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3)
그날 밤 류제는 해괴한 꿈을 꾸었다. 평범한 인간 렌이 점점 거대해지더니 와하하 웃으면서 그를 한 손에 쥐고 노는 꿈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가 불현듯 눈을 뜬 이유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무게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상 방송이 울린 것도 아닌데 해가 뜨기 전부터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려대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 간신히 고개를 드니 가슴팍 위에 올라 몸을 만 고양이 렌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꾹꾹이질을 하며 여유롭게 눈을 끔벅이는 모습이 꿈이 아니었다.
류제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땅이 기울어지자 고양이 렌이 뒷다리로 류제의 가슴팍을 박차고 책상 위로 점프했다. 끄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고양이가 되더니 제일 부지런하네. 왜 벌써 일어났어?”
크게 하품을 하고 불을 켠 류제는 자는 사이에 엉망이 된 방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도로 아미타불이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들겼다. 시끄러워서 방문을 먼저 연 류제가 눈앞에 등장한 늑대 귀 군인을 보고 주춤거렸다. 잠옷 바람이 부끄러웠다.
“뭡니까? 이런 꼭두새벽부터.”
“이런 안일한 놈. 아직도 모르겠나? 우리의 앞길에 펼쳐진 운명이 험난한 육아 생활을 지시할 것이다!”
네 마리의 고양이 수인을 베이비 캐리어로 동서남북 메고 있는 늑대 귀 군인이 열정적으로 외쳤다. 그녀도 어제 류제처럼 똑같이 고생을 했는지 눈 밑이 어두침침하니 안색이 나빴다.
매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서 냥냥 시끄럽게 울어대는 네 마리의 고양이들을 본 류제는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우냥? 캬아아악!”
자신과 똑같은 고양이 수인들을 목격한 렌은 털을 바싹 세우며 날 서게 반응했다. 류제는 뒤에서 우당탕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육아라면 저 뒤처리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 말할 수 있지. 교사들과 의논 한 결과 일주일 동안 이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수인화 어빌리티의 조사를 계속하기로 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네 담당은 렌 지미 학생이지. 그런고로 오늘 너에게도 지급품이 내려왔다.”
“자…잠시만요. 담당이라뇨? 제가 일주일 내내 렌을 돌봐야 한다는 말인가요?”
“달리 누가 있나? 아니면 다른 학생에게 맡길까?”
그건 싫었다. 바보 중의 바보가 되어버린 렌을 누구한테 보여주었다간 무슨 창피를 당할지 생각만 해도 대신 수치스러웠다.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그녀가 그에게 보고할 사항들이 적힌 종이를 넘겼다.
“익숙해지면 일주일은 금방 지나갈 거다. 네가 할 일은 그를 보살피면서 특이점을 기록하는 것이야. 어빌리티 사용에 특히 집중하면 된다만… 저 학생은 아직 어빌리티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할 일은 없겠군. 나머지는 육아다.”
그다음으로 그녀가 전달해 준 것은 조그마한 수인 전용 리드줄과 찍찍이로 붙였다가 뗄 수 있는 어린이용 상의였다. 어째 제립학교 교복을 닮았다고 말한다면 정답이라고 말할 같은 디자인이다. 거기에 고양이용 화장실과 온갖 고양이 간식들도 추가로 배급되었다.
육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류제는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수인들은 고양이와 아기를 합쳐놓은 모습이지만 원래는 어엿한 사춘기 청소년이니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애완동물 취급보다는 아기 취급이 더 나았다.
“이게 다인가요?”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라. 우리도 어제 갑자기 준비해서 부족한 게 있을 수도 있어.”
“어… 잠시만요. 보고 사항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건 뭐죠?”
종이를 읽어보던 류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늑대 귀 군인의 품에서 우냥우냥 울어대는 수인들이 고양이 언어로 집단적 독백을 하는데 뒤에서 고개를 쑥 내밀던 렌이 놀라 방을 우다다 뛰어다녔다.
“24시간 동안 관찰하라고 되어있는데 제가 등교하면 렌은 어떻게 돌봅니까? 설마 그때까지 등교 불가는 아닐 테고.”
“그야 당연하지. 데리고 등교하면 아무런 문제 없다. 참고로 이 학생들도 1학년의 다른 학생들에게 맡길 셈이다.”
“…분명 어제는 다른 학생들에게 들키지 말라고 하셨지 않나요?”
“하룻저녁 사이에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나버렸더군. 어제 네가 데리고 온 학생들이 한 짓이겠지. 뭐, 보고서를 잘 작성하면 평가 점수를 준다고 했으니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야.”
워낙 숨길 수가 없는 일이라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실은 그렇게 안 되길 바랐다. 류제는 두개골이 쪼개져서 사리 같은 둥그런 뭔가가 배출될 것 같으면서도 그처럼 고통받을 친구들이 또 있겠구나 생각하면 연민이 생겼다.
“그럼 세라 선생님은요? 혹시 선생님도 학생이 돌보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돌봐야겠지. 내가 하늘 같은 선배를 이런 식으로 취급할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제기랄. 너무 과분해서 어깨가 무거워.”
그녀가 험한 말을 내뱉었다. 세라보다 1년 후배인 그녀는 저번 여름 훈련 때 세라와 함께 수행한 훈련을 떠올렸다. 세라 밀로니는 군인으로서는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 생각 없는 고양이가 세라 밀로니라는 것을 알면 진짜 깼다.
“다른 질문 사항이 없으면 가겠다. 바빠서 이만.”
우냥우냥 시끄럽게 울어대는 수인들을 데리고 B동과 C동 기숙사로 향하는 그녀의 꼬리가 축 처졌다. 어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필기를 하더니 하룻밤 사이 마음이 변했나, 저들을 모두 혼자서 돌보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 듯했다.
“우냥?”
그들이 가자 조심스레 류제의 어깨에 올라탄 고양이 렌은 무서운 늑대의 냄새를 킁킁거리면서 바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오옹. 오우옹.”
고양이 말로 뭐라고 중얼중얼거린 고양이 렌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펄쩍 뛰어내려 침대 위로 착지했다.
보급품을 발로 밀어 문을 닫은 류제는 더러워진 방을 살폈다. 고양이 렌은 이번엔 류제의 침대 옆 벽지를 발톱으로 박박 긁었다.
공부를 가르칠 때에는 집중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만한 고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인간일 때가 그나마 양반이었다. 또 날아간 벽지에 류제는 머리를 싸매며 깊이 반성했다.
“난 절대 애완동물 안 키울 거야. 그게 다 네 탓인 줄 알아, 렌.”
말도 안 통하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지. 류제는 도망가는 고양의 렌을 붙잡고 옷을 벗긴 다음 지급받은 교복을 입혔다.
모래와 함께 온 고양이 화장실은 렌의 침대 옆에 두었고 간식거리는 책장 위에 숨겨두었다.
“냐? 냥!”
류제가 요리조리 움직이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렌이 신이 나서 류제의 손을 사냥했다.
이불 개고 방을 치우면서 새벽부터 온갖 고난에 시달린 류제는 곧 A동 사감이 부재하여 부사감과 함께 아침 운동을 진행한다는 기숙사 방송을 들었다.
운동을 가야 하는데 렌을 혼자 둘 수 없었다. 24시간 관찰이라는 것도 거슬리고, 내버려 두면 방을 또 엉망으로 만들어놓겠지.
“…하아.”
어차피 다른 학생들도 다 알고 있다고 했으니 아침 운동에 데려가 볼까.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류제는 렌에게 산책용 리드줄을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 렌은 제멋대로라 밖에 나가자마자 또 자기 멋대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번엔 리드줄 때문에 불가능했다.
“우우…우우우.”
“불만스럽게 쳐다봐도 안 돼.”
“우오웅…….”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렌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를 껴안고 기숙사 운동장에 나간 류제는 소문을 듣고 렌을 구경하는 여학생들의 눈초리를 별수 없이 향유했다.
“류제, 어제 소식 들었어. 고생이 많구나.”
“저거 진짜 렌이야? 이야, 좋겠다. 수업도 안 들어도 되고. 일주일 동안 완전 상전 아냐?”
“난 저런 상태가 되느니 차라리 수업을 들을래. 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질 것 같다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현실적이네. 나만 아니면 되지. 근데 귀엽다.”
동물을 좋아하는 학생 한 명이 멋대로 손을 내밀었다. 불평이 많은 고양이 렌은 류제의 품에 안겨 낯선 사람들을 향해 털을 부풀렸다가 뻗친 손을 냥냥 펀치로 후려갈겼다.
“우우…우오옹…….”
“윽, 성질 더러워라. 누가 렌 지미 아니랄까 봐.”
“가만히 있어서 얌전한 줄 알았는데. 류제만 따르는 건가?”
하루 먼저 만났다고 렌이 특별 취급해 주자 우쭐해진 류제는 제 손은 무리 없이 타는 고양이 렌을 과시했다.
“나도 어제 실컷 맞았어. 냥냥이가 그러는데 이런 상태가 되면 사람으로서의 이성이 거의 안 남는다고 하더라. 지금 렌은 그냥 고양이니까 이해해 줘.”
“흐음, 날것 그대로의 렌인가.”
그녀들이 꼬리를 부풀리며 류제에게 들러붙는 고양이 렌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발톱 때문에 류제의 옷에 구멍이 숭숭 났다. 성장기이기 때문에 체육복은 소모품처럼 바꾸고 있던 류제는 오랜만에 옷에 ‘강화’ 어빌리티를 사용했다.
“우냐…냐…냐아… 우오오.”
“윽, 알았으니까 타고 올라가지 마!”
“신기해. 먹을 거 주면 좋아해?”
“글쎄. 그보다 얘 겁먹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렌이 자꾸 머리 위로 올라가려고 하잖아.”
자신을 따르는 건 기분 좋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모근이 죄다 뜯겨버릴 것 같았다.
여학생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렸고, 독점은 개뿔 고통받는 것은 류제였다. A동 기숙사 부사감이 와서 학생들을 정렬할 때까지 류제는 선배는 물론이고 선생님들에게까지 시달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왕녀를 포함한 1학년 8반 학생들과 담임인 세라가 고양이가 되었다는 소문은 하룻밤 사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기숙사 아침 일과가 끝나고 렌과 평범하지 않은 등교를 했을 때에도 학생들은 놀라기는커녕 ‘저게 그거야?’라는 시선으로 류제를 구경했다. 그를 흘기는 사람 모두 이 일의 전말을 알 것이다.
교실에 가방을 두기도 전에 고양이 돌봄 담당 학생들이 교무실로 호출되었다. 왕녀부터 대귀족의 영애, 유명 상단의 자제까지 고양이 수인이 되어버린 사건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선생님들도 신중하게 나가는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습니다, 제군들.”
수신제 폐회식 이후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교장이 뒷짐을 지고 그들을 불렀다. 아침 해가 스며드는 교무실 창문에서 서늘한 공기가 들어왔다. 중앙 난로 불이 휘청거렸다.
지엄한 교장은 발을 돌려 그들과 마주 보았다. 시끌벅적 담당 고양이 수인들을 데리고 수다를 떨던 학생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렌 지미를 맡은 류제 신리.
비키 셀로니아를 맡은 냥냥이 포함 4반 밴드부 일동.
세라 밀로니를 맡은 늑대 귀 군인.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왕녀를 맡은 친위대 대표 6반 루이나 알로이드.
유네 나르타를 맡은 8반 유네의 친구들.
미나 플로리아를 맡은 1반 미나의 기숙사 룸메이트.
“아침에 지급품과 함께 전달 사항을 들었을 것입니다. 극비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성가시게 해서 미안하게 됐군요.”
학생들 모르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던 선생님들은 고고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 왕녀를 보면서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소식을 들은 왕녀파에게서 크나큰 반발이 있었다. 제립학교가 언제부터 귀족파와 손을 잡았냐는 화살이 돌려지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일을 처리한다고 선생님들은 급격히 초췌해져 있었다.
“하아, 그렇게 입단속을 시켰건만 누가 소문을 낸 건지.”
어떤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자 밴드부 일동의 움직임이 묘해졌다. 분명 비밀로 하라고 경고를 받았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친구들에게 다 떠벌리고 다닌 범인은 저들일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입이 싸도 저들만으로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학생이 알게 되기에는 물리적으로 큰 무리가 있지 않을까. 류제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수습하기도 전인데 누가 소문을 냈나 눈에 불을 켜는 건 시간 낭비지. 여기 호출된 학생들은 모두 일주일간 8반에 임시 배정되어 수인화 어빌리티의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것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각자 맡은 수인을 데리고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오면 평가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되는데. 학생들 의견은 어떤가요?”
“엑, 임시 배정이라니. 저희도 8반에서 수업 들어요?”
“한곳에 모여 통제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저하의 귀중한 사생활을 그깟 것에 팔아넘길 것 같나?”
모시는 주인인 왕녀가 아니라면 선생님들에게도 반말로 응대하는 루이나는 왕녀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던 교사 측은 정해진 대로의 대답을 반복했다.
“진정하세요, 루이나 학생. 어제 다 조율한 사항이지 않습니까. 어빌리티의 진화는 분명 왕녀님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알라마니 기술관과 저희 제립학교 측은 불완전한 수인 상태에서도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하께 해가 되는 일은 일절 없을 것임을 몇 번이고 강조했지 않습니까.”
루이나도 그들의 설득을 밤새 들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알았다. 다만 그 대상이 왕녀인 것이 불만이었다. 안 그래도 불면증이 심해져 쉬지도 못하는데 이 이상의 괴로운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이 없는 개는 혼자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루이나가 말없이 왕녀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침묵하며 시선을 외면하자 동의로 받아들인 선생님들이 안도했다.
“그럼 각 학생들은 오늘부로 보고서에 쓸 조항을 바탕으로 수인 관찰을 속행하세요. 아침부터 교실에 소란이 일겠지만 배워왔던 대로 침착하게 대응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컨트롤하시고요.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거기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 학생은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어빌리티를 제대로 숙련하도록 합니다. 전달 사항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만 해산합니다.”
척도 검사를 한 결과 수인화 계열 어빌리티의 최고 척도를 찍어 타인 수인화 능력을 확인한 이단아 고양이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가 점수 찔끔찔끔 주기만 해봐라.”
“선생님들도 제멋대로야. 우리 사정은 전혀 생각 안 해주지.”
교무실에서 나온 학생들은 일이 귀찮아졌다며 투덜거렸다.
정신없어 죽겠는데 아까부터 불안했던 렌과 비키가 싸움 시동을 걸었다. 유네는 두 고양이가 날을 세우며 우는 소리가 무서워서 친구들의 품에 얼굴을 처박았다.
“또 시작이네.”
“왓, 와앗! 불꽃 발사 5초 전! 가우르 발령, 가우르 발령!”
노련해진 밴드부 일원이 비키를 잽싸게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그들을 중재하던 고양이 세라는 창문으로 들어온 때늦은 나비를 쫓아가려고 버둥거렸다. 루이나의 품에 얌전히 안긴 왕녀는 그들의 싸움을 남 일인 양 느긋하게 구경했다.
“미나, 너까지 그러면 힘들어!”
“미안해. 이상하게 계속 류제 네 쪽으로 가려고 하네. 네가 신기하나 봐.”
얌전할 줄 알았던 미나는 룸메이트가 아닌 류제에게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비키를 물리친 렌은 미나가 다가오니 더 질겁해서 류제의 몸에 발톱을 박고 다른 쪽으로 기어올랐다.
“아야, 아야야. 제발 부탁이니까 가만히 좀 있어!”
“캬하아악!”
“우오오오… 우오옹!”
“냐…냐아앙…냐앙.”
일주일간 난장판인 고양이들을 데리고 같은 교실을 공유해야 하다니 끔찍하다. 8반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은 과연 그들이 고양이들을 얼마나 컨트롤할 수 있을지 불길했다. 평가 점수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밴드부 사이에서 주를 이루었다.
“다 냥냥이 너 때문이잖아.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우… 나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 안 했냥. 나한테 진짜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냥.”
“지루한 일상에 돌멩이 하나가 아니라 바위 하나를 던졌구만. 정도가 없어.”
반복되는 일상이 싫다고 하던 그녀들도 귀찮은 육아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씨부렁거리는 그녀들도 평소와 다른 일상에 일말의 흥미는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고양이 덕분에 관심을 많이 받으면 밴드부 홍보도 되고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러게 누가 소문을 내래. 하룻밤 지났다고 고양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말이 돼? 기숙사 돌아다니면서 밤새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한 거야?”
대놓고 성가시다는 얼굴을 하는 네 명의 밴드부원들에게 류제가 언짢게 물었다. 소문의 주범임을 손쉽게 파악당해도 그녀들은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해. 이런 기능을 쓰면 되지. 슬렉터는 생각보다 유용하다고.”
그녀들은 소문을 퍼뜨린 수단을 유쾌하게 보여주었다. 실은 수신제 전후로 S_script 동아리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학생용 슬렉터를 해킹해서 통신 기능을 오픈해 주는 행위가 성행했었다. 이는 비키가 S_script 동아리에 입부했을 때 확인이 가능한 이벤트이지만 지금의 류제는 모르는 사실이다.
‘가시’ 어빌리터가 슬렉터를 이것저것 조작하더니 냥냥이에게 통신을 걸었다. 곧 냥냥이의 슬렉터가 세라가 긴급 연락을 받을 때처럼 깜박거렸다. 냥냥이가 버튼을 누르자 약간의 딜레이와 함께 건너편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아, 들리십니까? 냥냥이 양.”
“들립니냥.”
그녀들이 헤헤 웃으며 하이 파이브를 했다. 얼리 어답터인 학생들 중 대부분의 선배들은 그 기능을 쓰고 있었는데 덕분에 소문이 더 빨리 전달된 것이다.
통신 기능은 학생용 슬렉터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류제가 대단한 호기심을 보였다.
“어떻게 한 거야? 그거 이번에 업데이트된 새로운 슬렉터야?”
“몰랐어? 늘 소문의 중심에 있으면서 소식이 느리구나, 류제.”
“너희들이 너무 빠른 거야.”
그녀들은 S_script 동아리실에 가서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선배들이 기능을 열어준다고 자랑스레 답했다. 과연 학교 보안은 이래도 괜찮을 것인가 류제의 눈 밑이 실룩거렸다. 옆에 늑대 귀 군인이 듣고 있는데 이런 걸 말해도 되나 모르겠다.
“그런데 군인 아줌마는 왜 같이 오는 건가요?”
“아줌마 아니래도.”
교무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는 동안 세라의 상태를 열심히 수첩에 기록하던 늑대 귀 군인이 귀를 쫑긋거리며 8반 교실 문을 열었다.
“어린이들은 못 하는 사고 수습은 어른이 해야 하지 않겠나.”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게 8반 교탁에 섰다.
“처음 보는군. 소식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부터 약 일주일간 세라 밀로니 선생님 대신 임시 담임을 맡게 된 백장미 부대 대원 루비니 아로즈네그다. 아로즈네그 소위라고 불러라.”
어쩐지 전학생처럼 교실 앞문으로 우르르 들어온 고양이 보호자 모임 단원들은 교탁을 두들긴 늑대 귀 군인이 반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랬다. 담임인 세라가 고양이가 되었으니 그녀의 자리가 텅 비어 8반의 담임과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 심화 과정을 교육할 겸 군인인 루비니가 대신이 된 것이다.
“내 뒤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8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을 것이며, 고양이 수인 학생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학급 인원들의 적극 협력 바란다.”
“군인? 백장미 부대원이래. 그나저나 저 조그마한 고양이들 좀 봐. 너무 귀엽다.”
“렌이랑 반장, 유네, 미나에 세라 선생님, 왕녀님까지 고양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카더라 통신이 믿을 만했단 말이야?”
수많은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여섯 마리 고양이 수인들이 냥냥거림을 멈추었다. 친구였던 그들이 고양이로 변해버린 이유가 궁금한 건 사건과 관련 없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조회 내용은 이상이다. 그럼 나중에 보지.”
늑대 귀 군인의 어색한 아침 조회가 끝났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같은 반 친구들이 이때다 싶어 보호자들에게 몰려들었다.
“귀여워! 어쩜 좋아. 부럽다. 나도 돌보고 싶어. 만져봐도 돼?”
“냐…냐아…냐아아.”
동시에 고양이를 만지고 싶은 학생들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교실 바깥에는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반에서 온 학생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악, 안 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고양이 렌은 그에게 뻗치려는 손들이 무서워서 도망갔다. 다행히 류제가 리드줄을 낚아채서 교실 밖으로 나가는 건 막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손길을 허락해 버린 렌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학생에게 냥냥 펀치를 두 방이나 먹여주었다.
“성질 더럽다. 저렇게 짜증을 내는 걸 보니 진짜 렌이긴 렌인가 봐.”
“야, 야아! 렌! 심정이 어때? 뭐라 말 좀 해봐. 네가 꿈에 그리던 인기남이 되었잖아.”
고양이가 되어버렸다는 소문만 들었지 그들의 정신상태가 어떤지 아는 바가 없었던 친구들은 털을 바싹 세우는 고양이 렌의 볼을 쿡쿡 찔렀다. 고양이 렌은 발톱을 세우고 버둥거렸지만 류제의 품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얌전히 좀 있어라. 너희도 렌 그만 괴롭혀.”
“괴롭힌 거 아냐. 귀여우니까 쓰다듬으려고 한 거야.”
“렌이 과민 반응하는 게 잘못이지.”
“치사한 자식. 우리한테는 쓰다듬당하는 것도 자존심 상한다 이거냐? 나쁜 놈아.”
류제 혼자만 독차지하다니 괜히 심술이 난다. 렌에게 친근감을 가지던 친구들은 실망해서 공연히 투덜거렸다.
류제는 렌이 친구들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그녀들이 손을 뻗는 것이 무서운 건지 헷갈렸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것처럼 이것도 렌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안 좋은 기억일지도 몰랐다.
“우우, 우우우.”
“알았어. 아무도 안 건든대. 착하지? 가만히 있어.”
낯선 장소가 어지간히 무서웠던 고양이 렌이 류제의 겨드랑이에 고개를 처박고 눈물을 흘렸다.
겁도, 싫어하는 것도, 경계심도 많다. 이래가지고 제립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떻게 친구를 사귀었을까 몰라.
“냥냥이가 그러는데 이런 모습으로 변하면 지능이 낮아지고 본능대로 움직이나 봐.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야.”
“유네는 안 그러잖아. 하물며 까다로운 비키 님도 머리는 쓰다듬게 해주는데. 다 쟤 성격이지 뭐. 우린 다른 고양이들하고 놀 거다.”
“더러워서 안 만진다. 메롱.”
기대를 품고 다가왔던 친구들은 경계심을 낮추지 않는 렌에게 질려 다른 고양이에게 관심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자 고개를 뺀 렌이 털을 낮추었다. 렌이 원했던 대로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으니 류제는 마음 언저리가 무거웠다. 자신만큼은 안전하다고 여겨주는 건 좋지만 이건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친하게 지내줘. 왜 그렇게 날이 섰어? 네 친구잖아. 정말 기억 안 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재경에게는 해피 엔딩을 향한다는 열망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뻗히는 목적 모를 손들이 싫었다. 숨을 죽인 고양이 렌은 묵묵히 사람 무리를 노려보았다.
“유네 귀여워어.”
“얌전해 보였는데 미나도 까칠하네. 고양이 아니랄까 봐 도도하긴.”
만지지 못하는 렌에게 빈정 상한 친구들은 비키나 유네, 미나와 같은 다른 고양이들에게 애정을 쏟아냈다.
왕녀야 루이나가 워낙 강경하고 세라는 늑대 귀 군인이 데리고 가버려서 이 세 고양이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는데 그중 소심하고 개냥이 같은 유네가 독보적이었다.
“비키 님은 잘못 만지면 입에서 불을 뿜으니까 조심해. 그래도 렌보다는 낫지.”
친구들이 주는 간식을 받아먹으며 힐끗힐끗 경계하는 비키와 비키 뒤에 숨은 유네는 렌과 어울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류제에게 가고 싶어 하던 미나는 렌이 경계하는 바람에 무산되자 류제의 품에 안긴 렌을 심술궂게 흘겼다.
“사이좋게 안 지낼 거야?”
렌만 따돌려지니 류제가 살살 달랬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분명 다들 좋아해 줄 텐데 왜 이럴까.
아무리 류제가 비키와 유네를 질투했기로서니 렌이 친구를 얼마큼 바랐는지는 알았다. 렌의 미들 스쿨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이야기해 주지 않아 몰라도 지금껏 느껴온 걸로 짐작하면 아마 그럴 것이다.
강한 척만 잘하고 정작 중요할 땐 숨어버리잖아. 하물며 일기조차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게 한다. 이런 성질을 잘 숨겨오다가 고양이가 되니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가.
“앗.”
고양이 렌은 기어코 류제에게서 벗어나더니 학급 뒤에 있는 높은 장식장 위에 몸을 숨겼다. 렌은 천장과 마주 닿아있는 작은 틈새로 들어가 어둠 속에서 눈동자를 빛냈다.
“자, 자! 집중. 제자리에 앉으렴. 진도 나가야지.”
1교시 수업 종이 치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학생들이 볼멘소리와 함께 고양이들을 놓았다. 장식장 위에 숨은 렌을 강제로 내릴 수 없던 류제도 리드줄을 늘려 책상에 묶어놓았다.
“정신 사납구나. 어수선한 건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공부를 해야 앞서나갈 수 있단다. 교과서 102쪽을 펴세요.”
책걸상에 앉은 학생들이 각자 교과서를 꺼냈다. 교실이 조용해지자 비키와 유네가 보호자 품 안에 앉아 주변을 기웃거렸다. 왕녀는 지금껏 자지 못한 잠을 실컷 자려는 듯 루이나의 무릎에 앉아 똬리를 틀고 눈을 감았다.
미나는 기어코 1반 룸메이트의 손에서 벗어나 류제의 무릎에 올라왔다.
렌의 자리를 미나가 차지하자 류제는 속상했다. 이게 다 자기가 이상한 마음을 품는 바람에 벌을 받은 것 같았다. 귀엽긴 해도 렌은 고양이가 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류제의 염려는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어갔다.
* * *
세라 대신 8반 임시 담임 자리에 오른 루비니 아로즈네그 소위, 통칭 늑대 귀 군인의 첫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 시간이 되었다.
다른 반 학생들과의 합동 훈련은 실기 시험 때에나 가능하던 일이라 8반이 아니었던 밴드부와 미나의 룸메이트, 루이나 등은 8반의 실전 수업 분위기를 신기해했다. 마지막 교시에 있는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을 언제 또 만끽하겠어?
“몸을 다 풀었다면 정렬하고 조용히 하거라!”
보호자들을 따라 기간트리카 경기장으로 산책 나온 고양이들로 어수선해진 학생들을 늑대 귀 군인이 서툴게 정리했다.
체계가 확실한 군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켜보자면 그녀도 어렸을 적 이렇게 지지리도 말귀를 못 알아먹었나 은사께 물씬 죄송했다.
“좋군.”
그녀가 원래 세라가 서있던 자리에 서서 헛기침을 했다. 정작 시선이 모이자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안타깝게도 사태가 정상으로 복구되는 날까지 내가 이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교육 자격증이 없어 남을 가르치는 재주가 부족하지. 너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밀로니 중위… 선생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너희를 가르치시는지도 모르니 내가 너희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서툴 거다. 그래도 일을 도맡은 이상 선생님을 대신해 유용한 것을 가르쳐야 하겠지.”
늑대 귀 군인이 자신의 발밑에서 알짱거리며 놀고 있는 고양이 세라를 흘겨보며 남몰래 한탄했다.
수인화 어빌리티의 비밀을 풀고 싶어 실험에 참가한 건데 왜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하는지 시련이 기구했다.
“무엇을 알려줘야 너희들이 이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까 고민한 결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간트리카 활용법을 알려주는 것이 사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질문해 주기 바란다.”
교과과정에 벗어난 수업이라고 불평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과 달리 8반 학생들은 설레는 목소리로 환호했다.
세라의 수업도 재미있지만 학생의 수준에 맞는 훈련법을 적용해 수위가 낮고 안전했기에 군인의 훈련법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하자 경기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제외한 학생들이 집중하며 눈을 빛냈다.
“내가 준비한 수업은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이다. 부분 장갑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 대비할 때 유용하다. 어렵지만 이번 일주일간 잘 배워두면 미래에 나쁘지 않게 써먹을 수 있다.”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 부분 장갑이 뭐지?”
“그러게. 비키 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은데.”
“부분 장갑이라면 몸에 기간트리카 파츠 한 부분만 장갑하는 건가요?”
“비슷해. 학생용에도 부분 장갑 기능이 있지만 수업에 따로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군용과 학생용 기간트리카는 음성으로 트리거를 작동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점이 있지만 기반하는 시스템이 같은 이상 요령은 똑같다. 기간트리카 장갑.”
학생용 슬렉터로 교체한 그녀가 무덤덤하게 외치자 부스터가 있는 팔목까지만 기간트리카가 장갑되었다. 그걸 컨트롤해 내니 트리거를 외치면 무조건 전체 장갑이 되는 줄 알던 학생들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저런 건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던 노하우였다. 자신의 어빌리티를 빠짐없이 파악해야 가능한 고난이도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기간트리카가 전신에 장갑될 때까지의 시간조차 아까울 때도 있지. 예를 들면 병마와 싸우게 될 때 헬멧 수동 장갑 대신으로 쓰면 된다.”
그녀는 이번엔 반대편 손만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오랜만에 써보는 학생용 기간트리카에 옛날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잠시 추억을 회상했다.
“우와. 저런 게 가능했었구나. 전혀 몰랐어.”
“저기 아로즈네그 소위님. 부분 장갑을 하는 방법은 뭔가요?”
“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현실로 돌아온 그녀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손의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았다. 늑대 귀를 쫑긋거리며 고민하던 군인이 반대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어빌리터만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지 아는… 아니?”
그녀가 군인 특유의 딱딱한 말투를 세라를 흉내 내며 상냥하게 바꾸었다.
공부를 잘하고 아는 게 많은 친구들이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학생들 중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녀가 자유자재로 장갑의 면적을 늘리며 현상을 풀어나갔다.
“어빌리티는 무형의 것이지. 어떤 사람은 ‘기’의 돌연변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몸에 흐르고 있단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수인화’ 계열의 어빌리터들은 어빌리티가 몸을 순회하며 수인의 특성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순환하는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컨트롤을 하고 있기에 어빌리티가 발현이 되는 거란다.”
“어빌리티의 흐름을 컨트롤하는 거랑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이 슬렉터와 슬렉터가 만들어내는 기간트리카가 바로 어빌리티에만 반응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 분명히 상관이 있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군인이 수업을 진행한다고 해서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떠올리며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던 류제도 의외로 유익한 내용에 감탄했다.
기간트리카는 마족과 싸울 때 움직임에 도움을 주는 병기라고만 생각해서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은 그녀의 설명에 쉽게 빠져들었다.
“대기 중에는 인간이 증명하지 못한 형태의 물질이 상시 떠다니고 있단다. 이 물질을 드라코니스 입자라고 아주 먼 옛날 어느 학자가 명명했지. 그것은 물질의 세 가지 상태인 액체, 기체, 고체도 아니며 특정 정보를 저장할 수가 있고 그 정보는 어빌리티와 만나면 호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입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이나 그것이 우리를 마족과 대적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 거란다.”
“어빌리티에 반응하는 물질이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우리가 기간트리카 장갑을 외치면 슬렉터에 있는 센서가 물질에게 정보를 전달해 우리 몸에 장갑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래. 사용자의 어빌리티에 슬렉터가 반응하여 저장된 정보를 토대로 입자가 모여 기간트리카가 되는 것이니.”
“그럼 알라마니 기술관에 전시된 옛날 기간트리카들은 뭔가요?”
“당연히 모형이지. 어빌리티가 없으면 물질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어.”
그녀가 장갑을 완전히 해제하였다.
어빌리터만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이유를 깨달은 류제가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품 안에서는 고양이 렌이 혀로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
그는 어빌리티가 있어야 마족과 싸우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입학생이 어빌리터뿐이라 착각했다.
비어빌리터가 싸우지 않는 이유는 기술적 문제라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애초부터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없었던 거였다.
“기간트리카 말고도 드라코니스 입자는 어빌리티와도 연관이 있지만 이건 나중에 배우게 된다. 지금은 기간트리카에만 집중하자꾸나.”
“네. 소위님.”
“학생용 슬렉터는 안전상 특정 단어가 트리거가 되어 어빌리티 센서가 활성화된다. 센서가 활성화되면 슬렉터가 착용자의 어빌리티를 감지하여 종류를 판별하고 전신을 스캔해서 정보를 인출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공기 중의 드라코니스 입자가 어빌리티를 따라 우리 몸에 딱 맞는 형태로 장갑되는 것이다. 이해가 되었니?”
그녀가 학생들이 자세히 볼 수 있게끔 다시금 천천히 예시를 보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수인화 단계를 높여서 덩치를 키우고 짐승에 가깝게 몸을 만들었다. 그 상태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니 저번 냥냥이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을 때처럼 수인화 버전의 기간트리카가 장갑되어 특수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빌리티에 따라 유연하게 기간트리카가 장갑될 수 있는 것이고 어빌리티의 순환 정도를 조절해 부분 장갑이 가능한 것이다. 부분 장갑을 연습하는 것도 어빌리티 컨트롤 연습에 큰 도움을 주지. 전체 장갑은 편하지만 세심한 움직임에 제약을 줄 때도 있거든. 필요한 부분만 움직임을 강화하면 보다 정밀하게 적을 공략할 수 있어.”
“그런 걸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하나요?”
“그 점이 어빌리티 심화 운용에 해당한단다. 몸에 흐르고 있는 기를 느끼는 건 난이도가 높아. 자신의 어빌리티가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으며 발현할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잡아낼 줄 알아야 해.”
기를 느끼라니. 1학년 학생들은 숨을 쉬는 일처럼 무의식적으로 어빌리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흐름을 읽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걸을 때 발의 어떤 근육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서 땅을 디디게 하는지를 몸으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였다.
“그럼 기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본디 3학년 때 하는 수업이라 1학년인 그들이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이 또한 자신의 어빌리티를 스스로 분석하게끔 도와주는 세라의 수업과 비슷했기에 학생들은 취지를 이해하고 실전 연습에 나섰다.
“명상하며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울리도록 집중해 보거라. 그다음 단전으로 내려가 기를 찾고 흐름을 따라가. 기운을 장갑하고 싶은 부위에 집중시키면 부분 장갑이 되는 것이다. 기운을 집중시킨다는 건 어빌리티를 발현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거기, 조심해!”
손에 어빌리티를 집중하던 학생 한 명이 실수로 어빌리티를 발현해서 주변 학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운을 집중시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 몇 번 실패를 한 학생들이 모르겠다며 머리를 싸맸다.
늑대 귀 군인의 설명을 듣고 성공한 학생은 류제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역시 류제라면서 박수를 치며 그를 치켜세웠다.
“생각해 보니 류제는 군용 기간트리카의 무언 장갑도 단번에 해냈었지.”
“하아, 나도 류제처럼 컨트롤 센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난 뭐가 문제지? 내 어빌리티인데 생판 모르는 사람 같아.”
쑥스러워진 류제는 부러 입을 다물었다. 겸손한 편은 아니지만 차라리 렌이 옆에서 잘난 척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 덜 부끄러웠다.
재경이 보충수업을 듣느라 바빴던 여름방학 내내 학교에 남아 어빌리티를 연구했던 류제인지라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빌리티와 불쾌한 마음이 들 때마다 치솟는 마기의 구별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마기는 몸 깊숙한 곳에서 똬리를 튼 채 겨울잠을 자고 있지만 어빌리티는 언제나 몸을 순환하며 그가 원할 때 원하는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거침없이 흘렀다.
흐름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은 어렵지 않았다.
“케엑, 짜증 나네. 야, 냥냥아. 너도 우리 반을 대표해서 뭔가 좀 보여줘 봐.”
“후냐아… 안 되냥. 저건 류제 신리라서 가능한 일이양. 나 같은 건 완전 하찮게 보이냥.”
“시꺼. 나약한 소리 하지 말고 4반의 자존심을 보이란 말이야. 빨리빨리 해내지 못할까!”
“그렇게 말해도…….”
선생님들에게 어빌리티 컨트롤 능력을 높이라 잔소리를 들었던 고양이녀는 연습하면 재채기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인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늑대 귀 군인의 말대로 몸에 흐르는 어빌리티를 감지하며 기간트리카 장갑을 컨트롤해 봤지만 아직 그녀에겐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나 보군.”
성공하는 학생이 저조하자 늑대 귀 군인은 버거운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나 고민했다. 그녀는 대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지. 버퍼 계열의 어빌리터가 너희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닌 다른 어빌리티가 내 몸에 덮어씌워지면 나의 어빌리티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거든. 조를 짜줄 테니 각기의 어빌리티를 느껴보는 것까지만 성공해 보자.”
버퍼 계열 어빌리터들을 필두로 조가 형성되었다. 버프를 받기 전과 후의 신체 변화에 집중하며 어빌리티의 흐름을 찾던 학생들은 이게 기의 흐름이 맞나 애매했다. 류제에게 요령을 물어도 답이 명쾌하지 않았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한탄하는 학생들 뒤로 나무에 묶어두었던 고양이 렌이 풀밭에서 발길질을 하며 놀았다.
혼자서만 수업 내용을 마스터한 류제가 쭈쭈 혀를 굴리며 렌을 불렀다. 매일 승부욕을 보이며 귀찮게 굴던 비키도, 옆에서 알짱거리던 유네도 없으니 심심했다.
류제가 고양이 렌과 한가하게 여유를 부리는 걸 발견한 늑대 귀 군인이 다가왔다. 높게 솟은 늑대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 냄새를 맡은 고양이 렌이 움찔거렸다.
“유망주에겐 내가 가르칠 것이 별로 없군. 수업이 지루하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딴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렌이 신경 쓰여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냐. 본래 너희들은 일주일간 그 어떤 수업보다 수인의 관찰 및 기록이 중요하니까. 너는 네 본분을 다하고 있는 거야.”
연습할 시간을 할애하며 고양이 수인을 관찰하는 그를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오해를 하는 그녀의 귀가 만족스럽게 쫑긋거렸다.
다른 곳에 리드줄을 묶어둔 고양이들은 학생들이 장갑한 기간트리카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걸 보더니 관심을 가져달라며 크게 울어댔다.
“우아앗! 비키냥이 리드줄을 풀었다!”
“날 쫓아오는데? 역시 비키 님은 고양이가 되었어도 기간트리카를 좋아하나 보다.”
특히나 호기심 왕성한 비키는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을 간신히 해내는 친구들을 쫓아다니면서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뭐든 시작하면 끝장을 봐버리는 그녀의 성격이 반영된 듯하다.
루이나가 애지중지 보살피는 니냐롯트는 느긋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더러운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 왕녀의 체통을 문제 삼은 루이나가 왕녀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못하고 덥석 안아 들었다.
마음대로 다니고 싶은데 루이나가 귀찮게 굴자 짜증이 난 고양이 왕녀가 루이나에게 가볍게 전기 충격을 가했다.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류제가 서있는 곳까지 났다.
“윽, 아프겠다. 왕녀도 고양이가 되더니 인정사정없구나.”
“흠, 흠. 좋은 정보를 얻었군.”
왕녀의 어빌리티인 ‘뇌우’ 중 번개 능력을 날씨 변화 없이 이루어내자 왕녀의 어빌리티 잠재 능력이 뛰어남을 관찰한 아로즈네그 소위가 수첩에 옮겨적었다.
심정에 따라 어빌리티가 반응해 항상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바람에 더 성장을 못 한 케이스인가 싶다.
편하게 뛰어내린 니냐롯트는 바닥에 누워 길게 기지개를 켰다. 루이나는 포상인지 벌인지 모를 전기 충격으로 뒤로 넘어가 기절했다. 절대 왕녀를 만지지 못하게 하는 루이나가 쓰러지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양이 왕녀를 구경했다.
“꼴좋다, 루이나.”
“꺄아~ 왕녀님께서 햇빛에 일광욕하고 있어. 너무 귀엽다.”
“저 복슬복슬한 꼬리 좀 봐. 늘어져 있는 거 완전 취향이야. 고양이가 되셨어도 너무 고귀한 거 아냐? 나도 오늘부터 친위대에 들어갈까 봐.”
역시 왕녀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가졌다. 류제는 왕녀가 고양이가 되기 전 루이나가 없는 사이 벌어진 음해 사건을 떠올렸다.
멋대로 왕녀를 쓰다듬는 손길 속에서 그런 악의적인 집착이 발생할까 걱정이 앞서는데 늑대 귀 군인이 먼저 다가가 학생들을 만류했다.
학생들을 왕녀에게서 떨어뜨려 놓은 아로즈네그가 루이나를 깨웠다. 군인으로서 왕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기보다는 저러다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상사로 연대책임에 얽히는 것이 싫은 거겠지.
문득 루이나가 항상 정색하며 자신을 경계하던 모습과 자신을 겹쳐본 류제는 괜히 렌을 쓰다듬으며 망상을 휘휘 지워버렸다.
“너도 저쪽에 가서 친구들이랑 같이 놀아.”
“냐아옹.”
“네가 자꾸 혼자만 있으려고 하니까 걱정이 돼서 다른 걸 못 하겠잖아. 인기를 끌고 싶은 거 아니었어?”
오늘의 마지막 교시까지 렌은 다른 학생들이나 고양이 수인들하고 어울리지 못했다. 고양이가 되기 전에는 막역한 사이였으면서 비키랑은 눈만 마주치면 싸우려고 하고, 친구들이 손만 뻗으면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갔다. 혼자서만 동떨어진 곳에 묶여있는 것이 처량했다.
“와앗, 위험해! 브레스 나온다!”
“캬아아아!”
기간트리카를 쫓아가던 고양이 비키는 제 분에 겨워 화염을 뿜어냈다. 그것이 학생들에게로 향하자 늑대 귀 군인이 달려가 기간트리카 부분 장갑으로 여유롭게 화염을 막아내었다.
“조심하거라.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는 참 다혈질이군.”
“소위님, 너무 멋져요. 짱이야!”
“너희는 별 게 다 멋지구나.”
커다란 기계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무서운 고양이 유네는 아무 품에 들어가 애교를 부리며 자신을 지켰다. 유네는 태생적으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성격인 듯하다.
원래 이 자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세라도 개냥이가 되어서 묘생을 즐겼다. 친구들의 쓰다듬을 받는 미나는 도도하게 앉아 불만스레 꼬리를 탁탁거렸다. 류제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집착이 느껴졌다.
모든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중에 내 노고를 얕보면 꿀밤 한 대로 안 끝날 거야. 듣고 있어, 렌?”
“우냐옹?”
자기한테 하는 말인 건 아는지 고양이 렌이 풀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류제를 쳐다보았다. 아무렴 좋다며 류제가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렌은 그래도 류제의 손만큼은 거절하지 않았다.
부분 장갑을 해낸 학생은 별로 없었지만 시간은 일주일이나 남아있으니 오늘 수업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아로즈네그 소위의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은 기초 어빌리티 컨트롤 단계인 8반 학생들에게 난이도가 높아도 굉장히 유익해서 다음 수업도 기대되었다.
고양이 수인들의 어빌리티 사용 관찰도 마쳤고, 고양이들과 밖에 나온 기념으로 아로즈네그 소위가 학생들에게 고양이 간식을 나눠주었다. 지능이 낮아져 낯을 가리는 고양이들과 친해질 시간을 준다고 나름 배려해 준 것이다.
“간식 앞에서는 장사 없지?”
렌을 꼬여내기 위해 여학생들이 간식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고양이 렌은 간식을 눈앞에 두고도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친구들은 불만족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왜 안 먹는 거지? 류제, 네가 한번 줘봐. 네가 주면 먹나?”
“글쎄. 사람 있는 곳에선 안 먹을 것 같은데. 아까도 잘 안 먹어서 꽤 애먹었어.”
그의 말대로 류제가 대신 간식을 들고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류제가 내밀어 준 간식은 미나가 와서 냉큼 먹고 사라졌다. 렌과 거리를 둔 후 만족스럽게 쩝쩝거리는 모습이 참 얄미웠다.
“우우우…우우.”
좋아하는 간식을 빼앗기자 렌은 용심이 났다. 친구가 새로운 간식을 내미니 욕심이 생긴 렌이 이번엔 킁킁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와, 세상에!”
“쭈쭈쭈… 착하지?”
“먹어? 먹는 거야?”
류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족의 발전이다. 그 틈을 타 다른 여학생이 뒤에서 고양이 렌을 억지로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렌이 핑크 젤리를 보이며 반항했다. 숨겨두었던 발톱이 날카롭게 드러났다.
“캬아악!”
“으앗!”
그녀는 고양이 렌이 손을 강하게 물어버리자 놀라 밀쳐버렸다. 고양이답지 못하게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렌은 뒤로 물러나 털을 세웠다. 류제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다고, 렌! 간식을 주려고 했던 거잖아.”
“우…우우우…우우…….”
“아파라.”
그녀는 피가 철철 나는 손을 붙잡아 지혈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렌을 고양이보다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인간일 때로 생각해서 장난을 친 것 같았지만 기억이 없는 렌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장난친 건데 너무하네. 자, 간식이라니까? 간식 안 먹어?”
“하여튼 렌 지미. 됐어. 아무리 고양이라도 렌한테 알랑방귀를 뀌다니 자존심 상해.”
리드줄이 팽팽해질 때까지 거리를 둔 고양이 렌은 다시는 다가오지 않았다. 성장한 줄 알았더니 퇴보했다. 다른 사람이 안아 든 것이 그렇게도 싫었나.
고양이 렌은 경계심이 심해서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절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에서 류제가 따로 먹일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 주는 간식에 호기심을 보여서 놀랐는데 저런 경계심은 학을 뗄 만했다.
“간식은 그냥 유네나 주자.”
“세라 선생님~ 저 렌한테 물렸어요. 치료해 주세요.”
그녀가 세라에게 달려가 징징거리자 날벌레 사냥을 하고 있던 고양이 세라는 우냥? 하고 대답을 했다.
학생이 피가 방울방울 흐르는 상처를 가까이 대자 딴짓을 하던 세라는 마지못해 상처를 핥아주었다. 어빌리티를 쓴 것인지 상처가 금세 사라졌다.
“세라 선생니이임.”
누구와는 다르게 상냥한 태도에 학생들이 감동을 해서 고양이 세라를 꽉 껴안았다. 싫어하던 세라는 학생들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면서 놀았다.
“자, 이제 아무도 없어.”
“…….”
“괜찮으니까 제발 나와.”
한껏 경계심에 부푼 렌은 류제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나무 뒤에 은밀하게 숨어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이 사태를 류제 탓하는 것 같았다.
류제는 협조적이지 못한 친구가 난감해 나무에 기대어 다른 이들을 구경했다. 렌의 시선에서 보니 외롭고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남은 시간 동안 고양이들과 놀아주던 학생들은 삼삼오오 교실로 돌아갔다. 서늘한 날, 품에 안은 고양이는 캠프파이어를 둘러싼 느낌을 주었다.
사람을 경계하는 렌을 진정시키고자 시간 간격을 둔 류제도 말썽쟁이 고양이 수인 한 마리를 안았다. 렌의 발바닥이 흙투성이라 체육복이 금세 더러워졌다.
먼지 묻은 체육복을 가볍게 털던 류제는 학생들이 다 돌아갔는데도 목석처럼 경기장에 서있는 늑대 귀 군인을 발견했다.
기간트리카를 가르치는 것은 핑계이고 수인들을 관찰하는 데에 비중을 더 두던 아로즈네그 소위는 그때까지도 집중해서 수첩에 메모를 적고 있었다.
“특별한 거라도 있었나요?”
류제는 소심한 유네조차 친구들에게 마음을 여는데 왜 렌만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성격 말고 다른 무엇인가가 렌에게 영향을 끼쳐서 혼자서만 고립되는 건가?
늑대 귀를 쫑긋거리던 그녀는 무덤덤하게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빌리티에 컨트롤이라는 것이 없어. 자기 마음대로 내뱉는군.”
그녀의 관찰 목적은 수인들의 성격 파악이 아니라 어빌리티의 활용에만 머물렀다. 그것이 그녀의 목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김이 빠진 류제가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야 아무래도 지능이 없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딱 저번 수신제 때 네 친구 정도로만 수인화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고양이 소녀가 어빌리티 컨트롤 능력을 키우기만을 바라야지. 보고서에 올릴 수 있는 정보를 발견해서 그나마 체면을 차렸어.”
‘분석’이라는 미나 플로리아의 어빌리티는 관찰이 불가능해서 안타까워. 라고 말을 덧붙인 그녀는 쯧쯔 혀를 차며 고양이 세라를 데리고 교무실로 돌아갔다. 그녀조차 떠난 기간트리카 경기장은 스산했다.
류제도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동급생과 선배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류제가 안은 고양이를 발견한 학생들이 그를 둥글게 둘러쌌다.
귀여운 고양이 수인을 만져보려고 시도하는 손길이 여럿 있었으나 렌의 날 선 발톱 덕에 길이 생겼다. 못마땅해진 류제가 그들을 헤치고 교실로 들어갔다.
“밖에 왜 저렇게 사람이 많아? 귀찮네.”
“이유가 뭐겠니? 고양이들 구경하러 온 거지.”
것 참 할 일도 없네. 사람들이 싫어 발톱을 세우고 매미처럼 매달린 고양이 렌을 다독인 류제가 자리에 앉았다.
종례 전까지 학급 회의 시간이지만 반장인 비키가 저 모양이고, 다른 반 학생들까지 섞여 교실이 비상사태이니 부반장인 그를 필두로 할 회의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번 주 학급 회의를 다 함께 고양이를 귀여워해 주는 시간으로 변경하기로 멋대로 합의를 본 듯하다.
의미 없는 시간이라 치부하기엔 섣불렀다. 고양이 수인 보호자들이 담당 고양이들을 중심으로 모여 수다를 떠는 걸 보니 아침부터 갑작스레 8반에 배정되었던 밴드부 일동 등이 이 기회를 말미암아 8반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생산적이었다.
“유네 핑크 젤리 너무 귀여워. 귀염둥이라니까. 고양이가 되어도 귀여울 수가 있나. 고양이는 원래 귀엽지만.”
“유네야, 일광욕하고 있어? 햇빛이 좋아?”
“우냐앙. 하와아암.”
간식도 많이 얻어먹고 좋아하는 쓰다듬도 실컷 받은 유네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책상 위에 게으르게 늘어져 만족스럽게 꼬리를 두드렸다. 그 귀여움은 ‘무게’ 어빌리터 소녀조차 손을 뻗고 싶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신기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인사했던 룸메이트가 고양이가 되어버렸다니. 왜, 미나는 얌전해서 고양이 같은 이미지가 아니잖아. 늦게까지 방에 안 들어와서 걱정하다가 아침에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너희는 안 그래?”
“우리도 똑같지 뭐. 유네가 고양이라고? 이게 뭐람!”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수인이지만 말이야. 그만큼 우리 반 냥냥이가 류제 신리만큼 대단한 애야. 장하다, 냥냥이.”
“너무 치켜세우지 말냥. 나는 기간트리카 수업 때 완전 아무것도 못 했냥. 걱정이양.”
“그 늑대 소위님이 어빌리티 개발하라고 엄청 귀찮게 군댔지? 너도 참 기타 치다 말고 고생하는구나. 우쭈쭈. 유네야, 하품해쪄?”
류제가 리드줄을 책상에 묶어두고 교복으로 갈아입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옆자리에서는 사이가 좋아진 고양이들―유네와 비키, 미나―을 두고 보호자들이 시시덕거렸다.
“오늘 기간트리카 수업 의외로 괜찮지 않았어? 임시 담임이 군인이라 딱딱하지 않을까 했는데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하시더라. 세라 선생님 수업도 들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아아, 세라 선생님 냥이도 착하고 귀여웠지.”
“어? 세라 선생님 수업 들어본 적 없어? 왜?”
유네에게 혀 짧은 애교 소리를 내며 턱을 쓰다듬어주던 유네의 친구들이 의외라며 물었다. 당연한 사실을 1반인 미나의 룸메이트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세라 선생님은 1학년 짝수 반만 수업하시잖아. 듣고 싶어도 못 들어.”
“맞아, 우리도 들어본 적 없어.”
밴드부이자 3반의 ‘가시’와 ‘투시’ 어빌리터가 연달아 동의했다. 그녀들은 홀수 반이라서 세라의 기간트리카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기간트리카 이야기가 나온 그녀들은 세라의 수업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다가 문득 류제의 책상 위에 앉아있던 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양이를 농락하는 그들의 손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라, 웬일이래. 렌냥이가 우리한테 관심을 보이는데?”
“우리가 아니라 유네를 보는 거 아니야? 드디어 쟤도 다른 고양이들한테 관심이 생긴 걸까?”
“그보다는 류제가 없어서 심심하나 봐. 없으니까 말하는 건데, 류제도 지나치게 과보호야. 루이나한테 뭐라 할 게 아니라고.”
“야, 렌. 너도 이리 와서 친구들하고 같이 놀아. 혼자서 뭐 하냐?”
그녀들이 손바닥을 보이며 렌을 불렀지만 렌은 가만히 앉아 꼬리만 두드릴 뿐 아무런 행동도 개시하지 않았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그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쟤도 참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고양이가 되니까 더 모르겠어.”
“렌은 뭐, 렌이니까.”
“맞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렌이 며칠 전부터 종례하자마자 우리 반으로 와서 냥냥이 찾았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
“그래? 이유가 뭔데?”
“낸들 아니.”
“내가 당사자인데 왜 난 처음 알았냥. 들어본 적 없냥.”
렌 지미의 기행이야 누가 의미를 알겠냐만,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냥냥이는 어리둥절해졌다. 방과 후에는 늑대 아줌마한테서 도망을 치느라 몰랐는데 렌이 날 찾았다고? 별일이네. 하기야 요 며칠간 내가 정신이 없기는 했지.
“둘이 또 작당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아니양. 밴드 일도 없는데 그럴 리가 있냥.”
수신제 이후로는 렌과 개인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던 고양이녀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뭔~가 수상쩍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밴드부 일동은 류제의 책상 위에서 꼬리를 탁탁 치는 렌을 흘겼다.
“유네, 거기서 뭐 해! 큰일 난다 너?”
“와악, 렌이 화풀이하기 전에 빨리 이리 와.”
그녀들이 한눈파는 사이 활개 치던 유네가 렌에게 관심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유네가 렌의 냄새를 맡았다. 고양이 렌은 가까이 다가오는 고양이 유네가 싫은 듯 고개를 뒤로 빼고 몸을 낮추었다.
“오옷, 비키 님이 갑자기 움직인다. 뭐지? 파란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하면 이상한가?”
그게 왠지 ‘가시’ 어빌리터의 무릎 위에 있던 고양이 비키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비키의 눈이 점점 샐쭉해졌다. 그녀는 어제부터 눈에 거슬리는 고양이 렌에게 날 선 경고음을 보냈다.
“우우…….”
고양이 비키가 미나의 책상 위에 껑충 올랐다. 유네를 사이에 두고 고양이 두 마리의 눈이 마주쳤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렌의 털이 바싹 서며 덩치가 커 보이도록 등을 휘었다. 또다시 비키와 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다.
“있잖아. 근데 비키랑 렌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무슨. 당장 비키 치워!”
옷을 갈아입고 온 류제가 불길함을 감지하고 뒤늦게 외쳤다. 투견들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 수인들의 싸움을 보고 싶었던 밴드부 일동이 마지못해 비키를 말렸지만 때는 늦었다.
자신의 영역을 과시하는 비키가 사정없이 렌에게 덤벼들었다. 사이에 있던 유네가 놀라서 펄쩍 튕겨 나왔다.
“와아악! 와악! 조심해! 우와! 책상 탄다!”
“뭐야? 뭔데?”
“비키랑 렌이랑 또 싸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대사다. 비키와 렌이 매일 싸우기는 했지만 고양이의 영역 다툼이란 인간과는 엄연히 달랐다.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와 우다다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을 누비며 한바탕 싸움을 한 두 마리의 고양이들 중 승자는 비키였다. 류제가 말릴 새도 없이 비키에게 호되게 당한 렌은 꼬리털이 새까맣게 탔다.
“냥!”
그녀들에게 돌아오는 비키는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했다. 높은 곳에 도망간 고양이 렌은 류제를 보고 내려달라고 찡찡거렸다. 영역 싸움에서 밀려난 게 서러웠는지 렌은 류제의 품에 안겨 펑펑 울면서 꼬리를 휘적거렸다.
왕녀가 번쩍 고개를 들어 고개를 흔들거렸다. 니냐롯트에게 감전당했던 루이나는 화들짝 손을 뗐다. 정전기가 일어서 놀랐지만 충성스러운 루이나는 영역 싸움에 호기심을 보이는 왕녀를 어색하게 끌어안았다.
“역시 세다, 비키 님. 고양이가 되어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상대는 렌 지미잖아. 하찮을 만도 하지.”
“유네는 어디로 갔어?”
“무서워서 도망간 거 같은데. 참 간도 작아. 저기 있네.”
그녀가 ‘무게’ 어빌리터에게 도망간 유네를 가리켰다.
고양이가 되었다지만 유네가 렌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의미심장했다. 유네의 친구들은 특히나 유네가 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씁쓸했다.
냥냥이는 고양이가 되면 기억이 없어진다고 했지만 이 일방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게 눈에 밟혔다.
“아까 무슨 소리가 난 거야? 네가 잠깐 들어갔다 와봐. 궁금해 미치겠네.”
“그…그래도 되려나. 루이나는 무서운데.”
“나도 만지고 싶어.”
“왕녀님도 있어? 보여?”
교실 바깥에서 고양이들 구경을 온 사람들은 종이 쳤는데도 문 주변을 서성거렸다. 더 이상의 동물원 원숭이 취급은 사양이었던 8반 학생이 성큼 문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종 쳤으니까 반으로 돌아가세요!”
“우왓.”
문이 닫히자 바깥 소음이 사그라지고 교실은 8반 학생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교실 안을 살피려는 사부작거림이 포착되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세라 없이도 솔선수범하는 학생들은 어른이 부재한 집을 지키는 어린아이 같았다.
비키 때문에 겁에 질린 고양이 렌을 보듬어준 류제가 또 사고를 친 그녀들에게 불쾌감을 표했다. 이래서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었던 거다.
“비키는 렌한테 왜 또 달려든 거야?”
“몰라. 렌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영역 싸움일걸. 고양이는 그런 거 잘하잖아. 책에 적혀있었어. 수인은 고양이랑 다르니 그런 거 안 하려나?”
고양이 렌에게 자꾸 거부당하는 게 싫어서 도서관에서 고양이 관련 책을 빌려와 읽던 친구가 자신감을 되찾고 다가왔다. 자주 들어보는 질문이 아니었던지라 냥냥이는 턱을 싸매고 고민했다.
“잘 모르겠냥. 8대 2? 정도의 비율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양. 완전한 고양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냥. 손을 많이 탄 똑똑한 집고양이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냥.”
“렌은 집고양이보단 들고양이 같은걸.”
렌을 들고양이보다는 바보로 취급하기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닐까. 비키에게 호되게 당하고 류제에게 매달려 있는 렌을 위로해 주려 그녀들이 질리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렌, 괜찮아? 불쌍한 꼴 좀 봐. 많이 아파? 아까 간식 많이 먹었어? 간식 줄까?”
분해서 성질머리가 치솟은 렌을 향해 다가오는 손이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란 작고 유약하고 귀여운 것을 보면 거부당해도 손이 절로 나가는 것이 본능인가 보다.
안 그래도 비키 때문에 약이 올라 있는 렌은 그 손들이 싫어 류제의 옷 안으로 숨었다.
“와아악! 렌, 잠깐만. 아야, 아야야! 아파!”
“꺄악! 조심해. 본 건 우리 잘못 아니다?”
발톱을 세우고 몸을 타는 렌 때문에 옷이 들려 속살이 보였다. 맨살을 보이는 수치보다는 발톱이 아팠던 류제가 뒤늦게 ‘강화’ 어빌리티를 걸었다. 이제는 살갗이 간질간질해졌으나 민감한 부분에 털을 문대는 감촉이 부끄러웠다.
“됐어. 신경 안 써. 하루 이틀도 아니고.”
류제는 괜히 윗옷을 아래로 강하게 내렸다. 옷 안에서 불쑥거리던 고양이 렌은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흉곽을 들썩거렸다. 임산부 흉내를 내며 놀 때가 떠올랐지만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치사한 렌. 한 번만 만지게 해주면 덧나나. 쟤는 분명 기억이 있을 거야. 아니면 류제만 특별 취급할 이유가 없잖아. 우리도 렌이랑 친한 친구인걸. 차별하지 말라고. 렌 주제에.”
“냥냥아, 같은 고양이로서 네가 좀 어떻게 해봐.”
“냥? 저런 고양이는 내 말을 안 듣냥. 자기 세계가 확고하거냥.”
그래도 시도는 하고 싶었는지 냥냥이가 냐냐 울며 숨어버린 렌을 불렀다. 펑펑 울던 렌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뺐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냐옹. 냐아. 우웅?”
“우냐아… 야아옹.”
“냐. 냐아. 냐냐.”
고양이녀가 뭐라고 말을 하자 렌이 허심탄회하게 울기 시작했다. 마음을 놓은 듯 류제의 옷 속에 숨었던 렌이 책상 위에 뛰어내렸다. 고양이 렌이 류제를 제외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뭐야, 뭘 한 거야? 뭐라고 말한 건데?”
“여긴 내 구역이니까 다른 고양이가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해준다고 했냥.”
“와하하. 구역이래. 제법 고양이 같네, 우리 냥냥이.”
“뭐래냥. 나도 고양이냥.”
“그러니까 뭐래?”
“불을 뿜는 저 미친 고양이가 무서우니까 자기한테 못 오게 해달랬냥.”
고양이 언어 소통 능력에 친구들이 감탄했다. 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던 류제도 고양이녀의 어빌리티가 부러웠다. 이것만큼은 ‘강화’라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와. 대박.”
“와아. 렌이……!”
영문 모를 세계에서 지켜준다는 냥냥이가 믿음직스러웠는지 렌이 스스로 냥냥이에게 털을 비볐다.
고양이 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다니. 아무래도 그의 말을 들어주고 원하는 답을 해준 고양이가 그녀밖에 없어서였겠지만 냥냥이보다 렌을 더 오래 알아왔던 친구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유네는 사랑의 나무 아래에서의 일을 확실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렌이 유네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가정이 그녀들에게서 유행하던 차였다.
유네와 렌 모두와 친구였던 그녀들은 아무래도 불쌍한 유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서 상처받은 유네에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일관하는 렌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냥냥이가 고양이 렌을 조몰락거리며 노는 것을 류제와 밴드부 일동이 지켜보는 동안 유네의 친구들에게 누군가가 이상한 소문을 흘렸다.
“성질 나쁜 렌도 의외로 인기가 많네. 왜, 냥냥이랑 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진짜로 그래?”
“뭐? 냥냥이랑? 그게 무슨 소리야?”
“쉬잇. 조용히.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자세히 말해봐. 렌이랑 냥냥이랑 뭐가 있다는 건데?”
“수신제 때부터 둘 사이가 좀 수상해 보였어. 요즘에 매일같이 방과 후에 냥냥이를 찾았다고 했잖아. 렌이 냥냥이한테만 마음을 여는 걸 보니까 진짜 그런 것 같아. 나도 들은 건데…….”
그 감정에 불을 지핀 사람은 고양이 미나를 쓰다듬고 있는 미나의 룸메이트였다. 미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고 골골거리며 그녀를 받드는 인간의 손길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