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4)
“우냥!”
고양이 렌이 류제의 품에서 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방문을 닫고 가방을 침대에 던진 류제가 피식 웃었다.
“변덕쟁이. 여기만 오면 기세등등하네.”
기숙사로 돌아와 렌과 단둘이 된 류제는 어느 때보다 활력 넘치는 렌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심란했다. 비키에게 호되게 당한 후로 교실에서 내내 기가 죽었던 렌이 방에 돌아오자마자 제 영역을 과시하는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과 친해지지도 못하고 교실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자존심만 강한 렌을 내일도 교실에 데리고 가야 류제는 하나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24시간 관찰이 조건인 데다 혼자 두었을 때 무슨 말썽을 피울까 그거대로 걱정이었다.
오늘 냥냥이에게 마음을 열었으니까 내일은 다른 친구들에게 진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수밖에.
“냐. 야아옹. 우우… 냐앙? 야옹.”
“그렇게 울어도 뭐라고 하는지 난 몰라.”
냥냥이와 실컷 회포를 풀던 렌은 류제에게도 이해 못 할 울음을 내뱉었다. 갓난아기의 옹알이를 해석하지 못하듯 당연히 류제는 고양이 울음소리의 의미를 몰랐다.
류제가 멀뚱멀뚱 가만히 있자 렌이 몸단장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못 알아들어서 괜히 미안하다.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렌은 편안하게 널브러졌다. 고양이는 잠이 많은 생물이라고 했는데 하루 종일 긴장해서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졸려? 나도 지친다. 빨리 인간으로 돌아와. 일주일은 너무 길어.”
사방으로 찢어진 벽지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렌의 말썽은 어제보다 양호했다. 류제가 저녁을 먹고 돌아올 때까지 렌은 방에서 얌전히 퍼질러 잤기 때문이다.
곤히 자는 렌을 깨울세라 그는 조심스레 스탠드를 켜고 소리 나지 않게 의자에 앉았다.
가방을 정리하던 류제는 어제 넣어두었던 미나의 책을 발견했다. 정신이 없어서 꺼내 볼 생각도 못 했다. 렌과 같은 방을 쓴 이래로 무가치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미나가 추천해 준 책을 읽거나 과제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렌이 고양이 상태라서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무리하게 책을 빌려주려다가 고양이가 되어버린 미나를 위해 류제가 연민의 침묵을 남겼다.
그가 오늘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려니 고양이 렌이 언제 잤냐는 듯 평화롭게 뒷발로 귀를 긁고 기지개를 켰다.
잠에서 깨 더 활기차진 렌은 류제의 안심을 농락하듯 방을 신나게 어질렀다. 보고서를 쓰던 류제는 어제 정리해 놓은 책장이 또 쏟아지는 소리에 펜을 멈추었다.
요망한 발짓으로 방의 모든 것을 열어보던 렌은 서랍을 열어 안에 들어가는 기행을 펼치더니 이번엔 류제의 서랍에 눈독을 들였다.
“와악. 제발, 렌!”
바닥으로 떨어진 서랍 안에서 류제의 소중한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큰 소리가 나자 펄쩍 뛰어 다른 곳으로 도망간 고양이 렌에게 뭐라고 할 수 없으니 류제는 그걸 주워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보는 추억이었다. 수학여행 사진, 체육대회 사진, 렌의 여장 사진, 타고시아 해변에서 찍었던 사진.
류제가 잠시 손을 멈칫했다.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르며 여기 있는 고양이가 이 사진에 나오는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류제는 침대에 올라가 눈치를 보는 고양이 렌과 사진 속 그를 비교했다. 아세미가 읽는 동화책에 자주 나오는 저주에 걸린 공주도 아니고. 뭐야, 정말. 키스라도 해야 인간으로 되돌아오나.
류제가 딴생각에 빠진 사이 독세상 고양이처럼 굴던 렌은 방을 제멋대로 헤집고 나서야 스트레스가 풀렸는지 류제에게 돌아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장난을 치며 애교를 떨어대니 화가 안 풀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신났어. 교실에서는 가만히 있더니. 냥냥이가 마음에 들어?”
“우냐?”
밖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친구들도 좋아할 텐데. 왜 경계만 할까.
“다른 애들한테도 살갑게 굴어봐. 친구들이 오해하잖아. 왜 그래? 뭐가 그렇게 싫어?”
“냐아? 냐아앙.”
‘그거야 내 마음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비키한테 미움받고 유네가 무서워하잖아. 인간이었을 때야 그런다면 아무도 내게서 렌을 빼앗지 않을 테니 마음은 편했겠지. 나는 렌이 차라리 그렇게 취급당하기를 바란 걸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면 끊임없는 혐오감이 그를 얽맸다. 나는 단지 행복한 렌이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했을 뿐이다.
렌은 그런 하찮은 견제에 관심 없다는 태도로 류제에게 얼굴을 비볐다. 귀엽다. 인간이었을 때에는 살을 맞대며 애정을 표하기보다는 친구로서 일정 수준의 선을 지켰고, 최근엔 서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어서 이런 친근함이 그리웠다. 다만 고양이가 아니었더라면 좋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소망했다.
“…아니면 이게 네 본심이야?”
고양이녀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드러나는 성격이 진짜 성격에 가까울 거라고.
아무 감정도 숨기지 않고, 바뀌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 그는 분명 이렇게 날 서있고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받아들여 줄까. 단지 내가 몇 번 위험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날 잊을 수 없는 누구와 혼동하는 걸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가 염려하는 렌은 전부 그만의 망상일 뿐이다.
“빨리 인간으로 돌아와. 나도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
렌은 아무런 울음도 짓지 않았다. 나도 고양이의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한 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건조한 하늘은 달빛을 시퍼렇게 빛냈다.
같은 하늘 달 아래. 잠을 선사하는 거룩한 밤이 찾아왔다.
12시가 넘어 소등이 되고 룸메이트와 실컷 놀던 미나도 축 늘어져 정신없이 코를 골았다.
어두운 방, 달빛이 정적을 침체시키고 고요한 숨소리만 들렸다. 그 무렵 고양이처럼 뒹굴거리며 잠짓하던 미나가 우연히 마법을 써서 룸메이트의 꿈속에 떨어졌다.
반짝거리고 아른거리는 꿈에 침입한 미나는 고양이에서 마족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탈바꿈을 하며 착지했다.
“제기랄, 망할 고양이 새끼.”
간신히 짐승의 두뇌에서 벗어나 마족의 형태를 유지한 그녀가 이성을 되찾고 이를 갈았다.
분해 죽을 것 같았다. 마족의 사천왕인 내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내가 인간에게 그런 꼴을 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하거니와 율폰이 알았다가는 무슨 태도를 보일까 수치스러웠다.
인간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간다면 다시 멍청한 고양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녀가 갈던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제길. 제길. 제길! 역시 인간 따위 끔찍해!”
거미줄에 걸려 잠든 룸메이트를 악몽 인자들로 괴롭힌 미나가 신경질적으로 분풀이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도 기적이라 꿈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젠장. 그 고양이 여자, 마족인 나에게까지 ‘수인화’의 영향을 끼치다니. 정신계 마법의 일인자인 내가. 감히 나를. 이 위대한 사천왕,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를 농락해?
“…….”
‘수인화’는 정신계 어빌리티가 아니라서 그런가. 내 마법에 허점이 있을 줄이야. 위험해. 짐승인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더 불안해.
“뭐? 정말? 그게 무슨 소리인데. 사실이야?”
“쉬잇.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자세히 말해봐.”
“수신제 때부터 둘 사이가 좀 수상하기는 했는데… 요즘에 매일같이 방과 후에 냥냥이를 찾았다고 했잖아. 나도 들은 건데 렌이 냥냥이랑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말이 있어.”
“그래서 렌이 밴드부를 도와줬던 건가?”
“그렇다면 유네는…….”
미나는 룸메이트에게서 오늘 있었던 대화를 엿들었다.
이 사태는 렌 지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렌 지미의 행동에 실망한 친구들의 유약한 감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렌 지미가 방해할 수 없도록 모든 일을 물밑에서 진행하던 미나는 이 굴욕을 기회로 붙잡아야 했다.
“빌어먹을 렌 지미. 네 계획도 무너지고 있지? 후…후후… 너만큼은 절대 날 방해할 수 없어. 암, 그렇고말고.”
기왕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 미나는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 신관을 덮쳤을 때 만든 마력 구슬을 꺼냈다.
그것에 악독한 마법을 건 미나는 꿈의 핵에 심었다. 전염성이 있는 세뇌는 이 인간이 주축이 되어 학생들 사이에 비틀린 생각을 뿌리박을 것이다.
어차피 활동하기 쉽도록 룸메이트쯤은 오래전부터 미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전쟁 전까지 이간질로 불신을 싹틔워 관계를 순조롭게 망가뜨리는 게 그녀의 목적이다. 한때 한 마을을 자멸시켰던 것처럼.
그녀는 나약한 인간의 꿈속을 마음대로 조작했다. 마족의 부흥을 위해. 그리고 마왕의 부활을 위해서.
죄책감 하나 없는 손길에 서릿발 눈 내리는 겨울이 머지않았다.
* * *
보고 자료와 기록 보관용으로 수인화 학생들의 사진이 필요하대서 보호자들이 수업을 빼먹고 교내 스튜디오에 방문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조그마한 수인들의 털을 빗기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혔다.
사진기사가 조명을 만지는 동안 수많은 하인들의 손을 타 고귀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니냐롯트가 스튜디오에 마련된 붉은 방석에 느긋하게 앉았다.
고양이 왕녀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를 오랫동안 보필한 하인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저하께선 타고나시기를 현명하신 분이야. 저런 모습이셔도 고양이의 왕이라도 되신 것 같아.”
“도도하시고 아름다우시지. 저런 고양이라면 평생을 받들어 모시고 살지도 몰라.”
“당연. 저런 오라는 왕녀 저하만이 가능하신 것이다.”
자기한테 하는 칭찬도 아닌데 루이나가 콧김을 내뿜으며 우쭐해했다.
고양이가 되었지만 대우받고 사랑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왕녀의 자세는 명실상부 왕족의 자부심이었다. 덕분에 니냐롯트는 어렵지 않게 사진을 찍었다.
다음 차례인 비키는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호되게 혼쭐내는 악덕 귀족 고양이인지라 보호자인 밴드부가 고전했다. 분풀이를 하다 카메라 부품을 태워먹을 뻔해서 사진기사의 눈초리를 받은 비키는 밴드부원의 손에 들려 어렵사리 퇴장했다.
얌전한 축에 속했던 고양이 유네는 빨리 끝날 줄 알았더니 의외로 고전했다. 방석에 앉히자마자 널브러지거나 애교를 피워대서 정자세가 안 나왔던 것이다. 그와 상관없이 유네의 애교에 녹아내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귀여우니 장땡이었던 사진기사도 생각을 바꾸어 유네는 귀여운 포즈 위주로 콘셉트를 밀고 나갔다.
고양이 세라는 집중력이 없었다. 사진 촬영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자기 마음대로 스튜디오를 휘저었고, 보다 못한 루비니가 간식을 미끼로 세라를 꾀어내 가까스로 촬영에 성공했다.
미나는 류제가 없으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서 룸메이트 대신 류제가 고생했다. 아기 돌잡이 사진 찍듯 류제가 앞에서 미나의 관심을 집중시켜 주니 얌전히 사진을 찍었다.
고양이용 장난감을 들고 한숨을 내쉬던 류제는 가장 문제인 마지막 타자에 정신이 까마득했다.
“캬아아아! 샤아아아!”
“거기 목장갑 좀 가지고 와!”
“이런 애를 데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렌은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갈아입히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기숙사에서는 얌전히 갈아입었던 주제에 바깥에서는 류제조차 버거워서 전문가들에게 맡겼지만 왕실에서 파견 나온 하인들도 렌의 손톱질에 엉망으로 당했다.
“렌, 착하지? 필요한 일이라서 그래. 조금만 참아.”
“캬아악! 캬악!”
“아야, 아, 아파! 내 머리카락!”
하악질로 위협하던 렌은 사람을 뿌리쳐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었다. 눈만 퍼렇게 빛내는 렌은 누구의 손길도 거부했다.
“저 고양이는 귀엽지가 않네.”
“반창고 있니? 밀로니 중위님이 멀쩡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런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겠지. 다른 고양이들은 안 그러는데 유독 저 고양이만 심해.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괴롭힘당하는 거야?”
“뭔들 보고서에 올릴 사진이 필요한데 곤란하네요. 기사님, 필름 몇 장 남았나요?”
“열 장 정도. 내 실력에 그 정도면 충분해.”
왕실 사진기사의 말은 아쉽게도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내내 스트레스를 받은 렌을 간신히 붙잡아 쿠션 위에 올려두어도 전자동 장난감처럼 도망쳐 버려 제대로 찍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렌은 도망가기 직전 흔들린 한 장의 사진만 건졌다. 사진기사는 좌절했다.
“내 실력은 여기까지군. 이럴 수가.”
“전신이 찍힌 건 이 사진밖에 없네요. 필름도 다 떨어졌는데 여기서 포기하죠.”
실패한 나머지 필름들도 발만 덜렁 나왔거나 바람처럼 사라지는 유령이거나 소품용 쿠션만 찍혔다.
다사다난했던 촬영이 끝났다. 사진이 나오면 사람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사진기사의 말을 뒤로하고 보호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진 뺐네.”
“두 번 다시는 못 할 짓이야.”
촬영은 힘들었지만 수업을 땡땡이친 건 최고다. 보호자들은 서로 이득 봤다며 깔깔거렸다. 고양이 렌을 안고 걷는 류제는 지쳐서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고양이들을 관찰하는 일상은 특별했다. 다만 이 원흉인 고양이녀만큼은 어빌리티 컨트롤 훈련이 강제되었다.
다른 친구들의 감시도 있겠다, 고양이녀는 집중해서 어빌리티를 느끼고 부분 장갑을 시도했지만 과도하게 집중하면 어빌리티의 흐름이 흐트러지는 재채기가 나왔다.
“아츄! 츄! 후아앙. 우아앙. 짜증 나냥. 왜 안 되냥.”
“아, 깜짝아! 너 재채기할 때 미리 이야기 좀 해라. 불안해서 못 해먹겠네.”
비키를 데리고 신관 창고에서 밴드 연습을 하고 있던 밴드부 일동이 기침 소리에 주춤거렸다. 베이시스트 ‘마비’ 어빌리터는 더러운 것을 만진 듯 몸을 털어대며 불평했다.
“날 전염병 취급하지 말아양.”
정좌하고 기를 모아보던 냥냥이는 포기하고 훌쩍거리며 무릎에 앉은 고양이 비키를 쓰다듬었다. 따끈따끈한 난로가 있으니 재채기가 금방 멎었다.
고양이 비키는 성격이 까다로워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펀치를 날리거나 손을 무는데 냥냥이의 손길은 쉽게 받아들였다.
“냥냥이는 고양이들하고 빨리 친해지네. 부럽다.”
“우리는 뭐가 문제라서 틈만 나면 화염을 맞는 거야?”
“낸들 아니.”
“특히 렌이 냥냥이한테 말 거는 게 제일 신기해. 오늘도 엄청 말 걸지 않았어? 사람이었으면 겁나 부담스러웠을 거 같아. 푸하하.”
“그 녀석 정말 수다쟁이냥. 엄청 시끄럽냥.”
사회성이 부족한 고양이 렌은 류제나 냥냥이 말고는 절대로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렌이 고양이 말로 고양이녀에게 사정을 일러바치는데 그걸 다른 친구들에게 번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번역했다가는 큰일 날 말들이 있었다. 냥냥이는 안 그래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 렌 지미의 호소를 묵묵히 들어주기로 했다.
“반대로 유네는 되게 귀여움받던데. 친구들이 예뻐해 줘서 기분 좋은가 봐.”
“남장이니 여자였니 해도 귀여우면 장땡인 건가.”
“왕녀님은 루이나 근처에서 주무시기만 하고. 나도 왕녀님 만져보고 싶어.”
“그래도 나 왕녀님 엄청 어려웠는데 이번 일로 가까워진 것 같아. 말은 건 적 없지만.”
“8반은 항상 그런 분위기인 건가?”
비키를 차례로 쓰다듬던 밴드부는 어느새 연습을 하다 말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비키를 가운데 방석에 눕혀놓은 그들은 따뜻하게 불을 쬐듯 둘러앉았다.
“미나 그 애는 조용조용 눈에 잘 안 띄는 애라서 몰랐는데 류제한테 어마어마하게 집착하더라. 설마 진심으로 류제를 좋아하는 건가?”
“솔직히 류제는 죄인이야. 그 얼굴에, 그 체격에, 그 능력에. 누가 채가기라도 했다가는 잠잠한 호수에 태풍이 불어닥칠걸? 그래서 미나도 참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되니까 드러나는 거 아냐?”
“와악, 그게 뭐야. 완전 수치사감이잖아. 으으, 근데 응원해 주고 싶어. 그 애는 홀로 마음을 숨기고 짝사랑만 할 것 같아.”
지레짐작한 그녀들이 자기가 다 부끄럽다고 얼굴을 가렸다. 류제 신리는 여학생들 천지인 학교에서 빛이 나는 존재이기는 했다. 범접할 수 없는 오라와 태도. 언뜻 보면 왕녀와 버금가는 후광이 비쳤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유네도 숨김이 없지. 나 우연히 들었는데 유네가 렌을 좋아했다고 하더라.”
“아, 그래서 렌이 화를 내도 다가가는 건가?”
“고양이 상태로 보면 좋아한다기보다는 호기심 같지 않더냥.”
“8반 애들이 말해줬어. 수신제 때 사랑의 고목 아래에서 고백까지 하려고 했었대.”
“어? 그럼 설마 그때 그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그래, 유네였다나 봐. 대박 아냐?”
흥미진진한 8반의 로맨스 이야기에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렌 지미를 좋아하는 남장을 했었던 유네. 류제를 좋아하는 미나. 누구의 사랑이 먼저 이루어질까?
“불쌍한 렌. 그런데 왜 유네는 고백을 안 했다니? 그거 때문에 렌이 우리한테 엄청 짜증 냈잖아.”
“그러게. 고백만 받으면 당장이라도 수락할 기세였는데.”
“마음이 바뀌었나? 왜, 유네랑 비키 님하고 룸메이트잖아. 비키 님은 렌을 싫어하는 것 같고. 유네가 렌한테 가까이만 다가가면 똥파리 쫓아내는 것처럼 화를 내니까. 추측하건대 비키 님이 고백을 반대했다거나 그랬을 수도 있지.”
그녀들은 몸을 말고 자는 비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럴싸한 추측이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이상한 이야기 그만하고 연습하자, 연습!”
고민해 봐도 그들끼리의 사정을 외부인인 밴드부가 파고들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농밀한 염문은 내버려 두고 합주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던 그녀들은 노래를 몇 개 선곡하다가 어느새 다시 고양이 이야기로 돌아오고 말았다.
“세라 선생님은 성격이 마이웨이시던데. 만사가 편하신 것 같아.”
“그런가? 일에 찌들어 계셨으니 난 쉬는 게 좋아 보여. 나도 8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담임 너무 구려.”
“맞아, 구려. 며칠 안 남았네. 우리가 8반에서 수업 듣는 거.”
“아쉽냥. 늑대 아줌마 수업도 좋지만 역시 세라 선생님이 짱이잖냥.”
그녀들이 한숨을 쉬며 비키를 만지작거렸다. 자다가 깬 비키가 화가 나 불을 내뿜었다. 밴드부는 꺄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척 장단에 맞춰서 놀았다.
밴드부 일동의 말대로 고양이가 되었어도 세라는 삶을 만끽했다. 그런 세라에게 장난감을 던져주던 루비니 아로즈네그 소위는 문득 백장미 부대에 보내야 하는 활동 보고서를 흘겼다.
“음, 역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늘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 일지를 쓰고 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편지에 고양이 세라의 사진을 동봉했다. 받는 이는 호세마타 요새 백장미 특공대대 3소대 소대장 네네 슈만이다.
FM에 후임 갈구기만 잘하는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던 늑대 귀 군인은 배를 붙잡고 박장대소했다.
여하튼간 재경이 원하던 전개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상황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미뤄져 버린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는 도대체 언제 굴러갈 것인가. 시간은 흐르고 때는 다가왔다.
“왔어? 새치기하지 마!”
“한 사람당 한 장씩이야.”
일주일이 지나고 수인들이 고양이로 있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판매용 사진이 인화되었다. 보고서에 올릴 용으로 몇 장 받은 보호자들의 사진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진은 교내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 세계는 호감도 이벤트 대상인 왕녀와 류제의 접점을 필요로 했다. 고양이 수인 사태는 라우라 축제 당시 비키의 호감도 실패에 버금가는 금기지만 역시나 재경이 아니라면 누구도 몰랐다. 그럼에도 세계는 어떻게든 정상 궤도로 돌아가기 위해 방해꾼이 없는 틈을 타 우연을 구축했다.
선착순으로 판매되는 B급 고양이 수인 사진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1층 복도에서는 사진 강탈을 위한 대전쟁이 벌어졌다. 총알 같은 어빌리티가 빗발치는 가운데 1학년이 상대하기엔 턱도 없는 어빌리티 컨트롤로 농락당하는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전장에서 튕겨 나온 패잔병들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사진을 구할 방도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터덜터덜 빈손으로 교실로 돌아갔다.
“으아아, 선배들 너무 강해.”
“1학년들한테 양보해 주면 뭐 덧나나. 선배가 되어가지고 치사하게.”
“어쩌지. 그림으로 그려서 남겨둘까?”
고양이녀 오피셜에 의하면 오후 중에는 고양이 수인들이 사람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늘이 보호자들이 수인을 돌볼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사진이 없다면 내일부턴 고양이 수인의 희귀한 모습은 영영 추억 속에 묻혔다.
8반 학생들은 사진을 구하지 못해 아쉬워도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귀여운 고양이들을 만끽하기로 했다.
“와, 류제 설마 성공했어?”
“아슬아슬. 운이 좋았지.”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녀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사진 한 장을 들고 교실로 돌아가는 류제를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판매대 근처에도 가지 못한 그녀들이 류제에게 다가와 기웃거렸다.
“누구? 어라, 렌이네. 설마하니 우정 파워야?”
“급하게 집었는데 이게 걸렸네.”
“에이, 뭐야. 흔들렸잖아. 하나도 안 멋있어. 실은 누구를 잡으려고 한 건데? 너도 왕녀님?”
“하하하, 그러게.”
류제가 넉살 좋게 거짓말을 했다.
고양의 렌의 사진은 초점이 흔들린 데다 고양이 귀 여장 메이드를 좋아하는 기묘한 취미를 가진 마니아들이 아니라면 여타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인기가 없어 가장 늦게 매진되었다.
그래봤자 몇 분 차이지만 덕분에 한 장 건질 수 있었던 류제는 자기 책상 자리에 사진을 올려두었다.
“우우…오오오…캬아악! 하아악!”
“류제, 볼일 끝났으면 렌 좀 어떻게 해봐! 네가 무슨 동네 골목 대장이니? 쥐똥만 한 게 그만 좀 하악거려.”
류제가 사진을 구매한다고 한눈파는 동안 일찌감치 포기하고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돌아온 류제를 다급하게 호출했다.
다가오는 사람도 싫고 매사에 불만이 많은 고양이 렌이 류제가 없는 틈을 타 또다시 친구들에게 공격성을 보였다. 어지간하면 손길을 받아들여 줬을 법도 한데 고양이 렌은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발전이 없었다.
류제가 사진을 가방에다가 넣으려다 말고 그녀들에게 향했다. 그때 책상에 묶어두었던 렌의 리드줄이 풀려 흘러내렸다. 뻗대다 기적적으로 탈출한 렌이 바람처럼 활개 쳤다.
“야단났다. 누가 리드줄 좀 잡아봐!”
“우냐앙!”
붙잡으려는 손을 피해 교실 안을 도망 다니던 렌은 누군가 손이라도 뻗으면 지레 경기를 일으키며 미꾸라지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도망가면 안 돼!”
미리 문을 막고 서있던 학생 한 명이 고양이 렌을 붙잡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고양이 렌은 막무가내로 발톱을 휘둘렀다.
일주일이나 이런 사고가 반복되어 일상에 녹았으니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날카로운 발톱은 형편 좋게 빗나가지 못하고 여학생의 얼굴을 세게 할퀴고 지나갔다.
“꺄악!”
“괜찮아?!”
언젠가 터질 것 같았던 일이 발생했다. 렌을 통제한 류제가 먼저 여학생의 상태를 살폈다. 기어코 사고를 친 렌은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는 채 으르렁거리며 류제의 몸을 타고 올랐다.
“으으… 아파.”
여학생의 얼굴에 세 줄로 그어진 선에 핏물이 흐르며 바닥에 붉은 점으로 떨어졌다. 크게 흉터까지 남을 수도 있는 상처다. 얼굴의 상처는 사춘기 학생에게 있어서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라 렌을 옹호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류제는 잠자코 그녀들이 침착하기만을 바랐다.
“피가 너무 많이 나와. 잠깐 휴지 좀. 어쩌지? 이거 나을 수 있을까?”
“캬아악!”
“시끄러. 뭘 잘했다고 그래?”
자기가 할퀴어놓고 자기가 학대받은 양 하악질을 하는 렌을 보며 친구들이 화를 냈다. 친근함을 느끼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적개심만 보이고 마음을 터놓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고양이 습성을 알아보기 위해 책에 적힌 대로도 해보고 그녀들도 여러모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 렌만 이상한 고양이임에 틀림없었다. 친구들이 렌을 못되게 흘겼다.
“괜찮아? 덧나기 전에 양호실에 가자.”
“으으, 흉터 남으면 진짜 싫은데.”
마족에게 당한 상처면 모를까 고작 고양이 발톱에 당해서 흉터가 남으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 자존심이 상했다.
왜 다른 고양이들은 문제없이 잘 지내는데 렌만 사서 난리란 말인가. 그녀들이 그에게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있지, 난 8반 분위기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렌이랑 너희 친한 사이 맞지?”
“왜 물어봐, 그런 걸.”
“당연하지. 얼마나 친한데.”
“말로만 들었던 렌하고 저 고양이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별 볼 일 없지만 류제 신리와 어울려 다니고 이따금 의외의 면모를 보인다는 렌 지미는 사고를 몰고 다녔다.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미움받지 않고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을 마냥 혐오했다.
“왜, 냥냥이도 저게 원래 성격에 가깝다고 했잖아. 옆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 렌이 너희 장단 맞춘다고 친한 척만 한 거라고밖에 생각 못 하겠어.”
너희, 렌 지미한테 속은 거 아냐?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 너희뿐인 거 같은데. 미나의 룸메이트가 낮게 속삭였다.
이 질문은 그녀들을 불쾌하게 자극했다. 그들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면서 기분이 나빠졌다. 이 미묘한 감정 속에서 미나의 마법이 은밀하고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눈동자에 보랏빛 형체가 스치며 잠시 눈동자가 멍해졌던 친구들이 눈을 깜박 정신을 차리고 묵묵히 응급처치를 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고양이 렌을 달래던 류제가 대신 변명해 주었다.
“미안해. 지금 상태가 이러니 이해해 줘. 렌도 그러고 싶어서―”
“이해는 무슨. 일주일이나 기다려줬잖아! 무의식이니 본능이니 말만 그럴싸하지 실은 이게 렌의 진심인 거 아냐? 우리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유네도, 우리도 자기 형편 좋게 휘둘러 댄 거겠지.”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말하는데, 유네를 찬 거면 다른 반 애한테 추파나 던지지 말든가. 저런 행동을 보면 당연히 신용 안 가. 참고 있는 건 우리인데 왜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저런 소리나 들어야 해?!”
수상하게 소용돌이쳐 울컥한 화를 참지 못한 여학생들이 류제에게 신경질을 냈다. 그녀들은 류제를 뿌리치고 양호실로 사라졌다. 그들을 은밀하게 자극시킨 미나를 교실에 둔 채 동반하는 1반 룸메이트의 눈에도 생기가 없었다.
류제는 추파니 뭐니 의미를 모르겠으나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이 가버리니 이긴 것에 만족하며 렌이 류제의 책상에 착지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류제는 가만히 화를 삭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머리를 뒤적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데 그새를 못 참은 고양이 렌이 한 장뿐인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혈압이 치솟은 류제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렌, 제발 좀!”
“우우?”
사진은 이미 침으로 범벅되어 축축하게 조각나 있는 채였다. 보고서에 올려야 할 사진은 개인적으로 소장하지 못해서 일부러 하나 더 구해 온 건데 그걸 망가뜨리다니.
류제는 자신이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변화가 없는 렌이 답답해 참아왔던 짜증이 폭발했다.
“너도 일주일이나 지났으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언제까지 그럴 거야?”
사진을 찢으며 기세등등하던 고양이 렌은 고함 소리에 겁을 집어먹었다.
류제가 아차 싶어서 주춤거렸다. 지금 렌은 말귀를 알아듣는 인간이 아니다. 자기가 못나서 그런 걸 렌한테 풀어내고 있다니. 한심했다.
“우우…우우…우오오…….”
놀라버린 렌은 털을 잔뜩 부풀리며 류제를 경계했다. 눈동자가 샐쭉해진 렌은 뒷걸음질 치다가 류제를 피해 학급 뒤편 높은 곳에 몸을 감춰버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눈이 류제를 원망했다.
“하아.”
열이 올라 머리가 안 돌아갔다. 어차피 오늘 오후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아무래도 좋다. 여자애들하고의 오해는 그때 가서 풀면 되겠지.
류제는 렌이 삐쳐서 숨어버린 장소를 외면했다. 소중한 한 존재가 오로지 자신만 따르는 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이번 일주일로 여실히 깨달았다.
“어?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밥 먹으려고 했더니.”
“우리 점심 먹으러 갈 건데 류제 너도 같이 갈래?”
“하아. 가자. 어디로든.”
자기들끼리 놀다가 교실로 들어온 밴드부 일동이 자리에 고양이 비키를 내려두었다.
“비키 님,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렌이랑 싸우면 안 돼. 렌은… 뭐야, 또 숨었어?”
‘가시’ 어빌리터가 숨은 렌을 흘기며 쯧쯔 혀를 찼다.
너무 화가 나서 책임감이 소홀해진 류제도 머리를 식힐 겸 밴드부 친구들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렌은 리드줄도 단단히 묶여있고, 교실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으니 알아서 고양이들을 감시해 줄 터였다.
천장에 숨어버린 렌은 훌쩍거리며 교실을 관찰했다. 제일 좋아하는 류제와 말이 통하는 냥냥이가 나가버렸다. 류제가 화를 낸 데다 자신을 혼자 두고 가버리기까지 했다.
불을 내뿜는 저 괴팍한 고양이가 아직 곁에 있는데. 재경이 냥냥이의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자는 비키에게 시선을 꽂았다.
일정한 군화 굽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꼬리를 흔들거리는 루비니가 늑대 귀가 솟은 딱딱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루이나 알로이드. 잠깐 보지. 저하께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늑대 귀 군인이 교실 안에 고양이 세라를 넣어두며 루이나를 호출했다.
점심시간이라 교실에는 학생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학생들이 루비니가 데리고 온 팔자 좋은 세라에게 알은척을 했다. 그녀가 세라를 내려 교실에 밀어 넣었다.
“뭐야, 수인화 보고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을 텐데?”
루이나가 경계했다. 왕실의 개(犬)인 백장미 부대는 믿을 수가 없다.
왕녀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도할 생각까지 했던 루이나는 늑대 귀 군인의 표정이 비보를 전하는 것처럼 심각하자 검에서 손을 뗐다. 루비니는 학생들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읊조렸다.
“…대대장님의 전언이다.”
그자가 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왕녀에게 전언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거기까지 막을 권한이 없는 루이나는 잠든 왕녀를 두고 자리를 떴다. 고양이 왕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단잠에 빠져 마지막 휴가를 즐겼다.
그녀들이 정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뒷자리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서 쥐가 툭 떨어지자 고양이 렌이 놀라 경기를 일으킨 것이다.
렌이 책상으로 내려오니 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비키가 렌을 쥐 잡듯 잡으며 괴롭혔다. 비키가 불을 내뿜자 단단히 묶여 팽팽해진 렌의 리드줄이 불에 타 끊어졌다.
“캬아아!”
“샤아아아!”
“정말인가? 정말로 미노타가―”
“우오오옹……! 냐아아아!”
“…교실 안이 시끄럽군. 잠시 자리를 비키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늑대 귀 군인과 루이나는 교실 옆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불길한 소식에 다급해진 루이나가 교실 문을 닫다가 말아 그 사이에 조그마한 틈이 생겼다.
왕녀의 호감도를 위해 또다시 세상이 우연의 우연을 겹치기 시작했다. 매일 비키에게 당하기만 했던 고양이 렌은 오늘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렌이 비키의 목덜미를 물고 반격에 나섰다. 까짓 게 감히 덤벼들자 비키가 두 번째 화염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화염이 유네의 리드줄을 끊었다. 고고하게 휴식하던 왕녀는 애초부터 불경하다고 리드줄 따위 매지 않았고, 미나는 친구들이 양호실에 가느라 깜박하고 리드줄을 채우는 것을 까먹은 상태였다.
이로써 모든 고양이 수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냐아… 냐아아.”
비키가 불꽃으로 태워버려서 엉덩이가 뜨거워진 렌이 류제를 찾으면서 울다가 창문을 넘어 훌쩍 교실에서 떠났다. 비키가 그 뒤를 쫓아갔다.
렌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다른 고양이들이 문득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다가 어슬렁어슬렁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네가 반쯤 열린 교실 문을 통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왕녀도 나가버린 루이나를 흘기다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으아… 오늘이면 급하게 점심 해치우는 것도 끝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급식실까지 고양이들 데리고 오기 싫어. 밥은 편하게 먹고 싶단 말야.”
“셀로니아가에 이 노고를 치하해 달라고 조르면 얼마를 주려나.”
부자가 되는 망상을 하는 밴드부 일동들이 부른 배를 두드렸다. 점심으로 꽁치가 나와 행복한 고양이녀는 이를 쑤시다가 찢어진 사진을 들고 뚱해있는 류제를 보고 물었다.
“근데 류제양, 아까 왜 렌한테 소리친 거냥?”
“다른 이유가 있겠어? 렌이 사고를 또 거하게 쳤거든. 하아, 원래대로 돌아오면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어쩌려나 몰라.”
“사고는 무슨 사고 말이냥. 또 친구들 할퀸 거냥?”
“그렇지 뭐.”
“아까 반에서 나가던 애들? 얼굴에 줄 세 개가 길게 나서 피가 뚝뚝 흐르던데 그건 좀 그렇지. 흉터 생기기 전에 세라 선생님이 돌아오면 좋겠다.”
손을 물고, 머리를 쥐어뜯고, 할퀴고. 일주일 동안 질리지도 않는다.
류제는 망가진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 보호자로서 고양이 렌의 사건 사고를 커버해야 하는 류제의 형편이 불쌍해서 밴드부 일동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위로했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조금만 참아. 인간으로 돌아오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놀려주면 되지.”
그렇지도 못할 것 같았던 류제가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다가 유네 같은 것이 도도도 복도를 지나가자 헛것을 봤나 싶어 다시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있었던 것 같은 고양이 유네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아니, 내가 뭘 잘못 봤나 봐.”
고양이들에게 시달리느라 노이로제가 걸린 것이 분명했다. 류제는 오늘 자로 고양이 보호자 임무가 끝나면 실컷 잠이나 자겠다며 다짐했다.
오늘만 넘기면 된다. 그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으며 교실 문을 여는 순간, 활짝 열린 창문에서 커튼이 펄럭거렸다.
“어… 음?”
교실이 텅 비었다. 고양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았던 리드줄이 끊어져 있었다. 렌이 숨어있던 곳도 기척이 없었다.
잠시 현실 부정의 시간을 가졌던 류제가 눈을 비볐다. 교실 밖에서는 루이나가 늑대 귀 군인과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루이나는 왕녀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점심도 싸서 먹는데?
“저, 루이나? 물어볼 게 있어.”
“뭐야, 하찮은 게.”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루이나의 고압적이고 건방진 태도야 2학기가 되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적개심을 적당히 흘려들은 류제가 차근차근 물었다.
“교실 안에 왕녀가 안 보이던데. 누가 데려갔어?”
“왕녀가 아니라 왕녀‘님’이다. 저하께서 안 계신다고? 그럴 리가 없어.”
“제대로 확인해 본 것 맞나? 아까 전까지 고양이들이 모두 교실에 있는 것을 내가 확인했다만.”
루비니도 따라서 반박했다. 때마침 밴드부 부원들도 비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입을 모아 보고했다. 놀란 루이나가 류제를 밀치고 교실 안을 확인했다. 교실에는 고양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기랄. 첫날 고생해서 붙잡아 놓은 이유가 없어지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내 책임이 아니라 루이나 네 책임이잖아! 너야말로 왜 왕녀한테서 눈을 뗀 거야?”
“와아아. 어쩌냥? 오후에는 원래대로 돌아올 테냥! 시간이 얼마 없냥.”
“망했다. 포기하자.”
“어차피 인간으로 돌아오니까 괜찮지 않아? 부끄러운 꼴이 될지라도.”
“그 부끄러운 꼴 때문에 곤란한 거라고! 아아, 어쩌지?”
고양이들의 2차 대탈출과 함께 정지되었던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가 재개되었다.
본디 왕녀의 네 번째 호감도 이벤트는 고양이 대양육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수신제 때 재경에게 솟았던 고양이 귀 정도의 해프닝이었다.
4반 고양이녀처럼 되어버린 왕녀를 발견한 류제가 고양이 본능대로 행동하는 왕녀를 보며 그녀의 고충과 감정을 보다 심도 깊게 이해한다는 호감도 이벤트.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왕녀가 고양이 습성대로 움직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그녀답지 않은 자세로 개운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는 설정이었다.
왕녀가 사라졌다는 말에 찾아 나선 주인공이 인적이 드문 들판 어딘가에서 낮잠을 자는 왕녀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웃옷을 덮어주어 잠에서 깰 때까지 지켜주는 훈훈한 결말로 끝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까딱했다간 하반신 실종 이벤트가 발생하니 왕녀의 심정을 심층 이해하는 것보다는 알몸 노출 변태 이벤트를 막기 위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그런 옷을 입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안 된다고! 일주일 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잖아!
“왕녀 저하, 이 루이나가 갑니다!”
왕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루이나가 울부짖으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1층이라 가볍게 착지한 루이나는 왕녀를 연호하며 단거리 이동 능력으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팔자 좋은 밴드부 일동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담당 비키는 어디에 있던 불이 나는 곳일 테니 별로 걱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종 치면 옷 갈아입히러 양호실로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선생님들한테 소리 듣겠다.”
“다른 애들 점심 먹다 말고 고양이들 없어진 거 알면 체하겠는데.”
“근데 그 상태로 인간으로 돌아오면 옷은―”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제바알! 생각도 하기 싫어.”
렌의 하반신 실종 패션을 떠올려버린 류제가 주저앉으며 절망했다.
아까 괜히 고함쳤다. 겁을 먹고 도망간 거겠지. 인간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없는데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일을 망쳤다. 머리를 싸맨 류제를 늑대 귀 군인이 무덤덤하게 달랬다.
“진정해라. 당황하면 될 일도 안 돼.”
“소위님은 왜 그렇게 여유로운 건가요?! 지금 큰일이 나게 생겼는데! 수습 못 하면 사유서 같은 거 써야 하지 않아요?”
저번에도 그렇고 저 늑대 귀 군인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는 구석이 없었다. 왕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책이 잡힐 것임을 지적하자 그녀는 슬렉터로 이것저것 누르더니 적당히 보고를 하고는 유연하게 몸을 풀었다.
“그야, 그 옷을 입은 채로는 학교의 대마족 결계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굳이 그런 옷을 입혀놓은 거라고 생각한 거냐.”
“네? 옷? 통과를 못 한다니요?”
“고양이들에게 입히라고 첫날 준 옷 말이다.”
그녀가 쯧쯔 혀를 차며 류제의 무식을 지적했다. 방심하는 사이 고양이들이 도망쳐버린 전적이 있어서 그녀가 알라마니 기술관 측에 부탁해 기능을 추가해 놓았다.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안전장치 하나 없이 고양이를 맡기면 고생하는 건 그녀뿐이란 걸 루비니는 진작부터 알았다.
“뭐, 그런 거지. 우리는 너희들 생각처럼 미련하지 않아.”
“한시름 놨겠네, 류제.”
“태평하게 나오네.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냐?”
“에이, 우리는 뭐 아무래도 좋지.”
“곤란한 건 군과 학교 측이니까. 그리고 친위대장 나리도.”
그녀가 루이나를 비꼬았다.
역시 군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녀는 늑대 수인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도망친 고양이들은 늑대의 코로 찾으면 금방이었다. 고양이 수인 사건에 괜히 수습 담당으로 파견된 게 아닐 정도로 그녀는 이 일에 제격이었다.
까칠한 루이나 대신 믿음직스러운 루비니에게 반한 밴드부 일동이 휘휘 휘파람을 부르며 치켜세웠다.
“소위님은 대단하시네요. 진정한 백장미 부대원!”
“멋져요, 멋져!”
“고맙군. 그럼 다른 학생들이 걱정하기 전에 빨리 찾지.”
그녀의 입가가 늑대 주둥이로 변하며 수인화 단계가 높아졌다.
백장미 특공대대 대원 루비니 아로즈네그 소위. 그녀는 수신제 때 고양이녀가 렌 지미를 수인화시킨 것을 보고 수인화 어빌리터의 대표 격으로 이 실험에 참여했기 때문에 본래 이야기대로라면 이번 달에 학교에 없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백장미 부대 엑스트라인 그녀의 등장이 어떤 파란을 불러올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이번 챕터만 본다면 그녀가 시사하는 바는 하나다. 숨어버린 왕녀를 찾는다는 이벤트의 완료 조건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왕녀를 찾는 것은 루이나도, 류제도 아니라 루비니 아로즈네그 소위의 몫이 되었다.
코를 씰룩거리는 루비니를 따라 류제와 밴드부 일동이 뒤를 쫓아왔다. 신이 난 밴드부원들은 오지 탐험대라도 되는 양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냄새가 나기는 하나양?”
“그렇게 멀리 간 것 같지는 않군. 냄새도 한데 섞여있는걸.”
“모여있다고양? 으으음.”
고양이 수인들이 다 함께 모여있을 때는 수업 중일 때밖에 없었다. 고양이들은 보통 개인플레이라 그밖에 다른 경우가 있을까 고양이의 입장으로 고민해 보던 냥냥이는 어쩐지 늑대 귀 군인이 가는 길이 익숙하자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설마 거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양.”
“거기라니?”
“내가 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있냥. 아가타가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에 고양이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 있거냥.”
“그런 곳이 있으면 지난주에 진작 말해줬어야지!”
“류제 네가 모르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확인한 거양. 왜 큰소리냥!”
자기는 렌을 찾겠다고 다른 고양이들은 죄다 떠넘기고 사라져버렸던 주제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했단 말인가. 고양이 찾는 도구 취급하는 류제가 너무해서 냥냥이가 분한 듯이 발을 굴렸다.
“다들 너무하냥. 아무리 나 때문에 고양이라 된 거라고 해도냥.”
“괜찮아. 어쨌든 귀여웠잖아.”
“냥냥아. 다음번에도 잘 부탁해~”
꿍해진 냥냥이를 데리고 밴드부가 장난쳤다. 성가실 텐데도 늑대 귀 군인은 상관하지 않고 주둥이로 여기저기 킁킁 쑤셔대며 앞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들어선 학교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탁 트인 들판이 나왔다.
“우와.”
“역시 이곳으로 나왔네양.”
“학교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멋지다.”
“오랜만에 오는군. 네가 말한 장소가 여기였을 줄은.”
코스모스가 만개한 들판을 늑대 귀 군인도 알고 있는 듯했다. 풀 냄새를 즐겼던 그녀가 비 오고 난 다음 날 짐승의 본능이 울컥 치솟을 때 혼자서 즐기던 장소였다.
오랜만에 맡는 냄새가 반가워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 그녀는 높게 자라난 풀숲을 헤치고 고양이들의 냄새를 찾았다.
“이 근처에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는 함께 찾아다오.”
루비니가 냄새에 집중했다. 가만히 그녀를 뒤따라가던 밴드부 일동이 문득 든 궁금증을 던졌다.
“냥냥아. 근데 고양이들이 왜 여기에 온 거야? 짐작 간다고 했지?”
“뭐… 그게냥…….”
역시 냥냥이는 뭔가 알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데헷 웃으면서 머리를 콩 때렸다.
“에… 실은 내가 여기에다가 종종 캣닙 씨앗을 뿌려놓냥.”
“캣닙? 그게 뭐야.”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허브 같은 건데 맡으면 개다래같이 기분이 좋아지냥. 이 근처일 테냥.”
그다음부터는 냥냥이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들판 한쪽 양지바른 어딘가로 향하던 냥냥이는 이내 한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니나 다를까 냥냥이가 심어놓은 캣닙밭에 다섯 마리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면서 잠들어 있었다. 보송보송 마른 털들이 아늑해 보였다.
“끄악. 귀여워. 진짜 있잖아?”
“너희들, 옹기종기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이런 곳을 용케 알았네.”
“나도 신기하냥. 냄새를 맡고 온 건가 싶냥.”
고양이가 된 이후부터는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따로 놀던 다섯 마리 고양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양지바른 곳에 모여서 겹친 꽃잎처럼 옹기종기 자는 전경은 지켜만 봐도 미소가 나왔다.
모두 사이좋게 서로에게 기댄 고양이들을 보자니 따스하고 평화로워서 류제도 김이 다 빠졌다. 하나둘 세어보던 류제는 가장 중요한 고양이가 안 보여서 당황했다.
“어? 한 마리가 없어. 렌…렌은 어디 갔지?”
보통 여기서는 모두 함께 모여 화해…라든가 좋은 결말로 끝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가장 골칫거리였던 렌의 그림자도 없었다.
“렌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응? 누가 없는 건가? 이 이상은 냄새가 나지 않는데. 잘 모르겠다.”
믿음직스럽던 그녀가 무책임하게 말했다. 하나가 없는데 태평하니 꼬리를 흔든 채 주변을 킁킁거리고 있는 그녀는 왕녀를 찾았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게 가장 문제잖아요!”
“렌이야 뭐… 알몸 정도는 좀 보여도 신경 안 쓰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아니, 쓰겠지! 아무래도.”
여기는 여자들밖에 없잖아. 캣닙에 달아오른 냥냥이와 풀 냄새에 신이 나 장난을 치는 밴드부와 아로즈네그 소위 대신 류제가 혼자 들판을 뒤졌지만 렌은 보이지 않았다.
렌을 찾는 척 냥냥이와 실컷 놀다가 인간 형태로 돌아온 늑대 귀 군인도 여기서는 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왜 혼자서만 다른 곳에 있는 거야?!”
어디를 먼저 뒤져야 하나 까마득하던 류제는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를 듣고 한숨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양호실로 가서 고양이 수인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에 밴드부 일동과 늑대 귀 군인이 고양이들을 하나씩 들고 이동했다. 그들은 렌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우리 먼저 갈게. 수고해!”
“렌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미안했다고 전해줘.”
“그야 렌은 류제 네 책임이잖아? 하하하.”
그들은 캣닙에 홀라당 저세상으로 가버린 고양이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들은 양호실에서 대기하면서 고양이들이 인간으로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히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류제는 왕녀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사라진 렌을 찾는 것을 선택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렌이었으니까.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는 실패했다. 환경이 구축된다고 할지언정 사상누각에 누더기가 된 이 이벤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중천에 떴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류제가 온 학교를 뒤지며 찾아도 렌은 없었다. 고함을 친 천벌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시간이 부족하자 류제는 렌을 찾으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혀 줄 재정비를 하기 위해 기숙사로 돌아왔다. 손에는 렌을 찾기 위한 캣닙이 잔뜩 들려있었다.
쓰레기통도, 뒤편 사랑의 고목나무에도 없던 렌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한숨을 쉬고 불을 켜는데 안에서 나올 때 깔끔하게 개고 나왔던 이불이 어쩐지 흙투성이로 흘러내렸다.
“후냐앙? 냐아앙?”
그렇게 걱정했던 고양이 렌이 더러워진 몰골로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5층 높이의 기숙사에 혈혈단신으로 어떻게 올라온 걸까.
“렌?!”
활짝 열린 베란다 문과 펄럭거리는 커튼을 보고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캣닙을 놓친 류제가 잽싸게 다가와 렌의 상태를 확인했다.
“걱정이나 끼치고. 더럽게 이게 뭐야!”
안 그래도 여학생들 분위기가 묘한데 그런 그녀들 앞에 알몸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해 봐라. 진짜 학교에 무슨 소문이 퍼질지 생각만 해도 치욕스러웠다.
안도한 류제가 렌을 안아주었다. 귀찮았는지 흙투성이 렌이 버둥거리면서 싫어했다.
“냐…냐아…냐아아.”
“정말 못 살아. 십년감수했잖아.”
고양이 렌이 뭐라 중얼거리면서 침대 위로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류제는 도망가지 못하게 렌을 꽉 붙들고 슬렉터를 조작했다.
저번에 S_script 동아리에서 통신 기능을 크랙했던 류제가 렌을 찾았다고 냥냥이에게 보고했다. 그가 슬렉터를 직접 크랙한 것은 아니고 이게 있으면 기숙사를 몰래 탈출할 때 선생님한테 안 들킨다고 밴드부원들이 멋대로 벌인 짓이었다.
―그렇냥? 찾아서 다행이냥. 내가 적당히 둘러대서 보고해 주겠냥.
“그래, 고마워. 다른 애들도 잘 부탁해.”
―너는 나한테 떠맡기기만 하냥.
“너한테 렌을 부탁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여하튼 렌이 인간으로 돌아오는 건 여기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너무 더러워서 씻겨야 할 것 같거든.”
―씻기는 거냥? 렌 말이냥? 지금?
이상하게도 뜸을 들이던 고양이녀가 심각한 말투로 ‘…힘내.’라고 말하며 통신을 끊었다. 순간 냥냥이 특유의 고양이 어미가 정상으로 들렸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고양이의 목욕이란 엄청난 일이다. 개라면 몰라도 고양이 목욕은 처음이었던 류제는 흙투성이 렌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우아아악! 렌! 아파! 아! 아야!”
“캬아아! 하아아아!”
그 불길함대로 렌과 함께 샤워실에 들어가 수도를 틀자마자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품이 낭자한 샤워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교복을 걷어붙였던 류제는 옷을 입고 목욕한 꼴로 밖으로 나왔다. 렌이 긁고 버둥거리고 울부짖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너 정말 나중에 두고 보자.”
“우우…우우우우…….”
자신도 축축해서 찝찝해 죽겠는데 싫어하는 렌을 수건으로 싸매서 꼼꼼하게 닦아준 류제는 결국엔 도망치는 렌을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렌 때문에 더러워진 이불을 빨기 위해 흙먼지를 털려는데 류제는 그 위에 모인 물건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침대 위에 찢어진 골판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종이, 메모지 등등 그가 망가뜨렸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모여있었다. 어떻게 구한 건지 몰라도 자기가 찢어먹었던 고양이 사진도 있었다.
“…네가 가져온 거야? 나 때문에?”
가져온 것들을 하나씩 집어 들자 고양이 렌이 류제를 쳐다보면서 귀엽게 손짓했다.
고양이가 되었어도 렌은 렌이다.
류제가 혓바닥으로 몸단장을 하는 렌을 쓰다듬었다. 그의 화를 풀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했을 심정을 생각하니 복잡해졌다.
“우냐앙.”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할머니가 재경에게 했을 법한 말을 하는 류제가 물기가 남은 털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렌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지를 모를 뿐이다. 미움받기 싫어하는 주제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게 안타까워서, 그리고 그걸 평범한 친구에 불과한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류제는 힘에 겨웠다.
꾸벅꾸벅 조는 렌에게 줄줄 흘러내리는 팬티와 체육복을 임시로 입혀놓은 류제는 그가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고 이불을 들고 나왔다.
기숙사 1층 목욕탕 옆 세탁기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류제는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렌은 어느새 원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상 떠나가는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좋았다. 일주일 만에 보는 친구의 진짜 모습은 바스러질 듯 애달아서 손을 피부에 스치는 것조차 불경했다.
류제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누군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짝사랑이야. 내가 더 사랑하면 돼. 근데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가능성이 없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지?
성인군자가 아니라 욕구는 맴돌기만 한다. 너는 왜 내게만 오지 않는 거야. 그런 거 싫어. 나도 널 가지고 싶어. 하지만 넌 절대로 내 손에 들어오지 않겠지.
지쳐버린 류제가 렌의 옆에 누워 같은 베개를 베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눈에 검은 앞머리가 가렸다. 그가 손을 뻗어 렌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서 태연하게 목 졸라 죽인다. 이건 생죽음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친구인 나는 그에게 사랑이 뭔지,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아끼는 법을 알려줄 수 없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내가 하는 말은 닿지 못한다.
저건 웃는 얼굴이 아니다. 달콤한 꿀도 아니다. 나를 메마르게 하는 독과 같은 비수다. 함께 있으면 나는 필연적으로 망가져 간다. 그럼에도 함께 있고 싶지만, 그렇지만 죄 없는 렌을 나는 왜 원망하는 걸까.
그가 지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둑해진 하늘이 커튼 사이로 비치는 가운데 잠결에 무엇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잠이 든 거지.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땡땡이치고 말았다. 류제가 슬며시 눈을 떴다.
“도대체 …가 …된 거야 …는데 …지만 …하아, 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잠에서 깬 렌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등을 돌리고 앉은 그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실패야. …정말 …패라고… 생… 못 해. 이것도 나 때문인 건가.”
렌의 말투는 씁쓸했다. 실패? 무엇이 실패라는 말인가. 그 때문이라는 말은 뭐지. 궁금했지만 여기서 말을 건다면 렌은 나비처럼 날아 벗어날 것이다.
같은 침대 위에 체육복 상의만 입고 양반다리로 앉은 렌에게 손을 뻗으려던 류제는 주먹을 쥐고 간신히 감정을 참아냈다.
딱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원 없이 너를 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루지 못할 꿈이다. 꿈에서 깨지 못한 사람은 류제밖에 없는 밤이었다.
* *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양이 수인들이 모두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제립학교에 대대로 회자될 고양이 수인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문제 해결이 가위로 싹둑 잘라내진 감이 있지만 제립학교와 기술관 측에서는 소득이 없는 수인화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매듭지어야 했다. 이 사건을 좋게 포장한 그들은 그럴싸하게 결론을 내려 무마했다.
사건이 정리되었다고 한들 학생들에게 수인화 사고가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았다. 고양이가 되었던 학생들은 지나가다 놀림을 받고 수치심 범벅이 되어 도망가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특히나 자신의 입에서 불꽃이 발사되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별명에 ‘레드 드래곤’이 추가된 비키는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에 먹칠 아닌 먹칠을 해버려 ‘레드’라는 글자만 들어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고양이로 지내는 동안 묘생을 즐기던 세라도 일 복귀에 차질이 생겼다. 왕녀를 치료하려고 했던 그때 전후로 기억이 흐릿한 세라에게 동료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고양이가 된 그녀가 교무실에서 활개 친 일화를 말했던 것이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렸음에도 흑역사가 지독해 세라는 당분간 휴가를 내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반면 어벙하고 순수한 이미지라서 고양이가 되든 말든 학급 친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유네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이런 진귀한 경험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증거가 담긴 사진을 평생의 보물로 여기겠다 다짐한 유네가 친구들의 증언을 호기심을 담아 경청했다.
“고양이 상태로 바람을 막 날리면서 나뭇잎 사냥을 하는데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역시 비키 님하고 뒹굴거리면서 노는 게 제일 귀여웠지.”
“우에에, 신기하다. 렌 군도 고양이가 되었다며? 혹시 나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지?”
아무래도 그게 가장 신경 쓰였던 유네가 걱정을 표했다. 좋아하는 렌에게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그녀에게 친구들은 좋은 말만 해주었다.
“괜찮아. 유네는 이상하지 않았어.”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네는 잘못이 없으니까.”
그녀들의 눈동자는 1반 미나의 룸메이트처럼 생기가 떨어져 나갔다.
남장을 하지 않았어도 여전히 미소년 왕자님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유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헤헤 웃었다. 순수한 그녀를 지키듯 그녀의 친구들이 까맣게 죽은 눈으로 맞장구를 쳤다.
가장 고귀하고 왕실의 체통을 지켜야 하는 니냐롯트는 고양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루이나가 한눈을 팔았다가 고양이가 되어버린 탓인지 루이나의 비호를 한층 더 허락했다. 아무래도 고양이로 변하기 전에 자신을 은밀하게 위협하는 일이 있었으니 뇌리에 크게 남은 듯했다.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궁으로 돌아온 니냐롯트는 그녀의 방에 앉아 루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왕녀를 지키는 검을 내려둔 루이나는 무릎 꿇고 왕녀의 부재 기간 동안의 일을 전해주었다.
그야말로 충신의 표본인 루이나는 이어서 새로운 사실을 긴밀하게 보고했다.
“마지막으로 …미노타의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들라크루아 중령에게서 전달받았습니다.”
“그 말이 진실일 확률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곧 국경에 미노타의 …가…….”
“과연. 피난인가.”
바르게 앉아 요정 같은 품새로 경청하던 니냐롯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이며 눈을 낮게 깔았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귀족파 놈들도 저하를 노리고 행동을 개시하겠죠. 신중해지셔야 합니다.”
루이나가 진언했다. 왕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맑아진 은색의 눈동자에 고뇌가 스쳤다.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악몽에 시달리겠지만 지금은 머리가 신중하게 돌아갔다.
과연 그녀는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재경을 어떤 길로 이끌 것인가는 베일에 가려졌다.
떠들썩했던 학교는 평화를 되찾았다. 생체 난로가 없어 신관 창고는 다시 추워졌지만 밴드부는 여전히 꿈을 위해 악기 연습을 이어나갔다.
고양이녀의 새로운 능력을 분석해 전투에 활용하려고 했던 어른들은 타인 수인화 능력을 활용하기 부족하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고양이녀에게 지속적인 어빌리티 심화 연습 보고 명령을 내렸다.
냥냥이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혹시 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기대했던 밴드부는 그러면 그렇지라며 대폭 실망했다.
하지만 또 귀찮아지기는 싫었으니 그녀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소동은 자제하기로 했다. 솔직히 비키 돌보기는 지옥의 하드 트레이닝 같았으니까 당분간은 사양이었다.
“비일상은 됐어. 공연도 기대 안 할래. 내면의 평화가 지속되기를.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난로 하나만 주시길―”
“기도합니다아.”
그녀들이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때일수록 치사하게 신을 찾게 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으으. 내면의 평화는 무슨. 난로만 있다면 전쟁도 방불케 할 수 있어.”
추워서 건반을 치다가 겨드랑이에 양손을 수납한 ‘투시’ 어빌리터가 발을 동동 굴렀다.
퍼스트 기타가 합류했는데도 한 자리 빈 듯한 기분에 오늘 합주도 꽝이었다. 목적도 없는 합주는 사람 김빠지게 하는 큰 장벽이었다.
“합주도 제대로 안 되고. 춥기만 하고. 심심하다.”
“떼끼, 심심하다는 말 하지 마.”
“애 돌보는 건 사양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안 도와줄 거다, 냥냥아.”
“거참, 미안하다고 했잖냥.”
어빌리티 특훈 중인 냥냥이가 꿍얼거렸다. 타인 수인화 컨트롤을 위해 기타 대신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연습하던 냥냥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슬렉터를 노려보다가 포기했다. 슬렉터는 죄가 없었다.
그녀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세상을 즐기는 마음으로 실컷 웃어댔다.
“농담이야. 어려울 땐 당연히 도와줘야지.”
“이런 재미있는 일이 언제 또 있을 거라고.”
“근데 냥냥아, 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렌이 고양이일 때 너한테 뭐라고 그렇게 말했던 거야?”
다른 사람들 근처엔 가지 않던 고양이 렌이 냥냥이에게는 종종 가서 뭐라고 일러바친 것이 떠올랐던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냥. 맨날 류제가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냥. 솔직히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매일같이 자랑해서 의외라고 생각했냥.”
왜, 류제 신리는 귀찮은 거 싫어하고 관심 없는 일에는 신경 안 쓰잖냥. 그렇게 말을 덧붙인 고양이녀가 쯧쯔 혀를 찼다. 그 말을 들은 밴드부 일동이 배를 잡고 폭소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무슨 대단한 대화를 하나 싶었는데.”
“고양이들은 의외로 집착을 많이 하냥. 그래도 렌은 유별나더냥. 친구끼리 하는 대화로 치긴 이상해서 8반 애들한텐 아무 말도 안 했냥.”
“아하하하. 하하하! 안 어울리는데 상상은 잘 돼! 렌 그 녀석은 좀 이상하잖아.”
류제는 아주 유능한 집사였다며 고양이녀가 어처구니없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연습을 마치고 신관 창고에서 나온 그녀들이 고양이들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며 복도를 걷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빨간 말총머리와 여우 귀처럼 솟은 노란색 리본이 보였다. 새침하고 도도한 셀로니아가의 귀족 영애가 역사책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레드 드래곤이잖아. 비키 님, 안녕~ 오늘은 입에서 불을 안 뿜는 거야?”
새로운 별명을 부르며 알은척하는 밴드부 일동을 발견한 비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이번 일로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와 친해진 줄 알았던 밴드부는 기억이 사라지는 건 참 허무한 일이구나 들었던 손을 내렸다.
“레드 드래곤이 도망쳐버렸네.”
“그야 그렇게 부르니까 그렇겠지.”
그녀들 중 누군가가 핀잔했다.
귀족 가문에 빌붙어서 밴드부 후원을 받는 것도 실패인가. 렌 지미랑 친해 보여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말고도 일주일 동안 열심히 보살폈는데 괜히 섭섭했다. 뿌듯함 그런 거 말고 눈에 보이는 보상을 바랐던 그녀들은 짜게 식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쉽다. 고양이 때는 귀여워서 좋았는데.”
“좋기는.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인사는 좀 받아주지. 치사해.”
“다시 고양이가 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실컷 괴롭혀 줘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냥. 너무 놀리지 말아양. 내가 죄책감이…으응…에…에츄이!”
창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와 별생각 없이 재채기를 했던 냥냥이가 코를 문대다가 순간 오싹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괜한 소리나 늘어놓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에…엣, 다…다들 장난치지 말아양.”
커다란 연기가 뭉게뭉게 가시자 그녀의 발치에 세 마리의 고양이 수인이 냥냥 울어댔다. 안색이 새파래진 냥냥이가 머리를 붙잡고 울었다. 망했다. 망해버린 것이다.
“냐아아아! 나는 불행하냥!”
학교 어디선가에서 냥냥이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에 류제가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수인들의 관찰 내용 보고로 바쁜 와중 계속 동아리를 빠질 수는 없어 도서부 일을 도와주러 왔던 류제는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마저 책을 정리했다.
고양이가 되는 바람에 일주일간 도서부 활동을 못 해서 사죄 겸 도와주던 미나가 묵묵히 일하는 류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류제, 혹시 어디 안 좋아?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
“뭐? 아니. 괜찮은데.”
눈에 보일 정도로 낯빛이 안 좋았나 류제가 짐짓 입을 가렸다. 곧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짧게 웃고는 손에 든 책을 꽂았다. 반복적인 작업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단순화하기에 적합했다.
“너야말로 아직도 고양이 이야기가 신경 쓰이는 거야?”
“읏……!”
미나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를 지레짐작한 류제가 비수를 찔렀다. 책을 꽂다 말고 미나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고양이가 되었을 때 류제에게 들러붙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나는 당장 착한 도서위원의 탈을 벗어 던져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계획을 생각해서 참아내었다.
“안 쓸 수는 없잖아. 폐만 끼쳤는걸.”
그녀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흉내를 내었다. 반대편 얼굴에서는 이를 악물었다. 류제는 퍽 귀엽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폐 아니었어. 너 정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폐라고. 책 한 권 빌려주려다가 낭패를 당할 줄이야. 다음부턴 조심해야지.”
“하하, 뭘 어떻게 조심하게?”
“어쨌든! 마음가짐을 그렇게 한다는 거야.”
심술을 부리는 류제가 토를 달자 그녀가 뚱해졌다.
인간에게 농락당한 것은 불쾌하고 짜증 나지만 그 기회를 잘 살린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나중에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마왕님이 날 꼭 칭찬해 주시겠지?
“고양이가 된 건 네 잘못이 아니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
미나의 이중적인 마음을 알 리 없는 류제가 진심 없는 목소리로 미나를 위로했다. 손으로는 반복 작업을 하고 있는 채였다.
“류제가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마음이 놓이지만… 다른 애들한텐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어.”
“아무도 나쁘게 생각 안 해.”
다른 친구들이 실망한 건 렌의 행동이었을 테니까.
솔직히 류제는 미나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도 벅찼다. 아무리 추악하게 굴어도 친구인 이상 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여실히 깨달은 그는 끊임없이 우울했다.
렌 앞에서 친구라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건 힘들었다. 자신의 탐욕스러운 모습, 안도하는 모습, 욕망 모두 끔찍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이 점점 버거워졌다. 나는 그를 생각하는데, 그는 나를 그만큼 여기지 않는다는 건 지독했다.
“그래서 뭐 때문에 기운이 없는 거야?”
그녀가 입을 열도록 그를 유혹했다. 보기 좋게 피해나가지 못한 류제가 잠시 손을 멈추고 미나와 눈이 마주쳤다. 녹색 단발머리 아래로 보이는 분홍색 눈동자가 아련하게 빛났다. 그녀는 믿음직스럽다. 그가 듣고 싶었던 답만 말해주니까.
“역시 너만큼은 속일 수가 없구나.”
“저번에 내게 상담했던 일 때문이야?”
“뭐…….”
그가 짐짓 말을 줄였다. 수신제 때에도 그의 이런 내면을 파악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게 해준 사람은 미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지만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주제에 비키와 유네가 렌을 포기하게끔 만들고 욕심은 욕심대로 내는 꼴이라니. 이런 걸 미나가 알았다간 그녀마저 그에게 질려 할 것이다.
“나는 분명 잘못한 걸 거야.”
“…유네에게 그렇게 조언해 준 걸? 그건 네 판단이 현명했다니까.”
류제는 답하지 않았다. 유네가 고백해서 렌과 이어졌다는 상상을 하면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기에 그렇게 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었나 끊임없이 시험에 들었다. 고작해야 친구 사이도 넘을 수도 없으면서,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렌이 사랑받을 기회를 막아버린 것이 과연 옳을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매번 시시한 일로 고민하고. 답은 정해져 있으면서 바보 같아. 내 자신이 어리석어서 견딜 수 없어.”
“류제, 너 괜찮아?”
“하아. 미안해, 미나. 너한테는 매번 약한 소리만 하게 되네. 부끄러워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그녀도 룸메이트의 꿈속에 잠시 들어갔던 우연을 제외하면 줄곧 고양이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무지하지만 모종의 일로 류제의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음을 짐작했다.
“렌 때문이야?”
“…혼잣말은 그냥 잊어줘.”
마음이 복잡한 류제는 이내 속을 감췄다. 무안해진 류제는 괜히 책 한 권을 들어 책장을 넘겼다.
몽마이자 업마의 군주인 미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해 타락시키는 건 그녀의 특기였다. 그녀가 상냥하게 류제의 등을 끌어안았다.
류제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미나가 어떻게 서있는 자신의 등을 끌어안을 수 있는지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류제는 그녀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말해봐.]
그녀가 류제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류제의 동공이 붉게 빛났다. 지금 있는 이곳이 단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고립된 정신은 유혹에 집중했다. 류제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영원히. 영원히 떨어지고 있다.
[렌 지미를 가지고 싶은 거지? 그 애에게 네 진심을 알려주고 싶지?]
“…나는…….”
[괜찮아. 마음대로 속박하고, 강요하고, 집착해도 돼.]
정신이 약해진 류제는 미나의 속삭임에 손쉽게 흔들거렸다. 미나에게 장악당한 류제는 멍해진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미나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지어주었던 미소가 겹쳐졌다.
욕심꾸러기 마왕님. 인간임을 포기하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데. 당신이 그걸 알려주었으면서.
[너는 그래도 돼.]
이 장면이 바로 이번 챕터에 있던 서큐버스 미나 플로리아의 네 번째 호감도 이벤트이다.
미나의 유혹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호감도가 하나 올라간다. 다만 미나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첫 회차일 때는 이것과 다른 형태로 진행되지만 다회차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도 재경의 업보였다.
[가져.]
미나의 네 번째 호감도 이벤트는 신경 안 쓰겠다고 선언한 재경은 그보다는 이상하게 흘러간 고양이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사이 은밀하게 류제에게 접촉했던 미나는 이번에도 자신이 이겼다면서 눈매를 샐쭉하게 휘었다.
[가져버려. 왜 너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데?]
“렌을―”
[엉망으로 만들어.]
악마의 속삭임은 언제나 달콤하다. 악마는 그 사람이 원해 마지않는 것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눈에는 영원히 너의 희생이 보이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류제의 심장을 찔렀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번개가 쳤다. 그것이 그의 마음인지, 마법인지, 무엇이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사물이 안개처럼 변해서 어두운 복도를 거닐었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1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