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1) (44/112)

챕터 9. [11월. 시나브로 침식하는 염몽] (1)

아무래도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위기다. 그것도 내 고양이 인생 최대의 위기다!

다홍색 하늘이 유리창에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복도. 그곳을 활보하는 고양이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대망의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몇 주가 흐른 현재, 성적표를 받고 고비를 감지한 학생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떠들썩했던 수신제가 끝나고 학교는 면학 분위기를 강제로 조성하였으나 청춘을 즐기고픈 학생들에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선생님들의 조삼모사 전략에 당한 학생들은 수신제 준비를 핑계로 뺀 수업을 채우기 위해 주말에도 보충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나가 공부했다.

그럼에도 여느 때보다 낮아진 중간고사 평균 성적에 학생들은 미래를 향한 위기의식을 불태웠다. 무슨 이유를 들먹이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평균 30점을 넘지 않은 과목은 겨울방학 내내 보충수업을 듣고 추가시험에 통과하지 않으면 낙제였다.

누가 뭐래도 친구들과 함께 2학년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건 학생들에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냐아앙~!”

“거기 서라!”

그녀가 현재 뒤에서 쫓아오는 어둠을 피해 도망가는 건 망친 중간고사의 현실도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수신제의 여파였으나 이유는 달랐다.

밴드부 홍보로 전교생 앞에서 공연했을 당시 그녀가 우연찮게 렌 지미를 ‘수인화’시켜 버렸던 일 때문에 선생님들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시달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흐냥!”

“잡았다.”

수신제 때 오며 가며 얼굴을 봤었던 백장미 부대 소속 ‘늑대 수인화’ 어빌리터가 그녀를 붙잡고 앞발로 강하게 짓눌렀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도망자가 영 성가셨던 늑대는 짐승처럼 변한 주둥이를 고양이녀의 목덜미에 대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 너를 위해서니 제발 애처럼 굴지 말거라.”

“냐아앙. 하지만…….”

늑대 울음소리에 담긴 저주파에 냥냥이가 겁에 질려 납작 엎드리자 늑대 주둥이가 다시 사람처럼 변했다.

고양이녀는 체념하고 말았다. 저 군인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변명이 무색해도 한번 늘어놔 보자면 그날 이후 매일같이 어른들에게 들볶여 좋아하는 기타 연습도 못한 데다, 보충수업이라도 피하게 시험공부 할 시간을 주면 모를까 허구한 날 실험을 당하니 예민한 고양이로서 유쾌하지 못했다. 분명 그것 때문에 중간고사를 망친 거다.

자유로운 고양이는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단 말이야. 난 구속받는 것 따위 정말 싫어.

목덜미를 잡힌 그녀는 속으로 불평을 내뱉었다. 이곳에선 그녀의 편이라곤 한 명도 없다. 나는 이러려고 밴드 공연을 한 게 아닌데.

“똑바로 서거라. 오늘도 할 일이 많아. 새로운 사람이 설명을 들으러 온다고 어제 공지했지 않니.”

“…냐앙. 저도 알아양.”

“그럼 도망가지 말거라.”

타이르는 목소리에 진심이 없다. 고양이녀는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늑대 수인에게 끌려갔다.

그녀 스스로도 어떻게 평범한 렌 지미를 수인화시켰는지 모르겠는데 이유를 묻는다면 곤란했다. 렌을 수인화시켰던 사건은 사춘기 특유의 어빌리티 불안정으로 인한 단순한 우연임에 틀림없었다. 선생님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람. 냥.

“먼저 들어가거라.”

“아…알았어양… 밀지 말아양.”

문제의 방문을 여니 그녀를 기다리던 수많은 어른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수인계 어빌리터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온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학교 전속 사진사의 손에 찍혔던 유일한 증거 장면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문제의 그……. 이 남학생은 ‘수인화’와 전혀 관련이 없는 어빌리터인가요?”

“그렇습니다. 정신계 방면 어빌리티를 가졌다고 추측하는 학생입니다.”

“놀라운 일이군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아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수인화’ 계열의 어빌리터가 타인을 수인화시키다니 전례가 없지 않습니까.”

“만일 비어빌리터까지 수인화시킬 수 있으면 그때는 정말…….”

어른들만의 사정에 휘둘려야 하는 고양이녀는 싫증이 났다. 며칠 전에 봤던 장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그녀는 이전에 설명했던 현상을 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이 진술해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입술이 말린 그녀는 야속한 그들에게 힘없이 다가갔다. 늑대만 없었어도 오늘은 분명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저기 왔군.”

“부르셨냐옹.”

“1학년인가? ‘고양이’ 계통이로군. 학생의 척도는 어느 정도지?”

예상했던 대로 새로 온 어른들이 고양이녀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으며 신상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실험대에 제 발로 걸어가는 기분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또… 냐앙.”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만 새롭게 측정한 결과 저 학생이 문제의 재채기를 할 때마다 척도가 불안정하게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기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학생 말로는 그 순간 어빌리티 컨트롤이 어려워진다 하더군요. 수인계 어빌리티의 진화 징조입니다. 이걸 일관되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전투 시에도…….”

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그냥 자기들 멋대로 사람을 휘둘러 댄다.

도망칠 루트를 찾으려니 낌새를 눈치챈 늑대 귀 군인은 고양이녀가 두 번 다시 이탈하지 못하도록 문을 지켰다. 한숨을 삼킨 고양이녀가 제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그녀는 고양이가 아닌 모르모트(실험 쥐)가 되어서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낱낱이 파헤쳐질 것이다.

“알겠습니까, 학생? 어빌리티 컨트롤 능력을 증진시키는 겁니다. 수인화를 시킨 상대방 또한 당신 정도로 청력과 근력과 민첩성이 상승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하필 대상이 어빌리티 판별이 안 된 학생이라 수인화 상태에서 자신의 어빌리티를 동시에 운용 가능한지 확인하는 작업은 못 했습니다만. 밀로니 선생, 그 학생에게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고요?”

시무룩한 냥냥이를 달래주려고 했던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담당한 8반 렌 지미 학생 때문에 호출되었던 그녀도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애물단지 평범한 학생이 고양이 수인이 되어서 귀와 꼬리를 내놓고 학생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니. 입에 담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 대사건이었다.

깜짝 밴드 공연을 짐작하고 있었던 세라는 렌의 노래를 들은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해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가 갑자기 고양이가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건 이후의 폭발적인 반응은 더욱 놀라웠다. 렌은 아는지 모르는지 공연이 끝나고 그를 보기 위해 체육관을 대거 이탈하려는 학생들을 수습하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모른다.

“유심히 주시하고 있지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다만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을 잘 못 한다고…….”

어떻게 하면 이만큼 다채로운 사건에 말려들 수 있을까. 그녀는 두통이 일었다. 귀엽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일이 중대하다 보니 아직 그에겐 후폭풍을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담임 선생의 입장으로선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신중하게 접근합시다. 이는 더 먼 미래를 보았을 때 우리 키아나트리체가 그 어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강대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재경에게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정상이라면 고양이녀는 밴드 공연 때가 아닌 이번 달에 있을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의 트리거가 되는 바로 그때 문제의 재채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공연 당시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재경이 먼저 영향을 받아버렸고, 예정보다 빠르게 특별한 능력을 들킨 고양이녀가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과 수인화 계열 군인 등에게 분에 넘치는 훈련을 받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냐아아오옹!”

덕분에 인생이 더 빨리 귀찮아진 냥냥이가 꼬리털을 부풀리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다. 다만 고양이답게 자유롭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귀찮은 엇갈림은 더한 나비효과가 되어서 부드럽게 유턴해 재경에게 돌아올 준비를 했다.

* * *

“이렇게 된 이상 기말고사를 노린다!”

책상을 주먹으로 내지른 재경이 진취적으로 외쳤다. 꽉 쥔 손에는 그의 중간고사 총점과 석차 등급이 적힌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저번 학기에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친구들이 이번에도 불안한 낌새가 보이는 렌의 성적을 걱정 반, 조롱 반으로 섞어 놀렸다.

“기말고사는 무슨. 내가 장담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넌 이번 겨울방학 때도 집에 못 돌아가.”

“아냐, 이번 중간고사는 수신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기말고사 땐 괜찮을 거야. 진심!”

재경이 당당하게 반박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은 류제 선에서 손쉽게 부정되었다. 익숙한 류제는 미나가 추천한 책을 읽으면서 렌의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묵묵히 반박했다.

“수신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면 다른 애들은 언제 공부한 건데? 국사는 비키랑 같이 부루마블로 복습까지 했으면서 점수는 왜 그럴까? 세계사 다음엔 국사 보충이야? 정말 대단하다.”

“으으… 그렇게 애매하게 외우니까 더 헷갈렸단 말이야. 시험 문제 풀다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버렸어.”

믿었던 류제마저 빈정거리며 편을 안 들어주자 시무룩해진 재경은 성적표를 접어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이대로 기말고사 성적까지 나쁘면 겨울방학 때 보충을 들어야 할 과목들이 셀 수도 없었다. 보충이야 류제가 있으니 괜찮지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2월에 있을 엔딩을 보충과 함께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 렌 군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야. 몇 과목은 충분히 안정권인걸. 저번 학기 추가시험도 합격한 걸 보면 렌 군에게도 공부 잠재력이 있다는 말이잖아?”

“유네… 내 자존심을 챙겨주는 사람은 유네 너밖에 없다. 류제, 이 나쁜 놈.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못된 소리만 하는 게 넌 딱 악역이야, 악역!”

자신이 삼류 악당인 주제에 징징거린 재경이 유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수신제가 끝나고 중간고사 기간 동안 렌을 피하는 듯 보였던 유네는 이제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재경은 유네가 자신을 피하는지도 몰랐겠지만 웬만한 반 친구들은 모두 유네의 이상한 태도를 알아챘다.

지금도 유네는 재경의 손을 의식하며 일부러 뿌리쳤다. 자연스럽게 뒷짐을 진 그녀가 실없이 웃었다.

“헤헤. 하지만 사실인걸. 그렇지 않아, 류제 군?”

“글쎄다. 어쨌든 렌의 머릿속에 지식을 넣는 건 결국 내 몫이 되겠지.”

자기 공부하랴, 렌 공부시키랴, 축제 때문에 한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기간트리카 실기 시험까지 봐주랴 시험 기간 내내 류제도 기진맥진이었다.

한숨이 나오던 류제는 책을 읽다 말고 책상에 턱을 기대었다. 저번 학기에 부진한 성적을 내었던 수학은 기적적으로 괜찮았는데 다른 과목들이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하하, 하하하하! 웃겨 죽겠다.”

“미친, 대박! 아, 표정 좀 봐. 멍청이 야옹이 같아.”

“쉿. 쉬이잇. 너무 크게 말하지 마. 렌이 또 와서 심술부릴걸.”

다른 자리에서 숨넘어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메이드복 때처럼 남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는지 같은 반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웃음보를 터뜨렸다. 손에 든 사진을 보아하니 드디어 인화되어서 판매되는 수신제 사진들을 돌려보고 있는 듯하다.

류제는 그녀들이 구경하는 사진이 뭔지 알았다. 그녀들이 힐끗힐끗 렌을 쳐다보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 밴드부 대기실 사진일 것이다. 거기엔 유일하게 렌의 고양이 귀 모습이 제대로 찍혀있었다.

아무래도 렌은 머리에 고양이 귀가 달렸었다는 걸 여태 모르는 모양이고, 류제의 부연 설명으로 렌이 무대에서 내려온 그 시점부터 기억이 애매해졌다고 들은 친구들은 렌이 만약 이 사진의 존재를 알면 불같이 화를 내리라는 것도 뻔히 알았다.

“여장 메이드에 고양이 귀라니. 렌의 메이드복은 완벽한 선택이었어. 수예부 나이스.”

“흥, 감히 유네를 울리니까 이런 벌을 받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니까. 밴드부 공연은 우리한테 왜 숨긴 거야? 너무한 자식.”

“왜긴, 당연히 몰래 인기 끌려고 그런 거겠지. 하여튼 그놈의 인기는 엄청 따져요. 뭐, 렌이야 매번 그러니 질리지도 않지만.”

유네가 렌에게 차였다고 잘못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은 사진을 보며 유네를 거절한 렌의 멍청이 같은 선택을 실컷 비웃어주었다.

그녀들은 얄미운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라우라 축제 때 렌의 손에 분해된 여장 사진 꼴이 나지 않게끔 몰래 사진을 돌려보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쟤네는 왜 또 저래?”

재경이 어지간히도 크게 웃어대는 그녀들을 심술궂게 흘겼다. 지네들은 성적 잘 나왔다고 잘난 척하나.

재경이 오해하는 틈을 타서 가까이 다가온 비키가 책상 위에 있던 성적표를 멋대로 펼쳤다.

“허, 이게 뭐야. 점수가 왜 이래? 잘못 채점하신 거 아냐? 사람이 이런 점수를 맞을 수가 있나?”

“우악! 함부로 보지 마. 넌 귀족이라면서 개인 정보에 대한 예의도 없냐?!”

“웃겨. 이런 점수를 보고 예의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알아?”

어처구니없어진 비키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번 중간고사 시험은 비키 그녀도 자기 공부에 바빴고 유네의 고백 실패로 얼굴 보기가 민망해 기간트리카 대결을 제외하고 그를 신경 써주지 못했었다. 류제가 있으니 괜찮다고 방심하는 사이 이런 사달이 났을 줄은 그녀도 몰랐던 것이다.

공부를 핑계로 부루마블까지 해줬는데 국사 점수가 이 모양이니 비키의 눈가가 울화통으로 실룩거렸다. 착한 유네는 손을 내저으며 꾸준하게 렌의 편을 들었다.

“다들 너무 각박해. 렌 군도 기말고사는 잘 볼 거야. 걱정하지 마.”

“유네, 네가 착해서 탈이야. 렌은 너무 오냐오냐해 주면 안 돼. 그러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잖아. 류제, 넌 신경 안 쓰고 뭘 한 거야?”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해 줄 수 없어?”

결국 책을 덮은 류제가 시큰둥하게 입을 비죽거렸다. 렌을 가르치는 건 집중력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정신 산만한 고양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류제도 이번 학기에 배운 내용을 완전히 까먹은 렌을 온 힘을 다해서 간신히 그 성적까지 올려놓은 거다. 특히 S_script 시험. 그건 정말… 하아.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친다.

류제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경이 남 일인 양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 학기 추가시험까지 통과시켜 준 전문 과외 선생님이 곁에 있으니 어지간히 든든했다.

“그러니까 기말고사를 노린다는 거지. 부탁한다, 류제야.”

“아니, 류제는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지금부터 기말 끝날 때까지 집중적으로 관리해 줄게. 감사하도록 해.”

“윽, 비키랑 내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라고? 싫어. 차라리 혼자 할래.”

“뭐라고?! 왜 류제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

“시끄러, 마귀할멈아. 넌 맨날 잔소리만 하잖아!”

“하하하, 비키 양도 참.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마.”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키와 유네는 여전히 친한 친구였다. 수신제가 지나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안이 썩어가는 탐스러운 개살구의 향이 흐드러졌다. 쉬는 시간 내내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류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2학기가 시작하고 워낙 많은 일이 순식간에 지나가서인가 아무런 사건 사고도 터질 기미가 없는 11월의 학교는 평온 그 자체였다.

다만 따스했던 정오의 양지 기온이 급락해서 저녁에는 지정된 교복 코트를 입지 않으면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학생들은 별다르지 않은 학교생활을 영위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나날. 나무에는 드문드문 마른 잎사귀가 매달려 안쓰럽게 흔들렸다. 평범한 하루 속 운동장만 이따금 수다스러웠다.

건조한 바람이 피부를 메마르게 하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이곳 제립학교 학생들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최후의 검으로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본분을 찾아 드넓은 운동장에서 기간트리카 실전 훈련과 호신술을 배우며 몸을 단련시켰고, 생소한 개념인 S_script 수업과 다른 여타 교과목 수업을 경청하며 이루고자 하는 바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런 평탄한 일과의 연속에 자극이 부족해진 학생들은 끝내 지루함을 느꼈다. 괴롭던 중간고사도 끝났는데 끝내주게 재미있는 일이 학교 어디선가에서 벌어지지 않으려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제립학교가 본디 이능력자 집단이고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지라 평화를 지루하다 여기는 불순분자들이 있었다. 그네들은 잔잔한 수면에 개구쟁이처럼 돌을 던지고 싶어 했다. 대단한 일정이 없는 11월은 항상 그렇다.

수신제 공연을 성공리에 마쳐서 기분이 좋았던 밴드부 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창고 문을 닫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근 그녀들은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 추워. 빨리 난로 좀 틀어줬으면 좋겠다. 어디 버려진 난로 없나?”

“난 여름보다 겨울이 더 싫어. 추운 건 질색이야. 근데 엄마가 이번 겨울 엄청 추울 거라고 했어. 감기 걸리면 어쩌지?”

“난 벌써 목이 칼칼해.”

나라카의 자생 식물로 망가졌던 신관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서 동아리별 부실 배정도 끝났으나 렌 덕분에 간신히 폐부만 면했을 뿐 여전히 사람 수가 부족한 밴드부는 동아리실이 마땅치 않아 아직도 신관 창고를 연습실로 쓰고 있었다.

수신제가 끝나버려 방학 전까지 공연할 일도 없으나 악기 연습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던 밴드부 일동은 히터가 없는 창고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저녁 시간이 되기 전 밖으로 기어 나왔다.

손끝이 얼 것 같은 차디찬 공기에 그녀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창고는 넓고 소리가 잘 퍼져서 연습하기 좋지만 날이 추워지니 영 쓸 만한 곳이 못 되었다.

선생님 몰래 창고에서 장작을 때자니 혼날 것 같고, 화염 계열 어빌리터를 한 명 납치해 올까 꾀를 낸 밴드부 일동은 1학년 화염계 유명인인 비키 셀로니아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비키의 고귀한 신분이 마음에 걸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만일 렌 지미를 억지로 공연에 참가시켰던 것처럼 비키 셀로니아를 납치할 수만 있으면 재미난 대사건이 벌어지겠지.

제멋대로인 그녀들일지라도 사람을 봐가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그 일은 망상 속에서만 맴돌 뿐, 절대 실현되지 않을 일이었다.

“으하암, 지루해. 공연하고 싶다. 그럼 추운 것도 모르고 연습할 자신 있는데.”

드럼 스틱을 손에 든 ‘가시’ 어빌리터가 크게 하품을 했다.

겨울이 다가와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아직 5시 반밖에 안 되었어도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니 날이 저물었다.

“선생님한테 부탁해 볼까? 뒤뜰에서 버스킹식으로 공연해도 되냐고.”

“그럼 분명 이렇게 말할걸.”

“‘그런 것에 시간 허비하지 말고 공부나 하거라!’라고?”

어림도 없는 희망 사항에 세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문장을 떠들었다.

융통성 있는 8반의 세라 선생님이라면 몰라도 그녀들의 담임 선생님이 호락호락하게 허락해 줄 리 없었다.

특히나 밴드부 고문을 겸한 1학년 4반 담임은 학생들은 본분인 공부나 하고 훈련이나 제대로 받는 게 최고라는 주의라서 평가 점수에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 길거리 한량 같은 부탁을 귀담아 들어주지도 않을 터였다.

“하아, 이게 다 마족 때문이야. 마족 따위 다 없어져 버리라지.”

“2학년 때는 더 공연하기 힘들어질 텐데 큰일이네. 동아리에 사람도 안 오고. 밴드부는 무슨. 괜한 욕심을 부렸나?”

“그런 말 그만둬. 내년 1학년 중에 우리랑 마음이 맞는 사람이 꼭 있을 거야. 일단 우리 목표는 내년 체육대회에서 댄스 동아리를 제치는 거다!”

신관과 구관을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 교실로 돌아가던 그녀들은 살을 에는 바람에 부르르 떨었다.

세 명으로 오늘따라 수가 적은 밴드부 일동은 최근 유난히 얼굴 보기가 힘든 그녀들의 친구 고양이녀를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퍼스트 기타가 없어서 합주에 차질이 있었다.

“냥냥이는 뭐 하고 지내냐? 요즘 통 얼굴을 못 보네. 무슨 일 있어?”

“몰라. 틈만 나면 교실에서 사라지던데. 나 참, 새로운 부원 받으라니까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고양이녀와 같은 반인 ‘마비’ 어빌리터가 공연히 투덜거렸다. 교실에서 가장 눈에 띄기에 부원 모집 홍보 멘트로 4반 냥냥이를 찾아달라고 말했더니만 냥냥이는 틈만 나면 바람같이 사라지곤 했다. 그나마 베이스를 쳤던 그녀를 알아보고 찾아왔던 사람들은 렌의 고양이 귀 메이드복 사진 없냐면서 환호하는 팬들뿐이었다.

밴드부의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새로 입부하는 사람이 없어서 곤란했다. 입부 희망자들은 동아리실이 창고라는 걸 보고 1차 경악, 악기를 새로 배우기 위해 투자되는 시간이 만만찮아 2차 경악, 그리고 렌이 없는 것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대다수… 아니, 전부였다. 이런 사태는 절대 그녀들의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뭐, 네 말마따나 부원이야 내년에도 기회가 있으니까 그때까지 버티면 돼. 정 안 되면 보컬이 필요할 때마다 렌을 부르면 되지.”

“분명 치를 떨고 싫어할걸. 그리고 보컬도 중요하지만 세컨드 기타도 있어야 한다고. 사운드가 비잖아.”

“렌이 치면 어때? 렌은 노래는 정말 잘하는데 악기 다루는 재주는 잘 모르겠다. 하아, 뭐든 걔가 임시 입부 취소하면 우리 동아리는 폐부가 되겠지. 밴드부의 희망이 렌에게 달려있다니. 제기랄, 자존심 상해.”

“다시 설득해 보자. 걔 엄청 팔랑귀잖아. 이번엔 기타를 치면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꼬셔보면 어때?”

“아냐, 저번에 러브레터 받았다가 안 좋게 튕겨가지고 우리를 영 못 믿는 거 같아. 입부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렌을 찾는데. 약속대로 인기를 끌게 해줬는데 왜 우리한테 뭐라 그래? 참 내.”

그래도 렌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던 ‘가시’ 어빌리터가 불만 가득히 꿍얼거렸다. 태도가 하나같이 음습하긴 해도 팬클럽 같은 것도 생겼고,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누가 고백이라도 하려고 했잖아. 충분히 인기인이지 뭐. 분명 우리가 말했던 대로 된 거 아닌가? 거짓말은 안 했어.

“어, 저거 냥냥이잖아?”

구관으로 건너와 계단을 내려가 1학년 교실이 줄지어 있는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반대편에서 냥냥이가 황급히 뛰어왔다.

부리나케 달려오는 모양새가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라 마침 냥냥이를 찾고 있었던 밴드부 부원들은 반가움 반, 심술 반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냥냥아! 왜 동아리 연습 안 오는 거야? 너 도대체 뭘 하고―”

“으앗!”

가깝게 다가오는 냥냥이에게 알은척을 하려고 했던 밴드부 일동은 재빠른 고양이가 무시하고 지나쳐버리자 할 말을 잃었다.

이 제립학교에서 밴드 공연이라는 이질적인 목적으로 모인 걸쭉한 사이이니 당연히 인사를 받아줄 줄 알았던 그들은 냥냥이가 쌀쌀맞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저렇게 성격 비틀린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지?

“서라!”

그 궁금증은 쉽고 빠르게 풀렸다. 곧바로 고양이녀를 뒤쫓는 군복 입은 늑대의 거센 추격이 이어졌다.

뭔진 몰라도 이쯤 되면 그녀들도 심상치 않은 일에 얽혔다는 건 알아차렸다. 늑대 귀 군인 또한 바람만 남기고 사라지자 ‘투시’ 어빌리터가 냥냥이와 같은 4반의 베이스 ‘마비’ 어빌리터에게 물었다.

“군인? 냥냥이가 왜 군인한테 쫓기는 거지? 법이라도 어겼어?”

“나도 모른대도. 요즘 계속 사라지는 이유가 저 사람을 피해서란 건 알겠다.”

“어쨌건 하나는 확실하네. 우린 지금 세컨드 기타보다 퍼스트 기타를 다시 구해야 할 판일지도 몰라.”

인생이 꼬여버린 냥냥이의 불행에 밴드부 일동들은 동시에 묵념했다. 수신제 공연이 언더그라운드 때보다 반응이 좋아서 모처럼 이름을 날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위기를 가지고 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기회가 부족하다지만 그래도 기구한 운명이라고 그들이 제 처지를 비관했다.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괜찮아. 다시는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도.”

“굿바이… 고양이 렌.”

어디선가에서 구한 밴드부 공연 대기실 사진을 팔랑거린 밴드부 일동이 체념하며 짜게 웃었다.

사진 속 고양이 귀 달린 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아무런 꿈도 없는 학교생활은 지루하다. 밴드부 일동은 뭐라도 좋으니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길 소소히 바랐다.

* * *

최근 심심찮게 자신을 훑는 기분 나쁜 시선을 재경도 느끼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재경은 고개만 돌렸다 싶으면 얼굴도 본 적 없는 다른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면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여장 사진이 나돌았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걸 떠올리면 수치스러운 차림으로 교내를 활보했던 수신제 때 여장 메이드 사진이 교내에 나도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라우라 축제의 연장선인가. 장난에 당했지만 공연도 만족스럽게 했겠다, 관심을 받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 재경이 인기인이란 이런 건가 자조하며 괜히 우쭐해했다.

한가로운 방과 후, 날이 금세 어두워져서 귀가가 보다 서둘러지는 나날 속 재경이 종례를 마치자마자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4반 교실이었다.

“진짜 그 고양이녀, 뭘 하고 다니는데 비싸게 굴어?”

또다시 느껴지는 기묘한 시선을 무시한 재경이 분을 삭였다.

말이라도 걸면 모를까 곁에 맴돌기만 하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게 계속되니 노이로제에 가까웠다. 그 시선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재경은 그보다 이번 달에 있을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에 대한 정보를 조사가 우선이었다.

이번 챕터는 이전 챕터들과 달리 힌트가 되는 인트로가 나오지 않고 평범한 나날들이 계속되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벌컥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호감도 이벤트가 시작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트리거는 4반 냥냥이가 방과 후 복도를 지나다가 왕녀가 친위대 없이 유유히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중 예의 재채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냥냥이의 실수로 왕녀가 반쯤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주인공 류제가 놀라서 숨어버린 왕녀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의 호감도 이벤트가 하나 있다.

다른 하나는 미나의 호감도 이벤트이고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와 며칠 날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미나의 호감도 이벤트는 이미 3까지 다 채웠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이번 미나의 호감도 이벤트는 기왕이면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재경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건 그 선택은 내가 간섭할 게 아니지. 또 내가 개입했다가는 일이 틀어질 게 뻔한걸.

그게 어떤 시련을 줄지라도 선택은 류제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야, 냥냥이 없어?”

재경이 4반 뒷문을 두들기자 학생 한 명이 반응을 보였다. 퉁명스럽게 서있는 그를 발견하고 친근하게 다가온 4반 학생이 놀려대듯 말했다.

“뭐야, 너 냥냥이랑 사귀냐? 왜 맨날 냥냥이만 찾아?”

“그런 거 아니거든?! 물어본 것에만 답하면 될 것이지 꼭 뒷말을 붙이긴. 고양이녀 없어? 없으면 됐어.”

“냥냥이는 종 치자마자 나갔어. 근데 너 또 언제 공연해? 공연하면 나한테 알려주면 안 돼? 앞좌석에서 보고 싶어.”

“안 해. 노래 안 불러. 그럼 간다!”

재경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4반의 고양이녀를 추적하면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가 언제 발생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종이 치면 가장 먼저 4반 냥냥이를 확인하는 일과를 추가했던 재경은 이번 달 들어 얼굴 보기가 힘든 그녀의 행적이 어리둥절했다.

밴드부 애들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 대답을 안 해주고. 곤란해 죽겠다. 도대체 냥냥이 이 자식,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언제 왕녀와 마주치는 건데?

“설마 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면 진짜… 답이 없는데.”

설마 자신이 수신제 때 밴드부 공연을 도와줬다는 이유 때문에 스토리가 바뀌어버린 거라면 그건 정말 변명할 여지 없이 재경의 잘못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수록 재경은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부수고 있다는 망상밖에 들지 않았다.

싫은 생각을 오래 하기 싫었던 재경이 어둑한 안개를 어렵지 않게 떨쳐냈다. 오늘은 류제가 동아리 안 간다고 같이 하교하기로 했으니 류제가 잔소리하기 전에 빨리 교실로 돌아가자. 걱정의 꼬리를 매단 재경이 8반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 시작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한동안 재경에게 그런 무의미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 달의 고양이녀는 동네 도둑고양이처럼 신출귀몰했다. 저기에서 보였다 싶으면 홀연히 사라지고, 사라졌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그녀를 감시하려는 재경은 고양이녀를 따라잡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퍼부었다.

신관 창고에 숨어도 보고, 고소공포증을 감내하고 뒤뜰 나무도 타봤지만 아무래도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강인한 신체 능력을 가진 수인화 어빌리터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했다.

약이 오른다고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자니 눈에 띌 뿐만 아니라 선생님한테 잔소리를 들을 거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할지언정 아무도 몰라줄뿐더러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교내를 질주하는 행위는 당연히 벌점 사항이었다.

매번 루팡의 뒷모습만 쫓는 실패자 형사처럼 닭 쫓던 개 신세를 면치 못하던 재경은 문제의 그날도 냥냥이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종례를 마치자마자 교실을 박찬 재경이 4반으로 향했다. 오늘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세라가 바쁜 바람에 운 좋게 8반이 더 빨리 종례해서 재경이 4반에 도착했을 때 고양이녀가 교실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좋았어! 오늘은 붙잡고 말 테다!”

재경은 요 며칠간 냥냥이의 행동 패턴을 완벽하게 분석해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삼류 탐정처럼 그녀의 뒤를 밟는 재경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류제랑 같이 돌아가기로 했단 말이야. 제발 좀 잡혀주면 덧나나.

어째 목적이 냥냥이가 왕녀와 만나는지 유무를 감시하는 것에서 붙잡는 것으로 바뀐 듯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냥냥이의 뒤를 따르는 재경은 그와 다른 방향에서 고양이녀를 쫓는 ‘늑대 수인화’ 군인을 의식하지 못하고 추적을 계속했다. 고양이녀의 예민한 눈을 피하는 재경은 서바이벌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 서라!”

“아츄, 아츄우! 훌쩍. 진짜 귀찮냥.”

재경이 게임하는 것 같다고 단순히 말했어도 이 세계의 입장에선 난감한 문제였다. 고양이녀는 이번 달 반드시 니냐롯트와 마주쳐야 하는데 고양이녀는 귀찮은 사람들을 피해 다니려고 하며, 니냐롯트는 악몽으로 누적된 피로 때문에 몸을 사리니 이 세계의 억지력이 오랜만에 빛을 발했다.

고양이녀가 본래 이야기보다 빠르게 특이능력을 알아차렸든, 니냐롯트의 우울함의 원인이 렌 지미 때문이든, 대략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좋고 히로인의 심정과 그 행동의 결과로만 세상이 움직인다.

니냐롯트가 고양이녀를 만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없는 이상 이 세계는 도망 다니는 냥냥이와 숨으려고 하는 왕녀를 어떻게든 류제의 앞에서 조우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니 세상은 교묘하게 우연을 굴리고 굴려 톱니바퀴를 조절했다. 하지만 신재경이라는 이질적인 톱니바퀴가 존재하는 이상 정상적인 결과가 나오긴 힘들 것이며 재경도 그에 대해서 언젠가 대가를 치를 것이다.

고양이녀가 사라진 곳을 따라 미행하던 재경이 1학년 교무실을 조용히 지나쳤다. 문이 굳게 닫힌 교무실 안에서는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 연구원에게 붙들려 담당 학생에 관한 조사를 받는 세라가 퇴근도 못 하고 연구원과 입씨름을 했다.

“아직까지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 학생이 다른 사람들을 수인화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면 담당 학생만 특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렌 지미 학생의 어빌리티를 실험하게 해주시면 보다 정확한 실험 결과로 이어져 키아나트리체의 안보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고 제발 학생을 직접 조사하게 해주세요. 그러시면 저희도―”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한들 곤란합니다. 제가 곁에서 몇 개월간 지켜봤지만 이렇다 할 특별한 능력은 없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4반의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 학생에게서 별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자 이번엔 8반의 렌 지미 학생을 타깃으로 끈덕지게 질문을 받는 세라는 상황이 영 곤란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귀여운 사고로 넘어갈 수 있는 사건 때문에 그녀가 봤던 착각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째 세라가 비협조적으로 나서자 마족에게서 나라를 지키고 어빌리티를 연구해 발전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연구원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밀로니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계속 요청했어도 ‘그’ 류제 신리 학생조차 건강검진이라는 항목만 허락하셨지 않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시죠? 선생님께서는 지금 인류의 진화의 걸음을 재촉할 대단한 기회를 놓치고 있으신 겁니다.”

“학생이란 당신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실험 도구가 아닙니다! 제가 당신의 개인 정보를 샅샅이 조사하고 실험하면 좋겠습니까?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어빌리티를 연구할 겁니다. 당신들 멋대로가 아니라.”

“이거랑 그건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저한테는 같습니다!”

어빌리티 진화에만 집중하는 연구원에게 세라는 차마 렌 지미 학생이 첫 학기 신체검사 결과로 척도 검사기가 이상을 일으킬 만한 거대한 반응을 보였다고 알려줄 수 없었다.

그녀도 연구원도 서로 의견이 엇갈려 며칠째 아무런 소득이 없는 가운데 고요한 호수의 물밑에서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교무실 복도 반대편, 1학년 8반 교실 근처 여자 화장실에서는 세안을 하는 비키와 유네 사이의 모종의 대면이 있었다.

마지막 교시인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친 그녀들은 동아리에 가기 전 주둥이로 회포를 풀었다. 대화 주제는 또다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렌 지미의 기이한 행태에 관한 것이다.

“류제는 뭘 하는 거야? 그 바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제대로 감시해야 하는 거 아냐?”

“에이, 그래도 류제 군이 렌 군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어차피 매번 참견했었잖아. 최근엔 내버려 두는 것 같지만. 분명 류제도 렌의 바보짓에 질린 거야. 정말 못살아. 나중에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비누 거품을 문지르던 비키가 큰 소리로 불평했다.

최근 날이 건조해서 땀에 젖은 채로 다니면 피부가 빨리 말랐다.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으로서 외관도 완벽하게 관리하는 비키와 남장을 했어도 목욕탕을 꼬박꼬박 찾았을 만큼 청결을 좋아하는 유네는 얼굴에 잔뜩 거품을 묻혀 마사지를 했다. 거울에 거품투성이인 두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비쳤다.

“그 애는 사사건건 참견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반장인 나만 고생이라고.”

“렌 군은 눈 깜짝할 새에 폭풍의 눈 한가운데로 가니까. 비키 양도 매번 신경 쓰느라 힘들겠다.”

그녀들은 합심해서 렌의 흉을 보며 서로의 긴밀한 마음을 모른 척했다. 거품 아래에 있는 진짜 표정은 숨긴다. 그것이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너무 소중하고, 그렇기에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관계의 균형이란 것이 있다. 서로가 받을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녀들은 대화를 나누며 그 균형을 재정립했다.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수다를 떠는 사이 반 친구들은 모두 하교하거나 동아리 부실로 떠났다. 주번이라 교실에 남아있던 미나도 뒤늦게 가방을 챙겨서 도서부 동아리실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그녀는 오늘은 동아리를 가지 않겠다고 전했던 류제가 아직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수업 때를 제외하면 모습이 보이지 않던 니냐롯트는 재경이 뛰어가고 있는 건물의 건너편 창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악몽 때문에 피곤에 지친 왕녀는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검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종례를 마치고 검도부 부실로 향했던 그녀가 웬일인지 구관으로 돌아왔다. 부실 앞까지 갔다가 루이나에게 언성을 높였던 니냐롯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이나를 두고 혼자 교실로 향하는 것이다.

니냐롯트가 루이나에게 화를 낸 이유야 평소와 같았다. 수면 부족으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그녀가 심히 걱정되었던 루이나는 이게 다 왕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무지렁이들 때문이라고 흉을 보며 분개했고, 니냐롯트를 걱정해서 한 말이 과도한 집착처럼 보여 니냐롯트가 주의를 주자 루이나가 자신에게만 너무한다고 토라진 것이다.

니냐롯트를 위해서 희생하는 부분이 많던 루이나는 그녀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이 상황이 억울했다. 무슨 일이든 정도를 중요시하기로 한 니냐롯트는 루이나가 마음을 식힐 시간을 주고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전에 깜박하고 교실에 두고 온 과제를 가져가려고 그녀는 8반 교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경이 고양이녀 찾아 삼만리로 학교를 헤집고 돌아다닐 동안 류제는 교실에서 렌을 기다렸다.

방과 후 동아리 활동 시간이 되었지만 오늘은 동아리에 가지 않고 렌과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했던 그는 재경이 잠깐만 기다리라며 종례를 마치자마자 사라져버려 다분히 심심했다.

분명 같이 돌아가자고 했으니 어디 화장실이나 간 거겠지 짐작한 류제는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책상에 앉아 렌이 올 때까지 독서를 했다.

“…….”

류제가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도서부 일원으로서 새로운 취미 활동을 시작한 류제에게 미나가 추천해 준 책이었다.

같은 도서부이긴 하지만 입문자인 류제에 비해 미나는 박학다식하고 영리해서 학급 추천 도서 분류는 여전히 미나의 담당이었다.

그녀가 제안한 책들은 다 깊이가 있고 완성도가 높았다. 지식의 만족도가 높았기에 같은 도서부원인 류제도 추천 도서 담당에 동의하지 않을 건더기가 없었다.

“어라, 류제. 오늘은 할 일이 있다고 바로 하교한다고 하지 않았나? 남아서 뭐 해?”

“렌이랑 같이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네. 금방 돌아올 것 같으니까 기다려보려고.”

류제가 뒷자리에 있는 렌의 가방을 눈짓했다.

렌이야 워낙 제멋대로에 뭔가에 꽂히면 전부 제쳐두고 나 몰라라 행동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고 단지 배려가 몸에 안 배어서 사람을 휘두르는 것일 뿐임을 류제도 이해했다.

렌 지미의 더러운 성질머리야 반 내에서 유명했으니 미나도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렌 지미가 곁에 없는 건 그녀에겐 좋은 기회였다.

류제와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미나가 앞자리에 걸터앉아 류제가 보는 책의 표지를 훑었다. 그녀가 추천해 주는 책들은 모두 어빌리터가 받는 불합리함과 특별함, 희생, 강요되는 영웅 정신 등이 현실적으로 내포되어 사람의 이기심을 들쑤시기 쉬운 책이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았던지라 렌이 오기 전에 책을 전부 읽을 셈이었던 류제는 미나의 관찰 속에서 커버를 닫았다. 구경하던 미나가 흥분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때? 재미있어?”

“읽을 만해. 인상적이야. 끝까지 방심할 수가 없네.”

류제가 짧게 소감을 말했다.

미나가 만족스레 웃었다. 책이란 그녀의 특기인 꿈을 다루는 마법처럼 미성숙한 인간의 생각을 바꾸기에 적합한 도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녀를 신뢰하고 손바닥 안에서 입맛대로 차근차근 굴려지는 류제는 자신이 어떤 업을 시험받고 있는지 무지했다.

“수신제 때 학교에 왔었던 사관생도들이 추천해 준 책도 있는데. 흥미 있어?”

“흐음, 제목이 뭔데?”

“『마족과 전투의 역사』. 며칠 전에 읽어봤는데 비어빌리터의 관점에서 쓴 책이라 그런가 고증이 부족하기는 해도 재미있어. 그들 나름대로 우리들의 능력을 상상한 것도 즐겁고.”

미나는 늘 비어빌리터와 어빌리터를 구별해서 말하곤 했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버릇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어빌리터의 존재를 특별하게 여기고 싶다는 것이다.

“이 책 다 읽으면 무슨 책을 읽으면 좋을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딱 맞네. 그것도 도서부에 있는 책이야?”

“응, 도서관에도 있다고 했는데 내가 찾았을 땐 대여 중이었어. 아, 내가 지금 동아리실에서 찾아다 줄까?”

이제 막 책의 여운을 씹고 있는 류제에게 미나가 과분한 제안을 했다. 아무리 타인에게 무관심한 류제라도 염치는 있었다. 늘 동아리에서 신세 지는 미나를 부려먹기 미안해서 류제가 먼저 거절했다.

“나중에 내가 찾아볼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니,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서 그래. 누가 빌려 가기 전에 내가 가져올게!”

하지만 미나는 류제가 매사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임을 알아서 책을 추천해도 막상 류제가 읽게 되는 건 언제가 될지 몰라 걱정이었다. 벌써 11월인데 겨울까지는 시간이 촉박하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렌 지미라는 방해꾼을 피해 노선을 수정하느라 바빴던 미나는 류제가 말릴세라 황급히 교실에서 뛰쳐나왔다.

동아리방이 있는 신관까지 빠르게 달려가려던 그녀는 신발장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신발을 발견하고 뒤돌아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 쟤도 유별나다니까.”

미나가 그렇게 떠나버리고 멀뚱히 홀로 남겨진 류제는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다.

도서부에 입부한 이유는 정신 수양이 목적이었으니 책을 추천해 주는 것은 좋으나 책이 없으면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도 닦는 용으로 쓰는 거라 지금 책을 한 번 더 읽으면 되는 거고.

하지만 제멋대로 교실을 뛰쳐나가는 뒷모습이 왠지 렌 같기도 하고, 귀여우니 되었다.

미나가 굉장한 책 마니아라고 착각한 류제는 어차피 렌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며 책상에 팔을 기대었다.

심심해서 다 읽은 책의 내용 중 다시 읽고팠던 부분을 찾은 류제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낡은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미나인가 렌인가. 둘 중에 누가 먼저 왔으려나.

“어… 왕녀?”

“흠,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더니 아직 돌아가지 않았을 줄은 몰랐구나. 그대는 친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예상과 반대로 조용히 교실로 들어온 사람은 니냐롯트였다. 놀란 류제가 곱씹던 책을 덮었다. 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그녀의 주변에 친위대도, 루이나도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오랜만에 그녀와 단둘이 마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여행 때 한밤중에 마주친 이후로 처음인가?

“뭐… 그렇지. 왜 돌아온 거야?”

“필요한 게 있다. 신경 쓰지 말고 그대의 할 일을 하거라.”

그녀가 차갑게 전했다.

최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동아리 체험을 했던 날 검도부에서가 잠깐이었지. 그때 왕녀에게 렌에게 왜 손등 키스를 했냐고 물었는데 왕녀는 렌과 화해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 이전에 루이나는 타고시아 해변에서 렌이 왕녀에게 어떤 부탁을 했었다는 말을 흘렸다. 왕녀는 검도부에서 병마가 학교에 쳐들어왔을 때 어떻게 자신이 학교에 돌아올 수 있었는가를 아느냐 질문했었다.

그 일련의 사건들이 서로 얽혀있는 것일까? 마족이 쳐들어왔을 때 렌이 왕녀에게 도움이라도 청했다는 건가?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날 병마가 침입했을 때 렌이 왕궁에 있는 왕녀에게 연락할 타이밍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마가 침입하기 전에 렌이 알려주는 경우밖에 없는데 그건 불가능했다.

아아, 알고 싶다. 왕녀와 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왜 그러지?”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부담을 느꼈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든 물어보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던 류제는 호기심에 섞인 불쾌한 의도를 인지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왕녀에게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니, 오늘은 옆에 사람이 없어 별일이다 싶어서.”

“피곤해서 사람을 물렸다. 부탁을 들어주어서 다행이지.”

힘없이 답한 그녀가 제자리로 향했다. 왕녀는 수신제 때 검법 시연을 보였을 때보다 더 수척하고 말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축제 이튿날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분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사람이 모이는 날에는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왕녀란 과분한 자리구나. 피곤할 만도 해.”

“그리 태어나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 정신이 그릇에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것이 죄지.”

“딱히 나약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쉰 거야? 수신제도 제대로 못 즐기고.”

더군다나 수신제는 외부인에게 학교를 개방하기까지 했으니 차기 왕위 계승자인 그녀가 몸을 사릴 만도 했다.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외로운 자리였다.

“나는 그대들의 행복한 때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던 니냐롯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책상을 뒤적거렸다. 그곳에 찾는 과제가 없음을 안 그녀는 이번엔 교실 뒤로 향했다.

개인별 사물함 잠금을 해제한 그녀가 문을 열자 어떻게 넣었는지 온갖 과도한 애정 표현이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의 흔적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떨어지는 기묘한 선물에 불쾌감을 표했다.

“…원래 루이나가 먼저 열어본다만 오늘따라 정도가 심하군. 분명 가기 전에 깨끗하게 해두었을 텐데.”

“다른 의미로 대단하네.”

그것을 목격한 류제는 과도한 애정 표현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류제는 문득 집착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증오를 배설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친위대의 짓인가? 아니라면 그녀의 관심을 받고 싶은 누군가? 뭔들 위험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류제는 그것이 렌에게 향하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집착과 겹쳐 보였다.

“괜찮겠어?”

“정리하면 된다. 위험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물함에 있는 그것들은 아무래도 고귀한 왕녀가 집기에는 소름 끼치는 물건이었다. 왕녀의 기분이 나빠져서 번개가 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처리하는 게 낫겠지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류제가 기꺼이 그녀를 도왔다.

“고맙군.”

“다음번엔 네 친위대에게 처리해 달라고 해줘. 혼자 다니지 말고.”

“좋은 조언 고맙구나.”

류제가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없는 사물함을 닫고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자동으로 잠금 처리가 된 사물함이 어떻게 뚫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류제는 왕녀가 측은해졌다.

선배들 사이에서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류제도 저런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였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다. 내일 또 보자꾸나.”

“저런 것까지 봤는데 불안하네. 혼자 돌아가도 되겠어? 아니면 이따 렌 돌아오면 같이 하교할래?”

“제안은 고맙다만 그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학교는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다. 하교는 종종 혼자 했으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큰일이 날 것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니냐롯트는 그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비장했다.

류제와 짧게 눈인사를 나눈 그녀는 교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신발장에 있는 신발로 갈아 신으려던 니냐롯트는 사물함 일에도 질렸고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신발 밑창에 박힌 압정을 보지 못했다.

“앗……!”

신을 신던 니냐롯트가 아파서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궁금했던 것을 묻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류제가 왕녀의 비명을 듣고 단숨에 뛰쳐나왔다.

아픔을 억누른 니냐롯트가 제 발바닥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내쳐진 신발에 작은 금속이 반짝거렸다.

“왜 그래?”

덩달아 놀란 류제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주저앉은 니냐롯트는 박힌 압정이 아파서 말없이 인내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류제가 떨쳐진 신발 안에 박힌 압정을 보며 혀를 찼다. 친위대장 루이나가 곁에서 호들갑을 떨 이유는 정당하다는 건가.

곧 황제가 될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지. 왕녀에 대한 견제인가? 정치적으로 얽힌 건가? 적어도 그녀의 적은 학교에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상태로 내버려 두긴 뭐하지만 기다려봐. 세라 선생님 교무실에 계실 거야. 내가 모시고 올게.”

“나는 괜찮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안 괜찮을 수도 있잖아. 혹시라도 내가 누명을 쓰는 건 귀찮아.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기간트리카로 방어하고. 렌도 곧 올 거니까.”

류제는 곧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은 같은 1층의 복도 끝에 있었기 때문에 류제의 신체 능력이라면 빠른 시간 내에 오갈 수 있었다.

“세라 선생님!”

그가 다급하게 교무실 문을 열었다. 세라는 렌 지미에 대해 조사하려는 연구원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이 크게 열리는 소리에 말을 아꼈다.

“류제 학생? 왜 그러시죠?”

“어흠.”

“아, 선생님 그게…….”

유명인의 등장에 연구원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류제는 건강검진 명목하에 매주 토요일마다 다니는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 연구원의 익숙한 얼굴을 흘겼다. 지난주 건강검진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싶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왕녀는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말조심을 해야 할 것 같았던 류제가 세라에게 작게 귓속말로 전했다. 그에 따라 표정이 심각해진 세라는 연구원에게 잠시 후에 보자며 곧바로 교실로 향했다.

선생님을 모셔올 동안 렌도 곧 돌아올 거라는 류제의 말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고양이녀를 놓친 데다 왕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겠다, 하교하기 위해 다시 교실로 돌아오던 재경은 8반 교실 앞 복도에서 다리를 기대고 있는 왕녀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재경이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니냐롯트를 흘겼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궁금해도 그들은 이제 와서 걱정스레 말 걸기도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재경이 교실 문을 여는데 안에 류제가 보이지 않았다.

“류제 신리라면 곧 돌아올 것이다.”

“아… 그래.”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에 재경이 불편하게 대답했다. 왕녀와 말을 섞으면 루이나가 난리를 쳐서 오히려 어색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혼자라서 귀찮게 군담.

하아, 저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엔딩을 해피 엔딩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을지언정 전쟁이 터지는 왕녀의 루트로는 절대 가지 않을 재경과는 현재 왕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