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6)
“산탄총에 맞은 부상자가 있습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재경은 류제의 품에 안겨 산을 내려가 즉시 국경 경비대대 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연락을 받은 군 병원에서는 류제의 손에 들려오는 환자를 들것에 실어 수술실로 이동했다. 온몸이 렌의 피로 범벅된 류제는 다른 이의 손에 사라지는 렌을 뒤쫓다가 저지되어 갈 곳을 잃었다.
“수혈 준비해. 남는 힐러 없나?”
“전 인원 현재 수술 중입니다.”
“이런.”
‘힐링’ 계열 어빌리터가 없으면 이 상처는 가망이 없었다. 이 세계관에서 의술은 재경이 살던 현대보다는 전근대에 머물러있으며, 정교한 고난도 수술은 모두 특수한 어빌리터의 손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세라처럼 의무 복무가 끝나고 교육 자격증을 따서 선생님이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간호장교나 군의관으로 가는 어빌리터들도 있었으며 군 병원은 그런 인원으로 이루어진 진보된 환경이 조성된 의료기관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라는 독특한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재경이 살고 있던 곳의 의술보다 몇 단계는 뒤처져 있었다.
병마의 군주 때 재경의 배 상처를 깔끔하게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키아나트리체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제립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족의 손에 배가 찢어진 것과 뼈가 이물질에 섞여 살에 박힌 것은 치료의 난이도가 달랐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 재경은 수술실에서 몸에 박힌 산탄을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갔다. 정교한 작업을 요하는 만큼 ‘염력’ 계열의 어빌리티를 가진 간호장교 어빌리터가 의사를 도왔다.
부족한 피도 문제거니와 혈압이 빠르게 낮아져 쇼크가 오려 하고 있었다. 수혈을 해도 피가 계속 누출되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제립학교 소속 ‘힐링’ 어빌리터가 도착했습니다. 전신 소독 후 투입 가능합니다.”
“마취는?”
“다른 수술 담당 중이라 30분 정도 소요된답니다.”
“시간이 없는데. 정신계 쪽도 없어?”
“네. 없습니다.”
그렇다면 약물을 써야 하는데 마취가 들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아까웠다. 몸에 독이 되는 마취제를 생사를 넘나드는 어린아이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도가 밑져야 본전이다.
빠르게 산에서 내려온 세라가 수술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무균실로 들어왔다.
“상처는 확인했으니 바로 시작하시죠.”
상처가 세균에 오염되지 않게 수술 장갑을 낀 세라가 심호흡을 했다.
‘염력’ 계열 어빌리터와 협력해서 박혀있는 총알 조각을 하나하나 빼내는 걸 봐야 하는 세라는 손이 떨려왔다. 그러는 동안 총알을 빼낸 구멍에 혈관과 장기가 붙도록 끊임없이 ‘힐링’을 시전하는 세라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렌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끄으으… 아파… 으… 아파… 싫어… 하지 마… 제발… 하…하지 마……!”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렌 학생. 제발 움직이면 안 돼요. 곧 안 아파질 겁니다.”
육체의 깊은 곳에 박힌 철 조각을 강제로 벌려 꺼내고 부서진 뼈를 하나하나 맞추는 ‘염력’ 어빌리터의 기술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다.
그 어빌리터와 호흡을 맞추는 세라는 손가락 단면이 죽지 않도록 들고 오는 내내 어빌리티를 시전한 데다, 루시에의 폐를 뚫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실패하고, 다친 렌의 응급처치를 하는 등 어빌리티를 과도하게 써버린 탓에 어지러워서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새빨간 상처가 보기 힘들다. 호감도 이벤트에서 유리에와 관련된 과거를 극복해야 하는 세라는 트라우마가 재발해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이 중요한 때에 몸에 흐르는 어빌리티가 고갈되어 감을 그녀는 절실하게 느꼈다.
루시에도 구하지 못했는데 이 애까지 잃을 수는 없어. 내가 무엇 때문에 선생님이 된 건데. 이런 어린아이조차 살리지 못하면 왜 이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차라리 없다면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지.
“으윽! 으으…흐으윽. 싫어…싫어어… 할머니… 아파아.”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할 수 있어요. 렌 학생은 강하잖아요. 그렇죠?”
용케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그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세라도 이 과정이 얼마나 아플지 알았다. 살을 헤집는 고통에 짓이겨져 제정신이 아닌 렌이 눈물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세라는 드디어 끊겨가는 어빌리티를 보며 식은땀이 흘렀다. 왜 중요한 때만 어빌리티는 한계에 봉착하는 건가. 아직도 빼내야 하는 것들 천지인데 어째서 치료할 수가 없는 거야.
“마취 계열 어빌리터는 아직인가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인력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몇 분 후면 약으로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 전에 ‘힐링 팩터’라도 처방해 주세요. 군 병원이니까 있을 겁니다. 그렇죠?”
“그럴 수 없습니다, 밀로니 중위.”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인가요? 지금 내 학생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의사에게 억지를 부렸다. 이물질을 빼낸다고 해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집도하는 의사는 단호했다. 세라를 도와 ‘염력’으로 산탄을 꺼내고 부서진 뼈의 조각을 맞추고 있는 군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힐링 팩터’는 성장이 덜 끝난 미성년자에게 부작용도 심할뿐더러 비용도 만만찮습니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치료에 집중하세요, 중위.”
“전 지금 한계란 말입니다. 비용이라뇨. 그런 걸로 생명을 저울질하지 마세요. 내 제자예요. 내 제자라고요! 왜!”
“‘힐링 팩터’를 사용하려면 장성급 장교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중위가 당장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장성급 장교. 나라의 높으신 분들과 연줄이 많은 비어빌리터가 대부분인 그들은 제립학교 학생들을 모두 척도로만 평가한다. 척도가 낮은 학생들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는 기회주의적인 자들이 태반이었다.
“흑… 안 돼.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더 이상 손에서 어빌리티가 나오지 않는 세라는 마른 샘에서 물방울을 쥐어짜 냈지만 결국 그녀도 중도에 쓰러졌다 탈진한 그녀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부모님이 이곳까지 오고 있다고 해서 국경 경비대대에 있는 군 병원 응급실 앞에서 서성거리던 유네는 안에서 들려오는 세라의 처연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렌 군, 무사할까. 정말로 죽는 건 아니겠지. 나 때문에 죽으면 어쩌지. 렌 군은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거리는 동안 복도 반대편이 소란스러웠다. 고개를 들자 치안대의 호위를 받으며 부모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뛰쳐나간 엄마가 유네를 꽉 껴안았다.
“유네! 우리 딸. 무사했구나!”
“어…엄마, 아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유네는 부모님과 만나 극적으로 포옹했지만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멀쩡했다. 그녀를 대신한 렌의 몸이 엉망이었다.
렌 군을 지켜줬어야 했는데 붙잡혀 버려서 그래. 내가 약해서. 내가 아니었으면 렌 군은 다치지 않았을 텐데.
“난…난 괜찮은데 렌 군이.”
“걱정하지 말거라. 그 애도 괜찮을 거야.”
어떻게 다친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좋게만 말하는 그녀의 부모님의 말은 허례허식같이 들렸다.
괜찮을 거라고? 그 상처가 과연 괜찮은 것인가? 괜찮다며 달랬던 말이 렌에게 그렇게 들렸을까 유네는 수치스러웠다. 그녀는 손을 붉게 물들였던 피의 감촉을 옷에 닦아 없앴다.
12월의 성탄제 이벤트는 유네에게 있어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가진 자신이 어빌리티를 가졌다는 것의 의미와 그 여파, 그리고 미들 스쿨 친구들이 왜 자신을 미워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나아가 마족뿐만 아니라 비어빌리터와 어빌리터 간의 통합을 원하는 등 나아가고자 하는 꿈의 정체를 더욱 명확히 마무리하는 이벤트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 대신 재경이 부상을 당하고, 유네의 마음속에는 이해보다는 증오가 치솟았다.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나았는데. 그 여자, 허무하게 죽을 거면서 왜 렌 군을 아프게 하고 간 거야. 다 밉다. 이 상황이 그저 끔찍했다.
눈물을 쏟은 유네가 엄마의 품 안에서 훌쩍거렸다. 이를 안심해서 우는 거라고 착각한 부모님이 그녀를 차분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유네의 아빠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며 유네를 이끌었다.
유네는 렌이 무사를 끝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과보호하는 부모님의 이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곁을 떠났다.
현재 군 병원에서 재경을 치료할 유일한 힐러였던 세라가 한계에 부딪혀 쓰러지자 다른 어빌리터를 찾기 위해 병원이 소란스럽게 들쑤셔졌다.
이번 일의 인간 측 흑막이자,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남자는 부지런히 병원을 뛰어다니는 간호사들을 흘기며 서류에 서명했다.
“무슨 소란이지?”
“납치되었던 제립학교 소속 학생을 치료하던 힐러가 쓰러졌답니다.”
“환자는?”
“치료하는 동안 쇼크가 와서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합니다.”
“‘힐링 팩터’를 쓰면 되지.”
“여분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어린애한테 쓰기엔…….”
“내 이름으로 처방을 내려.”
무슨 속셈인지 독수리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두말하지도 않고 충성을 한 특수부대 대원이 의사를 찾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멜가로스크 자작은 짧게 웃어 보이고는 복도 저편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향해 쉬엄쉬엄 걸어갔다.
렌을 치료하던 세라가 어빌리티 과도 사용으로 탈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류제는 초조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괘씸하고 뚱뚱한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데 이제는 이런 화를 풀 곳도 없었다.
도대체 왜? 렌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곧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특수부대가 도착할 예정이었고 스콜라 맥도어가 한 짓은 의미가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아니면 그 정도로 렌은 유네가 걱정된 건가? 자기 몸을 던져서 구하고 싶을 정도로? 그런 행동은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상처 입힐 뿐이라는 걸 왜 아직도 모르지? 몇 번이고 설명해 줬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거리를 둔 게 무의미하듯 상처는 반복되고 불안함은 증식된다. 보상받지 못할 마음이 렌을 원망했다. 내가 나무라도 너는 괜찮다며 손을 쳐내기만 할 테지. 왜 바뀌지 않는 거야. 이만하면 그만 힘들게 할 때도 되었잖아.
류제는 조각조각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렌과 있으면 자신이 다른 누군가라도 되는 것 같았다. 고아원의 상냥한 형 오빠도, 처음 수도로 올라와 또래 친구를 사귄 미성년 학생도, 숙명에 대해 고민하는 어빌리터도, 평범한 사춘기 소년도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버려서 엉망으로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렌만이 그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로 인해 절망하고, 희망을 놓지 못한다. 아까도 그 덕분에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이젠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류제가 제발 렌이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으려니 멜가로스크 자작이 옆에 앉았다.
“류제 신리지?”
류제가 차가운 눈으로 타인을 노려보았다. 얼굴을 감싸 안은 손가락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에 붉은빛이 어렸다면 잘못 본 것이 아닐 테다.
그러나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이고 역전을 노리는 마족들의 최후의 보루임을 모르는 그는 들고 있는 지팡이로 제 어깨를 두들겼다.
“경계할 것 없어. 눈치가 있는 학생이라면 친구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에게는 더 살갑게 대할 필요가 있단다.”
“당신이 어떻게 렌을 살렸다는 거죠?”
“죽어가는 네 조그마한 친구에게 ‘힐링 팩터’를 처방하라 지시해 준 게 나니까.”
그가 웃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류제는 알 길이 없었다.
‘힐링 팩터’는 류제도 육안으로 본 적이 있었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사용하는 것을 한 번 봤었다.
깊게 패 뼈가 보이는 상처도 단숨에 아물 만큼 회복력이 대단했었지. 그걸 사용하면 렌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친구는 친구를 잘 두었구나. 아아, 그래. 그럼 생명의 은인은 내가 아니라 너겠구나. 말실수해서 미안하구나.”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그의 눈빛에서 증오와 원망, 분노가 읽혔지만 멜가로스크 자작은 유쾌하게 제 말만 늘어놓았다.
“네 친구가 그걸 처방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네 친구이기 때문이지. 안 그러나, 화제의 소년?”
“닥쳐요.”
“등급1의 마족을 하나 더 처리했다고 들었다. 네 덕분에 키아나트리체는 더욱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구나. 네게 빚을 만들어둘 수 있어서 나도 기쁘단다.”
류제가 죽일 듯이 멜가로스크 자작을 흘겼다. 반응을 즐긴 그는 힘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사라졌다.
처음 보는 사람의 신경에 거슬리는 말 따위 진절머리가 났다. 내 덕분에 렌이 살아난 거라고? 높으신 분들이 내게 관심이 있으니까? 렌 같은 척도가 낮고 쓸모없는 어빌리터들한테 할애할 정신은 없지만 내 친구니까 그런 거라고?
웃기지 마. 그렇게 이를 악물었어도 류제는 힘이 있기에 비로소 지킬 기회가 생긴다는 문장을 여실히 깨달았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힘은 있는데 그 힘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 휘둘렀다. 그는 어리석은 어린아이였다.
“제기랄.”
영웅이라 불리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앞에서는 왜 지키고 싶은 사람만 지키질 못하냐며 애 같은 소리나 했었는데 정작 지켜야 할 사람은 지키지도 못하고 난 무슨 뻘짓거리나 하는 걸까.
사랑 타령, 욕심 타령한다고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분명 그 커다란 불꽃을 두고 평생 지켜주겠다 맹세했다.
더 이상 안일하게 있어서는 안 돼. 예전처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지켜야만 해. 내가. 나만이 렌을 지킬 수가 있어.
미안해, 렌. 내가 욕심꾸러기라서. 그래도 이제부턴 정말 아무도 널 다치게 하지 않을게. 반드시. 그러니까 제발 살기만 해줘.
어둠이 짙은 그의 파란 눈동자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결심이 자리 잡았다.
* * *
성탄제를 앞두고 제립학교 학생 두 명이 납치될 뻔한 사건으로 키아나트리체 정계가 술렁거렸다.
살아남은 세니타리 롯 멤버들을 심문한 결과 배후에 미노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기정사실화 되자 보고를 들은 왕녀는 대노했다. 그녀가 큰 소리로 화를 낸 그날 오후엔 따스한 성탄제에는 맞지 않는 번개와 지독한 눈보라가 아가타를 덮쳤다.
미노타가 키아나트리체를 상대로 날뛰는 이유는 긴급 구휼 정책이 얽힌 오래된 식량난과도 연관이 깊을 것이다.
무엇을 대의로 들든 지금은 인간끼리 전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감히 최후의 검인 어린 어빌리터에게 손을 댄 미노타의 형편없는 짓거리에 자존심이 상한 키아나트리체 정계는 괘씸한 미노타를 징벌하기를 원했다.
황제는 친우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공분한 니냐롯트에게 나라카 토벌을 우선시하라는 차가운 명령만 내렸다.
니냐롯트는 이전에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전해준 전언을 곱씹으며 화를 인내했다. 언젠가 진실을 헤집을 그때를 위하여. 떨리는 주먹이 가야 할 곳을 명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바람처럼 흔들렸다.
범죄자는 땅에서 안식을 취할 수 없다는 키아나트리체의 법률상 마족에게 살해당한 루시에 라탈스키나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살된 스콜라 맥도어 등의 시체는 화장되어 어딘가에 뿌려졌다.
루시에의 뼛가루를 뿌릴 때에는 류제가 창고에서 잡아 온 좀도둑과 세라가 함께했다. 좀도둑은 실은 루시에를 짝사랑했는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세라도 자유롭게 날아가는 루시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르타 상회는 그날을 기점으로 미노타와 관련된 모든 거래를 끊었다. 나르타 상회를 중심으로 모인 다른 상회의 여론도 좋지 못했다. 미노타의 괘씸한 짓거리에 대한 소문은 상인에게서 일반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연말인 지금 올해 들어 가장 불길한 기운이 키아나트리체에 감도는 가운데 수학여행을 갔던 펠노아도, 호세마타 요새에서도 전쟁의 기운을 감지했다. 지독하게 내리는 눈을 보며 수녀 루나는 물을 긷다 말고 류제를 걱정했다.
삑, 삑. 전자음으로 치환된 심장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상처가 회복기에 접어들자 군 병원에서 이송되어 아가타 인근 병원 1인실을 쓰게 된 재경은 모든 상처에 새하얀 붕대가 감긴 채 의식 없이 호흡기로만 숨을 내뱉었다.
상처는 깔끔하게 나았지만 뛰어난 회복 능력을 가진 만큼 ‘힐링 팩터’는 사용자에게 큰 부작용을 안겨주었다.
어떤 심각한 상처도 눈에 보이는 빠르기로 회복시키지만 ‘힐링 팩터’로 회복된 살과 근육은 조금만 자극이 생겨도 물러지는 등 진흙처럼 약하기 때문에 몸의 세포가 전부 자신의 것으로 치환되는 동안은 병실에서 절대안정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기에 세포분열이 활발한 성장기 아이에게 ‘힐링 팩터’는 특히 사용이 지양되는 약물이었다. 상처가 났던 인근의 세포가 재생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힐링 팩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혈우병처럼 넘어져 긁힌 상처도 스스로 아물지 못해 이 약물에 의존하게 된다.
처음 사용한다면 시간을 들여 독성을 중화시킬 수 있지만 절대안정 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힐링 팩터를 쓰게 된다면 전에 있던 상처가 괴사할 확률이 미성년자는 성인에 비해 열 배는 높았다.
괴사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시 힐링 팩터를 쓰는 뫼비우스의 띠가 형성되면 몸은 점점 부서져 내려 사망한다.
눈을 감은 그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경은 멀리 보이는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갔다. 이전에는 할머니를 봤었던 것 같지만 이번에는 류제였다.
그는 류제가 칭찬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유네를 무사히 지켜냈으니까 이 세계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류제의 손을 붙잡으며 활짝 웃었다. 내가 드디어 해냈어. 류제, 이 세계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세상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갔다.
재경은 그를 부단히도 괴롭히는 장면을 떠올렸다. 서슬 퍼런 눈을 빛내는 류제가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꿈. 그 꿈의 연장선이 재경을 붙잡았다.
[왜 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거야?]
류제가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 숨이 막혔다. 두꺼운 손이 목을 조르는 것보다 원망스러운 목소리에 숨이 더 가빠왔다.
꿈속의 류제는 재경을 용서하지 못했다. 왜 항상 이렇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최선을 다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할까.
싫어.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가 뭔데. 나한테 기회를 주려고 한 게 아니었으면 나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세계에 대체 왜 온 거냔 말이야. 응? 제발 누가 답해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줘. 류제, 류제……!
재경이 눈을 떴다.
허억, 숨소리가 가쁘게 들려오는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은 류제의 얼굴이었다. 재경은 그를 향하던 원망의 붉은 동공을 떠올렸다. 때마침 류제의 손이 재경의 목 언저리에 향했다.
“우악!”
깜짝 놀란 재경이 손을 밀치니 무안해진 류제가 주춤거리다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렌의 호흡이 이상해지자 안정시킬 겸 이불을 덮어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의식을 차린 건 좋은데 걱정했던 상대에게 거절당하는 건 썩 거슬렸다. 애써 웃는 류제는 렌이 깨어난 사실에만 기뻐하라고 마음을 달랬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
“아…아냐. 그… 뒤숭숭한 꿈을 꿨거든. 잠에서 덜 깨서 그랬나 봐.”
잠시 헐떡거리던 재경은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돌렸다. 누워있는 곳은 병원 같은데 어째 시야가 답답하다 싶었더니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른쪽 얼굴을 더듬거렸다. 얼굴을 단단히 감싸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혹시 총에 맞아 실명했나 재경이 두려워하기 전, 간호사에게 환자가 깨어났다는 호출을 넣은 류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분간 그쪽 얼굴은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시신경은 괜찮은데 주변 상처가 다시 물러질 수 있다고 했거든. 자세한 건 나중에 전문가한테 들어.”
‘힐링 팩터’의 부작용을 설명하는 의사에게 신신당부를 들었던 류제는 어쨌건 살아있는 렌에게 감사했다.
재경도 그 사실을 실감했는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작게 중얼거렸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용케 살았구나, 나.”
“몸 상태는 어때?”
“그냥 좀 뻐근한 정도. 괜찮아.”
“다행이네.”
재경은 덤덤하게 답하는 류제를 힐끗거렸다.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지만 지난달 이후로 단둘이 있어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또 일 쳤다고 잔소리하려나. 찔렸던 재경은 할 말이 없어 창밖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발견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나 얼마 동안이나 잔 거야?”
“꽤 오래. 성탄제는 진작 지났어.”
“벌써? 이런. 내가 입었던 옷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는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지 않자 왼손을 들어 몸을 살폈다. 왼쪽 손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잘렸던 새끼손가락 뼈를 붙여야 하기 때문에 붕대가 매여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니 류제가 말리며 대신 몸을 일으켰다.
“다 찢어져서 버리려다가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는데. 왜? 중요한 거라도 있어?”
“아, 뭐. 그렇지. 잊어버리기 전에 꺼내두려고.”
류제가 엉망이 된 옷을 찾는 동안 재경이 상처를 확인했다.
스콜라 맥도어의 총에 맞은 전후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병원의 전경이나 세라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단편적인 장면 말고는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
다리도 어디 접질려졌던 건가 파스가 붙었다. 어깻죽지에도 고통이 남았다. 눈을 뜨니 말끔하게 나았던 병마 때보다 훨씬 심각하게 다친 모양이다.
미연시 버프를 받고 형편 좋게 낫게 해주는 건 저번이 마지막이었던 건가. 재경은 상반신을 둘둘 만 붕대를 더듬거리다가 류제가 넘겨주는 옷을 건네받았다.
“여기. 조심해.”
“오, 땡큐.”
당시에 입고 있던 옷을 보자니 그때의 상처가 어지간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진청색이었던 코트가 어둑한 피로 색이 바뀌어있었다. 옅게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코트에 난 구멍을 흘긴 그가 속주머니를 뒤졌다.
“과격하게 움직이지 마.”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친 어깨를 비틀며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류제는 속이 안 좋아졌다. 뭐가 중요하다고 일어나자마자 들쑤시기는.
류제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간섭과 잔소리를 억눌렀다. 말을 해봤자 어차피 돌아올 말은 똑같다. 그가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류제도 상처받기 싫었다.
“내가 이 정도로 죽겠냐. 난 불사신이라고.”
그의 예상대로인지,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었던 재경은 괜찮다는 걸 피력하고 싶었다. 남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감당하기엔 그는 여전히 서툴렀다. 성탄제가 지나버려 애매하긴 해도 이게 있으면 류제도 기분을 풀지도 모른다는 게 재경에겐 더 중요했다.
“하하, 불사신이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상냥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안에는 뼈가 있었다.
류제와 화해해서 전처럼 지내고 싶었던 재경은 이번 호감도 이벤트가 끝나면 전해주려고 했던 성탄제 선물을 찾느라 빈정거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있다. 류제, 좀 늦었지만―”
그가 외투 안쪽 주머니에 있던 열쇠고리를 짚는 순간 바깥이 시끄럽더니 병실 문이 열렸다. 병문안을 온 손님이 더 있었다.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지쳐있던 유네가 재경이 눈을 뜨고 있자 인상이 풀어졌다. 곁에 있던 비키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제립학교 학생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은 극비였으나 유네의 룸메이트이자 8반의 반장 비키는 담임 대리 권한으로 유네와 같이 병문안을 올 수 있었다.
“언제 눈 뜬 거야?”
“방금. 간호사 불렀으니까 곧 올 거야.”
류제가 답했다. 렌이 뭘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지 뒤적거리던 손이 멈추었다.
찬 바람이 들어올까 문을 닫은 비키는 평소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괜찮아? 이 바보가. 또 말도 안 되는 곳에 얼굴 디밀었다지?”
“이야, 귀하신 분들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래.”
“렌 군, 정말 다행이야.”
붕대가 칭칭 감겼어도 평소와 다름없는 바보 같은 얼굴을 보고 안심한 유네가 달려와 재경을 껴안았다. 상처를 신경 쓴 것인가 포옹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두꺼운 코트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그의 심장에 닿았다.
유네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 일 이후로 매일같이 울기만 하는 그녀를 비키가 달랬다.
정말로 렌이 죽는 줄만 알았던 유네는 그동안 그의 상태를 류제에게 말로만 전해 듣다가 오늘 두 눈으로 확인하자 안도감에 파묻혀 비키의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유네가 이번 일을 설명할 때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았던 비키는 다행이라며 같이 눈물을 훌쩍거렸다. 재경은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상처는 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비키가 병문안으로 사 온 꽃과 과일을 탁상에 올려두고는 끼고 왔던 장갑을 벗었다. 비키도 말은 사납게 해도 렌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걱정했는지 눈 아래가 검었다. 멀쩡한 곳이 없는 재경을 비키가 이곳저곳 훑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렌이 깨어났음을 알린 지 얼마 안 되어 의사가 회진을 왔다. 이곳저곳 몸을 만져보던 의사는 부작용이 있을 테니 넘어지거나 다칠 것 같은 행동은 삼가라고 전했다. 알겠다고 대충 답하는 재경의 배에서 성대하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과일 정도는 괜찮다며 병문안 선물 섭취 허가를 전한 의사는 차트에 이러저러한 말을 쓰더니 간호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요리 동아리에 입부한 후로 칼질로 그럭저럭 모양을 낼 수 있는 유네가 고집을 부려 자신이 깎았다. 과일 살의 많은 부분이 파이긴 했지만 접시에 제대로 된 주전부리가 마련되었다.
붕대 때문에 입을 벌리기 힘든 재경은 작게 썰린 과일로 입가심을 했다. 뭐라도 들어가니 배에서 나는 울림이 진정되었다.
두런두런 며칠 동안 학교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세라 선생님이 스탈라 조약을 어긴 대가로 제립학교 선생님 자격이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흘렸다.
마족 때문이라지만 류제, 유네는 물론이고 재경까지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책임을 그녀가 지겠다고 했으니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짜? 세라 쌤 내년부터는 학교에 없는 거야?”
“몇 년간 군에서 재복무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학교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댔어.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어제오늘 우리도 세라 선생님을 보지 못했거든. 그래서 나한테 담임 대리 신분이 생긴 거고. 하아, 벌써부터 징계가 내려진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구나.”
입에 한가득 과일을 우물거리던 재경은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를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지했다.
특히나 루시에를 눈앞에서 잃어버린 세라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쌓아온 모든 이벤트를 무너뜨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라가 자격 정지를 당해 군으로 돌아가는 건 그도 위키에서밖에 본 적 없는,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세라의 호감도가 0일 때 결말에 나타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구나’는 무슨. 태평한 소리나 해대긴. 세라 선생님이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왜 총을 들고 있는 상대한테 뛰어들고 난리야. 너 바보야? 아니, 바보인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하잖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때 슬렉터가 멀쩡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그지?”
어떻게든 이야기가 잘 끝났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재경이 동의를 구하듯 가볍게 말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과민반응하긴. 쑥스러워진 재경은 핀잔이나 해대는 비키 말고 조용히 있는 유네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 다시는 못 할 경험이었어. 안 그래, 유네?”
이야기를 듣던 유네의 손이 움찔거렸다. 열심히 깎은 사과가 무안하게 접시에 떨어졌다.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는지 모르는 무신경한 말에 유네가 결국 폭발했다.
“렌 군은 왜 그래?”
“뭐가?”
어리벙벙하고 김빠진 목소리로 웃던 유네의 말투와 달랐다. 낮고 어둠이 짙은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때 기억을 떠올린 유네는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 끔찍한 일이 렌 군에게는 웃으면서 ‘다시는 못 할 경험’이야? 아무리 내가 인질로 잡혔어도 그렇지, 왜 무모한 짓을 한 거야?”
“아니… 왜 화를 내. 네가 위험한 것 같아서 그런 거잖아. 나쁜 의도로 그랬겠냐?”
그러자 분위기는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머쓱하게 눈을 끔벅거리던 재경은 또 말실수를 했나 입을 다물었다.
괜히 뒤통수가 가려웠다. 긁을 손이 없어 입만 달싹이던 재경이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는데 유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렌 군의 뭐야.”
“뭐? 아니… 치…친구지.”
당연한 질문을 한다. 재경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류제를 힐끗거렸지만 앞머리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유네는 들고 있던 접시를 탁상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렌 군은 평범한 친구한테 왜 목숨을 걸어?”
“뭐? 왜냐니? 그걸 왜 물어?”
그야 유네가 히로인이고, 유네 루트로 가기 위해서는 유네는 호감도 이벤트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 다치면 안 되는 귀한 몸이었다. 유네의 몸에 세계의 평화가 걸려있다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이런 말도 다 변명이고 그때는 그냥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병마 때처럼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렌 군은 자기 목숨이 안 소중해?”
“혹시 화났어?”
곤란해도 웃기만 하고 화를 내도 금방 풀어지는 유네는 오늘따라 재경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적개심이 담기지 않은 화를 받아치는 법을 재경은 몰랐다. 유네가 화가 난 이유도 잘 모르겠다.
“렌 군은 자기 목숨이 내 것보다 귀하지 않아? 내가 렌 군의 목숨을 대신할 만큼이야? 렌 군은 루시에라는 여자애가 말했던 것처럼 내 남자 친구도 아니잖아. 그러면 렌 군, 그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렌 군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겨 줘. 렌 군은 내 친구기도 하잖아.”
유네는 재경에게 뿌리 깊게 박힌 인식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다.
재경은 유네의 말이 매정하게만 들렸다. 그가 유네를 구한 것은 알량한 기사도 정신이라기보단 눈앞에 있는 그녀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한다는 의도는 없었다.
“그 상황에선 널 먼저 구하는 게 맞잖아. 더군다나 넌 부모님이 걱정하니―”
“렌 군은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니까 상관없다는 거야?”
“아… 그…그게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겠지.”
“평범? 뭐가 평범한데.”
루시에에게서 렌의 가족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했던 유네가 비참함에 울먹거렸다. 유네에게서 렌이 실은 고아였다는 걸 알았냐는 질문을 들었던 비키는 옆에서 침묵했다.
유네는 자신 대신에 죽을 위험을 건넌 렌이 싫었다. 그냥 친구인 그녀에게까지 목숨을 거는 렌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은 없다는 의미 아닌가. 이건 희생정신이 강하다기보다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길 뿐이다.
“이전에 학교에 마족이 쳐들어왔을 때, 왜 렌 군하고 류제 군하고 싸웠는지 난 잘 몰랐어. 근데 지금은 잘 알겠어.”
눈물을 닦은 유네는 이전처럼 순둥순둥한 얼굴이 아니었다. 새싹빛의 눈동자는 짓이겨진 잡초처럼 죽어버렸다. 재경의 말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그녀를 찔렀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렌이기에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렌 군,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런 부담감 따위, 대신 살아난 사람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워.”
그녀를 생각하는 렌의 친우를 향한 마음보다 렌을 좋아하는 그녀의 감정이 무겁기에 만약 그가 죽었더라면 덕분에 살아난 그녀는 그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가야 했다.
“나는…….”
재경은 놀랐다. 무겁다니. 왜? 살아있는 건 다 제쳐놓아도 기쁜 거잖아. 그리고 유네와 그의 관계는 죽은 그의 부모님과 그들이 도와준 행인과의 관계처럼 새빨간 타인도 아니지 않는가.
왜 목숨을 걸고 지켜준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난 유네가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뿐인데.
“미안. 몸이 안 좋을 텐데 이런 소리나 해서.”
“아니… 그… 나도 왠지 미안.”
병문안을 온 입장이라는 걸 깨달은 유네가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렌 군이 아픈데 화를 낸다고 낫는 것도 아니겠지. 속에 얹힌 속은 한숨으로도 가라앉지 않았다.
“미안. 이만 갈게. 얼굴만 보러 온 거라 학교로 금방 돌아가야 해. 지금 학교에 외출 금지령이 걸렸거든. 전교생들 모두 학교 밖에 못 나간대. 아마 겨울방학 때도 본가로 못 돌아갈 거 같아.”
유네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비키도 자리에서 일어나 재경에게 ‘바보’라고 말하고는 미련 없이 나갔다.
병실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어쩐지 저번 학기 중간 보스 때 류제의 반응과 지금의 유네의 반응이 비슷해 보였다.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또 무지한 그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저기… 류제, 역시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걸까?”
“무엇보다 무사가 제일이지. 네가 살아있잖아. 그걸로 됐어.”
류제는 그럴 수도 있다며 짧게 웃었다. 내심 그때처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을 기다렸던 재경이 멈칫했다. 비꼬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 재경은 부드럽게 미소 짓는 류제의 얼굴에서 확연하게 다른 태도를 느꼈다. 언뜻 류제가 목을 조르는 악몽과 현재의 그가 겹쳐졌다.
불길하다. 재경이 손을 뻗었지만 차마 짐을 챙기는 류제를 붙잡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처럼 류제조차 그를 거절할까 봐 무서웠다.
“나도 유네랑 같이 돌아갈게. 간신히 시간 낸 거라서. 빨리 퇴원했으면 좋겠다.”
“아… 응.”
“나중에 또 올게. 몸조리 잘해.”
병실 문이 닫혔다. 그 총소리와 함께 유네의 꿈도 깨져버렸다.
어수선한 마음에 재경은 열쇠고리를 쥐던 손을 펼쳤다. 깨진 열쇠고리는 제값을 하지 못하니 이제 쓰레기가 되었다. 그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다.
그야 그렇겠지. 나는 류제가 무슨 반응을 보이길 기대했던 건가.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 슬픈 눈물? 웃기지도 않는다.
이런 게 그가 바랐던 것 아니었나? 그의 상처에 의연한, 관여하지 않는, 냉정하면서도 무관심한 태도. 타인에게 무관심한 류제가 남들에게 취하는 그것.
하하, 뭐야. 그럼 나도 류제의 ‘관심 없는 것’이 되었다는 거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루시에도 죽어버리고, 스콜라 맥도어는 총을 쏘고, 유네는 화를 내고, 세라의 호감도는 0으로 초기화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 모든 건 호감도의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류제에게 미움받으려고 그런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다시 친해지고 싶어서, 멀어지는 게 싫어서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고 싶었다. 네가 고민하는 건 해피 엔딩만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웃으며 알려주고 싶었다.
무사히 귀환한 유네의 호감도가 5까지 찼음에도 나타나는 불길한 징조를 재경은 고심하고 싶지 않았다. 파고들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미래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재경은 그저 렌 지미가 뒤늦게라도 삼류 악당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라며, 마음이 아픈 건 다친 상처가 쑤시는 것일 뿐이라며 위로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디서나 불필요한 조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무의미하게 나날이 지나갔다. 순환하는 해는 뜨고 지고를 반복했다.
깨어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재경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퇴원은 언제 하는지 회진을 오는 의사에게 물어보아도 수확이 없어서 이 상태대로라면 새해 첫날도 이곳에서 보낼 듯하다.
서늘한 기운이 안개처럼 틈을 비집고 흘러들어 오는 창가 앞. 저 해가 떠오르는 태양인지 지는 태양인지 모호한 풍경을 보며 재경은 약으로 된 차를 마셨다.
‘힐링 팩터’의 독성을 중화시켜 주는 약이라지만 쓰고 맛이 없어서 먹기를 미루다가 결국 의사에게 걸려 오늘은 억지로 마신다.
같은 아가타의 하늘 아래에 있지만 그의 친구들도 병문안을 오지 못했다. 재경은 병문안 온 가족들이 단란하게 산책하는 정원을 흘겼다.
그는 가끔 상태를 보러 오곤 하는 세라가 말해준 정보를 떠올렸다. 지쳐 보이는 그녀는 교직 박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불길한 추측은 항상 들어맞았다. 재경은 지금 와서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사과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로는 세니타리 롯의 납치 건으로 제립학교는 십수 년 만에 다시 폐쇄적인 방향으로 운영을 변경한다고 했다. 학교가 마족의 타깃이 되었을 때보다 훨씬 방어적인 태도다.
이 때문에 성탄제에도 학생들은 학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세라는 대신 변명했다. 외출 금지라고는 들었으나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재경은 친구들이 화가 나서 안 오는 건 아님을 알고 안도했다.
재경은 그날 마지막으로 봤던 친구들의 실망한 뒷모습을 떠올렸다. 한 가지 일을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재경은 고려하지 못하는 텅 빈 사고의 영역이 불안했다.
그때 유네가 왜 화를 낸 건지, 비키는 왜 반박해 주지 않았는지, 류제는 어째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를 경계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도 퍼즐에 맞지 않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무지한 재경은 합리화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이었잖아. 더 좋은 수가 있었어? 라고 속으로 변명해 봐도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해피 엔딩이 우선이었던 그는 인물들의 소소한 감정은 무시했다. 그의 유일한 조언자인 사라 하놋이 히로인들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더 중요한 주인공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잊어버렸다.
류제를 의견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닌, 휘둘러야 하는 존재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이 컸다. 타성에 젖어버린 그의 버릇이었다.
“빙의한 지 1년도 지나기도 전에 돌아온 게 이거라니. 할머니, 난 매번 제자리걸음만 하네.”
이 세계에 빙의한 후 그는 스스로가 많이 바뀐 줄 착각했다. 다른 애들처럼 평범해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거칠었던 말투도 다듬어지고, 상처받았던 마음도 인정했으며, 공감하고 기댈 사람을 찾고, 친구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순조롭게 이어져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가 망가져가니 붕괴하는 사건 선을 지날 때마다 경험한 감정은 허무로 바뀌었다.
“네가 고른 길 아니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당당하게 나가라.”
익숙한 목소리에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공 류제에게 불현듯 나타나 기묘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하는 사라 하놋이 이번에도 류제를 만나 전쟁 예고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겸사겸사 병원에 있는 재경에게 들른 것이다.
그녀는 붕대투성이인 재경을 보면서 혀를 찼다. 만날 때마다 인사로 하는 지팡이로 머리 때리기를 하기도 미안해서 그녀가 공연히 꿍얼거렸다.
“잘하는 짓이다. 꼴이 왜 이 모양이야?”
“다치는 거야 뭐, 허구한 날 다쳤는데요. 그러려니 해야죠. 제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매번 그랬으니까. 빌어먹을 삼류 악당 렌 지미의 불운.”
“또 영문 모를 소리나 하기는.”
재경의 옆에 선 사라 하놋이 창가 밖 같은 전경을 응시했다.
약을 마시던 재경은 창가의 찬기에 차갑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찻잔 안 액체에 파장이 어렸다.
“이 세상은 제가 예언을 훼방 놓는 게 싫은가 보네요, 할머니.”
재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라가 왜 왔는지 재경은 모를 리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삼지 않으면 재경은 싫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하지 못했으면 그는 세계를 망친 완전한 죄인이었을 것이다.
“죽어버렸어요. 나 때문에 죽으면 안 되는 애가 죽어버리고,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이야기는 엉망진창이고, 친구들은 나한테 실망했고, 난 이 모양이에요. 제대로 굴러간 게 하나도 없어요. 하하, 아하하.”
말하면 말할수록 다 자기 탓인 것 같았다. 재앙이다. 마족도 뭣도 아니라 그가 이 세계의 재앙이었다. 왜 이런 세상에 온 걸까. 그냥 그때 마음 편하게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재경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떠올렸다. 언젠가 사라 하놋은 그에게 삼류 악당이 하기 싫으면 그의 역할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답을 찾고 싶어 고민하던 재경이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겠어요, 할머니.”
“…다 큰 사내자식이 청승맞게 울지 말거라.”
그게 재경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 세계의 운명이니 뭐니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재경은 작고 초라했다. 다 큰 게 아니다. 그는 여전히 모자랐다. 능력도 없는데 거대한 짐을 떠맡은 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오해를 받는 심정은 고독하고 외로웠다.
“모르겠어. 히로인의 마음이나 류제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재경이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그녀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실컷 잘난 척했던 장면이 생각나 볼 낯이 없었다.
“하나도 모르겠어.”
그는 아무것도 결론 내리지 못했지만 류제는 재경이 생각하는 행동 영역을 벗어났다. 이야기 끝에 이런 감정을 느끼기를 재경은 정말로 원했었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툴기 그지없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버거운 기대를 했다. 힘들었다. 기대를 부응할 수도 없는 그에게서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할머니가 죽었을 때처럼 사무치는 외로움이 백마족의 얼음 창 대신 그의 심장을 찔렀다.
사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그러지 말라고 초장에 경고했건만. 그녀도 마지막에 미소 짓는 자가 재경이길 바랐다. 그러니 예언이 엉망진창이 된 건 네 탓이라고 쐐기 박지 못했다.
“할머니는… 할머니는 그래도 끝까지 내 곁에 있어줄 거지?”
사라가 어깨를 도닥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손길에 재경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미 잃은 새끼강아지 같은 표정에 사라 하놋은 마음이 동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의 늙은 몸도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있었다.
사라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라 이 이상 그에게 정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떠나야 할 사람이고, 그는 남을 사람이다. 남을 사람이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느낄 슬픔은 적은 것이 좋다.
그녀는 매정하게 재경의 손을 뿌리쳤다.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너는 혼자서 잘해낼 수 있어. 네 곁에는 친구들이 있지 않느냐. 늙은 내가 무슨. 네가 기댈 사람은 내가 아니야.”
공간을 열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격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일그러졌던 공간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재경이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수건에 묻은 붉은 자국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할머니? 왜 그래요. 아파?”
들썩거리던 흉부에서 피가 계속 뿜어졌다. 이 나이에 어빌리티를 쓴다는 건 전력 질주를 하는 것처럼 몸을 좀먹는 행위였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는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재경을 달랬다.
“너밖에 없다. 너만이 할 수 있어. 그러니 모르겠다고 하지 말고 네 역할을 제대로 생각해 보거라. 너도 일부러 일을 망친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
“오늘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다음번에 보자꾸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공간을 열고 흡수되듯 사라졌다. 그제야 사라 하놋의 건강 문제를 깨달은 재경은 온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무서웠다.
현재 그녀만이 유일하게 재경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마저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그 상상을 하니 정말 할머니가 죽었을 때처럼 세상에 혼자 남은 것같이 괴로웠다.
만약 사라조차 곁에서 사라져버리면 과연 해피 엔딩 후에도 그의 자리가 이 세계에 남아있을까, 재경은 사치스러운 고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