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5)
“세라… 선생님! 잊지 마세요. 렌의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저 애란 걸.”
동요하는 세라를 류제가 냉정하게 깨웠다. 달려드는 구울을 발로 차고 미련 없이 심장을 찌르는 류제는 피해자인 척 밉살맞은 루시에를 흘겼다. 저자가 세라의 지인이건 아니건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려 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류제는 상관없었다.
“그래, 내가 잘랐어. 날 아가타로 데려간다느니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 중 한 명만 내일의 해를 볼 거거든.”
“아뇨, 전 당신과 함께 아가타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루시에가 불만스레 혀를 찼다. 지금까지 타인처럼 잘만 살아왔으면서. 그녀는 세라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늦어버려 다시는 이 길을 되돌릴 수 없다고 여겼다.
정체를 털어놓고 쌓여온 원망을 이야기해도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고, 절망할 줄 알았던 세라도 덤덤해 보여서 시시해진 루시에는 어빌리티를 크게 방출했다.
삼 대 일의 어빌리터 싸움이라도 공격성이 높은 어빌리티를 가진 그녀가 유리했다. 공격 태세에 만전을 기한 루시에를 보면서도 세라는 무장하지 않았다.
또 착한 척 시작인가. 루시에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난 당신을 죽일 거야. 아침 해를 맞이하며 비참한 과거 따위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기간트리카든 뭐든 빨리 장갑해!”
“전 당신과 싸우지 않습니다.”
“왜? 내가 유리에 언니의 동생이라서? 죄책감 가져? 관심 없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도 가식으로밖에 안 들려!”
루시에가 세라에게 경고 공격을 날렸다. 위력은 대단했지만 세라에겐 맞지 않았다. 보조 어빌리티만 가졌어도 세라는 한때 전장에 있었던 군인이었다.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루시에의 난잡하고 치우친 공격은 마족의 것과 비교하면 형편없었다.
“루시에,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다가오지 마!”
어둠에 가려진 검은 날붙이가 이번엔 세라의 볼을 스쳤다. 여전히 세라는 당당했다. 자기가 먼저 상처를 드러낸 주제에 이를 인정한 세라가 다가가 주자 겁을 먹은 루시에를 보자니 재경은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어지러운 기분이 가시고 나쁜 감정이 울컥 강제로 끄집어내졌다.
루시에의 억지를 깨달은 건 재경뿐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네가 큰 목소리로 따졌다.
“너…넌 이상해. 세라 선생님 탓만 하면서 인생이 망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주제에 왜 너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건데? 네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어!”
뭘 하고 싶냐고? 그런 건 없다. 하루하루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것 말곤 그녀에게 사는 목적은 없었다. 남이 고통받건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나한테 휘둘리는 게 아니꼬우면 너도 싸워. 싸워서 이겨내. 자유는 투쟁으로 얻어지는 거야. 나의 자유는 너의 억압으로 이루어져 있지. 투쟁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영원히 쓸모없고, 누군가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세상이란 원래 그래.”
그녀가 유네와 재경을 향해 빈정거렸다. 아까부터 루시에의 말이 자꾸만 그가 생각하기 싫었던 부분을 건드려서 기분이 더러웠다. 참지 못한 재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까짓 게 뭐가 우스워?”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자신의 철학을 듣고 비웃자 루시에가 발끈했다. 재경을 무시했던 주제에 하찮고 쓸모없는 자식이 그녀를 비웃었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빠 참을 수 없었다.
“발상이 유치해서 헛웃음이 다 나오네. 자유? 투쟁? 웃기고 있네. 네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앞길은 안 보이고, 망가지는 건 무섭고. 단지 세라 쌤이 널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던 거겠지.”
“닥쳐. 그 조잘거리는 입 다물지 않으면 다음번엔 손가락 하나로 안 끝날 거다.”
“그럼 그 잘난 어빌리티로 세라 쌤을 상처 내봐.”
정곡을 찔렸던 루시에는 류제에게 쏠려있던 그림자를 더 끌어 재경을 공격했다. 군용 나이프를 ‘강화’했던 류제는 루시에에게서 돋아난 그림자를 잘라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저 류제 신리란 자는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만들어 방해한다.
이야기하는 중에도 류제만 신경 쓰는 그녀가 재경은 탐탁지 않았다. 세라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던 그는 이유 모를 고양감에 찌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참아달라는 유네의 부탁이 있었지만 목이 근질근질했다.
아까부터 맞고, 차이고, 손가락까지 잘린 데다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던 그 분노와 무시를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필요도 없는 내 손가락을 잘라서 쌤을 도발했던 거 아냐? 세라 쌤이 아무래도 좋았으면 굳이 쌤한테 네가 누구니 뭐니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지. 아무래도 좋다고? 좋기는 무슨. 세라 쌤이 지금이라도 너를 알아줬으면 하고 바랐던 거잖아! 억지 부리지 마.”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난 저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야. 너같이 쓸모없고 불필요한 놈에서 나는 성장했어. 내가 더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변명하지 마. 잔말 말고 인정해!”
재경이 윽박질렀다. 도움을 바라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받은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다. 반복해서 스스로를 칼로 긋고, 해치고, 찢어버릴 뿐이었다. 마음을 인정하는 건 자기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후에 넌 우리들과 아가타로 돌아갈 거야.”
그래야 세라 선생님의 호감도 이벤트가 성공한다. 재경이 분을 삭이며 세라와 함께 대치했다. 유네도 언제까지고 세라의 등 뒤에만 숨어있을 수는 없었기에 재경을 따랐다.
“루시에! 이상한 곳에서 열 내지 말고 사람들 오기 전에 빨리 처리해. 그러게 내가 그거 그만하랬지?”
진심을 들킨 루시에가 흔들리려던 순간 세니타리 롯 멤버들을 챙기던 스콜라 맥도어가 외쳤다. 동요하던 루시에의 마음이 스콜라의 목소리가 방패가 되어 굳건하게 닫혔다.
“나한테 참견하지 마.”
그때부터 루시에의 공격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잡담 시간은 끝이다. 슬렉터에서 나오는 미세한 빛으로 그림자의 위치를 파악하던 세라는 류제 말고 유일하게 방어가 가능한 어빌리티를 가진 유네에게 침착하게 설명했다.
“유네 학생, 저런 종류의 어빌리티로 만들어진 형상은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 흐트러집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전엔 효과가 없는 것 같았는데요. 시…실패하면 어쩌죠?”
“넓은 범위에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좁은 범위에서 밀도 높게 폭발시키는 겁니다. 할 수 있습니다. 유네 학생이라면 반드시. 절 믿으세요.”
좁은 범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용기를 얻은 유네가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림자 이리가 입을 벌리며 세라의 머리를 물어뜯으려고 할 때 숨이 멎을 듯한 돌풍이 늑대의 머리 안에서 터졌다.
“돼…됐나? 된 건가?”
“유네… 나르타 네깟 게 감히!”
약하고 볼품없는 어빌리티를 가진 주제에 그림자를 흐트러뜨리자 자존심 상한 루시에가 더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감을 잡은 유네는 아까처럼 그들에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하나하나 터뜨렸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사용하는 ‘기압’처럼 터져서 검은 폭죽 같았다.
덕분에 류제가 안도했다. 저 세 사람 중에 공격용 어빌리티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유네가 선방해서 다행이었다.
그가 구울의 심장에서 나이프를 뺐다. 원래 사람이었던 시체들을 이렇게 취급한 건 정신력이 소모되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이 더 중요했다. 예우를 다하다 죽는다면 죽은 사람 때문에 죽는 아이러니이니.
군부대에서 빌려온 나이프의 마른 피를 닦은 류제가 예리한 날붙이를 확인했다. 구울들의 피는 썩어있어서 영 향기롭지 못했다.
“다 정리됐는데 이제 어쩔 거죠?”
류제가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도망갈 채비를 하는 스콜라에게 다가왔다. 기간트리카가 있는 루시에는 알아서 도망갈 거라고 먼저 발을 빼려던 스콜라는 류제 신리의 무지막지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립학교는 무슨 괴물을 키우고 있는 거야.
“애송이. 구울이라면 아직 많아!”
그녀가 남은 철창에서 상태가 멀쩡한 구울들을 꺼냈다. 이것들은 교육이 되다 말았지만 창고에 남기고 오기 아까워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자유를 찾은 구울들이 비명을 질렀다. 당장 밖으로 나가는 데 급급하던 구울들은 경쟁하듯 철창을 탈출하다가 앞에 있는 류제의 냄새를 맡고 네발로 달려나갔다.
“단숨에 정리를… 응?”
나이프를 편하게 고쳐 쥔 류제가 움직임을 예상해 시뮬레이션을 돌리려는데 입질하던 구울들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췄다.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스콜라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나가던 그것들이 정지하자 낌새를 느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구울의 저런 행동은 본 적 없었다. 냄새를 맡는 듯한, 위대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듯한, 이성이 없는 짐승에게서 지혜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시끄럽게 끽끽거리던 울음소리가 사라지자 눈보라 치는 주변이 고요해졌다.
“아줌마, 뭐 하는 거야?”
“나…나도 몰라. 이 멍청한 것들아, 왜 멈춰 섰어?!”
스콜라가 철창을 발로 차며 구울들의 주의를 끌었지만 그들은 넋이 나간 듯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울 다루기에 능한 세니타리 롯의 멤버들 중에서도 이 증상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뭐든 그들이 세운 계획이 틀어지는 건 좋은 일이라 여기던 류제는 잠깐의 정적을 깬 세라의 외침을 생각을 정정했다.
“류제 학생, 당장 물러나세요. 고등급의 마족이 다가옵니다!”
산 너머에서 느껴지던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인간을 벗어난 속도로 접근함을 세라가 ‘탐색’했다. 류제도 뭔가가 이곳으로 날아오는 걸 발견했다.
보름달이 뜬 늑대 인간처럼 고개를 번쩍 들던 구울들이 흥분에 둘러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것을 찬양했다. 어둠을 빛내는 하얀 눈 사이로 천사가 흐느꼈다.
“님… 마왕님! 아아, 그자 말이 맞았어. 나의 사랑스러운…….”
땅에 발을 디딘 인간들은 자아를 가진 냉기가 그들을 내려다보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잘려버린 뿔. 하얀 옷과 머리칼. 하얀 눈동자. 가운데서 붉게 빛나는 동공이 그것이 악마임을 알렸다. 얼어붙은 날개를 가진 그녀는 안개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같이 희미했다.
스콜라는 이 틈을 타서 도망가기 위해 짐마차의 브레이크를 빼내려고 했다. 단 한 명도 놓치기 싫은 마족은 일대를 둘러싸는 거대한 얼음 울타리를 박았다.
“우아악!”
그것에 맞아버린 부하가 몸이 얼어붙어 빙과처럼 깨지자 식겁한 스콜라가 짐마차에서 떨어졌다. 루시에를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들은 마족의 등장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마족이 나타났다! 당장 도망쳐!”
“마…마족이라고?”
“거짓말. 어째서 마족이!”
“뭐야, 그 소문이 진짜였던 거야?! 지금까지 이런 적 없었잖아!”
루시에 근처에 있던 멤버가 겁에 질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버린 압도적 존재가 등장하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마족이 되다 만 부산물들인 구울들은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었다.
“저 모습은… 등급1의 백마족인가.”
하필이면. 세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재경을 제외하면 여기에서 마족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라우라 축제 때에 이어 태어나 두 번째 마족을 본 유네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세라의 옷가지를 붙잡고 울먹거렸다.
“등급1이라면 제립학교에 쳐들어왔던 병마족과 같잖아요. 어…어쩌죠?”
“곤란하군요.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그녀와 마주하다니!”
스콜라를 잡는 것보단 사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지라 구울들을 상대하던 류제가 마지못해 돌아왔다.
“세라 선생님, 저 마족은 뭐죠?”
지친 재경과 유네를 뒤로 물린 류제가 본 적 없는 마족을 노려보았다. 마족을 상대하는 거면 여기서도 기간트리카를 장갑이 가능하나?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 ‘눈 마법’과 ‘빙결 마법’을 사용하는 마족 분파의 군주입니다.”
자료로 봤던 세라는 저 마족의 정체를 알았다. 북쪽 툰드라 지방에서만 배회한다는 백마의 군주가 왜 여기까지 내려온 거지? 토벌전 때 뿔이 잘린 후 군주급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몸을 숨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있었구나!”
마족의 주변에 서늘한 서리 안개가 내렸다. 얼어붙은 것같이 추워 몸이 움직이질 않는데 시간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관절을 삐걱거리며 살아있는 구울들이 그들을 관리하던 세니타리 롯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이것들이! 보스, 어떻게 합니까?! 구울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이거 놔! 으아악. 내 팔을 물어뜯는다!”
“물지 못하게 해. 떨어뜨리라고 이 멍청아!”
“제기랄.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마족을 처음 본 루시에가 멍청하게 서있는 동안 그녀의 고향이자 동료이자 가족이었던 세니타리 롯이 구울들에게 물어뜯겼다.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산산조각 났다.
죽기 두려웠던 스콜라 맥도어가 목이 찢어져라 그녀를 불렀다.
“루시에, 빨리 저놈을 해치워! 넌 어빌리터잖아!”
“저…저건 마족이잖아. 싫어. 난 마족이랑 못 싸워. 도망갈래! 도…도망가자고, 아줌마!”
“도망 못 가. 마족과 마주치면 그냥 죽어. 네가 아니면 우린 다 죽게 생겼다고!”
얼굴이 일그러진 루시에는 소리치는 스콜라와 도망가기 위해 구울들을 떨치고 있는 부하들, 흐느끼는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내가 아니면 다 죽는다고?
“구울들은 우리가 처리할 수 있지만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단 말이다!”
“싫어, 절대로 싫어! 저놈들한테 맡겨! 난 관련 없어!”
루시에가 도망가려고 하자 먹이를 놓치지 않는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은 키만 한 얼음송곳을 생성해 루시에에게 날렸다.
간신히 회피에 성공했지만 연이은 공격에 옷이 꿰뚫린 루시에는 등골이 오싹했다. 달 대신 밤하늘에 뜬 괴물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럼 우리가 도망갈 시간이라도 벌어줘! 부탁이다, 루시에.”
“루시에 아가씨!”
그들이 애타게 외쳤다. 루시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라를 비롯한 제립학교 소속 어빌리터들은 루시에는 내버려 둔 채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역시 세라에게 중요한 건 제립학교 학생들뿐, 그녀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딴 것에 반응하고 있을 시간 없다. 루시에는 어빌리터가 인류의 검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책임감을 알기 싫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사지에 밀어 넣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족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달라는 스콜라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을 벌면 모두가 살 수 있나? 살 수 있다면 그녀는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족을 상대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감정이었다.
“내 보금자리를 망가뜨리지 마!”
결심한 루시에는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이용해 부스터를 번갈아 작동시켰다. 이 방식을 쓰면 부스터가 얼어붙지 않았다.
백마의 군주를 피해 도망갈 작전을 세우던 세라는 루시에가 무턱대고 마족에게 달려들자 모닥불에 돌진하는 나방을 붙잡듯이 손을 뻗었다.
“루시에, 다가가면 안 됩니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
그녀는 강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저 제립학교 출신 어빌리터들이 벙쪄서는 기간트리카 장갑도 못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 마족의 얼음 창을 피하며 유연하게 싸워나가는 거 아니겠나.
썩어도 준치라고 먼 옛날에 망가져 버린 데다 이름뿐인 군주라도 스니트로닝의 왕은 강했다. 마족과 싸워본 적 없는 루시에는 마족이 상식을 뛰어넘은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다. 백마의 군주가 그림자 공격에 당하기만 하자 루시에는 승리를 섣불리 직감했다.
“뭐야, 마족도 별거 아니잖아.”
그림자를 이용해 마족의 몸뚱이를 차근차근 물어뜯던 그녀는 뜯긴 육체가 얼음처럼 부서지고 다시 생성되자 한 번에 으스러뜨릴 목적으로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리로 변한 그림자가 단번에 마족을 물었다. 이걸로 끝이다.
어빌리티를 과도하게 써버린 루시에는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잔기침을 쏟아냈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어빌리티 컨트롤에 실패해 부분 장갑이 해제되어 눈 바닥에 주르륵 굴렀다. 다행히 스콜라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도망간 모양이다.
“됐다. 이 틈에 도망을―”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자신하는 ‘그림자’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형태가 없는 어빌리티가 산산조각 나자 루시에는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는 그림자 안에서 나타난 긴 얼음 창이 루시에의 몸을 관통했다.
살아있는 육체가 강제로 벌려지는 소리는 잔인했다. 루시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대신 그녀를 도와주지 못한 세라의 외침이 설산을 흔들었다. 상부에 기간트리카 장갑 허가를 요청하려던 그녀는 잔인한 현실에 울부짖었다.
“안 돼, 루시에!”
자유로운 나비는 표본이 되었다. 폐를 찔려 숨이 막히는 고통에 루시에의 황금색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힘에 버거워 주춤거렸을 뿐이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되잖아. 유리에 언니는 무슨 괴물하고 싸웠던 거야. 저딴 걸 무슨 수로 이겨?
“제길!”
마족이 다시 얼음 창을 만들어 공격하기 전 류제가 달려가 그녀를 빼돌렸다. 마무리를 짓듯 연이어 날아온 서너 개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루시에가 세라의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폐에 구멍이 나 숨을 쉴 때마다 기도를 통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좋지 못한 곳이 다쳤다. 아무리 세라라도 이 정도의 상처는 가망이 없었다.
“왜… 어… 아…아프…….”
얼음을 따라 생명이 흘러 새하얀 길에 동백꽃이 피었다. 꿰뚫린 살갗이 얼어붙어 갔다.
유리에 언니, 언니는 저런 것 앞에 나서기 무섭지 않았어? 싫어도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던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세라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졌다. 누구나 죽는 것은 처음이다. 루시에도 자신이 오늘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는 건 무서웠다.
“안 돼… 루시에, 조금만 참아요. 내가…내가 반드시 치료해 줄게요.”
“렌, 넌 거기 가만히 있어!”
이제는 그들에게로 타깃을 돌린 마족을 저지하기 위해 류제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어… 왜지? 어째서 이 여자애가 죽는 거… 이…이러면 …벤트는…….”
재경은 류제의 부탁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지럽게 지켜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처음이라는 이유보단 죽은 이가 루시에라서가 더 컸다.
루시에는 이번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의 정점이었다. 루시에가 스토리 끝까지 살아있는 건 당연한 전제여야 했다. 붙잡혀 복역하는 루시에에게 세라가 면회를 가는 장면도 후반부에 반드시 나왔다.
그런 그녀가 이벤트를 끝내기도 전에 죽는다고? 안 되는데.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애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으면 안 된다. 루시에가 죽어버리면 세라의 마지막 호감도는 당연히 오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대백마족 작전을 짜던 중에 왜 이야기가 틀어진 거지? 덱에는 루시에도 포함되어 있다. 마족을 쓰러뜨린 후 다 함께 아가타로 돌아가는데 어째서 마족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지?
온갖 단어가 범람하는 가운데 재경은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불길함이 아귀가 맞아갔다. 그녀가 사망한 이유는 류제와 세라가 이곳에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본래 스토리보다 이르게 유네와 합류했고, 접전이 길어져 루시에가 빨리 지쳤기 때문에 마족과의 대결에서 살지 못한 거다.
결국 나 때문이다.
드디어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결론을 피하지 못하자 재경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세라… 언…….”
“말하지 마요, 루시에! 제발 아무런 말도 하지 마.”
호소하고픈 루시에의 입이 뻐끔거렸다. 생명을 잃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다들 잘 도망갔으려나.
눈앞이 흐릿해지니 모든 것이 무상했다. 삶도, 세라를 만나 화를 풀어낸 이유도 모르겠다.
이렇게 죽을 거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그래도 루시에는 죽기 전에 세라와 만나서 기뻤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실은 만나서 좋았다. 끝끝내 날 기억해 줘서 고마웠다. 이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살아만 있다면 분명 길이 존재했겠지만 이젠 불가능하다.
진짜 천사가 되어 내려온 유리에의 손을 잡고 하얀 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녀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세라를 향한 진심을 남겼다.
“도망…가…….”
세라의 노력에도 루시에는 숨을 거두었다. 아무리 그녀가 루시에를 잊고 있었다지만 화해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앗아가는 건 과도한 형벌이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러면 안 된다.
세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사람을 치료하는 일뿐이다.
“안 돼, 루시에. 조금만 기다려요. 아직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제가…제가 반드시……!”
유리에에 이어 동생까지 살리지 못한 세라는 그때의 기억에 휩싸였다.
이것 모두 재경이 바라지 않았다. 패닉에 빠질 찰나 재경은 루시에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슬렉터를 발견했다. 그는 피가 묻은 그것을 남모르게 주워 들었다.
“세…세라 선생님. 흐윽, 우린 어쩌면 좋죠?”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낯선 감각에 유네가 몸서리를 쳤다. 사람이 죽었다. 마족이 등장했으니 사상자가 생길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유네를 농락하던 그녀가 죽을 줄은 몰랐다.
루시에를 아가타로 인계하면 유네도 루시에가 틀렸음을 당당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류제도 같은 생각이 스쳤다. 진한 피 냄새를 지운 류제는 루시에의 죽음에 동요하는 세 사람을 남겨두고 마족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미끼로 쓰기 위해서다.
기간트리카 장갑이 어려우니 마족이 사용한 거대한 얼음 창을 계단처럼 밟고 높게 올라간 류제가 마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원래 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아… 보고 싶었어……. 매일 보고 싶었어……! 마왕님. 내 사랑스러운 마왕님.”
“너도 그자들처럼 날 확인하러 온 건가?”
타고시아 해변에서 만난 작은 어린아이 형태의 수마를 기억한 류제가 백마의 군주를 경계했다.
그놈의 마왕, 마왕. 질리지도 않는다. 인간인 그를 마주했음에도 병마족만큼 공격적이지 않은 백마의 군주는 하늘에서 내려와 류제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 손길이 소름 끼친 류제는 그녀를 밀어냈다.
“저리 떨어져!”
“마왕님이 원하는 건… 내가 다 이루어줄게.”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넌 인간을 죽이기만 하니까.”
“마음에 안… 들어? 죽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 열심히 죽였는데…….”
류제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야 그가 렌의 손가락을 자른 루시에에게 살의를 느낀 건 맞았다. 그래서 죽였다고? 제발 그렇다고 말하지 말아 줘. 세라에게 몹쓸 짓을 하기 싫었다.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은 다른 의미로 미치광이였다. 차라리 적의가 가득한 병마족이나 화마족이 낫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르니 정말 마왕이라도 된 것 같아 끔찍하다.
“아아… 아직 마왕님이 싫어하는 인간들이 수두룩 남아있었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전부 죽여줄게.”
그녀는 루시에가 미운 류제의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이고 싶을 뿐이었다.
스니트로닝은 미끄러지듯 하늘을 달렸다. 루시에를 죽인 그녀는 이번엔 짐마차를 들고 도망가는 세니타리 롯을 추격했다. 뒤쫓은 류제가 마족을 말렸다.
“안 돼. 전부 죽이지 마!”
“죽이지 말라고?”
인간을 증오해 마지않는 마왕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백마의 군주가 류제를 괴이하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예의 마왕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상관없어. 하지만 내 옆에 있었던 인간들은 죽이지 말아 줘.”
모든 인간을 죽인다는 마왕의 목적을 이루어주고 있는 그녀는 류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싫어… 왜? 인간들은 다 죽여야 하는데…….”
“명령이야. 하지 마.”
류제가 위엄을 흉내 냈다. 백치미가 돋보이는 백마의 군주가 멈춰 섰다. 머릿속에 든 게 없어 보이는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자는 병마의 군주보다는 말이 통하길 빈다. 화마의 군주보다는 멍청한 것 같고, 수마의 군주보다는 집착심이 덜해 보였다.
하지만 마족은 역시 마족이었다.
“이상해. 왜 인간 편을 들지?”
상냥했던 눈이 돌변했다. 그에게만큼은 인자했던 목소리에 살얼음이 끼었다. 한 꺼풀, 그녀를 덮고 있던 무엇인가가 벗겨져 류제의 모습이 달라졌다. 미련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너 진짜 마왕님이 아니구나. 이 모습은… 인간이야. 인간 주제에 왜 내게 명령하지?”
백마의 군주가 붉은 동공을 서슬 퍼렇게 떴다. 진정으로 미쳤다. 머리카락이 백사처럼 일렁이며 등 뒤로 수많은 얼음 창이 생겨났다. 유연하게 누운 얼음 창이 타깃을 좁혔다.
백마의 군주의 공격을 피하는 류제는 그녀를 일행과 먼 곳으로 유인했다. 이렇게 많은 창을 만들어내는 데도 지치는 구석이 없었다. 푹 꺼지는 눈이 다리를 무겁게 해서 피하는 것도 한계다.
“칫, 실수했어.”
세라는 누구를 진두지휘할 상황이 아니다. 지금은 그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눈보라 때문에 기간트리카 없이는 방법이 없었다.
부분 장갑을 하자. 스탈라 조약이고 뭐고 다 같이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용이야.
재경은 잊어버렸던 사실이지만 류제는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루시에가 이용하는 것을 보고 이 챕터 이후에 익힌다. 그러나 저번 고양이 사건으로 학교에 오게 된 루비니 아로즈네그 소위 덕분에 더 일찍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전력이었던 루시에는 죽고, 류제의 실력은 늘었다. 조금씩 시간 차가 생기고, 이야기는 틀어져 갔다.
“율폰이… 내게 거짓말을 했어. 마왕님이 아니었어……!”
“변덕도 가지가지군. 마왕님이랬다, 아니랬다. 난 거짓말한 적 없어.”
불평했지만 아니라고 하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비처럼 처박히는 얼음 창들을 류제가 유려하게 피해냈다. 날씨만 도와줬어도 저런 덜떨어진 마족은 금방 공략했을 텐데.
일어나지 않을 망상은 그만하고 우선 핵의 위치를 찾자. 어디를 노려볼까. 렌이라면 저번처럼 핵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까? 그때는 정말 우연이었나. 그런 우연에 기대고 싶지만―
“윽!”
어두운 밤에 내리는 눈이 대기를 밀도 높게 채운 환경에서 백마의 군주를 혼자서 상대하기는 힘들다. 부스터가 갑자기 정지하자 도망치던 세니타리 롯의 짐마차에 류제가 추락했다.
“끄아악!”
“뭐…뭐야?! 으아악!”
커다란 무엇인가가 운석처럼 떨어지자 사람들이 놀라 자지러졌다. 마족이 공격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으윽, 아파라.”
류제가 얼어붙기 시작하는 손을 털어냈다. 짐들이 구르고 짐마차가 망가졌다. 도망갈 수 있었는데 백마의 군주의 타깃이 그들에게로 돌려지자 스콜라가 짜증스럽게 류제를 밀쳤다.
“저리 가서 싸워. 우리한테 엮이지 마! 너희들끼리나 싸우란 말이야!”
“사돈 남 말하지 마세요. 그쪽에서 우리한테 얽힌 거 아닙니까.”
스콜라를 쳐낸 류제가 아니꼽게 투덜거렸다. 자기네들이 렌과 유네를 납치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다. 나쁜 짓만 일삼지 않았으면 이런 곳에서 마족과 마주할 일도 없었는데 왜 우리 탓을 하는지. 자기네 속만 편하기 바라는 자들이다.
“루시에 아가씨는? 아가씨는 어디에 있지?”
“젠장, 뭔들 좋으니 다들 빨리 여기서 비켜요!”
누군가가 물었지만 류제는 답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큰 비중은 백마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백마의 군주는 어리석은 가축들을 얼음의 창으로 만든 울타리에 가두고 사냥했다. 겁에 질린 비어빌리터들이 양 떼처럼 흩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니타리 롯의 비명 소리를 들은 세 사람 중 유네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세라 선생님! 류제 군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정신 차려요!”
유네는 멍청해진 세라를 흔들었다. 세라의 눈은 죽은 루시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지만 세상은 추스를 시간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세라 쌤! 쌤!”
똑같이 멍청해졌던 재경도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외쳤다. 스토리가 틀어지고 있는 걸 안 이상 재경도 뭐라도 수를 써야만 했다.
“…갑시다.”
결심한 세라가 마침내 움직였다. 여기서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루시에의 시체는 살아남았을 때 수습해야겠지. 눈물을 닦은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루시에 때문에 끊긴 연락을 다시 시도했다.
“여기는 1―8 세라 밀로니. 통신이 불안정했던 점 양해 바랍니다. 긴급 상황으로 인한 기간트리카 장갑 허가 부탁드립니다.”
―세니타리 롯의 저항입니까? 곧 사람이 도착할 겁니다. 불허합니다.
“마족이 등장했습니다. 등급1의 군주급 존재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을 겁니다.”
―…….
“툰드라에 숨어있던 백마의 군주가 여기까지 내려왔단 말입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허가해 주세요!”
―밀로니 중위,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국경은 각 나라 간의 많은 이권이 얽힌 장소다. 세라는 저들이 책임을 지기 꺼린다는 것을 짐작했다.
멀리서 부스터 소리가 들렸다. 류제가 싸우는 중이다. 재경과 유네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없고 현재 방어 가능한 이는 그녀와 류제가 전부다.
“제립학교 소속 1―8 류제 신리와 세라 밀로니의 기간트리카 장갑을 중위 세라 밀로니의 이름으로 허락합니다. 이에 따르는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어떤 결정이 맞나 의논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세라는 통신을 종료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것이다. 다시는 누구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먼저 동쪽으로 내려가세요. 방향은 저쪽입니다.”
“서…선생님. 선생님은 어쩌고요!”
“류제 학생을 데리고 저도 뒤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세요!”
류제는 전투 중이라 통신을 받기 힘들 테니 그녀는 학생들이 산을 내려갈 때까지 미끼가 되어줄 것이다.
“백마의 군주는 똑똑하지 않아 공격은 단순합니다. 만약 당신들 쪽으로 간다면 멈추지 마시고 지그재그로 산을 내려가십시오. 괜찮습니다. 다 잘될 겁니다.”
그렇게 바라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세라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 날씨에 부스터가 얼어붙지 않고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신이 있다면 여기서 기회를 주어야 했다.
“렌 군, 빠…빨리 가자! 지체할 시간 없어.”
유네도 재경의 손을 잡고 내리막길로 미끄러졌다. 루시에가 빼앗았던 슬렉터를 호주머니 속에서 쥐던 재경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유네는 숨이 막혔다. 여기는 무섭다. 빨리 집에 가서 모든 것을 다 잊고 푹 쉬고 싶었다. 행복했던 성탄제의 추억이 꿈처럼 느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오늘 일을 꿈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키 양도 그렇고 류제 군도 그렇고 렌 군도 그렇고 저런 괴물하고 싸우겠다 왜 다짐하는 걸까.
적이었지만 같은 인간이었기에 루시에에게 애도를 표한 유네는 흐르는 눈물이 얼기 전에 닦아냈다.
“잠깐만. 뒤에 무슨 소리가 들려.”
“렌 군! 그럴 시간 없어!”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니까?!”
백마와 싸우는 덱에는 유네도 포함되어 있기에 재경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들린다고 하는 렌이 이상해서 유네가 뒤를 확인했다.
“비켜, 비키라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동쪽으로 내려가던 그들에게로 류제가 얼음 창 울타리를 뚫어준 틈을 타 도망친 스콜라 맥도어와 하나 남은 짐마차가 들이닥쳤다.
그녀와 다시 만나자 재경은 안심했다. 감각이 뒤틀렸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맞고, 이래야만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허…허어… 불가능해. 저런 것을 피해 도망을 갈 수는 없어. 루시에, 루시에는 어디까지 간 거야!”
스콜라가 다급하게 루시에를 찾았다.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건만 금세 내뺀 것이 틀림없었다. 짐마차를 다시 재정비하던 스콜라는 산탄총을 목숨처럼 지키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너희들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저놈처럼 우리를 지켜!”
“슬렉터를 당신들한테 빼앗겼잖아요. 어떻게 싸우라는 건데요!”
“뭐… 어…어…어떻게든 싸우란 말이야. 어빌리티로!”
“이럴 때만 책임을 떠넘기지 마세요!”
유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을 납치해서 돈을 벌려고 한 주제에 마족이 나타났으니까 지켜달라는 건 무슨 심보야. 루시에란 여자애는 왜 이런 사람을 지키려고 한 걸까.
“아무도…아무도 놓치지 않아!”
마족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리자 스콜라는 머리를 붙잡고 땅에 넙죽 엎드렸다. 도망갈 수 없다. 연약한 인간은 마족은 마주한 순간부터 죽을 운명이다.
세니타리 롯을 그 자리에서 전멸시키려는 마족을 저지하려 분투노력하던 류제는 렌과 유네를 발견하고 혀를 찼다.
저 마족, 정말로 인간을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일 셈이다. 그도 포함된 건 물론이고 렌까지 타깃이 되어버렸다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류제 학생! 여기서부턴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당신은 다른 이들을 부탁해요!”
세라의 목소리에 류제가 눈보라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았다. 세라는 사지에 달린 부스터와 몸통 양쪽 부스터를 부분 장갑하며 부스터가 얼지 않도록 유지시켰다. 마족만 상대하기도 껄끄러운데 날씨 때문에 전신의 어빌리티 컨트롤까지 집중이 필요하다.
재경은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렸다. 루시에가 사망한 이때 세라, 류제, 유네만으로 이루어진 덱으로 백마의 군주를 공략할 방법이 뭘까. 그가 루시에 대신 들어간다고 해도 불안하다. 잘못했다간 게임 오버가 그를 기다렸다.
게다가 병마 때는 학교 운동장이었지만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이라는 점에서 류제에게 공략을 알려주기도 힘들어졌다.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이야기는 망가져 간다. 그는 오늘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 그가 루시에를 대신한다고 치면 현재 이 순간이 첫 번째 페이즈 시작이다.
백마족을 쓰러뜨리는 미니 게임은 날아오는 얼음 창을 피하는 탄막 슈팅 게임이었다. 세라가 선턴. 중간 보스전과는 다른 형식의 미니 게임이라 재경은 미니 게임과 공격의 연관성을 찾았다.
지금만큼은 싸울 사람의 신체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날아오는 탄막을 뚫은 세라가 교사 기간트리카에 비상용으로 존재하는 미사일로 마족을 공격하면 즉시 세라의 기간트리카가 망가지고 1페이즈가 끝난다.
다음 페이즈는 류제, 루시에, 유네가 순서대로 합세한다. 이 네 번의 공격 마지막에 핵의 위치를 알아낸 류제가 마족의 핵을 파괴해서 백마족을 쓰러뜨린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그가 무슨 수로 마족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그가 가진 슬렉터를 이용해서?
재경이 죽은 루시에에게서 돌려받은 두 개의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뭐든 해보자. 지금이 아니면 하지 않은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재경이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 마족과 대치하는 세라를 살폈다. 세라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류제가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고 내려와 재경의 앞에 섰다. 그는 멀뚱히 서있는 재경을 붙잡고 밀었다.
“넌 이 틈에 어서 내려가.”
“아니, 마족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가망이 없어. 여기서 모두 힘을 합쳐 해치우자.”
“다 같이? 너도 싸울 셈이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상태로 뭘 쓰러트려?”
류제는 손가락 골절용 고정대를 둘둘 만 재경의 왼쪽 손을 가리켰다. 왼손을 등 뒤로 숨긴 재경이 반박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거 아냐. 넌 세라 쌤이 저 마족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그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류제는 몸이 저런데 허황된 말이나 늘어놓는 렌이 답답했다.
쓰러뜨린다고? 여기서 마족을?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병마 때처럼 방안이라도 있나? 하는 의문이 스쳤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요구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류제, 네 나이프 좀 빌려줘.”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당연히 빌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뜻밖의 요구에 류제는 기가 막히다 못해 허탈했다. 렌은 지켜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군가를 지키려고만 한다.
그런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앞서 나가는 걸 볼 때마다 낭떠러지로 뛰어드는 레밍 쥐를 보는 기분은 왜 류제 혼자만 감당해야 할까.
“안 돼.”
“빨리.”
“안 되는 건 안 돼!”
“왜!”
“몰라서 묻는 거야? 뻔하잖아! 나이프로 뭘 어쩔 건데. 마족을 공격하기라도 하게? 기간트리카도 없으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류제가 당연히 반대했다. 마족을 상대로 희생하려는 속셈이다. 기간트리카가 있어도 마땅찮을 마당에 어떻게 그래.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류제와는 다르게 재경은 자기 마음대로 앞일을 결심했다 기회는 한 번뿐. 기로가 있을 때 행동해야 한다.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빠지면 또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잠시 류제와 눈씨름을 하던 재경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유네를 흘겼다. 포기한 줄 알고 안도하던 류제는 주머니에서 나온 물품에 기가 찼다.
“유네, 받아!”
“응? 우앗! 이…이건?”
재경이 던진 것을 건네받은 유네는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건 루시에가 가져갔던 슬렉터였다. 소실된 줄 알았는데. 유네는 렌의 철두철미함에 새삼 감탄했다.
“레…렌 군?! 언제 챙긴 거야?”
“마족이 눈앞에 있는데 두고 갈 리가 있겠냐.”
“렌, 너 정말…….”
이제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에 류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재경은 억울했다. 전력이 되는 어빌리터가 늘면 좋은 건데 왜 그를 배신자 쳐다보듯이 보는 걸까.
순간 커다란 소리가 하늘에서 터졌다. 류제는 마족에게 미사일을 한 방 먹인 후 기간트리카가 서리에 얼어붙어 추락하는 세라를 확인했다.
강제로라도 렌을 하산시키려던 그는 일단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치는 세라에게 달려가 간신히 그녀를 받아냈다.
“무사하신가요?”
“전 괜찮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무사히 도망갔나요?”
“아뇨, 어쩌다 보니 상황이…….”
말을 줄이던 류제가 산산조각 난 마족을 살폈다. 육체는 파괴되었어도 핵이 파괴되지 않았는지 백마의 군주는 순조롭게 재생했다. 몇 번을 보아도 상식에서 벗어난 재생력이다.
“류제 학생, 재생하는 부분을 잘 보세요. 저건 보통 마족보다 재생이 느리니 어느 방향으로 붙는지 보일 겁니다.”
“그런…데요?”
“마족의 육체가 모이는 방향에 핵이 있습니다.”
세라는 렌처럼 여기서 마족의 핵을 파괴할 생각인 것 같았다. 류제는 착잡해졌다. 물론 자신이 그걸 해낼 가장 좋은 인력이지만……. 그래, 렌을 움직이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하자.
단번에 땅을 박찬 그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세라나 루시에가 한 방식을 보고 눈대중으로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시도한 류제는 마족의 상체 쪽으로 모여드는 조각들을 보며 하반신에 핵이 없음을 짐작했다.
“가짜 주제에.”
조각난 몸을 맞추는 백마의 군주는 류제가 다가오자 더 분노가 치밀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마족을 무시한 류제는 눈물을 흘리는 마족의 육체를 샅샅이 뒤졌다.
어디지. 어디에 핵이 있을까. 분명 군주급 존재라고 해도 다른 군주급에 비견할 만큼 강하지 않다. 다만,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어지는 눈보라가 문제였다.
그는 미사일을 가진 세라처럼 원거리로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근거리로 붙어야 했다. 마족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빠르게 얼어붙는 기간트리카도, 추위도 모두 그의 ‘강화’ 어빌리티로 어떻게든 극복이 가능한 문제였지만 눈보라만큼은 곤란하다.
“그렇다면……!”
단번에 거리를 좁힌 그가 얼음 창을 만들려는 마족의 목을 잘랐다. 비명을 지른 마족은 마왕에게 더한 배신감을 느끼며 아낌없이 공격했다.
단검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던 대가는 컸다. ‘강화’로 세라만큼 유연하게 부분 장갑을 하지 못했던 류제의 기간트리카 부스터가 얼어붙으면서 아래로 추락했다.
‘강화’ 인챈트를 했던 부스터까지 얼어붙다니. 역시 등급1의 군주급의 마법은 최악이다.
장갑을 해제하고 큰 울림을 일으키며 땅에 착지한 류제는 세라의 말대로 목의 회복 방향을 관찰했다. 잘린 목이 머리에 달라붙는 것을 확인한 류제는 마족의 핵이 목보다 위에 있음을 짐작했다.
머리인가. 머리의 어느 곳이지?
“렌, 그 슬렉터 나한테 넘겨!”
기간트리카를 재장갑하더라도 얼어붙은 부스터가 녹기까진 시간이 걸리고, 눈과 바람과 낮은 온도 때문에 방도가 없다. 렌이 가진 슬렉터를 떠올린 류제가 그걸 빼앗으려 했지만 쏟아지는 공격 때문에 섣부르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얼음 창을 피하기 위해 재경과 유네도 반대편으로 흩어졌다.
“렌!”
“류제!”
류제의 공격이 끝났으니 다음에는 루시에의 턴인데. 재경이 대타로 개입하려고 해도 어빌리티 컨트롤을 해야 하는 부분 장갑도 안 되는 데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전력이 되지 못했다.
“내가 갈게!”
눈보라 속에서 유네가 외쳤다. 재생을 끝마친 마족이 공격을 개시했으니 그녀가 가진 슬렉터를 류제에게 넘겨주기엔 늦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유네가 강한 바람으로 눈보라를 걷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마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족과 유네와 눈이 마주쳤다.
“조심해!”
“히익……! 왜 나한테 다가오는 거지?”
공중에 뜬 채 얼음 창으로 공격만 하던 마족이 유네에게로 돌진했다. 도망치는 거라면 친구들과 많이 연습했으니 할 수 있었다. 해야만 했다.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
“차분하게 머리를 노려!”
“으…응! 알았어, 렌 군! 노력해 볼게!”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하지만 전력이 되는 그녀가 류제가 기간트리카를 재장갑할 때까지 시간을 끌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전멸할 것이다.
처연한 마족이 입을 턱관절까지 찢어 상어처럼 벌렸다. 진짜 괴물 같은 모양새로 돌변한 백마족이 유네의 기간트리카 부스터를 붙잡고 물어뜯었다.
유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루시에의 그림자를 터뜨리던 그 공격대로 어빌리티를 날카롭게 세웠다.
유네는 난생처음으로 괴물이 죽어버렸음 좋겠다고 바랐다.
“저리 가!”
날 선 칼날 바람이 마족의 머리를 꿰뚫었다. 핵이 파괴되지 않았기에 마족은 죽지 않았다.
얼음 창이 스친 슬렉터가 유네의 팔목을 따라 떨어지며 소원 팔찌가 끊어졌다. 유네가 눈밭에 낙법하며 데구루루 굴렀다.
덕분에 틈이 생겼다. 마족이 회복하는 틈을 타 류제가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재경에게 빌려주지 않은 군용 나이프가 들렸다.
“류제, 이마!”
재경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류제는 이전 병마의 군주와 싸웠던 때를 기억했다. 핵의 위치다. 마족의 조각들을 밟고 뛰어든 그가 망설임 없이 백마의 군주의 이마 정가운데를 꿰뚫었다.
“아……!”
마족이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나이프의 끝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핵이 박혔다. 모든 마족이 그러하듯 핵이 파괴당한 그녀의 육체는 얼음처럼 부서졌다.
“어…째서? 외롭지 않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힘없이 바스러진 스니트로닝은 얼음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마지막 손길이 아련하게 류제의 머리칼을 스쳤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 목소리.
류제는 일순 비키의 말이 떠올랐다. 마족이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 마왕의 혼을 가진 그가 마족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만의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죽이려 한 마족이 사라진 건 불쌍하지 않았지만 외롭고 슬픈 얼굴이 왜인지 익숙했다. 류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잠시 아찔했다.
꽤나 높은 곳까지 뛰었던 류제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마족의 짓이었는지 매섭던 눈보라가 그쳐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전투가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겼…다!”
“마족…마족을 상대로 이겼어. 저 어린애들이 마족을… 이겼다고. 말도 안 돼!”
“살았다. 우린 살았어!”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가 있지? 같은 인간이 아냐. 괴물들이라고.”
부하들이 감탄과 두려움이 버무려진 감상을 늘어놓을 무렵, 이 승부에서 인간이 이길 줄은 몰랐던 스콜라는 살아있다는 쾌감보다는 더 중요한 사실을 꼬집었다.
마족이 죽은 것은 그들이 무사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대로 있으면 세니타리 롯은 전원 치안대에게 붙잡혀 사형에 처해진다.
대지가 얼음 창으로 난잡한 가운데 그녀는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나간 유네를 발견했다. 마족이 정말로 죽은 것인가 안심하지 못한 유네가 다른 곳을 보는 틈을 타 스콜라가 유네를 붙잡았다.
“꺄악!”
“가까이 오지 마.”
말려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두어 명의 세니타리 롯 멤버들도 스콜라의 작전을 짐작하고 하이에나처럼 합세했다.
제아무리 어빌리터라 할지언정 마족을 상대하느라 지쳤을 것이다. 아까의 싸움으로 기간트리카도 전부 망가졌을 터. 비어빌리터에게도 승세가 있었다. 유네를 인질로 잡은 그녀는 유네를 산탄총으로 위협했다.
“이…이거 놔요!”
“넌 얌전히 있어.”
뒤로 물러난 그녀는 유네의 얼굴에 산탄총을 가까이 댔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머리통이 날아갈 줄 알아.”
“유네를 돌려줘!”
산 넘어 산이다. 재경은 골치가 아팠다.
원래는 마족이 처리됨과 동시에 특수부대가 도착해서 세니타리 롯을 잡아내야 한다. 스토리라인에 존재해야 하는 루시에 대신 재경 그가 도움을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루시에의 턴이 생략되어 마족이 이르게 소멸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번 호감도 이벤트는 이놈의 시간이 문제다. 유네만큼은 무사히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고민하던 재경은 아직 손에 남은 슬렉터를 힐끗거렸다.
“도망갈 수 있게 길을 열어. 하는 걸 봐서 이 계집애를 풀어주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억지 부리지 마세요.”
세라가 스콜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스콜라는 총을 장전했다.
“웃기지 마. 살았으면 됐잖아! 우릴 내버려 둬!”
“마족의 일과 당신이 저지른 죄는 다릅니다.”
망설임이 없는 세라가 그들을 압박하자 류제도 동참했다. 특히 류제는 아까 마족을 상대한 괴물 같은 능력을 봤기에 세니타리 롯은 겁에 질렸다. 인질로 잡힌 유네도 조금은 안심했다.
“그 이상 다가오면 쏴버릴 줄 알아!”
그 분위기에도 스콜라가 총구를 가까이 댔다. 나르타 가문의 여식이 인질이라면 저들은 절대로 섣부른 행동을 못한다. 그녀에게는 인간은 손쉽게 사냥하는 산탄총이 아직 제 기능을 했다.
“이 스콜라 맥도어가 붙잡힐쏘냐. 나도 가족들이 마족에게 몰살당했어. 간신히 다시 만든 형제들도 죄다 죽어버렸단 말이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절대 끌려가지 않아. 내 인생의 끝은 여기가 아냐!”
그녀가 비장하게 울먹거렸다. 재경은 탐욕스러운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악어의 눈물이 가당치도 않았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녀가 여기에서 대치할 이유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것은 다 그녀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당신은 죄를 저지른 대가를 받을 겁니다. 그 말은 변명이 되지 않아요.”
“난 억울해. 이건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야.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살겠다고 남을 해치고 인간의 도리를 어기다니. 이기적이시군요.”
“너희들은 어빌리터니까 이 박탈감을 몰라.”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다수의 어빌리터와 믿을 것이라곤 산탄총밖에 없는 유약한 비어빌리터. 왜 비어빌리터는 어빌리터를 이길 수 없을까. 패배 의식과 질투심에 눈이 먼 스콜라는 방아쇠에 손을 대어 세라의 접근을 저지했다.
“같은 고아원에 있던 아이 중에 나처럼 비참한 애가 있었지. 난 그 애가 좋았어. 왜냐면 그 애보다는 내가 덜 비참했거든.”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가 처절함을 연기하려는 듯 눈물을 떨어뜨렸다. 류제는 그 눈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관심 없었다. 그보다는 유네를 탈환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스콜라에게 유네는 배수의 진이었다. 루시에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스콜라는 루시에가 그들을 구하러 오기까지 시간을 벌 속셈이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통했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애가 어느 날 어빌리티를 발현하더라? 그것만으로 그 애는 성공을 보장받았어. 누구는 나이가 차서 고아원에서도 쫓겨나 오늘내일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데 누구는 제립학교라는 위대한 시설에 들어가 풍요롭고 행복한 한때를 보냈지. 나 같은 건 잊어버린 채로.”
어린 시절 루시에만큼이나 끔찍한 생활을 했던 그녀가 범죄에 손을 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누군가의 지극한 사랑을 모르고, 루시에보다 더 어린 나이에 길거리에 내쫓겼던 소녀의 말로다.
“대신 우리는 아까처럼 마족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루시에의 언니는 마족 때문에 죽었어요. 우리의 삶도 그다지 천국과도 같은 삶이 아님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몰라. 나도 어빌리티를 줘. 그래야 비교해 보지. 생각해 봐. 나랑 그 애가 뭐가 달랐을까? 어빌리티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해서 나는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고 그 애는 행복하게 권력을 누리지? 절대 용서 못 해. 이 체제가 싫어. 어빌리터가 싫어. 이 세상이 싫어!”
그녀가 실성한 듯이 웃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인생이다. 하지만 같은 고아원 친구는 지하에 추락한 그녀보다 더, 아주 더,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었다.
“내가 이대로 끝날 줄 알아? 응? 끝날 줄 아냐고. 빌어먹을 루시에, 어디까지 간 거야! 이대로 탈출할 거니까 빨리 움직여!”
스콜라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얼어붙은 시체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혐오해 마지않는 어빌리터를 죽을 위기에서 또다시 찾아 헤맸다.
세라는 얼음 창이 폐를 뚫어 사망한 루시에를 떠올렸다. 저지른 죄에 비해 죽음이란 형벌이 무겁게 다가오는 건 세라가 루시에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벌을 받기엔 루시에는 어렸다. 살아만 있었다면 죄를 반성하고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에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린 루시에는 어빌리터였지만 저 여자의 사상에 동감했을 것이다. 세라는 이용만 당하던 루시에의 죽음이 저 끔찍한 범죄자 탓인 것 같아 분노가 치밀었다.
“유네 학생을 납치한 이유도 그래서였습니까? 어빌리터가 행복한 걸 보기 싫으니까?”
“물론 그런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지만. 암, 당연하지. 너무너무 싫어. 불행했으면 좋겠어.”
“당신 같은 사람은 어빌리티를 가졌어도 불행했을 겁니다.”
스콜라는 세라의 비난을 듣는 척도 안 했다. 단지 오지 않는 루시에를 원망할 뿐이었다. 포위망은 좁혀졌다. 아무래도 방법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동요할 만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재미있는 걸 알려줄까? 내가 어빌리터를 싫어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계집이 바로 포르테 들라크루아야. 알겠어? 나와 그년은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난 젖형제라고. 하지만 나는 이따위 생활을 하고, 그 계집은 높은 곳에서 사람이나 부리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름에 류제도 세라도 유네도 움직임이 멈추었다. 키아나트리체의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과거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현상 수배범인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요하게 만들 작정이었다면 훌륭하게 성공했다.
“그건 그분이 그만큼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지친 세라가 중얼거렸다.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순간 세라의 슬렉터가 깜빡거렸다. 그 신호를 통해 스콜라는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루시에가 오지 않으니 도주로는 무너졌다.
슬렉터를 확인하기 위해 세라가 아주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 스콜라가 결심을 내렸다.
“어딜!”
총구가 재경에게로 향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면 타이밍에 맞춰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재경이 유네를 밀치다가 뒤늦게 총구 방향을 확인했다. 부스터 방향을 바꾸기 전에 스콜라가 방아쇠를 당겼다. 근거리에서 터진 산탄이 살갗을 으깼다.
스콜라의 반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반동으로 곡예사처럼 공중에서 한 바퀴 밀려 바닥에 난장으로 굴렀다.
몸뚱이에 수십 개의 산탄이 처박힌 순간적인 고통에 정신이 흐트러지자 재경이 장갑했던 기간트리카가 해제되었다. 세니타리 롯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레…렌 군?”
“안 돼, 렌 학생!”
세라가 애처로이 외쳤다. 가만히 있던 렌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산탄총을 든 상대에게 달려든 것도 예상하지 못한 데다 총에 맞기까지 했다. 루시에에 이어 가르치는 학생마저 피를 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찌들었다.
유네도, 류제도 경악해서 흉곽에 든 숨을 뱉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아. 으…….”
오래된 인형에 든 휘슬처럼 억눌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에게서 살아남았으니 이제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네는 또다시 찾아온 비극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피 냄새가 났다. 충격을 받고 뒤로 날아간 렌이 바닥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렌 군……! 괜찮아? 렌 군!”
유네가 그에게 뛰쳐나가려는 걸 스콜라가 붙잡아 총으로 위협했다. 거만한 목소리는 부아를 치밀게 했다.
“이년도 똑같은 꼴을 당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렌 군! 정신 차려!”
“저 멍청이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비켜!”
자신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알 리 없는 스콜라가 악어의 눈물을 치우고 외쳤다.
눈앞에서 피가 터지는 걸 목격한 유네는 산탄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렌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그녀가 늦지 않게 렌이 뻗은 손을 잡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나 때문에 죽은 거다. 나 때문에.
자책하던 순간 으리으리한 무엇인가가 피부를 짓눌렀다. 하지만 유네의 시선은 피를 흘린 채 상처를 붙잡고 비명 지르는 렌에게 향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형태가 없는 기가 주변을 압박했다. 죄책감이 형상화라도 된 것일까?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 루시에의 것보다 더 지독한 그림자가 그들을 감쌌다.
유네의 생존 본능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곳에서 꼼짝도 하면 안 된다. 움직이는 순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 말고도 이를 느낀 자들은 저도 모르는 이유로 손을 떨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죽는다. 죽을 거다.
“다…당장 비…비키라고 했―”
기에 억눌린 스콜라가 간신히 말을 더듬거렸다. 그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산탄총을 다시 장전하려던 스콜라의 머리에서도 피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을 까뒤집더니 총신을 놓치고 눈밭에 쓰러졌다.
누가 한 짓인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들을 억누르던 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스콜라가 사망하자 세니타리 롯의 생존자들이 당황했다.
“누님!”
“정신 차려요, 누님. 저놈들을 물리치고 도망쳐야죠!”
누가 스콜라를 죽였느냐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저 저주스러운 여자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네가 곧바로 재경에게 뛰쳐나갔다.
도망가려는 유네를 저지하기 위해 스콜라가 놓친 산탄총을 주워 들려는 한 멤버 위로 어떤 군인이 뛰어내렸다.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타깃 생명 활동 정지 확인 완료. 나머지 놈들도 제압했습니다.”
‘저격’ 계열의 어빌리티를 가진 특수 요원이 스콜라를 저격할 때 썼던 것과 동일한 탄환을 튕기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살아있는 범죄자들이 모두 제압당하자 치안대들이 우르르 몰려와 세니타리 롯의 시체들을 하나하나 수색했다.
“끄윽…윽… 아…아파…아파아.”
“세라 선생님이 금방 치료해 줄 거야. 조…조금만 참아. 응? 피가… 잠깐만, 피를 먼저 멈춰야…….”
“유네 학생, 상처에 손대지 마세요!”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모두의 안전을 파악한 세라가 곧바로 달려왔다.
근거리에서 산탄을 맞았어도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있었으니 치명상은 면했을 것이다. 눈보라도 그쳤고, 밑으로 내려갈 안전도 확보했으니 치료할 수 있다. 그를 살릴 수 있는 조건은 충분했다. 그녀가 그렇게 달래며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렌……!”
류제가 꾹꾹 눌러 담고 억눌렀던 마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차올랐다가 다른 이에게 스콜라가 저격당하자 갈 곳을 잃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특수 요원들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처럼 마족의 형태로 변모했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전혀 냉정하지 않았다. 살의를 느꼈던 원수는 다른 이의 손에 죽어버렸다. 당장이라도 스콜라를 죽이고 싶었던 류제는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지독한 분노와 끓어오르는 마음의 상처가 아팠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들려오는 렌의 비명 소리가 그를 할퀴었다. 상처를 확인하기까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으… 아…아파… 아파아……! 아악!”
“렌 학생, 걱정 마세요. 치료해 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요. 절 믿으시죠? 나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숨을 쉬세요. 천천히. 천천히…….”
“렌 군! 흑… 괜찮으니까 내 손 꼭 잡아. 자, 안 아프다. 안 아프다.”
유네가 아픈 상처를 긁으려는 재경의 손을 꽉 붙잡은 틈을 타 세라가 산탄에 맞은 부분을 살폈다.
기간트리카 덕분에 산탄이 비껴가 즉사는 면했지만 고작 시간을 번 것일 뿐이었다. 스콜라가 비어있는 그의 상반신 오른쪽을 겨냥했었는지 어깨부터 시작해서 얼굴 오른쪽 부분에 심각한 총상들이 난자했다.
산탄 때문에 부서진 기간트리카 파편이 살갗에 박혔다가 장갑이 해제되면서 사라져버려 막히지 못한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뜨거운 탄이 스쳐 입가가 찢어진 건 예사고 오른쪽 광대뼈 부근을 비롯해 어깨뼈가 박살 나서 깨진 뼈가 눈에 보였다. 눈에 핏물이 들어가 빨갛게 물든 것이 보기 힘들다.
지금은 ‘힐링’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이송해야 했다.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세라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병원까지 어떻게 이송하지? 세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기간트리카가 망가진 가운데 스탈라 조약에 깐깐한 저들이 움직여줄 것 같지는 않다.
이 상황 속에서 환자를 빠르게 이송할 수 있는 사람은 류제밖에 없었다. 세라는 짙은 어둠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류제를 향해 외쳤다.
“류제 학생! 지금은 렌 학생이 먼저예요. 늦기 전에 빨리 수습해야 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는 마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류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그녀 또한 그때와 같은 어두운 마기를 느꼈다.
눈앞에서 소중한 친구가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의 마족적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말 위험했다.
“류…류제 군. 좀 도와줘!”
“응급처치를 하면 살 수 있습니다. 류제 학생, 제발!”
세라와 유네가 외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분노에 잡아먹힐 것 같던 류제는 정신을 번뜩 들었다. 또 이런다. 저번에도 그랬다. 누군가가 렌을 다치게 한 것에만 정신이 나가 분노하다가 정작 살 수 있었던 렌을 방치하는 바람에 정말로 죽게 내버려 둘 뻔했다.
“하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삼켜왔던 뭔가가 나와버릴 것 같던 그가 끊임없이 되뇌었다. 렌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 살 수 있다. 그 가능성 하나만이 절망이 덕지덕지 들러붙었던 류제를 구제했다.
다리를 붙잡는 두려움을 신발에 붙은 껌을 떼듯 떨쳐내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던 그가 렌에게로 뛰어갔다. 자욱한 구름 너머로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을 검게 물들였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며 형상이 돌아왔다. 그를 지옥에 떨어뜨리며, 동시에 구원해 주는 자는 오직 렌뿐이었다.
마족을 피해 다른 곳에 숨어있던 세니타리 롯 멤버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모두 포획한 특수 부대원들은 얼음 창이 박힌 주변을 둘러보며 치열했던 다툼의 순간을 확인하고 응급처치 중인 세라에게 다가왔다.
“인질 중에 부상자가 있습니까? 마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마족은 해치웠습니다. 이 학생은 스콜라 맥도어가 들고 있던 산탄에 맞았습니다. 즉시 병원에 이송해야 합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이 학생이 데리고 갈 겁니다.”
멈추지 못하는 피를 쇼크가 오기 전에 지혈해야 하지만 부서진 뼈와 산탄이 얼기설기 박혀있어 세라가 어빌리티를 쓴다 하더라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이 상처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의사를 대동해 대수술을 거쳐야 했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렌을 직접 보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 류제는 세라의 뒤에서 서성거리다가 일순 해가 떠오르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하얀 머리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헛것을 본 양 류제는 얼음이 되었지만 율폰의 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유네가 아파하는 렌을 달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안 속전속결로 응급처치를 끝맺은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과 옷은 피투성이로 난장판이었다.
“류제 학생, 이대로 산을 내려가 아까 들렀던 국경 경비대로 가세요. 그곳에 군용 병원이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저도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침착하게 말하려는 세라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실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늦지는 않았나 보군.”
떠오르는 해를 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손에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란스러운 자들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은 류제 신리를 향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