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7) (42/112)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7)

재경의 방해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요리 동아리 부스에 들어가지 못한 그녀는 수첩을 뒤적거리며 제립학교 1학년 학생 리스트를 넘겼다.

파란 머리라. 나르타 가문에서 파란 머리가 많이 나왔는데. 이번에 계집인가 사내인가 하나가 들어왔다지. 역시나. 유네 나르타. 옆에 있던 꼬마는… 뭐야, 척도가 이게 다야? 이놈은 별 볼 일 없는 놈이잖아. 필요 없어.

그녀가 철없이 웃는 렌 지미의 사진과 그 이력을 흘기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녀는 아가타 하층민들 전반에 걸친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그들은 나이가 어린 어빌리터들을 납치해서 범죄에 이용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에서 어빌리터들을 직접 관리하는 명분이 있었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좋아~”

그녀는 아침에 창고에서 뒹굴거리면서 나태하게 굴었던 루시에를 떠올렸다. 그년의 어빌리티는 편리하지만 깡따구가 커서인가 뒤질 정도로 맞아도 말을 안 듣는단 말이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누가 누가 말 잘 듣는 아이일까 동그라미를 쳤다.

* * *

외부인도 참여 가능한 요리 동아리 주최 이벤트성 요리 대회는 우승을 위한 치열한 경쟁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난장판 같은 축제에 가까웠다.

아무런 걱정 없이 즐기기만 하는 것이 모토이니 참가자들의 수만 봐도 역사 연구 동아리의 부스와 비교하면 격차가 컸다.

어제 즉석에서 펼친 요리 어빌리티 쇼 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요리 동아리 부장은 털털한 성격에 다소 도덕심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하나 요리를 포함해 이벤트 기획이나 연출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듯하다.

렌의 등쌀에 떠밀려 얼떨결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이 축제의 즐기자 모토와 걸맞지 않게 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류제와 비키는 사회자로 활동하며 부스 일대를 뛰어다니는 부장에게서 룰을 듣고 서로를 견제했다.

하필이면 지긋지긋하게 같은 테이블일 것은 뭐냐. 신경 쓰인다. 비키는 요리 대회 라이벌을 힐끗거리고는 예의 콧방귀를 뀌며 센 척했다.

“아무리 류제 너라도 푸딩은 만들어본 적 없겠지. 내 낙승이네.”

“만들어봤을 리가 없잖아. 뭐야. 넌 자신 있나 보네. 수학여행 때는 생각 안 나는 거야?”

“나도 좋아하는 건 직접 만들어보려고 노력하거든? 그때랑 달라!”

그때의 결과물을 떠올린 비키가 도둑놈이 제 발 저리는 심보로 식식거렸다.

좋아하는 건 직접 만들어보려고 한다라. 류제는 본받을만한 비키의 태도가 눈엣가시였다. 모전여전이라고 상인 집안의 자제여서 그런지 손이 빠른 유네는 차치하더라도 귀족이라 연애에 보수적일 것 같은 비키조차 진취적이면 류제는 발이 절로 동동거려졌다.

비키를 흘긴 류제는 죄책감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술수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으로 그가 비키를 떠보았다.

“그럴 시간도 있나 보네.”

“뭐야. 아까부터 뭐가 불만인데?”

“넌 군인이 되어서 마족에게 복수하겠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었잖아. 이런 것에 할애할 시간이 있나 궁금해서 그렇지. 옛날 네가 했던 말이랑 다르니까.”

정곡을 찔린 비키는 침착하지 못했다. 촌철살인이다. 제립학교에 들어오기 전 같아서는 푸딩이 걸렸어도 절대 이런 비효율적인 건 안 했을 거다.

물론 비키는 수신제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와중에도 중간고사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인이 되기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역사 연구 동아리에 입부한 점이나 요리 대회에서 시시덕거리며 노는 자신을 보자면 일족의 복수와 부흥에 전혀 필사적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대답하기 싫어 레시피를 읽는 척하던 비키는 마지못해 꿍얼거렸다.

“…그냥. 나 자신을 그렇게 각박하게 몰아붙인다고 해서 좋은 게 하나 없다고 생각했어.”

“복수를 그만두겠다는 말이야?”

“내가 언제 그만둔다고 했어?”

비키가 단번에 반박했다. 류제 신리 저 바보. 남 일에 관심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예리해서 사람 죄책감 뜨끔거리게 굴었다.

“급박해하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새로운 결심을 입에 담은 비키가 진지하게 류제와 마주했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마족들을 보는 족족 때려잡을 사람처럼 서있던 비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많이 변했다.

“진실을 알아내야 할 필요도 있고, 지금의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학생인 이상 군주급 마족을 해치울 수는 없겠지. 어른이 되어서 군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많은 걸 배우고 알아가야 할 거야. 그걸 수용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게 뭐 나빠?”

“의외네. 너라면 그러기 위해서 더 스스로를 몰아세울 것 같았는데.”

이전의 비키라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비키는 이미 혼자서 모든 것을 이고 가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과 그 무게를 나누며 함께하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워왔다.

누구를 통해서? 그녀의 생각을 그렇게 바꾸는 데 일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누구였더라?

“등을 기대라고. 네가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무려 비 오는 날 류제가 비키에게 펜던트를 돌려주며 했었던 말이다.

나태해지는 비키의 정신을 지적해서 렌에게서 관심을 떼게 하려고 했던 류제는 할 말을 잃었다. 날이 서있고 여유가 없던 비키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그였다.

만약 그 펜던트를 내가 아닌 렌이 찾아서 돌려준 것임을 안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웃겨. 그래놓고 왜 네가 놀라고 그래?”

“…놀랄 수도 있지. 여유로운 마음치고는 축제 날 중간고사 시험 준비시킨다고 렌을 끌고 간 시점이 바로 몇 분 전인데 어지간히 모순되잖아.”

“그건 렌이니까 그렇지. 그 애는 좀 절박해야 해!”

비키가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붉은 말 꼬랑지를 바싹 세웠다.

물론 순수하게 중간고사 성적을 염려한 거라면 그녀의 양심에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얄팍한 변명거리일 뿐이었다. 결국 비키는 거짓말을 털어내듯 중얼거렸다.

“아쉬웠단 말이야.”

“아쉽다니?”

“기…기왕 동아리 일을 도와준 거, 보여주고 싶었어. 그럴 수도 있잖아! 주사위는 걔가 만들었던 거니까.”

얼굴을 붉힌 비키가 뚱하게 볼을 부풀렸다.

표정에 진심이 담겼다. 류제가 입을 달싹거렸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정면으로 부딪쳐 오려는 마음에 짓눌릴 것 같다.

그는 그녀들이 무서웠다. 그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던 류제가 괜히 실실거렸다.

“아아, 렌이 주사위를 만들어줬다고 했지.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 너도 말이야, 내가 역사 연구 동아리 소속인 거 알고 있었으면서 우리 부스에는 놀러 올 생각도 안 하고. 너무한 거 아냐? 너희를 손님에 포함시켜서 손익을 계산해 놨단 말이야.”

“얼씨구, 그게 친구한테 자랑으로 할 말이냐?”

내가 아니라 렌이 신경 써주길 바랐던 주제에. 류제가 솔직한 심정을 삼켰다. 웃음이 썼다.

―앞에 있는 재료를 마음껏 쓰셔도 무방합니다. 어떤 종류의 푸딩도 OK! 심사 기준도 모두 심사 위원 마음대로. 만들고 남은 디저트는 포장해서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럼 몸도 마음도 단단히 준비하시고~ 시작!

요리 동아리 부장의 호쾌한 징 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었다.

처음 만드는 사람들을 위해 요리 동아리 측에서 기본 레시피도 제공해 주었기에 어레인지가 아닌 평범한 푸딩을 만드는 정도라면 류제도 무난하게 자신 있었다.

불을 쓰지 않아도 일단 요리라는 과목 자체가 쥐약인 비키는 어느 것이 설탕이고 어느 것이 소금인지 구별하는 게 먼저라서 찔끔찔끔 맛을 보며 조미료를 넣었다.

정해진 적당량을 계량하던 류제는 어째 요리도 못하면서 주어진 레시피보다 더 많은 양을 넣는 비키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다.

“푸딩이 한사발이네.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해줄 셈이야?”

“무슨 상관이야. 한눈팔지 말고 네 거나 만들어.”

“희생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렇지.”

희생자라니. 무례한 말에 비키가 그를 찌릿 노려보더니 손가락질로 자신, 류제, 그리고 관객석에서 손을 흔들며 응원하고 있는 렌과 유네를 가리켰다.

친구니까 당연하겠지만 류제는 비키의 뻔한 의도가 느껴져 불만스레 눈썹을 까딱거렸다.

“독극물 테러냐?”

“윽, 독극물이라고 하지 마! 맛있을지 없을지 먹어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아? 렌도 먹어보면 나보고 요리치니 뭐니 그런 말 절대 못 할 거야. 집사도 맛있다고 했었거든.”

그러면서 비키가 왜인지 베이킹파우더를 푸딩에 쏟았다.

먹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류제가 이 괴상망측한 푸딩의 희생양이 될 친구들에게 잠시 애도의 묵념을 보냈다. 물론 그는 먹지 않을 예정이었다. 정신적 성장보다는 저런 극악 센스부터 어떻게 할 것이지.

레시피를 보며 평범하게 모양을 내고 있던 류제는 잠시 손을 내려두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비키의 심경 변화는 렌과 얽힌 시점에서 예견된 것이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치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말해버리기 전에 비키가 렌 말고 다른 곳에 신경을 썼으면 했다.

“…저기, 비키.”

“왜. 말 시키지 마. 바빠.”

그래서 그는 비키가 역사 연구 동아리에 들어간 연유를 떠올렸다. 그 부분을 건들면 결심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으니 거기를 자극해 볼까. 그가 간사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원인이 뭐가 되었건 류제와 비키가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우연찮게도 비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의 중요한 대사에 해당했다.

“저번에 말했던 것에 대해선 알아낸 거 있어? 네 동아리에서 해줬던 그 말.”

“마족이 실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말하는 거야?”

류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집중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비키가 정체불명의 반죽을 만지작거리다가 류제를 못마땅하게 흘겼다.

하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수신제 준비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이 멈춰있었기도 했고 류제에게 자료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했었으니 입을 꾹 닫고 있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다.

그녀는 이전에 기억해 낸 과거를 눈으로 곱씹었다.

“없어. 아직은.”

“찾기가 꽤 어렵나 보구나.”

“그만큼 아주 오래전 사람일 거라고 가정하고 있어.”

과거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셀로니아가와 관련된 사료들이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는 것과 어빌리터로 유명한 셀로니아가인데 어느 기점부터는 어빌리터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과연 셀로니아가의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복수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 가문을 멸한 존재가 우리 가문의 선조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야.”

좋지 못한 추측만이 마음속에 남았다. 오래전 셀로니아 가문의 인간이 마족이 되어서는 지금 와서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키다니. 증오심이 웬만하지 않은 이상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 기나긴 연대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왜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는 마족이 되어버린 걸까. 그 비밀이 뭘까.”

“비키…….”

“그자는 내 선조의 모습을 흉내 낸 건가 아니면 정말로 내 선조였던 걸까.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정체를 밝혀줄 거야. 그러기 위해서 난 더 노력해야겠지. 너도 수신제 끝나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도와줘.”

비키 이야기의 끝은 일족의 원수인 화마의 군주를 향한 복수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비키 루트로 가면 비키는 류제와 이어져 일족의 부흥을 이루고 졸업하면 함께 백장미 부대에 들어가 마족들을 쓰러뜨리는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난다.

즉, 비키 루트는 셀로니아 가문을 멸족시킨 화마의 군주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셀로니아가의 과거가 드러나지 않는 열린 결말이라는 의미다.

화마의 군주와 셀로니아 가문, 키아나트리체의 왕비가 마족에게 살해당한 일이 현대에 와서 뒤섞여 비키의 과거를 완벽하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트루 엔딩인 왕녀의 루트로 가야만 한다.

재경이 해피 엔딩을 결심한 유네의 루트로 간다면 비키는 그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렌 군, 왜 그래? 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들의 입 모양을 살피며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게 맞나 확인하던 재경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는 유네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다.

“아…아냐, 별로. 저 요리 똥손인 비키가 이번에 뭘 폭발시키려나 걱정되어서 그렇지.”

손으로 만든 쌍안경을 내려놓은 재경이 용케 말을 돌렸다.

순진한 유네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재경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리자 유네는 쪽지를 재경의 메이드복 호주머니 안에 숨겨두기 위해 숨을 죽였다.

“으흐윽,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요리를 하다니 기적이 일어났어…….”

그러던 유네는 옆에서 눈물을 쏟는 어느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기겁해서 화들짝 놀랐다.

“후아악! 엄마야. 귀…귀신인 줄 알았네.”

“우악! 깜짝아. 유네, 너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

재경의 관객석 옆자리에는 언제 온 건지 저번 여름방학 때 인사를 나누었던 비키네 유모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저기 혹시 아줌마는 비키의―”

“우리 아가씨가……. 마님. 아이고. 우리 마님이 저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돌연 나타난 유모가 목걸이 십자가를 쥐고 하늘에 기도했다. 셀로니아가의 옛 주인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비키의 곁에 서있는 환상을 본 그녀는 감격해서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녀가 중얼거린 마님이란 분명 비키의 가족들을 모두 대신하는 단어겠지. 그녀의 눈물이 부담스러운 재경은 유네에게 찰싹 달라붙어 내씹었다.

“어우, 심장이야. 저 사람 언제 온 거야? 말이라도 하지.”

“비키 양이 학교에 유모를 초대했다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봐.”

같은 방을 공유하는 사이인 데다 아무래도 신경 쓰였던 유네는 수신제 전 비키에게 그녀의 부모님이 학교를 방문한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그러고 난 며칠 후 비키가 ‘나도.’라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셀로니아가에서 벌어진 비극을 익히 들어 알던 유네는 비키도 부모에 버금가는 사람을 초대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렌의 옆에 앉은 비키의 유모임이 틀림없었다.

혹시라도 비키가 마음 쓸까 걱정했던 유네는 마족에게 살해당한 부모 대신 비키를 돌봐왔을 유모의 진심에 감동했다.

눈물을 그칠 기미가 없는 유모는 비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유모에게 말을 걸 겸 유네가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었다.

“요리 대회가 끝나면 비키 양이 만들고 있는 푸딩을 직접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옆자리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유모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마냥 귀여운 손녀처럼 비키를 지켜보느라 모시는 아가씨의 친우에게 인사를 나눈다는 것을 깜박하고 말았다.

“나르타 가문의 영애님 아니십니까. 우리 아가씨와 같은 방이시죠. 오래간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비키와 비슷한 초록빛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한 유네가 낯가림 심한 렌 대신 친구의 소중한 사람을 상냥하게 달랬다. 유모는 자기가 주책없었다며 코를 팽 풀었다.

“비키 양 보러 오신 거죠?”

“예, 아가씨께서 꼭 축제에 왔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셔서요. 소인은 이런 날에도 아가씨 혼자서만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시면 어쩌나 전전긍긍 걱정했는데 남자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니 그새 훌쩍 자라버리신 기분입니다. 감정이 복받쳐 오릅니다.”

간신히 멈췄던 그녀의 눈물샘에서 감동이 왈칵 쏟아졌다.

남자 친구란 말에 유네가 요리 대회 경연장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 비키와 류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같은 탁자 위에 있는 재료를 서로 먼저 쓰겠다고 뺏고 빼앗기며 투닥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오래 사귄 이성 친구처럼 친근했다.

하지만 비키와 류제가 서로에게 그런 관심을 가져서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유네는 단단히 오해한 유모의 생각이 섣부를세라 조심스레 정정해 주었다.

“어울리기는 해도 비키 양하고 류제 군은 사귀는 사이가 아닐 거예요. 아하하.”

“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남자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건 분명 뜻이 있을 겁니다. 셀로니아가의 모든 짐을 홀로 지시려고 했던 이전과는 달라지셨으니까요. 아가씨… 소인은 정말…….”

그녀가 칠칠치 못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추슬렀다.

제공된 레시피를 참고하지 않고 열정과 고집과 정성만으로 근본 없는 괴상망측한 푸딩을 만들던 비키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다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유모가 눈물을 닦는 모습에 놀란 비키가 자기가 만들고 있던 푸딩을 등 뒤로 숨겼다.

“왜 그래?”

“유모가 왔어.”

비키가 유모가 앉은 위치를 눈치껏 알려주었다. 언제 올까 계속 기다렸는데 지금 왔구나. 바빠서 못 오는 줄 알고 자랑할 겸 푸딩을 만들어서 선물로 보내주려고 했다.

한차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비키가 머쓱하게 유모에게 인사했다. 그걸 보고 유모는 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려버렸다.

시간제한이 끝나자 참가자들이 푸딩을 각자의 테이블에 두었다. 요리 동아리 측에서는 관객석에 있던 사람들 중 원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심사 위원으로 뽑았다. 이벤트성 대회이니 인력도 절약하고 공정한 평가도 가능하며 관객들도 즐거워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이다.

어떻게든 푸딩의 형태를 유지한 기상천외한 요리를 올려둔 비키는 내심 뿌듯한 심정으로 심사를 기다렸다.

“이건 좀 독특한데.”

“한번 먹어볼래?”

푸딩 주제에 달콤해 보이지 않는 독보적인 외관에 실상을 모르는 심사 위원들이 겁 없이 그것을 집어 먹었다. 곧 내장을 두들겨 맞는 감각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들이 독극물을 섭취한 듯 입을 막으며 쓰러졌다.

“읍!”

“크흑… 이…이 맛은…….”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버둥거리던 심사 위원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들은 응급처치 동아리 부원들 손에 실려 나갔다.

먹을 수 있는 재료들로 독극물을 생성해 낸 주제에 뭐가 그렇게도 기분 좋은 비키는 자기 푸딩 때문에 일어난 사단에는 관심 없고 남은 푸딩을 포장해 관객석에 있는 그들에게 말총머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유모! 언제 온 거야?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아가씨의 동아리 부원 분들이 여기로 가셨다고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다 유네 아가씨를 발견해서…….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면학 말고도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다니 이제 소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천년만년 살아야지 울긴 왜 울어. 그보다 이거 봐. 내가 만든 거야.”

비키가 손수 제작한 독극물을 유모에게 자랑했다.

저 푸딩에 무슨 재료가 혼합되어 들어갔는지 직접 생성 과정을 목격했던 류제는 어찌 보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 비키의 푸딩을 경계하며 입을 사전 봉쇄했다. 저걸 먹었다간 여한이 생길 만큼 고통스럽게 죽을 거다.

“다들 하나씩 먹어봐.”

쑥스럽게 구는 비키를 보자니 평소처럼 얄밉게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서 푸딩의 실상을 아는 재경과 류제조차 차마 저건 독극물이라고 놀리지 못했다.

“우와, 비키 양 멋지다. 비키 양의 요리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네. 기대된다.”

“아가씨… 제가 정말 아가씨가 손수 만드신 이 귀한 걸 먹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지. 안 왔으면 직접 집으로 보내주려고 했는걸.”

비키가 흔쾌히 푸딩을 건네주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사약을 넘겨받은 유네와 늙은 유모를 말려야 하지 않나 싶던 재경에게도 푸딩이 하나 강제적으로 쥐어졌다.

“어서. 먹어봐. 심사 위원도 엄청 맛있어하더라.”

“잘 먹었다고? 죽은 거 같던데.”

아주 그냥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없애버릴 셈이냐.

푸딩 상자를 손에 든 재경은 천사처럼 웃는 비키가 사악한 악마로 보였다. 어쩐지 보일 것 같은 악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비키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잘 먹을게, 비키 양.”

“유네, 너 잘 생각해야 해. 진짜 먹을 거야?”

“응? 렌 군도 참. 안 될 이유가 뭐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유네가 아앙 입을 열어 푸딩을 베어 먹었다. 유모도 처음 맛보는 비키의 요리에 미리 감탄하며 입에 푸딩을 쏟아 넣었다.

걱정했던 대로 두 사람 다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다. 또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응급처치 동아리 부원들의 들것에 두 사람이 실리고 옆 부스로 다급하게 사라졌다.

독사처럼 기회를 틈타던 유네는 비키의 의도치 않은 술수로 이번에도 재경에게 쪽지를 전해주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아니, 요리 대회에서 뭘 먹은 거야?”

“상한 걸 먹은 거 아냐?”

“그렇다면 몇 사람만 이런 꼴이 되지는 않겠지.”

그들을 싣고 가는 응급처치 동아리 부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요리 동아리 부장에게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식중독을 조심하라며 자기네 동아리가 만든 하트 모양 비누를 팔아넘겼다.

“더블 킬이군.”

새파랗게 질려 실려 나간 두 사람 덕분에 여느 때처럼 비키와 류제와 재경 세 사람만 멀뚱히 남았다. 실제로 당하니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던 재경은 손에 들린 푸딩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머리를 굴렸다.

“류제 네가 먼저 먹어봐.”

“아니. 비키 네가 먼저 먹어봐.”

“으…….”

비키는 사람들이 쓰러진 것이 다 자기 푸딩 때문임을 짐작하고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이리 내!”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자신의 생산물을 낚아채 빼앗았다.

“윽, 뭐야. 자기가 먹으라고 줬으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고 난리야.”

“어차피 너도 속으로 비웃고 있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이쯤 되면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던 비키도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있는 누구를 위해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남들 실려 갈 만큼 맛없고 해로운 요리를 했다니 속상했다. 류제는 이길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이제 이런 것쯤은 해낼 수 있다고 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건 이름처럼 어떤 분야에서도 1등을 추구하는 비키의 승리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렌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안타깝게도 그런 의도를 모르는 재경은 비키가 드물게 시무룩해 보이자 깔깔거리며 비웃기 바빴다.

“속으로 비웃겠냐? 대놓고 비웃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솜씨가 한순간에 좋아질 리가 없지. 세상에, 사람을 몇이나 보낸 거야. 으하하. 크크크.”

“분명 본가에서 연습했을 때는 멀쩡했단 말이야! 다들 맛있다고 했는데. 뭔가 잘못 된 거야!”

그게 진실인지는 복통을 일으켰던 메이드만이 알 것이다.

비키는 상상했던 반응도 결과물도 아니자 요리에 대한 마음이 뚝 꺾였다. 그녀는 재경에게서 도로 빼앗은 푸딩을 근처 쓰레기통에 냅다 쑤셔 박았다.

“어. 야, 걸작은 대대손손 보관해야지 아깝게 왜 버리냐?”

“됐어. 다시는 요리 안 할 거야.”

“참 나, 몇 번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안 된다고 금방 포기하기는. 쯧쯧쯧. 평생 나한테 못 이기겠구만.”

그런 정신으로는 못 하는 게 당연하다며 대단한 셰프라도 되는 양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비키는 모든 걸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성취를 못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었다. 그것이 가장 쥐약인 분야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소질도 없는 주제에 레시피를 보고 따라만 하면 중간이라도 가는 걸 무턱대고 많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해서 냉큼 들입다 넣으니 저렇게 되는 거다.

“류제를 봐. 쟤는 시키는 대로 하니까 무난하게 성공했잖아. 너는 너무 욕심을 부리니까 그래. 내가 안 본 줄 알아? 누가 푸딩에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과자 종류니까 넣는 거 아냐? 안 적혀있어서 빼먹은 줄 알고 일부러 넣은 건데.”

“요리 동아리가 바보도 아니고 그랬으면 말을 했겠지! 베이킹파우더는 빵 만들 때 부풀어 오르라고 쓰는 거라고! 그러니까 푸딩이 이 꼴이 나는 거잖아.”

재경이 류제의 손에 들린 비키의 흐물흐물한 괴작을 지적했다.

그것 말고도 지적할 부분이 많지만 어쨌든 비키가 요리를 못하는 제일 큰 문제는 맛을 내는 원리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재료를 추가해 레시피를 안 따르는 것에 있었다.

“많이 넣으면 더 맛있는 거 아냐?”

“적당히 넣어야 맛있지. 안 그러면 류제 게 네 것보다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래?”

재경이 류제 몫의 독극물을 빼앗아 그녀 앞에 들이밀었다. 자신의 요리에 질려버린 비키가 시선을 회피했다.

분명 내가 저 무관심한 류제보다 더 정성을 넣어서 만들었는데. 직접 만든 푸딩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는 진심을 몰라주니 짜증이 나는데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만하면 되었는데 비키의 마음도 모르고 렌은 잘도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아니, 이해가 안 가네. 공부는 잘하면서 왜 요리를 못하냐? 맛의 기본은 소금 많이 넣으면 짜고 설탕 많이 넣으면 달고 그런 거잖아. 안 그래? 너 맛 안 보고 만들지?”

그러면서 재경이 비키가 생성한 독극물을 살짝 맛보았다.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아릿한 맛을 내는 것도 대단한 재주다. 도대체 뭘 섞으면 이런 맛이 나는 거야?

“으엑.”

재경이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아린 혀를 베 내밀었다. 이건 충고로는 부족할 정도로 근본부터가 글러먹은 괴작이다.

“자, 네 입으로 직접 먹어봐.”

재경이 비키에게 독극물 푸딩을 직접 내밀었다. 떠먹여 주는 기분에 비키가 움찔 동요하다가 마지못해 새침한 입을 열고 작은 부분 베어 물었다.

두근거렸던 마음도 잠시, 비키는 역겨운 맛에 입을 틀어막았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맛이 없었다.

“혀 아파. 못 먹겠어.”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뱉지는 못하고 간신히 삼킨 비키는 자기가 졌다며 좌절했다.

“그런 걸 네 유모에게 먹으라고 강요하다니. 비키 너도 참 못됐네.”

“시끄러워. 이런 맛이 날지 몰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뭐 만들 때 무턱대고 돌진하지 말고 중간중간 맛을 봐!”

“사람이 못하는 게 하나쯤 있을 수도 있지. 이걸로 입가심할래?”

류제가 자기가 만든 푸딩을 건넸다. 당장에 독극물에 오염된 혀를 씻고 싶었던 비키와 재경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짜식이 진작 내놓을 것이지.”

류제가 상자를 펼치자마자 두 사람이 하트 모양 푸딩을 냉큼 하나씩 집어 먹었다. 우물우물 평범한 푸딩의 식감을 음미하던 비키가 신경질이 난 얼굴로 꿀꺽 삼켰다.

“맛있어서 짜증 나.”

“그지? 중간중간 맛 좀 보면서 레시피를 준수하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류제보다 내가 못하다니 마음에 안 들어.”

“허, 웃기네. 네 솜씨가 없는 걸 왜 나한테 분풀이를 해?”

레시피에 나온 그대로 만든 류제의 푸딩은 너무 무난해서 심사 위원들에게 큰 메리트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적어도 비키의 괴작보다는 맛은 있었다.

호감도 이벤트 물품을 히로인과 함께 나눠 먹는 기분이란 묘했지만 혀가 아팠던 재경도 맛있게 푸딩을 해치웠다.

“두고 봐. 다음번엔 제대로 푸딩을 제패해서 감탄하게 만들 테니까.”

“윽. 더 할 셈이야? 살려주라. 제발.”

“만들지도 않은 걸 먹고 죽는 것처럼 말하지 마!”

이것으로 비키의 호감도를 총 4로 마무리한 재경은 추억이 되어버린 그녀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를 떠올렸다.

3월서부터 시간이 흘러 결국 여기까지 당도했다. 당장에 마족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눈이 멀었던 그녀가 한 감정으로 때려 부은 삶보다는 요리처럼 여러 가지 조화된 삶을 사는 것이 더 맛있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음을 암시하며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는 종료되었다.

왕녀의 트루 엔딩으로 가지 않는 한 비키의 궁금증과 화마의 군주와 연관된 셀로니아가의 비밀은 풀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안 돼. 미안, 비키.

다다음 달에 있는 유네와 세라의 호감도만 완성시키면 어떻게든 해피 엔딩의 길이 다져졌다. 제발 그래야 할 텐데. 재경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나는 삼류 악당도 친구도 아닌 흐지부지한 정신머리로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엇나감을 향한 불안함만 품겠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시상식 시작했네.”

“비키 너도 나중에는 저기에 서 있는 거 아냐? 푸딩 마스터로.”

“흥. 당연하지.”

제법 뛰어난 푸딩을 만든 참가자에게 우승 트로피를 돌린 요리 동아리는 다음번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우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이제 뭘 할지 고민하던 류제는 깜박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렌을 탈취해 도망간 비키를 쫓아온답시고 카페 일을 내팽개치고 노닥거리던 중이었다. 홍보를 핑계 대기는 했는데 홍보는 무슨, 지금껏 놀기만 했다.

“큰일 났네. 반으로 돌아가야겠어.”

시간을 확인한 류제는 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해 영 귀찮아졌다. 재경도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어제 밴드부 친구들과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뜨악하고 말았다. 뭘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으악, 나도 약속 시간에 늦었잖아? 빨리 가야 할 거 같은데.”

“꼴좋다. 가서 한 소리나 듣지 그래.”

“네가 갑자기 렌을 끌고 가서 그런 거잖아. 하아, 사과로 뭐라도 사가야 하나.”

“나는 렌을 끌고 온 거지 널 끌고 온 건 아니거든? 덕분에 렌도 상식을 배우고 얼마나 좋아?”

푸딩 때문에 기가 죽었던 비키가 잘도 잘난 척했다.

“그걸 중간고사 때까지 기억해야 말이지. 렌, 이제 돌아갈까?”

아까 풀었던 역사 연구 동아리 퀴즈 내용을 벌써 초기화한 것처럼 보이는 렌의 멍청한 얼굴을 대신 자랑한 류제가 살갑게 어깨동무했다.

“그래야지. 나 지금 엄청 늦었어. 아오, 겁나 뭐라고 하겠네.”

“비키, 너는 어쩌게?”

학급 행사는 문화 예술 동아리가 주체가 되는 공연 전까지만 진행된다. 공연까지는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난 유모가 괜찮은지 얼굴을 마저 보고 교실로 돌아갈게. 하아, 여기까지 와줬는데 유모한테 그런 걸 먹이다니 미안해서 어쩌지.”

학급 행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반장의 지도가 필요하니 그녀도 유모의 상태를 볼 겸 지금쯤 돌아가야만 했다.

“뭐, 그분은 네가 뭘 먹여도 좋아할 것 같은데.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런 걸 먹어버린 유네한테도 사과해라.”

“사람을 사이코패스 독극물 테러범처럼 말하지 마. 당연히 할 거야.”

류제가 독극물 테러범이 아니었냐며 모르는 척 반문했다.

약이 오른 비키는 그를 흘기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있던 류제는 비키가 언제 변심할지 경계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때였다.

“냥냥냥!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아앙~!”

복도 반대편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코끝을 찡긋거리며 냄새를 맡던 냥냥이가 네 발로 뛰어 돌진했다.

분명 약속 시간이 넘었는데 창고로 오지 않은 재경 때문에 온 학교를 뒤지며 렌 지미를 찾던 고양이녀가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재경을 발견하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후다닥 낚아챘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냥! 분명 시간 비워두라고 어제 말했잖양!”

“우악, 지금 옷 갈아입고 가려고 했어. 잠깐, 좀 제대로 잡아!”

“거참, 요구하는 것도 많냥. 시간 없냥. 꼭 잡기나 하냥!”

냥냥이는 조금 후에 있을 공연 때문에 당장 합주가 급했다. 이제 공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렌이 공연 전에 도망가 버리면 밴드부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안 그래도 보컬이 늦게 구해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져서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공연 전까지 어떻게든 합을 맞추어야 했다.

세 발로 뛰며 한 손으로는 메이드를 낚아챈 고양이녀는 바람처럼 우다다 사라졌다. 덕분에 재경은 어제 정해두었던 공연복이었던 춘추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하고 메이드복 차림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렌!”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있어!”

복도 저편으로 렌의 목소리가 소멸되었다. 말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납치된 렌이 사라지자 남겨진 두 사람이 멀뚱히 눈을 끔벅거렸다.

“뭐지? 예의 그건가.”

“예의 그거라니?”

“나도 몰라. 대충 냥냥이랑 뭐 꾸미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이따가 공연이라도 하는 건가.”

류제가 그냥 자기 추측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키도 응급처치 부스에 들러야 하니 먼저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던 류제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비키.”

그가 비키의 팔을 붙잡았다. 렌이 없는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곧 있으면 수신제는 끝을 맞이할 거고, 유네는 강수를 던지겠지. 비키는 생각을 확고히 할 뿐 여전히 렌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비키가 별일이라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유네가 정말로 렌에게 고백하면 상처받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 걸까. 류제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며 넌지시 비키에게 일러바쳤다.

“너 유네랑 같은 방이지? 그럼 혹시 그거 들었어?”

“뭐가. 유네 부모님이 오신다는 거?”

류제는 자신과 하등 관련이 없는 척 소문을 어렵지 않게 흘렸다. 비키의 올곧은 초록색 눈동자는 류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유네가 오늘 렌에게 고백할 것 같던데. 유네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뭐?”

처음에 비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인지하지 못했다. 곧 그 그녀가 놀란 심정을 삼켰다. 같은 방 룸메이트임에도 유네가 렌을 좋아한다는 건 몰랐다.

“유네가 고백을? 그것도 렌한테?”

“나도 그냥 들은 이야기야.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류제는 연이어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

“왜 수신제 날 뒤뜰 하트 나무에서 고백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문 있잖아.”

“유네가 렌을 조…좋아했던 거야?”

“그런가 보지.”

그녀뿐만 아니라 유네도 렌을 좋아하고 있었다. 비키는 현실의 사랑은 꿈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사자들 없이 단둘이 있는 지금 그 사실을 그녀에게 전달하는 류제의 저의는 과연 뭘까. 우연찮은 소문에 대한 호기심? 단순한 사실 전달? 모르겠다.

렌을 향한 그녀의 감정을 류제가 죄다 꿰뚫어 보고 있는 기분이다. 비키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그…그게 뭐 어쨌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비키는 성장해 나가는 자신을 뿌듯해하던 아까의 감정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친한 친구와 좋아하는 사람이 겹치다니.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참을 수 없는 상처의 고통이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약해진 마음을 올바르게 드러내는 법을 모르는 비키는 냉정을 위해 마음의 셔터를 닫았다. 그녀의 나쁜 버릇은 감정의 원천 자체를 먼저 부정했다.

“고백하면 하는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유네도 별일이네. 레…렌이 뭐 볼 게 있다고 고백을 해?”

“나야 모르지. 그냥 그렇다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원하는 대답을 들은 류제가 먼저 선을 그었다.

류제가 붙잡던 팔을 쳐낸 비키는 유모가 실려 간 응급처치 동아리 부스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분명 상처받았을 게 분명한 감정은 말총머리를 흔드는 뒷모습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다. 필연적으로 유네에게 볼일이 생길 것 같다. 류제는 앞머리 아래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교실로 향했다.

* * *

메이드 차림 그대로 4반의 기타리스트, 전교생 공용 별명 냥냥이라 불리는 고양이녀에게 납치당한 재경은 합주 연습용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기존 방청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뭐야, 왜 이렇게 늦… 하하하. 무슨 옷을 입은 거야? 교복 입는다며?”

“그런 취미도 있었어? 얼씨구? 화장도 했네.”

“시꺼.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거 아냐. 우리 반 메이드 카페 하는 거 알잖아! 젠장, 공연 시작 전에 갈아입을 거야.”

“왜. 그대로 가도 되는데. 교복보다는 훨씬 낫다. 우리 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지 않아?”

한밤중 번화가에서도 놀라 돌아볼 법한 요란한 옷을 입은 ‘가시’ 어빌리터가 말하니 이 차림이 익숙해져 버린 재경은 자신의 꼴을 새삼 의식했다.

다른 밴드부 친구들 옷을 보면 전부 길 가다가 ‘저게 뭐야.’ 하고 돌아볼 것 같은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임팩트가 넘친다고? 그런 꼴로 학교를 활개 치고 돌아다녔다니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서 미치겠다. 재경이 고개를 저어 당장 부정했다.

“절대 아니야. 너야말로 그런 옷 입고 부끄럽지도 않냐?”

“시꺼. 드럼은 아무리 열심히 휘둘러도 눈에 잘 안 띈단 말이야. 나는 눈에 띄는 걸 좋아해.”

“기간트리카 대결하는 걸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가시로 쑥대밭을 만들어놓잖아. 다음 대결할 사람 곤란하게. 쟤도 관종병이야, 관종병.”

“역시 관종이었구만.”

재경은 엑스트라인 그녀와 류제가 정면 대결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수학여행 때 서바이벌에서 처음으로 붙었고 체육대회 기간트리카 준결승전에서도 붙었었지. 경기장 바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교장에게 불려가 혼났다고 들었다.

“나는 분명 높으신 분들 눈에 띄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넓은 의미로 그런 거지. 스타는 항상 눈에 띄잖아.”

그녀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들이 잔뜩 박힌 옷을 자랑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공연복도 살피자면 냥냥이는 고질병 같은 꼬리를 위해 옷 엉덩이에 구멍을 뚫긴 했지만 아가타 시내를 돌아다니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복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고양이 귀와 꼬리가 참 매력적이라 절로 시선이 간다.

코러스와 베이스를 맡은 ‘마비’ 어빌리터는 높은 워커에 가죽 소재의 옷을 입은 데다 시크한 얼굴에 눈 화장을 진하게 해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키보드인 ‘투시’ 어빌리터는 프릴 달린 귀여운 계열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도 이것대로 눈에 띄어서 흑백 계열의 메이드 복장인 재경이 가장 평범하게 보였다. 내가 그렇게 임팩트가 있나?

“난 메이드복 찬성해.”

“싫어. 이따 옷 갈아입을 거야.”

“왜. 인기 있을 거 같은데. 8반 여장 메이드 유명해서 우리 귀에도 자주 들렸거든. 화장은 공연 때문에 한 거 아냐?”

“아니야. 이건 강제적으로 당한 거야!”

“괜찮아. 이틀 내내 그러고 있었으니 익숙해져서 아무도 뭐라고 안 해. 교복보다 낫다니까? 진짜 그대로 공연하면 팬클럽 생겨서 너 뒤를 졸졸 따라다닐걸?”

그놈의 인기. 팬클럽. 남 속이는 사기꾼처럼 간사하게 웃은 그들은 어렵지 않게 재경을 설득할 수 있었다.

“하아, 이제 됐어. 빨리 해치우고 내려오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멘트나 애드리브는 다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긴장해서 가사 실수 하지 마.”

“안 해!”

“렌 지미가 똑똑하다는 소리를 워낙 들어서 말이지.”

“어제저녁 합주 때도 안 틀렸잖아. 진짜 사람을 못 믿네.”

네 사람이 불신의 눈으로 재경을 쳐다보았다.

“틀리면 내가 아이스크림 산다!”

“오. 짠돌이 렌이 웬일이래.”

“그만큼 자신 있다니까!”

아무리 내가 암기를 싫어하기로서니 해야 할 때는 했다. 싫어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이 정도 반복했으면 누구든 싫어도 느낌적으로 외우게 된다. 그것도 모르나.

“곡 순서는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갈 거야. 리허설은 30분 후부터니까 한 곡씩만 돌리고 가자. 곡 순서 반대로 리허설 할 거니까 가서 볼륨 확인하고.”

“알았어. 악기 사운드 모니터링은… 드럼 마이킹은 렌, 네가 좀 봐줘.”

“그게 뭔데.”

“멀리서 드럼 소리 잘 들리는지만 확인하면 돼.”

그냥 노래방처럼 무대에서 마이크 들고 노래만 하고 내려오면 될 줄 알았는데 공연을 하는 데에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구나. 재경이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엣―츄이!”

기타를 메고 손을 풀던 냥냥이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녀의 털이 수북하게 자랐다가 다시 원상 복귀 되었다. 머리를 턴 그녀는 아직도 코가 근질거린다며 세게 풀었다.

합주 때에도 저러다가 몇 번 박자를 놓친 전적이 있어 누군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너 진짜 솔로 치다가 재채기해서 손 나가면 가만 안 둬.”

“그거 생각보다 오래가네. 무슨 알레르기라도 있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겠냥. 아무리 그래도 공연 때 실수는 안 한다냥.”

코를 찡긋찡긋한 고양이녀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처럼 귀를 파르르 떨었다.

이전부터 드는 감각인데 재채기를 할 때마다 안에 맴돌고 있던 어빌리티가 밖으로 분출하는 것 같았다. ‘수인화’계의 어빌리티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니 그럴 리는 없지만.

별생각 없이 성장기라 어빌리티가 불안정한 것이라고 치부한 고양이녀는 손에 맞는 피크와 튜닝기, 카포를 챙겨 들고 잭을 앰프에 연결했다.

“그보다 시간 없으니 빨리 돌리냥!”

어색한 공연복을 입고 유연하게 손을 푼 그들은 리허설 전까지 짧은 시간을 쪼개 마지막으로 합주를 마쳤다.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악기를 챙겨 들고 남몰래 체육관으로 향했다.

밴드부의 공연은 깜짝 이벤트 형식으로 준비한 데다가 밴드부의 홍보를 위해 보컬의 존재를 숨겨야 했기 때문에 렌을 숨기며 악기를 옮긴 밴드부 일원들은 잘도 그 꼴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리허설을 진행했다.

“쟤네 뭐야?”

“몰라. 우리 학교에 저런 동아리가 있었나?”

“별 애들이 다 있네.”

공연 첫 타자인 관악부 부원이 요란한 차림의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흘겼다. 군악대를 흉내 내서 입고 있는 관악부 제복이 말끔하고 획일적이었다.

그런 제립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밴드부들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마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신세대 어빌리터의 심정을 대변하는 존재들이 1학년 밴드부가 아닐까 싶다.

남들이 리허설을 하는 동안 구석진 곳에서 합이 잘 안 맞는 부분을 반복해서 맞춘 그들은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 마이킹과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재경은 넓은 체육관을 가득 채운 수많은 객석들과 눈을 자극하는 무대조명을 절반 만끽했다. 이번에 설 무대 공연이 이전 라우라 축제 때보다 더 커다란 규모란 건 생각보다 대단했다. 실공연은 이보다 엄청날 거라니 재경은 두근두근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에 대한 반발로 괜한 걱정이 정신을 좀먹었다. 전적이 많으니 근거 없는 자신감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나 괜한 짓을 한 건가. 여기서도 공연을 엉망으로 만들면 어떻게 하지. 아까 리허설은 괜찮았나. 가사 까먹으면 어떻게 하지. 실수하면? 만약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면 어쩌지.

“렌, 가자.”

“벌써?”

걱정 때문에 귀가 멀어있었던 그의 정신이 문득 선명해지자 관악대의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눈앞에 닥쳐온 현실이 겁나 창백하게 질린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중얼중얼 가사를 암기하는 그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으로 인해 아침부터 한 화장이 지워질 것 같다.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그 땀을 닦아주었다.

“아무 생각 없기 교내 1위를 쟁취할 것 같은 렌 지미도 긴장하는구나.”

“안 하면 그게 사람이냐?!”

“괜찮아. 틀려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재미로 하는 건데 고작 긴장으로 망치면 재미없잖아. 편하게 생각하라고.”

리더 격인 드럼의 ‘가시’ 어빌리터가 멤버들을 모아 어깨동무를 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공연을 준비했는지 멤버들은 분명 알았다. 결과가 나빴다고 과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 서로의 믿음은 분명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 공연은 그걸 자랑하는 마무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대 따위 긴장될 것 하나 없었다.

“할 수 있어.”

“가자!”

“냥!”

“시원한 마음으로 내려오자!”

무대에서는 관악대가 의자를 치우고 반대편으로 내려갔다. 사회자가 다음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동안 커튼이 내려가고 관악대가 사용하던 드럼이 가운데로 배치되었다.

네 명의 밴드부 부원들은 앰프 볼륨과 이펙터를 조절하고 리허설 때 섰던 곳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재경도 가장 앞에 있는 마이크 스탠드에 섰다. 그처럼 위풍당당하게 다리를 벌리고 선 메이드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재경은 커튼으로 막힌 시야 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건너편에 보일 까마득한 장면을 상상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 천지이던 라우라 축제가 낫지. 긴장되어서 죽을 것 같다. 어차피 멘트는 다른 애가 치니까 상관 없지만.

후우, 하아. 할 수 있다, 신재경.

“막이 걷히면 카운트하고 바로 첫 번째 곡 시작할게.”

‘가시’ 어빌리터가 다시금 멤버들에게 곡 진행을 확인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올라갔다.

사람들의 함성이 들림과 동시에 재경의 눈앞도 아찔해졌다. 체육관을 가득 채운 시선이 모두 그들을 향해있었다.

이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세계의 주인공인 류제 신리의 시선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 그만의 이벤트였다. 재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함성이 잦아들자 뒤에서 드럼 스틱을 부딪치는 카운트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곡은 최대한 사람들의 기억에서 빨리 잊히고 싶다고 재경이 넣은 노래였다. 등쌀에 못 이겨 만든 자작곡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지만 이 노래는 빙의 전 재경이 자주 듣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코드는 재경의 기억이 토대가 되어 기타 리프나 베이스 리듬, 드럼과 키보드의 브라스는 음악에 자질이 있는 멤버들이 재창조했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던 재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연습한 노래를 남들 앞에 보여주다니. 아직 부족한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떨림이 재경을 상기시켰다.

인트로를 시작하는 드럼 탐탐 소리와 함께 청량한 기타의 음이 지판을 누르며 고막을 빛냈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하얀 조명이 내려왔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동아리가 등장하자 관객들은 다시금 환호성을 질렀다.

재경은 그들을 쳐다보는 관객들의 생각을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몸에 익은 박자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사 첫 마디가 덤덤히 전달되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치마를 입어 분명 여자인 줄 알았는데 제법 미성인 남자 목소리가 체육관을 뒤덮자 누구든 놀라 함성을 질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재경은 그러거나 말거나 집중해서 다음 가사를 떠올렸다.

재경은 목소리의 떨림을 자제시키려 해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앞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그는 언젠가 MP3로 이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지나갔던 나날을 떠올렸다. 이 순간 이미 추억이 되어버렸으며 잡히지 않을 과거의 나날들 말이다.

항상 듣기만 했던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직접 불러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때의 재경에게는 그만을 위한 행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자신이 고작 몇 달 만에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아무도 몰랐겠지. 재경 자신도 몰랐던 일인걸.

그래, 지금은 모든 걱정 다 떨쳐버리고 집중하자.

격한 감정이 올라오던 찰나 그를 붙잡아 주듯 코러스를 담당하는 베이시스트 ‘마비’ 어빌리터의 목소리가 묵묵히 이어졌다. 그에 힘입어 재경도 목소리에 자신감을 담아 노래에 박차를 가했다.

“저거 렌 맞지? 정말 맞지?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잔잔한 노래로 시작하는 밴드부를 보던 관객 중에는 체육관 한편에 자리 잡은 1학년 8반 학생들이 있었다.

서로에게 확신을 요구한 그들이 기분이 들떠 발을 굴렀다. 라우라 축제 때 무반주로 노래를 불렀던 렌의 여장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세 친구들은 자기들이 더 뿌듯해하며 렌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냥냥이랑 뭘 꾸미고 다니나 했는데… 밴드부 공연이었다니.”

“류제 군도 알고 있었어?”

“설마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야, 그래도 깜짝 놀랐네. 렌이 저런 걸 수락할 성격은 아니잖아.”

그래서 계속 목이 아프다고 물을 마셨구나. 저녁 늦게나 돌아오고. 부끄러워서 말 안 하고.

별로 관심 없고 관전하고 싶지도 않았던 문화 예술부 동아리들의 공연에 참석한 건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류제는 어째서인지 메이드복 차림 그대로인 렌을 지켜보며 한적하게 목소리를 감상했다. 세상의 주인공이 뒤바뀐 것처럼 낯설다.

“멋지구나 소.년! 누나들도 응원하고 있단다!”

“그때도 멋졌지만 지금은 더 멋져!”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두 여장 남자가 재경을 응원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류제는 먹먹하게 들려오는 그 속에 있는 진심에 무던하게 묻어 나오는 노래의 의미를 곱씹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를 넌 언젠가 잊어버리겠지만, 잊지 말아 줘.

어쩐지 낯선 풀밭에 서있던 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잡힐 듯, 손을 뻗어도 절대 잡히지 않는 그가 환영처럼 사라졌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들어가 매끄러운 키보드의 소나타가 곡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박수를 쳤고, 곡이 끝나려나 하는 찰나 코러스로 깔려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던 목소리가 맑게 차고 들어왔다.

이번엔 재경이 코러스가 되어 그녀의 목소리를 뒷받침했다. 류제는 그 목소리가 시간이 흘러 렌의 곁에 서있을 다른 여자의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부질없는 행동임을 방증하듯, 너무나 애틋하게 서로의 목소리를 휘감아 류제는 끊임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타를 치는 냥냥이가 사람의 심금을 건드리는 기나긴 기타 솔로를 끝내자 노래는 정말로 끝이 났다. 체육관을 울리는 장대한 이별의 연대에 사람들은 모두가 박수를 쳤다.

긴장은 풀렸지만 시야가 넓어지니 재경은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어릴 적 일기장을 사람들 앞에서 읽는 기분이었다.

“후우… 죽겠다.”

“렌, 잘했어! 첫 무대치고는 괜찮아.”

재경과 눈이 마주친 ‘마비’ 어빌리터가 마이크에 들리지 않게끔 말했다. 옆에 두었던 생수를 들이켠 재경이 짧게 웃었다. 그가 다음 노래를 위해 아무렇게나 입을 닦고 목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곡을 시작하기 전에 이펙터를 조절하던 고양이녀도 첫 번째 곡의 기타 솔로를 무난하게 해내자 안도했다. 그녀는 방심한 나머지 아까부터 참고 있던 재채기를 시원하게 뿜어냈다.

“에…에…에치이잇!”

몇 주 전부터 감질나게 몸의 기능을 방해하던 어빌리티가 숙변이 제거된 것처럼 시원하게 뚫렸다.

아후, 살겠네. 그녀가 코를 슥슥 닦으며 이펙터를 마저 밟으려는 찰나, 퐁 하고 재경의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솟았다.

노래도 끝났는데 환호 소리가 다시 커지자 냥냥이는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있는 보컬의 엉덩이에서 익숙한 꼬리를 본 그녀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고개를 마저 들 용기가 나지 않았던 냥냥이는 창백한 얼굴을 돌려 드럼인 ‘가시’ 어빌리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당황한 듯 눈치를 살폈다. 아니,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상관은 없긴 한데. ‘수인화’ 계열의 어빌리티가 이런 것도 되나?

“야, 다음 노래 언제 들어가냐?”

“멘트 좀 치고. 홍보는 해야 할 거 아냐. 안녕하세요. 저희는 제립학교 밴드부 1학년 일동입니다. 반갑습니다!”

“으, 진짜 긴장되지 않냐?”

마이크가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물은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위로 쫑긋 솟아있는 머리털과 같은 색의 고양이 귀가 냥냥이와 똑같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재경은 냥냥이의 시선이 의아했다.

“왜 사람을 그렇게 보냐?”

망했다냥.

그녀들의 수신제 공연 목적이었던 밴드부 홍보는 냥냥이와 렌의 기적적인 조합으로 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냥냥이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총 세 가지 근거에 기반을 두었다.

첫째. ‘수인화’ 어빌리티 계열의 어빌리터는 타인을 ‘수인화’시킬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사람을 ‘수인화’시키다니 어빌리터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이런 대단한 일을 밴드 공연하는 도중, 선생님을 포함해서 외부인과 학생들이 모두 그들에게 집중한 이 상황 속에서 해버렸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게 귀찮은 삶을 영위하게 됨을 의미할지도 몰랐다.

둘째. 저 성질 고약한 렌 지미가 메이드복까지 입었는데 자기 때문에 고양이 귀에 꼬리까지 달린 부끄러운 꼴을 동네방네 자랑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를 분명히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나중에 우리 동아리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는 도움을 안 줄지도 몰라. 안 그래도 억지로 보컬을 부탁한 건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곤란하다.

셋째. 어빌리티 컨트롤에 따라 특정 영역 짐승화가 가능한 그녀의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티의 단점 중 하나는 말끝이 고양이처럼 끝난다는 것에 있었다.

그녀가 어미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넣는 이유는 딱히 귀여운 척하려는 게 아니라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이상 고칠 수가 없는 부분이라서가 컸다.

불러야 할 노래가 아직 네 곡이나 남았는데 말끝마다 냥냥거리면 이상하잖냥. 아무리 반응이 좋다지만 그래도 가사에 냥거리는 건 좀 아니겠지양. 어쩌지? 어쩌지이이?

“우리들이 열심히 준비한 첫 번째 곡, 잘 들으셨나요? 여기 반전 매력의 멋진 보컬,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의 마스코트 렌 친구가 수고해 주셨습니다. 메이드복이 참… 귀엽죠?”

“뭐래냐. 내 소개는 됐다고 말 안 했냐.”

재경이 마이크를 치우며 투덜거렸지만 그의 꼬리는 관객들의 환호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렌의 더러운 성격과 합쳐져 건방져지긴 했으나 냥냥이는 역시나 냐냐 어미를 다는 렌을 불안한 듯이 살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말을 안 듣냐.”

“냐앙… 정말 망했냥.”

정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렌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멋대로 바뀌어버리면 다 어빌리티 컨트롤을 못한 자기 잘못이었다.

“우리 귀여운 냥냥이 기타리스트. 밴드의 실질적 권위자 까칠한 드럼 양. 브라스부터 스트링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키보드 양과 베이스와 코러스를 맡고 있는 제가 모여 만든 밴드 동아리는 언제나 신입 부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새로운 악기를 배워보고 싶거나 지루한 학교생활을 일탈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1학년 4반 냥냥이를 찾아주세요~”

이날을 위해 준비한 멘트를 말하는 베이스 ‘마비’ 어빌리터는 관객들에게 정신이 팔려 재경의 귀에 고양이 귀가 솟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냥냥이는 혼란스러웠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다음 곡 준비 OK 사인을 보내기로 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할래양. 데헷.

“두 번째 곡은 첫 번째 곡보다 신나는 느낌으로 가겠습니다. 첫 공연이니 실수하더라도 응원해 주세요!”

가장 떨렸던 첫 곡을 끝내니 아까보다 긴장이 풀린 재경은 자신의 귀와 엉덩이에 뭐가 달렸는지 상상도 못하고 진지한 얼굴로 드럼의 카운트 소리에 발을 맞췄다.

막이 올랐을 때보다 반응이 더 격해졌지만 그냥 예의상 그런가보다 착각한 그는 산뜻한 키보드 브라스가 주 멜로디인 두 번째 곡 인트로가 끝나고 목소리를 가볍게 터뜨렸다.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키보드 ‘투시’ 어빌리터의 취향이 묻어 나오는 노래를 재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외견이 참으로 앙증맞고 귀여워서 관객들이 크게 호평했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신이 나서 끝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꼬리는 시선 강탈 주범이다.

다행히 냥냥이가 걱정했던 냐냐 어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소멸하긴 했다. 그러다 노래가 끝나니 다시 살아나는 매직을 선보였다.

나름의 메커니즘이 있는 듯한데, 노래를 부를 때 사용되는 뇌와 발현된 어빌리티 때문에 고양이의 본능이 심긴 뇌가 어미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다른가보다 냥냥이는 추측했다. 나도 노래를 부르면 다를까냥?

어쩐지 렌을 이용해 어빌리티 실험을 해버린 냥냥이는 죄책감 가득 실은 손짓으로 기타 솔로에 소울을 담았다.

세 번째 곡으로 시원한 바다 느낌이 나는 사랑 노래, 네 번째 곡으로 어두운 듯 묵직한 톤의 이별 노래, 다섯 번째 곡으로는 빈티지틱한 톤의 만남의 노래를 연주한 그들은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관객석에서 큰 박수 소리와 함께 비명에 가까운 앙코르 요청이 일었지만 밴드부는 다음 타자를 위해 대기실로 내려왔다.

함박웃음을 터뜨린 그녀들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야,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연을 하니 상쾌하니 기분 좋구만.”

“나 잘한 거 맞냐? 아쉽게 왜 준비한 시간에 비해 시간이 후딱 지나가냐.”

“원래 공연이란 게 그렇지 뭐.”

“우앗. 렌, 너 귀가 언제 그렇… 읍.”

긴장해서 여태껏 모르다가 이제야 렌의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솟은 모습을 본 ‘마비’ 어빌리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제의 그것에 손가락질하려던 그녀의 지적은 냥냥이가 잽싸게 입을 막아 무산되었다.

“가만히 있어양. 제발 부탁이냥.”

“뭐냐. 왜 말을 하다가 마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냥.”

‘마비’ 어빌리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냥냥이는 필사적이었다. 만일 렌이 저 모습을 알아차렸다가는 엄청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렌!”

그녀들이 무대 아래 악기를 내려놓자 누군가가 사람들을 헤치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다음 순서로 공연을 하는 다른 동아리 부원들이 고양이 귀 재경을 보고 저들끼리 수군거렸지만 재경은 그보다 대기실에 들어온 류제가 더 눈에 들어왔다. 재경이 류제를 향해 상큼하게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 비밀로 한다고 입 근질거려 죽을 뻔한 거 아냐. 어땠냐. 괜찮았냐?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을 것 같냐?”

“그보다 너 그 귀…….”

“냐냐냐아앙!”

냥냥이가 이번엔 류제에게 뛰어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불안한 듯 꼬리를 탁탁 치면서 류제에게 속삭였다.

“실수다냥. 렌은 저렇게 된 거 모르냥. 분명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걷어찰 거양. 비밀로 해달라냥. 제발 부탁이양… 아마 몇 분 있으면 저절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냥.”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냥냥이의 부탁에 류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안한 듯이 꼬리를 휘저었던 그녀가 안도하며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 모습을 수상해서 재경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왜 자꾸 말을 하다 마냐. 내 귀가 뭐라고 했냐.”

“아니, 메이드복 귀엽다고. 밴드 공연이 본격적이라 놀랐어. 렌이 용케 허락했네.”

“그지? 첫 번째 곡은 렌이 작사 작곡한 거야. 괜찮은 노래라서 의외지 않아?”

“그래? 렌은 다양한 재주가 있구나.”

류제가 제 귀를 확인하려는 렌의 손을 붙잡고 자연스레 아래로 내렸다.

“아냐! 저작권적으로다가 이상해지니까 그런 말 안 하면 안 되냐.”

소리를 들으려는 듯 쫑긋거리는 고양이 귀가 정말로 렌의 머리에 붙은 건가 직접 만져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류제는 용케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귀여워.

“너희들도 악기 다루는 재주가 하나씩 있었구나. 반응이 좋아.”

“이 정도야 기본이지. 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으니까.”

“반응이 좋은 건 뭐… 우리 밴드부 홍보는 제대로 됐을 거야. 여러모로.”

드럼 스틱을 가방에 넣던 ‘가시’ 어빌리터가 재경의 고양이 귀를 의식했다.

재경은 어쨌건 이제 다 끝났다며 후련한 마음으로 짐 위에 털썩 주저앉고는 꼬리를 탁탁 쳤다.

“드디어 나도 해방이냐. 팬클럽이고 뭐고 크게 바라지는 않는다만 이걸로 놀림 받으면 다시는 안 도와줄 거냐.”

“놀리지는 않겠지. 놀리…기보단 놀란 것 같던데.”

“나는 다른 의미로 유명해질 것 같아서 무섭냥.”

냥냥이가 무대 앞에서 저지른 실수를 떠올리며 진절머리를 쳤다.

‘수인화’ 계열 어빌리티의 한계를 너무 가볍게 뛰어넘은 거 아닌가. 우연히 타인을 수인화시키다니. 이건 가늘고 길게 살려고 했던 그녀의 인생 계획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는 커다란 위기였다.

“학생 아직 있습니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후냐앙. 선생냥?!”

“세상에.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그녀가 걱정했던 4반 담임 선생님과 수인화 어빌리티 계열의 군인이 대기실을 쳐들어와서 냥냥이를 추문했다. 뒤에서는 사진사가 찰칵찰칵 밴드부의 사진을 찍어댔다.

“언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어빌리티를 쓸 수 있었던 거니? 응? 선생님한테 빨리 말을 해줬어야지!”

“후냐아앙! 오늘이 처음인데양…….”

“그 친구는 어디 있니?! 어서 불러와 봐! 선생님이 직접 확인해 보게.”

4반 담임 선생님이 대기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악기 위에 앉아 경계한 듯 꼬리를 세우며 어리둥절한 재경을 보고 눈을 빛냈다.

“심정이 어떠니? 어떤 기분이니? 귀의 감각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나?”

그녀가 멋대로 재경에게 다가와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경기를 일으킨 재경이 꼬리털을 바싹 세워서 하악질을 했다. 덜떨어진 둔한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재경은 그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높은 곳을 찾다가 가장 키가 큰 류제의 몸을 타고 발버둥을 쳤다.

“뭐냐… 선생님이 왜 갑자기 나한테 오는 거냐? 나 또 사고 친 거냐?”

“우악! 렌, 잠…잠깐만! 내 옷……!”

“류제, 어서 가냥! 렌한테 혼나기 싫냥! 잠깐만 숨겨주냥.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양.”

냥냥이가 몸을 던져 어른들을 막았다. 그 말을 들은 즉시 류제가 등에 매달린 재경을 옆구리에 끼고 대기실 밖으로 도망 나왔다.

뒤늦게 4반의 담임 선생님과 ‘수인화’ 어빌리티계의 군인이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학교에서 신체 능력으로 류제를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반 냥냥이처럼 되어버린 렌의 몸은 전보다 작고 말랑말랑해진 것 같다. 류제가 놓칠세라 꽉 끌어안았다. 렌은 여전히 일말의 영문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왜 그러냐?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냐? 내가 뭐 잘못했냐? 동아리 공연을 하면 안 되었던 거냐?”

“그러게나 말이다.”

“냐?”

간신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체육관 밖으로 빠져나간 류제는 고양이 눈을 깜빡거리며 불쾌한 듯 꼬리를 휘젓는 렌의 시선에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관객석 반응이 뜨거웠으니 이 모습이 들켰다간 4반의 담임 선생님 말고라도 분명 소란이 일 것이다.

류제가 체육관 뒤편 인적이 드문 곳까지 피신했다. 사람들의 동향을 살피며 렌을 품 안에 숨겨주고 있노라니 호기심 가득해진 재경이 류제를 툭툭 쳤다.

“뭐 하냐.”

아까부터 냐냐냐냐. 이렇게 변하면 어미가 어떻게라도 되는 모양이다. 귀염성 하나 없는 말투였지만 상대가 렌이니까 봐준다.

류제는 포동포동 귀여워진 볼살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다 과연 진짜 귀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일어 양손으로 재경의 얼굴을 붙잡고 찰흙을 가지고 놀듯 주물럭거렸다.

“하지 말아냐아아앙.”

그렇게 말하면서도 골골거리는 게 꼬리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니 너무 귀엽다.

류제는 위에 솟은 고양이 귀를 잡고 마사지를 하듯 주물럭거렸다. 커다란 손이 기분이 좋아진 재경은 류제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냥냥이처럼 되면 사람 귀는 없어지는 거구나. 으아, 귀여워. 귀여워어어.

“하지 말라고 했잖냐! 아까부터 정말 왜 그러냐!”

주물럭거리는 힘이 강해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재경이 냥냥 펀치를 가했다. 그렇게 좋아하다가 금세 기분이 나빠진 건지 꼬리를 탁탁탁탁 치는 모습이 영 못마땅해 보였다.

이해가 안 가는 류제의 태도에 부루퉁하던 재경의 귀가 갑자기 쫑긋거렸다. 고양이처럼 변해서 감각이 고양이에 더 가까워졌는지 웬만해선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재경이 고개를 돌려 발소리가 나는 곳을 살폈다.

“레…렌 구우운!”

“렌, 이 바보! 대기실에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뭐냐, 유네랑 비키였냐.”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한 꼬리털이 부풀어 오르려다가 말았다.

무대에 올랐던 렌을 보기 위해 대기실까지 갔다가 류제가 렌을 데리고 도망가자 여기까지 쫓아온 유네가 서둘러서 달려왔다. 따라온 비키도 심란해 보였다.

“렌 군, 저…정말 할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비키가 선물로 준 푸딩을 먹고 기절해 버려서 앞뒤 상황이 어리둥절했는데 친구들과 공연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렌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는 데다 고양이 귀가 뿅 나오니 그녀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인 유네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된 거야? 뭐…뭐야? 렌 군, 공연하기로 했었어? 왜 난 몰랐지?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거라니 무슨 말이냐.”

“그…그…그……!”

유네가 뭐라 설명을 못 하고 두리뭉실하게 귀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옆에서는 재경 몰래 류제가 쉿, 입단속을 시켰다. 의미를 잘못 알아들은 재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닌 척 뽐냈다.

“공연 말하는 거냐? 밴드부 애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잠깐 도와준 것뿐이냐.”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류제 군도 알고 있었어?”

“나도 몰랐어. 전혀.”

“깜짝 놀라라고 일부러 말 안 한 것도 모르냐. 부끄럽게 그걸 왜 말하게 하냐. 그보다 어땠냐.”

“어떻긴 완전 멋졌어! 평생 기억 속에 남겨둘 거야. 진짜 감동이야!”

유네가 아직도 기억에서 선명한 공연 무대의 여운에 휩싸였다. 비키도 고양이 귀가 달린 재경을 보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손을 주물럭거렸다.

“냐? 왜 날 그렇게 보냐? 할 말 있으면 비키 너도 하냐.”

“그거 진짜 생겨난 거였구나! 나는 분장인 줄 알았어. 나한테 진작 말해주지. 이런 엄청난 이벤트라니. 지금이라도 사…사…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에엑, 메이드복 차림을 대대손손 남겨줄 이유라도 있냐. 부끄럽지도 않냐.”

재경이 비키의 사적인 욕심에 손을 내저으며 기겁하다가 돌연 어딘가에 시선에 고정되었다.

“어……? 왜?”

집중하는 재경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꼬리가 흔들흔들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달려들 것 같았다.

“뭐…뭐야, 그렇게 쳐다보지 마.”

“냐!”

비키가 붉은 말총머리를 흔들거리며 고개를 획 돌리자 재경이 이때다 싶어서 달려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비키는 재경의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의 본능에 정신을 먹혀 움직이는 물체에 꽂혀버린 재경은 앞발로 비키의 포니테일 끄트머리를 붙잡으며 꾹꾹 눌렀다.

“뭐…뭐…뭐 하는 거야?! 변태가 옮기라도 한 거야? 당장 비켜!”

“자꾸 이게 움직이잖냐. 잇…이잇…….”

비키의 몸에 올라타 탐스러운 포니테일을 꾹꾹 누르는 렌이 엄한 짓을 하기 전에 류제가 그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쭉 들어 올렸다. 꼬리를 S 자로 들었던 재경이 방해하지 말라고 하악질을 했다.

마냥 고양이 귀가 귀여웠던 유네는 어쩐지 평소와 다른 렌의 모습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귀만 달린 줄 알았더니 렌 군이 정말 고양이가 되어버렸어.

“렌 군… 평생 저대로인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곤란해!”

렌의 습격에 당황한 비키가 새빨개진 얼굴로 먼지를 털었다. 비키는 유네를 힐끗거리다가 기분이 우울해져서는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냥냥이가 몇 분 후면 원래대로 돌아온다고는 했어.”

류제가 재경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방해받아서 짜증 났다가 그 손길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재경이 골골거리면서 류제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따스하게 비치는 오후의 햇살에 재경은 급격하게 나른해졌다. 분명 ‘수인화’ 어빌리티의 영향이겠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재경은 자고 싶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고양이의 마음에 육체를 지배당해 완전히 제멋대로이다.

“니야하암.”

니야함……! 렌이 고양이 귀랑 꼬리 달고 니야함이라고 하품했어!

기적적으로 세 사람이 같은 생각으로 경직된 와중, 삐죽 나온 송곳니를 과시하며 고양이 습성대로 움직이는 재경은 세수를 하듯 손을 둥글게 말아 혀로 날름날름 핥고 그걸로 화장을 지우려고 했다.

“왜 그래?”

“렌 군, 졸려? 몸이 그렇게 되어서 그런가?”

골골골. 고개를 끄덕인 재경이 졸린 눈을 끔벅거리며 류제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고 비비적거렸다.

류제는 심장 고동 소리가 렌에게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의식도 없는 재경은 그저 자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뭐야? 아까 걔 어디로 갔어? 고양이 귀 메이드 어디로 갔냐고!”

“빨리 찾아! 찾아서 당장 대령해!”

“사진으로 남겨놓자. 사진사아아!”

요리 동아리 부원들 같은 급진파들을 무사히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렌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제가 주변을 살피다가 졸고 있는 렌을 안아 들었다.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나는 렌 데리고 피난 가있을게. 선생님이 찾는다면 그렇게 말해둬.”

“아, 응! 알았어. 나한테 맡겨둬.”

깜짝 놀란 유네가 아무것도 안 한 척 양손을 휘저었다.

이 모습이 공개되면 귀찮은 수난을 당해야 하는 렌을 지키려 류제가 학교 안 안전한 장소를 떠올리는 동안 렌의 기습 공격으로 정신을 못 차리던 비키가 사진사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래도 사진은 한 번이라도 찍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분 후면 사라진다니 아쉬운데.”

아직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비키가 아쉬워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시늉을 했다.

“안 돼.”

렌이 인기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기 싫고, 어차피 이런 상태인 렌이 하는 행동의 뒷수습은 모두 자신의 몫이 될 것이 뻔했으니 귀찮았던 류제가 단번에 거절했다.

“지금 플래시 터뜨리면 경기를 일으킬걸.”

“역시 그러겠지? 시시하네.”

포니테일이 흔들리는 걸 보고 달려든 예를 설명하며 류제가 비키를 납득시켰다. 실망한 비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이따 보자!”

“으응. 렌 군을 잘 부탁해, 류제 군!”

떠나가는 고양이 렌을 보며 한숨을 내쉰 그녀들은 친구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앗, 저기 있다!”

“대박. 진짜 고양이 귀야. 와아아, 귀여워!”

고양이 귀 메이드라는 속성으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렌 때문에 어딜 가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수신제 내내 자신보다 렌이 더 주목받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저 사람들은 왜 날 쫓아오는 거냐?”

“잠깐만 가만히 있어, 렌!”

아무 생각 없는 렌을 뒤쫓는 그들을 피해 간신히 축제 때 외부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신관 실습실에 몸을 숨긴 류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새 페인트 냄새에 렌이 코를 킁킁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냐.”

“공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걸 거야.”

“문제가 왜 생기냐. 공연은 완벽하지 않았냐. 저 사람들 분명 내 팬클럽인 거 아니냐.”

“아냐. 틀려.”

“왜냐. 나 열심히 했지 않았냐? 왜 팬클럽이 안 생기는 거냐?”

재경이 툴툴거렸다. 이럴 줄 알았지만 기껏 시간을 쪼개서 남몰래 노력했는데 보상이 없다. 그러다가도 고양이의 본성에 뇌를 지배당한 재경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만든 뜨끈뜨끈한 길을 발견하고 꿈지럭 자리를 잡았다.

“나 잘 건데 넌 뭐 할 거냐.”

“…글쎄. 머리라도 받쳐줄까.”

고양이들 식빵 굽는 자세로 따끈따끈하게 몸을 모으고 있는 렌이 어지간히 불편해 보였던 류제가 물었다.

다들 쉬쉬하는 바람에 자신의 행동이 이상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재경은 류제가 손을 뻗자 벌러덩 편하게 드러누워 골골거렸다.

“으…….”

귀여워. 미치겠다. 원래부터 고양이 같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저러니까 귀여워 죽겠다.

류제는 귀여운 냥냥이 버전 렌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어 기뻤다. 그가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과 고양이 귀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렌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쳤다. 분명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데 이것도 고양이의 본능적인 행동인가.

공연이 이런 사건 없이 마쳤더라면 승승장구하면서 반에 돌아가 인기인이 되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그의 운명이지 싶었다.

그러나 류제가 렌을 마음껏 독점했다고 하기도 애매한, 렌이 잠든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양이 귀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 정도를 잠으로 보내는 고양이의 특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미처 잠이 들었던 재경은 류제가 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할 무렵 번뜩 눈을 떴다.

“으어엉?”

“우앗. 깼어? 금방 사라지네.”

지금이 생소했던 재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라, 여기는 분명 아직 출입이 금지된 신관 건물 안이다.

“뭐야? 여기 어디야?”

공연을 하는 꿈을 꾼 게 아닐까 재경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체육관에서 밴드부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가 공연한 건 기억이 나는데…….

“나 왜 여기서 자고 있지?”

“기억 안 나?”

“공연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뭐지? 여기에 언제 온 건지 모르겠어.”

“공연 끝나고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기절해서 여기서 쉬게 해주고 있었어.”

“그랬나? 왜 기억이 안 나지? 아, 맞다. 공연 봤어? 어땠어? 나 실수한 거 티 났어?”

관객들이 환호하던 장면이 떠오른 재경이 무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류제는 몸을 움찔거리며 숨을 삼켰다.

대기실에서 물어봤던 걸 다시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거기서부터 기억이 애매한 모양이다. 고양이 귀 때문인가.

“엄청 잘했어.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노래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 후우, 다행이다. 내가 긴장을 엄청 했나 봐. 눈 뜬 채로 기절을 하다니. 쪽팔려서 원.”

재경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귀여운 고양이 귀는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의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비쳤다. 꼬리가 남았다면 치마 아래서 만족스레 활개를 치고 다닐 것처럼 그는 기분이 상쾌해 보였다.

대기실로 사람이 몰렸다는 말을 곱씹으며 좋아하던 재경은 메이드복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종이 질감에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이 넣어준 과자가 남은 건가 생각했는데 넣은 적 없는 편지가 봉투에 싸여있었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봉투는 아무리 봐도 결투장은 아니었다.

“이게 뭐지? 이거 류제 네 거야?”

“응? 뭐가?”

류제가 채 확인하기도 전에 재경이 봉투를 열었다.

작은 편지에는 앙증맞은 글씨로 포크댄스가 시작하기 전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재경을 기다리겠다고 쓰여있었다. 잘못 전달해 준 것인가 의심부터 들었지만 봉투엔 분명히 수취인이 렌 지미라고 적혀있었다.

이 편지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재경의 뇌가 굳었다. 수신제에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은…….

“어…어라? 인기랑 팬클럽은 기대하긴 했는데 버…버…벌써 고백이야?! 류제, 이거 봐! 이거 러브레터 맞지? 그지?! 내가 그 개고생을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어! 여자 친구야! 여자 친구가 생길 거야. 류제! 가만히 있지 말고 이거 보라고!”

“러브레터라고?”

렌에게 덮어줬던 옷을 다시 걸치던 류제가 황급히 편지 내용을 훔쳐 읽었다.

렌은 바보라서 자기가 지금껏 숙제를 베꼈었던 글씨도 못 알아봤지만 저 글씨체는 유네의 것이었다.

아까 만났을 때 넣은 건가. 젠장, 여기나 저기나 다 손은 빨라가지고. 고양이 렌한테 홀랑 빠져있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미쳤다, 진짜. 하하하하! 기분 최곤데. 야, 류제. 이러다 내가 너보다 여친 일찍 사귀겠다?”

저렇게 좋아하는 렌을 보고 있자니 나쁜 이야기는 못 하겠고, 다만 좋지 못한 생각이 류제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저런 렌은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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