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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2) (45/112)

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2)

“하아, 정말 바보 같아. 세상에 그런 바보도 없을 거야.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아하하, 그래도 렌 군 의외로 상냥한 면이 있잖아. 비키 양도 렌 군한테 호신술 배운 덕택에 좋은 점수 받았으면서.”

게임대로의 이야기라면 여태 이곳에 남아있어서는 안 되지만 수신제 고백 건의 여파로 렌의 흉을 보던 비키와 유네가 드디어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와 교실로 향했다.

“내가 걔한테 해준 게 얼만데 그…그 정도도 없으면 그게 사람이야?”

“하지만 렌 군은… 어… 렌 군? 이랑…….”

“뭐? 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어?”

니냐롯트와 렌이 불편하게 눈을 맞대는 모습을 발견한 두 사람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안 그래도 여름방학 때 왕녀와 렌 둘 사이에 기묘한 흐름이 있음을 정면에서 목격한 두 사람이다. 밀회를 훔쳐본 것 같아 그녀들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니냐롯트 학생은 어디인가요?”

“저기예요!”

복도 끝에서 류제가 세라와 함께 교실로 달려왔다.

세라는 멀쩡해 보이는 니냐롯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픈 듯이 발 한쪽을 떼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다급해진 그녀가 류제를 제치고 왕녀의 상태를 살폈다.

“류제! 어디 가?”

도서부 동아리실에서 원하던 책을 가져오던 미나가 복도를 질주하는 류제를 발견하고 외쳤다.

미나가 종종거리며 달려오자 성실하게 보폭을 줄인 류제는 미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미나는 뭐 그런 것이겠거니 피식 웃다가 왕녀를 걱정하는 척했다.

“왕녀님과… 세라 선생님이랑 류제도… 뭐야? 다들 여기서 뭐 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다들 안 돌아가고 뭐 해?”

비키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재경이 핀잔했다. 별일이다. 재경은 모든 히로인들이 온갖 방향에서 다가와 8반 교실 앞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참 대단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게임하면서 이런 장면은 없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경은 틀어진 톱니바퀴가 기적적으로 맞아떨어진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서 냥냥이와 그녀를 쫓는 늑대 군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냐냐아앙! 비켜양아앙!”

“절대로 못 도망간다!”

질리도록 들은 냥냥 소리다. 순식간에 다가와 창문을 여는 고양이녀와 재경이 돌진하는 자동차처럼 눈이 마주쳤다.

높은 창문을 넘어 가볍게 복도로 뛰어내리는 고양이녀는 눈을 반짝였다. 이게 다 렌 지미 쟤 때문이다. 짜증이 치솟던 그녀는 곧 코끝을 찡긋거리며 아릿아릿 재채기를 할 듯이 굴었다.

“어?”

그 슬로모션 속에서 재경은 그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이번 챕터의 호감도 이벤트의 시작은 왕녀와 고양이의 만남이 계기가 된다. 지금 이 상황이 그 계기인 것이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냥냥이는 복도를 거닐다가 왕녀랑만 만나야 하는데? 다른 히로인들은 왜……?

영문을 몰랐지만 재경은 일단 등을 돌렸다. 그의 감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게임에서 이런 장면은 없었다. 미연시 CG 일러스트로 들어가도 모자람이 없는 장면을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얽히면 안 되니 일단 도망가야 한다. 그 생각이 재경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저리 비켜!”

“우앗! 렌, 뭐 하는 거야.”

“렌?!”

“렌 군? 으앗!”

자리를 피하려다가 비키와 몸이 부딪힌 재경은 호신술을 배운 그녀가 호락호락하게 밀쳐지지 않자 반대로 비키의 몸에 걸려 유네를 치고 넘어졌다.

다른 때였으면 비키에게 짜증을 냈겠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던 재경은 당황하는 바람에 히로인들과 서로 얽힌 몸을 빼기 힘들었다. 하지 마. 아직 하지 마, 냥냥이 이 멍청아!

“애…으애…으아애… 아츄우우!”

고양이녀가 개운하게 재채기를 했다. 그 일대에 이질적인 변화음과 함께 짙은 연기가 깔렸다.

히로인들을 포함해서 재경의 모습이 연기에 가려 사라졌다. 극적으로 그 영역 밖에 있던 류제가 연기가 몸에 닿지 못하도록 몸을 사렸다.

“우냐앙.”

“냐옹.”

“하아악!”

고양이녀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왕녀를 치료하고 있던 세라를 포함한 8반 친구들이 모두 아기처럼 조그마한 고양이 수인이 되어버렸다.

고양이녀를 쫓아 창문을 넘어왔던 늑대 군인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귀를 쫑긋거리며 사태를 파악했다.

드디어 타인 수인화를 해낸 냥냥이에게 그녀가 축하의 박수를 쳤다. 아주 훌륭했다.

“…….”

차마 말을 잇기도 황당한 일이 펼쳐졌다. 일동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느라 침묵이 고요한 가운데 복도에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만 공명했다.

영문을 모르는 여섯 마리(?)의 작은 고양이들이 막 태어난 소동물처럼 샐쭉한 고양이 눈을 끔벅거렸다.

서로를 포갠 귀여운 몸짓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들은 자신의 발바닥 젤리를 보더니 혈색 좋은 조막만 한 진분홍 혀로 슥 핥았다.

이 사태를 보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오로지 고양이녀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으아… 이걸 어쩐다. 완전 망했냥.”

수인으로 변화한 그들은 성체 고양이 두 배 정도 크기였고, 손이었던 앞발도 신발이 신겼던 뒷발도 고양이처럼 육구와 발톱이 생겼다. 엉덩이에는 털 난 뱀 같은 긴 꼬리가 달린 데다 머리에는 쫑긋 솟은 동물 귀가 있었다.

얼굴이 조그마한 어린아이인 것을 빼면 그들은 완벽한 고양이 모습이었다.

“어…어어?”

류제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왕녀부터 세라 선생님, 비키, 유네랑 미나에 이어 렌까지 고양이로 변했다고? 이번에도 냥냥이 때문인가?

“레…렌? 괜찮아?”

우와, 근데 진짜 귀엽다. 몸이 말랑말랑 폭신폭신해 보여.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근데 저 탱탱한 분홍색 육구가 박힌 앞발 좀 봐. 당황했나 봐. 자기 몸 냄새를 맡고 있어. 우와, 우와아, 안아보고 싶다!

“냐아?”

귀여움에 홀라당 낚인 류제가 고양이녀를 옆으로 밀쳤다. 그는 옹기종기 쓰러져 있는 고양이들 중 렌처럼 보이는 고양이에게 서슴없이 다가갔다.

자신의 이름은 알아듣는 듯 나사 빠진 표정으로 류제를 쳐다보는 고양이 렌이 귀를 쫑긋거렸다.

“와…와아아.”

그 모습이 볼을 주물주물 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류제가 겁도 없이 손을 뻗었다. 네 발로 선 고양이 렌이 인상을 찌푸리고 하악질을 했다. 위협을 하려는지 털이 바싹 부풀었다. 삐죽 나온 송곳니가 제법 험악했다.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아하, 몸이 그렇게 되어서 짜증 났구나?”

“하아악! 캬악!”

“내 탓이 아니잖아.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해?”

농담 아니라 조금만 더 다가오면 손을 물어뜯어 버릴 기세다.

고양이 렌을 안아 들 욕심으로 가득 찼던 류제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춤했다. 다가오는 류제를 경계하던 고양이 렌은 꼬리를 부풀리고 몸은 뒤로 물러났다.

밑에 깔린 유네를 잘근잘근 밟던 렌은 물컹한 바닥이 이상해 제 육구를 확인하다가 발밑이 다시 꿈틀거리자 그것이 바닥이 아닌 생소한 무엇임을 깨닫고 고장 난 용수철처럼 펄쩍 뛰었다.

“캬아악!”

화들짝 놀란 렌이 비명을 지르며 우다다 복도를 질주해 사라졌다. 고양이 비명 소리에 다른 고양이들도 옹기종기 벌떡 고개를 들어 렌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냐앙?”

“야옹.”

그녀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체구가 작아지는 바람에 교복이 벗겨져 상의만 간신히 긴 원피스처럼 걸친 그녀들은 하의와 양말과 실내화를 깔고 앉아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빛냈다. 커다래진 주변 환경이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렌, 어디 가?!”

“말을 걸어도 소용없을 거양. 못 알아듣냥.”

아직도 시큰거리는 코를 쓱쓱 문지르던 냥냥이가 꼬리를 말고 류제의 눈치를 살폈다. 이전처럼 어빌리티 컨트롤이 이상해지는 재채기를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고려하지 않았던지라 당황한 것은 그녀도 매한가지였다.

“못 알아듣는다니? 저번엔 저러지는 않았잖아! 뭔가 잘못된 거야?!”

렌이 적의를 드러내자 덜컥 충격을 받은 류제가 원인인 냥냥이를 붙들어 짤짤 흔들었다.

냥냥이에 의해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렸던 수신제 때를 생각해 보면 고양이 습성이 생기긴 해도 적당히 귀여운 수준에 머물러서 류제는 이번에도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지능은 그대로일 거라고 가정했다.

외관이 몰랑몰랑 귀여웠기 때문에 이 기회에 사심 채울 계획을 세웠던 그는 렌이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가 다 고양이녀 때문인 것만 같았다.

흥분한 류제에게 고양이녀가 힘없이 말했다.

“으… 진정하냥. 흔들거려서 말을 할 수 없냥.”

“빨리 이 상황을 설명해 봐!”

당장 그녀를 놓은 류제가 윽박질렀다. 성질 한번 급하다. 고양이녀는 머리 위에 달린 귀를 접으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류제가 잡았던 옷깃을 툭툭 털었다.

“저건 수인화 단계 중에서 짐승으로 가기 바로 전 단계냥. 나도 어빌리티가 처음 발현했을 때 실수로 저기까지 가긴 했는데 저 상태가 되면 진짜 고양이처럼 지능이 낮아져서 곤란하냥. 주변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냥.”

“뭐라고? 지능이 낮아져? 돌아버리겠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시…실수였냐아앙!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알았겠냐는 말이냐앙!”

그럼 렌이 도망친 이유가 제 몸이 저렇게 되었다고 나한테 화풀이를 한 게 아니라 그냥 자기보다 큰 인간을 경계하는 거였나? 잠깐, 그러면 저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

“수인화라고 하지만 고양이와 가장 가까운 상태양. 하아, 이렇게까지 조절이 안 될 줄은 몰랐냥. 큰일이양.”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거 아니냐는 고양이녀의 말을 무시한 류제는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을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들은 네발로 서서 기지개를 켜거나(왕녀의 경우에는 아픈 뒷발을 핥았다) 고양이처럼 털을 골랐다.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정신까지 고양이가 되어버린 것이 확실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무줄이 탄탄한 삼각팬티가 바지를 대신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지만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큰일이 날 것이다.

류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들이 차례로 몸단장을 하며 털을 푸르르 털었다.

“후냐?”

“냐아앙.”

“야아옹.”

남아있는 고양이들부터 처리를 생각해 보자. 렌처럼 어디론가 도망치기 전에 잡아들여야 하는 게 맞겠지.

고양이의 생태를 모르는 류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렌이 걱정되었지만 이대로 냅다 움직이면 저들도 사방으로 흩어질 것 같아 진퇴양난이었다. 귀찮으니 일을 더 키우는 것만은 사양이다. 게다가 왕녀까지 저런 상태면 아마…….

“여기 모여서 뭐 하는 거지? 뭐, 아무래도 좋다만 왕녀 저하를 보지 못했나?”

수첩에 뭔가를 기록 중인 백장미 부대 군인과 4반의 고양이녀, 8반의 꼴불견 류제 신리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있자 눈치코치 없는 루이나가 다가왔다.

그녀가 어린애처럼 토라지는 바람에 왕녀를 홀로 보냈던 게 마음에 걸렸던 루이나가 8반 교실로 찾아온 것이다.

“얼굴 한번 얼빠졌군.”

왕녀를 안전하게 보필해야 하는데 말썽만 일으키는 학생들이 복도에 줄줄이 나와있으니 눈엣가시였던 루이나가 마땅찮게 그들을 흘겼다.

“흠?”

교실 문을 열려는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 없는 루이나는 교실에 멋대로 들어가려다가 신발장 앞에 널브러진 다섯 마리의 고양이 수인을 보고 얼이 빠졌다.

고양이 중에 아무리 뜯어봐도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과 닮은 존재가 있었다.

“귀여워. 엄청나게 귀여워. 동물은 질색이지만 저 고양이는 마음에 드는데 고양이가 원래 저랬나? 저것들은 뭐지?”

왕녀에게 보여주면 마음을 풀어줄 것 같아 루이나의 눈이 반짝였다. 왕녀를 끔찍이 아끼는 그녀가 사실을 알았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뻔했어도 류제는 착각하고 있을 게 뻔한 루이나의 생각을 정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가 왕녀 고양이를 가리키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게 네가 찾던 왕녀야. 저 황금색 털, 비녀 꽂은 고양이 수인.”

“뭐라고? 고양이 수인? 흥, 농담도 지나치군. 내가 그런 조악한 개그로 웃음을 터뜨릴 것 같나?”

그저 왕녀와 닮았다고만 생각하던 루이나는 류제의 재미없는 헛소리에 입꼬리도 미동하지 않았다.

처음엔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그렇게 들으니 정말 저 고양이가 왕녀처럼 보였다. 특히나 고양이가 차고 있는 비녀는 왕녀가 소중히 여기는 장신구라 세상에 둘도 없는 물건이었다.

루이나는 왕녀와 같은 은색 눈동자에 고양이 귀가 달린 어린아이가 진짜 왕녀와 겹쳐 보여 눈을 비볐다.

“어…어어… 왕녀… 왕녀 저하께서…….”

그녀는 저절로 그것이 왕녀임을 믿게 되었다. 고고하게 앉아서 털을 고르고 있는 왕녀에게 루이나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고양이들은 샐쭉하게 눈을 빛내며 루이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왕녀 저하. 이 루이나가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니냐롯트의 핑크 핑크 젤리에 넋이 나간 루이나는 다른 고양이들은 보이지도 않았는지 가만히 앉아있는 다른 고양이의 꼬리를 우지끈 밟았다.

몸단장을 하다가 꼬리가 밟힌 비키가 털을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화가 난 비키는 루이나에게 펄쩍 뛰어올라 얼굴에 X 자로 긴 발톱 자국을 남겼다.

“으악! 조그마한 게 뭐 하는 짓이야!”

그게 비키인지 모르는 루이나는 조그마한 고양이 수인을 밑으로 패대기쳤다.

“캬아악!”

“하악! 학!”

커다란 인간이 고통을 주자 놀란 고양이들이 털을 바싹 세우고 걷잡을 새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루이나의 하드 트롤링에 류제는 머리를 싸매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할, 가지가지 하는군. 아주 그냥 다 망해먹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하는 어디로 사라지신 거지? 바른대로 답하라!”

“네가 쫓아냈잖아! 왜 나한테 큰 소리야?”

“뭐라고? 내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저 괘씸한 고양이가 날 공격한 거지.”

왕녀가 고양이 지능으로 퇴화했다는 걸 모르는 루이나의 얼굴이 무지로 일그러졌다. 혈압이 정도를 모르고 올라 폭발하기 직전 냥냥이에게서 류제와 똑같은 설명을 들은 루이나는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져서 류제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다 내 탓이다. 내가 왕녀 저하를 홀로 둬서 저런……!”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후회해 봤자 바뀌는 건 없잖아. 다시 돌아오길 바라야지.”

답답한 것은 류제도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류제는 냥냥이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저 상태가 되면 언제 사람으로 돌아오는데? 저 꼴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위험하지 않아?”

“절대 안 돼. 키아나트리체 왕실 권위와도 연관 깊어!”

“후…후냐앙. 그렇긴 하지.”

그들은 벗겨진 치마와 바지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슬렉터마저 빠져서 복도에 나뒹굴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이 없는 상태라 저대로라면 그런 차림으로 온갖 곳을 헤집고 돌아다닐 텐데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오면 답도 없었다. 왕녀의 하반신 실종 상태라고? 범국가적인 차원의 수치가 될 테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

렌도 물론이지만 특히 왕녀만큼은 절대 안 돼. 그렇게 되기라도 하면 냥냥이는 반드시 사형일 거야. 거기에 연루된 렌도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겠지.

저번엔 고양이 귀가 삼십 분 정도 유지되었고 이번에도 그쯤일 테니 그 시간 내에만 찾으면 아무래도―

“내 경험상 꼬박 일주일은 간다냥.”

“일주일? 일주일이라고?!”

“저하! 기다리십시오. 이 루이나가 갑니다!”

루이나가 왕녀가 사라진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지금 귀여운 외관에 가려진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파악이 된 그녀는 다 자기가 한눈을 팔아서 그렇다며 울상으로 왕녀를 연호했다.

“우리도 빨리 찾으러 가자.”

“진심이냥?”

저런 상태가 되면 이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데다 인간일 때의 기억조차 애매해져서 사람을 따르지 않게 된다.

간식이나 먹을 것으로 꼬여내야 하는데 고양이는 경계심이 심해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렌 지미 같은 내추럴 본 독립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은 말 다 했다.

“진심이지 그러면 거짓말이겠어? 일주일이라고! 이러는 동안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해?”

“경비들에게 문을 폐쇄해 달라 전달해 주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수첩에 보고할 것을 가만히 기록하던 늑대 군인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그녀는 과연 한 나라의 왕녀나 대귀족, 유명 상인 집안의 자제 등이 행방불명될 위기에 처한 상황임을 제대로 아는 게 맞는지 모를 정도로 냉정했다.

뭐, 당황해서 실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만큼 침착한 태도를 보이다니 늑대 귀랑 꼬리가 달렸어도 역시 군인은 군인인가 싶었다.

“학교 담은 넘어가기 힘드니 가능성 높은 장소만 추적하면 되겠지. 그건 저 고양이 수인 학생이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하아. 내 팔자냥. 역시 내 책임이냥.”

별다른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다. 목표는 여섯 마리의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찾는 것.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하다. 류제가 슬렉터로 어딘가에 연락을 하고 있는 늑대 군인에게 쏘아붙였다.

“거기 늑대 귀 아줌마도 찾는 걸 도와주세요. 할 일 없잖아요!”

“아줌마라고 하지 마. 난 아직 20대니까. 물론 나도 왕녀님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니 냄새로 어떻게든 찾을 거야.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내가 고지해 주지. 학생들에겐 입단속해라. 왕녀의 실종은 진중한 사항이니 괜히 이야기가 새 나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

방관하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잡고 명령했다.

그녀도 왕녀가 고양이가 되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위에서 알았다간 ‘수인화’ 실험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거슬렸다. 같은 ‘수인화’ 계열의 어빌리터로서 고양이녀의 특이능력을 높이 사는 그녀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녀가 사냥개처럼 뛰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복도를 보며 류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의 ‘강화’ 어빌리티가 만능이라도 짐승도 아니고 렌을 냄새로 찾기엔 무리가 있었다. 학교 일대를 차근차근 뒤져보기로 한 류제가 물었다.

“고양이는 보통 어떤 곳에 많이 가?”

“후냥, 레이디의 비밀 장소를 파헤치려고 하다니 예의가 없… 알았냥,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양.”

창문을 넘어오다가 렌을 발견하고 재채기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커지진 않았을 테니까 냥냥이도 찔리는 게 많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학교에는 고양이들의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는 고양이들에게 인기가 좋으니까 집중적으로 수색하면 찾기 수월할 것이다.

“높은 곳이나… 따뜻한 곳이나 조그마한 틈새나… 어두운 곳 말이냥. 딱 보면 아냥. 아니라면 자기 영역… 익숙한 곳도 좋아하냥.”

“짚이는 곳이 많은데. 따로 몇 군데 짚어줄 수 없어?”

“뒤뜰, 쓰레기장, 기숙사 옥상, 산책로에 있는… 아니양. 그럼 그런 곳은 내가 찾아보도록 하냥.”

“그러는 게 낫겠다. 난 렌이 갈 만한 곳을 찾아볼게.”

류제는 렌이 달려간 길목을 토대로 흔적을 되짚기로 했다.

혹시라도 이 짧은 시간 내에 학교를 빠져나가 일주일 후 마을에서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팬티 바람으로 행방불명이 된 렌은 한동안 침울해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팬티 바람으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한다면―

“왕녀 저하아아!”

멀리서 왕녀를 찾는 루이나의 안타깝고도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류제도 서둘러서 움직였다.

“그럼 난 렌을 찾아볼게. 다른 애들은 너한테 맡긴다!”

“뭐? 잠깐만냥. 왜 나만… 하아. 내 삶은 점점 고달파지냥.”

냥냥이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류제는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다 자기 탓이라고는 하나 왜 남은 네 마리 고양이들을 그녀 혼자 찾아야 하는지 억울했다. 머리를 쥐어 싸맨 그녀도 고양이의 은신처로 향했다.

해가 지고 있는 학교. 늑대 귀 군인은 선생님들에게 이 엄청난 사건을 고하러 갔고, 루이나, 류제, 고양이녀 셋이서 여섯 마리의 꼬마 고양이들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잠깐 사이에 어디까지 간 거야?”

고양이 렌이 달려 나간 방향을 중심으로 추적하던 류제는 마침내 막다른 길목에 도착하고 혀를 찼다.

그가 애꿎은 벽에 화풀이했다. ‘강화’ 어빌리티를 활용해 1층을 샅샅이 뒤졌지만 단서가 될 만한 조그마한 인기척도 찾아지지 않았다.

해봤자 문이 열린 교실로 들어가 몸을 숨겼거나 복도 구석에 몸을 웅그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이쯤 되니 설마 열린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간 건가 걱정이 앞섰다.

그게 아니라 2학년 교실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간 거라 해도 골치가 아파진다. 1층은 방과 후라 문이 닫혔지만 2층에는 신관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있어 신관까지 수색 범위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답답했지만 행방불명된 렌을 찾아 헤매는 건 익숙했다. 언제나 렌의 진심을 찾아 헤매는 그의 마음이 그래서인가, 해변의 밤의 연장선인가.

류제는 문득 방해만 받다가 렌을 가장 나중에 발견할 것 같다는 이상한 걱정이 앞섰다.

“하아아,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구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막막해진 류제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대는 렌이니 귀찮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여기서 놓치면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렌이 갈 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만약 내가 렌이고 갑자기 고양이가 되었다면 맨 처음 무슨 생각을 할까.

신체가 조그마하게 변한 데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고양이의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렌은 인간인 내가 다가오자 경계하며 도망갔다. 무서웠을 테니 분명 안전한 장소를 찾았을 거야.

기억이 없어졌다고 해도 인간이었을 때처럼 성격이 까칠한 걸 보면 기억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을지도 몰라. 렌이 이 학교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어디지. 렌이 주변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단언하면서 부끄러운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곳은―

“아.”

류제는 어렵지 않게 한 장소가 떠올랐다. 확신하는 건 아니고 설마 하고 짐작만 하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 상태인데 그런 곳에 가는 건…

아니, 입학식 날 학교 구조도 모를 텐데 그런 장소를 용케 찾은 걸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밑져야 본전이라며 망설임 없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조그마한 고양이 수인이 되어버린 렌은 아무리 봐도 꾸물꾸물 고양이 캐릭터처럼 아가타 곳곳의 쓰레기장을 헤치고 다니는 도둑고양이 품종, 키아나트리체 쇼트헤어였다.

그…그래서 쓰레기장에 간다는 건 아냐. 그냥 전적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도둑고양이 취급해서 미안, 렌.

“세상에, 진짜 있잖아.”

학교 뒤편 쓰레기장에 도착한 류제는 어이없는 바람에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신중해야 할 때 실수를 해버린 그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고양이 렌은 이미 그 목소리를 들은 후였다.

“……?! 하아아악!”

긴 와이셔츠 상의는 어디에다가 내버린 건지 반팔이 되어버린 남색 조끼와 질질 끌리는 주황색 넥타이만 목에 끼고 쓰레기통 위에서 식빵을 굽고 있던 고양이 렌이 하악질했다.

인기척 없이 신출귀몰한 인간은 고양이의 입장에서도 두려울 만해서 고양이 렌은 눈앞에 나타난 류제를 보고 몸을 잔뜩 긴장했다.

“우오오… 우오옹.”

“착하지. 이리 와, 렌.”

“우우우…….”

상냥하게 타이르며 손을 뻗어도 고양이 렌은 위협하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쳤다.

고아원에 놀러 오던 뒷동산 들개만 빼면 어떤 동물도 그를 따르지 않았던지라 류제는 사람을 싫어하는 흉포한 고양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난감했다.

“확인해 봐. 자, 손에 아무것도 없지?”

류제가 제 손을 확인시켜 주었다. 진짜 짐승을 다루는 것 같다. 렌을 고양잇과라고 여겼지만 인간 렌이 진짜 고양이는 아니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해치지 않는다니까. 배고프잖아. 기숙사 가서 저녁 먹자.”

“…….”

“착하지? 이리 와.”

털을 바싹 새운 채 류제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고양이 렌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인간의 손길을 경계하며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짙은 긴장감의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이쯤 다가갔으면 렌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던 류제가 신체 능력을 세밀하게 ‘강화’하던 찰나 위층에서 소란이 일었다.

“거기 서라아! 저하, 부탁이니까 제발 서주세요! 이 루이나가 왔습니다아!”

“캬하아악!”

덕분에 류제는 고양이 렌을 잡을 타이밍을 완벽하게 놓쳤다. 우다다 도망가는 렌의 뒷모습에 허탕 친 류제가 쓰레기통에 발길질을 했다. 망할 루이나 알로이드. 도움 되는 구석이 조금도 없어!

렌을 이대로 놓쳐버린다면 다음 도피처는 감도 안 잡힌다. 여기에 매복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계속 날 보고 무서워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닌데.

“저쪽으로 갔지. 하아.”

네 발로 달아나는 고양이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고양이 렌을 추격한 류제는 속도를 조절하며 렌과 거리를 좁혔다.

뒤에서 인간이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따라잡자 질겁한 고양이 렌이 어디 도망갈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양이의 본능으로 적당한 곳을 발견한 그는 뒷발로 후다닥 점프했다.

“냐아앙!”

고양이 렌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총총총 뒤뜰 사랑의 나무를 타고 가장 높은 나뭇가지로 올라갔다. 인간이라면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겠지 싶었던 고양이 렌은 류제가 나무 아래에서 난감한 듯 쳐다보자 성공했다며 우쭐거렸다.

이제 난 안전해. 그렇게 판단한 고양이 렌이 히죽 류제를 비웃었다. 거봐, 넌 여기까지 못 올라오지?

“…냐옹?”

기고만장하던 고양이 렌은 어째 아래를 내려다볼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곳은 안전해!’라고 말하던 본능이 ‘높은 곳은 위험해!’, ‘빨리 내려가!’라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었다.

아래에는 자신을 쫓아왔던 인간이 기다리고 있고, 내려가려고 해도 방법을 모르겠다. 무서워. 어떻게 하지? 나 왜 여기에 올라온 거지?

고양이 렌은 무서워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딱 보아도 진퇴양난으로 암담한 처지인 것 같았다.

“흠?”

고양이 렌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가볍게 점프하려던 류제는 얕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거리자 주춤주춤 꼬리를 마는 렌을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겁에 질린 표정을 보자니 그의 염려가 얼추 들어맞는 모양이다.

고양이가 되었어도 높은 곳은 싫은가 보구나. 이런 점은 확연히 렌 같다.

“우우웅… 우오옹.”

불만스럽게 내뱉은 고양이 울음소리는 이런 고생을 하는 이유가 류제에게 있다 투덜거리는 듯했다. 류제는 헛웃음이 터졌다. 자기가 올라가 놓고 왜 나한테 그래. 그러게 얌전히 잡혀주면 덧나나.

“이리 와.”

이건 기회였다. 어차피 뛰어서 붙잡는다고 해도 발버둥을 치며 싫어할 텐데 그럴 바엔 신뢰도를 높여주는 게 먼저다. 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무에서 내려오고 싶을 테니까 그걸 이용하면 된다.

입학식 날 남몰래 대사를 연습하던 쓰레기장을 찾아가고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등, 고양이녀는 저 상태가 되면 기억이 없어진다고 했지만 류제는 강렬한 추억들은 은연중에 남아있을 거라 추측했다.

그렇게 따지면 언제나 렌을 지켜주던 류제의 품 또한 기억할 것…이라는 것이 류제의 바람이었지만 일이 쉽게 풀릴 리 없다.

벌써 삼십 분째 류제는 렌과 눈씨름을 했다. 뻗은 손이 무안할 만큼 내려올락 말락 렌이 끈질기게 간을 봤다.

유달리 경계심이 심한 건지 고양이란 원래 그런 족속들인지 모르겠지만 류제는 인내심을 가지며 찔끔찔끔 움찔거리는 렌이 마음을 열어주기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우…….”

“다치지 않게 받아준다니까.”

지칠 법도 한데 류제는 쳐졌던 손을 높게 뻗었다. 고양이 렌은 저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무서워 나무 기둥만 붙잡고 머뭇거렸다.

“위험해!”

“캬아아악!”

류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때는 늦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 위에 둥지를 틀었던 까마귀가 먹이를 찾고 다시 돌아왔다. 둥지 근처의 고양이를 발견한 집주인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거침없이 공격했다. 자지러진 고양이 렌은 펀치를 날리다가 나무 기둥을 놓치고 그만 밑으로 떨어졌다.

“우냐앙?!”

“어이쿠.”

어렵지 않게 고양이 렌을 받은 류제는 떨어지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소동물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추운 겨울에 물에 젖은 것처럼 벌벌 떠는 그는 따스한 품 안에서 무사를 깨닫고 안도했다.

고양이는 까마귀를 흘기며 좁은 곳에 파고들려다 인간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발버둥 쳤다. 덕분에 발톱이 류제의 조끼에 끼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가만히 있어. 착하지?”

“냐아아! 하아악!”

조금 얌전해졌다 싶었던 고양이 렌이 경기를 일으키며 날뛰었다. 붙잡기만 한다면 귀여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상상과 다르다.

얼굴에 냥냥 펀치를 날리면서 할퀴고, 물고, 때리고. 놓칠 수는 없는지라 꽉 붙들고 있다지만 진심으로 거부당한 류제는 내심 상처받았다.

“하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류제가 담아두던 말을 꺼내며 남몰래 투정했다. 낮고 진지한 음색에 렌의 공격이 잠시 멈추었다.

정말 이 고양이는 인간일 때의 기억이 없는 걸까. 마음에 안 든다. 그는 얌전해진 고양이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캬아악!”

물론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서 류제는 냥냥 펀치를 맞고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렌을 길들이다니. 말도 안 된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캭. 캬악!”

고양이 렌은 팔뚝을 꾹꾹 밀어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필살 공격에도 꼼짝 않다니. 고양이 렌은 류제가 유별났다. 지금쯤이면 아야 하고 놓아야 하는데 왜 이놈은 시늉도 안 하지?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아파. 그만 포기해.”

렌의 귀여운 공격에 류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냥냥 펀치에 손을 거두어준 이유는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렌을 무사히 확보했으니 다음은 왕녀인가. 공격적인 렌을 데리고 수색하는 것은 무리이니 류제는 고양이 렌을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떠넘길 필요가 있었다.

늑대 군인이 이 사태를 선생님들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으니까 교무실에 렌을 얌전히 묶어놓을 요량이었던 류제는 하찮게 꿈지럭거리는 렌을 껴안고 후문을 찾았다.

더러워진 실내화를 벗으려던 그는 신관 근처에서 흘려들어서는 안 될 소란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네. 고양이가 원래 이렇게 생겼어? 불을 뿜는 고양이라니 신종 괴물인가?”

“괴물이라고 부르지 마. 귀엽잖아.”

“8반에 셀로니아 가문 영애님 생각나는 건 나뿐이야?”

어쩐지 밴드부가 사용하던 신관 창고가 시끄러웠다. 형편 좋게 대사를 되짚어보면 불을 뿜는 고양이란 고양이 수인들 중 비키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들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안색이 새파래진 류제가 잽싸게 뛰어가 신관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으아악! 너희 뭐 하는 거야?”

“어, 류제 신리잖아.”

“뭐야, 밴드부에 입부하게? 우리는 언제나 환영인데.”

창고 안에서는 몰염치한 밴드부가 불을 뿜는 수인을 기타 잭으로 묶어놓고 나뭇가지로 쿡쿡 찌르며 불씨로 손을 녹이고 있었다.

“냐아아옹. 니야옹!”

검은 전선에 묶인 고양이 비키는 밴드부 일동이 찔끔찔끔 찌를 때마다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수평으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피한 밴드부 일동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따뜻함을 즐겼다.

류제가 알기론 비키는 전신에 화염 내성이 있었지만 어빌리티는 주로 손에서 발현했다. 입에서도 불이 나올 수 있다니 좋은 놀림거… 대단한 발견이었다.

“입부 안 할 거고, 그 고양이는 내가 데려갈 거야.”

“엑, 싫어. 이거 우리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거란 말이야. 밴드부 거야!”

‘마비’ 어빌리터가 묶여있는 비키를 소중하게 껴안았다. 비키가 위험하게 불길을 내뿜으며 그녀를 위협했다. 아세미가 좋아하는 동화책에 나오는 악당 드래곤 같다.

류제는 쓸데없는 망상을 삼켰다. 인간으로 돌아간 비키도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으려나.

“냐아옹!”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괴롭힘당하는 비키의 울음소리에 억울함이 담겼다. 아차. 지금 중요한 건 놀림거리 스탬프 적립이 아니다. 내가 넋이 나가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캬아악!”

“하지 마. 이리 내!”

류제가 그녀에게서 고양이 비키를 낚아챘다. 쿡 찌르면 입에서 불이 나오는 구조를 가진 신기한 난로를 두 눈 뜨고 빼앗긴 밴드부 일동은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류제더러 치사하다고 구시렁거린 그녀들은 또 다른 고양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린아이를 닮은 고양이가 하나 더 있다니. 세상은 넓고 놀라운 일은 많았다.

“우와, 그것들 다 류제 네가 기르는 거야? 이런 해괴망측한 애완동물은 어디서 구해?”

“기르는 거 아니야. 동물도 아냐.”

“그래? 그럼 뭐지? 근데 되게 렌 지미같이 생겼다. 푸하하, 본인한테 보여주고 싶어.”

“진짜네. 저 못돼먹은 심보 가득한 얼굴 좀 봐. 진짜 판박이야.”

그녀들이 류제의 속도 모르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총체적 난국을 대변하듯, 비키가 속박을 풀어주는 류제에게서 벗어나려 사납게 불을 뿜었다. 밴드부 일동에게 난로 취급당한 게 어지간히 짜증 났던 모양이다.

고양이 비키가 몸을 비틀다가 문득 반대 손에 들린 고양이 렌을 발견했다. 불길이 나오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류제의 양손에 붙들린 채 서로를 노려보는 두 마리 고양이 수인들끼리 불길한 시선이 오갔다.

“우우우… 우오오옹.”

“캬아아옹!”

서로를 인식한 두 수인이 상대방을 위협했다. 가벼운 영역 싸움으로 안 끝날 고양이 울음소리가 살벌하게 창고를 채웠다.

아니나 다를까, 털을 바삭 세운 비키가 입에서 용암처럼 불꽃을 농축하기 시작했다. 불 때문에 다루기 까다로워 죽겠는데 설상가상이다.

“으악. 둘이 사이 엄청 안 좋네?”

“그러게. 같은 종이라 사이좋게 지낼 줄 알았는데.”

그야 그렇겠지. 안 그래도 인간일 때에도 사사건건 부딪쳤는데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붙여놓으면 좋지 못한 꼴이 벌어질 게 뻔하다.

그 전에 류제가 둘을 말리려고 했지만 비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열 받은 고양이 비키가 고양이 렌에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강한 불을 발사했다. 류제가 렌을 지키기 위해 비키를 다른 쪽으로 돌리자 불꽃이 밴드부 일동을 향했다. 그녀들도 꺄꺄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붙잡는 힘이 허술해지니 고양이 렌이 류제의 팔뚝을 비집고 빠져나갔다. 위협적인 불꽃에 정신이 팔려 한쪽을 놓쳐버린 류제가 실수로 외쳤다.

“우앗, 렌!”

“뭐? 렌?”

그 이름을 용케 주워들은 밴드부 일동의 시선이 기묘해졌다. 불꽃을 뿜는 고양이. 렌과 닮은 고양이를 렌이라고 부르는 수상한 류제의 태도.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란을 좋아하는 그녀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방과 후 학교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들은 다 들었다면서 류제를 향해 사악하게 히죽거렸다.

“이야, 정체불명의 생물에게 친구 이름을 붙여주다니 류제 너도 참 기분 나쁜 놈이구만?”

“그래. 렌이라고?”

“앗… 이런.”

류제가 입을 막았지만 쏟아진 말은 못 주워 담았다.

그러는 동안 창고 안을 우다다 달리던 고양이 렌은 문이 닫혀 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방향을 바꾼 그는 정신 사납게 질주해서 잡동사니를 높게 쌓은 선반 뒤에 몸을 숨겼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던 그는 불을 내뿜는 고양이 비키를 훔쳐보며 어째서 저런 것이 득시글거리냐며 몸을 떨었다. 저 인간은 왜 불을 뿜는 무서운 자식을 겁도 없이 들고 있는 거람. 날 죽일 셈이냐?

“설명을 해주시지?”

재미있는 것을 찾고 있던 밴드부 일동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류제를 둘러쌌다. 재경이 밴드부에 임시 입부했을 때 그녀들이 써먹은 방식이었다.

류제는 선반 뒤에 숨어있는 렌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녀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말이 헛나온 거야. 신경 쓰지 마.”

“거짓말. 렌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말에 단순하게 속을 줄 알아?”

변명하기 귀찮다. 그녀들의 끈질긴 시선도 성가셨다. 고양이 비키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등대처럼 불을 뿜게 하던 류제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결국 졌다며 항복을 표했다. 그 늑대 귀 군인이 학생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혼나는 건 나겠구만.

“말해줄 테니까 비켜줘.”

“새침하게 굴기는.”

“뭔데. 무슨 일인데?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말해봐.”

“알았다니까. 참을성 없기는. 그게 실은 아까…….”

류제가 그녀들과 같은 밴드부 소속 고양이녀의 만행을 설명했다.

그도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수신제 밴드부 공연 당시 렌에게 고양이 귀가 달린 사건과 연관이 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렌을 포함한 여섯 사람이 피해자로서 저렇게 변해버렸다는 사족도 덧붙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밴드부 일동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듣다 못한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했다.

“저게 진짜 렌이라고? 정말?”

“말도 안 돼. 냥냥이한테 그런 능력은 없었는데! 요즘 군인한테 쫓기면서 산다 싶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이 일은 비밀로 해줘. 얽힌 사람이 많아서 사정이 복잡해.”

류제가 신신당부했다. 밴드부 일동은 합심해서 ‘물론이지!’라고 말했지만 하나도 신용이 가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줬으니 부탁 하나 할게. 내가 비키를 잡고 있는 동안 저기 있는 렌 좀 붙잡아 줘. 혹시라도 도망치면 진짜 곤란하거든.”

“알았어. 그런데 렌은 그럼 계속 저 상태인 거야?”

‘가시’ 어빌리터가 선반 뒤에 숨어서 인간들을 훔쳐보는 렌을 손가락질했다. 귀와 꼬리가 쫑긋쫑긋 움직이며 관찰하는 시선이 끈덕져서인지 전혀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냥냥이가 일주일은 갈 거라고 했어.”

“일―주일?! 대박이다, 진짜. 푸하하하! 일주일이래.”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드는걸. 이 대사건에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니 기분 최고야.”

“이 기묘한 미스터리, 우리 밴드부에게 맡겨달라고!”

그녀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창고 안이 크게 공명했다. 파열하는 웃음소리에 렌이 놀라 펄쩍 뛰었다. 다른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던 그는 옆에 있던 선반을 쳐버리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적재물이 쌓여있던 선반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조그마한 렌을 덮쳤다.

“우냐아아!”

피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짐 덩이가 무서워 고양이 렌이 머리를 감쌌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큰일이다! 다칠 거야. 어쩌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곳도 안 아팠다. 고양이 렌은 어리둥절해져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인간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조심히 보호하고 있었다. 신출귀몰한 등장에 렌은 놀라는 것도 잊고 눈을 끔벅거렸다.

“하아, 진짜 너한테 눈을 뗄 수가 없다. 제발 얌전히 있어라. 응?”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고양이 렌을 껴안았다. 류제의 등에서 우수수 잡동사니들이 떨어졌다. 고양이 렌은 웬일로 얌전히 안겼다.

“오오, 역시 류제 신리. 냥냥이 뺨칠 정도의 반응속도.”

류제가 던진 비키를 받아 배가 하늘을 보는 상태로 치켜든 ‘가시’ 어빌리터가 감탄했다. 그러다 비키가 불을 내뿜어 누군가의 머리를 태워버리자 피해자는 짜증 나서 비키에게 ‘마비’를 걸었다.

“가만히 있어, 난로.”

“냐…냐아.”

“그것도 원래는 사람이니까 존엄성은 지켜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저 노란색 리본 달린 포니테일부터 아무리 봐도 우리 반 비키잖아.”

“엇, 어쩐지 닮았다고 생각했어.”

“쟤가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다?”

귀족에게 모욕을 주는 건 귀족의 기분에 따라 대역죄였다. 찔끔했던 ‘마비’ 어빌리터는 탄 머리카락을 뜯어내며 자신의 행위를 모르는 척했다. 이런 귀여운 생물을 그 성질 나쁜 비키 셀로니아라고 어떻게 단정해.

“원래대로 돌아와도 기억 못 하겠지. 안 들키면 돼.”

“기억하더라도 나중에 사과하면 되지. 그지? 위대한 셀로니아 가문이 그렇게 쩨쩨하진 않을 거 아냐.”

“하아, 난 몰라.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위대하긴 개뿔. 류제는 어째 취급이 험해진 비키가 불쌍해졌다.

그래도 마침 잘 됐다. 렌과 비키를 동시에 안으면 같은 극성을 가진 자석처럼 밀어내니 둘을 동시에 관리하려면 밴드부 일동의 도움이 절실했다.

“데리고 교무실로 갈 거니까 들고 따라와.”

“근데 다른 네 명은 누구야? 여섯 명이 저렇게 되었다며?”

“보면 알아.”

류제가 밴드부원들을 데리고 1학년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 문을 여니 세라 선생님과 이야기하던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과 늑대 귀 군인에게서 보고를 받고 학교에 남아있던 선생님들이 모두 대기하는 중이었다.

큰일을 벌이고 선생님들에게 붙잡힌 냥냥이와 밴드부 일동도 오랜만에 재회했다.

“냥냥아! 소식 들었어. 엄청난 짓을 벌였다며?”

“역시 한 건 할 줄 알았어. 그래야 우리 퍼스트 기타지!”

“시무룩하니까 그런 이야기 하지 말냥.”

그녀들이 반가움을 표현할 새도 없이 교무실 문이 꽉 닫혔다. 문제의 고양이 여섯 마리가 모두 모이자 선생님들이 오묘한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리 사고일지라도 한 반의 선생님인 세라와 나라의 왕녀, 그리고 귀족 비키와 유명 상단의 자제 유네까지 저렇게 된 건 학교 평판에 손실이 컸다.

“늦었군.”

늑대 귀 군인이 양손에 유네와 세라, 입으로는 미나를 물고 웅얼거렸다. 왕녀를 안은 루이나도 있었다. 다른 네 마리 수인을 언제 다 찾을까 걱정했던 류제는 마음이 편해졌다. 온전히 내 몫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밴드부 일동은 8반의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조그마한 고양이 수인들이 냥냥거리자 눈에 하트가 뿅 생겼다.

“왕녀님이잖아!”

“세라 선생님? 거기에… 이야, 냥냥이 너 진짜 장난 아니다. 이 사악한 악동아,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거기 학생, 조용히 하렴.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이 일은 비밀로 하라고 전달했는데?”

“들켜버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류제가 자신의 팔뚝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입질을 하는 렌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섯 마리가 빠른 시간 내에 모일 수 있었던 건 모두 저 군인의 덕분일 것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언제 다 찾으신 건가요?”

“며칠 동안 고양이와 씨름을 했더니 고양이 상대로는 익숙해졌거든.”

군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옆에 서있던 냥냥이가 찔끔했다.

렌 하나도 고생깨나 했는데 순식간에 세 마리나 찾다니 역시 늑대라서 코가 좋구나. 사고의 뒷바라지 역할은 항상 그가 떠맡았었는데 할 일이 줄어들어 시름을 덜었다.

“왕녀님께서 저런 상태이시면… 하아, 윗분들이 우리 제립학교가 학생들 통제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트집거리가 생기겠죠. 어휴, 머리야. 생각만 해도 두통이 오네요.”

고양이 왕녀를 데리고 멋대로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루이나를 교무실로 끌고 온 사람 또한 늑대 귀 군인이었다.

무사히 포획된 여섯 마리의 고양이 수인들은 인간들을 유심하게 지켜보며 이야기를 듣는 시늉을 했다.

“타인 수인화는 저 남학생만 특정해서 그런 건 아니었군. 하지만 이렇게까지 지능이 없으면 전투에 기여할 수 있는지 판별이 불가한데.”

“그래도 수인화가 된 상태에서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좀 더 관찰이 필요해요.”

“그 대상이 하필이면 귀한 분이시라니. 하아, 분명히 잡음이 섞일 겁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 포기해야 하나.”

선생님들은 루이나의 품에 안겨 고고하게 털을 고르는 왕녀를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8반 학생들을 통솔해야 하는 담임 세라 밀로니마저 고양이가 되어버려 세라가 아닌 누군가가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너희들은 그만 기숙사로 돌아가거라. 이 일에 대해서는 통지가 있기 전까진 절대 함구하고.”

“에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치사해. 우리도 끼워줘요.”

“잔말 말고 어서 돌아가렴. 류제, 너도.”

자기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었던 선생님들이 멋대로 그들을 밀어냈다. 학생들만 따돌리니 그들은 싫다며 애처럼 볼을 부풀렸다. 루이나는 끼워주면서. 어른들은 맨날 이런 식이었다.

“렌은요?”

“데리고 돌아가도 된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거든. 대신 분실하지만 말도록. 내일 아침에 자세히 통지하지.”

“아, 거기 학생. 고양이에게 이거라도 먹여. 소화기관까지 변했을 테니 그 상태론 사람이 먹는 걸 먹일 수는 없으니까.”

문이 닫히기 전 늑대 귀 군인이 류제에게 고양이 간식을 건네주었다. 그가 봉투 안을 확인하는 사이 교무실 문이 굳게 닫혔다.

수신제 여파로 발생한 은밀한 특별 대우가 사라져 개밥에 도토리 꼴이 된 렌은 태평하게 고양이 세수를 했다.

“쳇, 시시해. 끼어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처럼 대사건이 터졌는데 선생님들도 자기들끼리만 모여서는 너무한다니까. 하아. 냥냥이도 바쁘겠다, 난로도 빼앗겼겠다. 우리 합주는 어디로 굴러가냐.”

교무실 입구에서 컷당한 밴드부 일동은 불쌍한 냥냥이를 추억하며 각기 반으로 돌아갔다.

그들과 작별 인사한 류제도 반에서 렌과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기숙사로 향했다. 선생님들은 일주일 동안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려나.

“냐앙.”

“좋겠다, 넌. 아무 생각 없어도 돼서.”

앞날이 깜깜한 류제가 고양이 렌에게 한탄했다. 추운 날씨에 손을 녹여주는 뜨끈뜨끈한 체온을 품에 안고 기숙사로 돌아온 류제는 방문을 단단히 잠근 후 렌을 내려놓았다.

“냥? 냐앙?”

렌은 매일 보던 기숙사 방이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여기저기 탐색했다.

땀투성이인 세탁 바구니에 멋대로 들어가서 자리 잡으려는 것을 류제가 급하게 말렸다. 거기가 좋다고 고집을 부리던 렌이 입질을 하자 그는 침대에 올려둔 봉투에서 간식을 하나 뜯었다.

방 안을 채우는 맛있는 냄새에 고양이 렌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류제가 쭈쭈 개를 부르는 소리를 내며 간식을 흔들었다. 경계하며 다가오던 렌이 침대에 가볍게 점프해 류제의 무릎을 양발로 디뎠다.

“맛있어?”

짓이겨진 생선 살로 만들어진 간식을 낼름낼름 핥아먹는 고양이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이라고.”

스토리가 틀어지고 말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는 이대로 정지되어 일주일 후에 다시 시작할 것이다.

“우냠, 냠, 냠.”

그 누구보다도 그걸 의식해야 하는 렌은 류제에게서 냥냥 간식을 받아먹기 바빴다. 항상 같이 저녁을 먹던 렌이 이런 걸로 배를 채우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급식실에서 저녁을 때운 류제는 고양이 렌을 방에 둔 게 생각나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렌이 방을 돼지우리로 만든 것을 보고 류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혼자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지 책상 위에 있던 책이란 책은 다 떨어졌고 보관해 놓았던 유인물도 갈기갈기 찢어져서 형체를 잃었다. 벽지에 손톱자국을 내놓은 데다 화장실에는 고양이 렌도 인풋과 아웃풋이 있는 생명체라는 걸 알 수밖에 없는 증거물들이 난자되어 있었다.

사고를 친 고양이 렌은 태평하게 책상에 앉아 고양이 세수를 했다. 류제는 그가 얄미워 꿀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너 진짜.”

골치가 아팠지만 지성이 없는 고양이가 되어버린 건 렌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불평은 내일 고양이녀에게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고양이 렌과 행복한 한때를 상상했던 류제는 현실에 좌절하고 얌전히 방을 정리했다. 더러워진 렌의 교복 조끼를 벗겨 빨래 통에 쑤셔 넣은 류제는 가벼운 여름 체육복 상의로 갈아입혔다.

방 탐색을 하다가 떨어뜨렸을 책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던 그는 렌의 책상에서 떨어진 공책을 줍고 무의식중에 펼쳤다. 낯선 알파벳이 삐뚤빼뚤 적혀있는 공책은 아무리 뜯어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나라 말이니?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겠지만. 그지?”

“냐앙.”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양이 렌이 답했다. 렌네 할머니가 과거 키아나트리체에게 정복당한 소수민족 출신이신가도 싶고.

아무리 렌이 고양이가 되었어도 사적인 생각까지 훔쳐보는 건 실례니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둔 류제는 네 갈래로 찢어진 벽지를 보고 허탈해졌다. 벽지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다른 곳 먼저 해치우기로 하자.

현실도피로 온 힘을 다해 화장실의 흔적을 지우고 나와보니 벌써 소등 시간이 머지않았다. 할 일이 많아 허둥지둥 움직이는 그를 보고 고양이 렌이 겁에 질려 책장에 몸을 웅그렸다.

청소를 끝내고 의자에 주저앉은 류제는 고양이 렌을 못된 눈초리로 흘겼다.

잘못했다는 걸 알기는 아는 걸까.

“이제 나도 모르겠다.”

머리를 쓸어 넘긴 류제의 이목구비가 잠시 드러났다 사라졌다. 정신적으로 지친 그가 과제를 할 생각도 못 하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사색에 잠겨있으려니 고양이 렌이 책상 위로 내려와 류제를 가까이서 관찰했다.

“왜, 이 바보야.”

“…….”

“이리 와.”

류제가 쭈쭈 손짓을 해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꼬리를 탁탁 치던 그는 이내 흥미를 잃고 제 침대에 뛰어내렸다.

나한테 전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말이 안 통한다는 건 갑갑하네. 소통이 잘 안 되는 건 원래 렌이랑 똑같은 것 같지만.

의자를 돌린 류제가 책상에 바로 앉아 책을 펼쳤다. 과제를 풀고 있으니 혼자서 놀다 심심해진 고양이 렌이 냉큼 뛰어와 장난을 치듯 그를 툭툭 건드렸다.

“오라고 할 때는 안 오고. 이 변덕쟁이야.”

“냥.”

류제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는 연필 꽁지를 보고 눈을 요리조리 돌리던 렌은 한참 장난을 치다가 책 위에 식빵 자세로 누웠다.

연필을 놓은 류제는 렌의 턱을 쓰다듬었다. 골골골 기분 좋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마음도 많이 연 것 같고, 귀여우니까 봐준다 정말.

자신을 두 번이나 도와준 류제를 무해하다 정의 내린 고양이 렌은 책 위에 발라당 누워 숙제하는 류제를 방해했다.

포기한 류제가 놀아주자 그는 신이 나서 우다다 온 방을 내달렸다. 언젠가부터 조용하다 싶더니 침대 구석에 얼굴을 처박고 잠이 들었다.

팔자도 좋다. 바깥보다는 기숙사가 익숙해서 안심이 된 건가. 류제는 자신의 침대 머리맡을 대각선으로 차지하고 도롱도롱 코를 고는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고민하던 류제는 어쩔 수 없이 침대 구석에 쭈그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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