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5)
홍보 피켓을 든 집사와 메이드가 학교를 유랑했다. 목적지는 요리 동아리가 세운 레스토랑 부스. 팸플릿을 살피며 쫄랑쫄랑 걷는 그들은 괴짜들투성이인 제립학교 교내에서도 눈에 띄었다.
앞머리를 내려 수려하고 기품 있는 얼굴이 가려졌지만 학교를 돌아다니는 잘생긴 집사의 소문을 들은 손님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어지간한 비밀주의자보다 더한 검은 천막 아래에 무슨 형상이 숨어있을까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냈다.
주인공 류제가 블랙홀처럼 관심을 흡수하자 재경은 렌 지미의 공기 같은 존재감이 너무해졌다. 이상한 차림까지 해줬는데 사람들은 매번 류제만 보니 수지타산이 안 맞다.
차라리 아까처럼 흘깃거리는 게 낫지. 앞머리를 내린 류제가 더 시선을 모으는 이유는 뭘까. 역시 미연시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얼굴 반절을 가리는 앞머리가 뭐라도 돼? 나도 앞머리나 길러볼까.
“시간이 이래서 줄 서는 사람도 없네. 딱 좋을 때야.”
“고픈 걸 넘어서 아사 직전이다, 짜샤.”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은 게 아닐까 재경이 홀쭉 들어간 배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이라면 신발도 와작와작 맛있게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와. 류제, 이거 봐. 진짜 짱이다. 장난 아냐.”
서두르던 재경이 냉큼 부스 천막을 걷었다가 감탄에 빠졌다. 요리 동아리 부스는 진짜 레스토랑처럼 웅장했다.
수신제를 위해서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건지 테이블도 평범한 책상이 아닌 고급 원목 나무로 제작했고, 화려한 자수가 매력적인 식탁보와 도금된 촛대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휘장을 뒤덮는 태피스트리들과 빨간 카펫도 멋졌다.
고작해야 고등학생들 소꿉장난일 줄 알았는데 너무 본격적이라 이런 장소에 서툰 재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웬일이래. 저번에 유네 여장 대회 상품으로 받았던 레스토랑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내가 이런 부티 나는 곳을 평생에 두 번이나 와볼 수 있을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요리 동아리는 동아리별 서바이벌 대회에서 최장 시간 생존한 경력이 다수 있대. 그래서 나라에서도 지원금이 꽤 나오는 데다가 아이디어 좋은 보급 식량을 개발하기도 해서 선배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나 봐. 팸플릿에는 그렇게 쓰여있어. 그래서 재정이 독보적인 것 같아.”
“하기야 어딜 가던 먹을 건 중요하지. 똑같이 싸워도 맛있는 걸 먹어야 힘이 나는걸.”
재경이 오늘 아침밥으로 나온 화려한 급식을 떠올렸다. 매일 다른 메뉴에 건강 밸런스를 맞춘 요리가 스무 개가 넘게 뷔페식으로 진열되는데 재경이 경험한 그 어떤 급식과 가히 비할 바 없을 만큼 뛰어났다.
덕분에 피부에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것 아니겠나. 빙의한 이후로 어울리지 않는 호강만 하는 것 같다. 할머니, 나 개쩔지 않아?
이 레스토랑에는 무슨 음식이 있을까 기대하는 재경은 빈 테이블에 제일 먼저 엉덩이를 붙였다.
“어머나, 지미 군 아닌가요.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류제를 부르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어떤 어른이 알은척을 했다. 재경이 깜짝 놀라 털을 바싹 세웠다. 확인해 보니 좀 전에 복도에서 인사했었던 유네의 부모님이었다.
“어, 어? 아…안녕…하세요.”
재경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맞다. 아까 팔씨름 대회 끝나고 여장 아저씨들한테서 도망치고 나서 유네네 부모님하고 우연히 만났었지. 그럼 당연히 요리 동아리 부스로 오면 그들과 마주치게 된다. 깜박하고 있었다.
“또 만났네요. 저희도 이제 막 주문했는데 기왕 이렇게 만난 거 합석을 하면 어떨까요?”
“조…좋아요. 괜찮지, 류제?”
“뭐? 렌, 너야말로 괜찮아?”
“나쁠 게 뭐 있어?”
“그렇긴 하지만…….”
낯선 사람을 어려워하는 렌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자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던 류제는 난감했다. 유네가 보는 앞에서 렌과 단둘이 레스토랑 식사를 즐기며 소소한 독점욕을 배출할 요량이었지만 눈치 없는 당사자 때문에 무마될 위기다.
그것도 하필이면 유네의 부모님과 합석하는 건 뭔가. 아까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얼굴도 봤는데 대접해 주고 싶었거든요. 신리 군은 앞머리를 내렸네요. 멋졌는데 아쉽습니다. 호호.”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보다 유네는 만나신 건가요?”
유네네 부모님은 유네를 만나러 8반 교실로 향했었는데 요리 동아리의 부스에서 다시 만나다니 우연이 과했다.
반에서 유네를 못 만나 여기로 온 건가. 류제가 앞머리 아래로 울컥한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땐 분명 유네가 교실에 있을 시간이었는데?
“물론 만났지요. 지미 군과 비슷한 메이드복을 입고 친구들하고 노닥거리고 있더군요. 그 애의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편지에 쓰여있던 것처럼 학교생활을 잘 해내고 있어 안심이 됩니다. 이것도 다 친구분들 덕분이겠죠.”
물론 이 우연도 스토리대로인지라 무너지지 않은 땅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심정인 재경은 안도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유네가 잘 극복해 낸걸요.”
손을 내저은 류제가 억지로 웃었다. 예의상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을 류제라고 치부한 유네의 엄마는 류제가 참 바르게 자랐다고 착각했다.
“분명 두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겁니다. 아니라면 요리라고는 소꿉놀이 수준밖에 모르는 애가 요리 동아리에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자, 당신도 어서 말해요.”
“어흠, 저들 말대로 내 딸이 잘 해낸 걸 왜…….”
“당신도 참. 당신 때문에 유네가 쓸데없이 남장을 했던 거였잖아요!”
그녀가 날카롭게 속삭이자 유네의 아빠는 아무런 대꾸를 못 했다. 그는 단지 제 딸이 인간관계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그 대안을 마련해 준 것일 뿐인데 그게 쓸데없었다는 말을 들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를 눈치챈 류제가 적당히 그를 옹호했다.
“그래도 유네가 남장을 했기에 비로소 우리와 변함없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잖아요. 저는 남장이 나빴다고 생각 안 합니다.”
“흥, 거봐. 잘 아네.”
만화에나 나올 W 모양 콧수염을 유네의 아빠가 기고만장하게 들썩거렸다.
“렌 군, 류제 군! 와줬구나. 세상에, 우리 부모님과는 어쩐 일이야.”
학급 행사 할당 시간이 지나 동아리로 돌아와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유네가 부모님을 위한 요리를 나르다가 친구들을 발견하고 설레발을 떨었다. 반에서 입었던 메이드복은 벗고 요리 동아리에서 발주한 앞치마와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유네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엄마가 억지를 부린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니. 우연히 만난 거란다. 신리 군과 지미 군도 메뉴를 골라주세요. 식사는 제가 사드릴게요.”
“어…엄마아… 둘 다 부담스러워할 거야.”
“이 정도는 괜찮잖니, 오성급 호텔 식사도 아니고.”
“맞아. 아빠는 배짱도 없는 놈들은 못 믿는다.”
부부가 쌍으로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 류제와 재경은 눈치를 보며 메뉴판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 유네가 요리를 테이블 위에 서빙했다. 부장이 알려준 요리 배치를 거꾸로 둔 유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부모님의 평가를 기다렸다.
“으흐흑… 아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우리 유네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다니.”
“내가 요리한 건 아냐, 아빠. 나는 서빙만 하는걸.”
“우리 유네가 날라준 요리를 먹다니 아빠는 정말 행복하다.”
잽싸게 말을 바꾼 유네의 아빠가 훌쩍거렸다.
재경은 유네가 제 손으로 부모님에게 요리를 날라준 적이 없을 정도로 곱게 자랐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런 유네와 이어질 류제를 재경이 부러움의 눈초리로 흘겼다.
나도 반드시 유네네 집 창고에 기어들어 살고 말 테다. 입을 비죽거리던 재경은 메뉴판에 적힌 요리의 가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무슨 요리가 이렇게 비싸?”
“과연 유네가 소속한 동아리네.”
류제도 만만찮은 가격대를 보며 기함을 토했다. 물론 저분들은 이런 푼돈은 괘념치 않겠지만 나라에서 용돈을 받는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요리가 비싼 이유는 아무래도 작년까지 외부인들에게 개방하지 않았던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축제라는 점, 맛을 보장되는 요리 동아리라는 점, 요리하는 사람이 어빌리터라는 점 등을 종합해 과도한 가격이 책정된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냐며 많이들 방문했는지 계산대 옆에 주문서가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었다.
메뉴도 8반의 메이드 카페는 소꿉놀이로 보일 만큼 전문적이었다. 요리할 때 무슨 어빌리티를 사용하는지도 적혀있는 걸 보니 명백하게 어빌리티를 보러 온 외부인을 노렸다.
때마침 오픈된 주방에서 요란스러운 불길이 치솟았다. 화염계 어빌리티를 가진 누군가의 쇼맨십에 손님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메뉴판을 살피는 렌을 남몰래 쳐다본 유네의 몸이 들썩거렸다. 어느 정도 가격대를 주문해야 하는지 도통 감을 못 잡는 두 사람을 위해 그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추천하는 음식은 스테이크 종류나, 딥 피자, 바질 파스타야. 부장 선배의 주력 메뉴는 볶음밥인데 양배추 게살 볶음밥이 나는 제일 좋았어.”
“그…그럼 나는 그 볶음밥으로 할래.”
“나는 스테이크… 레어로.”
추천을 받은 재경과 류제가 차례로 메뉴를 선정했다. 유네가 골라준 거니 유네네 부모님도 불만 없을 거다.
유네는 금방 가져다주겠다며 주문지에 테이블 번호와 추가 메뉴를 표시했다. 긴장하는 두 사람을 보는 시선이 음흉하다. 그런 독점욕 가득한 유네를 처음 본 그녀의 엄마가 채신머리없이 물었다.
“유네, 혹시 신리 군과 사귀고 있니?”
“에……? 뭐어?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네?!”
어이없는 질문에 기절초풍한 유네와 류제가 차례로 부정했다. 경악하는 두 사람이 혹시 찔린 건가 오해한 유네의 엄마가 호호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머,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미안하네요, 신리 군. 모르는 척해주는 게 나았을까요?”
“오해예요! 절대 아닙니다!”
“어…엄마!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그래? 대체 어디서 그런 확신이 든 건지 모르겠어!”
“맞아요, 여보. 우리 유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저런…저런…….”
유네의 아빠가 류제에게 손가락질을 하다 말을 차마 못 이었다.
반박할 게 없다. 유네와 1학기 때부터 같은 방을 썼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을 정도로 바른 사생활을 가진 데다가 미들 스쿨 내내 왕따를 당했던 유네와 친구가 되어주었고 여자라고 밝혀졌어도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키도 크고 얼굴도 수려하고 똑똑하고.
유네 말로는 대단한 어빌리티를 가져 출세 가도도 단단히 잡혀있다는데 그런 자가 남자 친구라니 너무 완벽해서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딸을 가진 아빠의 눈에 모든 남자가 늑대로 보이기 마련이다. 과부하가 걸린 그는 머리에서 연기가 올라올 듯 얼굴이 다 시뻘게졌다.
“당신은 무조건 반대하지 말아요. 신리 군이라면 모자랄 게 뭐 있나요. 유네야, 엄마는 응원한단다. 선생님들이 지적하면 엄마에게 편지를 부치렴.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게.”
“정말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류제 군은 그냥 친구라고!”
“어머, 정말? 거짓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응원해 준다니까?”
“네, 정말로 유네랑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렌, 너도 무슨 말이라도 해봐!”
류제가 재경의 팔을 붙들고 닦달했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히죽거리고 있는 렌이 너무했다.
히로인으로서 유네를 가장 밀어주고 있는 재경은 그게 뭐 어쨌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류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엄마도 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류제 군이 아니라… 읏…….”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침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유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그녀의 부모는 이미 사실을 짐작했다. 유네의 엄마의 얼굴이 간사해졌고 덩달아 유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네의 눈동자가 절로 렌을 향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렌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에이. 유네, 그렇게 막 부정하면 재미없지. 우리 류제가 왜? 최고의 신랑감 아니냐?”
연애 세포가 죽다 못해 생성되지도 못한 재경은 류제의 어깨에 손을 두른 채 하하 웃으며 비수를 꽂았다. 분위기가 싸해지자 말을 잘못했나 재경이 당황해서 웃는 낯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어… 왜? 나 또 뭐 잘못했어?”
렌이 상처받기 전에 유네가 애써 분위기를 풀었다.
“아냐. 류…류제 군이 잘 생기긴 했지. 헤헤. 나는 주문 넣으러 가야 해서 이만 갈게! 조금만 기다리면 곧 가져다줄게.”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유네의 얼굴이 아련했다. 내일 고백하려고 했는데 자신에게 전혀 연애 감정이 없다는 선고를 해버린 렌에, 그걸 들어버린 부모님을 보기 민망해서 유네가 주문서를 들고 도망갔다. 등을 돌린 그녀의 표정은 잔뜩 상처 입었다.
“어후, 내가, 어휴, 정말!”
딸이 합격선에 간당간당한 놈을 두고 그 옆에 영 모자라 보이는 놈을 좋아한다는데 그자는 딸에게 아무런 이성적 호감이 없으니 유네의 아빠는 자존심이 상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속이 답답해진 그는 찬물을 들이켰다가 혼자서 원맨쇼를 했다.
“왜…왜 그러지? 류제, 역시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유네의 부모님의 표정이 굳자 자신이 서투른 바람에 또 실수한 건가 재경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류제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부모 자식 간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감정이 있나 봐.”
“흐음… 그런 건가…….”
재경은 아직도 세간에는 자신이 모르는 것들이 있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네가 류제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전혀 풀지 않은 채다.
렌에게 몰래 속삭이다 유네의 부모님과 눈이 마주친 류제는 무해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이 분위기 어쩐다.
다행히 주방으로 간 유네가 주문을 넣자마자 요리 동아리의 부장과 부원들이 테이블에 들이닥쳐 어색함이 깨졌다.
“오랜만이구나, 우리 후배들아!”
요리사 모자를 쓴 선배들이 대거 등장하며 뱉는 위압감에 몸이 절로 주춤거렸다.
“이래선 안 되지, 류제 신리. 요리 동아리를 방문했으면 내게 인사를 해야 하거늘.”
음식이 나올 때까지 숨 막히는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차라리 남의 참견이 솔깃했다. 유네의 엄마가 그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어머머. 무슨 일이시죠?”
“우리 동아리의 부원, 유네 나르타 양의 부모님이 오셨다고 해서 인사차 들렀습니다. 요리 동아리 부원의 가족은 저의 가족이기도 한 법!”
“가족이라면 혜택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요리부 부장이 류제를 보며 코피를 슥 닦았다.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유네가 그 뒤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주문서를 전달해 주러 주방에 갔던 유네는 부모님과 친구가 찾아와 긴장된다고 말했다가 부장에게 불씨를 붙여버리고 말았다.
내가 뭐 잘못했나?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안 되는 건가? 나 이제 찍힌 건가?
요리 동아리 선배들의 목적은 뻔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잘생긴 남자를 사랑하는 부원들인지라 유네를 찾아온 친구 중 한 명인 류제를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물며 부원의 부모 앞이라도 말이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찾아온 선배들은 손에는 빈 접시가 들렸다. 그네들은 세계 평화를 지키는 전대라도 되는 양 포즈를 취하더니 손에 위생용 장갑을 꼈다.
“우리 요리 동아리 최정예 부원들의 어빌리티 요리 쇼를 보여드립니다.”
“어빌리티 요리 쇼?”
“후후. 잘 보거라, 류제 신리. 이게 바로 네가 입부하지 않은 요리 동아리의 저력이다. 얘들아, 가자!”
그녀들은 그 말과 동시에 뒤에서 트레이로 딸려 오는 재료들을 후르르 던지더니 요리부 부장이 ‘토막’ 어빌리티로 잘게 다져서 웍 안에 넣었다. 거기에 화려하게 기름을 붓고 화염 계열 어빌리티로 재료를 익혔다.
신선한 소고기도 불길로 겉 부분만 익혀서 접시에 올려 윤기 나는 소스를 뿌렸다.
접시에 재료들이 저절로 안착하는데 옆에서 염력 계열 어빌리터 선배가 초특급 집중력으로 잘게 부서진 재료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연출하고 있었다.
“으어억… 이…이게 뭐야.”
미쳐버리겠네. 주인공 앞이라고 가지가지 한다.
재경은 이 쓸데없이 멋진 장면을 보면서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빌리티를 이런 목적으로 써도 되려나 부끄러웠다. 세라 쌤은 남발하지 말라고 했는데.
“‘화염’ 계열 어빌리터는 비키 말고 처음 봤어.”
“드문 어빌리티는 아니니 말이지.”
류제는 손에서 발현되는 불을 보고 비키가 떠올랐다. 화염계 어빌리터는 1학년 중에도 열 손가락 정도 있지만 류제에게 있어서 타오르는 화염은 그녀의 상징이었다. 강렬한 붉은 머리칼과 지기 싫어하는 불꽃 같은 성격의 소유자.
비키도 유네처럼 렌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지. 눈동자에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 아래로 류제가 해서는 안 되는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와. 멋지다. 중요한 손님이 왔나 봐.”
“저걸 받으려면 특별 주문해야 하나?”
부스에 온 손님들이 화려한 어빌리티 요리 쇼를 샅샅이 훑듯 감상했다.
부장은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전(前) 식물 동아리 부장에게서 얻어냈던 나라카 자생 식물의 점액이 담긴 비밀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이 약병 속 액체를 사악하게 살피더니 뚜껑을 열어 레어 스테이크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수상한 낌새에 류제가 언짢게 물었다.
“그건 뭔가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조미료지.”
그녀가 음흉하게 웃었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 끝에 도출된 사랑을 느낄 정도의 정량이 요리에 들어갔다.
플레이팅까지 완벽하게 끝낸 그녀가 두 요리를, 특히나 레어 스테이크를 류제 앞에 강조하며 내려놓았다.
“미노타산 특급 소고기와 산뜻하고 풍미 깊은 소스를 가미한 스테이크입니다. 나이엔힐리아에서 어렵게 구한 코코넛크랩의 달콤한 속살이 아름다운 볶음밥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손님.”
“벌써 끝난 건가요? 아쉬워라. 유네도 이제 저런 걸 할 수 있는 거니?”
“그…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 선배들이 대단한 거야.”
썩어도 준치라고 3학년의 어빌리티 컨트롤 능력을 1학년과 비교하다니. 유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선배들 모두 척도가 평범하다고 했는데 얼마나 연습했으면 이렇게 합이 잘 맞을까. 신기하다.
나도 졸업할 때쯤엔 가능할까. 비키 양과의 어빌리티 조합도 좋지만 기왕이면 렌 군하고 같이… 렌 군의 어빌리티도 나랑 잘 맞았으면 좋겠다.
유네가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동안 유네의 엄마는 류제 몫의 레어 스테이크를 흥미로워했다. 가지고 싶은 것을 꼭 갖고야 마는 그녀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였다.
한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기로 유명한 나르타 상단 경영자라 진귀한 것에 욕심이 많은 그녀는 어빌리티로 만든 요리가 무척 가지고 싶었다.
아직 손대지 않은 그녀의 요리도 레어 스테이크였지만 그녀는 당장 저것을 원했다. 쇼를 구경한 손님들이 원하는 진귀한 경험을 그녀가 독점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리 군, 미안한데 제 요리와 당신의 스테이크를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그 요리를 아무래도 꼭 먹어보고 싶어서요. 이 고기가 더 좋은 부위라 훨씬 맛있을 겁니다.”
“저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어차피 식사를 사는 것은 유네의 부모님이니 류제는 흔쾌히 수락했다. 말은 안 했어도 요리 동아리 부장이 넣은 이상한 향신료가 신경 쓰이고.
먹고 죽진 않겠지만 영 탐탁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생명에 위협이 없으면 그걸 유네의 엄마가 대신 먹어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류제가 접시를 들어 친히 요리를 바꾸어주었다.
“으윽, 마담의 요리도 어빌리티로 만든 요리입니다.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맛이라면 사…상관은 없을 텐데요. 게다가 이건 미노타산 소고기라고요. 이게 더 좋은 고기예요.”
“호호, 그런가요? 그럼 신리 군, 미노타산 소고기는 저희 집에 오시면 전속 요리사로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르타 상단은 미노타와도 거래를 하거든요. 끈질겨서 미안합니다. 전 제가 한번 꽂힌 건 가지고 마는 성격이라서요.”
욕심꾸러기인 그녀의 소유욕을 잘 아는 유네의 아빠도 그럼그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래서 냉큼 유네의 엄마에게 잡아먹히고 만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빗나가자 요리 동아리 부장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안 돼, 류제 신리에게 먹이려고 했단 말이야! 점액을 그 애한테서 얼마를 주고 구매했는데!
“여보, 나도 한 입만 주세요.”
“이이도 참. 아아~”
닭살 커플처럼 음식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그들은 한창 연애할 때처럼 풋풋했다. 소스에 섞인 점액이 그들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요리 동아리 부장이 분한 듯 체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음 기회를 노린다.
“크흑, 즐거운 식사 되시길. 얘들아, 가자.”
“엄마 아빠, 맛있게 먹어요. 류제 군도 렌 군도 맛있게 먹어. 헤헤.”
애도 아니고 렌이 눈치가 없다고 언제까지 꿍해 있을 수 없었던 유네가 파이팅을 외쳤다. 요리부 부장도 뒤를 돌아보며 이번에도 낚이지 않은 류제를 몰래 노려보았다.
류제는 오싹한 시선에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몸을 움찔거렸다. 저 사람은 도대체 나한테 뭘 먹이려고 그런 거야?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류제가 고기에 칼질하자 재경이 고기가 먹고 싶다며 레어 스테이크의 절반을 자신의 볶음밥과 멋대로 교환하였다.
렌과 사이좋게 음식을 나누어 식사하던 류제는 유네의 부모님의 애정 행각을 보며 저것이 부부간의 그것이구나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점점 그들의 손길이 농밀해지자 류제가 음식을 먹다 말고 잠시 속이 답답해져 물을 찾았다.
어째 두 사람 모두 술이라도 마신 양 상태가 이상해졌다. 식사가 끝날 때쯤이 되니 그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몸을 안절부절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카운터로 계산을 하러 온 그들은 허리를 끌어안고 취한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후후. 유네야, 음식이 정말… 황홀하구나. 엑스터시가 느껴져.”
“어흠,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군. 아주 아름다운 맛이야. 우리 사랑스러운 자기야를 처음 만난 날인 것 같은걸.”
“그래요?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다.”
지불한 금액의 거스름돈은 유네가 직접 거슬러 주었다. 잔돈을 계산하는 딸의 오밀조밀한 손길에 부모로서 호들갑을 떨 법도 하건만 유네의 부모는 다른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했다.
“후후… 저희는… 지금부터… 할 일이 생겨서…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어…엄마, 아빠. 근데 남들 앞에서는 너무 그러지 마. 여긴 집이 아니라고.”
“왜애. 후후. 유네야, 엄마는 네가 누구와 사귀든 항상 응원한단다. 나르타 가문은 원하는 걸 쟁취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하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지?”
“어험,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아라. 하지만 아빠는 남자 친구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구나.”
“두 사람도 참. 그런 건 내…내가 알아서 해!”
사람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과도한 애정 행각에 유네의 얼굴이 절로 새빨개졌다. 오늘따라 신혼 때처럼 불타오르는 유네의 엄마가 점잖게 있으려는 유네의 아빠의 등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재경은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개같이 구는 그들의 행각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류제에게 속삭였다.
“왜 저러시지? 화장실 가고 싶으시나?”
“그러게.”
류제는 그 약병에 든 액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요리 동아리 부장이 넣은 약은 그때 있었던 나라카산 자생 식물의 점액임이 틀림없었다.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요리부장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걸 음식에 넣었다고? 그것도 내가 먹을? 세상에 소름이 돋는다.
“안녕히 가십시오. 좋은 식사 하셨기를.”
요리 동아리 부장이 직접 나와 식사를 마친 그들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은 지금은 식사 소감보다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지만 그 원흉인 부장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얼굴에 철판이 적어도 다섯 장은 깔렸을 거다.
류제도 재경의 허리를 누르며 유네의 부모님께 인사를 전했다.
“저도 덕분에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앞으로도 우리 유네랑 친하게 지내주세요. 유네야, 꼭 편지하렴.”
“으으, 알았으니까 어서 가세요.”
이 이상 사람들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리려고. 유네가 억지로 두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종종거리며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를 따라 마차로 향했다.
렌이 유네와 동아리 이야기 하고 있는 틈을 타 류제가 요리부 부원들에게 따졌다.
“아무리 그래도 요리에 그런 걸 넣다니 요리 동아리 부장으로서 정신 나간 것 아닙니까.”
“윽. 류제 신리, 눈치챘던 건가.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대놓고 넣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죠!”
노렸던 타깃이 바뀌어 혀를 차는 부장과 그 측근들의 얼굴이 진심이라서 무섭다. 엄연한 금지 품목이니 걸리면 봉사 활동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곧 졸업할 사람이라서 그런가 그런 사소한 교칙 위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범한 건지, 제멋대로인 건지 모르겠다.
“뭐 어떤가. 나는 사회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도 없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일탈을 해보겠어. 학교에서 재미로 하는 일에 의미 부여하지 마라. 아니면 류제 신리, 네가 먹어보고 싶었던 건가? 후후후. 어때, 인간의 정력이 어디까지 늘어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콧김을 뿜으며 류제의 턱선을 훑었다. 류제 주변으로 모여드는 요리 동아리 선배들의 시선이 찐득거렸다.
노골적인 시선에 류제는 고개를 돌리려 애쓰며 그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만약 스테이크를 절반 가져간 렌이 그걸 먹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도 요리 동아리 부원으로서 사람 먹는 음식에 저런…….”
“어빌리티로 이런 짓까지 하는데 그런 장난도 못 치랴. 여흥이다, 여흥.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수신제를 즐겨?”
“하지만…….”
“너도 알고서 마담과 음식을 바꾼 거 아닌가? 네가 마냥 날 탓할 수는 없을 텐데? 아님 뭐야, 친구 부모님의 사생활을 지켜보고픈 관음증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가 변태처럼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들의 사고방식은 류제와 달랐다. 게다가 학년이 높은 선배는 언제나 대하기 껄끄럽다. 계급제가 확고한 군에 들어가면 어떤 이유로든 선임으로 만날 테니까.
류제는 입을 다물고 마냥 성가시다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흥이 식은 그녀가 손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세세한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닐 줄 알았는데 귀찮구나. 저 정도 양을 섭취해 봤자 음식에 풍미를 더하고 적당히 기분이 좋아질 뿐이다. 흥, 일손이 멈췄다. 얘들아, 가자. 유네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손님들의 주문이나 받아.”
그녀는 단순한 장난을 진지하게 따지는 류제가 지루해서 콧방귀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유네도 부장의 지적에 황급히 트레이를 밀었다.
부장의 말에 류제는 양심이 찔렸다. 뭐라 따질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네의 부모님은 아무래도 좋았던 거 아닌가.
“렌 군, 맛있게 먹었어?”
“응, 완전 쩔더라. 고기가 사르르 녹아.”
“내가 말했잖아. 우리 부장님 대단하시다고.”
“괴짜 같은 건 여전하네.”
류제는 렌과 이야기하는 유네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무관심은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아무래도 좋은 걸 어쩌라고. 난 성인군자가 아니거든.
“잘 가. 이따가 반에서 보자.”
“으응, 홍보 열심히 해!”
트레이를 밀던 유네가 손을 들어 팔짝팔짝 인사했다. 내일을 고대한 유네는 멀어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살폈다.
부모님처럼 렌과 꽁냥거리는 상상을 해보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손님이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주문을 받기 위해 종종 걸어갔다.
“류제, 아까 왜 요리 동아리 부장한테 화를 낸 거야?”
다음엔 어디를 갈까 팸플릿을 훑고 있던 류제에게 재경이 물었다. 그걸 또 언제 본 건지. 류제는 뚱한 얼굴로 입을 비죽거리다가 못마땅하게 입을 열었다.
“…장난으로 음식에 이상한 걸 넣잖아.”
“이상한 거? 맛있게 잘 드시던데?”
나라카의 자생 식물의 점액이 무슨 작용을 하는지 모르는 렌은 헤어질 때에도 여전히 사이좋아 보이던 그들을 떠올리며 어리둥절했다.
그 순수함을 해칠 수 없었던 류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렌의 머리를 손날로 툭 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경이 바보 취급하지 말라며 버럭 화내며 뒤따라갔다.
“야, 야! 왜 말을 하다 마냐? 천천히 좀 가.”
“빨리 와. 네 걸음이 느린 거야.”
“말 돌리지 마! 제대로 설명해! 잠깐만… 어. 류제, 이상한 소리 안 들려?”
그들의 뒤로 멧돼지들이 한 곳으로 돌진하고 있는 듯한 위화감이 스쳤다. 류제를 뒤쫓아 가던 재경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 전체가 진동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이어 군중들의 돌진이 있지 않았더라면 류제는 하마터면 ‘안티 슬렉터’가 작동했을 때 나타나는 진동으로 잠시 착각할 뻔했다.
“사…사람들?”
“렌, 이쪽으로 와!”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저수지에서 수로가 개방된 것처럼 복도를 따라 왕녀의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피할 곳은 마땅치 않고,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휩쓸릴 것임을 직감한 류제가 재경의 손을 끌어 아까 숙녀 흉내를 내는 아저씨들에게서 도망갈 때처럼 안아 들었다.
“끄아악, 높아!”
“조금만 참아. 날 잃어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싫어어어! 나 놓치면 절대 안 돼, 알았지?”
류제를 잃어버리면 이런 꼴로 혼자 남게 되어버린다. 재경이 그럴 수는 없다며 류제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았다.
흉부로 코를 누르는 렌 때문에 앞도 잘 안 보이고, 파도처럼 휩쓸리는 힘에 류제도 별수 없이 그들을 따라 밀려갔다. 류제의 머리 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떼처럼 뛰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재경이 이 사태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했다.
“지금 다들 어디 가는 거야?”
“검도부에서 왕녀님이 검법 시연을 하신대!”
“왕녀님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수신제에 오길 잘했어!”
“왕녀라면, 설마 니냐롯트 왕녀님이신 건가? 정말로?”
“어빌리터라고 했지? 제립학교 학생들은 매일같이 왕녀를 보겠네.”
어쩐지 평범한 외부 손님들까지 쏠린다 했더니 왕녀의 검도부 행사 때문인가. 하기야 키아나트리체의 국민으로서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왕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전대미문 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어쩌다 보니 검도부 부스까지 떠밀려서 온 두 사람은 백장미 부대 군인들과 검도부 부원들로 경비를 세운 것을 보고 과연 왕녀구나 납득했다.
유명 연예인 공연을 보는 것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모여들었다. 한가운데 앉아있던 왕녀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피곤에 찌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진정하며 조용해졌다.
“키아나트리체 제1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저하의 검법 시연이 있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요란한 발성으로 외친 사람은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였다. 박수 소리와 함께 왕녀가 진검을 발도했다. 요정의 왕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속절없이 검의 춤에 빠져들었다.
“멋지다.”
“다른 세상 사람 같아.”
타고시아 해변에서 친근하게 비치발리볼을 하며 함께했다는 것이 거짓말인 양 그들과 왕녀의 사이에는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두 사람은 내심 실감했다.
십수 분이 흘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에 빠져든 그들은 그녀가 다시 착검하고 관객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단 한 번의 시연을 마친 왕녀는 피곤한 듯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어쩐지 류제 쪽을 바라본 것 같다고 재경은 생각했지만 집사의 손에 엉덩이를 받친 채 높게 앉아있는 메이드가 누구보다 눈에 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왕녀의 검법 시연으로 손님들을 손쉽게 모은 검도부는 이후에 저들끼리 미친 이능 배틀을 펼쳤다. 왕녀는 고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라도 있었지, 어쩐지 애들 장난 같은 태도에 류제는 요리 동아리처럼 괴짜들이 난입한 검도부 공연이 살짝 질려버렸다.
반대로 저런 쓸데없이 멋진 걸 좋아하는 재경은 검도부의 어빌리티 검법 대결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흥분해서 누가 누가 이겨라 소리를 지르는 재경을 향해 부러진 목검이 타이밍 좋게 날아와 머리에 명중했다. 봉변을 당한 재경이 죽는다고 발버둥을 쳤다.
“거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그렇게 높은 곳에 있던 네 잘못도 크다.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오히려 재경을 탓하는 검도부 부장의 위로 아닌 말에 재경은 잔뜩 토라져서 류제를 끌고 검도부 부스를 나갔다.
사람을 헤치느라 고생깨나 했지만 왠지 또다시 렌 지미의 불행과 얽힐 것 같아서 잽싸게 발을 뺐다. 젠장, 왜 또 나만.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저 나쁜 선배들 같으니.”
“괜찮아?”
“안 괜찮아!”
뇌세포가 수천 개가 죽었다고 투덜거리던 재경은 언뜻 눈에 들어온 주홍빛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꽤나 서쪽으로 기울어있었다. 이제 그만 8반 메이드 카페로 돌아가 다른 친구들도 쉴 수 있게끔 서빙과 내일을 위한 정리를 도와야 했다.
내내 학교를 헤집으며 놀았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 재경인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었어?”
“나름대로.”
수신제 내내 떨거지처럼 잘 보이지도 않는 삼류 악역의 입장을 잊고 홍보를 핑계로 류제와 신나게 논 재경은 아닌 척 실컷 만족했다.
“다행이네.”
류제는 뿌듯했다. 실은 수신제를 준비하는 내내 렌이 뭘 좋아할까, 뭘 하면 라우라 축제 때처럼 재미있어할까 찾아보면서 다른 친구들 시간에 맞춰 동선을 설계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었다니 내일도 안심이다.
“반으로 돌아가자. 다들 언제 오나 기다리겠다.”
“으으, 나도 쉬고 싶어. 머리가 띵하네. 홍보는 잘됐을까? 손님이 없었으면 엄청 갈구겠지. 근데 아직도 그 몬스터 숙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아무래도 지금쯤이면 돌아갔겠지.”
“아냐, 그 끈질긴 아저씨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재경이 목도에 맞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혹이 날 것 같지만 이런 걸로 또 세라에게 쫄래쫄래 가면 잔소리란 잔소리는 다 들을 거다.
내일 아침이면 띵띵 부은 혹을 찜질하며 당장 세라에게 달려갈 듯하지만 재경이 고집을 부려 응급처치 동아리 부스에 들르지 않은 두 사람은 서둘러서 8반으로 돌아갔다.
* * *
아침부터 메이드복 차림으로 쫓겨난 이후 처음 돌아온 8반 교실은 손님으로 문전성시였다.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자 재경은 이런 시시한 메뉴를 먹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별스럽다고 여겼다. 아니면 8반 장사가 잘된다는 것도 다 스토리에 얽혀있는 이야기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류제, 렌! 왜 이제야 온 거야. 약속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었잖아. 빨리 서빙 도와!”
“으아아… 8번 테이블에 홍차 가야 하는데 누가 커피를 보낸 거야?”
“아직 멀었어요?”
“갑니다, 가요!”
어릴 적부터 어빌리터라는 숙명에 얽매여 있던지라 이런 잡일들이 어지간히 서툴렀던 그녀들은 실수를 연발하며 위태롭게 카페를 운영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요리 동아리를 들렀다가 왔더니 더 엉성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멀뚱히 서있던 류제와 재경도 주문서를 확인하고 서빙을 도왔다.
“꺄악! 류제 신리다!”
“야, 대박, 대박. 빨리 애들 불러! 여장 메이드도 있어!”
드디어 잘생긴 집사가 카페로 돌아오자 바빠 죽겠는데 소문을 듣고 온 선배들이 줄지어 교실로 쳐들어왔다.
재경은 싫어했지만 메이드복 차림의 렌도 어쩐지 인기가 있었다. 라우라 축제 여장 사진을 들고 있던 선배들은 물론이고 오늘 아침 재경이 화장실에서 마주친 불쾌한 놈들이 더운 숨을 내뱉으며 테이블을 차지했다.
류제가 한껏 사악하게 웃으며 그들을 대접해 준 건 학생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이었다.
일이 너무 바쁜 바람에 요리치 비키가 주방으로 들어가 팬케이크를 굽다가 폭발시킨 해프닝이 있었다. 비키를 내쫓은 재경이 수습을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자 일사천리로 주문이 나갔다. 정신없이 음료와 디저트를 만들다 보니 오늘 준비한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
류제의 학급 행사 스케줄도 무사히 끝났다. 해가 지고, 마지막 손님이었을 사람이 나가자 8반 학생들이 모두 지친 듯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으아아, 뭘 어떻게 홍보했기에 손님들이 들이닥친담. 둘이서 하루 종일 뭘 하고 다닌 거야?”
“덕분에 매출도 장난 아니야. 우리 노동력 소비도 장난 아니야. 이렇게까지 인기 있을 줄이야. 내일이 기대되는걸. 우리 메이드 차림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데헷.”
“우리들보다는 류제 덕분이 크겠지.”
“해본 소리지 뭐. 음, 류제 고기 한 덩이, 우리들 밥 한 스푼. 렌이 소금 한 꼬집 정도 했다고 치자.”
“치지 마. 왜 나만 소금 한 꼬집이야? 야, 내 말 무시하지 마.”
“원래 소금이 가장 중요해. 아, 맞다. 점심쯤부터 느끼한 아저씨 둘이 자리를 지키고 렌을 기다리던데 아는 사람이야?”
“뭐?!”
다리를 쩍 벌리고 늘어지게 앉아 태클을 걸던 재경이 혹시 그들이 아직도 주변에 있을까 두리번거렸다. 있을 리가 없다.
“너희 오기 전에 갔어.”
“하아. 다행이다.”
까딱했다가는 그들과 마주칠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재경이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녀의 검도 시연을 안 보고 돌아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재경은 그들은 예전에 마주쳤던 하나도 안 친한 아는 사람이라면서 적당히 무마했다.
“흐음. 그렇구나.”
반면 숙녀에게 들은 바가 있었던 그녀들은 엉큼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내일 아침엔 너희도 서빙을 좀 도와줘. 렌, 너는 특별히 마스코트로 가만히 서있게만 해줄게.”
“내일 바쁠 거 같은데. 홍보도 계속해야 하고. 난 홍보가 좋아. 카페 일은 너무 정신없어.”
“언제는 홍보는 싫다며?”
“그건 이 옷이 싫은 거지! 홍보할 때는 당당하게 농땡이 피워도 되잖아.”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오늘 하루 내내 놀기밖에 안 한 렌이 저런 말을 하자 그릇을 정리하던 비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자신은 동아리 활동에 학급 행사에 스케줄 맞춰서 왔다 갔다 학교를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졌는데 고생한 것에 비해 팸플릿 가득 수놓아진 수신제 구경은 하나도 못 했다.
자기들은 홍보를 핑계로 잔뜩 놀다 왔으면서 너무한 거 아냐? 내가 있을 시간도 다 말해줬는데 우리 동아리에는 코빼기도 안 내밀고!
“잘만 싸돌아다녔던 주제에 말도 많네. 문답무용이야! 우리도 쉴 틈 없이 바빴다고!”
비키가 짜증스럽게 외치자 재경이 쟤 또 시작했다며 귀를 막으려고 했다. 눈치껏 옆에 있는 친구가 재경에게 비키 몰래 속삭였다.
“오늘 손님들이 열 번도 넘게 찻잔을 깨뜨릴 뻔했나 봐. 렌, 네가 가서 위로해 드려.”
귀족 팔자에는 없는 서빙에 비싼 찻잔까지 신경 쓰다 보니 히스테리라도 오른 건가 싶다.
고생한 비키와 달리 오늘 하루 종일 신나게 수신제를 즐긴 재경은 성격상 내내 이 악물고 일만 하다가 축제를 즐기지 못했을 그녀를 위로하며 받았던 사탕 몇 개를 비키에게 넘겨주었다.
“먹을래?”
“사탕은 무슨 사탕! 가서 뒷정리나 도와!”
그러면서 비키는 옳다구나 재경의 손에 있는 사탕을 낚아채고 말총머리를 휙 돌렸다.
“바보 렌 지미 같으니!”
유네가 말해주길 그녀의 부모님과 홍보 팀 두 사람이 함께 요리 동아리에서 식사를 했댄다. 혹시나 그녀의 동아리도 방문할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역사 연구 동아리에는 오지 않았다. 뭐 부족한 거라도 있나 자존심 상해서 비키는 마음이 꿍했다.
“난 동아리 부스 정리하러 가야 하니까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 우리 동.아.리.도 오늘 사람이 몰려서 정리를 도와야 하거든.”
메이드복을 벗어 던진 비키가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재경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며 알쏭달쏭했다.
“거참, 성질 고약하네. 왜 나한테 짜증이야?”
“홍보한답시고 너무 놀기는 했지.”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류제는 오늘 하루 렌을 혼자 독차지했다는 사실을 만끽하니 심술이 조금 풀렸다. 내일도 오늘처럼 둘이서만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류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빌었다.
열심히 홍보를 한 대가로 옷을 돌려받은 재경이 평범한 체육복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탈의실로 들어간 재경은 하루 종일 더럽혀졌을 메이드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류제도 집사복을 벗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평범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베스트에 꽂혀있던 하트 모양 클립을 빼낸 류제는 누가 볼세라 클립을 체육복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그들이 탈의실에서 차례로 나왔다. 털레털레 재경이 신발을 신자 반 친구가 때맞춰 알려주었다.
“밖에 누가 왔어. 렌, 너 부르는 거 같은데.”
8반 교실에 처음 와본 고양이녀가 문밖에서 기웃거리며 조심스레 렌을 불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썩 사랑스럽다. 아까 귀신의 집에서 냥냥거린 이유로 렌을 찾아온 듯했다.
“렌……! 렌, 냥! 시간이 없냥! 합주할 시간이양. 공연 때문에 할 일이 많냥.”
“쉬잇. 조용히 해!”
민감한 이야기에 재경이 고양이녀의 입단속을 시켰다.
류제는 요즘 고양이녀와 렌이 친하게 지낸다는 ‘환영’ 어빌리터의 말이 떠올랐다. 전혀 같이 다닐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걸까 궁금하다.
“야, 난 일 생겨서 먼저 간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뒷정리는 도와주고 가야지!”
“지금 안 가면 걔네들이 또 뭐라 할 거란 말이야. 걱정 마. 유능한 류제가 나 대신 도와줄 거야. 하루 종일 변태 같은 꼴로 다녀준 것에나 감사해라. 류제, 이따 기숙사에서 보자.”
재경은 누가 따라올세라 후다닥 고양이녀와 함께 도망쳤다.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어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훔쳐 듣자 하니 ‘복장’이니 ‘순서’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렌이 다른 반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궁금해진 8반 학생들이 교실 문 옆에 쪼르르 붙어서 구경했다. 왠지 오한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재경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꽃매미 같은 모양새를 보고 걸음을 빨리해서 사라졌다.
“뭐지? 렌이랑 냥냥이랑 언제부터 친했지?”
“수상해. 아무래도 수상해. 류제, 넌 뭐 아는 거 있어?”
“글쎄. 나도 잘 몰라.”
렌은 곧 있으면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지. 수신제 때 다른 학생들과 함께 뭘 하는 건가? 흐음.
“어쨌든 류제, 렌이 없으니까 말하는 건데 내일 아침에 절대로 렌이 도망치지 못하게 교실로 끌고 와.”
“왜? 홍보용 메이드복 때문에?”
“그것도 있고.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렌을 찾아온 아저씨들에게서 솔깃한 제안을 들은 학생들이 만만한 류제를 교활하게 꼬드겼다. 그 꿍꿍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들은 류제는 그녀들의 음흉한 시선에 알았다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우리도 빨리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자.”
늦게까지 불이 켜져있던 학교는 마침내 마지막 한 교실까지 모두 꺼졌다. 내일 장사 준비를 마친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로 돌아갔다. 불 꺼진 학교를 검사하는 것은 선생님과 군인들의 몫이다.
기숙사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류제가 책상에 앉아 하트 모양 클립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렌은 저녁 늦게 녹초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왔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수신제는 다음 날로 이어졌다.
* * *
“이 무능한 놈들. 날짜를 착각하면 어쩌자는 거야? 하루를 날려먹었잖아!”
빈민들이 성벽을 따라 판자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아가타의 최외곽. 구름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해마저도 외면하는 이곳에도 사람은 살았다.
키아나트리체 왕성의 황금빛 첨탑조차 인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은 음지처럼 습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밖에 자랑거리가 없었음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은 살기 위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런 그들의 손조차 타지 않은 후미진 창고 안에서 이른 아침부터 구울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창고를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길들여지지 않은 똥개에게 화풀이하듯 그것들을 발로 찼다. 구속구가 채워져 있는 마족이 되다 만 것들이 그대로 넘어져서 아둔한 기계 덩어리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을 취했다.
인기척이라고는 괴물들의 것으로만 가득 차서 분명 그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추측했건만 구울들의 발작 소리 너머로 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창고 안을 갈라놓았다.
“지랄 좀 그만 떨어, 아줌마야. 시끄러워서 잠이 다 깨잖아.”
“역시 여기 있었네. 내가 모를 줄 알아? 넌 알고 있었으면 빨리빨리 말해줘야 할 거 아냐! 하여튼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란.”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구울들에게 짜증을 냈던 덩치 큰 여자가 캐비닛을 신경질적으로 뜯었다.
캐비닛 위에 올라가 다리만 하나 달랑거린 채 누워있는 소녀의 얼굴에 표독한 음영이 꼈다. 둘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상처투성이 얼굴이 도사견과 같았다.
“그건 아줌마가 알아서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내 일이야? 나한테 시킨 것도 아니면서.”
“나 참. 무능한 새끼들만 남아서는 내 골머리만 썩이지. 이번에야말로 쓸 만한 놈들을 골라야겠어. 그렇게 된다면 루시에 네년을 당장에 제립학교로 보내버릴 테다.”
소녀를 향해 경고한 그녀가 뒤룩뒤룩 살찐 볼을 씰룩거렸다.
캐비닛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가방을 하나 꺼내 든 그녀는 매사 시키는 것만 할 뿐 협조적이지 않은 빌어먹을 식충이 소녀를 노려보다가 ‘저놈들이란 다 그렇지.’라며 창고 문을 쾅 닫았다. 구속된 구울들과 한 창고에 갇힌 꼴이 된 소녀는 평온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귀찮게 구는 사람도 갔겠다, 캐비닛 위에서 다시 잠을 청하려던 소녀는 밑에서 구울들이 뭐 재미있는 것이라도 발견한 듯 시끄럽게 굴자 짜증이 나서 외쳤다.
“시끄러워, 망할 시체들아! 씨발, 구울로 만들 거면 입 좀 닥치게 목부터 찢을 것이지.”
발로 캐비닛을 찬 그녀가 구울을 흉내 내며 으르렁거렸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새벽의 햇빛에 그녀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그림자는 손 여섯 달린 이리를 만들어내 나비를 쫓던 구울들을 짓눌렀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그것들을 향한 예우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벗자 상처가 없다면 얼추 재경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일 얼굴이 드러났다.
“체제에 순응한 병신들 따위 뭐가 좋다고.”
탐탁지 않은 소녀는 아까 창고에서 나간 뒤룩뒤룩 살찐 그녀의 목적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모든 것이 마음에 차지 않은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캐비닛 위에 몸을 뉘었다. 그림자에 짓눌린 구울들이 끙끙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한편 창고를 나서서 요란한 모자를 고쳐 쓴 덩치 큰 여인은 부지런히 다리를 교차해 어디론가 걸어갔다.
좁은 보폭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다리를 보니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두른 옷은 고급스러우나 범죄에 손을 댄 키아나트리체 최하층민 특유의 옹졸함이 보이는 움직임은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어느새 익숙한 전경의 마을에 도착했다. 지친 듯 가방 안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땀을 닦은 그녀는 투명한 무지갯빛 그물로 둘러싸인 키아나트리체의 자랑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를 응시했다.
수신제를 기념해서 학교 전체에 태피스트리가 내걸렸다. 맑고 햇빛 냄새가 나는 이곳은 그녀가 미로처럼 지나온 외곽과 비교하면 천국처럼 상냥했다.
“개새끼들.”
그녀가 남모르게 중얼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의 세 배는 포동포동하게 살찐 몸이 탄성처럼 출렁거렸다. 그녀의 몸을 버티기엔 너무나 얇은 하이힐 굽이 땅을 디뎠다. 그녀의 목적지는 앞에 보이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였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수신제를 보러 오신 겁니까? 초대장을 보여주세요.”
마을에서 본 적 없는 수상한 여성에 학교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그녀는 탐욕스럽게 웃으며 딱따구리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신분증과 위조된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경비병이 손에 찬 슬렉터를 닮은 기계로 신분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
혹시 몰라 수배지를 몇 개 돌려보고 그녀처럼 뚱뚱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경비병들은 그녀의 신병을 구속할 명분이 없어 그녀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경비병은 그녀를 어디선가에서 봤던 기시감에 뭐라도 떠올리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경비병이 들고 있는 수배지 안, 그녀와 비슷한 듯 다른 뼈밖에 없이 빼빼 마른 여자가 있었지만 같은 부분이라고는 입술 밑에 있는 점밖에 없었다.
뒤뚱거리며 교문을 통과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경비병들은 수신제 동안 백장미 부대의 군인들이나 담당 선생님들도 정찰을 도니 괜찮을 거라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외부인에게 학교를 개방하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참견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쉬워, 쉬워~”
그녀가 킬킬킬 웃으며 뒤뚱뒤뚱 제립학교를 향해 걸었다. 위조된 가짜 신분증도 보안을 뚫었다. 비싼 돈을 주고 맡긴 보람이 있었다.
어디 말 잘 들을 착한 아이가 있나 한번 탐색을 하러 가볼까.
교복을 입은 제립학교 학생들을 모자 아래에서 힐끗거리는 그녀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새빨간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 아래에 점 하나만이 뇌리에 남아 학생들을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