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8) (43/112)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8)

제정신으로 돌아온 렌을 체육관 1학년 8반 관객석에 데려다준 류제는 주변을 확인하고 남몰래 자리를 떴다.

착잡함으로 분주한 손가락을 호주머니에 숨긴 그는 조용한 복도를 거닐었다. 이따금 체육관에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수다를 떠는 학생들을 지나쳤다. 그녀들은 류제를 구경거리 취급하듯 수군거렸다.

그 시선은 자신을 진정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야깃거리로 소비할 뿐임을 류제는 잘 알았다. 이런 비뚤어진 성격인 자신을 다른 사람이 좋아하다니. 아세미처럼 뭣도 모르는 사람의 치기겠지.

그래서 류제는 렌이 간혹 자신의 멀끔한 외관을 부러워해도 긍정하기 어려웠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뜯어보면 누구든 경악할 것이다. 속이 추악한데 겉이 멋들어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속내도 모르면서 좋다고 다가오는 건 달갑지 않다. 차라리 감정에 솔직한 렌이 지닌 관계가 류제는 더 진정성 있다고 생각했다.

“…하아.”

수신제 끝물이 다가오니 유네가 고백을 위해 렌을 불러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현실감에 류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17년 동안 형성해 온 도덕성을 포함한 모든 가치판단이 엉망이 되는 기분이란 역겹다. 단지 렌을 좋아하고 싶을 뿐인데 왜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더러워지는 걸까.

류제는 고양이 귀가 사라지고 친구들 곁으로 돌아간 렌이 받았던 환호와 축하 메시지를 떠올렸다.

렌은 고양이 귀 운운하는 친구들의 대화 주제를 기타를 쳤던 냥냥이와 혼동했다. 팔자 좋은 그는 남 일인 양 그들에게 러브레터를 자랑했다. 비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류제는 똑똑히 보았다.

보내는 이를 공백으로 둔 편지를 건네고 곧바로 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 유네는 관객석에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렌을 두고 체육관 밖으로 나온 이유는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류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마음은 무엇인가. 한심함? 분노? 질투? 유네 때문에 깨져버릴 평화에 대한 불안함?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초침처럼 들렸다.

이윽고 류제는 고백 전 혼자 마음을 가다듬는 유네를 발견했다. 우연을 가장한 그가 유네에게 접근했다. 새까만 앞머리 아래로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가증스러운 눈웃음에 가려졌다.

“유네, 여기서 뭐 해?”

“류제 군?”

모종의 일로 고양이 귀가 달려버린 렌이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피난을 갔었던 류제가 그녀의 앞에 섰다. 류제가 먼저 다가오다니. 유네는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렌 군 상태는 어때? 아직도 고양이야?”

“아니, 너희랑 만나고 얼마 안 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지금은 체육관에서 친구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넌 여기서 혼자 뭐 해?”

유네가 있던 곳은 학교 뒤편 사랑의 고목나무가 한눈에 보이는 복도 창문 옆이었다. 신관으로 갈 수 있는 다리와 가깝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류제의 어빌리티 덕분일까, 아니면 그녀가 렌에게 보낸 편지를 류제도 읽었다는 의미일까.

이런 감정이 처음이었던 유네는 지레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의도치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남장을 했을 무렵에는 기숙사에서 잠을 자기 전까지 늘 렌과 함께했기 때문에 유네는 류제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많지 않았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했더라? 더군다나 지금 처한 상황이 묘해서 유네는 어떤 주제를 꺼내야 하나 난감했다. 아까 고양이 렌 군이 왜 고양이가 된 것인가 물어보면 되려나?

“저… 그… 류―”

“렌이 편지 보고 좋아하더라. 네가 보낸 거지?”

그녀가 저지른 행위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못을 박는 말투다. 추궁을 당한 유네가 당황해서 몸을 움찔거렸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아아, 그렇구나. 류제 군은 옆에서 렌 군이 편지를 읽는 걸 봤겠구나. 난 편지를 읽은 렌 군의 반응이 궁금했던 건가? 그래서 류제 군 앞에서 긴장한 건가?

“아… 으… 혹시 렌 군도 내가 썼다는 거 알아?”

“그럴 리가. 렌은 바보잖아. 익숙한 글씨체 보고 깜짝 놀랐어. 유네 네가 렌을…….”

류제는 유네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편지를 받고 좋아했다는 반응을 들으니 벌써부터 고백이 성공한 기분에 유네는 머릿속이 핑크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곤란해질 사람이 몇일까. 망상에 휩싸여 뒤틀려버릴 현실을 보지 않는 유네가 류제는 괘씸하다.

그녀를 개도하겠다는 꿍꿍이속 다분한 눈길로 그가 적당한 곳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곁에서는 누구도 고백한 후에 벌어질 곤란함을 알려주지 않겠지. 다들 그녀를 응원만 했을 거야.

렌 정도면 유네의 고백을 받아주고도 남지.

유네의 고백은 절대 실패할 리 없을걸?

왜냐면 렌은 단순하니까.

웃기지도 않는다. 그게 무슨 자신감이야.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왜 너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렌이 주는 호의를 건방지게 착각하는 거야? 네가 렌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도 무지한 그 애의 밑바닥도 모르는 주제에?

아무도 모르는 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독점욕.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렌의 불안을 그는 보았다. 그에게 기대어 오열하는 모습도 안다.

나약한 렌 따위 알지도 못하면서 왜 손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지? 주제를 알란 말이야. 너도, 나도. 그 애는 아무의 것도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그래야만 해.

“그래도 갑자기 고백이라니 의외네. 렌도 널 좋아하는 거야?”

“으… 자…잘 모르겠지만 렌 군이라면 그…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지 않을까.”

“흐음, 렌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유네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류제 군이 그녀의 일에 대단히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다.

어디가 좋다니. 류제 군도 내 모습을 받아들여 준 친한 친구고, 늘 렌 군과 세 사람이서 같이 다니곤 했으니 이유를 비밀로 하기엔 의리가 없겠지.

렌 군은 언제나 강하고, 자신감 넘치고, 나를 그냥 나로만 봐준다. 곁에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의식하다 보니까 어느새 좋아졌다.

복합적인 이유를 말로 그려내지 못한 유네가 쩔쩔매다가 한 문장으로 간단히 압축했다.

“렌 군이랑 있으면 즐거워.”

“뭐야, 나랑은 즐겁지 않다는 거야?”

“아…아니, 그게 아니라… 류제 군하고 있을 때도 즐겁지만 렌 군은 뭔가 달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지금보다 더 렌 군을 알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어.”

일정한 선을 지키는 친구 이상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미들 스쿨 때도 유네는 인기가 좋았지만 그녀는 그녀에게 고백한 이들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것을 잘 몰라서였겠지만 렌은 달랐다. 그라면 그녀의 소중한 것까지 전부 맡겨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 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뭘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용감하구나.”

류제가 가식적으로 웃었다.

“그…그런가?”

용감하다는 말을 성장했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인 유네가 예의상 손을 내저었다. 고백 가지고 용감하다니, 류제 군도 참 무슨 사탕발림인지.

“그야 렌이 너랑 그럴 마음이 없다면 친구로도 못 돌아가는 거잖아. 고백을 들은 사이니까 어색할 거고. 그럼 네가 상처받지 않을까 해서.”

친구들의 전폭적인 응원을 받는 데다가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게 렌의 소망임을 익히 아는 유네는 그녀의 고백은 꼭 성공한다고 은연중 생각했다. 동요한 그녀가 숙이던 고개를 들어 류제를 쳐다보았다. 응원해 줄 줄 알았던 류제의 생각을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왜 그렇게 생각해? 렌 군은 상냥하니까 분명…….”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글쎄. 렌은 사랑을 모르겠다고 했거든. 널 상처 주지 않으려고 괜한 고민에 빠질지도 몰라.”

“하지만 렌 군은 여자 친구 가지고 싶어 했잖아. 소…손도 잡고… 키…키… 뽀뽀…도… 하고 싶다고 그때…….”

처음 만났던 날, 그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렌을 떠올린 유네가 안색이 창백해져 반박했다.

“그게 너이길 바라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고백을 수락했다고 해도 나중에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류제 군, 심술궂어.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

“걱정되니까 그렇지. 우리 셋은 늘 함께 다녔고 나는 렌이 널 어색하게 대하는 게 싫어. 네가 상처받으면 그거대로 렌도 불편해할 거야.”

걱정스러운 말투로 새빨간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장하는 류제는 자기 자신이 끝도 없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유네의 단념하는 모습을 보게 될수록 모순되게도 기뻤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가증스러운 말이 술술 나왔다. 류제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나 소름이 끼쳤다. 그의 안에 있는 마왕의 혼 때문이라고 치부하면 죄책감이라도 덜해질까.

아니지. 난 처음부터 이런 놈이었던 거다. 그만큼 소중한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몰랐을 뿐이다.

“난 렌이 너와 멀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

“…….”

“그래서인가 몰라도 비키는 고백할 용기도 못 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용감하다고 말한 거야. 그런 걸 다 감내하고 있나 하고. 솔직히 난 달갑지 않거든.”

비키와 고백이라는 연관성 없는 단어의 조합을 들은 유네가 착잡했던 눈을 번쩍 떴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비키 양이 고백이라니? 누구한테?

“비…비키 양이 누굴 좋아해?”

“몰랐어? 비키가 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 건 너였지 않아?”

놀람을 연기하는 그가 입가를 가렸다. 비키가 좋아하는 인물도 깜박하고 말해버린 양 당황한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몰랐구나. 룸메이트라서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 미안. 못 들은 척해줘.”

쐐기가 박혔다.

비키 양이 렌 군을 좋아한다고? 여자임이 밝혀지기 전 그녀의 집에 놀러 가던 여름방학 날, 멀어지는 비키의 마차를 보며 류제에게 던진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비키 양이 가지던 렌 군을 향한 호감이 이성으로서의 호감이었다니. 그게 정말이야?

비키는 유네의 거짓말이 들통났어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소중한 친구였다. 무신경한 류제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난…….”

“힘내. 이렇게 된 거, 나도 응원할게.”

누구도 아닌 그와 반년 동안 같은 방을 썼던 유네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못 주는 유약한 성격을 류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비키가 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네는 절대로 렌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

“류제 군.”

상처받은 유네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았다. 류제는 렌과 사귈 수 있다는 가당찮은 꿈에 겨운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준 것일 뿐이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고백을 하면 반드시 관계가 틀어져 버릴 것을 알기에 흘러나오는 마음을 코르크 마개로 빈틈없이 틀어막아야 하는 그인데 이대로 뺏기기 싫다. 이 정도는 욕심부려도 되잖아. 그가 조언한 말이 언젠가 진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

“…나 볼일이 생각나서… 미안. 먼저 갈게.”

비키의 마음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지라 혼란스러웠던 유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버렸다. 심한 말을 한 류제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만큼 무지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유네는 그런 애였다. 자신을 긍정해 준 비키를 배신하고 고백을 한다고? 어림도 없지. 류제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히 고아에, 부유하지 않은 데다 남자인 자신보다 화목한 가정환경에 손꼽히는 상인 집안인 유네나 지체 높은 귀족인 비키가 가능성이 있겠지. 단순한 렌은 거리낌 없이 고백을 승낙할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알든 모르든.

기척을 지우고 그 더럽고 질척질척한 수라장을 훔쳐본 초록 단발 머리카락이 깔깔깔 비웃는 듯이 흔들거렸다. 화살표의 행방이 걷잡을 수 없이 뒤섞여갔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네. 우리 학교에 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제정신인가?”

“제정신이라니. 죽을래?”

“렌만큼은 졸업할 때까지 절대 이런 일 없을 줄 알았는데. 하물며 류제도 진심 담긴 러브레터는 받아본 적 없는걸.”

“류제랑은 섞지 마라. 걔는 나랑 동급으로 취급하면 안 돼. 어쨌든, 니들이 뭐라고 씨부렁거려도 내가 이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 아니냐.”

교복으로 갈아입은 재경이 자랑스럽게 편지를 들어 보였다.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히죽거리는 꼴은 공연할 때의 멋진 모습과 정반대였다.

아무리 날 놀리기 위해 준연예인급인 류제를 삼류 악당인 나와 비교해도 타격 없다. 귀족인 비키나 왕녀와도 자주 말이 오가는 류제를 평범한 애들이 어떻게 건드려? 류제한테 러브레터 건네주려면 히로인 다섯 명부터 해치우고 오라고 해라.

그리고 내가 아무리 삼류 악당이라도 그렇지, 이 많은 여학생 중에서 나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정상 아닐까? 없으면 그거대로 너무한 거 아냐? 히히히. 우하하하!

“류제는 러브레터 받은 거 보고 뭐래?”

“몰라. 별말 안 하던데.”

재경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답했다. 옆에서 편지를 읽어보더니 완전 벙쪄 보이기는 했다. 그 정도로 내가 러브레터를 받은 게 의외인가.

나도 정신 차려보니 류제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고, 주머니에 러브레터까지 들어있어서 완전 혼비백산했으니까. 류제라고 뭐 다를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류제가 안 보이네. 너 무대 올라왔을 때 깜짝 놀라서 달려가던데 아직 안 돌아왔나?”

“렌, 너 류제랑 만났다며? 어디에 두고 온 거야?”

“같이 옷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돌아왔는데. 잠깐 어디 나간 건가?”

재경은 소란을 틈타 사라진 류제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러브레터에 마음이 쏠린 그는 미안하지만 류제에게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류제라면 미나의 호감도 물품을 사러 간 거겠지. 수신제 스케줄 표를 떠올렸을 때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포크댄스 시간이 가까워지는 지금 주인공이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 건 그 의미밖에 없다.

어제 세라 선생님 때도 그렇고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착실하구만. 호감도 이벤트에 강박적으로 굴어서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걸까.

요즘 류제가 미나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불안하지만 어차피 트루 엔딩인 왕녀 루트로 가지 않고 유네 루트로, 실패 시 그 예비인 세라 쌤 루트로 갈 것이다.

다다음 달 호감도 이벤트만 성공하면 둘 다 호감도가 5까지 차니 해피 엔딩으로 갈 수 있다. 내가 끼어들어 망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다.

“헤헤헤.”

분명 이건 모든 일이 잘 풀릴 징조야. 재경은 몇 번이고 러브레터를 읽었다. 다달이 나오는 필독 도서 독후감은 남의 것 베끼기 일쑤에 글씨라고는 간판이나 읽을 정도로 글 읽기를 싫어하는 주제에 문장을 외워버릴 듯이 눈에 박는 모양새가 웃기다.

“하나도 안 멋져.”

“차라리 메이드복 입고 있을 때가 나았어.”

“아아… 류제도 교복으로 갈아입어 버렸지. 언제 다시 그런 옷 입어주려나.”

“고양이 귀… 나도 고양이 귀 버전으로 보고 싶었는데. 냥냥이한테 부탁하면 다시 해줄까?”

시시하다며 투덜거리는 친구들의 시비는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재경은 자꾸만 웃음이 나와 입꼬리가 아팠다.

인기라고는 쥐똥만큼도 없었던 나한테 러브레터라니. 이야, 살다 보니 이런 경험도 다 하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우하하. 할머니, 나 여자 친구 생긴다! 부럽지?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쁜 나머지 정신을 놓은 재경은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킬킬거렸다.

염장질을 지켜보는 친구들은 무대 위에서 보여준 렌의 생소한 카리스마와 고양이 귀 귀여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홀랑 속은 기분이었다.

“어휴, 그만 좀 웃어라.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아, 엄청 귀여운 애가 나오면 어쩌지? 앞에서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별걱정을 다 한다. 우리랑은 잘하잖아. 막말만 안 하면 문제없어.”

저런 애를 멋지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이 잘못이지.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가수가 되었건 고양이 귀가 달렸건 바보 렌 지미는 뼛속부터 렌 지미인가 보다.

그녀들 중 유네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왜 유네가 이런 바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렌이야. 과대평가했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어. 긴장해서 상대방 멱살이나 안 쥐면 다행이겠다.”

“어엉? 뭐라고?”

재경이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눈을 부라렸다.

입학하고 그녀들과 처음 만났을 땐 긴장해서 눈도 못 마주쳤으면서 노려보는 건 잘한다. 여기까지 참 잘도 발전했다.

처음 렌 지미에게 말을 걸었을 땐 성격이 저모양이라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보다 더한 애였으니까. 많이 사람 됐다.

“하아, 렌도 여자 친구, 여자 친구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짝이 생기는구나. 나도 남자 친구, 남자 친구 노래 부르면 생기려나.”

“헤헤헤. 부럽냐? 부럽지?”

“우리만의 귀여운 소.년.이 남자가 되어버리는구나. 누나는 너무 슬퍼.♂”

아침부터 친구들과 작당하고 깽판을 부렸으면서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숙녀들이 실연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훔쳤다.

남자가 된다니. 한때 진정한 남자는 여장을 해야 한다는 개소리에 낚였던 재경은 그들 입에서 나온 남자라는 단어에 오한을 떨었다.

“솔직히 렌같이 옆에서 여자 타령만 하는 남잔 질리는데 말이지. 안 그래?”

“너도 참 독특해. 낯가림도 심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냉큼 사귈 마음이 드는구나. 왜 그렇게 여자 친구가 가지고 싶었던 거야?”

“별 이유 있겠냐. 다 같은 그런 이유지.”

재경은 쓸데없는 거 물어보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다 그런 이유라니. 렌 주제에 음탕한 말을 하자 그녀들의 시선이 음흉해졌다.

“이 변태~ 조금은 숨길 생각을 해라.”

“내가 왜 변태냐?”

“다 알면서 모른 척하긴. 남자 여자 둘이 만나면 뭘 하겠냐? 으휴,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음란마귀 낀 그녀들이 재경보다 더 변태같이 히죽 웃었다.

둘이 만나면 뭘 하냐니. 재경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그녀들을 향해 미간을 구겼다. 쟤네 왜 저래?

“뭐긴 뭐야. 둘이서 재미있게 놀겠지.”

“어떻게 재미있게 노는데?”

재경의 입에서 야한 말이 나오도록 하려는 것인지 그녀들은 에둘러 말하는 렌의 속내를 기어코 입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재경은 쟤네도 참 독특하다면서 고개를 젓다가 일순 부끄러워져서 괜히 튕겼다.

“그걸 내 입으로 굳이 말해야 아냐?”

“당연하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겠거든~”

“나 참.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 뭐… 손잡고… 놀러 다니고… 뽀…뽀뽀도 하고…….”

체면 차린다고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뽀뽀라는 말에 렌의 귓불이 터질 듯이 새빨개져서는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마룻바닥만 훑었다. 너무 순진한 반응에 그녀들은 맥이 빠졌다.

“뽀뽀라니. 어린애냐?”

“내가 왜 어린애야?! 여…여자 친구 사귀면 이 정도는 다 하잖아! 너희들이 물어봐 놓고서는 왜 시비야?”

“어휴, 렌한테 뭘 더 바라. 적어도 키스라고 해라.”

“시꺼!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 이 참견쟁이 짜식들아.”

키스라는 허용 불가의 성인 단어에 머리가 터질 것 같던 재경이 상상을 셧다운시키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렌을 놀리던 친구들이 재미없다며 혀를 찼다.

“남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우리가 널 얼마나 힘들게 사람으로 만들어줬는데.”

“맞아, 맞아. 엄마한테 이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지.”

“음란한 렌 지미.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지 벌써부터 입맞춤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는. 서큐버스가 와서 확 물어가 버린다?”

“누가 엄마야! 으…음란 그런 거 아니거든?”

석연찮은 단어에 재경은 눈가를 실룩거렸다. 친구들이 아까부터 끈질기게 시비를 거는 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대단한 이유가 없었던지라 재경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빙의 전에 있었던 일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기 싫어서 말 안 한 건데. 뚱하게 한숨을 내쉰 그는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조금 터놓기로 했다.

“별로 그것 때문에 여자 친구 원한 건 아냐. 그냥…….”

“그냥?”

“미들 스쿨인가 어디인가, 거기에서 반 친구들이 자기 여자 친구랑 있는 모습 보니 좀…….”

“좀?”

이때다 싶어 집요하게 물어보는 그녀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가 아래턱을 불쑥 내밀었다. 부끄럽다. 이런 말을 남들에게 해본 적이 없던 재경이 후회하는 듯 머뭇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새빨개진 귓불이 얼굴 전체까지 퍼져나갈 것 같았다.

“좀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오호라, 그게 부러웠구만?”

“그래. 그럼 뭐 덧나냐?! 사람이 부러워할 수도 있지.”

샛노란 태양 아래 늘어진 땅거미가 출렁거리는 당시의 기억에 고개를 돌린 재경이 공연히 짜증 냈다.

반응이 솔직해 그 말이 진심임을 안 그녀들은 렌에게 너무 못되게 군 것 같아 서로 머쓱해졌다. 행복해 보여서 부러웠다니. 그게 뭐야.

“귀여운 소.년. 소년은 마음이 순수하니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구나. 재립학교는 연애 금지라지만… 이 누나들이 응원해 줄게.”

“러브~ 러브 이즈 트루 파워어…….”

불행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시무룩해진 재경을 가운데에 낀 숙녀들이 볼을 비비며 손을 마주 잡았다. 방심하던 사이 몬스터에게 압착 공격을 당한 재경은 거대한 흉부에 숨이 막혀 생존을 위해 버둥거렸다.

애정 표현이 과격한 숙녀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던 친구들 중 어느 학생이 문득 생긴 궁금함을 던졌다.

“근데 언니들은 남자를 좋아하는 거예요, 여자를 좋아하는 거예요?”

“어머, 그야 당연히―”

“뭐어?!”

끼어있던 와중 어처구니없는 질문은 들은 재경이 숙녀들보다 먼저 반박했다. 아무리 여장을 하고 스스로를 누나라고 지칭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남자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턱수염까지 난 아저씨들이란 말이다.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남자를 왜 좋아하냐?”

“아니, 뭐… 세상 살면서 그럴 수도 있지.”

“나 참, 그런 대책 없는 소리 하지 마. 암만 놀리는 걸 좋아해도 사람 기분 나쁘잖아.”

생각보다 꽉 막힌 렌의 사고에 그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렌은 숙녀들의 여장을 피에로 분장보다 더 의미 없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그녀들은 얼굴에 음영이 끼는 숙녀분들의 안색을 간신히 살폈다. 눈치 없는 재경은 숙녀들 틈에서 발버둥을 치며 한술 더 떴다.

“남자끼리는 애도 안 생기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생물학적으로 당연하다고 말하는 재경이 상체를 쭉 내뺐다. 숙녀들은 무례한 말을 하는 재경을 놓치지 않고 와플 기계처럼 흉부로 꽉 압착시켰다.

“러브~ 러브 이즈 트루 파워…….”

“사랑만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지 않.을.까?”

세상을 잘 아는 숙녀들이 재경의 무례함을 무마하듯 그의 볼에 부비부비 턱수염을 긁었다. 재경은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렀지만 수수방관하는 친구들은 깔깔거리면서 재경을 비웃었다.

“바보 같긴.”

반장으로서 학생들을 통솔해야 하는 비키는 반장 자리에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8반 학생들을 흘겼다. 여자 친구니 러브레터니라는 말이 들려온다. 저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던 비키는 류제가 전해준 사실이 떠올랐다.

유네가 렌을 좋아한다고.

렌이 들고 있는 저 러브레터는 유네가 보낸 걸까. 류제가 말하길 유네가 수신제 때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렌에게 고백을 한댔으니 확실할 거다.

넌지시 주먹을 쥔 그녀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죽여야만 하는 이 감정이 슬프고 억울했다. 먼저 쟁취하고 싶으면서도 경쟁해야 하는 상대가 유네라는 것을 생각하면 별수 없다는 유약함 마음이 들었다.

나는 유네처럼 귀엽지도 않고 사근사근하지도 않을뿐더러 렌에게 매일 화만 내는걸. 렌은 분명 나보다는 유네를 더 좋아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도 실은―

―공연을 준비해 주신 문화 예술 동아리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으로 수신제 한마당 공연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으로 수신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포크댄스와 폐회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교류를 위해 사관생도분들께서 참여해 주셨으니 학생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차. 난 이제 가봐야겠다. 으하하하! 쫓아오지 마라.”

편지에는 포크댄스 시작 전에 고목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적혀있었다. 신이 나서 친구들을 냅다 버린 재경은 늦을세라 후다닥 체육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친구들이 멀어지는 렌의 등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가버렸네.”

“구경 갈래?”

“미쳤냐? 그런 거 봐서 뭐 하게? 난 춤이나 출래.”

수신제 포크댄스는 여학생이 태반이 넘는 제립학교에서 비어빌리터 사관생도 남학생들과 함께 춤을 추는 소중한 기회였다.

군인을 목표로 하는 동지로서 학교 차원에서 사교의 장을 만들어주는 경우가 있었다. 포크댄스는 재작년에 성공적인 교류회를 이룬 이후 생겨난 전통이라고 한다.

무대 막이 내리고 관객석이 일사천리로 정리되었다. 군청색 사관생도복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들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려왔던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물론 제립학교는 공식적으로 연애 금지이지만 할 사람들은 다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에 마음을 담아 그리는 정도는 학교에서도 눈을 감아주었다.

그녀들은 그녀들대로 사관생도와 손을 잡아 춤을 추고, 재경은 재경대로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사랑의 고목나무로 뛰어갔다.

누구일까? 과연 누가 이런 귀여운 러브레터를 보낸 걸까? 3반의 그 애? 1반의 걔? 의외로 선배일지도 모르겠다. 이전번에 머리에 핀을 꽂아주며 장난을 쳤던 그 선배라든가.

“후우, 아직 없네.”

다행히 늦지 않았는지 고목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포크댄스가 워낙 인기 있어 교실에 남아있던 학생들도 체육관으로 가서 온 학교가 조용했다. 남의 눈길을 피해 고백하기 적절한 시간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 속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재경은 나무 아래에 섰다가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황급히 갈아입은 통에 망가진 교복의 매무새도 다듬어 보고,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화장이 제대로 씻긴 게 맞나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러는 동안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났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느낌만 들면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재경은 이내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을 보내고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다가 사고라도 당한 건지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어느덧 재경은 긴장은 사라지고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언제쯤 오는 걸까.

“자기가 불러냈으면서 왜 이렇게 늦어?”

포크댄스 시작 전에 만나자고 했던 편지 속 그녀는 포크댄스가 끝날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설마 하던 재경은 생각을 굳혔다. 포크댄스가 끝나면 폐회식을 하고 외부인들을 내보낸 다음 학생들은 청소를 한다. 편지에는 분명 포크댄스 시작 전에 보자고 했었고, 나한테 고백하려고 했던 거라면 체육관에 남아 외부인들하고 포크댄스를 추지는 않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경은 불신주의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안 온 것을 보면 분명 친구들이 장난을 친 것이 틀림없었다. 밴드부 녀석들인가? 인기 절정에 팬클럽 생긴다고 날 속여먹으려고?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크다. 젠장, 미나 호감도 이벤트도 포기하고 왔더니만. 그럴 가치도 없었던 건가. 그래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사정이 생긴 것일 수도 있으니 재경은 끝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멀리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나오지 않을 무렵에도 편지의 주인은 오지 않았다. 속았다는 걸 인정한 재경이 가까이 있던 돌멩이를 발로 찼다.

“사정은 무슨! 열받게!”

기다리다 지친 와중 고목나무 아래에 볼일이 있는 사관생도와 3학년 선배의 눈길에 마지못해 자리를 비킨 재경은 러브레터를 휴지통에 버리려다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서로에게 하트 모양 선물을 건네주는 새로운 커플을 훔쳐본 그는 부럽다는 생각을 억눌렀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라도 미나 호감도 이벤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던 재경은 멀지 않은 곳에서 흔들거리는 익숙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비키? 여기서 뭐 하냐?”

“아… 어?”

재경이 벽 뒤에 까꿍 고개를 내밀었다. 유네가 정말로 렌에게 고백할까 걱정해서 뒤따라온 비키는 전전긍긍하다가 렌이 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재경과 마주치자 당황한 나머지 눈동자가 흔들리던 비키는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멋대로 체육관에서 이탈하지 마. 찾느라 고생했잖아!”

포크댄스가 필참은 아니었지만 변명하기 곤란해서 반장의 지위를 멋대로 이용한 비키는 마음이 들킬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장난질에 속아서 이미 신경질이 난 재경은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들쑤시며 투덜거렸다.

“흥, 모르는 척하지 마. 어차피 걔들한테 다 들어서 알고 있지? 놀리려고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짜증 나. 누가 장난친 거야?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걸리기만 해봐 진짜.”

“뭐야, 러브레터 받았다더니 아무도 안 온 거야? 하…하하, 바보 아니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놀리듯이 말했지만 속으로는 왜 유네가 오지 않은 건지 오만가지 상상이 더해졌다. 어째서? 마음이 바뀌었나? 이제 렌을 안 좋아하는 건가? 류제가 착각을 했나? 아냐, 분명 체육관에는 유네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내가 그 러브레터를 쓴 거라고 속여서 차라리 내가 먼저 고백을…….

“죽을래?! 두고 봐. 반드시 예쁜 여자 친구 사귀어서 손도 잡고 뽀뽀도 할 거다! 젠장, 내 무대를 보고 반한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인기 절정이 된다는 밴드부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잘생긴 사관생도 손 잡고 헬렐레 좋아하고 있을 반 친구들이 뭐라고 놀릴까 재경은 쪽팔렸다. 비키를 제친 그는 먼저 체육관으로 향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비키는 미처 붙잡지 못한 렌이 가버리자 착잡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차마 유네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힘없이 손을 내린 그녀는 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재경이 사랑의 고목나무로 뛰쳐나가 하염없이 기다릴 동안 체육관으로 돌아온 류제는 선배들의 등쌀에 못 이겨 포크댄스에 참가했다.

고백이 어떻게 되었나 알고 싶지만 류제는 이기적이었던 자신에게 주는 벌로 유네에게 일말의 자비와 자신에게 인내심을 키우는 시간을 강제했다. 만에 하나 유네가 경고를 무릅쓰고도 고백한다면 그는 정말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지난달에 벌어졌던 그 사건 때문에 렌을 상대로 선을 지키는 제어력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비키도 렌을 좋아하고 유네는 고백을 하려고 하니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때까지 구경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네가 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 고백을 방해하다니. 나는 정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다.

곡이 바뀔 때마다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춤을 추던 중 어느덧 류제의 상대는 미나가 되었다.

수신제 내내 동아리 활동에 바빠서 교실에서도 잘 못 봤던 미나다. 렌을 에스코트한다고 수신제 동아리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던 류제는 수고했을 그녀에게 기계적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오랜만인 것 같네.”

눈이 마주친 미나가 상냥하게 웃었다.

마왕님과 함께 춤을 추다니 그가 살아있을 적에도 있을 수 없었던 영광이다. 몸 둘 바를 몰랐던 미나는 이내 류제의 어두운 표정을 확인하며 본연의 목적 달성에 집중했다.

“나랑 춤추는데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아 줘. 아니면 내가 뭐 잘못했니?”

시선을 외면하던 류제는 마음이 티가 났나 싶어서 쓰게 웃었다.

“미안. 혼자 생각할 것들이 있어서.”

물론 미나는 그와 유네 사이에서 렌 지미를 두고 어떤 지저분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모르는 척 물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은 수녀 루나처럼 상냥했다.

“무슨 일 있어? 고민 있으면 말해줘.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혼자 앓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책에서도 그랬어.”

착하고 청초하고 지적인 미나. 그의 고민은 감히 남에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그녀에게 상담하면 명쾌하게 답변이 나올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음악에 맞춰 그녀를 언더암턴으로 돌려준 류제는 곡의 중반까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건 성격에 어긋났지만 답답하게 그를 옥죄는 죄책감을 류제는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사람의 마음이 제일 무서워.”

“응? 왜 그러는데?”

타고시아 해변의 영향일까, 류제에게 있어서 미나는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 강렬하게 인식이 박혔다. 입도 가볍지 않고, 그가 여기서 말한다 할지언정 류제의 속마음을 함부로 다른 이에게 털어놓고 다닐 이는 아니었다.

“…지독한 짓을 했어.”

그는 푸념하듯 주절거렸다. 한번 물꼬가 트이니 마음껏 남에게 이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설마 유네 때문이야?”

“어떻게 알았어?”

류제가 나쁜 짓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동요했다. 그는 바른 아이고자 했다. 고아원에서는 수녀 누나에게 폐 끼치지도 않고, 자기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며 막냇동생 아세미를 챙겨주고 양보하는 바른 사람으로 컸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차라리 남에게 무관심할지언정 스스로 나서 상처를 주었다. 그 장면을 하필이면 미나에게 들켰다고?

“지나가다가 유네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버렸어. 렌에게 고백하기로 했다며. 비밀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유네가 왜?”

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제는 그가 걱정했던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안도했다.

“유네는 고백하지 않을 거야. 아마도.”

“왜? 그게 네 고민과 연관 있어? 설마 그 일로 유네와 다퉜다거나.”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변명하기 위해 류제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다툰 건 아니고… 조언을 해줬다고 생각해 줘. 혹시라도 잘 안 풀려서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 지금은 소중한 친구 사이인데 관계가 엇나갈 수 있으니 신중하라고 말해줬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유네가 많이 상처받은 것 같아서. 내가 괜한 말을 한 걸까.”

여기 와서도 거짓말이다. 속마음을 숨긴 류제는 스스로가 참으로 간사하고 옹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미나를 제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난 틀리지 않았어.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이야.

그 마음을 읽은 듯 미나는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민을 하냐며 가볍게 답했다.

“별로 심한 말은 아닌데. 유네가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거야. 하아, 난 또 뭐라고.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류제 네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 정돈 친구로서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너는 렌하고도, 유네하고도 둘 다 친한 친구니까 그 사이에 있는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충고 아냐?”

미나가 류제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살 긁었다. 마음이 동한 류제의 눈에 그녀가 비치자 미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유혹하는 목소리가 류제의 귓가에 쉽사리 박혔다.

“유네가 렌에게 고백한다니 난 도리어 남은 넌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유네가 배려심이 부족한 거야. 분명 네 말로 정신을 차렸겠지.”

“…….”

“너희는 늘 세 명이서 같이 다녔잖아. 렌하고 유네가 사귀면 남는 건 류제 너밖에 없는 거 아냐. 네 입장도 난처하지. 반에 같은 남학생도 없고. 만약에 서로 안 좋게 되면 반의 여론도 갈릴 거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통 유네의 편에 설걸. 나는 렌을 위해서도 네 대처가 훌륭했다고 생각해.”

“역시 그렇지?”

류제는 나쁜 속삭임을 듣기 잘했다며 안도했다. 미나는 물론 그렇다며 흔쾌히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곡이 끝났다. 미나를 향해 기묘한 시선을 보낸 류제는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졌다.

“이거 가질래? 상담해 준 답례로 줄게.”

“그게 뭐야? 우와, 류제의 선물이라니 정말 좋아.”

류제가 하트 모양 보석이 달린 자석을 건넸다. 유네를 울리고 체육관으로 돌아오다가 마음이 착잡해서 참여한 다트 게임에서 딴 경품이다. 미나는 오밀조밀한 장난감을 소중하게 쥐었다.

“상담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별말씀을.”

마지막 곡이 끝나자 학생들은 파트너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들 중에는 수신제 동안 눈이 맞아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조한 사이도 있었고, 벌써부터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남몰래 고백한 커플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미나와 류제도 서로에게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류제가 미나를 놓아주지 못했을 때 미나의 호감도 이벤트를 확인하기 위해 체육관까지 뛰어왔던 재경이 타이밍 좋게 그 장면을 목격했다.

“노래 끝났다 자식들아! 둘이 아직도 뭐 하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손을 뗀 류제가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절대로 렌에게 말하면 안 되는, 아니 미나 말고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추잡스러운 심정이다.

그의 마음이 어쨌건 미나는 그의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해해 주었다. 뭐 어때. 나는 고백도 못 하는 상황인데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잖아. 현 상황을 공정하게 바라본 미나도 동의했어.

“렌, 그보다 이거 봐. 류제가 나한테 이걸 줬어. 예쁘지?”

말하고 싶지 않은 류제의 마음을 짐작한 미나가 말을 돌리려는 의도로 호감도 물품을 자랑했다.

류제는 그가 그랬듯 렌 또한 질투해 주지 않을까 넌지시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평범했다.

“잘됐네. 그보다 류제! 진짜 내 말 좀 들어봐. 아까 나 러브레터 받았었잖아. 뒤뜰 고목 아래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편지 주인이―”

반응은 시원찮아도 계략은 잘 먹힌 모양이다. 류제는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속았다고 징징거리는 렌을 보며 음습한 만족감을 채웠다.

* * *

긴 준비 시간 끝에 이틀 동안 쉴 틈 없이 진행된 이번 연도 수신제가 성황리에 마쳤다.

축제가 끝난 학교는 쏟아낸 열정이 흐트러진 채 감당 못 할 쓰레기들로 난장판이었다.

누군가의 지인이 탄 마차가 연이어 떠났다. 학교에 남은 학생들이 그들을 배웅했다. 지금 보내면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노을을 따라 가버리는 마차를 보내는 사람들은 그날을 기대하면서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

혹시 모를 외부인들의 위협에서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파견 왔던 백장미 부대 군인들도 학교를 떠날 준비를 했다.

축제 여운에 취해있을 학생들을 불러 일렬로 세워놓고 권위를 과시하는 등 눈에 빤히 보이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폐회식에서 학생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제립학교 교장과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조용히 작별을 고한 그녀는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후 왕궁으로 가 보고를 끝내고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에 들른 다음 하루를 더 머물다 호세마타 요새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세라는 학교를 떠나기 전 은사에게 경례를 마친 네네 슈만을 보면서 씁쓸해했다. 그녀들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서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작별이다. 그래도 세라는 이전보다 네네 슈만과 가까워진 착각이 들었다.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운영되었던 수신제는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정리되었다. 수많은 이벤트들이 열렸던 동아리 부스 천막도 하나둘 걷히고 학급 행사로 알록달록 꾸며졌던 교실도 삼삼오오 손이 모여 높은 곳에 달렸던 장식품이 떨어져 나갔다.

이틀간 메이드 카페였던 8반 교실도 정리되었다. 책상을 가렸던 테이블보도 걷히고, 셀로니아가의 귀중한 도자기는 유모의 손에 셀로니아가 대저택으로 돌아갔다.

서투른 손들로 자주 불이 날 뻔했던 임시 주방도, 그로 인해 그을어버린 커튼도, 귀여운 메이드복도, 가판대에서 팔던 하트 모양 장식품들도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졌다. 꿈이 담겼던 카페는 다시 면학을 위한 교실이 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버려진 하트 장식품 하나가 지나가던 학생들의 발에 밟혀 깨졌다. 아직도 축제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이 장난질을 치며 학교 뒤뜰을 뛰어다녔다.

‘강화’ 어빌리티의 장점을 이용해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며 무거운 짐을 쓰레기장으로 옮기던 류제는 그곳에서 익숙한 파란 머리 소녀를 발견했다.

힘없이 축 처진 어깨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 다가오자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 충혈된 눈은 보고 싶지 않아도 의식되었다.

“아… 류제 군.”

렌의 얼굴을 볼 낯이 없는 데다 감정적으로 되어서 혼자 훌쩍거리던 유네가 그의 뒤를 확인했다. 재경과 류제는 거의 세트로 다녔기 때문에 혹시라도 곁에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걸 의식한 류제는 유네를 지나쳐 쓰레기를 소각로에 버렸다.

“렌이라면 뒤뜰에서 쓰레기 줍고 있어.”

“그…그렇구나.”

다행이다, 라는 뒷말을 류제는 못 들은 척했다. 암만 스스로에게 나쁘지 않다 최면을 걸듯 되뇌어도 혼자서 눈물을 훔치는 유네를 보자니 마음이 쓰였다.

마음 여린 유네는 류제가 신경 쓰지 않도록 안 흘린 척 눈물을 닦고 웃었다. 특유의 어리벙벙하고 선한 미소를 띤 그녀는 정말 어쩔 수 없다며 헤헤 볼을 긁적거렸다.

그런 유네에게 류제가 뻔한 물음을 던졌다.

“여기서 뭐 해?”

“…나 고백 결국 못 했어. 하하.”

손을 털어낸 류제가 고개를 돌려 유네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 쏜살같이 사라졌다던 렌이 체육관으로 돌아와 나에게 불평이란 불평은 다 쏟아냈으니까.

솔직히 렌도 이해하기 힘들다. 누가 러브레터를 보냈는지도 모르면서 오란다고 냉큼 고목으로 향하는 건 뭔가.

가지 말라는 건 내 욕심이고 렌이야 단순한 감정일 테니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 제쳐두고, 류제는 저지른 일의 후폭풍을 여실히 느꼈다. 유네는 이 모든 엇갈림이 그녀의 안일한 생각 때문이라 여기는 듯했다.

“류제 군이 해준 말이 자꾸 생각났어. 류제 군의 말이 맞아. 하마터면 실수할 뻔한 거야. 신중해져야겠지.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고. 난 다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유네가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그녀는 그렇게 타협하기로 했다. 고백을 하고 난 후에 비키도 렌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죄책감 때문에 더 상처받고 이미 저질러진 일로 더 복잡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맞아. 비키 양과 관계가 멀어지기 싫어. 그리고 나 같이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소심한 애가 당차고 예쁜 비키 양한테 비견이 될까. 렌 군은 나보단 비키 양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려고 했던 용기를 실수라고 말하는 유네는 허탈하고 울적해 보였다.

“역시 나는 준비가 안 되었나 봐.”

사랑스럽게 웃어 보이는 유네에게 류제는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아서 더욱 미안했다. 그의 마음을 차지한 건 오로지 한동안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독점욕이었다. 배배 꼬인 감정이 똬리를 틀고 유네를 비웃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럼 나중에 교실에서 보자. 수고해, 류제 군.”

심정을 털어놓았어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유네는 쓰레기장에서 뛰어나가 사라졌다.

멀뚱히 서있던 류제는 멀지 않은 곳에 친구와 합류해서 대화를 나누는 유네를 흘겼다. 분명 렌의 투덜거림을 듣고 왜 유네가 고백하지 않았던 걸까 물어보고 있겠지.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던 류제가 이내 뒤를 돌았다.

친구들의 부탁으로 대형 쓰레기 분리수거를 몇 번 도와준 류제는 한바탕 정리가 되자 손을 씻고 렌이 있을 곳을 찾았다.

렌은 뒤뜰 안쪽에서 사람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고양이 귀 여장 메이드 차림으로 공연한 일과 러브레터로 친구들에게 잔뜩 놀림을 받은 그는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 정도로 심정이 나빠 보였다.

“누가 그런 장난을 친 걸까? 덕분에 제일 비웃음당하기 싫은 비키한테까지 놀림당했잖아. 아니, 사람이 할 일도 없나?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야? 괜히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신종 괴롭힘 같은 거냐? 더럽고 치사하다.”

마침 학교 뒤뜰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밟아 부서진 하트 모양 비즈를 주워 쓰레기봉투에 담은 재경이 꽥꽥 신경질을 냈다.

속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아서인가 아무래도 찜찜했다. 수신제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무엇인가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허탈했다.

“지나간 일이잖아. 마음에 담아두지 마, 렌.”

“그게 마음처럼 되냐?”

류제 저 자식은 내가 러브레터를 받든가 말든가 아주 남 일인 양 굴고 있고. 인기가 이만큼 늘었으니 조금은 대견하다고 생각해 주면 덧나나? 하여튼 자기는 미래에 여친 생긴다고 자만하기는.

하아, 삼류 악당 내 인생에 유일무이한 기회일지도 몰랐는데. 정말 누구일까. 왜 안 나타난 걸까. 러브레터에 적힌 글을 읽자면 사람을 놀리는 걸로는 안 보였는데. 정말로 이유가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내가 러브레터를 너무 자랑하고 다녔나?!

“이게 바로 실연인 것인가… 별로 유쾌하지 않구만.”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으면서 실연은 무슨. 그리고 사귀지도 않았잖아. 과장하지 마.”

옆에서 자기 할 일 끝났다고 농땡이를 피우던 류제가 차갑게 핀잔했다. 울컥한 재경은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단 내뱉었다.

“고백했으면 분명히 사귀었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나 바라마지않던 여자 친구잖아. 이 나쁜 짜식이 넌 알면서도 그러냐? 너무한 거 아냐?”

재경이 충격이라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면서도 집게에서 쓰레기가 하나 툭 떨어지자 주워서 쓰레기봉투에 넣는 모습이 착실하다.

렌이 얼굴도 모르는 편지 주인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류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주변에 있던 쓰레기를 하나 재경이 들고 있는 봉투에 휙 던졌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만약에 그 숙녀분들 같은 사람이 오면 어쩌려고 그래?”

“뭐? 아니 그…그건 좀…….”

고목 아래에 나온 사람이 우락부락한 숙녀일 거라니 학교를 떠나기 전 그의 양 볼에 추악한 뽀뽀를 해준 숙녀들이 떠오른 재경이 오한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남자에게 하기에는 너무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행위였다.

“거봐, 싫잖아. 신중하게 생각해. 안 그럼 이상한 사람 꼬여. 안 그래도 넌 이성을 좋아한다는 그런 감정 모르잖아.”

“뭐야? 나 무시하냐? 새…생길 수도 있지. 일단 고백받으면 그 순간부터 알지 어떻게 알아?”

그대로 납득하고 싶지 않았던 재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겼다.

다른 쓰레기도 봉투에 던지려고 했던 류제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고백받으면 그 순간부터 사랑을 안다고? 어떻게? 네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마음고생이 바보 같을 정도다.

무슨 생각인지 지면으로 뛰어내린 류제가 재경에게 다가왔다.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그는 영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험해 볼까?”

“뭘?”

“고백을 받았다고 가정하는 거지. 네 말대로 사랑이 생기나 안 생기나.”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이게 욕심부려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가 진짜 렌을 취하는 순간 잠자는 공주는 눈을 뜨고 성은 무너진다. 꿈은 깨지고 잔혹한 현실만이 남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학교 뒤뜰 하트 장식물이 치워진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 류제가 손을 들어 재경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계속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작은 하트가 달린 클립을 류제가 렌의 교복 상의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난데없이 나무 뒤로 몰아붙여진 재경의 귓가에 류제가 간지럽게 속삭였다.

그래도… 그럼에도 렌한테 처음 고백하는 건 나로 해줘.

“좋아해.”

눈이 감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싹오싹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왼쪽 귀에서부터 올라와 뇌리에 박혔다. 갑작스러웠지만 그 잠깐의 순간에 재경은 류제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류제가 손을 떼었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류제의 표정이 눈앞에 보였다. 침묵하던 류제는 장난스럽게 상대방의 반응을 살폈다.

“어때?”

“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야. 사람 가지고 놀지 마!”

“에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지.”

“또 저번처럼 흔들다리 효과니 뭐니 하는 거지? 누가 모를 줄 알아? 이때다 싶으니까 아주 그냥 신나가지고.”

참 나, 날 상대로 저런 말이 쉽게도 나온다. 안 그래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기분이 이상한데 얜 또 무슨 장난이나 치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나도 재미없다.

“어땠어? 감상 좀 말해 줘. 아야, 아파!”

“진짜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어!”

펄쩍 뛴 재경이 류제의 등짝을 때렸다. 이럴 줄 알았던 류제는 렌의 귓바퀴를 흘겼다. 쑥스럽든 화가 나든 어떤 이유든지 평범했다.

역시 그런 거다. 확률이 반반이라고? 아니, 내게는 희망조차 없어. 이루어질 가능성 따위 없다고. 그러니까 이런 심술도 괜찮잖아. 그렇지?

“아, 비 내린다.”

“이런. 한바탕 쏟아질 거 같아.”

해가 지면서 날씨가 어둑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건조한 가을, 계속 맑은 날이 이어지던 와중 드문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류제가 재경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한 손에 쓰레기 집게를 들고 달리던 재경은 류제의 등 뒤를 따라갔다.

비에 젖은 교복에 연한 살갗이 비쳐 보였다. 듬직하고 커다란 등. 재경의 손목을 붙잡은 핏줄이 돋아난 커다란 손.

좋아해.

손가락이 동맥을 눌렀다. 두근, 두근, 두근. 한 박자 늦게 머릿속에 다시 재생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반동이 늦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

우와, 진짜 왜 미연시 주인공한테 히로인들이 홀라당 반하는지 알겠네. 저런 미남이 저런 목소리로 말하면 누구든지 반할 거야, 우와아.

류제가 맨정신일 때 사람 꼬시는 거 처음 봤어. 나중에 이놈이 히로인에게 고백할 때 저런 목소리로 고백하겠지? 부럽다.

비를 피하는 학생들이 건물로 들어왔다. 위험천만하게 양호실 창가에 걸터앉은 미나는 제 몸 하나 사리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류제 신리가 네 뜻대로 안 되고 있는 거지? 렌 지미.”

그렇지 않았다면 렌 지미를 좋아하는 류제 신리가 그들 사이를 훼방 놓지는 않았을 거니까. 렌 지미를 농락할 변수로서 잘 움직여 주어 만족스럽다.

수신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몇 날 며칠 무리를 하던 니냐롯트가 피곤에 지쳐 양호실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를 꼬드겨 침대에 재운 미나는 똑같은 악몽에 시달리는 니냐롯트가 여전히 악몽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빨리 마왕님을 만나고 싶다…….”

그녀가 쏟아지는 비에 아련하게 손을 뻗었다.

이미 그녀의 수중인 루이나는 감시역도 제대로 못 해 멍청한 인형처럼 서있었다. 왕녀가 남았다면야 준비는 수월했다.

그녀가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겨울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마왕의 부활을 위해 그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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