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3) (51/112)

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3)

보스 스콜라가 마련해 준 짐마차를 새롭게 갈아타고 샛길을 통해 순조롭게 목적지로 이동 중인 루시에는 부하들이 말을 채찍질하며 분주하게 일하는 동안 짐마차 위에 앉아 한가롭게 나이프를 돌렸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슬렉터. 칼집에 날붙이를 착검한 그녀는 새 슬렉터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렸다. 슬렉터를 켜자마자 통신이 올지는 몰랐고 홧김에 인질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가타를 탈출했으니 계획엔 아무런 차질이 없었다.

그러나 스콜라 맥도어는 루시에의 저지르고 보는 부분이 못마땅했다.

―너는 쓸모없는 놈은 왜 굳이 데리고 와서 병신으로 만들고 난리야?

“시끄러워. 심심풀이니까 아줌마는 신경 꺼.”

―빼앗은 슬렉터도 제립학교 측에 연결된 거 같다며? 하여간 멍청하긴. 왜 항상 즉흥적이니. 앞일 좀 생각하고 살아, 이 덜떨어진 자식아.

“아, 왜. 아줌마도 몰랐잖아. 어차피 제립학교랑 딜하려면 접촉했어야 했고. 뭐가 문젠데.”

―말은 청산유수지. 나대다가 괜히 단서나 남기지 마.

“안 남겨!”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껐다. 그자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자른 이유는 별것 없었다. 심심풀이 땅콩이다, 땅콩.

희희낙락 성탄제를 앞두고 데이트라니. 눈꼴 시려서 짜증 나는 데다가 반드시 구해질 거라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기를 꺾어놓은 건데 나쁠 것 없잖아. 그런 놈들이 절망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줌마도 마찬가지면서 고상한 척하긴.

“야, 나도 하나만 줘.”

“루시에 아가씨, 이런 건 어른이 되면 피십쇼. 빨리 죽습니다.”

“뒈지든가. 넌 아직 안 죽었잖아.”

“아가씨는 소중하잖아요.”

“웃기네. 알랑방귀나 뀌어대긴.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냐?”

“저야 뭐 항상 그랬듯 조금만 떼주시면 좋죠.”

“일만 잘 해치워 봐라. 뭐든 안 해줄까?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말이나 제대로 몰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설령 몸을 망가뜨리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어차피 어빌리터는 어빌리티를 쓰면 쓸수록 빨리 죽잖아? 이런 생활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서받는다. 늙어서 죽으면 그것만큼 추한 것도 없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그녀는 그래서 죄책감이 없었다.

“후, 할 일이 없으니 지루하네.”

“하하, 심심하다고 또 물건 부수지나 마시죠.”

“안 해. 나도 조절할 줄 안다고.”

편안하게 자리에 드러누운 그녀는 눈을 담은 솜구름을 보며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렸다.

“루시에… 루시에……. …가 …리에, 네 언니가……!”

서럽게 외치던 그녀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병환이 짙었던 어머니는 언니 덕분에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마족이 마을을 습격해 도망치다가 부상을 입었다고 했었나. 아버지는 언니로 인해 가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며 좋아했다. 그럼에도 새롭게 정착한 마을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그들의 삶은 척박했다.

그녀의 언니는 어빌리터였다. 나라에서 지원금이 나오는 대신 언니는 강제로 제립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군인이 되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했다.

병세가 좋아지던 어머니가 죽어버린 건 그 직후였다. 언니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다고는 하나 결정적인 이유는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이 끊겼기 때문이다.

‘힐링 팩터’니 뭐니 소문으로만 떠도는 그것을 사겠다며 돈을 벌러 떠난 아버지는 사고사했다. 시시한 최후였다.

그녀만 남겨두고 죽어버린 가족들 모두 자기 인생이란 없었다. 다 남을 위해 희생하다가 죽었다. 루시에는 그게 패배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니의 길을 답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한테 파괴당하고 없어질 건데 가정을 이루고 살기도 싫었다.

그러니 여기는 자유롭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고 살 수 있었다. 어빌리터라고 괜한 짐과 억압을 받지 않아도 되고, 마족을 상대로 총알받이가 되지 않아도 된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비어빌리터들의 돈벌이 수단이 될지언정 쾌락을 탐하며 위에서 군림할 수도 있었다.

여기는 천국이었다. 동갑내기 어빌리터를 보면 그 생각이 확고해진다. 그 나르타 상단의 유네 나르타도 한 수 아래.

어떤 금기도 금단이 아니게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을 좀먹은 쾌락을 외면한 채, 출혈을 막고 고통으로 앓아누운 재경과 그런 그를 걱정하는 유네 두 사람 위에서 마냥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갈아탄 짐마차에 갇혀있는 유네는 사람의 손가락을 자르고도 소풍 온 사람처럼 허밍하는 그녀가 미웠다. 악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족과 대치해야 하는 어빌리터가 마족과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다니. 루시에는 유네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당하기만 하는 건 분하지만 내기에서 져버린 유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힘들어하는 렌의 상태를 봐주는 정도다.

힘없이 늘어진 그 대신 심장보다 팔을 높게 들 수 있게 도와주는 유네는 피로 얼룩진 천을 보고 떨리는 숨을 삼켰다. 피는 무서웠지만 렌이 아픈데 약한 척할 수 없었다.

강한 마음과 강한 몸은 어떻게 다를까. 미들 스쿨 때의 트라우마는 극복했지만 육체적 무력감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키 양이나 다른 친구들이, 하물며 류제 군이 나와 같은 사고에 얽혔더라면 이런 처지에 놓이지도 않았을 거다.

왜 그들과 같은 어빌리터인데 나는 유약할까. 렌 군마저 말려들게 했으면서 중요한 대결에서도 쉽게 져버리고 만다.

“레…렌 군,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아직도 많이 아파? 손이 떨리고 있어.”

“괜찮아. 추워서 그래.”

기온 때문에 차갑게 식어서 감각이 없는 거라고 재경은 착각했지만 유네가 잡은 팔은 한여름 쇳덩이만큼 뜨거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강한 척하는 그를 보며 유네는 눈물을 삭였다. 자신 때문에 부상당했다는 현실감은 죄책감으로 흘렀다.

“거기, 쫑알쫑알 잡담하지 마.”

“상태를 보는 거예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유네가 감시자에게 용기내서 반박했다.

성벽을 넘어 아가타를 벗어나자 피도 눈물도 없는 저들도 방심을 하는지 두 사람은 구속되지 않았다. 다만 짐마차 철창에 갇혀 위에는 루시에가 버텼고, 반대편에는 다른 인물이 그들을 주시했다.

렌 군의 상태를 선생님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재경의 발목을 힐끗거린 유네는 기회가 안 오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래도 슬렉터를 켰으니 세라 선생님이 위치를 파악했을 것이다. 따라오고 계시려나. 나쁜 사람들에게 당하면 안 될 텐데. 혹시나 슬렉터가 오작동이 났으면 나랑 렌 군은 정말…….

“렌 군.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못 하지? 계속 렌 군의 발목만 잡는 것 같아.”

“네 잘못 아니잖아. 쟤가 나쁜 거지.”

“으응,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 곧 다른 사람들이 우릴 구해주러 올 거야. 꼭 그럴 거야.”

유네는 믿어야만 했다. 덜컹거리는 짐마차 속 렌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나빠졌다. 잘린 손가락 단면의 출혈을 막는답시고 더러운 천을 묶어놓아 상처에 감염이 염려된다.

“으윽! 하아.”

“렌 군.”

“쉿,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어. 수상한 낌새 보이지 마.”

고통으로 식은땀이 흘러 추운 날씨 속에 자율신경이 이상해졌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거리니 죽으면 어쩌나 무서운 유네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무해하게 웃는 것. 그녀의 특기다. 렌 군도 안심할 것이다.

“분명… 분명 도와주러 올 거야. 조금만 참자, 렌 군.”

“…그래.”

그 미소를 보며 재경이 힘겹게 답했다. 입에서 서늘한 입김이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벤트 초반부터 다칠 줄은 몰랐던 재경은 이 호감도 이벤트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춥다. 아프다. 유네의 미안한 얼굴을 보자니 일이 잘못된 걸까도 싶었다.

“너도 힘내, 유네.”

과거에 유네가 겪던 고난과 역경에서는 늘 조력자가 곁에 있어주었지만 이 이벤트에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 조성되어야 했다.

절체절명의 위험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며 주인공을 이끌어 저 제멋대로 어빌리터에게 당당하게 반격하는 것이 유네의 역할이다. 여기서 재경은 유네가 기댈 어떠한 것도 해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다쳐서 무능력한 처지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나 없이도 혼자서 할 수 있어, 유네. 우리에게는 아직 보험이 있고, 선생님과 류제는 스토리대로 무사히 우리 뒤를 쫓아올 거야.

다만 지금 몸으로 미노타 국경선까지 가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았다.

* * *

“으응? 뭐라고? 누구랑 점심을 먹었냐고?”

“아뇨, 이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할아버님, 기억 안 나세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아랫마을 마을. 후미진 골목 안 엉망이 된 액세서리 가게.

치안대원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고, 말이 안 통하는 주인 할아버지에게 증언을 구하는 1학년 3반 선생님은 어지간히 골치가 아팠다.

파란머리 여자아이를 봤다는 증언을 토대로 따라와 본 결과 도착한 가게 안은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으로 난장판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 맞는 듯한데 유일한 목격자가 이 모양이라 진전이 어려웠다.

머리를 짚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은 할아버지는 남모를 말로 투덜거렸다.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어. 줄 서서 사라니까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해.”

“애들요? 아이들을 본 적 있습니까?”

“하여튼 갑자기 득실득실 들어와서는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어. 내 때는 물건을 살 땐 항상 줄을 섰는데.”

“그 학생들이 뭔가를 샀나요? 이 돈은 누구 거죠?”

“손주가 준 용돈이야. 손대지 마!”

대화가 불가능하다. 지인들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가족이 없다고 했다. 되지 않는 장사도 올해까지만 하고 접는다고 했는데 손주가 준 용돈은 무슨. 납치당한 유력한 장소를 찾은 건 좋았지만 원하는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통신 보안. 여기는 1―3. 세라 선생님, 그쪽은 진전이 있습니까?”

―범인이 언급했던 창고에서 묶여있는 구울들과 수상한 인물 한 명을 포착했습니다. 심문 결과가 나오면 보고하겠습니다.

“구울이요? 그 말이 진짜였던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쪽으로 치안대원분들을 보냈습니다. 세니타리 롯 그자들이 단단히 미쳤나 봅니다.

“후우, 상상 이상으로 나오는군요. 저도 목격 정보가 더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참에 세니타리 롯을 뿌리 뽑고야 말겠습니다. 그럼, 통신 보안.”

―통신 보안.

마땅한 진전이 없는 보고를 들은 세라는 류제가 데리고 온 좀도둑을 위아래로 흘겼다.

슬렉터가 켜졌을 때 추적 가능한 위치 정보에는 거리 제한이 있었다. 학생들의 슬렉터에 접근할 수 있는 세라는 손수 납치범을 쫓고 있던지라 마차를 타고 도망간 흔적을 발견하고 쓸 만한 정보가 나오길 대기 중이었다.

표정 없는 류제가 좀도둑을 노려보았다. 세라는 돌아갈 줄 알았던 류제가 현장을 헤집는 것까지 막을 정신이 없었다. 저 학생의 고집을 꺾을 능력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한 문제네요. 저는 분명히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요.”

“발목 잡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지 않나요?”

류제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세라는 류제가 한시라도 빨리 학교로 귀환했으면 좋겠지만 설득도 실패한 데다가 친구가 걱정되는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저 모든 게 안쓰러웠다.

“노…높은 곳에… 바…바람이… 으아악!”

류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좀도둑은 난생처음 기간트리카에 매달려 이동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는지 혼이 빠졌다. 류제가 발로 툭 차자 정신을 차린 좀도둑이 놀라 큰소리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잖아!”

“거짓말하지 마. 당신 분명히 나한테 ‘루시에’니 어빌리터니 말했잖아. 선생님에게도 똑같이 말씀드려.”

“이봐, 어린 친구. 내가 언제 그랬어?”

시치미를 떼던 그는 험악해지는 류제를 보고 말을 줄였다. 확실히 어빌리터 운운하면서 그 이름을 팔긴 했었지.

납치범의 이름을 여태 모를 줄이야. 실수를 직감한 좀도둑은 입을 달싹이다가 되지도 않는 머리를 굴렸다. 제기랄, 이 나이 먹고 내가 내 발목을 잡다니.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걸까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괘씸하게 간을 보자 세라가 좀도둑 앞에 쭈그려 앉았다. 섹시한 눈가를 부드럽게 휜 그녀는 갈매기 날갯짓처럼 요염하게 입술 선을 움직였다.

“우리를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어빌리티로 당신 머릿속은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류제는 세라가 남을 진심으로 협박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으름장에 좀도둑이 머뭇거렸다. 세라가 정말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 같았다. 대답을 고민하던 와중 누군가가 그녀를 호출했다.

“밀로니 선생님, 잠시.”

“무슨 일이시죠?”

치안대 대원 중 지위가 높은 사람 한 명이 귓속말을 요구했다. 좀도둑을 흘기던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서 치안대의 전언을 들었다.

치안대는 슬럼가 사람들에겐 악마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세라에게 굽신거리며 속닥거리는 모양새가 험악했다. 게다가 선생님? 제립학교의 선생님인가? 걸려도 한참은 잘못 걸렸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수신제 둘째 날 담당이었던 경비병의 진술입니다. 같은 것이라곤 입 밑에 점밖에 없었다고.”

세니타리 롯의 보스, 스콜라 맥도어와 닮은 사람을 수신제 때 목격했다는 발언이 경비병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목격한 경비병은 현상 수배지와 모습이 너무 달라서 들여보냈다고 했다. 그때 학교로 침입한 스콜라 맥도어는 그 시점에서 납치를 계획했을 것이다.

“대략적인 초상화는 이렇습니다.”

치안대가 새롭게 바뀐 스콜라 맥도어의 수배지를 보여주었다. 좀도둑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용의주도하게 얼굴을 바꾸던 스콜라 맥도어의 새로운 모습을 치안대가 인식했다는 건 세니타리 롯이 통과할 검문도 거세진다는 의미와 상통했다.

“아…알겠습니다! 말한다고요. 대신 익명의 제보로 부탁합니다!”

“저자는 뭐죠?”

“증인입니다. 후후, 똑똑하시군요. 상황 파악이 빨라서 좋습니다. 실토하세요. 흉터를 가진 어빌리터는 누구죠? 어떤 어빌리티를 가졌죠? 다른 어빌리터도 있나요? 그들의 목적이 뭐죠?”

세라가 민감한 질문을 쏟아냈다.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어빌리티에 겁에 질린 그는 슬럼가 사람들은 다 아는 정보를 얼버무렸다.

“제가 어빌리터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다만 세니타리 롯에 소속된 어빌리터의 이름이 루시에이고 고아인 그 애를 스콜라 그자가 데려다 키웠다는 것만 압니다.”

“데려다 키웠다고요?”

“딱 저만한 나이일 겁니다. 그것 말고는…….”

좀도둑은 의도적으로 말을 줄였다. 세라는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빌리티를 발현하면 반드시 나라에 등록하도록 되어있을 텐데.

이내 착각임을 짐작한 세라는 어린 어빌리터들을 꼬드기는 스콜라 맥도어가 몹쓸 악당이라며 이를 갈았다.

“일단 지금은 치안대를 따라가서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불어내길 바랍니다.”

“풀어주는 거 아니었나요?”

“정보를 모두 털어놓으시면 풀어드리겠습니다.”

“다 말했습니다만.”

“아니잖아요.”

세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이 일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를 경계하는 것이다. 좋게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는 언짢게 투덜거렸다. 정말로 어빌리티로 뇌를 뒤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그럼 이자를 부탁합니다. 위치는 파악되었나요?”

“마차 바퀴 자국으로 보아 북서쪽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세라 선생님. 우리 치안대원 모두 유네 나르타의 안전 확보를 최우선으로 움직이겠습니다.”

“렌도 있어요.”

세라를 안심시키려는 치안대에게 류제가 거침없이 끼어들었다.

“거기 렌도 같이 있어요.”

“외 다른 학생도. 동선을 파악했으니 금방 잡을 겁니다.”

치안대가 말을 추가하고는 좀도둑을 끌고 사라졌다.

류제는 분했다. 만일 그가 납치되었어도 어른들은 이랬을까? 아니, 납치당할 만큼 약하지 않으니 애초부터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렌은, 기간트리카가 없는 렌은 평범했다. 그건 싸움을 못 하는 유네도 마찬가지겠지.

왜 렌은 봐주지도 않는 거야? 유네와 렌이 뭐가 다른데? 사회적인 위치? 부모의 힘? 어빌리티의 척도? 그런 것들 때문에 렌은 유네보다 덜 중요해도 돼?

적어도 같은 제립학교 학생으로 취급해 준다면 은연중에 그런 차별이라도 보이지 말아야지. 렌이 친구를 위해서 어떤 짓까지 감내했었는데.

걱정 마, 렌. 너만큼은 내가 꼭 구해줄게.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차갑게 내려앉은 소년의 푸른 눈동자는 검은 장막에 가려졌다가 바람에 잠시 흩날렸다.

“……?!”

치안대에게 끌려가던 좀도둑이 오싹한 기분에 시선을 꽂았다.

그도 슬럼가에 나뒹굴며 사회 부적응자들은 어지간히 경험했다. 사람 한둘 우습게 죽여본 이도 있고, 당장 주린 배를 채우겠다고 앞일 보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 태반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빼앗을 준비를 마친 도태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공통점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증오와도 같은 무엇인가가 응어리져서 눈빛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위험한 인물을 보아 손발이 떨렸다.

제립학교는 멀쩡한 애한테 무슨 교육을 시키고 있는 건가. 벌써부터 저런 눈을 하다니 싹수가 노랗구만.

“말세군.”

그가 할 말은 아닌 말을 하며 그는 조서를 작성하러 떠났다.

어차피 그를 잡아둘 명분이 없으니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서 진술하면 내보내 줄 것이다. 그러면 돌아가는 척 대기하며 제립학교가 창고에 돈을 보내주는지 확인해 루시에에게 정보를 흘리면 되겠지.

그는 아직 루시에와 함께한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 * *

수도 아가타와 가장 인접한 키아나트리체 북서쪽 국경.

미노타와 마주 닿은 이곳은 초겨울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고지대 동토(凍土)라 수백 년간 사람이 살지 않는 버림받은 대지였다.

생물이 사는 흔적은커녕 말라가는 침엽수와 얼어붙은 땅밖에 없는 이곳에서 이상하게도 들릴 리가 없는 말소리가 들렸다. 추위에 떨지도,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은 그 음성은 변성기가 없는 미성과 소녀의 고음 두 가지 종류의 것이었다.

“이런 곳까지 날 불렀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지금 외출 금지라 귀찮아지기 싫어.”

[푸흐흐, 네 입에서 그런 귀여운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군. 외출 금지라니.]

형체가 없는 환영이 불꽃처럼 바람에 따라 일렁거렸다. 시린 머리칼이나 몰아치는 눈보라와는 상이한 검붉은 화염을 두른 화마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조롱이 담긴 웃음을 터뜨렸다.

마족 서큐버스의 본모습으로 돌아온 미나는 제립학교의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인간 같은 말을 해버린 것이 무색했다.

“선생들 세뇌는 조절하기 어려워. 이럴 때 제립학교에 숨어들어온 마족의 존재를 들키면 지금껏 해온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된다고. 그런 의미였어.”

미간을 좁힌 미나가 불쾌감을 표했다. 오랫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하니 마음도 인간처럼 되어버린 거라고 비웃어대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추억거리가 될 만한 일이니 너도 도박을 즐겨.]

“신중한 게 성미에 맞아. 그리고 가추… 인간들과의 교류는 네 담당이잖아. 난 류제 신리를 타락시키는 역할이야. 알았으면 바쁘니까 다른 일로 꼬드기지 마.”

[호오, 그것참 미안하게 됐군. 내가 제립학교로 친히 방문해 줄 걸 그랬어.]

미나가 율폰을 사납게 흘겼다. 농담도 지나치다. 제립학교는 현재 고등급 경계 상황이라 율폰이 대마족 결계를 뚫고 침입해 들어왔다가는 마가릿 때처럼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키아나트리체를 좌지우지하는 인간들은 배반을 꾀한 율폰을 단칼에 쳐낼 터. 그것만큼은 제립학교 학생 중 한 명이 서큐버스였다는 걸 들키는 것보다 싫은 상황이었다.

“네, 네. 내가 여기 오는 게 나았겠네요!”

[알았으면 투덜거리지 마.]

“그 말투는 뭐야. 정보를 주고 있는 건 나야. 아무리 너라도 고자세로 나오면 재미없어.”

불평하던 미나가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이번 일의 계획을 미리 들어 알았던지라 세뇌해 놓은 제립학교 경비병에게 상황 정보를 받는 중이다.

치안대가 쓰는 통신 장치를 이용해 주요 인물들의 위치를 파악한 그녀는 율폰의 아둔한 장기말 세니타리 롯을 추격하는 류제와 세라 밀로니의 능력에 감탄했다.

“벌써 근처까지 왔다는데. 네 계획과는 다른 전개네.”

통신을 끊은 미나가 거보라며 율폰을 떠보았다. 그의 무능함을 똑같이 조롱해 주었더니 기분이 풀렸다.

[뭐, 그렇긴 하다만.]

“약속했던 결과를 못 낸다면 나도 협조 못 해.”

그녀가 이번 율폰의 계획에 동참한 이유는 악몽을 극복해낸 유네 나르타에게 새로운 트라우마를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납치의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예정에 없던 렌 지미의 난입으로 또 일이 꼬일 것 같다. 렌 지미를 향한 류제 신리의 집착은 둘째 치고 추적 시간이 예상보다 빨랐다. 설마 렌 지미가 무슨 술수를 썼나 의심이 들었다.

“이러다간 왕녀의 지시로 납치는 없던 일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미노타의 일이 헛수고가 되면 어쩔 건데, 율폰.”

[그럼 곤란하지.]

“곤란? 흥, 나한텐 도박을 즐겨보라며?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물론. 그걸 위해서 널 여기로 부른 거다.]

율폰은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얼굴로 키득거렸다. 미나는 언짢게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얼굴로 웃는다면 걱정할 것도 없으려나. 저러다 유네 나르타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면 강한 마족이 될지도 모르는 원석이 사라져 아깝기는 했다.

[그녀와 류제 신리를 접촉시키는 건 네게 보고해야 하는 사항이니. 서로 인사라도 나누지 그래.]

“뭐야, 망할 마가릿이 새로운 병기라도 가지고 온대?”

누군가를 기다리는 율폰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지루하게 설한풍을 맞았다. 인간과는 다르게 육체적 고통에 둔감한 마족들은 이런 추위는 아무런 방해도 아니었지만 시야가 불편해지는 눈보라나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귀찮았다.

[기다리는 건 병마의 군주가 아니다. 너는 본 적 없는 마족 군주일걸.]

“마족 군주?”

[뭐, 낡은 장기말을 처리하는 용도니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그렇다면야 다른 마족 군주와 만나든 말든 그녀는 상관없지 않은가. 미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대기를 요구하는 율폰 때문에 참았다.

율폰은 미나의 능력으로 제립학교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미나는 괜히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며 못마땅했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아직도 남은 군주급 마족이 있었나?”

[누구인지는 보면 알 거다.]

율폰의 목적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마국 나라카를 견제 중인 왕녀에게 미노타가 방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왕녀가 인류 협약을 어기려는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미노타에게 경고를 취하려 한다 들었다. 그 전에 왕녀의 요량으로는 피할 수 없는 강렬한 쐐기. 율폰에게는 그런 사건이 필요했다.

[일이 심심할 것 같으니 모시기 어려운 손님을 초빙했지.]

주도면밀한 율폰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미나는 그가 쥔 비장의 카드가 무엇인가 호기심이 생겼다. 셀로니아 가문에 대한 것도 그렇고, 자세한 걸 전해주지 않아서 율폰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때 거친 눈 폭풍이 그들을 덮쳤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참을성 없기는.]

한참을 기다려도 맞이하고픈 자가 감감무소식이라 미나가 돌아가겠다고 운을 떼려던 순간, 눈보라 먼발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 음험하고 증오가 섞인 기운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하기야 이런 곳을 혈혈단신으로 버티는 인간은 많지 않겠지. 다가오는 이가 마족임을 깨달은 미나는 불평을 거두고 흥미롭게 응시했다. 같은 마족이지만 처음 보는 기였다.

“왕님… 마왕님은?”

비틀비틀 힘없이 다가오는 마족이 율폰을 향해 흐느꼈다. 잘려버린 뿔이나 찢어진 날개, 짙은 눈물 자국과 까맣게 죽어버린 눈동자는 긍지 높은 마족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조금만 더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다.]

율폰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미나는 백마 스니트로닝의 왕을 보고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누군가 했더니 저건 아주 오래전에 미쳐버린 마족이 아닌가.

그녀는 마족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미쳐있었다고 했다. 마왕님이 죽은 이후로 북쪽 툰드라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발이 넓네, 율폰. 저런 폐기물까지 다룰 줄 알다니.”

[신참내기보다야 유능하지.]

“그렇게 부르지 마.”

미나는 그 표현이 싫었다. 이는 그녀가 책에 집착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미나는 사천왕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다른 마족 군주와 비교해도 터무니없는 나이 차이가 났다.

마족은 인간들처럼 나이니 뭐니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지만 연륜으로 인해 생긴 지식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병마의 군주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아는 것이 많아 발명 하나는 잘하니까.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은 마왕님이 인간이었던 시절의 모습도 알고 있지. 백마의 군주도 그 정도로 오래된 마족이라고 들었는데.

“마왕… 마왕님… 마왕님!”

애절하게 부르며 비틀비틀 날아가는 백마의 군주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하얀 옷을 입고 새하얀 목소리로 눈보라를 나풀거렸다. 처연한 그녀는 만나고 싶은 임을 찾아 하염없이 걸었다.

“저런 게 도움이 되겠어? 인간만큼이나 멍청해 보여.”

[두고 봐. 좋은 도박거리가 될 거다.]

키아나트리체와 미노타의 국경에 출몰한 마족은 계획에 어떤 이점을 가져올까.

저 마족 때문에 렌 지미의 신병에 이상이 생겨 류제 신리가 불완전하게 각성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의 그는 세라 밀로니라는 목줄도 믿기 힘든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날 부른 거야? 내 허락을 받으려고?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걸 너도 잘 알 텐데.”

[그도 조금은 성장했겠지. 이 정도 동요로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다.]

“과연 그럴까? 나콜렙시도 그를 보고 불안정하다 경고했는데. 기억을 찾기 전에 폭주해 버리면 인간들에게 쉽게 들키고 말아.”

미나는 섣불리 동의하지 못했다. 마족을 이끌 마왕의 자질로서 성장은 있었지만 렌 지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류제 신리는 여전히 부족했다. 뭐, 율폰이 저지른 일이니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은 없겠지만.

의구심이 남은 미나를 위해 율폰이 부연 설명을 덧대주었다.

[어설프긴. 플로냐여, 나는 더 멀리 보고 싶은 거다.]

“네 원시안적인 미래 설계에는 류제 신리가 인간들의 손에 배제될 가능성도 빠지는 거야?”

[빈정거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우리는 류제 신리를 전쟁의 최전선에 참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 상황에서 그가 군주급 마족을 하나 없애면 우리들의 귀여운 파트너들이 아주 좋아하겠지. 포르테 들라크루아 대신 그들이 키우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기야. 최전선은 학생의 신분으로는 어려운 일이지.”

미나가 중얼거렸다. 예정했던 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류제 신리로 하여금 인간의 추악함에 더욱 주목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전쟁의 최전선에 서야 하는 백장미 부대 등의 강한 어빌리터들과 그 어빌리터를 마족으로 만들 수 있는 류제 신리의 조합이 있다면 마족의 부흥은 손쉬웠다.

[납득했다면 위대한 제물의 긍지 높은 최후를 보라.]

“알았어. 하아, 마왕님을 위해서 죽는 거라면야 저것도 기뻐하겠지.”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그녀가 얕게 미소 지었다. 마족이란 마왕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그 백마의 군주도 흔쾌히 마왕을 위해 죽어줄 것이다.

* * *

“니가 뭔데 내 죽에 코를 빠뜨려 개자식아. 그딴 짓이나 하라고 널 보낸 줄 알아?!”

―어빌리티로 내 머릿속을 살피는 것보단 백배는 낫지.

“우리가 미노타 북서국경으로 간다는 사실을 떠벌려 버리면 어떻게 해. 머저리 같으니!”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 다른 방안을 모색하라고 친히 연락까지 해줬잖아. 자, 우리 어쩌지?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다른 방법은 무슨. 열이 뻗친 루시에는 굉장히 불쾌했다. 미노타 국경 근처 합류 지점에서 보스 스콜라 맥도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립학교 측에 그 사실을 불어버리면 어쩌자는 말인가.

분명 그 아줌마, 괜한 놈을 데려와서 실수를 저지른다고 지랄지랄 난리 치겠지.

“우리는 무슨. 감히 나한테 엿을 날렸겠다. 너 진짜 두고 보자.”

―그럼 나도 알레흐카이잔으로 데려가 주는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주둥아리 닥쳐!”

그녀가 옆에 있는 장물들을 발로 찼다. 이동이 길어지는 만큼 흔적이 남았다. 아가타 밖으로 탈출했을 때부터 추적을 파악했지만 좀도둑놈 때문에 추적자들과 예상보다 더 가까워지고 말았다.

그 탓에 아가타 북서쪽, 미노타와 가장 가까운 국경으로 향했던 루시에를 포함한 세니타리 롯은 지금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내가 합류하고 싶으면 조건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 돈을 받아오라고 했잖아. 그건 어떻게 됐는데?”

―그러니까 미안하대도. 들켜서 잡힌 거야. 그리고 돈은 무슨. 아무리 봐도 제립학교는 그 렌인가 하는 애새끼한텐 관심 없어. 온통 나르타니 뭐니 난리라고.

“젠장, 처음부터 끝까지 되는 일이 없네!”

나르타 가문의 남자 친구쯤 되는 위치이니 고아라도 용돈벌이라도 될까 싶었는데 그러긴커녕 꼬리까지 질질 끌고 올 줄이야. 별 볼 일 없는 그에게 낚인 것 같아 루시에는 짜증이 치솟았다.

저걸 미노타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는데. 이렇게 된 이상 둘 다 수주에다가 넘겨버릴까. 어빌리티 척도가 낮아서 받아주지도 않겠지. 제기랄!

―친구랍시고 창고까지 찾아온 제립학교 소속 남학생이 있었는데 장난 아니게 무섭더라. 교육이 안 된다고 너희가 버리고 간 구울들을 순식간에 잠재웠거든. 너보다 대단한 어빌리터는 처음 봤다니까.

“흥,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지. 이번 일에 학생은 왜 끼어든 거야? 걔가 돈을 가지고 있었던 거 아냐?”

―그건 아니었어. 제립학교 선생… 그 눈 밑에 점이 있는 섹시한 여자한테 끼워달라는 식으로 말했거든.

세라 밀로니. 루시에가 멈칫했다. 제자를 되찾기 위해 직접 움직이다니. 그녀를 상상할 때마다 배신감이 차올랐다. 어째서 세라 언니는―

“…하아. 하여튼 일 마무리되면 부를 테니까 당분간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알레흐카이잔으로 데리고 가줘. 너 어차피 외국어 못 하잖―

루시에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이 통신을 끊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선으로 생각해 두었던 고지대 국경선을 넘어가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그곳은 툰드라를 헤매다 잘못 들어온 사람들에게 등급1의 백마가 목격되던 곳이라 기회가 많을 것이다. 이럴 때는 최후의 보루인 63번 감시탑 근처로 거래 위치를 변경하기로 해서 고객과 접촉 가능한 스콜라 맥도어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일이 망가지자 루시에는 속된 언어를 지껄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보스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조급해지는 루시에를 속박하듯 수상한 일행에 대한 목격 증언과 지나간 흔적을 토대로 움직이는 세라와 류제는 고지대로 이동을 계속했다.

손발이 얼어붙는 날씨에 눈발로 시야 확보가 어려운 와중 치안대를 통해서 세라가 국경선 경계 강화를 요청했다.

별개로 세니타리 롯을 추적하던 류제가 세라에게 복귀했을 때 어떤 슬렉터 고유 번호로 연락이 왔다. 유네가 연락했던 번호였다.

류제가 통신을 받기 전에 세라가 가로챘다.

―…님 …선생님!

“유네 학생.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무사하구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나무 뒤에 숨어 간신히 눈보라를 피하는 세라는 뒤늦게 슬렉터 주인인 류제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할 것 없이 류제는 필사적인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안도했다.

“무사하신 거 맞죠?”

슬렉터를 가까이 댄 세라가 작게 물었다. 유네도 그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은 괜찮아요. 밖에 회의를 하러 가서. 뭔가 차질이 생겼나 봐요.”

피랍된 그들이 방치된 곳은 고지대 국경선 근방 오래된 물류 창고였다. 아마 미노타의 긴급 구휼 정책으로 키아나트리체가 물품을 지원해 줄 때 통관 전 보관하던 창고 같다. 지금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바람을 피하기에는 적절했다.

감시자들이 문을 지켰지만 잠이 든 척 속삭이는 정도라면 문밖에서 두드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들킬 염려는 적었다. 추위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 줄이야.

―세니타리 롯의 행선지에 대한 정보를 받았습니다. 따라붙고 있으니 곧 구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다. 렌 군, 들려? 이제 우리 살 수 있대.”

유네가 눈을 감은 재경을 흔들었다. 고통은 익숙해졌지만 손에는 감각이 없고 몸에서 열이 나는 재경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슬렉터 고유 번호, 알아냈습니까? 기기 뒤편에 적혀있을 겁니다.

“네, 손발이 풀려서 가능해요. 지금 불러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유네가 재경의 발목에서 슬렉터를 꺼내 고유 번호를 살피려는 때 그가 유네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그래, 렌 군? 뭔가 잘못됐어?”

“…아니. 미안.”

이 슬렉터는 스토리에 없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라에게 알려지면 위치가 손쉽게 추적된다. 그러나 당장 유네를 말릴 변명이 떠오르지 않은 재경은 마지못해 저지했던 손목을 놓았다.

국경 근처까지 왔다면 괜찮을 것이다. 유네가 다시금 루시에와의 기간트리카 대결을 통해 위치를 전달해야 했지만 창고 위치를 알아낸 류제 쪽도 눈보라 때문에 추적에 장애가 생길 터였다.

“…예요.”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구출해 드리겠습니다.

“네, 저희도 노력할게요.”

―부디 무사하시길.

받은 슬렉터 고유 번호로 원격 접근하기 위해 세라가 자신의 슬렉터를 만졌다. 바빠진 그녀 대신 통신은 류제에게 넘어갔다.

―렌은 어때? 손가락을 다친 거지?

“으응. 피는 멈췄는데 많이 추워해. 식은땀 때문에.”

“난 괜찮아.”

재경이 짤막하게 답했다. 꺼끌꺼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류제가 아직 무사함을 깨닫고 안심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을 삼켰다. 렌의 입에서 아프다는 솔직한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 것은 섣부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감시는 괜찮아?

“곧 돌아올 것 같아. 밖에 눈보라가 치고 있어. 거긴 어때?”

―여기도 많이 내려.

“그렇구나. 괜찮을까? 류제 군도 몸 조심해.”

유네가 눈물을 닦았다. 추운 것보다는 이대로 구조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아, 미안. 끊어야겠어.”

답을 듣지 않고 통신을 끊었다. 고유 번호를 보기 위해서 끌렀던 슬렉터를 호주머니에 숨김과 동시에 창고 문을 박차고 루시에가 들어왔다. 바람 소리와 함께 눈송이가 창고에 쏟아졌다.

“흐음?”

뭔가 작당을 한 낌새에 그녀가 삐딱하게 섰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는지 성큼성큼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걸어온 루시에는 지친 재경의 앞에 멈춰 섰다. 유네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결국 보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해 악이 찬 루시에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재경의 상처를 밟아 짓눌렀다.

“으윽!”

“그만둬! 왜 그러는 거야!”

“이 빌어먹을 자식이 빌어먹게 불―쌍해서 못 참겠지 뭐야.”

제가 저지른 일로 계획이 틀어지자 짜증이 난 루시에가 분풀이로 유네를 자극했다. 험상궂게 미간을 구긴 그녀는 간신히 아문 재경의 상처를 결국 터뜨렸다.

유네가 루시에의 신발을 강제로 들었다. 발버둥이 무색하게끔 루시에는 억지로 힘을 가해 고통을 더했다. 드디어 나온 재경의 비명 소리를 듣고 만족한 루시에가 슬며시 발을 치웠다.

“불쌍한 자식. 넌 제립학교에서 버림받았어. 아무도 널 위해 돈을 준비해 주지 않았다고.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별… 이유 있겠어? 네가 우릴 풀어주지 않을 걸 알았겠지. 우리 쌤들은 똑똑하거든.”

재경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풀려나지 않는 게 재경이 바랐던 바였다. 지금 와서 유네 곁에서 떨어지는 게 더 곤란했다.

재경은 손끝에 남은 고통을 인내하며 루시에를 노려보았다. 루시에는 저 눈이 거슬렸다. 절망을 주려고 하면 할수록 빛나기만 했다. 참지 못한 그녀가 못된 말만 늘어놓았다.

“지불할 가치가 없다는 거겠지. 이걸 바로 버림받은 거라고 하는 거야.”

재경의 앞에 쭈그려 앉은 루시에가 그의 머리칼을 붙잡고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쓸모 있었으면 어땠을까. 이 나라는 당장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겠지. 왜냐고? 빼앗기는 것보단 손해가 덜 가니까.

“잘린 새끼손가락 아프지? 아픈 건 처음에 다쳤을 때뿐이야. 나중에 가면 이걸 쓰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렇지 않을걸. 손가락 열 개 중에 가장 쓸모없는 손가락 한 마디. 그게 바로 네 가치야. 네가 없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아.”

“내 가치에 대해선 내가 잘 알아.”

“의외로 마조히스트구나.”

루시에가 히죽 웃었다. 이렇게 자기 신세를 직시시키면 제립학교에 충성을 다하던 학생이라도 가치관이 흔들린다.

어빌리티는 쓸모없어도 기간트리카는 장갑할 수 있을 테니 이자를 세니타리 롯에서 관리하겠다고 스콜라 맥도어가 지시했다. 루시에는 그를 회유시키는 역할이었다.

“아차차, 아파서 정신이 나가버렸나.”

“렌 군한테 무…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리 가!”

“뭐야, 넌 네 남자 친구가 계속 아파했으면 좋겠어?”

항생제와 진통제로 사용하는 약을 꺼낸 루시에는 재경의 입에 강제로 넣어 삼키게 했다. 기침을 하며 거부하는 재경의 코를 막고 수통을 기울인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들과 함께해야겠어, 친구. 네 그 하찮은 힘도 여기선 엄지손가락만큼 대단할 테지.”

“함부로 말하지 마. 렌 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왜 너희와 함께해야 하지?”

“아무도 널 필요로 하지 않은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네. 어차피 고아잖아. 버림받아서 기댈 사람도 없는 주제에 왜 고집을 부려?”

즉효성의 독한 약 때문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감각이 들어 나른해진 재경은 그 상황 속에서도 유네에게 허점을 들킨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런 말 하지, 꺄악!”

“쫑알쫑알 시끄럽긴. 지금 우리 둘이 이야기하잖아. 넌 닥치고 있어.”

루시에가 유네를 발로 차 시야에서 떨어뜨렸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콜록거리던 유네가 말을 곱씹었다. 렌 군이 고아라니?

하지만 납득은 갔다. 아니,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 사실이 더 이상할 정도로 증거는 많았다. 그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상하리만치 꺼낸 적이 없었다.

“…네가 상관할 거 없잖아.”

감각이 혼미해진 재경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유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렌을 보자니 눈물이 나올 만큼 속상했다.

“콜록… 콜록. 고…곧 우리를 구하러 와줄 거야. 레…렌 군, 조금만 참아.”

“그럴 리 없어, 나르타 가문의 여식아. 이제부터 우리는 운명 공동체거든. 우리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재경에게 기어가는 유네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는 루시에의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룩뒤룩 살찐 인상에 야생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위험한 산탄총을 든 그녀는 수신제 때 요리 동아리 앞에서 마주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스콜라 맥도어. 그녀가 입술 밑에 있는 점을 씰룩거리며 유네와 재경을 차례로 흘겼다.

* * *

눈보라가 거세졌다. 세니타리 롯을 쫓아 산을 높이 오를수록 시야 반경이 극도로 좁아져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그럼에도 류제는 ‘강화’ 어빌리티로 흔적을 찾았지만 하얀 세상 때문에 눈의 피로 간격이 짧아져 고통스러웠다. 시야를 강화하면 동공에 빛이 많이 수용되는데 주변이 온통 하야니 화이트아웃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젠장!”

갑자기 시야가 상실된 류제가 애꿎은 전나무를 발로 차 쌓인 눈을 떨어뜨렸다.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으니 열받았다. 누구는 흰 눈이 내리는 성탄제라고 기뻐하겠지.

눈을 비비고 질끈 감았다가 뜬 류제는 시야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피로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는 일단 노끈으로 묶어놓은 길을 따라 하산했다.

“위치는 아직인가?”

조급한 건 세라도 마찬가지였다. 유네에게서 슬렉터 번호를 받아내고 이를 제립학교 측에 전달했으니 원격으로 세라의 슬렉터와 불명의 슬렉터를 연결시킬 것이다.

원하는 작업은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세라가 슬렉터를 반복적으로 두들겼다.

“충성.”

그러던 중 함께 대기하던 군인이 경례했다. 다가오는 이를 알아본 세라도 그자에게 경례했다.

“충성.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소속 중위 세라 밀로니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불필요한 안부 인사는 생략하죠.”

미노타와 키아나트리체의 북서쪽 국경 경비대 대장이 세라에게 악수를 요청했다. 소령이 중위에게 악수를 요청하는 건 세라에게 드물지 않았다. 보통 일반 군인은 어빌리터에게 저자세로 나왔다. 군에 소속된 어빌리터가 진급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세니타리 롯’이라는 카르텔이라고 했습니까?”

“예, 현재 제립학교 학생 둘을 납치해 미노타로 향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미노타의 정세도 그렇고 하물며 날씨도 도와주질 않군요.”

이곳은 국경 근방이라 군부대의 양해를 구했다고 해도 섣부르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니타리 롯이 미노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국경선 경계 근무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되었기에 세라가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이런 눈보라에 산을 타서 미노타로 넘어갈 생각을 하다니. 성공하면 찾는 건 불가능해질 겁니다. 그들도 죽거나 미노타로 가거나 둘 중 하나겠죠.”

“방법이 없겠습니까?”

“밀로니 중위, 요즘 키아나트리체와 미노타의 사이가 좋지 못한 건 알고 있을 테지요.”

“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에둘러 말하는 소령에게 세라는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군부대를 움직였다간 인류 협약을 깨려고 줄다리기를 하는 미노타에게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주는 꼴이다.

“소령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늘 하던 일이니 노고도 아닙니다. 그럼 중위도 수고해요.”

“충성.”

명령을 지시하기 위해 소령이 자리를 떠났다. 경례를 마친 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슬렉터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국경 경비대보다 필요한 건 이런 날씨에도 상공을 자유롭게 오가는 군용 슬렉터를 가진 기간트리카 부대였지만 국경선 근방에서 기간트리카 부대를 움직이면 더한 후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군인이 아닌 선생님이라는 감투로 변명할 수 있는 세라조차 여기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했다.

세니타리 롯이 미노타에 밀입국하려는 이유가 미노타에 있는 누군가의 사주 때문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키아나트리체의 범죄자들이 미노타에 밀입국하려는 걸 왜 미노타로 책임을 떠넘기냐는 식으로 나오면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망할 스탈라 조약 같으니. 세라가 혀를 찼다. 세니타리 롯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제립학교의 연락을 기다리다 못해 세라는 손목에서 헛것까지 느껴졌다. 연락이 언제 오나 조급해하며 있으니 산에서 돌아온 류제가 그녀에게 보고했다.

“선생님,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도 서둘러 출발합시다.”

국경감시 강화를 부탁하기 위해 머물렀던 군부대에서 나온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천천히 나아갔다. 두꺼운 털옷을 입고 바람을 맞는 그들의 발걸음이 깊숙하게 파묻혀 끈질기게 붙들렸다.

세라는 그녀가 소령과 만나는 사이 국경 경비대가 이용하는 순찰로 확인용 노끈 위치를 파악한 류제를 뒤따랐다.

한 치 앞 길 보이지 않는 새하얀 눈보라가 그들의 미래처럼 어두웠다. 학생들의 위치를 빨리 파악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노끈을 붙잡고 걸어가던 세라가 범위 내의 지역을 ‘탐색’했다.

그녀의 ‘탐색’ 어빌리티는 마족들의 마기 등의 특수한 기를 찾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서 인간의 기는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 어빌리티를 학생들이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으로 쓰던 세라는 쓸모가 높지 않은 두 번째 어빌리티가 원망스러웠다.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재차 시도해 보아도 좋은 결과는 없었다.

“이 방향에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하군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든 가보면 알겠죠. 두 사람 모두 이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요.”

앞서 나가는 큰 등을 보는 세라의 입가에서 하얀 뱀처럼 긴 입김이 흩어졌다. 류제더러 제립학교로 돌아가라고 했으면서 그가 없었더라면 추적이 불가능할 뻔했지 않는가. 선생님으로서 믿음직하게 행동하지 못해 속상했다. 그리고 그녀의 ‘탐색’ 어빌리티가 반쪽짜리라는 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허탈했다

“제 손 잡으세요, 선생님.”

바람 때문에 다리가 밀려나는 세라에게 류제가 손을 내밀었다. 날씨가 나빠 슬렉터가 연결이 돼도 문제였다. 선생님용 슬렉터에 표시되는 학생들의 위치는 십여 미터 정도 오차가 존재했다. 가시거리가 멀쩡했을 때는 상관없지만 이런 날에는 키아나트리체의 기술력의 한계가 뼈아팠다.

“후우.”

그래도 세라는 소중한 제자들을 되찾기 위해 한 걸음 디뎠다. 굳건한 의지를 보이는 류제를 두고 안일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 반드시 해낼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세라가 류제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잠깐만요, 선생님.”

“문제가 생겼나요?”

걸음을 멈춘 류제가 깜박거리는 불빛을 보여주었다. 낌새를 느낀 세라가 서둘러 다가왔다. 한동안은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네에게서 다시 통신이 왔다.

불길한 소식이 아니기를 바라며 누군가 승낙 버튼을 눌렀다. 다급한 목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들려왔다.

―류제, 선생님! 저희 지금 따돌리고 도망가고 있어요!

“네?! 따돌렸다니요?”

“렌은 어쩌고?”

놀란 그들이 되물었다. 세니타리 롯이 호락호락한 카르텔이 아님을 아는지라 겁이 많은 유네가 보인 기지가 의외였다. 궁금함도 잠시, 눈보라 때문에 통신이 이따금 끊겼지만 유네의 설명이 문제없이 전해졌다.

―렌은 부상 때문에 어지러워하고 있어요. 제가 부축을 맡아서 방심하는 사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도망쳤어요. 근데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싶은데 부스터가 꺼져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네가 루시에의 감시에서 벗어난 방법은 한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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