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2)
“여보세요? 유네?”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에서 건강검진을 받던 중 신체 측정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류제는 유네의 고유 번호로 통신이 와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또 유네의 친구들이 억지를 부려 자신을 마을로 나오게 꼬드기려고 하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에 렌이 방을 나서며 유네와 뭘 살 게 있다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뭐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검진실에서 나와 슬렉터를 확인하던 류제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이상한 잡음이 들렸다. 친구들과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조용히 소리에 집중했다.
―지직 나르타 가문의 …집 아… 미…지만… 압수…게.
―이거 놔! 꺄악!
비명을 마지막으로 수신이 끊겼다. 모르는 목소리는 다분히 강압적이었다. 흘려듣기엔 어딘가가 거슬렸다.
류제는 유네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통신이 연결되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유네? 무슨 일이야. 뭐 잘못됐어?”
―응? 뭐야, 이건.
아까 유네와 대화를 하던 인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설마하니 유네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슬렉터를 빼앗긴 듯했다.
제 또래 여자애의 목소리라 혹시 미들 스쿨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여름방학 때의 보복을 당한 건가 싶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렌이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당신 누구야? 유네는 어디 있어?”
―…….지직
답 없이 통신이 끊겼다.
오싹한 기분이 류제를 덮쳤다. 이 마을에서 제립학교 학생의 슬렉터를 강탈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기다 슬렉터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는 자라면 비어빌리터는 아니었다. 그가 아는 상식 내로 좁혀지는 인물이 없었다.
류제는 렌의 고유 번호를 입력하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세라 선생님.”
그의 머리 위로 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화장실에 간다고 했으면서 바깥 대기 의자에 앉아 슬렉터를 만지작거리던 류제가 통신 기능을 껐다. 고개를 드니 웨이브 진 진회색 긴 머리칼이 버드나무 줄기처럼 늘어져 그의 이마를 간질였다.
류제가 연이은 검진에 지친 줄 착각한 세라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보통 검진에 동행하지 않았지만 지난달 이후로는 류제가 불안하지 않도록 이따금 옆을 지켜주곤 했다. 그녀는 손에 든 코코아를 넘겨주며 류제를 달랬다.
“많이 힘드나요? 조금 쉬었다가 하는 게 좋을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 세라 선생님,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거죠?”
물어보면 무엇이든 답해줄 듯이 그녀가 말했다. 이전 일 때문에 류제가 상담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녀의 상냥함에 류제는 머뭇거려졌다. 만약 이 일이 단순한 착각이라면 당장 전교생이 곤란해졌다. 입을 달싹이던 그가 결국 말문을 열었다.
“슬렉터를 강탈하는 행위에 대한 제재는 없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없을 리가 없지요.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신경… 쓰이는 게 있어요.”
“누가 당신에게 슬렉터를 빼앗겼다고 말하던가요? 혹시 또 렌 학생이? 누구에게 빼앗겼답니까?”
사고뭉치 렌의 일이라면 목소리가 커지는 세라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면 학생들이 몰래 통신 크랙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했다.
안 그래도 세라의 신뢰도를 떨어뜨렸을까 걱정인데 통신 크랙 때문에 징계가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귀찮아졌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내버려 두래도 류제는 유네의 곁에 있을 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유네의 비명은 렌의 위험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곁에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불길해졌다.
지금은 건강검진 중이니 무턱대고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만일 아무런 일도 아니라면 그거대로 렌과 거리를 두는 의미도 수포로 돌아간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산적인 자신이 한심해진 류제는 유네나 렌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며 이실직고했다.
“아까 렌과 마을에 내려갔다던 유네한테 통신이 왔는데 비명 소리가 들려서요. 저에게 도움을 청하려다 슬렉터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았습니다.”
“유네 학생이요?”
“네. 그… 미리 말씀드리는데 통신 크랙은 지난달에 고양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리신 거군요. 학생들 사이에서 크랙이 유행한다는 건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음 학기부터 새로운 버전의 슬렉터를 배급할 것이기 때문에 내버려 둔 거였는데……. 유네 학생이 슬렉터를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고요? 비명 소리와 함께?”
“네, 모르는 여자 목소리가 ‘나르타 가문의’라며 유네를 지칭한 것 같았어요.”
“이런. 다시 유네 학생에게 통신해 보시겠어요?”
세라의 미간에 작은 맥이 그려졌다. 류제가 유네의 고유 번호로 통신을 연결하려 했지만 아까 일 이후로 슬렉터가 꺼져서 신호음도 잡히지 않았다. 이번엔 렌의 고유 번호도 연결해 보았다.
“렌의 것도 꺼져있다고 하네요.”
“괴한이 슬렉터를 빼앗고 강제로 종료했다는 거군요. 이러면 죄질이 더 나빠지는데.”
키아나트리체에서 슬렉터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제립학교에 소속된 어빌리터나 군인, 왕실 기사나 알라마니 기술관의 연구원 등이 전부다.
어빌리터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걸 어떻게 조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점도 있는데 학생들이 굳이 다른 학생의 슬렉터를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가타를 순찰하는 기간트리카 부대의 군인들도 학생용 슬렉터를 강탈하진 않겠지요. 강도라도 당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치안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당신은 걱정하지 마세요.”
“네, 렌도 곁에 있을 거라서 무슨 일 있었으면 치안대분들도 알 수 있게 큰 소란이 났을 거예요.”
세라는 그래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류제를 달래 검진실로 돌려보냈다.
설마 이 마을에서 그런 일이 생길까 안일한 생각을 품던 세라는 라우라 축제 때 화마족이 들이닥친 일도 있으니 주의도 줄 겸 치안대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류제가 가버린 의자에 홀로 남은 세라는 그녀의 코드로 학교 경비실에 연락을 넣었다. 이는 학교 경비병의 기기에 직접 연락이 갔기에 어렵지 않게 통신이 닿았다.
“통신 보안. 학교 남문 경비병에게 전달합니다. 여기는 1―8 세라 밀로니. 마을 근교에서 슬렉터를 강탈당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으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습니다. 신병 확보와 무사 확인 보고 부탁합니다. 1―8 유네 나르타, 렌 지미입니다.”
―확인했습니다.
통지했으니 학교의 경비병이 마을 치안대에게 연락해서 사건을 해결할 것이다. 그녀는 이후 연락이 닿으면 신병이 확보된 유네 학생을 위로한 다음,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는 학생에게서 슬렉터를 빼앗는 행위는 금고형에 처한다고 경고할 것이다.
세라가 벽에 기댄 채 천장을 살폈다. 남모를 이유 때문인지 류제의 눈동자가 이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그녀가 믿고 있는 학생이 점점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슬펐다.
이대로라면 류제가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자제하고, 몰아붙이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더군다나 가장 친한 친구와도 거리를 두려는 류제를 세라가 잘 이끌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유리에, 내게 힘을 줘.”
아름다웠던 황금색 눈동자를 추억하던 세라가 감상적이게 되었다며 피식 웃었다.
류제 학생의 건강검진은 언제나 정상이었다. 괜찮다. 그녀가 류제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컨트롤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세라는 이번 건강검진 결과도 괜찮기를 바라며 류제를 따라 검진실로 들어갔다.
신체 측정과 혈액 검사에 이어 어빌리티 컨트롤 능력, 기간트리카 기동 능력을 차례로 점검한 결과를 확인하던 세라의 슬렉터로 남문 경비병의 번호로 연락이 왔다.
―통신 보안. 마을 수색 결과 제립학교 학생들이 얽힌 소란은 없었다는 치안대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신병 확인을 부탁한 학생들은 어디에 있죠?”
―마을 내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믿을 만한 증언에 따르면 오늘 그 두 사람은 마을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기분이 싸해진다. 류제 학생이 거짓말을 했을 이유도 없었다. 슬렉터도 꺼져있어 교사의 슬렉터로 추적이 불가능해진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 멀어지면 위치가 잡히지도 않는데.
“선생님?”
검사 결과표를 손에 든 세라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류제가 걱정스레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라의 생각이 헝클어졌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는 제발 아무 일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녀는 학교에 있는 A동 부사감을 슬렉터로 호출했다. C동 기숙사와 A동 기숙사에 8반 유네 나르타와 렌 지미 학생이 귀환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둘 다 외출 중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이었다. 류제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착잡한 입맛을 다셨다. 불길하다. 유네에게 ‘나르타 가문’이라고 말했다면 슬렉터를 빼앗았다는 사람은 유네를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접근한 목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방학식을 앞두고 본가에 사정이라도 생겨 잠시 데려간 것이길 바라며 세라는 기술관 1층에 있는 전선 통신 장치로 내려갔다.
전화기가 있는 집안은 드물었지만 나르타 가문이라면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교사의 슬렉터 네트워크로 나르타 가문의 직통 번호를 구한 후 전화를 걸었다.
“돌아간 일이 없다고요.”
―네, 성탄제에 맞춰 돌아온다고 해서 저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유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유네 학생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최대한 빨리 찾고 있습니다만 마을에도 보이지 않고 본가로 돌아간 게 아니라면 어디로 향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수화기 안에서 짧은 정적이 일었다. 유네가 입학하면서 나르타 상단은 제립학교 교장도 굽히고 들어갈 만큼의 기부금을 냈기에 학교 측도 나르타 가문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학생이 남장을 했었다는 전말이 드러나도 잠잠한 것 아닌가.
그런 집안의 자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키아나트리체에 만만찮은 큰일이 불어닥칠 것이다.
“다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속히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세라가 벽에 기대어 긴장한 숨을 터뜨렸다. 멈춰 서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그녀는 곧바로 학교에 보고를 올렸다.
아가타 전역의 치안대에게 지령이 내려지고 성문이 봉쇄되었다. 일단 여기까지 막아낸 세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일은 극비로 흘러갔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간 고양이 수인화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비상사태였다.
마족의 짓일까? 마족이 나르타 가문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어. 학생들이 인간에게 납치된 거라면 제립학교 학생의 안전에도, 학생들의 의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류제와 세라 등 중요 인물뿐. 현재 학교에 남아있는 선생님들이 호출되어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상세히 말해보세요. 학생 두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요?”
“저희 반 류제 신리 학생이 증인입니다. 두 학생은 그에게 비명 소리가 담긴 통신 내역을 남겼으며, 이후 슬렉터가 꺼져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마족의 짓입니까?”
“현재 납치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가장 안전해야 할 학생들이 벌건 대낮에 강도 짓을 당한단 말입니까?”
세라를 따라 학교로 돌아온 류제도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차라리 모두 그의 착각이었다는 끝맺음이 나을지도 몰랐다.
유일하게 사건의 정황 속에 있었던 그는 자신이 들었던 바를 선생님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들이 공연히 테이블을 내려쳤다.
“감히 제립학교 학생을 건들 생각을 하다니. 이건 키아나트리체 왕실을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슬렉터를 빼앗았다는 건 그들이 어빌리터라는 걸 알았을 텐데요?”
“파란 머리 제립학교 여학생과 다른 남학생이 성탄제 선물을 고르며 다녔다는 목격 증언을 확보했습니다만, 집에도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학생이 스스로 마을 밖으로 나갈 다른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렌 지미의 본가는 어떻죠?”
“치안대에게 연락해서 알아봤지만 마찬가지로 비었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남녀 두 사람의 밀회도 아니다. 그들의 의견은 점점 납치로 확정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제립학교 학생을 건들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그게 키아나트리체의 최후의 검을 배려하는 자들이 지키는 도덕이기도 하고 불문율로 작용하고 있는 만큼 제립학교 학생을 납치한 건 키아나트리체를 상대로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것이다.
“그 카르텔이 움직인 건가.”
역시 슬렉터를 강탈한 누군가가 슬렉터 조작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그 카르텔이라뇨?”
누군가 흘린 단서를 주워 담은 류제가 물었다.
몇십 년 전부터 아가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범죄 집단. 현상 수배범에 카르텔의 보스인 스콜라 맥도어를 선두로 몇몇의 어린 어빌리터를 납치해 말로 구슬려 결탁하고 횡포를 부리는 악명 높은 조직이었다.
생각에 빠진 세라 대신 옆에 있는 다른 선생님이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세니타리 롯이라는 카르텔이 있습니다. 어딜 가나 무뢰배들이야 많지만 다른 조직과 이자들의 다른 점이라면 세니타리 롯은 어린 어빌리터들을 범죄에 악용한다는 겁니다. 대대로 소탕하고 현 카르텔의 보스를 현상 수배한 이후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설마요. 설마 세니타리 롯이…….”
“나르타 가문인 걸 알고 있었다고 했죠. 그들은 분명히 유네 학생을 고의적으로 납치한 것입니다. 그들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수법도 비슷합니다.”
“그런…….”
류제가 탄식했다. 선생님들이 평소에 제립학교 학생들의 외출과 귀향을 자제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가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줄이야. 오늘 처음 알았다.
정말로 그런 사람들과 얽힌 거라면 렌은 어쩌지. 렌은 변변찮은 어빌리터니 내버려 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렌은 유네에게 변고가 생기면 절대 내버려 둘 성격이 아니었다.
“당장 외출했던 학생들을 학교로 불러들이세요!”
간이 회의실에 들이닥친 교장이 외쳤다. 주말마다 학생들에게 허가되었던 외출을 취소한 선생님들은 담당 학생들을 기숙사로 강제 소환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학교로 돌아오는 학생들 사이로 렌은 보이지 않았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렌이 내게 무관심한 것이 싫다고 똑같이 응대했던 벌이 이렇게 빨리 내려질 줄은 누가 알았겠냐 말이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왜 이번 납치가 우연이 아닌 것 같을까. 류제는 머리를 싸맸다.
“슬렉터 위치 추적은 아직도 불가능한가?”
“신호가 꺼져있으니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켜기만을 기다릴 수밖에요.”
“젠장, 반드시 찾아야 해! 이건 우리 제립학교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야.”
교장이 책상을 치며 분노했다. 중압감에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학교는 봉쇄되었고 전교생 모두 기숙사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함구령을 위해 학생 중에는 유일하게 류제만이 비상대책위실에 들어가 연락을 기다렸다. 학교에 남은 모든 교직원들이 어두운 얼굴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도했다.
* * *
얌전히만 잡혔으면 뜀박질하며 고생하지 않았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욕본 걸 보복하듯 그들은 유네와 재경의 손과 발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봉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철창에 내던졌다.
온몸을 두들겨 맞는 타격감과 험한 대우가 익숙하지 않았던 유네가 최후의 반항으로 버둥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터지지 않았다.
철창 문이 닫히고 짐마차의 캐노피가 내려졌다. 손쓸 새도 없이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렉터도 빼앗겼고, 기댈 수 있는 건 그녀가 구조 신호를 보냈던 류제가 무슨 이상을 깨달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바깥에서는 성탄제를 기념하는 캐롤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격리당해서 얌전히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유네를 지배했다.
유네는 두려움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어 그저 체념했다. 어두운 짐마차 안에서 손발이 묶여 ‘바람’이라는 어빌리티로 무뢰배들을 어디까지 제압할 수 있을까. 그녀가 과연 사람을 표적으로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나 있을까?
기절한 재경을 바라보는 유네의 시선이 흔들렸다. 슬렉터를 빼앗긴 렌이 덤빈다 한들 가능성이 희박했다. 무방비한 그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어빌리터의 인질이 될 것이다.
렌 군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잡혀갈 수밖에 없나. 여차할 때 어빌리티를 쓸 수 있는 그녀가 도리어 그를 지켜야 할 것이다.
피랍자의 두려움을 아랑곳하지 않은 짐마차가 자비 없이 출발했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있는 철창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깥 풍경은 캐노피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손도 발도 묶여있고 입도 봉인된 그녀는 하찮은 상품일 뿐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나를 납치한 거지? 몸값을 뜯어낼 셈인가? 렌 군도? 렌 군은 나르타 상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우…우우! 우!”
그녀가 옆에 누워있는 렌을 불렀다. 흉터투성이 어빌리터에게 공격당한 그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재갈이 물린 입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던 유네는 마차가 덜그럭거리는 힘을 이용해 렌에게 애벌레처럼 기어갔다. 간신히 렌에게 닿은 유네가 등을 뒤로 돌려 묶인 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그를 붙잡았다.
얕게 기절한 탓인지 유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재경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감실감실 뜨니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어디에 실려 이동하는 듯하자 재경이 놀라 몸을 꿈틀거렸다.
“……?!”
손발이 묶인 데다 입까지 막혀있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그가 유네를 살폈다. 유네도 자신과 똑같은 꼴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재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그 자식들 나까지 납치했단 말이야? 최악의 상황인데.
일이 이렇게 된 것도 아직까지는 재경의 생각 범위 내였다. 한 가지 루트로만 공략을 끝내지 않을 만큼 재경은 이번 이벤트 공략에 신중했다.
재경이 발목을 꿈틀거리며 슬렉터가 제대로 달려있는지 확인했다. 기절한 후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이것까지는 들키지 않았다.
‘유네, 괜찮아?’
‘렌 군. 우리 어쩌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겁에 질린 유네는 재경만이 살 길이라는 나약한 시선으로 매달렸다. 눈앞이 깜깜한 유네와는 다르게 재경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유네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것과 별개로 납치당한 지금 닥치는 두려움은 피하기 어려웠다. 유네의 녹색 눈동자에 울음이 가득한 것처럼 재경도 무서웠다. 싸움질만 해봤지 무방비하게 납치당하는 걸 경험해 봤을 리가 만무했다.
만약 이야기가 잘못되어서 류제와 세라 선생님이 우리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하지? 유네가 제대로 SOS 신호를 보냈을까?
물어보고 싶어도 입에 재갈이 물려 그들은 아무런 정보도 교환할 수 없었다.
“…….”
고민하던 재경은 짐마차가 사거리에 멈춰 섰을 때 결단을 내렸다. 재경이 자신의 발을 움찔거리며 유네에게 자신의 발목에 무언가가 있음을 인지시켰다.
현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어 절망하던 유네는 익숙한 크기의 그것을 짐작하고 놀라 날숨 뱉기를 잊었다. 렌이 슬렉터를 발목에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렌 군……!’
유네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한 그가 존경스러웠다. 자신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대단히 믿음직스럽다. 타고 내린 눈물이 그녀의 재갈을 적셨다.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성급해진 유네가 등을 돌려 손으로 재경의 양말 발목을 걷었다.
늘 차고 다니던 슬렉터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유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슬렉터를 눌렀다.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통신 기능에 접근했다.
원래대로라면 유네 혼자 납치되어야 하는 데다 납치된 유네는 나르타 상단의 자제로서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이동 흔적을 남겨놓고, 빼앗긴 슬렉터를 다시 켜게 만드는 식으로 적들을 꾀어내서 주인공에게 힌트를 주어야 한다. 유네의 힌트를 따라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주인공의 역할이다.
원했던 형태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주인공의 입장이 아닌 히로인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된 재경은 주인공에게 언제 어느 정도의 정보를 흘려야 하는지를 대강 파악했다.
썩 나쁘지 않아. 어차피 이 슬렉터는 위치 추적이 되지 않았다. 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류제와 세라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상태를 확인하는 용도로는 괜찮다. 챕터 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또 다른 적을 상대로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유네는 등을 돌려 조작하다가 도저히 불편했는지 재경의 발밑에 조심스레 엎드려 입술로 슬렉터를 눌렀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남녀 사이의 굉장히 오묘한 자세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세라 몰래 통신을 연결하는 유네는 조심히, 조심히, 외우고 있는 류제의 학생 번호 코드를 입력하고 숨을 죽였다.
―여보세요?
“우…우우…우!”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네가 감격해서 외쳤다. 막상 통신이 연결되었어도 슬렉터는 반이중 통신이라 상대방과 통신을 전환해야 하는 데다 유네나 재경은 모두 입이 막혀있었다.
류제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안도감을 선사했지만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통신이 종료될 것이다.
―유네? 혹시 유네야?
눈치가 빠른 류제는 이상한 침묵과 덜컹거리는 소음을 듣고 모르는 번호로 온 통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네는 앞에 있지도 않은 류제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제가 똑똑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납치된 두 사람을 되찾을 방도를 구하던 류제의 목소리가 컸다. 유네가 몸을 이용해 통신이 나오는 부분을 가렸다.
밖에 있을 범인들이 아무도 류제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한 유네가 재경의 발에서 몸을 뗐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답답한지 유네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고민했다.
옅은 숨소리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상황으로 보아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 연락을 주고 있는지 대충 짐작한 류제의 목소리에 탄식이 담겼다.
―젠장…….
통신이 된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이대로라면 방법이 없다. 렌 군도 저런 자세로는 스스로 통신을 할 수도 없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데.
유네는 잠시 방법을 고민하다가 S_script 수업 때 이진수에 대해서 배우면서 모스부호 알파벳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통신 기능이 있기 전에는 모스부호로 작전을 교환했고 지금도 위급 시에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해서 기말고사에서도 나왔다.
렌 군과 이걸로 의사소통하기에는 렌 군이 모스부호를 잘 모르니 불가능하지만 류제 군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유네는 볼로 슬렉터를 길게, 짧게 누르며 천천히 단어를 만들었다.
마차가 계속 흔들거려서 잘못 칠 가능성도 컸다.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도록 신중해야 했다.
‘납치’
긴 시간을 들여 한 단어를 전달한 유네는 류제가 이 의미를 알아차려 주기를 기도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통신 반대편에 있는 류제는 그녀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간파했다.
한참을 답변이 없던 류제는 후에, 잠시 자리를 바꾼 건지 주변 소리가 조용해졌다.
―렌도 거기 있어?
‘O’
그녀가 긍정을 뜻하는 오랜 관습 기호를 보냈다. 렌이 있다는 정보에 류제의 목소리가 커졌다. 유네는 혹시나 밖에 들릴세라 숨을 죽였다.
곧 진정을 한 듯 류제가 작게 물었다.
―유네, 네 슬렉터 꺼져서 위치 추적이 안 된대. 이건 누구 슬렉터야?
‘ㄹ’
―잠시만 기다려.
이니셜을 전달하자 통신이 중단되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희망의 끈을 잡은 두 사람은 심장이 입 바깥까지 튀어나오기 전에 눌러 담았다.
―이걸로 위치 추적을 하고 싶은데 등록되지 않은 슬렉터라서 슬렉터 고유 번호가 필요해. 지금 확인할 수 있어?
‘X’
―지금 위치가 어디야?
‘X’
역시 모스부호로는 보낼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다. 유네도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체한 듯 속에 얹혔다.
―…잠시만. 지직 유네 학생, 누가 당신을 납치했나요?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류제가 세라와 함께 제대로 유네를 추적 중이라는 증거를 들은 재경이 떨리는 숨으로 안도했다. 그들의 납치를 선생님도 알고 있다. 스토리대로 굴러가는 희망이 보였다.
세라가 물어본 정보만큼은 상세한 내용이 필요했다. 그래야 어른들이 범인을 특정하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조심 모스부호로 단어를 만들며 흉터투성이 어빌리터를 떠올렸다.
‘얼굴 상처 어빌리터 외 일반인 다수.’
이 문장은 모스부호로 만드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전달이 끝나자 유네는 한겨울에 식은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벌어진 재갈 틈으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역시 세니타리… 롯.
재경은 그 범죄 조직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내에서도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세라가 제대로 적을 파악했다면 끝난 거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임에도 해피 엔딩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던 재경은 빨리 호감도 이벤트가 마무리되길 바랐다.
―근처에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아가타 안에 있는 건 맞습니까?
‘교회 종소리. 북문 근처.’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은밀하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가능하면 저희에게 계속 연락을 남겨주세요. 무슨 내용이든 상관없으니까. 저희가 반드시 추적하겠습니다. 반드시 그 슬렉터를 사수해 주세요. 고유 번호도 확인해 주세요. 되도록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O’
―유네, 렌은? 렌도 거기 있지? 렌은 어때?
류제의 마지막 통신에 답하지 못한 유네가 통신 기능을 종료하고 고개를 숙였다.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천막을 거두었던 세니타리 롯 멤버가 캐노피 안에 눌러앉은 것이다.
앉아서 사람들 몰래 날붙이를 갈기 시작하는 그자는 재경과 유네 둘 다 철창에 갇혀 얌전히 누워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 할 일을 계속했다.
“…….”
사악, 사악.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험악하다. 그자가 앉은 곳을 흘긴 유네가 땀방울 하나를 또르르 흘렸다. 통신을 종료한 그녀는 재경의 양말로 슬렉터를 덮었다. 이 슬렉터마저 빼앗기만 안 된다.
재경은 유네의 의견과 반대로 슬렉터의 고유 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전하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알려져선 안 되는 정보였다. 흔들리는 짐마차에 몸을 맡긴 재경은 공책의 내용을 잠자코 떠올렸다.
베스트였던 상황에서 빗나갔으나 이것도 이것대로 유네의 안전을 살필 수가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슬렉터도 아직 나에게 있고.
나까지 납치한 건 스토리에 없던 일이라 걱정되기는 하지만 지금 류제와 세라 쌤에게 연락이 닿았으니까 유네를 되찾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세니타리 롯이란 조직은 최근에 나온 슬렉터가 담당 선생님들의 슬렉터로 위치 추적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발목에 찬 이 슬렉터는 재경 그의 슬렉터와 연동이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 측에서도 접근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유네는 이 슬렉터를 이용하는 것보단 저들이 슬렉터를 켜게 만들어서 위치가 발각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유네가 과연 그걸 잘해낼 수 있을까.
“루시에 아가씨.”
북쪽으로 이동하던 세니타리 롯이 아가타를 빠져나가기 위해 성문을 지나려던 중 루시에의 부하 한 명이 그녀를 호출했다.
류제의 통신으로 최신 슬렉터의 통신 기능을 확인한 루시에는 작은 맥가이버 칼을 꺼내 들고 어떻게 뜯어고칠까 즐겁게 궁리했다. 새로운 장난감이 두 개나 생겨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시에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큰일? 짜증 나게 굴지 말고 꺼져.”
그녀는 방해하는 부하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검문이 이상합니다. 경비병들이 교체되었어요.”
“뭐?”
본격적으로 재미를 보려던 루시에는 실망했다. 얼굴이 흉터투성이라 잠시의 굴곡을 만들어도 흉악하게 보였다.
오늘 북문의 경비병은 그들에게 매수된 인물이 담당해야 했다. 그래서 아가타를 쉽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했는데. 제립학교 측에서 벌써 움직임을 보였다는 의미일까? 충분히 수상했다.
“어떻게 안 거지? 벌써 들켰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 귀찮게.”
일순 슬렉터를 떠올린 루시에는 자신이 그 통신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 더 따지지 않았다. 자기가 잘못했긴 했지만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 아닌가. 그렇다면야 내 책임 없어.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면 아무런 문제 없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돌아서 가야지.”
북문 검문소로 향하려던 그들은 짐마차를 돌려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경비병을 피해 후미진 곳에 도착한 그들은 시건방진 목소리로 재경과 유네를 깨우며 짐마차의 캐노피를 걷었다.
* * *
기지를 발휘한 유네 덕분에 기적적으로 통신이 연결되었지만 류제의 개인적인 소망이 담긴 마지막 질문에는 답하지 못하고 끊겨버렸다.
선생님들의 요구대로 질문하며 종이에 모스부호를 옮겨 적던 류제와 그걸 해석하던 선생님들이 탄식하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그들을 휩싼 좌절감이 안색에 숨겨지지 못했다.
“지금 당장 북문의 병력을 교체합니다. 검문을 강화하고 지나는 사람들의 모든 짐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세요! 제립학교 학생 둘이 잡혀있을 법한 이동수단, 그리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어빌리터입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교장이 당장 치안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든 사건에는 골든 타임이 있듯 납치범 확보는 시간 싸움이었다.
성탄제 준비로 들떴을 학생들을 학교로 귀환시키고 비상대책위를 마련해서 통제실을 만들 것을 지시했던 교장은 속전속결 무전으로 북문 경비대장에게 전달 사항을 보냈다.
“그들이 아가타를 벗어나기 전에 찾아야 해.”
간신히 이어진 실낱같은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아무런 단서가 없던 이 시점에서 납치된 학생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찾은 기적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었다. 아직 그자들을 잡아들일 기회가 있었다.
세니타리 롯의 목적은 납치한 학생들의 목숨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인질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어빌리터에 아가타 상위 엘리트 계층인 교장은 세니타리 롯이 어차피 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우민들의 집합소라고 치부했다. 제립학교가 총력을 기울이고 아가타의 치안대가 위력을 발휘한다면 수색은 어렵지 않을 것임을 자만한 것이다.
그들의 조그마한 안심은 다시 불안으로 바뀌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북문을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흉터가 있는 사람은커녕 학생 두 명이 있을 법한 짐마차는 전부 무고한 상인들의 것이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검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불만까지 늘어났다.
“제길, 그놈들에게 속은 건가. 정말 유네 나르타 학생의 통신이 맞았나?”
“그자들이 류제 학생의 개인 학생 번호를 알고 있을 리가요.”
“저희 측 움직임을 눈치챈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경비 중에 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며 머리를 싸매는 동안 비상대책위실 한쪽에서 기다리던 류제는 유네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바라며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적어도 무사하다는 렌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제발…….”
내뱉은 한 단어에 깊은 진심이 얽혔다.
식사할 때마다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걸 귀찮아하던 어린 류제에게 루나는 기도하면 언젠가 신이 답해준다고 했다. 신은 그가 절박할 때 답해주었나 모르겠지만 류제는 이럴 때 기도라도 안 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기도를 들어준 것처럼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치안대와 통신을 하던 경비대장이 교장에게 현 상황을 보고하러 다급하게 들어왔다.
“성문 근교에서 버려진 짐마차를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없습니다. 내부는 비어있었습니다. 다만 안에서 이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경비가 내민 것은 유네가 차고 있던 귀도리였다. 귀족들이 주로 구입하는 값비싼 브랜드 제품이 허름한 짐마차에 버려져 있는 것은 충분히 수상했다. 직감이 마음 언저리를 쑤셨다.
“계획범죄처럼 움직임이 용의주도합니다. 이건 절대 우발적인 납치가 아니에요.”
“젠장할… 빌어먹을 범죄자 새끼들.”
일은 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가타의 암세포 같은 세니타리 롯도 마냥 잡히지는 않는다는 건가. 곤란해진 선생님들이 머리를 감쌌다.
이 귀도리가 피해자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납치당한 학생의 보호자인 나르타 가문에 정중한 연락이 갔다.
어른들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는 류제는 통신이 온 번호로 다시 연락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아침에 렌과 인사하던 때가 생각나 속이 타들어 갔다.
아는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렌을 제대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류제는 안쓰러운 렌 대신 더한 고통을 품었다.
“납치된 학생의 부모님이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
유네의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유네의 부모님이 비상대책위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학교 측에서는 키아나트리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을 소유한 학생 부모님의 후폭풍이 두려웠다.
만일 귀도리가 유네의 것이 맞다면 제립학교의 비호 아래 있는 딸이 납치되었다는 걸 시인할 수밖에 없는 증거품이었다. 선생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안심시켜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마족에 이어서 이번에는 납치라고요?!”
늘 웃는 낯으로 류제를 반겨주곤 했던 유네의 엄마가 눈물을 숨기지 못하며 교장에게 곧장 덤벼들었다.
믿고 딸을 맡겼더니만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켜주기는커녕 몇 번이고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에 그녀의 불만이 터져버렸다.
“우리 유네… 내 딸 무사한 거 맞죠?! 맞다고 당장 말해요. 전 납득을 못 합니다!”
“진정하십시오.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내…내 딸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찾은 건 따님의 것이라 추측되는 물건입니다.”
교장이 유네의 부모에게 귀도리를 보여주었다. 머리가 새하얘진 유네의 엄마는 당장 세라나 다른 선생님들에게 덤벼들 것 같았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주겠다 해서 믿고 제립학교에 맡겼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유네가!”
그녀가 울부짖는 소리에 입이 열 개라도 위로할 수 없었던 선생님들은 정적을 유지했다.
주변 공기가 짓눌려 유네의 부모님의 슬픔이 와닿았다. 선생님들이 걱정하는 건 학생 개개인의 안전도 포함되었겠지만 부모가 아이를 걱정하는 심정과는 달랐다.
덕분에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린 렌은 지금 무슨 심경일까 류제는 머리가 아팠다. 저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유네의 엄마를 진정시키던 유네의 아빠는 그가 제립학교에 가면 왕따도 없고 괜찮을 거라며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해 주었던 귀도리의 안쪽을 살폈다.
주문 제작한 것으로 안쪽에 유네의 이니셜이 박혀있었다. 이것이 유네의 것이 맞다 시인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유네가 거기 있었다는 정황을 바탕으로 버려진 짐마차를 중점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가운데, 제립학교 근교까지 들어왔던 세니타리 롯은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두 명의 학생을 찾기 위해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며 성탄제를 앞둔 아가타에 불길함이 증폭되었다.
* * *
생각보다 검문이 빨리 강화되어 북문을 통과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짐마차를 포기하고 산길을 강행했다.
유네는 다리 구속이 풀리는 즉시 도망가고 싶었지만 손과 입이 막혀있는 데다 목에 그림자 이리가 일렁여서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만일 그녀가 도망치면 렌은? 그도 이심전심일 것이다.
유네의 생각대로 재경 역시 가지고 있는 슬렉터로 기간트리카 장갑을 한다면 세니타리 롯이 방심한 틈에 유네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겠지만 입이 막혀 트리거를 외치지 못하는 데다 이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도망치기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풀피리를 불며 그들을 감시하던 루시에는 소란스러운 밑 동네 전경을 흘기며 퉤, 씹어버린 이물질을 뱉어냈다.
“좋겠네. 고작 너희 두 사람을 위해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 주다니. 아줌마가 보면 배 아파서 펄쩍 뛰겠는걸.”
“…….”
“웃기지 않아? 자기네들이 이 나라 국민들을 다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 자만하는 모습이. 키아나트리체는 말이야, 이런 부분에서 허술하다는 걸 인정 안 하는 것 같지? 나라면 억울할 것 같은데.”
그녀가 ADHD처럼 다리를 조급하게 떨었다. 한시라도 자극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 못 참는 루시에가 제 팔을 벅벅 할퀴며 그들을 비웃었다.
붙잡힌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그들을 위협하는 검은 그림자는 두려웠다. 묵묵히 루시에의 도발을 흘려들은 그들은 얼어붙은 땅을 디디며 화를 인내했다.
빠른 판단으로 치안대가 움직이기 전 산을 타서 성벽을 넘은 그들은 짐마차를 버려 이동 수단이 없어졌기 때문에 본진에 도움을 요청했다. 보스 스콜라 맥도어가 사람을 보내겠노라 전했다.
산을 오르느라 지친 그들은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합류를 대기했다. 추운 날씨에 땀이 흐를 만큼 걸어서 탈진한 유네는 자유롭지 못한 손과 입은 어쩌지도 못한 채 나무에 기대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들은 망을 보러 사라졌고, 그루터기에 앉아 새로운 슬렉터를 만지작거리던 루시에는 심심하던 중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듯이 웃은 그녀는 유네와 재경이 쉬는 곳으로 다가왔다. 납치한 이들을 지키고 서있던 세니타리 롯 멤버가 루시에가 억지를 부릴 것임을 짐작하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봐, 나랑 내기 하나 할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네의 눈동자에 적의가 담겼다. 입을 막아놓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사람을 조롱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하, 그러고 있으니 말을 못 하겠네. 미안, 미안.”
지금까지 막아놓은 건 뭐였나 싶을 정도로 그녀가 흔쾌히 유네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들이닥치는 날카로운 그림자들에 유네의 볼이 부드럽게 긁혔다. 루시에는 유네의 생각 따위 다 알고 있다는 간사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루시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도…도대체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뭔가요.”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에 겁에 질렸지만 유네는 지지 않고 외쳤다. 볼에서 흘러내린 피가 차갑게 식었다.
“너희? 없어. 너보단 너를 사주는 사람한테 바라는 게 있지.”
루시에는 장난치는 친구처럼 해맑게 답했다. 유네의 무가치함을 조롱한 그녀는 유네의 앞머리를 쥐어뜯어 강제로 고개를 들었다. 저 여린 모가지의 새하얀 살결을 흘긴 루시에는 분에 못 이기는 감정을 쏟아내듯 유네의 목을 꽉 쥐었다.
자비를 베풀 듯 숨통이 트이자 유네가 다발적으로 기침을 쏟아냈다.
“근데 고분고분 남들 말에 따르는 것도 시시해서 말이야. 나랑 기간트리카 대결 할래?”
언니가 죽은 이후 파탄 난 가정사 때문에 미들 스쿨도 가지 않고 국가의 명령을 어긴 루시에는 다른 어빌리터들과 대결을 해본 적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따금 어린 어빌리터들이 납치 타깃이 되면 기간트리카 대결을 시키고는 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대결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또 억지를 부리자 옆에 있던 세니타리 롯 멤버들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넣으며 만류했다.
“루시에 아가씨, 그러다 인질이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이런 유약한 년보다 약할 것 같아? 한 번도 놓친 적 없잖아. 걱정 마.”
“하지만…….”
“내 말에 토 달지 마.”
자신보다 커다랗고 힘세 보이는 남자를 그녀는 냉정하게 짓눌렀다. 조직에서 루시에의 자리가 상당히 높다는 걸 알아차린 유네는 왜 어빌리터가 저런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유네를 본 루시에의 얼굴엔 자만이 찼다.
“제…제가 왜 그래야 하죠? 좋은 점이 없…없잖아요.”
저 여자의 의도를 모르겠다. 흉터투성이 얼굴이나 거친 말투, 또래 같지 않은 행동은 유네의 삶에서 정상 범주로 넣을 수 없었다.
“아직도 너와 내가 동등한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네.”
그녀는 유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유네는 이런 모욕은 미들 스쿨에서도 당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유네를 사람 취급은 해주었다.
손발이 묶이고 슬렉터가 없는 유네는 같은 어빌리터임에도 무력했다. 그것이 지금 유네와 루시에의 계급이다.
“그럼 네가 대신 할래? 척도가 마땅찮은 자식은 싫은데 어쩔 수 없지.”
그녀가 이번엔 재경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재경은 유네와 같은 치욕감에 재갈을 악물었다.
재경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네가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게 스토리대로의 일이고, 주인공과 선생님에게 흔적을 보낼 수 있었다.
“렌 군은 건드리지 마!”
“뭐야, 남자 친구가 기사처럼 나서면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완전 반대네. 넌 자존심도 없어?”
“할게. 할게요! 제가 하면 되잖아요! 렌 군은 건드리지 마요.”
유네도 재경이 나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재경은 유네의 시선을 외면했다. 제기랄. 계획대로 해야 하는데 심장이 떨려서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내기라고 했죠? 무슨 내기를 하…하실 건가요?”
“뭐, 이럴 때 하는 내기야 별거 있겠어? 네가 이기면 너희를 풀어준다는 것밖에 더 돼?”
“무…무슨, 어째서……!”
“오, 솔깃해? 의욕적인 모습 아주 좋아.”
당연히 솔깃했다. 풀어준다고? 이렇게 쉽게? 유네는 마른 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말을 신용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저 산전수전 다 겪어온 어빌리터를 이길 수 있을지 유네는 자신할 수 없었다.
“네가 지거나 대결이 재미없으면 대가는 받을 거야.”
“그런……!”
지면 어쩌나 두렵지만 유네는 힘겨워하는 렌을 보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녀도 1년간 제립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을 따라가기 벅찼지만 기간트리카 실전 기동법도 익숙해졌다.
유네가 그녀를 쓰러뜨린다면 때를 봐서 렌의 입에 있는 재갈을 풀고, 발목에 있는 슬렉터로 기간트리카 장갑을 외쳐서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응? 지금 머리 굴리고 있는 거야?”
비웃는 웃음에도 유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루시에는 화초 아가씨의 눈빛에서 끄집어내진 쟁취를 위한 투지를 짓누르고 싶어 신이 났다.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루시에 아가씨, 그런 짓은 그만하시는 게…….”
“괜찮아, 괜찮아. 아무런 문제 없어.”
유네에게 슬렉터를 던져준 루시에가 가볍게 몸을 풀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루시에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제립학교 따위가 가르치는 것보다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방법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슬렉터를 돌려받은 유네는 욕심꾸러기처럼 꼭 쥐었다. 저들은 렌 군도 슬렉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몰라. 방심한 사이에 단번에 도망가면 돼.
슬렉터를 켜면 우리 위치도 세라 선생님에게 전송이 될 거니까 손해 보는 거 하나 없다. 할 수 있어. 렌 군… 제발 내 작전을 눈치채줘.
“덤벼봐.”
“기간트리카… 장갑!”
손목 밧줄이 풀린 유네가 뒤따라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이로써 세라에게 위치가 공유되었다.
안심이 되는 한편 그림자를 일렁거리는 루시에를 앞에 두니 까마득했다. 친구들과 대결하는 것과는 다르다. 남을 공격하는 건 비키와 합동 공격을 했을 때나 간신히 시도했지 그녀의 성정은 타인을 상처 입히는 데 부적합했다.
“하하!”
부스터를 수직으로 세운 루시에가 호쾌하게 날았다. 새로운 슬렉터는 보안으로 막혀 제립학교에 등록되지 않은 그녀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구버전 슬렉터로도 장난감 다루듯 유네를 공격했다. 새로운 슬렉터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유네를 실험 삼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에의 무차별적인 공격은 제립학교 친구들의 패턴과 너무 달랐다. 과격한 공격을 회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유네는 어빌리티인 ‘바람’으로 언제나 그랬듯 흙먼지를 일으키거나 시야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루시에는 용서가 없었다.
“소용없어.”
“히익!”
친구들끼리는 은연중에 ‘져도 된다.’라는 안심이 있는데 여기선 지면 끝장이라는 걸 유네는 실감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공격을 끝끝내 감행했지만 서투른 공격은 루시에를 스치지도 못했다.
“뭐 하는 거야. 도망만 가지 말고 제대로 상대해!”
유네와는 다르게 남을 해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루시에는 순식간에 유네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게 바보 같다. 애들 장난질 같은 전투 실력에 기가 찬 루시에는 유네를 땅에 처박고 그림자로 가시를 만들어 사지 사이에 꽂아 넣었다.
“형편없잖아. 이딴 실력으로 마족을 상대하겠다고? 제립학교도 몰락했구나. 내가 재미없으면 두고 보자 했을 텐데?”
“으…으으.”
유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대결 결과 루시에가 이겼고 유네는 졌다. 렌을 구출할 시도조차 못했다.
오랜만에 기간트리카 대결을 했음에도 루시에는 불만족스러웠다. 나른하니 기분 좋은 김에 스트레스를 한껏 쏟아내고 싶었는데 영 탐탁지 않았다.
“역시 루시에 아가씨. 대단하십니다.”
“당연히 저딴 제립학교 머저리들보다야 내가 더 뛰어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짜증이 난 루시에가 그림자를 이용해 유네의 슬렉터를 강제로 벗겨냈다.
장갑이 해제된 유네는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일 렌 군이 상대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왜 내가 나서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지. 조그마한 자존심이라도 세우고자 유네가 훌쩍거리며 반박했다.
“우…우린 아직 어려. 선배들은 우리보다 더―”
“이봐, 1학년생. 그래 보이지 않겠지만 나도 17살이야. 알겠니, 친구?”
흉터투성이에 사악해 보이는 저 얼굴이 동갑이라는 대답에 유네가 동요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세상에는 너희처럼 꽃밭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거든.”
“너…넌 어빌리터잖아! 어빌리터라면 제립학교에 들어와…와야…….”
“하하, 아까부터 기분 더럽게 하네. 그딴 곳을 내가 왜?”
그녀는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치욕스럽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하다.
그런 반응이 유네는 낯설었다. 제립학교에 들어오면 모두가 행복하다. 인류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무겁지만 범죄자 생활보다는 나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빌리터의 제립학교 입학은 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왜 저 아이는…….
“어라.”
그때 루시에가 빼앗은 슬렉터로 통신이 왔다. 류제거나 세라일 것이다.
저쪽에서 먼저 접촉을 시도하자 루시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녀도 제법 머리가 좋아서 새로운 슬렉터의 기능을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찾고 있는 거겠지. 이들을. 탐나 죽겠네. 빨리 보안을 뚫어서 내 걸로 만들고 싶다.
남의 절실함에 장난기가 생긴 그녀는 그 통신을 받았다. 학생을 납치한 자들이 누구인지 제립학교는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다.
“여보세요~”
―…학생들은 무사합니까.
세라의 목소리였다. 역시 제립학교는 학생의 납치를 눈치챘다. 루시에는 그런 세라가 미웠다. 자신에게는 그런 척도 안 했으면서 제 학생들만 소중하다고 감싸다니 이중성이 역겨웠다.
“세라… 힉……!”
“넌 닥쳐.”
위치를 당장이라도 말하려던 유네의 몸을 루시에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진득한 어둠이 타고 올라 목을 졸랐다.
“소식 참 빠르네요~ 이제 무사하지 않을 예정인데요~ 귀찮게 질척거리지 말아 줄래요?”
심술이 돋은 그녀가 뚜벅뚜벅 재경에게로 걸어왔다. 그녀가 허벅다리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누군가가 뒤에서 유네를 붙잡았다.
불길한 기분에 유네가 재경의 이름을 연호했다. 유네는 내기에서 졌고, 루시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내기에는 대가가 있다고 했다.
“졌으니까 가져가도록 할게. 남자 친구니까 이 정도쯤은 대신 해줘도 괜찮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재경의 새끼손가락을 끊었다. 역치를 뛰어넘는 고통에 재경의 재갈에서 참지 못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루시에는 그 비명을 똑똑히 들으라는 듯 슬렉터를 가까이 대서 철저하게 전달했다.
“쓸데없는 짓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목숨은 나도 장담 못 해.”
―우리에게 뭘 바라는 겁니까.
“바라는 거야 다 똑같은 거 아니겠어?”
그녀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타깃의 남자 친구는 루시에의 용돈벌이로 쓸 셈이었다. 이 하찮고 쓸모없는 남자를 돌려준다면 저들은 저 아가씨도 돌려줄지 모른다는 희망에 차서 유네 나르타의 몸값이 올라갈 것이다. 그 돈을 먹고 튀는 것만큼 효율 좋은 것도 없었다.
“성의는 슬링셀 3번가 어딘가에 있는 창고에 넣어둬 줘. 겸사겸사 안에 있는 구울도 처리해 주고. 한 시간 후 금액 확인한 뒤에 이 남자는 풀어줄지 말지 결정할게. 알았지, 세라 언니?”
―당신…….
세라가 말을 이었지만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루시에가 통신을 끊었다. 그녀는 다시 통신이 오지 못하도록 슬렉터를 종료시켰다. 유네의 입을 막았던 세니타리 롯 멤버가 버둥거리는 유네를 풀어주었다.
유네는 곧바로 재경에게 달려가서 상태를 살폈다. 끊어진 손가락 단면이 아찔한 데다 새빨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피가 쏟아지는 걸 처음 본 그녀는 패닉에 빠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재경을 보며 울음을 머금은 유네가 루시에를 나무랐다.
“레…렌…렌 군! 어…어째서. 내…내가…나…내가 졌는데 왜 렌 군을!”
“아, 커플로 네 것도 가져갔으면 좋겠어?”
루시에는 이번엔 나이프를 유네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유네의 손가락마저 끊을 듯이 아슬아슬 날붙이를 꺾었다. 피를 지혈해 주느라 손이 피범벅이 된 유네는 원망스럽게 루시에를 노려보았다.
“하하, 그럴 리가. 넌 중요한 상품이니까 상처 안 입혀. 어때? 쓸모 있어서 기쁘지?”
기쁘지 않았다. 저자가 도통 같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유네는 그녀가 사악한 마족처럼 보였다. 마족은 인간을 싫어한다는 이유라도 있지, 그들이 저자에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특히나 렌 군은 저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남자 친구도 아니다. 그녀를 지켜주려다가 휘말린 건데.
“죽기 전에 지혈이나 해줘.”
스트레스를 풀어서 후련한 그녀는 깔깔 웃다가 이 사건을 옆에 있던 다른 멤버에게 떠넘겼다. 피가 묻은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던 루시에는 옷에 아무렇게 닦고는 칼집에 넣었다.
“렌…렌 군… 렌 군! 정신 차려!”
“우…우욱…….”
재경은 고통을 참았다. 꼴사납게 비명을 지른 것도 짜증 나는데 유네를 더 불안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젠장, 원래는 내기에서 진 유네의 저 파란 꽁지머리를 자른단 말이야. 그걸 증거로 이곳에 두고 간다고. 그게 왜 내 손가락으로 바뀐 거냐고. 제길. 제길! 망할 자식! 대가 한번 더럽게 비싸네!
“렌 군, 괜찮아? 미안해. 내가…내가 져버려서…….”
“괜…찮아. 잘했어.”
피가 쏟아지는 가운데 유네가 재경의 재갈을 풀었다.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재경은 정신이 혼미했다.
슬렉터를 켜면 세라 쌤의 슬렉터에 위치 정보가 뜬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으면 두말할 나위 없었다. 이걸로 학교에 상세한 위치가 전송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유네의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재경은 스토리대로 된 거면 이런 새끼손가락 하나쯤은 싼값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 * *
“렌!”
턱 막힌 비명 소리에 놀란 류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들은 침착하게 통신이 끊어지는 것까지 기다렸다.
적의 뜻대로 동요해 버린 류제가 이를 어쩌면 좋냐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분명 똑같은 걸 들었을 텐데 사람들은 귀라도 먹은 것처럼 덤덤했다.
세라의 슬렉터에 위치 정보도 공유되자 교장이 차분하게 치안대에게 전달했다. 선생님들은 슬렉터 건너편에 있던 소녀의 목소리를 분석했다.
절대 고양되는 법이 없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역시 아가타를 벗어났군. 건방진 자식들.”
“‘성의’라면 금전을 말하는 거겠죠. 매뉴얼대로 갈까요?”
“창고에 구울이라니. 저희를 농락하려는 셈입니다. 아가타 한복판에 왜 구울이 있다는 말입니까.”
목소리가 유네의 것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류제는 배신감이 들었다. 딸과 함께 있다고 추정되는 학생의 비명 소리까지 들렸는데 선생님들의 태도가 안일하자 유네의 아빠도 마찬가지로 분개했다.
“얼마죠? 얼마를 주면 우리 딸을 풀어준답니까? 그깟 것 얼마라도 내겠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아파 메이드들의 부축을 받으며 쉬러 간 그녀 대신 그가 외쳤다.
“진정하세요. ‘성의’라고만 말했습니다. 그 성의가 어떤 것인지 답하지 않은 이상 말장난을 하려는 그들의 계략일 수 있습니다.”
고양된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선생님들은 초지일관 차분했다. 이성을 잃으면 판단이 흐트러졌다. 아가타의 암 덩어리 세니타리 롯이 창궐한 이래로 변을 당한 제립학교 학생들은 적어도 열은 넘었다. 지금까지 당해온 바를 토대로 제작된 매뉴얼이 있고, 세니타리 롯의 보스 스콜라 맥도어가 저지른 범죄로 추정하건대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만일 돈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결과적으로 제립학교가 그들의 범죄를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그들을 소탕하지 못할 경우 오늘 이후로 세니타리 롯이 저지를 모든 범죄는 제립학교의 재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성의를 보이면 풀어줄지도 모르잖아요! 얼마가 되었든 주기라도 한다면 뭐라도!”
“주지 않습니다. 저희는 매뉴얼대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 행동이 더 나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습니다.”
류제도 유네의 아빠와 합심해서 따졌지만 선생님들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돈을 주면 세니타리 롯은 제립학교 학생이나 어린 어빌리터를 납치하는 등의 같은 굴레를 반복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당장 렌을 구하고 싶은 류제는 그런 말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그자가 말한 창고에서 매복하면 뭐라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가능성이 있으면 시도라도 해봐요!”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알아서 정합니다. 류제 신리 학생. 자리에 앉아요. 당신은 학생입니다. 이건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교장이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류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제립학교에 와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이제 이런 무력감은 참을 수 없었다. 교장의 말을 무시한 그는 유네의 슬렉터의 위치가 뜬 정보를 흘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류제 학생!”
안 그래도 담당 학생이 납치당해 정신이 없는데 류제까지 섣부르게 행동하면 세라만 힘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둘이나 납치당한 게 얼마나 마음 힘든 일인지 알았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란 게 있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라고 비상대책위에 넣어준 것이 아닌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가 선생님들에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정의감이 불타오르는 모습은 좋지만 지금은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아, 행복해야 할 성탄제가 코앞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아가타 밖으로 나갔으니 더 멀어지면 위치 추적이 불가능할 테죠. 세라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괜히 날뛰다가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그에게 잘 알려주도록 하게.”
“네.”
슬렉터에 뜬 위치를 아가타 전체 지도에 표시한 세라가 류제를 뒤쫓아 갔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행동해 버리면 류제는 사건에 개입할 수 없게 된다. 유네와 통신을 할 수 있는 슬렉터도 빼앗기고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위험을 류제도 알았다. 그래도 몸이 움직이는 걸 어쩌란 말인가. 렌이 왜 비명을 지른 거지. 고문을 했나.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걱정에 휩싸여 당장 찾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에 박혔다.
슬렉터를 빼앗겼다던 유네가 자신의 슬렉터로 기간트리카 장갑을 했다. 그 이유를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친 류제는 학교를 빠져나와 멋대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여긴가. 렌, 어디에 있어!”
그는 아가타 성벽을 넘어 북서쪽 위치가 찍혔던 장소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있던 흔적이 보였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진작 떠난 뒤였다. 류제는 아직 연기가 피는 작은 모닥불을 흘겼다.
눈앞에서 놓쳤다.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넘긴 류제는 그들이 남겨놓았을지도 모르는 다른 흔적을 찾았다.
“렌!”
토지를 붉게 적신 피. 그리고 손톱이 깨진 작은 손가락 한 마디.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흔적을 발견한 류제의 전신에 분노가 뭉쳤다. 누군가는 ‘고작 손가락’이라고 말하겠지만 끔찍한 경고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렌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목적이 뭐냔 말이야.
“제길, 제길, 제기랄.”
아까까지만 해도 렌이 이곳에 있었다. 기간트리카로 바로 달려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다. 온기가 느껴지는 듯 마르지 않은 피가 땅을 적신 모습을 보자니 류제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오감을 집중시켜 곧장 그를 잡아먹을 듯 흔들리는 마기를 잠재웠지만 무력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이런 식이야. 렌을 놓치고 그 뒤를 쫓기만 하지.
분에 겨워 류제가 주먹을 떨고 있으려니 류제를 쫓아왔던 세라가 땅에 착지해 어깨를 잡아챘다.
“류제 학생, 단독 행동은 그만하세요. 당신도 소중한 우리 제립학교의 학생입니다. 그들의 타깃이 1학년들인 걸 잊었습니까? 무슨 짓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세요!”
“세라 선생님, 하지만!”
류제가 흥분해서 반박하자 세라가 침묵으로 류제를 다루었다. 세라의 눈을 보고 있으면 아까까지만 해도 건강검진을 받던 류제는 당연히 죄책감이 들었다. 치사할지라도 세라는 그런 방법으로 류제를 진정시켰다.
“저는 당신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니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는 흥분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네.”
류제가 마지못해 답했다. 아직까지는 눈빛이 정상이었다. 너무 흥분했었다는 사실을 직시한 류제는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피범벅이 된 누군가의 손가락을 세라에게 보여주었다.
“렌은 무사한 거겠죠?”
“그러기를 바라야죠.”
이보다 더한 끔찍한 것들도 본 그녀도 화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학교에 있는 선생님처럼 의연한 척했다. 차마 괜찮을 거라는 무책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렌의 손가락 마디는 세라가 넘겨받았다. 세니타리 롯 쪽에서 상처를 제대로 치료를 해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늦으면 상처가 감염되어서 생명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라다가 렌…렌이 혹시라도 …면 어떡합니까.”
죽는다는 단어를 차마 말하지 못한 류제가 세라를 보챘다. 학교에서 탁상공론을 하는 사이 납치된 이들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뻔하게 그려졌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류제 학생, 학교로 돌아가세요.”
“안 돼요. 저는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의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럼 다른 분들은 렌을 위한 ‘성의’는 마련해 주신답니까? 뭐라도 무사를 확인하게 해주신다는 겁니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어요. 렌이 여기 있었다고요!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단 말이에요! 1시간 후에, 1시간 후면……!”
“류제 학생.”
“뭐라도 접점을 만들어야 추적할 수 있잖아요!”
세라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말단인 그녀가 결정짓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목적을 모르니 돈을 준다고 해서 납치한 학생들을 돌려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점점 더 높은 금액을 요구하고, 그 돈은 그들이 나중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키아나트리체를 빠져나갈 때 사용하게 될 것이다. 장기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좋지 못한 전략이었다.
“…그냥 절 내버려 두세요. 발목 잡지 않을 테니까. 제발요.”
류제는 당장이라도 렌이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세라의 대답을 듣지 않은 그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하늘에 높이 올랐다.
아래에서는 위치 정보를 받았던 제립학교 소속 어빌리터들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채 도착했고, 성문을 지나친 치안대들도 한발 늦었다. 유네네 부모님도 치안대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따라왔다.
다 이기적이고 냉혈한 치들처럼 보였다. 화목한 가정의 상징이었던 유네의 부모님이 원래부터 저랬던가? 그들은 렌은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보여서 자기만 이상한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면, 진짜 가족들 사이란 더 특별하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중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딸은… 우리 딸은 다치지 않았겠죠?”
렌의 비명 소리를 듣고 그렇게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미웠다.
심장이 조여온다. 그는 두근두근 속에서 쉬쉬 똬리를 풀려고 하는 마기를 억눌렀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가 이거다. 다시는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류제는 곧바로 슬링셀 3번가에 위치한 악독한 슬럼가로 들이닥쳤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어린 학생이 등장하자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성탄제는 개뿔 오늘을 살기 위해 버둥거리던 사람들이 고깝게 눈을 빛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그에게 다가오는 몇 사람을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던 류제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때려잡고 문제의 창고를 찾았다.
낡은 문을 여니 텅 빈 안쪽엔 짐승 소리를 내는 구울들이 개목걸이에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구울?!”
구울은 한때 인간이었지만 마족에게 당하고 난 후 이상해진 시체들이었다. 구울들은 이성이 없이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이유를 불문하고 토벌 대상이었다.
창고에 구울이 있다는 말은 선생님들을 조롱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럼 정말 돈을 마련해 준다면 렌을 풀어줄지도 몰랐던 것 아닌가.
어쨌든 창고를 뒤져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여기에 있는 구울을 전부 무찌르는 게 편했다.
구울들은 심장을 찌르면 평안을 되찾는다. 류제는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죽음의 안식을 되돌려 주었다.
흠칫거린 류제의 눈동자가 뒤편을 향했다. 세라에게 창고에서 구울을 발견하고 처리했다는 연락을 보내던 류제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주시하며 죽은 구울들의 상태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아까는 구울들의 난동 때문에 알아차리기 힘들었는데 창고 안에 그보다 일찍 들어왔던 손님이 있었다.
등 뒤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좀도둑 한 명을 류제가 사냥하는 표범처럼 웅그리다가 잽싸게 뒤를 돌아 제압했다.
“우와아악!”
“네가 납치한 거야?”
손으로 좀도둑의 머리를 짓누른 류제의 목소리에 한껏 분노가 담겼다. 무슨 뻔뻔한 자신감인지 좀도둑은 무고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울먹거렸다.
“난 아무것도 안 훔쳤어!”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가 렌을 납치한 거냐고 물었어!”
“레엔? 그건 또 누군데?”
땅에 얼굴이 처박힌 좀도둑은 어린 습격자의 목소리를 파악하고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슬럼가에서 한두 해 구른 게 아닌 그는 제압당한 기술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예상을 뒤엎는 돌덩이 같은 힘이 짓눌러 끝내 탈출에 실패했다.
“으윽, 무슨 힘이…….”
좀도둑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류제가 입고 있는 옷에 박힌 제립학교 로고를 확인했다. 깜짝 놀란 그가 버둥거렸다. 어쩐지 쉽지 않다 했더니 어빌리터였을 줄이야. 잘못 걸렸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제립학교 놈들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대답이나 해.”
이글거리는 마기가 느껴지자 몇몇 죽지 못하고 꿈틀거리던 구울들이 두려움이 담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도발하지 않아도 류제는 충분히 화가 난 상태였다.
“세니타리 롯과 무슨 상관이지?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들에게 무슨 명령이라도 받았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위협적이다. 류제는 여차하면 그를 인질로 잡고 세니타리 롯과 협상을 해볼 생각이었다.
세니타리 롯과 협력 관계일지언정 그 자식들과 전혀 끈적끈적한 동료애가 없던 그는 억울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난 그놈들이 이 아지트를 버린대서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고 했을 뿐이야! 납치는 무슨.”
“이곳을 버린다고?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긴, 말 그대로지. 세니타리 롯은 여기를 떠났어. 이번 일을 끝내고 알레흐카이잔에 망명할 거라고 했다고!”
“알레흐카이잔?”
“그래! 설마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건 아니지?”
물론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제립학교 측에서 돈을 준비해 놓으면 그 돈을 세탁하라는 루시에의 개인적인 명령을 받았다.
그 루시에가 금액을 떼어먹어도 눈을 감아준다기에 성급하게 움직였던 그는 개처럼 꼬리를 흔든 과거를 후회했다.
정보통에게 들은 바로 키아나트리체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알레흐카이잔에 망명하는 세니타리 롯을 따라가고 싶었던지라 밉보이기 싫었던 그는 시키는 대로 하려 했으나 저놈이 난입해서 구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놈들이 왜 제립학교 학생을 납치했지?”
“몰라! 매번 그런 짓으로 먹고살잖아.”
“여기를 버리고 알레흐카이잔에 갈 거였으면 왜 돈을 요구한 거냐고! 당신, 뭔가 알고 있지?”
어린애쯤은 잘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니 좀도둑은 말을 아꼈다. 빠져나가기 전에 키아나트리체에 남아있는 그를 통해서 어떻게든 회수하겠지.
좀도둑은 이 일에 연관된 거라곤 돈을 회수하는 것밖에 없어서 억울했다. 납치당한 놈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화풀이란 말인가. 그가 적반하장으로 빈정거렸다.
“이봐, 네 친구가 납치된 모양인데 그만 포기해. 화풀이할 상대도 잘못된 데다 상대가 세니타리 롯이라면 가망이 없어.”
“닥쳐. 멋대로 지껄이지 마.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인생 선배로서 현실적으로 말하는 거야, 어린 친구.”
임계점을 넘을 만큼 화가 치솟은 류제는 자신을 무시하는 좀도둑을 내동댕이쳤다. 마음 같아서는 저런 무지렁이를 상대로 어빌리티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싶을 만큼 울화통이 가시지 않았다.
좀도둑은 데굴데굴 굴러 벽에 부딪히고는 구울들의 시체를 보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지독하게도 해놨군. 루시에도 그렇고 어빌리터 놈들은 다 이래? 젠장맞을 자식들이야.”
“난 너희들이 더 역겨워. 사람을 상대로 목숨 장사나 하는 더러운 놈들 주제에 깨끗한 척하지 마.”
“어린 친구, 굶어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하는 거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모르나 봐.”
“그래서 이런 짓을 하나? 난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어.”
“명예? 참 나, 너 잘났네. 하기야 나라에서 돈 퍼 날라주는 너희야 등 따습고 배부르니 그러겠지.”
그는 투덜거리다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류제에게 다시 붙잡혀 공연히 혀를 찼다.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 어빌리터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비루한 마음가짐이 박혀 마을을 잃고 슬럼가로 흘러들어 온 사람들의 비참함을 모른다.
명예? 도덕심? 그것보다는 일단 먹을 거다. 그리고 입을 것. 잘 곳. 이곳엔 자신을 포함해서 그것만 빼앗을 수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놈들 천지였다.
“날 심문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다, 어린 친구야.”
“닥쳐. 그걸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냐. 세라 선생님, 그들이 말했던 창고에서 수상한 사람을 한 명 붙잡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치안대를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류제 학생, 이제 그만하시고 학교로 돌아가세요.
류제는 답하지 않고 통신을 끊었다. 류제는 수많은 기대를 받는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사무치게 아팠다.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랐던 것이다.
그 사실이 억울하고 분했다. 왜 포르테 그녀처럼 강하지 못한 걸까. 자꾸만 작게 보이는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는 텅 빈 창고 벽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공허한 울림이 부질없다며 조롱하기 전, 그는 좀도둑을 데리고 그 장소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