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4)
“웃기지 마, 이 망할 고양이!”
“냐아앙!”
기묘한 분위기를 깨며 고양이가 깨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짜증 가득 담긴 무뚝뚝한 목소리는 분명 네네 슈만의 것이다.
그녀가 학생을 발로 차버리자 세라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하지 마!”
“빌어먹을. 이딴 애송이 장난 따위 해치울 수 있으면 얼마든지…….”
“냐옹~ 냐아앙!”
“그만두지 못해? 학생을 상대로 뭐 하는 거야!”
세라가 네네 슈만의 손목을 붙잡아 강제로 손을 펼쳤다. 덕분에 목덜미가 잡혔던 고양이녀가 후다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놀래려고 했던 고양이를 혼이 빠지게 혼낸 것에 만족한 네네 슈만이 차갑게 비웃었다. 어둠 속에서 수동적으로 당해야 하는 입장이 싫은 모양이다.
“네가 그래버리면 더 이상 유령의 집이 아니잖아!”
“덤벼오는데 아무런 반응도 안 하는 것이 어리석은 거지.”
“하아, 그거 알아? 넌 융통성이 없는 게 아니라 미련한 거야.”
“닥쳐, 세라 밀로니.”
세라를 밀친 네네 슈만이 슬렉터로 플래시를 켰다.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어두워야 하는 유령의 집에서 이 무슨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이란 말인가. 학생들보다 네네 슈만이 더 유치해서 세라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무서운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다지만 한 명의 어른으로서 학생들이 열심히 만든 걸 엉망으로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이 짜증 나는 계집들이… 감히!”
“네네. 네네, 제발!”
네네 슈만은 연이어 소품을 들어 올려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는 척하는 스태프들을 제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4반 학생들도 애가 탔다. 네네 슈만이 교실 내부를 제멋대로 헤쳐버리는 바람에 유령의 집이 엉망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그녀들이 ‘환영’ 어빌리터 소녀에게 교실의 현 상황을 고했다.
“세라 선생님하고 같이 들어가신 군인이 우리 교실을 완전 엉망으로 만들고 있잖아. 이러다가 다음 손님 못 받아!”
“진짜 네가 좀 어떻게 해봐. 네가 들어오라고 꼬드긴 거지? 책임져!”
“짜증 나. 학생이라고 무시하기는! 자기가 백장미 부대면 다야?”
4반에서 가장 강한 어빌리티 척도를 가지고 있는 ‘환영’ 어빌리터는 유령의 집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승부를 보겠다고 오기를 부려서 이런 사달이 난 것이기에 그녀는 졌다는 생각에 분했다.
백장미 부대라고 해서 우리 반을 깔볼 이유는 없잖아. 자기도 몇 년 전엔 제립학교 학생이었으면서.
“있어봐. 내가 저 사람 콧대를 꺾어줄 거니까 손가락 빨며 구경이나 해.”
그녀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현재 총 세 가지의 어빌리티 활용을 실험하고 있었다.
첫째, 어빌리티를 건 상대방의 눈에만 보이는 상대방 기억 속 트라우마 자극용 환영. 둘째, 특정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녀가 만든 환영. 셋째는 이들을 합친 것으로, 특정 대상의 기억 속 장면을 특정 영역에 당도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환영.
첫째는 체육대회 때 써먹은 것이고 어렵지 않게 지금도 써먹고 있다. 둘째는 냥냥이와 함께 싸울 때 거는 상대 혼란용 환영이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건 힘이 드는데 세 번째 활용법은 한번 사용하면 기절할 정도로 지치는 바람에 지양하는 편이다. 남의 기억을 함부로 꺼내서 보여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폭주하면 걷잡기도 힘들다.
하지만 오만한 네네 슈만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그 봉인을 여기서 풀었다. 소매를 걷은 그녀가 어빌리티에 집중했다.
“우릴 무시한 벌로 큰코다치게 해주겠어.”
“냥냥. 하지 마냥. 세라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냥.”
“웃기지 마. 당한 게 있는데 여기서 잠자코 물러날 거 같아? 누가 이기나 두고 봐.”
저 짜증 나는 아줌마한테 내 비장의 수를 보여줄 거다. 백장미 부대라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그녀가 각을 잡고 앉아 사력을 힘을 다해 어빌리티에 집중했다. 놀라서 혼비백산하라지. 빌어먹을 아줌마.
거슬리는 감각에 류제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네네 슈만이 부리는 횡포와 반짝이는 슬렉터의 플래시 빛을 귀신이라고 착각한 렌이 옷을 늘어지게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주변이 물감 덧칠하듯 생소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전환이다. 이것도 환영인가.
“류제, 으아! 아까 그 소리 뭐야? 응?”
“환영이 보이고 있어. 뭔가 시작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뭐? 진짜? 나…난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고? 이것들이?”
류제가 선명하게 바랜 전경을 가리켰다. 주변 전경이 낡은 사진처럼 변했고, 거기에 녹아들지 못한 류제만이 홀로 색이 입혀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니 렌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 혼자 있었던 것처럼 옆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렌? 어디에 있어?!”
[나약한 자식.]
그가 외치자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류제가 뒤를 도니 그가 서있는 곳은 제립학교 옛 교실이었다.
[너야말로 그 고자세인 태도 좀 고쳐!]
[제발 둘 다 그만 싸워. 매일같이 싸우면 질리지도 않니?]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교복을 입은 모습은 생소했다. 회색 긴 머리를 집게 핀으로 올린 세라 선생님. 여전한 네네 슈만. 그리고 처음 보는 그녀.
“이건…….”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환영이 무너졌다. 환영에 깊숙이 빠져들도록 시야가 감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받아들이는 정보를 뇌가 헷갈려 했다. 류제가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시 눈을 떠보니 옛날 제립학교가 보이는 광활한 창공 아래였다. 류제는 낯선 전경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머릿속이 어수선하다. 현실의 껍질이 한 겹 아래로 벗겨지듯 류제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렌! 거기 있어?”
류제가 보이지 않는 렌을 찾아 다급하게 외쳤다.
시끄러운 부스터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청각이 고장 난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어디를 ‘강화’해야 할지 모르겠어. ‘환영’ 어빌리터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왜 내게 세라 선생님의 과거를 보여주는 걸까. 렌은 어디로 간 거지?
“류제? 괜찮아? 왜 그래? 뭐가 보여?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도 환영인가? 렌, 렌?”
“류제?”
“거기 있는 거 맞아?”
반면 환영이 걸리지 않은 재경은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왜 나만 아무것도 안 보이지. 질릴 새도 없이 환영에 걸려버린 류제는 재경이 보기엔 유령의 집으로 꾸며놓은 교실 안을 생소한 듯 두리번거리는 미친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다.
아무래도 어둠 속이 무섭기도 하고 재경은 자기 여기 있다며 먼저 류제의 손을 붙잡았다.
“환영 자식, 진짜 지독한 놈이네. 왜 나는 안 보여주는데? 야, 류제 너 또 헷갈려서 이상한 짓 하면 쌍펀치를 먹여줄 테다.”
바로 옆에서 재경이 투덜거렸지만 감각이 꼬여서 렌의 대사도, 그가 손을 붙잡고 있는 것도 류제는 알 길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류제가 고개를 털었다. 바로 그때 눈앞에 기간트리카 부대가 스쳐 지나갔다. 젊은 시절의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얼굴이 헬멧 사이로 보였다.
“……!”
부스터가 위협적이라고 착각한 그가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리려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진득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손바닥 살갗을 분명히 눌렀다. 류제는 감히 손을 잡아주고 있는 게 렌인 것인가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옆에 있구나. 그가 짐짓 손을 오므렸다.
어둠 속에서 손을 잡아준 렌을 떠올린 류제는 천공에서 추락하듯 새로운 장소로 떨어졌다.
비슷한 시각, 말다툼을 하던 세라와 네네도 류제와 같은 전경을 목격했다.
그녀들은 그때 그 교실에 놀라 주춤거렸다. 서로 눈앞에 있는 사람 앞에서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세라와 네네는 눈이 마주치자 서로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네네 슈만이 자신의 사적인 추억을 파고드는 무례한 ‘환영’ 어빌리터를 향해 고함을 쳤지만 반항이 무색하게 그녀들은 류제처럼 옛 기억에 빠져들었다.
때는 왕비님의 서거 2년 후.
감히 키아나트리체의 왕비를 살해한 마족들을 벌하겠다 선언한 왕의 명을 받든 신(新) 소령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주도로 5월 22일 대규모 토벌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키아나트리체가 본격적인 마족 토벌에 나선 세라의 제립학교 2학년 시절이다.
환영에 떨어진 자들은 그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바래진 기억으로 읽을 수 있었다. 소리도 감촉도 거짓말처럼 생생해서 마치 그때 그 현장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게 정말 환영인 건가. 아니면 그녀들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현실인 것인가. 그녀들조차 혼란스러웠다.
덜컹거리는 지면과 함께 예전 그녀들이 함께했던 교실에 당도한 세라는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에 놀라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몇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얼굴들이 많았다.
“매일 싸우기만 하고. 친구끼리 그러지 좀 마.”
“이딴 년과 날 친구 취급하지 마, 유리에.”
“그래도 같은 반 친구인데 너무한 거 아냐? 년이라니. 네네, 너 진짜 그 험한 말투 좀 고쳐!”
“그러길 바란다면 나한테 상관하지 마, 세라 밀로니.”
지금보다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객관화되어 괴리감을 형성했다. 네네 슈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조차 지금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다.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도저히 반갑기가 힘들었다.
“또 이마에 골이 났다. 그러지 말고 웃어, 네네. 난 네 웃는 모습이 좋더라.”
옆에서 네네 슈만의 소꿉친구인 유리에 라탈스키가 그녀들 사이를 이어 팔짱을 꼈다. 황금색 눈동자가 생기 넘치는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리에도 네네 슈만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 세라는 의심스러웠다.
세라와 네네 슈만은 안 좋은 의미의 비키와 렌과도 같은 앙숙 관계였다. 어빌리티고 성격이고 하나도 맞지 않아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 사람을 중재해 주던 사람이 단 한 명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리에 라탈스키, 네네 슈만의 소꿉친구였다.
네네와 비교되는 곱슬머리에 둥글둥글 선한 인상의 그녀는 날이 선 학교 분위기 속에서도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인자하고 상냥한… 그래, 누구보다도 학생을 사랑할 선생님처럼.
“그 맹탕 같은 눈으로 잘 보라고, 망할 세라 밀로니. 내 ‘빙결’ 어빌리티의 위력을 단단히 눈에 새겨주지. 가자, 유리에.”
“으…응. 후우, 떨리네.”
“미리 말하는데 네네 너만큼은 다쳐도 절대 치료 안 해줄 거야.”
“닥쳐. 난 안 다쳐.”
2학년이 되어 자기 몸처럼 익숙해진 기간트리카 수업에서 늘 짝을 이루던 네네 슈만과 유리에는 함께 지내온 세월만큼 합이 잘 맞았다.
네네 슈만이 ‘빙결’로 움직임을 봉쇄하면 유리에가 ‘공명’으로 진동하여 파괴하는 조합은 그녀가 마주해 봤던 그 어떤 상대보다 강렬했다.
하지만 그 공격이 직격하면 대상의 부상이 상당했기 때문에 유리에는 종종 공격을 주저했다.
네네 슈만은 상대방이 극심하게 다쳐도 ‘이기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반 친구들에게까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격하는 것은 언젠가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친구들의 매서운 분노를 샀다. 유리에는 그걸 알았고 네네 슈만 때문에 친구들이 아파하는 걸 보기 힘들어했다.
“유리에, 이 유약한 계집애. 거기서 실수하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거기서 공격하면 그 애가 크게 다쳤을 거야.”
“그걸 왜 신경을 써야 하지? 다친 건 전부 약한 저놈들 탓이지. 너도 백장미 부대에 들어가려면 그 정도 희생은 감내하는 게 좋을 거야.”
네네 슈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융통성도 없고, 마족을 멸절시키겠다는 목표만 바라보고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울리는 친구도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유리에 라탈스키뿐이었다.
반장으로서 네네 슈만에게 휘둘리는 유리에를 그냥 둘 수 없었던 세라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달랐음에도 나서서 네네 슈만과 충돌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세라와 네네는 극과 극, 물과 기름 같은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키아나트리체의 검이다. 유리에, 너도 이만하면 우는소리 하지 마. 언제까지 나약하게 있을 거야?”
“하지만 네네―”
“쫑알쫑알 시끄럽게 하지 말고 빨리 와.”
세라는 네네 슈만에게 한마디도 불평하지 못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유리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네네 슈만이 과격해서 그렇지 당시 학교 분위기로서는 그녀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 당연히 어빌리터라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고, 명예로운 키아나트리체의 군인이 되는 게 마땅했다.
네네 슈만과 함께 다니는 유리에도 겉보기엔 백장미 부대를 목표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라는 종종 유리에가 네네 슈만에게 뭔가를 숨기는 모습을 목격했다.
“백장미 부대에 들어가면 이딴 상처는 별것도 아냐. 수치스럽군. 세라 밀로니 따위에게 치료받다니.”
“시끄러워. 빨리 낫고 싶으면 고분고분하게 있어. 시간이 좀 걸리니까.”
“흥.”
“…너도 참 별나다. 그 사람이 그렇게 존경스러워?”
방과 후 교실에 남아 네네 슈만을 치료해 주던 세라가 물었다.
18세에 제립학교를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최연소 소령 계급을 달아 백장미 부대 참모로서 중대를 이끌고 마족을 토벌하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만나보지도 못한 그녀를 뼛속 깊이 존경했던 네네 슈만은 자신도 혜성처럼 등장한 차세대 영웅처럼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방 부대 지원이나 하는 네까짓 안일한 년이 그분의 대단함을 알 리가 없지.”
“난 기왕 세상에 태어난 건데 나 자신이 더 행복했으면 하는 것일 뿐이야.”
“그게 안일하다고 하는 거다. 자기 목숨만 중요해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
어빌리터라면 마땅히 그것만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네네 슈만은 ‘탐색’과 ‘힐링’이라는 두 가지의 어빌리티를 가진 데다 보조역으로 굉장히 뛰어났던 세라가 군인의 의무를 외면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
“나는 한적한 곳에서 여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제립학교에 들어오기 전 시절처럼. 그게 뭐 잘못된 거야?”
네네 슈만의 도발에 세라는 제립학교의 척박한 분위기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니 얌전히 치료를 받던 네네 슈만은 적의를 드러냈다.
“난 네가 싫어, 세라 밀로니.”
“사람은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잖아, 네네. 세라도 세라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거야. 후방 부대에도 힐러는 꼭 필요한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리에가 순박한 눈망울로 네네를 말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네네에게 뭐라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어빌리터가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네네 슈만은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에는 세라에게 그 이유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네네 슈만과 유리에 라탈스키가 태어났던 마을은 그녀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마족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독 마법이 만연한 마을을 버리고 다른 마을로 이주했다.
마족이 습격한 날 유리에는 낌새를 느낀 어른들과 먼저 도망쳤지만 한발 늦었던 네네 슈만은 눈앞에서 가족들이 마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새로운 마을에서 새롭게 생활하면서도 네네 슈만은 복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무능력한 일반인이 마족에게 당하는 감정이야 익숙한 것이어서 어른들은 네네 슈만에게 한시라도 빨리 슬픔을 잊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마을에서 도망가기 전 네네를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유리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미들 스쿨에 입학할 무렵 차례로 어빌리티가 발현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녀들이 어빌리티를 발현하자 마족에게서 누군가를 잃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네네 슈만과 유리에를 차세대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너희들이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다. 네 가족을 죽인 마족에게 당당히 맞서 복수해라. 너희들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로 인해 치러야 할 그녀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유리에는 이런 기대감이 부담스러웠지만 네네 슈만의 살아나는 눈동자를 보고 피하지도 못했다.
네네 슈만은 그때부터 이상해졌다.
유리에는 언젠가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며 한탄했다.
어빌리터는 반드시 뛰어난 군인이 되어 마족을 처죽여야 한다는 고지식한 친구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유리에는 자신의 바람을 꾹 눌러 담았다.
어느덧 세라도 3학년이 되었다. 더욱 강도가 올라간 훈련에 학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감정도 죽이고 자유도, 생각도 없이 도구처럼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세라 또한 제립학교 교복이 아닌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제립학교를 졸업하고 훈련소대에 배정받은 세라의 앞으로 본격적인 군인의 길이 열렸다.
네네 슈만의 FM 같은 성격에도 완전히 물이 올랐다. 학교보다 더욱 자유가 억눌린 세계에 세라는 거부감을 느꼈지만 네네 슈만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네네 슈만은 그 야망을 인정받고 6개월 후 최전방 백장미와 가까운 기간트리카 부대로, 세라와 유리에는 다른 후방 부대로 배정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히도 세라와 유리에가 처음 배정받은 후방 지원부대는 훈련소대보다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다. 사람들도 빡빡하지 않고, 신병인 그녀들에게도 텃세 없이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다.
훈련은 여전히 고되었지만 선임과 함께 제립학교 시절 추억도 되새기고, 희망도 나누며, 흩어진 친구들에게 손 편지도 쓰고, 부대 근방에 있는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세라는 그녀 나름대로 한적한 삶이라는 꿈을 영위했다.
세라가 자대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숲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세라의 소대는 주변 정찰 임무를 맡았다.
언제든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게 집중하며 어두운 수풀 속에 숨어 수상한 움직임이 있나 주시하던 유리에는 세라에게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었다.
처음 마주하는 마족이 두려운 것인지 그녀는 조심스럽고 겁내는 듯한 목소리로 숨기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세라, 난 말이야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것참 이런 상황에 걸맞은 대사네.”
“하하, 약한 소리만 해서 미안해. 그래서 의무 복무가 끝나면 바로 선생님이 되려고 해. 깜짝 놀랐지?”
미래를 그리지 않으면 마족을 마주하는 공포에 휩싸일 것 같다며 그녀가 애써 웃었다.
유리에가 네네 슈만의 앞에서 머뭇거렸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다. 그 낌새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세라는 그녀의 폭탄 발언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역시 짐작하고 있었구나. 세라 넌 세심하니까 그럴 것 같았어. 네네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네네는 들라크루아 소령님을 따라가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말하기가 무섭네.”
“그럼 네네에겐 말 안 하고 시험을 치르게?”
“…나중에 내 입으로 말할게. 걱정 마, 세라. 네네도 언젠가는 이해해 줄 거야.”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네네 슈만에게 지금껏 말하지 못한 게 아닌가. 세라는 그렇게 되묻지 못했다.
비밀을 당부한 그녀는 곧 그냥 못 들은 걸로 하라며 어색하게 둘러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수색을 펼친 지 어언 3주가 넘었을 무렵 마족이 지역을 벗어난 것이라 방심하고 있던 세라의 소대에 불현듯 괴물이 나타났다. 급습당한 소대는 순식간에 두 명의 마족에게 농락당했다.
그동안 배웠던 것, 기간트리카 훈련, 자신의 어빌리티 운용법, 서바이벌 훈련, 체력 단련. 빛을 발할 새도 없었다.
가벼운 손짓 하나에 소중한 인생이 부서져 내렸다. 마족들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세라는 귀를 막고 싶었다.
소대장 옆에서 보조역을 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세라를 제외한 소대원 전원이 그녀의 눈앞에서 허탈하게 쓰러졌다.
“으…으으…….”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세라가 참혹한 현장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무전을 받은 다른 소대가 마족을 쫓아갔지만 그녀의 소대는 피투성이인 채 생명을 잃어갔다.
마족에게 물려 의식이 없는 구울이 되어버린 동료들을 보며 세라는 혐오감을 내비쳤다. 그녀들에 대한 것이 아닌, 이런 현실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간신히 기어간 그녀는 본능만 남아버린 동료들의 심장을 나이프로 꿰뚫어 잠자게 해주고, 물리지 않은 동료들을 살리려고 발버둥을 쳤다.
함께여서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면 누구도 포기 못했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못 하고 풀숲을 기어간 세라는 젖 먹던 힘까지 이끌어내 동료를 치료했지만 그들은 누구도 살아나지 못했다.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그리고 유리에 라탈스키.
그녀의 몸뚱이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아슬아슬하게 서로 매달려 있었다. 내장과 함께 땅 위로 쏟아지는 피가 이슬 머금은 초목을 적셨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살리려고 세라는 어빌리티를 쥐어짰다.
왜 아무도 못 살리는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무력하지? 왜 하필이면 우리는 지금 죽어야만 하는 건데. 왜! 유리에가 드디어 솔직하게 답해줬는데. 어째서. 어째서 항상.
“윽… 으윽… 유리에… 유리에!”
“세라… 콜록.”
“말하지 마. ‘힐링 팩터’만 있으면 살 수 있어. 기다리면 보급이 올 거야. 응?”
그녀가 찾아 헤맸던 ‘힐링 팩터’는 그녀들 같은 말단에게는 만질 기회조차 없었다. 세라는 어빌리티를 한계까지 사용해서 기절하기 직전이었지만 유리에가 죽어가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가망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몸은 그러지 못했다. 능력의 부족함에 대한 후회, 절망. 그녀에게 안일하다고 말했던 네네 슈만.
“미안해… 세라. 네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제발, 제발 말하지 마!”
그녀가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마족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소대가 이들처럼 희생되려는 것일까. 이를 짐작한 유리에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애쓰는 세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도망가, 세라…….”
고왔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가망이 없는 자신을 치료하는 세라에게 말하는 죽어가는 자의 유언. 충격으로 귀가 먹었지만 그 말만큼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은 이런 곳에서 허탈하게 죽기 위해서 학교에 다닌 것일까. 그건 싫었다. 싫어. 이 아이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돼. 그럼 정말로, 정말로 네네 슈만의 말이 맞았다고 인정해야만 하잖아.
어빌리터는 마족을 죽이기 위한 인류의 도구일 뿐이라는 걸, 의지도 생각도 꿈도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삶만이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흑…흐윽…흑.”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세라의 눈물이 유리에의 눈동자를 적셨다.
유리에는 네네 슈만과 반대로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결국엔 이런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는 싸움을 싫어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녀의 천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마족과의 전투 한복판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세라는 무능했다. 무능하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등급2의 마족들의 심심풀이 장난질로 세라가 속한 기간트리카 부대의 제3소대, 6소대원이 전멸했다. 그때가 바로 현 제립학교 1학년 8반 담임인 세라 밀로니가 스무 살이 되었던 해였다.
살리지도 못할 사람에게 과도하게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로 세라는 혼절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눈을 뜬 곳은 부대 근처에 있던 군 병원이었다.
며칠 후 네네 슈만이 유리에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흥분해서 상처투성이 세라의 멱살을 쥐어 잡고 타박했다. 가족에 이어 유일한 친구까지 죽었다는 사실을 네네 슈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함께 백장미 부대에 들어가자고 다짐했었다. 마을의 원수를 갚자. 포르테 들라크루아처럼 마족을 토벌하자. 그래야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만 했던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로 했는데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그 분노를 돌릴 데가 없던 네네 슈만은 모든 원인으로 세라를 탓했다. 네네 슈만은 그때 세라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네까짓 무능한 게 그 애 곁에 있어서 그래. 그때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아무도 죽게 하지 않았을 텐데 너같이 나약한 게 그 애 옆에 있어서……! 그래서 죽은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네가! 네가 그 애를 죽였어!”
“…미안. 미안, 네네.”
세라는 부정할 수 없었다. 네네 슈만의 눈물을 보고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녀들의 비극이자 죄책감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말했던 마족의 상상도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스산한 밤 수풀 속에서 등장해 히죽거리며 마을을 파괴하던 마족들을 피해 멀리서 숨어있던 사람들의 기억보다, 당장 두려운 적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군인이었던 그녀들의 공포는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이제 그만해! 세라 선생님이 불쌍하잖아!”
“…윽.”
정신없이 무례한 환영에 빠져들었던 누군가가 폭주하는 ‘환영’ 어빌리터 소녀를 잡아채 깨웠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4반 학생들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들이 마주하기엔 너무나 이른 세라의 과거이자, 그녀들의 미래였다.
“하, 하하, 그랬었지. 그랬던 적이 있었지. 케케묵은 기억이군.”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난 네네 슈만이 끔찍한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웃었다. 이제는 주름이 져버린 미간의 골. 유리에가 죽은 이후로 그녀는 언제나 찌푸린 상태였다.
어느새 환영이 깨져 병실의 전경은 조각나 주변은 어둠에 휩싸였지만 네네는 세라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날처럼 원망했다. 그녀의 원망은 그때 이후로 전혀 풀리지 않은 엉킨 실타래로 꽁꽁 싸매졌다.
그녀는 환영과 똑같이 세라의 멱살을 쥐어 잡으며 그녀를 윽박질렀다.
“결국 너는 이런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를 하겠다며 쪼르르 도망갔어. 동료들이 죽는 것이 보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애새끼들 품에서 숨어 살고 있지. 네 능력이면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도 모르고. 내 말이 틀려? 응? 세라 밀로니. 변명을 해봐! 네 잘난 사상으로!”
네네 슈만은 이래서 세라가 미웠다.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행복만 좇는 행보를 보였던 세라의 마음가짐 때문에 유리에를 포함한 소대원이 전멸한 것이다.
‘힐링’과 ‘탐색’이라는 뛰어난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소중한 소꿉친구가 살아나지 못한 이유가 눈에 빤히 보이지 않나.
세라와 그런 이유로 대립했던 네네 슈만은 혼자만 살아남은 세라를 보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화내봤자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아. 언제까지 그 유리에의 그림자에 붙잡혀 있을 거야?”
“다 네 탓이잖아. 다, 다 너 때문이야!”
슬픈 기억이 되살아나자 세라는 다시금 죄책감이 자신을 찔렀다. 당시의 기억은 개미지옥에 발이 붙잡힌 것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틀린 걸까,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도 그녀는 흔들렸다.
네네 슈만의 고함 소리에 4반 학생들이 조심스레 암막 커튼을 거두었다. 교실 안으로 복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이 세라의 얼굴에 단단한 음영을 만들었다. 학생들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학생들이 그녀를 선생님으로서 얼마나 믿고 따르는지를, 얼마나 그녀를 필요로 하며 그녀로 인해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그리고 유리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유리에는 네네 슈만에게 그러지 못했던 것 대신 학생들에게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임을.
그런 감정을 모르는 네네 슈만은 유리에가 자신을 배신하고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거짓말처럼 여겼다.
“너는 그 애의 희생을 잊으려고만 하지. 난 그래서 네가 싫어. 네 안일한 정신머리도, 현실 직시를 못 한 채 혼자 도망치고 있는 너도. 죄다 멍청이에 병신투성이야.”
“아니, 그랬으면 나는 선생님이 되지 않았어. 인정해, 네네. 나는 그 애를 대신해서 선생님이 된 거야.”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유리에를 기리기 위해 세라는 학생들에게 평범한 행복을 주고 싶었다. 이런 끔찍한 미래를 마주해야 하는 학생들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네네 슈만은 세라의 기억에서 나온 소꿉친구의 환청을 부정했다.
“거짓말 마. 그 애는 자신이 어빌리터라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어. 함께 마을의 복수를 하자고 결심했단 말이다. 백장미 부대에 한 발씩 다가가며 나와 함께……!”
“정말로 그랬어? 네가 생각한 대로만 그 애를 본 게 아니라?”
네네 슈만은 죽은 유리에를 농락하는 세라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볼을 후려갈기려 했다. 세라는 이에 지지 않고 네네 슈만의 팔을 붙잡았다. 힘겨루기를 하던 네네 슈만은 이를 악물다가 결국 세라의 손을 뿌리쳤다.
“그럼 뭐야. 우리는 어빌리터야!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다름 아닌 인류를 지키는 거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능력을 가진 거야! 더 이상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
네네 슈만은 복수심에 불타올라 그것에만 인생의 의미를 매달고 있었다. 가족이 살해당한 것이 계기이고, 어빌리티 개화가 불을 붙였으며, 유리에의 죽음이 기름을 부었다.
네네 슈만이 고함을 질러도 세라는 격양된 감정을 흐트러트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학생들이 의무를 위하기 전에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했어. 너는 사람들을 지키는 군인이기를 희망했지만, 유리에처럼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라는 듣기 싫어하는 네네 슈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네, 유리에는 내게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어. 이제 그만 인정해.”
“그깟 환영 따위 내가 믿을 것 같아? 아냐, 아니야.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말투에는 의심이 서렸다.
“나는 죽은 유리에의 꿈을 대신 이뤄주려고 한 것이지만 덕분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어. 그걸 난 도망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건 도망이 아니야. 그걸 도망이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유리에의 꿈을 모욕하는 거야.”
“유리에가 그랬을 리가 없어. 다 네가 지어낸 망상이야. 네가 유리에를 모욕하고 있어! 네깟 것이 유리에를 모욕하지 마!”
“네네, 그만 이제 그녀와 네가 달랐다는 걸 받아들여. 그리고 용서해 줘.”
네네는 이 불합리함과 분노와 슬픔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딴 애송이들의 장난으로 떠벌려진 소꿉친구의 비밀과 그걸 일찍이 알고 있던 세라. 이제 와서 용서해 달라는 말을, 이미 죽은 친구를 대신해서 말하는 악우를, 네네는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네네는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상처받은 그녀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안쓰러워 보였다.
“으악! 류제, 너 날 밀면 어떻게 해?”
“고의는 아니야.”
그런 두 사람의 갈등을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던 두 학생이 유령의 집 임시 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제가 너무 고개를 빼다가 밀려난 주제에 류제를 탓하는 렌의 모습에 세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말썽꾸러기 렌을 보니 참을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다투고 있는 네네 슈만과 세라를 살피다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눈치를 보았다. 세라는 귀여운 학생들을 보면서 슬프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네, 내 방식대로 앞으로 나아가겠어.”
세라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제자를 양옆에 두고 네네에게 말했다. 이들은 그녀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니 너도 그만 유리에를 놓아줘. 네가 나아가기 위해.”
세라의 울적하면서도 확신에 찬 대답을 듣노라니 재경은 그녀 또한 악몽을 극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라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컥했다. 나도 세라 쌤의 과거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왜 류제만 볼 수 있었던 걸까. 내가 삼류 악당이니 난 볼 필요가 없다는 건가?
세라는 그런 렌이 갸륵했다. 왜일까. 이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딱하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아팠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들을 끌어안았다.
“…쌤?”
“고마워요. 정말.”
그녀가 꼭 껴안자 재경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움츠렸다. 푹신하고 상냥한 품에 재경은 내심 엄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으로 안아주지 않았을까 남몰래 상상해 보았다.
그녀가 보내는 진심 때문인가. 재경은 만일 자신이 중학생 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더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안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어빌리티 조절을 잘못해 너무 깊게 정신에 침범한 나머지 세라 선생님의 슬픔까지 파헤쳐 버린 ‘환영’ 어빌리터와 4반 학생들이 울면서 세라에게 용서를 빌었다. 학생들의 솔직한 사과에 세라가 괜찮다면서 그녀들도 안아주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세라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학생들에게 애정을 쏟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네네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듯 정신적으로 허탈해져서 근처에 기대어 머리를 짚었다. 학생들이 둘러싼 세라와 반대로 그녀는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세라의 고뇌와 네네 슈만과의 사연 깊은 마찰을 현장에 있던 것처럼 목격했던 류제는 속이 답답해졌다. 다른 이들에게 정신이 분산되자 그가 착잡한 얼굴을 숨기려 밖으로 나갔다.
교실 문을 가렸던 암막 커튼을 들추니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졌다.
“하아.”
세라 선생님과 저 슈만 중위 사이에 저런 일이 있었다니. 선생님이 했던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구나.
선생님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소중한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두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친구와 그걸 옆에서 지금까지 원망하는 친구를 견뎌내면서.
난 상상할수록 속이 울렁거린다. 만일 렌이 그렇게 되었다면 난, 난.
아직 렌의 체온이 느껴지는 손을 오므리던 류제는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교실 문에 기댄 채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키아나트리체의 영관급 장교 군복이 눈에 띄었다. 가슴팍에는 중령의 계급장과 자랑스러운 백장미 부대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나라카의 식물을 파괴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지? 승승장구하는군. 왜, 이번에는 다수를 선택할 이유가 있었나?”
네네 슈만이 나오길 기다리던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이전 있었던 일의 불평인지 잠시 빈정거렸던 그녀는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베레모를 푹 눌렀다.
“자주 보는군.”
그녀를 몰라볼 수 없는 류제가 놀라 숨을 멈추었다. 그 사람이 세라 선생님하고 같이 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류제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했다. 타고시아 해변 전투 당시 그녀와 있었던 마찰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라의 과거가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류제는 배 속이 찌릿거렸다. 키아나트리체의 현 영웅이 학교에는 왜.
“이런 누추한 곳엔 무슨 일이신가요?”
“네가 알 바는 아니다, 애송이. 그것보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나?”
노련한 암살자처럼 등장해서는 단숨에 정곡을 찌른다. 그녀는 항상 류제의 마음이 복잡할 때 형편 좋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 떠오르는 것들은 많았다. 그것들 중 그때 있었던 일의 사과를 종용하는 것인가 짐작한 류제가 미덥잖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해봤자 기쁘지 않다. 하니만 못한 사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모르는 척하긴.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눈가를 실룩거린 포르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류제는 아차 싶은 심정으로 입을 가렸다. 오늘은 축제 때문에 앞머리를 넘겼었다. 늘 검은 앞머리 아래에서 적당히 무관심한 표정을 숨겨왔던 류제는 그 몹쓸 버릇이 하필이면 그녀 앞에서 튀어나온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류제의 무례를 빈정거리는 것으로 끝낼 일이라는 듯 역정을 내지 않고 벽에 기대있던 허리를 뗐다. 혼쭐이라도 날 줄 알았던 류제는 문득 안도했다.
진중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류제보다 그녀가 더 커 보였다. 아닌 듯 류제에게 마음을 쓰는 포르테는 교실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피해 그에게 눈짓을 했다.
“조금 걷지.”
“부하분을 찾으러 온 게 아니었습니까?”
“남들이 보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난 상관없다만. 그래도 좋은가?”
역시 그녀는 억지로라도 그때 있었던 일을 끄집어낼 생각인 것 같다. 담아둔 구석이 많던 류제는 털어놓기 망설여졌지만 말없이 포르테를 따랐다. 바쁠 텐데도 일부러 시간을 비워주는 것 같아 단숨에 거절할 용기도 안 났다.
그녀는 류제의 속내를 뭐든지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옳은 말만 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는 그녀가 너무한다 생각했는데 결국 돌이켜 보니 그녀가 했던 말이 옳았다. 이번에도 옳을 것 같아 류제는 그렇게 생각이 바뀌는 자신이 싫어졌다.
앞장서서 교내를 걷던 포르테는 이 학교 출신이 확실하다는 듯 류제가 모르는 샛길을 통해 한적한 공간에 당도했다.
태어났을 때에도 저 모습 그대로 태어났을 것 같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도 제립학교를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그녀도 그처럼 스스로를 고민해 본 적이 있었을까. 당당하게 군화 굽을 땅에 디디는 그녀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동안 머릿속을 정리했던 류제가 그녀를 향해 간신히 입을 뗐다.
“저는 그때…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류제가 먼저 그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던 것인지 포르테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베레모 아래 굳은 표정이 무섭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저런 얼굴을 하는지 류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녀가 곧 쓰게 웃었다.
“지금이라면 잘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뇨, 똑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것이 네게 ‘잘못’은 아니지. 스스로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비로소 잘못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당신은…….”
그 사건 이후로 2개월이 막 지난 참인데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이상하다. 아니, 만일 당장 똑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는 그날보다 더 렌을 지키겠다는 선택에 집착했을 거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는 선을 넘어버렸으니까.
렌이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서 타고시아 해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저울질 될지라도 류제는 렌을 포기 못했다. 하지만 그때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류제를 질타했었다.
머릿속으로는 류제도 포르테의 말이 더 일리 있다고 인정했다. 한 명의 사람과 수천 명의 사람 중 하나를 골라 구해야 한다면 누구든지 수천 명의 사람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그의 마음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 한 명은 그에게 두말할 것 없이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 제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네 담당 선생이 가르치지 않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지 간에.”
포르테가 고민할 것도 없이 답했다.
류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훔쳐봤었던 세라의 슬픈 기억을 떠올렸다.
네네 슈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녀더러 소대원을 구하지 못한 것이 무능했다며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라 선생님은 사람을 치료할 힘이 있었기에 살리지 못한 친구에 대해 지금까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자의. 그리고 타의.
“그래도 저는 포기할 수가 없어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누가 뭐래도… 그게 안 될 것 같아요.”
고집 센 발언에 포르테는 말없이 류제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힐난하는 눈초리를 느끼고 제 발이 저린 류제가 변명하듯 반박했다. 앞머리가 넘어가 드러난 그의 솔직한 표정이 여과 없이 보였다.
“어째서 저는 그런 선택을 해야 하나요. 왜 소중한 사람 대신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택해야 하는 건가요? 누굴 지키고 말고는 내가 선택하는 건데. 누굴 구할 힘을 가진 건 나잖아요. 당신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럴 수 있나요? 당신의 남편, 아이는 아무래도 좋은 건가요? 당신의 동료들은요? 어째서 그렇게 의연한 거죠?”
“그들은… 류제 신리, 애송아.”
슬픔으로 일그러진 류제의 얼굴을 본 포르테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할 마땅히 이기적인 생각을 품은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건 그녀 또한 난감했다.
“그들은 내가 해야만 하는 선택을 이해한다. 나는 이 나라의 군인이며, 한 대대의 지휘관이다. 군인이란 키아나트리체를 위한 도구이고, 키아나트리체를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뿐임을 그들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반복된다. 군인, 책임, 의무. 류제도 제립학교에 입학한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어빌리터니까 이대로 군에 입대해야겠다 여겼지만 이제는 싫었다.
“그럼 우리는 왜 강해져야 하는 건가요. 소중한 걸 지키지도 못하면서 뭘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틀립니까?”
이전에 만났을 때 그녀가 해주었던 조언을 류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면, 더 사랑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이 더 강해진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포르테가 하는 말은 이상했다. 논리적이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더 사랑하란 말인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강해지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을 지킬 기회조차 없어진다. 나도 내 부하들과 키아나트리체 백성들의 목숨을 저울질하기 힘들어. 희생되는 부하들을 대신하고 싶어도 내가 희생하면 누가 부대를 지휘할 것이며 지휘관을 잃은 부대원들은 누구를 따라 통솔되느냐? 유능한 지휘관은 죽는 것조차 죄다. 그러니 우리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당신만의 이야기잖아요.”
“너의 미래이기도 하다. 하물며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겠다고 사람들을 내버리면 평화롭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야 할 나의 소중한 것들은 무슨 죄냐. 잘 생각해 보거라.”
“하지만 왜 하필이면 우리가 그런 선택을 강요당해야 하는지, 왜 힘이 있다는 이유로 그래야만 하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류제가 도리질을 쳤다.
포르테의 씁쓸한 입꼬리가 비대칭을 이루었다. 류제에게 한 걸음 다가간 그녀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 올곧았다.
“네가 되고자 한 군인이란 바로 그래야 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짊어질 명예의 대가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 그것이 군의 존재 의의. 이제야 비로소 처음 만난 날 내가 했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류제는 왜 그날 자신을 포함한 제립학교 학생들을 본 포르테가 그렇게 분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있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군인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다른 학생들은 물론이고 세계를 다시 쓸지도 모르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안일하고 무른 정신으로 군인이 되고자 하는 류제가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네가 가고자 한 길은 순탄하지 않다. 어렵지. 힘들고, 괴롭다. 그러니 나는 더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한 거야. 선택이 괴롭다고 외면하고 귀를 막아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그때야말로 마음이 부서지니까.”
류제는 그 예시로 어렵지 않게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네네 슈만이 그랬다. 그녀는 가족이 살해당하고 소중한 소꿉친구가 전사한 이후 괴롭다고 외면하고 귀를 막았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단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손쉽게 바스러졌다.
류제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그런 결정을 해야만 하는 제 자신이 싫어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그런 충고를 해주었지만 개인의 선택이란 그녀가 종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류제 신리 본인이 깨닫고 결심해야 얻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깨닫지 못한다면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준다 할지언정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가져야 할 책임의 미래를 모를 테니까.
그녀는 땅에 기대던 발을 바꾸어 허리를 틀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지. 네 소중한 친구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네 결정을 원망할 아이냐?”
“…아뇨. 렌, 그 친구는…….”
어떤 생각이 스친 류제는 안색이 나빠졌다. 포르테는 그의 친구는 고민하지 않고 대의를 위하는 자임을 쉽게 추측했다.
“기꺼이 받아들일 친구구나. 그런 친구를 지키겠다며 목숨을 저울질하는 건 네 욕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수천 명의 목숨을 대신해 살아난 친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어떻게 감당할 셈이지?”
“하지만―”
“네 마음은 안다. 지키겠다는 욕심.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좋으나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는 마음에 너무 집착하지 말거라. 집착은 언젠가 미움이 되어버린다. 미움은 분노를 만들지. 소중하게 품고 있더라도 언제든지 놓아줄 준비를 해.”
“들라크루아 님은 항상 말을 쉽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글쎄. 그런 식으로 유약했던 마음을 단련시켰더니 나는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단련이라니. 그녀도 예전에는 류제와 같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까.
울상이 된 류제의 어린애 같은 면모를 보면서 포르테는 약한 얼굴 하지 말라 차갑게 이르지 않았다. 대신 이전에 해주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말했잖느냐. 애초부터 영웅적인 마음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백의 모르는 사람보다 하나의 소중한 사람을 택하고 싶다는 건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그런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지.”
“그럼 저는 뭘 해야 하나요? 저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데.”
“우리는 그런 평범한 인간을 초월해야 하기에 늘 선택지 앞에 놓이는 것이다. 그 선택을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스스로의 어빌리티를 연구하고, 동료를 만들어라.”
“제가 어빌리터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그럼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과연 그럴까. 말했다시피 이런 힘을 가지고 있기에 비로소 무언가를 지킬 기회가 있는 거다. 바뀌지도 않을 과거를 부정해서 지금의 네가 만든 인연을 끊지 말거라. 어찌 되었건 너는 나라의 눈에 띄었고 군에 가야만 하는 자이다. 마족이 있는 한 네 운명은 그럴 수밖에 없어.”
초연한 태도에 류제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또한 범인이 아닌 차가운 이성을 지닌 영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간에서 말하는 영웅이란 다들 저렇게 되는 건가. 소중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할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의를 위해서 마음을 죽이고, 그 마음이 부서지지 않게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닿을 수 없는 짝사랑의 연장선이 아닌가.
“모르겠어요.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는 건가요?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키지 못하는 모순을, 어른이 되고 군에 들어가면 당신처럼 저도 가지게 되는 건가요? 그걸 명예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네 마음 먹기에 달렸겠지.”
정답을 듣고 싶었던 류제는 허무맹랑한 답변에 울컥했다. 지금 당장 마음이 답답한데 곧바로 이 마음을 풀어낼 수 없어서 마음이 끓어올랐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렌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날더러 멍청이라고 했을까.
“네게도 언젠가 현명한 정답이 내려졌으면 좋겠구나. 진심이다.”
포르테가 류제의 어깨를 다독였다.
류제는 그런 경험을 했어도 도망가지 않고 죽은 친구의 꿈을 이어 선생님이 된 세라가 존경스러웠다. 그것이 바로 포르테가 말한 마음이 강해지는 정답인 것 같았다.
“슈만 중위에게 시계탑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전해라.”
그렇게 말한 그녀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류제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던 류제는 참지 못하고 올렸던 앞머리를 헝클어 내려버렸다. 장막으로 가려진 시야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낯선 장소에 멀뚱히 남은 꼴이 된 류제는 고요함이 외로웠는지 그는 렌이 기다리는 곳에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포르테의 말을 곱씹은 류제가 그녀와 함께 지나왔던 곳을 천천히 걷고, 지나고, 스쳐서 다시 익숙한 복도로 돌아왔다.
그와 포르테가 단둘이 대화를 나누던 장소가 이질적이었음을 증명하듯 조용했던 주변이 거짓말처럼 소란스럽게 전환되었다.
학교는 한시라도 입을 다물지 않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모든 것이 낯설어진 류제는 길을 걷다 문득 어느 동아리 부스에서 판매하는 작은 꽃다발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세라 선생님이 꽃을 좋아하셨던가.”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꽃을 보면 세라 선생님이 떠올랐다.
알아갈수록 느끼지만 세라 선생님은 대단하신 분이다. 인류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나의 정체를 인내하며 지켜봐 주시는 것도 그렇고, 마족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눈앞에서 잃는 비참한 경험을 했음에도 그걸 자신의 약함이나 슬픔으로 탓하지 않고 여전하게 학생들의 행복을 원하다니. 그런 강한 마음이 존경스럽다.
나도 언젠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그녀처럼 나만의 정답을 가질 수 있을까?
“그 꽃 하나 주세요.”
류제는 고의가 아니었지만 세라의 과거를 훔쳐본 사과로 그녀를 닮은 꽃다발 하나를 장만했다. 작은 꽃다발을 장식한 꽃은 꽃잎이 하트 모양이라 수신제 때마다 인기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세라처럼 되기를 바라며 넌지시 향기를 맡아보다가 어렸을 적 자주 맡아보았던 은은한 초목을 떠올렸다. 그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지했던 날로 돌아갈 수는 이제 없을 것이다.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한눈파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졌던 류제가 불현듯 나타나자 재경이 그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탈이라도 난 사람처럼 창백했다.
“나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해!”
“미안, 어쩌다 보니. 그래도 금방 돌아왔잖아.”
류제가 붙잡힌 멱살을 털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세라의 감사 인사에 감상적이게 되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있었던 류제가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무리 착각이라지만 자기한테 그런 짓까지 했으면서 비밀주의가 되어가는 류제가 재경은 야속했다.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가 아직 안 끝나서 마음이 급한데 제 발이 저린 그는 또 스토리가 엇나갔으면 어쩌나 강박적으로 따졌다.
“미안하다면 다야? 어디 갔다 온 거야?”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온 거야. 너무 그러지 마.”
“누구랑!”
“그게 그렇게 중요해?”
짧게 미소 지은 류제가 참견하는 렌의 머리를 떨어뜨리듯 밀어냈다. 개인적인 일에 참견하며 다가오지도, 묻지도 말라는 태도다.
지금 이런 건 불길하다. 너마저 그 애들처럼…….
“너무 그러지 마세요. 렌 학생이 당신을 무척 찾았습니다. 우리 반 귀여운 메이드를 두고 가는 집사는 못된 집사겠죠?”
불안해진 재경을 구원해 주듯 세라가 의연한 얼굴로 류제를 반겼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어른의 미소가 그녀의 슬픈 과거와 무참히 대비되었다.
“쌤! 다 좋은데 귀엽다느니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마요. 소름 끼친단 말이에요.”
“하하, 렌은 귀엽죠. 두고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네네 슈만 중위님은요? 가셨나요?”
“네깟 게 나는 왜 찾는 거지?”
세라와 그녀 사이의 오랜 오해와 균열은 차치하더라도 감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 주제에 자신의 기억을 엿본 4반 학생들을 용서하지 않은 네네 슈만은 문제를 일으킨 4반 학생들을 교실 밖에 일렬로 세워서 벌을 주고 있었다.
눈물을 흘렸던 부끄러운 과거를 보여주었음에도 네네 슈만은 언제나처럼 미간에 골을 만든 차가운 얼굴이었다. 류제는 덤덤히 포르테의 전달 사항을 말했다.
“들라크루아 님께서 시계탑 아래로 오라고 전달해 달라 하셨습니다.”
“대대장님께서? 흥.”
가장 존경하고 있는 인물이 자신을 찾는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네네 슈만이 4반 학생들을 흘기다가 미련 없이 발을 떼었다.
그녀가 움직이자 4반 학생들이 냉큼 벌로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가 자리에 없던 사이에 네네 슈만과 세라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네네 슈만에게 4반 학생들이 기가 죽을 정도로 혼났다는 것은 알겠다.
“네네.”
“친근하게 부르지 마라, 세라 밀로니.”
그녀를 부르는 세라를 지나친 채 당당하게 걸어가는 네네 슈만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류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세라는 걱정되는 네네 슈만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네네 슈만은 모퉁이를 꺾어 사라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님.”
그런 세라에게서 비참하게 눈물 흘리던 모습을 떠올린 류제가 무심결에 꽃다발을 건넸다.
류제가 사라졌단 사실에 정신이 팔려서 그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보지 못했던 재경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저건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 물품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류제는 재경이 간섭하지 않아도 혼자서 호감도 이벤트를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이게 뭐죠?”
“그… 아무래도 죄송해서요. 사과의 선물인데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앞머리는 내려버렸지만 집사 차림의 훤칠하게 인물 좋은 류제가 세라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학생과 선생 사이의 스캔들인가 가십거리에 신이 난 4반 학생들이 슬며시 바닥에서 무릎을 떼고 휘휘 휘파람을 불었다.
놀란 세라는 류제의 순수한 의도에 감복하여 점이 찍힌 섹시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감사합니다, 류제 학생.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이런 걸로 무마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물론 과분합니다. 우리 소중한 학생이 주는 건데요. 용서하고말고요.”
세라가 살갑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학생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녀는 이 꽃다발로 자신의 과거가 용서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르는 류제를 내치지 않은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을 거란 생각에 기뻤다.
류제가 준 꽃다발의 향기를 깊게 맡아보던 그녀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품에 안았다. 그녀는 이 꽃다발만큼이나 사랑스러운 담당 학생들을 보며 장난꾸러기처럼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이제야 말하지만 류제 학생도 렌 학생도 정말 귀여운 차림이군요. 당신들을 보자니 우리 반 학생들이 만든 카페, 참 기대가 됩니다. 4반만 들르기는 뭐하니 저는 이 길로 8반에 들러볼 생각인데 당신들은요? 저와 함께 가실래요?”
“저희는 홍보를 해야 해서 더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렌?”
재경은 대답하는 것을 잊었다. 이야기가 갑자기 진행되어서 머리가 안 따라간다.
“…렌?”
그 무서운 아줌마가 세라 쌤의 악우를 호출했다고? 그럼 사라졌던 류제는 지금껏 나 몰래 그 아줌마를 만난 건가?
“듣고 있어?”
세라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둥 하라고 해도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스스로 하는 류제에게 정신이 팔렸던 재경이 뒤늦게 답했다.
“응? 아… 뭐, 그렇지.”
“그러시군요. 아쉽지만 나중에 또 봅시다.”
류제와 재경을 끌어안아 작별 인사한 세라는 8반 교실로 향했다. 네네 슈만과 정반대의 길로 사라지는 세라의 걸음 또한 당찼다.
네네 슈만 때문에 엉망이 된 유령의 집(2주 동안 밤을 새우며 만들었다고 하던데) 보수공사를 해야 하는 4반 학생들과도 헤어진 류제는 정신적으로 지쳐서 이제 그만 앉아서 쉬고 싶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쏟아져서 허기가 졌다. 군것질만 하고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 건가도 싶다.
“우리도 이만 가야지. 어디로 갈까?”
“니 맘대로 해. 나한텐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사라진 주제에 내 의견은 무슨.”
“미안하다는데도. 점심은 내가 살게. 배가 고픈데 어디 갈 곳 있나?”
류제는 축제를 즐길 마음이 팍 죽어버렸지만 포르테와 연관이 없는 렌은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어제저녁에 전체적인 동선을 짰던 류제는 유령의 집을 들른 후에 가려고 했던 부스를 한군데 떠올렸다. 슬슬 시간이 됐으니 그 동아리를 한번 가볼까.
“이쪽이야.”
렌 몰래 슬렉터로 시간을 살핀 류제가 피켓을 들고 복도를 걸었다. 재경이 그 뒤를 종종 따랐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경이 힐긋거리다 물었다.
“근데 앞머리 다시 내렸네. 왜 내린 거야? 벌써 질렸어?”
“아, 역시 익숙하지 않아서. 까발려진 기분이라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가? 훤칠하니 보기 좋더만. 하여간 특이한 자식일세.”
“하하, 사람마다 하나씩 고집하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앞머리를 올려버리면 무덤덤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귀찮다. 거짓말도 금세 들통날 것 같아서 불안했다.
지금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류제는 그보다 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재경도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던 중 류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는 만일 네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그가 앞머리 사이로 푸른 눈동자를 아래로 힐끗거렸다. 떠보듯 가증스럽게 묻는 자기 목소리가 어색해 류제는 심장이 절로 두근거렸다.
렌은 머리 색과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눈꺼풀로 가려 끔벅거리다가 어이가 없다며 입을 열었다.
“별 뜬금없는 소리를 다 한다. 갑자기 왜?”
“그냥.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돌아올 대답이 긴장되었던 류제가 눈동자를 먼 곳으로 돌렸다.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내버린 류제에게 꼬치꼬치 캐묻기 난감했던 재경은 주인공에게 내려졌던 질문의 답을 대신 고민했다.
듣자 하니 예견된 대로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모종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류제는 혼자서 알아서 잘하게 되었네. 내가 걱정할 것도 없이.
몇 분간 침묵하던 재경이 답했다.
“난 그런 게 싫어.”
“싫다니?”
“누군가가 희생해서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그런 거.”
대답이 의외였다. 류제가 느끼기에 렌의 말과 행동엔 괴리가 있었다.
“넌 무슨 일이 생기면 매번 앞뒤 보지 않고 달려들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내가 이전에 말했지? 부모님 때문에 그런 거 싫다고. 난 항상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만 움직여.”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류였다. 그의 부모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재경이 이때껏 할머니와 단둘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런 가식 따위 끔찍했다.
떠나보낸 사람의 허무함을 알았던 재경은 절대로 그런 행위를 긍정해 줄 수 없었다.
“…너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말을 할 것 같았는데.”
“나 살기도 바쁜데 그럴 정신이 어디 있냐. 누가 그딴 짓을 해. 사람이 모름지기 이기적이게 굴어야지.”
“하하, 그런가. 그렇기는 하지만.”
귀신이 무서워도 무서운지 모르는 것처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렌은 분명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렌은 언제나 그랬다. 부정해도 그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냐? 나 배고픈데.”
재경이 꼬르륵 울리는 주린 배를 붙잡았다. 류제는 그럴 줄 알았다며 센스 있게 답했다.
“말했잖아. 점심 산다고. 요리 동아리 부스를 갈까 생각 중이었어. 지금쯤이면 유네가 동아리에 갔을 시간인가?”
류제가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하는 척했다. 오후 3시경.
아침부터 주전부리만 얻어먹었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속이 빈 강정처럼 배가 고팠다.
“짜식이 말야.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가장 비싼 걸로 사먹어도 되냐?”
재경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최대 난제였던 세라 선생님의 호감도 이벤트가 끝났으니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하. 그럴 줄 알았어. 뭐든 빨리 가자. 가서 밥이나 먹자.”
“거기 너 좋아하는 선배도 몇 있는 것 같으니 밥 먹으면서 메이드 카페 홍보하기도 딱 좋겠네. 안 그래?”
재경이 음흉하게 웃었다. 동아리 탐사차 갔었던 요리 동아리를 떠올린 류제가 오한이 든 몸을 쓸었다.
요리 동아리 부스라. 그 아저씨 말투의 이상한 부장이 있는 곳인가. 설마 이번에도 입부하라고 억지를 부리며 쫓아오진 않겠지?
“유네 말로는 거기 부장 부모님이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나. 요리 실력이 꽤 좋나 봐. 유네의 대단하다는 말은 영 신뢰치가 떨어지지만 설명을 들으면 꽤나 그럴싸해.”
“그 부장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네.”
“그지?”
재경이 자기도 처음 유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생각했다며 킬킬거렸다.
뭐든 유네가 아저씨 가득한 낚시 동호회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 소심한 성격을 고쳐보려고 분투노력하고 있으니 유네 엔딩을 봤을 때도 류제와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현재 류제랑 가장 유력하게 이어질 수 있는 히로인은 유네니까.
“이쪽이야. 따라와.”
“오올. 짜식, 수신제를 위해 칼이라도 갈았냐? 웬일로 적극적이래.”
“그런 거 아니야. 아까 유네네 부모님과 마주쳤을 때 혹시나 하고 알아본 거야.”
오늘을 위해 짜온 렌과의 데이트 코스를 전면 모른 척한 류제가 괜히 수신제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관심 없으면 알아볼 생각도 안 하는 놈인 주제에 애써 변명하는 게 수상쩍다. 재경은 류제와 유네 사이에 자기가 모르는 기류가 있었나 갸웃거렸다.
미연시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사랑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다음 달에 있을 유네의 다섯 번째 호감도 이벤트가 마지막이니까 이때쯤이면 관계가 진화해 서로를 의식할 타이밍 같기도 하다.
만약 정말 류제와 유네가 이어진다면 손잡고 입을 맞추어 이성 간의 사랑을 확인하겠지.
재경은 아무래도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도 기숙사에서 편하게 뒹굴거려서 그런가 둘이 그러고 있는 장면도 어색했다.
게다가 그런 실루엣을 떠올리면 어째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늘 셋이서 함께했는데 둘이 사귀게 된다면 그 사이에 렌 지미가 없어서 그런가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