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3) (38/112)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3)

모난 돌도 밟히지 않는 평탄한 전개에 방심하던 재경은 류제를 따라 동아리에 냅다 가겠다고 답한 것을 후회했다. 도서부 축제 부스는 더럽게 재미없었던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졸졸 들러붙은 건지.

메이드복 차림이라는 부끄러운 꼴로 류제가 볼일을 끝내고 돌아오길 마냥 혼자서 기다리긴 싫었다고 쳐도 희생이 뼈아팠다.

부스 구석에 앉아 도서부와 외부인 간의 독서 토론회를 참관하던 재경은 졸려서 하품이 다 나왔다. 관중석의 부루퉁한 여장 메이드를 보며 수군거렸던 사람들도, 재경의 옆에 기댄 메이드 카페 홍보 피켓도 모두 졸음을 참지 못하고 함께 삐거덕거렸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비어빌리터가 기간트리카 부대에 배정된대도 결과적으로 방해만 됩니다.”

“반대 측은 어빌리티가 없다는 이유로 비어빌리터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기간트리카 부대는 언제 어디서든 마족과 대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빌리티가 없는 일반인들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보조 계열의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어빌리터들도 전투에 큰 도움은 못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업무를 비어빌리터들도 볼 수 있게 한다면 더 좋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을 들은 ‘반대’ 측이 ‘찬성’ 측에 즉시 반박했다. 빈정거리는 말투로 보아하니 ‘반대’ 측은 ‘찬성’ 측의 주장이 억지에 불과하다고 취급하는 것 같았다.

“어떤 점이 더 좋다는 것입니까? 보조 어빌리티를 가진 군인들도 비어빌리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성’ 측 토론자분은 사관생도시죠? 제 의견은 왜 비어빌리터가 굳이 기간트리카 부대에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일반 부대와 기간트리카 부대의 대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비어빌리터들에게도 평등한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똑같은데 왜 기간트리카를 조종할 수 있다고 달라야 합니까.”

“그건 그야 그만큼 기간트리카 부대가 더 위험을 부담하고…….”

“그 위험을 우리가 덜어주겠다는 말이잖습니까. 행정병이라면 직접적으로 마족과 마주하지 않지 않고, 그러면 차라리 그 자리에 일반 군인을 배정해서 어빌리터들과 비어빌리터들의 계급적 간극을 좁히자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비어빌리터들이 어빌리터들만 있는 기간트리카 부대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간트리카 부대는 언제든지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기간트리카 장갑이 불가능한 이상 비어빌리터들은 보다 쉽게 마족들의 먹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건 효율의 문제입니다.”

아까부터 비어빌리터의 능력을 무시하는 발언에 사관생도 옷을 입고 있는 ‘찬성’ 측 외부인이 울컥 화를 내며 반박했다.

“그런 변명이야말로 당신네 어빌리터들이 놓치기 싫어하는 명예와 지위 특권 때문 아닙니까!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능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비어빌리러들로만 구성된 부대에서 대마족 병기를 이용해 마족을 해치웠다는 기록도 있어요. 아니면 우리 비어빌리터도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게끔 해주십시오!”

“기술적인 한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비어빌리터의 전투 기록은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사상자가 몇 배는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토론에서는 비어빌리터의 무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명예와 지위 특권 때문이라면 어빌리터라면 반드시 제립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제도에 언제 비어빌리터가 반대했습니까?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껏 이 제도가 유지되어 온 것 아닙니까? 주적 마족이 건재하고 그에 따라 어빌리터가 나라를 지키는 것이 맞다는 전제하에서는 당신들의 의견은 하나부터 끝까지 헛소리입니다.”

“공평하지 못하다는 게 왜 헛소리입니까?! 저도 군인이 되기 위해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당신들과 내가 다른 점이라면 당신들이 어빌리티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는데 왜 비어빌리터보다 뛰어난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 어빌리터가 비어빌리터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리고 선택과 강요는 다릅니다!”

시끄러워 죽겠네. 토론회라면서 왜 소리를 꽥꽥 지르는지 원. 보다 원활한 숙면을 원하는 재경은 귀를 막고 싶은 심정으로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싸우는 그들을 흘겼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고,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졸던 재경은 그들이 토론을 빙자한 개싸움을 하는 동안 꾸벅 꿈나라로 향했다.

“토론자분들 모두 언성을 좀 낮춰주시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뛰어난 게 맞잖아! 그만큼 더 희생을 하고 있는데 특권쯤은 가져도 되는 거 아냐?!”

“우리가 그 희생을 나눠주겠다는 말이잖아! 이걸 부정한다는 건 그 특권을 놓지 않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는 거 아냐?! 그러면서 사사건건 우는소리나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조용히…….”

사회를 보고 있는 류제도 고역이었다. 뭐, 토론회니까 그런 점이 더욱 두드러지긴 한다지만 굳이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 사이에 있는 간극을 대놓고 보고 싶지 않았다.

관심도 없고, 일개 학생이 여기서 토론을 펼친다고 뭐가 바뀔 거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언제까지나 높으신 분들의 몫이었으니까. 왕녀 앞에서나 말하지 그래.

단 하나, 찬반 토론에 나온 비어빌리터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어빌리터도 좋아서 어빌리티가 발현된 건 아니라는 생각만 스쳤다.

하지만 또 역으로 생각하면 그가 나중에 군에 들어가게 된다면 출세와 명예는 정해진 수순이니 아무런 힘도 없는 촌구석 일개 고아였던 그가 어빌리터로서 가지게 될 것들에 욕심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그에 따라 돌아오는 책임과 위험이 두려웠다. 하물며 그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증거가 건재한 현재 그 두려움은 단연 배가 되었다.

어빌리터가 아니었더라면 난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어빌리터가 아닌 내가 렌을 만났더라면 누굴 먼저 구하든 뭘 하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왜 저런 말을 하는 거람.

저자를 비난하기엔 그 스스로도 어빌리터가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았나. 이런 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다면 분명 모를 일이겠지. 어, 이거 이전에 누가 말했던 것 같은데.

어렴풋이 기억나려 하는 장면이지만 결국 타고시아 해변에서 겪은 꿈속 일을 떠올리지 못한 류제는 그런 건 이제 됐고 빨리 시간이나 지나가라며 토론자들 사이에서 몰래 딴생각을 했다.

가타부타 논쟁 끝에 토론회는 어떤 합의점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제립학교가 개방되는 오늘 교류를 위해 찾아와 토론을 펼친 사관생도 비어빌리터가 투덜거리면서 류제를 지나쳤다. 친구들이 따라와 식식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토론자를 달래주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다혈질이라도 도졌냐?”

“놀러 온 건데 분위기 나빠지게 정색 좀 하지 마. 쟤네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젠장. 같이 춤춰야 하는데 포크댄스 때 기피당하면 다 네 책임이야.”

“아… 몰라. 앉으니까 갑자기 막 화가 치밀어서.”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상대방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남몰래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이 폭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재작년부터 교류를 가지던 제립학교가 축제 때 사관생도들을 초대하였기에 또래 어빌리터들은 어떤 걸 배우나 겸사겸사 구경 온 건데 왜 이러지.

“가서 차나 마시자. 아까 1학년 8반인가 메이드 카페 홍보 피켓 들고 있던 여자애가 있던데.”

“으으, 그래야겠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봐.”

그들이 당이 떨어져서 안 되겠다며 도서부 부스를 나갔다.

곧 약간의 휴식 후에 다음 도서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질 것이다. 『영웅주의에 대한 단상』을 썼던 한스테데 가트만의 『통제된 사명은 안녕을 야기했다』라는 후속작의 주제이다.

류제가 할당한 동아리 시간은 이걸로 끝이 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 떠난 관객석에서 피켓을 끌어안고 자고 있는 메이드는 어지간히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부스를 떠나는 관객들이 류제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동안에도 렌은 세상 떠나가도 모르게 깊게 잠들어 있었다.

“렌, 렌! 일어나.”

“으헙… 습… 응?”

질질 흐른 침을 닦은 재경이 졸린 눈을 두리번거렸다. 텅 빈 관객석과 류제를 비몽사몽 살피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째 주변이 조용한 것이 수상쩍다 싶었는데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었다.

“벌써 끝났어?”

“벌써는. 진작 끝났지.”

“잠들어서 몰랐네. 으하아암. 지루해서 죽을 뻔했어. 무슨 혓바닥이 그렇게 긴지, 원.”

들고 있던 피켓을 류제에게 떠넘긴 재경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놀 수 있다. 그전에 류제가 유령의 집만 잠깐 들르면 세라 쌤의 호감도 이벤트도 어떻게든 되겠지 뭐. 안 들르면 어쩐담.

“문집도 파는데. 볼래? 기념품도 있어.”

“구경할래.”

눈을 끔벅이던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렌은 어차피 글자 따위 안 읽을 거 아니까 문집에 무슨 글이 올랐든 전혀 부끄럽지 않은 류제가 재경을 도서부 굿즈 가판대로 이끌었다.

가판대에 가니 미나가 앉아 도서부가 제작한 문집을 판매하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며 상냥하게 웃는 미나는 아까 사관생도 토론자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던 것이 의도했던 대로 성공적으로 끝나서 아주 즐거웠다.

“사회자 역 도와줘서 고마워, 류제. 덕분에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야. 넌 다시 학급 행사 홍보하러 가는 거야?”

“그래야겠지. 미나, 넌?”

“나도 점심 먹고 선배랑 자리 교환한 다음에 교실로 가서 친구들 도와줘야지. 들리는 말로는 우리 반 카페가 아주 성황이라던데. 다 너희 덕분일까?”

“흥, 실컷 바쁘라지. 날 이 꼴로 만들었는데 빈둥거리기만 해봐라.”

눈썹을 까딱거린 재경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미나는 옷이 참 멋지다는 알맹이 없는 칭찬을 했지만 속으로는 꼴좋다며 깔깔거리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어떠냐, 빌어먹을 렌 지미. 아무리 너라도 내 치밀한 계획은 막을 수가 없을 거다! 류제는 점점 내 생각에 동화하고 있거든. 하하하!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고 있는 미나는 가판대 앞에서 꽁냥거리며 기념품과 문집을 구경하는 그들에게 뱀 혀가 날름거리는 사악한 미소를 숨겼다.

그런 미나를 무시한 재경이 도서부가 발매한 문집을 차르르 펼쳤다.

“윽, 정말 재미없어 보인다. 문집에 네 독후감도 쓰여있냐?”

“그렇지 뭐.”

“흠, 나중에 베껴 써야지.”

재경이 류제가 듣지 못할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도서위원이 쓴 문집이니 책 종류도 다양하게 독후감이 쓰여있을 거다. 재경은 이것만 있다면 다달이 제출해야 독서 감상문 따위는 독 안에 든 쥐라며 음흉한 생각을 품었다.

이젠 유네가 류제 몰래 숙제를 보여주기 힘드니 재경은 이 필수템을 꼭 구매해야겠다 결심했다.

“켁, 가격이 왜 이래?”

“설마 사려고? 내 거 줄게.”

“싫어. 내가 가지고 싶어. 좀 더 싸게 안 되냐?”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재경이 친구 할인 해달라며 권한 없는 류제에게 칭얼거렸다.

결국 그는 주적 미나에게 할인받은 가격으로 문집을 구매하는 데에 성공했다.

“사줘서 고마워, 렌~”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산 거야! 어디 보자.”

어쨌든 류제가 고생해서 열심히 쓴 것이니 수고로울지라도 읽는 시늉은 해야지. 재경이 문집 목차에서 류제의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 냉큼 페이지를 넘겼다.

『영웅주의에 대한 단상』 감상문.

1학년 8반

류제 신리

인류를 상대로 한 일방적인 위협으로 인해 공포가 만연한 가운데 그를 타개할 방법으로 인류는 영웅을 원한다. 마족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이끈 옛 키아나트리체의 황제가 그러하듯, 그리고 세계의 악을 멸절시킨 로라 하놋이 그러하듯.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하는 수필은 100여 년 전 마왕을 죽인 한 영웅에 대해 담담히 써 내렸다.

건조한 문체로 묘사했지만 로라 하놋과 막역했던 한스테데 가트만 박사의 시선에서도 그녀의 오만한 성격은 충분히 드러났다. 품성이 어떻든 세계의 악을 뿌리 뽑은 그녀는 인류의 영웅이라 불리더라도 부족함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타개해 준 자를 인류는 마땅히 숭배했다. 그녀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끝까지 영웅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을까. 가정하지만 그녀는 일찌감치 사망했고, 소멸되는 기록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녀에 대한 숭배는 나라에 대한 숭배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여전히 키아나트리체는 강한 결속력으로 뭉쳐있다.

……(중략)……

키아나트리체 왕실은 새로운 영웅이 퍼트릴지도 모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그들의 사상과 위배됨을 알고 그녀를 사전에 통제하고자 했다는 책 속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한스테데의 글에서는 그녀에게 내재된 위험한 사상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았던 그녀가 모든 것을 사랑하는 바람에 마족까지 사랑했던 건 아닐까 추측할 뿐 그녀의 사생활은 영영 무지로 남았다. 다만 죽은 그녀를 영웅주의에서 끌어내려 잊히게 만들고 대중의 결속력만을 남긴 왕실의 영리함에 감탄할 뿐이다.

그녀는 죽었고, 기록은 소실되었으니 이젠 아무도 그녀의 진실을 알아내지 못할…….

“안 읽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에 질겁하며 재경이 문집을 덮었다. 오랜만에 문단을 세 개 이상 읽었더니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다.

젠장, 그림이라도 옆에 그려달란 말이야. 동화책처럼. 이해도 쉽고 얼마나 좋아. 류제가 쓴 것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안 읽었다.

“읽었어? 읽어줄 줄은 몰랐는데.”

“뭐야. 네가 열심히 썼는데 예의상 봐주기는 해야지.”

재경이 자신의 소중한 독후감 복사기가 될 문집을 끌어안았다.

어째 자신을 위해준다는 기특한 모양새에 류제는 감동적이었다. 이걸 쓴다고 몇 주간 고생했는데 괜스레 뿌듯했다.

“고마워. 재미없었을 텐데.”

“별 게 다 고맙네. 재미는 더럽게 없더라. 아아, 도서부 진짜 재미없네.”

예의 없는 말을 면전에서 내뱉는 렌의 등을 밀며 류제가 가판대에 있는 미나에게 사과했다.

도서부 부스를 나가는 그들에게 미나가 웃는 낯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기분이 좋은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어디 가지.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본 곳 같은데.”

팸플릿을 펼친 재경이 테마파크처럼 그려진 제립학교 지도를 살폈다. 이번 챕터의 주도권은 류제에게 주었지만 류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으니 애매하다.

“네가 알아서 정해. 난 어디든 상관없어.”

“그래도 돼?”

힐끗거리는 렌과 눈이 마주친 류제는 동아리가 끝나면 가려고 했던 새로운 데이트 코스를 째깍째깍 땡 생각해 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4반 유령의 집 가볼래? 재미있을 것 같던데.”

아닌 척하지만 렌은 깜짝 놀라는 걸 싫어하니 유령의 집에 데려가면 수학여행 담력 시험처럼 좋은 반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류제는 내심 기대했다.

반면 수신제 1일 차에 아무 때나 유령의 집을 방문하면 시작되는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를 알고 있는 재경은 처음엔 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예고도 없이 벌컥 중요한 걸 해치워 버리는 류제가 장한지라 재경은 앞뒤 생각도 없이 외쳤다.

“나야 대환영이지!”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이 당첨을 고른 듯하다.

“그래?”

이상하다. 귀신 나오는 건 절대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혹시라도 질겁하고 거부하면 괜찮다고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생각했던 것과 반응이 다르면 어떤가. 렌과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되지. 그만의 귀여운 메이드를 옆에 낀 류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령의 집으로 향했다.

렌도 고분고분하니 귀엽고 모든 날이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호도 모르는 류제는 광대 복장 같은 옷도 지금은 마냥 커플 복 같았다.

* * *

고문으로서 응급처치 동아리 축제 부스를 관리하고 있는 세라는 친구들과 과도한 장난을 치다가 팔꿈치에 피가 철철 나는 학생을 치료해 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외부인이 와서 더 들뜬 건지 오늘따라 교내에 부상자가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말썽꾸러기 렌 학생으로 보이는 건 별걱정병의 중증일 거다.

학생들의 과격한 놀이에 못 이겨 다친 외부인들도 심심찮게 부스를 찾아왔다.

어떤 반은 어빌리티로 놀이기구를 만들었다는 둥 팔씨름 대회를 한다는 둥 들어만 봐도 외부인들을 가지고 놀려는 심보가 가득했다.

외부인들이 그런 과정도 재미있게 즐겨서 망정이지 예민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하루 종일 불만을 듣고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세라는 뿔피리를 불며 부스를 지나치는 학생들을 보면 즐거워져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옛날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학교 분위기가 학생들의 사고를 넓혀줄 수 있으면 교육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우리 반 학생들을 봐. 귀엽게 메이드 카페를 한다잖아. 그 정도면 얼마나 깜찍해. 생각이 넓어지다 못해 넘쳐흘러서 이전처럼 나라카의 자생 식물을 멋대로 구해 키우면 곤란하지만 말이야.

세라가 그때의 아비규환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밀로니 선생님, 1학년 4반에서 외부인이 기절했다고 합니다.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또요?”

소식을 전해 들은 세라가 학생들에게 부스를 맡기고 사람들을 헤치며 1학년 4반 교실로 뛰었다.

유령의 집에서 벌써 세 번째로 사람이 기절했다는 소리가 나왔다. 세상에, 고작해야 학생들이 만든 것인데 얼마나 무서우면 기절을 다 할까.

이런 일로 어빌리터에 일문부지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줘버린다면 그거대로 곤란하다. 모처럼 학교를 개방했으니 사람들이 어빌리터들을 자신들과 동떨어진 존재로 인식해 버리는 관념을 줄여줬으면 좋겠건만 학생들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가 싶다.

“깔깔, 아까 봤어? 완전 머저리처럼 넘어져서 우는 거.”

“까짓 게 뭔데 비어빌리터 주제에 깝죽거려.”

하지만 개중에서도 네네 슈만처럼 나라에서 주어지는 어빌리터의 의무와 특권 의식을 자랑스러워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학생들은 아주 어릴 적에 어빌리티가 발현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들은 자아가 완벽히 형성되기 이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라의 기둥이다, 특별하다란 말을 듣고 자라 떠받들어 주는 것이 익숙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비범함을 당연하게 여기곤 했다.

“거기, 학생들. 누가 머저리처럼 쓰러졌다는 거죠?”

거슬리는 말을 내뱉은 고학년 학생들을 세라가 잠시 불러 세웠다. 3학년 교복을 입고 건방지게 고개를 치켜든 그녀들은 잘못했다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라 선생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더군요.”

“…아까 멍청이처럼 굴던 비어빌리터 나부랭이가 건방지게 치근대서 골려줬거든요. 그게 다예요.”

“골려주다니요. 나쁜 짓을 하면 안 돼요.”

“에이, 선생님. 또 진지해지신다. 장난이에요, 장난. 그 사람이 먼저 치근덕거렸다구요.”

수신제를 맞이해서 학교 안을 한정해 비어빌리터를 상대로 어빌리티를 사용 가능하게끔 제한을 풀어줬더니 금세 이런 사달이 난다. 그동안 비어빌리터를 상대로 억누른 곯고 곯은 짜증을 죄 없는 사람에게 푸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들을 향해 한숨을 내쉰 세라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 사람이 당신들에게 어떤 해코지라도 했나요?”

“계속 귀찮게 굴잖아요. 학교에서 뭐 배우냐, 수업은 어떠냐, 기간트리카가 어쩌고저쩌고. 비어빌리터 주제에 알아서 뭐 하려고.”

“흥, 아저씨 주제에 기분 나쁘게.”

“그래도 학교에 구경 온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죠.”

“이럴 줄 알았어. 선생님들은 맨날 비어빌리터들 편만 들더라.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책임이니 뭐니. 매번 우리들을 귀찮게 구는 건 항상 비어빌리터들이거든요? 오늘만큼은 괜찮잖아요.”

“맞아, 딱히 교칙 위반한 것도 아닌데.”

그녀들은 세라가 잔소리를 할까 봐 저들끼리 숙덕거리며 떠났다.

외부인들과 교류를 하라고 개방해 줬더니 밖에서 목줄 달린 개 취급을 당했던 분노를 제립학교에 놀러 온 사람들에게 쏟아내는 모양새가 영 좋지 못하다. 세라가 투덜거리면서 떠나는 학생들을 붙잡으려다가 포기했다.

저 학생들은 학교의 제약으로 억눌려왔다가 이번 기회에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들의 대단함을 비어빌리터들에게 자제 없이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저러면 말려도 듣는 척도 하지 않을 거다. 명색이 3학년인데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 분별력은 있길 바라야지.

씁쓸한 얼굴로 4반으로 향한 세라는 아까 학생들이 말한 것처럼 잔뜩 골탕을 먹고 주저앉은 한 중년의 남성과 마주했다.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저자가 학생들을 왜 귀찮게 굴었을까 궁금해진 세라가 상태를 확인할 겸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신가요? 불편한 곳이 있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이쿠!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라가 상냥하게 물었어도 그는 손길을 거부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호되게 당한 듯하다. 그녀가 목에 달린 교직원 명찰을 보여주며 손님을 안심시켰다.

“전 제립학교 선생님입니다. 다치신 건 아니죠?”

“어휴, 멀쩡합니다. 잠깐 미끄러져서 그만. 별것 아닙니다.”

그가 쩔쩔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힐끗거리며 세라의 눈치를 살피는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자니 세라는 없던 의심이 불현듯 솟았다.

학생들에게 제립학교에 대해서 캐물었다고 했었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건가? 최근에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는 그놈들의 일당?

“학생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알고 오신 거구나. 참 부끄럽습니다.”

세라의 의심이 불거지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인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세간의 학교와 전경이 다른 제립학교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곧 그리 대단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뭘 꼬치꼬치 묻고 다니니까 여간 싫었나 봅니다. 저 나이대 애들이란 다 그렇죠.”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제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은 세라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자 시골의 순박한 사람처럼 안도하던 그는 주변에 누구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어지간히 정신 사나운 사람이었다.

“그… 저 선생님도 어빌리터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어떤 어빌리터인가요?”

“‘힐링’과 ‘탐색’ 두 가지입니다만. 저기…….”

“어빌리티는 언제 개화했습니까?”

그가 세라에게 고개를 점진적으로 들이밀었다. 학생들이 말했던 캐묻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정도로 세라는 그의 질문이 무례하고 부담스러웠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그녀가 한 발짝 물러나며 되묻자 또다시 마음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도 머쓱하게 물러섰다.

“왜 그게 궁금하신 거죠?”

세라의 의심의 눈초리가 짙어지자 그는 설명할 수 있다며 양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결국 이실직고로 사연을 털어놓았다.

“다름 아니라 저의 막내딸이 어빌리티가 발현되어서 말입니다.”

“따님이요?”

“예, 아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가문에서 누구 하나 어빌리터가 없는데 돌연 일이 이렇게 되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라서요. 애는 어느 날 별안간 물건을 공중에 띄웠다가 부숴버리고, 또래 애들은 무서워하지 주변엔 조언을 줄 만한 어빌리터가 없지 저희도 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난감했습니다.”

“그것참 큰일이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번에 제립학교가 외부인 개방을 한다지 뭡니까. 기회다 싶어서 온 겁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그가 그날 이후로 생면부지 타인처럼 느껴지는 막내딸을 떠올리며 서글퍼했다.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는데 너무 특별한 자식을 감당하게 된 그는 어빌리터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 알고 싶어서 이 학교에 찾아왔던 것이다.

“따님 나이가 아직 어린가 보네요.”

“예, 이제 고작 여덟 살입니다. 보통 어빌리터들은 미들 스쿨에 들어가서 능력을 개화한다고 알고 있는데 8살이라니 너무 어려요. 아이도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립학교 학생들은 어땠나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 나 같은 처음 보는 아저씨가 물어보면 누구라도 기겁하겠죠.”

어느 날 돌연 미지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식. 그걸 감당해야 하는 부모. 자신과 다른 사람이 두려운 사람들.

특히나 어빌리티가 공격 능력에 특화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느낄 공포는 더 컸다. 세라 그녀는 살상 능력이 전혀 없는 보조 어빌리티를 두 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감하긴 힘들었지만 여러 사례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물건을 띄우다니. ‘염력’계 어빌리티의 일종인가 보군요.”

“그…그런가요? 어빌리티도 종류가 많나 보네요.”

“그럼요. 사람은 특기가 제각각이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태도를 바꾸면 아이도 상처받을 수 있으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이 대해주세요. 떠받들어 주어서도 안 되고 특별 취급도 하지 말고 그냥 이전처럼 평범한 가족 구성원이라고 여겨주시면 됩니다. 어빌리티를 부정하지 말고 자신의 손과 발처럼 여기도록 격려해 주세요. 생소한 것이 아니라고 긍정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사람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죠? 가끔 애들 장난에 어빌리티로 과격하게 대응해서 항상 걱정입니다.”

“너의 손과 발이 그러지 않는 것처럼 그것으로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되고 친구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면 됩니다. 어차피 우리들은 같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 아닙니까. 당신이 배웠던 것처럼만 가르쳐도 아이도 충분히 알 겁니다. 무엇보다 따님이잖아요.”

남자는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못한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딸을 가르칠 용기보단 두려움이 큰 모양이다.

멀리서 들린 큰 웃음소리가 한바탕 끝난 후에 그가 비로소 답했다.

“그게 마음처럼 안 됩니다. 막상 어빌리터를 눈앞에서 보니 전혀 다른 생물처럼 보이고. 그래도 이 아이 덕택에 우리 가족이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란 생각도 들어서 특별하게 안 볼 수가 없어요. 하아, 정말 바보 같은 거 압니다. 속물적이죠.”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다 보면 될 겁니다. 상냥한 아버지를 두었으니 그 딸도 상냥하게 자랄 수 있어요. 딸을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용기 있으신 분이에요.”

낯선 딸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에게 세라는 진지하게 조언했다.

약방을 운영하던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에게 종종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빌리터가 짊어지게 될 의무니 뭐니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세라의 능력과 약을 만들어 처방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같다고.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자잘한 상처에 자신을 희생하면 이용당하는 것이며,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측은지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마땅한 일이라고 그가 가르쳤다.

그녀가 이런 세상 속에서도 제립학교 학생들이 보다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에 눈을 뜬 것도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어빌리터의 의무와 특권을 강조하는 네네 슈만과 자주 부딪혔던 이유도 이런 연유였을 거고.

각자 어빌리티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니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세라는 그녀가 바라는 방식으로 세상이 발전하기를 바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만일 우리 막내딸이 이 학교로 오게 되면 선생님께서 담임이 되셨으면 참 좋겠네요.”

“별말씀을요. 학생들의 행동에 상처받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를 봐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상처 안 받습니다. 저야 사춘기 애들이 얼마나 섬세한지 잘 알죠. 집에 아이가 많거든요.”

익숙하다며 사람 좋게 웃은 그가 허리를 숙여 세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 자리를 떠나는 초라한 뒷모습을 보며 세라가 그녀의 가족을 떠올렸다.

내 아버지도 처음 내 어빌리티를 봤을 때 저런 마음이었을까. 앞으로 9년 후에 저 사람의 막내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제립학교에 입학을 하게 될까. 제립학교는, 세상은 9년 후에 얼마나 바뀌어있을까.

“아차,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있던 세라가 기절했다는 외부인을 떠올리고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여기예요!”

검은색 커튼에 유령 캐릭터가 덕지덕지 붙은 1학년 4반 교실 앞에 당도했을 때쯤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어 세라를 불렀다.

누군고 얼굴을 확인하니 4반에 성격이 고약하기로 유명한 ‘환영’ 어빌리터 소녀였다. 쭈그려 앉아서 복도에 누운 외부인을 툭툭 찌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건 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 또 기절해 버릴 줄은 몰랐네요.”

“하아, 학생네 반도 정도껏 하세요. 이게 몇 번째입니까.”

“전 경고했어요. 하겠다고 한 건 이 사람이다, 뭐.”

강한 환영을 걸어서 사람을 기절시키는 데 일조한 그녀가 모르쇠 고개를 틀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단단히 혼낼 기세던 세라는 별수 없이 기절한 사람을 먼저 살폈다.

다 큰 어른이 비명을 지르다가 발라당 넘어져 골탕 먹는 꼴이 뭐가 재미있다고 벌써 세 번째 사람을 기절시키다니. 아무리 유령의 집이 학급 행사 컨셉이라고는 하나 취미 한번 고약하다.

“무슨 일이지? 사고가 생겼으면 보고를 하라고 했을 텐데?”

사람이 복도에 쓰러져 있고 그 주변을 군중들이 둘러싸자 그 근방을 순회하고 있던 군인이 확인차 사람을 헤집고 나타났다.

눈에 띄는 복장을 보고 주변에서 어빌리터 군인이라며 수군거렸다. 손을 내젔던 세라가 고개를 들다 말을 줄였다.

“너무 놀라 쓰러진 것일 뿐이니 염려… 윽.”

“뭐야. 무능한 세라 밀로니 아냐?”

아니나 다를까 흥미를 가지고 다가온 군인은 세라와 앙숙인 네네 슈만이었다.

짧게 친 주홍빛 단발에 융통성 없어 보이는 차가운 눈. 군복에 달린 백장미 부대의 마크. 세라의 꺼림칙함과 반대로 학생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한 발 물러서 네네 슈만을 구경했다.

“으윽…….”

찬 기운이 흐르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마침 기절했던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직도 정신이 어지러운지 뒤집힌 흰자위를 부르르 떨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런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와, 생생한 거 완전 최고인데? 트라우마가 올라왔어.”

“그렇죠~? 짜릿할 거라고 했잖아요.”

세상에, 깨어나자마자 뭐라는 거야. 세라는 이 유령의 집의 운영 방식에 쓸데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트라우마가 올라와 기절할 정도인데 최고라고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외부인이 무사해 보이자 안도한 세라가 본분을 떠올리고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고요?”

“지금으로서는 그런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응급처치 부스를 관리하고 있는 제립학교 선생님입니다. 당신을 치료해 드리려고 왔어요.”

“아아, 예. 근데 전 자연치료주의자라서요. 어빌리터의 치료는 안 받습니다. 강제로 치료했다가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길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은 세라를 불신의 눈초리로 경계하더니 같이 온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떠났다.

그야 저 사람의 신념 같은 거겠지만 왠지 자신이 뭔가 더러운 짓거리라도 하는 것 같아 세라는 기분이 나빴다.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힐링 팩터’니 뭐니 중얼거리는 걸 봐서는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호오, 비어빌리터 주제에 보는 눈이 좋군. 밀로니 중위의 어빌리티가 유명무실하다는 걸 알아보다니 박수를 쳐주고 싶어.”

“입 다물어, 슈만 중위. 참견하지 말고 넌 네 할 일이나 해.”

네네 슈만이 어김없이 시비를 걸어오자 세라가 학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입을 악물고 복화술로 말했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함께한 백장미 부대 훈련 백업 이후로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질긴 인연이다. 백장미 부대원이 몇인데 하필이면 네네 슈만이 학교 경비로 올 건 뭔가. 저 얼굴을 1년에 몇 번이나 마주해야 하는지, 원.

“불평하지 마. 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나도 원해서 온 거 아냐. 이딴 햇병아리들 뒤치다꺼리 누가 하고 싶은 줄 알아?”

“그럼 썩 돌아가지 그래. 호세마타 요새에서 다시는 나오지 말아 줘.”

“나오고 싶지 않았어. 누구씨가 무능해서 학생들이 대거로 나라카산 식물 따위에게 공격당했다는데 학생들 사랑 지극하신 높으신 분들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안 그래? 밀로니 선.생.님.”

“웃기지 마. 네가 학교에 온 이유는 들라크루아 중령님이 학교에 왔기 때문이겠지.”

선생님인 세라의 지인처럼 보이는 백장미 부대 소속 군인의 등장에 학생들은 네네 슈만과 세라를 신기하다며 구경했다. 동물원 원숭이라도 보는 건가 시선이 마땅치 않았던 네네가 미간을 구겨 역정을 냈다.

“뭘 쳐다봐? 썩 꺼져.”

여전히 말투 한번 까칠하다. 네네가 무서워 서로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우수수 제 갈 길로 떠났다. 세라는 다 큰 어른 주제에 학생들을 상대로 참 잘하는 짓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는 네네 슈만은 학생들에게 잘난 척하듯 콧방귀를 뀌었다.

“어빌리터로서 긍지도 뭣도 없는 평화에 찌든 애새끼들인가. 전장에서 가장 먼저 뒈질 놈들.”

“우리 때랑은 분위기가 달라! 네 생각을 강요하지 마.”

“네가 네 생각을 저치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거겠지. 아직도 밖에서는 주적 마족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이딴 축제에 열정을 쏟아부을 정신이 있으면 나라면 기간트리카 대결이라도 한 번 더 하겠어.”

데자뷔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어쩜 어렸을 적하고 하나도 안 바뀌었을까. 시간이 흘러도 정신적 성장이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저기요, 유령의 집 무시하지 마시죠? 우리 반 친구들이 사람을 골려주기 위해 사력을 다해서 만든 거거든요?”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세라와 네네의 대화를 엿듣던 ‘환영’ 어빌리터 소녀가 삐딱하게 투덜거렸다.

다들 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누가 남아있었을 줄이야. 아아, 이 아이가 4반 학생이었지. 깜박할 뻔했는데 이곳은 4반 유령의 집 앞이었다.

“이딴 가소로운 것 따위 예전에도 있었어. 사력은 무슨. 답습할 뿐이지.”

“뭐예요. 군인 아줌마도 유령의 집 했었어요?”

“지적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 하나, 나는 아줌마가 아니다. 둘, 내가 이딴 축제에 시간을 허비했을 것 같나? 셋, 잔망스러운 계집아, 좋은 말로 할 때 그 건방진 말투를 고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주제넘은 입을 당장 찢어발겨 줄 테니.”

네네 슈만의 싸늘한 눈길이 그 학생에게 향했다. 사람들이 겁먹어 부들부들 떠는 눈동자를 즐기는 ‘환영’ 어빌리터 소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기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군인이면 다인가. 난 지금 군인도 아닌데. 지기 싫어하는 그녀는 네네 슈만을 상대로 승부욕을 불태웠다.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적의 가득한 안면을 뒤집고 비굴한 약자의 웃음을 지었다. 딱 네네 슈만이 좋아할 것 같은 표정이다.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용감한 백장미 부대 소속 군인이시면 유령의 집 체험 한번 어떠세요? 저는 이런 정신 교육도 군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저희가 만든 게 현 백장미 부대 소속 군인이 보기에는 어떨지 소견이 궁금해요.”

‘환영’ 어빌리터 학생이 네네 슈만을 살살 자극하는 말로 공손하게 제안했다. 세라는 저 학생도 참 성격 나쁘다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물론 기대가 안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 성질 더러운 네네 슈만이 유령의 집을 간다라. 세라는 그녀와 같은 반이었던 제립학교 재학 시절이 떠올랐다. 어디, 재미있을 것 같으니 장단에 맞춰줄까.

“뭐, 귀신을 무서워하는 겁쟁이인 네네 너한테는 무리겠지만.”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닥쳐. 말 다 했나, 세라 밀로니……!”

그딴 건 유약했던 과거의 일일 뿐이다. 9년 전 제립학교 2학년 때 일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는 네네 슈만은 세라에게 지기 싫어서 눈을 부라렸다.

세라도 얌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네네 슈만이 제립학교 복도에 서있으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서 더 그녀를 도발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붙어! 비명을 지른 사람이 패배다.”

네네 슈만이 사람이 네 명이나 기절한 유령의 집에 겁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녀를 뒤따라가려던 세라를 ‘환영’ 어빌리터 소녀가 붙잡았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상냥한 세라에게는 악감정 없는 그녀가 세라에게만 작게 만류했다.

“선생님, 괜찮으시겠어요? 아까 기절한 사람 보셨죠? 이거 제 취향 따라 만든 거라 좀 하드한데. 호불호가 엄청 갈리더라고요. 저 사람은 아무래도 좋지만 선생님은 좀 걱정되네요.”

걱정된다는 말이 꾸며낸 감정인 것처럼 그녀가 히죽 웃었다. 여전히 악취미적인 능력을 잘 이용하는 그녀는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학급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매번 네네 슈만의 빈정거림을 듣는 것도 그만할 때가 되었지. 세라도 오랜만에 대결 심리가 불타올랐다.

앙숙 관계인 제립학교 동기 두 사람이 유령의 집으로 입장했다. ‘환영’ 어빌리터 소녀는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는 기억 속에 교차하는 한 소녀를 보고 생뚱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 * *

얌전히 복도를 걷던 재경이 류제를 몰래 흘겼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4반으로 가는 내내 류제는 웃음이 헤퍼졌다.

수신제 준비로 바빠서 기숙사에선 잠만 자고 교실에서도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표정이 안 좋더니만 오늘은 기분이 좋다니 다행이다. 혹시 유령의 집을 그만큼이나 기대했었나? 특이한 녀석일세.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 구경 오세요.”

“세요~”

데이트 중에도 카페 홍보를 잊지 않은 류제가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외부인들에게 외쳤다.

다들 류제의 외관과 재경의 기묘한 옷차림을 힐끗거렸다. 입을 비죽거린 재경은 류제의 뒷말만 따라 외쳤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을 뭐 보듯이 보는 것 같아 한 대씩 패주고 싶었지만 호감도 이벤트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 꾹 참았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있었던 최악의 일 이후 다시는 스토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사라 하놋이 했던 말도 신경 쓰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재경은 그냥저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피할 수 없는 사건이 다가올 차례였다.

2학기에 들어와 처음 있는 호감도 이벤트에 참전하는 재경은 마지막 만찬을 즐기는 사형수의 심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실은 흠칫거릴 정도로 긴장해서 점심시간이 지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체할 것 같은 얼굴로 유령의 집에 당도한 재경은 커다란 비명과 누군가가 꽈당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그러자 교실 문 앞에서 입장을 도와주고 있던 ‘환영’ 어빌리터가 킬킬거리며 이름 모를 손님을 비웃었다.

“한 건 했다!”

“우와, 비명 소리 좀 봐. 진짜 무서운가 봐.”

신이 난 류제가 재경의 허리춤을 쿡쿡 찌르며 간을 보았다. 자신이 무서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재경은 그게 무슨 문제라는 듯이 짜증스럽게 뿌리쳤다. 그것보다는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가 더 거슬렸다.

어빌리티를 시험해 보던 중 집사와 메이드 커플을 발견한 ‘환영’ 어빌리터 소녀가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뭐야, 얄미운 류제 신리잖아. 오늘은 앞머리를 넘겼구나. 역시 잘 생겼네. 그리고 넌… 누구였더라? 요즘에 냥냥이랑 자주 놀던 애인데.”

“윽, 그거 말하지 마. 그리고 내 이름은 렌 지미다. 류제는 기억하면서 왜 난 기억 안 해주냐!”

“아아,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네. 참 너도 뻔뻔하구나. 류제 신리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 주눅 들지 않니? 하여튼 오늘은 너희 둘 다 굉장한 꼴이네.”

‘환영’ 어빌리터가 좀처럼 보기 힘든 차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위아래를 훑었다. 부끄러웠던 재경은 콧방귀를 뀌며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냥…냥이?”

렌이 4반의 누구랑 자주 어울린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류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라도 밴드 공연을 연습했다는 걸 알아차릴세라 당당한 척하던 재경이 류제 뒤에서 쉬이잇! 잇새로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멀뚱히 그 모습을 보더니 뭔가 건수가 있는 건가 사악하게 웃었다.

“뭐야, 뭐야. 우리 반 냥냥이랑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요즘 냥냥이랑 3반 애들하고도 같이 다녔지? 수상쩍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됐으니까 두 사람 입장시켜 줘.”

“에이, 재미없게. 냥냥이한테 직접 물어보지 뭐. 별다른 규칙은 없지만 안에서 어빌리티만 쓰지 마. 아무리 놀라서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해도 반드시 수리비 청구할 거니까. 2인 입장료는 이렇게 되시겠습니다.”

그녀가 가격표를 들이밀었다.

체육대회 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 대결 말고는 사적으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환영’ 어빌리터. 류제는 어느 순간 친근하게 대화하는 그녀와 렌을 흘겼다.

뭐, 다들 알음알음 아는 사이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냥냥이는 뭐지. 내가 도서부 일로 바쁜 사이에 렌이 다른 반 애들하고 교류가 있었나?

의심의 눈초리가 짙어지는 가운데, 재경이 니삭스처럼 긴 양말 발목에서 돌돌 만 봉투를 꺼냈다. 무슨 할머니 쌈짓돈 보관하듯 꺼내는 모양새에 류제의 목젖이 잠시 꿀렁거렸다. 돈을 왜 저런 곳에다가 보관한담.

“뭐 해. 류제 너도 빨리 돈 내놔.”

“아, 그래.”

“넌 제발 정상적인 곳에서 꺼내줘.”

‘환영’ 어빌리터가 태클을 걸자 류제가 평범하게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냈다.

재경은 꿈지럭거리는 류제에게서 잽싸게 돈을 빼앗아 넘기고 잔돈을 인터셉트했다. 어째 그 돈이 렌의 쌈짓돈과 함께 양말로 되돌아가는 전경에 류제는 할 말을 잃었다.

“들어가자.”

“어어.”

앞장선 재경이 류제를 질질 끌고 유령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기절한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는 4반 스태프들과 길이 엇갈렸다. 기절한 사람을 본 두 사람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환영’ 어빌리터가 저 사람처럼 되어도 모른다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그들을 안으로 인도할 천막을 들추었다. 새까만 교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문득 렌이 또 기절할까 걱정되었지만 조심스레 미지의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천막이 닫혔다.

“이야. 본격적이네.”

“으, 아무것도 안 보여. 이래가지고 앞은 어떻게 가?”

어두컴컴한 교실은 방음 처리가 되어서 복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자기가 무서운 걸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재경은 류제의 베스트 허리끈을 붙잡고 뒤를 따라왔다. 그럴 줄 알았던 류제가 곁에 얌전히 붙어 만족했다.

수신제 1일 차에 유령의 집에 방문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켰으니 스토리가 꼬이지 않았다면 여기서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가 반드시 발생해야 한다.

세라의 네 번째 호감도 이벤트는 네네 슈만과의 과거를 파헤치면서 진행된다. 재경이 아는 전체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백장미 부대 네네 슈만은 수신제에 맞춰 학교에 방문했다가 세라와 마주친다.

만약 촉수 이벤트가 있었으면 포르테 들라크루아까지 오게 되고 아니라면 네네 슈만만 오는데 그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는 수신제 동안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학생과 학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우연찮게 얼굴을 마주한 세라와 네네 슈만은 앙숙처럼 부딪힌다. 네네 슈만은 미나의 악몽 마법에 영향을 받아 세라를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태다.

네네 슈만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어빌리터의 의무에서 도망친 세라가 학생들에게는 이상한 바람이나 넣으면서 자기만족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라는 나라를 망치는 불온 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떠한 연유로 4반의 유령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환영’ 어빌리터는 가장 마주하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꺼내 괴롭히다가 마지막에 소중한 사람이 나오는 병 주고 약 주고식 환영을 보여준다.

거기서 유령의 집에 먼저 와있던 주인공 류제가 네네 슈만과 세라 사이에 있었던 과거를 엿보며 진실이 밝혀진다.

“처…천천히 가.”

“알았어. 발밑 조심해.”

“우악!”

말하기가 무섭게 무엇인가가 발에 걸린 재경이 몸을 덜컥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류제를 붙잡고 더듬더듬 나아가던 재경은 앞으로 걸을수록 두려움이 엄습했다. 까마득한 무저갱이라도 내내 이어지는 양 주변이 고요해서 재경은 류제조차 옆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가 꼭 붙잡고 있는 옷깃은 류제의 것이 틀림없었다. 재경이 그것을 확인하고자 류제의 옷깃을 더 꽉 붙잡으려는 찰나 샛노란 고양이 눈 한 쌍이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저…저게 뭐지?”

재경이 도깨비불 같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기 전,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둥둥 뜬 고양이 눈이 요지경이라도 보는 양 뒤죽박죽 비치며 여러 개로 늘어났다. 기괴한 광경에 놀란 재경이 류제를 끌어안았다.

“끼야아! 저게 뭐야! 뭐야! 으아! 류제, 저거 뭐야!”

“냥냥이인데.”

“끄아아으아! 으아, 으아아아!”

한번 이 공격에 당한 전적이 있는 류제가 침착하게 답해주었음에도 재경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꽥 비명을 질렀다.

류제는 하나도 놀라지 않고 렌만 거품을 물 듯 자지러지자 재미가 없어진 고양이녀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운 얼굴도 보였겠다, 유령의 집에 찾아온 렌에게 겸사겸사 할 말이 있었다.

“렌이었냥. 꼴이 그게 뭐냥.”

어제도 신관 창고에서 들었던 냥냥거리는 울음소리다.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던 재경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성질을 부렸다.

“시…시끄러! 다가오지 마. 개무섭네 진짜. 망할 고양이녀. 이 어둠 속에서 뭐가 보이긴 하냐?”

“그야 당연하냥. 난 고양이지 않냥.”

“나도 보여.”

눈의 광적응력을 강화시킨 류제가 자신의 눈을 툭툭 가리켰다.

렌을 리드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지만 류제는 어둠으로 가려놓은 부실한 내부가 빤히 보였다. 더군다나 고양이가 등장하기 전에 몇몇 스태프들과 눈이 마주쳐서 되레 뻘쭘했다.

“너무하냥. 그럴 거면 왜 유령의 집 온 거냥. 어빌리티 쓰지 말라고 말 안 했냥.”

“맞아, 류제 짜식. 쟤 은근히 사람 기만하는 거 좋아하더라.”

“물건만 안 부수면 되잖아.”

류제가 말해도 새까만 어둠이 말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재경은 아주 둘이 잘났다며 투덜거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건 렌 지미뿐이지. 나도 어빌리터인데 왜 나만 동떨어져 있는 거야, 젠장.

“냐냐. 이쪽으로 계속 가면 되냥. 그래도 마지막 코스에는 네 ‘강화’도 안 통할 거냥. 기절 안 하게 조심해양. ‘환영’ 만드는 친구가 수신제를 핑계 대고 사람들 상대로 실험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냥.”

“실험? 무슨 실험?”

“류제 너라면 잘 알겠지양. 그 애, 요즘에 척도가 늘었냥. 무섭냥.”

고양이녀도 최근에 한번 당해봤다며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털었다. 아끼는 기타가 산산조각 부서지는 걸 봤다는 냥냥이의 말을 흘려들은 류제는 잠시 옛 기억을 뒤적거렸다.

‘환영’은 체육대회 때에도 상대하기 까다로웠는데 척도가 더 늘었다고? 그런 능력으로 유령의 집이라. 완전히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작정했나 보네.

“아차. 렌, 이 말 하려고 왔냥. 중요한 말이양. 저녁에 냐냐, 냐냐냐. 냐냐냐냐기로 한 거 잊지 말양. 냐아아옹. 냐아아도 냐아아하겠다고 냐아아옹. 알겠냥?”

“뭔 소리야.”

“냐옹. 엣치!”

요즘 들어 어빌리티가 불안정한 고양이녀의 얼굴이 진짜 고양이처럼 변했다가 부르르 몸을 털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류제의 눈에는 보였지만 그녀의 눈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재경이 쟤 또 저런다면서 쯧쯔 혀를 찼다. 아무리 밴드부가 비밀주의라도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재량은 없다. 뭐, 대충 저녁 합주 약속을 상기시켜 주려는 거겠지.

“냥냥아! 왜 손님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두 사람 더 들어올 거 같으니까 빨리 준비해. 무려 세라 선생님하고 백장미 부대 군인이란 말이야!”

“냥냥. 알았냥.”

스태프들이 주의를 주자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가 뜨며 고양이 키스를 한 고양이녀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었다. 샛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재경은 십년감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다. 고양이녀도 자기 학급 행사를 도와주는구나.

“세라 선생님이 오셨다고? 별일이시네.”

“그러게 말이다. 세라 쌤이 웃으면서 화내면 그게 진정한 공포지.”

렌은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류제는 세라가 백장미 부대의 군인과 함께 유령의 집을 찾았다는 사실이 대단히 의외였다.

세라 선생님은 항상 학생들 뒤치다꺼리에 바쁘셔서 이런 행사를 못 즐기시곤 했지. 타이밍이 묘하네.

“그런데 렌, 냥냥이랑은 왜 같이 다녔던 거야?”

“뭐? 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류제의 함정에 보기 좋게 걸린 재경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이 어둠 속에서 류제의 옷깃을 놓칠 수 없었는지 류제는 옷을 당기는 힘을 느꼈다. 렌이 동요하는 걸 보니 진짜였나 보다.

류제가 말이 없자 류제의 의도를 깨달은 재경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놈의 ‘환영’ 어빌리터가 죄다 떠벌린 데다 고양이녀가 알은척까지 했는데 모를 리가 없지.

아직은 들키고 싶지 않은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나중에 알려줄게. 빨리 가기나 해.”

“나중에 언제?”

“그런 건 지금 여기서 하나도 안 중요하잖아. 어차피 알게 돼있어. 잔말 말고 가!”

어차피 알게 되어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뭐 때문인지 궁금하긴 하네. 렌이 남학생들 말고 다른 반 여자애들하고 노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류제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렌의 귓불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연이어 재경을 놀라게 한 건 귀신처럼 무섭게 꾸며놓은 소품들의 난입이었다. 미약한 빛이 들어와 재경도 어렴풋하게 사물을 식별할 정도로 보인다 싶더니 폴터가이스트처럼 징그러운 소품들이 우당탕 이리저리 흔들리자 그가 자지러지며 손을 내저었다.

“으아악! 아악! 뭐야? 이번엔 뭐야! 끄아! 뭐가 날 쳤어! 류제! 날 쳤다고! 류제, 어디 있어!”

“렌, 나 여기…….”

“저리 가! 어, 어어! 끼약!”

류제가 패닉 상태가 된 그를 붙잡기도 전에 재경은 소품과 뒤엉켜 넘어졌다. 덕분에 재경은 류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틈을 타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재경을 붙잡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으아! 으아아! 류제에! 류제에에!”

놀리는 게 재미있다 보니 너무 집중적으로 괴롭힘당한 재경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치마를 입은 채 거꾸로 매달린 모습이 꽤나 볼썽사나워서 보다 못한 류제가 렌을 안고 다시 아래로 내려주었다.

무서워 죽을 뻔했는지 재경은 보이지도 않는 류제의 다리를 붙잡고 한 걸음도 못 가겠다며 주저앉았다.

“나갈래. 나가자. 빨리 나가……!”

“흔쾌히 간대서 자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럴 줄 몰랐단 말이야! 나갈래. 나 나갈래애애! 진짜 싫어!”

무서워서 한 걸음도 못 뗄 것 같은 재경이 우는 소리로 찡찡거리자 류제는 어쩔 수 없이 렌을 성큼 들었다.

아세미 달래주는 것처럼 마주 보게 안은 류제가 괜찮다고 렌을 달랬다. 애 취급이 분명했지만 체면이고 뭐고 당장 이런 곳에서 나가고 싶었던 재경은 당장 류제가 뭐라도 하기를 바랐다.

“으으, 진짜 싫어. 다시는 안 해.”

“담력 시험 때도 그런 말 했었던 거 같은데.”

“완전 까먹고 있었단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데에 따라온다고 해서. 최악이야.”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재경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젠장, 세라 쌤 이벤트는 언제 시작되는 거야. 여기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호러라고. 너무 싫어. 뭐라도 좋으니까 빨리 끝나란 말이야. 으으으.

걱정하는 재경과 달리 부들부들 떠는 렌을 안고 여유롭게 나아가던 류제의 눈에 타인의 어빌리티가 순조롭게 덧씌워졌다.

이 유령의 집에서 수학여행 때 꿨던 야한 꿈의 주인공이 한번 더 나오게 되는데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으면 바로 환영에 걸렸다는 증거다. 무서운 와중에도 재경은 그걸 노릴 작정으로 류제에게 우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보여?”

“출구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봐. 렌, 그런데 여긴 엄청 밝아서 눈 떠도 될 것 같아.”

“그래?”

재경이 게슴츠레 실눈을 떴지만 암실인 것은 여전했다. 재경은 류제가 소도구를 차는 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거구나. 또 속았다.

“이 거짓말쟁이야, 완전 어둡잖아!”

“아냐, 이거 봐. 여기 우리 학교 남자 화장실 아냐? 잘 만들었다. 어떻게 구현한 거지?”

“뭐가! 하나도 안 보여. 치사하게 너만 보고.”

“왜 안 보이지? 잘 봐봐.”

류제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재경을 쳐다보았다. 그를 꽉 붙잡은 렌이 애원하듯 바라보는 이 구도. 이 기억을 류제는 알고 있었다.

재경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류제의 동공이 확장되며 입가에 언젠가 그가 거울 속에서 봤던 그 미소가 걸렸다.

류제의 이상 상태를 알 리 없는 재경은 마냥 류제를 독촉했다. 빨리 뭐라도 환영이 보여야 세라 쌤의 호감도 이벤트 시작을 알 수 있을 텐데 류제는 왜 남자 화장실 타령만 하는 거지?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보인다는 거야. 깜깜하구만. 이 거짓말쟁이가 날 또 놀리려고 그러네.”

“아직도 힘들어?”

“힘들긴 뭐가… 으힉!”

헛소리를 늘어놓던 류제가 재경의 영역에 침범해 목선에 고개를 처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한이 든 재경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숨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간지럽다. 복슬복슬한 검은 머리칼이 귓바퀴를 스치는 게 재경은 그렇게 야릇할 수가 없었다.

“야, 류제! 잠깐, 잠깐만! 너 지금…….”

“그러게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하아.”

귓가에 울리는 류제의 낮은 미성에 경직된 재경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을 못했다. 그 모범생 류제가 동문서답을 하다니 아무래도 환영에 제대로 걸린 모양이다.

반면에 환영이고 나발이고 정신계 마법의 최강자인 서큐버스의 왕조차 다른 군주급 마족과 힘을 합쳐야 겨우 정신 영역에 손 하나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방어기제가 뛰어난 재경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교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야… 야! 어…어디를 만지는 거야?!”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도와주긴 뭘……!”

재경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류제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어 치마 속 엄한 곳에 향했다.

이 변태가 남정네 다리는 왜 쓸고 난리야?! 재경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안 나왔다. 류제가 무슨 환각을 보는지 알 길 없는 그는 이놈이 수학여행 때 아무런 꿈도 안 꿨다는 것도 다 거짓부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 떼애…….”

아주 엉큼한 놈이다. 툭하면 류제더러 변태라고 놀리는 비키의 심정에 동감했다. 이, 이, 발라당 까진 변태가 어디까지 손을 넣는 거야. 누가 미연시 주인공 아니랄까 봐 세상 거침없네. 짜식이, 감히 내 팬티를 노려?

“이 미친놈아. 야, 야! 정신 차려!”

친구의 손놀림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데이터가 부족해 로딩이 느려진 재경이 버둥거리자 류제는 머릿속에 강렬히 남은 기억을 바탕으로 재경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등을 조였다.

다리가 땅에 안 닿는데 서로 가슴까지 밀착한 자세로 인해 좀처럼 류제를 떨쳐내지 못했던 재경이 참다못해 고개를 들었다.

코끝이 서로 어긋나며 그와 류제가 눈이 마주쳤다. 차갑게 식은 류제의 눈동자에 비치는 붉은 동공이 무섭다. 류제가 차가운 입김을 내뱉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힉……!”

짐승에게 사냥당하는 기분이다. 그 공포에 몸이 얼어붙은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환영이라기에 뭐가 보일까 기대했었는데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고. 류제 자식, 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어쩌라는 거야. 옆에 있던 나는 무슨 봉변이냐고. 누구랑 착각하고 나한테―

어라, 생각해 보니 장난 아니게 열받네.

“아오, 진짜. 이 멍청이가 짱나게 하네. 정신 좀 차려!”

참다못한 재경이 류제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뼈가 맞는 거센 소리와 함께 류제가 재경을 놓치고 우당탕 옆으로 굴렀다.

재경은 정조의 위협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울컥한 듯하지만 덕분에 류제가 정신을 차렸다.

“윽, 내 얼굴!”

“이름하여 ‘눈을 떠라 펀치’다. 흥.”

밑으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재경이 어둠을 향해 주먹을 들어보며 당당하게 콧김을 뿜었다. 펀치의 이름처럼 정신이 확 든 류제가 아파 죽겠다며 광대뼈를 붙잡고 버둥거렸다.

현실 감각이 너무 살아나서 고통스럽다. 환각에 시달리던 류제는 당연 렌이라면 이렇겠지 싶어서 찔끔 난 눈물을 닦았다. 현실은 너무 냉혹했다.

“으으, 도대체가…….”

나라카의 자생 식물 신관 습격 건의 기억과 현재를 헷갈려 하던 류제는 주변이 깜깜하자 자기가 더 놀랐다.

류제가 덜그럭 발로 차는 소품 소리만 들리는 재경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인영과 손끝에 닿는 소품이 무서워서 흠칫 손을 모았다.

“정신이 드냐, 이 변태야. 무슨 상상을 그렇게 하셨나.”

“어, 뭐? 어어……!”

류제가 말을 다 못 이었다. 그 행위가 렌에게 향했었을 줄이야. 꿈처럼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힌 후의 행동이 현실이자 류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시의 기억 그대로를 재현한 감각이 환상에 불과하다니. 유령의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아직도 거짓말인 것 같은데.

“렌, 난… 내가…….”

류제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유령의 집 스태프들이 자신의 파렴치한 행위를 목격했으면 어쩌나 변명의 여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유령의 집에 들어온 세라와 백장미 부대원의 일에 정신이 팔린 듯하다.

세상에, 유령의 집이라고 하더니 아주 식겁할 만한 걸 보여주네. 류제는 소름이 끼쳐서 정신이 어지러웠다.

“…설마 봤어? 너도… 너…너도 그거 봤어?”

“보긴 뭘 봐.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 음흉한 놈이 누구랑 날 착각한 거야? 짜증 나네.”

“어? 아니, 그, 환각… 환각이…….”

류제는 냥냥이가 말했던 ‘환영’ 어빌리터의 척도가 늘었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자연스럽게 기억에 빨려 들어가서 지금의 렌과 당시의 렌을 덮어씌웠다. 감쪽같아서 환영에 걸린 줄도 몰랐다. 그걸 나는 그대로 지금의 렌에게 하려고 했던 거고.

류제는 마음이 들킨 양 심장이 조였다. 반면 재경은 묘하게 따뜻했던 윗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을 뿐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환각에 걸려도 사람을 착각하면 어떻게 하냐. 진짜 기분 나쁘거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어. 미안. 근데 정말로 아무것도 안 보였어?”

“안 보인다니까 그러네. 봤으면 좋겠냐? 야, 류제. 너 좋아하는 사람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누구냐? 누가 나와서 막 그런 엄한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재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류제는 말문이 막혔다. 렌이 나와서 렌한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렌이 냅다 물어보니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든다.

“…마…말 못 해.”

“뭐어? 아주 난리를 치려고 하더만 말은 왜 못 해? 피해자한테 그런 것도 못 말해주냐?”

류제는 어둠 속에서 침묵을 유지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만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붉은 동공도 감춰져서 재경은 류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기껏 찔러볼 기회였는데 아쉽다. 류제는 앞머리 때문에 더 그래 보이지만 표정 변화가 옅으니까.

“비키? 유네? 아님… 미나?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걔네들이랑 엮지… 아니야. 하아, 정말 미안해.”

재경이 떠봤지만 류제는 단호하게 답변을 거절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영에 홀려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던 류제가 거리를 벌리자 재경은 서운했다.

난감한 질문인 것도 알고, 삼류 악당 렌 지미 주제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의 류제를 훔쳐보고 말았으니 먼저 물러나 주기로 했다.

“치사한 짜식. 뭐든 그런 거 함부로 하면 안 돼. 아무리 실수라도 껴안고 뽀뽀하고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야 하는 거야. 안 그럼 비키한테 변태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어. 나니까 용서해 주는 거야, 나니까.”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야한 장면을 떠올린 재경이 핀잔을 주다가 멍청하게 서있는 류제를 냉큼 붙잡았다.

“야. 듣고 있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에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 반, 꺼림칙함 반이다. 렌이 별생각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뭐 더 이상한 거 하지는 않았지?”

“됐다니까. 대신 다음에 또 착각했다간 죽빵 한 방으론 안 끝날 줄 알아라.”

재경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실은 굉장히 동요했다. 솔직히 류제는 목석같은 구석이 있어서 히로인들이랑 잘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 그녀들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단서가 부족했는데 아까 그런 모습을 보자니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기는 한 듯하다.

“짜식이, 진짜.”

재경은 왜인지 섭섭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에 머리를 털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와 껴안고 쓰다듬는 행위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 상대방이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라는 걸 의식하니 더욱더.

괜한 걸 알아버렸다고 여긴 재경은 자신이 원래 세계에서 친구가 없어봐서 그런 줄 알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로 했다.

렌이 자신에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은 줄 알았던 류제는 그 작은 기회의 기류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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