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4) (52/112)

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4)

세니타리 롯의 보스 스콜라 맥도어의 등장으로 물류 창고 안은 냉동고처럼 차가워졌다. 탐욕스러운 몸뚱이에 그들을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비장했다.

산탄총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피랍자들을 힐끗거리다가 루시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덜떨어진 새끼야. 제대로 해내는 경우가 없어.”

“아악. 아줌마가 마음대로 하라며?”

“꿍얼거리지 말고 움직일 채비나 해. 거의 다 도착했다고 연락을 넣었으니까.”

“뭐어? 진짜 가게? 이런 날씨는 좀 싫은데. 아줌마 또 속은 거 아냐?”

“닥쳐.”

유네도 루시에와 동감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데 움직인다고? 적어도 날씨를 피해 하룻밤은 묵을 줄 알았던지라 저들의 목적과 의도가 점점 의심스러웠다.

설마 슬렉터를 통해서 세라가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었지만 무지로 인해 휘둘려지는 게 두려웠다.

정말로 이동을 감행할 셈인지 루시에와 스콜라가 차례로 밖으로 나갔다. 세니타리 롯의 멤버가 유네와 재경을 일으켜 세워 등을 밀쳤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윽……!”

어지러워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재경은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몇 걸음 걷지 못한 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야가 좁아진 재경을 붙잡은 유네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레…렌 군. 괜찮아? 내 목소리 들려?”

“뭐 하는 거야? 빨리빨리 움직여!”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인정사정없다. 유네가 강제로 일으키는 세니타리 롯 멤버의 손을 쳐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자를 노려본 그녀는 계속해서 재경을 부축했다. 세니타리 롯에게 필요한 건 유네 그녀이기 때문에 폭력으로 상품을 망가뜨리지 않을 것이라 짐작해서 낸 용기였다.

“으… 토할 것 같아.”

“렌 군. 정말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힘내자.”

눈물을 삼킨 그녀는 자신에게 하는 말을 재경에게 속삭였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가 다 자신 때문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렌 군이 위험해.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정신 차려, 유네 나르타!

눈보라로 시야가 좁아도 한두 번 와본 게 아닌 듯 세니타리 롯은 거대한 짐마차를 끌고도 무리 없이 산을 탔다. 눈보라가 몰아쳐 걸음이 멈출 때 유네는 재경을 부축하는 척 남몰래 호주머니에 있던 슬렉터를 장착했다.

저들은 다친 렌 군을 치료해 줄 생각도 없다. 아니, 오히려 상처를 짓이기거나 협박을 하는 등 아프게만 한다. 걱정 마, 렌 군. 내가 지켜줄게.

외견이 작고 연약하다 보니 지친 척 조금씩 뒤처지는 게 가능했던 그녀는 그들이 큰 관심을 주지 않을 정도로 방심하자 큰 눈보라가 안개를 몰고 왔을 때 작게 속삭였다.

“기…기간트리카… 장갑.”

어지러운 와중 재경이 유네의 트리거를 들었다. 풀린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안 돼, 유네. 이 길에서 벗어나면 스토리가 흐트러진다고!

재경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심이 확고했던 유네는 단번에 상승해서 스토리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당황한 세니타리 롯의 외침이 눈보라에 묻혔다.

“흐으윽! 렌 군, 무서워도 좀 참아!”

“우아아악! 그만, 멈춰!”

얼음물에 맨얼굴을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때렸다. 유네의 힘으로 재경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었지만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유…유…유네! 젠장. 이제 어쩌려고― 우아아악! 천천히! 뭔지 모르겠으니까 좀 천천히!”

“꽉 붙잡아, 렌 군! 이…이…이대로 산을 내려갈 거야.”

“으…으으! 절대로 불가능해!”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미친 듯이 떨어지는 데다가 어디가 아래인지 보이지 않고, 길을 잘못 들어 미노타 국경을 넘어버릴 수도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발아래가 보이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다.

약 때문에 정신이 멍청했던 재경은 고소공포증보다는 유네가 멋대로 스토리를 이탈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그 유네가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대로라면 유네는 물론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마저 허탕으로 돌아간다. 100%의 해피 엔딩은 물 건너간다고! 난 도박하기 싫어!

바로 그때, 하늘에서 재경의 기도를 들어준 건지 유네가 장갑한 기간트리카의 한쪽 부스터 엔진이 예고도 없이 멈추었다. 낮은 온도로 엔진이 얼어붙은 것이다.

“에… 어어! 어째서?!”

“우와악! 시…싫어. 추…추락한다! 유네, 으악! 우아악! 추락한다고!”

높은 곳을 싫어하는 그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민들레씨처럼 휘청거리다가 다시 부스터를 켜 간신히 균형을 잡은 유네가 땅으로 내려와 주르르 미끄러졌다. 눈이 두껍게 쌓이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재경과 사이좋게 눈밭에 일자로 길을 그린 유네는 차가운 감촉에 서둘러서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하얀 눈투성이였다.

“기간트리카가 고장 나다니. 어떻게 해야……. 아, 빨리…빨리 움직이자, 렌 군. 걸을 수 있겠어?”

“으으, 잠시만… 속이 울렁거려.”

감당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바람에 오랜만에 트라우마가 도진 재경이 정신을 차리려 숨을 연거푸 들이켰다. 찬 공기가 폐를 얼릴 듯이 왕복했다.

또 스토리에 없는 상황이라니. 슬렉터를 가져온 것부터가 계산 실수인가.

재경은 유네가 적극적이게 된 것도, 기간트리카로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래서야 애쓴 보람이 없었다.

“잠시 쉬고 있어. 내가 류제 군한테 연락할게. 렌 군은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유네가 공포와 추위에 떠는 재경을 진정시키려 도닥여주고는 연락을 넣었다.

“류제, 선생님! 저희 지금 따돌리고 도망가고 있어요!”

―네?! 따돌렸다니요?

―렌은 어쩌고?

“렌은 부상 때문에 어지러워하고 있어요. 제가 부축을 맡아서 방심하는 사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도망쳤어요. 근데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싶은데 부스터가 꺼져요.”

통신하던 유네가 시험 삼아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지만 여전히 부스터는 켜졌다가 꺼졌다가 멋대로 움직였다.

기간트리카를 잘 아는 세라라면 방법을 알 것 같았는데 그녀는 예상과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그곳에서는 되도록 기간트리카는 장갑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째서죠? 너무 추워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데…….”

―학생용 슬렉터는 눈보라를 막아주지 못합니다. 상공으로 올라가면 몸이 얼어붙을 거예요. 게다가 스탈라 조약이라고, 유네 학생도 들어봤을 겁니다.

“국경선 근처에는 기간트리카 부대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조약 아닌가요? 아아, 여기가 미노타 국경이군요.”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어가기 전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잘했습니다. 조금이나마 안도가 되는군요.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동쪽으로 오십시오. 미노타와 최대한 멀어지세요.

유네가 슬렉터 나침판 기능을 켰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 확보도 어렵고, 이런 날씨에 무리하게 도망친 판단이 맞았나 두렵지만 그들을 기다릴 세라를 믿었다.

동쪽으로. 유네가 알겠다고 답신했다.

“…후.”

떨림이 진정이 된 재경이 분해서 주먹으로 하얀 눈밭을 두들겼다.

왜 계속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할까. 이럴 때야말로 매번 스토리대로 돌아가는 이 세계의 빌어먹을 억지력이 발동되면 좀 좋아. 왜 맨날 나만 난리인 건데. 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렌 군, 가자.”

재경이 혀를 차며 마지못해 유네를 따라갔다. 그가 미적거리고 있으려니 유네가 다시 돌아와 부축해 주었다. 이래도 되나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서로가 있는 덕분에 매서운 바람에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았다.

곧, 세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유네 학생, 혹시 주변에 다른 구조물이 보일까요?

“모르겠어요. 눈 사이로는 숲밖에 안 보여요.”

―그렇습니까. 특별한 지표가 보이면 좋을 텐데요.

그렇다면 합류가 수월해질 것이다. 유네가 밤이 찾아온 설국을 열심히 살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가려버려 별다른 것은 눈에 차지 않았다.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뭔가… 아, 렌 군, 괜찮아?”

재경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스토리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고, 추위와 상처 때문에 버티기 힘들었던 재경이 견디지 못하고 유네의 슬렉터를 빼앗았다.

“북동쪽에 감시탑이 보여요. 63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아요.”

“레…렌 군!”

재경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한 감시탑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흐릿하게 자리 잡은 그 형태를 유네도 짐작했지만 거기에 63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유네와 세라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가 이루어질 최후의 격전지였다. 류제와 세라, 유네를 강제적으로 스토리라인에 넣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 가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이야, 어떻게 알았대. 시력이 좋구나? 그게 네 어빌리티야? 맞아, 저기가 바로 63 국경 감시탑이야.”

안도를 깨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전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어둠 속에 숨은 두 마리 그림자 이리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루시에를 뒤따랐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한 루시에가 땅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너희가 키아나트리체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할 곳이 바로 저기고. 내가 허튼짓하면 가만 안 있을 거라고 했을 텐데?”

단단히 약이 오른 그녀는 유네에게 단숨에 다가가 손목을 비틀어 슬렉터를 빼앗았다.

“꺄악!”

“어쩐지 추적이 빠르다 했더니 슬렉터를 하나 더 숨겨두고 있었나. 뭐, 아무래도 좋지만. 어차피 그자들이 도착했을 땐 너흰 다 이곳에 없을 거거든.”

슬렉터를 던졌다가 받으면서 장난질을 치던 루시에가 그것을 그림자 이리의 장난감으로 던져주었다.

이로써 유네는 류제에게 연락할 방도도, 위치를 알려줄 방법도 사라져버렸다. 유네는 재경의 손을 꼭 잡으며 두려운 마음을 삼켰다.

“우리를 데리고 뭘 하려는 속셈이야? 제발 눈감아 줘. 너도 어빌리터잖아! 부탁이니까 우리를 괴롭히지 마.”

“어처구니가 없네. 내가 어빌리터인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일을 두 번이나 한 데다 보스에게 혼나고 연이어 인질이 도망가는 등 되는 일이 없었던 루시에가 눈을 부라렸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독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까부터 어빌리터, 어빌리터. 같은 어빌리터면 없던 연대도 생겨나나? 저기요, 우리 오늘 처음 본 사이거든요? 친한 척하지 말아 줄래요?”

“하지만 어빌리터가 나쁜 짓을 하면―”

“설마 내 앞에서 어빌리터는 마족과 대적해야 한다고 설교하고 싶은 거야? 네 주제에?”

그녀가 짜증스럽게 그림자 이리를 불렀다. 피부를 세차게 때리는 눈을 아랑곳하지 않은 그림자가 여우로 변해 앞발로 유네를 짓눌렀다.

재경이 유네를 구하려고 했지만 다른 그림자가 몸을 붙잡아서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이 눈에 파묻혔다.

“진짜 짜증 나게 만드네. 그럼 물어보자. 총알받이가 될 게 뻔한데 내가 왜 제립학교에 가야 하지? 아니,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지랄들이냐고요. 응? 내 말이 틀려?”

“그…그게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유네는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 법안이 형평성 없다는 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어빌리터가 제립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어빌리터가 인류의 희망으로서 가진 책임감만이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로 많은 금전적 이득을 받을 수 있지만 본인이 책임감을 가지기 싫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유네는 할 말이 없었다.

“난 이 나라가 싫어. 이딴 나라는 죄다 마족에게 당해 뒤져버렸으면 좋겠어.”

“적어도 남들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말아야지! 네…네가 저지르고 있는 짓은 범죄잖아! 그리고 이런 생활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제립학교에 소속된 게 더 나…나은 거 아냐?”

누가 잘난 집안 아니랄까 봐 설교부터 시작한다. 착해빠진 말과 이상론에 기가 찬 루시에가 폭소를 터뜨렸다. 유네는 루시에를 자극하기만 했다.

“말은 잘해. 입학을 거절한 어빌리터를 키아나트리체는 어떻게 취급하는데? 그들 입장에서 난 어차피 범죄자야! 비어빌리터들이 나를 이용할 거, 나도 똑같이 비어빌리터들을 이용하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빠? 어?”

궤변이다. 하지만 유네는 그녀가 이런 곳에 몸을 담고 있는 이유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루시에는 감정에 따라 이글거리는 그림자를 뒤로하고 유네에게 다가왔다. 유네는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위에 있는 그림자가 뒤통수를 눌러 볼 수 있는 건 루시에의 발밖에 없었다.

“난 오히려 왜 네가 키아나트리체에 충성을 맹세하는지 모르겠어. 넌 약해빠졌으니까 마족과 마주치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임당할걸. 그게 체제에 순응한 돼지 새끼들의 말로거든. 우리 언니도 마찬가지고. 제립학교는 사탕으로 너희를 꾀고는 벼랑 끝으로 내모는 추악한 어른들의 사육장이야.”

그녀가 분노로 이를 갈았다. 말을 하다 보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언니의 죽음을 답습할까 봐 제립학교를 거부한 그녀에게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마족을 상대하지 않는 어빌리터를 무가치하게 취급하는 세상이 죽일 듯이 미웠다.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들 같으니.

“우리 가족이 뒈져가도 이 나라는 손쉽게 외면했어. 우리 언니가 왜, 어쩌다가 죽었는데. 너도 관심 없었잖아. 내가 어디서 어떻게 비참하게 생활했든지 간에!”

루시에는 순간 머리끝까지 감정이 폭발했다. 이상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하던 루시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림자에게 붙잡힌 재경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유네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루시에는 광폭했다.

“개자식, 개자식, 빌어먹을. 개 같은 자식!”

“하지 마! 그만해, 제발 그만! 레…렌 군에게 손대지 말아 줘! 차라리, 차라리 나를……!”

ADHD와 어릴 적부터 받은 수많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부작용을 겪고 있는 그녀가 분풀이를 하다가 질려서 재경의 머리카락을 쥐고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얼굴이 난장판이 되었어도 반항조차 제대로 못 하면서 여전히 날 선 눈동자가 거슬렸다.

“뭐야. 울어라 좀. 기분 나빠. 네까짓 게 뭐가 잘나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봐?!”

“…귀찮게 징징거리는 자식 앞에서 내가 왜 울어?”

한마디도 지지 않는 재경이 자극하자 그녀가 또다시 폭력을 퍼부었다.

유네는 그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이런 일에 말려들어서 그래. 나 때문에 렌 군이……. 내가 좀 더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

“찾았어? 루시에. 찾았으면 찾았다고 말을 해줘야지. 입은 말을 하라고 있는 거란다. 하아, 너희들도 귀찮게 하지 말아 주지 않으련. 날이 건조해서 밖에 돌아다니면 피부가 상하거든. 난 이 일을 한시라도 빨리 마치고 싶어.”

소란을 듣고 찾아온 누군가가 눈 쌓인 전나무를 헤치며 다가왔다. 줄지어서 다른 세니타리 롯 멤버들도 보였다. 망했다. 저들의 우두머리까지 그들을 찾아버렸다.

스콜라를 흘기던 루시에가 재경을 내팽개쳤다. 재경의 입가에 피가 터져 흘러내렸다. 식식거리던 루시에는 주머니를 더듬거려 진정제를 먹었다.

연초를 피우던 스콜라가 성큼성큼 다가와 산탄총을 재경의 머리통에 대었다. 그녀는 멋대로 도망친 유네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또 귀찮게 만들면 남자 친구의 머리통이 축구공처럼 날아갈 줄 알아. 왜 자꾸 번거롭게 구니. 굳이 본보기를 보여줘야 알겠니?”

“지금 그럴 때가 아냐. 저놈들이 꼼수를 쓰는 바람에 거래 위치를 들켜버렸어. 서둘러야 해. 나르타 가문이라면 군이 움직일지도 몰라.”

“그럴 리가 있겠어? 미노타가 가만있지 않을 건데.”

“그럼 어떻게 해. 다 망해먹었는데. 도망이라도 가?”

“물건은 오늘 안에 넘겨줄 거야. 난 네가 아냐, 루시에. 꼬리를 말기엔 아직 수가 남았어.”

스콜라가 엉망이 된 재경을 흘겼다.

쓸모 있는 놈을 데려오면 몰라. 루시에 이 자식, 가장 못쓰겠다고 생각한 놈을 데리고 오다니 반항기인가? 반항은 밥 먹듯이 하긴 해도.

“일어서, 망할 덜떨어진 꼬마야. 땅에 제대로 발을 디디라고. 난 네 목발이 아니니까.”

어빌리티가 약해도 기간트리카는 장갑할 수 있으니까 소중한 자산으로 관리해야 하는데 꼴이 저게 뭐야. 말 안 듣는 건 루시에가 좀 패면 되는 문제겠지만 저러다 얼굴이 박살 나면 못마땅할 것 같았다.

재경을 인질로 잡은 스콜라가 유네더러 앞장서라며 고갯짓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루시에를 따라가는 유네가 비틀거리는 재경을 안쓰럽게 흘겼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세라 선생님, 류제 군. 큰일이 나기 전에 빨리 와주세요.

“비장한 표정 짓고 있는 중에 미안한데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게. 63번 국경 감시탑은 이런 날씨면 사람이 오지 못해. 왜인 줄 알아? 기간트리카 부대도 없는데 위쪽 툰드라에서 마족이 내려온다나 뭐라나. 깔깔깔. 비어빌리터들은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지.”

“마…마족. 마족이라니. 그럼 다…당신들도 위험한 거 아냐? 왜 이런 도박을…….”

“당연 농담이지. 진짜 그랬으면 좋겠니? 시간을 끌고 싶은 모양인데 너희 선생님들이 위치를 알았다고 해도 이런 날씨에는 가망이 없어. 우리가 아니라면 여기서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스콜라의 지시에 따라 루시에가 유네를 붙잡고 끌었다.

유네가 추락한 곳이 정말 거래 장소인 감시탑 근처가 맞았는지 이미 도착해 있던 세니타리 롯 멤버들이 몇 보였다. 그들이 아가타에서부터 끌고 온 저 짐마차 안이 이상하게 덜컹거렸다.

“수주가 왔다.”

산탄총에 덮인 눈을 털던 스콜라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시탑 근처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립학교 측이 이렇게 빨리 도착했을 리도 없고 그를 미노타의 거래 중개인이라고 생각한 세니타리 롯의 멤버들이 유네를 붙들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들만 넘겨주고 나면 그들도 나르타 상단에서 유네 나르타의 몸값을 받은 후 키아나트리체에서 벗어나 알레흐카이잔으로 망명해 당분간 몸을 사릴 것이다.

“코드 V―683. 학생들 위치 확인했습니다. 위치 정보 송신합니다. 지금부터 신병 확보에 나서겠습니다.”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는 두 인영이 기다리던 자가 아님을 쌓여온 감이 스콜라를 두드렸다.

머리를 굴리려던 순간 하나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렌 지미를 인질로 잡던 그녀의 몸뚱이가 어딘가로 나뒹굴었다.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역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렌, 유네. 괜찮아?”

“류제 군!”

“제 소중한 제자들을 돌려주세요.”

눈의 장막을 제치고 걸어오는 자들은 미노타의 수주가 아니라 인질을 탈환하기 위에 쫓아온 류제와 세라였다.

“렌, 상태는 어때?”

“어떻게 벌써……!”

재경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아침에도 본 류제가 초췌해 보였다. 그보다 더한 몰골인 재경의 안색이 파리했다. 반갑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들이 유네를 찾는 시간이 일렀다.

유네가(친숙한 숫자라 재경이 기억하고 있는) 거래 장소인 63번 국경 감시탑 아래에서 루시에를 상대로 기간트리카 대결을 한 번 더 시도해 얻은 위치 정보로 추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분발했지.”

시간대가 맞지 않는 전개를 쌈박하게 답한 류제가 덤벼드는 무뢰배를 하나 처치했다.

루시에와의 기간트리카 재대결 성사 가능성이 희박함을 재경도 짐작은 했다. 유네가 숨겨두었던 슬렉터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 그 여자가 쉽사리 대결을 수락하지는 않겠지.

기간트리카 재대결은 유네가 날 데리고 도망가서 시간을 번 것으로 치환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일러진 건가.

산을 내려갈 바엔 차라리 합류하라고 위치를 노출했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지. 아직 중요한 스토리가 남았는데 시간에 맞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재경이 머리가 어지러워서 안 돌아가는 가운데 칼을 들고 달려오는 무뢰배가 세라에게로 덤벼들었다. 류제는 붙잡아 둔 다른 이를 던져 명중시켰다.

볼링핀처럼 튕겨 나간 그들은 눈 속에 처박혀 정신을 잃었다. 일대다(一對多)임이 믿기지 않을 만큼의 재량이었다.

“뭐 하는 거야, 엉덩이 무거운 자식들아! 싸울 수 있는 건 고작 애새끼 하나잖아. 당장 일어나!”

눈 속 어딘가에서 스콜라 맥도어의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춤거리다가 보스의 명령에 용기를 얻은 세니타리 롯 조무래기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들도 류제와 그들의 실력 차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보스의 오른팔인 어빌리터 루시에를 이긴 적이 없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세니타리 롯’을 상대로 어빌리티 사용이 허가되었으니 그들보다 시야가 더 밝고 움직임이 좋은 류제는 차례차례 적들을 때려눕혔다.

지금껏 유네와 재경이 한 고생이 뭐였을까 허탈할 정도로 악당의 처치는 손쉬웠다. 주인공다운 활약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다른 사람들도 도와주러 올 겁니다.”

류제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세라가 재경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키트에 담아둔 잘린 손가락을 접합시켰다. 처치가 좋지 못해 걱정이었지만 세라의 능력이 출중한 덕분에 절단면이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세라의 어빌리티 빛이 상처를 무사히 감싸자 재경을 붙잡던 유네가 안도했다.

“렌 군, 이제 안 아파?”

“어어. 쌤,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제대로 붙는 거죠? 기분이 이상한데요.”

“상처가 회복되려고 하는 겁니다. 뼈는 고정시켜야 하지만 혈관과 신경이 연결되면 괜찮아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른 아픈 곳은 없고요?”

“네.”

루시에에게 맞아 엉망이었던 재경은 어렴풋이 보이는 세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걱정만 했을 그녀더러 왜 스토리대로 하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마음이 못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은 세라는 그 상처도 동시에 치료해 주었다.

“더 탈 나기 전에 만나서 다행입니다. 렌 학생 덕분에 빨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견하군요.”

“아, 아야야. 아파요, 쌤. 세게 잡지 마요.”

“그런 소리 하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모양이네요. 치료를 해야 하니 참으세요.”

세라가 재경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손에서 발하는 미약한 빛이 상처를 비추며 고통을 감소시켰다. 잘려나간 손가락을 포기했던 재경은 다시 돌아온 그것이 그저 고마웠다.

류제와 세라의 빠른 수색은 하늘이 도왔다. 63번 감시탑 아래라는 힌트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밤의 설산에서 위치를 특정해 준 국경 경비대와 유네의 슬렉터 신호 소실을 바탕으로 지도상의 위치를 알아낸 제립학교가 국경연대에 연락한 덕분에 헤매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안 오는 거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루시에, 루시에!”

“뭐야, 저 자식. 움직임이 마족 뺨치는 괴물이잖아.”

“루시에 아가씨, 저희로는 무리입니다! 못 막아요!”

격투 시합에 체급을 맞추듯 어빌리터의 상대는 역시 어빌리터가 해야 했다. 정예 멤버로 이루어진 세니타리 롯의 인원이 터무니없는 류제 신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루시에를 앞세워 뒤로 물러섰다.

승세가 기우는 데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미노타의 고객이 오지 않자 스콜라 맥도어는 한 가지 나쁜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다면 미노타는 손쓰지 않고 키아나트리체에 혼란을 퍼트릴 뿐만 아니라 세니타리 롯도 키아나트리체를 통해 처리가 가능했다. 한 배를 탄 줄 알았지만 미노타에게 완전히 이용당한 것이다.

“두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순 없지. 그냥 해치워버려. 루시에!”

“치사하게 이럴 때만 날 찾지. 해치우다니 웃기고 있네. 안 보여? 저건 류제 신리야!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망할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해도 저 녀석 상대는 안 해. 내가 상대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거든.”

창고에 있던 길들여지지 않은 구울들을 순식간에 처리했다고 하는 그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하기 싫지만 무능한 비어빌리터들 사이에서 어빌리터를 상대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스콜라 맥도어를 뒤쫓으려던 류제를 루시에가 가로막았다. 태평해 보이는 루시에는 류제의 뒤에 있는 세라 밀로니를 흘겼다.

“방해하지 마.”

“방해는 할 거야. 상대는 안 할 거지만.”

루시에가 숨겨둔 그림자를 이용해 류제를 붙잡았다. 끈적끈적한 액체 풀처럼 들러붙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그는 렌을 치료하는 세라를 지켜야 했다.

루시에에게 집중하던 그가 스콜라 맥도어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린 건 그녀가 짐마차의 캐노피를 걷었을 때였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일할 시간이다!”

“구울?! 아직 남아있었나!”

철창을 열고 발로 찬 스콜라가 허기로 날뛰는 구울들을 밖에 쏟아냈다. 어두운 설산에서 인간 냄새를 맡은 구울들이 개미 떼처럼 터져 나와 입질을 했다.

그것들은 옆에 있는 세니타리 롯을 지나쳐 류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림자에 붙들린 채 달려드는 적을 발로 밀쳐낸 류제는 세니타리 롯을 공격하지 않는 구울들이 의아했다.

그 이유는 구울을 범행에 이용하는 세니타리 롯이 구울 다루기에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구울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묻어있었다. 구울들의 눈과 귀를 망가뜨려 후각에만 의존하게 만든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원하지 않는 사람을 처리하곤 했다.

“이런, 것, 때문에, 물러날, 성, 싶으냐!”

규칙 없는 난잡한 움직임을 피하던 류제는 발정 난 개처럼 들러붙어 옷을 물어뜯는 괴팍한 시체를 공략했다. 눈 오는 설산의 밤에 그림자와 구울을 상대하는 몸놀림은 행위 예술의 극치에 다다랐다.

재경은 빙의 전에 했던 미니 게임 형식의 스와이프 대전을 떠올렸다. 아직 연습 게임이겠지만 콤보만큼은 만점이었다.

그때 게으른 루시에가 움직였다. 그녀는 상대해야 하는 류제를 지나쳐 세라에게 가까워졌다. 류제가 막으려고 했지만 구울들의 집요함에 손이 부족했다. 안 되겠다 싶던 류제가 외쳤다.

“선생님, 조심해요!”

구급 키트로 재경의 새끼손가락 뼈를 고정시킨 세라는 다가오는 루시에를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째서 저런 눈빛으로 그녀를 노리는지 모르겠지만 루시에의 상대는 그녀의 몫이 될 듯했다.

“당신이 세니타리 롯에 소속되었다는 문제의 어빌리터군요. 생각보다 어린데. 왜 현상 수배범 밑에서 범행을 돕는 겁니까? 어째서 제 소중한 제자들을 납치한 거죠?”

“왜 납치했냐고? 글쎄. 내가 왜 세니타리 롯에 있냐고?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다시 만나서 반가워, 세라 언니. 당신이 직접 올 줄 몰랐는데.”

처음 보는 소녀가 친근하게 부르자 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요시키는 소녀의 작전이라고 세라는 짐작했다.

사진 밖에서 본 세라 밀로니를 감상하고 비릿하게 웃은 루시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세라가 기억하지 못하자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좀 너무하네. 흉터가 괴팍해도 그렇지 눈은 예전하고 똑같지 않아?”

“누군가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전 당신을 모릅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당신이 이런 곳에 몸담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죠.”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 증거인데. 이 내가 바로 당신이 나를 알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런 말은 안 통해.”

세라가 끝까지 모른 척하자 루시에는 광소했다. 꾹꾹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는 그녀는 울렁거리는 그림자를 다스렸다. 화가 났어도 세라를 공격을 참았다. ‘기다려’를 하는 짐승처럼 기회를 엿보는 눈이었다.

“내기를 하자. 내 이름이 뭔 것 같아? 맞히면 공격하지 않을게. 당신들을 풀어주겠어.”

내기라는 말에 유네가 움찔거렸다. 렌의 손가락을 잘랐던 기간트리카 대결처럼 루시에는 유리할 때만 내기를 할 거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그녀의 이름을 세라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과 장난칠 생각 없습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나이를 감안해서 형량을 줄여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후 제립학교에서 관리하여―”

“문제가 너무 어려웠나? 하하. 미안, 미안. 루시에의 대출혈 서비스로 힌트를 줄게. 내 언니의 이름은 유리에야. 이러면 내가 누군지 알겠어?”

세라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이 어째서 저 소녀의 입에서 나올까.

유리에. 세라가 알고 있는 유리에는 그 유리에밖에 없었다. 제립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부대에 배치받았던 세라의 전우.

그녀는 스무 살 무렵에 세라의 눈앞에서 마족에게 살해당했다. 그런 유리에에게는 어릴 적 마족에게 일가족이 몰살했던 네네 슈만과 다르게 돌아갈 품이 존재했다.

“말하지 못했으니 내기는 내가 이겼어. 내 이름은 루시에 라탈스키야. 하하. 모른다고? 언니가 나를? 이제 알아버렸으니 그런 가증스러운 말은 못 하겠지.”

세라 그녀의 동기이자, 지키지 못한 존재이자, 악우 네네 슈만의 소중했던 소꿉친구. 그녀 이름이 유리에 라탈스키였다.

그녀에게는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유리에는 이따금 서투른 편지를 보여주면서 동생이 참 귀엽다고 말해주곤 했다.

“설마 당신, 유리에의……?”

유리에를 따라 본가에 들렀을 때 스쳐 지나가듯 봤던 어린 소녀. 유리에처럼 황금색 눈동자를 빼다 박은 눈으로 벽 뒤에 숨어있던 그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름이 루시에였다.

“기억났어? 이제 당신이 했던 말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알겠지. 오랜만이야. 내가 많이 흉해졌지? 그럼 다시 말해봐. ‘만약 알았더라면 당신이 이런 곳에 몸담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죠―?’ 그다음은? 무슨 말을 할 건데?”

있는 힘껏 비난한 그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에 가려졌던 황금색 눈동자. 세라의 손이 떨려왔다. 유리에… 유리에의 동생. 조그마하고 귀여웠던 모습과 저 얼굴에 흉터가 있는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가 똑같다.

유리에가 죽고 그 집안과 연이 끊겼어도 어머니의 병세가 낫고 있다 했으니 어련히 살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동생이 어빌리티가 발현한 줄도 몰랐다.

유리에의 동생이 어째서 세니타리 롯에 있는 거지? 가족은? 왜 제립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던 거지? 거기에 내가 있었을 텐데.

아아, 유리에 때문이구나. 유리에가 그렇게 죽어버렸으니 동생인 그녀가 마족을 상대로 감당할 공포는 컸을 것이다.

“선생님…….”

유네가 말문을 잇지 못하는 세라의 소매를 조심스레 끌었다.

세라는 동요하려는 마음을 잠재웠다. 그녀의 임무는 납치당한 제립학교 학생을 무사히 학교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1순위. 루시에를 설득하는 것은 2순위다.

“…설사 당신이 유리에의 동생이라고 해도 이런 행동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당신을 아가타로 데리고 가서 계속 듣겠습니다. 저항할 생각 하지 마세요.”

“어째서라고 생각해?”

동문서답을 한 유리는 끈질겼다. 자기 세계에 갇혀버린 웃음은 마족처럼 뒤틀려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다.

“왜 어빌리터인 내가 이런 조직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유리에의 죽음을 겪은 당신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다만, 이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입니다. 어린 당신이 소속되어서는 안 돼요.”

“제립학교는 뭐가 달라?”

“다릅니다.”

옹호하는 세라에게 실망한 루시에는 입을 다물다 점점 들썩거렸다. 입술 사이가 맞닿으며 바람을 노래했다. 언니의 개죽음을 보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는 상관없이 제립학교는 좋은 곳이었던 거야? 그래서 날 구원해 주러 오지 않았던 거였어? 알고서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던 거구나.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목소리를 따라 그림자가 날카로워졌다.

구울들을 쓰러뜨리던 류제는 그림자에 잡힌 두꺼운 팔뚝 옷감이 칼에 베인 것처럼 잘려나가자 혀를 찼다. 그 광소가 이전에 마주했던 병마 페스트의 왕의 뒤틀린 웃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잦아든 루시에는 고개를 들고 상냥하게 말했다.

“난 제립학교에 입학해서 우리 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았어. 그딴 개죽음은 언니로도 충분해.”

“유리에의 죽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마세요.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유리에가 당신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유리에 언니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게 뭐야. 이미 여기에 없잖아. 그리고 그게 개죽음이 아니면 뭔데? 하기도 싫은 일에 끌려가서는 의미도 없이 죽은 걸 표현할 다른 말이라도 있어?”

세라도 유리에의 죽음이 얼마나 허무했는지 알았다. 그걸 눈앞에서 본 세라도 친우가 죽기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었으니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서 유리에의 죽음을 깎아내리는 친동생의 말은 가시가 되어 돌아왔다.

“내가 바보 같지? 제립학교처럼 안락한 학교에 왜 안 왔을까. 어차피 마족한테 죽을 운명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우리 가족은 죄다 죽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난 살고 싶어. 나비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양팔을 벌린 유리에가 그림자를 과시했다.

새로운 사실이 연이어 세라를 강타했다. 유리에의 가족이 루시에를 제외하고 다 죽었다니.

“그러니 설득할 거였으면 진작 날 찾으러 와줬어야지.”

루시에는 착한 척하는 세라가 역겨웠다. 저 유네 나르타와 적당한 이름의 남학생도 부러워서 역겨웠다.

자신은 그렇게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구원의 손길을 바랐을 때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았다. 같은 부대에서 유일하게 생존했다고 전해진 세라만큼은 그녀를 찾아와 줄 거라고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 언니는 방학 때 집에 오면 내게 세라 언니 이야기를 했지. 엄마 상태를 봐주러 와서 고맙다고. 네네 그 짜증 나는 인간은 마족, 마족,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가족은 안중에도 없었어. 그래서 난 유리에 언니가 죽었을 때 네네 그 인간보단 당신을 원했어. 엄마가 죽어갈 때도 어떻게든 도와주기를 바랐어.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알고 있었으니까!”

“루시에, 그때 저는…….”

세라는 말로 만들어진 창이 심장을 꿰뚫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는 세라가 유리에의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도 루시에만큼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회복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둔 적이 있었다. 그때 루시에는 세라에게 외면당한 것이다.

“난 기다렸어. 엄마가 죽어도, 아빠가 시체로 돌아와도, 집이 은행에 넘어갔어도, 고아가 되어버린 날 이웃들이 모른 척해도, 세라 언니만큼은 우리 집을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를 치료해 줬음 좋겠다고 편지도 보내고 부대에 연락도 해봤지.”

지금까지 참아온 분노와 슬픔에 목이 메어 그녀는 거의 우는 것 같았다. 세라를 향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이런 자신은 구해주지 않았으면서 어째서 저 애들은 곧바로 구하러 오는 건데? 저 애들과 자신이 뭐가 그렇게 달랐는데? 제자라서? 제립학교의 학생이라서? 훨씬 옛날부터 알아온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주제에!

“그때 내 손을 유일하게 잡아준 사람은 저 빌어먹을 아줌마였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야. 이제 내 대답이 이해가 갔어?”

루시에가 구울들을 통제 중인 스콜라 맥도어를 가리켰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루시에가 울부짖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세니타리 롯 멤버들이 부상자를 부축하다가 측은하게 흘겼다.

세라는 지금 하는 그 어떠한 말도 루시에에겐 변명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제립학교의 선생님으로서, 여기에 있는 이 학생들의 담임으로서 그녀는 루시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루시에는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버릴 것이다.

“…당시의 저는 유리에의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도 인간이기에 나약했습니다. 당신을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여기서라도 당신과 마주해서 다행입니다.”

“뭐,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겠지. 나도, 언니도. 그걸 모를 나이는 아니니까.”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루시에가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그림자는 커져갔다.

루시에도 자기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 것이다. 아무리 세라가 뛰어난 어빌리티를 가졌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원망하게 된다. 재경은 루시에의 감정에 물 한 모금 공감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배신감은 다잡았던 마음이 단번에 추락할 정도로 지독했다.

이 세상에서 나는 필요하지 않다는 감정이 드는 건 상대방 탓이 아닐 테지만, 관계의 저울이라. 재경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날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넌 누구니?”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리지 마. 떠올리지 마. 떠올리지 마. 생각하지 못하도록 되뇌고 머릿속을 새까맣게 칠했다. 그래도 들려오는 가짜 목소리에 그는 속으로 귀를 막았다.

망할 우연처럼 재경이 기억하는 그녀도 중학교 선생님이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정년 퇴임을 앞두던 그녀가 그를 특별하게 생각할 리 없었던 게 당연했다. 지독한 자만임을 알고 있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 시선과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독사가 마음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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