 것만이 답인가.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어? 매일 차던 소원 팔찌가 안 보이네. 방에 두고 온 거야?”

“아… 비키 양. 에헤헤, 눈썰미가 좋네. 실은 그거 저번에 잃어버려서 이제 없어.”

C동 기숙사 공동 목욕탕에서 룸메이트 비키와 함께 목욕을 하고 나온 유네가 씁쓸하게 답했다. 너덜너덜해지도록 소중히 여긴 그 팔찌를 유네가 매일같이 끼던 걸 아는 비키는 아쉽겠다, 라며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소원 팔찌잖아. 끊어져야 효력이 발휘되는 거겠지. 그나저나 비키 양은 진전이 있어? 어제도 새벽 늦게까지 책을 읽는 거 같던데.”

“윤곽이 잡혔는데 좀 지지부진해. 하나에만 몰두하려고 해도 정신이 없거든. 그래도 몸을 푹 담그고 나오니까 머리가 상쾌해서 좋아. 목욕 같이 가자고 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있을 뻔했어.”

‘세니타리 롯’ 사건에 직접적으로 얽히지는 않았지만 비키도 썩 어깨가 무거웠다. 끝까지 8반의 1년을 책임져 줄 줄 알았던 세라가 교직을 박탈당하는 바람에 2학년에 올라가기 전까지 비키 혼자 8반을 감당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녀가 좋아하는 렌이 유네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 다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렌이 위험을 감수하고 유네를 구하려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고민하자면 착잡해졌다. 자신의 이기적인 면모에 비키는 질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키다가 다친다? 당연히 배신감이 든다. 바보 렌이야 생각 없이 멋대로 벌인 일이겠지만 그게 만약 유네를 향한 이성의 감정으로 비롯된 거라면 어쩌나 비키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금 이런 이기적인 감정 따위 생각할 때가 아닌데 짓누르려 하면 할수록 불쑥 고개를 내밀고 심장을 간질였다.

유네를 탓하려는 건 아니었다. 구하는 자와 구해지는 자로 엮인 당사자 유네가 겪어야 할 슬픔을 모르지 않았다.

비키도 어릴 적 가족들을 눈앞에서 잃었다. 그녀도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기 싫었다. 유네나 렌마저 마족에게 살해당하면 어쩌지? 나는 다시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비키는 역사 연구 동아리까지 들어가 찾고 있는 선조의 이름을 떠올렸다.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 셀로니아 가문을 알아갈수록 분서되다 만 어두운 과거만이 발굴되었다.

과연 기간트리카 훈련을 뒤로한 채 환상이나 다름없는 기억을 뒤쫓는 길이 맞을까. 이런 조사보다는 마족 배제가 타당할지도 몰랐다. 학교에 처박혀 있을수록 비키는 선택이 과연 옳았을지 시험에 들었다.

거기에 멋대로 소문을 만들어내는 반 학생들까지 그녀를 괴롭혀 그녀의 역량으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비키는 세라가 극적으로 돌아와 반의 통솔이라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저번 일로 인해 실질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라는 현재 근신 중이었다.

그녀는 다음 학기부터 제립학교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군인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했다. 교직도, 기숙사 사감 자리도, 동아리 고문 자리도 반납한 그녀는 곧 전방 새로운 자대에 배치될 것이다.

유리에 대신 학생들에게 행복한 경험을 전해주고 싶어서 선생님이 된 후, 그녀의 담당 학생의 목숨이 위험했던 것은 오직 작년뿐이었다.

무슨 마가 끼었는지 저번 학기 수학여행지였던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발생한 지진 건으로 한 번, 병마 페스트에게 죽을 뻔한 것으로 두 번, 비공식적인 두 번의 조우를 제외하면 이번이 네 번째.

이 모든 사건에 연관된 렌 지미는 크게 부상당했다. 악우의 조롱처럼 선생님이 되고 안일해진 건가. 모든 것이 그녀의 무능 때문인 것 같았다.

마족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차례차례 앗아간다. 지금도 앗아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망양지탄과 소중한 사람을 잃는 슬픔의 반복에 세라는 진절머리가 났다. 극복했다고 생각하던 게 모두 제자리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하나 걸렸다.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르는 그 학생을 위해 높은 등급의 마족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 오만이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그녀 앞에서 또 사람이 죽었는데?

슬픔에 지친 세라는 왕궁 로비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앉았다. 아까까지 귀족들 앞에서 당시 벌어졌던 사건을 구두 보고했던 그녀는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를 괴롭혔다. 탐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움켜쥐며 자책하던 세라의 뒤로 그림자가 겹쳐졌다. 유리에 라탈스키의 혈육이 세니타리 롯에 소속되었다가 마족과의 전투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누군가가 호세마타 요새에서 세라를 찾아왔다.

“이야기는 들었다, 세라 밀로니.”

딱딱하고 냉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네네 슈만이었다. 모처럼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에는 비릿한 냉소가 부재했다.

수신제 때 세라의 잘난 설교에 할 말 없이 물러났던 네네 슈만이라지만 세라의 절망을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족을 향한 복수심에 미쳤다고 해도 짐승까지는 추락하지 않았기에 네네 슈만도 한때 신세를 졌던 친구 가족의 부고 소식은 참담했다.

“…그 아이는 얼마나 내 도움을 바라고 있었을까.”

세라가 힘없이 답했다.

유리에가 죽고 팔다리가 잘리듯 천천히 혼자가 된 루시에는 세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유리에의 죽음이 버거웠던 세라가 세상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구하러 와주기를 믿으며 끊임없이 기도했겠지.

그녀는 오지 않았던 세라와 다시 마주쳤을 때 무슨 감정이 들었을까.

초췌해진 몰골에 네네 슈만은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서로를 걱정하기엔 골이 얕지 않았다.

“자책하지 마. 루시에를 생각 못 한 건 너보단 내 잘못이 커. 그리고 상대는 등급1의 군주급 마족이야. 조약을 어겼고 말고를 떠나서 애송이들만 데리고 거기까지 해낸 건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세라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네네 슈만은 생각했다. 어린 루시에가 세라를 멋대로 동경했을 뿐이지 루시에는 세라와 새빨간 타인이었다. 그녀를 구했어야 하는 건 오히려 어릴 적부터 유리에의 집안과 친했던 네네 쪽이었다.

“잘난 듯이 유리에의 의지를 잇느니 말했으면서 정작 동생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뒀어. 나는… 난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네네, 차라리 날 비웃어줘.”

허리에 손을 올린 네네 슈만은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는 세라를 보는 건 생각보다 속 시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너 잘났다며 조롱해도 가뿐하게 무시하는 편이 더 그녀다웠는데. 지금의 그녀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무력함이 고되나? 분노가 치밀어? 지금이라도 그 감정에 직면했으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뭐든, 물은 쏟아졌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게 네 길이겠지. 네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처럼.”

세라의 바람에도 네네는 빈정거리지 않았다. 분노를 풀기 바빠서 소꿉친구의 여동생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지켜보지 못했다는 후회감이 네네 슈만에게도 자리 잡았다. 비뚤어진 채 마음을 닫았던 그녀도 심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네네 슈만은 수신제 때문에 학교에 왔을 때 상품으로 얻었던 하트 모양 로켓을 머뭇거리듯 손에 쥐었다. 그녀의 얼굴이 결심으로 굳었다.

히로인들의 생각이 변해갔다. 뒤따라 그들과 연관 깊은 이들의 마음까지 흔들렸다.

언제 망가질지 모르게 서있는 그녀들을 보자니 재경이 바라는 마냥 행복하기만 한 해피 엔딩으로 끝맺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듯했다.

* * *

사람은 맞부딪히며 살아가는지라 혼자인 것에 비해 돈이 더 필요했다. 누가 더 나은 삶을 사는가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기 위한 지불 금액이다.

사는 게 다 그렇겠지만 그중에는 인간관계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편안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밥을 먹고, 새 옷을 입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도 있었다.

현실에서 살아가던 재경은 그런 버거움이 당연했던 삶을 살았다.

군데군데 곰팡이 낀 낡은 주택은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웠다. 할머니 임금이 밀려 아침은 굶기 일쑤고 저녁은 찬밥에 물 말아 신김치로만 먹는 게 다인 적이 빈번했다.

점심은 재경이야 급식으로 먹었지만 할머니는 아니었기에 재경은 이따금 포장된 간식이 나오는 날엔 가장 늦게 급식을 먹고 남몰래 몇 개 더 챙기곤 했다.

사기 아까운 필기구는 교실에 떨어져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것들을 몰래 가져갔다. 가방은 중학교 입학했을 때 시장에서 산 유행 지난 구제 가방.

몸이 자라며 머리도 커가던 재경은 그게 구질구질한 짓거리라는 걸 깨달았다.

공부는 할 줄 모르니 당연히 안 했다. 반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문제아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는 없는 사람이다. 그게 언제부터였냐면 흐음, 아마도 처음부터였지 싶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체육대회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재경은 친구가 필요했다. 혼자인 것보다 여럿이서 있으면 배는 더 행복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고 싶었던지라 재경에게도 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몸에 밴 가난과 보호받지 못하고 비뚤어진 마음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를 괴롭혔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좋게 말해 특별하지, 상대의 약점을 사람들은 나쁘게 받아들였다. 약점이 많은 재경은 친구들에게 다가갈 자신감이 없었다.

그중 학생이라면 당연히 입어야 하는 교복이 가장 거슬렸다. 중학교에 올라갈 때 중고 교복을 구했는데, 물 빠진 색이나 헐렁한 품이 다른 학생들과 유별나게 구별돼서 보기 싫었다.

고작 교복일 뿐인데 열등감 때문에 재경은 브랜드 교복이 입고 싶었다. 다른 학생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아니니 거기서부터가 문제인 것 같았다.

“새 교복 안 사주면 절대 고등학교 안 갈 거야. 분명히 말했어. 남이 입던 거라든가, 시장에서 파는 건 절대 안 돼. 꼭 그 브랜드 교복이어야 해.”

“땅만 파서 돈이 숨풍 나오면 할미가 말도 안 헌다. 셋바닥만 나불거리면 다 말인 줄 아는 머스마가 뉘 집 자식이냐. 염병할 소리나 새어 나오라고 얼굴에 주둥이가 달린 줄 알어? 시장 교복이나 기 교복이나 거서 거드만. 교복에 금 발라놓은 것도 아니고 도새 3년도 못 입는 옷을 그 돈 주고 왜 자꾸 사달라 해싸. 궁딩이에 불나기 전에 존 말로 할 때 가라. 잉?”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무렵. 재경은 싸구려 교복이 싫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고등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렸다.

성적이 개판이었던 재경을 받아주는 고등학교는 썩 질이 좋지 못한 학교였다. 내로라하는 양아치들만 간다고 동네에서 유명했다.

학교에 가도 어차피 친구 없고, 머리가 나빠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 선생님들이 기대도 안 한다. 세상은 이상한 교복을 입은 그에게 불친절한 놈들투성이니 3년 내내 고만고만한 놈들하고 싸움질해서 할머니가 늙어서까지 고생하느니 어디서든 일하고 싶었다.

교복은 그냥 핑곗거리였다. 남들의 비교 대상이 될 바에는 학교에 가기 싫다는 남모를 앙탈. 평범함에 미치지 못한 소년의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는 알량한 자존심.

할머니야 학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교를 나오기 바라지만 재경은 다 돈 낭비라고 여겼다.

어차피 이런 인생일 텐데 뭘.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 재경은 뭘 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가난뱅이 삶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이고, 알았다, 알았어. 할미가 니가 말해준 걸루다가 사줄 테니까 가서 얌전히 공부도 좀 하고 살어. 또 뭐가 필요한지 퍼뜩 말해봐라. 나중에 안 사줬니 뭐니 징징거리지 말고.”

“윽, 진짜로 사줄 거야?”

“그 말투는 뭐시여. 그럼 사주지 말까? 혹시라도 망가뜨리고 그러면 다시는 안 사줄 테니 그리 알어라.”

“칫,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잔소리쟁이 할망구!”

“누가 할미더러 할망구래, 이 버르장머리 없는 머스마 자슥이 뭔 기집애망키로 시끄러워가지곤.”

“할미나 할망구나 할머니나. 사준다고 했으니까 약속해!”

재경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대여섯 개 시계추처럼 달랑거렸다. 오늘은 할머니가 밀린 임금을 받은 날이라 시장 음식들로 두 손이 가득 찼다.

느지막이 등교해서 급식 먹고 땡땡이친 다음 시간을 때우다 할머니 퇴근 시간에 맞춰 함께 돌아가는 지금이 재경은 제일 좋았다.

학교보다는 바깥이 좋고, 밖보다는 집이 더 좋다. 할머니와 오순도순 있는 시간. 지금 떠올려보면 힘든 것 하나 없이 평범하게 행복하기만 했던 것 같다.

“허구언 날 쌈박질만 해대지 말고. 이 성질 괴팍한 놈아. 니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그럴 거냐?”

“우이씨. 누차 말하지만 난 가만히 있었어. 맨날 그쪽에서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해.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친하게 지내라 헛소리나 하지.”

“고등학교 가서 뉘가 시비를 걸면 그냥 모른 척―해라잉. 쥐똥만 한 게 나대다가 한 대 씨게 맞고 코뼈나 부러지지. 할미는 돈 없다.”

“안 부러져!”

친할머니 맞아? 절대 손자 편을 들어주는 법이 없다니까. 재경이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꿍얼거리던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적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을 불쑥 넘었다. 정신이 팔렸던 재경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등이 굽은 할머니는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할머니? 할머니, 어디로 간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날 혼자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노을 진 골목은 그림자만 졌지 찌르레기 우는 소리도, 투닥거리는 까막까치도 없이 텅 비었다. 손에 들었던 소중한 저녁거리도 사라졌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밥 냄새가 공허하다.

방금 전까지 잔소리하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재경은 이 평화로운 세상이 무서워졌다. 주황색 골목이 차례차례 점멸했다. 필요 없는 놈 따위 사라지라고 내쫓는 것만 같았다.

“싫어!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그가 무턱대고 달렸다. 형광등이 차례로 꺼지듯 골목이 사라졌다. 달리고 달려도 캄캄한 현실에 그가 울부짖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까 누가 나 좀 도와줘. 할머니, 날 두고 떠나지 마. 혼자 남는 건 무서워.

결국 어둠에 잡혀버린 그는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궁지에 몰렸다. 그를 쫓아오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검은 손들이다.

그 간악한 웃음소리가 바늘로 몸을 찌르며 도리질을 치는 그의 흉부를 밀쳐냈다. 뒤로 넘어진 재경은 까마득한 어둠 그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우아악!”

육성으로 터진 목소리로 스스로를 깨운 그가 잠들어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중력이 피부를 찌르는 그 기분은 그에게 공포와 다름없었다. 땀에 전 그의 온몸이 경직되어 안으로 구겨졌다.

“하아…하… 무슨 이상한 꿈을.”

최근에 이런 꿈을 자주 꾸는 것 같다. 재경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켁켁 숨을 골랐다.

흘린 땀을 대충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 안은 발버둥이 무의미한 것처럼 고요했다. 차라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 노는 소리가 낫다. 적막한 방은 무서웠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던 재경은 침대 아래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병실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바쁜 간호사 주변을 알짱거리며 방문 기록을 보았으나 목록이 공백이다. 류제라도 올 줄 알았더니. 토요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재경의 어깨가 풀이 죽었다.

아가타 최고의 병원에 소속된 의료진과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를 거스르는 그를 사람들은 세차게 흐르는 계곡에 박힌 돌처럼 스쳐 지나갔다. 재경은 방황하던 옛날 생각이 났다.

계단을 내려와 탁 트인 바깥으로 나와보니 오늘은 산책하기 좋을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다. 재경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쪽색이 류제 눈동자 같았다.

학교 애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노답이었던 보충수업을 공식적으로 땡땡이칠 수 있어서 좋긴 해도 세상과 동떨어진 감각은 사람을 무디게 했다.

“하여튼 청승 떨기는. 누가 보면 나라라도 잃은 줄 알겠다.”

분명 아무도 없던 옆자리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않은 척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수상한 점술가 흉내를 내지 않은 사라 하놋이 쯧쯔 혀를 찼다. 외로움에 사무쳤던 그의 눈이 손님을 반겼다.

“사라 할머니?”

“그래 나다, 이 청승꾸러기야.”

“저번에 왔었으니까 이번 달엔 안 올 줄 알았더니 무슨 일이래. 몸은 어때요? 저번에 막 기침했잖아요. 할머니도 병원에 입원해요? 많이 아파요?”

붕대로 꽁꽁 싸여가지곤 서럽게 울었던 건 기억 안 나는지 재경이 쪼르르 가서 붙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흥, 입원은 무슨. 나 같은 늙은이야 매 안 아픈 곳이 없지.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다 그래. 내 나이에 이 정도는 정정한 편 아닌가?”

“기침한 건 어빌리티 때문 아녜요? 차라리 어빌리티를 안 쓰고 걸어오는 게 낫겠다. 왜 굳이 신출귀몰하게 등장하는 건데요? 이상한 데에서 자존심 부리기는. 그러니까 몸이 상하지.”

“하여간 주둥아리 탁 치고 싶게 조잘거리긴. 어떻게 오든 내 마음이다!”

그녀는 멀쩡해 보이는 재경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걱정되게 갓난애처럼 울 때는 언제고. 그때는 이야기를 나눌 상태가 아닌 것 같아 돌아갔다만 괜한 오지랖이었나.

질문을 회피하려던 사라는 사라의 옷깃을 강하게 붙잡는 손길에 떨떠름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이 나라는 내가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하지만 내 거처는 감시당하고 있지. 내가 마왕을 죽인 로라 하놋의 여동생이니 그 명성을 등에 업고 수상한 짓을 못 하게 하려는 거겠지만 그만큼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그래서 늘 어빌리티로 감시를 빠져나오는 거란다.”

“엑, 감시라니 겁나 싫다. 죄 없는 할머니도 유명한 언니 때문에 고생하네요.”

“내가 선택한 것이니 고생이랄 것도 없어.”

사라는 시큰둥했다.

로라 하놋에 관한 비밀은 재경은 하나도 몰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욕심을 부려서라도 시크릿 엔딩을 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지만 그는 이내 현실과 타협했다. 마왕과 로라 하놋의 이야기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너야말로 몸은 어떠냐?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진짜로 죽을 뻔했다던데.”

“오버는. 괜찮아요. 다치는 건 익숙하고. 붕대도 풀었으니 딱 봐도 멀쩡해 보이잖아요.”

“이번 예언이 위험하기는 했다만 나조차도 네가 부상당할 줄은 몰랐구나. 이유가 뭐가 되었든 다치는 게 익숙해지면 안 된다. 우리 같은 조언자들은 만일을 대비해 항상 몸을 사려야 해. 그래야 필요할 때 적시적기에 나타날 수 있지.”

“오우, 역시 프로 조언자네요.”

“대충 흘려듣지 말고.”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재경은 잔소리가 반가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할머니와 있으면 방황하는 자신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아서 편안했다.

“근데 저도 매번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건 아녜요. 아무것도 안 해도 다치는 걸 어떻게 해.”

“흥, 예언을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리가 없지 않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다쳐.”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네가 물불 안 가리고 미련하게 덤벼드니 그러겠지.”

“우이쒸, 아픈 데를 찌르네. 그러지 않을 때도 다치거든요? 하아, 이게 바로 삼류 악당 렌 지미의 불운인 건가. 아, 이거 저번에 말했던 거 같은데?”

“뭔 불운? 삼류 악당? 하여튼 엉뚱하기는. 머리도 다쳤다더니 나사가 덜 조립되었나.”

삼류 악당이라니. 이상하긴 해도 들어봄 직한 괴상한 단어다. 여름 즈음에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긴 하다.

세상에서 불운은 자기가 다 가져간 것 같다는 사춘기 같은 발상이긴 하다만 그거랑 예언의 날에 다친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의 눈빛에서 못마땅함을 읽은 재경의 입이 붕어가 되었다.

“에이씨, 역시 할머니 제 이야기 하나도 안 믿고 있죠?”

“믿을 만한 소리를 해야 믿지. 항상 생뚱맞은 소리나 하니까.”

“생뚱맞은 소리 아녜요. 진짜 말로 잘 설명 못 하겠는 그런 게 있어요. 이 세상이 괜히 날 괴롭히는 거 같아.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래. 잘 들어봐요, 할머니. 작년 동안 제가 겪은 말도 안 되는 불행을.”

자신에게만 야박한 불합리한 처사를 떠올린 재경이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과거 일을 되짚어 보던 예언의 날에만 이상하리만치 큰 부상을 입었다.

스토리를 멋대로 헤집고 다녔던 학기 초에는 매번 양호실 신세만 졌었지. 아프지 않았던 달을 손에 꼽는 게 더 쉬웠다.

“작년 3월엔 비 엄청 내리는 날 넘어져서 다리 까이고 감기도 걸렸고, 수학여행 때는 머리가 세 번이나 깨진 데다 거의 죽을 뻔했고, 체육대회 때는 날아오는 공을 수시로 맞다가 마족한테 배가 뚫렸고, 라우라 축제 때는 마족한테 목이 졸리고, 방학 때 유네 집 놀러 갔을 땐… 뭐 별거 없으니까 패스. 문제는 8월! 별 이유도 없이 제가 아세미 대신 꿈의 핵이 되어버렸잖아요. 원래라면 다른 불행을 겪어야 하긴 하지만 하여튼!”

“참 나. 운 좋다고 자랑하는 게냐? 살아있는 것도 용하다. 이렇게 들으니 별별 곳에 고개는 다 들이밀고 다녔구나.”

“전부 예언에 관련되어서만 그래요. 9월은 이상한 식물 때문에 입원하고, 수신제 땐 여장에다 가짜 고백에 당하지 않나, 11월에는 고양이가 되어버리지 않나, 지난달에는 산탄총에 맞지 않나. 진짜 온갖 고난과 역경은 다 헤치고 왔는데 이쯤 되면 세상도 감동해서 해피 엔딩을 내려주면 좋겠네.”

하늘 아래 재경은 반드시 해피 엔딩을 받아내겠다며 기를 받았다. 사이비스러운 모습에 사라 하놋이 꺼림칙한 눈으로 쳐다보다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원래라면 다른 불행을 겪어야 한다’는 말은 뭐냐. 그것들도 네가 알고 있는 예언 중 하나냐?”

“그게 자기 맘대로니까 속 터지죠! 다른 날은 괜찮은데 예언의 날에 끼어들기만 하면 항상 예정에 없는 불행이 닥친다고요. 얼마나 짜증 나는데!”

“아이고, 알았다. 조용히 좀 말해라.”

“유네네 집에 갔을 때는 개입 안 하려고 엄청 노력했으니까 무사했던 게 분명해. 물론 류제 옆에 내가 없는 게 맞겠지만. 여러모로 날 쫓아내는 느낌이 난달까.”

재경이 투덜거렸다.

쫓아낸다. 사라는 단발적인 불평 속에서 나온 단어에 집중했다.

재경 말대로 고작 예언에 개입한다고 해서 일생을 거쳐 겪을 만한 재난이 한꺼번에 내려지지는 않을 터였다. 언니는 내게 필요할 때에만 예언에 개입하라고 경고했었지.

사라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음을 짐작했다.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그녀는 재경이 조목조목 알려준 정보에 따라 비교했다.

“사실이라면 예언과 네 행동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인과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으으, 몰라요. 이제 생각하기 싫어. 호감도… 아니, 예언도 끝이잖아요. 유네 루트로만 제대로 가면 난 해방인걸. 빨리 속이 후련해지고 싶어요. 류제가 제대로 고백하면 이 세계는 행복하게 끝맺겠죠.”

수첩을 보던 사라 하놋의 손길이 멈칫했다. 애 같은 발상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세계가 행복하게 끝맺는다, 라. 언니는 저 아이처럼 그런 세계를 원했던 걸까. 잡을 수 없는 환상을 잡으려는 손짓처럼 그의 바람은 무의미했다.

수첩을 닫은 사라 하놋이 진지하게 주의를 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영원한 끝은 없단다.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건 동화책 이야기일 뿐이야. 연을 끊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고, 예언이 끝난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너는 왜 항상 단순하게만 생각하느냐.”

“하지만 류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확 달라지는 건 맞잖아요. 밸런타인데이를 기점으로.”

“…아이고야, 너는 도대체가.”

류제 신리의 마음에 따라 그 기점도, 예언과 결과도 달라질 수 있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사라 하놋은 지금까지 해준 말의 의미를 소화하지 못한 재경이 안타까웠다.

예언의 아이들의 마음도 신경 쓰라고 했던 의미는 예언이 그저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예언은 모두 그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존재 의미를 다시 고찰해 보라는 제안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예언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인 류제 신리도 해당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자리에 있으면서 왜 저 아이는 그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걸까. 친한 친구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마음을 달래주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하려고만 하나. 왜 ‘끝’이라는 틀에 박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지.

아직 생각이 덜 성숙한 아이니까 그런 거겠지. 방법은 틀려도 그는 최선을 다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

그녀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왔지만 엇나가는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달아갔다. 재경의 만행에 사라 그녀도 자진해서 탑승했지만 저 아이의 눈에서 본 다른 희망의 빛은 여전히 발하지 않았다.

“일단 저는 다음 달에 류제가 유네에게 고백하게 도와줄 거예요.”

“…그러냐. 힘내거라.”

그녀가 보기엔 류제 신리와 유네 나르타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선택을 강요하여 고백한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겠지. 사라는 그걸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는 재경에게 초를 치자니 양심에 찔렸다.

류제 신리가 다음 달에 어떤 선택을 하든 세계는 하나의 길을 택하여 나아간다.

긴 세월에 걸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그가 백 년 전과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그녀의 언니의 바람대로 마왕은 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질 못할지언정 저 아이가 미소 지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 그냥 한 번쯤은 행복해 봤으면 했을 뿐인데. 왜 나만 이런…….”

사라는 재경이 바꾸어버린 예언이 희망의 끈으로 작용하길 기도했다. 푸념을 흘려들은 사라는 이 아이가 앞으로 혼자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가여웠다.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기까지엔 그녀의 숨긴 손은 부서져 내렸다.

이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지. 사라는 차마 저 따뜻한 손을 잡지 못하는 겁쟁이 같은 옹졸함에 남겨질 아이만이 안타까웠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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