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5) (48/112)

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5)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온 재경은 머리가 복잡했다. 도대체가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가 어떻게 벌어진 건지 알 재간이 없었다.

유네 루트로 갈 테니 왕녀 이벤트의 성공 여부는 관심 없지만 단 하나, 스토리가 틀어지는 방향은 알아야 했다.

진엔딩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해피 엔딩이면 돼. 평범하게 끝낼 수만 있으면 괜찮아. 그러니 류제가 도서부 활동 중 미나와 대화하며 발생하는 미나의 네 번째 호감도 이벤트도 내버려 둘 것이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의 욕심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었으니까.

“하아.”

왕녀 루트는 타고시아 해변에서의 악몽 구원 이벤트의 성공 여부도 모르고, 지금 것도 실패로 친다면 가망이 없다. 비키 것도 확률상 보류.

해피 엔딩의 기로에 엑스 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갈라져 있는 해피 엔딩을 하나씩 포기당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괜찮다. 다음 달에 있는 세라와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 중 하나만 성공해도 해피 엔딩이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 되어야만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경은 복도를 위태롭게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다잡는 재경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둡고 번개 치는 하늘은 무섭다. 빨리 하교하고 싶었던 재경은 동아리에 갔던 류제가 벌써 돌아오자 조금 의외였다.

“류제? 여기서 뭐 해? 기숙사로 돌아가게?”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류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걸어오는 태도에 그의 목적이 보였다.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이상하다. 재경이 그것을 눈치챈 것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왜…왜 그래? 갑자기 사람 변한 것처럼.”

분명 입학 초에는 엇비슷한 신장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차이가 벌어졌다. 그의 시간은 멈춰있는데 류제는 훌쩍 커버려서 그를 뛰어넘고도 남았다.

재경은 류제가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류… 으윽!”

혼란스러운 감정을 괜찮다며 어루만지는 듯했던 손이 재경을 붙잡고 억눌렀다. 류제가 붉은 동공을 빛내며 그를 제압했다.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는 언젠가 어둠 속에서 빛났던 잔혹한 그것과도 같았다.

“무…무슨… 느닷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왜 항상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일부러 그러는 거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류제가 그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던 적이 있었나? 모르는 척이라니? 설마 내가 류제의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들킨 건가?

“지…진정해. 잠깐 이거 놓고 말해. 너, 누…눈이… 누가 보면―”

“내 눈이 왜? 무서워? 두려워? 도망가고 싶어? 아니, 넌 관심 없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류제가 그의 감정을 지나치게 강요했다. 그 감정이 너무 어둡고 무거웠다. 견디지 못한 재경이 그를 밀쳤다. 흉흉한 마음이 재경을 지배했다.

물러서지 않은 류제는 재경의 팔을 휘어잡고 넘어뜨렸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나쁜 거라고. 네가 날 비참하게 해.”

“왜 그래? 내…내가 뭘 어쨌는데.”

“어차피 너는 또 모르는 척하겠지. 없던 걸로 만들고, 무시하고, 생각하지 않고.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네 비밀을 지키기에만 급급해서.”

비수를 찌르는 말에 재경은 할 말을 잃었다. 류제가 이상해졌다. 동공도 붉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꿈의 연속인가. 안중에도 없어?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만해!”

도망치고 싶었던 재경이 버둥거렸다. 떠올랐다. 류제가 지금처럼 이성을 잃고 그를 몰아붙였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병마의 군주와 싸우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때와 달라야만 했다. 어느 부분에서 또다시 류제가 상처받은 걸까.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상처받았다면 그건 다 재경이 이야기를 흩트려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재경의 멱살을 휘어잡은 류제는 재경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멋대로 떠벌렸다.

“너는 항상 그래. 내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넌 내 마음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지?”

“이거 놓으라고 했지?”

재경은 유령의 집에서 그런 것처럼 류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편 좋게 넘어가지 않았다. 류제의 붉은 동공에 빗나간 주먹질과 당황한 재경의 얼굴이 비쳤다.

자신을 쓰러뜨린 류제를 노려본 재경이 미간을 구겼다. 안 그래도 다른 일로 머리가 아픈데 류제까지 이러면 곤란했다. 동공이 마족처럼 붉어지는 일이 너무 빈번하지 않은가.

“너 지금 누구한테 휘둘리고 있는 거야.”

“…….”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해. 그리고 이거 놔. 화내기 전에.”

재경이 이를 악물었다. 제발 류제만큼은 선택지대로만 행동했으면 좋겠다.

“하…하하.”

류제가 짧게 웃었다. 그때 그 말이 맞았다. 그가 인간인 채로는 절대로 눈앞에 있는 존재를 그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길고도 까마득한 단어에 겁에 질린 류제가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향할 곳은 어디인가. 짓누를 듯한 마기가 재경을 위협했다.

“그만둬!”

“류제 학생!”

잔업을 하던 중 심상찮은 날것의 마기가 ‘탐색’되어 뛰쳐나온 세라가 류제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사냥을 개시하려던 행동이 멈칫했다. 이성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류제가 정신을 차렸다. 달콤한 목소리에 홀렸던 그는 세라의 당혹스러운 얼굴에 탄성을 내지르며 절규했다.

“어… 난…….”

붉은 동공이 가라앉고 인간의 새까만 동공이 자리 잡았다. 단번에 재경을 물어버리려고 했던 류제의 송곳니가 줄어들었다.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고립된 그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던 그는 세상이 깨어나자 자신이 하려던 행위를 깨달았다.

아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그의 순수한 의지였다. 마기를 피워낸 것도, 렌을 물려고 한 것도 전부 그의 바람이었다. 깨어났다고? 아니지. 실패한 것일 뿐이다.

나는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다.

“젠장, 류제 너 정신 좀 똑바로 차려. 뭐 하는 거야?”

렌의 언제나 다름이 없는 태도는 마왕의 혼을 품고 있는 류제에게 있어서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 싫어졌더라? 언제부터 지독하다고 여겨졌더라? 그것이 그를 향한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언제부터였지?

“류제 학생, 저와의 약속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라 선생님. 저는…….”

“지금 몸 상태는 괜찮으신 거죠?”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던 그녀의 믿음을 손쉽게 배반하려 했더니. 류제는 육욕이 사그라들었다.

그는 이런 나약한 자신이 정말 싫었다. 렌을 가지고 싶다고 그렇게나 싫었던 마족의 힘을 사용하려 하다니. 머릿속이 복잡해서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그 이후로 이런 징후가 보이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최근에 또 이런 적이 있었나요?”

“없어요. 아마도. 없었어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저와 같이 가주시죠. 렌 학생, 미안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 없고요?”

“네, 뭐… 근데 류제 너―”

재경을 무시한 류제는 세라를 말없이 따랐다. 바닥에 주저앉은 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라를 따라가는 류제의 뒷모습을 붙잡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뭔가를 해줬어야 했나? 아니면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도록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이었나?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선 재경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류제가 기숙사에서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재경은 류제의 태도만큼 기묘한 시선들의 연장선이 더 거슬렸다. 처음에는 단지 여장 메이드를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적개심이라고 해야 하나, 중학생 때 자신을 보던 사람의 눈빛이 생각나는 시선이 섞였다.

“…뭐야.”

적개심이야 익숙하지만 오랜만이라 생소하다. 재경은 뭐, 고양이가 되었을 때 사고라도 친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텅 빈 복도를 걸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계기만 있으면 된다. 보기 좋게 승세를 과시한 미나가 행복하게 웃었다.

* * *

“충성.”

“그럼 수고하시게, 아로즈네그 소위.”

키아나트리체의 왕궁. 의회 시작 전 귀족들에게 보고를 마친 늑대 귀 군인이 경례했다.

루비니도 보고한 내용이 그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공적인 일이고,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의무를 마친 그녀는 말없이 방을 나섰다.

왕궁은 일하는 사용인들조차 이상한 곳이다. 타인 수인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데. 비어빌리터들은 어빌리티를 이해 못 하니 시시하다.

그녀는 세라 밀로니의 동기 네네 슈만에게 보낸 고양이 세라 사진에 대한 네네 슈만의 답장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파견을 보냈더니 이딴 ‘한심한 짓’이나 하고 다니냐며 폄하했었지. 기껏 부루마블에서 딴 하트 모양 로켓에 넣을 사진을 구해왔더니 중위님도 너무하시지.

“짐승 주제에 사람 흉내를 내기는.”

문이 닫히자 누군가가 늑대 귀 군인이 건네준 보고서를 화로에 집어넣었다.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그녀의 보고를 제대로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건이 끝나서 아쉽군요.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후, 그렇게 된다면 키아나트리체 역사에 길이 남을 왕녀파의 엽기적인 추락이 아닙니까. 하지만 고고하신 왕녀께서는 계획한 대로 추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담아서요.”

백작 부인이 상냥하게 웃었다.

니냐롯트 왕녀는 감히 그들은 가질 수 없는 과분한 자리에 앉아있다. 어빌리티를 품은 차기 왕위 계승자는 반드시 끌어내릴 것이다. 어빌리터는 그들의 손에 굴려지는 장기말이면 충분했다.

“셀로니아가의 여식도 얽혔다는데 직접 보지 못해 아쉽겠습니다, 멜가로스크 자작.”

이에 독수리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남성이 샴페인을 마시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서 조롱해 주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

“불쌍한 셀로니아 후작가는 핏줄 하나만 살아남아 십 년 가까이 의회에 입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원하는 대로 되어서 다행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작?”

오랜만에 생각나는 옛날이야기에 멜가로스크 자작의 눈이 반짝였다. 사냥하는 독수리 같은 눈빛에 광기가 비쳤다. 그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를 옮겼다.

“내 공이라기보단 우리들의 위대한 친구분의 공이라고 해주오, 백작 부인.”

그의 소개와 함께 화로 어딘가에서 불길이 타고 율폰이 등장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생각을 알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셀로니아 후작가 멸족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테니.”

“후후, 그렇죠. 그랬더라면 왕비도 죽이지 못했을 거고―”

“위대하신 황제 폐하는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못했을 테지.”

인간이란 아첨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족속들인 건가. 가축에게 찬양받아 봤자 기쁘지 않았던 율폰이 킥킥거리며 그들을 비웃었다.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이유는 반어빌리터파 귀족에게 마족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잔류한 마족과 키아나트리체 귀족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전, 그는 인간을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켰다. 단지 그것일 뿐인데 그것마저 기회로 삼는 저들의 추악함이 더럽고 역겨워서 그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피날레가 머지않았어요,”

집단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을 세워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분노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 폭력으로 풀게 하고 더 큰 폭력에는 굴복시키는 것.

마족에게는 인간이 그렇고, 인간에게는 마족이 그러하며, 저들에게는 어빌리터가 그러하다. 그런 기묘한 트라이앵글 속에서 그들은 건배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인류의 희망을 위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무지로부터 나오는 무차별적 증오는 이용하기 쉽다. 증오에 대상이 있으면 더욱 쉽다. 증오는 필요악이다. 그것만큼 훌륭한 수단이 없다. 그들은 그것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인간들의 마족을 향한 증오. 태초로부터 있었던 특수 능력자에 대한 두려움. 이것들이 있으면 인류는 어떤 적이 나타나더라도 진화할 수 있다. 그것이 태생부터가 지도자인 그들이 의회에 앉아 진화시킨 이론이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율폰은 그저 지루했다. 화염처럼 일렁거린 그는 의자 하나를 불태우며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미노타에서 갓 돌아온 내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대를 부른 건 그것 때문이었지. 그곳 정세는 어떠하지?”

[순조롭게 침입하고 있다. 왕비의 때처럼. 전쟁은 머지않았어.]

전쟁을 떠올리니 신이 난 율폰이 히죽거렸다. 주욱 찢어지는 기괴한 입꼬리에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만큼 가증과 혐오가 담겼다.

“힘없는 왕녀를 주인공으로 세울 완벽한 무대로구나.”

“징고이즘(jingoism)과 함께 전쟁은 시작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세상이다.”

거창한 대사가 장 안에 퍼져나갔다.

광활한 하늘의 기류를 타고 아가타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이 있는 곳의 창고 문이 열렸다.

세라와 유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를 암시하듯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자들이 달빛 아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이 하나 들어왔구나. 일을 해야 할 거 같아.”

“무슨 일? 아아, 그때 미노타? 뭐야, 진짜 전쟁이 일어나긴 하는 거야? 개소리인 줄 알았더니.”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녀가 퉁퉁한 살을 흔들며 탐욕스럽게 웃었다. 창고에서는 구울들이 웃음소리를 따라 짖어댔다. 그녀가 들고 있는 편지에는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어떤 아이가 좋을까. 어떤 아이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 일이 번거롭게 되지 않을까. 골라보렴, 루시에.”

“저번에 봤다던 나르타 가문의 상단 꼬마가 낫지 않아? 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제일 싫거든.”

“아주 좋지.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구나, 루시에 라탈스키. 나의 귀염둥이 오른팔아.”

그녀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그림자가 들썩거리며 이리 떼를 만들었다. 난세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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