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0. [12월. 선택지 없는 기로 앞에서] (1)
늦은 밤 기숙사로 돌아온 류제는 그 길로 짐을 쌌다. 어쩐지 상태가 이상했던 류제가 걱정돼 뜬눈으로 기다리던 재경이 말렸으나 류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숙사 전체 소등 시간이 지나 스탠드 불빛만 아른거리는 가운데, 침묵하는 그림자가 부지런히 휘청거렸다.
입학할 때 고아원에서 들고 온 가방 안에 짐을 구겨 넣은 류제는 짤막하게 인사하고 예전 재경이 쓰던 옆방으로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류제는 그렇게 되었다라고 말할 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설마 몸에 문제라도 있었나 뒤늦은 걱정에 재경은 우두망찰해졌다.
“류제…….”
문은 닫혔다. 말소리가 익숙한 공간에 혼자 남겨져 버린 그는 아스러질 만큼 정적이 두려웠다. 단절된 문을 열기에는 그는 현실과 맞설 용기가 부족했다.
다음 날 재경은 세라를 찾아가 따졌다. 왜 류제가 방을 옮겼냐는 질문에 세라도 어리둥절해했다. 류제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에게 아무런 설명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세라는 흥분한 재경을 안심시켰다. 저번과 같은 일이 발생하면 안 되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류제가 혼자 방을 쓰겠다 부탁했다고 그녀가 차분하게 전해주었다.
이것은 당사자인 류제와 담임이자 A동 기숙사 사감인 세라가 서로 논의한 사항이었다. 학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세라는 그 말이 타당하다고 판단해서 류제의 선택을 존중했다. 룸메이트인 렌은 아쉽겠지만 류제의 생각이 단호했다고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나온다면 재경은 할 말이 없었다. 존재 자체로도 세상을 위태롭게 하는 그가 세상을 해피 엔딩으로 이끌 주인공 류제의 결정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무슨 건더기라도 있어야 트집을 잡지, 방도가 없었다.
몸에 대해선 걱정할 거 없다고 류제를 설득해 볼까 고민하던 사이 날이 밝았다. 그동안 재경의 안에서 답이 내려졌다.
솔직히 원작 렌 지미는 주인공과 같은 방을 쓰면서 도움 되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류제가 방에 돌아왔을 때 신경에 거슬리게 시비를 거는 정도. 그게 이 세계 속 렌 지미란 존재다.
다시 혼자서 방 쓰는 건 외롭지만 그게 류제의 결정이라면 2학년에 올라갈 때까진 참을 수 있었다. 겁쟁이가 되어버린 재경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 않다고는 입에 침을 바르고도 말할 수 없었다.
류제의 바뀐 태도도 거북한데 12월로 넘어오자 거센 된바람처럼 반 분위기도 날이 섰다.
둔한 재경도 그것을 느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니 괜한 시비 걸기 싫었던 그는 파리 쫓아내듯 시선을 무시했다. 언짢았지만 어차피 수신제나 고양이 사건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재경은 이런 곳에서 자신의 성장을 재확인했다.
1학기엔 류제와 유네와 재경, 이 세 사람이 같이 다니는 게 당연했는데 2학기에 들어와 진실을 밝힌 유네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재경은 류제와 둘이서 주로 활동했었다.
그런데 학기 말이 된 지금은 류제까지 그에게 무관심해서 어쩐지 자주 혼자가 되어버린 재경은 심심하게 반을 겉돌았다.
하지만 뒷자리 유네는 항상 착하고, 노닥거리면 괜히 참견하는 비키도 있으니 그런 기분도 금세 사그라졌다.
쉬는 시간에 유네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다 치밀하게 성탄제 약속을 잡은 재경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교실을 나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가 추운 복도에 몸을 사리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야, 너. 전부터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하? 뭐?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날 선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그를 불러 세운 건 같은 반 ‘무게’ 어빌리터 학생이었다. 짝다리로 서서 손톱을 매만지던 그녀가 희번득 눈깔을 올려 재경을 노려보았다.
재경과 그녀는 수학여행 때 말고는 접점도 별로 없고 사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은 사이였다. 별일이다 싶어서 말해보라며 턱짓을 하니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보란 건 말뿐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보니 박수가 나올 정도네. 반 분위기 좀 보고 행동하는 게 어때?”
“사람을 불러놓고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면 낸들 아냐?”
“난 몰라. 이제 네가 알아서 해.”
제 말만 마친 그녀는 반박하려는 재경을 밀치고 사라졌다.
여자애들 세계는 뭐 저렇게 복잡할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영문을 몰랐던 재경은 난데없이 싸움 거는 거냐며 부딪힌 어깨를 툭툭 털었다.
“뭐라는지, 원.”
반 분위기는 무슨. 아무 일도 없었다. 왜 나한테 와서 난리야.
친구가 없었던 그가 차마 보지 못하는 깊은 곳을 파고든 미나의 계략이 시작되었다. 교내는 미나의 룸메이트를 시작으로 천천히 세뇌 마법에 감염되는 중이었다.
재경에게는 듣지 않는 그 마법으로 반 친구들의 의식이 뒤틀려 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 괴리를 이상하다 의심하지 못했다.
반 분위기라 말하면 재경도 몇 군데가 찔렸다. 멀리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가까이에선 소외된 기분. 류제도 그렇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말을 걸어도 함께 있다는 충족감이 부족했다. 단지 내 착각인가? 아니면 또 내 잘못인 건가.
틀어지는 톱니바퀴의 향방을 단 한 사람만이 염려한다. 시간폭탄의 끝을 향해 초침이 거침없이 흘러갔다.
번개가 쳤다. 요즘 아가타에 번개가 치는 날이 잦아졌다. 비 대신 눈보라가 몰아쳤다. 고양이 사건 이후 용서가 없는 악몽으로 불면증에 시달린 니냐롯트는 결국 수면 부족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루이나가 망을 보고 있는 사이 양호실에 홀로 잠든 니냐롯트는 악몽에게 마음이 조여졌다. 곁에는 미나가 성자처럼 웃으며 잠든 공주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십 년도 전인 과거. 니냐롯트가 고사리 같은 손을 활짝 편 7살 무렵의 일이다.
쨍하게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뜨고 초목이 손길에 스쳐 지나가던 그날만큼 또렷하면서 희미한 기억은 없을 것이다.
쪽빛을 잡아먹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오늘처럼 똑같은 천둥소리가 그날의 클라이맥스에 울려 퍼졌다.
어빌리티를 발현하기 전의 어린 시절. 복잡한 정계 이야기는 모르는 평범한 공주였던 그녀는 왕실 교사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듣고 마냥 행복했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모여 단란하게 식사하는 날이기도 했다. 금슬 좋은 부부라 늘 함께 있었던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오늘 작문한 글을 읽는 동안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식기가 놓인다. 혼자 뿌듯해하며 자리에 앉던 그녀가 실수로 음식을 흘리자 하인이 그녀를 보필하며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조심하라 일러주신 아바마마가 웬일로 칭찬을 해주었다. 어마마마가 웃었다. 따스한 기억이 그녀를 감쌌다.
[어리석은 가축들아. 주제를 알아라!]
즐거운 때는 단숨에 추락했다.
두려운 목소리에 그녀는 얼핏 왕궁에 숨어들어 온 마족과 지나쳤던 것이 뇌리에 스쳤다. 미소, 행동, 몸짓 등 모든 것들이 눈에 익지만 그자의 얼굴만큼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나로 땋은 긴 초록 머리가 마기에 흩날렸다.
대마족 결계가 쳐져있는 왕궁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왕실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위장했던 마족이 그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평화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악한 마기로 얼룩진 회장이 난장이다.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니냐롯트의 마음도 깨뜨렸다.
왕실을 지키는 전속 기사가 어빌리티로 마족을 상대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녀는 어마마마의 뒤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비명 소리가 낭자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 안심시켰다.
그런데 왜 어마마마는 마족에게 밀쳐졌었지? 그녀와 어마마마는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었을 텐데. 그 연유가 뭐였더라?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되는 순간 어머니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마족을 상대하던 기사는 겁에 질려 머리를 붙잡았다. 공기를 찢는 마족의 웃음소리가 소름 끼친다. 뒤늦은 아버지의 절규. 그 비명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뒤섞이는 기억에 그녀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누구지? 류제 신리, 제발 울지 말아 줘.
“증오스러운 것.”
“아바마마?”
상냥하던 아바마마는 그때부터 이상해졌다. 이상해져 버렸다. 눈동자는 상냥함이 소실되고 증오와 분노로 뒤덮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상실의 슬픔은 메워지지 않아 화목하던 그때로 영영 돌아갈 수 없다.
아바마마, 절 봐주세요. 어째서 저마저 감히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처럼 어빌리터가 되었을까요. 하지만 어마마마를 죽인 건 제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바마마.
그러니 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이전처럼 나긋한 얼굴로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저를 제대로 바라봐 주세요. 저는 달라요.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어린 그녀의 외침에도 소중한 비녀가 산산조각 난다. 복수심에 불타는 황제의 광기가 섞여 마족 토벌전이 시작된다. 백장미 부대를 이끌 젊은 신성과 함께 키아나트리체는 뚜렷한 목적지로 향한다.
마족을 토벌한다. 인류의 안전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그녀는 그 끝을 이룩해 낼 유일무이한 존재로 성장했다.
함정에 빠진 미노타는 대마족 인류 협약을 어기려고 하고 있다. 고독한 자가 전해준 첩보는 그녀의 적이 만들어낸 미끼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진 고양이의 생사는 알 수 없다.
미노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배후를 지키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무력을 행사한다면 피폐해진 키아나트리체에 활개 칠 위협이 뒤따른다.
전쟁을 하면 사마(死魔)들이 냄새를 맡고 찾아와 미쳐 날뛴다. 피바다로 도륙된 대지 위를 조롱하듯 날아다닐 박쥐 날개의 그것들이 싫다.
벌써 올해 세 번이나 등급1의 마족이 키아나트리체를 침범했다. 마왕이 죽은 이래로 전례 없이 높은 등급의 마족이 날뛴다. 마족이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는 파란의 가운데에 있었다.
“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셨나요.”
그녀가 지켜야만 했던 존재들이 원망의 목소리를 보냈다. 고통받아 허우적거리는 민초의 손이 파도처럼 그녀에 발치에 일렁거렸다.
미끼를 던지는 미노타. 호시탐탐 부활을 꾀하는 마족.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에 먼저 칼끝을 향할 것인가.
“대제국 키아나트리체의 황제로서 제1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에게 인류의 최대 적국인 마국 나라카의 완전 토벌을 명한다.”
위대한 황금의 왕좌에 앉은 황제가 말한다. 마족의 완전 토벌. 이 세상을 평화로 이끌 유일한 방법.
마족의 지도자인 마왕이 소멸한 지금만이 때다. 적기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야무야 넘어갔다가는 미노타의 손에 인류 연합은 무너지고 또다시 마족들이 득세하는 시기가 오고 말 터다.
아바마마를 실망시켜 드릴 수 없어. 이것이 나의 숙명이다. 어마마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어빌리터의 오명을 벗기는 것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진중하게 검을 받들어 황제에게 복종했다.
행복하기만 한 꿈은 끝났다. 현실은 혹독하고 잔인했다.
* * *
2학기도 끝나가고 혹독한 추위를 피할 겨울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해를 마무리할 성탄제를 앞둔 즐거운 연말. 기말고사도 끝난 지 오래인데 재경은 책상에 앉아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위해 공책을 살폈다. 그는 학생들의 염원인 겨울방학을 고대하기는커녕 빙의 이래로 가장 신중했다.
고양이가 되었던 그가 찢었다고 하는 벽지에 흉터가 남았다. 벽지는 새것으로 갈아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텅 빈 반대편 책상은 누군가 있었던 흔적만 미세하게 남았다. 창밖에서 서늘한 기운이 들어오자 그가 연필을 놓고 몸을 움츠렸다.
지금 재경에게는 망한 기말고사 성적도, 피하지 못한 겨울방학 보충수업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있을 유네와 세라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 그걸 무사히 끝내야 류제는 2월 밸런타인데이 때 두 사람의 루트로 해피 엔딩을 노릴 수 있다는 것만이 핵심이었다.
그러니 이번 챕터는 아무래도 이전처럼 안일하게 ‘류제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몸을 사리는 건 사치였다. 1학기 중간 보스전만큼은 아니지만 유네에게 상당히 위험한 일이 미치기 때문이다.
개입을 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이벤트였던지라 선을 지키며 관찰하기로 노선을 변경한 재경은 이야기가 흐트러졌을 모든 가능성과 대안을 마련했다.
기말고사 공부 대신 공들여서 루트를 짜낸 그는 이 공책에 적힌 대로만 된다면 모든 일이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두근거리는 심장이 언제부터 불안함을 뜻했는지 모르겠다.
재경은 공책을 닫고 잠시 이마에 맞댔다. 할머니, 날 좀 도와줘.
“앗, 벌써 시간이.”
해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자 공책이 발갛게 빛났다.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한 재경의 목소리에 강요된 활기가 담겼다.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는 이전부터 물밑 작업에 들어갔었다.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는 유네의 것과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유네만 밀착하면 세라의 진행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12월 챕터의 이벤트 트리거는 히로인 유네가 친구들과 주인공을 위해서 성탄제 선물을 사러 혼자서 마을로 내려갔을 때 벌어진다.
왜 이 세계에 성탄제가 있냐면, 신부님도 있고 수녀님도 있고 교회도 있으니까 있어도 이상할 것 없겠지. 짬뽕 같은 세계관 따위 당장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현재 시각은 아침을 먹고 난 후 정오 전. 유네와 약속한 시간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재경은 웃옷을 걸치고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비어버린 한쪽 침대를 살피던 재경은 잠자코 문을 닫았다.
우연찮게도 마침 류제도 옆방 문을 열고 나왔다. 류제와 마주친 재경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친한 척하며 인사했다.
“알라마니 기술관 가는 거야?”
“그렇지. 너도 외출해?”
“어엉. 유네랑 뭐 살 게 있어서.”
“그렇구나. 그럼 이따가 저녁때 보자.”
“정문까지는 같이―”
재경이 뒤늦게 입술을 떨어뜨렸으나 류제는 그 제안을 무시하고 가버린 후였다.
그날 이후 류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만 방이 다시 갈라진 만큼의 넘어설 수 없는 거리를 분명하게 두고 있었다.
재경은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실망할 것 없다. 이번만 성공하면 된다. 류제가 저러는 것도 이번 호감도 이벤트만 무사히 끝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그는 시무룩해지는 마음을 다독였다.
엉망이 된 이 세계가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불안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그도 지독한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좋아.”
원래는 학교를 내려가는 동안 주인공은 히로인 유네와 대화를 나누다 중간에 헤어져야 하지만 재경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류제는 건강검진 때문에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간다. 그것만큼은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만전을 기해 학생용 슬렉터를 하나 더 꿍쳐두었던 재경은 이것을 유네의 옷 속에 몰래 숨겨줄 요량으로 무릎을 꿇었다. 중요한 물건을 보관할 때의 버릇처럼 그가 발목에 또 하나의 슬렉터를 차고 양말 안에 숨겼다.
움직이기 쉬운 운동화를 신고 통통 뛰어보며 몸을 풀던 재경은 좋았어, 라고 되뇌며 당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파란 머리통이 보이는 C동 기숙사의 정문을 확인한 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 챕터에서는 주인공인 류제와 이벤트 당사자인 유네와 세라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 중 새로운 등장인물의 일러스트가 해금된다. 수신제 둘째 날에 수상한 모양새로 유네에게 얼쩡거렸던 여인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현상 수배를 피하기 위해 살을 뒤룩뒤룩 찌울 만큼 악독한 그 여자는 저번 학기에 중간 보스였던 페스트의 왕과는 다른 느낌의 인간 악역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길거리 갱단의 두목이라고 해야 하나. 재경의 기억에 텍스트로도 울화통이 치밀 만큼 치졸하고 성질 더러운 아줌마로 남아있었다.
그 여자의 부하인 재경 또래 어빌리터의 일러스트도 추가된다. 제립학교가 아닌 갱단에 속한 어린 어빌리터는 세라와도 질긴 인연을 가진 기구한 운명의 소녀였다.
이들의 등장으로 착한 유네에게 새로운 파장이 하나 던져진다. 미들 스쿨 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을지언정 유명 상단 자제로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라온 유네는 마족이 두려워도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어빌리터로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들의 등장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챕터의 끝에 도달해야 알 것이다.
해피 엔딩이 달려있는 두 히로인의 호감도의 상승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아가타의 어두운 곳에 기생하는 범죄 조직이 오늘 성탄제 선물을 사러 홀로 마을에 내려온 유네를 납치한다. 류제가 납치된 유네를 추적하여 무사히 구출하면 유네가 감사를 표하며 호감도가 상승한다.
류제와 함께 온 세라는 악당의 오른팔이 되어버린 어빌리터 소녀를 설득한다. 이에 류제가 일조해서 소녀가 얌전히 치안대에게 붙잡혀 준다면 세라의 호감도가 상승한다. 물론 두 사람의 호감도를 동시에 올릴 수 있다. 재경은 되도록 이 두 히로인의 호감도를 모두 올리고 싶었다.
삼류 악당을 그만둔 그가 해내고 싶은 이상적인 역할은 유네가 납치되는 걸 확인한 후 류제와 합류해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류제와 세라가 유네를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전개는 일전 고양이 사건이 스토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가정하이다. 타고시아 해변의 악몽처럼 무의식에 남아버리는 이벤트가 되어버리면 유네의 심리를 분석해야 하는 재경의 입장으로서는 곤란했다.
―렌 군, 언제 나와?
“지금 가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
유네가 요즘 학교에서 유행하는 슬렉터 통신 기능으로 연락했다. 성탄제도 다가왔겠다, 자신도 통신 크랙을 한 재경은 유네가 이번 주 토요일에 마을로 내려가 혼자 쇼핑을 할 거라는 걸 알고 같이 가자 제안한 상태였다.
밖으로 나온 재경은 몸이 절로 수그러질 정도로 추운 공기에 살갗이 부르르 떨렸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하늘에는 구름까지 꼈다.
오늘 눈이 온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그야 그렇겠지 싶다. 이번 챕터의 백미는 미노타 국경의 눈 내리는 전경이니까.
A동에서 나와 C동 정문으로 걸어오는 재경을 목격한 유네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열심히 했는지 두꺼운 귀도리를 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유네의 볼이 새빨개져 있었다. 재경은 머쓱한 얼굴로 사과했다.
“늦어서 미안.”
“혹시라도 안 나오는 줄 알았어.”
“뭐야,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안 나올 리가 없잖아. 이 짜식이 사람을 못 믿네.”
“에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열심히 기다렸잖아.”
유네가 자기 볼을 보라며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마냥 행복하지 못한 재경은 유네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치고는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경은 용기를 내 유네에게 부탁했던 지난주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는 쌈 싸 먹은 데다 당장 눈앞의 유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가 중요했던 그는 유네의 마음도 모르고 자기도 살 게 있으니 동행하자 부탁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가 청하면 흔쾌히 수락하던 이전과 다르게 유네가 많이 머뭇거렸다.
비키가 신경 쓰이는 유네의 입장에서는 그의 데이트 신청이 난감했다. 그래도 렌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어깨를 붙잡으니 착한 그녀는 비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얼결에 성탄제를 앞둔 주말에 약속을 잡은 유네는 볼일만 마치고 가버리는 렌의 뒷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친구들은 렌이 사람 마음으로 장난치는 거라고 충고했다. 그렇게 말한들 유네는 어쩔 수 없었다. 친구들은 렌이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농락하는 거라 해도 유네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렌 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음흉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렌 군이 아니라 난걸.
“겁나 춥네. 으으, 목도리를 하고 나올 걸 그랬나.”
“돌아다니다 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전에 내 코끝이 얼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마을에 내려가면 따듯한 음료수 사줄게. 친구들이 좋은 가게를 추천해 줬어.”
“오, 땡큐 땡큐. 그러면 나야 고맙지.”
고요한 새소리를 들으며 내리막길을 걸어가던 유네는 평소처럼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다가 몰래 재경을 흘깃거렸다.
목도리 사이로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입을 달싹거렸다. 이 자리가 불편하면서도 좋은 건 그녀뿐일 것이다. 오랜만에 단둘이 하는 나들이인 것만큼은 기뻐서 유네가 헤헤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렌 군은 뭘 사려고 한 거야?”
“어엉? 뭐가?”
“나한테 살 게 있다고 했었잖아. 나랑 꼭 단둘이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며?”
“아, 그거? 그야…….”
말을 줄이는 재경의 귓불이 슬쩍 붉어졌다. 유네와 같이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그런 변명을 준비했던 그는 친구 생일을 포함해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산 적이 없었다. 성탄제에 맞춘 듯한 부탁은 유네의 입장에서 충분히 수상했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렌이야 워낙 이상한 행동을 자주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만 유네는 혹시라도 깜짝 선물이 있으면 어쩌나 기대했다.
오늘 호감도 이벤트에 개입하기 위해 은밀하게 밑밥을 깐 것에 대해서 뭐라 답할 것이 없었던 재경이 적당히 둘러댔다.
“나…나도 선물이나 살까 하고. 성탄절에는 다들 사는 것 같으니까 눈치도 보이고.”
“헤에, 그런 거였구나.”
“너는 이런 거 잘 알 것 같아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어. 너니까 부탁한 거지, 부끄러우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유네가 물어봤을 때를 대비했던 대사대로 변명한 재경이 몰래 안도했다.
거짓말 같아도 반은 진심이었다. 류제랑은 왠지 서먹해졌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사과하기도 애매하니 이럴 때 선물이라도 주면 괜찮으려나 싶었다.
겸사겸사 류제에게 선물을 사려고 일부러 돈까지 들고 내려온걸. 뚱한 재경이 무뚝뚝했던 류제를 곱씹었다. 같이 학교를 내려간다면 직접 물어보려고 했는데. 류제 자식, 날 이렇게 귀찮게 만들다니. 나중에 두고 보자.
“…….”
“…….”
속내가 다른 사람이 둘이나 끼었으니 대화에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생겼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익숙지 못한 재경은 쑥스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을 참지 못한 유네가 도둑이 제 발 저려 다른 대화거리를 숙고했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오른 그녀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맞다, 렌 군. 국어 주관식 답은 어떻게 됐어? 잘 처리된 거야?”
“엑, 그건 왜?”
“어떻게 됐는지 못 들은 거 같아서. 잘못하면 보충수업 들을지도 모른다며.”
“하아, 묻지 마. 결국 오답으로 처리되었으니까. 덕분에 하나 더 당첨이야. 망할 보충수업 같으니.”
“정말? 선생님한테 부탁해도 안 된대?”
“절대 안 된대. 날 봐주면 비슷한 오답인 학생들이 반발할 거라고 콧방귀도 안 뀌더라.”
글씨를 애매하게 쓰는 바람에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재경의 3점짜리 국어 주관식 문제도 결국 오답이 되었다. 그 때문에 국어 성적도 아슬아슬 보충수업에 걸려버렸다.
최근 들어 좋은 일이 하나도 없던 재경은 처참한 성적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래도 기간트리카 실기랑 호신술은 잘 봤어.”
“렌 군은 체육 계열은 잘하니까. 이번엔 류제 군이 뭐라고 안 해?”
“어… 뭐. 늘 똑같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는 굳이 류제와 다른 방을 쓴다는 말을 하지 않은 재경이 대충 얼버무렸다.
방도 다른 데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류제가 기말고사 공부를 봐주지 않아 이번 재경의 기말고사 성적은 사상 최악이었다.
자기가 기말고사까지 책임지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비키는 잘난 척만 잘하지 가르치는 건 개뿔 못하고, 결국 낙제 과목이 다섯 손가락이 되어버렸다.
분명 류제가 도와줬으면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류제 자식, 후반에 타락하는 클리셰로 범벅된 주인공 아니랄까 봐 비싸게도 군다니까.
투덜거리던 재경은 자신이 너무 바보라서 류제가 질려버린 건가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이제 그에게는 상의를 안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머리가 나쁜데 어쩌란 말인가. 공부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이 정도 따라가면 괜찮은 거지. 아아, 왜 난 하는 것마다 이 모양이람. 하나라도 확실하게 잘하는 게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류제가 날 믿고 따라주면 얼마나 좋아.
수박 겉을 열심히 핥아대는 두 사람은 학교 정문 경비병에게 호쾌하게 인사하고 학교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며칠 후에 있을 성탄제 준비로 탈바꿈한 마을 광장에 커다란 전나무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렌 군, 저것 좀 봐. 엄청 커다래.”
“와. 대박 크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언제 저런 걸 가져다 놓았대. 이 높이라면… 5층 건물 정도인가?”
“분명 넬사 고원에 있는 전나무 숲에서 베어온 걸 거야. 저렇게 크지는 않지만 우리 집 앞마당에도 성탄제마다 거기에서 나무를 가져오거든.”
“넬사 고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목장으로 유명해. 넬사 고원의 전나무는 크기도 두께도 훌륭하고 멋져. 밑에는 가족들이나 사용인분들한테 주는 선물을 놓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
생각만 해도 화목해 보이는 유네네 집안 풍경을 상세하게 떠올려보려던 재경은 빈약한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너희 집은 규모부터가 남달라. 도통 따라갈 수가 없네.”
“그…그런가? 규모보다는 선물을 주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렌 군은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나? 음. 나는… 아냐, 됐어.”
“왜?”
“그냥.”
재경은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성탄제는 재경의 세계의 크리스마스와 일맥상통하니 재경에게 크리스마스란 할머니가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비싼 물건을 사주는 날 정도였다.
철없는 재경도 염치가 있으니 가격대는 타협했지만 학교에서 유행하는 비싼 패딩이나 신발, 브랜드 재킷을 그도 실은 선물 받고 싶었다.
자기는 이런 날에도 할머니 눈치 보면서 수십만 원짜리 물건을 가지고 싶다 말도 못 하는데 또래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풍숨풍 사는 걸 보자니 배가 아팠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재경에게 그런 복잡한 물건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는 개뿔, 할머니도 크리스마스라고 일을 쉬지 않았다. 선물을 받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휴일이다.
생일과 다르게 이날은 사람이 붐비기 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할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 게임이나 하고 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유네에게서 고가의 선물을 받아버리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비교될 것 같아 무서웠다.
“가지고 싶은 물건이 없는 거야?”
“아니. 네가 딱히 내 것까지 살 필요 없잖아. 여자애들 선물 산다며. 그거나 골라.”
“레…렌 군도 내 친구니까 그렇지.”
“그럼 선물 다 고르면 마지막에 말해줄게.”
“정말? 응! 알았어.”
선물을 다 고를 때쯤엔 범죄 조직이 움직이고도 남았을 거다. 재경이 손을 펄쩍 들고 좋아하는 유네 몰래 씁쓸해했다.
유네는 돈이 없어서 비참했던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티 없이 맑았다. 좋겠다. 이런 날 마냥 행복할 수가 있어서. 뭐, 사정을 아니까 마냥 마음 편한 소리는 못하겠지만.
“친구들 선물은 이브에 줘도 되려나. 렌 군은 성탄제에 본가로 돌아가?”
“어… 뭐. 안 가. 일일이 돌아가기 귀찮잖아.”
재경이 이런 날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물론 유네는 알 리 없었다. 렌과 함께 있는 게 좋았던 유네는 분홍색 립글로스를 발라 반들거리는 입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래도 성탄제인데 부모님이 오라고 안 하셔?”
“속세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집안이거든.”
“신기하다. 그런 집안 처음 봤어.”
“넌 돌아가게?”
“으응. 헤헤, 우리 아빠 성격 알잖아. 안 돌아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어.”
유네네 아빠라면 귀가가 허용이 되는 휴일에 무조건 유네를 집으로 불러들일 것 같기는 하다.
잠시 콧수염이 매력적인 그를 상상해 보던 재경은 이럴 때 류제와 자신을 집으로 초대해 성탄제 파티를 하고 싶다고 떼를 쓸 유네가 잠잠하니 어딘가 껄끄러웠다.
뭐, 지금은 여자라고 밝혀졌으니 이전처럼 남정네 둘을 집에 초대하는 건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못하겠지.
“이거 예쁘다. 남자 거네? 류제 군은 이런 장신구 안 좋아하나? 렌 군은 어때?”
“정말? 어디… 켁.”
류제가 좋아한다는 소리에 상품의 가격을 확인한 재경은 목에 가래라도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그것 말고도 상점 가판대에는 다양한 기념 선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캐럴과 별, 조그마한 트리와 성탄제를 축하하는 장식물들이 발랄하게 거리를 꾸몄다. 이 동네는 참 축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다만 가격대는 가차가 없었다.
“더럽게 비싸네.”
재경은 할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의 가격대를 타협하려던 이유를 실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가격에 어디 싸면서 괜찮고 쓸모 있는 물건이 있을까 꼼꼼하게 살피던 그는 선물은 마음이라고 했던 유네의 말이 한사코 어려웠다.
선물을 고르면서도 어떤 것을 줘야 마음에 들어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정해진 호감도 물품을 사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인데.
“있지, 유네. 저… 네가 보기엔 류…류제가 어떤 걸 좋아할 거 같냐? 역시 아까 그런 걸 좋아하려나?”
이 가게, 저 가게를 둘러보다 못한 재경이 유네를 불러 정보를 구걸했다. 상단 집안의 자제라서 선물 고르기에 일가견 있던 유네는 반짝반짝 금가루가 떨어지는 스노볼을 구경하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끔벅거렸다.
어쩐지 속내가 들통나 쑥스러워진 재경이 괜히 돌멩이를 차며 둘러댔다.
“류제 짜식, 요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선물이라도 해주면 괜찮을까 싶었어.”
“아하하. 류제 군의 선물을 사려고 했던 거야? 렌 군은 류제 군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치…친구잖아. 대단한 건 못 주지만 필요하면 네 것도 사줄게. 내 선물도 받는 기념으로. 대신 싼 걸로 골라줘.”
재경이 남은 이번 달 용돈을 떠올리며 꿍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기쁨에 유네가 입을 달싹거렸다. 내 선물이라니. 그러면 괜한 기대를 해버리게 된다.
어쩌지. 왜 난 아직도 렌 군에게 두근거리는 거람. 렌 군이랑 오랜만에 쇼핑을 나와서 긴장되는데 둥실 뜨면 곤란하다. 들뜬 마음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갈 것 같았다.
렌에 대한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유네는 비키에게 미안해져서 땅만 쳐다보았다. 곧 그녀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비키 양 것도 같이 줘.”
“엑… 비키 것까지? 내가 왜?”
“비키 양이 렌 군 기말고사 공부 도와줬잖아. 감사 인사는 해야지.”
“으… 그야 그렇지만 결국 성적이… 알았어. 하아.”
“분명 비키 양도 좋아할 거야.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상적인 결론에 유네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들의 아이 쇼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네가 여기 있다는 걸 광고하듯 마을을 헤집으며 선물을 고르던 재경은 동시에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나 확인했다.
유네가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는 동안 쭈그려 앉아 신발 끈을 묶는 시늉을 하던 재경이 발목에 있는 슬렉터가 필요할 때를 간보았다.
그가 미적거리자 유네가 새로운 가게를 찾았다고 손을 흔들어 재경을 보챘다.
멀리서 보면 사이좋은 커플 같은 그들을 누군가가 망원경으로 낱낱이 훔쳐보고 있었다.
“목표 포착했어, 아줌마. 머리가 새파란 게 눈에 잘 띄네.”
루시에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지붕을 타다가 기와를 깨뜨렸다. 실수를 깨닫고 발소리를 죽인 그녀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개조된 슬렉터로 발 쪽 부스터만 부분 장갑했다.
유네의 파란 머리에 주목하며 뒤를 쫓던 그녀는 뛰어넘기 어려운 곳을 부스터로 단숨에 건넜다. 그녀의 귀에 장착된 수신기에서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일 처리 시작해. 애도 아니고 뭘 일일이 보고하고 있어.
“쉽게도 말한다. 여기 치안은 왕도 다음으로 좋은 곳이거든?”
―그래서 슬렉터도 빌려줬잖아. 그거 보안 뚫고 개조하는 게 얼마가 드는지 알아? 혹시라도 망가뜨렸다간 죽여버릴 테다.
귀에 달린 수신기는 제립학교 경비병이나 치안대원이 쓰는 무선 통신 장치를 개조한 물건이었다. 슬렉터에 이어서 통신 장치까지. 그녀가 소유한 모든 오버 테크놀로지 물품들은 키아나트리체 어디선가에서 빼돌리거나 훔쳐 온 것들이었다.
“닥쳐. 쓰지도 못하는 게. 오늘부로 새 걸로 교환할 거니까 다시 보안 뚫을 준비나 해둬.”
그녀가 보스에게 겁도 없이 으르렁거렸다.
흉터투성이 얼굴을 후드로 가린 그녀를 선두로 팀을 이룬 ‘세니타리 롯’이 지시에 따라 이동했다. 그들 중에 어빌리티를 가져서 슬렉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인 듯했다.
유네를 쫓아가며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목표물의 위치를 알려주던 그녀는 아까부터 유네 나르타 주변을 알짱거리며 방해하는 남자가 거슬려서 가볍게 혀를 찼다. 좋게 보려고 해도 그 나르타 가문의 지인이라고 볼 수 없는 형편없는 차림이었다.
거대 상단을 운영하는 나르타 가문은 성탄제 날 가문의 문지방을 건넌 모든 지인들에게 선물을 주기로 유명했다. 그것은 여식인 유네 나르타도 마찬가지였다.
성탄절을 기념해 친구들의 선물을 구매하러 주말에 마을에 나타날 것이라 예측했던 그들은 쾌재를 부르고 유네를 납치할 계획이었다.
이전에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지만 치안대 때문에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오늘이 시간에 맞출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예상 밖의 방해꾼은 강경하게 처리할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면 수주에게 곧바로 연락을 넣을 것이고 취미가 더러운 수주와는 미노타 국경에서 만나 물건을 넘긴 후 잠적하고 알레흐카이잔 망명 준비를 할 것이다.
키아나트리체는 곧 쑥대밭이 될 테니까 미리 피신을 해야지. 멍청한 놈들이나 전쟁이니 뭐니에 휘말려 사서 고생하는 거다. 머리가 좋아야지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줌마, 아직 거기 있어? 귀찮게 이상한 놈이 하나 붙어있네. 어쩌지.”
―누군데. 어빌리터야?
“어… 사복을 입어서 모르겠어. 일단 남자야.”
그자 때문에 몇 번이고 엿보였던 기회가 방해받자 짜증 나다 못한 루시에가 보스에게 보고했다.
생각에 빠졌던 수신기 너머의 상대방이 이내 삐딱한 말투로 답했다.
―아아, 혹시 덜떨어진 인상에 주근깨 있는 황토색 머리?
“와, 어떻게 알았대. 언제부터 어빌리티가 있었어?”
―내가 제립학교 1학년들은 다 외우고 다니잖니. 봤을 땐 타깃의 남자 친구인가 뭔가였던 거 같은데. 그놈도 분명 8반이야.
필요하다면 특색과 생김새와 이름까지 분류해서 외워놓는 보스의 습성에 질린 루시에의 입가가 비죽거렸다. 남자 어빌리터란 건가. 남자 어빌리터를 처음 본 그녀가 망원경을 놓고 재킷 주머니에서 수첩을 찾았다.
멍청한 놈들이 태반인 제립학교 1학년들은 그들의 돈줄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루시에도 보스를 따라 3월부터 수첩에 정보를 기록한 전적이 있었다.
“8반이면 그 ‘류제 신리’와 같은 반 아닌가.”
낡아빠진 수첩을 넘기던 그녀는 8반 맨 첫 번째 장에 있는 담임 세라 밀로니의 사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
웨이브가 진 긴 회색 머리에 눈 밑의 점이 기억에 남는다. 루시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세라의 실체를 간간이 상상해 보았다.
“문제아들투성이네. 안 그래? 세라 언니.”
감상적인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그녀가 수첩을 뒤로 넘겼다.
그녀는 곧 8반에 단둘밖에 없는 남학생 중 한 사람을 찾았다. 누군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보 같은 면상이 유네 나르타의 곁을 맴도는 이와 닮아있었다. 빙고. 이런 게 나르타 가문의 여식의 남자 친구라고?
“진짜네. 렌 지미. 어빌리티 불명. 척도는… 우악, 이런 것도 어빌리터야? 나라면 쪽팔려서 자퇴하겠다. 비어빌리터와 다름없는 능력치잖아.”
―내가 말했잖아. 멍청이라고. 게다가 고아라 집안도 형편없어.
“흐음, 용케 저딴 거랑 사귀네. 명색이 어빌리터인데 기간트리카는 장갑할 수 있겠지. 귀찮게 얼쩡거리는데 어떻게 해?”
―내가 말했지. 일일이 물어보지 말라고. 네 알아서 해. 하아, 쓸모없는 것도 능력이라니까.
“시꺼. 진짜로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수신기를 끈 그녀가 부하들에게 눈짓하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일을 두 번 하기는 귀찮으니까 타깃인 유네 나르타만 붙잡아야지. 그녀가 부지런히 눈동자를 움직이며 다른 쪽 수신기를 켰다.
“북쪽에 치안대원 확인했다.”
―타깃이 지정한 골목으로 이동합니다.
“짐마차 불러서 사각지대를 만들어. 작전 시작한다.”
치안대원들이 미처 둘러보지 못하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루시에가 무뚝뚝하게 내려다보았다. 자주 다니는 마을이라고 이런 깊은 구석까지 잘도 쏘다니는구나. 처음 보는 사람도 쉽게 믿어버리지. 곱게 자란 계집 아니랄까 봐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네.
그래서 일이 쉬워지는 거지만 상류층에 대한 반감은 참을 수 없었다.
목표물이 향하는 골목은 마족으로 가족을 잃은 독거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라 문을 닫은 꽃집이나 근근이 먹고 사는 수제 장신구 가게를 제외하면 빈집투성이였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지 오래여서 좁고 길목이 더러웠지만 이곳은 루시에가 살아왔던 아가타의 깊은 슬럼가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살 만했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이런 곳도 천국 같겠지.
하지만 이 마을은 신분이 증명되고 높은 교육 수준과 일정 소득이 없다면 거주할 수 없을 정도로 치안에 민감했다. 아가타 강북만큼은 아니지만 제립학교가 근처에 있는 특성상 잘사는 동네라는 말이다. 그러니 저들도 이런 골목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들어가는 거 아니겠어?
“으으, 이 골목 너무 어둡지 않아? 사람도 별로 없네. 아까 그 사람이 추천해 준 가게가 이곳인가? 후미져서 무서워.”
“뭐, 숨겨진 맛집 같은 데 아니겠냐.”
이 골목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게가 희귀하고 저렴한 액세서리를 취급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어째 골목이 휑하니 을씨년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악당 끄나풀이 유네에게 바람을 넣은 거 같지만 재경은 묵묵히 유네를 따라 걸었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시나요?”
“문은 열려있네. 불도 켜져 있고.”
“들어가도 되겠지? 영업 중이라고 되어있으니까.”
유네가 오래된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에 들어갔다. 사람을 속이려면 9할의 진실에 나머지 거짓말을 섞으면 된다고, 이 가게에 구하기 힘든 액세서리가 있다는 프락치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주인이 있나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네는 마침 가판대에서 원하던 물건을 찾았다.
“있다! 이런 가게에 있을 줄이야. 렌 군, 내가 말한 게 이거야. 이 캐릭터 류제 군이랑 닮지 않았어?”
그녀가 열쇠고리를 하나 들어 보며 말했다. 류제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던 재경에게 유네가 추천해 준 상품이었다.
추워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온 재경이 어디 보자며 광장 비둘기처럼 고개를 디밀었다.
최근 크리스마스를 저격해서 나온 꾸물꾸물 시리즈 중 베어, 고양이에 이어 새로운 흑표범 캐릭터가 류제의 게으른 인상과 몹시 닮아있었다.
“정말이네. 진짜 똑같이 생겼어. 특히 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 인상적이야.”
“그렇지? 헤헤. 한정판이지만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어때?”
“나쁘지 않은데. 그럼 이걸로 살까? 보면 분명히 좋아… 우왁! 할아버지,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으응? 뭐라고? 너희들은 누구냐?”
거죽밖에 안 남은 폭삭 늙은 노인이 구석에 앉아 지팡이를 떨었다. 귀가 먹은 호호 할아버지면서 이가 다 빠져 부정확한 발음으로 지르는 호통 소리가 우렁찼다.
아무래도 그가 이 가게의 주인인 듯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익숙한 얼굴에 안도한 재경이 할아버지에게 외쳤다.
“저희가 뭐 좀 사려고 하는데요.”
“으응? 사기는 뭘 사!”
“여기 액세서리 가게 아니에요?”
“으응? 악다구니로 가래를 뱉는다고?”
“액! 세! 서! 리! 가! 게! 말이에요!”
귀먹은 노인이 잘 들을 수 있게끔 한 글자씩 강조해서 외친 재경이 식식거리며 숨을 골랐다.
잠시 뇌가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노인은 잇몸밖에 남지 않는 입 안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그래, 그렇지. 뭐가 가지고 싶으냐, 우리 귀여운 손주야.”
“할아버지 손주 아니거든요? 왜 생판 남을 혈연으로 만들어요? 됐고, 저 이거 사도 돼요?”
“그래, 그래.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져가거라.”
홀홀홀 웃으며 재경을 진짜 손주 보듯이 웃는 그를 보자니 세상 안타까운 병에 걸린 듯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마주 보던 그들은 액세서리에 달려있는 가격표대로 돈을 주면 될 거라고 적당히 타협했다.
가게를 더 둘러본 결과 그 캐릭터 열쇠고리가 재경의 재정에 가장 알맞은 상품이었다. 류제를 닮은 데다가 자신의 가방에 달린 꾸물꾸물 고양이와 같은 계열의 캐릭터이니 연관성도 있고 보답으로도 무난해서 나쁘지 않았다.
첫 선물이니 류제가 멋쩍어하며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던 재경이 히죽거리다가 아직도 빈손인 유네를 흘겼다.
“너는 안 사?”
“으음, 나는 류제 군 도서부 들어간 후로 책을 많이 읽으니까 선물로 책갈피를 사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안 보이네.”
“책갈피는 여기도 있어. 이런 건 어때?”
가판대에 돈을 내려놓은 재경이 일부러 그녀를 바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유도했다. 밖에서 은근슬쩍 보이는 수상한 인물들을 의식해서였다.
유네의 납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세세하게 기억하기엔 시간이 오래되었고 초반에 공책에 정리했던 글에는 그냥 납치된다고만 쓰여있어 재경도 일부러 바람잡이들이 나오는 대로 순순히 낚여준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스토리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눈에 익은 공간이 등장해서 재경은 기뻤다. 저 할아버지도 스토리와 똑같이 눈도 귀도 먼 데다 치매까지 있는 것 같고,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슬슬 악당들의 유네 납치 공작이 실현될 때가 되었다.
“이런 건 괜찮으려… 꺅!”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해.”
뒤에서 조용히 접근한 누군가가 팔을 붙잡자 유네가 뒷걸음질 쳤다. 재경 같은 하찮은 길거리 양아치가 아닌 이 세계의 진짜 갱단 단원들인 그들은 재경이 보기에도 발이 주춤거릴 정도로 인상이 험악했다.
슬그머니 허리를 숙여 양말 속에 있는 슬렉터 알맹이만 집어넣어 주려던 재경에게도 나이프가 들이밀어졌다.
“너도 가만히 있어.”
“윽.”
타이밍을 놓쳤다. 재경의 목에 가누어진 흉기는 허튼짓을 했다간 금방이라도 치명상을 남길 것처럼 날카롭게 살갗을 터뜨렸다.
“레…렌 군! 할아버지……! 할아버지, 좀 도와주세요!”
“얌전히만 있으면 넌 무사할 거다.”
재경에게 그렇게 말한 그들은 버둥거리는 유네를 구속했다.
유네의 부탁에도 할아버지는 또 ‘으응?’을 반복하며 물건을 보려면 줄을 서서 기다리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았다. 미연시에서나 여기에서나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재경은 유네를 저대로 납치되게 내버려 둬야 하지만 겁에 질린 유네의 얼굴을 보자니, 거기에 싸움에서 지기 싫은 그의 성격상 당하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렸다.
유네에게 위치 추적용 슬렉터를 넣어줘야 하니 일단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며 재경은 금세 눈빛을 바꾸었다.
“윽, 이 자식이!”
면상은 하찮은 삼류 악당인 주제에 괜히 이번 학기에 호신술을 열심히 배운 게 아니었다. 재경은 나이프를 든 괴한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손을 쳐내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그대로 명치를 후려쳐 괴한을 밀쳐낸 재경은 유네에게 달려갔다.
“유네!”
“렌 군!”
유네의 손목을 낚아챈 재경은 가게 밖으로 나갔다. 대로로 나가는 길목은 커다란 짐마차가 막고 있음을 발견한 두 사람은 반대편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따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달리기가 빠른 재경의 속도에 맞추기 힘든 유네는 헉헉거리면서 질질 끌려갔다.
“저 사람들 뭐야? 왜 갑자기 우리를 공격한 거지?”
“몰라! 일단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 유네, 너 류제 고유 번호 외우고 있지?”
“아… 으…응!”
“젠장, 어디 숨을 곳 없나?”
유네한테 슬렉터를 몰래 넣어줄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까지만 함께 도망가고 이후에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거야. 그러면 유네는 납치되고 나는 빠져나가고. 괜찮겠지?
“꺄악!”
유네를 납치하려는 악역들은 재경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쩐지 도망가는 방향을 모두 파악한 듯한 그들은 재경의 날렵한 움직임에 속을 만큼 바보 같은 악당이 아니었다.
결국 시간을 벌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재경과 유네가 지친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대여섯 명의 악역 엑스트라들과 조우했다.
“헉…허억… 후우… 젠장,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레…렌 군… 내가 ‘바람’으로 어떻게든 해볼게. 그 틈에 벗어나자.”
“괜찮겠어?”
“어쩔 수 없잖아. 해…해야만 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상대가 비어빌리터라도 유네는 어빌리티를 써야 했다. 공격을 최소화하고 방어만 한다면 학교에서도 퇴학 대신 정상참작을 해줄 것이다.
그동안 제립학교에서 어빌리티를 갈고 닦아온 유네는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게끔 날 선 바람으로 둘러쌌다.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 다가오지 마세요. 안 그러면 다…다치게 할 거예요!”
“흥, 꾀 많은 쥐새끼들이 앙큼한 짓을 하는군.”
타깃이 방심한 사이 가게 안에서 단번에 일을 처리하려고 했던지라 괴한들에게도 이런 추격전은 일정에 없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갱단 무리가 두 사람을 구석에 몰아넣고 칼을 돌렸다. 위협적인 날붙이가 번뜩거렸다. 무기… 우리한테도 무기가 될 만한 게…….
“렌 군, 기…기간트리카! 기간트리카로 도망가자!”
“안 돼. 여기 너무 좁아서 부스터 때문에 다칠 거야.”
“부…부분 장갑이라도…….”
“난 그런 거 배운 적 없다고!”
재경이 달려드는 악당 한 명을 간신히 때려눕혔다.
아, 안 되는데. 여기서 너무 날뛰어 버리면 스토리가 어떻게 달라질지 까마득해졌다. 그러나 오랜만에 벌어지는 싸움으로 흥분한 그의 몸은 재경의 머리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제기랄. 어떻게든 되라지!
“기간트리카 장… 윽!”
“장난해? 애송이 둘 상대로 뭐 하고 있는 거야?”
높은 지붕 위에서 계획을 지시하고 있던 루시에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림자를 이용해 재경을 기절시켰다.
새까맣게 점멸하는 시야에 재경은 아뿔싸 후회했다. 아직 유네한테 추적용 슬렉터를 넣어주지 않았는데…….
“렌 군!”
“시끄러워. 귀청 떨어지겠네.”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이리가 재경의 몸을 물고 흔들었다. 유네가 재경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다른 그림자 이리가 가로막고 유네를 겁박했다.
바람을 쉽게 뚫고 들어오는 형체 없는 검은 이리가 일렁거리며 이를 보였다. 이런 특이능력은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간트리카로 보이는 부스터의 일부분을 장갑하고 여유롭게 착지하는 그녀는 절대 일반인으로 생각될 수 없었다.
“어…어빌…리터?”
상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유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학교에서 날 구하러 온 건가? 하지만 저런 낡은 기간트리카는 처음 본다. 더군다나 저 사람 분명히 렌 군을 공격했어. 저 상처투성이 얼굴은 학교에서 본 적이 없다.
“아, 젠장. 귀찮게 구네.”
짜증이 솟은 그녀는 혀를 차며 껄렁껄렁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제발 같은 편이었으면 좋겠다는 유네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녀는 유네를 압박해 오는 무뢰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묶어.”
“이놈은 어떻게 할까요?”
“레…렌 군한테는 손대지 마!”
그녀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짐작한 유네가 외쳤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유네를 둘러쌌다. 유약한 몸부림을 비웃은 루시에가 유네를 무지렁이 보는 양 힐끗거렸다.
“싫은데?”
그녀가 그림자로 재경을 위협했다. 유네가 겁에 질리자 인위적인 바람의 세기가 줄었다. 루시에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흐음, 일방적으로 치근덕거리는 줄 알았더니 이 남자 어빌리터랑 친한가 보군. 진짜 남자 친구인 거야? 어처구니가 없네.
고민하던 그녀는 유네를 괴롭히고 싶기도 하고, 인질이 있어야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테니 이 남자 어빌리터도 납치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저딴 쓸모없는 놈도 잘 쓰면 귀중한 돈줄이니까. 일을 두 배나 하게 된 내 용돈으로 대신 꿍쳐놓을까?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이다.
“반항하면 재미없을 거야.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으…….”
공격력이 약한 유네의 ‘바람’ 어빌리티로는 저 흉악한 ‘그림자’를 이길 수 없었다. 섣부른 짓을 했다간 렌에게 해코지하겠다는 협박에 머리가 새하얘진 유네가 몸을 움츠렸다. 학교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데리고 가.”
그들이 기절한 재경을 둘러메고 얌전해진 유네를 이끌었다.
유네는 두려웠다. 날 공격하라 지시한 인물이 어빌리터라고? 그것도 자신과 차원이 다른 공격적인 어빌리티라니. 이 모든 상황이 무서워서 머리가 굳었다. 어쩌지. 렌 군도 잡혀버려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데.
“왜…왜 우리를… 도…도대체 어째서…….”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저 예쁜 무지개색 돔한테도 작별 인사해야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일 없을 테니까.”
“으…으으.”
그래도 지금껏 배운 게 있으니 유네는 얌전한 척 뒷짐을 지고 손목의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렌 군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했다. 그녀는 더듬더듬 외우고 있는 학생 고유 번호 중 류제의 것을 떠올렸다.
낌새를 눈치챈 그녀가 웃으면서 유네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르타 가문 아가씨. 미안하지만 이건 압수할게.”
“이거 놔! 꺄악!”
마지막 희망이었던 슬렉터가 벗겨지고 말았다. 최후의 반항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다. 이내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아아~ 생각보다 길어졌잖아. 빨리 가서 밥이나 먹을래. 배고파 죽겠네.”
골목 밖에 정지된 짐수레의 철창에 수주가 부탁한 물건을 던져 넣은 루시에는 기지개를 켜며 세상 태평하게 말을 탔다. 손에는 압수한 두 개의 슬렉터가 들려있었다.
“가자!”
어빌리티를 가진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범죄에 써먹는 아가타의 카르텔 ‘세니타리 롯’.
그들은 의뢰한 고객에게 키아나트리체의 어빌리터를 납치해 팔아먹거나 루시에처럼 사회에 반항적인 아이를 잘 꼬드겨 세력을 불리는 이 나라의 암 덩어리들이었다.
수신제 때 학교에 잠입해서 셀로니아 귀족 가문의 여식 등 다른 유명 가문의 자제들을 확인하고 목표물로 고려했지만 공격적인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어빌리터들은 저 잘난 맛에 살아 다루기 어려웠기에 타깃은 유네로 좁혀졌다.
약한 어빌리터 중에서도 유명한 상단의 자제를 고른 이유는 효율 때문이다. 사로잡기 쉬운 데다 신분에 비해 납치에 따른 사회적인 파장이 컸다. 이번 미노타의 고객은 그런 어빌리터를 원했다.
미노타가 키아나트리체의 보물과도 같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소속 어빌리터를 납치 공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무슨 파장이 일어날까 즐겁다.
그들은 어차피 이 일을 마치고 키아나트리체를 뜰 생각이었다. 고객이 미노타와 키아나트리체의 사이를 흔들어놓으려는 목적이 있든 말든 돈을 준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이 계집은 그 나르타 상단의 자제다. 자기 자식을 끔찍이 아낀다는 나르타 상단의 주인을 희망 고문 한다면 돈이 절로 굴러 들어왔다. 물론 그래도 돌려주지 않을 거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돈 많은 아가씨. 세상의 더러움이나 실컷 맛보라고.
그녀가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슬렉터를 강제 종료시켰다. 이 슬렉터도 다른 방식으로 분해되고 강제 해금되어 루시에의 것이 될 것이다.
군용은 절대 유출되지 않고 지금 사용하는 학생용 슬렉터는 4년 전에 배포된 구식이니 현재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루시에는 온몸이 참을 수 없이 근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