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6)
수신제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어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걸 류제가 억지로 깨워 화장실에 처넣은 덕분에 아침에도 뽀송한 재경의 이마가 유니콘처럼 부었다. 어제 검도부가 대결을 하던 도중 부러진 목도에 이마를 맞은 흔적이었다.
결국에는 세라에게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며 치료를 받은 재경은 이럴 줄 알았다며 졸린 눈을 비볐다.
학교는 여전히 수신제 분위기로 들떴다. 게다가 오늘 드디어 있을 밴드부 공연 때문에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재경은 죄 없는 류제에게 별것 아닌 이유로 짜증을 부리며 아침밥을 먹었다.
“설마 오늘도 그딴 옷을 입으라고 한다면 당장 도망갈 거야.”
“에이, 축제니까 그 정도는 괜찮잖아. 다른 친구들도 입는데 뭐. 너그럽게 봐줘.”
“그래도 싫어. 생각날 때마다 이불 찰 것 같아. 나도 집사복 입을래. 그러면 뭐, 마지못해서라도 입어주지.”
체육복을 입고 껄렁껄렁 등교하는 재경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돌멩이를 발로 찼다. 피곤하니 마음 같아서는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전까지는 어디서 몰래 잠이라도 더 자고 싶다.
“오늘도 메이드복이라면 난 반드시 땡땡이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침엔 오픈 준비 도와줘야 하는데. 도망갔다간 여자애들이 가만있지 않을걸.”
“메이드복만 안 입히면 되잖아, 안 그래? 류제 네가 미리 가서 살피고 와주라. 오늘도 그 저주스러운 옷을 들고 있으면 당장 도망가게.”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왜? 어, 으악!”
어제 재경에게 메이드복을 들이밀었던 수예부 여학생들과 비슷한 얼굴로 히죽 웃어 보인 류제가 재경을 냅다 둘러멨다.
갑자기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되자 이게 무슨 일인가 벙벙하던 재경은 류제가 자신을 팔아먹었음을 은연중에 깨닫고 뒤늦게 발버둥 쳤다.
“뭐야? 야! 류제, 너 혹시 걔네들하고 작당했냐?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안 놔?!”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렌이 도망가기 전 여학생들에게 부탁받은 대로 얌전히 보쌈해 교실까지 당도한 류제가 즐거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재경은 마지막 반항으로 버둥거렸지만 류제의 힘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교실 안에는 일찍부터 등교해서 개점 준비를 하던 여학생 몇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해! 약속대로 잘 데리고 왔군. 늦어서 놓쳤나 싶었더니 역시 류제는 믿음직스러워.”
“기왕이면 교실 올 때까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 눈치를 너무 빨리 채더라.”
“역시 류제 너 이 자식, 감히 날 배신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거 놔아아! 싫어! 안 입어!”
류제에게 들려 단단히 허리가 붙잡힌 재경이 류제를 걷어차고 때렸지만 이런 시시한 반항이 류제에게 타격으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류제 너 진짜 잘 생각해야 한다? 너 나한테 한 달 동안 간식 빼앗기고 싶어?”
“안 뺏기면 되지.”
어떤 협박에도 동요가 없는 류제는 통발에 걸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재경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먼저 온 손님이 더 있었다.
“늦었구나, 소.년.♂ 미인이란 본디 부지런한 법이란다.”
“시간이 없으니 오늘은 우리들이 대신 부지런하게 움직여 주지.”
교실 안에는 8반 학생들의 부탁으로 아침 일찍부터 학교를 찾아와 준 두 아름다운 숙녀가 있었다. 바로 여장을 좋아하는 별난 취미를 가진 근육질 아저씨 두 사람이었다.
메이드복을 입었던 재경을 보고 사그라들었던 의욕이 불타오른 듯했다. 그녀들은 여장 대회 때 입었던 이상한 발레복과 짧은 치마를 입고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포즈를 취하며 재경을 환영했다.
그녀(?)들은 시간이 없다며 류제에게서 재경을 빼앗으려 들었다.
류제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재경이 이번엔 반대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류제를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렌의 흉부와 입을 맞추게 된 류제는 얼굴을 붉히며 놓으라며 버둥거렸다.
“끄악, 으아악! 뭐 하는 거야. 류제~! 나 놓지 말라고! 이거 놔, 이 변태들아아! 야, 이 류제 배신자야!”
“으으, 내 코야.”
렌이 무사히 탈의실로 들어갔다. 코뼈가 꽉 눌려 삐뚤어질 것 같았던 류제가 콧잔등을 집으며 얼굴을 찡긋거렸다.
“집사 류제는 이쪽입니다요~”
그런 류제에게는 8반 여학생들이 그를 둘러쌌다. 이번엔 내 차례구나, 류제가 체념했다.
재경이 들어간 간의 탈의실이 북적거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뭔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리고, 투닥거리는 소리, 도망가려던 손이 바깥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모습 등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서 숙녀들이 탈의실 커튼을 거두었다.
“후후후, 앙칼진 고양이 소년이구나. 간신히 옷을 갈아입혔군. 어서 시작하자고, 파트너.”
“내 연장이 날 부르고 있어. 불타오르는걸.”
축 늘어진 재경을 빨랫감처럼 다루며 양옆에서 마주든 두 숙녀가 그를 화장대로 꾸민 임시 테이블에 앉혔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흰자위를 뜨며 기절한 재경은 깨꼬닥 고개를 떨어뜨리고 얌전히 숙녀들의 시술을 기다렸다.
가방을 연 그녀들은 불법적인 어떠한 것들을 꺼내듯이 은밀하게 연장을 늘어놓았다.
온갖 종류의 붓과 색조들이 테이블에 차례로 진열되었다. 뷰러, 눈썹 정리 칼, 하물며 손톱 줄까지 가지런하게 늘어놓은 그녀들은 본격적으로 손에 연장을 끼우고 작업을 시작했다.
탈의실에서 명치를 가격당해 정신이 나가있던 재경이 무언가가 자신의 얼굴을 두드리는 감각에 놀라 번뜩 고개를 들었다.
“으헙……?! 어, 내가 언제 여기로… 으풉, 읍!”
재경이 깨어났어도 봐주는 것 없이 분칠을 하던 쿠션이 입을 때렸다.
재경은 우락부락한 숙녀들이 자신의 하잘것없는 얼굴을 진지하게 쳐다보며 얼굴에 장난질하는 장면을 보고 얼어붙어 입을 다물었다.
틈을 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두 숙녀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했던 것이다. 단념한 재경은 인형 놀이를 당하는 인형의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도대체 뭔데… 으악! 이 사람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류제, 너 알고 있었으면서 말도 안 하고!”
“어제 네가 냥냥이랑 사라졌을 때 들었지.”
집사복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던 류제가 의연하게 답했다. 그가 어제 강매한 하트 모양 클립을 베스트 주머니 안에 꽂았다.
“치사한 놈. 그럼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그러게 누가 치사하게 혼자서만 뒷정리 빠지래?”
어제 재경을 기다리던 숙녀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작당한 여학생들이 점점 예뻐지는 재경을 보며 좋아라 웃었다. 화장 솜씨가 없는 그녀들을 대신해서 숙녀들이 꾸며준다는 사탕발림은 달콤했다.
“윽, 으겍, 으윽. 그만 좀 발라요. 뭘 그렇게 치덕치덕 문대는 거야.”
“가만히 좀 있어봐. 자, 입 다물고. 옳지.”
분을 다 칠했다 싶더니 이번엔 눈두덩이를 따라 뭘 또 칠했다. 가만히 있는 눈깔을 까뒤집지 않나, 푹푹 찌르지 않나, 이상한 도구로 속눈썹을 꽉꽉 집어서 사람을 무섭게 만들더니 솔로 눈을 찌를 듯이 위협했다.
그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발랐던 곳에 뭘 다시 바르고 칠하고 닦고 깎고 질리지도 않고 요란법석이었다.
입술을 음빠음빠 두어 번 하니까 어느덧 화장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손톱 줄로 못생긴 손톱을 가지런히 정리해 준 그녀들이 재경의 앞으로 전신거울을 가져왔다.
저번 여장 대회보다도 진화된 모습에 여학생들은 만족도 100프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째 더 여리여리해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 재경이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콤플렉스였던 주근깨도 잘 안 보이고, 눈도 왠지 커진 것 같다. 못생긴 삼류 악역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꾸며놓으니 뭔가 좀 괜찮긴 한데 인정하기 싫었다.
재경은 집사 복장을 한 류제를 흘겼다.
“기왕이면 류제처럼 멋지게 꾸며주면 좀 좋아.”
“소년은 아직 골격이 덜 자라서 여장하면 선이 볼 만하거든. 이런 것도 삶의 묘미 아니겠어?”
“묘미는 무슨. 그냥 놀리는 거잖아요.”
재경이 이젠 포기했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여쁜 아이들아. 다음 차례는 누.구.니♂”
숙녀들이 이번에는 여학생들을 위해 붓과 분을 꺼내 들었다. 사람의 외관에 내재되어 있는 매력을 한층 더 이끌어내는 데에 맛을 들인 그녀들은 천수보살처럼 손놀림이 빨라졌다.
매사에 비협조적이었던 ‘무게’ 어빌리터와 그 친구들조차 실력을 알아보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아저씨들은 왜 여장을 하게 된 거예요? 전혀 안 어울리는데.”
의자에 거꾸로 앉아 여학생들을 구경하던 재경이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여학생 한 명 한 명 매력을 살려 화장을 해주던 숙녀들이 손을 잠시 멈추었다. 서로를 마주 보던 그녀들은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매력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기뻤던 그들의 얼굴에서 색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
“귀여운 소년이 우리들의 여장 연대기에 호기심이 생겼구나.”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아니, 별로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그럼 들어주렴. 우리들의 슬픈 세레나데를.”
별생각 없이 한 질문이 중요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재경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숙녀들은 우아한 발레리나 자세를 취하면서 자기 멋대로 공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소년보다 솜털만큼 더 작고 귀여웠던 때였지.”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과거에 심취한 그녀들은 무대에 선 뮤지컬 배우처럼 춤을 추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차례를 기다리다 말고 더러운 것들을 목격한 여학생들이 헛것을 본 마냥 눈을 비볐다.
“우리 오픈 전까지 화장은 할 수 있는 거지?”
“몰라.”
관심 없는 정보들까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퍼포먼스를 보다 보니 이야기는 재미있긴 했다. 어쨌든, 춤과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생략하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마족에게 가족을 잃은 슬픔이 지독하던 때. 어린 마음에 그들도 어빌리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확률상 남자는 어빌리터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 그들은 여자가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 소망을 품고 있던 중 그들은 재경과 같은 17살 때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게 되었다.
“거짓말! 아저씨들이 상을 탔다고요?”
“그럼. 나도 너희 나이 때에는 피부도 탱탱하고 아름다웠단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멋지지 않니?”
몸을 쓰는 일을 하는 그들이 서로의 근육을 만지작거리며 훌쩍거렸다. 근육도 멋지지만 역시 고운 선이 가지는 아름다움과는 달랐다.
그때의 영광을 뒤로한 채 성인이 되고, 그 추억을 가슴 속에 깊이 묻었다. 꿈이 깨진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 살기 위해서 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빌리터가 되고 싶었던 순수한 꿈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가까운 술집에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일이 잘 안 풀려 허심탄회 하소연을 하던 그들은 술김에 라우라 축제의 꽃 여장 대회 신청을 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 소리에 마음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장에 맛을 들였다.
“그런 이유지. 여장을 하면 계속 억눌려 참아왔던 걸 마음껏 뽐내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
“진짜 시잘데기없는 이야기…….”
“뭐라고?”
뿔난 재경이 옆에서 투덜거리자 아득하게 낮은 저음이 그를 위협했다. 재경은 당장 입을 다물었다.
결국 라우라 축제 땐 어빌리터를 동경해서 여장을 시작했다는 내 생각이 맞았잖아. 재경은 언젠가 사기꾼처럼 그를 설득했던 예언가 할머니의 알랑방귀를 떠올렸다.
뭐?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서 여장을 한다고? 웃기고 있네. 거짓말쟁이 할머니. 내 말이 맞았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장을 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제기랄. 할머니는 나중에 두고 봐요.
“어라, 렌 군 화장한 거야? 엄청 귀여워! 잘 어울려. 어제보다 훨씬 낫다.”
“꼴이 그게 뭐야. 하하하, 바보 같아.”
“모른 척하지 마. 너희들도 작당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재경이 반에 들어오자마자 웃음보를 터뜨리는 비키와 유네를 손가락질하며 으르렁 이를 드러냈다.
역시나 재경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 그녀들은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침부터 변신한 렌을 이곳저곳 뜯어보았다. 고양이 눈매에 붉은 뺨이 생기 넘쳤다.
“흐음, 화장의 힘은 대단하구나. 천하의 천덕꾸러기 렌조차 이렇게 바뀌다니. 키아나트리체의 기술력에 감탄이 다 나오네.”
“뭐야? 비키 너 말 다 했냐? 자기는 얼굴 잘났다고 아주 막말하고 있어. 나도 본판이 괜찮으니까 그런 거거든?”
“흐…흥! 괜찮기는 무슨. 나 정도가 되어야 본판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예쁘다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비키가 잘난 척하며 얼굴을 붉혔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어 아무렇지 않은 시늉을 했어도 비키는 당장 거울을 보고 싶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유네가 키득거리다가 손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꽁지머리에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숙녀들이 유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유―네―! 이제야 왔구나. 어제 인사밖에 못 해서 아쉬웠어. 잘 지냈지?”
“맞아, 왜 금방 가버렸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우리끼리 회포를 잔뜩 풀고 싶.었.다.구.♂”
“으힉!”
아무래도 여장 대회에 나갔을 땐 남자인 척 거짓말을 했던지라 지레 뜨끔한 유네가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한 그녀가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어제는 마주치자마자 동아리 간다고 도망쳤었는데 지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자가 여장 대회 가서 상금을 탔다는 정당하지 못한 짓을 한 거짓말쟁이라고 엄청 혼날 거다. 어제 숙녀들과 마주하고 아침부터 각오했던 유네가 조심스럽게 숙녀들에게 인사했다.
“아…아…안녕…하세요오… 오…오…오랜만이에요오…….”
“유네도 아침부터 여장이라니 분발했구나. 화장할 거지? 응? 오늘도 예쁘게 꾸며줄까?”
“아…아하하… 가…감사합니다.”
“저분들은 유네 네 지인이야?”
유네와 숙녀들 간의 사정을 모르는 비키가 갸웃거렸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의외인 거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혼나더라도 밝히는 게 나았다. 곧 유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으응, 여장 대회 때 같이 참가했던 사람들이야. 나랑 렌 군 여장하는 걸 도와주셨어.”
“여장… 아.”
여장 대회라는 말에 당시의 사진을 떠올린 비키가 눈치껏 유네와 숙녀의 관계가 얼마나 꼬였는지 알아챘다. 다른 친구들도 재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즉 저 아저씨들은 아직도 유네가 남자인 줄 알고 있다는 건가.
그저 유네가 반가웠던 숙녀들은 정숙해진 분위기를 못 읽고 라우라 축제를 떠올리며 황홀하게 몸을 떨었다.
“그때 유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렇게 꾸밀 맛이 났던 소년은 처음이었다니까.”
“암. 선도 가늘고 얼굴도 귀여워서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그게 좀… 사정이 있는데… 전 진짜… 여자예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냉큼 진실을 말한 유네가 에헤헤 머리를 긁적거렸다. 화난 아저씨들은 무섭지만 좋은 마음으로 그녀를 도와준 분들이니 기왕 여자로 돌아온 거 괜히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혼나더라도 지금 꿀밤 한 대 맞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유네가 진실을 숨길 것이라 생각하던 친구들은 눈이 희번덕했다. 일단 저 사람들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무서우니 유네를 지켜야겠다 생각한 친구들이 차례대로 앞을 막았다.
“일단 침착하시고!”
“유네도 사정이 있었으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누가 보면 사달이라도 난 것처럼 유난을 떠는 친구들이 황급히 유네를 보호하니 참으로 갸륵한 우정의 현장을 목격한 숙녀들은 ‘무게’ 어빌리터의 화장을 해주다 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관련 없는 ‘무게’ 어빌리터조차 긴장한 정적의 순간 그들은 마침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렇지? 그럴 것 같았어.”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유네를 지키던 친구들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여자 흉내를 낸다며 가짜로 만든 고음이 아닌 본연의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은 그들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있는데 남장한 여자라고 없을까. 우리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으로 보이니?”
“절대 아니죠.”
재경이 그들의 평범함에서 두 발짝은 물러난 모습을 흘기며 단언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여장을 당당하게 하고 다니는 그들이 꽉 막힌 사람이었다면 세상은 카오스였을 거다.
“후후, 그럼 우리는 공식적인 대회에서 소녀의 외모와 겨루었다는 거네. 기뻐라.”
“암. 동료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늘었지. 유네도 참. 우리가 한두 번 여장을 해본 줄 아니. 둘 다 귀엽지만 렌과 골격이 다른걸.”
그녀들이 쯧쯧쯧 혀를 차며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귀엽다는 말에 움찔 반응한 재경이 분을 삭였다. 왜 나를 끌어들이고 난리야. 그런 거짓부렁이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귓불이 새빨개진 재경은 뒤로하고, 숙녀들은 용케 진실을 밝힌 유네와 그 친구들을 보면서 어른의 미소를 지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괜찮은 거지? 널 이해해 주는 좋은 친구들을 뒀구나.”
“이리로 오렴. 오늘도 이 언니가 예쁘게 꾸며줄 테니.”
상냥한 숙녀들에게 감동한 유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 어빌리터 소녀도 내심 안도했는지 한숨을 내쉬다 지레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숙녀들이 마무리로 핀을 꽂아주었다.
아침부터 수고해 준 숙녀들의 도움으로 8반 학생들이 전원 세련되고 나이대에 어울리는 화장을 마쳤다. 어설펐던 어제는 +1강 한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5강 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카페를 오픈하고 숙녀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차를 대접하고 있으려니 슬슬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제의 여파로 오늘도 어지간히 들이닥칠 예정인가보다. 유동 인구에 시동이 걸려 일손이 바빠졌다. 한눈판 사이 렌이 화끈한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까 걱정한 친구 한 명이 새끼손가락을 들고 단단히 타일렀다.
“렌 너도 이거 들고 저기 가서 서있어. 손님한테 시비 걸면 안 된다? 약속. 잘 지키면 과자 줄게.”
“사람을 다섯 살 먹은 애 취급하지 마라. 저쪽에서 안 건들면 시비도 안 걸어. 으으, 왜 어제보다 더 아랫도리가 휑한 느낌이지?”
재경은 어째 더 짧아진 치마를 어떻게든 내려보며 홍보 피켓을 들었다.
무릎 위까지 온 치마는 조금이라도 빙글빙글 돈다 싶으면 밑이 죄다 보여버릴 것 같았다. 어색하게 쭈뼛 선 재경이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친구들이 장난삼아 입힌 메이드복이 움직임 봉인용 옷이 되어버렸다.
2일 차 수신제 아침 학급 행사의 히로인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왕녀와 미나는 활동하는 동아리 부스로 갔고 주인공과 시간이 맞은 비키와 유네는 서빙을 도와준다. 세라는 가끔씩 교실에 들르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주로 고문을 맡은 동아리 부스에 있었다.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틈을 타 양말 발목에서 구깃구깃한 종이를 몰래 꺼내 든 재경이 스케줄을 재확인했다.
<수신제 2일 차 류제 학급 행사 동아리 스케줄 표>
10 카페(고정)
11 카페(고정)
12 ?
1 ?
2 카페(고정)
3 문화 예술 동아리 공연 (내 공연)
4 문화 예술 동아리 공연
5 포크댄스(미나의 호감도 이벤트)
6 뒷정리(고정)
수신제 2일 차는 공연이나 포크댄스 때문에 생각보다 자유 시간이 적었다. 이런 촉박한 와중에 류제가 어제처럼 유네의 동아리에 들른다면 아니나 다를까 비키의 다섯 번째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한다.
유네의 동아리에 가는데 왜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하냐면 바로 저 요리치 비키가 요리 동아리 배 요리 대회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뭐, 비키 루트는 포기했기 때문에 현재 호감도가 3까지 오른 비키는 호감도 이벤트를 신경 쓸 필요가 없기는 하다.
재경은 잘 구워지고 있는 팬케이크를 건드려보다가 기어코 검은 연기를 내뿜게 하는 비키를 보면서 혀를 내찼다.
결국엔 다른 친구들이 수습하고, 비키는 주방에서 쫓겨났다. 뚱해진 비키는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얼굴로 뭐라고 투덜거리다가 종종 발걸음을 옮겼다.
“8번 테이블 주문받으세요.”
“우아악. 비켜, 비켜! 부딪힌다!”
“스페셜 메뉴 들어갔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손님들이 들이닥쳤고, 간이 테이블은 꽉 찼다. 밖에서는 긴 대기 줄이 있었다.
학생들이 어지간히 바빠 보이니 숙녀 두 사람도 테이블을 비워주고 서빙을 도와줬다. 과연 그녀들의 박력은 대단한지라 귀여운 메이드들에게 엉큼한 마음을 품고 있던 손님들이 찍소리도 못했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괜찮은데? 예쁘다.”
손님들이 그럴싸하게 장식된 디저트를 보며 과한 찬사를 보냈다. 학생들이 만든 서툰 음식일지라도 보석처럼 보이게 해주는 다기 세트 덕분일 것이다.
“특히 찻잔이 정말 예뻐.”
“흥, 당연하지.”
서빙을 마치고 기고만장해진 비키가 코끝을 치켜들고 다음 주문을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불안한 대사가 들렸다.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테두리에 있는 거 진짜 금인가?”
“한번 물어봐.”
“이렇게?”
손님 중 한 명이 찻잔을 들고 이로 씹는 듯한 시늉을 했다. 순금이 아닌지라 강도가 무르지 않았지만 찻잔의 주인인 비키가 보기엔 참으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비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달랬다. 어제부터 심심하면 등장하는 진상들 때문에 수신제를 위해 다기 세트를 빌려준 게 정답이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가지고 싶다. 하나 슬쩍해도 모르겠지?”
“하나 챙겨. 뭐 어때. 이 정도쯤은.”
“잠깐. 이거 다 마시고.”
다기를 훔치려고 작당하는 사람도 질리도록 봤다. 비키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찻잔을 가져온 가방 속에 몰래 숨기려고 하는 손님들에게 버럭 외쳤다.
“잠깐. 거기 도둑질하지 마!”
“우앗!”
곧바로 현장을 들키자 손님들이 소스라쳐서 찻잔을 놓쳤다. 찻잔이 교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럴 거라고 예상 못 한 비키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으랏차!”
혼자서 피켓을 들고 교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우연찮게 그 장면을 목격한 재경이 곧장 몸을 날렸다. 운동신경이 좋은 재경은 바닥에 턱을 찧기는 했어도 한 세트당 집값보다 비싸다는 찻잔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게 다 저번 체육대회 배구 리시브 연습 덕분이었다.
“후우, 하마터면 집 한 채가 날아갈 뻔했네. 야, 비키. 나중에 내가 노숙자가 돼서 찾아가면 한 채 내놔야 한다. 알았지?”
비키에게 찻잔을 넘긴 재경이 우쭐거렸다. 이 조그마한 찻잔 하나가 집 한 채 값이라는 말에 도둑질하려던 손님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농담인가 진담인가 가늠을 못 하겠다는 얼굴이다.
찻잔을 돌려받은 비키가 안도의 한숨을 꿀꺽 삼키고 아닌 척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서서 마스코트 역할이나 제대로 해.”
“뭐야, 비싼 거라길래 기껏 도와줬더니.”
“암, 어디에 비할 바 없이 귀한 내, 셀로니아, 가문의, 유산이지. 하나라도 없어졌다간 범인을 찾아내 당장 숯불구이로 만들어줄 거야.”
경고하듯 손에서 불길을 내뿜은 비키가 찻잔을 훔치려고 한 손님들을 노려보았다.
기념으로 가져가려 했던 예쁜 찻잔이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의 유산이라는 사실과 저 빨간 포니테일 소녀가 바로 그 셀로니아 후작 가문의 여식이라는 말에 그들은 탈이라도 난 양 디저트를 한 입도 대지 않고 곧바로 도망쳤다.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모습에 만족한 비키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염치는 있어서 다행이네.”
“너야말로 염치가 있는 거냐? 도와줬으면 고맙다고나 할 것이지.”
“누가 안 고맙대? 고맙다고 지금 말하고 있잖아.”
부끄러워진 비키가 입을 비죽거렸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 아니었거니와 렌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이게 자신의 삐뚤어진 마음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도 어제 일로 뚱해 있는 건가 비키 자신도 몰랐다. 혹시나 자신의 이런 태도에 렌이 질렸으면 어쩌나 눈짓을 보내던 비키는 눈이 마주치자 모르는 척 시선을 회피했다.
어처구니없는 대사가 마음에 안 든 재경이 비키처럼 얼굴을 구겼다.
“이 자식, 매사에 그런 식이면 친구 없어진다? 나 화낼 거다?”
“흥, 친구는 무슨. 어제 내 동아리에는 놀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결국 본심을 밝힌 비키가 주둥이를 내빼며 꿍얼거렸다. 고작 그거 가지고 지금까지 삐졌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재경이 머리가 굳어서 바보처럼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렸다.
뇌가 정지한 렌의 끈질긴 시선이 부끄러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비키가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고 소리치려는 찰나 서빙을 하던 류제가 그들의 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여기서 멈춰 서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
“비키 이 짜식이 이상한 걸로 짜증 내잖아.”
“이…이상한 거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어쨌든 찻잔은 고맙게 됐어!”
류제 저 변태는 왜 항상 중요한 타이밍에 초를 치고 난리야. 비키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질 못해서 도망가는 길을 택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담. 창피해.
“왜 저런대?”
“나도 잘 몰라. 어제 자기 동아리 부스 안 들렀다고 화난 건가. 참나, 별걸 가지고 삐져.”
“흐음.”
류제가 어제 데이트 코스를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역사 연구 동아리는 렌이 재미없어할 것 같아서 넣지 않았지.
앞머리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뜬 류제가 비키의 뒷모습을 흘겼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척 당황한 거동이 어설펐다.
지는 걸 싫어하는 비키는 그릇을 정리하던 중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내가 왜 렌이 동아리에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거지? 끌고 가면 되잖아.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셀로니아 가문인 내가 머뭇거릴 필요가 뭐 있어?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고? 아, 이번 중간고사 시험이 좋겠다.
어울리지 않게 계략을 세워 차근차근 행동을 개시한 비키는 얌전히 때를 기다렸다. 자신의 동아리 활동 시간이 다가오자 비키는 교실로 돌아온 미나와 담당을 교체하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야, 렌 지미.”
계획대로 그녀는 피켓을 끌어안고 구석에 주저앉아 하품을 하는 사냥감에게 당당히 다가갔다. 렌이 비키의 기색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뭐야, 또 시비 거냐?”
“그러고 보니 곧 중간고사인데 렌 너 공부는 잘하고 있어? 또 1학기 꼴이 나면 큰일 날 텐데.”
“가…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넌 꼭 내가 재밌게 놀고 있으면 옆에서 초를 치더라. 나한테 뭘 협박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류제 앞에서는 그런 말 절대 하지 마.”
시험에 관련되면 잔소리 대마왕으로 뒤바뀌는 류제의 귀에 중간고사의 중이라는 글자라도 들어갔다간 당장 오늘 저녁부터 공부를 시킬지도 몰랐다. 재경이 황급히 입단속을 시켰다.
비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리본이 쫑긋거렸다. 그녀는 교활한 여우처럼 웃어 보이더니 재경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공부 안 하고 국사 시험 평균 넘기게 해줄까?”
“뭐? 어떻게?”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 렌이 호기심을 보이자 비키가 뭐라고 속삭이는 시늉을 하려다가 냅다 렌의 손목을 붙잡고 날랐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을 모르는 재경은 눈을 끔벅거리면서 질질 끌려갔다.
“뭐야? 뭔데? 왜 그래? 어디 가?”
“잔말 말고 따라와! 다 널 위한 거니까.”
“어? 렌, 어디 가?”
비키가 8반의 마스코트 여장 메이드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빙을 하던 학생들이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반장 비키의 돌발 행동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비키는 지금부터 쉬는 시간이기는 한데. 렌은 왜 데리고 간 거지?
“류제, 너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냐?”
“비키 님이 렌한테 뭐 부탁할 게 있는가 보네. 류제, 네가 가서 렌 데리고 돌아와 줘. 너무 늦지 말고. 기왕이면 메이드 카페 홍보도 부탁해.”
비키가 렌을 끌고 갔으니 그와 세트가 되어야 하는 류제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들이 류제의 등을 떠밀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류제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재경은 당황스러웠다. 비키가 자기 동아리 활동 시간에 땡땡이를 치고 어디를 가나 했더니 결국 도착한 곳이 키아나트리체 역사 연구 동아리였던 것이다.
뭔가 다른 거라도 있겠지라는 심정으로 부스 앞에 ‘역사 퀴즈로 놀아보는 부루마블’이라고 적힌 글자를 차근차근 읽은 재경은 국사 시험 점수를 올린다는 의미가 이런 뜻이었음을 감지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왜 내가 즐거운 수신제 날 여기까지 와서 재미없는 퀴즈를 풀어야 하는 거냐.”
“네 중간고사 구제를 위해서라고 했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과연. 그런 의미였구나.”
“끼야악!”
“으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닭살이 돋은 두 사람의 머리털이 바싹 솟았다. 재경은 이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놈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류제, 너 이 자식. 어느 틈에 따라온 거야?”
“비키가 널 데리고 가는 걸 봤거든. 혹시 도와줄 게 있나 해서. 기왕 가는 거 카페 홍보 좀 하고 오라더라고.”
“하여튼 이럴 때만 눈치 빠르기는.”
“별말씀을.”
하나도 안 고맙다. 비키는 매번 렌과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으면 은근슬쩍 방해 공작을 펼치는 류제가 얄미워서 날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곧 그게 의미 없는 행동이었음을 깨달은 그녀는 됐다며 셋이서 역사 동아리 부스로 입장했다.
“어? 너희들 왔구나. 오랜만이야. 비키 님에게 들었어. 주사위 만드는 거 도와줬다며?”
“아…안녕하세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어제 안 와서 시무룩할 뻔했지 뭐야.”
동글뱅이 두꺼운 안경을 쓴 문학소녀인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이 여장 메이드 재경의 손을 붙잡고 무척이나 좋아라 했다. 그녀는 간식도 많이 있다며 산처럼 쌓여있는 비스킷들을 재경의 메이드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들은 바가 없었던 류제가 물었다.
“주사위 만드는 걸 도와줬었다고?”
“그래, 저거 다 내가 만든 거야.”
몇 번을 던져도 어느 면이든 경우의 수가 같아야 하는 주사위는 무게중심과 동일한 면적이 중요했다. 수신제를 준비하는 동안 손재주가 좋은 재경이 비키의 부탁을 받고 역사 연구 동아리를 위해 완벽한 주사위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하아, 이 주사위를 헛되게 쓰지 않으려고 열심히 퀴즈 카드도 만들고 부스도 부루마블 판처럼 꾸며놨는데 어제도 그렇고 영 손님이 안 오는 거 있지. 역사 연구 동아리라 하니 사람들이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 오늘도 너희가 첫 손님이야.”
아이디어를 냈던 그녀는 부원 볼 낯이 없어서 눈물을 훔쳤다.
아직도 재경의 손을 붙잡고 있던 그녀는 필살기로 안경을 벗고 초롱초롱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배경에는 이유 모를 장미꽃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
“에, 그러니까…….”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모습에 재경은 약했다. 그녀가 훌쩍거리며 침묵 섞인 부탁을 강요하자 그는 난감한 듯 비키와 류제를 쳐다보았다. 세게 잡지도 않은 부장의 손은 뿌리치지 못한다.
어떻게 해달라는 표정을 그들에게 보내는 건 선택 미스인 듯했다. 왜 손을 안 뿌리치는 거야! 라고 똑같은 생각을 한 비키와 류제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거리다 동시에 말했다.
“알았으니까 그 손 놔요!”
찔려서 서로를 노려보던 그들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눈물을 흘리는 것도 연기였는지 알았다는 말에 부장은 활짝 웃으며 안경을 썼다. 노련하게 손님을 얻은 그녀는 싱글벙글 세 사람을 끌고 거대한 부루마블장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자 부원들이 뿌렸던 장미꽃을 쓸어서 다시 담는데 어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삼 대 삼으로 대결해 볼까? 우리를 이기면 저 하트 모양 로켓을 상품으로 줄게. 참고로 참가비용은 이래.”
부장이 냉큼 가격표를 들이밀었다. 비싼 건 아니지만 싼 것도 아니라 재경은 망설여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도 없고. 젠장, 눈물에 낚였다. 어쩐지 접점도 없는 삼류 악당한테 왜 친한 척하나 했다. 돈을 벌려고 했던 거였구만.
“아, 진짜. 가뜩이나 가난한데.”
재경이 양말 주머니에서 지갑 같지도 않은 구깃구깃한 봉투를 꺼냈다. 그러다 같이 있던 종이가 딸려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돈에 정신이 팔린 재경은 눈치채지 못했다.
양말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모양새에 그가 할머니와 함께 산 흔적을 여실히 발견하던 류제는 떨어진 쪽지를 주워주다 말고 호기심에 살짝 펼쳐 보았다. 돈은 누가 훔쳐갈까 그렇다지만 이런 종이는 왜 넣어놓은 거지?
“렌, 이거 떨어졌는데. 뭐야?”
“어? 우아악! 보…보면 안 돼!”
류제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을까 식겁한 재경이 쪽지를 낚아챘다. 적혀있던 글을 읽은 류제는 본 적 없는 알파벳이라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나라 말이야? 너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알았어? 너 제2외국어 텐마이어어잖아.”
“아…아무것도 아냐. 하…할머니가 쓰던 거라서 나도 잘 몰라.”
그 빠른 시간에 어떻게 글자를 또 봤는지. 의심이 깊어지기 전 재경이 어쭙잖게 변명했다.
할머니는 글 쓸 줄 몰랐지만 둘러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할머니, 변명거리로 써서 미안. 재경은 류제의 끈질긴 시선이 사라질 때까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모르는 척했다.
부장에게 돈을 지불한 세 사람은 역사 연구 동아리의 콘텐츠도 즐길 겸 렌에게 중간고사를 대비한 역사 공부를 시킨다는 명목하에 게임에 참가했다.
평균은 넘게 해준다는 비키의 말이 괜한 호기가 아니듯 역사 동아리의 부루마블 판은 제립학교의 교육과정 내에서 키아나트리체의 건립부터 5.22 토벌을 비롯한 최근에 벌어진 역사적인 일까지 모두 다룬 역작이었다.
“이걸로 날더러 공부라도 하라는 거야? 어떻게?”
“렌, 넌 몸 쓰는 건 잘하잖아. 몸을 쓰면 금방 외워지니 아주 효율적이지.”
“오. 비키, 머리 좀 썼는데? 하기야 곧 있으면 중간고사니까 1학기꼴 나지 않으려면 주의는 해야겠지. 잘해봐, 렌.”
“류제 너까지 동감하지 마. 으으, 진짜 자신 없는데.”
같은 시작 지점에 선 새로운 참가자 세 사람이 역사 동아리 부원이 서있는 반대편 시작 지점을 쳐다보았다. 그깟 퀴즈 대결을 빙자한 부루마블일 뿐인데 싶지 않았다.
“자, 그럼 게임 시작합니다. 모두 시작 지점 앞으로!”
손님이 와서 신이 난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이 확성기를 들고 떠들어댔다.
배정받은 부스 전체를 부루마블 판으로 만든 경기장에서 말이 된 비키와 류제와 재경이 한 팀이 되었다. 반대편에서 시작하는 적 팀보다 빠르게 팀원 모두 가운데에 있는 칸으로 가면 승리한다.
“우라얍!”
첫 번째 타자인 재경이 기묘한 기합과 함께 제 몸뚱이만 한 주사위를 굴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주사위는 점 세 개가 있는 면에서 멈추었다.
제일 먼저 시작 지점에서 나가 깡충깡충 세 걸음을 걸은 재경의 발밑에는 ‘역사 카드 뒤집기’ 칸이 있었다. 맞히지 못하면 두 칸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럼 문제! 건립 당시 키아나트리체 수도는?”
“아가타!”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재경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외쳤지만 가차 없이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나이엔힐리아였습니다. 키아나트리체의 수도가 아가타로 천도된 건 건국 287년이었습니다. 상식이지요. 렌의 말은 두 칸 뒤로 갑니다.”
“쳇.”
제일 처음 시작해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앞서있다고 좋아하던 재경이 투덜거리며 두 걸음을 물러났다. 이건 뭐 부루마블이 아니라 누가 누가 잘 맞히나 퀴즈 대결이잖아. 재경이 뚱한 얼굴로 퀴즈의 풀이가 적혀있는 책자를 펼쳤다.
아가타가 아니라고? 나이엔힐리아? 거기는 키아나트리체 대륙 저 아래 바닷가가 있는 곳인데. 아아, 맞다. 그때는 전선이 거기까지 밀렸다고 했었지.
“렌, 이 바보야. 저번 학기에 배운 내용이거든? 그걸 또 틀리면 어떻게 해?”
“잠시 까먹었던 거야. 흥, 다음번엔 꼭 맞힌다.”
재경이 틀렸던 부분을 확인했다. 역시 공부는 싫어해도 승부욕은 대단하다.
게임 하나 잘 골랐네. 어쩐지 마음이 통한 기분에 류제와 비키가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모르는 척했다. 짜증 나게 오늘따라 계속 눈이 마주친다.
“속전속결로 가겠습니다. 다음 턴, 역사 연구 부원들의 차례입니다. 주사위가 던져졌습니다! 숫자 5. 다섯 칸 앞으로. ‘문화’ 카드를 뒤집겠습니다. 마족과 인간의 싸움을 형상화한 민속놀이로 라우라 축제에서 마을 단위로 자주 하는 놀이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 아! 나 저거 아는데!”
아는 문제가 나왔지만 역사 동아리 팀의 문제라서 말하지도 못하고 재경이 발을 동동 굴렀다.
저 문제가 나 때 나왔어야 했는데! 으으, 짜증 나. 그것도 다섯 칸이나 앞서가다니. 아아악! 억울해!
“차전놀이.”
“정답입니다. 자, 다음 턴.”
나도 저런 쉬운 문제나 내주지. 재경이 유치하게 입을 모아 구시렁거렸다.
다음에는 비키 차례였다. 커다란 주사위를 넘겨받은 비키가 있는 힘껏 던져 굴렸다. 운이 나쁜지 주사위 숫자는 1을 가리켰다.
한 칸 앞으로 와 재경과 같은 칸에 선 비키는 좁아 죽겠는데 기어코 같은 칸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야, 내가 먼저 왔거든? 옆으로 좀 가.”
“규칙상 말은 이 칸 위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참을성 좀 키워, 이 바보야.”
“융통성 없기는.”
“우리 1학년 신입 부원을 위한 문제는~ 두구두구두구.”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다툼을 무시한 채 부장이 정치 카드를 뒤집었다.
“키아나트리체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며 건국 257년 마족 간의 전투로 초토(焦土)가 된 토지를 버리고 떠나는 국민들을 위해 토지제를 개편하는 데 큰 공헌을 하여 자작의 자리에 올랐던 가문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멜가로스크.”
“정답! 비키 님에게는 쉬운 문제였겠지요.”
부장이 칭찬하자 비키가 잘난 척 코끝을 치켜세우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귀족이라 별것 다 안다면서 재경이 못마땅하게 비키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계속해서 차례가 지나갔다. 자기가 아는 문제가 나오면 입이 근질근질해진 재경은 한시라도 빨리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막상 자기 차례가 돌아와도 전혀 생뚱맞은, 하나도 모르겠는 문제가 나와서 고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맨 나중에 말을 움직였던 류제도 재경을 지나쳐 쉽사리 앞서나가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스탈라 조약의 계기가 되었던 미노타와의 백년전쟁 당시 몰고로니 고원에서 벌어졌던 전투가 ‘투우 전쟁’이었잖아. ‘토우 전쟁’은 알레흐카이잔과 미노타의 전쟁이야!”
“어, 어어. 아, 맞다.”
“어휴. 투우 전쟁은 이번 시험 범위니까 잘 기억해 둬. 미노타의 상징이 소잖아. 우리나라가 고지를 점령해 달려오는 소를 막는다는 의미로 투우 전쟁이고 알레흐카이잔의 상징은 토끼라서 토우 전쟁이야. 알았어?”
“우이씨,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몰라서 못 맞혔으면서 말은 잘해.”
실컷 재경을 바보 취급한 비키는 재경이 책자를 펼치고 열심히 전쟁 이름을 되뇌자 만족스러워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아는 척을 했지만 재경은 결국엔 맨 꼴찌로 중앙 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마침내 게임이 끝나자 모두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못마땅해진 재경이 꿍얼거렸다.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게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사회 자리에서 내려온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이 상쾌하게 다가왔다.
“아쉽게 됐네. 후후, 귀여운 메이드님은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나 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바보라서 그래요.”
“시끄러. 그래도 몇 개는 맞혔잖아.”
쟁쟁한 역사 동아리 부원한테 내가 역사 지식으로 어떻게 이겨. 재경은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며 책자를 읽었다. 아는 것이 늘어서 지금이라면 전보다는 나은 결과를 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더닝 크루거 효과의 그래프의 두 번째 단계로, 착각으로 인해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일 뿐이라며 비키가 킥킥 웃었다.
부원을 이기지 못했지만 아차상으로 부장이 과자를 주섬주섬 챙겨주었다. 원래는 아무런 상품도 없지만 여장 메이드가 부스에서 큰 소리로 오답에 대한 열변을 토로한 덕분에 부스가 홍보가 되었는지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보 메이드가 혼자서만 역주행하다가 간신히 골인한 이후 다음 손님 차례가 되어서 자리에서 밀려난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치열한 대결을 보며 아는 답을 중얼거렸다.
재경은 계속 책자를 뒤져보다가 지쳤는지 에라 모르겠다 류제에게 짐을 떠넘겼다.
“오락은 무슨, 내내 공부만 하다가 나온 것 같구만. 아우, 머리 아파.”
“네가 상식이 있었으면 우리가 이겼을걸. 넌 분하지도 않니?”
“흥, 다음번에 한 번 더 하면 우리가 이길 거야.”
“그럼 한 번 더 할래?”
류제가 흔쾌히 제안했다.
류제 저 자식, 관심 없는 건 죽어도 안 하는 주제에 웬일이지. 안 할 거라는 걸 알고 괜히 센 척을 하던 재경은 질린 얼굴로 시선을 외면했다. 그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 까먹으며 말을 돌렸다.
“그…그러고 보니까 오늘 요리 동아리에서 대회를 한다고 했었는데. 차라리 거길 가는 게 어때?”
“너, 여기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네가 자신 있는 걸로 이기고 싶은 거지?”
뻔하디뻔한 생각을 들여다본 류제가 시큰둥하게 정곡을 찔렀다.
재경은 아니거든? 이라 하며 고개를 쑥 빼 들고 거들먹거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 오늘 자유 시간에 유네의 요리 대회에 가야지 비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뭐, 비키의 루트는 안 갈 거니까 상관없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다. 절대로 내가 자신 있으니까 양학하려고 그런 거 아니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재경이 변명하듯 수신제 2일 차 일정이 쓰인 책자를 펼쳐 요리 동아리 행사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조리법을 주고 대회를 한대. 만드는 디저트는 푸딩인가 봐. 푸딩 좋아하니까 비키 너도 참가해 보지 그래?”
“푸딩? 내…내가?”
“싫어? 아아. 참, 내가 나빴네. 비키 너 요리 겁나 못했지. 에이, 설마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푸딩 정도는… 하지? 아닌가?”
“당연하지! 푸딩 그깟 거 금방 만들어. 한천 넣고 휘휘 저으면 끝이잖아.”
지기 싫었던 비키가 거드름을 피우며 아는 척했다. 지식이 조금 있다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오, 어떻게 한천을 알지? 연구 좀 했나 보네.”
“푸딩 만드는 건 유네가 말해줘서 알고 있었어.”
“내가 먼저 가자고 말해줘서 좋지? 너 푸딩 좋아하잖아. 감사해라.”
“아…아니거든.”
“아니면 뭐야, 많이 먹기 대회처럼 몰래 참가하려고 했던 거냐? 이상한 가명 쓰고?”
“시끄러워. 아무리 나라도 학교에서는 그런 짓 안 해.”
얼굴이 새빨개진 비키가 앞장서 요리 동아리 부스를 찾았다.
삐걱삐걱 로봇처럼 걸어가는 모양새가 귀족의 교양과 어긋났다. 재경은 푸딩 좋아하는 비키 놀리기에 맛이 들었다.
비키를 놀려대는 렌을 지켜보던 류제는 답답한 속내를 눌렀다. 렌은 비키의 얼굴이 달아오른 이유가 푸딩 좋아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하여튼 비키도 류제 너도 빨리 와!”
“정말 출전하게?”
“렌 네가 가자고 해서 가는 거다?”
“젠 척하지 말고 오기나 해.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류제는 어제의 나라카산 자생 식물 점액 건도 있어서 요리 동아리 부장을 보기가 꺼림칙했지만 렌이 신나서 끌고 가니 거부할 수 없었다.
요리 동아리 부스에 온 그들은 역사 연구 동아리에 비견되는 요리 동아리 부스의 규모에 다시금 놀랐다. 어제 봤던 레스토랑은 치워지고 거대한 요리 대회장으로 뒤바뀌었는데 대회를 구경하는 손님들도 몰려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다음 타임에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가판대에서 참가 용지 세 장을 뽑아 이름을 적던 세 사람은 뒤늦게 돌아온 선배가 안 된다고 하자 무슨 일인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난감해하며 팔짱을 끼었다.
“미안한데 지금 두 사람밖에 자리가 없네. 오후에 자리가 나는데 나중에 참가할래?”
“에엑, 정말요?”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올까?”
류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경을 쳐다보았다.
나중? 시간이 지금밖에 없을 텐데? 재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 류제가 수신제 2일 차 자유 시간 때 유네의 동아리를 스케줄에 넣으면 호감도 이벤트의 일환으로 비키와 요리 대결 미니 게임을 할 수가 있다. 그때는 당연히 삼류 악당인 그가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세 사람이라고 거부당하지 않는다.
“어…어어.”
스토리를 따르지 않는 렌 지미 때문에 또다시 호감도 이벤트가 실패할 위기에 봉착했다. 이제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는 필수가 아니지만 심장이 조이는 듯해 참을 수 없었던 재경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차…차라리 나 빼고 비키 너랑 류제가 나가지 그래?!”
“뭐? 내가 왜 이런 변태랑. 기왕이면 너랑 붙고 싶단 말야.”
요리 하면 렌이니까 렌과 같이 대회에 나갈 것이라 생각하던 비키가 거세게 반발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비키의 승부욕이 재경을 향해있다. 재경은 떠올려야만 했다. 강제로 참가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비키의 생각을 바꿔서 스스로 참가하게 만드는 거야. 나는 할 수 있다.
3초간의 정적을 유지한 재경이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간사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비키를 다른 방향으로… 류제에게 승부욕을 보이도록 해야 해.
“뭐어어야. 비키 너 설마 류제한테 지는 게 무서운 거야?”
17년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껄렁껄렁 양아치 표정이 비키를 도발했다. 잘할 줄 아는 게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당연 이 표정에 낚인 비키가 울컥해서 반박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너야말로 도망가지 말고 나랑 정정당당히 붙어!”
“에이, 비키 네 요리 실력으로는 류제를 이기는 것도 무리인데 나랑 붙으면 어련하겠냐. 류제를 이기고 오면 생각해 볼게.”
“저 변태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거든?!”
“그럼 증명해 봐.”
어떠냐. 류제를 향한 비키의 승부욕을 자극해서 붙게 하는 작전이다. 이거라면 괜찮겠지?
창백해진 렌이 난데없이 비키에게 시비를 걸자 저게 무슨 심정일지 류제는 오리무중이었다.
“변태라는 말 좀 그만 우려먹어. 나보다는 렌 네가 비키랑… 잠깐, 아니다.”
어차피 비키에게 할 말도 있고, 렌이 없어야 비키가 속내를 편하게 말할 테니 비키와 붙어도 상관없으려나.
류제가 싫다고 반발하지 않자 예정이 빗나간 비키가 진심으로 싫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날 그렇게 봐? 뭐가 아닌데?”
“요즘에 수신제 준비한다고 기간트리카 대결도 제대로 못 했는데 오랜만에 붙어볼래? 하기야 렌 말대로 비키의 요리 실력으로는 푸딩도 무리겠지만. 결과가 좀 시시하려나.”
“뭐라고? 나도 이제는 요리 실력 많이 늘었거든? 자만하지 마!”
재경의 말에 흔들리던 호승심이 류제 덕분에 쉽게 불타올랐다.
그런 연유로 재경의 참가 종이만 빼고 비키와 류제 두 사람만 요리 동아리 주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선배에게 참가비를 낸 두 사람은 언짢은 얼굴로 각자의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왜 이런 대회마다 너랑 얽히는 기분이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참가자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다 ‘기왕이면 렌이랑 같이 나가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서로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아까부터 서로에게서 느껴지던 기묘한 대결 심리를 여기에서 풀어낼 셈이다.
두 사람은 대회 시작 전 요리 동아리 부원에게 대회 주의 사항을 들으러 갔다. 관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기로 한 재경은 잘하라며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비키와 류제는 서로를 노려보다 걸음을 빨리하며 벌써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그가 빠지자 이야기가 차질 없이 돌아가니 기분이 묘해진 재경이 팔짱을 껴서 뒤통수를 기대었다. 다리를 쩍 벌려 선 여장한 메이드 혼자서 생각에 빠져있노라니 누군가가 재경의 허리를 툭툭 쳤다.
“렌 군? 여기서 뭐 해?”
“깜짝아. 유네?”
“안녕. 카페는 어쩌고?”
“도망쳤지 뭐. 넌 동아리 행사 도와주는 중?”
“으응, 오늘은 공연도 있고 부스가 금방 끝나잖아. 류제 군하고 비키 양이랑 있었던 거야? 오늘은 레스토랑 운영 안 하는데.”
메이드복에서 요리 동아리 접객복으로 갈아입은 유네는 숙녀들의 화장 솜씨로 인해서 귀여운 얼굴이 더 살아났다. 성숙하지 않은 어린애 같던 외모가 좀 더 어른에 다가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유네의 얼굴을 감상하던 재경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워졌다.
“둘이 요리 대회 나간대.”
“어? 렌 군은 안 나가? 요리 대회 하면 렌 군이잖아.”
“참가자가 다 찼나 봐. 어쩔 수 없지.”
“에에, 아쉽다. 렌 군이라면 분명 1등 했을 텐데.”
“과대평가하기는. 그리고 원래 재야의 고수는 조용한 법이야.”
재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렌과 우연히 마주쳤다 싶더니 이것이 기회인지 주변에 알짱알짱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네는 오늘을 위해 몰래 준비한 쪽지를 재경의 호주머니에 살짝 넣으려고 했다.
두근두근 들키지 않을까 심장이 벌렁거리는 그 순간에 누군가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꼬마야, 여기는 뭘 하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니?”
“으힉!”
음흉한 짓을 하려다가 들킨 듯 유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급히 쪽지를 숨긴 유네가 말을 건 사람을 살폈다. 통통한 손에 주렁주렁 반지를 매달고 과한 모자를 쓴 어떤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르타 가문의 촉이 말하길 아무리 봐도 수상쩍었다. 유네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저한테 물어보신 건가요?”
“그럼 누구한테 물어보니. 너 여기 관계자 아니야?”
그녀가 다른 요리 동아리 부원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유네의 유니폼을 가리켰다.
억지로 착한 척하는 목소리에 유네는 이상한 혐오감이 느껴졌다. 외부인이라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하다.
“뭐야?”
호감도 이벤트를 생각하느라 의식이 다른 곳에 있던 재경이 뒤를 돌아보자 일러스트에서 툭 튀어나온 것같이 탐욕스럽고 기름진 얼굴이 둥둥 떠있었다. 재경도 놀라 유네를 뒤로 물리며 그녀를 경계했다.
세상에, 저 기름진 사람은 유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에서 벌어질 사건에 나올 흑막인데.
“…가까이 오지 마세요. 여기에 백장미 부대 군인이 있는 건 알죠?”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저 악당이 나올 때가 된 거구나. 유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를 결정할 악당. 제기랄, 한창 재미있게 즐기고 있는데 초를 치기는.
그 사실을 모르는 유네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외부인을 노려보는 렌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유네도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대치 상황에 침을 꿀꺽 삼켰다.
“허?”
아무것도 모르는 온실 속 꼬마인 줄 알았더니 자신을 알아보는 낌새에 그녀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것을 렌이 날을 세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 줄 알고 유네가 어쩔 줄 몰라 속삭였다.
“레…렌 군? 저 사람은 그냥 우리 부스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그런 것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마.”
“시끄러. 유네, 넌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엄멈머. 참 나, 별꼴이야. 쥐똥만 한 게 꼴에 여자 친구라고 챙겨주는 거니? 내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 기분 나빠.”
포동포동 살이 오른 뺨을 출렁거리던 그녀가 화려한 깃이 달린 모자 아래로 독살스러운 눈빛을 빛냈다. 눈가를 실룩거리던 그녀는 주제에 맞지 않는 높은 굽을 또각거리며 뒤뚱뒤뚱 가버렸다.
유네는 손님을 경계한 렌도 그렇고 그녀의 태도도 이상해서 긴장이 되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안도한 재경이 비틀거리며 식은땀을 닦았다.
“렌 군, 아는 사람이야?”
“…아무것도 아냐. 넌 지금은 몰라도 돼.”
영문을 몰라 하는 유네에게 ‘저 사람 엄청나게 위험한 사람이니까 조심해.’라고 재경은 말하지 못했다.
깜짝 놀라서 경계하기는 했지만 유네의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네에게 그녀의 정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힌트를 줬다가는 저번처럼 이벤트에 큰 차질이 생겨버릴지도 몰랐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0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